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바탕과 근본, 그리고 순리

오갑록 2009. 12. 26. 14:23

순리 ......

 

■  바탕과 근본, 그리고 순리(順理)

 

 

어항의 바닥에서 방울방울 올라 오는 공기방울을 보면 그 공기방울이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텅 빈 허공에서 어항에 갇힌 물이 이물질임을 망각하곤 한다. 어항의 바탕은 물이라는 관념이 판단을 흐려 놓은 탓 때문이다. 이 어항처럼 우리가 세상과 그 안의 사물들을 바라볼 때 시작과 끝을 한정 짓곤 하는 무언의 약속들이 진리, 진실, 원리라고 여기는 것들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약속들이란 논고(論考) 대상의 앞뒤를 잘라 버린 채, 보거나 경험하고, 배우거나 느낀 것만을 무의식 중에 수긍케 하고 인정하려는경향들 이라고 표현함이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떤 사안의 막막함을 말할 때, 앞이 캄캄하다고 한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세상의 바탕은 그러한 때의 생각과도 같은 캄캄한 어둠이라고 그려 본다. 태양과 같이 어둠을 밝히는 행성들은 그 별의 생명이 다하는 한정된 시간 동안, 한정 된 거리까지만 빛을 발산한다. 현대 과학문명은 언제인가는 그 빛들도 소실되어 어둡게 될 운명을 지니고 있음을 예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하고 밝다는 사실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낸다. 태양처럼 빛나는 밝은 별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마치 세상의 바탕은 밝고 환한데, 지구가 햇볕을 가려서 밤이 오고 어둠이 잠시 오는 것인 양 착각하기도 한다. 들판에 서면 땅이, 바다 가운데서 보면 물이 세상의 근본이자 바탕처럼 보이지만, 그간 익힌 과학 토막지식은 하늘 위로 더 크고 넓은 광활한 세상이 있다고 한다. 산마루 정상에 올라서 바위 턱에 걸터앉아 멀리 이어지는 앞산의 능선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선()을 느낄 때가 있다. 그렇지만 지구의(地球儀)의 한쪽 위에 걸터앉아 우주의 다른 한 편을 바라본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있는 한계를 인식하고 있기에 그 한계를 벗어 난 먼 곳에 관하여는 관심도 없으려니와 볼만한 가치도 없다고 포기한 때문이다.

 

캄캄한 것이란 우리가 볼 수 있는 범위의 파장을 가진 전자파가 있고 없음에 따른 구분이지만, 너무 멀어 볼 엄두를 낼 수 없는 먼 곳도 캄캄하고아주 가까운 곳도 캄캄하다. 너무 커도 캄캄하려니와 나노미터의 세계나, 원자 쿼크의 세계처럼 아주 작은 세상도 캄캄하기는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시력이 가시광선 파장 범위의 전자파에 의해서 반사된 사물의 색상만을 한정해서 인식하고 있음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가시광선 파장범위를 벗어난 전자파만을 반사하는 반사물체가 있다고 상상해 보자.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그것도 마찬가지 물체일 것이다. 우리가 있음과 없음을 판단하는 바탕이란 가시광선이라는 한정된 파장범위 내에서 인식하는 한정된 범위의 실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디, 눈으로 본다는 것만이 그러 하겠는가? 인간이 시각으로 느낄 수 있는 파장의 한계처럼, 인간이 다른 오감을 통해서 지각하는 감각들 모두가 한정된 범주 내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소리며 촉각, 냄새며 맛과 같은 감각은 모두가 온도, 압력, 산도(酸度) 등의 한정된 물리.화학적 요소로서 전달되므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이란 어느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한 부분에 불과 하다면, 이 세상의 전체 또는 전부에 해당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더 있을 수 있을까? 캄캄한 우리 앞에 놓여 진, 진실의 실체를 우리에게 주어진 감각의 잣대만 가지고는 가늠하기 어려우리라는 상상을 펴 본다. 세상의 이치를 추정하고 전망하는 것들도 감각을 통해서 인지된 바탕 아래 성장한, 한 겨울 처마 밑의 고드름 가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고드름 조각을 두고 때로는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들 열 올리며 평하곤 하지만, 그리 성장한 고드름이란 아침 햇살에 녹아내려 처마 밑은 이내 허공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허공은 파란 하늘과 닿아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그 실체를 그리곤 한다. 하늘의 바탕이 캄캄한 줄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 가는 것이 우리들, 보통 사람들이다.

