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칸막이 너머 세상, "희망과 믿음"
시험 시간이면 옆자리 짝꿍이 답을 엿 볼세라 책상 위로 가방 올려 놓아, 칸막이 치던 학생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칸막이" 는 "둘러싸인 공간을 가로질러 막는 행위 또는 물건"이 사전적 정의다. partition, divider, screen, 隔板, 隔断, 分隔 ..
열린 세상이란 그러한 칸막이가 없는 세상이다. "너"뿐만 아니라 "나"도 알 수 있는 사회를 정보가 열린 세상이라고 하며, 지식 부 성공 등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열려 있는 사회를 평등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칸막이로 가려진 곳들이 있기에, 내가 보거나 닿지 못 하는 다른 쪽 그 곳이 궁금하여지곤 한다. 엎어지거나 코 깨고 다치기도 하지만, 칸막이 너머 다른 곳에서 얻는 무엇인가에 더욱 보람을 느끼던, 어릴 적 경험도 생각 난다. 까치발 딛고 가까스로 꺼내 든 선반 위의 달콤한 것, 어릴 적 그 기억도 당시로서는 자신의 힘으로 꺼내 든 딴 세상의 보람 된 물건 이었을 지 모른다,
칸막이 된, 딴 세상은 늘 궁금하고,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욕심 나기도 한다. 나뿐 아니라 누구나 한 번쯤, 느껴 본 일반적 감정일 수 있다.
치마 두른 참한 여인을 훔쳐보는 엉큼한 시선의 이성은 칸막이 너머가 궁금할 터이고, 프롤레타리아 서민들은 성 너머 사는 부르주아 계급의 생활상, 칸막이 너머를 궁금해 하고 선망할 것이다.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공간으로 칸막이 된, 달 나라 별 나라 머나먼 우주가 궁금 하고, 이생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사후 세계가 궁금한 것도, 칸막이 너머에 대한 유사한 이유에서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시공으로 칸막이 된 먼 곳의 일이며, 또 다른 차원으로 가려진 사후의 일들을 궁금해 하는 것은 우리네 인간의 본성 일지도 모른다.
칸막이는 나의 시선과 행동, 욕망을 제한 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위한 방패가 되기도 한다. 내 몸의 구조도 관찰하다 보면 칸막이의 연속이다. 눈꺼풀, 숨 구멍, 입부터 배설까지 이어지는 구멍은 물론, 피부 각종 장기 등의 세포막 또한 각각의 기능을 갖는 분리된 칸막이의 연속이다. 자신이 필요한 성분을 흡수 생성하면서, 그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도 하고, 목적 외의 침입자를 방어 하기도 하는 등 제 각각의 순기능들이 있다.
내 몸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가정, 자기가 속한 조직과 사회, 또는 국가와 같은 삶의 외부 환경도 그러하다. 그들은 자기가 속한 조직 영역의 순기능을 위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칸막이를 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려고 부심하며 애도 쓴다. 그릇 옷 가구 등의 생활용품, 건물 제방 등의 각종 시설물도 일종의 칸막이로 볼 수 있다. 무기로 무장된 국경은 조금 더 큰 의미의 칸막이일 것이다. 기술 보호 명목의 특허 상표권 따위의 독특한 칸막이도 있다. 전기 절연체도 전기적 특성을 막아주는 칸막이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동식물의 섭생 또한 그러한 본성은 인간과 비슷하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생명의 근본인 생명체 자체도 칸막이로 형성 되었고, 그 생명 유지 또한 칸막이 환경 속에서 한정된 시공간을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모든 생명체 삶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칸막이는 시간을 포함한 4차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차원 다른 세상도 분명 존재하리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물질의 근본 중에, 내가 아는 차원의 짧은 식견만 가지고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사례를 들어 보자.
세상 모든 물질은 중력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지만, 무엇이 무엇을 어떻게 당기는지 지각할 수는 없다. 중력의 힘을 막을 수 있는 칸막이는 아직 없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기능의 칸막이가 가능하게 된다면, 물질의 비행이나 이동 방법의 개념이 현재와는 비교될 수 없으리만큼 발달할 것이다. 우주 저 편,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도 더 수월해 질 것만 같다.
내가 인지하며 생각하는 4차원의 세상은 10 또는 더 높은 배수의 차원이 존재하며, 그의 특성에 따르는 칸막이를 형성하는 다른 세상이, 4차원의 물리현상처럼 색다른 물리적 힘으로 맞물리며 균형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곳은, 크기나 거리에서도 우리가 인지하는 범위란 극히 단편적일 수도 있다. 거리는 우리의 과학상식으로 크게는 수 억 광년, 작은 크기로는 몇 옹스트롱 단위로 나뉘지만, 큰 단위계는 턱없이 크기가 더 크고, 작은 단위계는 한없이 더 작을 지도 모른다. 입체와 시간을 포함한 4차원의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적 요소(거리, 크기, 온도, 압력, 시간 ᆢ 등) 이외의 또 다른 어떤 요소가 있을지도 장담할 수가 없다. 다른 차원의 다른 세계가 우리의 인식 세계를 가로막는 칸막이로 가리고 있는지 여부는 아무나 알 수 없다.
그것을 우리 선각자들은 신의 이름을 빙의 하여 표현하고, 그러한 신을 믿자고 후계에 가르치는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르기도 한다. 우리의 힘으로서는 접견하지 못할, 이 세상의 칸막이를 인정하고 그 너머 세상으로 인도하려 했던 선각자의 예지를 존경하고, 그 안내를 믿고 따르자는 신자들에 대해서도 의심 많은 나로서는 부럽기만 하다.
그러한 믿음에 대한 의구심과, 먼 앞 날에의 막연한 걱정 사이에서 방황하는 나! 자신을 씁쓸하게 초라하게 되돌아 보기도 한다. 차원이 다른 칸막이의 존재를 의심할 필요는 없지만, 그 존재를 이 세상의 잣대로 경험하고 본 것처럼 확신하는 주장에 대하여는 서슴없이 믿지 못하고, 어쩐지 미심쩍고 망설여 지곤 한다.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운 칸막이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지도 않고,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을 가능성은 수긍하면서도, 막상 칸막이를 넘어선 곳을 특정 하면서 믿음을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는, 나는 의심의 날을 감추지 못하곤 한다.
“종교는 절대 의존의 감정이다.”라고 설파했던 종교철학자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macher, 1768 -1834)의 주장이 마음 깊숙하게 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
칸막이 너머, 저 곳!
가서, 보고 싶고,
가서, 만나고 싶고,
먹고, 만지고, 갖고 싶은 ᆢ
그 곳에는,
욕망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어릴 적,
까치발 띠고도 닿지 못하던,
선반 위의 달콤한 것 들처럼 ..
사랑, 예술, 학문, 종교, 정치, 경제 ᆢ
선망하던 이에 대한 마음도,
그들의 능력이며 영광도 ..
막연하게 이리저리 뒤바뀌어 가며,
욕망하곤 한다.
지역, 사회, 국가, 시대 ..
시.공간을 넘나들며
수시로 욕망하곤 한다.
그리고 ..
궁극적 욕망!
저 세상,
별과 우주, 그리고 사후의 세상까지도
다다르곤 한다.
이 세상의 이지(理智)로서는
궁극적으로
내가 다다르지 못할 곳만 같은,
칸막이 너머,
저 먼 곳까지도!
2023. 4. 14.
오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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