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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의 인식

오갑록 2015. 7. 1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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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 자아의 인식 (自我認識)

 

 

   

자아(自我, ego)자기또는로서 경험되며, 생각, 감정 등을 통해 외부와 접촉하는 행동의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말한다. 우리의 심신(心身)은 늘 성장하고 변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역시 같은 자신으로 생각하고 타인과 구별한다. 이 동일하다고 의식한 자기를 자아라고 한다. 우리 일상의 감각, 사고, 행동 등 모든 경험의 밑바닥에 있는 모든 경험을 통일하여 그 경험을 하고 있는 바로 그 당사자라고 생각되는 자신이 자아이다.

 

자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행위 및 기대와 상상 속에 나타나는 미래의 행위와 관련된 개인적 준거를 제공함으로써 행동에 지속성과 항상성을 부여한다. 신체 개념은 자신의 초기 경험이 중심이 되지만 자아는 성격이나 신체와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 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 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

 

칸트는 본능, 욕망에 의해 살고 있는 경험적인 자아 이외에 도덕적으로 살려는 자신(양심)을 신적(神的)인 인간의 본질로 생각하여본래적인 자기라고 불렀다.  (사전 인용)

  

남을 알고 이해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이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나 태도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아는 것은 항상 어렵다. "진정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이란 스스로가 정한 주관적인 믿음이나 욕망의 산물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자아는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기 스스로가 찍어내는 객관화 한 사진이며, 그 개념은 마치 물이 흐르듯, 상대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달라질 수 있다.

 

자아의 개념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외면적이고 물리적 측면(Physical), 사회적 측면(Social), 생각이나 감정을 바탕으로 하는 사유적 측면(Reflective), 그리고 철학적 측면(Oceanic)의 자아로 구분한다.

 

몸의 구조나 외모, 그 움직임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물리적인 자아이다. “나는 야위고 못생긴 남자로서 공 굴리는 운동 치고 잘 하는 것이라곤 한가지도 없다는 식의 자기인식이다. 사회적 자아는, 일상 생활에서의 역할이나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알게 되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나는 다섯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여 생활 했고 잘난 부인과 결혼하여 지금의 가정을 꾸렸다. 명성이나 내세울만한 명예도 없고 직장동료나 친구하나 변변치 못한 볼 별일 없는 사람이다라는 식의 자기인식이 사회적 자아이다.

 

사유(思惟)적인 자아란 생각이나 마음 속 감정 상태로서 인식되는 자신의 모습이다. “나는 나이 지긋한 지금도 여전히 순진하고 낙천적이며, 좀처럼 화 낼 줄 모르는 넓은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며, 때로는 자질구레한 작은 일에 마음 쏟는 소심한 쫌팽이기도 하다. 게으르기 때문인지 뇌 용량이 작아서인지는 모르지만 머릿속에 든 지식이라곤 꺼내 놓으며 자랑할 만한 게 없는 사람이다

 

영적(靈的), 형이상학적 관념에 관련된 자아로서 인생의 목적, 인생관, 세계관, ()관 등에 관한 인식을

철학적 자아(Oceanic)라고 한다. 예를 든다면나는 신을 믿는 것이 생노병사라는 녹녹치 아니한 험한 인생살이를 살아가는 지혜로서 매우 옳다고는 여기지만, 그것이 희망이나 욕망을 향한 목적론적 믿음의 한계를 벗어난다고 여기지는 못하고 있다. 이 광활한 우주의 원리인 아르케나 우어스토프, 생명의 원리와 사후의 세계, 영혼과 육체, 시간과 공간 …… 이러한 물음에 명확히 답할 주체가 있기 바라지만, 이는 우리가 어려운 현실과 불안한 미래 내일을 욕구하며 목마르게 갈망하는 희망일 뿐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다가올 행운의 약속을 믿고 죽어서도 영혼을 구원 받아 영생으로 이른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신앙심이 깊은 이들을 대하면 매우 부럽게 여겨진다.”라는 식의 자기인식이다.

 

이렇게 분류되는 4가지 자아 인식 중에서, 사유(思惟)적인 자아에 관하여는 한 때의 생각들이라는 별도의 카테고리에서 짤막한 단락의 글로 생각날 때 마다 남겨 보았다. 그리고 철학적 자아의 부류에 속하는 것들은 블로그에 카테고리 별로 부제를 달아서 내 마음에 닿는 부분의 내용들을 나름대로 구성해 보고 싶었다. 가능한 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바를 많이 인용했다.

 

이 글은 무심코 지나쳤던 자아 인식의 대강을 한 눈에 훑어 보고자 그 주제들만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글의 상당 부분이 다른 카테고리의 본문 글 중에서 인용한 내용들임을 밝힌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하는 주제로 스스로를 돌이켜 보게 하는 명사들의 시나 산문 등을 글 하단부에 모아본다.

 

      2010. 4. 28.

     오갑록 (K.L. Oh)

 

 

 

나는 누구인가?

■  내 마음 속의 나

 

 

     영아기 유아기를 거치는 성장 과정에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마음으로 생각하며 갖게 되는 주관과 가치관이 있다. 그 가운데에는 고집이며 아집, 바램이니 희망이 뒤 엉켜 있다. 이들은 내 생애가 이어지는 한,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세월 사이를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사이를 오가며 서로 상호작용하며 연계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자신의 태초에서 시작하여 망각에 이르기까지 희망 갈망 욕망 바램이라는 이름으로 흡족함과 만족 또는 부족함과 불만의 사이 또는 그 언저리에서 머무는 생각의 존재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하는 것을 수시로 자각하곤 한다. 망각의 순간 이전까지 만이 존재 할 수 있다는 특성이 마음이고 생각이며, 그것이 바로  "나"이다.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바램, 그 틈새에서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 속에 있는 나의 형성과정은 어떠한 것일까? 오감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들, 만져서 느끼는 것, 보고서 느끼는 것, 듣고서 느끼는 것, 맛으로 알 수 있는 것, 냄새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오감은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는 시기부터 시작된 직접적인 경험들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밖으로부터의 경험을 듣고 얻게 되는 다른 이들이 경험했던 선험적인 것들이 있다. 자장가로 기억되는 나이 어린 시절 어머님의 말씀, 성장과정에서 선생님의 가르침, 벗들의 이야기, 글과 학문적으로 쌓은 지식들, 뉴스미디어를 통해서 또는 사회적 종교적 집단의 활동, 또는 자연이나 동식물의 자연현상을 통해서 얻게 되는 여러 가지 계층과 종류의 지식들로서, 나 자신의 오감을 통해서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주체들의 선험적인 지식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나"의 경험인양 수긍하게 되는 간접적인 경험의 마음과 생각으로서  "나"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형성된 선험적인 지식들에 대한 관심 믿음 신뢰가 곧 가치관인 것이다. 때문에 무관심이나 의심과 불신으로 버려진 지식들은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서 무관하거나 멀어지고, 믿음과 신뢰를 통해 수긍할 수 있는 선험적 경험만이 자신의 가치관 형성에 기여하게 된다.

 

형성된 가치관 중에서도 기억력의 범주, 즉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 간에 기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내 마음 속의 나로서 자신의 주체가 형성될 것이며, 또한 그러한 기억력을 가공하고 가공 할 수 있는 뇌의 능력과 체력이 이자 나의 한계가 된다. 그 체력(또는 정신력)의 한계를 넘어 선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는 거리가 먼 희망, 욕구, 갈망, 욕망, 꿈에 해당 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는 누구인가?

■  내 마음의 관심과 나

 

 

    잠자리 눈꼽은 얼마나 될까를 생각하다가 웃음짓고, 진흙탕 물가의 지렁이 기어간 궤적이 남기는 여운이 눈 앞을 삼삼 댄다. 봄날 아침에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며, 실바람에 흔들리는 들풀과 들꽃의 춤사위가 부드럽게 여겨지고, 줄 이은 개미들의 향방이 궁금해 지고는 한다. 어떤 때는 냇가를 흐르는 여울, 바닷가 모래톱의 잔주름에 눈길을 멈추고, 하늘로 향하는 에스라인의 담배연기에도 마음을 빼앗기고는 한다.

 

때로는 선한 노인의 움푹 패인 주름에서 그분들의 좋았던 세월이라도 읽을세라 눈망울을 휘두르기도 한다. 곱고 청순한 이성의 모습이 어른 거리기도 하며, 잔뜩 흥분하면 그 입술이며 눈가 잔주름, 얼굴형상은 어떨까? 그 순간 심연의 은밀한 굴곡들이며 손짓이나 몸 동작은 어찌 들 변화되는 지 궁금할 때도 있다.

 

하찮은 일들이 어디 그 뿐이랴? 바닥은 닳아 지고, 옆은 뚫어 지고, 위는 색 바랜 헌 구두가 새삼스러워 손질하고, 헌 우산 양산 부러진 살 이어대고, 헌 자전거 손질하기 마다하지 아니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수선하고 보내는 시간들일뿐, 흘려 보낸 시간에 대한 보상의 기대감이나 아까운 마음은 한 톨도 없다.

 

그 모두가 쓸 일 없고, 시간 가면 사라질 허상들이며,  쓸데 없이 보내는 시각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 속에는 시시로 떠오르는 잔상들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도 마음 속에 갖게 되는 무의식 중의 관심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성공, 야망, 희망, 꿈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된 웅장하고 거대한 큰 관심의 그늘 아래 가치 없이 흘러가는 사소한 관심들 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럴싸한 관심사도 많기만 하다. 부동산 돈 사랑 자연 권력 경제 사회 문화 과학 종교 철학 역사 조국 명예 ……  거대기업의 경영지표, PER 주가지수 국가신용도 …… 페라리 벤츠 아우디 렉서스 비엠더블류 …… 예수 석가 노스트라다무스 정감록 남사고 …… 별 우주 과거 미래 ……

 

그렇다. 어떤 형태의 사물이나 행위던 간에 또는 크거나 작거나  간에,  한 사람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며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한정된 시간을 나누고 쪼개며 일생을 보낸다. 그렇기에 관심으로 점철된 시간들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이기도 하다. 시원한 음료 한 잔에 씹고 삼킬만한 저녁 식사용 먹거리에 관심을 두고 머릿속을 굴려 보고 있는 지금의 관심도 이 순간의 라고 할 수 있다. 이 순간의 , 마시고 씹고 삼킬 것에 대한 관심으로 보내는 짧은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듯 관심이 의 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생각에 따라 그 관심이란 허망 되고 가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왕방울 만한 다이어몬드가 찬란하게 빛나는 백금 발찌에 진주목거리를 두르고, 깊고 투명한 남청색의 사파이어 귀고리 장식을 치장한 110kg의 우량 돼지가 돼지우리 속에서 경매를 기다린다고 치자. 돼지에게는 이 모든 보석이 몸을 옥죄는 쇠사슬에 지나지 않을 터, 먹을 때가 지나 넣어 주는 썩은 감자 한 덩이나 짚 검불만 못할 것이다. 돼지에게 관심은 썩은 감자며 짚 검불에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기의 품질이 좋아진다거나 돼지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2010311일 축산물 경매시장 경매자료를 보면 박피 기준 1+ 등급의 돼지고기 경락 가격이 Kg5,135원 이었고, 그날의 110Kg 암돼지 마리당 시세는 289천원 이었다. 보석으로 치장 했던 그 돼지를 그 날 경매에 붙였다고 하자. 그렇다고 그 날 3%에 불과했던 1+ 라는 최고등급을 받을 수 있었을까? 애완용 돼지가 아닌 한, 주인의 관심사는 육질의 품질향상과 높은 경매가격에만 국한될 뿐이다. 보석에 대한 관심은 돼지 자신에게나 사육하는 주인에게나 모두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영혼을 찾아 헤매는 무명의 무속인, 진리를 찾아 오지(奧地)를 마다 않고 평생을 쫓아 온 고고학자, 말기 암으로 투병 중인 촌로 …… 각기 서로 다른 관심 속에 나날들을 보내곤 한다. 만일 그들이 스포츠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A매치 축구경기에서 한 골이 주는 가치란 무엇으로 비춰질까? 야구경기에서 스트라이크나 홈런 한방이 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피겨 스케이팅에서 트리플 악셀로 한 바퀴 더 도는지 못 도는 지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백 미터 단거리 경주에서 9초 대를 끊느냐 못하느냐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 한계를 인식하는 경계선이거나 경쟁 상대보다 우월했다는 만족감에 지나지 않는다거나, 또는 관심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 행동들은 자신이 관심을 두지 아니한다면 아무 의미 없는 짓들 일 수도 있다.

 

관심에서 싹튼 "나"의 가치관은 이런 형식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이렇게 형성된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 마음이다. 때문에 나를 감싸고 있는 관심이나 주관이란 말 그대로 주관일 뿐, 보편 타당성 있는 우주 질서라든가 또는 객관성있는 진리일 것을 기대하는 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  한 생명체로서의 나

 

 

     생물의 본질적 속성으로서 추상되는 생명현상의 총칭을 생명(生命)이라고 한다. , 생명은 생물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속성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에 대하여 5가지 정도의 정의가 있다. 생리학적 정의, 물질대사적 정의, 생화학적 정의, 유전적 정의, 열역학적 정의 등이다.

 

섭식, 물질대사, 배설, 호흡, 이동, 성장, 생식,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을 수행하는 계()로 정의되는 생리학적 정의와, 자신의 물질을 끊임없이 외부와 교환하지만 일반적인 특성을 잃지 않고 체제의 확실한 경계를 가지고 있는 물체로서 정의되는 물질대사적 개념이 있다. 핵산 분자에 생식 가능한 유전정보를 암호화하여 가지고 있으면서 효소로서 물질대사의 화학반응 속도를 조절하는 계로 정의되는 생화학적 정의와, 유기물질, 행동양식, 구조 등을 복제하는 존재로서 정의되는 유전학적 정의, 그리고 한 개의 개방된 계로서 열, , 물질 등 우주의 무질서를 통해 자신의 질서를 증가시키는 어떤 국소 부위로서 정의되는 열역학적인 정의가 있다.

 

이를 다시 종합해 보면, 생명이란 외계와 세포 내외를 가리는단위막 계를 가지고, “자기복제 능력이 있으며, 외계의 물질을 받아 이를 대사 하는대사 계를 가진 특성을 가진 것으로 정의한다. 생물학적 생명의 특성은 성장, 물질대사, 내외부적인 동작과, 자기개체의 생식 기능, 그리고 외부자극에 반응하는 것이다. 탄수화물, 지질, 핵산, 단백질과 같은 성분을 지니고, 에너지와 물질을 모두 필요로 하며, 하나 이상의 세포로 이루어졌으며, 그 항상성을 유지하고, 진화한다는 것이 생명체가 가지는 현상들이다.

 

세포의 발견과 DNA 구조의 해명으로 생명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생물체를 구성하는 DNA G, A, T, C라는 네 개의 염기가 조합을 이루며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다. 네 가지 염기조합(A.T.G.C 서열조합 64종 중 자연계에는 20가지만 존재)으로 아미노산이 만들어 지고, 아미노산이 모여 단백질이나 세포핵 등이 되고, 이들이 모여 세포를 구성하며, 세포가 모여 생명체를 이루게 된다. 마치 복잡한 곡선도 잘게 분해해서 확대해 보면 직선에 근사해 가며, 분할의 과정을 무한히 진행하면 곡률 0의 온전한 직선을 얻을 수 있음과도 같다. 엄밀한 의미에서 원자적 사물은 존재하지 않지만, 원자는 사물에 대한 극단적 이상화이다. 마찬가지로 아미노산으로 시작된 유기물 세포가 생명체를 발현 하는 것과 같다.

 

생명체가 생명체를 복사하는 것은 복사기가 서류를 복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자기자신을 복사하는 것이며 복사기가 복사기를 복사하는 것과 같다. 부분이 전체 속에 들어있으면서 또 전체를 자신 속에 가질 때 가능해지는 것이자기조직화이다. 이것은 자기의 조건을 자기 스스로 부과한다는 점에서 외부의 강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질서와는 다르다. 자기조직은 전체와 부분간의 상호 되먹임의 결과이다. 이러한 되먹임은 자기가 자기를 만드는 촉매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한 알갱이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라. "순수의 전조(Auguries of Innocence)”, 영국시인 윌리암 블레이크(W.Blake) ,

 

물질적 우주에서 생명이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이 의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적어도 무엇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연을 넘어서는 어떤 질서, 賦存秩序(order for free)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기원에서 시작해서 수정난의 형태형성에 이르기 까지,

캄브리아기의 대 번성에서 기술혁명에 이르기 까지

여러 다양한 주제들의 근저에 깔려있는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生氣"(elan vital)라는 개념의 그 공허 한 동어반복에 있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나의 이론은 철저한 전체론(holism)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신비적인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수학적 필연성에서 도출된 것이다. 생명은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진 것이 아니

고 전체로서 출현했으며 또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우주는 우리의 집(at home in the universe)” 중에서, 스튜어트 카우프만(S.Kauffman)

 

어떻게 무규정적인 동질적 배(胚, embryo) 세포에서 근육세포, 신경세포, 혈액세포 등이 분화되어 나올 수 있는가? 인간을 구성하는 10만종의 유전자가 어떻게 254개의 상이한 세포들을 발현하는가? 인간의 수정난 속의 10만 여 개의 유전자는 상호 연결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서로 상대를 켜고, 끔으로써 256가지의 상이한 세포형태를 발현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10만개로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한 연결의 수는 즉 개다. 이 가운데 250여 개만 발현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러나 이 "그 무엇"은 비물질적인 "생기"가 아니고 유전자들간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내는 자기촉매적 네트워크이다. 이 네트워크는 주의 깊은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요소들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전체와 요소들간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자생적 질서이다.

 

이 부존질서는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점을 지양하면서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본적 의도에서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창조론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우연만으로는 복잡한 생명체가 만들어질 확률이 全無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진화론자들은 자기복제 과정에서 끊임없이 변이가 출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환경과 적합한 것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형질을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 있다. 환경에 적합한 것이 선택되고, 부적합한 것은 도태되는 과정이 바로 고도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선택은 제멋대로 흩어져 있는 부품들에서 보잉747기를 조립할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다.

 

카우프만은 자연선택이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떤 선행조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선택 그 자체만으로 선택이 잘 작동하는 그러한 종류의 지형에 적응한 유기체들을 만들 수 있고 유지할 수 있는지가 아주 의심스럽다. 선택 그 자체만으로 진화가능성을 산출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 세포와 유기체가 선택이 작동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실재가 아니라면 어떻게 진화는 진화를 위한 발판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자기조직화가 진화적 능력의 전제조건이라는 것, 그것이 자연선택을 효율적 도구로 만들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이 점진적으로 진화할 수 있는 강인한 구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서 자기 조직화된 바로 그것이 전제됨으로 자연선택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자기조직과 자연선택 간에는 어떠한 근본적 대립도 없다. 질서의 이 두 원천은 자연의 파트너이다. 게놈 네트워크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가까운 질서의 영역에 있다.

 

만일 자연선택이 자기조직적인 강인한 특성들을 이용해서 유기체를 만들었다면 우리는 뜯어 맞춘 임시방편적 분자기계가 아니다. 진화는 우연이 아니며 근저에 있는 질서의 표현이다. 우리는 예상된 존재이다. 그리고 우주는 우리의 집이다.     (조..현 글 중에서 발췌)

 

 

 

 

나는 누구인가?

■  유기물질과 나

 

 

    

생체를 이루며, 생체 안에서 생명력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물질을 유기물질이라고 한다. 유기화합물은 구조의 기본골격으로 탄소 원자를 갖는 화합물을 통틀어 부르는 것이다. 유기화합물은 탄소골격의 길이나 분기의 다양성에 제한이 없어 무기화합물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질 수 있다. 또한 탄소에 질소, 산소, , , 할로젠 등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작용기도 다양하므로 각각 독특한 특성을 가져 무한한 다양성을 보여 준다. 관습적으로 유기화합물은 생체가 생산하는 화합 물질이라는 이유로 이산화탄소 탄산칼슘 등은 탄소의 화합물이지만 무기물질로 분류된다. 당류·녹말·셀룰로오스 등의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은 생체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유기물이다.

 

"나"라고 하는 생체도 이러한 유기물질의 복합체이면서, 한편으로는 영양과 에너지 원으로서 다양한 유기물을 섭취하고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 가는 존재이다.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등의 대표적인 유기물질 몇가지를 나열하여 본다.

 

아미노산(Amino acid)은 모든 생명현상을 관장하고 있는 단백질의 기본 구성단위를 말한다. 염기성을 띠는 아미노기(-NH2)와 산성을 띠는 카르복시기(-COOH) 및 유기원자단인 R기로 구성된 유기화합물이다.   

                                                                   NH2

                                                                   I

    R [CH3-CH2-CH2- ……CH2] – C – COOH

                                                 I

                                                 H

천연에는 100개 이상의 아미노산이 존재하지만 이 가운데 약 20개의 아미노산만이 원생동물에서 동식물에 이르는 유기체(有機體)에 공통으로 존재하며 단백질 합성에 이용된다. 이들 가운데 대략 10개는 인체에서 합성이 불가능한 필수아미노산이므로 음식물로부터 섭취해야 하고, 나머지 10(비필수 아미노산)는 아미노기 전달반응이라고 하는 산화-환원 반응에 의해 합성된다. DNA는 아미노산을 특정 위치에 배열하여 단백질이 만들어지도록 한다. 대부분의 단백질은 100개 이상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표적인 단백질로는 뼈, 힘줄, 인대, 피부를 구성하는 구조단백질인 콜라겐, 상피세포 내의 구조단백질로 머리카락·손톱 등을 구성하는 케라틴, 근육 단백질, 효소를 포함하는 미오겐, 수축단백질인 미오신, 그리고 혈청에는 7% 정도의 단백질이 포함되어 있는데 2/3가 알부민이고 1/3이 알파·베타·감마 글로불린이다. 접합단백질로서 당단백질이나 헴단백질 지방단백질, 핵산단백질 등이 있으며, 단백질호르몬, 면역 글로불린과 항체 등의 단백질도 있다.

 

효소는 생체내의 다양하고 복잡한 모든 생화학반응의 촉진제이며, 조절기능을 가지고, 소화작용에서부터 혈액으로의 운반작용, 거대분자의 형성, 에너지 저장 및 방출 등에 관여하며, 1개 이상의 소단위들이 모여 형성된 수백 여 개의 효소단백질은 기질과의 반응성에 따라 분류 많은 효소들이 금속이나 조효소 같은 공동인자를 가진다.

 

탄수화물은 천연에 존재하는 가장 풍부한 유기물질로서 화학식은 Cn(H2O)n 단당류, 이당류, 올리고당류, 다당류로 분류되며, 사람의 주된 에너지원이 된다.

 

지방은 세포의 구성성분이며, 주요 에너지원이다. 10개 이하의 탄소로 이루어진 지방산들은 수용성이며, 그 이상의 탄소를 포함하는 지방산들은 불용성이며, 지방단백질, 지방산 유도체 및 화합물로도 존재한다.

 

핵산(核酸, Nucleic acids)은 염기, , 인산으로 이루어진 긴 사슬 모양으로 중합된 고분자 물질로 아데노신, 우리딘, 구아노신, 시티딘 같은 뉴클레오티드로 구성된 생명체의 유전물질이다. 가장 잘 알려진 핵산으로 DNA RNA가 있다. DNA를 구성하는 염기에는 아데닌, 티민, 구아닌, 시토신이 있으며, RNA는 티민 대신에 우라실을 가지고 있다.

 

비타민은 일반적으로 체내에서 합성되지 않으므로 외부로부터 공급 받는다. 동물의 체내 요구량은 극미량이며, 전구물질인 프로비타민이 몇 가지 물질대사과정을 거쳐 비타민으로 전환된다. 비타민은 물질대사를 조절하는 기능을 가지며, 결핍되면 대사균형이 깨진다.

 

호르몬은 동식물에 의해 분비되는 유기물질로서 생리작용을 조절하고, 생체항상성을 유지하고, 특정기관이나 조직으로부터 응답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호르몬 조절은 신경계에 의한 조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경분비세포에서 신경호르몬을 분비하여 혈류로 방출한다. 신경에 전달된 신호를 화학적 자극으로 전환시킨다.

 

아미노산,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효소, 핵산, 비타민, 흐르몬 ......  "나"도 이 세상의 여느 생명체처럼, 이러한 유기물 들의 생성과 분해가 반복 되고 있는 한 개의 생체조직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  미토콘드리아와 나

 

 

    인체는 약 60조 내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 지는데, 각 세포내의 구성단위는 세포막, 세포질, 세포핵, 미토콘드리아, 리소좀, 골지체 등이 있고, 각각의 세포 내에는 미토콘드리아가 1000 ~ 2000 개 정도씩 있다.

 

세포막은 외부로부터 전달되는 각종 신호를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수용체(Receptor)라 불리는 안테나를 갖고 있어 접수된 정보를 세포 내부로 전달하는 통신 기능과 외부 침입자로부터의 자기 방어기능, 필요한 물자를 외부로부터 내부로 운반할 수 있는 수송기능, 혈액형이 다를 경우 수혈 거부나 장기이식의 거부반응과 같은 개체로서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기능까지 이 세포막이 수행한다.

 

인체의 힘은 세포내의 소 기관 미토콘드리아 라는 소시지모양의 작은 주머니에서 생산된다. 그 기능은 마치 석탄이나 석유를 태워 전기라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화력발전소와 흡사하다. 미토콘드리아에서 사용되는 원료물질은 세포가 흡수하고 세포질 속에서 분해된 영양물질들이다. 결국 세포의 동력공장은 화학적인 공정을 통해서 섭취된 양분들을 연소시켜 ATP(Adenosine Triphosphate)라는 생체에너지원을 생산한다. 한 분자의 포도당을 태워서 얻어내는 가용 에너지의 양 즉, 에너지효율은 약 50%로 석탄을 태워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의 8%와 비교할 때 6배나 높은 효율이다.

 

. 미토콘드리아 (Mitochondria)

 

한 개의 세포 내에는 미토콘드리아가 1000 ~ 2000 개가 있는데, 세포내의 12-25%의 용적을 차지한다. 심장세포같이 항상성 운동을 하는 경우는 많고, 운동이 적은 구조는 적게 있다. 세포 내에서 미토콘드리아의 신경전달 속도는 시속 200 마일의 운동 상태에 있다. 이 기관의 숫자는 일정 수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 조정이 되고, 수명도 세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반감기가 10일 정도로 짧다.

 

세포의 수명은 그 종류에 따라 다양한데 수십 일에서 신경세포같이 영생하는 세포도 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명령에 따라서 하시라도 조정 당하는 불안한 운명에 있으면서 또한 역으로 세포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세포의 자멸프로그램(apoptosis)을 여기에서 조정한다. 세포핵 유전자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미토콘드리아 자체의 유전자를 따로 갖고 있으면서 전체 세포에까지 영향을 준다.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은 에너지 생산 기능, 칼슘의 생체항상성 유지기능, 면역기능 등을 꼽을 수 있다. 미토콘드리아 내막의 기능은 에너지의 생산이다. 뇌세포의 경우는 포도당으로부터 ATP(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데, 만약 산소가 충분한 상황에서는 글루코스(포도당) 한 분자에서 ATP 38개 만들어 내는데, 산소가 없게 되면 겨우 2개를 만들게 된다.

 

칼슘의 작용으로 혈액 전해질의 균형이 PH 7.35 - 7.45에서 유지되는데, 미토콘드리아가 이 칼슘의 생체항상성을 유지한다. 인체는 자체의 면역력을 위하여, 계획적인 죽음의 기전 안에 체내의 세포 중, 어느 세포가 정상의 기능을 벗어나면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 세포를 죽여 버리는 현상인 에이포토시스(Apoptosis)라는 기능도 갖고 있는데 이것 또한 미토콘드리아가 작용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  생명 기원물질과 나

 

 

    

사람의 세포핵에는 생화학적으로 DNA (Deoxy-nucleic acid)라고 부르는 23(46)의 염색체가 존재한다. 유전정보는 바로 이 염색체에 담겨 있다. 이 중 나선형의 DNA로 이루어진 23쌍의 염색체 세트에 담긴 유전정보를 총칭해서 게놈이라고 부른다. 인간게놈은 3~4만개의 유전자와 이를 구성하는 30억 개의 염기로 구성돼 있다. 즉 인간게놈에는 사람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네 가지 염기로 구성된 DNA는  긴 나선형의 물질이다. 세포내의 DNA를 추출하여 23쌍의 염색체를 연결하면 전체 길이가 약 2M 정도, 무게는 10조 분의 1mg 밖에 안 된다고 한다. 직경이 불과 0.000005m인 핵(1~수십μm) 속에 정교한 일정한 나선형의 모양을 갖춘 형태로 4천만 배나 긴 2m가 넣어져 있다.

 

RNA(Ribose Nucleic Acid)는 리보핵산(核酸)이라고도 한다.  RNA의 종류로는 rRNA(리보솜RNA), mRNA(전령RNA), tRNA(운반RNA) 세 가지가 있다.

 

DNA RNA는 모두뉴클레오티드라는 물질을 기본 단위로 구성된 사슬이다. 지금까지 가장 잘 밝혀진 RNA의 기능은정보전달자의 역할이다.  DNA는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정보인데, 직접적으로 단백질 생산에 관여하기보다는 RNA를 매개체로 사용한다. DNA에 있는 유전정보가 RNA에 인쇄되고, 이렇게 인쇄된 정보가 단백질을 만드는 주물 (鑄物)역할을 한다. 이처럼 정보전달자 역할을 하는 RNA를 메신저-RNA(mRNA)라고 부른다. 실제로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에는 또 다른 종류의 RNA(tRNA)가 작용하는데, 이것은 단백질합성에 필요한 아미노산을 데리고 오는도우미역할을 한다.

 

또 건물의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RNA(rRNA)도 있다. DNA로부터 정보를 받은 mRNA는 리보좀이라 불리는 거대한생명체공장에 들어가고, 생명체공장에서는 mRNA에 적혀있는 순서에 따라 tRNA가 데리고 오는 아미노산을 연결시켜 단백질을 만든다. rRNA는 이 공장이 제 모양을 갖추는 데 필요한 골조 역할을 한다.  RNA DNA의 복제과정에도 필요하다. 조그만 RNA 조각이 DNA에 달라붙어야 DNA가 제대로 복제될 수 있다.

 

RNA는 효소로서도 작용한다. 효소로 작용하는 RNA를 리보자임(ribozyme)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RNA(Ribonucleic acid)와 효소(enZyme)의 합성어이다. 리보자임은 RNA의 특정 서열을 인지하여 그 부위를 자를 수도 있고 이어 붙일 수도 있다. 그래서 리보자임은분자 가위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생명 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를 약 4만개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전자는 게놈을 이루는 DNA의 약 3%에도 이르지 못하며, 나머지 부분은 쓸모 없는 것도 있지만, 단백질을 만들지 않고 RNA만을 만드는 새로운 유전자 등도 발견되고 있다.

 

생명의 기원을 과학적으로 추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억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가정하는 것도 힘들고, 그 가정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슈 중의 하나는 생명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시작물질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단백질. DNA들을 핵심적인 기원물질로 생각해왔다. 그러나 RNA의 다양한 기능이 밝혀짐에 따라 RNA DNA나 단백질보다 수 억년 앞선 물질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RNA DNA의 탄생과정의 추정은 이렇다.

