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 ......
■ 또 다른 우상(偶像)
인간의 턱없는 편견과 착각에 대하여 프랜시스 베이컨은 네 가지의 우상을 예로 든 바 있다. 나는 시간의 인식에 대한 우리들의 착각 한 가지를 그 위에 더하고 싶었다.
인간은 삶의 언저리에서 자기의 갈 길과 목표가 “지금 또는 여기”에서 가 아닌, “미래 또는 저 곳”에 두고 찾거나 향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사고(思考)라고 여긴다. 자기계발을 통한 성공과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 가운데에는 자칫 모순과 함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여 본 적은 없는가? 진정한 삶의 가치가 성공과 발전 위에서만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믿어 온 것은 아닌가?
자기 손 아귀에 쥔 것은 하찮게 여기기 일쑤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본 물에 비친 더 큰 고기를 물려다 자기가 물고 있던 고기를 물에 빠뜨려 버린 욕심 많은 개의 이솝우화 한 단면과 같기도 하다. 재물도, 사랑도, 명예나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도 인간의 만족감이나 행복감은 자칫 그러한 우상(偶像)을 범하기 쉽다.
오랜 세월을 보내며 세상이치를 그만큼 잘 아는 노인도 마찬가지다. 몸 져 자리에 눕지 않는 한 건강이 닿는 대로 더 재미있는 곳을 찾아 나서곤 한다. 편안하지만 지금의 거처는 항상 식상하다. 많은 사람들은 해가 바뀌는 새해에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쏜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내일에 살고, 희망을 걸고 산다. 쓸모없고 폐인 된 이를 두고 빗대어 말하기를 희망이 없고 내일이 없는 자라고까지 말한다.
쾌유의 믿음이 있기에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디며 보내는 병원 입원실의 중환자들이 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의 노고를 기쁨으로 삼아 살아간다. 합격, 성공, 승리, 영광을 기리며 내일을 내다본다. 올림픽 메달을 겨냥하여 오늘 고된 훈련을 하는 것이며, 병사들은 내일을 대비한 전투를 대비하여 훈련으로 오늘을 담금질하기도 한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나”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너”를 바라보며 사는 모습과도 흡사하다. “나” 자신을 살피려면 눈을 감고도 보지만, “너”를 보려면 눈을 떠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 삶의 본성일 수도 있다. 그 때 뜬 눈은 크고 많고 나에게 유리하여 좋다고 여기는 곳으로 향하는 것이 습성이기도 하다.
자신의 현상에 만족할 줄 모르는 감정 구조야 말로 물욕, 정욕, 명예욕과 같은 모든 욕심의 발단일 수 있다. 세속적인 발전과 성공의 근원은 그러한 욕심과 바람에서 싹 트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자기 만족은 우리 삶의 질, 마음을 더 풍요롭게 장식하여 줄 것임이 분명하다. 금욕과 억제라는 인간의 이성이 작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쉽게 용서하며, 예외라는 단서달기를 주저하지 않곤 한다. 그렇기에 타자를 향한 자신의 맹목적 선망은 인간의 턱없는 착각임을 자각하지 못하곤 한다.
지금 나의 존재, 물체, 정신, 감정으로 구분되는 존재의 모든 것은 지금 현재의 전부이고 나로서는 그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 수는 없으며 밖을 향한 타자의 세상은 허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잊은 채 살아가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시간과 공간의 광활함을 망각하며 욕심을 부리고 있는 나 자신은 특이하리만치 이상한 존재라고 느껴지지 아니한가?
빅뱅으로부터 터진 우주 나이 환산은 137억년, 그 우주의 크기는 465억 광년, 지금도 빛의 3.5배 속도로 커지고 있다고 하는 막연한 우주 가설들은 차제 하고서라도, 내가 딛고 살아가는 이 땅 위의 자연현상, 돌과 흙, 풀과 나무, 산하와 하늘, 바람과 물, 빛과 공기, 달과 별, 모든 것이 얼마나 경이로우며 아름답고 무궁한지를 망각하며, 하잘 것 없고 작은 욕심의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문득 발견하곤 한다. 백년 남짓한 수명과, 100Kg 남짓한 신체의 유지를 위해 몸부림치다시피 열심으로 살아가는 행태가 꿀벌이며 개미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욕심부리며 모은 재물이, 축적한 영광이, 다듬어 온 신체가, 키워 온 자손이, 돌봐 온 혈육과 가족과 조직과 나라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며, 꿀벌과 개미와 다를 바는 무엇이겠는가? 다르다고 말한다면, 이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을 잊은 채 헤아린 결과들일 것이다.
