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어린 양, 심우(尋牛)

오갑록 2008. 10. 28. 17:18

착하고 양순한 ......   

 

■  어린 양, 심우(尋牛)

 

      서울 인근에서 오일장을 보려면 성남에 4일과 9일에 서는 모란장을 찾으면 된다. 국내 오일장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고 한다. 누더기 차림에 각설이 타령을 열중인 엿장사도 보인다. 개, 닭. 오리 장사 부근의 퀴퀴한 내음이며, 갈치 고등어 물오징어가 늘어선 어물전의 질퍽대는 바닥에서 풍기는 비린내는 오히려 정겹다. 콩, 깨, 쌀, 보리, 좁쌀, 서숙 등 입 벌리고 늘어선 알곡 곡물 포대들도 푸짐하고, 두루마리 순대곱창 솥이며 웃는 형상의 돼지머리 고기도 푸짐하다. 소주며 막걸리 사발 들이키며 주고받는 이야기에 정신 팔고 있는 초로 남정네들의 되는대로 입은 잠바차림이나 수염 텁수룩한 모습들도 정겹기는 마찬가지다.

 

저 지난주말에 자전거를 타고서 오랜만에 장터를 찾아 본다. 난전 좌판에서 검정색 플라스틱 시계 하나를 골라 드니 9천원을 부른다. 허름한 외국산 시계인 듯하지만 재미 삼아 만원 건네고 거스름 돈과 함께 시계를 챙겨 든다. 시장 북새통 가운데를 헤집으며 조금 걷다가 시계를 꺼내 보니 멈추어 서 있다. 무심코 핸드폰이 가리키는 시간에 맞춘 다음 팔목에 차고 탄천변으로 자전거를 몰았다. 그리고 다음 주 초쯤에야 그 시계의 시간을 확인하니 가기는 하는데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다. 시계를 두드려도 보고, 분침 시침을 빙글빙글 돌려도 본다. 시계가 멎고 서기를 반복한다. 던져 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장난감 시계로 여기며 짬 날 때 마다 시간을 맞추고 톡톡 거리며 두드려 본다. 두어 주일 지난 지금은 하루에 2~3분 정도 늦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간 정도는 제대로 가리킨다.

 

잘 맞는 시계였다고 하면 한 주일에 한번이나 보고 말았을 시간을, 습관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시로 확인 하곤 한다. 틀리는 시계가 더 재미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기에 로렉스니 오메가니 하는 무겁고 투박하게 생긴 옛날 기계식 시계를 아끼며 차고들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틀어진 시간을 조정하랴, 자동태엽 돌리느라 흔들랴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틀리는 시계 버리지 않고 차고 다니는 게 예전에는 이상했었다.

 

세상의 이치가 모두 그런지도 모르겠다. 잘난 자식보다 불구의 자식이 더 사랑스럽다거나, 망태에 잡아 놓은 큰 고기보다 놓쳐버린 잡어 한 마리가 더 아쉽고, 벌어 놓은 큰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흘려버린 푼돈에 목매는 부자도 있다.  

 

잃어버린 어린양을 찾아 나서서 절규하는 교도들의 설교를 자주 접하곤 한다. 모란장터 갓길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 모이는 곳이면 거리나 전철 안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개중에는 파랑눈 노랑머리에 검정색 양복의 말쑥한 정장차림으로 가죽가방 한 개는 꼭 지참하고 선교에 나선 몰몬교 청년 교도들의 이색적인 모습도 있다. 특정 계층별 목표를 설정하여 정복을 향한 “전진 앞으로”를 외치는 목회자가 있는가 하면, 가가호호 전단지를 들고 나선 희미한 그림자처럼 맥없는 백발의 노인들도 있다. 소속된 종파의 확장을 꾀하려는 행위로 보려는 색안경을 쓰고 대하기에는 미안할 만큼 그들은 항상 진지하고 열심이다. 오래된 고찰의 대웅전 뒷벽에도 잃어버린 소를 찾아 심산유곡을 찾아 나선 동자가 소와 함께 돌아 오는 스토리를 담은 벽화가 눈에 띄곤 한다.

 

진정한 수도자라면 길 잃고 방황하는 거리의 뭇 중생들이 진정으로 애처로이 보일 것 만 같다는 생각도 하여 본다. 작은 관심과 흥미로 헐값 장난감 시계 들여다 보며 시간을 고치곤 하던 그 모양과는 다른 것이지 않을까?     

 

2008.10.28. ()

K L Oh

 

 

□  어린양 

                                                                                                             (퍼온글)

(성서 이야기 ...... ) 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과 만왕의 왕으로서의 어린양이다. 이 두 양면성은 세상죄를 지고 죽은 어린양이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더 중요시되는 것은 만왕의 왕으로서의 어린양이다. 만왕의 왕이라 할 때 그 왕은 정치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세상 죄를 지고 간 어린양은 종교적인 인물이다. 계시록의 어린양이 정치적인 인물이 되는 것은 계시록의 등장인물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어린양과 싸우는 대상은 짐승이다. 이 짐승은 곧 나라요 왕이다.  왕은 곧 정치적인 인물이다. 이것은 계시록이 종교적인 면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도 있다는 알게 한다. ……

 

사복음서와 계시록에 나오는 어린양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데, 사복음서에 베드로가 본 두 눈을 가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어린양, , 오늘날 이 땅 위에 계셨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어린양이며, 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일곱눈을 가진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강화된 하나님의 어린양, , 승천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곱 영으로 강화된 어린 양이다. ......

