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6292

오갑록 2013. 1. 1. 21:36

애틋함 ......

 ■  6292

 

    누구에게 있어서나 어머니라는 말은 사랑의 대명사가 된다. 한도 없이 많은 것들을 어머니로부터 나누어 받아왔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은 물론, 그들을 감싸는 온갖 겉치레까지도 그로부터 받은 나눔의 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삐딱한 사춘기의 철없는 누군가는 반문하기도 한다. ?, 자기네 좋아 낳았지, 나 위해, 나를 낳았느냐고 ……”

 

지 새끼 돌보는 본능은 인간이나 여느 동물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들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 보살피고 양육한다. 더러는 새끼 위해 처절한 사투까지 서슴지 않는 모습들을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자식 사랑은 본능이자, 당연히 해야만 할 일을 하는 자연의 순리 정도로 넘길 수 있다. 동식물 종족 보존의 과정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자연계에서 생존은 경쟁의 연속이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동시에 종족을 지키고 수를 불리는데 충실해야 하는 운명을 지닌 것이 자연이다. 식물은 자기 씨앗의 보존 위해, 뽀얀 자양분을 쌓는가 하면 딱딱한 껍질의 보호막을 치기도 한다. 그 대신 동물들은 새끼가 충분히 자립할 때까지 양육하는 모성본능을 갖고있다.

 

그러한 자연계 숙명을 지닌 관계로서 맺어진 사이가 우리 어머니와 나이기도 하다. 배아(胚芽)를 둘러싼 씨앗의 속살이나 밤 잣 호두 같은 견과류 껍질을 당연하게 여기듯 를 감싼 어머니의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러움인지는 모르겠다. 배아의 자양분이나 보호막을 두고 감사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산란을 마치고 목숨을 다하는 연어나 낙지 같은 동물도 있는가 하면, 짧은 기간의 한정된 양육 시한을 거치면 모성애를 잊고 서로를 멀리하는 부류도 많다.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 중 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그 관계의 끈을 다른 어느 부류의 동식물 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은, 단지, 감정의 기억능력이 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법칙만으로 본다면, 이를 두고, 좋다거나, 옳다거나, 잘하는 것이라고 평할 수는 없을 게다. 그 어느 자연현상이 크다거나 작다거나, 길다거나 짧다고 하여 순리에 어긋남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사랑의 감정을 생이 다할 때까지 오랜 기간동안 기억되는 특성이 있기에, 숨을 다하는 날까지 자식사랑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 어머니라고 여기면 크게 이상한 생각이 아니 될지도 모른다. 그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

 

입을 통해 표현하는 차이는 다를지 모르지만, 누구나 어머니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이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닌다. 때로는 못다하여 아쉬운 그 사랑을 그리워 하기도 한다. 때문에 누구에게나 쉽사리 공감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 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때로는 좀 더 많이, 좀 더 오래 그 사랑을 느끼며 나누고픈 바람이 우리를 아쉽게 하기도 한다.

 

어린시절 어머니를 여읜 고아들이나 갖는 감정만은 아니다. 어디 우리가 갖는 그 기한에 한정이 있던가? 아무리 오랫동안을 함께 지냈어도 아쉬운 감정이 문득문득 묻어 나는 것은, 우리가 받아 온 그의 사랑을 잊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감정의 장기간 보존 능력이 어느 동물보다 길다는 특성 때문인지 모른다. 어머니는 모성 본능의 감정 끈을 늙도록 놓지 못한 채 자식사랑에 목말라 하고, 그 자식 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그를 못 잊어 하는 것은 자연에서 흔치 않은 색다른 특성일 수도 있다.

 

한편으론 인간의 부질없는 욕심 욕망의 산물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성장 후에까지 지속하여 갖는 그 애틋한 감정이란 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종족 유지 본능을 넘어서, 영혼 영생 까지를 넘보면서, 후세에서의 안녕과 행복까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차원에서의 욕망의 산물들은 아닐까?

 

나의 영혼을 돌봐주고, 나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제사 지내 줄 나의 소중한 핏줄기라는 황망한 가치관의 산물들은 아닐까? 언제까지고 애틋함으로 저려오곤 하는 모성애 사랑의 근원을 따지거나 헤아릴 소재는 아니겠지만, 그것이 어떤 가치가 있는 감정인지는 생각하여 보고 싶은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어린 나이의 모성애에 대한 것은 이해되지만, 나이 들어도 놓지 못하는 그 감정의 본질은 때로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한정된 시간이나 기간이 되면, 우리는 그 상황에 따라 지난 일들을 돌아 보게 된다. 현실, 현재, 현위치, 자신의 모습을 과거나 미래의 시간으로 졸보기나 돋보기 대듯 현실의 사이에 두고 조율하며 바라보게 된다. 때로는 잘잘못을 느끼며, 수치 회한 영광 자랑 따위의 감정이 유입되곤 한다.