 

종교 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현대 종교에서의 내세관(來世觀)들도 진리, 진실, 원리 또는 약속 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나름의 특색 있는 색을 띄우며 주장이 확실하다. 그러나 한 발짝만 앞으로 다가 가서 보노라면 논거(論據)의 앞뒤가 단절된 채 별도의 믿음이 요구됨을 알게 된다. 그 내세관(來世觀)의 바탕이나 근본들이란 이전의 누군가가 했다는 일(생각 예언 말씀 등)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내용들을 몇 세대가 바뀐 뒤에 명문(銘文)화 하여 전래되는 경전(經典)에 뿌리를 둔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 때문에누가, 언제, 어떻게, ?” 하는 식의 의문을 가지고 종교를 대하려는 순간, 그 믿음이라는 모습의 우아하고 찬란한 고드름은 녹아내려 허상이 되기 십상인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대다수 종교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이건 그렇지 못한 자이건 간에 서로가 알지 못하는 캄캄한 곳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확인 할 길은 마찬가지로 캄캄하다. 밑바탕이 캄캄하니 그 위에 그린 그림 역시 캄캄한 격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태양이 꺼지는 먼 미래가 있다면, 단지 칠흑처럼 캄캄한 암흑 속의 허공일 것이라고 포기하기는 싫어한다. 앞뒤가 잘려 단절되거나 왜곡된 논리가 될지언정, 빛이 있어 밝은 곳이 세상의 바탕이고 우리의 근본은 그곳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믿음에 기대어 밝은 희망을 걸고 무지개처럼 찬란한 그림 그리기를 선호한다. 그런 믿음의 소리 듣기를 선호한다.

 

어항의 물 속을 떠 오르는 공기방울을 바라보며,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의 바탕이 물인지 공기인지를 착각하는 것은 어항을 노닐고 있는 금붕어나 방안의 나 자신이나 크게 다를 바는 없다. 어차피 세상의 바탕은 물도 공기도 아닌 캄캄한 그 무엇일 수 있으리라는 상상을 한다면 말이다. 사실이니 진실이니 진리니 하는 모든 것들이 토막 나고 단절된 논리로 구성 된 어항 속의 공기방울과도 닮은 토막상식이라고 한다면, 세상의 이치를 앞서 깨달은 선각자라는 분들도, 결국 잘난 체 하는 이들의 큰 목소리 정도로 폄하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갖고 싶어 하고, 빛을 향해 쉽게 굽는 식물의 굴광성(屈光性)과도 같은 특성을 닮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단절된 논리를 따지기 이전에 달콤한 믿음을 가지려고 하는 본성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나의 수명은 한정된 것이며, 내일 아침에 뜨는 해를 내가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리라는 상상을 깊이 있게 진정으로 걱정하기를 싫어하는 속물들이, 인간이라는 이름의 생명체라고 한다면 너무 가혹한 말이 될까?

 

   세상의 바탕은 밝은 것이고, 내일도 밝은 태양은 빛날 것이다.

   내일도 오늘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즐기리라.

   그 찬란한 빛, 맑은 공기, 바람, 푸르고 높은 하늘, 들풀과 나무, 대자연의 풍족함을……

   그 속에서나와 우리가 오늘도 그랬던 것처럼 웃고 즐길 것이며,

   오늘 보다는 더 멋진 내일이, 올해 보다는 더 훌륭할 후년을 기대하며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있다.

   올 해에는 못다한 아쉬움으로, 마음 한구석 파랗게 멍든 년 말을 채색하면서도,

   희망과 설레임이 교차하는 가운데 후년을 기다리곤 한다.

   후년에도 건강하고, 모든 일이 잘 되라는 덕담에 귀가 솔깃해 하곤 한다.

   후년에는 한 몫 더 챙기고, 출세도 하고, 행운을 잡아 성공하리라고……

 

년 말이 다시 오고, 새해를 맞으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다 본다. 그리고 해마다 그리하여 오던 버릇처럼 다짐도 하여 본다.

 

   바탕은 캄캄하지만 환한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잊은 채 지내는자신을 일깨우고,

   캄캄한 것이 세상의 바탕이고 근본일 수도 있다는 마음 아픈 채찍질을 아끼지 말며,

   어둠을 알기에 밝음을 알고, 때로 겪는 어둠과 밝음의 교차함도 순리로서 순응할 줄 알며,

   두려움과 괴로움, 슬픔과 기쁨, 자만과 교만, 사랑, 아픔, 미움……

  시시때때로 일렁이는 마음을 평정하고,

   흰 바탕에 쓴 검정색 글씨와, 검정 바탕에 쓴 흰색 글씨가 어떻게 다른 지를 생각하고,

   어떤 길이 순리인지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면 삶의 가치는 돋보일 것이라고……

 

   캄캄한 어둠 속을 가르는 한 줄기 불 빛은 언제인가 어둠으로 들어 가는 것이 순리가 아닐까?

