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
■ 호오(好惡)
가수 장사익의 “꽃구경”을 처음 들으면서 저절로 눈시울이 적셔졌다.
. 꽃구경 , " 어머니 꽃구경 가요 ~~ ♬ "
한 서린 가락이라고나 할까? 어머니에게 제대로 못다한 회한 어린 내용의 가락인 듯 한데, 나의 정서에는 그리 닿은 듯 하다. 노련한 가수의 잘 다듬어진, 한 올 한 올씩 빠지는 정성 어린 가락에서 오는 감정 전달 효과인지도 모른다. 물론, 익숙하지 못한 가락이나, 곡의 내용 때문에 소음 수준에서 머무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 세대나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감정으로서 와 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카톡으로 몇몇에게 전달해 보았더니, 듣고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중등학교 국어교사인 여동생 카톡 답변이, 15분 후에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너무 울어서 수업이 제대로 진행 될 지 걱정이라고 했다.
호오(好惡)의 감정은 그렇다. 내게는 좋다거나 싫다는 감정을 줄지라도, “너와 그”로 지칭되는 누구에게나 모두 다 그러하지는 않다. 그리고 “나” 자신도 내일이나 내년, 먼 훗날까지도, 언제나 그렇지도 않을 것이기도 하다. 감정을 가르는 호오의 경계선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항상”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하다. 나는 좋은데 너는 왜 싫다는 말인가 하고 따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을 것이다. 각자의 감성이나 감정의 그릇은 모양새가 다르고, 그 크기도 때에 따라 수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러하려니 하며 무심코 흘려 보내곤 하는, 야릇한 경계선은 호오의 감정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희로, 애락, 애증 등도 마찬가지며, 음양과 요철로 갈리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러하다. 사람을 평가하는 평가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선악(善惡), 빈부(貧富), 미추(美醜), ……
그 경계선을 어찌 운용하는가에 따라서, 보다 더 좋다고 느껴지는 호오(好惡)의 감정을, 보다 더 기쁘다고 느껴지는 희로(喜怒). 애락(哀樂)의 감정을, 한 층 더 사랑스러움으로 다가갈 애증(愛憎)의 감정을 …… 느끼고 보듬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물리적 여건도 다를 바가 없다. 높낮이, 많고 적음, 크고 작음의 경계선이 그러하다. 그 이유는 물리적인 크기가 결국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잣대로서 측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질량과 크기, 시간과 세월이 모두 그러하다. 많다고 많지 아니하며, 크다고 크지 아니하고, 길다고 길지 아니한 것이다. 인간의 수명도 마찬가지로, 오래 살았다고 하여 오래 산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건강백세를 지향하는 좋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의식주가 개선되고 의료기술이 발달한 덕택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혜택을 느끼지 못한 채, 더 높은 목표를 향하며 달리기 일쑤다. 불과 1~2 세기 이전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지금보다 형편없이 짧았었다. 영아 사망률을 배제한다 해도, 60 넘기기가 쉽지 아니하여, 회갑잔치를 성대하게 치르곤 했었다고 본다. Radetzky March, LP레코판을 넘기다가 우연히 보니, 우리 이전세대 음악 거장들 수명이 이즈음 사람들보다, 짧았던 것이 눈에 확연하다. 멘델스죤 (38), 모짜르트(35), 그리이그(64), 베를리오즈(66), 챠이코프스키(53), 프로코피프(62), 요한 시트라우스(45) …… 요즘은, 인생은 육십부터, 칠십부터 하면서 서로가 시작하는 시기라고 말하지만, 한세기 이전만해도 생을 접어야 할 나이가 된 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못다한 욕정에 허덕이며 불평과 불만을 품기도 한다. 우리가 품고 살아가는 감정의 특성을 보다 더 깊숙하게 헤아려 보지 못한 채, 오직 각자의 목표라는 깃발을 향하여 열심이라는 이름으로서만 오늘을 보내곤 한다. 호오의 감정을 헤아려 보며 그러함을 더욱 깊이 느끼게 된다. 좋다고 본다면 얼마던지 더 깊이 있는 감정을 느낄만한 일들도, 눈길 주지 못한 채, 그냥 흘려 보내곤 한다. 크고 많고 높고 길고 멋진 것만 쫓을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가치를 더 어루만지며 보낼 수 있어야만 한다. 영광과 영원만 쫓을 것이 아니라 지금의 가치도 헤아릴 줄 알아야만 한다.
선악을 쉽게 말하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 것인가? 그 경계선은 호오의 경계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를 생각나게도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두가 선한 것처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세상 모두가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아닐까? 생명체를 죽이는 일은 악하다고 하지만, 자기 먹거리 때문에 살생하는 짓을 악하다고는 간단하게 평가하지 못한다. 선과 악의 잣대가 생각하기 따라 달라지는 모습이다. 소 돼지 잡는 것은 당연하지만, 개나 사람 잡으면 왜 악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가? 원수나 적이라고 해서, 정말 당연하고 선한 행동인가? 선한 일과, 좋은 일은 다른 의미가 된다. 살생의 행위는 나쁘지만, 내가 먹고, 내가 잘 살기 위한 살생은 좋다고 한다. 이처럼, 선악과 호오는 평행을 이루지 못하고, 서로가 엇갈리게 되기도 한다.
삶이란 좋은 것이라고 가정해 보자. 심지어 죽는 것까지도 좋은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상정해 보자. 한 개의 직선은 시작과 끝이 있을 뿐이라는 단순한 이치만 두고 볼 경우이다. 원(圓)이나 구(球)에서는 찾을 수 없는 답변이다. 끝이 있다고 여기며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의 생각은 누구도 바로 알 수는 없을 것이지만, 취사선택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본다. 자기 생각이나 감정과 타인의 그것이 항상 다른 것처럼, 선악이나 호오, 인간이 갖는 모든 감정의 기준이 어느 한 곳에만 수렴될 수 없음이 진리일 수도 있다. 그러한 기준이라면, 이세상의 모든 일이 선하고 좋은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경우는, 화해니 용서가 선하고 착한 짓이 아니라, 당연한 행위가 되기도 하고, 욕하고 때리고 부수는 일을 악행으로만 내어 몰 수도 없게 된다.
극한으로 팽창 된 우주의 모든 것과, 극한으로 수렴 된 한 개의 점을 두고, 세상의 시작과 끝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것처럼, 우리가 갖는 서로 상반된 어떤 감정도 그 경계선은 애매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를 속단하지 못한다. 섣부른 평가에 앞서서, 가치의 기준과 인식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우상(偶像)은 무엇들인지를 먼저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내게 듣기 좋은 노래가, 너에게는 소음이 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러한 호오의 감정을 가르는 경계선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 지를 한번쯤은 헤아려보는 것도 그다지 엉뚱하지는 않을 듯 하다.
2015. 03. 24. (화)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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