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삶의 흔적

오갑록 2013. 8. 13. 11:26

위대한 ......

■  삶의 흔적

 

      거창한 표현으로 삶이라고는 하지만, 한 생명체로서의 궤적으로서 훑어보면 나 자신 또한, 비 온 날 물고인 진흙 밭의 지렁이 기어간 궤적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고 만다. 어찌 생각하면, 한없이 드넓은 세상에서 우리 인간들이 살아 간다. 그러나, 그 삶의 궤적이나 흔적들을 돌아보면 삶의 무상함이 떠 오른다. 세상과 우주,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이 느껴 온다.

 

자신의 지난 날 궤적이란 짧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 엊그제 같던 어린 날의 철없는 생각이니 행동, 티없이 순수하여 맑고 깨끗하던 생각들 까지 …… 기억에 새로운 순간들이 점 점으로 이어지곤 한다. 순진했다고 여겨지는 흐뭇함도 있지만, 무섭고 두렵고 밉고 분하다거나 부끄럽던 어두운 장면들도 사이사이 끼어 들고는 한다.

 

위대하다거나 훌륭한 개개인의 궤적이 그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우리는 어디서 느끼곤 하는가? 답도 없고 막연하기는 하지만, 물질의 근본을 생각하고, 우주의 원리를 궁금해 할 때일지도 모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느낄 때는, 역사 속에서 우리 조상들 삶의 궤적들을 소급하여 멀리까지 올려 볼 때이다. 가까운 우리 역사 속에서 그려지는 몇 조각 개인의 궤적을 볼 수 있다. 순박하고 소박한 사회모습이 엿보이기도 하나, 암울하고 어두운 면들이 오히려 더 하는 듯 하다. 제왕, 장수, 학문 등의 위업으로서 남는 얼마 안 되는 것 들이다. 그 궤적마저도 천년을 넘기기는 어렵다. 기껏해야 신화라는 이름으로 몇 천년을 앞서갈 뿐이다. 그것이 우리 역사라는 이름의 삶의 궤적에 관한 현실이다.

 

세계사에서도 몇 천년 전을 넘겨 보기는 우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나마도 종교의 형태로서 그 흔적들이 명맥을 유지할 정도다. 2천년, 3천년 정도의 앞일들이다. 기독교와 불교의 경전이나 미술품들이야말로 먼 조상의 인류 흔적을 지금껏 볼 수 있는 좋은 사례라고 여겨진다. 그 시대의 모습과 사상, 가치관, 시련과 고난, 그 때의 욕망이니 희망하는 모습들은 무엇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의식주의 본능을 충족하고 건강과 영생을 바라는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끝을 모르는 욕망의 본질이 그 때도 삶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국사나, 세계사 속에서 당시 사회실상을 상상하고, 개인들 삶의 모습들은 어떠했을 지를 그려본다. 그 때 개개인의 삶의 궤적이란, 지금 내가 경험하여 왔던 것들, 그 삶의 궤적과 무엇이 다를 지를 꼽아본다. 물론 의식주의 행태나 질은 전혀 다를 것이며, 건강이나 수명도 다소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차이는 반 백년이라는 수준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의식주라는 생활환경도 행복의 관점에서는 얼마나 개선 되었는지는 본질적인 면에서 쉽사리 비교할 수 없으리라는 가정도 하여 본다.

 

헐벗고, 굶주리는 어두운 면이 현대사회는 모두 떨쳐졌을까? 분배의 모순에서 오는 극한의 빈곤은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흔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는 수려한 자연환경은 고대에서는 매일의 삶을 이어가는데 오히려 두려움과 극악의 조건으로서 인간 앞에 다가섰을지도 모른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고대의 사회상황을 엿보기는 매우 어렵다. 5천년을 뛰어 넘는 이집트 역사에 그렇게 열광했던 근대 고고학사의 이유였다고 생각하여 본다. 단절되었던 수 천년 전의 역사를 읽고 해석하여 고대의 흔적에 대하여 이해할 수 있음으로 하여 지금 우리가 처한 세상과 가치관을 상대 비교 하는데 그 의의가 있을 것만 같다. 지금 삶의 상대적 우월감도 읽고, 고대 인류 선조들의 탁월했던 지적 능력들도 평가해 주고 싶은데 있을 것이다.

 

단절된 수 천년 전의 역사는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고대사에 대한 우리의 많은 궁금증을 풀어 준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해독의 시작은 비석문인 로제타스톤에서 비롯된다. 돌에 새겨진 문자 흔적에서 인류사의 흔적을 더듬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오늘 하루살이가 짧았다고는 하지만, 내가 겪고 경험한 세월도 짧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천년 전의 고대역사는 그보다는 한참 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없이 큰 우주의 광활함 못지않게 멀고 긴 것이 시간, 세월이라는 생각을 앞세워 본다면, 수 천년 전 고대사도 내가 경험한 오늘 하루만큼이나 짧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부질없는 작은 욕망에 불태우며 안달하며 지내던 나의 사소한 경험, 내 삶의 궤적들이란, 커다란 역사의 흔적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부질없는 것들임을 느껴 본다. 고대사의 흔적을 따라보며 갖는 감정이다.

 

돌에 새겨진 흔적을 통해 상형문자 해독에 성공하고 나서야, 수 천년 전의 고대역사의 궤적을 파악할 정도로, 고대 이집트 왕조 파라오의 이름이며 치적의 개요를 간신히 가늠하는데 불과하다. 장구한 역사 속에 나고 스러져간 수 많은 군중 무리들이 겪었을 굴곡진 삶의 궤적들은 지금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참된 이치 또는 우주의 근원적 원리를 “진리”라 하고, 거짓이 없이 바르고 참된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 진리나 진실이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삶도 그 가운데에 서 있고, 역사며 우주질서도 진리며 진실 속에서 돌고 있을 것이다. 장구한 시간과 세월, 광활한 공간 …… 그 속에 진리와 진실이 있음을 인정은 하지만, 역사 속에 숨어있을 민생들, 누구나 마찬가지로, 나도 또한, 욕망의 고리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한 채, 허망과 허무의 늪을 거닐곤 한다.