   내려 흐르는 물길이 순리라면, 증발하고 휘발하고 응축하는 물길 또한 순리가 아닐까?

 

1222일 동짓날 이른 새벽, 탄천변을 걸으면서 졸졸대며 흐르는 물소리에 거기 물이 흐르고 있다고 느끼고 새삼스러워 한다. 졸졸거리는 그 물의 근본은 무엇일지도 떠 올려 본다. 깨끗하고 성스러운 물이라는 생각도 한다. 온갖 동식물의 체 내를 흐르며 거쳐서 나온 생명수도 있을 터이고, 태평양과 대서양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내려 와 산골짝을 거친 것일 수도 있고, 금강산 백두산 히말라야의 고산의 적설에서 증발된 흰 눈을 거친 성수(聖水)가 구름 타고 바람 타고 동네 골짜기를 거친 것일 수도 있으며, 먼 대륙의 하늘을 거치며 날라와 이 땅에 내리거나, 물 속 땅 속을 지구의 나이만큼이나 오랫동안 오르내려 헤매다가 지금 내 옆을 지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깊은 감흥을 물소리와 함께 만져 보기도 한다.

 

더럽고 추한 생각으로 냄새 배인 소리 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 본다. 윗동네서 바삐 사는 어느 분의 몸 속을 돌다 배설된 더러운 오물들 일 수도 있다. 똥오줌 국물, 손발 닦고, 양치 뒷물과 몸이나 거시키 씻어 오염 된 물방울도 섞여 있을 것만 같다. 어디, 물이나 수증기가 그 뿐이랴? 공원묘지의 지하수 물길 따라 온 물도 있을 터이고, 화장장을 거쳐 승화 한 수증기도 이 동네에서는 응축하지 말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니 졸졸거리는 그 물 속에는 세상 모두가 함께 녹아 있을 수도 있다. 물이 발견된 행성이 아직까지는 지구뿐이라고는 하지만, 온 세상을 다 거쳐, 우주의 구석구석을 거쳐 온 것이 아니라고는 말 할 수가 없다. 세상의 바탕이 무엇인지 캄캄하기 때문이다. 캄캄한 한 겨울의 새벽녘, 어둠 속에서 들리는 개천가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 가운데 우주의 캄캄함을 읽어 보기도 한다. 드넓은 이 세상을, 땅 위의 물길 따라 수증기가 날라 온 하늘 길 따라 상상 속에 한 바퀴 휘 둘러 보기도 한다. 순리대로 흐르는 물길들을 머릿속에 되뇌어 오르내려 가며 따져 보기도 한다.

 

    천 년을 흘러 온

    소리 들린다.

    천 년뿐이랴?

    만년, 억년, 억겁의 소리다.

 

    이끼 끼어 검고 추한 물,

    더러운 개천의

    흐르는 물 소리일 뿐이랴?

    맑고 고운 소리, 성스러운 소리다.

 

    괴로움과 고통의 신음

    한 서린 소리도 아니요.

    죽음 씻고 흐르는

    구슬픈 소리도 아니다.

 

    기쁨과 환희의 노래

    어우러진 여운으로

    새벽 안개 속을 아련히 구르는 소리다.

    새 생명 키우고 난

    생명의 소리

    사멸과 소생이 어우러진 삶의 소리다.

    생동하는 자연,

    영혼과 영생 떠올리는

    대자연의 소리다.

 

    한 겨울 이른 새벽 녘

    아침을 가르는

    개울가 물소리에 마음을 비운다.

 

이제 나이 든 탓이리라,

혈 중의 당 수치가 높다는 당뇨 탓도 있으리라,

당뇨에는 운동이 좋다 하니 겨울 꼭두새벽도 마다 않고 하는 걷기 운동 탓 때문이리라,

들리는 물소리가 아직은 즐겁게 들릴 만큼 세상살이 한가하기 때문이리라,

년 말이 다가오니 새해 맞을 생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세상의 바탕은 땅도 물도 될 수 있고, 어둠도 될 수 있다.

지금을 생각 하고 있는 자신일 수도 있다.

걷고 있던 어둠 속, 개천가의 졸졸대며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 길이

내가 아는 세상의 순리이려니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오늘 아침운동을 마감한다.

 

    2009. 12. 25. (금)

    오갑록 (K L Oh)

 

'◆ 관심과 의문......眞 > . 한 때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산  (0) 2010.05.14
바칼로레아 논술  (0) 2010.03.04
기우(杞憂)  (0) 2009.11.18
죄 (罪)  (0) 2009.10.06
젊음과 건강함의 역설적 의미  (0) 2009.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