넉넉한 ......
■ 더하고 나눔의 지혜
. + - (1/15)
우리들의 삶은
무엇인가를 서로
주고 받으며 쌓는 가운데,
더하고 빼기가 반복되며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살다 보면
남길 적도 많지만
모자람에 허덕일 때도 많다.
돈이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기쁨과 슬픔 열정이나 분노도
그러하다.
아픔과 고통,
건강이며 생명도
그의 예외는 아닌 듯 하다.
희망이던 갈망이던,
때로는 바라는 만큼
많이 쌓이는 듯 여겨지지만,
돌아보면
항상 빈 그릇,
텅 빈 허공과
그리고 아쉬움으로 채색되곤 한다.
. ⅹ ≒ (2/15)
대부분 사람들은
한 단계씩
더하거나 빼가며,
땀 흘린 만큼 벌어서
쓰고 살아 가지만,
때로는
곱빼기 잇속을 챙길 때도 있고,
한 순간에 반 토막 난
턱없이 잘린 탓으로
마음 고생 할 때도 많다.
자산도 그렇고
명예도 그렇다.
매일 같이 달려가며
조깅으로 다져 온
건강을
어느날 갑자기 잃을 때도 더러는 있다.
. ≤ ≥ (3/15)
누구 것이 더 크고 작은지,
누가 더 훌륭했다거나,
악하고 나쁘다는 등의 평가는
정해진 공식이나
정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재 보려고 말하는 순간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얼만큼 가져야 (벌어야) 살 수 있을까?
그 최소한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항상 쉽지 않은
마음 속의 질문(갈등?)이 되곤 한다.
비록 돈만의 문제는 아니다.
삶의 언저리에 맺혀 지는
각종 허상들,
갈구하는 욕망들이 그렇다.
건강, 생명, 목숨까지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만수무강을 바라기 때문이다.
사노라면
어느 정도는 먹어야 한다.
그래서 기본 생계비의 보장은
복지사회의 목표가 된다.
우리나라 최저생계비 및 최저임금
제도의 현황을 본다.
2009년 고시를 기준으로
최저수준의 생계비는
한 사람당
하루 1만6천원, 월간 약 50만원,
최저임금은
시간당 4천원, 일급 3만2천원,
월간 약 83만원 선이다.
의식주를 해결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비용수준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준이다.
최소한의 수준이란
사람마다 눈높이가 다르니 정하기 어렵다.
공출로 빼앗긴
곡물을 대신하여
풀 죽을 쑤고, 생키(소나무 껍질)를 벗기던
대동아 전쟁 말기
어려운 시대의 서민들이 생각하던
수준과도
적지 않은 차가 있을 수 있다.
때와 장소
또는 소득 수준에 따라
생각하는
그 수준은 다르기 마련이다.
아프리카 난민 지원단체의
지원자 신청광고를 보며
1달러란 가치의
커다란 모습을
광고문안에서 접하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사는
약 9 억 명 가운데
1일 1불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전체의 46%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래서, 최저생계의 기준은
가치기준에 따라
극명하게 다른
내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라면 한 그릇으로도
눈물 나도록 행복을 느낄 수 있는가 하면,
부드러운 고깃발로
배 터지도록 뜯어 가면서도
부족하여 으르렁댈 수 있다.
입고 잠자는 장소,
의복이나 주택은
먹거리 보다
그 차이가 더욱 커 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씀씀이의
인식 차이만큼,
돈벌이 크기, 행복과 욕망에 관한
만족도 차이는
그 크기가
사람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각각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알고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천만금을 주먹에 쥐고서도
잔돈푼이 모자라
발버둥 치는 모습은
주변이나 뉴스 속에서 접하곤 한다.
우리는 크고 작음을 알고
그것을 수긍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 xa √ ̄ y1/b xa ≠ y1/b (4/15)
벌고 쓰는 기술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현대사회는
농경시대의 자기농사를 짓는 것처럼
일한 만큼 수확하는
시대는 아니다.
기술과 기능을 발휘하고
타인의 힘을 빌어
천문학적인 크기를 얻기도 한다.
