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인연

오갑록 2007. 7. 13. 18:29

인자하고 고상한 ......

 

■ 인연


   물리학에서 세상을 보는 관점은 시간 질량 힘 에너지 파동 등에서 시작한다 . 이들이 서로 어우러진 실 타래들을 풀어 가는 학문이 물리학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곳에다 이들을 올려 놓고 볼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한 의문인 듯하다. 물리현상을 합리적으로 인식하고 설명하려면 무엇인지 모를 다른 요소가 더 필요한 모양이다. 그 요소 또는 장소가 바탕질이던 에테르이던 새로운 기준점과 4차원을 벗어난 다른 차원이 필요하다는 설명들이다.

 

지금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는 만큼만 알고 있다. 우주의 개념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 것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답하는 격이다. 우주의 이치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우리만큼 크고 광활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아무리 훌륭한 석학이라도 그 안목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아니하리라 본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다는 것이란 고작 아주 작은 한조각의 단편 지식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소립자 핵물리학에서부터 천체 우주물리학이 다루는 학문의 범주란 중간의 어느 한 토막만을 가지고 학문적 입씨름에 얽매인 것이 현대과학의 한계점은 아닐까 싶다.   

소립자 핵물리학을 들여 다 보면, 양자역학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으로 구조적인 설명을 하고 있지만, 페르미온인 쿼크, 렙톤, 게이지 보존, 중력자로 들어가 이들이 가지는 색전하, 질량, 상호작용, 게이지 입자 등의 더 작은 물리적 근본에 대해서는 어슴프레한 몇몇 이론에 따른 내용에 지나지 않고, 끈 이론이니, M이론이니 하는 신 이론분야에서는 10차원의 세계 또는 그 이상 차원의 해가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우주물리학도 입장은 마찬가지로 엇비슷하여, 반경 약 140억 광년 크기로 어림 되는 우주의 지평선 저 넘어 암흑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 추정해 볼 방도가 아직 없고, 이 우주나,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우주들 사이에는 에테르 라고 하는 어느 매개체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막연한 의문이 철학개념 정도로 거론되는 실정이며, 우주의 나이라고 하는 빅뱅 발생으로부터 140억년 이전에는 어떤 시간들이 존재 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왜 우주가 무슨 연유로 언제부터 압축되었으며, 그것은 왜 폭발했고 앞으로 언제까지 그 폭발이 지속될지 모른다. 빛 밝기의 변위와 파동에서의 도플러 효과를 응용하여 계산하는 거리와 기간 산출에 따르면, 빅뱅으로 퍼져 나간 빛이 되돌아 와서 지금의 우리 눈에 보이기까지, 빛이 달려 온 기간이 140억년이라고 하니, 그 끝 부문에서는 현재에도 같은 속도로 계속 커지고 있었는지, 멈춘 상태인지 아니면 수축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보고 확인한 것이란 140억년 전의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우주 끝에서의 상황 인식은 앞으로 140억년 뒤에나 알 수 있는 사실들인 셈이다.

 

주위의 빛과 물질을 흡인하는 블랙홀들의 과학적 실체들이 설명되고는 있으나 그 역시 지구 위 자연현상처럼 우주의 한 작은 자연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물질의 기본에 대한 취약한 지식기반에서 출발한 생물학도 그 범주를 벗어나기는 힘들 수 밖에 없다. DNA, RNA 구조를 해석했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더 숨어 있음이 분명한 밑그림들은 우주 밖의 암흑을 알지 못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듯하다.

 

궁극적인 의문으로 남아 있는 의식과 물리적 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그 들 속에 얽혀서 존재할 것 같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현대과학으로는 생명현상이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난다는 증거는 밝혀진 바 없고, 의식을 담당하는 기구인 중추신경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의식 주체(자유의지)도 실은 물리적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하는 물음으로도 귀착 되지만, 그러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이 장님이 코끼리 만지고 실체를 추정하는 모습과도 닮은 꼴이다. 지금 내가 아는 것이란 태산 아래 흘러 내린 겨우 한 줌의 모래알에 불과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무엇을 알려고 하는가?
더 알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알고 있음을 아는 것도 중요하며, 모르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단편적으로 학문적 욕구충족을 위해서 만이 아닌, 삶의 목적과 방법 설정, 그리고 그 가치를 인식하는 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우리 삶의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채로운 방법으로 밑그림을 그려 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 할 수도 있으나, 비록 같은 삶이 주어 졌다 하더라도 의문에 대하여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한 층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다듬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성원 교수의 시간여행이라는 기고문에 보면 시간을 늘이기도 하고, 미래와 과거로도 돌아 가 보는 방안들이 거론된다. 지금 같아서는 터무니 없는 이야기지만......,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인 일반상대론에 의하면 주위의 시공간은 중력의 영향으로 휘어진다. 이 휘어지는 정도는 중력에 따라 달라지는데, 블랙홀처럼 강한 중력으로 빛마저도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면, 시간도 휘어진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
웜홀(wormhole)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을 풀어서 블랙홀에 대한 해를 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데, 1988년 미국의 유명한 천체물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가 웜홀을 우주의 지름길로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한 학계의 자문을 구해가며 저술한 책자가 시간여행과 타임머신에 대한 관심을 커지게 하였다고 한다.