 

 

.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어린양은 누구인가요?

 (21:9)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위해 어린 양으로 대속 제물로 죽으셨으며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 안에 들어 오셨습니다. 성경에서 남편과 아내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그의 아내 하와를 만듭니다.

 

우리 주님도 깊은 죽음을 통하여 그 분의 신부를 얻습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분의 신부인 믿는 이들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부르심 받아 나온 무리 들을 교회라고 하는데  이 교회는 여러 측면이 있습니다. 한가지만 예로 들어 보면, 에베소서 1 23절에서 " 교회는 그의 몸이니" 라고 말하지요. 여기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신부의 차원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지요.

 

또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라고 도 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 분의 신부라고도 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 분을 위해 싸우는 전사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이 영화롭게 된 다는 것은 주님의 성분으로 우리 몸까지 부활의 몸으로 변화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은 이런 변화와 영화롭게 됨을 통해 그 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고린도후서 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요한계시록 19:7)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요한계시록 19:8)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요한계시록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 25: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 25: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 25:10) 그들이 사러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지금까지 여러 가지 사역으로 세상을 정복하라고 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여러분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직업과 사역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젊은이 여러분에게 주님의 능력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원하며, 각자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을 가지고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기 바랍니다

                                 (젊은이여, 세상을 정복하라!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이상은 목사)

 

 

심우(尋牛)

 

. 심우(尋牛-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서다.

망망한 수풀을 헤치고 소를 찾아 나섰네.

강물은 넓고 산은 멀어 길은 더욱 깊기만 한데

기력은 쇠하고 정신은 피곤하나 찾을 길 없어.

해 저문 숲 나뭇가지에서는 매미소리만 들려올 뿐.

 

. 견적(見跡- 소 발자국을 발견하다.

물가 나무 아래 수많은 발자국들.

우거진 수풀 헤치고 또 다시 찾아보네.

비록 이곳 산이 깊고 골짜기 깊어도

먼 하늘 바라보는 콧구멍처럼 감출 수 없다네.

 

. 견우(見牛- 소를 발견하다.

나뭇가지 위에 금빛 꾀꼬리 지저귀고

햇볕과 바람 따뜻하여 언덕에 버들가지 푸른데

이런 곳에서는 달리 피할 곳이 없지.

크고 억센 머리와 뿔은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네.

 

. 득우(得牛- 소를 붙잡다.

정신을 가다듬어 소를 잡았지만

마음 사납고 힘이 억세 제어하기 어렵네.

때로는 높은 산에 오르고

때로는 깊은 구름 속에 숨으려 하네.

 

. 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다

때때로 채찍을 대고 고삐를 잡아 지키는 것은

그대가 더러운 길로 빠질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끄는 대로 순하게 따라오면

채찍 고삐 없더라도 스스로 사람을 따르게 되리.

 

.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소를 타고 굽어진 길 따라 집으로 돌아가네.

평온한 피리 소리 저녁 노을에 퍼지고

한 박자 한 곡조에 무한한 뜻 담겼으니

이 뜻을 아는 이가 무슨 말이 필요하리.

 

. 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잊고 나만 있다.

소를 타고 이미 고향집에 이르러

소는 간 곳 없고 사람만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뜨도록 아직도 꿈을 꾸고

채찍과 고삐는 초가에 버려 두었네.

 

. 인우구망(人牛俱忘- 소도 잊고 나도 잊다.

채찍과 소와 사람 모두 공()으로 돌아가니

푸른 하늘 밀고 높아 소식 전하기 어려워라.

붉게 타는 불길에 눈발이 어찌 견디랴.

여기에 왔으니 이제 조종(祖宗)과 하나가 되었네.

 

. 반본환원(返本還源- 근원으로 돌아오다.

근원으로 오기 위해 너무 많이 걸었지.

처음부터 눈 멀고 귀머거리 된 것만 못하네.

초막에 앉아 앞의 사물을 보지 않으니

물은 스스로 아득하고 꽃은 저절로 붉은 것을.

 

. 입진수수(入塵垂手- 다시 저잣거리로

맨발에 가슴 풀고 저자로 뛰어드니

옷은 누추하나 얼굴에는 미소 가득.

신선의 도술은 사용하지 않건만

눈 앞에선 고목에서 꽃이 피네.

 

***

 

심우도(尋牛圖) :

불교의 회화(繪畵), 선종(禪宗)에서 자기의 본심(本心)을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순서를 소와 동자에 비유하여 10단계로 그린 그림. 소는 인간의 본성에, 목동은 불도(佛道)의 수행자에 비유됨심우도(尋牛圖)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함. 중국에서는 소 대신에 말로 상징한 시마도(十馬圖), 티베트에는 코끼리로 상징한 시상도(十象圖)가 전해지기도 함. 중국 송나라 때 곽암(廓庵) 선사가 처음으로 시우도를 그리고 시우도송(十牛圖頌)을 지었다고 하며, 또는 청거(淸居) 선사의 작이라고도 하는데 확실하지 않음.

 

우리나라에서는 송나라 때 제작된 곽암(廓庵)본과 보명(普明)본 두 종류가 전래되어 조선시대까지 그려졌으나 근래에는 곽암본이 더 일반화되었음. 곽암본은 제목을 심우도라 하고, 모든 화면에 원상(圓相)을 만들고 그 안에 그림을 그린 데에 반하여 보명본은 제목을 목우도라 하고 10번째 화면에만 원상을 만든 점 등이 다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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