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무엇이 아름다운가?

오갑록 2012. 10. 1. 15:50

정관(靜觀) ......

■  미추(美醜)의 경계선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 짓는 것들

 

 

□  아름다움이란 시와 때, 그리고 장소가 적절해야만 아름답다.

 

같은 일에도 시나 때, 장소가 어우러지지 못하면 추한 모습으로 변하고 만다. 지난 경험을 들춰보면, 때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항상 어렵다. 심지어는 배 고플 때, 슬플 때, 기쁠 때도 제대로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다. 배고플 때를 제대로 알고 먹지 못해 건강을 망치기도 하는가 하면, 세월 가고 한참을 지난 후에야 그 때의 슬픔이나 기쁨이 얼마나 컸던 것인지를 새삼스러워 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풍족한 시대를 살아 가고 있다. 제 때 맞춰 먹는 음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망각하며 지낸다. 내가 생활하는 이 시대, 이 장소는 어느 때 보다 더 넉넉한 세상이다. 배고프고 곯아가며 느끼는 추한 모습이 어떤지 잘 모르며, 그에 속한 자신이 복되다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제 때를 맞추지 못하고 과식과 폭식으로 몸을 망친 뚱보들도 때에 어긋난 데서 오는 추함은 아닐지 넘겨 짚어보고 싶다.

 

먹는 것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물질과 관련한 많은 것들이 그러하다. 우리 근대사의 역사나, 어렵게 생활하는 오지의 어려운 삶들과 비교할 때, 먹고 입고 거주하는 우리의 의식주가 모두 풍요롭고, 그만큼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지낸다고 자신 있게 답하는 이는 드물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러한 의식주 말고도,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곤 한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들이다. 의식주가 풍요롭다고 하여 이목구비를 통해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며, 생각으로 느끼는 뭇 감정들이 모두 함께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다.

 

스치는 바람결에서, 우연히 발에 채인 조약돌 한 개에서, 봄 날 하늘거리는 연초록 들풀 잎새에서, 한 여름 피어 오르는 새하얀 뭉게구름에서 …… 우리는 우연히 아름다움을 맛보게 된다. 어디 보이는 것만 그러하던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따스하게 느껴오는 봄날 양지 녘의 따스함도 소리며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들이다. 이처럼 우리 곁에 아름다움 들은 시시때때로 스쳐 흐르고 있지만, 그 때와, 그 장소를 우리가 느끼고 즐기지 못한 채 흘려 버리기 일쑤다.

 

놀고 쉬고 일하는 중에도 아름다움은 묻어 있다. 운동에 열중하고, 맡은 일에 열중하고, 쉼터며 휴양지에서 쉬는 때도 나름의 아름다움에 취하며 지낸다고 볼 수 있다. 즐기며 열심으로 흘리던 그 땀 방울의 아름다움을 세월 가고 흐른 뒤에야 그 때가 좋았음을 어렴풋한 기억으로 떠 올리게 되기도 한다. 힘들고 욕심에 차지 않는다는 불만과 불평으로 아름다운 한 때를 흘리는 수가 적지 않다.

 

제 때에 입고 먹고 보고 자고 놀고 일하고 쉬는 것은 아름답지만, 때가 아닌 이르거나 늦어지면 아름다움은 고사하고 추해지기 십상이다. 한겨울 반바지 차림이나, 한 여름 두터운 스웨터 차림은 추하다. 때 지난 멋은 추하다. 이른 시간 먹고 마시는 것이나 늦은 밤참도 눈에 설다. 옆자리 동료들은 맡은 일 처리에 바쁜데 자기 혼자 한가롭게 쉬는 모습도 눈에 거슬린다. 한창 일할 나이 젊을 때 빈둥대며 놀거나, 거꾸로 허리 굽고 백발 된 늙은 나이에 힘든 일 겨워하는 모습은 추하게 보인다. 때 맞춰 일하는 모습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때도 모르고 일하는 모습은 추하게 보이는 수가 많다. 늦은 나이에 열공 중인 만학도도 예외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랑하고 봉사하고, 노력하며 일하는 모습들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철 지난 나이에 너무 나서면 나이도 모르고 주책 맞다는 핀잔듣기 쉽다. 추한 모습으로 비추게 되는 것이다. 너무 어린 나이에 나서는 경우에도, 측은하다거나, 발라당 까졌다며 추하게 여기기 쉽다. 그러한 적당한 때를 긋는 경험상의 경계선이 있다. 우리가 경험한 사회적 가치관이 그어 놓은 선일 뿐, 그렇다고 그 선이 옳다거나 진실이라고 단정 할 수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니 추함이니 하는 가치관의 본질 일 수 있다.

 

내가 느낀 아름다움이, 너에게도 아름다울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이나, 인간이 느끼는 추한 것이 개나 소에게도 추할 것이라는 것은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미추의 어느 한 경계선이 사실일 수는 있으되, 진실로서 평가 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가 될 것이다. 때문에, “아름다움이란 시와 때, 그리고 장소가 적절해야만 아름답다.”라고는 하지만, 나의 생각, 나의 얄팍한 가치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만 한다.