 

45억년 전쯤 지구가 생겨났고, 다이내믹한 지구 활동으로 3억년 후 각종 유기물질이 생겨났다. 이러한 유기물질들 간의 반응으로 다시 뉴클레오티드가 생겨나고, 이 뉴클레오티드들이 연결돼 RNA가 생겨났다. 그것이 약 40억년 전쯤으로 추정된다. 이 중 우연히 몇 개의 RNA가 자기 복제를 함으로써 이른바 ‘RNA 세계가 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38억년 전쯤의 일로 추정된다. RNA들 중 일부는 뉴클레오티드를 계속 연결시켜 몸집을 불리며 다른 기능을 계속 획득한다. 예를 들어 단백질을 합성할 수 있는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그러나 RNA는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명이 짧은 것이 흠이었다. 이때 RNA와 비슷하지만 보다 안정적인 구조를 지닌 DNA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오늘날 생명체의 핵심을 이루는 DNA와 단백질의 세계가 시작됐다. 지금부터 약 36억년 전의 일이다.

 

영국의 프레드릭 호일이라는 천문학자는 이 지구상에 이렇게 오묘한 생명체가 우연히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을 보잉 747 비행기 한대를 완전히 분해시켜 사막에 흩어놓을 때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쳐 분해되어 있던 부속품이 저절로 조립되어 날아갈 수 있는 상태로 될 확률로 설명하면서신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고백했다.

 

 

 

나는 누구인가?

■  생명과 정신 그리고 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많은 현상 가운데에는 생명현상이라 불릴 독특한 현상과 이러한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하는 현상이 있다. 의식은 그것의 주체가 되어보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의식과 물리적 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생명현상이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난다는 증거는 없다. 의식을 담당하는 기구인 중추신경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 것인가? 의식 주체(자유의지)도 실은 물리적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내 몸을 움직인다고 할 때에는 이미 내 몸이 이를 움직여낼 물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지, 내 의지가 물질에 종속된다는 말과는 다르다. 물질적 구도에 지나지 않는 우리 중추신경계 안에서 ''라고 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현재로서는, 물리학으로 해명해낼 수 없는 커다란 신비며 우리 생명이 지닌 매우 놀라운 특성이다.

 

주체적 삶이 내포하는 ''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의 이른바 의식이라는 것이 신체, 특히 그 중추신경계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물리적 기구의 주체적 양상을 가진다. 의식의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라고 생각하는 주체의 내용이 이러한 물리적 기구와 일치하는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라는 것이 '내 몸' 곧 의식을 일으키는 내 신체를 지칭한다. ''라는 내용 속에는 신체로서의 내 몸과 함께 인격체로서의 '' 와 그리고 한 ''의 주체로서의 ''가 어우러져 있다. 주체적 측면에서의 생명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개체를 ''로 의식하게 되지만, 자신이 지닌 생명의 모습을 객체적으로 파악해나가면서 자신이 곧 생명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인간의 의식 능력은 인간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정도로 진화되었다.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구성물이다. 인간은 현재 자신의 의식에 만족해 하지 않고, 아주 가까이 있는 다른 형태의 의식을 추구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다른 형태의 의식을 찾아 흔히 커피 담배 음주처럼 인위적인 무엇을 즐기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의식을 통해 그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있으며, 일상적 의식은 자동화되어 있어 굳이 우리가 의식을 의식하지 않아도 항상 우리를 지배하며 우리의 생존을 돕고 있다. 의식적 기능은 물리적 기능이나 화학적 기능과는 다른 차원의 기능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생명이 있는 것과 생명이 없는 것으로 구별 할 수도 있다. 물리.화학적 반응은 하면서도 의식적 반응은 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자연 지능인 생물체의 지능은 중층적 반응을 하는 중층적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중층적 사고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인간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고의 과정은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분석한 형상인, 질료인, 목적인, 동력인이라는 네 가지 원인조건이 모두 갖추어야 한다. 모든 생명은 의식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의식기능은 신경기능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식의 진화 과정은 너무나 큰 정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이를 테면, 인간의 의식과 식물의 의식을 같은 차원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의식은 생명현상이 토대가 되어 나타난 것이고, 생명체와 더불어 진화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생명체로서의 반응을 하지만 더 높은 수준의 의식적 반응을 하지 못하는식물인간이나 인공 생명의 경우와 구분된다. 의식 진화도 높은 수준의 의식은 식물적 의식이나 동물적 의식과 같은 의식 수준을 바탕으로 해서만 된다.

 

자아와 관념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

 

생명체의 몸은 하나의 세포로부터 시작하여 성장해 간다. 다양한 세포들과 다양한 기관들을 만들어 가면서 성장한다. 성장하고 변화해 가면서도 하나의 몸으로 그 구조와 기능을 유지해 간다. 말하자면 신체적 자아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추구하고 섭취한다. 몸의 이러한 자아 기능은 모든 생명체에게 필요한 의식 기능이다. 신체적 자아 기능 또는 본능적 자아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관념적 자아와 구분 된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배 고프다라는 언어적인 표현에서의 주체가 되는 것이개념적 자아, 관념적 자아이다. 다른 동물들에게 이러한 관념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세계에서의 자아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자아 의식이 특이한 것은 그것이 관념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이라고 할 수 있다.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가상 현실의 세계이며 언어적으로 표현 될 수 있는 가상 현실의 세계이다. 언어적으로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객관화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일반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의 세계이지만 객관적 사회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가상 현실의 관념세계를 갖게 됨으로서 우리 인간은 비로소나의 생각”, “나의 세계그리고나의 마음을 말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가상 현실의 세계는 마음대로 조작 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관적 세계, 자율적 세계, 자기만의 세계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 세계의 주인이 마음으로서의 자아이므로 실제 현실에서는 속하지 않는 초월적 존재로 인식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상현실의 관념 세계가 몸과 마음의 이원론을 생각하게 하며 관념적 초월성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자주적이고, 자율적이고, 사변적이고, 창조적일 수 있는 것은 가상 현실로서의 관념적 세계 때문이다. 개념적 자아 또는 관념적 자아는 인간 특유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체적 자아나 본능적 자아를 토대로 해서만 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아의 기능이나 자아의 의식이 하등 생물로부터 우리 인간에게까지 진화해 온 것이다.

 

정신이론에서의 질문들은 줄을 잇는다. 정신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정신적 작업을 할 때 정신은 어떻게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는가? 물질, 신체기관, 물질적 조건 등과 정신과의 연관성은 어떠하며, 하나의 정신과 또 다른 정신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정신은 인간과 동물의 공통적 소유물인가? ……

 

정신이란, 육체나 물질에 대립되는 영혼이나 마음으로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이나 그런 작용이다. 철학적으로는 우주의 근원을 이루는 비물질적 실재를 뜻하기도 한다. 대다수의 종교는 육체에 대립되는 정령. 신령. 성령과 같은 형식의 정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 정신은 관습적으로 육체나 물질에 대립하는 영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심리학에서의 정신은 마음의 작용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며, 프로이트는 정신의 작용을 리비도, 자아, 초자아 등으로 분석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 이후 서양 철학에서 정신은 형이상학의 주된 주제였다. 서양 철학에서 정신은 종종 신과 같은 성질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인도 철학에서 정신은 생명의 본질로 다루었으며, 힌두교의 아트만은 육체 보다는 정신을 우위에 둔 사상이며, 불교에서 정신은 더럽혀질 수도 깨끗해질 수도 없고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존재로 여겼다.

 

 

 

 

나는 누구인가?

■  몸의 구조로 보는 나

 

 

     나의 몸을 속된 표현으로 폄하하며 생각할 수도 있다. 똥 자루며 오줌 통, 더럽고 추한 것들로 한 가득 담겨진 채 꿈틀대는 오물 통, 가운데 다리나 때때로 휘두르게 되는 동물, 키 168 cm, 체중 60 kg의 신체구조를 가진 동양인, 중년후반의 못생긴 성인 남자 …… 그 성인 남자란 어떤 구조인가?

 

성인의 뇌는 1,000억 개 신경세포와 1,000조개의 신경세포 접합부를 가지고 있어서 뇌 속의 상호 연결은 사실상 한계가 없다. 근육의 수는 650개이고 뼈는 206개인데 관절은 100개 이상이며 혈관의 길이는 120,000Km로 지구를 3바퀴 감을 수 있는 길이다.

 

남성의 고환은 매일 한국 인구의 10배에 달하는 정자를 만들어 낸다. 70Kg 체중인 사람의 피는 약 5.2리터이다. 적혈구는 골수에서 매초 마다 20,000개씩 생성되는데, 적혈구의 수명은 120-130일 정도이다. 이 골수는 평생 동안 약 반 톤 가량의 적혈구를 생산한다.

 

피부의 넓이는 1.9평방미터 이며, 피부는 끊임없이 벗겨지고, 4주마다 완전히 새 피부로 바뀐다. 한 사람이 평생 동안 벗어버리는 피부의 무게는 48Kg정도로 1000번 정도를 새로 갈아 입는다. 1평방 인치(6.3 cm2)의 피부에는 2천만 개의 세포와 1300개의 근육조직, 78개의 신경 조직, 650개의 땀구멍, 100개의 피지선, 65개의 털, 20개의 혈관, 178개의 열 감지기와 13개의 냉 감지기가 있다. 성인의 머리카락 숫자는 10만개, 수염은 3만개, 잔털은 30만개이다

 

우리 인간의 몸에는 100조개의 세포 조직이 있고, 25조개의 적혈구와 250억 개의 백혈구가 있다. 심장은 1분에 4.7리터의 피를 퍼내고 혀에는 9,000개 이상의 미각세포가 있다. 성인 남자 평균 뇌세포 수는 228억 개이다.

 

장기의 무게는 뇌(1.4Kg) 심장(130g) (1,4Kg) 지라(198g) 고환2(25g) 이자(82g) (9Kg)  폐양쪽(900g) 췌장(85g) 신장2(290g) 방광(1.1Kg)

 

일생 동안 심장 박동(27억 번) 음식물 섭취(50) 눈 깜빡임(4억 회) 머리카락 성장(563Km) 손톱성장(한 손가락 3.7m)

      

몸의 구성 성분은 물(61,8%) 단백질(16,6%) 지방(14.9%) 질소(3,3%) 칼슘(1,8%) (1,2%) 칼륨(0,24%) 염분(0,17%) 마그네슘(0,041%) 철분(0,0075%) 아연(0,0028%) 구리(0,00015%)

 

길이로 본 인체는 입~식도(45cm) 위장(27cm) 소장(6m) 대장(1,5m) 십이지장(23cm) ~항문 총 길이(8.5m)

 

세 포수는 100조 개, 분자 수는 4*10^28 개 이다.  

 

신경세포는 1초에 1,000번 이상 방전한다. 그 방전은 신경세포 내의 작은 발전소와 미세한 펌프 들에 의해 내뿜어진다. 사람은 36,5도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정온 동물이다.  

 

 

 

 

나는 누구인가?

■  "자기(自己) 와 비자기" 그리고 나

 

 

    "안"이면서 "바깥"인 것은 면역계를 만들어 내고, 소화관이라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내부세계는 인간에게 내장의 부속물에 해당된다. 한쪽에서는 보통 ‘자기’로 처리되던 단백질이 절단되면 숨겨져 있던 정보가 나타나 그것이 ‘비자기’로 인식된다. ‘자기’와 ‘비자기’는 미리 선험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면역학은 원래의 ‘자기’를 인식하는 기구가 ‘자기’의 ‘비자기’화를 감시하는 것이다. ‘비자기’는 언제나 ‘자기’라는 맥락 위에서 인식된다. 자기를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는 면역시스템. 그리고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자기 이외의 비자기에 대해 무섭도록 철저히 거부하고 배제하며 가끔은 자기를 붕괴하면서까지 비자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자기(自己)란 무엇인가?

인간의 소화기관, 즉 식도, 위, 장. 항문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부분에 굉장히 많은 면역세포들이 몰려있으며 외부의 물질과 계속적인 접촉이 일어난다. 이것은 곧 "안"이 아니라 "바깥"이며 '관(管)으로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면역은 자기와 비자기를 비교해 비자기를 제거하는 실세 기관이다. 면역계는 구성요소가 많고, 특히 기관, 면역 세포, 사이프 파인으로 나뉜다. 면역기관에는 골수라는 조직이 있는데 이는 모든 면역세포들의 모세포 존재이며, 흉선이라고 하는 기관은 T세포가 분화 발생하는 장소로서 1차 면역기관이라 한다.

 

흉선은 면역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이 흉선에서 T세포라는 면역계의 핵심세포가 만들어 지며 자기 안으로 들어오는 비자기를 철저히 배제해 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기존의 흉선을 제거하고 다른 개체의 흉선을 이식하자 이식된 흉선은 자기의 뇌를 비자기로 인식하고 공격했다. 즉 정신적 자기가 육체적 자기로부터 거부당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즉 면역계에서 자기를 인식하는 것은 뇌가 아닌 흉선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自己)란 뇌인가? 흉선인가?

 

우리 몸에서 외부세계와 반응 하는 것.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폐, 장 부분 등 이물질이 들어오면 면역 장내에서 림프절이 중요하다. 피부가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것이다.

 

사이프판은 요즘 50개 정도로 알려졌다. 인터루킨 4. 5. 6 번은 항체를 만드는 것들로 알아두면 좋다. 인터페론, 암 치료할 때 쓰이는 사이프판의 일종이다.

 

면역계는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시스템'이다. 비자기 인식보다는 자기인식이 면역계의 본질적인 면으로서, 자기를 인식하려면 자기 표시가 돼 있어야 한다고 했다. 자기표시는 natch 1 자기세포가 된다. 4개의 단백질로 되며 그 중의 한 단백질 세포의 막으로서. 이것 때문에 장기이식을 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단백질을 만드는 것들을 MH라 부르고, 사람은 MHC의 유전자로 이뤄진다. 면역계가 자기세포와 비자기세포를 비교한다.  단백질의 일부가 MH+1에 실리고,  바이러스부터 운영된 표면에 노출되면 면역계에서 이물질의 등장을 알려주는 형식이다.

 

마이크로파지는 일종의 아메바이며, 전문적 항원제시세포 등 일반세포들은 수동적이다. 바이러스 단백질이 우연히 실리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찾아 다니면서 소식을 전하면서 마이크로 파지 같은, 이물질 들어오면 비자기 이물질들은 정상세포 이물질 등과 함께 MH 단백질에 실려서 면역계에 알려준다.  이것을 T세포가 인식하고, 전문적인 항원인 MH+2가  똑같이 4개의 단백질로 결합한다.

 

MH는 '자기'를 표시자는 단백질이다. 따라서 '비자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MH로 들어가서 비자기를 인식하고, 해당 세포들을 MH에 반드시 실어야 한다. 알레르기 같은 경우,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유전적인 요인과 환경적인 요인 등이 크다.  어떤 사람은 MH 단백질에 이물질을 실을 수 있다. 꽃가루에 대한 이물질 등. 비자기는 언제나 자기 인식과 관련돼 있고, 면역계는 원래 이물질을 제거하는 시스템이다. 외부에서 관찰하는 시스템. 외부세계를 감시하는 시스템 등이다. 예를 들어 암세포 같은 경우 세포들이 결제 시스템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면역계가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먼저 '자기'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비자기'를 나머지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또한 '비자기'로 먼저 규정하고. 나머지는 '자기'로 인식하는 방법이다.

 

흉선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기' 성분에 의해 관용적이 되는가?

'자기'성분과 반응하는 T세포는 죽는다. 일단 흉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 면역체는 이물세포가 들어오면 많은 분열을 한다. 반응 할 수 있는 T세포는 다른 흉선 세포들이 있는 세포들과 만나게 된다.

 

자기 표시에는 인식을 해야 하는 데, 자기 MH와 반응하기 위해 T세포만 표시해 놓고, 자살 프로그램을 작동 시켜 '자기'와 반응하는 세포들을 선택한다. 이런 세포들은 '자기' 단백질은 단백질 표면에 발현돼 있다. 반응을 해서 '자기' 성분들과 반응하는 세포들은 다 죽는다.  결국 다양한 비자기 세포들만 인식할 수 있는 T세포만 살아 남는다.

 

자기성분과 반응할 수 있는 T세포들은 제거 된다. 선별이 일어나는 '비자기 '성분과 반응 할 수 있는 T세포를 만든다. 루마티즘, 천식 등은 면역계가 '자기' 세포나 '자기'성분과 반응해 생기는 병이다. 자기면역 질환들은 어떤 세포들과도 반응 할 수 있다. 특수한 조직과 온 몸 전체에 대해서 반응 할 수 있는 자기면역 질환이 적혈구를 분열해 갑상선. 근육. 근육이 움직인다.

 

철학자 한 분은 "자기의 인식은 소극적인 자기인식에서 적극적인 자기인식으로 진화"된다로 면역계를 말했다. 소극적 자기인식, '비자기'에서 규정해 적극적인 '자기' 인식하는 방법으로 비과학적인 면역을 면역계가 '자기'를 규정하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사람의 면역계는 노화가 되면 늙게 되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능력이 약해지는 것. 대표적인 현상으로 흉선 기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10대에는 흉선의 무게가 35g 정도 되는데 60대는 1/4인 7~8g이 된다. 이것은 흉선이 아예 없어지거나 지방만이 남은 것이다. 따라서 노인들의 면역계는 떨어진다. 그러나 그 숫자적으로는 젊어서 흉선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비슷하지만, 내용적으로 틀린다는 것 알아둬야 한다. 항체의 레벨도 노인이 되면 높아지는데, 이렇게 되면 면역기능이 떨어지고, 다양한 비자기 인식도 떨어진다. 따라서 나이가 들면 병에 자주 걸리게 되는 것이다.

                                                                 (“면역의 의미론” 강론 중에서)

 

 

 

  

나는 누구인가?

■  십억의 배수와 나

 

 

     숫자로 비교하여 보는 나의 존재는 어느 면에서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미미한 존재에 불과 하다. 십억 배, 십억 분의 1 이라는 숫자를 잣대로 하여 그 오묘한 크기들을 가늠하여 본다.

 

십억1,000,000,000 (=10^9)이며, 십억 분의 11/1,000,000,000(=10^-9)이라고도 한다. 십억은 그리스어의 거대함을 뜻하는 gigas에서 온 giga로 표기되며, 나노라는 말은 난쟁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나노스'(nanos)에서 유래했는데 나노미터(nm)는 십억 분의 1m(=1/1,000,000,000m, 10^-9 m, 1 nm)를 가리킨다. 1nm는 머리카락 굵기의 1/100,000 정도의 크기로, 보통 원자 3~4개가 들어간다.

 

십억의 배수란 얼만한 비율인지를 따져 보자. 지구의 지름은 12,756.28 km (=12,756,280,000 mm)이며, 와이셔츠 단추의 지름은 직경이 12mm이다. , 십억 배의 비율이란 지구와 와이셔츠 단추 크기의 비율 정도라고 보면 된다. 나노미터(nm)의 크기란 1m를 지구와 단추 크기 비율인 십억 분의 1로 축소한 크기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우주의 나이나 크기 등을 가늠하노라면 십억이라는 크기가 얼마나 크고 광활한 것인지  짐작된다. 우주의 나이 137억년(13.7 * 10^9 ), 지구의 나이 45억년(4.5 * 10^9 ), 우주의 크기(4.3 * 10^26 m),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150 * 10^9 m), 우주의 별의 수(1 * 10^22 ) ......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나 분자의 갯수나, 물질의 근간이 되는 원자나 분자의 크기를 계수화 한다면 우주를 다룰 때 쓰이는 숫자 만큼이나 크거나, 또는 상대적으로 그만큼 미세하기도 하다. 내 몸의 미토콘드리아 수(1 * 10^17 ), 내 몸의 분자 수(4 * 10^28 ), 수소원자(0.1 * 10^-9 m), 물 분자(0.275 * 10^-9 m) ……

 

이처럼, 내 몸의 작은 구성 요소들의 숫자나, 우주를 가름 할 수 있는 숫자들의 배율은 어느 것이 더하다거나 덜하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다시 말해서 내가 자아의식이라는 형태로 이끌고 있는 나의 육체도 하나의 거대한 우주와 다름없으며 자아라는 틀을 통해 보는 인간, 동식물, 생명체, 다양한 사물들 …… 뭇 상대방들 각각은 또 다른 각각의 우주일 수도 있다. 그래서 조선 후기의 한의학자 이제마(李濟馬, 1837 ~1900)가 말한 몸은 곧 소우주라 함은 선각자의 의미 있는 발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작은 미지세계의 크기를 가늠하여 본다

. 수소원자 0.1 * 10^-9 m, =0.1 nm, 1Å 옹스트롱)). 탄소원자 0.1 * 10^-9 m ( =0.1 nm (1). 물 분자 0.275 * 10^-9 m ( =0.275 nm (2.7). 벤젠고리 0.5 * 10^-9 m ( = 0.5 nm (5)

. DNA    10 * 10^-9 m ( =10 nm)

. 염색체 기본구조 100 * 10^-9 m ( =100 nm). 박테리아 1000 * 10^-9 m ( =1,000 nm (=1μm)   . 담배연기 3000 * 10^-9 m ( =3,000 nm (3μm)   . 적혈구   8000 * 10^-9 m ( =8,000 nm (8μm)   . 세포    10000 * 10^-9 m ( =10,000 nm (10μm)   . 머리카락 100000 * 10^-9 m ( =십만 nm (100μm)

 

큰 세상의 크기들을 숫자로 가늠하여 본다.

   . 우주의 나이 13.7 * 10^9 (137억년) . 우주의 크기 47.0 * 10^9 광년 (470억 광년, 광속 2.908×10^8m/sec)   우주의 크기를 미터로 환산하면 4.3 * 10^26 m (광년= 9.17 * 10^15 m, 빛이 1년간 가는 거리).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 150 * 10^9 m (15천만 km). 지구의 지름 0.0127 * 10^9 m (12,756 km). 우주의 별의 수  1 * 10^22 (천억 개의 은하와 각 은하마다 약 천억 개의 별)

 

. 내 몸의 세포 수  1 * 10^14 (100조 개). 내 몸의 미토콘드리아 수 1 * 10^17 (세포당 천 개로 환산)   . 내 몸의 분자 수   4 * 10^28

 

이러한 기준에서 생각 할 때, 산업활동에서 거론되는 숫자들이 얼마나 큰 숫자들인지를 알 수 있다. 

 . 삼성전자는 세계 반도체 업체 가운데 처음으로 20나노급 공정 32기가비트(Gb) 낸드플래시를

지난 주말부터 양산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2010.4.20 기사)

       . 20 나노급    20 * 10^-9 m       . 32 기가비트  32 * 10^9 비트 . 삼성전자의 년간 매출액        . 년간 매출목표  1.3 * 10^14 (130조원, 2010년 매출목표) . 년간 투자목표  8.5 * 10^12 (85천억 원, 내년 투자목표)

 

 . 서울 강남 중형 아파트 가격 1 * 10^9 (십억 원). 세계인구    6.8 * 10^9 (68억 명). 중국인구    1.3 * 10^9 (13억 명)

 

 

 

 

나는 누구인가?

■  물질의 근본과 나

 

 

     몸의 근본이라고 여겨지는 피와 장기 근육과 같은 각종 유기물질, 수분이며 칼슘과 같은 각종 무기물질, 그 구성 요소는 탄소 산소 수소 등과 같은 원자라고 할 수 있다. 산과 들, 동식물, 생물과 광물질, 하늘 별 그리고 우주까지도 우리가 말하는 물질세계는 나의 몸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기본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세상의 기본물질이라고 생각되는 원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며, 여전히 풀리지 못한 소립자 물리학에서의 과제들을 생각해 본다. 원자는 아르케니 우어스토프라고 하는 세상의 근본은 아니더라도, 현대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규명 된 "나"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기본물질이 될것이다.

 

입자를 구성하는 소립자 물리학에 따르면 원자는  + 전하를 지닌 양성자, 전하를 띠지 않는 중성자, 그리고 - 전하를 지닌 전자로서 구성된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핵자라 하고, 이 핵자는 쿼크와 크기를 거의 차지하지 않는 렙톤이라는 소립자로 형성된다. 원자의 크기는 10^-10m, 핵자는 10^-14m, 핵자로 뭉친 핵의 주변을 돌고 있는 전자는 10^-19m 정도며, 쿼크의 크기도 전자와 비슷하다. 만약 핵자의 크기가 10cm라고 가정하면 전자는 0.1mm보다 작게 되고, 이렇게 작은 전자가 핵을 중심으로 지름 10km의 원을 그리면서 도는 형상이다. 그래서 원자의 99.99%는 빈 공간이라고 한다.

 

소립자 물리학에서 빛(광자)이나 전자 등의 입자는 점이 아니라, 고무줄 같은 끈(string)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끈이론의 출발점이다.  (고무줄)의 길이는 약 10^-33 ㎝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고무줄 모양의 입자는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다. 바이올린의 줄을 퉁기면, 진동수에 따라 다양한 소리가 난다. 줄에서 나오는 높은 소리는 높은 진동수에서 나오고, 낮은 소리는 낮은 진동수에서 나오며, 소리의 맵시도 진동의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끈의 진동방식에 따라 각각의 입자가 분류된다고 끈이론은 말한다.

 

끈 이론은 우리에게 친숙한 4차원의 시공간에서는 성립하지 않으며, 끈 이론이 성립하려면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끈이론의 가설들 중 하나는, 우주의 창조 사건 후 10 -43 제곱 초가 될 때 차원이 갈라졌고, 이 순간에, 10차원의 팽창하는 우주가 둘로 갈라져 6차원의 세계와 우리가 알고 있는 4차원의 세계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미지의 6차원 세계가 앞으로 설명되어야만 할 과제라고 한다.

 

원자나 우주를 구성하는 물리학 소립자 사이의 상호간에 작용하는 자연의 네 가지 힘이 있다. 강력, 약력, 전자기력, 중력이다. 과학자들은 이 네 가지 힘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고 대통일 이론 등을 발전시켜왔지만 아직까지는 전자기력과 약력을 합치는 데까지만 성공한 상태라고 한다. 초끈이론이 현재로서는 해답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는 추론이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들이 흩어지지 아니하고 단단하게 뭉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질들이 모이면 왜 중력이 작용할까? 그리고 지구나 별들의 전자기장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자연계에는 물질 내에 이러한 힘을 작용하게 하는 게이지 입자라고 하는 입자가 있다는 가설이다. 글루온, 포톤, 보존, 중력자라는 입자들이 일정한 거리 내에서 서로 상호작용을 하여 밀거나 당기거나 전자기장을 형성한다는 이론이다. 작용하는 상대적인 거리(1 10^-18, 무한대)나 상대적인 힘(110^40)은 아주 작거나 아니면 아주 크다.

 

자연계 4대 힘이라고도 불리는 기본적인 상호작용(Fundamental interaction, 基本相互作用)                        상대적인 힘   영향범위(m)    힘을 전달하는 Gauge입자       강한 상호작용      10^40         10^-15       Gluon       전자 상호작용      10^38         무한대        광자(Photon)       약한 상호작용      10^15         10^-18        Boson (W.Z.)       중력 상호작용      10^0          무한대         중력자

 

 

 

 

나는 누구인가?

■  우주 역사 속에서의 나

 

 

    현대과학의 물리학적 추론에 의하면, 무엇인지 모를 원인으로부터 빅뱅이 발생하여 우주가 탄생했다고 한다. 우주 생성으로부터 137억년이 경과 한(우주 나이 137억년) 지금도 광속의 3.5배로 팽창 중에 있는 우주 속에 내가 살고 있는 것이다.

 

반경 465억 광년 크기의 우주(관측 가능한 우주의 직경, 930억 광년)에는 천억(10^11) 개의 은하가 있고, 각각의 은하에는 약 천억(10^11)개씩의 별들이 존재한다 (, 우주의 별들은 10^22 개 정도). 그 중에 우리 은하계는 처녀자리 은하단의 국부 은하단에 존재하며, 직경 10만 광년(=0.001억 광년) 크기에 별 2천억 개 (2*10^11 )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 은하계는 안드로메다 은하와 매시 50 km(초속 139 km)의 속도로 접근 중에 있으며 이는 30억년 후에는 서로 충돌 하는 거리이다. 지구 탄생의 역사가 45억년임을 감안하면 지구는 75억년의 나이로 소멸되리라는 추정이다.

 

지구가 속한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의 오리온 궁수/용골 완부에 위치하며, 중심부에서 3만 광년(=0.0003억 광년) 부근에 있다. 태양계의 처녀자리 은하단 공전 기간은 23천만년으로 태양계 나이로 보면 지금까지 25번 공전 한 꼴이 된다. 그 공전속도는 초속 217 km (1 광년당 1400년 걸리는 속도), 태양계의 우리은하 공전 속도는 50 km/s 이다. 

 

이 때, 초속 217 km나, 50 km (= 초속 5만 m)란 얼마나 빠른 속도일까?  

 

북태평양 서부나 남중국해에서 발생하는 열대성저기압인 태풍(颱風 typhoon)초당 최대풍속이 17 m/s 이상인 것을 말 한다.  1959.9.11. 발생하여 15~18일에 한국 중부와 남부를 강타하여 사망.실종자가 무려 849명에 달했던 제14호 태풍 사라호는 중심 최저기압이 905mb으로 중심 최대풍속이 85 m/s 에 달 했었다. 그러나 태양계의 공전속도와는 비교가 안될만큼 작은 것이다. 각각의 공전속도는 사라호 최대풍속의 2,552 배와 588 배에 이른다.

 

 

 

. 공전속도의 비교

지구 자전속도: 1,609km/h, 0.447km/s

   지구의 태양 공전속도:  107,160km/h, 29.77km/s     태양계의 우리은하 공전속도: 180,000 km/h, 50km/s    태양계의 처녀자리 은하단 공전 속도:  792,000km/h, 220 km/s    태양계 행성의 평균공전 속도      수성: 47.36 km/s      금성: 35.02 km/s      지구: 29.78 km/s

 

이처럼, 달은 지구 주위를 돌고, 지구나 태양계 행성들도 자전과 함께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계나 우리 은하계가 속한 은하단도 모두들 공전하고 있다.

 

도는 것은 물질에서나 생명체에서도 같은 이치다. 물리학에서 추정하는 물질의 기본입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의 핵을 중심으로 음의 전하를 띈 전자 구름이 돌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나를 비롯한 모든 생체들 또한 물 공기 영양 에너지원 등이 혈액을 통한 순환계를 이루며 몸 속을 돌고 있다. 물론, 소립자 입자물리학에서 핵을 둘러싼 전자의 회전이나 생체 순환계의 회전의 개념은 은하나 행성들 간의 자전 공전과는 다른 개념의 회전으로 볼 수도 있다.

 

태엽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도 돌아가는 가운데 각각의 서로 다른 의미의 시간을 가리킨다. 초침이 가는 한 땀이나 일 회전은 분침이나 시침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시간의 개념이다. 그러나 초침도 분침이나 시침과 마찬가지로 흐르는 시간을 나타내고 있다.

 

소립자 물질 내의 회전이나 생체 내의 순환도 회전하는 가운데 존재 하여 온 우주의 역사와 흡사한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다. 역설적으로 "나"를 구성하는 각종 유기물 무기물도 소립자들이 모여 이루어 진, 결국 우주의 한 토막이요, 먹고 숨쉬고 배설하며 순환계를 이루고 살아가는 "나" 또한 우주의 한 토막이리라는 상상을 품어 보는 것이다. 

