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주문 (呪文)

오갑록 2011. 9. 23. 17:53

굳은 믿음 ......

■  주문 (呪文)

 

 

더 크게, 더 높게, 더 많이 ……

 

“한층 더”를 주문(注文) 하는 곳은

경기장 응원단의 힘찬 목소리 말고도

우리 일상의 주변에는 얼마던지 많다.

 

봄이 되면 씨앗 뿌리는 농부의 마음 속에도,

공들이며 출산한 갓난이 엄마의 마음 속에도,

아파트 평수에 목말라 애타는 순진한 시민도,

새로운 개발과 투자로 확장하려는 기업정신도,

기세도 등등하던 대륙 국가의 군사적 야망도,

……

 

어디 그 뿐이랴 !

더 크게, 더 높게, 더 많이 ……

우리네들 종교의식 가운데에도 그 예외는 아니다.

관심만 있으면, 흔히 볼 수 있는 종교 시설들도 그러하다.

 

하늘을 찌르는 듯한 높은 종탑과 웅장함을 자랑하는 성당,

수십만 신도수를 자랑하는 그럴듯한 교회당,

역사를 자랑하는 거창한 경내의 사찰,

또한, 그 장소의 안팎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압도 하는 듯한,

제각기 종단이 모시는 신들의 형상물,

신비함을 자아내는 듯한 수 많은 석상, 조각상,

건축물 주변은 한껏 공들인 조각들로 줄서기도 한다.

 

힘이 닿는 한,

공과 품과 돈 그리고 시간을 아끼지 않고

더 크게, 더 높게, 더 많이 ……

건축물 조각물 출판물 등을 통하여 신앙의 깊이를 더해보려고 한다.

 

키만한 큰 붓을 양 손으로 부여잡고 휘저어 쓰는 “불(佛)”자

수십 길이나 되어 보이는 절벽에 양각된 고대의 석상

층층마다 최신 영상기기까지 동원한 교회의 초대형 예배공간

“한층 더”를 주문(注文) 한 흔적들이 종교계의 언저리에서는

역사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묻어난다.

 

최선을 다하여 받드는 만큼

더 크게, 더 높게, 더 많이 ……

“한층 더”를 주문(注文) 하는 것이 신앙 하는 자의 올바른 자세일 수 있다.

 

또한, 어느 종교나 기도, 주문(呪文), 주술 등도 시설물에 못지않게 중요할 것이다.

우리 몸에서 육체나 정신 어느것도 다 중요하듯,

컴퓨터 산업에서 하드웨어 못지않게 소프트웨어도 중요하다는 이치와 다름이 없을지 모른다.

 

열심으로 기도하고 주문(呪文) 하는 도량의 장소라면 어느 때 어느 곳이던, 목청을 한껏 가다듬고

더 큰소리로, 더 높은 곳을 향하여, 게으름 피지 않고 더 자주, 더 많이 ……

성스럽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

더 크게, 더 높게, 더 많이 ……

 

마음에서 꺼내어 외움으로써, 열심인 만큼 굳은 믿음과 혼신의 일체를 기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러나 때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거창한 종교시설 만큼이나 종교활동의 의식 행위들도 거창하고 복잡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생활화 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 익숙치 못하고 생소하기 때문일 수 있겠지만, 기도나 주문 같은 형식에도 밖에 내다 보이려는 과대 포장의 여지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때로는, 크게 소리 내며 많이 읊조리는 것이 과연 신앙심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반문을 해 본다. 한 발치 뒤로 물러선 자가, 의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허상이기는 하겠지만, 종종 작은 실망감에 젖기도 한다. 왜? 꼭, 크고 높고 많아야만 할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다. 왜? 크고 높고 많아야만 엄숙하고 믿음의 돗수가 깊어질 수 있는 것일까?

 

내 마음, 내 영혼, 심연의 저 깊은 곳으로 살며시 다가가서 만지고 얼래 보며, 다짐하거나 기원하며, 나와 사회, 현재와 미래, 그리고 언제나 칠흑에 쌓인 미지의 영혼을 위해서 발전적인 방향들을 모색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계기들을 담아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의 작은 눈에 어린 종교활동 모습에는 믿음의 행위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 만큼이나, 부정적인 군더더기들도 눈에 들곤 한다. 그 중에는 특히, “한층 더”를 주문(注文) 하는 듯한 믿음의 기본 자세들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의 되새김질을 해 본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 방관하는 자가 어찌 신앙 하는 바른 자세를 말할 수 있겠는가? 종교라고 말 할 것도 없는 일천한 식견에 불과하고, 믿음에도 누구보다 더 게으른 자라고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그런 만큼 기도나 주문(呪文)에 대한 식견도 짧지만 지나간 먼 날, 내 어릴 적, 차마 꺼내기 부끄러운 기억 하나를 더듬어 본다.

 

나의 아버님은 번듯하게 성공한 큰 장사꾼은 아니었으나 오랜 상거래 경험과, 탁월한 계수감각으로 더하고 빼기, 곱하고 나누는 산술만큼은 누구보다 못지않게 빨랐었다. 그렇지만 무일푼으로 상경하여 자기의 한글이름 석자,  “규자택자”도 어렵사리 근근히 그리는 정도였던 만큼, 남보다 앞서기 어려웠을 터이고, 그래서인지 나에게 남는 기억이라고는 고작 해야 먹고 사는 자체에 항시 급급했던 어린 날의 씁쓸했던 몇 가지 안 되는 추억에 불과하다.

 

당시의 어려운 생활 처지만 내세우며, 죽음이니 후세에 대한 걱정은 사치스럽다고 여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분이 어린아들의 기억에 남겼던 종교의식 비슷한 주문(呪文)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자신이 누구로부터 인가 주워들은 이야기인데, “강희노령”이라는 말을 되뇌면 어떤 위험이나 난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말씀이었다. 비록, 앞뒤 없이 토막 난 지식이지만, 어린 그 때의 토막 난 한 기간 동안, 밑도 끝도 없이 믿어보았던 부끄러운 일이 생각난다. 내게는 그것이 주문(呪文)이라는 경험이었던 것 같았다.

