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푸른 ......
■ 초로(初老)의 어느 가을날
주는 만큼 오는 것이 있고, 비운만큼 채워 지는 것이 순리다. 물가 모래밭에서 손바닥으로 무심코 웅덩이를 파다 보면, 그 웅덩이에 고인 물을 퍼내도 다시 고이곤 한다. 모래 틈으로 스미는 물이 비운만큼 다시 채워지곤 한다. 내 몸을 떠 도는 갖가지 상념들도 모래 틈, 물의 흐름과도 같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웃는 만큼 웃음이 오고, 내 뱉은 덕담 만큼 칭찬이 돌아 온다. 복된 언행은 복을 부르고, 긍정의 힘은 새로운 긍정의 힘을 불러 온다. 반대로 울음이나 비난, 불만이나 불행, 부정의 검은 늪은 내어 딛는 걸음마다 수렁이 되기 쉽다. 그 곳에서 헤어나려면 더욱 애 써야만 된다.
건강은 건강을 키우지만, 병은 병을 키운다는 의미로도 생각해 볼만 하다. 몸이나 마음의 상태가 건강이던 병이던 간에, 어느 한 쪽으로 반전되면 그 곳을 헤어나기 쉽지 않음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우리들 주위에는 고뿔 한번 안 앓고 장수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소한 고뿔 감기로 세상이 바뀐 경우의 삶도 보게 된다.
헛된 생각이던 욕심이던 간에, 무엇인가를 비운다거나, 비워진 그 공간을 다시금 채워가는 과정들은 각기 자신들이 선택하는 몫이 된다. 모래톱 웅덩이의 물처럼 무심코 들고나기를 반복하곤 한다. 나 자신이 보통의 사람이기에, 화장실 양변기를 수리할 때처럼 허튼 곳으로는 절대로 물이 새어나가지 아니하도록 철저한 방수공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때, 성글게 되어 새 나가는 것은 미덕이고, 철저하게 막을라치면 깔끔 떤다는 비난이나 받기 십상이다.
그러한 상념의 들고 나기가 뒤바뀌는 순간들을 눈 여겨 보자. 그 중에서도 특히, 욕심이나 욕망의 고리를 스스로 놓아 버리는 한 순간에 갖게 될, 희락(喜樂)의 맛은 어떨지를 새겨보자.
욕망의 손을 놓는 순간, 보다 더 큰 전부를 잡게 되는 듯하며,
욕망에의 눈을 감는 순간, 보다 더 큰 전부를 보는 듯하며,
욕망을 잊고 잠 드는 순간, 새로운 꿈과 영혼을 만나는 듯하여,
뭇 욕망에의 욕심들을 털어내는 순간, 더 큰 풍요와 행복감을 얻게 될 것이다.
품고있던 안타까움이며 그리움을 떨쳐 버리는 순간, 더한 평온을 얻은 듯하며,
내일의 근심을 버리는 순간, 지금이라는 현실이 바로 알고 깨닫게 되어 돋보이며,
절망을 내려 놓는 순간, 새로운 희망이 싹트게 되며,
날선 사랑, 날선 미움을 내려놓는 순간, 너그럽고 포근함이 고이게 될 것이다.
황금 빛 일색의 욕망을 놓는 순간, 흑백이 교차하는 새로운 선과 멋이 눈에 든다.
그대는 당뇨라고 하여 주식(酒食)에서 눈을 떼니,
새롭고 풍성한 먹거리들이 더욱 눈에 띄게 되어,
먹새는 이전보다 오히려 만족감이 더하는 듯하다.
부, 명예, 건강, 체격, 체력, 수명, 사랑, 영원, 영혼이라는 이름들의 수 많은 욕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그러한 욕망의 손을 놓는 순간, 자신 스스로의 실체는 더욱 넉넉하여 지고, 풍성하며, 아름답게 변신할 것이고, 새로운 만족과 행복감은, 모래톱 웅덩이에 물 스미듯, 퍼 낸 만큼 스며들 것이라고 믿는다.
패이거나, 굽고 찌그러지고, 터지거나 부러져 굴곡진 모습들이 지나온 우리네들 삶의 모습일 수 있다. 어디 한 곳, 성한 곳 없이 땜질로 살아오기 일쑤이다. 잡았다간 놓기를 하루에도 수도 없이 반복하고, 들고 나기를 반복한다. 나의 하루하루 상념들이 그러하고, 우리집안 가정사가 그러하며, 우리나라의 근대사나 먼 역사도 그러하다. 아침마다 받아 든 일간지의 넘쳐 나는 뉴스도 그와 다름은 아니다. 살아가는 뭇 생명체의 삶 또한 그러하다. 스테인레스 강철선처럼 곧바른 생명체의 삶이란 기대하기 어렵다. 고인 물가에 그려진 지렁이 기어간 궤적처럼 굽이치는 곡선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고, 자연의 순리, 그 모습일 것이다.
9월 중순, 베란다의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서 초로(初老)의 초라한 자화상을 더듬거려 본다. 텅 빈 공간에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던 쓸모없는 상념의 잡동산이(雜同散異);
나는 싱그러운 녹색 풀잎에 눈을 맞추었네,
나는 바람결 살랑이는 아름다운 국화꽃을 보았네,
나는 가을바람 타고 흔들리는 먼 산 능선의 숲도 보았네,
나는 고요 속 멀찌감치 들려오던 차량의 한적한 소음 고이 들렸네,
나는 향긋한 내음 풍기는 따끈한 찻잔에 닿은 입술에서 여가를 만졌네,
텅 비운 마음 속,
머물다 간 가을의 작은 흔적들이 맴돌고 있네,
가을하늘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뻥 뚫린 높푸른 창공을 응시한 채,
밥 그릇, 국 대접, 찬 접시를 하나로 만들어서,
해 묵어 제대로 익은 베지터블스프 뒤섞으며 나 홀로 배 불리던,
어느 가을날 그 점심 식단은 더 없이 흡족했네,
오수(午睡)의 단잠, 꿈 속의 영혼도 그리 먼 곳의 신기루만은 아니려니......
2011.9.16.(금)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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