 

우주의 역사가 이어지듯 적어도 지금, "나로서 자각되는 나"도 우주의 역사를 이루고 있으리라고......

비록 초침의 한 땀보다도 훨씬 더 못 미치는 아주 짧은 역사라고 할지라도 ......

 

“나”를 느끼며, 내가 서 있는 이 우주의 근간이, 이렇듯 돌며 구르는 가운데 있음을 자각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겠는가? 덩달아 무엇인가를 굴리는 흉내를 낼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무엇인지 굴리고 있다.  

 

험한 세상이라고 체념 한 채, 때로는 힘과 권력 앞에 납작 엎드려 눈동자나 굴리고 머리 속만 굴리기도 한다. 돈 앞에서도 그렇고, 올려 봐서는 아니 될 듯한 뭇 욕망 앞에서도 그렇다. 명예 영광 사랑 건강 생명 ……

때로는 주색잡기에 끌려 술잔 굴리기며 궁둥짝을 굴리기도 하고, 크고 작은 공 굴리기며 혓바닥 굴리기에 정신 팔기도 한다. 우리가 굴리고 구르는 데에 재미를 느끼고 정신 파는 것을 우주의 이치에까지 비약하여 본다면 너무나도 허황된 생각이려니 ......

 

 

 

 

 

나는 누구인가?

■  우리는 우주의 고아인가?

 

 

     세계적인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는 최근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인정 했다고 한다. 호킹 박사는 우주에 1000억 개의 은하계가 존재하는 만큼 다른 생명체도 존재할 것이며, 광활한 공간에 진화한 생명체가 지구에만 존재할 가능성은 낮으며, 숫자 자체만 놓고 판단하더라도 외계 생명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이라고 했다.

 

생명체의 거주 가능성에 대한 고려 사항으로는 생각해야 할 기본적인 조건 들로서, 스펙트럼 형, 안정된 거주 가능지역, 작은 항성의 변광성, 높은 금속 함유율 등이 적절한 항성계인 지 여부와 질량, 궤도와 회전, 지구화학 등의 혹성 특성이 적합해야만 된다. 혹성에서 생명체의 거주 가능성이란, 어느 천체에서 생명을 탄생시키고, 그 발생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한 지표를 말한다.

 

생명에 있어서 절대 중요한 조건은 에너지원뿐 아니라, 지구물리학 지구화학 천체 물리학 등의 여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보나, 이는 지구 상태에서의 추측일 뿐일 수도 있다. 융해된 금속이나 성간 가스, 은하계 외 공간에 퍼지는 자장 등 세포와 관계없는 물질, 장소를 기반으로 한 생명도 상상할 수 있다.

 

. 생명체의 거주 가능에 필요한 여건들

 

표면에 액체의 물을 가지는 항성 주위 이론상의 공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에너지 다음으로 생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물에 의존하는 종에 대한 편견일 수도 있고, 만약 물을 필요로 하지 않고 액상의 암모니아 등으로도 생명이 존재 할 수 있다면 기존과학의 관념은 다시 수정 되야 할 것이다.

 

항성의 스펙트럼은 빛을 내는 별의 온도를 나타내며, 이는 주계열 별의 질량과 연관 된다. 생명발전에 필요한 시간은 10억년 이상으로 스펙트럼이 4,000 K~7,000 K의 온도 범위여야 한다. 태양은 이 범위의 중간인 G2의 항성이다.

 

항성이 적당한 크기의 질량을 가져야만 광도나 속도가 생명에 적합하고, 생명에 악영향을 주는 거대 혹성이 영역 내에 없어야 한다. 모든 항성은 공통적으로 광도가 변하고 있지만 그 변동 광도가 급격한 변광성은 생명 탄생에 나쁠 것으로 예측되므로 항성의 변광성도 중요하다. 태양은 11년의 태양 주기에서 약 0.1% 정도만 변하여 지구 온도에 영향이 적어 매우 안정적이다.

 

어떤 항성도 그 대부분은 수소와 헬륨에서 만들어졌지만, 항성에 포함된 무거운 금속 양에는 큰 차이가 있다. 금속의 양이 적은 경우, 주위에 혹성 형성 가능성이 감소하고, 형성된 혹성이라도 질량이 낮아 생명에는 부적합 하다. 태양도 항성의 평균보다 약간 많은 금속을 포함하고 있다.

 

거주 가능성의 주된 가설은 지구형 혹성으로서 너무 큰 혹성은 그 중력이 방대하여 생명이 탄생할 가능성 희박하므로 지구와 비슷한 크기로, 주로 규산 암석으로 구성되고, 지표가 있어야 하므로 외 층은 수소나 헬륨 기체로 덮이지 않아야 한다.

 

질량이 적어 중력이 낮다면, 대기의 보관 유지가 곤란하고 대기를 구성하는 분자 탈출속도가 커져 우주 공간으로 쉽게 소실되고, 대기층이 엷으면 원시의 생화학에 필요한 물질 부족해진다. 지표는 단열 효과가 낮고 열 이동(heat transfer) 부족되며, 단파장 방사선이나 운석에 대한 보호 효과도 낮아질 뿐 아니라, 물이 액체인 조건의 온도 범위도 압력이 낮아질수록 저하된다. 용해 된 지구핵심이 열기관으로서 남는데 충분할 만큼 큼 혹성의 코어에서 원소의 방사성 붕괴는 혹성의 열원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큰 혹성 핵에는 대규모 철을 갖게 되어 혹성을 태양풍으로부터 이겨낼 수 있는 자장을 만들 수 있다. 자장이 없으면, 혹성의 대기는 벗겨져 와해되고, 생물은 이온화 된 입자를 뒤집어 쓰게 될 것이다.

 

혹성의 궤도와 회전도 완만해야만 온도 차가 적어 생명에 적합하다. 지구는 완전한 원형으로 이심율은 0.02에 불과하다. 혹성의 자전도 생명 진화에는 중요하다. 만약 적도 경사각이 적거나 전혀 없고, 황도가 수직인 상태이면, 사계는 전혀 일어나지 않고, 생명의 활동에 주된 자극은 없어질 것이며, 반대로 만약 혹성이 크게 기울면, 계절의 변화는 극단적인 것이 되고 생물의 진화는 보다 더 어려워질 것이다. 회전축 방향의 변화가 커서도 안 된다. 지구의 세차는 2 3 천년 주기로 발생하며, 지구의 달은 적도 경사각을 안정시켜 지구의 기후를 완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구의 생물 공동체 량의 96% 이상을 차지하는 탄소, 수소, 산소, 질소와 같은 지구화학물질도 중요하다. 아미노산 등은 운석이나 성간 물질로부터 발견되고 있다. 지구의 물과 탄소는 태양열로부터 멀리 떨어져 고체인 채 남아 있던 태양계의 외계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그 퇴적물에서 생명의 진화가 시동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4개의 "생명의 원소"는 거주 가능한 계()가 되려면 장기간 궤도를 돌고 있던 천체로부터 혹성에 기본이 되는 것들이 공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  지구 대기층에서 머무는 나

 

 

    내가 숨쉬고 있는 하늘 위의 구성성분들은 무엇일까? 날마다 숨쉬며 마시고 내 뱉는 공기는 얼만한 두께로서 존재할까? 눈으로 직접 보이는 하늘의 한계는 생각보다 그다지 멀지 못함을 알게 된다.

 

지표 부근 공기는 수증기를 제외한 건조공기 성분의 부피 백분율은 질소 산소 아르곤 등의 순이다.

    질소(N2)  78.084 %    산소(O2)  20.946 %    아르곤(Ar) 0.934 %    네온(Ne)  0.0018 %    헬륨(He) 0.000524 %    메탄(CH4)  0.0002 %    크립톤(Kr)  0.0001 %    수소(H2)   0.00005 %    산화질소(N2O) 0.00005 %    크세논(Xe) 0.000009 %

 

공기 중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기체로 수증기 오존 이산화탄소 이산화황 이산화질소 등이 있다.

부피 백분율의 변화 범위

     수증기(H2O)     0 ~ 7 %    

이산화탄소(CO2) 0.01~0.1 % (평균 0.032%)

     오존(O3)        0~0.01 %

     이산화황(SO2)   0~0.0001 %

     이산화질소(NO2) 0~0.000002 %

 

90 km 이상의 상공에서는 혼합작용보다 확산작용(擴散作用)이 더 많이 일어나며, 수소나 헬륨과 같은 가벼운 기체들이 보다 풍부해진다. 특히 오존은 지상에서 20∼50 km 높이에 다량 분포되어 있으며, 미량(微量)이지만 기상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이산화탄소와 오존을 제외하고 대략 80 km 까지는 조성의 기체가 일정하게 분포한다.

 

아주 높은 상공 (80 km 이상)은 공기의 상하운동이 거의 없어서 혼합작용이 감소되므로 공기분자 자체의 분자운동으로 성분기체 무게 차이 별로 위 아래로 분리된다. 인공위성 관측에 의하면 대기는 조성 별로 성층(成層)을 이룬다.

지상 120 km 층까지 주로 질소와 산소

120∼1,000 km 층은 산소1,000∼2,000 km 층은 헬륨

그 이상 1 km까지는 수소

 

이온층이라고도 불리는 전리층은 태양의 자외선에 의해 대기권 상층부가 심하게 요동해 대기 구성물질 원자와 분자가 자유 전자와 양이온으로 갈라지면서 형성된 약한 플라즈마 층을 가리킨다. 지구 전리층의 높이는 밤에는 420, 낮에는 800㎞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탐지된다.

 

 

. 지구 상공의 온도분포 (그래프 상의 대략의 온도 분포임)

 

500Km 이상  1700℃~

150Km        200

100Km       -100

50Km          0

15Km        -65

0km (대기층)  15

. 태양까지 거리 15천만Km (표면온도 6000℃)

. 달까지 거리         38만Km

 

 

 

나는 누구인가?

■  지구 지표면에 서 있는 나

 

 

     45억년 전으로 추정되는 지구 탄생 관련설로는 운석의 용융 및 분화"에 의한 원시지구의 핵과 맨틀 생성설, “운석의 충돌 가스방출설"에 의한 증기 대기의 생성설, “원시 혹성의 충돌설"에 의한 달의 분리 독립과 지구의 탄생설 등이 있다 지상에 있는 자연의 물체는 중력가속도 9.81 m/s^2 의 작용을 받고 있으며, 나도 지구라는 물체로부터 발생되는 중력의 작용을 받으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서있는 지구표면은 어떤 것으로 구성된 것일까? 그 구성 비율을 나타낸 것이 클라크 지수이다. 클라크 지수는 지구 최외각 층의 평균해수면 (해발고도 0) 인 지오이드 면부터 지하 약 16km까지의 깊이에 이르는 지각의 암석권(岩石圈), 해수(海水)를 포함한 수권(水圈) 그리고 지구를 둘러싼 대기권을 포함한 부분의 원소들의 중량비율이다. 중량 93.06%의 암석권, 6.91%의 수권 및 0.03%의 기권(氣圈)으로 구성된다.     1 산소 (49.5%)  2 규소 (25.7%)  3 알루미늄 (7.6%)  4 (4.7%)  5 칼슘 (3.4%)      6 나트륨 (2.6%)  7 칼륨 (2.4%)  8 마그네슘 (1.9%)  9 수소 (0.8%)  10 티탄 (0.5%)

 

   태양계와 지구의 주요 원소 비교, 중량비율

           (태양계/지구)

      H   (74.4 % / -  )

      He (23.7 % / -  )

O   (0.9 / 29.5%)

Mg (0.07 / 12.7%)

Si   (0.08 / 15.2%)

S    (0.05 / 1.9%)

Ca  (0.01 / 1.1%)

Fe   (0.1 / 34.6%)

Ni   (0.01 / 2.4%)

 

   지층의 구조

   0 ~ 100 km  상부맨틀(암석권)     ~ 250                  (암류권)     ~ 670        하부맨틀     ~ 2,900     외핵 (Fe)     ~ 5,100     내핵 (Fe+Ni)

     ~ 6,400

 

   지구의 층별 광물분포, 중량 %

 (상부맨틀(250)/지각/100km)   감람석   (56% /  2% / 47%)

휘석      (28% /  5% / 24%)

석류석   (14% /  -   / 12%)

사장석   (  -  / 41% / 7%)

정장석   (  -  / 20% / 4%)

석영      (  -  / 17% / 3%)

 

. 화석으로 보는 지질시대

 

지구 탄생에서 부터 내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의 과정을 어림 추정 할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가 지층의 화석으로 남은 과거의 흔적들을 살피는 것이다. 지각이 형성된 약 38억년 전부터 역사 시대가 시작된 1만 년 전까지를 지질시대라고 한다. 선캄브리아대( Cambria )는 약 38억년부터 57000 만년 전까지, 캄브리아기는그로부터 5억년 전까지, 고생대는 24500 만년 전까지, 중생대는 6100 만년 전까지, 신생대는 1 만년 전까지이다.

 

선캄브리아는 약 32억년 전으로 전체 지질시대의 약 85%를 차지한다. 35억년 전의 지층에서 원시 조류의 퇴적구조가 발견되었고, 박테리아( 32억년 전), 원시적인 다세포 생물(7억년 전), 말기에 해면류나 해파리 등의 하등동물(단세포동물)이 출현한다.

 

고생대는 기후가 온난하여 갑자기 많은 종의 생물이 출현하고 번성하였다. 초기에 대부분의 생물은 바다에서 살았고, 삼엽충과 완족류가 번성하였고 중기에 육상 생물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어류의 시조인 갑주어가 출현하였으며, 양치식물이 크게 번성 말기에 양서류가 출현하여 번성하였고, 파충류와 겉씨식물이 출현하였다.

 

중생대는 바다에서는 무척추동물인 암모나이트가, 육상에서는 파충류인 공룡이 번성하였다. 시조새가 출현하였고, 소철과 은행나무 등의 겉씨식물이 번성하였으며, 말기에 공룡과 암모나이트가 멸종되었고, 포유류와 속씨식물이 출현하였다.

 

신생대는 단풍나무와 사과나무 등의 속씨식물이 번성하였고, 매머드 말 등의 포유류와 조류가 번성하였으며, 250만년 전에 인류의 조상이 되는 유인원이 출현하였다. 이는 지구표면의 지층에 형성된 화석을 표본으로 연구한 지질시대별 진화의 과정이다.

 

 

 

 

나는 누구인가?

■  씨족과 뿌리 그리고 나

 

 

     화석 자료에 의하면 현대 인류는 처음 아프리카에서 발생해서, 이후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화석 가운데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화석은 16만년 전의 것이며, 중동아시아에서 발견된 화석은 9만년 전, 유럽에서는 4~3만년전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유전자적 공통성이 많은 현생인류인 최초의 호모에렉투스는 약 19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탄생하여 다른 지역으로 방산( 180만년 전) 되었으며, 현생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였다.

 

아프리카 두 부족의 미토콘드리아 내 DNA를 분석해 도출한 최근 연구에서, 인류가 7만 년 전 기후변화로 멸종 직전에 처해 극심한 가뭄으로 20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본다.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초기 인류는 꾸준히 늘어가다 135000~9만 년 전 아프리카에 가뭄이 닥치면서 위기를 맞게 됐다. 이 무렵 인류는 두 무리로 나뉘어 아프리카 남부와 동부에서 따로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가뭄이 심해지면서 더욱 작은 그룹으로 분산돼 독립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 것은 초기 석기시대인 6만 년 전쯤이다.

 

학자들이아프리카 엑소더스라 이름 붙인 초기 인류의 대이동은 약 6500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5만년 전에는 인도와 동남아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일대에 진출했고, 5000년 뒤에는 이란을 지나 중·근동에 이르렀다. 유럽 등지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4만년 전 이후. 지금까지는 인류가 아프리카를 거슬러 올라 이집트와 시나이 반도를 거쳐 흩어진 걸로 추정됐지만, 최근 연구에서는 훨씬 남쪽에서 바다를 통해 이주가 이뤄졌다고 본다.

 

중국의 한 연구결과, 중국인의 조상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기원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와 점차 한족과 소수민족들로 분화돼 나갔다고 한다. 이 유전지도는 지난 5년간 세계 여러 인종의 유전자(DNA) 샘플 10만 건을 분석해 완성됐으며, 연구진은 약 15만년 전 아프리카 동부에 백인, 황인, 흑인 등 여러 인종의 부락들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일부가 10만년 전 아프리카를 떠났으며 그 중 황인종은 동남아를 거쳐 중국에 안착했다고 주장했다.

 

피부색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유전요소가 아니며, 햇빛의 양에 대해 생존을 위한 적응과정이 피부색으로 나타나며 흑인에서 백인으로 피부가 적응하는데 2만년이면 충분하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현생인류의 역사 15만년 가운데 피부색의 분화는 최근 5만년 사이에 진행된 적응의 역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최초의 현생인류는 언제부터 살았을까?

 

83년 충북 청원에서 4만년 전 인골로서 6살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석이 발견됐다. 발견자인 석회석광산 채광 소장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흥수아이로 불리는 화석이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약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이 흥수아이가 특별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장례 풍습에 의해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 위에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고, 주검 곁에서는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꺾어왔다고 추정되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다. 여기서 구석기유물과 코끼리 사자 원숭이 쌍코불이, 국화 진달래 등 많은 동식물화석이 발굴되었다.

 

오래 전에 사라진 큰쌍코뿔소나 상원말 등이 화석으로 나오고 있어, 이 화석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 기후는 열대성이거나 아열대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이동경로

 

시베리아 원주민이 한국인과 구별이 어려울 만큼 얼굴이 똑같다. 북 아시아인은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가지며, 얼굴은 평평하고,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는 게 특징인데, 동상과 찬바람을 견디고, 흰 눈 속에서 지내는데 보호막이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북 아시아인의 체질을 갖고 있지만, 남방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 등도 일부가 섞여 크게 4개의 유전학적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국내 유전학자들은 한국인의 원류가 된 북 아시아인이 마지막 빙기인 5만년 전부터 12000년 전까지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면서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북 아시아인이 한민족의 주류였지만 남방계 혈통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본다.

 

. 역사적 인구의 추이 (세계, 중국, 한반도)                   세계인구     (중국인구)             한반도 인구    20만년 전  최초출현    7만년 전   2천명    BC1000  0.5    BC200   2.0          (진시황 0.4)    AD 1     2.7억          (전한 0.6              1 백만 (낙랑,요동,현토 기원전)                  로마제국 0.6 AD581                    (수나라  0.2)   907                      (당나라 말 0.3)        8 백만 (통일신라 700년경)   1041                    (북송 1.0)   1640                    (원나라 1.4)             2.5 백만 (이조 현종 1660)      1830   10           (청나라 4.4)             7.6 백만 (이조 순종 1807)      1930   20           (중국 5.2)                5.9 백만 (이조 광무 1904)      2000   60           (중국 12.4)      2009   68           (중국 13.4)               7천4 백만 (남북한 합계)

 

 

 

나는 누구인가?

■  나와 너 (關係)

 

 

     남녀간의 은밀한 행위를 완곡한 표현으로 “관계”한다고도 하지만, “관계”란 일반적으로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무엇이건 간에 “나”와의 관계가 항상 우선하여 중요하다. 남과 남의 관계, 남과 사물, 남과 현상 등의 관계란 우리의 귓전을 항시 흐르고 있는 수 많은 전파처럼 나의 이익이나 관심과는 거리가 먼, 세상의 한 현상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그러한 관계가 “나”나, 내가 소속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거나, 줄 것이라고 여겨질 때, 관계는 그의 파급 정도에 따라서 나 또는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나와의 관계”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너”라고 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주제도 너라고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이 때의 “너”는 연인 혈육 이웃 벗 등을 떠 올려 볼 수 있다. 사랑에서처럼, 존경, 미움, 원망, 증오 …… 모두가 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들이고, 나에게는 그 관계를 두고 말하기를 행복이나 불행의 원인이라고 여기게까지 된다.

 

물론 동식물 자연과 같은 사물이나, 사회적, 물리적, 자연적 각종 현상도 진선미(眞.善.美)라는 이름을 걸고 그 “관계”에 끼어 들게 된다. 성공 명예 영광 만족의 크기로서 비교되어 “나”와 우리 옆에 다가오며 그 관계에 끼어 들곤 한다.

 

“나”가 지니는 한계는 무게 크기 거리라는 물리 요소와 함께 수명이라는 한정된 시간 요소를 특징으로 갖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영원하기를 갈망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에서의 바람으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한계를 극복하여 넘어보려 애쓰기 보다, 섭리로서 수긍하고 현재 “나”의 의미를 보듬으려는 자세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나와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 “너”라는 의미는 한층 더 명료해질 것이다.

 

“나” 역시 동물이다. 그 눈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이성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당신도 산책길에 주인장과 함께 가는 애완견을 보며 맛난 사철탕 용 고기 정도로 군침 삼키며 쳐다보곤 하는가? 들판에 여유롭게 풀 뜯고 있는 암소를 바라보며 안심스테이크 자르는 생각으로 군침을 흘리는가? 물가에 노니는 통통한 오리 떼를 보며 훈제오리의 구수한 맛을 먼저 떠 올리는가?

 

한낱 이성으로서의 너와, 나의 삶의 동반자로서의 너는 위에서처럼 개나, 소나, 오리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서로 다른 양태일 수 있다. 진리가 어느 한 곳에만 옳고 그름이 있을 수는 없을 게다. 선악의 기준이 인간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착각(베이컨이 말한 "종족의 우상")이 인간의 공통된 것이라는 점도, “너”를 대하며 판단하는 우리의 일관된 착각에서 읽을 수 있다.

 

나의 눈에 비친 아름답던 한 이성이지만, 누군가의 딸이며, 벗이며, 가족과 조직의 한 구성원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팔린 나의 눈으로 “너”라는 개체를 얼마나 많이 이해 할 수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가축을 단지 맛난 고깃덩이로만 보듯 하지는 안 했을까? 겨우내 짝지어 쌍쌍이 생활하는 냇가의 물오리 들과, 나와 너를 이름하며 숙명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에는 서로 간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나와 너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 중심의 착각 속에 이중성으로 구성된 나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를 생각한다는 것도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심의 한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축을 식용 고기로만 보려는 착각처럼, 술집에서 시중 드는 여인은 접대부로만, 부하직원은 부하로만, 아내는 아내로만, 부모는 부모로만, 자식은 자식으로만  …… “너”를 대하는 목적에 맞는 단면만을 보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그 어느 “너”라 할지라도 나처럼 모든 감정들을 끌어가고 있는 개체이자, “나”가 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생각하는 것처럼, “너” 또한 우주의 또 다른 한 구심점이라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본다. 세상의 모든 “너”를 합했을 때, “나” 하나에 대응되는 “너”가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고운 너도, 미운 너도, 사랑하고 좋아 하는 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중요한 대상들이다.

 

숫컷 동물인 나에 대응하는 조화로운 너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체세포 염색체 46개를 꾸릴 반쪽 염색체 23개를 갖는 이성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너”라는 이름으로 필요 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선악의 서로 다른 얼굴로서 매일 다가오는 “너”에 대응하는 “나” 또한 “너”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조화를 차리려고 한다. 선과 악, 세고 여림, 음양의 모습을 수시로 달리하며 대응하는 것이 “나”이며, 세상 이치라고 여겨진다.

 

너의 선한 모습에 나도 선한 생각이, 너의 악한 모습에 나도 악한 감정이, 너의 강한 모습에 나도 강한 감정이, 너의 약한 모습에 나도 약한 감정이, 너의 웃음에서 나도 웃음이, 너의 눈물에서 나도 눈물이 ……

 

그래서 “나”의 속에는 선과 악이, 음과 양이, 함께 상존하며 세상의 갖가지 “너”와 조화와 평형을 이루며 대응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 속의 이중성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된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해서 부끄럽다거나 미안스러워 할 이유는 없다. 그만큼 “너” 또한 다른 모습으로서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일 뿐이다.

 

나와 너는 새로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늘 생동하고 있다. 음과 양, 선과 악이라는 상반된 모습들이 서로 교차하며 “관계”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  오늘을 살고 있는 나

 

 

     빅뱅으로 시작된 우주탄생 137억 년 중에서 지구 나이는 45억 년, 그 후 32억년간의 긴 선캄브리아대를 거치며 원시조류와 박테리아가 발생하고 그 후 4억 년 간의 고생대에 삼엽충, 양치식물, 양서류, 파충류가 번성하였으며, 그 후 약 2억 년 간의 중생대에 공룡이 번성하고 말기에는 공룡의 멸종과 함께 포유류와 사과 등의 속씨식물이 출현 한다. 신생대에는 포유류, 조류, 속씨식물이 번성하고 약 250만 년 전에야 인류의 조상 유인원이 출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4만 년 전 구석기 시대의 흥수아이로 불리는 화석이 발견된다. 석회암 동굴 속에 감춰진 화석이지만 그러한 동굴이 석기시대 원시인들의 주거지였을 것이다. 파충류, 포유류와 같은 맹수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주거 선택임을 생각하면 밤이나 낮이나 두리번거리며 생활해야만 온전히 목숨을 보전했을 것이다.

 

기원전 4천년 전 선사시대 유적지인 서울 암사동의 신석기 유적지가 있다. 그 유적지를 돌아 보며 참담한 그 시절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먹거리며 입거리 그리고 주거환경이 현대 생활에 비한다면 얼마나 열악한 것이었는지가 느껴온다. 침략자 약탈자와 싸우기 위한 몽촌토성의 모습도 그 시대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인력도 부족하고 도구도 변변치 않았을 처지에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한 토성을 쌓아야만 했던 그들 모습이 가련하다. 밤낮없이 지켜야 하고 약탈자와 투쟁 해야 한다. 먹고 입기도 어려웠겠지만, 조금만 방심하여 여차하면 가족과 자신의 생명을 위협 받아야만 하는 어려운 그들 이었을 것이다.

 

만리장성, 남한산성, 북한산성, 38선 철책선 ……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간의 투쟁의 역사이자 모습이기도 하다. 역사소설 삼국지 전란 속의 뺏고 빼앗기는 민란의 와중이나, 일제 강점기, 대동아 전쟁, 625 전쟁 통의 서민들의 헐벗고 굶주리는 어려움도 지구라고 하는 장구한 역사에 비하면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동강난 채 좌초한 천안함의 처참함도 현대기술의 신무기로 둔갑하여 뺏고 빼앗기는 그러한 역사 속 투쟁과도 같은 단면일 수 있다.

 

암울하고 어두웠던 그 때 세상은 약육강식의 자연법칙과 다를 바 없다. 밤을 밝혀가며 먹거리 찾아 헤매는 천적이나 맹수들을 피해가면서 두리번거리며 살아가는 연약한 초식동물들의 삶과도 유사하다. 그들은 항상 긴장하며 숨쉬고 먹고 쉬고 자야만 한다.

 

끼니 걱정 아니하고, 춥거나 더운 지 모르며 살아 간다는 것이 지구역사에서 어느 때 가능했었을 지를 짚어 본다. 나처럼 허약하고 주먹이 약해도 밤이나 대낮이 무섭지 아니하다. 도심이건 야외이건 산이나 들, 아니면 집안에 홀로 있어도 누군가 있을지 모를 공격에 떨며 지내지 않고 지내는 좋은 세상이다. 나는 지금, 지난 어느 시대에서도 상상해볼 수 없었던 공명정대한 좋은 세상에서의 삶을 보내고 있다.

 

물론 그러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방, 산업, 문화, 과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역할을 분담하여 지키고 연구하고 일하는 국민 각자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비교 할 때 가 보내고 있는 이 시점이 어느 시기보다 좋은 시절임을 부정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 지금도 그늘 뒤에서 어려움을 보내는 부류는 적지 않다. 중병으로 투병 중인 이, 지은 죄로 매여 있는 이, 가난에 허덕이는 이, 불의의 사고나 재난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진 채 절망의 늪을 헤매는 이, 국가나 지역의 불운으로 고통 받는 이 …… 역사 속의 어려웠던 어느 때 보다 못지않게 현실이 고통스러운 사람이 많다는 것도 생각하며 지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현대사회의 안락하고 넉넉한 의식주 여건과, 안정된 정치와 사회 구조, 훌륭한 통신 운송 문화 ……. 교량과 도로마다 밤을 밝히는 도심의 가로등도 문명의 소산이다. 세상 모두를 빨아들일 듯 칠흑같이 캄캄한 밤의 적막감 두려움을 경험한다면 자정을 넘긴 도로의 환한 야경에 우리 현대인류의 대단함 황홀감이 더 할 것이다. 굳이 칠흑처럼 캄캄한 선캄브리아대의 먼 지구 역사가 아니더라도, 고대나 근대사를 돌이켜 본다면 지금의 이 나라 우리사회는 천국에 비할 만큼 좋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듯 하다. 자동차 컴퓨터 핸드폰 텔레비전 냉난방 설비, 푸짐한 열대과일 생선 육류와 유제품, 넘쳐나는 곡물, 술과 음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줄 모르고, 수시로 불만과 불안 그리고 괴로움으로 허덕이고는 한다. 나는 지금 전기 전자 물리 화학과 같은 현대 과학문명이 가져 온 이기(利器)의 큰 혜택을 받으며 살고 있음을 잊은 채 살아 가는 것은 아닌가?

 

오늘을 새삼스레 생각하여 본다.

 

열심으로 공부하고, 힘 닿는 데까지 부지런히 일하던 지난 한 때들도 보람과 긍지로 채워진 복된 날들이었다. 분위기 그럴듯한 장소에서 음량도 풍부하고 선율 그윽한 클래식 음향 아래, 향긋한 술잔 기울이며 육질 좋은 스테이크 잘라 가며 정담을 나누던 그날의 저녁 식사 시간도 얼마나 멋진 한 때였던가!

 

오늘도 그러한 나날 중의 하루였다. 이른 아침 새벽을 가르며, 분당 도심 탄천변의 아침 산책 길에서 봄날의 상큼한 아침을 마신다. 걸어도 걸어도 잘 정돈되어 이어진 둔치의 녹색의 잔디길이 새롭다. 눈에 거슬리는 어수선한 잡목도, 지저분한 휴지 한 조각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침 찬바람에도 입은 옷은 따스하고 뱃속도 넉넉하다. 보행로 옆 개천에는 팔뚝만한 잉어 들이 물살 가르며 오르고, 짝지어 노니는 주인 없이 통통한 물오리들 모습이 더욱 넉넉하여 보인다. 맞은 편에 무리 지어 재잘대고 깔깔대며 걸어 오는 아낙들의 모습도 여유 있고 한가로운 모습이다.

 

이 순간의 나는 누구인가? 부질없는 모든 욕심 다 잊은 채 걷는다. 비록 사소하지만 좋은 것들만 생각하며 듣고 보며 걷는다. 상큼하고 감미로운 봄 바람, 연약하지만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노랗고 하얀 들꽃, 연 초록의 풀잎, 짹짹거리는 새소리, 졸졸대며 흐르는 물소리, 지나는 아낙들의 속삭임, 웃음소리 그리고 이 순간의 나를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지나간 우주 역사 속의 나도 아닐 것이요, 다가올 우주의 미래를 책임 질 나의 존재도 아닐지 모른다. 단지, 아주 짤막한 찰라에 지나지 않는 토막 지식에 불과한 이 땅 위의 역사를 읽으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 미래를 그려보고, 흐르는 오늘의 시간을 만지고 보고 느끼며 생각하는 것이 나의 존재가 아닐까?  아니라면 오늘이라는 시간과 나의 관계는 이 말고 또 다른 그 무엇일까?

