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
■ 삶에 관하여
(그 이유, 목적 그리고 목표)
□ 너와 함께
서로 비슷하여 어깨를 견주며 함께 했던 “너”와, 나의 삶에 관하여 돌아본다.
우리들 삶의 길목에서 그 환경, 즉, 처지나 크기, 능력이며 성격 등에서 서로 간의 높낮이가 다른 경우라면, 주고 받을 정이며 감정들이 적겠지만, 서로 비슷한 처지일 경우는 보다 더 남다를 수 있을 것이다. 형제 간에도 형은 바로 동생이 더 얄밉고, 국가 간에는 영국과 프랑스, 한.중.일처럼 인접 국가간에 앙금이 더 심한 경우도 그렇다. 스포츠 세계에서도 같은 종목, 경쟁 팀이나 경쟁 선수 간에 경쟁심리가 더할 것이다. 종교 분쟁의 역사를 보더라도 이교도간 분쟁 만큼이나 같은 종교 내의 종파간 알력도 심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같은 모습을 한 인간에의 감정이 다른 동물과는 차별화 되고, 같은 특성을 지닌 동종의 인종들 간에 더 관심을 갖게 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 들 간에 갖는 감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난 시대의 역사 속 사람이나, 미래의 시대에 올 후손들 보다는 사뭇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재능이, 재력이, 성격이, 직종이, 직위가, 학력이, 학교가, 고향이, 국가가, 종교가, 시대가 …… 서로 비슷하다거나, 어울린다고 여겨질 때, 보다 더 서로의 마음을 열게도 되고, 자기와 상대 비교의 대상으로 여기기 쉬워지고, 감정의 골도 그만큼 더 깊어질 수 있다.
. 함께했던 “너”를 …… ,
나는 과연 얼마나 사랑했었을까? 그들이 나보다 낮아졌다거나, 나약해졌다거나, 작아졌다고, 행여나 그들을 얕보거나 홀대하거나 버리거나 방치하지는 않았던 것일까?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했던 그들, 나의 동료, 나의 경쟁자, 내가 선망하던 자, 내 삶의 여정에서 좋던 싫던 간에 정과 감정을 나누던 자들, 그들은 “나”에게 도대체 누구였던가? 우연이나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지며, 망각의 순간까지 “나”와 함께했던 “너”, 그 중에서 특히, 어깨를 견주며 비슷하여, 경쟁이나 선망, 감사와 기쁨, 미움, 증오, 혐오, 근심과 공포의 원인을 제공했던, 나와는 가까웠던 “너”를 생각해 본다.
그들의 다른 이름은 때로는 가족도 되고, 동년배, 동창, 동료, 동향, 동지라는 이름으로도 남게 된다. 더 크게 이 세상을 볼 때, 그것은 동시대인이 될 수도 있고, 동식물이며 무생물이 아닌 같은 인간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풀과 돌, 물과 바람 까지도 …… 한 없는 사랑을 품는 이들이 결코 없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함께했던 “너”와 어떻게 조우한 것인지는 “나”로서는 영원한 미지의 물음이자, 응답 없는 메아리로 남을 것만 같다. 만남과 헤어짐, 우연과 필연의 사이를 헤매는 꼴이라고 해야 할까? (블로그 글 ☞ "조우(遭遇" )
. 삶의 목적
우리는 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삶을 영위하는 것인가? 자칫 그 삶의 목적이 함께했던 “너”의 그림자를 쫓다가 그려진 허상들은 아니었을까? “너”와 비교 우위의 처지를 선망하고 그리거나, “너”를 밟고 딛어 일어서지 못하여 마음 상한 그릇된 형상은 아니었을까?
너보다 더 크고, 잘 나고, 잘 하고, 잘 살고, 오래 살기 위하여 …… 갈망, 절망, 증오, 공포라는 형형색색의 원인을 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삶의 목적인 양, 우리가 목표로 삼고 향하던 깃발은, 그 모두가 함께 했던 “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까? 헐벗음, 굶주림의 극한 체험에는 동물적 삶의 깃대 꽂힌 목적지가 어딘지를 느끼고자 하는데 긍정적 의미가 있듯, 고요와 적막의 심연을 경험하고 그 깊이를 느낀다면 삶이 가야 할 깃발이 “무엇이며 어디인지” 어림할 수 있는 앎을 던져 줄 지도 모른다. 깊은 어둠의 무한에서 경험한 내 시간의 유한을 언뜻 느끼기도 하고, 기나긴 역사의 시간과 무한한 미래의 시간을 짐작하게도 될 것이다.
