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장벽

오갑록 2008. 6. 30. 13:43

새롭고 세련된 ......

 

■  장 벽

 

    원만한 한 인간으로서 성숙하는데에 있어, 나를 가로막는 장벽은 무엇일까?

 

스스로 알고 있노라고 생각하는 어설픈 앎, 어설픈 풋내기 지식들이야말로 진정 나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요소들은 아닐까? 차라리 아무것도 모름만 못한 때를 종종 경험하곤 한다. 수학 물리 화학 천문 지리 어학 문학 철학 같은 순수학문이나, 사회 정치 경제 경영 군사 과학 공학 …… 어느 한 분야이던 하나를 선택하고, 만만한 곳을 응시하며 아는 바의 키를 견주어 보라. 그 안다고 하는 폭의 좁음과 깊이 없음에 이내 고개가 떨구어 짐을 느끼게 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모르는 것만큼 더 자신 있어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해 본다.

 

개인의 도약을 막고 있는 것들에는 어떤 류가 있을까?

 

단순하게 뛰어 오른다는 개념의 도약을 생각해 보자. 물론 다리 뒷심이 적거나, 다리 길이가 짧아도 도약의 장애 요소가 된다. 터무니 없는 생각일지 모르나, 지구의 인력이 도약을 막고 있는 원천이기도 하고, 하늘에서 땅에 다다르기까지 수십 Km에 달하는 두터운 두께의 공기 층의 무게가 1기압의 힘만큼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도 도약의 장애가 되는 요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통상 이를 자연현상으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물리적인 현상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정신적 측면에서도 짚어 볼만한 장애요소들은 널려 있다. 보고 안다는 것만해도 그렇다.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으며, 무엇을 보았다고 하는가? 인식론의 근본 문제이기도 하다. 식별 가능한 빛의 한계 파장이 주어진 범위 내에서 그것도 한정된 거리 범위 내의 것을 본다고 말한다. 너무 먼 곳이나 너무 가까운 것은 볼 수가 없다. 망원경이니 현미경이니 하는 도구도 우리가 접근해 볼 수 있는 원근에는 한계가 주어지기는 마찬가지이다. , 원자나, 전자, 쿼크, 글루온 또는 그 이하의 소립자 구성요소를 막연하게 추정하는 것처럼, 더 먼 곳 300억 광년 저 넘어 우주는 무엇이 어떻게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창문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볼 때, 문 틀 안에 드는 물체만 보이듯, 눈이라는 창문을 통해서 보는 것은 그 틀 이내에 들어가는 것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고개를 상하 좌우로 돌려가며 360도 전부를 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틀의 또 다른 한계가 무엇인지 모른 채 전부를 보는 양 인식하는 것이 지금 내가 아닐까? 조금 높게 보이는 하늘이 앞을 가리고, 구름이 가리고, 먼 산과 드높이 올라간 고층 건물이 가리고, 그 나머지만 조금 보는 것을 갖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보인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전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곳만 보는 것, 다시 말해 덩치 큰 공룡 꼬리부분의 한 구석 주름진 골을 보면서 우주 전체를 보는 양 착각하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공간도 그렇거니와 시간 또한 그렇다. 

 