 

누구는 “남미호랭각교”를 외우면 거동도 못하던 환자들도 벌떡 일어난다는 따위의 기적이 일어나더라 는 등의 이야기도 한창 떠 돌 때도 그 때 즈음이 아닌가 싶다. 그 무렵 우리 옆집은 중풍치료에 명의로 전국적으로 소문난 한의원이었는데, 내 또래였던 한의사 아들과 잘 어울려 놀곤 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종종 자랑 삼아 하는 말이, 자기네 아버지는 닭을 잡을 때 목을 비틀어 밟고서 주문을 외운다고 자랑했다. 당시에는 그 한의사 아빠가 얼마나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는지 모른다. 닭 한 마리 잡으며 벌벌 떠는 겁쟁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주문을 외워 귀신의 힘을 빌려 오는 신통력이 대단해 보였던 것이다.

 

내가 지금껏 경험한 주문의 위력이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돌려 생각하면 열심으로 주문을 외우고 기도를 올리고 하는 목표는 토속신앙이나, 발전된 형태의 커다란 종교집단에서나 간에, 위에 경험했던 우습지도 않은 기억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달래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하는데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사전을 통하여 주문(spell, 呪文)과 진언(眞言, mantra) 사이의 의미를 단순 비교하여 보면, 말을 암송하여 신이나 귀신과 소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 주문은 술법을 부리거나 귀신을 쫓을 때 외는 글귀를 말하며, 천주교에서는 심령을 닦고 신에게 빌고 맹세할 때 외는 글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말이라는 뜻으로, 비밀스러운 어구를 이르는 말을 진언이라고 한다.

 

     * 불교의 진언은 큰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만 부르면서 일정시간 계속 반복하기도 하고 한번에 끝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진언은 말 자체에는 의미가 없으나 심오한 의미가 내재한다고 생각되며 영적인 지혜의 정수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특정 주문을 반복 암송하거나 명상한다면 탈아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며 높은 차원의 정신적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정신적 깨달음 외에도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목적, 예를 들어 사악한 영들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여러 종류의 진언을 사용한다.  (사전)

 

주문, 진언, 기도 등은 대상을 누구로 생각하며 암송하는가에 따라 목적하는 바가 조금씩 달라진다고 본다. 자신 스스로의 마음이나 정신수양을 다잡아 보기 위한 것, 믿는 바의 신과 소통을 기원하며 하는 것, 같은 신도들 끼리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한 것, 아니면 이교도를 설득하여 내가 신앙 하는 바의 종교로 귀의하기를 권하며 수행하는 행위라고 이해하고 싶다.

 

그 중에서, 자신이나 같은 신도들 간에 행하는 수행방식에 관하여 내가 무엇이라고 언급할 주제는 못 된다. 단지, 이교도를 위한 수행에 한해서만 볼 때, 상업광고에서 광고선전의 방법론이 다양하듯, 믿음의 전도 방법 또한 나름대로 특색들이 있다. 대부분 더 크게 소리 높여, 더 많은 복음을 전파하려는 여러 방안들이 쓰여지는 듯 하다. 수도자나 신자들의 그러한 열성을 일상에서 자주 접하곤 한다.

 

누구는 목탁을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대로변이나, 광장에서 끝없이 외우는가 하면,

누구는 복잡한 버스나 전철 안에서 “할렐루야”를 외치기도 한다. 더러는 거의 실성한 것처럼, 광기까지 비춰지기도 한다. “심판의 날이 ~~~~” 그리고는 천당과 지옥까지 오가기도 한다. 어느 종교는 기도 말미에 앞뒤 좌우를 서로 보며 선교하러 갈 것을 다짐하는 듯한 인사 나누기를 제도화한 곳도 있었다.

 

그들의 굳건한 믿음, 신앙 하는 자세가 한없이 부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중심적, 아집의 흔적을 느끼기도 한다. 성문을 세우고 성의 안과 밖을 나누는 2분 법, 흑백의 논리가 이러한 곳에서도 세워지는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  “나무아미타불”, 부르고 외우며 따르고 공경하면 “한량없는 빛, 아미타불에 귀의한다”, 아니면(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서,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며,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즉 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이라는 고성제(苦聖諦)의 진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윤회하리라는 그들의 믿음,

 

      *  “할렐루야”, 찬양하라, 찬양한 자들은 성스러운 심판의 그날이 오면 ~~~ 기쁨 환희 영광 영원에 안기리라는 빛의 믿음이고, 아니면 그 반대라는 그들의 믿음,

 

우리의 전통 제사 풍습, 무당 굿, 아니면 미개한 나라나 고대의 토속신앙 등에서도 따지고 보면, 이런 식의 믿음에 관한 2분 법의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관점이다. 따라서 브르조아를 타도하자고 주장하는 성 밖의 사람들 주장처럼, 여하 한 믿음도 믿음을 갖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 사이에는 안과 밖이 서로 다른 입장에 서게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때문에, 동질의 믿음을 가진 신자들 사이라면 성스러운 복음이 될지라도, 서로 다른 색의 믿음을 갖는 사이거나, 믿음이 없는 자에게 대고서, 멸시에 찬 듯한 어조로 외치는 “주문. 복음. 진언. 신조” 등은 자칫 커다란 욕설이나 저주로 까지 비칠 우려도 있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1.9.23. (금)

오갑록

 

 

 

***  (참고자료)  *****************

 

 

□  만트라 명상

                                                                                                             (카페글 중에서 발췌)

소리를 통하여 하는 명상을 통칭 만트라 명상이라 한다. 만트라, 진언, 다라니는 동의어 이다. 주문, 다라니, 만트라, 진언을 행하게 되면 마음이 맑아져 자신 스스로를 예리하고 바르게 볼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인도에서 발생한 모든 종교의 옴(aum) 이라는 소리 말은 진언, 다라니를 기초로 하고 있고, 기독교 아멘도 일종의 만트라로서 옴이라는 소리에서 파생된 주문에 일종이다. 옴(aum)의 소리는 우주 만물의 존재 근원이라 하기도 한다.

