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허튼짓

오갑록 2014. 6. 29. 16:04

참과 진실 ......

■ 허튼 짓

 

우리의 삶을 굳이 행태 별로 구분한다면, 먹고 마시고 일하다 놀며, 누고 싸는 배설 행위와 함께 쉬다가 잠들곤 하는 것들이다. 이 과정에서 소리나 말도 하게 되고, 짓거리니 수작이라고 불리는 갖가지의 행동도 뒤 따르게 된다. 그러한 짓들을 하는 가운데 희로애락의 감정이 끼어들곤 하는데 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싫어함(), 바람() 따위의 느낌이 될 것이다.

 

때로는 희망과 욕망이라는 바램만을 쫓다 보면 그러한 감정이 크고 작게 왜곡된다거나 아예 잊혀진 채로 흘러 가기도 하고, 때로는 사소한 일이 태산처럼 커다란 중압감으로 우리 앞을 갑자기 가로막기도 한다.

 

한정된 수명이라는 인간운명의 관점에서만 생각한다면, 우리 삶의 질을 더 높이고, 더 가치 있게 하며 살아가야 된다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과연 무엇이 올바르며 가치 있는 일인가? 에는 이내 의문이 뒤따르게 된다. 진리나 참이란 어느 한 곳으로 집중 된 것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분산된, 제 생각하기 나름인 것은 아닌지 하는 착각에 빠져들기까지도 한다.

 

인간의 생각 속에만 진리니 참이 묻어 있다면, 개나 소의 생각 속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고매하고 덕목 넘치며 우아함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시궁창과 같은 하류의 삶 속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그것일까? 과거나 미래의 먼 곳에서만 반짝거리는 신기루 같은 몽상을 두고 그리 말하는 것일까?  그렇지만, 진리와 참은 지금, 이 순간, 자신 곁에 머무르는 것이며, 나와 너, 개나 소에게까지도 똑 같이 작동한다는 것을, 그 어느 누가 쉽사리 부정할 수 있겠는가?

 

 “쓸데없이 함부로 하는 짓”을 허튼 짓이라고 한다. 허튼소리며 허튼수작(酬酌) 도 같은 맥락이 될 것이다. 그러한 허튼 짓만 안 한다면 될 법도 하여, 가치 있는 삶이란 쉬울 듯도 하지만, 지난 날을 되돌아 본다면, 그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나의 시각 나의 생각으로는 가치 있다고 여기더라도, 너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지금, 이시대, 이 지역, 우리 사회에서는 옳다고 여겨 지지만, 훗날, 다른 시대, 다른 지역의 다른 사회에서 내다본 시각으로는 그릇된 짓은 얼마던지 상정하여 볼 수 있다. 나 스스로도, 어린 시절과, 젊었던 한 때의 그릇된 행동과 생각을 나이 들어서 후회 하는 일도 얼마던지 있다.

 

허튼 짓이라고 남을 탓하기도 쉽지만, 지난날 자신의 허튼 짓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 또한 거의 없을 것이다. 참되고 진실되며 가치 있는 일만을 할 수 있는 세상!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일까? 허튼소리, 허튼수작, 허튼짓이 넘쳐나는 세상은 어둡고 소란스런 세상에 불과한 것일까?

 

초등학생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밝힌다고 허튼 짓인가? 중등학생이 여자 꽁무니 따라다니는 것이 꼭 허튼 짓인가? 때로는 공을 치고 때리거나 쫓아 다녀도 허튼짓이라고 나무라고, 남의 흉내 내고, 춤추고 노래해도 허튼짓 한다던 때가 있었다. 노리개며 물건을 만들고 다듬고 궁리하는 것을 하찮게 여기고 허튼 짓이라고 멸시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즈음은 어떤가? 그러한 허튼짓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예술과 문화, 예체능 분야에서 탤런트라는 미명의 수식어가 붙으며 선망하는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자기직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자기가 속한 가족과 사회, 또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행위를 허튼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가치관마저도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것에 불과 할 지도 모른다.

 

세상의 가치기준이 인간의 입장만이 아니라 때로는, 개나 소의 눈으로, 산과 들,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의 눈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마음도 우리에게는 소중하다고 여겨진다. 나와 나의 가족, 내 직장 내 고향, 나의 사회, 내 조국만을 위한 판단과 가치 기준만으로 읽어 낸 허튼짓은 모두가 진리와 참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후회할 날이 올 수도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만이 꼭 참과 진리는 아니다. 그 목적이 참되고 진실한 것이 우선 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지향하는 목적이 참되고 진실된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무병, 장수, 축재, 출세, 성공, 득도 …… 이러한 목적들이 과연 참된 것들일까?

