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고요의 순간과 배설의 가치

오갑록 2015. 5. 17. 07:04

고요한 ......

■  고요의 순간과 배설의 가치

 

□ 

 

고요의 순간,

정적을 가르는

작은 탄성을 기다린다.

행복의 시간을 가르고 멈춰 서서

한 순간을 느끼고 즐긴다.

 

,

순간 속에서

지나간 시간 세월을 돌아보고,

길고 머나먼 영원을 가늠도 한다.

 

삶과 자기의 유한함도

쉽사리 만나는가 하면,

어느 운 좋은 날은

영원 영생 영혼의 교감까지 스치기도 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눈시울에 핑그르르 고이는 눈물

한 없는 포근함에 싸인 순간의 경험은

행복이라는 이름 곱씹는, 소리 없는 아우성일 수 있다.

 

따스함 아늑함 고요함

그리고, 넉넉함 포만감에 이어지는 시원함

감사하는 마음이 덧대진 좋은 순간이기도 하다.

 

아픔 있어 흐르는 눈물이야 서럽지만

좋은 시간, 모르는 사이 저절로 흐르는 데는

그러한 기쁨이 따르게 된다.

 

감성이 아직 무디지 아니하다면, 배설의 순간 순간들이 그러하다.

 

배설의 기쁨은

먹고 마실 때 못지 않다.

흐르는 땀도, 대소변 용변도 그렇다.

사랑의 극점이나 출산의 기쁨도 배설이지만,

말하고 노래하고 한숨 쉬는 것 조차도 배설의 기쁨이다.

들이마신 숨, 그 공기를 배설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가?

 

배설의 기쁨에 흐르는 눈물은 언제 경험되고 기억되는가?

 

땀 흘린 보람과 결실에서 그렇듯

용변의 순간에도 그러한 기쁨을 느낀 적은 없는가?

어찌, 사랑과 출산의 기쁨에만 기뻐한다 하던가?

 

칭찬, 찬송, 노래하며 기뻐한 적은 없는가?

, 기쁨 속에는 배설의 기쁨 또한 혼재됨을 자각한 적이 없는가?

가슴, 입, 입술, 비강을 놀려가며, 숨을 조절하여 내보내는

나름의 곱고 아름다운 소리에 혼재된 기쁨을 느낄 수는 없었던가?

 

한적한 시간을 음미하며 조용히 보내던

용변의 기쁨은 어떠했는가?

누구와 함께 나누기 보다는,

홀로 맞고 혼자만이 즐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힘주던 근력이

기쁨이고 넘치는 복이려니 여겨지지는 않던가?

 

악취 밴 추한 시간이기보다

여유와 향기로운 자기 몫의 순간이다.

구미에 닿는 먹고 마실 것만이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아니다.

애써 챙겨 먹은 것들,

배설하는 과정이야말로

의미 있고 보람된 것이고,

엄숙하며 아름다운 순간들인 것이다.

 

□ 

 

 우리는 익숙하다.

씨앗 뿌리고 키우며,

사랑하고 아기를 가지고,

잘 기르는데 온 정성을 한다.

 

그리고, 먹고 마시면서

내 몸의 것으로 하기에 익숙하다.

원기를 돋우며 체력과 체격을 키우는데 힘쓰고,

자기의 성장을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쓰는 데에는 익숙하다.

 

“Input”의 과정에는 아주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하고 백안시 한다.

안 보려고 고개 돌리기 일쑤이다.

아예 눈 감아 버리기까지도 한다.

나누고 쪼개어 남에게 주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시간과 재물과 사람과 정에 대하여 그러하다.

심지어, 내 몸 밖으로 나가는 배설물의 향방에까지도

무디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싫어한다.

 

 

나의 죽음도 남의 죽음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눈 감아 버리고

생각하기도 싫다.

두려움 무서움 공포라는 형용사만 맴돈다.

깻묵 찌끼, 쓰레기가 단순 폐기용이라 친다면,

스러져가는 노인의 생명은 왜 중요하다고들 하는가?

 

좋았던 시간,

좋았던 재물

좋았던 꽃

좋았던 사람

좋았던 정, 사랑 ……

 

한 때, 좋았던 것이 버리게 되면, 더욱 싫어 지는 것이 인정이기도 하다.

꽃은 아름다울수록 지게 되면 더욱 흉물스레 보이고,

맛난 고기음식 찌끼가 채소 반찬보다 악취며 모양새가 더 고약하듯,

죽도록 좋아하던 사람이, 헤어지면 죽이고 싶도록 더 밉상이고 ……

 

화장실처럼,

쓰레기장 수처리장 화장장은 혐오시설이 된다.

거쳐서 나오는 처리물도 싫고,

처리과정도 싫다.

