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궁극적인 목표와 방향

오갑록 2015. 3. 17. 11:45

무궁한 ......

■  궁극적 방향과 의문

 

 

      시사문제를 다룰 때는 6하원칙(六何原則, 5W1H)에 따른 내용으로 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식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이 세상의 이치나 진리를 궁금해 하는 순간을 맞게 된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학식 귀천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다 같은 내용의 궁금증을 접하게 되곤 한다.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 존재와 가치에 대한 궁극적인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의문들 또한, 6하원칙은 적용될 것이다.

 

이 세상의 시작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 어떻게 하였는가?

이 세상의 종말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세상의 존재와 가치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 어떻게 결정하는 것인가?

 

믿음”, “신앙이라는 전제 아래, 궁극적인 의문에 관하여 종교마다 6하원칙에 따르는 답들이 제각기 제시되고 있다. 세월과 거리를 초월한 나름대로의 답들과 함께, 인간으로서 취해야만 할 행동양식까지 명확히 하고 있다.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 삶의 가치, 목표, 방향 등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성경 불경 등의 종교 경전들이다. 여기에는 진실의 여부나 옳고 그름을 떠나,  믿음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내용이라는 특성이 있다. 우리는 그러한 궁극적인 사안에 관한 의문의 종착지는 믿음의 안에서만 도달 할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서로 다른 믿음의 구도 안에서는 존재와 가치의 내용도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옳고 그름, 선악의 기준이 서로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시작과 종말에 관한 의문을 배제 한 채, 올바른 삶의 방향을 우리는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의 시작과 종말을 바로 알지 못한 채, 올바른 삶의 과정과 목표를 기대할 수 있을까? 열심일 수는 있어도 모두가 바른 것일 수는 없을듯하다. 시작과 끝, 전체는 모를지언정, 우리 인간의 짤막한 순간의 삶 속에서 인지할 수 있는 물리적 사회적 현상 가운데, 수긍할 수 있는 목표와 그에 대한 가치기준을, 비록, 짧은 토막이지만 잘라보고, 비교하여 보는데 그치곤 한다. 토막 난 내용의 낱개는 각각이 허술하고 무의미한 듯 하지만, 전체를 구성하는 한 요소로서 생각한다면 전체가 기둥이자 몸통으로서 여겨 볼 수도 있다. 

 

밤하늘 별, 한 개, 한 개, 낱개를 보면 점이지만, 지구 한 개를 보면 크고 둥글다. 안방 커튼을 보면 색상, 무늬, 질감, 형상이 제 각각이지만, 문 열고 건물 밖에서 보면 건물 속의 부속물이다. 커다란 지구의 모습으로 확대하면, 그 건물 또한 커다란 지평을 유지하는 선의 구성요소가 된다. 이것이 토막과 전체의 다른 점이다. 우리의 생각도 이와 닮은 점이 있다고 본다. 한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의 골과, 젊음과 늙음으로 나눠 본 세월의 감정이 다르고, 시대와 그 때 사회의 가치관이 다르다. 한 생명체로서의 존재 의미로 본다면 더 달라질 수 있다.

 

안방 커튼의 색상 무늬 형상을 고민하는 것이 이 세상 전체에 무슨 영향을 주겠는가? 마찬가지로 내가 한 순간 느끼는 감정이나 고뇌가 광활한 이 세상의 이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 가운데서 선 악 죄를 따지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 그래도, 우리는 삶에서 꿈과 희망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젊음은 꿈과 희망을 연상하게 한다. 젊은 이에게 원대한 포부를 그리는 꿈과 희망을 간직할 것을 조언하곤 한다. 그렇게 설정된 목표를 향하여 젊음을 불사르며 정진할 것을 우리 사회가 바라는 것이다. 그러한 태도가 자신과 그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밝고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목표를 두고서 하는 말이다.