 

기상측정 이래 제일 길다고 하던 49일간의 장마기간 후에 온 더위는 말복을 맞아 절정을 이루는 듯,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대천 인근인 주포댁의 고추 밭에서 정오까지 한시간 남짓 고추 따는 일을  도와봤다. 작열하는 태양은 밀짚모자까지 뚫고서 내리쬐는 듯 뜨겁고 땀은 철철 흐른다. 고추 따던 손으로 얼굴 비비면 매울세라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어 땀방울을 털어보지만 땀방울이 눈앞을 가리기는 마찬가지다.

 

 

멀리 들려오는 매미 소리도 따갑다. 아흔 넘긴 고령으로 탈진하여 오늘내일 운명을 기다리는 그 댁 외아들은, 어미가 돌아가시면 쓸 산소까지의 오르막 길에 난 잡초를 미리 깎느라 집 위의 둔덕으로 올랐다. 아들이 저 멀리 산 등성이에서 휘두르는 제초기의 왱왱 소리가, 매미소리와 한 판 어우러지며, 고추 따던 내 마음을 요동 치게 한다. 무더위 땀 방울, 매미소리, 그리고 삶의 흔적에 대한 상념들이 섞이고 범벅 되며 한 여름 무더위에  푹푹 잘도 쪄진다.

 

얼굴도 제대로 모르던 어린 나이에 일찍 아비를 여의고서 의지하며, 육십 평생을 함께 살아온 어미의 가까워진 임종을 대하는 외아들 심정이 오죽하랴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매미 울음소리며 제초기 도는 소음과 함께 맴을 돈다. 아들과 며느리는 산으로 들로 일 나간 이 시각에도, 임종을 기다리며, 한 여름의 매미소리 들리는 당신 방에서 물 한 모금 넘기는 것 마저 힘들어 홀로 가쁜 숨을 몰아 쉬시고 계실, 아흔셋 노인의 애처로움도 마음에 집힌다.

 

탄광 잡부로 일하던 지아비를 젊은 시절 사별하시고, 어린것들 홀로 거두시느라 장항선 기차 길로 생선 “다라이” 이고 장터를 방황하셨을 젊은 때의 할머니 모습도 그려지고, 장성한 아들의 힘겨운 농사일이 안쓰러워, 손톱이 일그러지시도록 자나깨나 풀만 매시던 생전 모습도 눈에 삼삼하다. 정신마저 혼미한 지금, 병석에서도 두 주먹 쥐고 펴기를 쉬시지 않는다. 풀 매는 중일 것이란다. ...... (2013.8.21.(수 음7.15) 별세)

 

점심 후, 잠시 복분자 한 바구니 따서 챙기고, 흐르는 얼굴의 땀만 찬물에 씻고 나서, 말복 날 무더위를 가르기라도 하려는 듯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려왔다. 차량외부 대기온도는 34도, 35도를 넘나든다. 

 

   2013.8.13.(화)

   오갑록                               2001년 글  ☞ ;  흔 적

 

 

 

 □  히에로글리프 (이집트 상형문자)

 

고대 이집트 문명이 남긴 문자, 아름다운 벽화 등에 새겨진 히에로글리프는 어떻게 읽는가? 고대 이집트 문자에 도전해 보자. 고대 이집트인들이 사용하던 문자. 그리스가 이집트와 무역할 때 당시의 민중자체(民衆字體)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한 "신의 말"이란 뜻의 문자이다.

 

밝혀진 기록에 따르면, 이집트의 신성문자는 전부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최초의 기록은 표음적인 요소가 가미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독자적인 발달을 꾀한 신성문자의 가장 오래된 비문은 고유명사나 제목을 제외하면 해독이 불가능하며, 후대에 씌어진 문자가 몇 개 보이기도 하나 전체적인 의미는 해독되지 않았다.

 

이집트어도 셈어와 같이 어근이 자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접두사·접미사는 물론 모음들과도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동일어근의 사용에서 자음만은 일정했기 때문에 신성문자는 차차 자음과 결합하여 표음문자화 되었다. 약 78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신성문자는 주로 2자음결합을 표시하는 데 사용되었으며(집 pr, 눈 yr), 이집트어의 각 23자음은 적어도 하나 이상의 기호를 가지고 있다. 이 문자는 소아시아에 전해져 셈어 자모(子母)의 모태가 되었고, 로마자의 원형이 되었다.

  

. 사라진 문자의 해독. 히에로글리프는 어떤 문자인가?

 