 

 

□  티벳인들의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팓메 훔(OM MANI PADME HUM)”은 자비를 비는 만트라로써,  “옴 - 연꽃 속의 보석이여! – 훔”이라는 뜻이다. 이 만트라는 만사 형통을 기원하는 뜻으로 통용된다.

 

티벳인들은 우주 속에 충만하게 깃들이어 있는 아발로키테스와라(觀世音菩薩)의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만트라를 외운다.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를 돕기 위해서도 이 만트라를 외운다. 따라서 이 만트라의 울림 속에는 긍정적인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만트라의 목적은 마음속에 긍정적인 흐름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만트라를 반복하는 훈련은 특히 죽음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그 가치가 빛난다. 이 수행을 하면 모든 것을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힘이 생기며, 간섭하지 않는 힘이 있으면 죽음에 임박해서 또는 중간계로 옮겨가는 중에 당황하지 않고 초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일상 생활 자체를 영적인 수행으로 생각하는 훈련도 중요한 명상 수행이다. 설거지할 때는 그릇 씻는 행위를 마음의 탐착을 씻어 내는 영적인 수행과 연결시켜, 설거지 자체가 기도가 되게 한다. 집을 지을 때는 마음속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과 연결시킨다. 지하철에서 마주친 낯 모르는 사람을 볼 때는 붓다의 눈으로 붓다의 심정을 가지고 바라본다. 문을 열 때는 깨달음의 문을 연다는 심정을 갖는다.

 

죽음과 삶의 영적인 목표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짐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앞에서 설명한 가정이나 직장을 비롯한 현실 생활에 초점을 맞춘 일반적인 준비에 만족하지 못하고 삶 전체를 바꾸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 역시 중간계 과정이라고 여기고, 삶 전체를 바쳐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를 가속시키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  만트라 수련 (呪文修鍊)

 

                                                                                                  (불교계 카페 글 중에서 일부발췌)

주문수련이란 소리 내서 하는 수련법이다. 입으로 어떤 정형화된 글을 읽음으로써 수련을 한다는 것이다. 주문이란 영어로 만트라(mantra)인데, 만(man)은 인간(human), 정신(mental), 마음(mind)을 뜻하고 트라(tra)는 돌보다(take care of)의 뜻이다. 직역하면 마음의 도구(the instrument of mind) 즉, 내 생명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안내자, 동반자(the guide which leads my mind to the source of life)라는 뜻이다.

 

주문이란 본래 우주의 궁극의 소리를 본 사람(rish)이 이를 언어체계로 언어화하여 음절화 상징화 시킨 것이다. 따라서 주문을 읽게 되면 우주와 하나 됨으로써 나의 본래의 생명을 회복하고 우주와 하나로 진동하는 것이다.

 

. “주문이란 영적 에너지의 핵을 형성하는 성스러운 소리의 조화”

 

만트라 곧 '주문(呪文)'은 입을 통해서 소리를 냄으로써 생명의 근원을 마신다는 뜻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언어와 마음의 상호작용, 의식작용과 연관성을 이해해야 한다.

 

우주의 생명의 소리는 비자 만트라(bija mantra) 즉 우주의 종자소리, 창조의 종자 소리인 “훔” 소리와 “치” 소리다. 비자(bija)는 씨드(seed), 종자(種子)를 의미하는 우주의 생명의 근원소리로서 영적 에너지가 응축된 주문의 정수(essence)를 말한다.

 . 훔의 뜻 :무극, 陰 embracing sound: 모든 생명의 근원소리 (불교사전)

 . 치의 뜻: 태극, 陽 sound of releasing/creating: “크게 굳힌다”(大定也)의 뜻

 

. 주문의 뜻

한자 呪文에서 呪(빨주)는 성령(聖靈)을 부르고 우주의 진기(眞氣)를 빨아들일 수 있는 글이란 의미를 가진다. 신(造化神, 聖靈, 神明)으로부터 생명(氣運)을 받는 글, 하늘의 상제님(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는 글(祈禱文)이라는 2가지 의미의 뜻이다.

 

. 주문(mantra)의 어원(語原)

주문은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나오는 소리, 우주의 본래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 그 소리를 본 사람(seer)들이 언어로 상징화 시킨 것이 비자 만트라(vija mantra)이다. 비자는 종자(seed), 만트라는 주문이란 뜻이다.

 

만트라의 만(man)은 인간, 그리고 트라(tra)는 돌봐주다. 또는 도구의 뜻으로 “마음의 도구(the instrument of mind)”가 되는데, 이를 의역하면 “중생의 마음으로부터 우리를 끌어내어, 생명의 근원으로 인도하고 돌봐주는 도구”가 된다. 우리 마음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도하는 안내자(the guide which leads my mind to the source of life)이다.

 

. 주문의 5가지 구성요소

  . rishi, seer : 주문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내고 알린 자.

  . raga, melody : 멜로디, 선율, 리듬

  . devata, presiding : deity 주재신(主宰神)

  . biga, seed sound : 주문의 정수가 되는 소리

  . sakti, power : 주문의 힘(呪力)

 

. 주문(mantra)은 곧 진리의 말씀(眞言)

진언은 곧 진리의 말씀이며 진리로부터 온 성구(聖句)이다. 또 신들이 인간에게 들려 준 생명의 언어이자 깨달음의 언어이다. 신비주의적인 술어(述語)가 아니라 진리와 지혜가 농축된 모든 소리에 대한 총지(總持)이다.

 

. 주문의 3가지 뜻

(惡)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선(善)을 사라지지 않게 하며, 선(善)을 잡아 일체의 악(惡)을 없애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를 깨닫게 해준다. 그러므로 주문은 진리의 세계를 열어내는“참된 말” 이자“도언(道言)”이다.

 

. 신(神)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주문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미묘한 글자들로 이루어진 매우 특별한 언어이다.

