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진화

오갑록 2008. 6. 18. 17:34

우아하고 점잖은 ......   

 

■  진화(進化)

     

      화석으로 확인된 지구상의 최초 생물은 35억년 전의 원시 대양에 살았던 박테리아였으며, 세포를 갖는 진핵 생물의 출현은 15억년 전 경이라고 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선캄브리아대( Cambria , 38~6억년 전)에 생명체가 시작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다세포 생물과 초기 어류가 번창한 것이 고생대 초기인 캄브리아기 (Cambria, 6~5억년 전), 그 후인 4억년 전쯤 식물과 절지동물이 나타났으며 포유류는 한 참 후인 중생대 초기 약 18천만년 전쯤이라고 한다.

그리고, 6천만년 전에야 영장류가 나타났고, 도구를 사용한 인류의 먼 조상은 150만년 전쯤이라고 한다. 현대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출현은 20~50만년 전 경이라고 하니 초기 생물의 발생 시기인 35억년 전에 비하면 아주 최근의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제원유 가격이 배럴당 200달러 까지도 오를 것이라는 우려와 함께, 전 세계가 오일 파동으로 들 끓고 있다. 기름값이 뛰니, 석탄, 철강, 시멘트, 설탕, 곡물 같은 원자재나 서비스 요금도 끝을 모르고 뛰고 있다.  지금 우리 실생활에서 이처럼 아주 중요한 원유나 석탄이 35천만년 전의 석탄기에 형성된 식물들의 잔존물을 채굴하여 사용하는 것 이라고 하니, 수 억년의 먼 기간이 새삼스레 피부에 와 닿는 것만 같다.

 

그에 비해 아주 최근인 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현대 인류의 조상 호모 사피엔스는 7만년 전쯤의 지구상 총 숫자가 약 2천명 수준이었을 것이라는 연구보고도 나왔다. 지금의 지구 인구 66억 명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20만년의 기간 동안 늘어난 인구이지만, 지구의 진화역사를 생각하여 보면 앞으로도 영원 할 수는 없으리라고 보인다. 3억년 전 페름기에는 지구상 생물의 95%가 멸종되었고, 그 후에도 수 차례의 빙하기를 거치면서 쥐라기의 공룡과 같은 동물들이 종적을 감추기도 했다. 인류도 페름기나 쥐라기의 사라진 생물들처럼 지구의 역사에서 언제인가는 도태될 수도 있지 않을까?

 

2000년 유엔환경계획이 발표한 현재 지구상 생물의 종은 총 175만 종이며, 그 중 척추동물 5만종, 무척추동물 127만종, 식물 27만종, 원생동물 8만종, 그리고 균류 7만종, 세균 4천종이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수 억년 동안 진화와 멸종을 반복하며 남은 현존하는 생물의 종을 의미하며, 결국 우리 인종도 그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카우프만이 말하기를 '생물학적 진화는 질서와 혼돈 사이의 칼끝 위의 시소와 같은 자생적인 시스템의 하나의 예이며, 구조와 놀람 사이의 큰 타협이다.' 고 했다.

 

타임지 과학전문기자  J. Madeleine Nash는 “너무 많은 질서는 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너무 많은 혼돈이 있는 곳에는 연속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의 균형은 필수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유능한 밧줄타기 꾼들이 때때로 자주 (균형을 잡기 위해) 한 발씩만 걷는 것처럼 말이다. 혼돈이론에서는 거대한 멸종을 설명하기 위해서 혜성이나 화산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진화하고 있는 시스템의 본질적인 불안정성으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높은 적응성이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혼돈과 타협 속에서 진화라는 이름으로 서 있는 것이 지금 우리들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석가도 느낌, 지각, 인식, 앎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무상(無常). 무아(無我). 5(五蘊)에 대하여 설파했다고 생각하여 본다. 혼돈 속에 서 있는 스스로의 모습, 세상의 이치를 기웃거려 볼 수록, 나의 앎이 얼마나 깊이 없고 얄팍하며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부끄러워 진다.

 

자연과학 이건, 인문.사회과학 이건, 물리 수학 어문학 같은 순수학문 이건, 전문분야로 조금만 가면 만만한 것이 한가지도 없다. 순수학문이 아니더라도 순수학문의 비빔밥과 같은 것들, 자연과학은 로가리즘 삼각함수 미적분 벡타 같이 기초 수학적인 곳에서 멈춰지고, 인문과학은 어문학 몇 토막에 막혀 버리며, 사회과학은 확률, 편차, 분산 같은 통계학 몇 단계에 막히곤 한다. 역사, 철학, 종교, 문학 등은 어느 면에서는 과학보다 더욱 깊이를 요하지만 겉 모양을 훔치기에도 넓고 깊어 주제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기웃대는 것이, 모른다고 팽개치는 것보다 낫다고도 생각하여 보지만 쓸데없는 정력의 낭비라는 생각도 하여 본다. 적어도,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곳에 쪼개 써야 한다는 개념에서는 그렇다. 발전적이라는 개념은 무엇일까? 기술을 개발하여 돈벌이가 더 되게 하고, 자기가 전공한 학문분야를 키워서 이름을 더 날리는 것만을 발전적이라고 하는가?  그것 만이 발전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상 살아가는 이치를 조금 더 이해하고, 만족하며, 아름답고, 선함에 대하여 마음을 열어 볼 기회의 폭을 더 넓게 하는 것도 발전적인 일 중의 하나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해 해야만 하고, 무엇을 만족해 하며, 무엇이 아름답고 선하다고 할 것인가? 그것은 순환함수와도 같이, 아니면 닭과 달걀의 조상을 따지듯, 느낌이나 앎에 관하여 살아가는 동안 내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원형의 동선(動線)과 같을 것이다.