 

 . 재미난 한시간 특강이 끝 나갈 시간,

 . 보람찬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해질 시간,

 .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아 간 한 주의 주말,

 . 월 말이나 년 말이 오면 ……

 

어느 사이 자신도 모르게 나이 들어, 외모는 여느 노인네들을 닮아 가는 자기 모습에 기 죽어 거울 앞에 서기 민망해 지기도 한다. 웃음소리 말만 들려도 저려오고 시려 오는 듯 하던 어릴 적 사랑하던 형제자매의 모습들도 아스라이 멀어져 만 간다. 하나 둘 분가하며 제각기 새 가정을 꾸리고 가장이 되어 그들 나름대로 세상의 파고를 넘나들기 분주하다. 어리던 자녀들도 성장하니 마찬가지다. 학업을 마치고 직장인이 되니 무한경쟁의 험준한 사회 적응에 정신 없다. 그들로부터 어릴 적 순진하던 웃음을 기대한다면 정신 없는 노인네로 대접 받기 쉽다.

 

  . 주 말, 월 말, 년 말을 맞이 했듯,

  . 인생의 노년기도, 이렇게 다가오는 것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득 눈을 돌려 보면, 여전히 애틋한 감정으로 지긋이 나만 바라보는 노인 분이 바로 옆에 계시다. 한결같이 아들 사랑의 모성애를 놓지 못하시는 어머니, 인간의 본능으로만 받아들이기에는 안쓰럽고, 벗지 못할 삶의 무거운 짐과 같다는 생각까지도 들곤 한다. 이제 모든 것 훌훌 털고 고요하고 평안한 마음 쓰시기를 기대해 보지만, 사랑.미움.노여움, 애증이 교차하는 마음의 날선 고리를  쉬이 놓지 못하신다.

 

이제 새해를 맞아 92세 되시는 노인이 갖는 환갑 지난 아들에 대한 모성애는 젖먹이를 대할 때나 진배없으시다. 때로는 그 기대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미움과 노여움이 끝없이 교차하게 된다. 너나 없이 갖게 되는 대다수 노인들의 마음 씀씀이라는 마음 아프고 씁쓸한 교훈을 그 분으로부터 배우게 된다.

 

 

. 어머니 생각에 남겨 보는 글

 

냇가에 흘러가는 오이 한 개를 치마폭에 주어 담고 왔었다는 태몽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일까?를 생각하며 종종 떠 올리기도 했던 내용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소채가 오이입니다. 덤덤한 맛이지만 약간의 상큼한 향이 제 역할을 한다는 정도입니다.

 

내가 술 태백이 노릇 할 때 숙취용으로 또는 등산길 깔딱고개 올라 채고 나서 숨돌리며 배낭 한편에 꽂아 놓은 오이 쪽 꺼내 들고 씹으며 침 돌리며 애용하던 물건 정도입니다. 중국집 자장면 그릇, 면발 위에 올라 온 오이채나, 한 여름 밥 상위의  오이냉채 정도의 역할을 하는 정도 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 길지 않은 사회생활 거치며 종종 떠 올려 보곤 했습니다만, 사회에서 내 역할이 그 오이를 많이도 닮았다는 생각입니다. 쌈박 하게 달거나 시지도 않아 그다지 구미를 돋우지도 못합니다. 약이 된다거나 우리 몸에 보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쓰다거나 맵다거나 짜지 않아 입맛을 자극하지도 않습니다. 밥상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이지만, 있으면 한 번쯤 젓가락이 그 쪽으로 행차하는 정도의 식단의 재료가 오이가 아닙니까?

 

어머니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그 오이라는 식재료 정도에 불과하지나 않았을까요? 그다지 잘났다거나 자랑스럽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못나거나 요란하여 문제되지도 않았던 게 내가 아니었을까요? 이제 그 치마폭에서 그만 내려 놓으시고 떠 내려가는 세월, 그 시냇물에 그 오일랑 그냥 흘려 보내셔요. 마음도 함께 그 곳에 놓아 보내셔요.

