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일상의 관념에서 일탈(逸脫)하는 용기

오갑록 2015. 5. 6. 12:31

만족 ......

■ 일상의 관념에서 일탈(逸脫)하는 용기

         현실의 흐름에서 벗어나려는 용기

 

 

우리가 경험하는 실물이며 생각, 가치에 대하여,

. 무심코 서로 비교하고, 차이를 내보지만,

얼마나 만족하다거나 행복한 지는,

결국 스스로 판단하는 만큼만, 제 몫이 된다.

 

명품 골프채 명칭들을 둘러 본다. 기가, 던롭, 미사일, 아디다스, 엑스트론, 오클리, 카무이, 클리브랜드, 풋조이, 나이키, 지브이투어, 캘러웨이, 테일러메이드, 엘로드 ……

 

좋은 채로 휘둘러서 맞고 날아가는 골프공의 운동이 어떤 궤적이며 비거리로 바뀌는지, 골프 무뢰한인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한다. 잘 다듬어진 초원과 정원수의 조합들이 잘 어우러진다는 것쯤 밖에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그 장소에 어울리는 골프웨어나 장비들은 운동을 위한 부속물에 지나지 않을 터 임도 불구하고 제대로 갖추는 데는 만만치 않은 신경을 써야만 하나보다. 심지어 검정색 중대형 세단으로 줄 이은 골프장의 주차장 풍경만해도 여느 곳과는 좀 색다르다. 외모도 서로 어울리는 조합이 되어야만 예를 갖추는 상류계층의 점잖은 스포츠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부러진 막대기 주워 들고 휘두르던 어린 시절의 자치기와 흡사한 운동일 수도 있다. 골목길 땅 바닥을 막대로 대충 후벼 파고, “라고 불렀던, 양쪽 끝을 연필 깎듯 깎아 낸 나뭇가지 토막을 그 위에 가로질러 올려 놓고, 막대기로 살짝 쳐서 치켜 올린 다음, 올라간 를 긴 막대로 휘둘러 치고 나서, 누구 가 더 멀리 날아갔는지, 나 막대로 금 그어가며 재는 놀이로, 당시 아이들은 x 자치기라고 불러댔다.

 

골프는 그 때의 자치기와는 완연하게 다른 격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서로 좋은 사람들 간에 즐기는 운동이라는 본질에는 다름이 없을 것 같다. 걷거나 달리면서, 무엇인가를 굴리고 치고 때리며 하는 구기 운동의 본질들은 모두 다 그러한 지도 모른다. 당구 탁구 축구 농구 야구 따위의 어떤 구기 종류던 모두 다를 바가 없다. 어울리는 장비와 복장을 구비하고 비슷한 부류들끼리 어울리는 놀이임에 분명하다.

 

운동은 준비하고 연습하고 서로 경합하면서 어울려 즐기는 활동이다. 각자는 자기 삶의 한 순간을 쪼개서 주어진 운명의 시간을 할애하며 써먹는 것이기도 하다. 운동의 진정한 가치는 서로 어울리고 즐기며 보내는 사회적인 한 활동이자, 보내는 시간을 즐겁게 전환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상당부문을 어울리는 상대에게 장비나 도구, 복장 따위로 자신을 남에게 과시하는데 너무 치장한다는 생각을 들게 하기도 한다. 때로는 그것이 상대보다 못하다는 생각에 위축되기도 한다. 어디, 구기 운동에서의 장비만이 그러하던가?

 

갖가지 몸 치장, 또는 액세서리 하나 고르는 데에도 비슷한 면은 있다. 일상 갖고 노니는 장난감도 그러하다. 의상, 차량, 가재도구, 주택 따위도 그 용도나 본질에서 벗어난 과시용으로서 역할을 오해하는 듯한 인상을 들게 하기도 한다. 보온, 보호, 운송, 이동, 보관, 휴식 등의 본질보다는 자기과시용으로서 더 신경 쓰이게 되곤 한다. 생활의 편리성 보다는 사회 구성원의 서열을 그 곳에서 가늠하려 할 때가 적지 않다.