때로는 그리 날리는 경우도 많다.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생활하고 있다.
생활양식이며, 사고방식, 가치기준도
마찬가지로 심하게 요동치는 가운데
살아가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의
명문 구단에서 뛰던 한국 선수가 있다.
년봉이 80억 수준으로 알려지고 있으니,
하루 일당을 환산하면
3천만원 선에 달 한다.
주식이나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한 해에
수천 억 원씩 챙기는 부자도 적지 않다.
그들의 하루 벌이가 결국
수 억 원에 이르는 것인데,
그 분들이 보는
세상의 모습과,
최저생계비로 꾸려가는
저소득층 사람들이
보는 세상의 모습은
사뭇 다를 것만 같다.
이질적인 생활양식에서
오는
서로 다른 가치관이
형성 될 수 밖에 없지만,
인간생활의 범주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병노생사에 이르는
음양까지도 바뀌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크고 작아지는 속도가
일정하지 않음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인정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타계한 죽음을 두고
아쉬워함도
속도 인식에 관한 생각 차이로 말 할 수 있다.
단명하던 구시대의
수명에 비할 수 있다면
그 아쉬움은 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불과 십 여 년 사이에
매장과 화장의 비율이 급변하는 것을 보고,
수 백 년을 이어 오던
우리의 매장문화나 그와 관련된 가치기준들이
얼마나 급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980년대까지 10%대에 머물렀던 화장비율이
2008년 조사에서는 부산(79.9%), 인천(73.6%),
서울(70.2%) 순으로 치솟았고,
2020년에는 80%에 이를 것으로
복지부는 전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가치관의 변화속도에도
유사한 점은 있다고 본다.
. (x, y) (5/15)
누구와 주고 받을지에 관한
칸막이는
개인이나 조직 또는 사회의 역량에 따라
각각 달리 형성된다.
때로는 그 울타리를 전부로 알고
그 울타리의 벽에 대고 절대적으로
기대고 싶어 한다.
그 울타리는
때로는 자신 스스로도 되고,
가정이나 조직,
종교나 사회,
국가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울타리가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
때로는, 그 굳건하게 둘러 쳐진
울타리를
알에서 깨어 나오듯 과감하게 허물고
스스로를
재조명 해 볼 줄 알아야 한다.
둘러 쳐진 가치의 기준 틀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돌아 볼 줄 알아야 한다.
행복과 불행,
근심과 걱정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 (x), (y) (6/15)
자신 스스로 울타리를 치며
홀로 살아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형태의 삶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설파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과
차이가 있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동물의 혈연에 의한
단순 무리 진 형태와는 달리,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 되어,
그 삶을 결정짓는 공존공생의
삶의 형태를 가지는 특성이 있다.
. [{( . ) + ( . )} + ( . )] + ( . ) (7/15)
사회란 나를 중심으로 한
가족으로부터 시작한 혈연,
그 삶의 터전인 직장이라는
작은 기초 조직으로 구성된다.
수렵이나 농경사회 때와는 달리,
현대사회는 복잡다단한 사회구조 때문에
직장의 형태는 매우 복잡하여 졌다.
학교와 같은 배움의 터가 있는가 하면
점포나 회사와 같은
돈벌이 수단의 장소도 있다.
경찰이나 군대와 같은
조직을 지키는 조직도 발생되었다.
나, 가족, 직장이 연계된 이웃도 있다.
지역과 지방 또는 국가 등도
내가 속한 사회의 한 모습이다.
. (x + y)n = nk=0Σ nCk xk yn-k (8/15)
이항정리의 컴비네이션(Combination) 조합의
한 구성요소처럼,
나는 지금의 이 세상 구성요소의
한 부문일 것이다.
제 각각 지지고 볶아 가며
살아 가는,
뭇 인간의 삶들을 합한 모습이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곳의 사회 모습이다.
나의 모습,
그리고 내가 속한 조직의
모습 그 자체가
이 세상의 모습을 합한 것과도 같다.
