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로운 ......
■ 해찰 (海察)
625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자, 1960년대를 전후한 우리 사회는 전쟁의 파괴와 폐허 속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가운데, 그 복구에 여념이 없었다. 그 때 나는 초등학교 어린 나이였었다.
지리산 골짝, 깊은 산골 태생이신 부모님도, 어린 새끼들 끌고 그 즈음 무작정 상경하여 전쟁의 폐허 속을 함께 헤쳐 나가신 경우이다. 땡전 한 닢 없는데, 일자 무식으로 배움은 없고, 친인척 아는 이도 없는 낯선 서울 땅에서 그 어려운 사회를 헤쳐 나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웠을지 …… 그 분들의 당시 사정을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저며 온다. 차라리 눈물이 날 정도이다
우리만이 아니라 사회 모두의 실상이 그러 했으리라고 위안 삼기에는 너무 막막한 사정이었을 것이다. 점점이 남는 어릴적 어렵던 하루살이의 기억들이 그러하다. 당시 기록사진에 새겨진 헐벗고 굶주리는 처참한 생활상을 보노라면 저릿한 회상들을 돋구곤 한다.
겨울 상경 하여 한해가 채 안되어, 이 악물고 어렵사리 버텨온 그 해 가을, 악명 높은 사라호 태풍을 겪게 된다. 들이닥친 태풍으로 물난리가 난 동네를 야밤에 빠져 나오면서 큰 아이는 아버지 등에 업히고, 작은 아이는 어머니 등에 업혀서 무름까지 차 오른 동네 길을 도망치듯 뛰쳐 나오던 긴박한 순간의 기억도 또렷하다. 강물이 범람했는지, 물에 잠겨가는 동네를 장대 빗속에서 경찰들의 다급한 호루라기 소리와 손전등 불빛을 따라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무리지어 정신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등 뒤에 업혀 겁먹은 채 훔쳐보았던 야밤 한강 가의 서부 이촌동 수재 현장 피신 모습은 60여년 전의 일이 되었다. 다 늙어 가는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아니하고 생생하다.
그런 사회 여건 속에서, 단지 먹고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 넘기기가 힘든 날들이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불이 나면 재라도 남지만, 물난리는 흔적도 없더라는 푸념 까지도 하곤 했다. 미군 구호물자 도움으로 서울 외곽 서대문구 산골 동네에 천막촌을 짓고, 사라호 태풍으로 갈곳 잃은 수재민들을 모아서 이주시킨다. 부모님은 상경하여 품팔아 모았던 그 동안의 푼돈 자산마저 깡그리 없어지자, 호구지책으로 시작한 것이 재생 용지로 봉투를 만들어 팔기 시작하게 된다. 천막촌 안에서 호구지책으로 그 일이 시작된 것이다.
대형 천막 한 채 안에 4가구씩 기거하도록 구획을 한, 비좁은 공간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어른 둘에 4살, 7살 되는 아들 2명이었다. 그 해 겨울 큰 딸을 그 안에서 출산하고, 이듬해 봄에는 장성한 조카 딸, 2명이 추가 되어 7명이 함께 살아야 했다. 그 비좁은 공간에서 시작한 것이 봉투를 접고 붙여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자본없이 손발 품팔아서 쉽게 시작 할 수 있는 가내공업이었을 게다.
이즈음은 식품. 곡물, 과일, 의류, 잡화 따위를 비닐봉투나 손잡이 달린 고급스런 종이봉투에 호사스런 인쇄까지 하여 상품을 포장해서 팔지만, 물자가 부족하고 어렵던 그 시절에는 건설 현장에서 쓰고 버리는 시멘트 포대를 재활용하여 봉투를 만들어 쌀, 보리, 콩 따위 식자재며 의류 잡화 등 각종 일용품을 포장해서 거래 했었다.
황색 크라프트지는 기본 재질이 질겨서 포장재로서 좋기는 하지만, 시멘트 포대로 한 번 써 먹은 재생 용지이니만큼 먼지가 나고 구겨지고 더러워진, 품위 없는 재활용 자재였다. 산업현장, 건설현장을 쫓아 다니며 버리는 시멘트 포대를 다량 매입 하여, 먼지를 털어 내고, 찢어진 부위는 찾아내어 풀칠해서 구멍을 때우고, 일정한 크기로 잘라내어 일종의 규격봉투로 접은 다음, 밀가루 풀칠을 하여 접착시키면 봉투가 되고, 백장 단위로 묶어 내면, 시멘트 포대 폐지가 새 상품인 종이 봉투로 변신하게 된다.