 

우리 일상에서 가치의 기준이 뒤바뀌는 경우는 얼마던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각각을 곰곰 생각하면 그러한 모순 속에서 상당수가 정당화된 우리의 일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영광과 번영을 기리는 왜곡되고 그릇된 우리의 가치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이 속한 틀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러한 모순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중에서의 글 한 토막이 그다지 새롭지만은 않다.

 

꿈속에 있으면서 그게 꿈인 줄 어떻게 알며,

흐름 속에 함께 흐르며 어떻게 그 흐름을 느끼겠는가?

꿈이 꿈인 줄 알려면 그 꿈에서 깨어나야 하고,

흐름이 흐름인 줄 알려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삼국지 서사(序辭) 중에서)

 

턱 있는 밥상 위에서, 손톱 사이에 검은 때 끼인 손가락으로 튕겨가며 노니는 인조진주 알 굴리기 놀이도 좋은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보다 더 품위 있고 우아한 그 어떤 스포츠 보다 더욱 값지고 알찬 순간을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몸을 치장하는 의상도 그러하며, 작은 소품의 액세서리도 예외는 아니다. 고이 접어 만든 토끼풀 풀꽃 반지 한 개가 억만 금을 들여 낀 다이어 반지만 못하다는 주장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 가치란, 누구에게나, 언제이고, 정해진 바는 아니다. 주체에 따라 시시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그 가치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좋고 그름의 본성이 그러한 것이다.

 

맛과 향도 시각적인 미의 기준과 다를 바는 없을 것이다. 어제 맛난 것이 오늘도 반드시 맛나지는 않을 것이며, 나에게 좋은 향이지만 너에게는 악취로 닿을 수도 있다. 우리 식으로 입맛이 길들여진 사람에게는 갖춰진 식탁 위에서 정장을 하고 즐기는 양식의 스테이크 맛과, 신 김치 발라가며 먹는 된장찌개 맛의 순서를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배고플 때, 꽁보리밥 한 술과 배부른 이의 진수성찬의 입맛이, 서로 달리 인식될 수 밖에 없듯, 상황에 따라 달리 느껴오는 것이 우리의 입맛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자주 듣던 장르가 아니면 쉬이 흥이 돋지 않는다. 누구는 백색을 좋아하지만 누구는 분홍 색을 좋아한다. 동그라미를 좋게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네모를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내게는 커 보이지만 누구나 그리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짜고 시고 달다는 미각이 같을 수도 없으며, 채소나 고기의 선호도도 제 각각이다.

 

좋은 것과 싫은 것, 호오(好惡)에 정답이 없고, 그와 마찬가지로, 선악에 정답이 있으리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무리 지어 기고 있는 달팽이, 조개를 보며, 색 무늬 모양이 어느 것이 더 예쁘다고 해야 일 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미()의 평가란, 인간의 눈에 들어오는 선호도의 차이일 뿐, 절대적 미()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우리 인간 느낌에 주는 보편.타당성을 구분 짓는 형용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이라면, 아름다움을 쫓는 과도한 행위들은 의미가 퇴색되고, 그 흐름에서 한 발 뺀 시각으로 본다면, 우스운 행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흑인.백인.황인, 빈부, 미추에 관계없이 모두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평등박애 주의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서 바라보는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얼굴이 그 얼굴이며, 그 구멍이 그 구멍이라는 빈정대는 듯한 표현은 오히려 진리에 더 가까운 말이 될지도 모른다.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선악과 호오가 이런 것 들이라고 답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자기합리화 자기주장을 치장하려는 욕망에 찬 모습으로 비쳐지는 의구심은 무엇일까? 특히, 종교적인 색안경을 차고 신앙이라는 이름을 내세워가며 흑백을 가르려 할 때, 나로 하여금 그러한 생각을 들게 하곤 한다. 선악을 어떻게 한정 지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이유는, 위 소설책 예문처럼, “흐름이 흐름인 줄 알려면 그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한 인간으로서, 생명체로서 삶을 영위하는 한, 우리는 이 세상 삶의 흐름 속을 아직 벗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진리를 바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다. 그 흐름 속에서 주장하는 진리란, 다만, 자신이 속한, 그 사회를 편하고 정의롭고 올바른 질서 속에서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목표, 또는 그 갈 길을 제시하는 선을 두고 하는 다른 표현일 수는 있다는 생각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란, 극히 자기중심적인 기준이기 때문에, 자칫 그릇되고 왜곡 편협 된 우상(偶像)이기 쉬운 것일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게 된다.

