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절반에서 시작된 세상

오갑록 2014. 9. 17. 14:20

드넓은 ......

■ 절반에서 시작된 세상

 

 

    이 세상 사람의 반은 여자이고, 나머지 반은 남자다. 정원세포에서 정세포로 감수분열을 통해 생산되는 남성의 정자 씨앗도 반수체인 염색체로서 새 세상을 향하게 된다. 이들은 여성의 씨앗이 갖는 반수체 염색체를 만나서 드디어 사람의 염색체 46개인 온전한 새 생명의 세포를 이루게 된다. 생과 사의 갈림길도 세상이 균형을 이루려면 새 삶을 시작하는 숫자와 떠나는 숫자가 동수인 반반의 구조가 잘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정상적인 이치이기도 하다. 태어나서 성장하는 시기의 인구와 성장기를 지나 노년기로 접어드는 인구 비가 적당한 비례를 이뤄야 하지만, 성비 불균형이며 인구 노령화가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인간 세계뿐만 아니라 동식물의 세계에서도 그 어느 한 편으로 기울게 된다면, 먹이사슬이나, 생태계는 평형 유지가 안되어 망가지게 마련이고, 그 종족은 사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서로 반반이 되어 잘 유지될 때, 그가 속한 생태계도 비교적 더 오래도록 유지될 수 있음을 간파 할 수 있다.

 

물질세계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감정이며 정신세계에서도 서로 상치되는 감정의 골이 반반으로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종종 느끼곤 한다. 심지어 종교집단마다 주장하는 영적 사후세계에서도 그러한 양분 구도의 이론은 불가피할 것은 아닐까? 지향하는 천당과 극락 등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라는 표현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선악의 양분 구도는 결국 반반으로 나뉘어야 하는 것이 물질세계에서의 이치와 유사성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하여 본다. 물론, 주장하는 바는 종교마다 다르고, 지역. 시대. 사회마다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종횡비 0.996647, 타원율 0.003353의 온전한 구형이다. 둥근 지구에서는 날마다 교차하는 밤과 낮의 길이도 거의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뉜다. 자전축이 기울어 진 만큼 지역마다 편차는 크지만, 전체 평균을 본다면 그렇다. 고봉준령과 심해해협이 어우러진 지구이지만, 종횡비와 타원율이 거의 완벽한 구()를 이루듯, 우리가 갖는 선악의 기준 까지도 어느 사회,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반반으로 나뉠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어디 선악만 그러할까? 조화가 요구되는 세상만사가 모두 다 그러하지는 않을까?

 

흑백(黑白)의 조화, 명암(明暗)의 조화, 과부족(過不足)의 조화, ……

 

장단(長短)의 조화, 고저(高低)의 조화, 다소(多少)의 조화, 대소(大小)의 조화, 상하(上下)의 조화,

표리(表裏)의 조화, 전후(前後)의 조화, 개폐(開閉)의 조화, 출입(出入)의 조화, 두미(頭尾)의 조화,

음양(陰陽)의 조화, 요철(凹凸)의 조화, 남녀(男女)의 조화, 천지(天地)의 조화, 산하(山河)의 조화,

 

비락(飛落)의 조화, 진퇴(進退)의 조화, 승패(勝敗)의 조화, 미추(美醜)의 조화, 빈부(富)의 조화,

정동(靜動)의 조화, 선부(鮮腐)의 조화, 허실(虛實)의 조화, 유무(有無)의 조화, 냉열(冷熱)조화,

우열(優劣)의 조화, 완급(緩急)의 조화, 조밀(粗密)의 조화, 예둔(銳鈍)의 조화, 곡직(曲直)의 조화,

 

여야(與野)의 조화, 노소(老少)의 조화, 강유(剛柔)의 조화, 원근(遠近)의 조화, 강약(强弱)의 조화,

선악(善惡)의 조화, 희로(喜怒)의 조화, 애락(哀樂)의 조화, 애증(愛憎)의 조화, ......