빅뱅이 있고 137억년이 지나서 지금이 있다고 한다면, 빅뱅 이전에 있었을 시간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 있을 시간들은 계속 이어질 것인가? 우주의 엔트로피는 지금처럼 무한정 팽창만 할까? 이처럼 본다고 하는 것, 안다고 하는 것, 또는 경험했다고 하는 것들에 대한 인식론의 한계가 분명한 것처럼,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나 마음도 원하는 바 갖가지 욕망의 그늘에 가려진 채 한정된 작은 부분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름난 예언자 들은 마음에 그리 가려진 상당한 부분을 걷어낼 수 있었기에 앞날을 멀리 예견할 수 있는 혜안을 누린 것은 아닐까? 격암 남사고, 토정 이지함, 정감록, 프랑스 노스트라다무스, 이란의 조로아스터, …….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이름을 떨친 분들이나, 경제나 경영에 해박하여 큰 돈을 모으는 분들도 눈 여겨 보면 나름대로 앞을 가리는 여러 가지 장애요소들을 잘 극복하는 분들처럼 생각된다. 앞에 닥치는 장애요소나, 경영의 문제점을 남보다 미리 간파하고 대처할 줄 아는 능력이 일반인 보다 좀 더 앞서고, 물론 이루고자 하는 욕심 또한 그만큼 강한 듯 하다. 남보다 큰 재물을 쌓아 놓으신 어른 분을 가까이서 경험한 바로는, 그런 면에서 나 같은 조무래기와 분명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앎을 막는 장벽을 거두는데 남다른 노력을 하시는 것이라고 본다. 친구를 사귀고, 다양한 계층의 친분을 유지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경영에 연관되는 앎의 채널을 다양화 하는 것이다. 또한 뉴스 미디어에 항시 눈과 귀를 쫑긋하게 곧추세우고 생활했고, 전문가의 의견을 다양하게 접하려고 돈을 아끼지 아니하시었으며, 자기의 선입견을 억제하고 그 분들의 의견을 우선하는 능력이 앞섰다. 적어도 경영이나 경제에 관한 한, 앎의 폭과 깊이가 남다른 원인은 그처럼 단순한 순리를 따르는 습성 때문인듯했다. 물론 그러한 요소와 함께 그렇게 습득된 앎을 근거하여 판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결단력과 추진력이 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재물에 대한 확실한 욕심의 발로이다. 재물을 안 쓰고, 모으는 기술자 일뿐 나눔과 더불어 사는 것은 전혀 별도의 일들이다. 재물을 모으는데 드리워진 각가지 장벽들을 거두는 기술자, 그리고 이를 돈벌이의 실천에 옮기고 강력하게 추진하는 기술자 라고 표현해도 될까?  학문의 뜻을 달성한 유명한 학자들도, 그 과정은 재물을 쌓는 과정과 유사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여 본다. 학문에 저해되는 장벽을 거두는 능력, 모으고 자기 것으로 하는 능력, 판단이 옳다고 여기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특성, 달성하려는 욕망 등등.

 

스스로를 돌아 보면, 쉽게 살아 온 인생살이 덕에 나이만 들었지 삶의 형태 또한 볼품없고 솜털마냥 무게 없다. 재물이나 명예가 없음을 뜻함이 아니라, 마음 속의 가치관? 삶의 줏대? 그런 측면에서 쌓여진 것이라곤 아무것 없이 허허벌판처럼 느껴 오는 것이다. 이제는 연로하시어 여러모로 힘겨운 듯한 모친의 이력에 나를 견주어 본다. 배움도 일천하고 물려 받은 재산 한 톨 없이 일제치하 말기의 어려움과 해방, 6.25전쟁을 치르는 사회적 혼란기 속에서 여러 자식 키우고 뒷바라지 하면서 어렵사리 살아 온 8순 후반 모친의 어려웠던 삶, 그 동안 반복하여 자주 들어 때로는 짜증 나기도 하지만, 그 분의 고달프고 찌든 인생살이 푸념을 듣노라면 굳세고 무게 있는 인생역정에의 존경심이 모르는 사이 샘 솟는다. 열심으로 살아왔고, 진지하게 살아왔음이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장난 삼아 가벼이 지내왔고, 지금 또한 마찬가지로 진지함이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여 본다.

 

나이 들어 갈수록, 아름다움, 풍요로움, 넉넉함이 용서하고 이해하는 열린 마음에서 비롯됨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위의 생각들처럼, 나 스스로가 모르는 장벽들이 마음 주변에 둘려 쳐져 있음 때문일 터인데…… 아니면 스스로의 주제보다 더한 욕심 어린 높은 장벽이 가려진 때문일 터인데……하는 아쉬움 섞인 자책 탓을 하여 본다.

 

2008.6.30.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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