 

비코(Giambattista Vico)는 그런 언어들을 “신성한 글” 라 말했으며, 옛 슈메르인이나 바빌로니아 인들은 주문을 “신통력을 가진 단어들” 이라 칭했다. 또 고대 신비주의학파 들은 “잃어버린 말씀”, “잃어버린 화음”이라 했으며 베다에선“Holy Nad”, 이슬람 현자들은 “카르마(Karma)”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정의는 주문은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꾼 매우 특별한 힘을 보유한 “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즉 형이상학(비물질계)을 형이하학(물질계)으로 끌어내린 중간자라 할 수 있다. 신들의 성언(聖言)을 인간의 성언(聖言)으로 정립시킨 것이다.

 

   * 주문은 위대한 성자들에 의해 깊은 명상상태에서 발견된 음절이나 단어 또는 단어들의 집합체들이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언어들이 아니다. 깊은 초 의식 상태에서 내부로부터 수신된 만트라의 음(音)들은 구도자들을 점점 더 깊이 이끌어 완전한 고요의 상태에 도달하게 만든다. (“히말라야 성자들” 中)

 

이렇게 초 의식 상태에서 재건된 주문은 특별한 힘을 보유하게 된다.

 

(神)은 주문에 응감하며 누군가가 마음을 한데 모아 부르기만 하면 그 즉시 모습을 현실계에 드러내 보인다. 단순히 읊조리는 것만으로도 현화(現化)할 수 있는 것이다. 신과의 만남은 곧 자기 자신과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곧 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언어는 자기 자신 안에 또 다른 신의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 각 종교별 주문 형태

 

. 불교

불교는 주문의 백화점을 이룰 정도로 주문이 많다. 그 중 반야심경이나 천수경, 능엄경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은 불교의 핵심교리를 모아놓은 경전인데 불교 신도들은 이것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하고 복(福)을 구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는 “가는 이여, 가는 이여, 피안으로 가는 이여, 깨달아지리다.” 또는 “닿았노라 닿았노라 피안에 닿았노라 깨달음에 이르러 기쁘도다.” 라는 뜻이라고 한다.

 

천수주(千手呪)는 관세음보살에게 드리는 계청(啓淸) 형식으로 된 긴 주문으로 이 주문을 읽으면 천수관음의 자비와 공덕으로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나 죄업이 소멸되고 소원 성취한다고 한다. 능엄주(楞嚴呪)는 천수주에 못지 않은 427구로 된 긴 주문으로 정성껏 읽으면 금강장왕보살의 여러 공덕으로 최고의 정변지각(正遍知覺)을 이룬다고 한다. 그밖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나“지장보살”,“옴마니반메훔” 등의 수많은 진언(眞言) 들도 수 천년간 읽혀져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적인 힘을 받아들여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 기독교, 천주교

기독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도 역시 주문이다. 주문이란 기도행위를 포괄하는 것이며, 정형화된 기도문은 모두 주문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주문은 매우 짧고 간결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은 하느님을 찾고, 찬양하고, 진리의 실현을 바라고, 일상의 행복을 빌고, 시련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문이다.

 

또한 “그리스도”, “할렐루야”, “아멘” 등을 여러 번 반복해 부르거나 특정한 성경 구절을 소리 내어 반복적으로 읽는 것은 성령의 감응을 받아 하나님의 이념을 실천하려는 명백한 주문행위 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使徒信經), 천주교(天主敎)에서 읽는 성모송(聖母頌), 대영광송 (大榮光頌) 등의 기도문들도 소원을 간구하고 절대적인 힘의 도움을 바라는 주문이다.

 

. 유교(儒敎)

사서삼경(四書三經) 역시 주문이다. 그 가운데 주역은 무상하게 변하는 우주변화의 이치가 담긴 경전이다. 경전이면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인데 주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할 사실은 어떤 교리나 성구도 반복하면 주문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유교에선 경전 자체를 크게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어 아예 외어버리는 것을 공부의 원칙으로 삼기 때문에 그 행위자체가 주문을 읽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경전을 반복해서 읽으면 그 깊고도 심오한 뜻이 정신에 각인이 되고 그러면 마음이 밝아져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얻기 때문이다.

 

. 도교(道敎)

도교에서는 “주문의 바다”라 지칭할 만큼 주문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정형화되어 수 천년 동안 전해 왔다. 그래서 수많은 구도자들이 궁극적인 도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주문을 사용해 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교는 수행방법과 지역에 따라 크게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뉘어 졌다. 좌도는 주문이나 부적을 사용하여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수련법이고, 우도는 호흡을 통해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수련법을 말한다.

 

이처럼 주문은 소리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고 궁극적인 도의 세계에 들어가려는 종교적인 원리를 갖고 유불선을 통틀어 널리 사용되어 왔다.

 

. 수련의 목적

 

. 개인의 의식과 우주 의식의 합일(合一)이다.

   . 주송 → 집중(集中) → 호흡과 감정의 통제(감.식.촉)  → 마음(心) 정화  → 진정한 자아를 깨달음

 

. 우리가 외우는 태을주에 대한 교시(敎示)

  “기도행사에는 마음가짐과 함께 장소도 중요하니 집에서 열 번보다, 회의실에서 한 번이 낫고, 회의실에서 열 번보다, 도장에서 한번이 나으니라.”

 

. 만트라 기도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Be still, and know that I am God)”  (시편 46편 10절)

 

인도의 신비가 라마크리슈나는 19세기 벵골 지방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원숭이 떼로 가득찬 나무에 비유했다. 끊임없이 이 가지 저 가지로 뛰어다니며 번잡스럽고 부산한 소동을 벌이는 원숭이 떼이다. 평소에 묵상기도를 드리려고 마음을 모아보면 이 비유가 실감나는 비유임을 느끼게 된다. 묵상기도의 과제는 이런 저런 일로 산란하여진 마음을 고요함과 침묵 그리고 집중으로 되돌리는 데서 시작 된다.  

이런 경지가 바로 시편에서 말하여 주는 목표이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는 말씀에 담겨진 목표이다. 이 목표를 달성함에 도움을 주는 방편이 있다.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앉아 긴장을 풀고 편안한 자세를 취한다. 고요하게 규칙적으로 호흡을 한다.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택한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을 되풀이 한다.

