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밀알

오갑록 2012. 3. 26.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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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알

 

 

밀의 낟알이라는 뜻의 밀알은 어떤 일에 작은 밑거름이 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두 번 째 뜻은 근세에 들어서 우리나라의 기독교 교세 확장과 함께 성경에서 유래한 의미로 널리 퍼진 결과 인지도 모른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I tell you the truth, unless a kernel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only a single seed. But if it dies, it produces many seeds.

         (JOHN 12 : 24)

 

많은 열매를 맺음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말씀일까?

내가 배고파 느끼는 허기의 고통을 해소하여 주는 알약의 기능을 갖기 때문일까?

와 함께 하는 이 시대, 이 사회의 우리들이 먹으며, 삶을 유지 시키는 기능이 있기에?

 

내 종족의 씨알을 불리는데 밑거름이 되기에?

그렇다면, 종족의 씨 불리기는 왜 중요할까?

뭇 동식물들의 종족 보존 본능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를 불리고 남기고자 하는 사안들은 몇 단계만 더 깊이 있게 따지다 보면 답이 흐려지곤 한다. 나와  가까운 친인척이나, 재벌의 수장, 교단의 수장, 정치판의 수장처럼, 나나 우리 사회가 떠나 보내기 아쉬워 하는 분들이 세상을 뜰 때면 새삼스레 떠 올려보곤 하는 생각이 있다.

 

이 세상에 남겨 놓는다고 하는 의미들, “씨나 후손, 돈이며 재물, 명성과 명예, 영토의 확장…… “ 이들을  더 많이 남겨야만 하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일생을 보내며 우리가 무엇인지를 더 남기고파 함은 필요로 하는 어떤 목적 의식이 꼭 있어서일까? 목적  없는 단순한 본능의 소산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으로 점 찍곤 한다.

 

2009.2.16.()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 분은 씨를 불리기  위한 자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재물을 남기신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치장 된 목관과 의상으로 감싸여 흙에 묻혀 산화될 조그만 육신, 장기기증으로 넘겨 주시고 가셨다는 각막 두 조각이 다 일 수도 있다.

 

수혜자 누구인가는 그의 나머지 생애에 걸쳐 빛을 전해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르고 존경하던  신도며 그 분의 덕으로 은혜를 경험했던 소수의 일반 국민들의 기억 속에 점점이 남겨진 허상들이 될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 잊혀지는 특성을 갖는 것이 그 기억 속의 허상들은 아닐까? 그러나 교단의  흥성을 기리며 사도로서의 몫을 담당 하고자 하시는 분이라면 좋은 본보기로서 좀 더 오래 남겨지실 만 하리라는 생각도 가져 본다.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셨노라 는 칭송을 받을 만 할까? 교세 확장을 노린 교단의  적극적인 홍보물로 전락하여 눈꼴 사나운 치장거리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근심 어린 생각도 하여  보지만, 나의 눈에는 그러한 부정한 마음 보다는 순수 함이 더 빛났던 장례 절차로 비춰졌다.

 

출상하던 날 황사 바람 모질게 불던 봄날이 야속하게 느껴지던 것으로 미루어 비록 내가 교인은 아니지만 마음이 동했었던 듯 하다. 부족한 믿음이나, 허전하게 텅 빈 현대인들의 각박하게 살아가는 마음 속 빈 공간을 알찬 무엇인가로 채워주고 가셨노라고 도 미루어 짐작하여 보게 된다. 그를 밀알로도 비유 할 수 있을까?

 

 

광고주를 의식하며 시청자의 눈을 현혹하여 시청률 높이기에 급급한 TV 방송사들의 볼품 없는 경영행태를 우리가 비난하는 것처럼, 세속에 찌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보다는 단순한 교세 확장에 눈 높이를 맞춘 듯한 신도들 머리 수 늘리기에 열중인 종교단체가 적지 않다고 걱정들 한다.

 

신교 구교 불교 등 교단의 년차 별 신도수 증감율 다툼이 비난의 대상이 되곤 한다. 교세확장의 면에서 보면 고인이 이끌던 시기의 교세 확장 세는 어느 때, 어느 곳 보다 못하지 않을 듯하다. 좋은 시기를 만나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만한 덕목을 지닌 분으로 비춰지고 있다.