 

 

 

 

나는 누구인가?

■  아름다움과 나

 

 

    아름다움이란 그 중심이 항상 “나”에게 있다. “나”를 중심으로 한 개체나 조직을 위해서 “선(善)”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한 개체가 배부르고 따스하고 더 편하게 하여 내가 편하고 오래도록 잘 살고, 건강을 바탕으로 후손도 번창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선(善)”한 방향이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한가지 예로 생각해 보자.  건강한 혈색과 체형, “나”에게 잘 할 것 같은 순종적인 시선이나 모습, 나올 곳은 제대로 나오고 들어 갈 곳도 제대로 이뤄 진 S라인, 씨 불리기에 알맞게 어울리는 외모 …… 그러한 것을 여성의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고는 한다. 그러한 여성들이 "나"라고 하는 평가의 주체로서는 “선(善)”한 것이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강산”이라고 한다면, “나” 또는 나를 중심으로 하는 개체가 잘 먹고 잘 살며 종족을 벌릴 수 있는 좋은 장소를 이름한다고 본다.

 

오감을 통해 갖게 되는 아름다움이란 모두들 “나”에게 “선(善)”한 것들을 두고 말한다. 씹고 삼켜서 몸에 좋은 자양분이 되는 것을 맛있다고 한다. 보고 듣고 만져서 좋게 느끼는 것들이 나에게 유리한 것들이 더 많다. 감미로운 맛과 향기 나는 것들, 감미로운 볼거리와 물건들, 감미로운 소리들은 우리에게 좋다고 여겨 진다. 이를 두고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해롭다고 여긴다면 추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여 그것이 개나 소에게도 그리 보이지 아니할 것이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 이롭더라도 개나 소에게는 쓸모 없거나 해로운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나이, 성, 빈부, 종교, 지역, 시대 등의 격차에 따라, 즉, 청년과 노인, 가진 자와 없는 자, 남과 여, 후진국과 선진국, 유식자와 무식자…… 간에는 서로 좋고 그름에 대한 이해가 엇갈리거나 정도에 차이가 있게 된다. 때문에 내가 본 아름다움이 마주한 상대의 눈으로는 추하게 여겨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내가 속한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유지하고 생명의 숫자를 더 불리는데 순기능이 되는 사물, 여건, 생각에 대하여 긍정적이라거나 호감 가는 것들을 함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미(美), 아름다움의 본질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고대 그리스 인들은 미(美)의 이론으로서 미는 시각과 지각에 기초한 수와 척도와 비례에 있다고 했다. 참된 미(美)는 감각이나 상상이 아니라 이성 혹은 마음에 의해 파악된다고 하면서 미의 이성적 본질을 주장하기도 한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에 즐거운 것이라는 객관주의적 사고는 미로부터 일체의 상대성의 요소를 배제하기도 한다.

 

(美)는 진(眞), 선(善)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시각, 청각 등 오감을 통한 아름다움 들은 직접 또는 연상에 의한 간접 방식으로 삶을 선한 곳으로 이끄는 것들이라고 판단된다. 아름다운 음악이 그렇고, 아름다운 미술품이 그러하며, 멋진 음식이 그렇다. 자연, 인체, 건축예술, 연극처럼 몇 가지 감각의 복합요소가 적용되는 것들도 기본은 비슷하다.

 

혹자는 인식과 감각적 표출 양식의 학문을 미학이라고 했다. 미는 우리 마음에 즐거움과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서, 고대인들은 아름다운 사물이나 아름다운 색, 아름다운 음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고나 아름다운 제도라는 말을 썼으며, 플라톤은 미의 사례들로서 아름다운 성격이나 아름다운 법, 미의 이념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무엇을 남기는가?

 

 

      누구에게나 아끼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물건일 수도 있고 사람인 경우도 있다. 개중에는 느낌이나 생각, 명예나 평판, 사상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아끼는 것이 무엇일까? 어렵게 구한 여린 잎새 몇 잎에 불과한 동양란 화분이 우선 생각나는 이도 있을 터이고, 분재 한 그루나 정원 앞에 제대로 잘 자란 조선솔 한 그루를 떠 올려 보는 이도 있을 게다. 보석 서책 임야 가옥처럼 누구나 생각들만한 속된 것도 있겠지만 효행 충성 믿음의 마음으로 부모 조국 신()을 우선 내세우는 그럴싸한 경우도 있으리라. 득도의 길, 영생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도 고이 간직 할만 하리라.

이처럼 저마다 아끼는 중요한 것들이 따로 있다. 그것들은 어린 때와 성인이 되어 같을 수 없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같을 수 없다. 남녀가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다. 때와 장소 처지마다 변덕이 심한 때문이다.

 

사금파리 조각 노리개며 헌 종이로 접은 딱지 짝과 유리구슬이 중할 때가 있었는가 하면, 한 두 알 남은 달콤한 군것질거리일 때도 있었다. 알록달록 몽당연필 위에 숨듯 기어드는 지우개의 끝이 아까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자라 키 크고 체중이 나갈수록, 배워가며 무엇인지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그에 대한 생각은 달라진다. 성인이 된 후에도 나이 들어 갈수록, 사회적 입지가 제법 높아져 가장이 되고, 직장의 상사가 되고, 업계의 수장이 되어도 아끼고 중요한 것은 설악산의 사계절 풍광만큼이나 색이 달라지기 십상이다. 같은 산이라고는 하지만 때로는 흰색으로, 때로는 짙은 녹색으로, 그리고 때로는 타는듯한 붉은 색으로 뒤바뀌곤 한다. 새 운동화나 테니스 채에서 골프 채나 새 자동차로 아끼던 그 마음은 변심을 거듭한다. 그런 변덕은 아끼던 사람에도 다를 바 없다. 생각만으로도 피 끓듯 애타는 사랑, 처 자식이라고 언제까지나 장담할 수 있겠는가? 부모형제 처 자식이라고 순서가 정해진 것만도 아니며, 소중하게 여기던 벗이며 이웃도 잊기를 거듭하곤 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아끼는 것을 꼽아 본들, 조금 지난 훗날이면, 눈 녹듯 사그라질지도 모를 불안정한 마음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지난날에도 그래 왔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굳이 따져 본다면, 아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 할 때 자기 스스로를 그 우선에서 열외로 두고, 그 다음으로 아끼는 것을 꼽고 말하곤 한다. 내 몸과 정신이 머물고 있는자신을 얼마나 아껴 왔던가는 따져 볼 필요조차 없다.

 

아침 눈 뜨면 챙기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요모조모 살피고 다듬는다. 날개 달린 새들이 짬만 나면 부리로 자기 깃털 다듬듯 본능에 가까운 행태이다. 입술 매무새, 눈언저리 잔주름, 속눈썹 윗눈썹, 귀밑머리 한 올, 손끝 발끝까지 어느 한곳 소홀함이 없다. 움츠리고 보듬어 안고 감춰오던 앞가슴,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가득했던 아랫도리도 소중한 육신이다.

 

목적이니 목표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무심코 갖게 되는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눈에 띄지도 않을 만큼 작은 가시에 찔려도, 스치듯 베인 작은 상처에도 아픔을 느끼게 되고 마음 쓰여 정신이 혼탁해지기도 한다. 그러니 병원신세라도 져야 할 만큼 중병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서라고 하는 자신의 육체와 정신은 무의식 중에 가장 소중한 순서로서 자리매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빈 소라 껍질 한 개를 두고 자기집이라고 다투는 바다 밑 낙지들이나, 제 영역이라고 꽥꽥대며 목에 힘주며 상대방을 몰아내는 연못가 물오리들, 서로 자기 자리라며 목 좋은 도로변 터에서 과일장사들의 핏대 올린 자리다툼, 모두들 나름대로 적극적이고 열심이다. 물길 따라 산 능선 따라 자기 종족의 터전이라고 투쟁을 일삼는 국가간의 끝없는 전쟁의 속성도 충성과 애국애족이라는 선홍색 보자기로 감싼 허울좋은 자리 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이름과 명예를 남긴다지만 언제까지 무슨 이름이니 명예가 남을 수 있겠는가? 백 년이나 천 년이라는 극히 짧은 순간은 우주질서라는 큰 틀에서 생각한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축적된 부()를 자손에게 물려 주기 위해 아끼고 모으는 것만은 아니다. 꿀벌이 쉴 줄 모르고 부지런히 꿀만 따듯, 재산 불리는 맛에 별 작정 없이 모으기에 열심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끼고 중하게 여기는 목적이 남기려는 데만 있지는 않다. 우리가 아끼며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진선미(眞善美)라고 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를 더해 주는 데 있다고 본다. 나 자신과 내가 몸 담은 사회를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길 때 우리는 아끼며 소중하게 생각한다.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한 줄기 햇살, 좋은 생각 까지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하는 것과, “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사그라지고 난 후에 무엇인가를 남긴다는 것에는 서로 인과관계가 있다 없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재산 건강 지식 사랑 시간 명예…… 생각하기에 따라 주제마다 서로 다른 답을 제시할 수 있다.

 

나는 삶의 언저리에서 무엇을 남기는가?

우리는 무엇을 남긴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주어진 삶을 열심으로 이어가는 낙지나 물오리의 한 순간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아니면, 길가 장사치의 다툼처럼 보내는 그 때를 열심으로 한다는 의미 말고는 남길 것이 없으리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노인의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보며, 거울로 비춰 보는 훗날 내 모습은 결코 아니라고 큰소리 치지 못할 것 같다. 그렇다고 가치 없는 삶은 아니라고, 삶 자체에 의미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냐고 되묻고 싶다.

 

 

 

 

나는 누구인가?

■  도덕과 나

 

 

결혼 한 지 꽤나 오래된 부부의 예를 들어서 생각하여 보자. 성장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원만한 가정을 꾸려 가고 있는 그 들이, 간 밤에 부부가 여느 날처럼 꿈 같이 달콤한 밤을 보냈다면, 그 부부행위를 두고 윤리니 도덕이니 하는 관점에서 문제 삼거나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자신들 스스로도 마찬가지로 죄스럽다거나 부끄럽다거나 또는 미안하다는 생각 자체를 갖지 아니할 것이다. 좋았던 날 밤으로 잠시 한 동안의 기억에서 머물고 마는 한낱 순간의 의식에 불과한 행위 정도, 또는 배뇨 배변 같은 배설 행위처럼 생활하며 스쳐 지나가는 의례적인 행위로 여기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렇지만 길가를 스치는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만 보고서도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엉큼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죄스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물며 못 볼 것이라 여기는 곳을 보았다거나, 손대서는 안되리라 여기던 곳을 스치기라도 한다면, 스스로 쳐 놓은 도덕과 윤리의 그물 망 속에서 한없는 몸부림을 치기도 한다. 종교나 사회라고 하는 형식을 갖춘 틀, 규범의 그물은 그러한 자기의식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겪게 되는 2중 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린 날의 죄의식들도 뒤 돌아본다면 새롭기만 하다. 들 꽃 한 송이를 꺾고 나서도, 손뼉 쳐서 모기나 파리를 잡는 것을 보면서도, 비 오던 날 무심코 밟힌 실 지렁이를 보고서도 죄 돌아 갈 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생각은 자주 찾아 오고는 했다. 과음으로 토한 음식물을 바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고, 나의 부인은 왜 저리도 찌질이일까 라는 생각으로 물끄러미 보면서도, 한편으론 이러면 죄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생각 하기에 따라, 내가 살아 간다는 것은 끝도 없는 죄를 이어가며 부끄러운 짓을 이어간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는 반대로 사회 통념상으로는 큰 잘못으로 여겨지지만 그 잘못을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게 된다. 사회가 정하고 있는 통념이 자신의 가치관과 괴리가 있거나 또는 그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나 욕심으로 물든 아집을 멀리하고, 자신을 뒤로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사안을 판단하며 바라볼 수 있다면 다른 생각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입장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나는 나이기 때문에 지렁이를 밟더라도 죄가 아니며, 돈을 주고 사 먹는 고깃국물에 동동 뜬 기름방울을 무심하게 보고 지나칠 뿐 다른 생명을 죽여서 삶은 것이라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다른 생명체를 나의 생명과 대등한 입장에 놓고 판단하려 하지 않음이다 조그만 행동이나 생각에서도 같은 일은 반복된다. 남이 하면 나태하고 게으르다고 말 하지만 내가 하면 휴식이고 여가라고 여기며, 남이 하는 어긋난 사랑은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 여기는 격이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들을 프란시스 베이컨 철학의 틀에 넣어 다시금 정돈하여 보자.

 

명석한 사고를 가로막는 그릇된 정신 경향을 가리키는 철학 용어로 우상(偶像)이라는 말이 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이러한 우상을 네 가지의 착각으로서 구분했다. 모든 환경이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인류의 턱없는 착각과, 자신의 기호나 관점이 보편적이고 건강하며 합리적이고 전체적이라는 무의식적 착각, 언어가 대상과 일치할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그리고 다양한 학파가 가르치고 조장하는 편견이다.

   . 종족의 우상 - 인간의 공통적 편견 (인간)   . 동굴의 우상 - 개인의 특유한 편견 (개인)   . 시장의 우상 - 사회집단과 모국어에 의한 편견 (언어)   . 극장의 우상 - 다양한 학파가 조장하는 그릇된 관념 (관습)

 

이는 타자의 권위를 승인하는 맹목성을 말하고, 문화적 습관이나 전통에 의해 일정한 태도와 가치관념을 주입 받아 집단의 가치관, 문화, 이념, 종교를 배타적으로 고집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편견에 의한 우상들은 생명체의 근본에 초점을 둔 우리의 가치관을 꼬집는 포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윤리나 도덕이란 그 가운데서도 특히 관습이니 언어와 같은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관념을 다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서양의 윤리개념을 보면, 서양윤리는 인간존재라는 사실은 이성과 의지를 갖춘 개인적 주체로서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로부터 연역되는 덕()으로서 책임이 도출된다. 동양윤리는 인간의 자기반성에 관해 숭앙된 개념은()”으로서, '관계가 계기를 규정한다'는 일종의 장()의 이론이 인륜의 기초가 된다. (), (), (), (), ()이라는 덕목은 ''를 제외하고 모두 대인관계 이다. 특히, '()'는 현대식으로 번역하면 '책임'에 해당한다.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고 인간사회에 대한 명예는 소실된다.

 

구약성서의 윤리사상은 인간의 생명이 선악을 빼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윤리사상은 명확한 이해와 자각으로 뒷받침된 덕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대 로마의 스토아 학파는 자연적인 생명에는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이상이므로, 즐겁고 괴로움에 따라 마음의 평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것과, 부도 명예도 사치도 물리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에는 교육으로 습득할 수 있는 '지성적 덕'과 습관으로 성립하는 '습득적 덕'으로 구분하였다. 후자의 습득적인 덕은 윤리적 덕이라고 불리는데 이들은 모두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부여된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본성을 배반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윤리의 기본 사상은 모두 인간의 행위가 내적인 의지에 의존하고, 인간은 서로 도와야 할 관계며, 서로 돕는 방법은 사회적으로 타당한 이성의 결정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마누엘 칸트의 관념론의 윤리학은 도덕적 명령이란 "너의 준칙이 보편적 법률로 될 수 있는 것처럼 준칙에 따라 행동하라"고 했다. 윤리학의 기본문제로서의 인격의 자유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권리로 치환된다.

 

사람의 의식 활동은 인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도 한다. ‘실천이란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인식과는 달리, 의지적으로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 실천 행위에는 노동과 도덕적 행위가 있다. 노동은 자연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노동은 자연의 법칙의 범위 내에서 수행된다. 반면에 도덕적 행위는 자연의 제약을 넘어선다. 그래서 칸트는 이런 도덕 행위의 주체를순수한 실천 이성이라고 부른다.

 

인식 가운데 진리와 허위가 있다면, 선과 악은 도덕 행위 가운데 있다. 도덕 행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실천 행위다. 사람을 인격으로, 그 자체 가치 있는 것으로 대하는 행위는 선하고, 사람을 한낱 수단 가치로 취급하는 행위는 악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한 행위 가운데서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존재자, 목적인 존재자가 된다. 목적 자체인 인간을 우리는 존엄하다고 한다. 이성이 제시하는 선의 이념은 이로써 다름 아닌 인간 존엄성의 이념이다. 그런데 자연적 존재자인 인간이 언제나 자기 자신이나 남을 인격으로 대하는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신체 욕구적 경향성을 제어하고 도덕 명령을 존경하여 준수할 수 있는 힘을 인간이 한편으로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 힘이 바로 의지의 자유이며, 인격적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자유 의지이다.

 

도덕적 행위의 주체는 자유로운 의지이다.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수행되는 도덕적 실천 행위는 아직 없지만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 즉 이상을 실현하는 당위적 활동이다. 그리고 그 실현은 자연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행위에서 자연 존재로서 물리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하면서 자유 존재로서 도덕적 법칙에 종속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리적, 생리적 법칙에 종속하는 한 인간은 여타의 자연 사물과 한가지지만 도덕법칙에 종속하는 한에서는 인격이다. 그러나, 인격의 자유인 이념으로서의 선을 동경하는 윤리학은 종교로 보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

■  시간과 나

 

 

          시간은 지나가고 사라지며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 것에 비하여, 안다는 것은 기억력과 인지를 전제한다. 정말로 시간의 경과는 우리의 이전의 경험을 망각하게 할 뿐 아니라, 시간이 또한 우리에게 시간 자체를 망각하게 한다. 과거로부터 어떤 것을 기억하는데 성공할 때도 시간을 지속적으로 망각하고 있다. 우리가 시간을 파악하여, 시간을 행동과 인생의 목표에 관계시키며, 그래서 시간을 인간적인 이야기가 되게 할 때조차도, 시간은 우리로부터 사라진다.

 

내 삶의 시간과 물리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물들에 발생하는 시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물리적인 시간과 달리 심리적인 시간은 공간적인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지 않고, 모든 공간적인 개념과 이야기할 수 있는 형식을 제거한 것이다. 때문에 나에게 행복과 슬픔은 지속되는 기간이 있지만, 그 지속의 방식은 어떤 시계로도 측정될 수 없다.

 

현재 시점에서 나는 현재의 삶뿐 아니라 내 과거 및 미래의 삶에도 관계하는 것이 사실이다. 타인과 관계에 의해 내 삶의 시간이 변화되는 두 가지 다른 방법은역사와 윤리의 시간으로 각각 생각할 수 있다. 역사의 시간은 내 삶의 시간의 의미를 내 삶의 한계 너머로 확장한다는 것을 뜻하며, 윤리의 시간은 내 시간을 다른 사람을 위한 시간으로 만드는 책임의 의미를 뜻한다. 역사의 시간은 내 삶의 시간을 위협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내 삶의 시간의 경험에 끼어들고 방해한다.

 

기억과 전통의 시간과 달리 윤리학의 시간은 지속성이 아니라 중단된 시간이다. 중단된 시간은 간섭으로 인해 지나가 버린 시간이다.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의 상호 혼합된 것들이 용해되는 시간, 인생의 현재, 미래 과거가 더 이상 단순하고 유일하게 내게 소속되지 않는 시간이다.

 

내 인생의 중단이라는 일반적인 형태는 죽음이다. 죽음은 내게서 오지 않고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온다. 죽음은 내게 속해 있지 않은 채 내 인생의 가장 심오한 부분을 건드린다. 이것이 내가 죽음을 표상할 수 없고 전유할 수도 없는 이유이다. 죽음은 타인이 아닌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온다. 그것은 인식될 수 있는 형태나 모습도 없다. 죽음은 알 수 없는 것이다.

 

타인에 의해 내 과거의 윤리적 개입은 용서이다. 용서는 내 과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고독과 때로 견딜 수 없는 죄의식과 실수라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킨다. 내 견해는 나를 용서한 타인의 견해가 되며 내가 보는 것은 내가 원래 내 인생으로 경험했던 인생과는 다른 인생이다.

 

희망은 윤리적 개념의 시간과 관계된다. 희망은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이런 변화는 오직 타인으로부터 온다.

희망은 용서처럼 내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타인으로부터 오는 감사의 선물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가 없는 곳에 희망은 없다. 타인의 개입이 현재의 시간을 윤리적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시간으로 만든다. 내 인생의 현재의 시간은 특히 주관적인 자기 중심적인 시간이다. 과거의 실수로부터 나를 용서하는 타인은 동시에 내게 미래에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관은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며, 현재의 현재는 직감이며, 미래의 현재는 기대다.” 그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기억으로, 현재의 지각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로서 시간이 존재한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무엇보다도 내 안에, 내 영혼에서 일어난다.  내가 시간을 재는 것은 곧 나의 영혼 안에서이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재, 지금 이 순간"이란 무엇일까?

 

어느 한 네티즌의 "현재 관"을 (글 Tora) 인용하여 본다.

    현재를 말하는 사람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현재에 존재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를 생각하지만 실제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며, 대부분이 미래를 설계한다고 믿고 있는 것도 생각에 불과할 뿐 실제 그 생각자체가 과거에서 비롯되어 과거로 돌아가도록 주체 된 환영의 조각들이다.

 

육체는 빛과 상관 없이도 기생체의 에너지에 의존하여 살아갈 수 있지만 결국엔 죽음으로써 그 동안 얻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모두 잃어버리고 자연히 소멸하게 된다. 그래서 소멸을 원치 않는 육체는 보이지 않는 빛과 꿈같은 환상으로 보이는 기생체 사이에서 번민하게 되고 더하여 환상을 깨우는 고통을 맞이하기도 한다. 즉 환상 자체는 빛으로부터 벗어나있는 육체가 자성하여 빛을 찾아 돌아 가려 할 때 벗어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육체의 과거이며 생각의 흔적들이다.

 

현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뿐이며, 이 순간은 에너지가 아닌 에너지 밖으로 벗어나 빛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빛은 순수함이며 늘 현존하고 있는 오늘이며 이순간이 되는 현재이다. 꿈은 기생체의 흔적이며 환영이다. 꿈에서 눈을 뜨면 환영이 저편으로 달아난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  행복의 진정된 의미를 음미하며

 

 

   누구나 그러하듯 나 또한 행복을 원한다. 그렇지만, 배부르고 따스하며, 사랑하는 이들과 많은 것을 가지고 재미나게, 그리고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만이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미처 생각 못했던 새로운 모자람으로 마음이 뒤틀리고, 때로는 고통도 느끼게 되곤 하기 때문이다. 한 없는 듯한 욕망 욕구를 스스로 다스릴 줄 모르는 자, 결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을 세월이 흐를수록 나 자신의 경험으로서 느끼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지내 온 날들, 무작정 하고 행복만을 쫓아 온 것은 아니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버틀란드 러셀, 알렝, 칼 힐티, 쇼펜하우어 …… 그들이 남겼던, 행복에 관한 생각을 한 줄씩 짚어가며 내가 걸었던 시간들과 대조 시켜 본다. 그리고, 물리적인 나의 것들, 육체적인 나, 정신적인 나 라고 하는 틀 속에서 행복의 소재들을 열어보고, 앞으로 삶에의 각오와 모습들을 새삼스레 그려본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본질은 소유의 상태가 아니라 탁월한 활동성이라고 했다. 어떤 무엇을 소유한 상태, 즉, 부나 권력을 소유한 상태도, 건강한 상태도, 비록 그것들이 행복을 위한 외적인 조건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그 자체로 행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행복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정신의 활동성이라고 했다. 행복을 공동체 속에서의 삶 전체에 대한 인간 자신의 만족과 연관시켜 파악하였고, 선하고 올바른 삶을 통하여 참된 행복을 얻는다고 보았다. 탁월한 행위는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고, 선하고 고귀한 것이며, 이러한 활동들에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자족의 행복을 인지한다고 보았다. 특히, 지혜, 지성, 도덕적 통찰, 관후나 절제와 같은 지적이며 성품적인 탁월함을 꼽고 있다. 온전한 덕을 따라 지속적으로 활동하며, 자기의 이성에 따라 활동하고, 또 그 이성을 가꾸고 성숙하게 하여 최선의 정신 상태를 가지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을 행복한 사람으로 보았다.

 

  . 그런데, 칸트는

그러한 행복 위에 따르게 되는 도덕적 의무를 다 할 때라는 행복의 조건을 달고 있다.

 

  . 러셀은,

경쟁, 권태와 자극, 피로, 질투, 죄 의식 등과 같은 심리적 장애가 불행의 요소가 된다고 보았다.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 자기자신을 초월하여 자기중심적 사고를 타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행복의 요소로서, 건강, 열의, 일, 애정, 흥미, 노력, 체념 등을 꼽았다. 우리는 행복을 획득하기 위해서 고통과 좌절과 싸워가면서 인생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야 하며, 인생에 승리하기 위해서 관심은 넓혀가되 아집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생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혜와 올바른 도덕의 근본이 된다고 하면서, 비록, 이것이 인간생활을 행복하게 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행복한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불행이 닥쳐왔을 때 꿋꿋이 견디어 나가려면, 행복할 때 자신의 관심세계를 넓히는 것이 현명하다며, 여러 방면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은 어떤 불행이 닥쳐오더라도 인생과 세계에 대한 넓고 건전한 흥미로써 이를 극복해 나간다고 했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이며,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라는 것이다.

 

  . 알랭은,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행동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는 자유로운 행동 가운데 행복의 지름길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행복을 얻은 사람들 만이 타인들도 행복하게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도 행복을 간취하는 힘을 갖게 되므로, 스스로의 생각에 갖게 되는 자신의 내적인 행복은 결코 덕에 반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미 행복 그 자체가 미덕이라고 했다.

 

행복의 근원인 理性을 마비시키는 정욕들이 있는데, 재물, 권력, 쾌락은 지성의 빛을 흐리게 하고 결국은 이것을 없애 버리므로, 현명한 자들은 외관상으로 아름다운 그 보따리를 조심스레 통찰한다고 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고, 애써 획득하고 간직한 정의감을 헛된 운명 속에서 날리지 않으려 명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미래에는 스스로 다가오는 미래와, 손수 만들어 내는 미래, 두 가지가 있는데, 진정한 미래는 이 양자로 되어 있다고 하면서, 폭풍이나 일식처럼 스스로 오는 미래에 대하여는 희망을 가져도 소용이 없으니 만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하지만, 근면한 인간에 의해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 졌는가도 명심하라고 했다. 행복에 대하여는 추리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으며, 그것은 지금 현재 갖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행복이 미래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는 이미 스스로 행복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곧 행복을 의미한다고 했다.

 

  . 칼 힐티는,

행복의 첫째 조건은 윤리적 세계질서에 대한 확고한 신앙이며,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는 것은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라고 했다. 정열이 없는 곳에는 가치 있는 인생도 사업도 없으며, 진리를 구하고 찾는 데에는 냉철한 理智의 힘이 필요하지만 이를 밀고 나가는 것은 정열이며, 정열은 인생의 힘이라고 했다. 침상에 누울 때, 내일 아침 일어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 쇼펜하우어는,

물론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최선은 아니라 하더라도 차선책으로 어쨌든 이 괴로운 인생을 살아갈 각오를 가지고 가능한 한 유쾌하게 보내는 기교를 아는 것은 결코 쓸데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행복론은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의 행복을 결정하는 3가지 요소로서 인격, 재산, 표상을 들었다. 여기서 인격은 건강, 역량, 미모, 기질, 도덕적 품성, 지능, 교양과 같은 사람의 됨됨이며, 사람이 가지는 소유물로는 재산과 명예를, 표상으로서는 지위, 명성 등을 예로 들고 있다.

 

그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행복을 뒤쫓아 가며 방황하는 데에 많은 불행의 원천이 있고, 너무 많은 욕구에 매달려 자신의 생활 영역을 허황되게 넓혀가는 것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향락을 추구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며, 불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욕구를 향해 뻗으면 뻗을 수록 그만큼 불행에 휩쓸릴 가능성도 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복이란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오직 현재만이 분명하고도 확실한 현실이고 진실인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는 모름지기 이 유일한 현실에 충실해야 하며, 모호한 미래에 허황한 꿈을 갖고 다가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 인생은 향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극복하고 헤쳐나가기 위해 있는 것이라며, "행복하게 산다"는 말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불행을 줄이고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뜻뿐이라는 가르침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 그러나 종교에서의

행복이란 개념은 현세에서의 절제와 신에 대한 경배를 꼽고 있다. 미래 지향적이고 영원을 향한 행복을 강조 한다. 불교에서는 현실에서의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한 것은 모두 무상하고도 허망한 것이며,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열반(涅槃)의 평안함에 있다는 것이다. 그 곳이야말로 생사, 명예, 평판 따위로 마음이 흔들리는 일도 없고, 근심도 없고, 분노도 없고, 오직 열반의 평안함 속에 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의 행복으로서 그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행복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 정신적인 영혼의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현세적인 차원의 행복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하느님을 경배하면서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기 위한 믿음을 강조한다.

 

  . 나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있어서의 행복은 과연 어느 정도의 위치에서 머물고 있을까? 철학자들이 남겨 놓았던 명언들을 이어가며, 행복의 진정된 의미를 음미하여 본다. 재산 명예 지위 따위가 행복을 위해서 중요하다고는 해도, 행복의 본질이 그러한 소유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며, 본성을 실현하기 위한 긍정적인 활동성 자체에 있다고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그것은 과거도 아니며 미래도 아니며, 현재에서의 긍정적 마음 상태와, 현재에서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바탕으로 함을 알 수 있게 한다. 물론 그 희망 가운데에는 “열반이니 영원”이라고 하는 먼 후 일의 종교적인 바람까지도 중요한 요소가 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과도한 욕구와 욕망은 불행을 초래할 수 있으며, 행복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 또한,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쇼펜하우어와 칸트의 생각에 동감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  종교에서의 세계관, 그리고 "나"

 

 

     세계인구 65억 명 가운데 종교를 가진 사람은 84%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기독교(21억), 회교(13억), 힌두교(9억), 유.불.선(8억) 및 토속신앙 등으로 나뉜다. 이중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 불교 아브라함 계(유대교, 기독교, 회교) 종교의 발생시기는 서로 엇비슷한 시기인  2천5백년 ~ 2천년 전에 발생된 것들이다. 

 

신앙이나 믿음은 인류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해왔다. 번개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활동, 맹수의 습격이며 외적의 침략, 삶에서 누구나 닥치는 병로생사 등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이해를 위하여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형태로 발전한다. 그리고 문자와 함께 한 인류문명의 발달은 보다 체계적인 오늘날의 종교형태로까지 성장하게 된다.

 

이는 결국, 알려진 인류문명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대다수 인류는 어느 형태이던, 종교와 함께 의존하며 발전하여 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이 자연 앞에서는 나약한 존재임을 자각하고, 우주의 무한함을 인지하며, 자신의 삶이란 무한한 세월 위에 서 있는 순간에 불과함을 대다수가 인지하고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그 누가 쉽사리 부정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진 다짐 한 마디, 돌 한 개, 별 하나에 나름의 믿음을 던진 이도 있을지는 모르나 …… 인간에게 믿음이란 뗄 수 없는 삶의 조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 종교의 사회성, 도덕성, 영향력의 변천과 전망;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종교는 인류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화 및 행동 양식에 끼치는 영향이 점점 커졌다. 집단 내에서 종교는 사회적 불만 해소, 체제안정, 도덕, 양심, 박애, 사랑 같은 선 기능의 이면에, 체제안정에 이용하거나 이교에 대한 탄압과 질시, 분쟁 등의 악 기능도 있었다.