 

아프지 않는다는 것, 노인 소리 들을 때까지 장수 한다는 것, 큰 재물을 획득 한다는 것, 학문과, 예술과, 체능의 어느 한 분야에서 이룩한 성공, 철학적 신학적 진리의 탐구가 이룬 달성이 …… 우리 인간 삶에서 참되고 진리에 더 가깝다는 것을 쉽사리 말할 수 있는가? 

 

자신의 신앙을 진리라고 굳게 믿는 한 신도를 바라보는 이교도의 시선은 어떠할지를 상상해 보자. 이교도의 눈에 비친 타 종교의 신앙활동은 항상 눈에 설고 허튼짓처럼 여겨질 것이다. 절이나 기도, 노래나 주문 따위의 행위며, 종교마다 특이한 복장과 신물들, 그리고 도장의 건축물 양식까지도 수긍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질없고 허튼짓이라는 생각에 쉽사리 마음이 닿거나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의 여부에 따라, 그 종교활동이 허튼짓인지 아닌지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병치레로 단명하면서도, 헐벗고 굶주림 속에서도, 못나고 못 배워서 덕망이 없으면서도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선하고 충실하며 묵묵하게, 자신에게 다가온 운명을 잘 다듬어 온 이들 …… 우리 사회에서 아름다운 삶의 흔적을 남긴 이들도 눈 여겨 본다면 쉽사리 찾을 수 있다. 제 아무리 못난 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내세울만한 자랑거리 한 가지쯤은 있는 것처럼, 세상은 어느 한 구석인가에는 자기를 필요로 하고 쓸모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지향하는 목적도 가치 있고 참된 것임을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눈에 못 차기 때문에, 나의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에 무시한다거나, 하튼짓 이라고 폄하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설령 목적하는 바가 선하고 참된 진리라고 해도 그를 따르는 행위가 모두 옳다고 봐서도 안될 것이다.

 

 "사랑"은 참되고 선한 자연의 섭리, 진리라고 하자. 자연의 생물은 종족의 탄생과 그 번식을 사랑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암수의 교미나, 새끼 양육의 근간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식이 자연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인간사회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은 참되고 진실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도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범위로 한정하여 인식하게 된다. 남의 가정과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사랑은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경계하게 된다. 그러한 행위는 허튼짓이 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통념인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노인이 밝히는 섹스도 다를 바 없다. 허튼 짓이라 해도 틀림은 없다. 생식기를 넘긴 나이에 종족 번식이라는 자연섭리의 기본목적에서 벗어 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들의 사랑까지도 너그러이 보려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너그러운 것일까? 노인들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것일까?

 

먹고 자랑할 만한 커다란 부를 축적한 재벌회사에서, 중소상공인들을 못살게 등치는 사례를 뉴스거리로 자주 접하게 된다. 물론 허튼짓이라는 판단에 뉴스거리가 되는 것이겠지만, 치부의 과정에서도 참된 것, 선한 것, 진리라는 명제는 중요하고 세상에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생산적이지 못하여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지 못하며, 가족의 생활에도 누가되는 노인기의 삶과 생활도 어떤 의미로는 허튼짓이라고 볼 수도 있다. 먹고 입고 쓰는 일, 심지어 성생활 까지도 그것은 생산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를 비약하여 생각한다면 쓰고도 남을 만큼 벌어서 해외의 재산도피처에 재산을 은닉하는 재벌가가 열심으로 벌어들이는 행위 자체도 허튼짓의 범주에 넣어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번영과 공영공생 이라는 목적을 벗어나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이 때 열심으로 벌어들이는 행태는 아름답다기 보다는 차라리 추하다고 폄하하고 싶어지는 이유이다.  

 

스스로의 비생산적이고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지금 같은 생각들 또한, 

"허튼 짓" 이리라는 부끄러움이 없는 바도 아니다.

 

2014.6.29.()

오갑록

 

. 허튼소리, 허튼짓

absurdity, balderdash, bosh, bullshit, buncombe, falderal, flapdoodle, gammon, irresponsible utterance, rot

silly talk, idle talk, nonsense, a foolish act.