원자재를 구매하고, 만들어진 봉투 판매는 사내가 하고, 먼지 털고, 땜빵하고, 접고, 붙이는 수공 작업은 계집과 아이들 몫이었다. 집안은 늘 바빴다. 그렇게 시작하여 종이를 다루게 되었고, 제지공장에 제지 산업용 원료를 납품하는 중간상으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백상지 보다는 크라프트지용 원료를 주로 취급했던 이유도 시멘트 용지를 취급했던 연유인듯 하다.
두어평 남짓한 천막 단칸방은, 침실, 거실, 식당, 놀이방으로 써야 하는데, 그 안에서 봉투까지 자르고 접고 붙이고 해가며 만들어야 하니, 자재창고 제품창고 작업실 따위의 공장일까지 수행해야만 하는 다용도실이 되어야 했다. 비좁은 방안에서 이 모든 일이 수행되었으니, 눈에 띄는 사람은 애 어른 할것없이 일꾼이 되어, 종이접기 놀이나 할 어린 것들까지도 일손을 도와야만 했다.
몇 년 후, 사업 규모가 커지고 그만큼 일손이 더 필요하게 된 때, 초등학교 중반 즈음, 방학을 하면, 아이들도 일손을 도와야만 했다. 아들 형제들의 방학 숙제장인 일기에는 한달동안 거의 같은 내용으로 채워지곤 했었다. “일했다, 일했다, 오늘도 또 일했다……” 그러한 잡일이 없는 옆집 친구들을 무척이나 부러워했었던 기억이 남는다.
초등학생 어린 것들 일 시키려니, 그 어른들 입이 얼마나 고달프셨겠나 하는 생각이다. 말은 안듣고 뺀질대고 틈만 나면 밖으로 놀이나 나가려 하고, 일한답시고 앉아서 딴짓 거리나 하려 하니, 어른 입으로 쉼없이 닥달을 계속해야만 했을 것이다. 때로는 혼줄 내고, 달래고 으르며, “호래이 짜~악 찌져 무러갈 ……” 험한 욕도 달고 다니셨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잦은 말씀 한 가지가 있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또! 해찰하네!”
이즈음 해찰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뜬금없이 생각하여 본다. 어린 것들을 그리 다그쳐 가며 일을 시켜야했던 어른들의 마음은 얼마나 다급했었을까 하는 안쓰러움도 곁들여 생각하게 된다.
. 해찰(海察)
마음에 썩 내키지 아니하여 물건을 부질없이 이것저것 집적거려 해치다.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짓을 하다.
우리말 뜻이기는 하겠지만, 한문을 들여다 보면 좀 더 깊은 의미가 함축 되어 있는 듯하다. 해찰(海察)은 바다를 살핀다는 내용이다. 그와 비슷한 말로, 먼산바래기니, 멍 때리느니, 별을 보느니, 하늘만 본다는니 하는 말이 있다. 보고 살피고 생각 하여 봐야 시작도 끝도 없는 일이고, 달라질 것도, 생산적이거나 이득이 될만하지 아니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레서 쓸데없는 일을 할 때 그렇게들 표현했던가 보다. 해찰(海察)을 곰곰 들여다 보자 ……
바다를 살피는 일
오고 가기를 한없이 반복하는 물결,
시선을 멀리해도 마냥 일렁이는 푸른 파도,
시선과 함께
일상의 상념은 모두 그 속으로 빨려들고,
시간의 흐르름이 쉽게 잊혀지는 곳,
시간은 정지되기도 하고 ……
시각이 망각되기 쉬운 행태가 "해찰"이 아닐까? 시간이 무한으로, 발산되거나 수렴되는 순간들을 해찰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산업생산성에 도움없이 빼먹는 시각을 해찰이라고 본다면 좋은 짓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지만, 삶의 질, 삶의 과정에 초점을 두고 본다면, 해찰도 의미있는 삶의 과정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진다.
주제를 벗어난 그 모든 대상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고, 해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목표로 하는 일, 그 일의 주제는 항상 임의로 선정될 뿐, 절대적이라거나 참이라거나, 진실 또는 진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어린 시절, 일이 싫어 딴짓하던 그 해찰은 일을 시키려는 어른 입장에서 바라보면 산업생산 저해요인이 분명하다. 그 뺀질이 아이가 바라다 보는 가치는 생산성으로만 따질수 있을까?