 

도덕은 당연히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가변적인 상대적 사회 규범이기 때문에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뒷받침될 수밖에 없으며, 종교에 도덕과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도덕을 종교가 받아들인 것이지 종교가 도덕을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로 밖에 설명되지 않았던 자연현상이 과학적으로 밝혀지는 만큼, 종교의 권위는  예전보다 약해지고, 사회체제의 변화로 인해 과거의 풍습과 제도를 유지하는 오래된 종교의 관습체계가 매력적이지 않게 변하여, 현대사회의 종교 영향력은 과거보다 점차 위축되고 있으며,

 

오래된 기성 종교들은 수직적인 명령구조로 인해 종교가 현대사회에 맞춰 변하는 것을 방해 받는 사이, 신흥종교는 이 틈을 타 현대 문명에 더 밀접한 신앙과 규범을 내세워 점증할 것이며, 미래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양식으로 남을 가능성도 크다는 것이다.

 

고전 종교의 경우는 중심 된 기본 명제를 지닌 신학적 가르침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강한 믿음이 따르며, 신도들간의 유기적인 집단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현재에 와서는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는 믿음” 과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유기적인 집합체를 종교, 또는 종교집단으로 보고 있다.

 

 

. 종교의 목적과 발전방향

 

인간의 문화와 역사는 꿈을 추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였고, 인간이 꿈을 꾸는 한 그것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종교에는 두 가지 형태의 꿈이 담겨 져 있다. 그 하나는 기복이고 또 하나는 이상이다. 첫째는, 기복신앙은 이기적 동기에서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삶의 현실에서 늘 다양한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모든 종교에 기복이 나타난다.  둘째는, 세속적 욕망을 추구하는 기복을 넘어 고매한 인간의 삶의 길을 제시하는 형태이다.

 

세계의 종교는 어떤 안목으로 보느냐에 따라, 엄청나게 다른 결론에 이른다. 각자의 생각에 따라 믿음이 다를 수 있지만 서로의 존중만이 공존이 가능하고, 상대의 생각을 조화롭게 수용하여야만 할 것이다.

 

유일신관인 유대교, 기독교, 회교는 절대 신에 대한 사랑과 봉사, 순종과 회개를 토대로 하고 있으며, 한 없는 우주와 윤회 사상을 이념으로 하는 힌두교와 불교는 업보와 연기, 그리고 해탈을 토대로 한 범아일여 사상, 즉 우주와 나는 하나임을 자각하여 진아((眞我)를 거부하고 세속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하늘의 뜻과 지상의 질서와 인간의 내면세계의 질서를 앞세운 유교와 도교, 삶의 기쁨을 누리려는 인본주의 전통의 종교로서는, 그리스, 로마의 예를 들기도 한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야훼신(여호와)이 처음 창조한 인간인 아담과 하와의 자손이므로 그들의 원죄를 물려받아 모두 죄인이며, 이에 따른 시한부 종말론과 메시아의 재림과 함께 심판과 구원을 강력하게 믿고 있다. 그 구원의 믿음은 보통 예수를 믿고, 신뢰하고 의지하며, 그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 속죄에 관한 이해다.

 

불교에서는 우주는 하나가 아니고, 여러 우주가 있다고 하고, 여기는 사바세계라고 부른다. 깨쳐서 지혜가 열리면 너와 나의 분별과 대립은 사라지고, 무한한 자비심이 일어나게 된다. 중생이 이와 같은 믿음을 일으키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빠져 있음을 참회하여, 수행정진을 통하여 부처와 보살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불교의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깨달음(반야.보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우주의 진리로 보고, 업과 윤회를 벗어난 해탈을 하는 것이다.

 

인도의 시크교는 스스로를 신의 존재에 맡기고 신의 발끝에 엎드려 항복 받으려, 종교적 명상과 봉사를 행 함으로서 필요 없는 자존심을 줄이고 다섯 가지의 악(오만, 욕망, 탐욕, 분노, 집착)에 빠지는 걸 방지하자고 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한 때 흥성했던 종교인 마니교는 빛의 영적 세계와 어둠의 물질 세계 간의 갈등과 투쟁에 관한 우주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건은 무한자에 대한 인식이 아니며 그를 향한 행위도 아니고,

    그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온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이다.

    무한자에 대한 사변이 형이상학적이고,

    그를 향한 행위의 근본이 도덕이라면,

    무한자를 직관하고 느끼는 것이 경건과 종교이다.

                                          -  슐라이에르마흐의 '종교론' 중에서

 

 

. 종교에 대한 정의와 분류

 

신을 비롯한 초월적인 대상의 존재 또는 세계에 대한 궁극의 진실, 사람은 어떠한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세계종교사전"에는 아래의 3가지 류바의 분류.분석에 근거하여, 종교를 성립시키는 기본요소를 초절적(超絶的) 또는 초월적(超越的) 존재 (신(神), 부처, 법(法), 원리(原理), 도(道), 영(霊) 등)을 인정하는 특정 관념임에 근거하면서, 종교와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을 초월한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관념이며, 관념 체계에 근거한 교리, 의례, 기관, 조직 등을 갖춘 사회집단 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로서, 종교는 초월적 존재(신(神), 부처, 법(法), 원리(原理), 도(道), 영(霊) 등)에 대한 믿음, 초월적인 것과 개인의 관계,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개인의 태도(믿음 등), 신앙에 기초한 활동(예배, 순례 등), 조직.제도(교회, 사찰 제도 등), 신자로 형성하는 사회시설(교회당, 사원, 사원 등) 등등이다. “신 또는 어떤 초자연적 절대자 또는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 행사”(일본사전(広辞苑))라고도 정의 하고 있다.

 

. 류바(Leuba)의 종교의 정의에 대한 세가지 분류

 

. 주지적(主知的, intellectualistic) 관점에서의 정의

      대표적인 고전적 정의, 예로서  막스 뮐러의 “무한 한 것을 인지하는 마음의 능력”을 들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는 클리포드 기아츠의 “존재의 일반적 질서에 관한 개념의 체계화”가 있다.

 

. 주정적(主情的, affectivistic) 관점에서의 정의

      슐라이어마흐 (Friedrich Schleiemacher,1768-1834)에 따르면 "오직 의존감정", 

      마렛 (Marett, RR) 등도 다른 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합리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종교의 원형을

      정서주의 (emotionalism)에서 논한다.

 

. 주의적 혹은 실천적 (主意的 . 実践的, voluntaristic or practical) 관점에서의 정의

      CP 티레에 따르면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적으로 타고난 무한한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 중국 양수명의 종교관

 

종교의 특징 내지 종교적 이론의 성격으로 초월과 신비를 꼽는데, 초월이란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 세상을 넘어서 있다는 말이고, 신비란 이지 내지 이성적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의미다.

 

무엇이 이 세상인가? 바로 현재 우리의 지식세계, 즉 감각이 미치고 이지가 포괄하는 세계다.

 

종교는 왜 그러해야 하는가? 종교는 유한한 이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 이 세상 밖에 있는 존재에 의지하게 된다고 한다. 이 점에서 초월은 출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지식의 측면에서는 이 세상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초월이고, 정서와 의지의 측면에서는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출세라는 것이다.

 

신비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개 이지로 파악할 수 없는 관념 혹은 경험이 모두 신비며, 각자의 눈과 마음에 작용하는 적극적인 의미는 말로 할 수 없다.

 

종교가 왜 그러해야 하는가? 정서와 의지가 편안하지 못한 것은 이지가 분명하고 명료하게 관찰하기 때문이며, 위험에 처한 경우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할수록 더욱 마음이 동요하고 편치 않다. 종교의 특징 내지 종교적 이론의 성격으로 간주되는 초월과 신비, 즉 감각이 접할 수 없고 이지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은 “이지를 넘어선 것”이다. “초월”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지식이 이지 내지 이성에 의거하여 성립하므로, 이지 내지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의미의 “신비”와 불가분의 관계이다.

 

종교의 기능과 특징은 정서.의지(情志) 방면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능과 이성적 인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입론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특징을 가지는데, 실은 동일한 사실의 양면일 뿐이다. 정서.의지 방면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한데, 지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월의 영역에 의지한다는 특징과, 지식의 세계를 초월하지만 정서.의지 방면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징이 있다.

 

종교의 필요성으로는 약한 정서.의지의 위로를 하고, 모든 신자들의 정서와 의지는 약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끼고 문제에 대처할 수 없어서 매우 자신이 없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정서와 의지가 강하여 그들은 기력에 여유가 있는 듯하고 문제가 없으며 매우 자신만만하다.

 

자연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인간의 정서.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 것일까?

인간의 지식이 증대되어 장차 그러한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종교가 불필요하게 될까?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죄악에 대한 후회와 용서라는 면에서, 기독교는 죄악을 참회하고 선으로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풍부하며, 생존과 화복의 문제에서 신앙심이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누구인가?

■  무아 (無我)

 

 

□ 일체무아 (삼법인설 中)

                                                                                                       카페 장명등에서 발췌불교는 인간을 중심으로 세계를 본다는데, 그러한 인간을 주관적으로 말하면 ''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라고 하는 그 ''는 어떤 것을 가리킬까? 십이처설(十二處說)에서 말 하는 여섯 개의 감관 즉 육근(六根)을 말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나를 탐구해 들어간다면 오취온에 이른다고 말할 수가 있다.

 

"사문이나 바라문이 ''의 실체를 헤아린다면 그것은 모두가 오취온에서 그런다." (잡아함 3)

 

그러나 육근이나 오취온이 그렇게 나라고 할 만한 것들일까. 먼저 인간의 나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어야 하는가 에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바라문의 사상가들은 일찍부터 나의 이런 불변성에 착안하여 그것을 우주의 본질인 범(, Brahman)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說)에 까지 심화시켜 갔다. 이러한 나를 그들은아트만(atman 自我)”이라고 불렀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이 나라고 말하고 있는 여섯 개의 감관이나 오취온에 그러한 상일(常一), 주재성(主宰性)이 있을까. 그들이 모두 무상하고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무상함은 상일성(常一性)이 없기 때문이고, 괴로움은 주재성(主宰性)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결코나의 실체(實體, mama atman)”라고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다.

"눈이 만일 나라면 핍박의 괴로움을 받을 까닭이 없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있으리라. 그러나 눈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핍박의 괴로움을 받고,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할 수가 없다. , , , , 의지 또한 그와 같다." (잡 아함 1)

 

다음과 같은 말도 경전에 자주 반복되고 있다.

"()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오 (非我), 나의 것(我所)이 아니다." (잡아함 1)

 

석존은 그의 제자들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자주 교환하고 계신다.

"색은 무상한가 아닌가?"  "무상합니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닌가?"  "괴로움입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오, 이것이 나요, 이것은 나의 실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없을까?"  "말할 수가 없습니다."  "(((() 또한 그러하다." (잡아함 1)

 

우리들이 나라고 하는 것들(六根, 四大, 五取蘊)은 이렇게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常一), 주재성(主宰性)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 (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實體)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대립,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자아를 탐구한다는 바라문이나 사문들도 아직 진정한 자아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른 경계는 오취온의 차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석존은 범부들의 아집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바라문이나 사문들의 철저치 못한 자아관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라는 관찰에 이어,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불교의 현실판단은 이 무아설(無我說, an-atma-vada)에 이르러 일단락을 이루는데, 이것은 인도 정통파 철학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아트만 사상(atman-vada)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무아설은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입장으로서 인도철학사상 이채를 띤 사상이라고 평가됨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의 이 무아설에 대해 나의 절대적인 부정이나 참다운 나의 탐구를 배격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만일 일체법이 무아요 일체행(一切行)이 공적(空寂)하다면, 그 중에 어떤 나 가 있어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본다고 말하고 있는가?" (잡아함 10)

 

나가 없다는 것이 불가하다는 견해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이 나타날 것이다.

 

"나에 의지하고 의지하라.""나의 主人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라." (법구경)

 ……

무아설의 목적이 이렇게 참다운 나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그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이 문제를 위해 우리는 불교에서 설하는, 일체법에 대한 새로운 차원을 다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참고자료)

 

* 아상(我相)                                                                               (국어사전)

. 오온(五蘊)이 화합하여 생긴 몸과 마음에 참다운 ‘나’가 있다고 집착하는 일을 말함

. 잘못 깨달은 것에 집착하여 이를 참다운 ‘나’라고 생각하는 일

. 자기의 처지를 자랑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 오온(五蘊)                                                                               (위키백과)

  불교 용어로서, 우리들 개인의 존재가 5개 요소의 집합으로서 형성된다는 것,

  몸과 마음 즉 개인 존재를 가리킨다

    . () 肉體

    . () 의식의 感受作用으로서의 감각

    . () 의식 중 槪念·知覺·表象을 구성하는 작용으로서의 表象

    . () 受·想 이외의 능동적인 심리작용으로서의 의지나 행동적 욕구

    . () 대상을 분석판단하고 종합 인식하는 마음의 활동

 

오취온(五取蘊)과 괴로움()                                                       (카페 글 중에서)

. 오취온(五取蘊, Aggregates);    인간의 몸은 '육체의 몸' '정신의 몸'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몸의 모임을 색....식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개념 지어 놓은 것이 오온이다. 육체와 정신의 모임인 오온에 대해 ''라거나 '내 것'이라거나 '나의 자아'라는 자아 취착(집착)의 인식이 발생한 것을 오취온이라 한다. 이는 색취온(몸에 대한 취착). 수취온(느낌에 대한 취착). 상취온(인식에 대한 취착). 행취온(의도적 행위에 대한 취착). 식취온(알음알이에 대한 취착)의 다섯 가지를 뜻한다.

 

. 괴로움();    불교 교리의 핵심이라고 하는 고...(...)의 사성제(四聖諦) 중 하나인 고성제(苦聖諦)에서의 괴로움은 단순한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이나 괴로운 느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오취온(五取蘊)의 괴로움이다. 오온을 나,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중생계의 모든 물질과 정신은 반드시 집착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집착을 야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을 바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 한다.

 

 

 

□   업 (業)

 

   불교는 약 25백 년 전 인도 소 왕국의 왕자의 몸으로 태어난 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그의 교리 속에는 그 이전에 있었던 인도의 사상, 종교적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도 있다.

 

어떤 종교적 창조에도 모태가 있으며 완전한 무의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나올 수가 없다. 인도의 전통적 사상인 힌두는범아일여(梵我一如, 대우주의 본체인 프라푸만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은 일체이다)”를 주장하는데 이 입장을 완전히 부정하고 철저하게무아(無我)”를 주장한 것이 불교이다. 그러나 업에 따른 윤회사상은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힌두사상은우파니샤드에 결집하고 있다. 그것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되풀이하는 가운데 여러 단계의 생을 갖는다는 업(갈마)의 법칙과 유일절대의 실체이자 영원한 보편적인 존재인 프라푸만(梵天)의 원리로 성립한다.

 

갈마()의 법칙에 의하면 사람은 생애를 통해서 여러 업을 축적한다. 그 업은 인간의 욕망, 본능, 물욕, 노여움, 시기질투 등의 삼악(三惡)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사후 곧바로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는데 이때 전생에서 축적한 업이 클수록 천하고, 고통이 많은 것으로 태어난다. 이승에서 얕은 계급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의 업의 결과며, 그 속에서 반항하거나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고 자신을 억제하면 보다 나은 내세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물이나 벌레도 전생은 인간일 수 있다. 노예도 귀족도 전생의 업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불교는 이 윤회사상을 통해 자비와 실상계로 고도의 도덕심을 갖게 하며 특히 스스로의 힘으로 부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절대적 구제가 가능해진다.

 

불교는 카스트의 제일급인 브라만 계급의 승려에 의해 독점되고 경직화된 형식주의, 타락한 힌두교의 본질을 승화, 인간화 시키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윤회사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중생에 대한 구제의 길을 크게 열어 놓은 것이다.

 

(·본질)의 존재를 인정하는 종교인 힌두에는 윤회사상은 명확한 논리적 근거가 있다. 그러나 무아(無我·본질이 없다)의 불교에 있어서는무엇이 윤회하는가라는 물음에는 명쾌한 답이 없다. 이 물음에 대해 어느 학자는 벌레가 식물을 먹고, 그 생명이 벌레의 생명 속에 재생하고, 벌레가 새의 먹이가 됨으로써 그 생명이 생의 생명에 재생 되고 …… 인간의 생명 역시 여타의 생명체에서 얻는다.

 

인간이 죽으면 대지에 돌아가 식물의 영양이 된다. 이와 같이 각 단계의 생명을 윤회전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먹이가 된 것은 물질이며 이 순환은 단순한 물질순환에 불과하다. 본래 윤회는 정신적인 순환이며 정신이 여러 물질적 생명 상이를 전전해가는 상태를 말한다.

 

가끔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나와 화제를 모을 때가 있으나 그 내용은 애매하며 아무도 정확히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전생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전생을 믿었던 고대 인도인들은 인간이 전생의 기억이 없음을 재미있게 설명한다. “사람이 태어날 때 모태에서 좁은 산도를 통해 이승에 나오는데 그 때 머리를 강하게 압박 받음으로써 전생의 기억을 잃는다.” 그러나 이 설명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윤회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상징적 의미로 여기며, 업은 전생, 내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승에 있다고도 생각하여 본다.

 

인간의 어떤 정신적 육체적 언어적 행위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마음, 육체, 사회에 그 흔적을 남긴다. 수양이 쌓이고 지식이 축적되고 몸이 단련되는 것도 모두 업의 결과이며 심지어 최고의 경지인 부처도 될 수 있다. 개인의 생애, 민족의 역사는 모두가 과거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되먹임의 축적으로 여겨진다. 

불교와 수학(김.용운), 글 중에서 일부 발췌

 

□  범아일여 (梵我一如) 사상

 

우주의 근본 원리인 梵()과 개인의 중심인 我()가 같다는 정통 婆羅文敎(바라문교)의 근본 사상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형성되기 이전 고대의 민속종교로 바라문교가 있다. 바라문교는 인도 카스트 제도의 最上位(최상위)에 있는 승려층 바라문(브라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바라문의 經典(경전)베다이고 베다의 마지막 시기에 속하는 것이우파니샤드이다. 이 우파니샤드의 시대에 오면, 만유의 근본원리를 탐구하여 만물의 근본인 브라만(braman: )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 )이 일체라고 하는 梵我一如(범아일여) 사상이 형성된다.

 

여기서 梵()은 우주의 근본으로서 대자연, 그리고 我()는 개인의 중심으로서의 自我(자아)이다. 우파니샤드는범아일여의 사상을 통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설명한다. 진정한 실체인브라만에 뿌리를 둔 자아는 여러 생을 살다가 결국 다시 브라만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선이요, 인간 삶의 목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과 輪廻(윤회)의 목적은 지극한 선의 경지인 브라만의 의식상태, 주객의 구분이 없는 일체자유의 유일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解脫(해탈)이라고 보았다.

  

 

□ 무아 

       차훈명상, 글 중 에서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내일은 오지 않는 시간,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인식하고 체험하는 사람의 감성과 마음, 뇌는 직선적이지 않다. 마치 구불구불한 개울물의 줄기처럼 작은 지류를 만들며 사방으로 퍼져나가  그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작은 삶의 체험들을 창조한다.

 

똑같이 지금 이 시간 몇 분, 몇 초를 동시에 살고 있지만 그 체험은 너무나 다르다.

 

저마다 다른 우주를 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시간(時間)이란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차를 타고 있지만, 가는 길은 차이가 있지만 큰 도로라는 줄기의 대맥에서 보면 모두 길을 달리고 있을 뿐

그러한 길()이 시간(時間)이라 불리는 것 같다.

 

같은 시대와 공간을 사는데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외로움을 느낀다. 차별을 느낀다. 혼자 있음을 느끼고, 가끔 같은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끼리 손을 흔들며 친구가 된다.

 

우리의 육체는 같은 시공 속에 물리적인 정보와 영향을 공유하며 존재하건만 마음은 딴 곳에 있다. 서로의 맘이 제각기 너무 다른 세계를 산다. 우리 마음의 세계.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울고, 어떤 이는 비웃고, 어떤 이는 무심하다. 어떤 이는 쾌락 속에 있고, 어떤 이는 고통 중에 있다. ......

 

우주가 한없이 외롭다. 이 마음의 세계를 깨고 나아가고 싶다. 본래 모든 것이 서로 막힘이 없고 외롭지 않았다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진리가 근본이치라면,

이제 나도 서정윤 시인의 '마주보기'처럼 '홀로서기'의 문구처럼 손을 내밀어 너를 만나고 싶다.

 

사랑은 무엇인가? 자비는 무엇인가? 해탈은 무엇인가?

 

나를 깨뜨림이 그 시작일까? 외로운 그 세계를 산산이 부수고 싶다. 내 맘의 세계 ……

같은 곳에 살면서도  너의 손을 잡지 못했던 내 맘의 작은 세계 ……

我房(아방) ……

 

가만히 앉아본다. 가만히 앉아 나를 놓아 버린다. 나를 놓고 너를 연다.

아픈 우주를 받아들인다. 일체를 받아들이고 싶다. 바다처럼 출렁이는 물결 속, 내가 없는 한 점이고 싶다.

 

범아일여 ……

 

 

 

■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셸링 지음, 출판 서광사, 한자경 역

 

(목차). 지식의 실재성의 궁극적 근거 : 무제약자 . 무제약자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무제약자, 즉 절대적 자아는 어떤 존재인가 . 완성적 독단론의 비판 . 미완성적 독단론의 비판 . 미완성적 비판주의 비판 . 완성적 비판주의 . 자아의 근원 형식 . 자아의 자기정립 . 자아의 양 . 자아의 성질 . 자아의 관계 . 자아의 양태 . 관념론과 실재론의 개념 규정 . 이론적 명제 일반의 형식 . 양에 따르는 일반적 명제의 규정 . 성질에 따르는 일반적 명제의 규정 . 양태에 따르는 일반적 명제의 규정 . 절대적 정립 명제 . 동일성의 원리와 종합의 원리 .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의 구분 . 절대적 자아의 절대적 자유와 경험적 자아의 초월적 자유의 관계 . 경험적 자아의 초월적 자유와 자연 인과성의 조화

  

□  출판사 서평

 

셸링의 자아에 대한 사유에 앞서 자아를 철학의 본격적 주제로 등장시킨 철학자는 바로 데카르트이다. 데카르트는 세계 또는 신보다 그 존재가 더 확실하고 더 자명한 것은 무언가를 찾고 의심하며 희구하는 나 자신임을 방법적 회의를 통해 찾아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자신이 직관한 자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이에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들은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 제약된 현상적 자아와 무제약적 절대적 자아, 개체적 자아와 보편적 자아를 구분하는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를 행한 사람이 바로 칸트이다.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은 칸트에 의해 구분된 이 두 측면을 변증법적 관계로 발전시켜 나간다.

 

셸링은 피히테의 영향을 받아 이 책에서 사유와 존재가 하나인 절대자, 다른 지식에 의해 결코 제약 받지 않는 무제약적 절대 자아를 철학의 출발점 또는 철학의 제일원리로 간주한다. 원칙적으로 사물화 또는 객체화될 수 없는 무제약자란 셸링에 따르면 주체에 대면한 객관적 사물, 즉 객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객관화가 가능한 주체도 아니며, 오직 주객 분리 이전의 "절대적 자아"일 뿐이다.

 

셸링은 "자아는 모든 존재와 모든 실재성을 포함하며, 따라서 자아는 자아 외부의 실재성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는 단적으로 무한하다. 그리고 자아의 단일성과 통일성으로부터 자아의 분할 불가능성은 귀결된다. 자아의 분할 불가능성으로부터 자아의 불변성이 나온다. 자아는 항상 자기 자신과 동일하며, 모든 변화 너머의 존재"라고 자아를 규정한다. 그리고 나서 자아의 근원 형식과 자아의 자기 정립에 관하여 논의한다.

 

결론에 이르러 셸링은 관념론적 형이상학자들이 시도했던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의 구분을 한층 발전시켜 절대적 자아의 절대적 자유와 경험적 자아의 초월적 자유의 관계, 경험적 자아의 초월적 자유와 자연 인과성간의 조화에 관해 말한다. 즉 그 둘의 조화 원리는 절대적 자아 안에 있으며, 경험적 자아를 절대적 자아로 동일화해 나가는 것이 곧 도덕성의 완성이라는 것이다. 셸링은 결국 유한한 자아는 무한자에게 있어 현실적인 것을 세계 안에서 산출하도록 노력해야 함을 주장한다.

  

 

□    철학의 원리로서의 자아”     F.W.J.셸링 지음, 서광사

 

                          오늘의 책”  1999. 4. 신간서평 중에서

        인간 의식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를 분석하는 철학은 대충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된다. 거기에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것이 있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가능한 관계의 조합은 나와 너, 나와 그것일 것이고, 그 관계의 종합이나 상호 화해는, 우리가 되거나 폭력이 된다. 물론 바람직한 관계, 또는 관계라 일컬을만한 유일한 관계는 우리일 것이다. 이런 철학은 주체, 객체, 개념, 인식, 시간 등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으로 여긴다.

 

셸링의 이 책은 또 다른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가 다루는 개념을 보면 영원, 절대, 내재, 존재, 직관, 동일 등이 있다. 나는 이 개념들의 내용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의식 분석의 철학과 다른 개념을 쓰고 있음을 보일 수 있으면 충분하다. 서로 다른 개념의 그물 안에서 이 책의 주제인 자아를 살펴보자.

 

의식 분석의 철학, 특히 칸트 철학은 지각하고 인식하는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 안에서만 자아를 생각한다. 이런 자아는 상대적일 수 밖에 없고, 자체로 실재성을 지니지 못한다. 셸링은 절대적인(절대적이란 말을 권력관계 비스무리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자아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자아는 주체도 아니고, 경험하는 자아도 아닐뿐더러, 개념으로 파악할 수도 없다. 그 자체로 실재성을 지니고 있으며, 시간 안에 있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상대적인 자아, 비아에 대한 자아, 논리적인 자아, 사유 통일성의 원리일 뿐인 자아, 경험적 자아인 이른바 주체의 존재 근거가 되는 자아가 이 절대적인 자아이다. 이것은 '나는 있다'라는 절대적 형식의 표현이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 안에 있는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있다'라는 절대적 정립일 뿐인 이 자아는, '있음'이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칸트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오직 직관 안에서만 알 수 있다. 우리도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절대적인 나를 느껴보려 애써야 한다. 선가(禪家)의 말을 빌어, 나는 끝없는 바다이면서, 그 위에서 이는 파도라고 상상을 해보자. '고요한 기쁨'을 느껴보자.

 

의식의 철학은 최고의 시력을 발휘하여 나 안에 다른 나(타자라고 하기도, 타아라고 하기도 하는)가 있어서 나라는 것은 원래가 우리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계몽의 기치를 높이 세운다. 하지만 이제 관계가 하나 더 있다. 나와 큰 나의 관계가 있다. 셸링의 나와 나는, 서로가 나 아닌 것이 될 수 없기에,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폭력적인 동일성이 아니다. 나는 거대하고 고요한 나에 안겨 있다. 나의 가장 깊숙한 곳에 끝없이 깊은 내가 있다. 여기에서 느껴지는 것은 영원한 그리움과 비상, 그리고 나의 '있음'이다. 여기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영원한 '낳음'이 있다. 이 사실은 철학자보다는 시인들, 신비가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잘은 모르지만 셸링은 낭만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런 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불평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참되기만 하면 뭐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철학 기획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 개념으로 매개되는 것을 넘어, 의식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을 사유하려 했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생각난다. 나는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철학책을 읽었다기 보다는 어떤 아름답고 숭고한 것, 끝없는 밤하늘 같은 것에 덮쳐진 듯한 느낌이 든다. (김.정.훈)

 

* 셸링 (Schelling,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1775.1.~1854.8.) 

   . 독일의 철학자.    . I.칸트, J.G.피히테를 계승하여 G.W.F.헤겔로 이어 주는 독일 관념론의 대표자의 한 사람이다.      헤겔의 사상을 '소극 철학'으로 보고, '적극 철학'을 설파하여 '이성' '체계'를 깨뜨리는 실존철학의      길을

 

열었다. 주요 저서로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인간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찰등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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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되돌아 보게 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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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 수 없어요

 

 

    알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文)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우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만해, 한용운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오동잎, 하늘, 향기, 시내, 저녁놀이 "던져진 형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형이 이루어진 변형"이 되는 것이다.

 

 누구의..........입니까 …… 가리워진 님의 현존성에 관한 해명이 독창적인 독자의 호응을 기대하는 겸양과 조심성까지 지니고 있다. …… 여기서누구는 우주질서 속에 놓여 있는 초절대자인 부처이다.

 

 발레리는 인간의 심리상태는 어떠한 특별한 우주감각과 결부되어 있다고 하였다. 우리를 압도하는 듯한 어떤 광경, 석양이나 달빛이나 산림, 바다 등은 때에 따라 우리를 크게 감동시키는데, 이러한 종류의 감동은 다른 그것과 달라서 미의 세계를 형성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하여 이 우주감각의 영역에는 어떤 황홀경을 이루고, 심미적으로 통분(通分)되어 서로 공감을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심리상태를 그는시적 감동이라고 부른다.

 

 "알 수 없어요" 역시 우주감각과의 감동을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 질서의 근원에 직면했을 때, 베그로송은 커다란 경이를 느끼며, 나아가서는 무한 속에 놓인 존재로서의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여, 어떤 초현실적인 절대자를 그리워하고 여기에 의존함으로써 인생이 고뇌와 무상에서 벗어나고자 한다고 한다.

 

 유한자인 만해 역시 무한자인 우주질서의 본질에 직면하여 끝없는 물음을 통하여 불교의 윤회로 다시 무한에 놓인 자신을 발견하고희미한 등불로 구도의 길, 즉 영원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 수직이면 파문이 있을 수 없고, 파문이 있으면 수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물상은 영겁이라는 시간으로 볼 때, 순간적이요 찰나적인 것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수직의 파문을 결점으로 보는 것은 오류이며, 그 파격을 통해 고요함 속에서 미세한 움직임을 보는 불교의 정적 세계, 선적세계의 극적인 표현을 획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바람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곳에 처하매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공불이색(空不異色)의 무(), ()에 처해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발자취의 거리는 무한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고 오동잎에서 또 무한으로 확대되는 님의 발자취를 봄으로 자연 속에서 님을 보는, 자연과 님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

 

 만해는 이러한 본질을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짐짓 바람이 없는() 곳에서 파문을 내는(), 즉 무에서 유를 보게 하는 선적체험(禪的體驗)을 가능케 하는 주체는 누구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것이다. ……

 

 절대적 의미를 지닌 존재로서의하늘은 그 절대적 존재를 부정하고 감추려는 공포의 힘, 무서운 구름속에 존재하고 있다. 깨달음이 없는 번뇌와 망상 속에서 중생의 헛된 시간, 고통의 시간이지리한 장마의 시간이라면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보이는푸른하늘은 순간적 깨달음의 순간이며, 동시에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다. 그것은 일제하 삶의 형태로부터의 자유인일 수도 있고, 모든 우주현상의 유와 무를 초월하여 공()의 세계로 합일하려는 깨달음의 경지에 대한 갈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시 만해는 깨달음이 없는 곳에서 자유가 있는 곳으로 행하게 하는 것은혹시 님이 아닙니까?”로 묻고 있는 것이다.