지금부터 200년 전인 1799년 7월에, 이집트 지중해 연안의 마을 로제타(현지명 라시드)에서 발견된 석비(돌비석)가 고대 이집트 문자 해독의 단서가 되었다. 발견 장소의 이름을 따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이라 불리는 이 검정색 현무암으로 만든 석비에는, 위부터 히에로글리프(hieroglyph;성각 문자), 데모틱(민중 문자), 그리스 어가 새겨져 있었다. 그리스 어 비문을 통해 그 내용은 기원전 196년 3월 27일에 개최된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대관 1주년 기념제에 관한 신관(神官)들의 결의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역(對譯;원문의 단어·구절 등과 맞대어서 번역하는 것) 비문이라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는 있지만, 히에로글리프의 해독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히에로글리프는 4세기 말을 끝으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급격히 사라져 버린 언어라는 점도 그 원인이다. 또 5세기에 호라포론이 쓴 <히에로글리피카>에 ‘히에로글리프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그려진 사물이 지닌 성격이 문자의 의미를 반영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는 것도 큰 장애가 되었다. ‘히에로글리프는 표의 문자(表意文字)이다.’라는 선입견이 해독을 방해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영국의 물리학자 영(T.Young;1773~1829)과 프랑스의 샹폴리옹(J. F. Champollion;1790~1832)이었다. 영은 샹폴리옹에 앞서 신들과 프톨레마이오스 등의 이름을 올바르게 동정(同定)하고,몇 개의 문자 소리(‘음가’라고 부름)를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히에로글리프 해독자의 영예는 샹폴리옹이 차지하였다. 샹폴리옹은 타원형의 테두리, 즉 카르투슈(cartouche)에 주목하고, 그 안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새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 후 아스완의 피라에 섬에서 발견된 ‘클레오파트라’로 생각되는 히에로글리프와 비교함으로써 1822년에 몇몇 문자의 음가(音價)를 결정하고, 히에로글리프가표의 문자가 아니라 표음 문자임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면 히에로글리프는 어떤 문자 체계를 갖춘 것일까? 히에로글리프는 문법적 차이에 따라 역사순으로 고(古)이집트 어, 중(中)이집트 어, 신(新)이집트 어, 데모틱, 콥트 어의 다섯으로 분류된다. 그 가운데서도 중이집트 어는 중왕국과 신왕국 시대를 중심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고전어로서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사용된 적이 있는 등 고대 이집트 어의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이집트 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히에로글리프의 총수는 700~800자였다. 24개의 음가가 존재하고, 아라비아 어처럼 자음만으로 표시된다. 구두점(句讀點)은 없고, 세로로도 가로로도 쓸 수가 있었다. 언뜻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처럼 히에로글리프는 문자라기보다는 회화라고 할 만큼, 멋지게 조형된 표현이 채색되어 있다. 히에로글리프의 조형 안에는 이집트 미술의 요소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문자로는 히에로글리프hieroglyph(神聖文子), 히에라탁hieratic(神官文子), 데모틱demotic(民衆文子) 등 세가지가 있다. 히에로글리프는 수메르 문자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로서 선사시대 말기(기원전 3200년경)부터 고안되어 왕의 이름과 업적 등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히에로글리프는 돌이나 나무 등에 새겨졌다고 해서 성각聖刻문자라고도 하는데, 때론 벽이나 파피루스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 이 문자는 상형문자, 회화문자라고 일컬어지듯 대단히 구상적인 문자로도 유명하다 문자의 소재가 인체와 인체의 각 부분과 사람의 동작, 동물과 식물, 지형, 천체, 갖가지 모양의 물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문자의 수는 700여 개로, 각 문자는 본래의 소재 자체를 나타내는 표의문자表意文子였으나, 일찍부터 음의 전용에 의해서 표음문자의 구실도 하게 되었으며, 두음頭音의 활용에 의해서 24개의 알파벳이 정해졌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각종 알파벳의 가장 먼 선조이다.

 

표음 문자가 첨부됨으로써 문자로서의 히에로글리프의 구실은 더욱 확대되었다. 또한 한글이나 한자와 마찬가지로 가로와 세로로든, 좌우로든 자유자재로 방향을 다르게 해서 쓸 수 있었다. 그러나 표음문자가 첨부됨으로써 피할 수 없는 결함도 생겨났는데, 그것은 동음이의어의 경우였다. 이집트 인들은 이 결함을 해소하고 말의 뜻을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 한정사限定詞(determinative)를 사용했다.

 

히에로글리프는 셈,햄 계통의 대부분의 문자가 그러하듯이 자음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찍이 그리스 어 같은 외국어로 옮겨진 신명神名,왕명,지명을 통해서든지, 혹은 고대 이집트 문자의 바로 뒤를 이어 사용된 콥트 어 같은 언어를 통해 유추가 되는 히에로글리프의 모음부가에 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고는 있으나, 아직 이 문자로 기록된 말의 발음을 완전히 복원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집트 인들은 히에로글리프를 발명하고 나서 이내 히에라틱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휠씬 후인 기원전 8세기경에는 데모틱도 사용한다. 그러나 그들은 히에로글리프를 신의 말씀으로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4세기까지 3천 년 동안 사용했다. 그러나 이 신성한 '진보'가 없었다. 다만 세월이 더해지면서 처음 700여 개였던 기본문자의 수가 프톨레마이오스 조(기원전 305~기원전 30)에 이르면서는 수천 개에 달했다. 그러나 언어의 근본법칙만큼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프톨레마이오스조 때의 사제司祭가 무려 3천 년 전의 석판에 새겨진 "피라미드 문서"를 해독하여 에드푸 신전의 비문을 새길 수 있었다. 언어란 몇백 년만 흘러도 특별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정말 놀라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히에로글리프의 끈질긴 생명력은 이 문자가 바로 신의 말씀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이 문자는 인간이 신을 찾아 헤맬 때 의지해야 하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 히에로글리프로 쓰여진 고대 이집트 어는 추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지극히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극히 물질적인 현실 세계도 잘 묘사하고 있다.

 

1세기에 기독교가 이집트에 전파되면서 그리스 문자에 7개의 문자가 추가되어, 기독교가 이집트 말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뒤 5세기경에는 이집트 각지에서 대부분의 문헌이,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 문헌이 이 문자체계에 맞추어 기록되었는데, 이렇게 해서 나타난 이집트 문자가 콥트 문자이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 어가 발전하는 마지막 단계로 본다.

 

그러나 콥트 문자체계는 순수한 이집트 문자체계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 문자를 차용해서 표시했기 때문이며, 이 문자에 의해 표기된 콥트어에는 고대 이집트 어에서 자음의 발음이 일부 변화, 탈락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또한 방언으로 변화가 많았던 것이다. 어쨌든 콥트 문자는 계속 사용되었으나 아랍 어가 확산되면서 8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아랍 어가 이집트 인들의 언어로 자리잡으면서 15~6세기부터는 그리스도 정교의 한 분파인 콥트 교의 종교용어로만 쓰이기 되었다.