 

“Output”의 과정에는 무심하고 인색하고 혐오한다.

 

 

□ 

 

 생명체의 본능일까?

인간의 당연한 본성일까?

아기는 목마르고 허기지면 울어대고,

어린이는 군것질거리에도 울어댄다.

다른 욕망과 욕심에 울 때면 성인이라고 한다.

돈에 울고, 실패에 울고, 사랑에 울고, 건강에 울고, 죽음에 울고……

 

욕망과 욕심은

불만 슬픔 두려움도 부르지만

때로는 만족과 기쁨도 부른다. 

그런데, 모두

스스로의 마음 속에서

우러러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아픔은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의 아픔은 각기 서로를 자극하기도 한다.

몸의 아픔은 물질세계의 산물이다.

몸 속에서 물질의 과부족이 균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보통과 다름을 뜻하기도 하는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원만한 유지는 생명의 본능이다.

 

몸의 아픔은 마음의 아픔과는 사뭇 다르다.

마음의 아픔은 욕망과 욕심에서 비롯된,

균형이 어긋난 상태이다.

균형은 평형 평온 안정의 시작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 속으로

들어 온 만큼, 적절하게 내어 보내는

“Input, Output, Balance”라는 균형을 생각한다면

앞을 보며 달리고, 취하려고 애쓰는 만큼

뒤도 보고 평가하고, 나누고 버리는데 고상해야 한다.

 

배설의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의미들을 찾는데도 게을러서는 안 된다.

 

피 땀을 흘리며,

용변의 시간에도,

자기 씨앗 뿌리면서도,

아픔과 죽음에 대하여서도,

 

물론, 말하고 노래하고

자기 뜻과 생각을 내 보낼 때까지도 ……

 

욕망 욕심의 충족 과정이 “Input” 이라면, 

겸손 용서 정직 화해 사랑 나눔은 “Output”이고 배설의 과정이다.

평온과 안정은 둘의 균형이 잘 이룰 때 기대할 수 있다.

 

배설의 순간,

폄하나 비하 보다는

순간의 가치를 느끼고 즐기며 고상한 시간으로 하는데 애쓰고,

욕망 욕심은,

무한한 자기발전의 원동력으로서만 고집하기 보다는

때로는, 억제와 절제라는 조절에도 많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2015.5.15.()

오갑록

 

*** ***

 

 

□  모든 혐오의 출발은 자신이다.

 

            “문명 속의 불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역

혐오(hating)에 대한 고전적 분석, ...... 인간이 자기 외부(타자)를 만들어서 인생고를 해결한다고 보았다. 그 과정이 문명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우리 사회의 문맥이다. 식민과 독재를 경험한 우리에게 문명은 후진성을 극복하는 계몽, 발전, 진보 등 긍정적 의미로 쓰이지만, 프로이트에게는 문명과 본능적인 삶(성욕)의 대립을 설명하기 위한 ‘중립적’ 의미였고 걱정거리(“그 불만”)였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생은 너무 힘들다. 인생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과제를 안겨준다.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수단으로 세 가지가 있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고통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하는 강력한 편향, 고통을 줄여주는 대리 만족, 고통에 무감각하게 하는 마취제.” 인간은 원래 행복할 수 없는 종자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본 고통의 근원은 유한한 육체, 외부 세계, 타인과의 관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혐오는 말할 것도 없이 여성 혐오다. 고통을 자기 일부로 수용하기보다는 다른 곳으로 이동시킬 때 처음 등장하는 존재는 동물, 자연, 본인의 배설물이다. 남성(인간)에게 여성(인간 아님)은 이 세 가지를 인식하는 시작이자 교집합이다. 이렇듯 모든 혐오의 출발은 자신이다. 자기 내부의 관념에서 나온다. 파시즘이 그 정점이다. 파시스트는 피아, 자아 경계가 없다. = 세상이다.

 

......

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혐오’일까 다소 의문이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하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도취는 타인을 짓밟겠다는 의지가 있다. 근대적 인권 상식은 규범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규범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들은 어떤 규범은 지켜야 하고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약하고 편한 집단만 타깃이다. 상대를 혐오, 조롱(‘풍자’)했을 때 사회적 처벌과 반응 등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잘 아는 권력 관계의 달인이다. 남성연대 앞에서는 어떤 사유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며 가해를 방어하는 일부 좌파 지식인을 포함, 이들의 반사회성은 사회적으로 훈련된 문명의 결과다.

 

혐오 발화는 자기를 바라볼 필요도 용기도 없는 이들의 테러다. 자신을 모르는 이에게 가장 좋은 치유는 면벽(面壁)이다. 면벽? 깨달을 때까지 격리다.

(한겨레,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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