 

지식이나 말씀 보다는 덕으로 쌓아 올린 탑으로 여겨진다.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서 신앙심이 부족하던 이들에게는 믿음의 도를 더해 주고, 신도의 수도 늘릴 수 있게 되니,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노라 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래도 생각을 그 곳에서 한 발짝만 더 나아가면 그 의미가 빛이 바래곤 한다. 더 많은 신도 수와, 믿음의 도를 더하여 영생을 구한다? 신앙과 믿음으로 두터운 철창을 쳐가며 자신을 굳건하게 다지기 전에는 그 답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어렴풋한 감으로 눈시울을 내려 깔아 버리곤 한다.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운명, 죽음과 사후, 아르케에 관한 문제 ……

 

 

나의 백모님께서도 얼마 전인 225 별세 하시어 장례룰 치렀다. 출상을 치르는 중에 91세의 시골 할머니가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하여 본다.

 

백모님은 16녀의 자녀를 둔 딸 부잣집 노인이었다첫 딸을 낳고서 둘째는 아들 보기를 기원하며 첫 딸 이름을 금남이라고 지으셨단다. 둘째 딸을 보고서도 딸 좀 그만 낳게 금()하여 달라는 소원을 딸 이름에 붙여 금년으로 작명 하셨다. 그 아래 동생들도 아들을 바라는 흔적이 딸들 이름에 지금도 묻어 있다.

 

금남, 금년, 삼남, 금님, 금숙, 금옥, 부모가 여섯 딸들 이름에 남겨 놓고 가신 당시 소원의 흔적이다.

 

맏딸도 이제 칠순이 다 되었다. 나로서는 사촌 누님인 그 맏딸의 집안은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자를 모두 합하면 가족 수가 26명이나 된다고 한다. 둘째 딸 금년 네는 19…… 일곱 남매들의 가족을 모두 합하면 큰어머님과 연계된 가족 수가 100여명은 족히 될 듯하다.

 

91년을 사시는 동안 남겨 놓고 가신 씨족의 숫자 이다. 모계혈족은 인체 세포내 미토콘드리아의 DNA 유전자가 어머니를 닮아 다음 대로 이어 내려간다고 한다. 결국 닮은 표식으로 점 찍은 적지 않은 후손의 씨알을 이 세상에 남겨 놓고 흙으로 가신 것이다.

 

그냥 보내기 서운한지 가락지 한 개 끼워 놓고, 장의사가 주선하여 경황없어 하는 유족으로부터 노자 돈 하시라고 챙겨 넣어주는 달랑 동전 세 닢만을 앞 오지랍 섶에 품은 채 입관 절차를 밟으셨다.

 

여섯 딸과 여섯 사위, 그리고 느지막하게 얻은 아들과 그 며느리, 자손 모두가 진정어린 마음으로 서운해 하는 애도 속에서 고향 동네 분들이 메고서 모시는 꽃가마를 타고 집 앞 도랑을 건너 오백 미터도 채 안되어 보이는 앞산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셨다. 

 

출산하고서 삼시랑 전에 빌던 자기 딸들 이름에 남긴 흔적 말고 다른 무엇이 또 남겨 있던가?

 

그 분 삶의 언저리를 아무리 휘둘러 보아도 내 놓을만한 것은 없었다. 열심으로 살았고, 언제나 선하고 후 하였었다는 점점이 박힌 흐릿한 기억 몇 조각이 전부였다.

 

바로 얼마 전 별세하신 김수한 추기경과 다를 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여 본다. 적어도 조카인 나의 눈에 비친 백모님은 항상 선 하고 후 했으며, 덕 많고 열심으로 살아 오신 것으로 믿고 싶다. 내가 아는 어느 선인과 비하더라도 더도 덜도 아니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만일 차이가 있다면, 조직의 힘을 빌어 그 크기를 광고선전 한 차이만큼만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엉터리 생각도 해 본다.

 

큰댁 집 바로 앞 동산이 선산이다. 그 곳에 수 백 년 전 조상들이 계시고 시사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인근 동네의 윤씨 가문에서 열예닐곱에 시집와서 이곳에서 구십평생을 살아 오신 곳이다.

 

그 산비탈 일부를 개간해서 논도 치고 채전도 가꾸며 오미자 같은 약초도 길러 왔다. 언제나 봄이 오면 그 곳에 널려 있는 고사리를 꺾고 장마철이면 습한 골짝에서 송이며 느타리며 버섯도 채취한다. 수 십 년을 거처하시던 집과 동네가 빤하게 내려다 보이는 그 자리,

 

산자락 한 쪽의 진달래, 잔솔, 상수리 같은 잡목들을 털어내고 큰어머니의 유택을 마련했다. 20년 전에 먼저 별세하신 백부님도 바로 옆으로 같은 날 옮겨 모셨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가을철 벌초 때면 큰 산에 등산하는 만큼이나 힘겨워하던 할머니 할아버지 묘소도 이번 기회에 가까이 모실 량으로 가묘를 바로 위 편에 하나 더 장만했다.