 

한편 그리스 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조가 이집트에서 멸망(기원전 30년)한 뒤로 히에로글리프는 차츰 잊혀지기 시작했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이교도와 우상 숭배에 대한 억압으로 전수조차 어려워졌으며, 더욱이 비잔틴 제국의 유시티니아누스 호아제(재위 527~565)가 신전 폐쇄령을 내리면서 히에로글리프를 알던 사제들마저 사라짐으로써 이 세상세서 완전히 망각되어 버렸다.

 

이렇듯 철저하게 망각 속으로 사라진 히에로글리프는 잊비트를 침입했던 프랑스 군이 1799년 로제타에서 비석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다시 알려졌고, 프랑스 인 장 프랑소와 샹폴리옹이 읽는 법을 알아내면서 비로소 신비의 베일을 벗었다.

 

 

 

□  이집트 고대사 개요

 

. 선왕조시대    (BC5000~BC3000);     아직 통일국가가 탄생되기 이전

. 초기왕조시대 (BC3000~BC2780);     나르메르 왕에 의해 상이집트 통일, 수도 멤피스 건설

                                                    히에로클리프(상형문자) 정비, 1년을 365일로 정함

. 고왕국시대    (BC2780~ BC2270;     피라미드, 스핑크스 건설,

                                                    쿠푸 피라미드는 평균2.3톤짜리 돌 230만개로 건설됨

. 중왕국시대    (BC2270~BC1575);

. 신왕국시대   (BC1575~BC1085);     19왕조(BC1308~BC1186) 람세스 1세의 시작

, 후왕국시대   (BC663~BC332);         30왕조 넥타네보 군주는 이집트인에 의한 마지막 왕조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BC332~BC30);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통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네즘 문화의 중심지가 됨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대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망하여

                                                    로마제국의 속주로 전락함 (BC30)

. 그 후;        이집트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로마 제국으로 전락

      비잔틴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자, 이집트 토착종교는 쇄퇴

      AD570년경 메카에서 일어난 이슬람교의 세력확장으로

      AD641년 사라센 속국이 되어 이슬람화 됨

 

□  1

로제타스톤 (Rosetta Stone)

                                                                                                                              다음카페

. 로제타 스톤이 발견되기까지의 상황

 

 1798년 5월 19일, 이집트로 출발하는 배 안에는 5만 명의 병사 외에도 프랑스의 공학자, 지리학자, 골동품 연구가, 수학자, 시인 등 과학 예술 위원회들도 함께 승선하게 되는데 그들은 장구한 역사를 지닌 신비의 땅 이집트를 철저하게 조사하고, 도탄에 빠진 이집트인들을 교화한다는 명분으로 나폴레옹이 직접 뽑은 전문가 집단이었다. 그들과 함께 나폴레옹과 프랑스 병사들은 이집트에 상륙하여 전투마다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이때 나폴레옹의 전문가 집단은 다양한 프로젝트에 매달려 있었다. 장구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 관해서는 사실상 알려진 게 별로 없었는데 이번 원정을 통하여 프랑스인들이 직접 이집트의 자원에 관한 조사에 착수하기로 한 것이었다.

 

. 로제타스톤 발견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공을 개시한 지 꼭 1년 만인 1799년 8월, 당시 이집트 북부의 알렉산드리아 동쪽 60Km 로제타 (현재명: Rashid, 나일 강 서쪽 지류 어귀에 위치함)시 근교에 있는 셍쥘리엥 요새 주변에 방어 기지를 구축하던 중 이것을 발견한 도트풀이란 병사는, 이상한 글자들이 새겨진 검은 돌이 나오자 즉시 장교인 부샤르에게 알렸다.

 

길이 1.25m, 너비 0.7m 두께 28cm 인 단단하고 결이 고운 현무암에는 반질반질한 쪽에 세가지 다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첫째 단은 이집트 상형 문자로서 14행이었으며, 둘째단은 민용 문자로서 32행, 셋째단은 그리스어로 54행 이었다. 셋째단의 그리스어를 번역해 보니,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 신관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공덕을 찬양한 글이었다.

 

돌은 카이로로 옮겨져 이집트 연구소에 소장되었고 나폴레옹은 이집트 침공 시 함께 온 과학 예술 위원회들을 연구소로 불러 모았다. 이 돌에 대한 비상한 관심은 삽시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탁본가인 마르크 오렐과 장 조셉 마르셀이 탁본을 뜨고, 과학 예술 위원회의 한 위원이 그것을 조판했다. 비문을 인쇄해 유럽의 학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서였다.

 

. 로제타 스톤의 내용

 

그리스어로 된 부분의 각 행이 모두 약간씩 손상되기는 하였지만(나머지 두 부분인 신성문자와 민중문자 부분도 마찬가지로 손상되었다) 돌에 새겨진 그리스어 문장은 금세 판독되었다. 내용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 에피파네스(프롤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 9주년 기념일에 법령을 통과시켰는데 법령의 내용은 1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조언자들의 후견에 힘입어 나라를 다스리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통치 기간 중 이집트의 번영을 위해 이룬 업적들을 단단한 돌기둥에다 신성 언어와 토착어, 그리스어로 새긴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업적의 내용은 사원들을 장식 및 수리하고 죄수들을 석방하였으며, 해군 징용의 중단, 평등한 법체계의 도입, 불경한 사람들을 엄벌한 것, 그리고 댐을 건설하여 홍수를 막아낸 것 등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제타 스톤이 고대 언어들을 해독하는 데 실마리가 되어 줄 것이라는 애초의 부푼 기대는 한동안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돌의 일부가 유실된 데다가, 상형 문자와 민중 문자로 된 비문을 그리스어 비문과 비교하여 해독하는 일이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비문이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 샹폴리옹 이전에 로제타 스톤과 고대이집트 상형문자에 대한 해석

 