 

 깊은 나무의 푸른 이끼의 공간적 깊이, “옛 탑의 시간적 확대, 즉 시공을 초월한 삼계현상(三界峴象)에 꽃보다 더 향기로운 향기는 님의 입김, 또는 조국의 역사적 뿌리와 창조의 역사적 흐름이 아니겠냐고 역설적으로 묻고 있다. 환언하여 꽃이 없는 곳에서 향기가 있는 선적세계를 보게 하는 것이 혹시 님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

 

무시무종, 광대무변의 구천(九泉)에서 솟아 겁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무한적인 영원성과 무한대로 흘러가는 시내의 모습이다. 그런데 유한자인 인간은작은 시내로 밖에 접근할 수 없는 제한적이지 않는가. 분명 구도의 길은 탄탄대로일 수가 없으며, “수없이 많은 돌부리에 채이고, “가늘게 흐르다" 진리에 접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역시 식민지 상황으로 환치해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근원도 없는 곳에서 가늘게나마 진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한 선적체험은 누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냐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님에 대한 의혹, 즉 맺힘은 님의 현현(顯現)에 의해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저녘놀은 누구의 시입니까?”에서는 그 존재의 크기와 행동의 영역이, 무한대한 바다와 무한대의 하늘에 미치고 있다고 보며, 동시에 법신(法身)의 나타남을 보게 된다. 유는 무의 세계로 변하고 무는 유의 세계로 변하는 가운데서 다시 공의 세계로 현현하여 법신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저녁놀이 밝음은 밝음의 종말로서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으로 파악되고 있다. 그것은 무한자인 인간의 한계 상황으로 볼 수 있고, 조국의 정치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아름다운 실체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

 

 저녁놀이 보여주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은 순간적으로 보인 절대자의 모습이나 위기상황에 처한 조국의 모습이다. 이를 보고 마지막 연에서 하나의등불이 되어, “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밤을 지키고자 한다. 거듭나는 윤회 속에서 가려짐에 의한 어둠을타고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밝히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는 의지적 강인성으로 일관한 저항정신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끝없는 구도정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다시 기름이 됩니다”는 실제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지만 의지적으로는 가능한 역설이며, 그렇게 해야 님의 현존이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필연의 논리가 확인된 것이다. 더구나 "약한 등불은 존재의 한계성을 깨닫는 슬픔이면서 사라져 가려는 밝음을 스스로가 지키려는 엄청난 사명이다. 그것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기여이기 때문이다.

 

 만해는 불교와 속세가 하나였듯이 종교적 신념과 조국의 현실이 하나였다. 그는 이 시에서 무에서 유를 보게 하는 그 초절대자가 "누구입니까?"하는 겸손한 태도로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접근과정에서 확인되는 법신과 유한자인 인간의 갈등관계에서 그는 스스로 거듭나는 고통을 감수하며 "약한 등불"이 되어 험난한 구도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고 있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역사의 한 유물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깊이 통찰하고 그 제국주의자와의 열렬한, 그리고 전투적인 "등불"의 시인으로 남기를 자처했다. 또한 조국과 민족에 대한 "그칠 줄 모르고 타는" 지조와 부활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나 정치상황의 변모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드러내고 있다. ……

 

이 시는 우주질서의 초 절대자 또는 조국이라는 대상을 통해 무에서 유를 보게 하는 선적주체에 대한 끝없는 물음 즉, 맺힘이 님의 현현과 조국 본체의 파악으로 전환을 이루게 되어, 구도의 길을 가겠다, 또는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의지적 자아를 확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만해 한용운의 대상과 자아의 인식 태도           '알수 없어요'를 중심으로,                                                                                             작가 방.영주, 시론 중에서 일부발췌……  만해에 있어 시적 대상은 불교이면서 동시에 민중이며 조국이었다. 그에게 있어 불교는 出世間 있으면서 다시 俗世間 있는 불교였다. 현실의 정치 속에서 진실의 실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그는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기 위하여 불도에 귀의한다. 그러나 그가 이르게 되는 최종적인 입장은 완전히 출세간 불도의 그것이 아니라, 다시 말해 세간을 버리고 세간에 나는 것이 아니라, 세간에 들어서 세간에 나는 것이다. , 한용운에게 불타의 진리는 세상 밖에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이다.

 

 그에게 있어서 불교가 그 자체로서 어떤 절대적 가치, 불변의 고정관념일 수는 없었다. 만약에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치 않다면 아무리 위대한 불교인이 나온다고 해도 마침내 불교는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처럼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미신과 의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종교로 보고 있다.

 

 대중불교라는 것은 불교를 대중적으로 행한다는 의미이니 불교는 반드시 악을 버리고 선을 떠나서 인간사회를 격리한 후에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사회의 만반 현실을 조금도 여의치 않고 번뇌 중에서 보리를 얻고 생사 중에서 해탈을 얻는 것이므로 그것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것이 곧 대중불교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에서 신비주의의 껍질을 벗기고자 하는 계몽주의자,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읽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만해의 불교 가르침은 평등주의에 입각하고 있으며 만해 사상의 창조적인 점은 이러한 불교 평등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인 관념으로만 보지 않고 역사적 사회적 현실의 차원"에서 파악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해의 항일 전력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그는 불교를 현실과의 적극적인 관계 속에서 해석했으며, 이러한 분석태도는 민족적 위기에 대처하려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 ……

 

 

 

  

■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   묵시록

칼릴 지브란 (1883-1931)

나희덕 역, 진선출판사

밤이 깊어 대지도 가면을 내려놓고 잠이 들 무렵

나는 잠자리에서 나와 바다를 향하네.

"바다는 끝내 잠들지 않고

잠 못 이루는 영혼을 위로해주지."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엷은 안개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마치 처녀의 얼굴을 가린 베일처럼

온 세상을 덮고 있었네.

 

그곳에 서서, 파도를 바라보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며

나는 바다 저편에 있는 어떤 힘에 대하여 생각하였네.

그 힘이란 폭풍과 함께 떠돌고

화산과 함께 폭발하고

미소 짓는 꽃들과 함께 웃고

속삭이는 시냇물과 함께 노래하는 것이었네.

 

문득 나는 뒤 돌아서서

근처의 바위에 앉아있는 세 형상을 보았네.

안개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한 그들을.

 

알지 못할 어떤 힘에 이끌려

그들이 앉아있는 바위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네.

그곳에는 나의 환상을 휘저으며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에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았네.

그 순간 세 형상 중 하나가 일어나

바다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하였네.

"사랑 없는 삶은

꽃이나 열매 없는 나무와 같다.

아름다움 없는 사랑은

향기 없는 꽃이나 씨 없는 열매와 같다.

삶과 사랑과 아름다움, 이 세 가지는 한 몸인데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는

무한하고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그때, 두 번째 형상이 일어나

물결이 밀려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네.

"저항 없는 삶은

봄 없는 계절과 같다.

정의롭지 못한 저항은

불모의 사막 속의 봄과 같다.

삶과 저항과 정의, 이 세 가지는 한 몸인데

그들과 바꿀 수도 나눌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 세 번째 형상이 일어나

우레 같은 음성으로 말하였네.

"자유 없는 삶은

영혼이 깃들지 않은 육체와 같다.

사상 없는 자유는

혼란스러운 영혼과 같다.

삶과 자유와 사상, 이 세 가지는 영원한 한 몸인데

끝내 사라지거나 지나가버리지 않는 존재들이다."

 

마지막으로, 세 형상들이 일어나

장엄하고 두려운 음성으로 말하였네.

"사랑과 사랑이 낳은 모든 것

저항과 저항이 창조한 모든 것

자유와 자유가 가져온 모든 것

이 세 가지는 모두 신의 형상들이니···

그 신은 한정된 의식 세계에 살아있는 무한의 정신이다."

 

그리고 나서, 보이지 않는 날개들의 떨림과

그 울림으로 가득한 침묵이 흘렀네.

나는 들려오던 음성의 메아리에 귀 기울이며 눈을 감았네.

 

내가 두 눈을 떴을 때 안개가 낮게 깔린 바다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네.

그 바위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지만

하늘 위로 떠오르는 향기로운 기둥,

 

그 이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네.

  

 

□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칼릴 지브란 (1883-1931)

나희덕 역(1989), 진선출판사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우주는 너의 소리를 듣지 않는다네..

고요 하라, 나의 마음아

슬픔과 탄식으로 무거워진 하늘은

너의 노래들을 견딜 수 없으리라..

고요하여라

밤의 환영들은

네 신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지 않고

어둠의 행렬은

네 꿈 앞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기에,

고요 하라, 나의 마음이여

새벽 녘까지 고요하여라..

끈기 있게 아침을 기다리는 자

힘차게 아침을 맞을 것이요..

빛을 사랑하는 자 빛의 사랑을 받으리니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아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꿈 속에서 나는

사나운 화산 위에서 노래하고 있는

지빠귀 소릴 들었고

흰 눈 위로

고개를 내미는

나리꽃 한 송이를 보았다네..

묘비 사이에서 춤추고 있는 벌거벗은 천녀와

해골을 갖고 놀며 웃고 있는 아이를 보았네..

이 모든 걸 나는 꿈에서 보았다네.. 

 

……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아..

여명이 밝아올 때까지 고요하여라..

고요하여라

폭풍우가 네 속의 속삭임을 조롱한다 해도..

고요하여라, 내 마음이여, 새벽녘까지

아침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자

아침이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리니..

 

보아라, 나의 마음이여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말해보라, 너에게 아직 말할 힘이 남아 있다면,

보아라, 나의 마음아, 아침의 행렬을

아침을 맞는 네 속의 노래를

밤의 침묵이 휘저어 놓진 않았는가?

 

보아라, 골짜기 위를 나는 비둘기와 지빠귀를..

새들과 함께 날 그대의 날개는

밤의 두려움으로 더 강해지지 않았는가?

보아라, 목자가 우리에게서 양떼를 인도하는 것을..

푸른 풀밭으로 따라가려는 그대의 바램을

밤의 그림자가 재촉하지 않았는가?

보아라 포도밭으로 서둘러 가는 젊은 청년과 아가씨를..

일어나서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려는가?

 

일어나라, 나의 마음이여..

일어나서 새벽과 함께 움직여라..

밤이 지나가고 그 두려움은

검은 꿈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이기에..

일어나라, 나의 마음이여..

노래에 그대의 목소리를 실어보라..

새벽과 함께 노래 부르지 않는 건

어둠의 자식 뿐이기에..

 

 

□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칼릴 지브란 (1883-1931)

1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모든 걸 사랑하라고

또한 다른 이들이 헐뜯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라고.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랑 받는 사람까지도 고귀하게 만든다는 걸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는 사랑이

가까이에 피어난 두 꽃 사이의 거미줄과 같았네.

그러나 이제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는 후광(後光) ---

지금까지 있어온 모든 것을 감싸고

앞으로 있을 모든 것을 에워싼 채

영원히 빛날 후광과도 같다네.

 

2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형태와 색채 뒤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보라고

또한 추해 보이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보일 때까지

잘 살펴보라고.

내 영혼이 이렇게 충고하기 전에는

아름다움을

연기기둥 사이에서 흔들리는 횃불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연기는 사라져 없어지고

불타고 있는 모습만을 볼 뿐이라네

 

3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혀끝도 목청도 아닌 곳에서 울려 나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그 날 이전에는 나의 귀가 둔하여

크고 우렁찬 소리밖에는 듣지 못했네.

그러나 이제 침묵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웠으니

시간과 우주를 찬송하며

영원의 비밀을 드러내는 침묵의 합창을 듣는다네.

  

5

내 영혼이 나에게 충고했네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보라고.

우리가 매달려 온 것은

우리가 갈망하는 것들이었음을

내 영혼은 보여주었네.

예전에 나는, 겨울에는 따스함으로

여름에는 서늘한 미풍으로 만족했으나

이제 내 손가락들이 안개처럼 되어

붙잡았던 모든 것들을 떨어뜨려

보이지 않는 나의 갈망들을 뒤섞어버리려 하네.

 

6

내 영혼이 나를 초대했네

뿌리도 줄기도 꽃도 없는 보이지 않는 나무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도록.

예전에 나는 정원에서 향기를 찾았었고

향긋한 풀잎이 담긴 항아리와 향기로운 그릇에서

그걸 찾았었네.

그러나 이제 타버리지 않는 향기만을 느낄 수 있네.

지구의 모든 정원과 우주의 모든 바람보다도

더욱 향기로운 공기를 숨쉬고 있네.

 

……

 

8

내 영혼이 나에게 시간을 헤아리라고 훈계했네

"어제가 있었고, 또 내일이 있을 것이다." 말하면서.

그 때까지 나는

과거란 단지 잃어버린 채 잊혀질 시대라고 생각했었고

미래란 내가 얻을 수 없는 시대라고 여겨왔었네.

이제는 이것을 배웠다네.

덧없는 현실 속에서도 모든 시간이란

시간 속에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언젠가는 얻어지는 것이며

마침내는 실현되리라는 것을.

 

……

  

13

내 영혼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네

내가 지닌 빛이 나의 빛이 아니며

나의 노래가 내 안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걸.

내가 빛과 함께 다닐지라도

나 자신 빛이 될 수 없고

줄이 달린 악기는 될 수 있어도

나 자신 그 악기를 켜는 사람은 아니라네.

 

14 ……

 

 

□  밤의 노래

 

                                                       칼릴 지브란 (1883-1931)

고요한 밤이 되어

꿈들은 침묵 속으로 숨는다네.

달이 떠오르고 있고 ---

그녀는 낮을 보는 눈을 지니고 있지.

 

오라, 들판의 딸이여

가자꾸나, 연인들이 만나는 포도밭으로.

그러면 아마도 사랑의 포도주로

우리의 갈증을 달랠 수 있으리.

 

귀 기울여보라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 골짜기로 흘러내리고

언덕은 푸른 박하향으로 가득 찼네.

 

두려워하지 마오, 사랑하는 이여

별들이 우리 만남의 비밀을 지켜주리라

부드러운 밤안개가 우리의 포옹을 가려주듯이.

 

……

  

 

□  예언자

 

                                                                                                       칼릴 지브란 (1883-1931)

칼릴 지브란의 시대를 뛰어넘는 성서, “예언자”,  '알무스타파'라는 예언자가 오팔리스 사람들에게 문답 형식으로 깨달음을 전하는 과정을 담은 산문시예언자는 사랑, 결혼, 자녀, 감정, 우정, 종교, 죽음 등 26가지에 대해 다루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준다. 이 책은 그러한예언자를 영어로도 담아냈으며, 리듬을 따라 의미 있게 행을 바꿔 운문성을 부여했다. 저자의 대표작예언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사랑 받는 고전 중의 하나다. 15세 소년 시절부터예언자를 구상하기 시작한 저자는 가족의 죽음, 냉정한 뉴욕 생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 그리고 평생의 친구이자 연인인 메리 헤스켈과의 만남을 겪으며 오랜 시간 다듬어갔다. 1923년에 출간된예언자는 저자 특유의 아름답고 신비로운 문장으로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냈다.

 

. 목차

 

배가 오다 The Coming of the Ship

사랑에 대하여 on Love

결혼에 대하여 on Marriage

아이들에 대하여 on Children

주는 것에 대하여 on Giving

 

먹고 마심에 대하여 on Eating and Drinking

일에 대하여 on Work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on Joy and Sorrow

집에 대하여 on Houses

옷에 대하여 on Clothes

 

사고파는 일에 대하여 on Buying and Selling

죄와 벌에 대하여 on Crime and Punishment

법에 대하여 on Laws

자유에 대하여 on Freedom

이성과 열정에 대하여 on Reason and Passion

 

고통에 대하여 on Pain

자기를 아는 것에 대하여 on Self-Knowledge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on Teaching

우정에 대하여 on Friendship

말하는 것에 대하여 on Talking

 

시간에 대하여 on Time

선과 악에 대하여 on Good and Evil

기도에 대하여 on Prayer

쾌락에 대하여 on Pleasure

아름다움에 대하여 on Beauty

 

종교에 대하여 on Religion

죽음에 대하여 on Death

작별 The Farewell

  

 

□  모래, 물거품(SAND AND FOAM)

 

                                                                   칼릴 지브란 (1883-1931)

1

나는 영원토록 이 해변을 거닐고 있습니다.

모래와 물거품 그 사이.

높은 파도에 나의 발자국은 지워져 버릴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거품 또한 날려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바다와 이 해안은

영원까지 남을 것입니다. 

 

2

일곱 번 나는 내 영혼을 경멸하였습니다.

 

제일 처음

나의 영혼이 저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해

비굴해지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두 번째는 나의 영혼이 육신의 다리를 저는 사람들 앞에서

절룩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세 번째는 나의 영혼이 쉬운 것과 어려운 것 사이에서

쉬운 것을 선택하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네 번째는

나의 영혼이 잘못을 행하고서도

타인들도 잘못을 행하노라고

스스로 합리화하였을 때입니다.

 

다섯 번째는

유약함으로 몸을 사려 놓고는

그것이 용기에서 나온 인내인 양 짐짓 꾸밀 때입니다.

 

여섯 번째는

어떤 사람의 얼굴이 추하다고

마음 속으로 경멸했을 때입니다.

바로 그 얼굴이

내 마음 속의 가면들 중 하나라는 것은 모르는 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영혼이 아부의 노래를 부르고

그것을 덕이라 여길 때입니다.   

 

3 ……

 

12

그대의 이성과 나의 감성은 결코

서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대의 이성이 숫자 헤아리기를 멈추고

나의 감성이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을 멈출 때까지는. 

 

13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한낮의 태양 앞에, 깊은 밤 별들 앞에.

또한 그대는 자유롭습니다.

태양도 달도 별도 모두 존재하지 않을 때.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있는 앞에서도 두 눈을 감을 수 있다면

그대는 진정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사랑하고 있는 이 앞에서

그대는 노예입니다.

그대가 바로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그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에. 

 

……

 

15

그대의 타고난 결점을 후천적인 미덕으로

새하얗게 씻어내려 하지 마십시오.

나는 기꺼이 그 결점들을 지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결함들은

바로 나 자신과도 같은 까닭입니다.   

정은하 역(1989), 진선출판사

 

 

□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레바논 출생의 미국 시인.

1895 12세 때 아버지만 레바논에 남고 전 가족이 미국의 보스턴으로 이주하여 2년간 영어를 공부하고, 다시 레바논으로 돌아와 5년간 아랍어와 프랑스어를 수학했다. 1908년 프랑스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을 만나 3년간 미술을 공부하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보스턴의 한 출판업자의 도움으로 북디자이너로 일했다. 초기 작품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씌어진 산문시들과 희곡작품들이다.

 

20세를 전후하여 영어로 작품을 쓰기 시작하여 1923, 20년간의 구상을 거쳐 완성한 원고를 출판하기로 결심하는데, 그 작품이 바로 영어로 기록한 산문시 예언자 The Prophet”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한 답을 깨닫게 하여 현대의 성서라고 불리는 예언자는 아랍어로 쓴 소설 부러진 날개 The Broken Wings”(1912)와 함께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사랑 받고 있다.

 

아메리카의 보헤미아라고 불리는 그리니치빌리지에서 독신으로 지내며 예술활동에만 전념하면서 늘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주장하고, 레바논의 종교적 단합을 호소했다.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는 1975년 처음 번역된 산문시집 예언자를 비롯하여 첫사랑을 주제로 다룬 소설 부러진 날개”, 잠언집 모래 ·물거품 Sand and Foam”(1926), 우화집 방랑자”(1932) “고요하여라 나의 마음이여 Prose Poems” “세월 Time and Tide”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등의 작품이 소개되었다.

(백과사전 인용)

 

 

 

■   길은 내 안에 있다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Osho Laznishi, 1931∼1990)

 

 

.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시간 속의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 .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전염성이 있다.

 

. 스승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준다.   선생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세상에 전해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 . '나는 자신을 안 모든 사람들의 발 밑에 절합니다.'

 

.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 .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러나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 저는 단지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고 그것은 저의 권리에요. 상황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에요.. "제발 선생님의 갈 길만 가주세요. 선생님의 과목이 아니면 어떠한 조언도 제에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야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저의 삶을 탐험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저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리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젠가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

 

.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 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 구두쇠는 주먹을 꽉 쥐고 죽을 것이다. 이직도 붙잡고 집착하면서, 아직도 죽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직도 이완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손을 펴고,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나누었듯이 자신의 죽음마저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 그들은 와야 했기 때문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단지 사회적인 관습을 충족시키기 위해,   단지 그들이 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오는 것조차도, 그들이 죽었을 때 청소차가   그들을 실어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

 

.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라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 우리는 이미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그대는 그대와 그대의 희망 사이의 거리를 줄일 수 없다. 희망은 지평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 나는 평범한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관점들은 모두 버리고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관점만을 선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 돈은 언제나 나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무척 어려워진다. .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 나는 모든 독서를 통해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독서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나의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 지역적인 한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 그 모든 말들은 공허했다. 경험을 통한 뒷받침이 전혀 없었다. .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

 

.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 . 부유한 자가 종교적이지 않다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다.   가난한 자가 종교적이라면 그는 엄청나게 총명한 것이다.

 

.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그 한 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생각이 멈춘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둘은 정반대이다. .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이 아직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다른 모든 문들은 그대가 이미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

 

.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들을 넘어 움직일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생각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마음의 부분이다.

 

. 그대는 알고 있다. 그대가 눈을 감고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무엇을 만나는가?   그대는 붓다가 이야기하는 극락정토를 만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곳에서 억압된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지옥들과 고뇌들을 만난다. . 모든 사람들의 100도가 각각 다르다.   사람 또한 100도에서만 수증기로 변하지만 모든 사람의 100도는 서로 다른 것이다.

 

.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 외부에 빛이 있다. 따라서 그 빛이 그대 내면의 어둠을 보여준다.   흰 셔츠 위에 묻은 작은 진흙, 그것은 눈에 띈다. .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이다.  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어느 날은 성공하고, 어느 날은 실패한다. 어느 날은 정상에 있고, 또 어느 날은 밑바닥에 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

 

.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들을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 나의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

 

.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기다려온 때라는 것을, 이것이 그대의 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며, 도전이며,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라.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라. 조용히 그대 자신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다.

 

.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 기러기는 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는 욕망이 없다. 그리고 물은 기러기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이나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난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면 물은 기러기를 비춘다.   그 반영은  거기 있다. 그 상은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은 비추려는 마음이 없고 기러기도 비춰 지려는 갈망이   없다.

 

.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 세상은 그대가 빗나갈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때 각각의 성공들은 엄청난 기쁨이 된다. 그대는 중심에 남는다. . 이제 나의 방식으로 살아라. 스스로 책임을 져라. 그래서 다른 누가 그대에게 명령할 필요가 없게 하라. .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

 

.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시간 속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정지할 때의 느낌, 완전한 정지의 느낌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경험과 같다.

 

.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상태이다.

 

.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가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 이완하라. 그대가 단지 주시자일 뿐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   육체는 그대가 아니다. 마음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대가 거울과 같은 주시 속으로 침잠함에 따라 전 존재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모든 것이 신성해진다.

 

. 이번에는 정말로 인공의 사원이나, 인공의 종교가 아닌 그대 본래의 집으로 들어가라.   그대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왜 자꾸만 복사품이 되려 하는가?

 

 

 

 

■  "나"를 생각하며 

  

 

□  벗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가장 무서운 칼도 나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자신 중 어느 것을 쫓느냐에 따라

우리의 운명은 결정된다.

 

나 자신만의 인간 가치를 결정 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 가이다.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  비워가며 닦는 마음

  

모름지기 살아간다는 것은

가득 채워져 더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비워가며 닦는 마음이다.

 

비워 내지도 않고 담으려 하는 욕심,

내 안엔 그 욕심이 너무 많아

이리 고생이다.

 

언제면 내 가슴속에

이웃에게 열어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

수수한 마음이 들어와 앉아 둥지를 틀구

바싹 마른 참깨를 거꾸로 들고 털 때

소소소소 쏟아지는 그런 소리 같은 가벼움이

자릴 잡아 평화로울까.

 

늘 내 강물엔 파문이 일고 눈 자국엔 물기 어린

축축함으로 풀잎에 빗물 떨어지듯 초라하니

그 위에 바스러지는 가녀린 상념은 지져대는

산새의 목청으로도 어루만지고 달래주질 못하니

한입 베어먹었을 때 소리 맑고 단맛 깊은

한겨울 무 그 아삭거림 같은 맑음이

너무도 그립다.

 

한 맺히게 울어대는 뻐꾹이 목청처럼

피 맺히게 토해내는 내 언어들은

죽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빨아내는

철없는 어린것의 울음을 닮았다.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곧 나다.

 

육체 속에 영혼 속에

수줍은 듯 숨어 있는 것도

역시 나다.

 

나를 다스리는 주인도 나를 구박하는 하인도

변함없는 나다.

 

심금을 울리는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외침

외침들 그것도 역시 나다.

 

나를 채찍질하는 것도 나요.

나를 헹구어 주는 것도 나다. 

                                  “지학 스님

 

 

 

□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아침 잠을 깨우는 수다스런 새들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못생긴 언덕에 핀 끈적끈적한 꽈리 꽃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일찍부터 웃자란 맛이 쓴 상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여름 밤에 거리에서 들리는 음악소리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눈 속에서 해변에서 층계에서 지붕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거대한 열대 우림의 침묵

오지에 사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푸른 바다에서 몸을 뒤채는 거대한 고래들의 짝짓기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물을 튀기는 바닷새들의 서투른 날개짓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우주 공간의 무수히 많은 별들을 바라보면

놀라워하는 인간의 경이에 찬 눈동자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산꼭대기에 얹힌 순결한 눈

나이 든 사람의 강렬한 눈빛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아침에 하는 사랑, 정오에 하는 사랑

저녁 귀뚜라미 울음소리를 들으며 하는 사람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고원지대의 저녁 안개 속에

창가에서 불가에서 나누는 긴 이야기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짝짓기하는 하마와 기린의 신음소리

서로를 애무하는 눈사자들의 장난

뒷 담장에서 들리는 고양이 울음소리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정치인들이 없이

감옥 없이

죽음을 재촉하는 약과 병원과 전염병 없이

그것들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정신병원과 결혼과 학교 없이

나라들간의 다툼 없이

그것들이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기를. 

                                            다이앤 디 프리마

 

  

□  행복은 마음속에서 크는 것

 

 

자신의 삶에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이웃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역시

행복한 일임에 틀림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이 세상은 하나이다.

 

그러기에 행복은 자신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요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행복도 하나의 기술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높은 학력을 가졌으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은 부자이면서도 불행을 호소하는 사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 있기에 만족이나 행복은

반드시 소유에 비례하지 않으며, 지성이

그것을 보장해 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시인 백낙천은 "인생을 부귀로서 낙을 삼는다면

좀처럼 낙을 누리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만족은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지는 것이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는 뜻일 것이다.

 

"만족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해도 부자로 살 수 있고,

만족을 모르는 사람은 많이 가졌어도 가난하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하게 느끼느냐 행복하게 느끼느냐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인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남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조건 속에서도 만족함을 발견해 내고,

어리석은 사람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조건 속에서도 눈물 흘린다.

 

행복 하려거든 감사함에 눈 떠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함에 감사하다.

 

그래서 옛 성인은 "존경과 겸손, 만족과 감사

그리고 때때로 진리를 듣는 것은

최상의 행복이다"라고 하셨다.

존경할 스승이 있고, 섬겨야 할 어른이 있으며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친구나 이웃이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일 것인가!

 

남들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길지라도

내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일을

갖는다는 것 또한 행복한 일이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은 따분한 인생을 산다.

할 일이 없어 누워있는 사람보다는

거리에 나가 남이 버린 휴지라도 줍는 일을

하는 사람이 몇 배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기쁨은 반드시 커다란 일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남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소중하게 여기고

보람을 찾으면 된다.

 

비록 작은 일이라도 거짓없이 진실로 대할 때

행복한 것이지 아무리 큰 일이라도 위선과

거짓이 들어 있으면 오히려 불안을 안겨주고

불행을 불러오게 된다.

 

그래서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명성보다는 진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지나간 일에 매달려 잠 못 이루지 말고 잊을 것은

빨리 잊도록 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한 성자에게 "당신은 가진 것이라곤 없는데

어찌 그렇게도 밝게 살 수 있느냐"고 여쭈었다.

그 때, 그 성자는 대답 하셨다.

 

"지나간 일에 슬퍼하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일에 근심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당장 일에만 전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가지고

근심 걱정하고, 이미 지나간 일에 매달려 슬퍼한다."

 

그렇다.

공연한 일에 매달려 근심 걱정하지 않고 잊어야 할 것은

빨리 잊어버려 마음을 비우는 것은 행복의 길이다.

 

슬펐던 일을 자꾸 떠올려 우울한 마음에 사로 잡히지 말고,

화나게 했던 일, 기분 나빴던 일을 회상하여 분해하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못 된다.

체념도 하나의 슬기로움인 것이다.

 

항상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고 환희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밝게 만들어 준다.

 

이렇듯, 행복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더욱 견고하게 그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좋은 글 에서

 

  

□   나는 배웠다

  

나는 배웠다

 

신뢰를 쌓는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배웠다.

 

인생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달렸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 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배웠다.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이 아무리 얇게 베어난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한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야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영웅임을 나는 배웠다.

 

사랑을 가슴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내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때때로 나를 아프게 한다 해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때론

내가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해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나는 배웠다.

 

또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웠다.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보더라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그리고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해 내 인생의 진로가

바뀔 수 있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또 배웠다.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친구가 울면서

내게 매달린다면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내게 남아 있음을 나는 배웠다.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 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너무 아끼는 사람이 먼저

이세상을 빨리 떠난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과

나의 믿는 바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엄격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

또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의

모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오마르 워싱턴

 

  * 샤를르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 (1858~1916), 시인 오마르 워싱턴 (Omer Washington)

     여러 명이 자기의 시라고 주장하며, 유사한 여러 종류의 시가 있음

 

 

 

□   나는 배웠다 (I've learned)

 

                                                 Omer Washington 

I‘ve learned that you cannot make someone love you.

All you can do is be someone who can be loved.

The rest is up to them.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much I care,

some people just don‘t care back.

I’ve learned that it takes years to build up trust

and only seconds to destroy it.

 

I‘ve learned that it’s not what you have in your life,

but who you have in your life that counts.

I‘ve learned that you can get by on charm for about fifteen minutes,

after that, you’d better know something.

I‘ve learned that you shouldn’t compare yourself

to the best others can do, but to the best you can do.

 

I‘ve learned that it’s not what happens to people,

it‘s what they do about it.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thin you slice it, there are always two sides.

I‘ve learned that you should always leave loved ones with loving words.

It may be the last time you'll see them.

I've learned that you can keep going long after you think you can't.

 

I‘ve learned that heroes are the people who do what has to be done

when it needs to be done, regardless of the consequences.

I’ve learned that there are people, who love you dearly,

but just don‘t know how to show it.

 

I’ve learned that sometimes when I‘m angry I have the right to be angry

but that doesn’t give me the right to be cruel.

I‘ve learned that true friendship continues to grow even

over the longest distance same goes for true love.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good a friend is,

they‘re going to hurt you every once in a while and

you must forgive them for that.

