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함 ......
■ 기우 (杞憂)
손가락 굵기가 될까말까 하는 갸름한 찐 고구마 그릇을 옆에 끼고 한 알씩 골라 까 먹으며 혼자서 멍청하게 헛된 생각을 굴려 본다.
충청도 골짜기에서 가을걷이 한 속이 노랗고 당도가 높은 호박고구마다. 쓸만한 것은 골라서 돈 사고 남은 잔챙이들 이지만, 심심풀이 먹기에 좋다며 시골에서 보내온 것이다. 따끈할 때는 부드러운 촉감이 좋고, 찐 고구마 사발의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수증기가 늦가을 거실에서 내려다 보는 창 밖의 바람결에 뒹구는 낙엽과도 잘 어울린다. 구수한 내음이며 달착지근한 특유의 깊은 맛이 가을을 몸으로 느끼게 하여준다. 그리고 시골의 넉넉한 정취들이 위로 피어나는 김 마냥 간간이 떠오르곤 한다.
미국에서 늦깎이 학생이 되신 김 사장님이 자랑스레 보내주신 최근 소식을 떠올리며, 고구마 사발 옆에서 삶의 색다른 의미를 역설적으로 감지하게 된다.
대륙의 땅에서 낚시에 나가는 날이면 “쌔먼” 두 마리씩(법으로 두 마리만 허용) 낚아 포식을 즐긴다는데, 허름한 아파트 한 구석에서 잔 고구마 주물럭대고 있는 나 스스로의 모습이 새삼스레 비교되는 것만 같다.
고구마면 그냥 고구마일 뿐이다. 큰 고구마 따로 잔고구마 따로는 아니다. 먹거리면 먹거리일 뿐, 대륙에서 폼 나는 복장과 거창한 낚싯대로 건져 올린 “쌔먼”이, 모아 놓은 잔챙이들 찐 고구마 보다 더 멋질 것처럼 여기는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생각은 아닐까?
하루종일 앉아 있기가 뭐한 것 같아 요가 킥복싱 에어로빅을 매일 한시간씩 신청했는데, 넓은 교실에 때로는 수강생이 김사장님 홀로라고 한다. 젊은 여선생과 함께 ……, “젊은 여선생”이란 말의 어감이 좋기는 하지만, 배우처럼 미모일 것이라는 상상은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만 같다. 김사장님이 자랑 삼아 늘어 놓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젊기는 하지만, 깜둥이거나, 뚱보이거나, 바짝 마른 체형에 빨간 머리, 매부리코, 피부는 내 얼굴 판 마냥 주근깨가 쫘~악 퍼진 별로 정감가지 아니하는 젊은 여성은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상상을 흘려 본다. 잔챙이 고구마를 까서 어그적대고 먹어가며 해 보는 실속 없는 잡념들이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 이 회장님 근황을 보면서도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한다. 지난 날 회사생활 가운데도 뵐 때 마다 작아지며 초라하던 스스로의 모습이 이즈음 언론에 비친 모습을 뵙는 순간에도 변함없이 여전함을 발견한다. 세미나 참석용 경비의 지출결의 결재를 받던 일이 그 분과의 첫 대면이었고, 말단 사원이 내미는 사소한 결재에 언짢아 짜증 섞인 그분 모습이 여태껏 지워지지 않는다. 회사를 떠나 이제는 멀어져 버린 남이라고 여기면서도 은연중 비교되는 그 마음은 버리지 못했다. 나에게 남겨진 그분에 대한 잔영(殘影)은 고구마라고 모두 같은 고구마가 아니고, 먹거리라고 모두 같은 먹거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때로는 우리가 지닌 자산의 가치로서 사람의 차이를 비교한다. 또는 지닌 학식과 덕망으로서도 사람의 차이를 비교한다. 스러져 간 뭇 별들처럼, 얼마나 많은 큰 인물들이 우리의 기억 속에 흐르는가? 개중에는 종교적 지도자도 있고 정치적 인물들도 있다. 일부는 학문과 덕, 기술. 기능. 무예와 같은 재능으로 역사나 현실 속에 살아 있기도 한다. 재물이며 거대 자본으로도 같은 기능을 보이기도 한다. 그 크기의 차이가 사람 됨됨이의 차이로서 인식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우리 어머님처럼, 큰 고구마만 고구마로 여기는 이가 많다. 내게 쓸모없는 잔챙이는 쓰레기와 다를 바 없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배고파 허기진 이들에게는 맛난 고구마임이 분명하기도 하다. 결국 어떤 자리에서 보는가에 따라,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소중한 음식물이 될 수도 있다.
우리 삶의 언저리에서 눈 여겨 본다면 잔챙이 고구마를 닮은 것은 얼마던지 많다. 열에너지, 물 한 방울, 헌 옷가지, 푼돈 같은 것들도 생각할 수 있거니와, 여가 나는 짧은 시간, 잔재주, 공명심, 얄팍한 사랑이나 사소한 건강의 주제들도 때에 따라, 생각하기에 따라, 처지에 따라 그 명암과 희비가 엇갈리기도 한다. 그들이 비록 같은 사안이라고는 해도 긍정적이며 쓸모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그 가치를 높이는데 항상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배고픔을 달래는데는 찌질이 못생긴 잔챙이 고구마도 고깃덩이와 다를 바 없음을 알고서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의 여정에서 작은 사랑의 실천도 중요하고, 작은 건강의 주제들도 항상 중요하다. 작게 여기고, 흘려 넘긴다면 쓰레기가 될 것도, 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면 우리 삶은 보석처럼 한층 더 빛나게 되리라고 본다.
우리는 별 것 아닌 사소하고 작은 주제에 대한 생각 차이 때문에, 같은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세상으로 반전이나 되는 듯 아우성치는 가운데 요란스레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행여, 이를 두고 부지런하고 열심으로 살아 간다고 말 하는 것은 아닐까? 떼 부자와 알 거지, 장수와 단명, 천재와 바보, 성공과 실패, 영광과 망신, 은혜와 원한, 승리와 패망 ……
옛날 중국 기(杞)나라에 살던 한 사람이 “만일 하늘이 무너지면 어디로 피해야 좋을 것인가?” 하고 침식을 잊고 걱정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 “기우(杞憂)”이다. 앞일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잔챙이 고구마로 시작한 역설을 들춰가며, 삶이 별 것도 아닌 것을 큰 고구마 타령하며 그리도 부지런하고 열심으로 살아가느냐고 반문한다면, 허무주의자나 터무니 없는 기우(杞憂)에 불과할까? 찌질하며 작고 못난이를 자처하면서도 거상(巨象)의 죽음을 단지 재미로만 보는 통 큰 이와 봄들판을 누비는 민들레 홀씨나 잔물결 반짝임에서 존재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쫌생이를 비유하는 말에 마음이 와 닿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래도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하는 말이 공연한 말은 아닌성 싶다. ㅎ
2009.11.17.(화)
오갑록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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