좀 더 커서 중학교 다닐 적의 해찰하던 기억도 한가지 더 나열하여 보자.
당시, 서울은 지하철 1호선 공사로 땅 파기가 한창이었다. 을지로 통 주변도 여기저기가 지하철 공사용 골재로 어지렵혀 있었다. 학교에서 집에 갈 때면 버스로 그 길을 따라 통학하던 때이다. 동대문 근처의 학교에서 을지로와 시청앞을 지나야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어느 한가한 봄날, 그 공사판 길을 일부러 한들거리며 걸어서 가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공사판 모래 골재는 한강 백사장 모래 자갈이 대다수였다. 그래서 골재들은 한결같이 하얗고 깨끗한 것들 이었다. 그 골재의 질감과 아름다움을 느끼고 관심만 가진다면 공사판 여기저기가 온통 천연이 선사한 품위있고 질 좋은 장난감 천지였던 셈이다.
동대문 운동장 앞에서 하이얀 모래 한 웅큼을 쥐어 잡고, 을지로통 공사판을 걸어 시청앞까지 걸어가며 아껴서 아껴서 몇 알씩 뿌리면서 갔다. 그 한 줌만으로 농부가 씨앗을 뿌리듯, 을지로 공사장통 옆길 보도에 뿌려가며 걸었던 것이다. 신당동에서, 을지로 6가를 지나 입구까지 ……. 자기 주먹을 거쳐 지금 뿌리는 이 모래알은 언제까지나 이 근처 어디에인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분명히 중학생의 어린 생각, “해찰”이였지만, 그 속에는 시간, 세월, 삶, 영원 …… 이러한 철학적 요소가 깊이 있게 숨어 있었기에 지금 생각해도 대견하다. 무엇이 아름답고 중요한 것인지를 그 때도 인지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그렇기에 그 때의 그 해찰이 창피하다거나 숨기고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순간들,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나이고, 나의 시간이고, 의미있는 삶의 과정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그 어린 시절 내가 생각했던 바를, 어느 시인이 비슷하게 읖조린 싯귀도 새삼스러워 다시 보게된다.
. 순수의 전조 (Auguries of Innocence)
한 알갱이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And Eternity in an hour
by William Blake (영국시인, 1757-1826)
. 나의 블로그 중에서 ; ☞ 모래 (砂)
http://blog.daum.net/tsc99/18321770
은행에 적립된 알 돈 몇푼이 얼마나 의미있겠는가? 조직에서 몇 직급 더 올라감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학문적 업적이나 명예로운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몇 단계 더 나은 상급학교 진학이 얼마나 더 의미있는 일이었을까? 천하를 얻은 진시황, 금 장식한 고대 이집트 미이라의 주인공 …… 지금와서 생각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계를 지배하고 호령하는 듯한 강대국의 위업도 그리 여겨 본다면 허전하게까지 생각 들 때 마저 있게 된다.
노인요양병원에 와병 중인 어르신들의 지나간 영광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더 더욱 그러한 생각을 들게하곤 한다. 여지껏 고생하시며 보내신 어머님을 바라보며 그 분들 서로를 비교하게 된다. 옆 병상에는 보다 곱게나서 더 아름답고, 그 옛시절 명문 대학교까지 훌륭한 학교를 나와, 호사를 누리고 사셨을 듯한 노인 분들도, 와병 중의 모습은 똑같이 어렵고 안쓰럽다.
사회적인 지위나, 종교적인 입장에서도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다. 그 동안의 높은 영광과, 깊은 신앙심도 신체와 정신이 노쇄된 상태에서는 서로 같이 되는 듯만 하다. 그들 각각이 생각하던 해찰의 과정은 서로 다르겠지만, 그 때 생각하던 해찰도 지금은 같은 시간으로 각각은 안겨 있을 듯만 싶다. 그 해찰을 누가 평가 하여 줄 것인가?
“믿음”을 갖는 자는 절대자가 알아 주기를 기원하겠지만, 나처럼 “믿음” 없는 자는 스스로 보낸 해찰을 그 자체가 가치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믿음”가진 자가 위험한 말이라고 지적한 어느 명언에 귀가 솔깃한 이유일지 모른다.
“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
모든 길을 가까이, 자세히 보아라.
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몇 번이고 해 보아라.
그리고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
.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
『돈 후앙의 가르침, The Teachings of Don Juan: A Yaqui Way of Knowledge, 1968』
페루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작가.