삶이 무엇이고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만 하며, 누구와 함께, 나의 삶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지도 어림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가치가 “너”의 그림자를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왔음도 알게 된다.
더 잘 먹고 마시며, 따스하며, 더 편리함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적도 아닐 것이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우리가 아는 한, 과거의 그 어느 때 보다 더 발전했고, 우리들은 그만큼 많은 혜택을 누리며 생활하고 있다. 덕택에 의식주 생활의 근간이 불과 수세기의 짧은 기간동안 천지개벽을 한 것이다. 더불어 발달한 의료기술로 수명 또한 선사시대 보다 서너 배는 족히 길어졌을 것이다. 인간 삶의 외형적인 질이 그리 발전했다고 하여 그 행복지수,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생활 만족도가 개선되었을까? 하는 데는 의구심이 든다.
과학과 기술, 예술과 문화는 인간이 지향하는 꿈과 목표의 깃대를 다른 색상으로 갈아 끼웠을 뿐, 그 깃대를 더 높고, 더 멀리 꽂지는 못한 것인지도 모른다. 궁극적인 삶의 목적, 본성이 크고 많이 길게 한다는 물리적 형상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 있으리라는 가정을 상정해 본다. 길고도 머나먼 대우주의 진행 과정 중의 한 찰나, 순간에서 “나”라는 명목으로 만난 한 줄기 과정에 불과할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의 주인인 “나”로서는 나와 함께 하던 “너”가, 그리고 잠시 이웃 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의미 있고 소중할 뿐, 그 누구의 삶의 목적이나 목표의 대상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잘 먹어서 무게 불리는 게 목표일리 없고, 따스하고 고운 입을 거리가 목표일리 없으며, 수십 수백명의 자손을 더 불리는 데에 목표일리 없으며, 백 세까지 무병장수가 목표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크던 작던, 많던 적던, 높던 낮던, 길던 짧던 ……, 삶의 과정 그 자체에서 목적이며 목표를 찾아내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을 품어본다.
순간을 보내더라도 삶은 삶일 뿐, 불과 잠시 생명을 연장하는 세포들의 명이나, 미생물, 하루살이의 생명도 “나”와 같이 이 세상의 과정에서 “나”가 잠시 함께 한 동시대의 한 요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나”를 에워 싼 모든 현상이, 가족 벗 동료만큼이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가 언제 그들을 눈길 주고, 의미를 두며 바라볼 수 있었는가? 모래 한 알, 흙 한 줌, 풀 한 포기, 살랑이는 바람결, 한 줄기 햇살, 일렁대는 냇가 실 물결, 멀리 흘러 드는 새소리, 길가를 스쳐 지나는 여인네의 인기척 ……, 이 모두가 “나”와 같은 시간을 흐르던 대 우주의 “과정” 중 한 부분이라는 것을 ……
. 현재를 살고 있는 “나”이지만,
과거를 씹으며, 미래를 위해서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지나간 영광이나, 그리움과 회상 원망, 때로는 복수나 앙갚음의 날선 마음을 품기도 한다. 감사와 은혜의 고마움을 자주 갖지 못하여 자책하기 일쑤다. 미래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영혼이나 영원을 지향하는 큰 뜻을 나도 모르는 사이 저버린 지 오래고, 자손이나 후손에 대한 열망도 남들 같지 않은 것만 같다.
나에게 종교나 믿음의 세계는 어떨까? 유불선이나, 기독교의 어렴풋한 한계만 곁눈질 한 채, 그들 믿음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자에게 미래가 주는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끝없는 어둠과 공허로 이어질 뿐일 것이다. 현재를 살고 있다지만 , 과연 나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먹고 마시며 배설과 배출에서 느끼는 감정을 느끼거나 즐기고, 감각에서 오는 쾌락과 안온, 만족을 쫓아 두리번거리는 시간들이 대부분이다. 이 순간에 닿은 마음을 따라가는 수동태의 육체가 느끼는 것들이 현재라고 여기는 짧은 순간들일 것이다.
