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과 진리 ......
■ 앎과 삶 (Knowledge & Life)
무엇이 참인지 무엇이 진리인지를 바로 알고, 그렇게 깨우친 바에 따라 좋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올바른 행동으로 옮기면서 우리가 참되게 살아 가는 것이야말로, 밝고 좋은 사회의 바탕이 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앎
그런데, 과연 나는 무엇을 아는가?, 질문에 앞서, 안다는 것 자체는 턱없는 착각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네 가지의 우상(偶像, idol)을 떠올려 보자. 인간을 중심으로 한, 인간이라는 한정된 감각기관을 통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만을 가지고 인식한 내용과,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대, 이 사회에서 얻게 된 토막 지식을 토대로, 그리고 지역과 나라의 틀 속에서 한정된 특별한 언어와 관습을 통해서 축적된 가치관이며 윤리관 따위로 형성된 초라한 “나의 앎”을 내세워 가며 무엇인지를 주장하려 한다면 꼴 사납고 우스운 짓일 수 있음을 반박하기 어렵다.
가상할 수 있는 물리현상에 비해,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인식의 한계가 얼마나 얄팍한지는 새삼스럽지만 되짚어 보자. 자연에는 무수한 파동 특성을 갖는 전자파가 흐른다. 인간은 그 중에서 극히 한정된 범위만 시각(視覺)을 통해 인식할 뿐이다. 전자파 중 사람이 볼 수 있는 가시광선의 파장과 진동수는 390 ~ 760 nm, 390 ~ 760 Thz (7.6*10^14 Hz) 사이에 불과하며, 그 범위를 벗어난 것은 어느것도 볼 수가 없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가청 권역의 음파도 20 ~ 16만 Hz (2*10^1 ~ 1.6*10^4 Hz) 사이의 진동 파동만 들을 수 있다. 그것도 광활한 우주의 단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정된 극히 짧은 거리 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빛이나 소리처럼 맛이나 향기, 촉감 따위도 한정된 특정 인식범주를 벗어난다면 감지하지 못할 것이다. 개의 후각은 사람보다 수 십 배, 잘 훈련된 특수견은 2만 배까지도 된다고 한다.
중력, 전자기장 따위의 작용이 있음을 교육과 간접 경험으로 알게는 됐지만 우리의 감각기관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영감이니 텔레파시니 주장하는 것처럼 다른 무엇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들이 다니는 다른 길들이 있기를 바라는 집단을 터무니 없다고도 탓하지는 못한다. 상상할 수 있는 물리현상이라고 해도, 미세한 세상이나 아주 큰 세상은 우리가 알 수 없음도 인정한다. 우주 전체의 23%와, 우주 에너지의 73%를 차지한다는 암흑물질의 존재가 일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윔프(WIMP)라고 하는 이 물질은 현대과학으로 아직까지 보일 듯 말 듯 가물가물한 존재로서 규명을 위한 물리학계 연구가 한창일 뿐이다.
이처럼 극히 한정된 영역의 물리현상을 감지하며, 이를 바탕으로 알게 된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 그리고 선조의 경험이라고 할 역사적 내용을 통하여 지식이라고 표현되는 앎이 꾸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우리 앎의 바탕은 편협 되고 한정된 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종교집단의 특성은 그러한 상식적인 앎의 틀을 벗어난 가설을 내세운 가상의 틀을 믿는다는데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화 된 가상의 틀을 삶과 연계하며 다수인이 함께 믿는다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해 본다. 일반적이며 현대과학의 상식을 뛰어 넘는 가상의 앎을 믿으며, 이를 서로 알리고 결속하는 과정이 종교생활의 일련의 활동은 아닐까?
세상의 시작, 제1원인은 무엇일까 하는 아르케니 우어스토프, 사후 세계의 오묘함,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운명과 자유의지 …… 누구에게나 보이는 사물이라면 별도로 믿음의 필요성이 없겠지만, 이 세상을 바로 알기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지닌 인지능력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데서부터, 우리가 잘 몰라 보이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각기 다른 틀의 믿음을 유발케 하곤 한다.