                  

                                조부모(중앙)     

                          백부(좌) 백모(우)

 

생전에는 생활하시며 먹거리도 장만하던 곳, 그 흙으로 다시 가신 것이다. 이제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게다. 그렇지만 같은 유전자로 이어 지는 보이지 않은 표식을 간직한 그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가며 그가 그렇게 살아 왔었던 것처럼 열심으로 세상살이를 이어 갈 것이다. 적어도 지구가  이런저런 이유로 심하게 요동쳐서 생물체가 생존하기 어렵게 될 때까지는……

 

믿음으로 가득 찬 영생의 약속은 또 다른 주제인 듯하다.

 

생각 난 김에, “밀알의 이야기가 나오는 성경의 줄거리를 사전 뒤져가며 다시 본다.

 

 

  2009. 2. 27.()

   오갑록 (K. L. Oh)

 

 

 

■ 전도서 관련

                                                                                                

 

죽음과 장묘행사가 우리들 삶에 주는 의미를  일깨워 주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글 구절을 프랑스 작가 "르몽 드 보통"의 글 가운데서 인용하여 본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 1장1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1장4절) 

 

16세기부터 2세기간  유행했던 기독교도들의 “바니타스(Vanitas art, 헛되다의 뜻) 미술”은 가재나 서재에 걸려 있다. 천박과 세속적 영광의 상징물인 꽃, 동전, 월계관, 체스판, 술병 등과 함께, 죽음과 짧은 생명의 상징물인 두개골과 모래시계가 있다.

 

이 그림의 목적은 헛되다는 생각으로 우울함을 자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 경험의 구체적인 면에서 결함을 찾아낼 용기를 주고, 동시에 사랑, 선, 진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르몽 드 보통, "불안" 중에서)

 

“전도서”의 실제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라고 신원을 밝힌다. 이 표현은 솔로몬(BC 10세기 중반에 활동함)을 가리키지만, 이 책에 아람어 표현 형식이 자주 사용되고 합리주의적인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작 연대는 BC 3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전도서”는 지혜신학과 관련된 인과응보적인 정의(正義)의 교리에 이의를 제기했던 사람의 사상을 반영한다.

 

인생을 관찰함으로써 그가 확신하게 된 사실은 "발이 빠르다고 달음박질에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슬기롭다고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아는 것이 많다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더라. 누구든 때가 되어 불행이 덮쳐오면 당하고 만다"(9:11)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그가 행한 선행과 악행에 달린 것이 아니며, 운명은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라고 저자는 주장한다(9:1). 이 신비를 알아내어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시도는 모두 '헛되고' 무익한 일이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이 준 좋은 것을 향유할 수 있는 한 그것을 누리라고 저자는 충고한다.     (인용: 위키백과) 

 

. 지혜를 찾는 과격한 탐구자

 

전도서는 지혜문학에 속하지만 구약성서 “잠언”이나 “집회서”와는 분위기 자체가 사뭇 다르다.  이 책은 ‘헤벨(헛됨)’이란 말을 자주 반복한다. 또한 수고, 지혜, 이익, 올바름, 몫, 기억, 재물 등 세상에서 중시하는 여러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도전을 가한다.

 

이를 근거로 코헬렛을 회의주의자나 염세주의자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헤벨을 단순히 오늘날 생각하는  ‘아무 쓸데없다’는 의미의 ‘헛됨’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전도서가 회의주의나 염세주의를 설교하지 않는 사실은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드러난다. 코헬렛은 철학자들처럼 어떤 사안에 대해 철저히 살펴 보고 신중하게 판단한다.

 

그가 ‘내가 보았다’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고대인치고는 매우 특이하게도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마치 염세주의 철학자처럼 여겼으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코헬렛은 오늘의 삶에 대해 긍정하고 ‘즐기라’고 권장하기도 한다.

 

그는 최종 결론으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라. 그분이 주신 계명을 지켜라.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해야 할 의무다”(전 12:13) 이처럼 코헬렛은 인생의 여러 문제에 대해 깊은 회의를 하면서도 줄곧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을 견지한다.

 

요컨대 그는 전통적인 인습적 지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면서 다른 시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욥기”의 성격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하지만 코헬렛은 “욥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알 수 있다는 전통적인 지혜에 대해 도전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밀어붙여 진정한 지혜를 얻고자 하였다. 