 

 

□   나와 우리들에게 이로운 것은 더욱 아름답다.

 

아름다움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나에게 이로운 것들을 달리 표현하는 어귀임을 이해 할 수 있다. 나에게 해로운 것은 항시 추하게 여겨 지는 것이 생체의 본능임을 알 수 있다.

 

나와 우리에게 이로운 것이란,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의미한다.

 

영양가 있는 먹거리를 우선 꼽을 수 있다. 푸성귀, 곡식, 과일, 고기 같은 우리에게 먹거리를 조달하여 주는 자연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이로운 것이다. 갖가지 식물과 동물, 대지며 공기 바람과 빛 까지도 예외일 수는 없다. 부모, 가족, 직장, 고향, 나라와 같은 사회도 그러한 먹거리를 조달하여 주는 역할을 하기에 나에게는 이로운 것이다. 나에게 이롭기에 그 가운데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의식주는 생명체로서 생물의 본능 유지에 필수 조건이다. 그 의식주의 근간이 되는 것이 나에게는 이로운 것들이다. 옷과 집, 따스함, 시원함, 안락함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자연과, 고향, 내가 속한 사회가 나에게 의식주를 제공하기에, 내게는 이로운 것이다. 옷, 집, 차, 가재도구 ……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 종족의 대를 이어주는 데는 배우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본능적으로 내가 느끼는 확실하게 유리한 상대가 나에게 이로운 상대일 것이다. 그러한 이성으로부터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은 순리일 것이다. 사랑을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나 또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을 전제로 하는 단서 있는 사랑일 것이다. 나에게 해가 되는 사랑 (불륜이라고 하던가?)은 추하게 여겨질 것이다.

 

결국 나 또는 우리에게 이로운 것만 아름다울 수 있다. 아름다움이란, 한정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미추의 경계선이 나를 중심으로 분명하게 구획되어 진다는 특질을 갖고 있다. 적군을 무찌르면서 아군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참한 여성만 보면 음침한 욕심이 차오르는 게 건강한 남정네들이다. 생명체로만 본다면 잔인한 낚시광이나 처참한 사냥터를 보고서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동시에, 적군의 입장, 여인의 입장, 물고기나 사냥감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추한 모습이기도 하다.

 

 

□   과하지 않음에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조화로움을 전제로 한다. 모자라거나 과하면 추하게 된다. 그러나 조화로움의 경계선이란 항상 주관적이다. 때와 장소, 너와 내가 달리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조화로움의 경계선 이기도 하다. 역설적으로 내가 스스로 “좋다, 아름답다”고 여긴다면, “조화롭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게 된다.

 

페루 문화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의 말과도 상통한다.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조화로움이란 무엇인가? 서로 배치되는 극과 극이 어우러지는 지점이다. 중용이라는 이름으로 어느 한편으로 치우치지 아니함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감정의 골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기도 하며, 높낮이 굴곡이나, 명암의 반복처럼 대응하는 반전의 골이 있다. 조화로움의 경계선이 애매하다거나 주관적이라고는 하나, 굴곡과 반전의 어울림 가운데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직선이나 평면처럼 한정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불 같은 뜨거움과 얼음 같은 차가움 사이에서 주는 조화로움은 짜릿함이 덜 하겠지만 삶의 편안함은 그 속에서 자랄 것이다. 아름다움도 그 둘의 조화 속에서 찾기 쉬울 것이다. 주섬주섬 엮어 보았던 내용들을 다시 보자. 서로 대치되는 속에서 조화의 멋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흑백(黑白)의 조화, 명암(明暗)의 조화, 음양(陰陽)의 조화, 정동(靜動)의 조화,

선부(鮮腐)의 조화, 조밀(粗密)의 조화, 선악(善惡)의 조화 ……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아야만 더 큰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조화로움이 요구되는 것은, 대치와 반전 속에서도 중도와 중용의 지점에서 더 큰 아름다움을 바라 볼 수 있음이다. 고체와 액체 상(相 )변화의 전이점이 반응성이 더 활발하고, 바다와 뭍이 접하는 해변의 뻘 속에서 생태계는 더 활발한 이치이다. 깊은 바다 보다, 높은 산 보다 둘이 만나는 해안선에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더 기대할 수 있는 이치와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 아닐까?

 

 

□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움을 보는 것도 아름답지만, 볼 줄 아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아름다운 생각도 아름답다. 철학과 문학을 통해서 생각하는 아름다음도 크고, 사상이나 종교를 통해서 접하는 아름다움 또한 크다. 아름다움을 안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보고 듣고 만지면서 느끼는 것 보다 한 층 차원 높은 것이 될 수 있다. 그 생각을 자기 몸을 통해 밖으로 표출하는 것도 아름답다.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그림으로 그리기도 하며 흉내도 내면서 그를 방출 한다.