지난 주말 방송된 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가졌던 생각을 들춰내어 보자. 청춘합창단 단원을 공개 캐스팅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테너를 부른 중년의 한 참가자가, 자기는 벌 치고 꿀을 따며 자연에서 꽃을 따라 살아가는 양봉업자라며 소개 하는 장면이 화면에 흐른다. 그의 삶이 그림 속의 한 풍경화처럼 흔하게 받아 들여 질 수도 있다. 이는 우리 시대, 우리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이 단순하게 그릴 수 있는 가치관일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벌들이 애써 모은 꿀을 뒤통수 쳐가며 가로채는 몹쓸 인간 정도로 보는 이가 있다면, 대부분 그를 바르게 보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오직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은 늘 그리 이어져 온다.
치즈와 버터를 발라 먹고, 송아지가 먹어야 할 우유를 가로 채서 인간이 마시고, 갈비며 스테이크 뜯고 썰며 “소”라는 생명체에 대한 죄의식을 갖지는 못한다. 찐 달걀에 온갖 문양 넣어 부활절 행사에 즐기며 나눠먹는 기독교도의 행사장에서도, 그 알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엄한 한 생명체 임을 까마득하게 망각한 채 보낼 것이다. 알지만 모른 체 하는 것 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복날 개 잡는다고 야만스레 여기는 서구인들, 돼지고기 멀리하는 무슬림, 소를 숭상하는 인도인들 …… 언어, 종교, 관습 따위나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며 옳고 그름도 달리 여기게 된다.
의문은 여전히 남곤 한다. 내가 안다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며, 무엇이 바른 앎일까?
. 삶
사는 일이나 살아 있음을 삶이라고는 하는데, 이는 목숨을 연명해 가는 데 따르는 모든 것을 두고 이르는 말 일 게다. (Life, career, lifetime: These are all words for the time during which is alive or is doing a particular thing.) 이 가운데, 바르고 올바른 삶을 참삶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르고 어떻게 해야 올바른 것일까?
무엇인가에 대하여 바로 알고 삶을 보내는 이가 세상에 과연 얼마나 될까? 바르게 살자면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고, 즉 바른 앎이 선행되어야만 참삶으로 이를 수 있을 테고, 내가 아닌 타자로부터,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 이웃이나 역사적으로, 그 것이 바른 것이라는 공감대나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서 고민하는 학문탐구의 영역이기도 하다.
참삶이라는 목표를 정하더라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의 고민은 더 커지게 된다. 소위 말하는 막된 삶도 무방하다면야, 더 크고, 더 길고, 더 많고, 더 높고, 더 오래, 더 좋은 것들만을 쫓으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참삶을 지향하는 선량한 대다수의 삶은 선택의 양 갈래 길목에서 끊임없이 서성이게 되곤 한다.
이 놈의 삶을 어찌 이어 갈 것인가? 인간이 요구하는 욕구를 단계적으로 나열하게 되면, 가장 기초적인 욕구는 건강이 되고, 다음으로는 물리적 요건, 마지막으로 인간의 궁극적 만족 목표로서, 문화와 여가, 사회 참여 등이 포함된다고 한다. 량 보다 질?, 아니면 질 보다 량? 삶의 질(質)과 량(量)을 놓고서 저울질하게 된다.
