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일상(日常)

오갑록 2011. 5. 10. 12:18

여유로운 ......

■  일상(日常)

 

 

    갓난아기는 젖 빨고 잠자기를 반복하며 하루를 보낸다. 서너 살 된 어린이는 먹고 자는 것 외에도 장난치며 놀다 깔깔대고 웃기도 하고, 떼쓰고 울기도 하며 하루 해를 보낸다. 학생으로 성장하면 읽고 쓰고 외우면서 나름대로 무엇인가 열심으로 배우고 심신을 단련하고 익히는데 하루가 바쁘다. 성인이 되면 제각기 맡은 바의 직업 속에서, 명예.영광.부(富)를 키우려는 욕심이나 희망의 보따리 채우기에 나날이 바쁘다. 그 일의 분야는 가지가지다. 군사.정치, 인문.사회, 농공상업, 예술.체육, 노동.연구.기술.교육 ……

 

그러나 나이 들어 그 일 손을 놓게 되는 시기가 되면, 하루동안의 육체적인 활동량은 차츰 줄어드는 대신 한가한 때가 차츰 늘게 된다. 그래서 지내 온 일들에 대한 잘잘못과 다가올지 모를 막연한 생각들로 보내는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 더 늙고 병들면 아픈 곳의 병마와의 싸움으로 지내는 것이 일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형이 이 시대 사람들이 보내는 일상(日常), 매일 반복되는 생활의 일반적인 모습들이다. 아기는 땀 방울 맺혀가며 열심으로 젖을 빨고, 학생들은 밤새워 공부하며, 손톱 발톱이 닳도록 농사일에 기꺼이 매달리는 촌로가 있는가 하면, 연구개발에 늦은 시각까지 불 밝히는 연구원이 있다. 어렵고 힘든 일상에서도 보람과 긍지를 갖고 묵묵하게 임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건강하고 밝은 사회가 유지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남의 손의 떡이 더 커 보이고, 남이 잡은 일감이 더 헐어 보인다”는 속담처럼, 내가 처한 일상은 남 보다 더 어렵고 힘든다거나, 가치 없다거나, 볼 품 없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기의 일상에서 탈피하기를 바라고, 그러한 행위를 실천으로 옮긴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워도 한다.

 

게으름 피우며 빈둥대던 이즈음. “방외지사(方外之士)”라는 제목의 책자(저자: 조용원)를 접하게 되었다. 책장을 넘기면서 딴 생각을 해 본다. 주어진 일상에서 탈출하여 나도 이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되기를 바란다면 정말 옳은 욕심인지를 짚어 본다.

 

고정관념과 경계선 너머의 삶을 찾아서;  “방외지사(方外之士)" 서문 중에서

방내(方內)는 무엇이고 방외(方外)는 무엇인가? 방(方)은 원래 사방(四方)이란 뜻이지만,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층위에 따라 다양하게 적용된다. 방(方)은 테두리, 경계선, 고정관념, 조직사회를 의미한다. 방은 또한 노래방, 빨래방, 찜질방의 방(房)과 같이 닫힌 공간, 구획된 공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방외라는 것은 방으로 상징되는 이러한 고정관념과 경계선 너머를 가리킨다. 그 동안 방내(方內)에서만 살아 보았으니 이제 방외(方外)에도 한번 나가보자. 방외에 나간다고 정말로 굶어 죽는 것인가?

 

그러나 방외(方外)로 나가려고 생각한다면, 그 전에 풀어야 할 의문과 넘기 힘든 큰 벽들이 버티고 있음을 알게 된다.

  . 명예, 부(富), 정(情) 따위의 세속적(方內) 가치관이란 무엇인가?

  . 칠흑같이 캄캄한 긴긴 추운 겨울 밤, 태풍과 장마, 질병처럼,

    방외(方外)에 서게 될 때 마주치게 될지 모를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자연 조건들과 그 속에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여 보았는가?

  . 부지런할 수 있을까? 지금껏 나태하고 게으르던 악습들이 쉽사리 고쳐질까?

