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촛불집회

오갑록 2008. 7. 7. 17:26

개성있고 돋보이는 ......  

 

■  촛불집회

 

   우리가 사물을 인식함에 있어 단순히 직관에 의해서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개념에 의해서만 인식을 하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이 둘을 종합할 경우에만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에 관하여 철학자 칸트가 말한 유명한 말이 있다. "감각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제공될 수 없으며, 지성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사유될 수 없다. 내용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오성은 감성에 의존하며 또한 감성은 오성에 의존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에게 사물은 우리 밖에 존재하며 우리 감각의 대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는 그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하며 단지 그 사물의 현상만을 알 뿐이다" 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고 다만 현상의 세계만을 알 뿐인 바, 그 이유를 물자체는 감관과 오성, 경험과 사유를 거쳐 오로지 현상으로만 주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자체 즉, 사물에 관한 인식 자체가 이다지 어려울 진대, 하물며 우리의 일생생활에서는 어떠하겠는가? 서로를 느끼고 이해하는데 있어서야 그 보다 한층 더 복잡하고 미묘한 계층간 인식의 괴리가 있을 수 밖에 없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직 간의 거래에서 매도자와 매입자간의 입장은 극명하게 다르다. 한쪽은 좋은 값을 받기 원하고 다른 한 쪽은 같은 좋은 물건이라도 더 헐값에 사기 원하기 때문이다.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나눔이 이어지는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먹거리나 입을 것을 비롯한 재물이나 재화도 나누거니와, 마음이나 노동력 같은 무형의 것들도 나눔의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때도 항상 뒤따르는 문제가 계층 상호간의 인식차이 문제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생산자와 소비자, 사용자와 근로자,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에 자주 일어나는 의견충돌들을 유심히 보라. 좁히지 못하는 견해 차이인 경우가 허다하다. 선배와 후배, 부모와 자식 간의 개인적인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듯 계층간 인식차이로 인한 갈등이 언제나 일어나는 것이 우리 삶의 단면이기도 하다. 국가나 인종 간 또는 종교나 이념 간에 일어나는 각종 갈등도 많은 경우가 근본적으로는 계층간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은 음양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루어진다. 밝은 곳과 어두운 곳, 높은 곳과 낮은 곳, 찬 것과 뜨거운 것, 선한 것과 악한 것 …… 색상이나 크기 또는 정도가 서로 엇비슷하고, 그 어우러짐이 적당할 때, 다시 말해 나눔이 적당할 때, 그것을 보고 우리는 아름답다고 말한다. 키가 너무 큰 사람은 미인 축에서 빠진다. 코나 눈만 크다고 미인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모든 신체조건이 조화로울 때 미인이라고 말한다. 행동은 물론 사상이나 생각까지도 그렇다. 우리는 보통, 미친 이나 뛰어난 천재를 두고 외모의 아름다움을 평하지는 않는다.

 

강대국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조공 물목이나 물량 때문에 변란을 당하게 되는 역사 속의 아픔을 사극을 통해 종종 목격한다. 상납 하는 자와 이를 받는 자의 인식차이로 인하여 겪는 아픈 모습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경험한 국가나 인종간 전쟁의 원인도 결국은 인식차이들이다. 힘 있는 자는 약한 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원한다. 심지어 나머지 목숨까지도 원한다. 약한 자 생각으로는 항상 분하고 억울 하기만하다. 억제할 줄 모르는 인간의 끝 없는 욕심의 산물이다. 종교 간의 갈등도 그렇고 정치 이념간의 갈등도 그렇다. 도탄에 신음하는 인간 구원에의 믿음을 갈망하는 각 종교 집단의 기본은 서로 유사하다.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정치이념의 기본도 백성을 잘 살아 보게 하자고 하는 기본은 서로 유사하다. 그럼에도 그 방법이 조금 다르다 하여 심하게 다툰 경험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읽어 왔다.

 

이즈음 촛불을 들고 밤을 밝히는 군중집회의 사진 속에서, 나는 많은 것을 읽곤 한다.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다. 어린 날 나는 그 불 빛 아래에서 먹기도 하고 성장했으며, 그 촛불 아래에서 글을 읽고 배움을 키우기도 했다. 불은 열과 빛을 낸다. 생명체에게 열과 빛은 물과 공기 버금가게 중하다. 그러나 지금 이 불빛은 무엇을 밝히려는 불빛인가?

 

내가 보기에 그 촛불은, 촛불 든 이들 스스로와 그리고 허공에 뜬 상대방의 욕심의 크기를 밝혀 보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에 찬 눈초리를 떨칠 수가 없다.