이 때 량이라고 생각되는 것에는 물질, 돈, 육체(체중, 키)와 같은 유형의 것이 있는가 하면 수명, 직위, 지위와 같은 무형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에 대비되는 질(質)이라고 여길만한 것에는 진(眞).선(善).미(美).사랑.행복.영광.명예.건강 과 같은 것을 떠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활 수준과는 달리, 삶의 질을 직접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다. '삶의 질'이라는 개념에는 건강, 식사, 고통의 부재 등과 같은 물질적인 측면과 스트레스나 걱정이 없고 즐거움과 같은 정신적인 측면이 있다. 사람마다 어떤 것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만족을 느끼는 지가 다르므로, 특정한 사람의 삶의 질을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진선미의 탐구나 사랑과 행복의 실천을 따라서, 때로는 조국의 영광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가족의 안녕이나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삶의 질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 중에서 “질 보다는 량” 또한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 지를 느끼게 하곤 하는 경험들은 적지 않을 게다.
회생 어려운 식물인간이 되었어도 생명의 끈을 놓아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안타까운 모습에서 몇 일간만이라도 더 목숨을 연명한다는 량(量) 적인 요소도 삶에서 무시하지 못함을 느끼게 된다. 몸이나 마음의 고통과 아픔의 긴 터널 속에서 벗어나고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응급실 중환자들의 모습을 대할 때, 우리는 “질 보다 량”도 얼마나 삶에서 가치 있음인지 느끼게 된다. 돈도 지위도 그럴듯한 몸매도 삶의 과정에서 양적으로 중요 하다고는 하지만, 무작정 돈만 모으거나, 더 높은 지위에 눈 멀어 열심으로 뛰기도 하지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삶의 질이 부족했음을 자각하고, 뒤 늦게야 후회하는 모습도 경험하곤 한다.
참삶을 따르려면 실천에 앞서 올바른 앎이 선행되어야 하겠지만,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무엇인가를 바르게 안다고 하는 것 또한 인간으로서 그리 녹녹한 과제는 아니다. 설령 안다고는 하더라도, 바르게 안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나로서는 옳다지만, 가족이며 이웃, 더 나아가서 적이나 원수까지, 또는 색이 다른 종교를 믿는 이에게까지, 고대의 선조나, 미래의 후손에게 까지도 옳다고 여길 앎을 터득하기를 바랄 수는 없다. 물론 사람이 옳은 일을 한다고 해서 개나 돼지로부터도 옳다고 여기기를 바랄 수도 없다.
그런 의미로 보면, 참삶이란 우상(偶像, idol)의 탈을 쓴, 객관적이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참삶이란 신기루 같은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생각에는 항상 모순이 따를 수 있음도 알아야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무엇이든 열심으로 부지런히 목적을 찾아 최선을 다 한 삶이라면 설령 그것이 일방의 타자에게는 옳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에게 또는 어느 다른 일방에게는 참되고 바른 것이었다고 평가 받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너나 나의 앎이 모두 일천한 것이고, 참삶이란 것도 우상의 허구 뒤로 늘어진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본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틀에서 아무리 큰 잘못이나 죄를 범했다고 치더라도, 또 다른 틀에서 본다면 용서를 받는다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음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죄를 사하다”라는 말은 사전적 의미로는 용서하는 것이지만, 신약성서에 나오는 의미는 죄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라고 한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의 회복과, 박탈된 신분과 지위의 회복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In Him we have redemption through His blood, the forgiveness of our trespasses,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race. (Ephesians 1:7)
그런데, 여기서 죄 사함의 원류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절대자에 의한 죄로부터의 해방으로 해석한다고는 하지만, 나는 그 밑바탕에 깔린“사람의 본성이 선하고 참됨”을 인정하기에 용서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하고 싶다. 맹자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실마리인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이 인성(人性)의 기본이라고 했던 주장처럼, 성경에서의 죄 사함을 받게 되는 저변에는 “본래 사람의 인성은 선하다”는 성선설의 의미를 바탕에 둔 것이리라는 토를 달고 싶다.