  . 명석한 머리, 영적인 통찰력, 넘치는 체력 따위도 책 속의 주인공들만 할까?

 

사람답게 산다는 것, 삶의 보람을 느끼며 만족 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명제는 아닐듯하다.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풀지 못해, 허공에 맨손 휘 저으며 잡아보려고 안간 힘 쓰는 욕망 중 한가지일 수도 있다. 그 바람을 “방외(方外)”, 즉 밖에서 찾아 보려 함은 과연 옳은 생각일까? 그 밖으로만 나가면 내가 원하던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속내에는, 좋아 보이는 양지 녘의 따스함만 바라 볼뿐, 방외의 어둠 속에 숨어 있을 고난 고통 고독 두려움 같은 날 선 갈고리에 대하여는 눈에 두려고 하지 않는 데서 오는 착시가 아닐까?

 

나와는 다른 시기, 다른 지역, 다른 처지, 다른 세상에서 살던 사람의 시각으로는 내가 곧, 방외지사(方外之士)라는 것도 따져 볼만하다.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 그 책 속의 주인공들처럼 방외지사(方外之士)로 살아 보고픈 욕심을 나쁘다고 탓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오늘 하루 일상(日常)이 바로 방외지사(方外之士)라는 사실도 함께 인식해 볼만하다.

 

가령, 나의 일상이 제아무리 볼 품 없는 경우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일찍 일어나  먹고 마시고, 걷고 빈둥대다 잠드는 것을 일삼는, 그저 평범하게 놀고 먹는 도시민이라고 하자. 먹거리며 잠자리가 불편한 것도 아니며 주변 경관이 그다지 험한 것도 아니다. 단지, 부족함을 느낀다면 좀 더 호화롭고 호사스러워 보이는 이웃과 비교우위의 자기만족을 못한다는 것이 있을 뿐이다.

 

오늘 아침 걷던 일을 새삼스레 생각한다.

아파트 숲 속이라고는 하나, 이른 봄 동틀 무렵, 청계산 쪽 산자락에서 멀리 들리는 꾸륵대며 우는 뻐꾸기 울음소리도 어렴풋이 찾을 수 있다. 차량 소음이 섞이기는 하지만 탄천변의 물 소리도 새소리와 어우러지며 시끄러우리만큼 요란하다. 아침 공기도 그런대로 상큼하다. 변두리 도심이면서도 깊은 산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들을 여기서도 느낄 수는 있다. 면벽(面壁)으로 참선에 정진하는 수도자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무(無)”의 경지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반대로 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풍만한 정신 상태일 거라는 상상을 해 본다.

 

부족한 무엇인가를 찾아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과, 내면에 넘쳐 흐르는 넉넉한 무엇인가를 인식하며 만족을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방(方) 내외(內外)의 경계선을 어디에 두는지 정도의 차이는 아닐까?

 

잠들기 전, 깔고 누운 이부자리의 끝 자락을 양 팔 벌린 손으로 편하게 부여잡고, 눈은 지긋이 감은 채 상상을 펼쳐 본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 담요 깔고 올라 타고, 해와 우리은하, 은하단을 각각 시속 10만, 18만, 80만 Km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항행하고 있는 나 자신을 그려 본다. 이는 빠른 차량 속도의 천에서 만 배에 가까운 엄청난 속도다. 회전운동 중인 별세계가 거대한 방외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지구라는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 정도는 방내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주제넘지 않을 듯 하다.

 

특색 없는 나의 일상(日常)이라고는 하지만, 생각하기 따라서는 방외지사(方外之士)라고도 할 수 있다.

 

혹한의 에스키모나 열사에서 생활하는 사막 흑인들이 바라보는 “나”는 어떨까?, 석기시대나 이조시대 사람들이 지금 나타나서 본다면 “나”는 어떨까?,  굶주림이나, 아픔에 시달리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본다면 “나”는 어떨까? 아무리 훌륭한 부나 명예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헛된 더 큰 욕망으로 쫓기고 있는 자라면 “나”의 한가함을 읽고서 어떨까? 훌륭한 일터에서 자리잡고, 남의 눈으로는 안정된 삶인 듯 하면서도 한 줌이 모자라거나 한 줌을 더 채우려는 욕심으로 쫓기는 시간들이 이어진다면 그들 눈에 비친 “나”의 일상이 부러움을 살 수도 있다. 

