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핌 ......
■ 나의 어머니
친구 김 사장으로부터 어머님께서 6월14일(금) 4시에 KBS2에 출연하시니 시청하라는 문자연락이 한 통 날라왔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건강하시고, 세상에 자랑하리만큼, 공개 출연을 좋아하는 선량한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에 비춰보니 늦은 나이 되도록 그리 되기란 남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을 태어나게 된 고향의 또 다른 한가지 의미를 준다. 내가 태어난 장소가 남원이니, 개성이니 하는 어느 한 지역이기에 앞서서, 어머니의 뱃속과 품 속을 거쳐서 나왔기에 한 생명체로서 그 품속을 따스하게 여기게 되는 지도 모른다.
남보다 일찍 그의 보살핌을 떠나게 된 이들은 그 분, 어머니에 대한 정과 그리움을 잊지 못해, 애닯아 하는가 보다. 그러나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은 우리 수명을 길게 연장하여 주었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그분 어머니의 보살핌과 정을 느끼고 감사하게 여길 수 있는 더 많은 기간을 대부분 챙기게 되었다. 나 자신이 노년기에 접어드는 만큼, 비교적 긴 세월을 함께 생활하며 어머님에 대한 정과 그러한 감정의 기억들도 서서히 식어가고 잊혀져 감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물론 급작스런 사고나 질병으로 어머님을 일찍 여읜 경우가 주변에 흔하다고는 하지만, 평균 수명이 길어진 만큼 그 빈도는 낮다고 생각된다. 나의 경우 그러한 면에서 행운아다. 내가 회갑이 넘도록 여태 어머님께서 생존하시며 내 곁에서 아들걱정에 밤낮이 없으시니 말이다. 내가 주제넘게 그분을 보살피기 어렵다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잦아지니, 복에 겨운 생각일거라는 자책을 하기도 한다.
먼 곳, 남에 대한 사랑에 앞서, 가까이 옆 방문만 열면 계시는 노인 어머님을 두고, 그 동안 나는 충분한 사랑을 주고 있었을까? 하는 자책을 다시 하여 본다. 하지만 늘 부족한 구석이 있다. 부끄럽다고 눈을 내려 깔게 된다.
. 부화 (孵化)와 어머니의 의미
(나의 블로그 글 “부화”중에서 발췌 )
부화(孵化)라고 함은 동물의 알 속에서 새끼가 껍질을 깨고 밖으로 나오는 알까기를 말 한다. 닭은 알에서 21일만에 부화하며, 부화에는 적정 온도와 습도뿐만 아니라 환기며, 알이 놓인 각도, 알을 하루에 몇 번씩 굴려 주는가에 따라서 그 부화율이 크게 달라진다고 한다.
동물마다 주어진 환경과 자기의 본능에 따라 최적의 상태에서 알까기가 진행되고 그 종족이 번식되어 왔지만, 부화의 의미를 확대하여 볼 경우, 사람을 비롯한 포유동물도 조류와 마찬가지로 알에서 깨어 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조류의 알까기가 새 둥지에서 이루어 진다고 한다면, 포유류는 어미의 뱃속이 새의 둥지와 같은 역할을 해 준다고 비교하면 쉬울 듯 하다.
동물에서 생성되는 수컷의 생식세포가 정자이다. 인간의 경우 정자는 23개의 염색체로 구성된 유전물질이 여기에 있다고 한다. 여성 난소의 표면은 세포층(생식상피)으로 덮여 있는데 여포라고 하는 속이 텅 빈 세포구들이 각 난자를 에워싼 형태로 태어나면서부터 여기에 착상되어 있고, 이 중에서 일생 동안 300개 내외의 여포가 성숙하여 수정될 수 있는 난자가 되며, 배란이 일어나게 된다. 난자에도 역시 23개의 유전물질이 있는데 정자를 만나 수정되면 세포분열이 이루어지면서, 정상인의 세포 염색체 수인 46개로 된다고 한다.
알에서의 부화나 정자 난자의 수정 과정은 감싸고 있던 한 개의 껍질을 벗겨 내거나 뚫고 들어가는 과정이 수반되고 있다. 그 껍질은 서로 다른 세계를 분리하고 있는 계면(界面)이기도 하다. 껍질을 부수고 나온다거나, 껍질을 뚫고 들어간다 함은 계면(界面)으로 둘러싸인 다른 세상으로의 진출이나 진입을 의미한다.
서로 다른 세상과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하여 각각의 상이한 환경조건에서 기다림의 시간이 요구되는 것이 곧 알의 부화 조건과도 같은 셈이다. 수정을 거쳐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치는 포유동물을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이 세상을 보게 된 과정에 비견될 수도 있다.
(나의 블로그 글 “부화”중에서 발췌 )
조류의 부화 과정이나 어머니를 통한 출생의 과정은 한 계면을 깨고 새로운 이 세상을 나온 계면(界面)의 전후를 긋는 경계선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태동한 어린 씨앗의 육체와 정신을 양육하는 텃밭이자 자양분 공급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모자 사이는 감사니, 보답이니 하는 따위의 등식 형성이 아니 되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체크밸브 달린 파이프라인처럼 오로지 한 방향인 일방통행의 사랑 등식이 자연의 섭리라고도 생각해 본다. 그로부터 받은 만큼 나 또한 다음세대에게 퍼 주기만 하는 사랑 등식이 옳은 세상이치가 아닐까 여겨보는 것이다. 받은 만큼 돌려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에 지나지 않으며, 나 또한 다음 세대에 온 힘을 다해 퍼 주기만 하는 것이 당연한 순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어머님은, 새로운 세상, 계면(界面)의 경계선, 그 의미 말고는 더도 덜도 아닐지도 모른다. 부화(孵化) 시에 깨어지는 피각이나, 함께 흐르던 깃털 적신 습기는 감상 어린 허상에 지나지 않고, 그 껍질에서 나오는 알까기는 물이나 바람처럼 흐르는 자연의 단순한 한 현상에 불과 할 수도 있다.
어머니도, 그리고 그로부터 태동한 나 자신도 똑 같은 자연의 현상일 수도 있는데 ……, 어머니에 대하여 때로는 못다한 정, 부족함이나 아쉬움에 죄스러워하기도 한다. 이는 시대적, 사회적 관습에서 오는 편견과 우상(偶像)에서 비롯한 것이나 아닐는지 ……
2013.6.3.(월)
오갑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