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거리의 여인

오갑록 2011. 10. 30. 16:16

온화한 ......

■  거리의 여인

 

 

   이 세상 대부분은 굳이 흑백논리로 나눠가며 생각할 수 있다. 역으로 서로 다른 상이함이 연계되며 하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도 귀착된다. 생명체나 사물은 겉과 속으로 나뉘지만, 둘이 모여 우리가 느끼게 되는 실체가 된다. 위와 아래, 하늘과 땅으로 갈리지만, 그 둘이 모여 행성 하나를 이루고, 밤과 낮으로 갈리지만, 합쳐서 하루가 되며, 지난 날과 앞으로 올 날, 과거와 미래로 갈리지만, 둘을 느낄 때 지금이라는 현실 속에 서있는 내가 된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사람을 구분 한다면 우선해서 남녀의 구별을 들 수 있을 게다. 남녀는 신체조건이 태생부터 그 특성이 갈리고,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또한 신체조건 만큼이나 확연하게 구분되는 차이가 있다. 세상을 내다보는 관심사도 그만큼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의상, 액세서리, 몸 치장에 좀더 관심 두는 것은 여성이다. 여성은 병원으로 치면 소화기계, 비뇨기계, 순환기계 등을 아우르는 내과병동과 같다. 자식을 낳아서 먹이고 기르고 쓸고 닦기를 한다. 그에 비해 남자는 외과병동처럼 부러지고 터진 곳을 잘 다룬다. 힘쓰고 다투고 방어를 한다. 출산 육아 가사와 같은 안살림을 분담하는 것이 여성이고, 물자, 재화, 용역의 조달과 같은 생산활동이나 그의 방어를 분담하는 것이 남성의 역할로서 대별되곤 한다.

 

이는 과거와 같은 농경사회나 수렵시대 사회구조에서의 생각일 수 있다. 이제는 역사 속으로나 사라져 가는 남녀 구분의 가치관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신체 조건까지도 뛰어 넘을 수는 없다. 여자의 출산능력이나 남자의 힘을 내는 체력 조건은 주어진 본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따라 감싸고 있는 가치관의 기본 또한 주어진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자가 옷 매무새를 다독이고, 패션 쇼장에 관심 두고, 육아나 가족 사랑에 더 적극적인 것도 뛰어넘기 어려운 본능의 소산이라고 본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때로는 성격이니 성질이라는 이름으로서 구분 짓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행위에 관하여 여성답다거나 여성스럽다는 말을 쓰기도 한다. 물론, 시대나 지역, 사회나 계층에 따라서 어느 정도 다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근본을 이루는 차이까지도 부정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와 기술의 발달은 원시시대에 비해 힘을 잘 다스리게 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스위치 조작만으로도 누구나 큰 힘을 내는 기계를 작동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힘을 쓰는 남자의 성역이 무너지게 된다. 누구나 스위치만 누르면 총알, 대포알, 미사일, 위성까지도 사정없이 날라간다. 관우니 장비처럼 힘 세지 않더라도 전쟁터에서 힘 쓰고 싸울 수 있는 세상인지라, 국방의 영역에서도 성의 벽은 무너져내리고 있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남녀의 영역이나 그 가치관이 확연히 변화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서양에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급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정치나 국방 분야도 여성이 그 수장에 오르는 사례는 점증하고 있다. 외국에서 여성 수상이니 대통령에 당선 소식도 자주 접하게 되고, 우리나라도 장군, 장관, 의원 머리숫자가 증가하고, 대통령 감으로 여성이 거론되기도 된다. 이제는 국가의 안녕과 운명을 책임지는데 남성만이 역할 하던 시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산업생산 현장의 어느 곳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의 기술과 문화발전은 유사이래 전해온 남녀간 가치관 저변에 깔린 전통적 성(性)의 벽을 허물고, 여성들이 출산, 육아, 가사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상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어느 한편이 더 좋아진다거나 행복하여 지는 것은 아니다. 남녀 둘을 합쳐야 비로소 하나의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의 분담기능을 새로이 형성했다고 해서, 한 쪽 벽을 허물었다고 해서, 삶의 본질에 무엇이 달라질 수 있겠는가? 물길의 흐름에서 새로이 옮겨진 방벽 한 편은 새로이 밀려든 물길로 이내 꽉 차버리는 이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문화라는 사회현상에서 역할분담의 담벽이 한편으로 조금 이동했다는 사실에 불과할 뿐이다.

