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많음에 대한 잔상

오갑록 2014. 11. 27. 06:52

넉넉함 ......

■  많음의 잔상

 

너는 많다.

너는 크다.

너는 높다.

 

그는 많다.

그는 크다.

그는 높다.

 

무엇이 많고 크고 또는 높다는 이었을까?

너 그리고 그에 대하여 내가 선망했었던 것들을 돌이켜 본다.

 

많다는 것은 개수를 형용하는 수사 외에도

크다거나 높다거나 넓다는 등의 사물의 외모를 수식할 때도 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우리들 감정 중에서 자신에게는 선()한 모든 형용사가 포함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참되고 아름다우며 좋고 선한 진선미(眞善美)의 모든 덕목들을 두고서 그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다란 항상 상대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라고 하는 비교의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를 벗어나서 와 비교하게 될 때의 많음이란

로서는 와 비교 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상대적 크기로서 내 앞에 서성인다는 것을 종종 인식하게 된다.

 

마치, 화학에서 1(mol)의 물질에 들어 있는 입자의 수인 아보가드로수(6*10^23 )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거나,

현대 물리학에서 추산하는 우주의 크기인 반지름 465억광년을

크다는 인식이 들지 않음과도 비유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내가 견줄 만큼 만만하다고 여겨지는 를 벗어나서

로 통칭되는 한 줄 건넌 곳의

제 아무리 많고, 크고, 높은들 나와 견줄 수 있는 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태들이다.

내 마음 속에 자리하는 선망의 대상은 항상 제일 가까운 곳의 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내가 지난 날 욕심 내었던 에 대한 것들,

내가 아쉬워하고, 선망하던 그 모든 선한 것들이 어느 것 하나 예외 되는 것이란 없을 것이다.

 

가까운 곳의 ?

거리, 뿐만이 아니다.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때로는 사회적 지위나 격이 그렇기도 하다.

때문에, 거리가 멀어지고 난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다거나,

지위며 격이 전혀 다른 상대인 ,

그의 많음은

비교나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아보가드로수나, 수백억 광년의 크기처럼, 단순한 형용사로서 에게 다가서는 것이 되곤 한다.

 

내가 를 마음에 담는 것은

가까운 곳의 너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를 상대하려는 것만큼 우둔한 짓도 없을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인간 욕심의 원인 또는 시작이 될 뿐이다.

 

진리 미덕 선함을 추구하는 우리네 삶의 모든 면면이 다 그러하다.

무한한 영광, 영원을 추구하려는 본능으로 떠넘기기 전에

무엇이 얼마나 충분하고 만족한지를 시시로 따져보는 자세도 중요하다.

 

현대의 급속한 기술발전과, 결과물인 풍요로운 물질이 우리 삶의 가치관을 혼돈스레 하더라도

의 마음 속에 그려진 진선미의 가치관은

결국 가까운 를 대상으로 하여 지어진

한 알의 누에고치가 제격 이라는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것은 통상,

아보가드로수나 수백억광년을 헤아리는 량과 크기가 아니다.

외계인의 존재 여부를 묻는 질문에 대하여 누군가가 지적한 것처럼,

바닷가에서 퍼 올린 유리병의 바닷물에 물고기가 안 보인다고 하여

바다에는 물고기가 없다고 주장하려고 하는 우()를 범할지 모른다는 것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내가 판단했던 진선미란 유리병 내용물만 보며

합리화된 단편의 인식에 불과할 수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진리도, 미덕도, 선함도

로부터 습득했던 지식을 바탕으로,“가 경험하고 느낀,

극히 제한적 범주의 착시현상일 뿐이다.

가까운 데의 에게서 형성된 가치관일 뿐,

그로 통칭되는, 먼 곳의 가 반영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에게 선입견이 없었다면,

유리병의 바닷물만 보고서는 깊은 바다 속 생명체의 다양함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미역, 산호초, 말미잘, , 소라, 조개, 새우, 갈치, 명태, 꽁치, 상어, 고래 ……

 

먼 곳이란,

시대나 지역뿐만이 아니다.

격이며 지위가 다른 사회만도 아니다.

다른 인종, 인간뿐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 동식물까지도

때로는 의 대상으로서 눈 여겨 볼만하다.

끝 모를 우주론의 막연함 속에서도 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많다, 크다, 길다, 높다, 위대함, 영광, 우아, 장수, 영생

내게 이롭고 선한 모든 형용사들, 어떤 것에 대하여서라도

똑 같은 원리로서 적용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흡족, 만족하는 선을 긋기란, 항상 쉽지는 않다.

백세 넘어 장수한 노인이 자기 수명을 만족하지는 못한다.

노인이 어서 죽어야지하는 말은 거짓이란다.

기업본능 이라는 명분아래, 재벌기업 횡포가 종종 기사화 되고는 한다.

건강한 남정네가 열명 미인 마다할까? 라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될 수도 있다.

 

여하한 개인의 욕망도

가까운 를 벗어나, 머나먼 곳의 를 향하면  

때로는 볼 품 없고, 때로는 허황된 것이 될 수도 있다.

 

도를 넘어 뵈는 도심 속 초고층 빌딩의 솟구침을 보면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곤 하는가?

향학열에 불타는 칠팔십 노인 분의 소식을 접하면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곤 하는가?

상속 다툼으로 얼룩지는 재벌2세들을 보면서

당신은 무엇을 느끼곤 하는가?

긍정의 뒤에 숨은 욕망의 그늘들을 느끼게 되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들만 보고 비아냥댈 수 있는가?