내가 본 세상,
내가 생각한 세상이
너와 나,
전체를 합한 큰 세상과
크게 다를 바는 없을 수도 있다.
. (x2.3a + Y0.7b - ZC) (9/15)
사회의 구성원들 각각은
타고 난 저마다의 소질을 가지고
나름대로 잘 적응하며
열심으로 살아 가고 있다.
그러나 그 크기가
서로 같을 수도 없고,
항상 사회에 보탬만
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나보다 못하다고
얕잡아 봐서도 안되고,
개인의 성향이 다양함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한다.
내가 속한 조직의 목표를
갉아 먹는 존재라도
인정 할 줄 아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양의 부호만 가진다면
세상의 모습이
지금처럼 다양하고
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x + y)n (10/15)
사회는 나름대로
각각의 존재 목표가 있다.
때로는 크거나 길고
많은 것을 목표로 삼지만
짧고 작은 것 또는 적은 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표란 개체 조직으로서의
한가지 목표 일 뿐,
어느 한 쪽 방향의 목표만이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쉽게 생각나는 주제를 들어 생각하여 보자.
돈, 부(富), 명예, 영토, 애정,
운동, 취미, 학문, 건강, 생명 ……
무조건 이들이 크고 길고 많다고
아름다운 사회가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무조건 이들이 크고 길고 많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골프 초심자들이
새벽 서너 시부터 휘두르기 시작하여
온 종일
몸살 약 먹어가며, 파스 냄새 풍겨가며
좋아라 필드 누비는 모습을 종종 본다.
카지노에서 땅기거나,
마사회 투전이나,
과음으로 낑낑대는 일도
적당함에서 벗어날 때 추하게 여겨진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긴 생명에 너무 연연함도
과할 때는 추하게 보인다.
추하게 보일 때,
존재의 목표
또는 진정한 존재 의미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크기의 적당함이란
개개인 스스로의
마음 한 쪽에 있을 뿐,
실체도 없고 그것을 잴 수도 없다.
때문에 옳고 그름을 말할 수도 없다는 특성이
있음을 우리는 인정 할 줄 알아야 한다.
. lim x→0 lim x→∞ f(x) = c (11/15)
때로는, 극한으로 수렴된
더 작은 세상의 모습이나,
무한으로 발산된 우주를 그려 봄도
생활의 지혜는 될 수 있다.
넉넉한 마음,
넉넉한 생활 자세의
밑거름으로 작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얽매여
너무 허둥거린 적은 없는가?
그것이 돈이나 명예뿐 아니라,
희로애락, 생노병사의
어느 한 문턱 아래서
바둥댈 때,
더욱 그리 할 수 있다.
. lim x→a {f(x) + g(x)} = α + β (12/15)
“내가 너라면” 하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 하려고 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포기하고 복종하고 아부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이해하고 보듬어 주려는 자세는
이 세상을
더욱 순화되고 부드럽고 아름다운
조직이나 사회의 바탕이 되리라.
나 스스로도
그 예외가 되지는 아니할 것이라고
믿어 본다.
. sin (900 ᆂ θ) = cos θ,
tan(1800 ᆂ θ) = ᆂ tan θ (13/15)
내 마음의 합계는
삼각도형의 1800와도 비슷하다.
내가 써먹을 수 있는 정, 인정의 합계는
언제나 180을 넘어 설 수는
없었던 것 같다.
때로는 나 혼자를 위해서
180 전부를 쓸 때도 있었다.
작은 사랑에 눈 멀 때는
마음 먹고 크게 잘라 주고픈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잘라서 준 만큼
다른 한 구석은 비워지고 있었음이
세월이 지난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좁쌀 가족,
작은 사람들의 우리가족 모임에서
노인 된 부모, 위를 보나,
귀엽던 자식들, 아래를 보나,
언제나 애쓰는 듯하던 처, 옆을 보나,
볼 때 마다 좀 더 주고 싶었지만
한정 된 것이 인정임을 알게 되었다.
더 주지 않으리,
더 주면 한 편이 모자라게 되니…… 하는
아쉬움이 언제나 있었다.