 

그렇지만 내면의 세계에도 그늘은 따라 다닌다. 그 곳에도 추함이 있다. 무서운 마음, 두려운 마음,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 아프고 괴로운 마음, 서러운 마음 이다. 그렇기에 미추(美醜)의 경계선은 마음에도 항시 존재한다. 평정심, 정관(靜觀) 이라고 하던가? 어디에 연연해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 보는 고요한 마음이야 말로 그 경계선일지 모른다. 호오(好惡)의 중간지점을 그 경계선이라고 할까? 어찌 생각하면 영원을 지향하는 곳이 그러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아니한 “정관”의 세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   아름다움을 떨치려 하고, 놓으려 하는 것도 아름답다.

 

나와 우리들만을 위한 이로움을 놓고 떨치며 양보하는 것도 아름답다. 나에게 이로운 것이 어디 한 두 가지 이던가?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모두 이로움을 향한 욕심에서 형성된 것이다. 재물, 명예, 식욕(食慾), 색욕(色慾), 수면욕(睡眠慾), 사랑과 증오 희로애락에 속하는 욕심들이다. 그들을 놓거나 멀리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를 떨쳐버림은 아름다운 모습임을 누구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양보하고 봉사하는 아름다움을 어린시절 유치원 때부터 교육은 하고 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욕칠정을 떨치고 놓는 것이 아름다움이라면, 그 욕심을 채우려 함은 추함이다. 미추(美醜)의 경계선을 향하려면 추함을 억제해야 한다. 욕심을 버리고 양보하고 봉사해야 한다. 내가 아름답고, 우리가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 분수에 맞는 생각과, 분수에 맞는 욕심을 차려야 한다. 절제하고 억제하며 지낼 때, 이 세상은 아름다움이 묻어 난다.

 

 

돈벌이 한창이던 젊은 때, 일 손 놓고 여유롭게 일찍 퇴근한다고 자랑하던 친구를 부러워 했다. 왜 일까? 무엇을 부러워 한 것일까? 욕심을 접은 듯한 그의 모습에서 느낀 여유로움을 아름답게 여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여전히 사업을 번창 시키고 있는 그 친구가 85세까지는 더 일해야 겠다는 말을 듣고 실망감을 놓지 못했다. 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추하다고 생각했을까? 끝을 모르고 접지 못하는 오욕(五慾)의 끝 자락이 어디까지일지, 한심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장수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장수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 끝 자락의 의미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할 짬이 없이 허둥대듯 살아 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들이기는 하다. 종교생활을 하는 이들도 눈 여겨 보자. 시간과 때를 맞춰 예배니 종교행사 일정 대는데 급급하다. 종교 형식이라는 빵 틀에 구워내는 붕어 빵과도 흡사하다.

 

내면의 나를 들여다보며 관조하는 시간을 찾기란 여간해서 쉬운 세상이 아니다. 카톡 “애니팡”의 “하트” 메시지를 들어보라. “하트 좀 주세요. 하트요 하트! 급해요 급해 ……” 곧 숨 넘어 가는 듯한 다양한 소리의 동영상 메시지들이다. 우리들 현대인의 생활 모습을 꼭 빼어 닮았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다급한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급하지도 않고, 중요 하지도 않은 일들이지만, “애니팡 하트 메시지”처럼 항상 바쁘고 급한 것이 우리들의 일상 생활이다. 그 가운데서 관조니, 정관이니 하는 여유를 이야기 하는 자체가 난센스다.

 

현대인의 종교의식, 종교 생활도 같은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일전에 옆 자리에서 거는 전화의 대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다. 나의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한다. 가족 누구 누구의 성공과 안녕을 어느 스님께 기원하여 주시라는 내용과, 얼마의 시주를 온라인으로 송금 하겠노라는 내용이다. 여러 가지 번거로운 과정이 생략 된 현대인 생활 패턴 다운 발상이며, 오가는 시간과 노력이 허비 되지 않는 합리적인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기원하는 방법 또한 기능이 더욱 숙련된 전문가(?)가 대신 수행하여 주니, 기대 효율(?) 또한 배가되지 아니하겠는가!

 

빵 틀에 구워내는 붕어 빵의 모양은 같겠지만, 그 맛까지도 같지는 않을 듯 하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모든 이로움을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얻기 위한 욕심에서 형성된 기복신앙 종교 행태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추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을 기원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생각에, 이러한 행태도 과연 아름다운 종교생활 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사고(思考)의 틀 속에서, 미추(美醜)의 경계선은 더욱 불분명하다. 그 선은 객관적일 수 없고, 항상 주관적이다. 내가 머리 속에 그리는 아름다움이란, 어찌 생각하더라도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만 같다. 진실에 어긋난 그릇된 편견에서 맴돌 것만 같다.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고, 추한 것이 무엇인지는 내 마음이 정한 가치관이라는 하늘 한 복판에 그려진 뜬 구름 조각에 불과하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2012. 10.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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