 

동양적인 전통에서는 이 단어나 문장을 만트라(Mantra)라 한다. 기독교 전통에서 이 만트라에 해당하는 문장을 “예수의 기도”란 주제가 있다. 주로 동방정교회에서 사용하여 온 짧은 기도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란 기도문이다.

 

이 짧은 기도문을 수 백번 수 천번 때로는 수 만번에 이르도록 되풀이 하여 기도 드린다. 그렇게 되풀이 기도 드리는 중에 어느 단계에 이르러 혹은 어느 순간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現存)하심을 체험케 되고 뜨겁게 임하는 영적체험에 이르게 된다.

 

 

(기타의 관련 용어 조사)

                                                               

□   전례 (liturgy, 典禮)

 

왕실이나 나라에서 경사나 상사가 났을 때 행하는 의식 또는 일정한 의식. 그리스도 교회의 의식(儀式).

 

그리스도 교회의 전례에는 미사, 성사(성례전) 및 준성사(축성·축복, 구마 즉 악령추방이 여기에 포함됨), 성무일도, 성스런 행렬, 성체 강복식 등이 포함된다. 그리스어로 liturgia는 '민중에 대한 봉사'나 교회의 구제사업을 가리켰는데, 나중에는 교회의 의식을 의미하게 되었다. (사전 인용)

 

 

□   신조 (creed, 信條)

                                                                                                                   (사전에서 부분발췌)

굳게 믿어 지키고 있는 생각. 신앙의 조목 또는 교의(敎義)

종교 공동체의 필수적인 신앙조항에 관한 공인된 간략한 형식의 진술.

 

공중예배나 입교의식 때 전례문(典禮文)의 형태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신조는 일부 개신교 교회의 신앙고백과 비슷한데, 신앙고백은 훨씬 확대된 공식 용어들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종교적 신념은 대개 신조나 신앙고백처럼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으며 의식이나 신화로 표현되는데, 특히 원시종교에서 그렇다.

 

원시종교 이후의 시대에는 신념이 의식집전서, 경전, 법전, 신학적 사변 등 비(非)신조적인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그리스·로마의 고대 종교와 전통적인 도교·유교·힌두교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반면 어떤 종교가 타 문화에 전래되는 경우에는(셈족 문화가 헬레니즘 문화로 전래됨) 단절·변화·개종·다원주의에 대처하는 상황에서 종교의 정체성(正體性)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으로 공적인 신조가 생긴다.

 

진정한 의미의 신조를 소유하고 있는 종교는 조로아스터교·불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 및 몇몇 현대 힌두교 운동 등의 세계 종교들뿐이다.

 

동양의 종교에서는 특정 단어와 어구가 부분적으로 신조적 선언의 역할을 한다. 유교의 '이'(적합한 행동 법칙)· '효'(부모에 대한 도리), 도교의 '도'(道)는 각 종교 전통의 중요한 특징을 총괄하는 것이다. 특히 티베트 불교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만트라'(신을 부르는 성스러운 말)는 세상(로투스)에 아발로키테스바라(보석)가 존재함을 믿는다는 전형적인 표현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종교는 주로 종교의식의 표현을 통해 신앙을 고백하고 종교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소승(小乘) 불교의 신조적 표현은 초기의 '트리라트나'에서 보다 완전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부처·교리·공동체 속에서 피난처를 구한다는 고백이다.

 

신조 형식의 진술은 서양 종교, 특히 3개의 고전적인 유일신 종교에 가장 많다.

 

이슬람교도 개개인의 삶은 '샤하다'라는 고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이 신이며, 마호메트가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고백이다.

 

유대교에서는 연례 절기 예배 때 고백했음이 분명한 초기의 신조 형식의 진술이 히브리어 성서에 보존되어 있다.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하느님의 유일성과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고백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수많은 신조를 내놓았다. 부분적인 이유로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출발부터 뚜렷이 교리적인 성격을 지닌 특수한 복음 또는 '케리그마'(선포)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시대부터 이 선포는 예배시의 공동고백(예를 들면 "예수는 주이시다")과 부분적으로 정형화된 보다 긴 신앙개요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서로마 교회의 신조 작성 과정은 사도신경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사도신경은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례의식과 공중예배에서 쓰인다. 사도신경이 현재의 형태로 사용된 것은 아마 8세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신경은 그 이전의 세례 신조, 특히 고대 로마 신경에서 시작된 것 같은데, 그 내용의 골자는 2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니케아 신조 는 정통 교리에 대한 권위 있는 규범으로 입안 된 것으로,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최초의 에큐메니컬 공의회에서 처음으로 작성되었다. 니케아 신조는 사도신경과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이단의 주장들, 특히 성부와 성자의 동등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 이단설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본질(homoousion)을 지닌다고 규정했다.

 

 

□   신조의 필요성 (기독교)

                                                                                             (블로그 둥지, 글 중에서 일부 발췌)

교회 안에는 신조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신조의 무용론을 펴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교회는 일찍부터 신조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조를 작성하여 이를 교회 공동체 생활의 교리 표준으로 삼고 살아왔다.

 

교회는 이방인들과 이단자들의 비방을 물리치고, 기독교 진리의 탁월성을 증거하기 위해 신앙내용을 선명하게 밝힌 신조를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교회는 처음부터 신앙의 내용 때문에 이방인들과 이단자들로 부터 비방을 받았다. 이때 교회는 이들의 비방을 배격할 뿐 아니라, 교회가 믿고 있는 탁월한 진리를 공적으로 널리 증거하기 위하여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명하게 밝힐 필요를 느꼈다. 이 결과로 작성된 것이 신조였다.

 

종교개혁시대에도 거의 같은 이유로 다수의 신조들이 작성되었다. 로마교회는 개혁교회 신자들을 이단으로 단정하고 박해를 가해 왔다. 이 때에 개혁주의자들은 개혁교회 신자들의 신앙이 성경의 진리에 입각해 있다는 사실을 신앙고백서를 통해 증거함으로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비방을 물리쳤다. 벨직신앙고백(Belgic Confession, 1561)이 그 가운데 한 예가 된다.