 

어머니 서른 나이에 품으셨던 그 모성애, 사랑하는 마음, 애틋한 마음, 이제 모두 놓으실 만 합니다. 안쓰럽고, 조바심으로 걱정되고, 잘되라고 빌던 그 마음도 함께 놓으셔요. 당신 나이 삼십대 때, 뛰놀고 뒹굴던 너댓살 천방지축 아들은 이제 아니랍니다. 왜 모르시는 척 하십니까? 당신의 그 아들 나이가 환갑이 지난 것을? 세상 돌아가는 이치, 그 모든 것은 그리도 잘 꿰어차고 계시는 분께서 ……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가사면 가사, 심지어 한 여름 휴가철에 승용차의 냉각수 잔량까지 꼭 챙겨라고 당부하며 염려하여 주시는 분께서 말입니다. 

 

내가 그 볼 품 없이 꼬부라진 오이만큼이나 잘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로부터 과분한 사랑 오랫동안 잘 받아 왔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그 감사에 충분하게 넉넉한 보답 되지 못하여 송구스러웠습니다. 어머니와 그 아들, 62년과 92년 간의 관계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지난 날의 관계, 지금의 관계, 그리고 먼 후 일의 우리의 관계는 무엇으로 간직함이 옳은 일일까요?

 

그 관계의 가치 기준들이란, 우리가 그 동안 배우고 익혀 왔던, 우리사회의 도덕적, 윤리적 통념들 그대로가 모두 옳은 것들일까요? 아니면 옳다고 여기던 그 기준이란, 행여나, 사회와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각색된 엉터리 채색품의 가치에 불과한 것들은 아닐까요?

 

6292; 작은 생명체 간에 나눈 사랑, 이내 사그라질 흐릿한 불꽃.

6292; 혈연으로 이어진 영원한 사랑, 모성애의 시발점.

6292; 치마폭에 건져 올린 오이 모양, 작고 희미한 한 생명체, 이제 그 삶의 꿈도 접어야 할 때.

 

마음도 정도 사랑도, 서로 간에 주고 받는 것에는 시와 때가 한정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이곳, 자연에서 생존하는 생명체라면 그 틀에서 벗어난 바램은 과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언제나, 영원히 그런 단어는 별도의 믿음과 신앙으로나 딸 수 있는 별다른 과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6292, 우리가 서로 주고받던 그 관계는 크고도 깊고, 길었으며, 충분히 감사하고 만족했던 것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더 원하고 바라는 나머지의 것들은 감사하는 마음 속에 고이 묻어두고 싶습니다.

 

6292, 때로는 하룻밤 무탈하게 보낸 것에 대한 안도의 한숨을 짓기도 합니다. 숫자가 커질수록 한 겨울 보내기가 멀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 봄 어느날, 구멍 난 어머니 방한화를 수선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심난 했었답니다.  수선한 이 신을 과연 올 겨울에도 건강한 몸으로 잘 신으실 수 있을까?, 그래서 첫눈 내린 초겨울 그것을 재빨리 꺼내면서 무슨 좋은 선물이나 되는 양, 생색내며 기쁜 마음으로 신겨드렸답니다. 환갑을 지난들 무엇하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은 여전히 철없고, 방정 맞고, 초라하고, 꾀죄죄한 아들입니다.

 

그래도 걱정일랑 접어두시고, 사랑의 마음도 비우시고, 애틋함도 미움도, 서러움 서글픔도, 괴로움 쓸쓸함도 모두 훌훌 털고 잊고 용서하시며, 먼 발치로 덤덤하게 바라만 보시며 지나치셔요. 이제 그럴 때도 된듯합니다. 6292, 지금 정도라면 흡족한 수준이라고 만족하고 싶습니다. 인생의 한정된 시와 때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에게만은 영원과 영생을 기대함은 부질없는 욕심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해 봅니다.

 

2013년 새해 첫날, 그래서 오늘도 아들은 행복 했습니다.

 

한 편으론, 조심스러워 숨 죽이며 보낸 휴일 하루였지만, 6292 늦게까지 어머니가 베푼 모성애, 그 사랑의 행적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하루이기도 했답니다. 누구나 누리고 느낄 수 있는 행복이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복되다거나 운 좋다는 의미를 새삼스레 생각나게 합니다. 건강하시며 늦도록 베푼 과분한 사랑에 부끄러움도 느낍니다. 괜스레 짜증 어린 속 좁은 아들의 마음을 탓하기도 합니다.

 

부끄럽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생각을 남깁니다.

 

2013.1.1.(화)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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