(정병진 칼럼 중에서)

 

 

 

■ 요한복음 관련

                                                                                                                         (인용: 위키백과)

      신약성서(新約聖書)는 예수의 말과 가르침을 그를 따르던 제자들(대부분 사도 파울루스와 그와 관련된

사람)의 손으로 기록되고 전해 내려온 기독교의 경전 중 하나.

    . 마태(마태오)복음, 마가(마르코)복음, 누가(루카)복음, 요한복음

 

□ 요한 복음서

 

요한 복음서(또는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 더불어 4복음서를 이루는 복음서이다.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오(마태), 마르코(마가), 루카(루가) 등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는 다른 전승을

바탕으로 성서를 쓴 것으로 보인다. 요한 복음서는 '공관 복음서'라 불리는 다른 복음서들과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비롯한 주요 행적과 그 가르침은 다른 복음서들과 마찬

가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점을 명백히 증거하고 있으며,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한다.'라는 저작목표를 밝히고 있다.

 

    .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 - 고대 그리스어의 syn (함께) opsis ()이 합쳐진 낱말로서

구체적으로 세 복음서, 마태오/마태(Kατά Ματθαίον Ευαγγέλιον, Evangelium secundum Matthaeum), 마르코/

마가(Κατά Μάρκον Ευαγγέλιον) 그리고 루가/누가(Luka, Luke) 복음을 일컫는데 쓰임.

 

전통적으로 사도 요한이 쓴 것으로 추정되어왔으나, 성서학자들은 요한 복음서의 저자가 요한 학파라고

불리는 신학공동체 일원이며, 최소 2명 이상일 것으로 본다. 이는 요한복음서 21장이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성서학계의 학설에 근거한 것이다.

 

편집시기는 90년에서 100년에 쓰여졌다는 주장이 유력하며, 에페소에서 쓰여졌다는 주장은 성서학자들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

 

내용은 공관 복음서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세족례 등 다른 복음서에 없는 내용이 들어 있다. 예수의 설교도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교리를 직설적인

문체로 길게 해설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예수가 가나혼인잔치에서 보인 기적(물을 포도주로 만듦)을 첫번째

표적이라고 적음으로써 그리스도교가 기존의 유대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의 가장

큰 특징은 철학을 기독교 신학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사도 성 요한은 요한 복음서 서두에 그리스도를 사람이

 되신 말씀(Logos)이라고 설명하여, 그리스도를 만물의 원천으로 소개한다.

 

이 복음서는 일명 사랑의 전도서라 불릴 만큼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독생자 예수의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 성경전체의 요체요, 핵심은 요한복음의 단 한 줄의 구절로 나타나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이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 이다.

 

요한(John)이 가졌던 믿음에 의한 구원은 바울 (Paul) 사도의 신학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네 주 하나님을 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경외하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구절이 2

언급되고 있다. 이것이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삶의 태도인 것이다. 바울 사도 또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라고 여러 번 언급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13장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사랑의 위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기독교인의 정수로 본 것이다. 이 두 저자의 교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성서학계에서는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제자의 정체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하고 있다. 현재 신약

성서학자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셨다는 제자의 정체에 대해 대부분 열두 제자 즉, 사도들은 아닐 것으로 보고

있으며, 마티아, 사도 요한, 마르코(마가), 라자로(나사로), 사도 토마스(도마), 아리마태아 요셉(아리마대

요셉), 요한 마르코(요한이라는 히브리이름과 마르코라는 헬라 이름을 가진 마르코) …… 상징적인 인물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최근에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의 정체에 대해 라자로로 해석하는 견해와

토마스로 해석하는 견해가 주목 받고 있다.

 

□ 사도행전

 

루카 복음서를 편집한 루카가 사도 성 바오로를 옹호하기 위해서 편집한 신약성서이다. 1세기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사도행전 편집시기는 80년에서 85년경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 바오로의 사후에

쓰인 성서이다.

   . 내용은 성령 강림을 통한 교회의 설립(성령강림주일)과 초기 신자들의 생활(1-6)

   . 베드로와 요한의 초기 활동(3-13)

   . 봉사자(부제,집사)의 등장(6-7)

   .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줌(7 26-40)

   . 바오로의 회심과 이후 바오로의 선교 활동(9-28)

 

 

□ 요한복음 관련사진

 

 

 . 서기 125년경 기록된 초기 요한복음 조각 (The Rylands Papyrus is perhaps the earliest manuscript 

                                                            fragment found of John's Gospel; dated to about 125)

 

JOHN i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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