                                                                                               (블로그 글 중에서)

평화가 이어지는 극히 정상상태의 세상일지라도,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행운과 불운 따위도 반반이 서로 교차되며 반반이 어우러지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의 하루에서던, 소년 청년 중.장년 노년으로 구분 되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이던, 또는 임종을 염두에 둔 시점에서 보는 한 인생의 평가이던 간에 다름은 없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 감정의 특성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인간 감정의 세계에서도 물질세계에서처럼 상반되는 반반의 조건들이 절반씩 나뉘며 우리의 일상을 지배한다고 여겨진다.

 

우리의 감정은 만족(滿足)과 부족(不足) 사이에서 항상 방황하게 된다. 만족의 절반만 인정하게 되고, 부족의 절반만 인정하게 되는 것이 어쩌면 인간 감정이 갖는 순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의 한 없어 보이는 욕심, 욕망의 원천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명예, 수명, 건강, , 사랑 …… 어느 것 하나 예외가 될 것이 없다. 그렇기에 가진 자가 오히려 더 갖고 싶어하고, 먹어 본 자가 더 먹고 싶어 하고, 백세 장수 노인이 자기 건강 챙기기에 더 열중하는 것은 아닐까? 역으로 아무리 부족해도 절반만 인정하는 면면을 주변의 삶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느낄 수 있게 된다. 불행과 절망 앞에서도 의외로 의연하고 넉넉해 보이는 경우는 얼마던지 살필 수 있다. 무식과 가난으로 모자라고 부족해 보이는 경우는 물론, 아픔, 파멸, 단명 앞에서까지도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수긍하려는 경우들이 그러하다.

 

더하고픈 재물과 명예, 한 없는 사랑, 끝없는 질투 …… 우리가 갈구하는 모든 것들이 반반의 원리에 의한 순리임을 인정하고, 자신 스스로는 이를 억제하며 다스리고, 타인에 대하여는 용서와 화해를 하려는 마음 정서가 지혜로운 것은 아닐까? 그 어떤 상반됨도 반반이 서로 균형을 이루며 어울릴 수 있을 때, 세상은 더 아름답고, 마음과 정신세계도 더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부르는 주체가 그 어느 쪽의 한 편에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꾸리는 자연스런 이치에 속하는 것이라고 인정 할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희망과 만족, 사랑의 긍정하는 마음도, 좌절과 부족, 증오의 부정하는 마음도 과하지 않게 서로 조절할 줄 아는 마음자세가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선악이며 희로애락이 그러하듯, 빈부, 다소(多少), 대소(大小), 미추(美醜), 승패의 세계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아무리 없어도 나는 결코 가난하지 않으며, 내가 평균 보다 일찍 죽는다고 해서 단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의 주체는 항상 그 반반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세계의 한 구성 요소일 뿐이다.

 

세상은 균등하다, 둥글다. 그리고 평평하다. 여기서 균등이란 서로 상반된 반반의 것들이 어우러진 조화로운 것들이기도 하다. 반은 서로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진다. 대조, 상반, 반대는 조화와 상생으로 어우러진다. 흑백이나 명암의 조화에서만 그러하겠는가? 우주론자 들의 추론을 빌리자면, 일반적으로 같은 모양 등방형 이라고 하는 우주원리를 만족하는 우주 형태에서는 3 가지 우주 모양이 상정된다. 공간 곡율이 0인 평탄한 우주, 곡율이 정()인 닫힌 우주, 그리고 곡율이 부()인 열린 우주의 세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우주의 공간 곡율이 어떤 형태이건 간에 현재는 평형을 향해 팽창 중인 우주임은 과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인 듯 하다. 팽창은 다른 말로 조화를 향하여 가는 중이란 의미이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한 개의 절반이, 또 다른 한 개의 절반을 향하여 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우주의 의미를 반수체 염색체를 갖는 정자 씨앗의 행로와 견주어 생각 할 수도 있다. 생명체 시작의 작은 순리 속에서 우주가 진행하는 진리를 추론해 봄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듯하다.

 

2014.9.17.()

오갑록

'◆ 관심과 의문......眞 > . 한 때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별 것도 아닌데 .....  (0) 2015.01.16
많음에 대한 잔상  (0) 2014.11.27
공연음란죄  (0) 2014.08.29
죽음 ; 행복한 삶의 마지막 관문  (0) 2014.07.24
남진 선생님  (0) 2014.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