 

 

 

□  허튼짓도 ……

                                                                                                                        정승균 “희망칼럼” 중에서

……

 

이 시대가 낳은 걸출한 미래학자 자크 아탈리는 2030년 이후가 되면 1년에 5000만 명의 사람이 이런저런 연유로 국가 간 이동을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국적이 분명하지 않은 다문화 사회가 보편화되는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정체성 자체가 아주 모호해질 것이다.

 

자생력을 가진 개인만이 살아남고 번영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은 다양한 경험과 함께 위기관리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잘 알려진 길만이 최선의 길이 아닌 시대다. 지금 하는 딴짓이 나중에 엉뚱하게도 무척 잘한 짓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심해야 한다. 딴 데로 가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내공을 기를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 완전히 에너지를 탕진하고 기력을 소진하게 하는 길은 경계해야 한다. 내면의 열정이 이끈다면 그 길에서 방황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유혹이 손짓하는 길이라면 이를 악물고 뿌리쳐라. 젊음은 어떤 길이든 망설임 없이 나아가기에 최적의 시기이지만 가도 좋은 길이 있고 가서는 안 될 길이 있음을 꼭 새겨두라.

 

 

 

□   내림굿, 허튼굿

                                                                                                                                                        “한겨레 수행” 중에서

통과의례는 어떤 개인이 새로운 지위나 신분상태를 통과할 때 행하는 의식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프랑스 인류학자 방주네프(Van Gennep A)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로 추이의례(推移儀禮)라고도 한다. 무당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로는 내림굿이란 것이 있다. ……

그러나 예전엔 이 내림굿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하 세품’이라고 하여 길솟음, 천하솟음, 재솟음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다른 말로 허튼굿, 내림굿, 솟을굿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여 세 번을 하였다고 한다. ……

 

"부도지" 에 보면 마고삼신이 살던 성을 마고대성, 실달성, 허튼성이라고 하였으며 또 이 성들은 8()의 음()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천하 세 품의 허튼굿, 내림굿, 솟을굿이라는 명칭도 바로 마고대성, 실달성, 허튼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내림굿이란 인간들에게 천부의 가르침을 깨우쳐주어 다시 지상의 낙원인 마고대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해 주는 사제를 탄생시키는 의식으로 아주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마고대성은 하늘에서 내려 준 인간본연의 마음가짐인 선청후(善淸厚) 삼진을 보존하여 희노애락을 느끼지 못하고 아주 평온하게 살던 지상의 낙원을 이야기 한다.

 

솟을굿은 진정한 무당으로 거듭 태어나고 또한 무당 본연의 모습인 천부의 마음으로 많은 인간들을 가르쳐 삼망인 악탁박(惡濁薄)에 물든 인간들이 참모습을 찾을 수 있도록 인도하라는 임무를 무당에게 부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

 

허튼굿은 무당 될 제자의 몸에 붙어 있는 온갖 잡귀, 잡신들과,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하여 자손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아우성치는 조상들을 모두 벗겨내고 쫓아내는 굿이다. 이런 모습이 허튼성에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허튼성은 실달성에서 살던 인간들이 마고본성에서 쫓겨난 이유와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더욱더 미혹에 빠져,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남을 해하고 자신의 이익만 취하는 등 허튼 짓을 많이 하는 지금의 세상으로 무당들이 바로 잡아야 할 세상이다. ……

 

그리고 내림굿 날이 잡혀 내림굿을 할 때는 아흔아홉 집에 건립을 다녔다고 한다. 이 걸립을 세 건립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을 다른 말로 세()나린 건립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혀바닥을 세바닥이라고 부르듯 혀를 세로 불렀기 때문이다. 또는 쇠납(호적)을 앞세워 건립을 다녔다고 하여 쇠건립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세’라는 말이 곡해되어 쇠걸립으로 전해져 내림굿하기 전에 놋쇠 등을 건립하여 신기물을 만든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내림굿을 할 때 건립을 다니는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다.

 

 . 구경 와서 자신의 영검함을 보고 널리 입소문 내어 달라는 일종의 광고의 성격

 

  . 무당으로 가질 수 있는 부끄러움과 창피함 등 자격지심과 스스로 위축될 수 있는 마음을

    버리게 하고, 무당이라는 사화적 편견과 멸시를 이겨내고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여야 할 무당으로서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잘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자신감을 심어주는 과정

 

  . , 보리, 등 곡식과 집안에서 사용치 않는 촛대, 놋그릇, 북 그것도 없으면 돈이라도 조금 건네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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