 

촛불 든 하나하나는 그렇지 않고 불빛만큼이나 순수 할 수도 있다. 촛불 들고 뛰쳐나온 각각은 인터넷 덕분에 세계 어느 국민보다 똑똑해진 우리 국민들이다. 그 한 명 한 명 각각의 가슴 속에는 우리 국민 건강에 대한 진심에서 나오는 걱정과 위정자에 대한 참지 못할 분노로 불을 밝히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은 광우병 근원인 악명 높은 프리온의 위험성과 전염성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 사람이 광우병 프리온 유전자 MM 타입이 95%나 될 정도로 높아 전염에 취약 할 수 있다는 분석자료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광우병 소의 특정위험물질인 SRM 부위가 어디어디고, 수입경로나 그 관리의 취약성에 관하여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광우병과 CJD 사이의 인과성이라던가, 24년 동안 미국 알츠하이머병 사망 환자 수가 9배 가까이 급증했다는 인터넷 풍문 등을 알 만큼 한편으로는 똘똘한 군중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믿기지 않는 것 일까? 지금껏 미국에서 발생한 광우병 소는 겨우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판매국의 해명을…… 그리고 전체 미국인들이 같이 먹는 고기라는 그네들의 주장을...... 한편에서는 30개월 이내인지 어떻게 판별할 것이며, SRM 부위의 적정한 관리가 과연 가능한 것인지 따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년간 4천만 마리의 소를 처리하고, 3억 명의 미국 민이 매일 소비하는 것을 그렇게 아우성 치는 것이 의아하다는 현지 교민도 있다.

 

여하간, 밤 풍경, 무리 진 촛불의 흐름을 보면서 가슴 아픈 안타까움이 저려 온다. 누가 저들을 무리 진 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잘 해보려는 분수를 넘는 새로운 위정자 집단의 의욕이 고기를 팔아 먹으려는 판매 국의 압력에 국민건강이라는 명분을 뿌리 채 상대국에 넘긴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하여 본다. 경제력이나 국력 면에서 약소국인 우리 협상력의 한계를 마음 아파도 하여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똑 같은 내용, 같은 색깔의 같은 도구로 구성된 촛불집회의 조직적인 구호용 물품 이라던지, 누구누구 물러가라는 집회 때 구호 내용의 배경에 관해 구린 내음 나는 뒷구석 조직들도 의심하여 본다. 덩달아 여기에 붙어 맨 야당이나, 종교단체, 사회 단체들에 대해서도, 자기네 집단의 세력확장을 기대하며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는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 본다. 그 와중에서도 나름의 이권을 챙겨 보려는 것처럼, 촛불들고 단합투쟁에 열 올리는 노동단체의 모습도 달갑지만은 않다.

 

촛불집회에 대해 하릴없이 데모하고 나서는 것처럼 볼멘소리 하는 경영자 계층도 있다. 이러다간 국가 신인도나 경쟁력이 어려운 상황까지 떨어지지나 않을지 우려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는 달리 생각한다. 국가 경영이라는 큰 틀의 나눔과 주고 받기에서 한 번 더 다지고, 잘 못 되기 이전에 갈 길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똑똑 해진 사람들의 촛불 하나하나가 의심스런 조직들의 사욕으로 왜곡되거나 퇴색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말이다. 손해 보는 장사를 했다고 무조건 협상 판을 뒤 엎는 것만 능사는 아니다. 주는 대신 더 챙길 수 있는 구석이 무엇인지 고심하며 협력하는 의식이 커졌으면 하는 생각은, 아직 우리들의 분에 넘는 욕심에 불과할까?    

 

노사분쟁이 일어나면 사용자는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볼멘 소리를 한다. 꽹과리 치고 뛰쳐나온 노조는 사용자의 쥐어짜기 식 노무정책을 탓한다. 막말까지 가는 경우, 사주는 “저 놈들은 급여 많이 올려 줘 봐야, 술 마시고 배탈 나서 뒷날 더 많이 제끼기나 할 걸……”하는 식의 생각이고, 노측은 회사 보기를 “저네 들은 쥐어짜며 돈벌이해서 개인재산이나 끝없이 불리려 하고, 축적한 재산의 대물림에 눈이 벌건 속물들……” 하는 식의 막다른 곳까지 다다른다. 그 곳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나눔의 덕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단지, “기업의 속성, 노동자의 근성” 정도만이라도 서로를 이해하면 다행이다. 금번 소고기 협상 결과도 양국의 입장 차가 노사분쟁 테이블의 아우성과 흡사하다. 국내의 소용돌이도 손해가 크기는 하지만, 유리한 힘에 의한 수출국의 과도한 밀어붙이기가 화근을 불러 왔고 그들도 작은 부문이나마 자존심에 흠이 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바위로 계란치기 같은 불꽃시위 모습에 입맛 쓰긴 하지만 개개인의 순진한 촛불이 이해 집단의 불놀이에 희생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계층마다 그 입장이 달라 질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나나 우리만의 입장에서 한발 정도 비켜나서 이해관계인 간의 인식차이에 관하여 생각하여 본다.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이고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

 

조화로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국민 건강과 함께 돈 남는 국제 상거래” 라는 명분을 생각하면서, 촛불집회가 점점 맹목적으로 달음질치지나 아니하는지 돌아본다. 좀 비약된 내용의 글인 듯도 하지만, 칸트의 말을 다시 본다.

“내용이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그네들은 지금도 촛불 켜 들고 장대 빗속의 밤길에서 서성대야 하는지?

 

 

2008.7.7.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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