 

꿈과 희망, 목표란 무엇인가? 그 본질은 간단한 듯 하다. 우리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갖가지 욕구를 충족하고자 하는 뭇 욕망에 대한 물리적 또는 정신적인 설정이다. 시간, 크기, 깊이, 량 또는 진리와 선함과 아름다움이라는 진선미의 각종 덕목이 될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우선되는 것은 역시, 동물적인 본능을 충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먹고 마시고 싸며, 편하게 쉬는 가운데 자기 종족의 씨를 불리는 나름의 행태들이 선행될 때, 그 다음 단계의 목표설정이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명예, 성공, 사랑, 건강 등의 덕목은 이러한 기본 욕구 충족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식물이 성장하는데 빛을 쫓는 굴향성처럼, 동식물이 영양소나 먹거리가 풍족한 곳을 쫓는 것처럼, 인간도 본능과 본성은 그러한 방향의 진선미를 향한다.

 

우리 일상의 사회생활 가운데, 그러한 목표를 위해서 어떤 자세들 취하는가? 자기의 개인적인 취향과 특성을 바탕으로, 자의던 타의던 어떠한 연유에서였던 간에 설정된 곳을 향하게 된다. 잘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자신의 장기가 된다고 여기는 것을 바탕으로 하기도 하며, 자신은 싫지만 타의에 의하여 하는 수 없이 설정 되기도 한다. 자신과 가정과 사회 또는 시대적인 배경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밀리듯 흘러가는 경우이다. 학교를 가고, 군대를 가고, 결혼을 하는 따위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틀에 박힌듯한 인생 항로의 한 행선지가 되곤 한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 중에는 수험성적 수준에 맞춰서 학교며 학과 등의 진로를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동안의 학업성적이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는 경우이다. 꿈과 희망, 인생의 목표가 학교성적 때문에 방해 받거나 자신의 원하는 곳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곳으로 설정되는 경우이다. 물론 성적은 개인의 지적 능력과 노력의 산물이다. 능력이 있고 노력도 했다면 원하는 곳을 선정 했겠지만, 상대적이고 경쟁적인 요소가 있음을 생각할 때, 스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밖에 없다. 무한동력처럼 무궁한 재능이란 없으므로, 능력은 어느 누구에게나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적 능력 한계의 사례처럼, 재력, 체력, 미모, 건강 따위도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한계라고 여기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아쉬워하고 원망이나 절망을 하기도 한다. 가난 때문에, 힘이 모자라서, 못생겨서, 아파서 등등의 이유가 뒤따른다.

 

목표설정에 있어서 학력이란 한가지 예에 불과 하다. 재력, 체력, 미모, 건강 따위는 낮은 수준의 단순한 조건일 수도 있다. 더 큰 안목에서 볼 때, 물리적으로는 자기가 처한 시대적 사회적 입장이다. 자신이 선택 할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사회가 구석기시대 수렵사회가 아닌 것도, 이조 시대처럼 봉건사회가 아닌 것도, 종교 적으로는 이슬람 국가가 아닌 것도 …… 나에게 주어진 내 삶의 기본 여건인 것이다. 고산지대나 섬나라, 동토나 열대가 아닌 평지의 온대 기후 속에서 삶을 시작하게 된 것도 나에게는 주어진 여건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지금 내가 밟고 서 있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이라는 극렬한 운동 중에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며 내가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삶을 영위하게 되는 기본 여건들이 대체 어떤 수준인지를 잊은 채, 스스로를 과소 평가한다거나, 불평과 불만을 늘어놓는다거나, 욕망이 앞선 무리한 목표를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고, 대중을 이끄는 통치가가 되고 싶고, 존경 받는 덕망 있는 위인이 되고 싶고, 건강하게 무병장수하고 싶고, 더 좋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시대적 사회적 여건의 한계를 토대로 하여, 좀 더 노력하고, 궁리하며 처한 현실의 한계와 벽을 넘어 보고자 하는 것이, 꿈이고 희망이며 새로운 목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희망을 제한하는 듯한 목표도 있다. 희생, 봉사, 사랑, 겸손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덕목은 자기보다는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선하고 아름답게 꾸리자는 말이다.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목표인 것이다. 좋고 선한 무엇인가를, 자기 앞으로 끌어 당김이 아니라, 남에게 양보하고 나누자는 덕목인 셈이다. 언뜻 보기에는 자기 본능에 반하는 듯하지만, 자기가 속한 사회를 밝고 선하고 잘되게 한다고 함은 결국 자신과 자기 족속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만큼,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라고만은 할 수도 없다.