 

다음으로, 교회가 이단자들의 침투로 혼란과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에, 성경의 말씀을 따라 이들의 오류를 드러내고, 진리를 밝혀야 할 필요성을 느껴 신조를 작성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고대 교회에서 작성된 신조가 니케아 신경(The Nicene Creed)이고, 종교개혁시대에 작성된 것이 돌트신경(The Caonons of Dordt)이다. 이단은 언제나 같은 본질적 속성을 가지면서, 그 때의 환경을 따라 새로운 의장을 하고 나타날 뿐이다. 그런고로 교회는 변함이 없는 성경 진리를 정리한 신앙고백 내용을 파수하고 후대에 전해줄 사명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교회는 교회의 일치성을 지켜가기 위해 신조를 필요로 했다. 교회는 이단자들의 책동과 거짓 교사들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분열의 위험을 받아 왔다. 교회의 일치는 같은 신앙내용을 고백하고 파수함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면 4세기에 아리우스 이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맞았을 때에, 니케아에서 모인 공의회가 니케아 신경을 작성하여 함께 받고, 고백함으로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의 일치를 보존할 수 있었다. 공적인 신앙고백은 교회의 일치성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신조(신앙고백서)에 대한 무용론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20세기의 교회의 일치론자들 (Ecumenists)은 신조문제에 있어서 매우 부정적이다.

  . 성경의 충족성에 배치되고 

  . 신앙 양심을 속박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며

  . 신학연구의 길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고

  . 교회 분열을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도 한다.

근래에 교리를 초월한 교회일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교리는 분열을 일으키고, 신앙은 연합하게 한다(Doctrine divides and faith unites)"는 말을 하고 있다. 이들은 각 교회가 가진 신조들이 교회의 장벽을 두텁게 하고 교회의 분열을 조장한다고 주장한다. (반론은 중략함)

 

. 신조의 권위

성경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러나 신조의 권위는 상대적이다. 성경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절대 무오한 척도가 된다. 그러나 신조는 언제나 그 권위를 성경에 의존하고 있다. 신조의 권위와 가치는 성경에서 나온다는데 있다.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어떤 교리도 신조에 포함될 수 없다. "신조는 언제나 성경에 호소하고, 성경을 모든 교리의 원천과 표준으로 삼는다."

그러니 신조는 교회의 성경 지식의 계발을 따라 수정될 수도 있고, 보완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하고 오류가 없음으로 수정이나 보완을 할 수 없다(계22:18-19).

 

 

       (5대 신조); 사도신경 니케아신조 큰소탄티노플신조 칼케톤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

 

 

□   기도 (prayer, 祈禱)

                                                                                                               (사전에서 부분발췌)

사람이 하느님, 신, 초월적 영역, 초자연적 세력 등 신성하거나 거룩한 존재와 대화하는 행위. 기도는 역사 전체를 통해 모든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한 개인이 혼자 기도할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모여 공동으로 기도할 수도 있다.

 

사람을 위한 기도는 전적으로 비인격적인 마술에서 떨어져 나와 생겼으나, 기도와 마술은 발전해가면서 끊임없이 엇갈리고 뒤섞였다.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일어섬, 무릎을 꿇음, 구부림, 엎드림, 머리를 조아림)와 손 자세(올림·펼침·쥠·교차함·맞잡음) 등의 기도행위는 복종·존경·헌신의 마음가짐을 나타내며, 금기(禁忌)와 초인적 존재가 주는 위험을 막기 위해 고안된 마술적 기교에서 나온 듯하다.

 

기도를 통해 신적인 존재와 나누는 대화는 그 신적인 존재가 자연 세력이든, 인간행위의 수호자이든, 조상이든, 만물 가운데 최고의 세력이든, 하늘의 신이자 창조주이든 간에 일상적인 사회접촉과 똑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기도에는 '아버지', '어머니', '주'(主), '왕' 같은 호칭이 쓰이며, 마찬가지로 죄의 고백, 간구, 감사, 찬송, 예물(제사)에 대한 말, 기도를 들어주면 예물들을 바치겠다는 약속(서원)을 한다. 원시시대 기도의 특징은 세상의 질병과 위험에서 벗어나고 현세적인 소유를 얻으려는 욕구에 있다.

 

이러한 원시적인 기도는 문자사용 이전시대 사람들에게서 그 단순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기도는 고대 문명에 그대로 살아 남으면서 원래 즉흥적이고 자유스럽게 표현된 기도가 고정된 기도문으로 발전했다. 찬송은 의례식의 경직성과 형식에 치우치던 데서 점차 벗어나, 자연에 나타난 하느님의 행위를 순수히 명상하는 데로 발전했고 이집트 왕 이크나톤의 태양을 노래하는 찬송이 그 절정이다.

 

종교가 영혼과 도덕을 추구함에 따라 사람의 기도생활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했다. 현세적인 소유를 구하는 일은 훨씬 덜 중요하게 되거나 어떤 경우들에는 완전히 사라진 반면에, 영적 및 도덕적 자질,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사랑, 하느님과 하나됨을 비는 기도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영적 기도' 혹은 '마음의 기도'라고 부르는 죄의 고백, 찬송, 감사, 하느님의 뜻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기도가 많아졌다.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무언(無言) 기도가 생겼는데 신비주의자들은 이를 신에 대한 가장 순결한 형식의 경배로 생각한다..

 

찬송 다음에는 하느님의 백성과 온 인류를 위한 중재기도가 따른다. 그리스도교에서 공동기도의 절정은 주기도문으로 예수 당시의 유대인이 하던 주요 기원들을 한데 모은 기도이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가 오기를 기원하는 데 있다.

 

불교에서 그리스도교의 주기도문에 해당하는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생물들, 즉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못하거나, 크고 우람하거나, 중간 크기이거나, 투박하거나, 세련되거나,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이미 태어났거나, 태어나려고 하는 것이나, 모든 존재가 행복한 마음을 갖게 해 주옵소서."