“지금, 나, 이 곳”은 나로서는 실체이고 전부이며 “과거와 미래, 너, 그리고 저 곳”은 그림자이고 허상이며, 465억 광년을 넘어선다는 우주의 끝 저 편 언저리와 다름없는 우상(偶像, Idol) 인 것이다. 그것을 희망하는 것은 인간의 턱없는 편견과 착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이성이 작동되어 짓눌린 욕망의 굴레를 헤집고 머리 내밀고 새어 나온 욕망의 잔재들, 그들이 그려놓은 허상을 쫓는 착시 현상이 우리가 희망하는 내일의 궁극적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나의 집 편안한 자리는 잊은 채, 사랑방과 이웃 찾아 나서지 못해 매일 걱정하는 거동 불편한 노인분이며, 내일 올 지 모를 죽음의 두려움에 캄캄한 지금을 떨며 보내는 임종 앞둔 노인을 생각하여 보자. 배 부르고 따스하여 편안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았어도 마음은 멀리 떨어진 이상향을 찾아 저 곳을 향한다면, 현실은 생이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항상 부족하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주먹에 몇 푼 쥐어진 여유 돈을 갖고 투전장으로 달려가는 끼 있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탄광촌이던 태백시의 요란함이나, 현모양처 두고서도 바람나는 남정네의 끼 있는 습성이나, 온갖 핑계 구실을 찾아가며 노략질 나서려는 침략 민족의 습성도 새겨 볼 수 있다. 모두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고 내일과 더 큰 욕망을 채우려는 본성을 억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대다수 종교의 원리도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화려하고 달콤한 미래에의 약속은 신도들의 욕망을 채우는데 초점이 맞춰지고, 현실의 불안, 불만 또는 죄의식을 벗어날 수 있는 그럴듯한 명분들을 다양하게 마련해 주고 있다. 이는 현실적인 사회 통념적 가치관에 기준 할 뿐, 자연과 우주 질서라는 측면에서의 진리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진대, 이것이 곧 진리라는 주장은 어디나 넘쳐 나고는 한다. 그들은 자기중심적 우상(偶像)에 얼비친 허황된 진리임을 결코 의심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진리라는 허울을 두른 신앙은 말 그대로 “믿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순간 종교라는 유리거울은 산산조각 날것이다. 형태 없이 세갈박살 나는 것이다.
오늘의 잘못을 회개하고, 영생을 구원 받고자, 고(苦)의 윤회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오늘의 가치를 어렵고 잘못된 것인 양, 아니면 오늘의 가치를 단지 후 일을 위한 디딤돌이나 희생양 정도로 인식하려는 듯한 일부의 종교 양식들도, 그다지 색다르지 아니한 우상(偶像)의 조각처럼 느껴지곤 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믿음 없는 자, 믿지 못하는 자의 편견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현실 만족이란 대체 무엇일까?
겨울철 실내를 장식하며 지금 나의 눈 앞에 벤자민 화분이 한 그루 서 있다. 초록색 잎새에서 아름다움을 읽는 것은 열매가 달린다거나 목재가 유용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녹색의 수려함을 읽고, 각각의 잎새가 이루고 있는 유연한 곡선미와 나무가 이루고 있는 수형 자체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봄이면 신록이, 겨울의 흰 눈 덮인 산하가, 여름이면 시원하고 맑은 계곡의 물줄기가, 가을이면 오곡이 풍성한 들녘과 붉게 물드는 단풍이 있는 그대로, 내가 보는 지금 아름다운 것이다. 재잘대는 산새 소리, 깃털 매무새를 부지런히 다듬는 들새들의 자태도 무엇 못지않게 아름답다.
비단, 자연의 풍물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어린아기에 눈 높이를 맞춰가며 히죽대고 있던 흰머리 듬성듬성한 초로의 자신 모습이 아름답고, 단순한 생각이 아름답다. 티 없이 맑고 청순한 젊음의 끼가 넘치는 나름대로 아릿다움을 뽐내는 여성들의 웃음 섞인 재잘거리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며, 먼 발치에서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냥 있는 그대로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내일을 기대하는 음흉한 춘정이 있기에 그러한 것은 아니다. 정신의 세계, 마음의 세계에서도 이와 유사하다. 느낌이 아름답기에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움에 절대성이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기대하는 것 또한 착각에 의한 우상(偶像)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인간의 눈에 아름답다고 해서 개나 소나 돼지의 눈에도 아름다운 것이란 없다는 이야기다.
따습고 배부르며 편안한 “지금”은 누구나 경험한다. 단지 그 순간, 그 때를 쉽게 잊었을 뿐이다. 흘러간 과거 속에 쉽게 내 팽개쳐 버리곤 한다. 만족과 기쁨의 조각들을 쓰레기더미로 쉽게 버리는 격이다. 송이송이 눈 꽃송이를 모아서 들을 덮고 산을 덮어 하얀 세상을 그려 볼 생각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 눈 내리는 나라라면, 순백의 하얀 세상에 누구나 한 번쯤 서 본다. 시간 가고 철 바뀌면 녹아버릴 운명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기억 속에 간직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로 본다면 지금 순간의 만족이란 눈꽃송이와도 흡사하다. 녹으면 사라질 눈 덮인 하얀 세상과도 같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시간과 공간, 닥쳐올 시간과 공간은 나로서는 허상이다. 관념과 상상의 시간과 공간이다. 우주의 나이와 공간을 두고서, 내가 지금 마음 쓰며 걱정하고 애닯아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희망이니 목표도 그 가운데 어느 한 점에 깃발 꽂힌 허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현재의 아름다움만이 사실이고 의미 있다고 주장하여 보지만, 눈 녹듯 사라질 운명이고, 미래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면, 무엇이 실체이고 사실이고 진실일까? 진리란 무엇이라고 말해야 옳은 것일까? 세상의 진리나 인생 따위가 공허하고 무의미함을 이르는 허무(虛無)로 귀착함이 옳은가? 속박이나 번뇌 따위의 굴레에서 벗어나 편안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해탈(解脫)을 떠 올리게 된다. 어느 전문가의 설명을 들춰보자.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이 해탈의 절대적인 관문임을 알 수 있는 명확한 구절이다.
사실은 해탈의 문은 딱 하나다. 바로 空이다. 무상이나 무원은 공의 다른 별명이자 특징이다.
공하므로 상이 없어 무상이요, 공하므로 일체의 마음 작용이 일어나지 않아 무원이다.
2014.1.20. (월)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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