그리고 미안 했다.
어디, 가족에게만 그리 하겠는가?
회사를 나오면
휘하의 아래 직원들이 그리 보였고,
업무에 찌들어 헉헉대는 위의 상사들과,
경영목표 채우려는 경영주들이 그리 보였다.
더 보탬이 되고는 싶었지만
재능의 한계는 항상
그러한 바램을 넘어서지 못하게 막곤 했다.
거리에 나서며 도움 청하는
많은 자선단체들을 대하면서도 그러했다.
국방이나 정치처럼
국가에나 스스로가
큰 도움은 못 된 것 같다는
생각 들 때도 그러했다.
그러나 쉽사리 자기합리화를 하며
쉽게 잊곤 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0,
내가 할 수 있는 역량이란,
나의 힘, 재능, 노력, 판단력
그리고
마음이나 인정, 정 까지도 있는 그대로,
지금 가진 그대로를 한정하고 싶었다.
자신에게는 관대한 관용으로,
그러나 타인에게는 깐깐하고 엄하게 대하는
정신자세의 문제가 여기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1800,
나 말고 다른 이가 낼 수 있는 여력은
무한정인 듯 여겼던 것은 아닐까?
. dy / dx = ax, y = ∫ax dx + C = a/2 x2 + C
d2y / dx2 + 2 dy / dx + y = sin x, y = (C1 + C2x) e-x – cos x / 2 (14/15)
물리나 응용수학에서는
함수 ƒ(x)를 미분하여 얻은 함수인
도함수(導函數)나,
미분 연산자를 포함한 미분방정식 등이
많이 이용된다.
이들 응용공식들을
물끄러미 보면서 생각해 본다.
미적분이나 미분방정식이
수리, 물리, 응용과학 에서만 국한 되는
함수들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복잡하게 얽혀진
사고의 틀에서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복잡한 사고나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 인체를 구성하는
생물학 측면의 구성요소에도
비슷한 미적분 구도를
엮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체를 구성하는 각종 장기며 혈액
그리고 그것을 구성하는
세포며 면역체계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잘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알고 있다.
각각의 인체구성 요소들의 기능과 함께
인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존재의 이유들이 있다.
세포 또는 세포의 구성요소와
장기, 그리고 “나”라고 하는
인격체의 모습을 보면서
미적분, 도함수. 미분방정식의 관계가
떠 올려 진다.
세포를 구성하는 주요항목 중 하나인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에
시선을 집중하여 본다.
체내의 60조 개 세포에는
세포 한 개당 1000~2000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있고,
차지하는 부피도 15~25% 정도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각각의 미토콘드리아는
독립된 DNA 구조를 가지고,
세포와는 별도로 번식하며,
박테리아처럼 숙주인 세포에 기생하며
별개 생명체로서
세포와 공생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한다.
세포 한 개 한 개가
이들 작은 생명체의 집합이다.
물리적 기능 외에
그들이 어떤 사고를 하고 있는지 까지
미분해 볼 수는 없다.
세포 내에서 번식과 성장 사멸이
별도로 진행 된다 함은
작은 외벽에 갇힌
또 다른 작은 세상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조선 말엽 한의학자 이제마는
인체를 소우주(小宇宙)라고 불렀다.
미분된 세포나, 세포를 이루는
생명체를 알지는 못하지만
생명력이 이어지는 한,
개인은 그 우주를 이끌고 가는
주체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바는 그냥 나일 뿐,
더 큰 세상의 일이나,
더 작은 세상의 일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다.
하늘 위의 더 큰 우주도,
내 몸 속의 더 작은 우주도
알면서 살아간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채우고자 하는 크고 작은 욕망들이란
토막 난 한 조각의
부질없는 짓에 불과 할 수도 있다.
. ∫xm dx (15/15)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열심으로 살아가되,
부질없는 욕망에 끌려
허덕이는 때는 없도록 하자.
부(富), 명예, 영토, 애정,
운동, 취미, 건강, 생명 ……
오갑록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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