상형 문자는 이집트 문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보통 끌로 깎은 돌에 새겨져 있는데 돌 대신 파피루스가 필기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상형 문자의 형태도 달라졌는데 필기체 상형 문자가 좀 더 간결한 필기체인 민중 문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고대 이집트 문자의 언어학적 수수께끼를 풀려는 노력이 로제타 스톤을 계기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16세기부터 이미 학자들은 상형 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해 왔는데 독일인 안토나시우스 키르허, 영국인 윌리엄 워버튼, 프랑스인 니콜라스 프르레등이 초기 이집트 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상형 문자가 단순한 그림 문자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잘못된 견해로 인해 실제와는 거리가 먼 번역문을 내놓고 말았다.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민중 문자의 해독이라는 만만치 않은 작업에 처음 착수한 사람은 프랑스의 앙트완 이삭으로 그는 비문에 언급된 몇 가지 고유명사를 밝혀냈다. 그에 이어 1802년엔 스웨덴의 학자 요한 다비드 아처블라드는 몇 개의 단어와 그보다 더 많은 명사들을 확인해 냈다. 하지만 아처블라드의 성과는 여기서 그치게 되는데 그가 확인해 낸 단어들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민중 문자 부분이 순전히 자모로만 구성되었다는 견해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결국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게 되었으나, 이로 인해 민중 문자로 된 비문의 완전한 해독 문제가 약 반 세기 가량이나 공론화되지 못했다.

 

이후 로제타 스톤은 대영 박물관에서 오랜 세월 동안 조용히 묵혀 있게 되는데 그 사이 언론에서는 비석에 새겨진 수수께끼 같은 상형 문자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고, 학자들은 그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이후 이러한 논의에 대한 최초의 비약적인 진보가 1816년 자연 과학자이자 의학박사인 영국인 토머스 영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는 상형 문자들이 음가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를 진전시켰다. 쉽게 말하자면 각각의 기호들이 발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느닷없이 튀어나온 새로운 견해라고 볼 수는 없었으나, 영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견해에 대한 신빙성 있는 논거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는 상형 문자에서 타원이나 꽃테두리로 둘러싸인 기호들은 통상 왕의 이름을 나타낸다고 판단하여, 하나의 꽃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기호들의 음가를 밝혀내고자 노력했다. 로제타 스톤의 상형 문자에도 하나의 꽃테두리 안에 몇 개의 기호가 포함된 예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는 이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을 표시한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가운데 몇 개의 음가를 밝혀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 후 프랑스 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로제타 스톤을 판독하는 일에 착수함으로써, 마침내 상형 문자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된다.

 

. 샹폴리옹. 로제타 스톤의 수수께끼를 풀다

 

샹폴리옹은 학생 시절부터 이집트 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7세 때 이미 파리에서 동양 언어를 공부하여, 콥트어 사전 편찬 작업에 착수했을 정도였다. 샹폴리옹은 콥트어가 그리스어 철자를 사용한 이집트어의 후기 형태라고 주장했고 1812년에 22세의 나이로 교수가 되었다.

 

샹폴리옹은 영의 연구 성과와 콥트어, 상형 문자들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상형 문자들의 음가를 더욱 자세히 밝혀냄으로써 다른 왕들의 이름도 해독할 수 있었다. 샹폴리옹은 하나의 꽃테두리 안에서 볼 수 있는 특정한 기호들은 하나 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철자를 나타내며, 여자이름 뒤에는 특별한 기호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왕들의 이름을 표시한 꽃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것 중 아직 밝혀지지 않은 기호들의 음가는 그 이름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철자를 유추하여 정확히 연역해 낼 수 있었다.

 

샹폴리옹은 고대 이집트의 언어가 상형 문자, 신관 문자(고대 이집트의 상형 문자를 풀어 쓴 행서체 문자, 히에라틱이라고도 함), 민중 문자라는 세 가지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상형 문자는 단순히 표의(表意) 기호일 뿐 아니라 동시에 표음(表音) 기호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이론들은 1822년에 그가 집필한 '다시에 씨에게 보내는 편지, 음운 상형 문자의 자모에 관하여'를 통해 발표되었다. 샹폴리옹이 로제타 스톤에 새겨진 불완전한 14행의 상형 문자를 가지고 이룩한 괄목할 만한 업적은 고대 이집트의 자모 체계와 이집트인들이 상형 문자로 남긴 모든 글을 해석하는 열쇠가 되었다.

 

. 로제타 스톤이 프랑스가 아닌 영국 대영 박물관에 있는 사연

 

나폴레옹이 본국으로 돌아간 직후에 영국군과 터키군에 의해 프랑스는 이집트를 빼앗기게 된다. 그 후 알렉산드리아 항복 협정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의 프랑스군은 이집트에서 수집한 골동품들을 영국군에 양도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 프랑스측은 골동품 양도를 완강히 거부했으나, 나중에는 할 수 없이 입장을 바꿨다. 영국군의 탐킨즈 힐그로브 터너는 프랑스의 므노 장군에게 로제타석을 받기 위해 찾아갔고 므노 장군은 마지못해 로제타스톤을 내주었다. 포병 1개 분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로제타스톤을 징발했는데 이때 프랑스 군인과 민간인들은 거리에 모여들어 그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 후 로제타스톤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게 되었고 후에 터너는 이 고대 유물의 전시 장소에 이런 글을 남겨두었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이 고대의 유물이 오래도록 남게 되리라 믿는다. 이 유물은 고대 이집트 언어의 윤곽을 희미하게나마 밝혀 주었다. 또한 이는 방어 능력이 없는 현지인들에게서 약탈한 것이 아니라, 영국군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예롭게 취득한 자랑스런 트로피이다.”

 

 

 

□  2

로제타스톤

 

1809년부터 1813년 사이에 프랑수아 조마르가 쓴 ‘이집트 기(記)’ 24권이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다.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원정했을 때 수집해 온 자료들을 밑거름으로 하여 쓰여진 책이다.나폴레옹이 데리고 간 학자 175명이 이집트의 고대 유물을 닥치는 대로 긁어 모은 것이다.

 

그렇게 모은 유물들은 프랑스군이 1801년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해 몽땅 빼앗겼지만,복사된 자료만으로도 학자들이 이집트를 연구하기에는 충분했다.조마르는 원정대를 따라갔던 화가 드농의 스케치를 곁들여 ‘이집트 기’를 펴냈다.