 

4개의 예언종교, 즉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조로아스터교는 즉흥적인 개인 기도와 공중예배뿐만 아니라, 특정한 개인을 위해서 작성해놓은 일일(日日) 기도문에 따라 기도하도록 가르친다.

. 유대교

   남자는 '셰마'(Shema), 즉 야훼를 유일한 참 하느님으로 사랑하라는 계명과

   '18가지 요청의 기도'(Amida)를 하루에 2번씩 낭송

   '기도'(Tefilla)라고 하는 것도 역시, 찬송·감사·간구(懇求)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여·노예·어린이까지도 하루에 3번씩 낭송

 

. 그리스도교 교회 성무일도(聖務日禱)

   수도원 예배당에서 수사나 수녀가 함께 낭송 노래하며,

   재속(在俗) 사제들이 개인적으로 낭송

   성공회와 루터교에서는 간략하게 만든 성무일도를 회중예배 때 낭송

 

. 이슬람교의 '살라트'(salat)

   유대교의 의무적인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하루에 5번(동틀 때, 정오, 오후, 해가 진 직후, 해진 후 2시간 가량 뒤)

   엄격한 규율에 따라 경전을 낭송 (찬송기도, 신앙고백, 마호메트와 信仰偉人에

   대한 감사기도)

 

조로아스터교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도문들을 낭송하며, 이 네 종교들은 모두 의무적인 기도문들을 반복 낭송하는 것이 공덕(功德)을 쌓는 일로 생각한다.

 

                                                             

□   남묘호랭교

                                                                                                                     

남묘호렌케쿄(南無妙法蓮華經)를 한국식으로 잘못 구전된 명칭임. 일연정종(日蓮正宗, 니찌렌정종)이 일으킨 일본식 불교 종파 가운데 하나. 창가학회(Soka Gakkai International, SGI)를 결성(1975년)하여 전파하고 있음. 일본 우익 종파라는 설도 있음.

 

 

□   진언 (mantra, 眞言)

                                                                                                                        (사전 인용)

힌두교와 불교에서 신비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다고 생각되는 신성한 말(구절·단어·음절).

 

큰 소리로 또는 마음속으로만 부르면서 일정시간 계속 반복하기도 하고 한번에 끝내기도 한다. 대부분의 진언은 말 자체에는 의미가 없으나 심오한 의미가 내재한다고 생각되며 영적인 지혜의 정수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특정 주문을 반복 암송하거나 명상한다면 탈아의 경지로 들어가게 되며 높은 차원의 정신적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정신적 깨달음 외에도 심리적이거나 영적인 목적, 예를 들어 사악한 영들의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여러 종류의 진언을 사용한다.

 

힌두교에서 가장 강력하면서 널리 쓰이는 진언은 성스러운 음절인 '옴'(om)이다. 불교에서 중요한 진언은 '옴 마니 반메 훔'(om maṇi padme hūṃ)이다. 진언은 인도 종교의식과 가정 예식에서 여전히 중요한 특징을 이룬다. 힌두교의 많은 종파 입문식에서 구루(정신적 스승)는 입문자의 귀에 비밀스러운 진언을 속삭여준다. 진언은 구루나 그밖의 영적인 스승에게서 구두로 전해 받았을 때만 진정한 효과가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   염불 (念佛)

                                                                                                                            (사전 인용)

부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으로 생각하여 떠올리는 것.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이다. 염불에는 이법(理法)으로서의 부처를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신(法身)염불, 부처의 공덕이나 형상을 마음에 떠올리는 관념(觀念)염불, 부처의 이름을 입으로 부르는 칭명(稱名)염불 등이 있다.

 

대승불교는 찬불승(讚佛乘)이라는 입장에서 부처들의 덕을 칭송·공양하기를 강조했기 때문에 선정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널리 설했다. 특히 아미타불의 정토(淨土)에 왕생하길 바라는 정토신앙이 성행하자 아미타불의 이름을 듣고 부르는 것이 염불로 간주되었다.

 

 

□   나무아미타불 (namo amitayurbuddhaya, 南無阿彌陀佛)

                                                                                                                             (사전 인용)

아미타불은 산스크리트어로 “한량없는 빛”이라는 뜻으로 아미타불(阿彌陀佛)에 귀의한다는 뜻의 불교용어. 주로 정토종에서 숭배하는 구원불이다. 산스크리트어로 namo amitāyurbuddhaya,

 

여섯 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육자명호(六字名號), 또는 줄여서 명호(名號)라고 불린다. 일종의 진언(眞言)으로서, 이 여섯 글자는 원행(願行)이 구족(具足)하므로 이를 부르고 생각하면 왕생(往生)을 얻는다고 한다.

 

나무(南無)는 산스크리트 'Namas'(Namo)의 음역으로서, 나모[南謨]·납막(納莫)·낭모(囊謨)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귀명(歸命)·귀경(歸敬)·귀의(歸依)·경례(敬禮)·구아(救我)·도아(度我)라고도 한다.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으로서, 중생이 부처에게 진심으로 귀의하여 공경하며 따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나무아미타불은 귀명무량수각(歸命無量壽覺)이라고 의역되기도 하나, 아미타불을 무량수불(無量壽佛 Amitāyus)로 볼 것인가, 무량광불(無量光佛 Amitabha)로 볼 것인가 하는 데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남아 있다.

 

 

□   아제아제바라아제와 옴마니반메훔

                                                                                                                (카페글 중 일부발췌)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자 가자 어서 가자 열반의 언덕으로

  절대 공으로서 부처도 없고 스승도 없는 오직 유아독존의 샴막 삼보리만 존재한다.

 

. 옴마니 반메훔  !

  육도 중생을 칭함

  옴, 연꽃 속의 보석이여! 훔

  연꽃 속에 피어 오르는 보석은 무진장한 지혜와 무한한 자비가 들어있다.

 

.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揭諦 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菩提娑婆訶

한자는 중국에서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불경을 번역한 글과 음이다.