 

I’ve learned that it isn‘t always enough to be forgive by others,

sometimes you have to learn to forgive yourself.

I’ve learned that no matter how bad your heart is broken,

the world doesn‘t stop for your grief.

I’ve learned that just because two people argue,

it doesn‘t mean they don’t love each other and just

because they don‘t argue, it doesn’t mean they do

 

I‘ve learned that sometimes you have to put the individual

ahead of their actions. I’ve learned that two people can look

at the exact same thing and see something totally different.

I‘ve learned that no matter the consequences, those

who are honest with themselves get farther in life.

 

I’ve learned that your life can be changed in a matter of hours

when a friend cries out to you, you will find the strength to help.

 

I‘ve learned that writing, As well as talking, can ease emotional pains.

I’ve learned that the people you care most about in life are taken from

you too soon.

I‘ve learned that it’s hard to determine where to draw the line between

being nice and not hurting people‘s feelings and standing up for what you believe.

I’ve learned to love and be loved. I‘ve learned.

 

 

 

  스티브잡스

 

 

스티브잡스가 병상에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남겼던 메세지...

I reached the pinnacle of success in the business world.
나는 사업에서 성공의 최정점에 도달했었다.

In other's eyes, my life is an epitome of success.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 삶이 성공의 전형으로 보일 것이다.

However, aside from work, I have little joy. In the end, wealth is only a fact of life that I am accustomed to.
그러나 나는 일을 떠나서는 기쁨이라고 거의 느끼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부 라는 것이 내게는 그저 익숙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At this moment, lying on the sick bed and recalling my whole life, I realize all the recognition and wealth that I took so much pride in, have paled and become meaningless in the face of impending death.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 나의 지난 삶을 회상해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 빛을 잃었고 그 의미도 다 상실했다.

In the darkness, I look at the green lights from the life supporting machines and hear the humming ㅁmechanical sounds, I feel the breath of god of death drawing closer...
어두운 방안에서 생명보조장치에서 나오는 푸른 빛을 물끄럼이 바라보며 낮게 웅웅거리는 그 기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죽음의 사자의 숨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Now I know, when we have accumulated sufficient weath to last our lifetime, we should pursue other matters that are unrelated to wealth...
이제야 깨닫는 것은 평생 배굶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되면 더이상 돈버는 일과 상관 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Should be something that is more important.
그건 돈버는 일보다는 더 중요한 뭔가가 되어야 한다.

Perhaps relationships, perhaps art, perhaps a dream from younger days...
그건 인간관계가 될 수 있고, 예술일 수도 있으며 어린시절부터 가졌던 꿈일 수도 있다.

Non-stop pursuing of wealth will only turn a person into a twisted being, just like me.
쉬지 않고 돈버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바로 나같이 말이다.

God gave us the senses to let us feel the love in everyone's heart, not the illusions brought about by wealth.
부에 의해 조성된 환상과는 달리,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이란 것을 모두의 마음 속에 넣어 주셨다.

The wealth that I have won in my life I cannot bring with me.
평생에 내가 벌어들인 재산은 가져갈 도리가 없다.

What I can bring is only the memories precipitated by love.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 뿐이다.

That's the true riches which will follow you, accompany you, giving you strength and light to go on.
그것이 진정한 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고, 동행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과 빛을 가져다 줄 것이다.

Love can travel a thousand miles. Life has no limits. Go where you want to go. Reach the height you want to reach. It is all in your heart and in your hands.
사랑은 수천 마일 떨어져 있더라도 전할 수 있다. 삶에는 한계가 없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라. 오르고 싶은 높은 곳이 있으면 올라가보라.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렸고, 우리의 결단 속에 있다.

What is the most expensive bed in the world? "Sick bed"...
어떤 것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침대일까? 그건 "병석"이다.

You can employ someone to drive the car for you, make money for you but you cannot have someone to bear the sickness for you.
우리는 운전수를 고용하여 우리 차를 운전하게 할 수도 있고, 직원을 고용하여 우릴 위해 돈을 벌게 할 수도 있지만, 고용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병을 대신 앓도록 시킬 수는 없다.

Material things lost can be found. But there is one thing that can never be found when it is lost -
"Life".
물질은 잃어버리더라도 되찾을 수 있지만 절대 되찾을 수 없는 게 하나 있으니 바로 "삶"이다.

When a person goes into the operating room, he will realize that there is one book that he has yet to finish reading - "Book of Healthy Life".
누구라도 수술실에 들어갈 즈음이면 진작 읽지 못해 후회하는 책 한권이 있는데, 이름하여 "건강한 삶 지침서"이다.

Whichever stage in life we are at right now, with time, we will face the day when the curtain comes down.
현재 당신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르렀든지 상관 없이 때가 되면 누구나 인생이란 무대의 막이 내리는 날을 맞게 되어 있다.

Treasure Love for your family, love for your spouse, love for your friends...
가족을 위한 사랑과 부부간의 사랑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귀히 여겨라.

Treat yourself well. Cherish others.
자신을 잘 돌보기 바란다.
이웃을 사랑하라.

 

 

 

□   내 마음

  

행복해지고 싶다면 노력해야 합니다.

집을 깔끔하게 정리하듯

내 마음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간수할 건 간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과

칭찬의 말 등은 간직해도 좋지만

필요도 없는 비난이나 고통의 기억은

쓰레기나 잡동사니 치우듯이

과감히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밭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립니다.

 

버려야 할 쭉정이들을

그대로 쌓아두거나

잘 간수해야 할 알곡들을

미련하게 내버리면서

행복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마음밭의 주인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 밭을 가꾸는 사람도 자기입니다

                                (좋은 글 중에서)

 

 

 

□  나부터 사랑 하세요

  

살아가는 동안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어떠한 모양과 색깔을 지니며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지를

 

느릿하게 한 걸음씩 걸어가던 세상이

빠르게 뛰어가는 것처럼

절실히 느껴지는 흘러만 가는 세월 안에서

내가 간직하고 품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모아지는 의미는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내가 간직해야 되는 것들 중

가장 먼저 품어야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있음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

나를 위해 돌고 있는 세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고

주어진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간직할 수 있으며

또한 나의 삶이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나를 사랑하며 아침을 맞이합니다

때로는 숨막히는 아픔 속에 빠져 나를 잃어 버리고

하루의 시간을 멍하니 흘려 보낼 때도 있었고

내게 스며든 깊은 슬픔으로

내내 흘러 내리는 눈물이

마를 사이가 없는 하루도 있었고

 

얽매어 오는 시간 안에서

간절히 무언가를 찾는 하루도 있었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힘에 겨운 시간들을 감당할 때마다

오늘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두며 다시 일어섭니다

주어진 나의 하루를 스스로 소중하게 만들어 갑니다.

 

하루를 살아가며 느끼고 담아야 되는 것들

그저 눈을 뜬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어제와는 다른 하루 새로움을 주며

 

밝아오는 아침으로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하얀 도화지 위를 소망하는 꿈으로 스케치하고

샘 솟는 희망으로 하나 하나 채색해 채워갑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지나온 삶이 아닌 나를 사랑하며

오늘을 사는 생각과 나의 태도입니다

 

오늘의 시간도 내일이면 어제가 되어 버립니다

내일이란 시간에 어제가 되어 버린 오늘을

아쉬움과 후회로 보내게 되는 삶이 아닌

다가 온 하루를 아낌없이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있음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합니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며

오늘도 나의 소중한 하루를 만들어 가려 합니다 

                                        (좋은글 )

 

 

□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몸이 힘들고 마음에 아픔도 많지만,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다 보니

내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인생길이 순탄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가시밭길 많지만,

그때마다 내 삶의 길섶에서 따뜻하게

손잡아 주는 이들이 있기에 내 인생길이

순탄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이름이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실패와 유혹도 많지만,

그때마다 '안 된다' 하고 일어선 내 이름이

얼마나 귀한지를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모습이 건강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노라니 눈물 흘릴 때도 있지만,

눈물을 그치고 열심히 살아가는 내 모습이

건강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착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노라니 나쁜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 때마다 돌아서서 후회하고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터를 넓혀 가다 보니

이제는 착해진 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좋은 글 중에서)

 

 

□  내 인생의 가시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된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가시는 더 아프게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가시는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모나

육체적인 장애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환경이 가시가 되기도 한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원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가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가시 때문에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삶을 혐오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시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뺄 수 없는 삶의 가시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스려나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잔을

얼마나 쉽게 마셔 버렸을 것인가.

인생의 소중함과 고통의 깊이를 채 알기도 전에

얼마나 웃자라 버렸을 것인가.

 

실제로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

그 날카로운 가시야말로

그를 참으로 겸허하게 만들어줄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뽑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시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희덕의 산문집 "빈통의 물" 중에서)

 

 

□   歸田園居 귀전원거 (전원에 돌아와서)

 

                                            (陶淵明  도연명

             

少無適俗韻  소무적속운    어려서부터 세속과 맞지 않고

性本愛丘山  성본애구산    타고나길 자연을 좋아했으나

誤落塵網中  오락진망중    어쩌다 세속의 그물에 떨어져

一去三十年  일거삼십년    어느덧 삼십 년이 흘러버렸네

 

羈鳥戀舊林  기조연구림    떠도는 새 옛 숲을 그리워하고

池魚思故淵  지어사고연    연못 고기 옛 웅덩이 생각하듯이

開荒南野際  개황남야제    남쪽들 가장자리 황무지 일구며

守拙歸園田  수졸귀원전    본성대로 살려고 전원에 돌아왔네

 

方宅十餘畝  방택십여묘    네모난 텃밭 여남은 이랑에

草屋八九間  초옥팔구간    초가집은 여덟 아홉 간

楡柳蔭後첨  유류음후첨    느릅나무 버드나무 뒤 처마를 덮고

桃李羅堂前  도리나당전    복숭아 자두나무 당 앞에 늘어섰네

 

曖曖遠人村  애애원인촌    아스라이 먼 곳에 인가가 있어

依依墟里煙  의의허리연    아련히 마을 연기 피어 오르고

狗吠深巷中  구폐심항중    동네 안에서는 개 짖는 소리

鷄鳴桑樹顚  계명상수전    뽕나무 위에서는 닭 우는 소리

 

戶庭無盡雜  호정무진잡    집안에는 번거로운 일이 없고

虛室有餘閒  허실유여한    텅 빈 방안에는 한가함 있어

久在樊籠裏  구재번롱리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살다가

復得返自然  부득반자연    이제야 다시 자연으로 돌아왔네

 

 

 

□   마음이 정말 우울하다면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입니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50 년 전에 죽은 이가   그토록 원하며 기대했던 미래였습니다.

 

   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퍼센트의 고운 마음씨가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좋은 생각 중에서)

 

 

□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오늘은 슬피 울어도   내일은 기쁨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

 

   오늘은 분노로 가득차나   내일은 소리 내어 크게 웃을지도 모른다.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허무해도   내일은 희망이 푸른 날개를 퍼덕이며 찾아 올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오늘은 내 주머니가 비록 초라하지만   내일은 가득 찰지도 모른다.

 

   오늘은 날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내일은 날 찾아주는 사람들로 차고 넘칠지도 모른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비방을 해도

 

   자신의 일이 옳다면   결코 주눅 들거나 멈추지 마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영광에 대해   시샘 하거나 따돌릴지라도

 

   당신의 노력으로 이룬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더욱 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내 마음 같이 믿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떠나갈지도 모른다.

 

   진실로 당신이 그를 이해한다면    그를 용서하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도움을 요청하면    야멸차게 물러서지 마라.

 

   내일은 당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른다...    있는 그대로를 믿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여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어제는 오늘을 몰랐던 것처럼   내일도 잘 알 수 없지만

 

   삶은 늘 그렇게 지내왔고    그래서 미래는   언제나 신비롭고 영롱하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오늘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내일은 그 하늘을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당신에게 주어진 일에   묵묵히 정성을 다하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  마음도 쉬어야

  

마음도 쉬어야

넓고 부드러워집니다

 

"잘하겠다"는 정성입니다. "더 잘하겠다."는 욕심입니다.

 

"사랑한다"는 아름답습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허전합니다.

 

"감사합니다"는 편안함입니다. "너무 감사합니다"는 두렵습니다.

 

우리 마음이

늘 지평선 같았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일도 사랑도 감사도

늘 평평하고 잔잔하여

멀리서 보는 지평선 같기를 바랍니다.

 

아득한 계곡이나 높은 산 같은 마음이 아니라

들판같이 넉넉하고

순박한 마음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이렇게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바른 마음입니다.

 

앞만 보고 오를 때는

발끝만 보이지만

멈추어 서서 보면

내 앞에 지평선이 펼쳐집니다.

 

마음도 쉬어야

넓고 부드러워집니다. 

                         (행복한 동행 중에서)

 

 

 

□   서로 가슴을 주라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소유하려고는 하지 마라   그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두 마리가 서로 사랑했네   추위에 떠는 상태를 보다못해    자신의 온기만이라도 전해 주려던 그들은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상처만 생긴다는 것을 알았네

 

   안고 싶어도 안지 못했던 그들은    멀지도 않고    자신들 몸에 난 가시에 다치지 않을   적당한 거리에서 함께 서 있었네

 

   비록 자신의 온기를 다 줄 수 없어도    그들은 서로 행복했네

 

   사랑은 그처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것이다.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이다.

 

   가지려고 소유하려고 하는 데서    우리는 상처를 입는다.

 

 

   나무들을 보라    그들은 서로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지 않은가   너무 가깝게 서 있지 않을 것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늘을 입히지 않는 것.   그렇게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랑이 오래 간다

 

            (이정하 "내가 길이 되어 당신께로" )

 

 

 □   나를 생각하게 하는 글

 

   나는 믿는다고 하면서    의심도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잘난 체도 합니다.

 

   나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하면서    닫기도 합니다.    나는 정직하자고 다짐하면서    꾀를 내기도 합니다.

 

   나는 떠난다고 하면서    돌아와 있고    다시 떠날 생각을 합니다.

 

   나는 참아야 한다고 하면서    화를 내고 시원해 합니다.

 

   나는 눈물을 흘리다가    우스운 일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는 외로울수록 바쁜 척합니다.

 

   나는 같이 가자고 하면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으라 하면    같이 가고 싶어집니다.

 

   나는 봄에는 봄이 좋다 하고    가을에는 가을이 좋다 합니다.    나는 남에게는 쉬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서 계속 일만 합니다.

 

   나는 희망을 품으면서    불안해 하기도 합니다.    나는 벗어나고 싶어하면서    소속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변화를 좋아하지만    안정도 좋아합니다.

 

   나는 절약하자고 하지만    낭비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약속을 하고 나서    지키고 싶지 않아 핑계를 찾기도 합니다.

 

   나는 남의 성공에 박수를 치지만    속으로는 질투도 합니다.

 

   나는 실패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실패하는 것은 두렵습니다.

 

   나는 너그러운 척하지만 까다롭습니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하지만    불평도 털어놓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들 만나기를    좋아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하지만    미워할 때도 있습니다.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다음이 있습니다.    그 내일을 품고 오늘은    이렇게 청개구리로 살고 있습니다               (좋은 생각 "마음이 쉬는 의자" 중에서)

  

 

 

□   가을에는  

 

                                       (최영미)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 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 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 온다.

 

   뭉게뭉게 피어 나 양 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   미상

 

 

   아침이 이슬에 목 축일 때    눈을 뜨며 살아 있음을 의식한다.

 

   안식을 위하여    접어 두었던 옷들을 입고    하루만큼을 위한 화장을 한다.

 

   하루가 분주한 사람들과    목마른 사람들 틈에서 시작 되어 가고

 

   늘 서두르려다 보면    잊어버린 메모처럼    찢어 버리지 못한 째 넘어간다.

 

   아침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서    저녁으로 바뀌어 가고

 

   이른 아침    문을 열고 나서면서도    돌아올 시간을 들여 다 본다.    하루가 짧은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삶이 너무도 짦다.

 

 

□   우리의 아름다움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조 해 하지 마세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태우지 마세요.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지금 슬픔에 젖어 있다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우리가 흘린 눈물,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하지 마세요.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꽃과 잎의 한계이고,   그것이.......최상의 아름다움인 것입니다.

  

 

□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는 누구인가?    아버지란 기분이 좋을 때 헛기침을 하고,    겁이 날 때 너털웃음을 웃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기가 기대한 만큼 아들, 딸의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을 때 겉으로는, '괜찮아, 괜찮아' 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화가 나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마음은 먹칠을 한 유리로 되어 있다.    그래서 잘 깨지기도 하지만, 속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란 울 장소가 없기에 슬픈 사람이다.

 

   아버지가 아침 식탁에서 성급하게 일어나서    나가는 장소(그 곳을 직장이라고 한다), 즐거운 일만 기다리고 있는 곳은 아니다.

 

   아버지는 머리가 셋 달린 싸우러 나간다.    그것은 피로와, 끝없는 일과, 직장 상사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다.

 

   아버지란 '내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나?    내가 정말 아버지다운가?'하는 자책을 날마다 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자식을 결혼시킬 때 한없이 울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최고의 자랑은 자식들이 남의 칭찬을 받을 때이다.

 

   아버지가 가장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속담이 있다.    그것은 "가장 좋은 교훈은 손수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라는 속담이다.    아버지는 늘 자식들에게 그럴 듯한 교훈을 하면서도,    실제 자신이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게 생각도 하고 남 모르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이중적인 태도를 곧잘 취한다.    그 이유는 '아들, 딸들이 나를 닮아 주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도,    ' 나를 닮지 않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나이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대가 지금 몇 살이든지,    아버지에 대한 현재의 생각이 최종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일반적으로 나이에 따라 변하는 아버지의 인상은,

 

     4세 때--아빠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7세 때--아빠는 아는 것이 정말 많다.      8세 때--아빠와 선생님 중 누가 더 높을까?      12세 때-아빠는 모르는 것이 많아.      14세 때-우리 아버지요? 세대 차이가 나요.      25세 때-아버지를 이해하지만, 기성세대는 갔습니다.      30세 때-아버지의 의견도 일리가 있지요.      40세 때-여보! 우리가 이 일을 결정하기 , 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봅시다.      50세 때-아버님은 훌륭한 분이었어.      60세 때-아버님께서 살아 계셨다면, 助言 들었을 텐데

 

   아버지란 돌아가신 뒤에도, 두고두고 그 말씀이 생각나는 사람이다.    아버지란 돌아가신 에야 보고 싶은 사람이다.

 

   아버지는 결코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체면과 자존심과 미안함 같은 것이    어우러져서 그 마음을 쉽게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 배쯤 될 것이다.    아들, 딸들은 아버지의 수입이 적은 것이나,    아버지의 지위가 높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있지만,    아버지는 그런 마음에 속으로만 운다.

 

   아버지는 가정에서 어른인 체를 해야 하지만,    친한 친구나 맘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소년이 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앞에서는 기도도 안 하지만,    혼자 를 운전하면서는 큰소리로 기도도 하고    주문을 외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 간다.

 

   아버지! 뒷동산의 바위 같은 이름이다.    시골마을의 느티나무 같은 크나 큰 이름이다.

 

                              동아일보 : 2002.9.13

  

 

 

□   마음이 메마를 때면

 

   내 마음이 메마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메마르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메마르고 차가운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불안할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불안하고 답답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외로울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버리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외롭고 허전한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불평이 쌓일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불만스럽게 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쌓이는 불평과 불만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없을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내 기쁨을 빼앗아 가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나에게 기쁨과 평화가 없는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서 희망이 사라질 때면 나는 늘 남을 보았습니다.    남이 나를 낙심 시키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남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부정적인 일들이    남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오늘    나는 내 마음 밭에 사랑이라는 이름의 씨앗 하나를 떨어뜨려 봅니다.

 

 

 

□   부치지 않은 편지

                                                     (정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 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 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이슬에    새벽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기철)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 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은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 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   A  Psalm of Life                             

     Henry Wadsworth Longfellow, 1807~1882)

□   인생예찬 ;          롱펠로우

 

Tell me not, in mournful numbers,       슬픈 목소리로 내게 말하지 말라.

"Life is but an empty dream!"             "생은 다만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For the soul is dead that slumbers,      잠든 영혼은 죽은 것이니

And things are not what they seem.      만물은 겉 모양 그대로는 아니다.

                                             

Life is real! Life is earnest!                  인생은 진실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And the grave is not its goal;              무덤이 인생의 종말이 될 수는 없다.

"Dust thou art, to dust returnest,"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Was not spoken of the soul.               영혼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Not enjoyment, and not sorrow,          인생이 가야 할 곳, 또한 가는 길은

Is our destined end or way;                향락도 비통도 아니다.

But to act, that each to-morrow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Find us father than to-day.                 저마다 행하는 그것이 목적이며 길이다.

 

Art is long, and Time is fleeting,          예술은 길고 세월은 빨리 간다.

And our hearts, though stout and brave,  우리의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하지만

Still, like muffled drums, are beating      싸맨 북소리처럼 둔하게

Funeral marches to the grave.             무덤으로 가는 장송곡을 치고 있구나.

 

In the world's broad field of battle,        이세상 드넓은 싸움터에서

In the bivouac of Life,                         인생의 노영(露營)에서

Be not like dumb, driven cattle!           발 잃고 쫓기는 짐승같이 되지 말고

Be a hero in the strife!                        싸움에 이기는 영웅이 되라.

 

Trust no Future, howe'er pleasant!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Let the dead Past bury its dead!          죽은 '과거'는 그대로 묻어 버려라.

Act,- act in the living Presant!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Heart within, and God o'erhead!           안에는 마음이,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Lives of great man all remind us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친다.

We can make our lives sublime,          우리도 장엄한 인생을 이룰 수 있느니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우리가 지나간 시간의 모래 위에

Footprints, on the sand of time:-          발자국은 남길 수 있다.

 

Footprints, that perhaps another,          그 발자국은 훗날 다른 이가

Sailing o'er life's solemn main,           인생의 장엄한 바다를 건너다가

A forlorn and shipwrecked brother,       조난 당해 버려진 형제의 눈에 띄어

Seeing, shall take heart again.             새로운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롱펠로우

 

삶에 대한 가치관이 우뚝 서 있어도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가슴에 품어온 이루고 싶은 소망들을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으로 하루를 살다가도

때로는 모든 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완벽을 추구하며 세심하게 살피는 나날 중에도

때로는 건성으로 지나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직함과 곧고 바름을 강조하면서도

때로는 양심에 걸리는 행동을 할 때가 있습니다.

 

포근한 햇살이 곳곳에 퍼져있는 어느 날에도

마음에서는 심한 빗줄기가 내릴 때가 있습니다.

 

 

따스한 사람들 틈에서 호흡하고 있는 순간에도

문득, 심한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행복만이 가득할 것 같은 특별한 날에도

홀로 지내며 소리 없이 울고싶은 날이 있습니다.

 

 

재미난 영화를 보며 소리 내며 웃다가도

웃음 끝에 스며드는 허탈감에 우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자아 도취에 빠져 스스로에 만족함 중에도

자신의 부족함이 한없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할 일이 쌓여 있는 날에도

머리로 생각할 뿐,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일의 할 일은 잊어버리고,

오늘만을 보며 술에 취한 흔들리는 세상을 보고픈 날이 있습니다.

 

 

늘 한결 같기를 바라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변화에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한 모습만 보인다고 하여 그것만을 보고 판단하지 마십시오.

흔들린다고 하여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사람의 마음이 늘 고요 하다면,

그 모습 뒤에는 분명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거짓이 있을 것입니다.

 

가끔은 흔들려 보며 때로는 모든 것들을 놓아봅니다.

그러한 과정 뒤에 오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희망을 품는 시간들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들 안에는, 새로운 비상이 있습니다.

 

흔들림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습입니다.

적당한 소리를 내며 살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   우리를 흔들어 깨우소서

                                                                     (이 해인)

어디서나 산이 보이고 강이 보이는 작지만 사랑스런 나라

우리가 태어난 언젠가 다시 묻혀야 할 이 아름다운 모국의 땅에서

우린 늘 아름다운 것을 기억하며 아름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 소박한 꿈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를 긴 잠에서 흔들어 깨우소서. 주님

또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두 손 모으고 겸허한 참회의 눈물을 흘릴 줄 알게 하소서.

 

나라의 일꾼으로 뽑힌 사람들이

거짓과 속임수를 쓰며 욕심에 눈이 어두운 세상

자식이 어버이를 죽이고 제자가 스승을 때리며

길을 가던 이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우리의 병든 세상을 불쌍히 여기소서.

 

자신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훼손하고

그럴듯한 이유로 합리화시키며

잉태된 아기를 수없이 죽이면서도

해 아래 웃고 사는 우리의 태연함을 가엾이 여기소서.

 

한 주검을 깊이 애도하기도 전에

또 다른 주검이 보도되는 비극에도

적당히 무디어진 마음들이 부끄럽습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강에서.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우리 가족과 이웃들을 굽어보소서.

 

잘못된 것은 다 남의 탓이라고만 했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라고 비겁하게 발뺌할 궁리만 했습니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은 하찮은 것에도 그리 민감하면서

다른 사람의 엄청난 아픔과 슬픔엔 안일한 방관자였음을 용서하소서.

 

사랑에 대해서 말하기보다

 먼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생명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 먼저 생명을 존중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 항상 생명의 맑은 물로 흘러야 할 우리가

흐르지 않아 썩은 냄새가 풍기는

오만과 방종으로 더럽혀지지 않게 하소서.

사랑이 샘솟아야 할 우리 가정이

미움과 이기심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소서.

 

나 아닌 그 누군가가 먼저 나서서 해주길 바라고 미루는

사랑과 평화의 밭을 일구는 일 비록 힘들더라도

나의 몫으로 받아들이게 하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집을

내가 먼저 짓기 시작하여

더 많은 이웃을 불러 모으게 하소서.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나직이 죽은 이를 불러 보는 낙엽의 계절

우리는 이제 뉘우침의 눈물을 닦고

희망의 첫 삽에 기도를 담습니다.  주님

 

 

 

□  소나기

                                               (이해인)   사랑하는 사람이기 보다는    진정한 친구이고 싶었다.   다정한 친구이기 보다는    진실이고 싶었다.

 

   내가 너에게    아무런 의미를 줄 수 없다.   너는 나에게    만남의 의미를 전해 주었다.   순간이 지나가듯    우연이기 보다는    영원한    친구이고 싶었다.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너와 나 사이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친구이고 싶다.

 

   모든 만남이 그러하듯이    너와 나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진실로 너를 만나고 싶었다.   아무런 거짓도 허무도 아닌   진정한 너와 나의 모습을 찾고 싶었다.

 

   그대 !   이제는 더 나아가기 보다는    우리이고 싶다.   우리는 아름다운 현실을    언제까지 변치 않는 만남을 접어두자

 

   비는 싫지만    소나기는 좋고   인간은 싫지만    너만은 좋다.

 

   내가 새라면    너에게 하늘을 주겠고   내가 꽃이라면    너에게 향기를 주겠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기에    너에게 사랑을 준다.

 

 

 

□    빈 들에 서서

 

   나는 지금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에 서 있습니다.    눈을 들어 빈 들을 보면서    나는 그 동안 느끼지 못했던,    나의 부끄러운 모습들을 떠올리며    새로운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지금 빈 들에 서서    메마른 내 모습을 떠 올립니다.    빈 들은 곡식이 없어도    습기를 머금고 촉촉해 있는데,   나는 지금 가진 것이 없다고    마음까지 메말라 있습니다.    이제는 나도 빈 들같이    마음이 촉촉한 사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빈 들에 서서    욕심이 가득 찬 내 모습을 떠 올립니다.    빈 들은 이렇게 모든 것을 내놓고 자신을 비우고 있는데,   나는 나이가 들면서 욕심도 함께 늘어나   만족과 감사를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나도 빈 들처럼    욕심을 버리고 지금의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빈 들에 서서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내 모습을 떠올립니다.    빈 들은 이렇게 내년의 소득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바쁘다는 말만 생활 속에 가득 채운 채   아무 준비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도 빈 들처럼    쉼을 얻으면서,   앞날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용철)

 

  

 

□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

 

 

   말에는 좋은 말이 있고    나쁜 말이 있습니다   약이 되는 말이 있고 독이 되는    말이 있습니다.   약이 되는 말을 많이 하면    사람을 살립니다.   그러나 독이 되는 말을 많이 하면    사람을 죽입니다.    독이 되는 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가시처럼 찌르는 말이 있습니다.   벌처럼 쏘는 말이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많은 것은    더러운 말입니다.

 

   더러운 말은    입술을 더럽힙니다    인격을 더럽힙니다.    가정을 더럽힙니다.    사회를 더럽힙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친구를 사귀면    나도 더러워 집니다.    더러운 말을 듣기 좋아하면    내 속에 온통 더러운 것들이 스며들어    인격이 쓰레기장으로 변합니다

 

   더러운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음란한 말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사야도 입술을 지지고 나서야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더러운 말을 내 인격 속에서    빼내는 작업을 하십시오   음란한 개구리를 몰아내십시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 4:29)  순종의 열매에서

 

 

 

□   고향이라는 것은 

 

  고향이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닐까,

 

   태어나    태를 묻은 곳이 아닐지라도

 

   마음 깊숙한 곳에    따뜻하고 은은한    밀물처럼 묻어두고 있는 곳,

 

   어떤 장소,    어떤 공간,    어떤 시간,    어떤 마음들.

 

   그래서    언제나 그리운 것들.          (꽃이 피는 그 산 아래 나는 서 있네, 오정희 외)

 

  

 

□   너무 높은 것들

        (박명욱)   높은 것들이 있다.

 

   아무리 까치발을 하고 용을 써도 손에 닿을 수 없는 것들.    높은 곳에서 대롱거리며 어린 시절을 서글픈 낭패감에 젖게 했던    버스 천장의 둥근 손잡이들.    하염없이 아무개야, 아무개야 목청을 높이게 하던    친구 집 대문 위의 야속한 초인종.    끝내 지울 수 없었던 칠판 위쪽 선생님의 단정한 글씨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유혹과 갈망으로 종일을 서성거리게 하던    아득한 선반 위의 달콤한 군것들.

 

   하지만 훌쩍 자라, 몸이 길어진 만큼    세상은 낮아져서, 이제 버스 손잡이쯤이야    손쉽게 잡을 수 있게 됐지만,   선반 위의 군것들을 손에 넣지 못해 안달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시야에서 높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눈은 또 다른 높은 것들을 찾아 내,    목은 자주 마르고,    정신은 긴 휴식을 알지 못한다.    지혜의 목소리는 타이른다.    너무 높아서 올라가기 힘든 나무는 쳐다보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그것은 욕망이 없는 자,    그저 욕망을 바라보는 자,   욕망을 지나온 자의 지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욕망하는 자의 지혜는 될 수 없다.

 

   욕망이 어디 그렇게 만만하고 순순한 것이던가.

 

   욕망은 다가갈 수 없을수록 더 간절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멈춰지지 않는 이 응시는 멈춰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운명을 닮아 있다.   그 운명의 열기로 나는 여전히 바라본다.

 

   크고 강건한 사유들,    깊고 서늘한 아름다움 들,   자유와 평화의 나날들,

 

   왈칵 설움이 북받치도록 눈부신 당신.    너무 높은 것 들.      