 

아주 짧은 유럽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그리스·로마의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선 이집트 문화가 던진 충격은 매우 컸다.유럽이 아직 원시적인 떠돌이 사냥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이집트의 수천 년 유산 가운데 피라미드 하나만 해도 2t짜리 돌 250만 개로 쌓은 것이다.유럽인들이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데 한 가지 난처한 문제가 생겼다.이집트의 유적과 유물을 눈으로 볼 수는 있으되 거기에 담긴 속뜻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상형문자인 것 같은 이상한 기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물론 심지어 잉크 스탠드나 지팡이에까지도.그런데 그것들을 단 한 가지도 해독할 수 없었다.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국의 문화 유산을 뻔히 보면서 수백 명에 이르는 왕의 이름 하나도 알 수 없다니,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4000년이나 쓰였던 상형문자를 풀 단 하나의 열쇠로 로제타스톤(Rosetta stone)이 꼽혔다.그러나 30년이 넘도록 수백 사람이 달라붙었어도 거기에 담긴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로제타 스톤이란 길이 1.25m,너비 0.7m,두께 0.28m인 검은 돌이다.이 돌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에서 동쪽으로 60㎞ 떨어진 로제타 마을에서 요새를 쌓을 때 도트풀이라는 병사가 발견했다.

 

단단하고 결이 고운 검은 빛 현무암에는 반질반질한 쪽에 각기 다른 세 가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첫째 단 14행은 이집트 상형문자로,둘째 단 32행은 민용문자(民用文字·상형문자가 세속과 종교에 두루 쓰인 승용문자(僧用文字)로 바뀌었다가 더 단순한 흘림체로 바뀐 것.일반 국민에게 널리 쓰임)로,셋째 단 54행은 그리스어로.

 

셋째 단의 그리스어를 번역해 보니 기원전 196년에 이집트 신관(神官)들이 프톨레미 왕의 공덕을 찬양한 글이었다.

 

로제타 스톤은 영국군에게 빼앗긴 다른 유물들과 함께 대영박물관으로 보내졌지만,석고로 뜬 사본은 파리로 갔다. 학자들이 연구해 보니 같은 내용을 세 가지 글자로 써놓은 것이었다. 학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어를 아는 이상 나머지 두 가지 문자를 푸는 일은 쉬울 것이니,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기란 시간문제라고 보았다.

 

언어·역사·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두 이 일에 매달렸다. 그들은 이집트 상형문자가 뜻글자라고 못 박고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존 푸랑수아 샹폴리옹이 나타나기까지 어느 누구도 이것을 풀지 못했다.

 

. 샹폴리옹

 

샹폴리옹은 1790년 프랑스 남부 피지에크에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때 나폴레옹은 이집트에 원정을 갔다. 그무렵 샹폴리옹은 여섯 살도 되기 전에 읽고 쓰기를 마친 천재소년으로서 책더미에 파묻혀 지냈다.

 

1801년이 되자 맏형 자크가 열한 살 난 샹폴리옹을 그르노블로 데려가 사립학교에 넣었다. 자크는 훌륭한 언어학자였지만,동생이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를 쉽게 익히는 것을 보고는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동생이 가문의 이름을 빛내도록 샹폴리옹이라는 성으로 불리게 하고,자기는 피지에크라는 이름으로 불리도록 애썼다.

 

그해 어느 날 대학자 장 푸리에가 학교를 찾았다가 천재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의 뛰어난 지능에 탄복한 푸리에는 샹폴리옹을 집으로 초대해 자기가 나폴레옹을 따라 이집트에 갔다가 가져온 유물들을 보여주었다. 어린 소년은 파피루스와 돌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보자 금세 거기에 빠져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로제타 스톤의 사본을 보자 보석처럼 빛났다.

 

“누가 저것들을 읽었나요?”

소년이 묻자 푸리에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다면 제가 읽겠어요.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거예요.”

소년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뒤로 로제타 스톤이 그의 머리에서 떠난 적은 없었다.

샹폴리옹의 머리는 아주 뛰어나 그를 가르칠 사람이 없었다. 그는 열두 살 때 처음 책을 썼다. 열세 살이 되자 아랍어·시리아어·칼데아어와 옛 이집트 말인 콥트어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공부를 위한 자료는 모두 형이 마련해 주었다.

 

1807년 9월1일,열일곱 살 난 샹폴리옹이 파리 국립고등학교에서 ‘파라오가 다스리던 때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소년의 빼어난 통찰력과 확고한 논리에 압도되어,발표가 끝나자마자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샹폴리옹은 도서관이나 연구소에 파묻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아랍어·페르시아어를 공부했다. 중국어와 콥트어도 익혔는데,특히 콥트어 실력은 그가 콥트어로 쓴 일기를 본 어떤 학자가 옛 이집트 문헌으로 착각하고 주석을 붙이기도 했을 정도로 뛰어났다.

 

샹폴리옹은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가난에 시달렸다. 형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루브르 박물관 근처의 아주 작은 방을 월세 8프랑에 빌려 살았는데,툭하면 형에게 방세가 밀렸다는 편지를 보내곤 했다. 구두는 다 떨어졌고,셔츠는 넝마 같았다. 어찌나 남루했던지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다녀야 했다.

 

혹심한 겨울 추위와 굶주림이 샹폴리옹의 몸을 병들게 했다. 습기 차고 지저분한 방에서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는 그의 병약한 몸은 눈에 띄게 여위어갔다. 이글이글 타는 듯한 눈동자가 한 가지 집념이 그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음을 말해줄 뿐이었다. 샹폴리옹은 한시도 로제타 스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추기까지 상형문자 풀이를 미루었다. 스톤이야말로 그에게 마지막 도전이 될 터이고,그는 그 싸움에서 자기가 반드시 이기리라고 믿었다.