진리의 깃발, 삶의 바른 목표가 어느 구석인가 반드시 있으리라고 여기지는 않지만, 지금 이 세상의 구심체인 “나”의 입장에서, “나”의 존재와 “현재”야말로 현실이고, 사실이고, 진실이며 “나”의 그러한 느낌과 감정 자체가 진리이자 깃발 꽂힌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태껏 목표로 여기고 지향했던 성공과 야망들이야말로, 어깨 견주어가며 함께했던 “너”의 그림자를 따르는 허상과 허망에 불과한 것임을 잊고서, 애달아 열 내던 바보 같은 짓이었음을 나는 왜 몰랐을까? 삶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할만큼 스스로의 성공과 만족을 이룬 이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득도를 했다고 우리 사회에서 따르던 고대의 성현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그 추종자들이 남긴 기록물들은 모두 사실이라고 여겨도 옳을까? 아니면 믿음에 불과한 것일까? 히틀러, 스탈린 같은 독재자나 절대군주 제왕의 겉 모습처럼 허상의 깃발을 향해 우아한 외모로 치장된 것들은 아니었을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추종하는 자들을 보며, 그 힘은 과연 진실이었기에 가능한 것들이었을까? 하는 의심어린 생각까지 머물게 한다.
무한한 시간, 무한한 공간 속에는 그 답도 희석되고 묽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진리를 쫓다 보면 결국 무(無)로 귀착되는 것이 아닐까?
. 이 순간만큼은 “나”가 이 세상의 주인공
“나”가 생각하는 이 세상은 “나”가 그려 놓은 세상이다. 나의 눈으로 보고, 나의 귀로 듣고, “나”가 느끼고, 먹고 마시고 배설하며 굴리고 있는 세상이다. “나”로서는 왜? 언제까지?가 그리 중요한 것이 못 된다. “나”의 존재가 지극히 한정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혼과 영원이 있음을 믿으며, 깃대 꽂을 욕심 버리지 못한 경우라고 한다면 다른 의견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자신을 버리고 타자를 인정하며, 뭇 삶의 흐름을 순리에 맡기며, 공이 구르는 것, 세상이 흐르는 것, 만물이 돌고 도는 이치를 순응하는 자세야말로 올바른 것이리라. “나”를 인정하고 아끼며 사랑하는 태도라고 여긴다. 지구가 돌고 달과 별과 해가 도는 것 만큼만 인정해도 된다.
비록 그것이 “나”가 보고 느끼는 것 만큼일지라도, 더 크고, 더 높고, 더 먼 곳의 것은 아름다운 상상화를 그릴 “나”의 도화지 몫이려니 여기기로 하자. “나”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사회, 우리 지적능력으로 상상할 수 있는 만큼의 그림으로서 만족하자. 그러한 세상의 주인이 되어 더 욕심껏 주무를 허욕은 자신을 더 메마르게 할뿐일 것이다.
. 남의 탓
누구를 두고 미쳤다고 탓할 것인가? 생각과 행동,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기에 “나”와 다름을 말하는 것일 뿐, 진실과 진리에서 어긋남이 있음은 너와 나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거짓이라고, 미쳤다고 남을 탓하는 것이 부끄러운 이유인 것이다.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 또는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정상적인 경우보다 지나치게 심하거나 비정상적으로 열중하는 경우와, 상식에 지나치게 벗어난 행동을 하는 것을 두고 미쳤다고 말한다. 정상상태를 벗어난 경우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그 정상 상태란 현재의 보통 사람들 평균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뇌신경의 손상이나 마비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욕심이 지나쳐서 그런 욕설을 듣기도 하고, 순간의 격정을 참지 못하여 하는 행동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유아기 어린나이의 모자라는 판단력은 이해하며 오히려 귀여움으로 받아들이지만, 노년기의 뇌세포 자연괴사로 인한 경우는 자연의 섭리로서 인식되기 보다는 병으로 대하는 경우가 일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 재물, 성공, 명예, 건강, 장수 따위를 향한 야망이나 욕망에 얽매인 과도한 집착도, 정상을 벗어나면 병적인 현상으로 분류된다. 증오, 격분, 미움이 극에 달해도 발광을 한다고 말한다.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참을성 부족한 감정의 상태를 두고도 그리 말한다.