 

. 먹고 입고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쉽고 만만하던가?

 

좀 더 높아지려고 까치발을 딛기도 하고, 벽돌 짝이라도 주어다가 올라보기도 한다. 때로는 남을 헐뜯거나 빼앗기도 한다. 거짓 사기 공갈 협박을 서슴없이 하기도 한다. 막연한 꿈과 희망, 그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은 험난한 것이다. 전쟁과 파괴도 서로 뺏고 뺏기지 않으려는 다툼의 역사이다. 인간 관계뿐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 간의 사이에도 쫓고 쫓기는 형상은 존재한다. 맹수를 피해 눈치 보며 살아가는 초식동물처럼, 힘이나 능력이 모자라면, 언제고 피하거나 도망갈 채비를 하며 지내야 한다. 일기 예보를 듣고 비 바람 한파를 대비하는 것도, 인간이란 자연의 힘에 비해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니 피할 준비를 하는 격과 같은 이치이다.

 

싫던 좋던 간에, 자의던 타의던 간에, 주어진 여건 아래 선택된 일단의 자기 직업에 충실 하는 것은, 주어진 스스로의 삶의 기반 위에서 새로운 목표를 향해 열심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한다. 까치발을 딛던지, 남의 것을 빼앗던지 헐뜯던지, 도망치고 피하던지 …… 여하간에 더 높은 목표를 위하여 열심인 것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본능에 충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직업에는 여러 부류가 있다. 생산적인 것, 소모적인 것, 배분에 관한 것, 가르치거나 관리하는 것, 건강과 질병을 다스리는 것, 사상 종교 문학 기술 예능 군사 ……  사람은 모두가 자기직업의 관점에서 중요한 점을 찾아내곤 한다. 떡아기는 엄마 젖을, 어린이는 군것질 거리를, 총각은 처녀를, 학생은 학용품이며 성적을, 생산직은 수율과 원단위를, 영업사원은 판매실적을, 연구원은 R&D실적을, 기업인은 돈줄에 영향을 주는 각종 경영여건들을, 병사는 총기를, 군대는 충성심을, 농부는 비 소식을, 그리고 예술인, 체육인, 종교인, 문학인, 정치인 들 모두도 각기 그들만이 지니게 되는 직업상의 관심과 중요도가 달리 존재한다.

 

. 여러 가지 직업 가운데서, 의료업의 예를 들어보자.

 

의료 종사자도 같은 직군 내에 전문분야별로 각기 차별화되고 색다른 관심사를 갖는 것이 분명하다. 바이러스나 병원균, 질병의 원인과 대응책, 식품과 영양, 의약품과 치료기기 용품 등등, 서로 전혀 다른 분야처럼 느껴진다. 의료 학문과 연구개발, 제약은 생산.판매, 병원.약국의 서비스, 식품,영양 제공, 치료기기의 연구.개발.생산.판매, 그리고 병원 내에서도 각각의 전문 과목별로 관심사가 갈릴 것이다. 소화기 호흡기만 생각하는 분이 있을 터이고, 피부 알레르기만 골똘한 분이 있을 것이다. 안과 치과 비뇨기과 정형외과 방사선과 소아과 산부인과 뇌 심장 간장 등등이 각기 나뉘고 각각은 담당하는 분들마다 서로 다른 관심을 둘 것이다.

