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찬 ......
■ 의정부 남씨 상가(喪家)를 다녀 와서
아들 셋, 딸 일곱, 열 남매를 두시고 그 손자손녀가 24명, 며느리와 사위가 6명 …… 이씨 성을 가졌던 90세 어머님의 장례식장 안내문은 슬하의 가족 상황으로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를 이어 살던 남씨 집안의 동네, 영안실은 남겨진 가족들 숫자만큼이나 많은 조문화환으로 둘려져 있었다. 백색 화환 행렬이 식장 안으로 들어 서는 이에게 엄숙함을 알린다.
그 자손과 친지 그리고 이웃 분들의 도움으로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오는 문상객을 맞느라 모두들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주제는 먹거리 챙겨주고, 서로의 인사치레를 하는 행태들이다. 가족들은 지낸 삶이 힘들고 아쉽고 서러워 안타까워하며, 울고 불고하는 모습들이라기 보다는 일을 치르는데 힘들고 지친 모습이 더 하다는 느낌이 든다.
술 마시며 왁자지껄하며, 여기저기서 화투짝 돌리던 모습은 드물다. 어떤 모습,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것이 옳다는 정답은 없는 것이 관혼상제의 특성인 줄 다들 알지만, 그 잘잘못을 다투는 일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그 자리에서는 입 크고 힘있는 자가 항상 우세하다. 그러나 정작 무엇이 옳은 짓인지는 서로들 같은 크기로서 의문으로 남곤 할 것이다.
장례문화도 내가 모르는 사이 많이 변했다.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그만큼 많이 달라졌을까? 사회의 계층구조, 종교나 믿음의 종류, 그 깊이가 변한 만큼 남의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나 생각들도 변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남의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만큼이나, 행복과 불행, 선과 악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시각도 나이라는 시간이나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저절로 바뀐다는 것을 장례문화의 변화에 빗대어 가며 느끼게 해 준다.
한 장소에서 같은 주제, 죽음이라는 명제를 두고, 서로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인사치레 하는 장소임에 분명 하건만, 그 자리의 대다수가 흘러가는 강물 보듯 방관자의 자세로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가신 어머님의 연세가 많으시니 호상이라는 미명 아래 말이다. 이 자리를 비켜 서면 시합이라도 치르듯 다투며 빠르게 잊을 것이다. 그의 직계 자손도, 친척도, 이웃도, 문상객들도 …… 냇가에 서서 물줄기를 바라보며 흘러간 물을 돌이켜서 생각하지는 않는 것이 생물체의 본성일 지 모른다.
기억이니 과거니 사진이니 역사니 하는 따위는 우리 인류가 지닌 쓸데없는 호사스런 사치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가치며 의미가 우리들이 생각하던 것처럼 그럴듯하고 아름답게 포장된 그것만 훨씬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지금 살아 숨쉬고 있음 자체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삶의 의미를 자꾸만 부여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 영원한 무엇인가를 챙기고자 하는 욕망의 산물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죽음이란 그 무엇이라고 누가 큰소리로 확실한 답을 하겠는가? 믿음이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단절된 사고의 틀 안에서만 나올 수 있는 답일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누구나 그것을 알기에 남의 죽음을 다가서서 접하는 순간만큼은 숙연해 지곤 한다. 그 누구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것이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며, 죽음이란 것에 대하여 좋고 그름을 판단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그 순간을 맞곤 한다. 젊고 힘있을 때라면 큰소리 쳐 보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그늘 아래만 서면 작아지곤 한다.
수일 전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타계 소식을 신문을 통해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흘려 보았다. 메시아 (Messiah)를 자처하며 수 많은 교도를 거느린 종교 지도자가 92세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바라보며, 수명이 한정된 것임과, 죽음이라는 이름의 덧없음과, 살아 숨쉬는 우리들이 그 다음 세계를 말한다는 것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인가를 다시 머릿속에서 돌려 보게 된다. 나에게 들어있는 짤막한 감정의 지식들을 총 동원하여 보지만 흘러간 물을 되돌려 흘려 보아야, 역시나 같은 물 줄기로만 보이는 것처럼, 나의 삶은 삶이고 죽음은 남의 일, 나는 죽음의 방관자에 불과 하다는 것을 다시 깨닫게 된다.
남씨 상가의 상주도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는 문상객으로 참석했던 나와 다름 없는 방관자에 불과 한 것이다. 문선명 교주의 유지를 받들었던 수 많은 교도들 또한 믿음의 이름을 앞세워 후일 함께할 것을 바랄 뿐, 죽음이라는 선을 함께 넘지는 못할 것이다.
작아지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쓰러지려고 하는 나를 바르게 서도록 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그려 보던 좋은 사회, 바른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또는 그러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한껏 치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르는 선악의 틀, 좋고 그름의 틀, 옳고 그름의 틀을 한껏 드높이 치켜 올리면서 말이다. 그냥 나는 오늘도 살아서 숨쉬고, 오늘 이순간을 흐르는 자체가 전부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2012.9.4.(화)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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