남의 탓이 아니라, “나”의 주관이 설정해 둔 정상상태를 벗어난 결과일 뿐, 비정상이라고 여기는 상대방으로서는 자기가 정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입장일 것이다. 어디 인간관계만이 그러할까? 인간과 동물, 동물과 생물, 생물과 무생물 …… 이 세상 모든 것, 우주 자체가 정상적인 것이라고 본다면, “나”가 어찌 남의 탓을 할 수 있고, “너”의 비정상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순간, 우리는 정상 상태인 이 세상에서, 동시대성의 한 구성원이자 동료로서 함께 하고 있다. 누구의 삶이던 제각각 역할을 하는 것이며, 우주 가운데 한 구성 요소로서 충실이라는 명분을 앞세우며 잠시 존재한다. 서로 누구에게 잘못이라고 탓 할 것도 없고, 굳이 누가 비정상이라고 탓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 마음이 가고 관심 머무는 곳에 최선을 다하고 거스르지 아니하고 순응하며 묵묵히 걷는 길이야말로 주어진 자기 삶의 목표와 목적에 제대로 부응하는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다.
. 흐르는 세상을 부정하지 말고, 긍정하는 자세로 보고 인식하자.
맛난 음식이 얼마 남았는지 궁금할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맛나게 즐기며 먹었었는지를 헤아려야 한다.
누군가가 어제는 망둥어 낚고 새우 잡이도 하고 소주병 따가며 먹고 마시며 잘 보냈다고 하지만, 평생 한 두 번 그러한 경험이라면 즐거움도 있었겠지만, 어설픈 어부의 고달픈 직업이거나 할일 없는 건달 모습이 연상된다.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을 했다면,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과 체력단련의 이점도 있지만, 한편으론 내려올 산을 뭐 하러 올랐느냐는 핀잔 감이 될 수도 있다.
생명을 다루는 의술은 귀하며, 누구나 그 존엄성도 인정 하지만, 썩은 이 빼가며 치석 갈이 하고, 상한 창자 도려내거나, 매일 일과가 남녀의 상한 가랑이 속 벌려가며 확인하고 고쳐야만 하는 것이 평생의 직업이라면 차라리, 고장 난 우산, 구두, 자전거 고치고, 고장 난 시계나 수리하는 직업 편이 훨씬 상큼한 듯할 때도 있다.
누구의 생업이던 간에 기쁨 보다는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다. 음악 미술 체능처럼 이름다움과 기쁨을 주는 일이 있는가 하면 남의 아픔 고통을 덜어 주는 일이 있다. 그 과정은 어느것이나 나름대로 힘든 노력들이 필요하다. 예술, 기술, 학문 뿐 아니라, 농업, 공업, 상업이나 어떤 노동에서도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옹스트롱, 미크론, 나노미터 같은 미세단위를 헤아리는 물리학, 생물학도 어려움이 있겠지만, 광년, 파섹, 기가 단위를 다루는 멀고 커다란 크기를 다루는 학문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백만 천만 억을 헤아리며 잇속을 챙기는 상인이 있는가 하면, 0.1초 단축을 목표로 수개월 수년을 피땀 흘리는 100미터 단거리 육상선수도 있을 것이다.
연노랑 형광색 찌를 응시하며 칠흑 같은 야밤 개울가 질흙 밭을 지키는 강태공이 있고, 망원경 넘어 별자리 헤아리는 천문학도도 있다. 찧고 까불며 보내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넣고 빼기만 일삼는 일도 있다. 거짓을 말하고, 거짓으로 웃고 울고, 거짓으로 사랑을 하고 뽀뽀며 침상 뒹굴기를 주저하지 않는 배우라는 직업도 관점에 따라서는 예사로운 짓은 아니다.
거짓을 행하면서도 거짓인지 모르고 하는 일이 많다. 낚시미끼 자체도 물고기 홀리려 던지는 거짓이고, 파리, 새우, 지렁이 모양을 한 플라스틱 가짜미끼 역시 가짜이자 거짓이다. 아낙의 화장한 모습도 입술 그리고 눈썹 그리고, 속눈썹 다는 정도는 애교 섞인 거짓이지만, 코 높이고, 턱뼈 깎아 내는 정도의 성형은 악의 찬 거짓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노래 춤 조각 미술 음악 같은 예술 행위도 보는 주체나 관점에 따라 좋고 그름이 달라질 수 있다. 일부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로 삼아 열심으로 하는 일들이겠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이해 못하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마치 슈바르츠코프나 마리아 칼라스, 조영남의 노래를 바라보는 개나 소의 무표정을 연상 하면 될 것이다.