 

병원균 박테리아 바이러스만 다루는 의료인과 섬유근육조직 뼈.골수조직 혈액조직 뇌조직을 연구 치료하는 의료인은 사로 다른 목표가 있고, 기생충, 암세포, 신경정신 등도 각기 다른 목표가 있다. 약제나 기기를 연구.개발 하는 것도 다른 관심사가 되며, 인체조직 각각을 뜯어 보더라도 세부적으로는 다루는 분야가 상이하고 전담하는 의료인으로서 관리목표도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눈 코 치아 피부 관절 ……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료인 가운데, 누군가는 매일 환자의 이빨만 벌리고 보며 살아가는가 하면, 누군가는 고장 난 환자의 무릎 관절만 치료하며 살아가기도 하고, 시력 시신경 홍체 수정체 각막 등만 관심 갖는 안과의도 있다. 내과 신경정신과 등도 장기마다 그러하다. 그러나, 건강을 지키려는 나 자신의 눈으로는 누구나 같이 소중하다. 전체가 있어야만 나의 건강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익성, 채산성, 업무의 수월성 안정성 따위를 저울질해가며 전공을 저울질하려는 의료인의 속성과는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건강을 지키려는 와 직업인으로서 의료인인 의 목표가 다른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분명한 것은, 어느 병이던 간에 건강한 생명유지에는 한결같이 소중한 것들이다. 그러나 의사가 보는 관심과 환자가 보는 시각은 다르다. 의사는 담당하는 전문 분야를 두고 보겠지만, 환자는 건강 전부를 두고 한 개로 보는 것이다. 직업인으로서의 의료인은 인간의 치료와 건강을 목표로 한다지만, 수익성 채산성을 따져야만 되는 직업인이기도 하다. 환자는 아픈 곳을 치료 하고 건강을 유지해야만 하는 생명의 주체지만, 주머니 속 사정을 걱정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걱정해야 하는 경제의 작은 주체이기도 하다.

 

. 직업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자.

 

짧은 치마 아래로 늘씬한 각선미를 뽐내는 미인이 근처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성의 눈으로서 보이는 아름다움을 먼저 떠 올릴 수도 있겠지만, 직업이 서로 다른 전문가의 눈에는 직업의식이 먼저 발동 될 수 있다. 정형외과 의사라면 무릎 관절이나 뼈 조직을 그려가며 훑어 볼 것이고, 피부과 의사는 피부 아토피로 있을지 모를, 뒷 무릎 오금 부위의 붉은 반점 흉터는 없는지 관심 둘 수도 있다. 구두장이는 신고 있는 구두 색상, 굽 높이와 형태, 재질 따위의 디자인에 먼저 시선이 갈 것이다. 육상감독이 보는 눈이라면 장딴지 근육질이나 힘은 쓸만한지 눈 여겨 볼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눈에는 아름다움에 앞서 건강한 모습을 먼저 챙기고 싶어 할 것이다. 본인에게는 정작 무엇이 제일 중요하겠는가? 잘 걷고 뛸 수 있는 건강한 의미로서의 관절과 다리 역할일 것이다. 아름다움의 주제도 중요하지만 건강보다 우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무릎이라는 자기 인체 조직의 관점이 아닌, 그를 바라 보는 직업이라는 관점에서는 달리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안전한 직업, 돈벌이 되는 직업, 존경 받는 직업 등의 사회인식에 쫓아, 직업의 선호도는 시대에 따라 뒤바뀐다. .판사, 정치인, 교사, 공무원, 은행원, 무역회사원, 증권회사원 의사 등에서 배우 탤런트 가수 같은 예능인 등으로 짧은 기간 사이에도 대중이 좋아하는 직업은 변화를 지속 해 왔다. 그들이 맡은 바 직업의 속성이 달라 진 것은 없지만, 그들 직업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돈벌이 정도에서 상대적인 평가가치는 늘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관일 뿐, 직업 본질은 그 곳 그 자리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다.

 

 

. 궁극적인 목표는 어디에 두고 바라봄이 옳은 것일까?