표현을 바꿔 보면, 웜홀은 우주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만일 웜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의 지름길이 존재한다면 25광년 떨어져 있는 베가성까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왕복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시계로 잰 같은 한시간이라 하더라도, 의식으로 느끼는 그 길이는 경우에 따라서 몇 배 또는 수 십 배씩 길어지거나 반대로 짧아지는 서로 다른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시간 참 안가네…… 하는, 좋던 싫던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시간들은 대부분 길게 느껴진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릴 때, 가뭄에 단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도, 밤늦도록 오지않은 자녀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도, 쾌유를 기다리며 자녀의 병실을 지키는 어머님 마음도 다른 이들 시간보다는 한참 길어지게 느끼는 것이 우리들이다.
쏜 살처럼 빠르게 가는 시간도 있다. 수험생 시절,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시간에 영어, 수학 ...... 짧은 실력에 시간이 모자라 허둥대다 보면 주어진 시간이 짧아진 것처럼 느꼈던 경험은 많았다. 사랑의 달콤하던 시간들은 짧다고 들 말한다.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 나면 지리하고 긴 다른 길이의 시간들이 더 많다고 들 한다.


52년 수절 끝에 북쪽 남편 임한언 할아버지(74)를 만난 정귀업 할머니(75)는 이번 이천삼년 봄, 방북 기간에 “금강산의 이산(離散) 시인”으로 불렸다.

 

 "지금도 못 만났으면 넋새가 되어 울고 다닐 것이다"
반세기 동안의 이산과 상봉의 한을 정 할머니는 이렇게 표현했다. 남편 손을 잡고 금강산 구룡연을 찾은 정 할머니는 "하늘과 땅을 합친 것 만큼 좋다"고 기뻐하더니 헤어 지면서는 "시곗바늘이 한 점도 쉬어주질 않아요. 가다 보면 아주 가는 날 있겠지..그 때는 후회 없이 가자"고 말했다.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이 다가오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52년 동안 혼자 살았는데 어떻게 또 혼자 가요. 나 집에 안 갈 거야. 이제 어떡하라고요......" 정 할머니는 남편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도리질을 했다.

 

정 할머니의 길고 짧았던 시간들, 그 길이의 크기를 차마 쉽사리 말할 수가 없다. 오랜 세월 서린 한과, 순간에 지나친 만남의 시간들…… 우리가 갖고 느끼는 시간의 단편이리라. “인간에게 있어서, 시간의 흐름은 우리와 같이 하며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시간은 미래로서 우리들에게 기대되며, 현재로서 순간을 느끼며, 과거로서 기억된다”고 하신 어느 교수님의 글이 더욱 새롭기만 하다.

 

인연이 있기에 기다림, 만남 그리고 헤어짐이 있고, 그 인연으로 인해서 시간의 길이도 변하는 것은 아닐까? 그 인연의 끈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우주의 에테르 속에 잠긴 보이지 아니한 끈의 실체를 알 수도 없거니와, 알려고 하는 생각 자체가 우스꽝스러운 한 낮의 꿈에 불과하다고 대부분 생각할 것이다.
끈이란 이을 수 있다는 뜻도 되겠지만, 끊어 질 수 있음도 포함된다. 정 할머니의 슬픈 인연도 그렇지만, 우리의 삶의 과정에 맺고 다시 풀어지는 뭇 인연들도 이 같은 끈의 이치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다.

 

정자 난자의 만남에서 시작한 인연은, 핵산의 DNA RNA 라는 생물고리의 정해진 지도 순서로 아미노산 연결 끈을 복제하며 분화를 반복한다. 그 분화를 하기 위해 공급되는 자양분의 공급선도 탯줄로 불리는 좀 더 큰 규모의 끈이다. 어머니와 나를 잇는 이 끈도 몇 달에 불과한 한시적인 끈이다.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 콜라겐과 같은 구조 단백질이나 수용성 단백질, 접합 단백질 등의 유기물로 각종 세포 조직을 엮어 가면서 “나”라고 하는 개체를 따로 형성하지만, 인연은 정과 사랑의 이름으로 다시 매듭 지워 이어진다. 그도 얼마지 않아 풀어지고 멀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그 다음 반복의 고리를 알 수가 없다.

다만, 신앙.믿음으로 충만 된 종교를 가진 이들만 그 다음에 올 인연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답하고 있는 듯하다.

인연의 끈, 고리가 끊어질 때 아쉬움은 질량이나 속도의 크기에 변수를 둔 물리함수 들처럼 시간의 길이에 큰 영향을 준다. 위의 정할머니 사례에서 느껴지듯……


나이 들수록 흐르는 세월의 가속도가 더해지는 것처럼 느껴오는 것도 이치는 같다고 본다. 내가 지금 보낸 한 달과, 첫번째 여름방학을 맞는 초등하교 1년 생이 느끼는 한 달이라는 의식으로 느끼는 시간은 같을 수가 없다. 그맘때 내가 경험했던 첫 여름방학은 얼마나 길었던가?

 

에너지에서 시작된 파동은 소립자 핵으로 연결되고, 이 원자는 물질의 기본이 되어 생물과 “나”라는 개체까지 이어진다. 그 개체가 있기까지 한편에서는 가족과 사회로 이어지는 또 다른 끈이 엮어진다. 그러나 이들도 모두 화학반응에서의 가역반응처럼 한시적인 범위 내에서 존속할 뿐, 매듭이 다시 풀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 “나”라는 개체의 모습이다.

그 과정은 크고 긴 인연들, 작고 짧은 인연들의 반복 체이다.
물질의 개념에서도 그렇지만, 정신이나 가족을 포함한 사회라는 개념에서도 그렇다. “나”라고 하는 의식의 개념에서도 예외는 아닌듯 하다.

 

그 끈, 인연이라는 끈은 덧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지금도 한 편으로는 쉬임없이 그 매듭이 이어지고, 끝 모르고 내 뱉는 말이나,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배설 행위를 거치는 탈착과 망각의 과정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매듭이 풀리면서 흘러 가는 것만 같다. 그러한 인연으로 이어진 "나"라고 하는 실 타래는 봄 들판에 떠도는 한알의 민들레 씨앗처럼 우주의 한 구석을 잠시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07.7.13.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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