“예술은 영원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어찌 쉽게 답할 수 있겠는가! 시대와 처지, 보는 주관에 따라 감흥이 극명하게 달라 질 수 있는 것이 인류가 따르고 있는 예술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아니더라도 창조, 창작, 발명이라 불리는 인문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보는 주체에 따라 유용성 위대성 따위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공을 넣고 치고 굴리는 작태에 왜 그리 들 열광하는지, TV 개그 코미디에 왜 낄낄대야 하는지, 때로는 예술 학문 과학이라는 미명으로 열광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물끄러미 바라봐지는 순간도 적지는 않다.
대상이 무엇이던 간에, 삶에 대한 평가는 항상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생각할 수 있다. 세상 일의 대다수는 같은 사안을 두고서도 평가 주체마다 서로 다른 기준으로, 선악과 호오, 희로애락을 달리하며 평가될 수 있다. 축구장에서 골인은 골을 넣고 먹은 팀이 각각 있다. 살균제 신약 개발은 인간 생명을 구할지는 몰라도, 멸균되는 세균을 생명의 한 주체라고 인식한다면 죽어야만 되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일은 무엇이던 주체에 따라 느끼는 감정의 명암이 엇갈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흐르는 세상을 부정하지 말고, 긍정하는 자세로 보고 인식하자.
□ 다시 돌아보자, 삶에 관하여 (그 이유, 목적 그리고 목표)
썩은 물 푸고, 먹고 마시며 지껄이며 보낸다. 공상 속 이야기 만들며 소설 쓰고, 긴 한숨 쉬어가며 시도 쓰며 보낸다. 뜯고 붙이고, 이것 저것 섞기도 하고, 누르고 삶아가며 연구니 발명이라는 이름 걸고 과학을 한답시고 보낸다. 어부가 고기 꾀는 곳 어디인지 고심하듯, 장사꾼과 사업가는 돈 줄 꼬이는 곳에 골몰한다. 바람둥이는 여인 꼬드기기에 열중한다. 때로는 노래하고 춤추며 뛰고 노는데 열중한다. 자기 취향에 맞추며, 자기 가치관 위에 자를 대고서 사업욕망에 눈 뜬 자는 나름의 먹거리에 눈이 휘둥그렇기 일쑤다. 농부는 뿌린 씨앗 싹 나오기를 고대하고, 논밭의 병해충이 없는지 신경 곤두서고, 알곡 낟알은 실한지, 매달린 이삭의 개수에 골똘히 한다. 내시경 검진 전문의는 창자며 위벽에 이상한 부위의 크기 색상 위치에 관심 둔다. 건강한 성인은 잘난 이성의 시선이며 각선미에 눈길 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고, 예술을 하는 자는 선과 색과 음과 빛과 모양에 남다른 관심을 갖는다. 학생, 군인, 회사원, 교육자, 과학자, 문학인 …… 맡은 직업마다 관심과 그 대상에 차이는 있지만…… 우리들은 누구나 그렇게 각기 열심으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남의 일이나 남의 것에
는 무관심하다. 그만큼 자기가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타자 중심에서 바라보는 세상이기 보다는, 항상 자기 중심적 사고와 판단으로 현상과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이나 목표가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고, 삶의 이유가 자기중심적 시각으로 인한 착각으로 흘러, 프란시스 베이컨이 지적한 “종족. 동굴. 시장. 극장” 네 가지 부류의 우상(偶像)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가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있는 그대로가 가치 있는 것이며, 옳고 그름과 선악의 기준은 항상 자연스러운 곳에 있을 뿐이다. 진리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답고 고상한 것도 아니며, 내가 지금 경험하는 아주 가까이 있는 모든 것일 수도 있다.
2013. 12. 23. (월)
오갑록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깃들여 있으나,
이 세상 모든 것과는 다르고,
이 세상이 모든 것이 알아보지 못하나,
그의 몸은 이 세상 만물,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는 ―
그 네 영혼, 안에 있는 불멸의 통치자.
- 브리하드-아라냐카 우피니샤드 (Brihad-aranyaka Upanishad)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길은 내 안에 있다”
- 오쇼 라즈니쉬 (Osho Lazni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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