 

생물학적인 진화는 자연선택에 의해 발생된다. 이 때 자연은 생식을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자연선택이란 우세한 조건에 대해 가장 잘 적응한 유전자형이 환경에 의해 선택되는 과정을 뜻 한다. 자연선택은 불리한 유전자형을 제거 함으로서 개체군을 유전적으로 균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평형선택을 통한 다양성을 갖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열성형질이 개체군에 나타나는 경우에 대비한다는데 있다고 한다. 생물학적 진화(Evolution)란 시간 흐름에 따라 개체군내 대립유전자들의 비율이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전자형이 순종(동형 접합자, Homo) 보다 잡종(이형접합자, Heterozygote) 일 때 번식 성공도가 더 높기 때문에 유전적 다양성이 잡종(이형집합자)에 의해 유지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이야기 하고 있으며, 어떤 유전자형의 생식적인 성공은 개체군 내의 빈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

 

생물의 진화는 종의 번식을 위해 빈도의 수를 키우며, 더 크고 더 복잡한 조직구성 형태의 고등동물 쪽으로 점진되어 왔지만, 이를 두고 발전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혼돈 속에서 이루어 내는 복잡성은 진화의 한 결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는 열역학 제2법칙에서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한다고 하는 즉, 우주의 무질서와 혼돈의 양이 증가한다는 원리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이 진화를 거치며 복잡한 고등생물이 된다고 이를 발전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느낌이나 앎이 더 깊어진다고 하여 그 사람이 더 발전적이 되며, 삶에 대한 이해와 만족 그리고 아름다움을 껴 안게 되리라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삶이라고 하는 돌아가는 원형의 동선(動線) 중 한 정점에 불과할 뿐.

 

취향에 드는 학문, 오락, 운동, 여행에 심취한다고 하여, 또는 마음에 닿는 좋은 영화, 사진, 그림을 더 본다고 하여, 또는 좋은 날에 좋은 이와 함께하며 서로를 더 안다고 하여, 한 사람 삶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여길 수는 없지 않을까? 보고 듣고 만지며, 포식 포만 향기로움은 그 자체로서의 한 느낌에 불과할 뿐이니 말이다.  돌도끼 들고 수렵에 나선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의 삶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할 때, 지금 우리의 생활양상은 천지개벽에 버금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 삶의 과정 속에서의 느낌, 그리고 죽은 후의 찌끼에는 구석기 시대와 현대 간에 무슨 다른 점이 있을 수 있을까? 그 동안 무슨 진화가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불쌍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잘못을 뉘우치며, 기쁨과 노여움을 느끼고, 사랑과 미움을 느끼며, 참을 수 없이 번져만 가는 욕망들이나, 병...사에 대한 슬픔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석기시대 원시인과 현대인 간에 별로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영혼 육체, 시간과 공간, 운명과 죽음, 광활한 우주에 대한 끝없는 의문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의술의 발달로 삶의 물리적인 길이인 생명이 많이 연장되었다. 몇 십 년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또는 수렵을 대신해서 먹이 주며 잘 키운 고깃발을 더 많이 씹게 되고 배불리 삼킬 수 있다고 해서, 또는 맨발로 뛰는 대신 푹신한 승용차를 타고 달린다고 해서 …… 인간들 삶의 과정에서 좋은 느낌이 얼마만큼이나 수적으로 더 많아지고, 질적으로 더 커졌을까?  살아가는 겉모습은 진화되어 복잡한 사회로 되었지만, 삶의 느낌, 무상(無常). 무아(無我)라는 주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전 할 것만 같이 여겨진다.

 

시간이 많으니 우연치 않게 인터넷에 떠 도는 사진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나이 들어 주책없다고 여기면서도 단계를 거치면서 더 부끄러운 곳으로 진화(?)되어 간다. 덕분에 몰랐던 부분까지도 알게 되어 밤거리 성인용품 목록이 어떤 류가 있는지 까지도 이제는 어렴풋이 짐작된다. 성인용품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만 성인이 되어 가는 것일까? 더 안다고 하는 것이 때로는 모름만도 못할까? 사업추진을 하면서 상품구성의 다양성은 중요한 영업전략 중 한가지이다. 소위 구색물품이라고 하여 밑 가면서도 내 놓는 상품이 있다. 생각의 다양성이나 지식의 다양성에 있어서도 종()의 다양성이 중요한 것처럼, 사회악으로 여기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알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뚜렷한 종교관이나 별도로 다져진 믿음도 없는 불쌍한 이의 철없는 행태려니 하는 생각도 든다.

 

2008.6. .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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