 

아랍의 회교도 여인들이 얼굴을 가렸던 히잡을 벗어내고, 사회 일선으로 뛰어든다고 보자. 이는 종교적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일 뿐, 행복과 불행이라는, 그네들 삶의 본질을 뒤바꾸는 것과는 별개의 개념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히잡을 벗어 던지는 순간에서 가지게 되는 한 여성의 감정의 굴곡만을 바라본다면야 색다를 것이다. 바뀌는 사회적 가치관과 자신이 가지는 새로운 감정으로서 느낀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것이다. 문화적, 사회적 변화 과정에 속한 한 개인이 경험하는 감정변화 정도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전통적 사회현상에서 남성들이 해 왔던 일이라는 힘쓰며 생산하고 다투며 방어하던 일들은 가치 있는 일이고, 여성들이 해 오던 육아나 가사는 가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그릇된 가치관의 차이를 던져 버린다면, 현대의 남녀간 업무분담의 변화로 인하여 각기 성별로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너무, 왜곡된 생각일까?),  예를 들어, 남자도 나이 들어 할아버지가 되면, 애들이나 돌보며 노닥거리는 행태로 변하게 되는데, 사회 통념상 인정을 하고 받아들이는 현상이므로, 나이 들면서 남성이 겪게 되는 그 변화가 더 불행하게 된다느니, 행복하게 된다는 쪽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본다. 늙어 간다는 것을 주제로 하는 서글픔일 뿐, 일의 질이 떨어지는 데 따른 서글픔은 아닐 것이다.

 

급변하는 현대의 사회구조 속에서 경험하는 현상들 중 한가지가 위와 같은 종류의 가치관 변화에서 오는 느낌들이다. 어릴 적에는 상상도 못할 일들을 이즈음 여성들은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스스로 나이 들고 있음을 자각하곤 한다.

 

고도의 산업사회로 발전 한 만큼, 여자의 사회진출, 업무분담, 사고방식, 가치관 따위가 변화되고 있다. 그러나 내 머리 속에 꽉 박혀버린 고전적 가치관이 때로는 따라잡지 못하여 거북하게 느껴 올 때도 있다. 언론매체의 뉴스 속에서도, 길거리의 행태들 속에서도 그렇다. 가족 구성원들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나의 마음에 내키지 아니하는 여성들 행태나 풍속도를 보고 느끼며 세대차이 난다며 체념하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닐 것 같다.

 

가치관 변화에 뒤진 게으른 안목 때문이겠지만, 새삼스럽다고 비친 것들을 들춰 보기로 하자. 새로운 사회 현상에 몸 담은 현대여성의 모습, 새로운 이름을 붙여서 “거리의 여인들”, 그에 해당되는 몇몇 단면들을 남겨 보자.

 

여성의 일이란 집안일이 전부라고 여기던 예전에는 여성이 직업을 가지면, 직업여성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여성 전문직이 대부분이었다. 봉제 전자조립 따위 공장의 생산직, 버스차장, 간호사, 스튜어디스 등이 생각난다. 부엌의 허드렛일 같은 가사 도우미도 식모라는 이름으로 흔한 편이었다. 시장 통 길모퉁이에서 광주리에 과일이며 생선 푸성귀 한 줌 올려 놓고 쪼그리고 앉아 행인들을 올려다보며 손님을 기다리던 장사 아줌마도 있지만, 그나마도 거리의 여인이라고 하면 “히빠리 미찌”의 몸이나 파는 여인 정도의 상스러운 어감에서는 많이 개선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 걸쳐 여성이 일하고 있다. 군대는 물론 장의업무에까지도 여자의 손길이 닿고 있다. 과학 기술 정치 등에도 많은 진출을 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급격한 산업화로 다양한 일자리가 증가되기도 했거니와, 인구의 증가율 감소와 노령화에 따르는 연령층의 피라미드 구조가 변형되고 기형화된 것도 요인이 될 수 있다. 젊은 일손이 부족하게 되자 노동력 확보를 목적으로 한 정부정책의 변화도 한 몫을 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배경이야 어떻든 여성의 사회진출은 이제 길거리에서도 확연하다.

 

아낙네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 떨며 운동 다니는 것은 예사이다. 교통질서와 안전 글귀가 적힌 어깨 띠를 두르고 자녀들 등하굣길을 보살피는 도우미도 여성의 직업이라면 직업이다. "주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 어제 오전, 탄천변에 운동 다녀 오는 길목에서 어느 중년 부인이 내게 다가오며 전단지를 쥐어주려 하며 건넨 말이다. 종교는 성별에 무관하게 종사해 온 일거리 였을지 모르지만, 거리에 나선 전도자는 여성들을 더 자주 접하는 것 같다.

 

새로 개점하는 점포 앞이나, 프로야구 경기장의 응원석 앞에서 홀라당 벗다시피 한 옷차림으로 춤추는 무희들 모습은 이제 일상 중에서도 흔하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유니폼 차려 입은 은행 여직원들이 일렬횡대로 서서 출근길 행인들에게 이른 아침부터 인사하는 선전 행각도 비교적 오래된 여자들의 일하는 모습이다. 응시생 열명 중 일곱 여덟은 여성들로 보이는 요즘 운전면허시험장의 특색 있는 풍경도 거리로 쏟아져 나오려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모습은 아닐까?