결국, 참삶의 진정한 평가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를 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화엄경 법구(法句) 중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깊은 의미가 여기에 머물지도 모른다. 타인이 보기에는 내가 제 아무리 나쁜 악행을 일삼더라도, 나 자신은 그와 무관하게 “나는 선량하고, 나의 삶은 성공적이며, 나는 행복하다.”고 자만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역사 속의 폭군이나, 사회에 커다란 물의를 빚은 정치.경제.사회 등 사범(事犯)들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참과 진리를 쫓아 헤매는 수도자의 길도 바른 삶으로 볼 수 있겠지만, 복 중인 막바지 무더위도 이겨가며 열심으로 일하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삶들 모두 가치 있고 참된 것이고, 참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물론 어려운 현실을 견디며 이어가는 삶도 그러하며, 설령 타자의 눈에 거슬리는 삶이라 할지라도 시대나 사회, 지역이나 나라를 달리해서 본다면 긍정적일 수 있을 수 있을 터이고, 인간이 아닌 다른 동식물의 입장으로 본다면 우주질서를 거스른다고 할 수 없는 “바른 삶”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비싸고 휘황찬란한 명품 브랜드의 의상은 품위유지나 자기과시에는 좋을지 몰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오히려 거북할 수 있다. 내 분수에 어울리는 적당한 비용을 치르고 마련한 질감이며 색상과 디자인이 내 마음에 쏙 드는 옷 한 벌을 차려 입었다고 하자. 화려하지는 아니해도 내 몸에 잘 맞고 생활에도 편안한 옷, 깨끗하고 단정하게 바로 차려 입은, 마치 그 옷과도 같은 것이다.
뜨거운 햇살아래의 농부, 배움에 열중인 학생, 산업현장의 근로자, 연구개발과 학문에의 탐구자, 국방 현장의 군인, 구슬 땀 젖은 스포츠맨, 투병중인 환자, 갓난것의 먹자고 바둥대는 모습, 주름 깊은 노인의 더위에 지친 모습, 그리고 오락실 뿅뿅에 정신 팔린 청소년까지도 ……
비록 그것이, 크다거나 많지 않더라도, 우아하다거나 명예롭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길지 아니한 기간, 짤막한 순간이었더라도 ……
. 바른 생활
삶에서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대다수가 “량(量)적인 것” 이라고 할 수 있고, 마치 그것이 삶의 결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기왕이면 많이 모으고 높이 올라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선망하곤 한다. 그러나 “량(量) 보다 질(質)적인 것”을 내세운 삶은 어떤 모습일까?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작고 초라하더라도, 삶의 길목에서 스치는 뭇 순간과 과정들이 바른 것들이었다면, 그러한 점점이 이어진 선(線)은 질적으로도 좋게 평가 받을 수 있는 삶이 될 것이다. 올바른 순간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지는 자신 스스로에게 있다. 자신 스스로 만드는 것이자, 자신이 만족하는 것이다. 결국 부정적이지 않고 긍정적이며 만족하는 생활 태도에서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만족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자신을 포함한 세상의 존재가치를 이해하고 그 가치관을 확실히 다지는 데부터 시작될 것이다. 존재가치, 가치관을 구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바로 안다는 것, 그 앎이란 인간으로서는 여전한 의문이자 어려운 과제이다.
맞이하는 순간에 긍정적이고, 지낸 시간에 만족할 줄 알며, 불만스러운 부분에 대해서는 욕심은 아니었는지 하는 자기성찰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과 진리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항상 고민해야 하고, 분수를 넘는 욕심을 털어내려는 철저한 자기관리를 게을리해서는 희망, 선망, 절망, 낙망이라는 이름의 신기루며 구렁텅이가 엇갈려가며 삶의 가는 길을 어지럽히곤 할 것이다.
설령, 바르다고 깨달은 앎이 따르기에는 어렵다거나, 더럽고 추하다거나, 가치 없는 일이더라도 또는 그러한 순간들일지라도, 점 한 개로서 올바르게 찍고자 하려는 "바른 생활" 그 자체가 참삶일 수 있음을 되새겨 본다.
2011.7.28.(목)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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