 

직업으로 분류되는 모든 일의 속성들이 그러하다. 각기 다른 전문과 의사들이 다루는 환자의 신체 부위들 각각도 결국 라는 몸과 정신 한 곳으로 귀착하는 것이다. 일이나 건강뿐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한지도 모른다. 각각은 서로가 중요하고 존재 가치가 있다지만, 전체로는 하나로 일치되는 공동의 목표가 있다. 천체, 물리, 역사를 아우르는 인문과학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다. 의료분야처럼, 각기 자기가 다루는 것이 소중하겠지만 공동의 목표가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나에게는 똑 같이 소중한 일인지도 모른다. 물도 바람도 햇빛도 모래 한 알도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일분 일초의 시간의 흐름도 중요하고, 달과 별이 돌아가는 이치도 내 삶에서는 중요한 것들임에 분명하다. 내 삶이 그러한 구도 속에서만 연장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래 알에서 물리학자는 규소와 산소 구조와 원자와 전자 배치가 어떤지를 따질지 모르지만, 농사꾼은 사질토에서의 배수 정도에 더 관심 둘 지 모른다. 뿌린 씨앗이 발아는 잘 되는지 생육에는 어떤 영향을 줄지에 더 관심 둘 것이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종합적인 요소로서의 모래, 모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물리적 진실과, 세상 이치로서의 진리, 그 모든 것들이 나로서는 소중한 것임에 분명하다. 보고 듣고 만지며, 먹고 입고 생각하며, 함께하는 세상의 모든 자연과, 동시대인으로서 나를 둘러싼 사회의 모든 현상들이, 그 자체로서 나에게는 소중한 것들이다. 그렇기에 주위의 모든 자연 현상들이 좋고 소중하며, 내게 지금 주어진 사회 현상들이 좋고 감사하고 소중한 것이다. 물론, 나에게 주어져 쪼개며 흐르고 있는, 지금 한 순간, 작은 이 시간들도, 내가 더 늘리거나 줄일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물리적 량이기는 하지만, 중요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가 목표로 하는 주체의 전부이지만, 각각의 주체는 존재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들이 모두 모여야만 바르고 온전한 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해도 별도 달도 흙도 바람도 물도 불도, 생산도 기술도 서비스도 국방도, 부모도 형제도 벗도 이웃도 …… 그리고 도 마찬가지로 꼭 있어야만, “가 있을 수 있는, 존재의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초저녁 어둠 깔린 개천가를 산보하다 보면, 쌍을 이루며 부지런히 걷는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오곤 한다. 부부, 모녀, 부자, 친구 …… 무슨 내용인지는 잘 모르지만 발걸음만큼이나 종종거리며 잰 입술로 자기주장에 열 올리는 모습을 접하게 된다.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를 중심에 세우고, 타인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내용들로 느껴 오곤 한다. 한결같이 말하는 사람 자신은 옳고 당당한 듯 하다. 자녀들에 대하여, 노부모에 대하여, 친구나 이웃에 대하여, 정치인이나 극 중 인물에 대하여 …… 자기 생각과 주장을 누에 실처럼 뿜어대고 있는 것이다. 모두들, 저렇게 자기는 옳고, 타자는 그 잣대 위에 올려져서 평가 받고 지내게 되는 것이 우리 삶의 이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 자신이 그러하지만, 스스로의 잘잘못은 쉬이 잊고 용서하며 너그럽지만, 상대의 것에 대해서는 항상 엄격하고 물에 빠지더라도 잘 지워지지 않는 기름종이 위에 인쇄되듯 또렷한 기억으로 생생하고 용서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남을 쉽게 평가하고 탓하게 된다. 자기 잘못이나 부끄러움은 쉬이 잊게 된다.

 

믿음에 근거하여 신앙을 주장하는 종교집단에서도, 개인의 이러한 본성과 유사한 오류는 과연 없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기도 한다. 개인의 오류가 집단의 오류로까지 물든 형국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의심하는 자의 허구성도 인정하고, 종종 이를 부끄러이 생각하기도 한다. 믿음 없는 자의 한심한 작태려니 하며, 스스로를 탓하기도 한다.

 

 

궁극적인 목표란 어느 한 점에만 머무르는 것일까?

삼라만상 전체를 망라한 모두를 아우르는 것일까?

아니라면, 그 어느 것도, 아무것도 아닌,

없음()”과 무상(無常)에 와 닿는 것은 아닌가?

 

2015.3.15. ()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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