 

이번에 치렀던,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유세장 모습이 새삼스럽다. 여당 출마자 나경원 여성후보는 지원 유세자로 박근혜 전 대표를 대동하고 영등포 등 서울지역 유세장을 누볐다. 한 여성은 서울시장 후보로서, 또 한 여성은 국가의 운명을 책임질 미래의 대선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는 여성이다. 두 여성 정치인이 서로 손 잡고 길거리 유세 중인 모습이야말로 “거리의 여인”으로서 백미처럼 보였다. 안철수 원장의 지원이 알려진 박원순 경쟁후보에 대해 “남자가 쩨쩨하게 치졸한 선거캠페인을 하지 말라”는 당찬 말을 남겼다. 어감에 숨은 참 뜻을 머리 속으로 그려 본다. “남성이 쩨쩨해선 좋지 않고, 여성이라면 몰라도?” 유세장에서 그녀들이 남겼다는 “국민의 꿈과 더 나은 사회를 이루자”는 말들은 우리사회에서도 여성의 역할이 성(性)의 벽을 허문지 이미 오래라는 생각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우리사회에서 집안 일을 맡았던 여성들은 이미 거리로 나왔고, 모성애로 돌봐 온 육아나 가사라는 그 동안의 집안 안살림들은 돌볼 필요 없는 과연 하잘 것 없는 일들이었을까?

 

가족의 영양과 건강, 휴식과 안정, 자녀의 양육이나 사랑, 보금자리는 누가 맡아서 꾸려가야 하는가? 물론, 거리로 나선 여성을 대신하여 역할을 할 제도적인 기구들이 보완된다고는 하지만, 자녀에 대한 양육 보육을 보육원이 충실할 수 있을지 의문이고, 눈만 돌리면 주변에 흔한 뿅뿅장, 오락장, 헬스장, 사우나장, 콘도, 리조트 시설들이 가정에서의 휴식과 안정을 대신할만한 도움을 얼마나 줄 수 있을 것이며, 개발된 초 강력 비타민제나, 병원 의원이 가족의 기본영양과 기초건강까지도 위탁 할만 한지는 의심스럽기만 하다. 일부분은 도움이 되겠지만,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부족하고 모자라는 틈새가 불가피할 것이다. 그래서 여성들이 공들이며 전념하던 예전만큼 기대할 수 있을 지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여성의 성공, 성취감, 영광이라는 잣대 위에서 세워진 기계적인 사회, 경제적 효율성, 생산성, 합리성 등을 우선하며,  “거리의 여인”을 우상화 하려는 사회, 일손을 우선하는 기계적인 사회 속에서 잊혀지거나 잃고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전적 사회의 온화한 가정에 떠돌던 감성적이고 서정적인 삶의 여유들 중 일부가 아닌지 모르겠다. 배움도 모자라고, 차린 행색도 남루하여 남들 앞이나, 길에 나서기를 항시 주저하곤 하셨던 나의 어머님이 우리 가족에게 주셨던 것처럼, 자기 가족에게 쏟던 모성애며 인정미는 상당부문 밖에서 무심코 흘려 버릴 것이다. 삭아서 구멍 난 상수도관에서 물새듯 길에서 값없이 새나갈 것이다. 그 구멍의 크기란 밖으로 나도는 시간의 크기와 상관관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거리에 나선 여인의 가정에서 옛날과 같은 온화함, 여유로움, 안정감을 같은 크기로 기대한다면 욕심일 수 있다. 한편에서 더 얻는 만큼 다른 한 구석은 비워지는 것이 순리는 아닐까? 그것이 돈이던, 물자던, 다른 분야에서 얻게 되는 성취감이던 간에 정이나 마음 씀씀이 따위와  맞바꾸게 될 수 밖에 없는 구도가 될 것이다.

 

막 어둠이 내린 어느날 초 저녁, 아파트 단지내의 유아원 앞에서 보았던, 잠시 한 순간의 장면을 말해 보기로 하자. 직장여성처럼 보이는 정장차림의 한 아낙이 퇴근길에 아들을 데리러 유아원에 왔다 가는 길인가 보다. 아이 손을 잡아 끌며 종종걸음으로 유아원을 나서는 뒷모습이 안쓰러워 보인다. 지루하게 기다렸다는 듯 투정어린 어린애를 나무라듯 달래가며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지는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며, 허전함, 허망함, 텅 빈 듯한,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아쉬움을 느껴야 했다.

 

사회생활 구조가 변화 되면서, 거리로 나서게 된 여성들의 손길과 정성이 집안에서 머물지 못하게 되는구나! 그 만큼을 어디서 어떻게 보완해야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것인지, 현대사회의 새로운 과제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2011.10.29.(토)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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