 

1816년 샹폴리옹은 왕당파 교수들로부터 나폴레옹 숭배자라는 모함을 받아 봉급의 4분의 1을 감봉당했다. 그는 몹시 어려운 처지가 되었지만 상형문자 해독의 전 단계인 콥트어 사전을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그 무렵 엘바 섬으로 쫓겨갔던 나폴레옹이 다시 돌아왔다. 1817년 3월7일 나폴레옹이 그르노블에 입성하자 온 시민이 그의 편에 섰다. 나폴레옹이 그르노블 시장에게 유능한 비서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시장은 나폴레옹을 숭배하던 피지에크를 추천했다. 시장이 발음을 약간 잘못해 피지에크 샹폴리옹을 샹폴레옹이라고 소개하자 나폴레옹은 몹시 좋아했다.

 

“아주 좋은 징조로군. 내 이름과 세 글자나 같다니!”

황제는 형제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동생 샹폴리옹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황제는 콥트어 사전이 출판되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나폴레옹은 이 젊은 학자에게 얼마나 감명을 받았는지,다음날 다시 학교로 찾아와 콥트어를 이집트의 공용어로 만들어 주겠다고 말했다. 샹폴리옹의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얼마 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센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자 샹폴리옹은 반역자로 몰려 학교에서 쫓겨났다.

 

. 이집트 문자의 해독

 

1822년 샹폴리옹은 마침내 상형문자 푸는 기초 원리를 발표했다. 상형문자가 소리글자 ‘表音文字’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가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 즉 뜻글자 ‘表意文字’로 보고 거기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찾아 해석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자세는 5세기에 그리스인 호라폴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300여년간 답습돼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쓰인 시대에 자기들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폴론의 방식을 믿었다. 언뜻 보기에 그림이나 다름없는 부호들을 그림문자 즉 기호나 상징으로 보아,굽이치는 선 3개가 ‘물’을 나타내고,깃발이 ‘신(神)’을 나타낸다고 풀이한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이런 식으로 이집트 상형문자와 로제타 스톤을 풀었다는 사람이 수도 없이 나타났다. 하룻밤에 로제타 스톤의 글을 다 해독했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중국의 한자와 이집트 상형문자가 유사하다며 중국이 이집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근거없이 멋대로 해석했다. 가령 수염이 난 사람 위에 연꽃이 여섯송이 피고 그 위에 매가 올라앉은 기호는,왕(매)이 시리아(파도치는 선으로 채워진 네모꼴을 바닷가에 있는 나라로 해석함)를 정복하고,포로 6,000명(연꽃 한 송이를 포로 1,000명으로 봄)을 잡았음을 나타낸다는 식이었다. 그것은 몽땅 엉터리였다. 호라폴론처럼 뜻글자로 보아서는 500개가 넘는 기호 중에 단 하나도 풀 수 없다는 것이 샹폴리옹의 믿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호라폴론에게서 등을 돌림으로써 샹폴리옹은 성공했다. 천재적인 영감(靈感)을 떠올린 데 그치지 않고 신념과 용기를 가지고 밀어붙인 결과였다. 이집트의 기호들이 ‘그림’이 아니고 ‘발음기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른 때야말로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린 위대한 순간이었다.

 

샹폴리옹은 로제타 스톤을 풀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제타 스톤의 그리스어는,기원전 196년 이집트 신관들이 멤피스에 모인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그들이 신전과 신관을 위해 애쓴 젊은 왕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미) 5세를 칭송하는 글을 채택하고,그것을 새긴 똑같은 돌들을 모든 신전에 바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다.

 

샹폴리옹은 그리스어로 쓰여진 글이 프톨레미왕을 칭송하는 것이므로 이집트 상형문자로 쓰여진 글에도 프톨레미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으리라고 믿었다. 어떤 기호가 ‘프톨레미’를 나타내는지만 알면 적어도 서너가지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터였다.

 

샹폴리옹은 기호들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기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했는데,역시 옳았다. 그는 상형문자와 그리스어가 함께 새겨져 있어 제2의 로제타 스톤이라고 불리는 필레의 오벨리스크를 통해 그것을 증명했다.

 

오벨리스크란 돌 한 개를 깎아서 높이 세운 기념탑이다. 네모꼴이 위로 갈수록 좁아져 꼭대기가 피라미드처럼 뾰족해지는 방첨탑(方尖塔)이다. 여기에는 대부분 국왕의 공적을 기리는 글이 새겨진다. 1821년 고고학자 조제프 뱅크스가 이집트 나일강에 있는 필레섬에서 영국으로 가져간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그리스어에도 프톨레미왕의 이름이 나와 있었다.

 

로제타 스톤의 상형문자와 필레의 오벨리스크에 새겨진 상형문자에는 똑같은 기호가 타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미왕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이 발견은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여러 단계에서 첫 번째 성공이었다.

 

위대한 발견은 계속된다. 필레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미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기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로 쓰인 글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기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었다. 샹폴리옹은 프톨레미를 나타내는 기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단어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였다. 프톨레미와 클레오파트라 두 단어에 다 나오는 발음기호는 P,O,L이니,그 기호들이야말로 P,O,L을 소리내는 발음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1822년 9월14일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왕)의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다 밝혀냈다. 그날 아침까지 그는 파라오 이름 25개를 풀었다. 마지막 남은 2개를 놓고 씨름하던 그에게 점심 때쯤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SS와 M까지 풀고 나서 문득 콥트어에서 태양신을 Ra(라)라고 하는 것이 생각난 것이다. MSS 앞에 RA를 놓고,거기에 이집트어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RAMSES가 되었다. “아,이것은 저 유명한 람세스 대왕의 이름이 아닌가!”

 

곧 이어 토트메스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샹폴리옹은 마침내 이집트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그보다 닷새 앞서 그는 132개 문자로 이루어진 상형문자 알파벳을 발표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하나였다.