멕시코 야키 인디언 주술사의 신비한 비밀에 관한 시리즈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중등교육 과정의 어느 한 교과목 또는 그 중 어느 한 제목만 중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회생활, 삶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각각의 중요한 지식 항목들이기 때문이다. 국어 영어 사회 과학 수학 미술 음악 체육 …… 가령, 국어 시간에 다른 과목을 들여다 보고 있다거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한다면, 해찰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식을 쌓고 체력을 단련하는 등의 다른 주제로서 본다면 해찰하는 게 아니라, 바른 일을 한다고 주장 할 수도 있게 된다.
해찰이라고 폄하 될 수 있는 세상의 어떤일 일지라도, 옳고 바른 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제 아무리 옳고 바른 일일지라도,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해찰로서 비춰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복장을 하고 훌륭한 도구로 치장한 골퍼들을 바라보며, 운동에 관심 없는 이라면, 해찰하는 짓 정도로 깔보며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부류도 얼마던지 있을 것이다. 미술 음악을 하면 환쟁이니 딴따라 정도로 깔보는 부류도 있을 터이다. 예능 체능만 그러하지는 않다. 철학, 종교, 또는 그 어느 학문 분야라도 관심없는 사람이라면, 남의 일을 해찰하는 정도로 낮춰보는 다른 계층은 얼마던지 있을 것이다.
돈이나 명예 영광만을 삶의 바른 목표로 여기며 달려 온 이라면, 돈 벌이가 안되거나, 영광이나 명예롭지 못한 일에 정신 팔면 해찰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삶의 여정에서 진실로 중요한 덕목이 무엇일지를 곰곰 짚어 본다면, 금권, 명예 영광도 중요 하지만, 해찰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소한 모든 사안들이 어느것 한가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여 본다.
봄날 따스한 햇살을 느끼고, 연초록색 풀잎의 살랑거림을 느끼는 그 짤막한 순간들 까지도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있는 순간이었는가? 무엇에 견줄바 안되는 가치있고 중요한 자기의 시간을 쪼개가며 보낸 시각임에 틀림 없다고 본다. 자기 삶의 한정된 여정 중의 순간이고 시각이며 과정이기에 중요한 삶의 요소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연세 아흔다섯, 몸도 정신도 가누지 못하시는 노인의 간병은 산업생산성과는 거리가 먼 짓이다. 그러나 그 노모의 간병을 마음 써 가며 많은 시간을 쪼개어 돌보는 자식들로서는 진실한 마음이고 참인 것이다. 누군가는 돈도 안된되는 해찰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다가올지 모를 임종을 함께 할 수 있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기에 그들 각각은 스스로의 순간과, 진실을 스스로 주워담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와 자기가 소속한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을 위해 열심으로 노력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점점으로 이어지는 해찰 또한 마찬가지로 소중한 의미를 가진다는 생각이다. 이 세상을 나왔다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의 모든 여정이 그러할진대, 진리를 쫗는 일과 해찰하는 짓을 어찌 쉽게 구분하여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가롭다거나 여유롭다는 단어로도 통칭되는 각기 다른 취향에서 즐기는 시간 대부분도 그러하다. 취미로 하는 일, 가치없다고 여기던 일들이 해찰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의미있는 과정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해찰만 일삼아 자신과 사회나 조직에 까지 해가 되고 폐를 준다면 옳은 행동은 못되겠지만, 삶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적당한 정도의 해찰이야 말로 소중한 자기 시간 쪼개기가 될 것이다.
세상 일이 모두 해찰일 수도, 아니면 참이자 진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나의 일도 중요하지만, 너의 일 또한 가치있고 중요하다는 생각이고, 나의 종교, 철학, 가치관이, 너의 그것과 다르다고 하여, 부끄럽다거나 우월하다거나 폄하나 무시 하는 따위의 생각은 무엇이 과연 해찰인지를 곰씹어 보지 못한 불찰일지도 모른다.
가령, 우리 주변에 흔한 종교분쟁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여 보자.
각기 종교가 갖는 진리에 대한 그 옳고 그름을 따질 때, “믿음”이라는 전제를 잊고서 자기 주장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기가 소속된 그 시대와 사회와 장소 때문에 그러한 종교관 가치관의 믿음을 갖게 된 것이라는 전제를 짚어 볼 수 있다면, 타자의 가치관을 해찰하는 정도로 폄하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우리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모든 일, 생각, 사상이나 가치관도 종교관의 사례에서 보는 바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2016. 9. 24.(토)
오갑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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