 

경제나 경영이라는 면에서 살펴보자. 순간마다 출렁이며 숨가쁘게 변하는 환율, 주가, 유가, 금리의 지수를 타고 넘는 FX 딜링룸, 주식시장, 선물시장처럼 특화 된 거래장터의 소란 속에서도 그러하며, 기술이며 연구개발, 품질, 수율, 원가 관리에 속타는 생산현장도 그렇고, 수주며 매출증대, 부실한 채권관리로 애태우는 영업현장에서도 그럴 수 있으며, 급락하는 수익이나 자금조달에 마음 졸이는 악조건의 경영자 중에서도 고통의 크기나 빈도는 누구보다 클 수 있다. 전부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떠오를 수 있고, “나”와 같이 여유부리는 일상이 오히려 부러울 수도 있다.

 

이 같은 일상의 어려움은 경상적인 분야 말고도 얼마든 생각할 수 있다. 문학이나 학문, 종교나 철학, 사회나 국가, 가정이나 조직도 그 주체별로 나름의 난관은 구석구석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어려움에 닥치면 대부분 안정, 안락, 여유 이러한 순간들의 소중함을 갖게 된다.  그래서 타인의 일상이 예사롭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방외지사를 선망하게 되겠지만, 자신의 일상이 결코 범상한 것 아님을 알고 지냄도 중요하다고 본다.

 

“인생에는 한 길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길이 있다. 좀 더 나가면 자기가 가는 길이 곧 길이 된다.”고 저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페루의 문화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가 남긴 말의 깊은 의미와도 상통한다.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자세히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돈 후앙의 가르침", 1968

                       The Teachings of Don Juan: A Yaqui Way of Knowledge

 

2011.3.25.(금)

오갑록

 

 

■  방외지사(方外之士) 

              저자: 조용원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 다 하는 취업을 거부한 채 시골에서 고택을 지키며 사는 강기욱, 대나무로 엮은 뗏목을 타고 황해바다를 들락날락하는 윤명철, 전통무예 기천문의 박사규. 전남 곡성의 소목장 이정곤 등 "지금 가는 길이 곧 나의 길이요, 나의 운명"이라는 신념을 가진 13인의 삶의 고수들을 만나보는 자리.

 

“방외지사”는 정신적 삶을 추구하는 본격적인 한국 방외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방외지사'를 고정관념과 경계선 너머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재정의하면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사람들, 죽기 전에 살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자는 신념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탐색한다. 

                                                                                                                      (안내문 중에서)

(목차)

 

□  밥걱정을 뛰어넘은 귀거래사

 

. 죽기 전에 살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자

   20년 공무원 생활 접고 드디어 고향집에 돌아온 사람  

. 대책 없이 산으로 튄 무외(無畏)의 낭인

   할리데이비슨 타고 강산을 떠도는 시인  

. 직장에 매인다는 것은 자기를 파는 일이다.

   백수의 제왕으로 군림하는 강처사  

. 서울 이태원에서 계룡산으로 무대를 옮기다

   기천문 2대 문주인 무림 고수  

 

□  사바세계에서 도를 찾는다

 

. 차 잎의 냄새만 맡아도 원산지를 안다

   차 맛 감별하는 품명가(品茗家)  

. 역술계의 이종격투기장인 부산에서 살아남은 사람

   염라대왕의 대외비를 훔쳐보는 역술가  

.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픈 한국의 유마거사

   스승을 찾아 평생을 헤맨 내과의사

 

□  정신의 길을 가는 탐험가

 

. 제주도 설문대할망의 헌신인가?