 

연구실에서만 지낸 샹폴리옹이 마침내 이집트를 탐사한 때는 1828년 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이다.그는 가는 곳마다 자기의 상형문자 풀이가 옳음을 확인했다.멤피스의 폐허에서 그는 각각 다른 때의 건축물들을 한눈에 구별했다.사카라에서는 오노스라는 왕의 이름을 발견하고 즉시 초기 이집트시대에 속한다고 정확하게 연대를 짚어냈다.신전·왕궁·무덤의 비문들이 샹폴리옹의 풀이와 딱 맞아떨어져 사람들을 놀라게 하자 원주민들이 ‘오래된 돌에 쓰인 이상한 기호’를 잘 해석한다는 사람을 보려고 무리를 이루어 찾아오기도 했다.

 

샹폴리옹이 프랑스로 돌아가자 샤를 10세가 이집트학 강좌를 열도록 칙령을 내렸다.그러나 샹폴리옹은 초대 교수로 취임한 지 얼마 안되어 죽었다.1832년 3월4일 “너무 이르다.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남기고 죽은 그의 나이는 마흔하나였다.

 

그 때는 아직 샹폴리옹의 이론이 세계 학계에서 공인되기 전이었다.그가 죽자 곧 영국과 독일 학자들이 그가 단순한 상상력에 의존해 어거지로 상형문자를 풀이했다고 비방했다.샹폴리옹이 죽은 지 64년이 지난 1866년이 되어서야 독일인 렙시우스가 그의 이론을 지지했다.1896년에는 레어프가 영국 학사원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연설을 했다.

 

 

. 현대의 이집트 문자 해독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밝힌 이론으로 이집트 상형문자를 해독한다.상형문자는 4,000년 동안 계속 변해 왔기 때문에 한 가지 비명을 해독했다고 해서 그 지식을 가지고 다른 것을 똑같이 풀어낼 수는 없지만,샹폴리옹의 이론을 응용해 조금씩 조금씩 해독의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이제는 한 비문을 읽을 때 첫 번째 줄은 오른쪽부터 읽고 두 번째 줄은 왼쪽부터 읽으며 세 번째 줄은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는 것까지 알려져 있다.

 

오늘날 학자들은 샹폴리옹이 쓴 ‘이집트어 문법’을 밑거름으로 하여 옛글을 해석할 뿐 아니라 글을 쓸 수도 있다.이집트의 수정궁 정원,베를린의 이집트 박물관,기제의 피라미드에는 현대인이 상형문자로 쓴 헌정사와 기념문들이 붙어 있다.

 

그렇다고 이집트 상형문자가 다 풀린 것은 아니다.이집트학은 아직도 샹폴리옹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샹폴리옹은 이미 상형문자 가운데 어떤 것은 알파벳과 같은 소리(음가)를 나타내고 어떤 것은 부호 하나가 그대로 한 낱말이기도 하며 또 어떤 부호는 그 하나로 아주 복잡한 뜻(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밝혔다.이 수수께끼들이 다 풀리려면 또 다른 샹폴리옹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  로제타스톤을 해석하기 위한 천재들의 노력

 

샹폴리옹에 앞서 로제타스톤의 해독에 기여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먼저 독일의 예수회 성직자인 아타나시우스 키르셔(Athanasius Kircher, 1601~1680)는 동양학, 지질학, 의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키르셔의 탁월한 발명 및 지식의 깊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교될 정도로 뛰어났다. 키르셔는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을 푸는데 키르셔의 연구 자료를 참고했다.

 

동양학자 실베스터 드 사시(Silvestre de Sacy, 1758~1838)남작은 로제타스톤에 새겨진 민용 문자(demotic inscription)의 이름을 규명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드 사시의 제자인 스웨덴의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인 요한 오께블라드(Johan Akerblad, 1763~1819)는 드 사시 남작의 연구를 1802년에 이어받아 두 달 만에 민용 문자의 모든 이름을 밝혀냈다.

 

광학, 빛, 에너지, 심리학, 음악, 언어, 이집트학 등에 능통한 영국의 토마스 영 (Thomas Young, 1773~1829)은 14세의 나이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 이외에 불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독일어, 칼데아어, 고대 시리아어, 사마리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암하라어(에티오피아어) 등 14개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였다. 영은 오께블라드가 1802년 풀어 놓은 민용 문자 29개 알파벳을 토대로 로제타스톤의 상형문자를 풀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오께블라드처럼 영도 상형 문자가 전적으로 표음문자(음절문자)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1814년까지 영은 로제타스톤의 민용 문자를 모두 번역한 후, 상형문자를 푸는데 착수했다. 이어 1815년 영은 타원형의 테두리 속 상형문자가 파라오의 이름임을 알아내었다.

 

□   상형문자

 

히에라틱 문자와 함께 고대 이집트 3천년 역사를 통해 사용되었다. 원래 상형문자는 표의문자이지만 사건이 지나면서 음을 나타내는 표음문자와 수식어 등이 혼용되었다. 상형문자는 음표문자와 결정사로 구성되며 음표문자는 단음, 복음 3음으로 이루어진다.

 

상형문자는 장식적인 성격이 강하고 소재인 돌, 나무, 파피루스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든지 쓰여진다. 주로 신전이나 무덤의 기둥이나 벽면, 오벨리스크 등에 왕의 업적이나 사후세계 및 신에 대해 기록할 때 쓰였다. 나중에는 오직 신전의 벽에만 새겨졌기 때문에 히에로글리프라고도 불린다. 히에로글리프(Hieroglygh)는 기원전 3200년부터 394년까지 이집트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던 상형문자이다.

 

hieroglyphics(하이로글리픽스) = 그림으로 쓰는 방식(picture writing system)

hieroglyphs(하이로글립) = 각 그림 문자에 있는 문자(characters in such a system)

 

 

'◆ 관심과 의문......眞 > . 한 때의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성  (0) 2013.09.26
거울  (0) 2013.09.15
어머니  (0) 2013.06.03
극점  (0) 2013.05.23
3일간의 연휴  (0) 2013.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