 

우리가 선망하던, 그 모든 비교 대상들이 얼마나 작고 하잘것없는 것일까?

우리가 그토록 소중하다고 여기며, 온 힘을 다해 쫓던 그 것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 흐름에서 벗어나, 현실 밖의 우주론적 관점 앞에서라면 ……

. 머지 않은 언제인가 흐름에서 벗어나야 함을 나는 왜 잊고자 하는 것일까?

 

2015년 포브스 선정 세계 부호를 발표했다. 빌게이츠(, 792$), 카를로스 슬림(, 771), 워런 버핏(, 727), 아만치오 오르데가(스페인, 645), 래리 엘리슨(, 543) 5대 부호로 꼽혔고, 이건희(110, 113$) 등도 순위표에 오르고 있다.

 

전쟁의 역사 속에 공을 세운 영웅, 노벨상. 올림픽 메달에 빛나는 영광도 그 부호들이 누리는 영광에 버금갈 것이고. 고대 왕궁, 신전, 왕릉의 주인들도 당대의 영광으로 본다면 지금의 누구 못지 않았을 것이다. 초가지붕 아래 호롱불 켜고 회자 되던 영웅 호걸도 다름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정신세계를 이끌어 주던 각 종교의 창시자며 그 지도자, 또는 위대했던 철학자도 범인의 눈으로는 위대하고 큰 영광스러운 모습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영광의 대부분은 우리 삶의 흐름 속에서 바라본 허상일 수도 있다. 편협 된 가치 기준에서 형성된 우상(偶像)일 수도 있다. 열심으로 본능에 충실하며 살고, 그 삶에 만족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고 위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보자.

 

만일 부족하고 불만스러움이 있더라도, 관념을 흐름에서 잠시 벗어나 바라볼 수 있다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일 터라고 묻어 버릴 수 있는 용기도 가능케 하고, 팍팍한 현실 삶에서 때로는 긍정적인 대안도 될 것이다.

 

영예, 영광, , 권력, 미모, 사랑, 건강, 장수 …… , 필요한 만큼만 챙겨보자.

욕심, 원망, 미움 증오, 불안, 초조, 슬픔, 괴로움도, 그냥 한 번 내려놓아 보자.

목표와 희망이라는 앞만 보고 질주해 온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새겨보자.

 

잠시 내려 놓고 쉬는 순간을, 자기 방법대로 스스로 마련해 보자.

짓눌렸던 수 많은 욕망으로부터 잠시나마 일탈해 보자.

사랑, 이해와 용서,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갖자.

 

현실의 흐름, 일상적인 관념에서 일탈(逸脫)하는 용기를 가져보자.

 

 

2015.5.5.()

오갑록

 

 

 

    ◇◇   ◇ 

 

    외모 체격 체력

 

 160cm

 180cm

 

    ○ 60kg

80kg

 

    ○ 유색인종

백색인종

 

    ○ 못남, 추함

잘남, 미인

 

    ○ 허약체질

강력체질

 

     정신력 판단력 기억력

 

IQ 100

IQ 150

 

    ○ 뒤쳐짐

우수함

 

     수명 건강 면역력 장기기능 성격

 

단명

장수

 

    ○ 허약하고 불편하며 병듦

건강하고 우수함

 

    ○ 경박함, 사소한 일에도 잘 휘둘림

듬직함, 믿음과 신뢰감

 

     사회적 입지

 

가난

부유

 

    ○ 무식

유식

 

    ○ 사회적 약자

사회적 강자, 권세 재력 학력 명예

 

    ○ 부덕함, 유치 멸시 대상

후덕함, 덕망 존경 대상

 

      종교적 성향

 

신앙심 없음

깊은 신앙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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