   독버섯 달여 먹으며 "이 뭐꼬" 화두 30년

. 뗏목은 태풍이 불어도 뒤집히지 않는다

   뗏목 타고 황해를 누비고 다니는 장보고의 후예

. 여자 신선의 길이란 무엇인가?

   중국 화산파 23대 장문으로 등극한 여선

 

□  우리 곁의 이단자

 

. 인간은 누구나 자기 길을 가게 마련이다

   전국의 산하를 두 발로 걷는 낭인 

. 지리산에서 태어나 지리산에서 늙는다

   실상사 앞에서 평생 동안 발우만 만든 지리산 터줏대감 

. 나무는 기다려야 다룰 수 있다

   춥고 배고프면서도 민족의 전통을 이어가는 소목장

 

 

(내용 중에서 발췌)

 

“살고 싶은 대로 한 번 살아보자" 

사람들은 항상 꿈을 꾼다. 특히 도회지 사람들, 그리고 샐러리맨들, 그 작은 봉급을 받으면서도 집착은 대단하다. 봉급이 끊기면 사람 구실 못할 것이라는 굉장한 두려움 때문이다. 아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남과 다른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런 것도 무시 못한다.

 

"소급해 보니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남과 경쟁하는 것이 싫었다. 남을 이겼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았다. 자연도 모둠살이를 하고, 문명도 모둠살이를 한다. 전자의 모둠살이는 서로 상생하는 작용을 하지만, 후자인 문명의 모둠살이는 서로 간의 경쟁이고 죽임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문명의 속성인 경쟁과 죽임을 싫어했던 것 같다."

 

"효가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부모님과 함께 밥 먹는 일이었다."

"돈 안 드는 귀족 취미는 산책"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플 수밖에 없다."

 

性在何處 性在作用, 성품의 본체가 어디 있는가. 알고 보면 그 본체는 작용에 있다.

  마음의 본체를 따로 찾으려 하지 말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들과 번뇌망상 속에 본체가 있다는 말.

應無所住而生其心 <금강경>; 상황에 응하면서도 집착이 없는 마음.

 

처성자옥(妻城子獄): 아내는 성이요, 자녀는 감옥이다.

  처자를 거느리고 있는 사람은 집안일에 매여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다.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

  항상(恒産: 일정한 재산)이 있어야 항심(恒心: 평상심)이 있다. (맹자)

 

수행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선 마음과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 몸을 소중히 해야 한다. … 몸을 먼저 닦는 것이 그만큼 소중하다. 몸이 아프면 수도를 못한다. 그렇다고 몸에만 집착하면 마음이 열리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모두 닦는 것이 바로 성명쌍수(性命雙修)이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귀거래사를 감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도시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양손에 떡 들으려고 하는 욕심 탓이다. 어느 한쪽을 포기해야 한다. 도시가 주는 편리함도 누리면서 전원의 한가함도 즐기려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갑자기 자연 속에 들어오면 문명의 금단현상이 일어난다. 회사 생활을 하던 사람이 시골에 살면 이유 없이 불안하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 무엇인가를 하고 있어야만 불안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까 이것은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자유로부터의 도피였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으면 한가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오히려 불안하다. 이게 현대인의 불행이다.

 

인간이 혼자 있을 수 있는 경지를 독존의식(獨存意識)이라고 한다. 사실 참 어려운 경지이다. 인간은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사회적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혹독한 수련이 필요하다.

 

요가에서는 인체의 5번째 챠크라인 비슈다 챠크라(목젖 부위)가 뚫려야만 사회적인 평판이나 인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그러기 전에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한다. 행복의 요건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타고난 사주팔자대로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대까지는 팔자라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30대에는 사주팔자가 있는 것이구나 하고 어렴풋하게 느꼈다. 40대에 들어서니까 팔자가 50%를 차지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0대가 되니까 75%가 팔자이고, 나머지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60대가 되니까 95%가 팔자이고 나머지 5%가 후천적인 노력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지는 타고난 자기의 소질과 적성 그리고 장단점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생은 타고난 대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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