 

 

 

□  나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 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 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고독하게 던지는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이건

,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베를린 감옥에서 쓴 기도 시)

 

 

 

□  나의 사랑하는 생활

                                                     피천득

나는 잔디를 밟기 좋아한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나는 빛을 사랑한다.

나는 우리나라 가을 하늘을 사랑한다.

다른 사람이 없는 방 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한다.

군밤을 외투 호주머니에다 넣고 길을 걸으면서 먹기를 좋아하고,

찰스 강변을 걸으면서 핥던 콘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나는 신발을 좋아한다.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 중

 

 

 

 

□ 이 도시 경계 밖에 감옥이 있다 

 

                      장석주

 

명석한 슬픔은 은폐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는다

 

모포 몇 장을 겹쳐 깔아도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막아지지 않는다

 

 

무위와 권태라는 병균이

 

내 삶을 갉아먹는다

 

난 넝마처럼 너덜거리는 껍데기만 남았다

 

관제 모포를 끌어당겨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고 억지로 잠든다

 

관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잠들면

 

꿈도 관제 꿈을 꾸게 될까

 

 

온갖 잡음들이 자자든 새벽녘

 

기억할 수도 없이 많은 허망한 꿈에서 놓여나면

 

오래 다시 잠에 들지 못한다

 

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댄다

 

이곳이 내가 도달한 삶의 바닥일까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이 늪지

 

난 너무 오래 길을 건너지 못한 채

 

횡단보도 앞 붉은 신호등에 묶여 있다

 

간통으로 들어온 젊은 친구가 잠결에 돌아누우며

 

해독할 수 없는 잠꼬대를 한다

 

 

내 삶의 문맥을 읽기 위해

 

나는 고통의 문지방을 넘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난 내 삶을 더 낮게 할 수 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포복할 수 있다

 

낮은 곳에서 환하게 더 잘 보인다

 

이 깊고 깊은 어둠이, 어둠에 감싸여 있는 이 세상이

 

기상 나팔이 불려면 아직 멀었다

 

 

몇 백 번의 꿈을 꾸고 다시 깨야

 

이 미망으로부터 풀려날 것인가

 

 

 

 

 

□  물이 있는 풍경

 

                              장석주

 

 

물은 물오리를 붙잡아두지 않는다 저 물에 잠긴 주검들이 물을 붙잡지 않듯이 물은 물오리를 붙잡지 않는다 물오리는 물의 혼백처럼 물 위에 떠 있다가 어느 틈엔가 포르릉 날아간다 그대는 지하철 역에서 화난 사람처럼 입을 무겁게 닫고 있었다 하지만 침묵이 그대 말을 붙잡던가 물가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나무들은 바람을 붙잡은 적이 없다 하구가 언제 바다를 붙잡는 것을 보았는가 거친 하늘이 땅을 붙잡던가 우산이 흐린 날들을 붙잡던가 그런데도 그대는 오류가 그대의 삶을 붙잡고 있다고 한다 잔혹이 그대를 스치고 지났던가 무기수가 감옥을 붙잡고 있듯이 울음이 그대를 붙잡고 있다고 한다

 

 

물고기가 물을 붙잡고 있던가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니

 

한사코 물을 붙잡는 것이다

 

 

 

 

 

 

물고기

                             장석주

 

 

물고기에게 붉음이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에게 개 같은 추억이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에게 잃어버린 모자가 없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가 슬픔의 도서관을 가는 길을 모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가 바람 부는 3월에는 자주 동네 극장에 다녔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가 실연 때문에 생을 망쳐버렸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가 달력과 시계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고기가 변태성욕자가 아니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물고기가 내 귀를 입을 심장을 틀어막고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내 마음의 단 하나 유실물은 열 살의 소년이다.

 

천진스럽게 물고기만을 그리고 있던 그 옛날의 소년이다.

 

 

 

 

□  여로역여전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 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 붇습니다.

 

예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거리고

 

노쇠화 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 것을 내 것이라 하런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는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여덟 가지의

 

큰 고통이 있다고 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과

 

애별리고(愛別離苦) 

 

내가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사람 등과 헤어지는 아픔

 

원증회고(怨憎會苦)

 

내가 싫어하는 것들.

 

원수 같은 사람 등과 만나지는 아픔

 

구불득고(求不得苦)    

 

내가 원하거나 갖고자 하는 것 등이

 

채워지지 않는 아픔

 

오음성고(五陰盛苦)

 

육체적인 오욕락(식욕. 수면욕. 성욕. 명예욕)

 

지배하는 아픔 등의

 

네 가지를 합하여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겪어야 하는 짐수레와 같은 것

 

옛날 성인께서 주신 정답이 생각납니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몸이나 생명이나 형체 있는 모든 것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과 같은 것이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이를 잘 관찰하여 사는 지혜가 필요하다.

 

세상 살면서

 

나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피할 수 없으면 껴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이자.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하자.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자.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 종일 울겠습니다.

 

짜증 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 종일 얼굴 찌푸리겠습니다.

 

싸워서 모든일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 듯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덜어 논 그 그릇

 

내가 조금 낮춰 논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보다 조금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공간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70억 명 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들의 수 백억 배가 넘는

 

또 다른 많은 생명체가 함께 살고 있으므로

 

이 공간을 더럽힐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공간을 파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만 생명이 함께 살아야 하는

 

공생(共生)의 공간이기에.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으니

 

내 눈에 펼쳐지는

 

모든 현상이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나를 맞아준 아내가 고맙습니다.

 

나를 아빠로 선택한

 

아들과 딸에게 고마운 마음이 간절합니다.

 

부모님과

 

조상님께 감사하고

 

직장에 감사하고

 

먹거리에 감사하고

 

이웃에게 고맙고,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사람들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 고맙고

 

창공을 나는 날짐승이 고맙고

 

빽빽한 숲들이 고맙고

 

비 내림이 고맙고 눈 내림이 고맙습니다.

 

이 세상은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 일 뿐

 

내 것 하나 없어도 등 따시게 잘 수 있고

 

배부르게 먹을 수 있고

 

여기저기 여행 다닐 수 있고,

 

자연에 안겨

 

포근함을 느낄 수 있으니

 

나는 행복한 사람. 복 받은 사람.

 

은혜와 사랑을 흠뻑 뒤집어 쓴 사람.

 

내 머리 조아려 낮게 임하리라.

 

                    (좋은 글 중에서)

 

 

 

 

 

 

 

 

 

 

□   법구경  몇 구절을 골라서

  

  탐욕에 비유될 만큼 격렬한 불길은 없으며 분노에 비견할 만큼 강한 악력(握力)은 없고,     어리석음에 견줄만큼 촘촘한 그물은 없으며 애욕보다 더 빠른 물결은 없다.

 

  하늘이 칠보(七寶)를 비처럼 내려 주어도 욕심은 오히려 싫증을 낼 줄 모르나니, 즐거움은 잠깐이요,     괴로움이 많음을 깨닫는 사람이 슬기로운 자이니라.

 

  허술한 지붕은 비가 오면 새듯이 닦지 않은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든다.

 

  호화로운 임금의 수레도 부서지듯 우리 몸도 늙으면 허물어진다. 오로지 덕행을 쌓아 가는 일만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깎아서 바르게 만들고 물 위에서 사는 사람은 배를 조종한다. 목수는 나무

    를 조종하고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조종할 수가 있다.

 

  나는 나를 두고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할 때가 없다.

 

  나보다 나을 것이 없고 내게 알맞은 벗이 없거든 차라리 혼자 착하기를 지켜라. 어리석은 사람의

    길동무가 되지 말라.

 

  나야말로 내가 의지할 곳이다. 나를 제쳐놓고 내가 의지할 곳은 없다. 착실한 나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남의 바르지 못한 점을 잡지 말라. 남이 무엇을 하든 참견하지 말라. 다만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만을 생각하라.

 

  남의 잘잘못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항상 내 몸을 반성하여 잘잘못을 알자.

 

  남의 잘못을 보지 말자. 남이 행하고 행하지 아니하는가를 살피지 말자. 오직 자기를 돌보아 법도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살펴보자. 항상 자기부터 점검하는 사람이 되자. 법도에 맞지 않는 길은 아예 가지를

    말자. 잘못된 점이 있으면 변명하지 말고 즉각 시정하도록 하자.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의 일하지 않음을 책하지 말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남의 흠보다는 자기 흠을 찾아라. 남의 흠은 보기 쉬우나 자기 흠은 보기 어렵다. 남의 흠은 쭉정이

    골라내듯 찾아내지만, 자기 흠은 주사위 눈처럼 숨기려 한다. 자기 흠을 숨기고 남의 흠만 찾아내려 들면

    더욱 더 마음이 흐려져 언제나 위해로운 마음을 품게 된다.

 

 

 

  내 몸을 포말(泡沫, 거품)과 같고 양염(陽炎, 불꽃)과 같다고 긍정하는 자는 애욕의 악마가 쏘는 꽃 화살    을 쏘아 떨어뜨리고 사왕의 힘이 미치지 않는 영역에 이른다.

 

  논과 밭은 잡초로 인해서 손상되고 사람은 탐욕에 의해서 손상된다.

 

  떨쳐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않고, 젊음만 믿고 힘쓰지 아니하고, 나태하며 마음이 약해 인형처럼 비굴

    하면 그는 언제나 어둠 속을 헤매리라.

 

  마을과 숲 속, 낮은 곳이나 높은 곳 어디든 성자가 머무시는 곳에는 기쁨이 있다.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에게는 애욕(愛慾)과 지엽(枝葉)은 날이 갈수록 무성해진다. 숲 속의     과실을 탐하는 원숭이처럼 정념(情念)은 맹렬히 타오른다.

 

  손에 상처 없으면 독()을 잡아도 된다. 상처 없는 자를 독은 해치지 못하며 나쁜 마음 없는 자를 사악    ()은 범하지 못하느니라.

  

  마음은 흔들리는 것처럼 움직여 갖기 어렵고 조종하기 어렵다. 현명한 사람은 곧잘 자신을 바르게 하는데

    장인이 화살을 잘 바로하는 것 같다.

 

  마음이 고요하고 말씨가 부드럽고 행동도 얌전하다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바른 깨달음을 얻고 몸과 마음

    의 평안함을 얻은 사람이다.

 

  마음은 용겅게, 생각은 신중히, 행동은 깨끗하고 조심스럽게 하고, 스스로 자제하여 진실에 따라서 살며,

    부지런히 정진하는 사람은 영원히 깨어 있는 사람이다.

 

  마음은 동요하기 쉽고, 혼란하기 쉬우며, 지키기 힘들고, 억제하기 힘들다. 또한 마음은 잡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가볍게 흔들리며, 탐하는 대로 달아난다. 단지 지혜 있는 사람만이 이를 바로잡는다. 마음은

    보기 어렵고 미묘하나, 지혜 있는 사람은 이 같은 마음을 잘 다스린다.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곧

    안락을  

얻는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마음은 주()가 되어 모든 일을 시킨다. 마음이 악한 일을 생각하면 그 말    과 행동도 또한 그러하다. 괴로움은 그를 따라 마치 수레를 따르는 수레바퀴 자국처럼 생겨난다. 몸은 빈    병과 같다. 그러므로 마음이라는 성을 든든히 쌓아 몸에 악마가 침범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마음이 어지러워 즐거움만 찾으면 음욕을 보고 깨끗하다 생각하여 욕정은 날로 자라고 더하니 스스로 제

    몸의 감옥을 만든다.

 

  말을 그럴듯하게 잘 하거나 용모가 번듯하다고해도 질투와 인색과 간교에 찬 사람은 훌륭한 인물이 아니

    다.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지혜로써 보는 사람은 이 괴로움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 평안에 이르는 길이

    리.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이루어진다. 사악한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면 괴로움이 그 사람을

   따라 다닌다. 반대로 깨끗한 마음으로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한다면 행복과 보람이 그사람을 따라 다닐 것이

    다.

 

  '모든 것은 무상(無上)하다'고 지혜로써 그것을 보는 사람은 곧잘 괴로움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 평안에     이르는 길이리니.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 된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 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말이나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 된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듯이.

 

 

 

  무릇 사람은 이 세상에 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간직하고 나와서는 스스로 제 몸을 찍게 되나니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뱉은 악한 말 때문이다.

 

  물방울이 그릇을 채우듯이 어리석은 자는 악을 채운다.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보면 괴로우나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못 보면 괴로우나니.

 

  밭은 잡초의 해침을 받고, 사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해침을 받는다.

 

  배우는 바가 적은 사람은 들에서 쟁기를 끄는 늙은 소와 같이 몸에 살이 찔지라도 지혜는 늘지 않는다.

 

  병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며, 만족을 아는 자가 가장 넉넉한 자이다.

 

  뼈를 가지고 이 성(, )은 만들어졌고 피와 살로써 굳어졌다. 속에는 늙음과 죽음과 분노와 오만이     감추어져 있다.

 

  분노보다 더한 독은 없다.

 

  사람은 원래 깨끗한 것이지만, 모두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 하여

    향기가 나고, 저 새끼줄은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마는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다.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고, 술이 사람을 마신다.

 

  사랑에 겨워 않고 마음에 집착하는 바 없이 나를 버려 바르게 다스리면 그만큼 괴로움은 없어진다.

 

  사랑으로부터 근심과 두려움이 생긴다. 사랑으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얻은 사람에게 근심도 두려움도

    없다.

 

  사랑하는 이와 가까이 하지 말아라. 사랑하지 않는 이와도 가까이 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이를 보지 못함

    이 괴로움이요. 사랑하지 않는 이를 보는 것 또한 괴로움이라.

 

  생각을 한 곳에 모아 욕심이 동하게 하지 말고, 뜨거운 쇳덩이를 입에 머금고 목이 타는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지 말라.

 

  ()은 초조하지 않다. 구김살이 없다. 움츠러들지 않는다. 선은 유유하다. 명랑하다. 자유롭다.

 

  성난 말을 하지 말라. 마음에 괴로움을 안겨줄 뿐이다. 악을 보이면 재앙이 오나니 내 몸에 해로울 뿐이

    다.

 

  세상에는 볼 수 있어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어 잘 보는 자 적다. 그물을 빠져 나는 새 적은 것처럼 마음의

    평안을 얻는 자도 적다.

 

  승리는 원한을 가져오고 패배는 스스로를 비하한다. 이기고 지는 마음 모두 떠나 다투지 않으면 저절로

    편해진다.

  

 

  악을 두 번 다시 범하지 말아라. 악 속에 즐거움을 누리지 말아라. 악의 축적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되

    느. 작은 악이라도 경시하지 말거라. 물방울이 비록 작지만 마침내는 큰 물병을 채우느니.

 

  악을 행한 자는 두 번 뉘우친다. 이승에서 뉘우치고, 저승에서 뉘우치고. 악을 행한 자는 두 번 번민한다.

    악을 행했다는 생각에 번민하고, 벌받을 생각에 번민하고. 악을 행한 자는 두 번 고통 받는다. 이승에서

    고통 받고, 저승에서 고통 받고.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이를 명심하

    자.

 

  악의 열매가 무르익기 전에는 악을 행한 자도 행복할 수 있지만, 무르익고 나면 결국 그사람은 불행과 만

    난.

 

  악한 욕설을 함으로써 도끼로 자신의 몸을 찍는 사람이 있거니와 이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입 안에

    도끼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몸을 망쳐 버리게 되니 두려운 일이다.

 

  악한 일은 자기를 괴롭히나 행하기 쉬우며, 착한 일은 자기를 편안하게 해 주지만 행하기가 어렵다.

 

  악행을 방지하고 사념(邪念)을 제거하고 좋게 사유(思惟)하여 도()를 생각해야 한다.

  

 

  애욕에 탐익 하지 않고 미워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선악 모두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이 부유한 사람에게

    고민이 있을 리 없다.

 

  어리석은 자가 스스로 어리석다고 여기면 그는 벌써 어진 사람이며, 반대로 어질다고 여기면 그야말로 그

    는 어리석은 자이다.

 

  어리석은 자는 "네 아들, 내 재산" 하고 괴로워하며 허덕이지만, 내가 없어진 지금 누구의 아들이며 재산

   이란 말인가!

 

  오직 욕만 먹고 산 자도 없지만 믿음이 충만한 사람 또한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으리라. 그리고

    현재에도 없다.

 

  어진 이는 자기를 다스린다. 치수(治水)하는 이는 물을 이끌고, 화살 만드는 이는 살대를 바르게 하고,     대목(大木, 큰 건축물을 잘 짓는 기술을 가진 목수)은 목재를 다듬고, 어진 사람은 자기를 제어한다.

 

  여자는 언제나 부자유한 것이 그의 운명이다. 여자는 자기의 신비를 보존하기 위해서 항상 자기를 숨기

    고, 몸을 싸고, 얼굴을 가리우기에 여념이 없다.

  

 

  욕구를 버리라는 말은 욕구를 없애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욕구를 가지라는 말이다. 욕구의 방향을

    고치라는 말이다.

 

  욕락(慾樂)으로 부터 근심과 두려움이 생겨난다. 욕락을 초월한 사람에게 근심도 두려움도 없다.

 

  욕심을 부리는 자는 돈이 비처럼 쏟아져 들어와도 만족할 줄 모른다. 그러나 슬기로운 사람은 비록 조금

    이라도 욕심을 맛보는 것을 괴로움으로 안다.

 

  운명은 어떤 원인에서 오는 결과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불평 불만은 그 원인이 자기 스스로가

    만든 원인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유익하지 못한 천 마디 말보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한 마디야말로 생명의 말이다.

 

  음욕(淫慾)은 불보다 뜨겁다. 음욕보다 뜨거운 불이 없고, 성냄보다 빠른 바람이 없으며, 무명보다 빽빽한     그물이 없고, 애정의 흐름은 물보다 빠르다.

  

 

  의리 없는 친구를 피하고 어리석은 사람과 사귀지 말라. 현명한 벗을 사귀고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따르

    라.

 

  이른바 지혜로운 사람이란 반드시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두려움도 없고 미움도 없으며 착함을 지키는 것

    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헛된 것이니 구태여 가지려 허덕이지 말며, 잃었다 하여 번민하지 말라.

 

  입으로 읽지 말고 뜻으로 읽자. 뜻으로 읽지 말고 몸으로 읽자.

 

  자고로 사람들은 말이 많아도, 말이 적어도, 말이 없어도 비방을 하고 비방을 받았다. 비방하거나 비방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비방만 받고, 칭찬만 받는 사람은 지난날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자기의 얻음(분복, 分福)을 불평하고 남의 얻음을 부러워하면,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자기 자신만이 의지할 수 있는 곳, 자신 이외에 누구를 의지하리. 잘 갖추어진 자신만이 참으로 얻기 어려

    운 의지할 곳이다.

 

 

 

  자식이건 부모이건 연고자이건 죽음을 만나 갈라지는 것을 구해줄 자는 그 누구도 없으리라.

 

  자지 않으면 밤이 길고, 피곤하면 길이 멀고, 어리석으면 생사(生死)가 길다.

 

  잠깐 사이에 늙어지면 얼굴빛이 변하고 늙은이가 된다. 젊은 시절에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지만 늙으면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는 밤이 길고, 피곤한 사람에게는 길이 멀다.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삶

    과 죽음의 길 또한 길고 멀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여름 밤도 길고, 피로한 자에게는 일리 길도 멀기만 하고, (진리)을 구하지 않는 자

    에게는 만나기 어려운 인간 세상도 허무하기만 하느니.

 

  재물은 많고 길 동무가 적은 장사꾼은 위험한 길을 피하고, 슬기로운 사람은 목숨을 해치는 탐욕의 적을

    피해 간다.

 

  젊은 날에 몸을 삼가는 행동을 쌓지 않고 재물을 저축하지 않으면 그는 망해 가느니라. 먹이가 없는 연못    을 지키며 늙어가는 백로와도 같이. 방종하지 않음은 불사(不死)로 가는 길이다. 방종(放縱)은 죽음에의    길이. 불방일(不放逸)에 죽음 없고 방일(放逸)은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다.

 

  조금 아는 바가 있다 해서 스스로 뽐내며 남을 깔본다면 장님이 촛불을 들고 걷는 것 같아 남은 비춰 주지

    만 자신은 밝히지 못한다.

 

  좋은 스승에게 종신토록 배워도 배우지 못하는 자 있으니 숟가락이 국물에 잠겨서도 그 맛을 알지 못함과

    같다.

 

 

 

 

 

 

나는 누구인가?

■ 자아의 인식 (Perception of Self)

                                                                                                                      은목 블로그 중에서

□ 자아개념 (자의식 Self-concept)

 

. 정의.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기 스스로의 이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나 태도

. "진정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    .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자기 스스로가 찍어내는 객관적 사진. 자아개념은 상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 기능. 우리의 행위와 반응에 영향을 미친다. . 커뮤니케이션 행위의 예측자

긍정적 자아개념: 적극적 사고와 행동, 진취적 no hedges, confident voice

부정적 자아개념: 불안증, hedges, shaky 

. 우리가 다른 사람들 또는 현실과 어떻게 상호작용할 것인가를 결정 . 다른 사람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Positive s-c:  perceive others positively . 스스로 실현하는 예언 Self-fulfilling prophecies . 자신의 행위를 인도한다 (lead your behavior). 문지기. 들어오는 정보를 걸러서 기존의 자아개념과 합치하는 것만 통과 . 내적 메세지들이 상호 격돌할 때 중재역할              

 

. 척도 1 . 당신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당신에 대하여 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라.

이 사람은 당신의 친구일 수도 있고 애인이거나 가족의 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이 당신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를 아래의 지면 위에 써 보시오.

. 만약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하여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것을 추가할 것이다.    . 만약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하여 말한다면 아래와 같은 말은 뺄 것이다. 

 

. 척도 2  .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 스스로에 대한 당신 스스로의 생각을 묻는 문항을 완성 하십시요.

 

. 자아개념의 4 대 범주

 

. 물리적/외면적 자아 (Physical): 몸의 구조, 외모 및 움직임 . 나는 축구선수다. 나는 꽤 미남이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여자다. 나는 작고 빼빼 하다

 

. 사회적 자아 (social): . 일상생활에서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에 관련된 것. 역할 (Role):  상대와의 관계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가   . 나는 선생이다 . 나는 부모의 딸이다 . 나는 여성이다 . 나는 학생이다

 

. 관계 (Relationship): 인간관계에 관련된 자아개념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태도를 갖는가?     . 나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다 . 나는 친구가 별로 없다.

 

. 사유적 자아 (Reflective): mental and emotional states.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을 가진 사람인가 . 자신의 심적 감정적 상태를 표현

 

. 정서적 자아 (Emotional): 감정 또는 정서. 나는 자신의 욕구를 잘 참는 사람이다. 나는 미래에 대해서 초조하게 생각한다. 나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나는 예민한 남자다

 

. 심적/지적 자아(Mental): 지적 특성. 나는 지적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지적인 사람이다 . 나는 아는 것이 많다

 

. 철학적 자아 (Oceanic): . 영적, 형이상학적 관념에 관련된 자아 인생의 목적, 인생관, 세계관, 신관 등 . 나는 유신론자이다                               . 나는 우주와 하나됨을 믿는다.

 

 

.  범주들간의 관계 . 사람에 따라 강조하는 자아 범주가 다르다 . 상황에 적절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그 상황에 필요한 범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 수영장: 물리적 자아에 집중할 필요 .  자아개념의 차원 . 중요성 Importance . 어떤 속성이 다른 속성들보다 더 중요하다.

: 나의 키보다는 지성에 더 관심을 갖는다

. 측정법"자신의 속성 중에서 반드시 문제가 없다고 느껴야 마음이 편한 것은 어떤 것인가?" "남들이 알아 주었으면 하는 자신의 속성은 무엇인가?"                        . 확실성 Stability. 자신의 속성에 대하여 갖는 자신의 확신   : 내가 영적 존재라는 것은 확실치 않지만 내가 민감하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확실하다.  . 측정법                                    "나의 이 속성은 무슨 일이 생겨도 그대로 있는 것인가?" . 도구성 Instrumentality . 주어진 자아개념이 목적달성에 얼마나 도움을 줄 것인가     : '나는 강하다'라는 개념이' 나는 키가 작다'라는 개념보다 경기에 임할 때 도움이 된다.

. Self-fulfilling prophecy                              

. 측정법 "내 목적과 상충 되는 나의 자아개념으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정서성  Feelings:  Desirability                                . 주어진 자아 개념 대하여 갖는 긍정적, 중립적, 부정적 느낌. 이상적 자아 ideal self    내가 되고 싶어하는 나 . 자신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자아개념의 반대쪽을 규합하면 이상적 자아를 알 수 있다.. 실습 자아개념의 긍정성 검사 . 정확성 accuracy

 

.  형성  . 사회적 상호작용 Through social interaction (Me-I)  . 중요한 타인 (significant others)과 상호작용의 결과로 자아개념을 얻는다     부모 등 중요한 타인이 보내는 메세지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어릴 때 중요 . 우리는 중요한 타인들이 보는 대로 된다 . 관점채택 (perspective-taking) 

중요한 타인의 관점에서 자신을 본다

. 사회적 비교 Through social comparison   . 남과의 비교에서 상대적 위치를 파악한다  . 자기인식 Through self-perception  . 우리는 스스로가 행동하는 방식을 관찰하고

그 행동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에 대하여 배운다.

. 우리는 스스로의 내면적 세계에 대하여 아는 것이 적다.

따라서,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이 어렵다

나중에 스스로의 행동을 관찰한 다음 자신의 내면세계를 유추한다.

. Proposition 1: Individuals come to "know" their own attitudes, emotions, and other internal

   states partially by inferring them from observations of their own overt behavior and/or

    circumstances in which this behavior occur.

. Proposition 2: To the extent that internal cues are weak, ambiguous, or un-interpretable,

   the individual is functionally in the same position as an outside observer who most

   necessarily rely upon those same external cues to infer the individual's inner states.

  

 

 자아의식 (Self-Awareness)

 

. Johari Window : Four types of Self,  (Joseph Luft and Harry Ingham)

 

   . 자아의식의 두 차원 Two Dimensions      . 자신이 알고 있는가 Known/unknown to self      . 남이 알고 있는가 Known/unknown to others

 

자신이 (자신을) 알고 있다

자신이 (자신을) 모르고 있다

남이 (나를) 알고 있다

공개된 자아 Open Self

눈먼 자아 Blind Self

남이 (나를) 모르고 있다

숨겨진 자아 Hidden Self

아무도 모르는 자아 Unknown Self

 

   . 4가지의 자아  4가지 자아의 구성비율은 사람마다 다르다.

 

     . 공개된 자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공히 아는 정보, 생위, 태도, 감정, 욕구, 동기, 생각 등        이름, 피부, , 나이, 종교, 타율        공개된 자아가 작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못한다는 것     . 눈먼 자아        "" "" 등의 언어적 습관        자신의 장점, 단점에 대한 인식이 부족     . 숨겨진 자아        자기 자신만의 비밀        성문제, 재산, 관계상의 고민, 인생목표, 좌절, 몸무게..     . 모르는 자아        최면상태나 몽롱한 상태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자아       

 

 

. 자아의식 Self-awareness

  

   . 정의       .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는 정도       . 높은 자아의식 High self-awareness:

                         large open-self with small blind-self

       . 낮은 자아의식 Low self-awareness:

                         small open-self with large blind-self

     . 자아의식을 높이는 법       . 항상 자신에 대하여 생각한다       . 남에게 귀를 기울인다       . 스스로에 대한 정보수집에 적극적이어라: 물어라       . 자신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 공개된 자아를 늘려간다

          

. 자아공개 Self-Disclosure     보통은 숨겨진, 자신의 자아를 남에게 보여주는/공개하는 커뮤니케이션 과정      . 본질         . 자아묘사와는 다르다: 공개된 자아에 대한 커뮤니케이션         . 위험이 따른다: revelation of risky information      . 자아공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 상대방의 공개 Disclosure of the other

                          norm of reciprocity

         . 청중의 수 Audience size         . 주제 Topic         . 부하 Valence (more positive information)         . gender         . 관계 relationship. 자아공개의 보상 Rewards of self-disclosure         . 스스로에 대한 지식 knowledge of self            스스로에 대하여 명백히 설명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갖게 된다.         . 정신적 건강 energy release/physiological health            자아를 털어놓고 난 다음 마음의 짐을 던 느낌         .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ve effectiveness            상호이해 증진        . 의미 있는 관계 meaningfulness of relationships

 

. 자아공개 시 유의사항        . 자아공개의 동기를 되새겨보라            자신과 상대 그리고 관계의 이익을 위해서 할 것            상대를 해치기 위해서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안됨        . 자아공개의 적절성을 생각하라            적절한 시간과 장소            상황에 자연스럽게        . 솔직하고 숨김없는 반응이 주어질 수 있는 상황에서 하라        . 자아공개의 명쾌성을 유지하라            자아공개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이지 혼돈을 초래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 상대방의 공개를 생각하라            상대방도 자아공개를 할 기회를 주라        . 자아공개가 초래할 짐을 생각하라

 

   . 자아공개에 대한 반응        . 적극적으로 들어라        . 공개자를 격려해 주라        . 공개행위를 북돋아 주라        . 공개내용의 비밀을 지키라        . 공개내용을 그 사람에게 불리하게 사용 말라

Source: http://daisy.gwu.ac.kr/

 

 

□   Self (관련 용어)

 

 

. Self - a process of reflexive activity that includes a person’s subjective stream of consciousness (perceptions, thoughts, feelings, plans, and choices) as well as his or her conception of self as a physical, social, and moral being. In essence, the self is a reflexive process that enables us to formulate, monitor, control, and react to our own behavior.

 

Self-attitudes – refer to our beliefs about the self and our feelings toward the self and its related characteristics.

 

Self-concept – the overarching image that one has of oneself as a physical, social, spiritual, or moral being.   

 

Self-esteem – the positive or negative feelings we attach to our selves and the judgements we make of our own worth. We typically judge ourselves as good or bad, better or worse, and respectable or unrespectable.

 

Self-efficacy – our sense of being competent or “in control” as we act in the environment and interact with others.

 

Self-indication – the process through which we define and make sense of things in the world around us and inside of us. The process of thinking is based on self-indication.

 

Social identity – a mental category that locates a person in relation to others, highlighting how he or she is similar to and different from these others.  A social identity can consist of a single characteristic or it can consist of a cluster of traits and statuses. 

 

Social self – images of self that are linked to our social roles or statuses, such as our family, occupational, or educational statuses.

 

Mutable self – a self-concept that is highly adaptive to rapid social and cultural change. According to Zurcher, the mutable self integrates all four modes of self-conception – physical, social, reflective, and oceanic. It also enables its possessor to avoid fixating exclusively on any one mode, thereby enabling him or her to draw flexibly upon the different modes to adjust to the various people and situations he or she encounters in everyday life

 

* “Who am I?”

 

Interpreting Findings: According to Zurcher, the mutable self integrates all four modes of self-conception.

physical characteristics, social roles or group membership (social self), personal traits (reflective self), or some holistic sense of self (oceanic self) (e.g. “I am one with the universe”).

 

* Reflective practice

                                                               Wikipedia

Reflective practice can be an important tool in practice-based professional learning settings where individuals learning from their own professional experiences, rather than from formal teaching or knowledge transfer, may be the most important source of personal professional development and improvement. As such the notion has achieved wide take-up, particularly in professional development for practitioners in the areas of education and healthcare. The question of how best to learn from experience has wider relevance however, to any organizational learning enviro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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