는 과연 어떤 수준인지를 돌아보면

내놓기 부끄러우리만큼 사소하고 짜잔스런 것들이 수두룩하다. 

 

가 많다고 느끼던 것들 ……

 

당뇨 수치 올라간다며 5백 밀리그램 메트포르민 한 알씩을 매일 아침 찾는 주제에

나의 식탁 위는 먹거리가 넘쳐나고,

식후에도 간식 거리가 항상 푸짐하다.

 

진귀하다거나, 값비싼 것들은 아니지만,

나의 눈에 비친 먹거리들 모두가

나의 입 속으로 초대 받는 모두가

아름답고, 귀하고, 맛나기만 하다.

 

마시는 물 한 모금이, 찌개 국물 한 모금이,

젓가락 끝에 매달려 초대 받는 찬거리 어느 것 하나도

좋게 느껴지곤 한다.

식탁 위의 청소부, 식탐의 대가 정도의 핀잔까지도 들을만하다.  

건강하기에 입맛이 좋은 탓도 있으려니 하지만

쌀밥 한 톨, 찬 부스러기 푸성귀, 간 기 느껴지는 찬 국물 한 방울 ……

좋게도 느껴지지만, 그 풍부하고 넉넉함에

마음 속 심연에 전율 감도는 깊은 감사함이 시시로 느껴진다.

 

딸기 토마토, 포도 감 사과 ……

봄부터 가을까지 제철과일이 싫증나리만치 넘쳐난다.

빵 과자 쵸코렛 아이스크림 커피 음료도 이어진다.

맑고 시원한 물, 상큼한 공기, 맑은 햇살까지도

마시고 숨쉬고 느끼기에 넉넉함이 감돈다.

 

먹거리만큼이나,

를 감싼 의식주 모두가 푸짐하고 포근하고 따스하고 편안하다.

, 페라리, BMW만 눈에 찰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동 수단에 불편함이 없다면, 어느 것이던 만족할 수 있을진대

에게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자신의 허욕이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충동질 할 것이다.  

 

쌀쌀한 이즈음 아침, 야외에서 즐기는 운동 시간의 햇살도

에게 수 많은 감정의 고리를 이어가게 만든다.

그 아침햇살을 받으며, 새삼스레 문득 눈길을 멀리 돌리면

개천 둔치로 이어지는 11월의 노랗게 물든 잔디밭 위, 아직 남은 파릇한 기운은

길게 곧바로 늘어진 초록색 탄성체 포장도로가 옆에 흐르는 물길과 어우러지며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은 그렇게 고리 지어가며 넓게 번져가곤 한다.

사소한 욕심이라도 개입되는 순간, 그 가녀린 멋이며 아름다운 순간은 단절되기 십상이다.

 

그림이나 음악 같은 예술을 느끼는 것은 금전적 가치로서 평가 되기도 하지만,

의 느낌, 자신의 감정에서는 그러한 가치와 상이할 수도 있다.

 내가 지불 가능한 능력의 정도 내에서, 자기 자신은 무한한 감동을 찾아낼 수 있다.

 

물 한 컵을 보면서도, 그 속에 생동하는 아름답고 넉넉한 심연의 생명체를 연상하기도 하고,

따스하게 비치는 아침햇살 속에서, 꿈틀대는 뭇 생명의 생동감을 읽어 내는가 하면,

스치는 소매자락 바람결에서, 태고로부터 이어오는 인연과 조상의 숨결을 느끼고,

코끝을 스치는 사소한 내음에서, 지역과 사회가 다른 머나먼 이웃을 스쳐온 인연을 맡으며,

겨울철 빵모자 속을 스치는 이명 속에서, 우주 저 편의 속삭임은 아닌지 귀 기울이는 ……

쫓기는 듯 바쁘게 돌아가는 주변을 바라만 보는, 내쳐버린 욕심에서 찾은 여유로움의 시간들,

 

그런 넉넉함 들이 꼭 부끄러운 것들일까?

쓸모 없는 생각과 번민만 많은 것일까?

부질없는 욕심에 물든 세속적인 많음과 비교해서는 안 되는 것들일까?

 

, 재물, 영광,

그리고 우리가 통상 진선미로 여기던 그럴듯한 명분들

진리 미덕 아름다움 사랑 영혼 ……   

이들에 대하여

많고, 크고, 높고, 길고, 깊은것만이 꼭 정당하고 자랑스러운 것인가?

 

대중 앞에 서서, 열 올리며 주장하는 정치인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모택동, 히틀러, 김대중 ……

수 많은 신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종교 지도자를 연상하여 보자

빌리그레함, 문선명, 조용기 ……

 

감동하는 청중이며 신도들의 시선과 열광하는 모습은

연설이나 설교하는 그들을 영광스럽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시간이며 역사가 많게흐른 후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또는 머나먼 미래를 생각한다면 ……

 

범부로서는

부모며 처자식, 부양해야만 할 가족이 많다고

부담으로서 느껴질 때도 있다.

이를 보면,

많다라는 것은 조금이라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대중이나 신도의 숫자처럼 많지는 않더라도,

한 명이라 하더라도 있다는 그 자체가 많게느껴지는 경우이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감정으로 느끼는 모든 양태들이 같은 격으로서 볼 수 있다.

자산이며 실물뿐이 아니다.

사랑, 아름다움, , 건강과 수명 ……

심지어 영원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에까지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많다고 여길 때만이, 그것은 참으로 많음일 것이다.

 

2014.11.26.()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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