원어 기준으로는, 가테가테 파라가테 파라삼가테 보디 스바하

  가테가테 ... 가자가자고 권하는 말

  파라가테 ... 파라는 파라밀다(paramita) 즉 저 건너편, 피안으로 간다는 뜻

     중국에선 도피안(到彼岸)이라 하고, 우리가 사는 곳을 차안(此岸)이라면,

     극락, 낙원은 피안(彼岸)이라 할 수 있다.

  파라삼가테 ... 삼이란 뜻은 합(合)이란 뜻, 현대 수학에서의 SUM과 같은 의미

     우리모두 같이 건너 가자"란 뜻

     대승불교는 홀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성불하자는 정신

  보디 스바하 ... 진리의 성취를 위하여

     인도에서는 "스바하"란 말은 신들에게 다가간다는 뜻이 함축

 

. 옴 마니 반메 훔

 

옴 마니 파드메 훔(산스크리트어, 한자: 唵麼抳鉢訥銘吽) 및 옴 마니 반메 훔은 불교의 천수경에 나오는 관세음보살의 진언이다. 밀교를 비롯하여 불교에서 사용되는 주문 가운데 하나이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육자대명왕다라니경'(六字大明王陀羅尼經) 및 '불설대승장엄보왕경'(佛説大乘莊嚴寶王經) 등에서는, 이 진언을 부르면, 여러 가지 재앙이나 병환, 도적 등의 재난에서 관세음보살이 지켜주고, 성불을 하거나 큰 자비를 얻는다고 주장하며, 이 주문의 효과가 적혀있다.

 

문자적인 뜻은 "옴,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으로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티베트인들이 특히 많이 외운다.

 

 

□   할렐루야 (hallelujah, alleluia)

                                                                                                                        (사전 부분발췌)

“주를 찬양하라”라는 뜻의 히브리어 전례 용어.

 

히브리어 성서의 여러 시편에서 대개 첫머리나 끝에, 또는 두 곳 모두에 나온다. 고대 유대교에서 레위인 성가대가 송가로 부른 듯하며, “신약성서”에는 “요한의 묵시록” 19장에만 4번 나온다. 70인역 성서(유대인들이 번역한 그리스어역 “구약성서”)에 음역 되었고, 불가타 성서(4세기에 그리스도교도들이 만든 라틴어역 성서)에 'alleluia'로 음역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이 이 표현을 예배에 채택한 이래 그리스 정교회, 로마 가톨릭, 영국성공회, 일부 개신교 전례와 찬송가에 사용되었다.

 

할렐루야(Halleluj(y)ah), 또는 알렐루야(Alleluia), 알릴루이야(Αλληλούια)는 히브리어 단어의 음차(표준 히브리어: Halləluya, 티베리 히브리어: Halləlûyāh)인데, 이 단어는 ‘찬양하라(הלּלוּ:Hallelu)’와 ‘하느님을(יָה:yah)’의 합성 단어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이 단어의 사용을 가장 기쁘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일부 종파에서는 사순절기간 동안 할렐루야를 대영광송과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NIV 성경에서는 할렐루야를 ‘praise the Lord’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개신교의 대표적인 성서인 개역한글판 성경, 개신교와 천주교가 공동번역으로 번역한 공동번역 성경, 천주교의 천주교 새 번역 성경 모두 할렐루야를 사용하고 있으며, 개신교의 예배나, 일반적인 생활에서도 할렐루야라는 말의 사용이 일반화되어 있다. 다만, 천주교의 경우에는 할렐루야보다는 알렐루야나 ‘†찬미 예수’의 사용 빈도가 높은 편이다. 정교회에서는 알릴루이야라고 한다.

 

 

□  

                                                                                                                            (사전 인용)

(Om)은 인도의 힌두교와 기타 종교에서, 모든 만트라(mantra), 즉 진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신성한 음절.

 

a-u-m의 3가지 소리로 이루어진(산스크리트에서 모음 a와 u는 합쳐져서 o가 됨) '옴'이라는 음절은 하늘·땅·대기의 삼계(三界), 힌두의 삼신(三神)인 브라마·비슈누·시바, 베다 삼전(三典)인 리그·야주르·사마 등 3가지 중요한 것들을 의미한다.

 

이같이 '옴'에는 전우주의 정수(精髓)를 신비롭게 구현하고 있다. 힌두인들은 기도·찬송·명상할 때 시작과 끝에서 이 음절을 외며 불교도나 자이나교도들도 의례에서 이것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6세기부터 이 소리를 상징한 문자가 필사본이나 비문의 첫머리를 장식하게 되었다.

 

 

□   아멘

                                                                                                                             (사전인용)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예배에서 동의·긍정·소원을 표시할 때 쓰는 말.

 

이 말은 셈어에서 생겼으며, 그 기본적인 뜻은 '굳게 하다', '고정시키다', '확신하다'이며, 이와 관련된 히브리어 동사도 '의지할 만하게 되다', '믿을 만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은 아멘을 보통 '그대로 이루어지기를'이라고 번역하며, 영어 성서는 자주 '진실로' 또는 '참으로'라고 번역한다.

 

아멘이라는 말이 성서에 처음 쓰였을 때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그 말에 동의할 때 먼저 아멘이라는 말을 하고 그 사람의 말을 다시 인용했다. 아멘 다음에는 보통 긍정적인 말이 따랐다. 강조할 때는 엄숙한 서약을 할 때처럼 아멘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쓰기도 했다.

 

유대인의 성전예배에서 제사장이 기도나 송영을 마칠 때 회중이 그 말 끝에 아멘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역대기” 저자의 시대(아마 BC 4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일찍부터 널리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이 예배의식에서 쓰던 이 아멘이라는 말을 그리스도교도 들이 받아들였다. 순교자 유스티누스(2세기에 활동)에 의하면 성찬예식 때 아멘이라는 말을 썼으며, 나중에는 세례의식에서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기도를 마무리 지으려고 아멘을 썼으며, 그리스도교도 들도 모든 기도를 이 말로 마무리 짓는다. 이슬람교에서는 아멘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지만, 첫번째 '수라'를 낭독할 때마다 끝에 이 말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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