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심과 의문......眞/. 한 때의 생각

나의 "재봉기술"

오갑록 2020. 10. 31. 18:28
□ 1967년, 중3 여름방학 때의 기억;
         재봉기술 습득

내가 중학 3학년 여름방학을 보낸 일이다.
동생들 4명은 초띵 6년과 3년, 7살, 3살 이었고,
동갑내기 부모님은 그 때 46세 ᆢ
그 해 여름, 방학 한 달 내내, 나는 미싱만을 돌렸었는데,

곡물, 감자 고구마 등 40kg 정도의 포대로 쓰는 갈색 비닐로 짠 우븐백, 그 우븐백을 공장에서는 톤백이라고 하여 1톤 정도 들이로 크게 만들어 쓰는데, 각종 원자재나 건축자재 등의 운송 용도로 사용한다.

그 때, 아버님이 어느 공장의 톤백 폐자재를 한 트럭 사서, 가내공업용 원자재로 싣고 오셨다. 헌 톤백의 성한 부위를 가위로 잘라내서, 한 말 들이 소형 봉투를 만들어 재활용 할 생각이었는데, 우리 집에는 미싱이 없었으니, 그 일을 위해 새 틀을 장만하셨다.

브라더 미싱으로 샀다고 생각된다. (아이디알 미싱이 더 고가였던듯) 그것도 아마 뙤약 빚을 내서 장만하셨을 것(?)

기계는 장만했으나, 어머니는 양쪽 발이 지그재그 샥샥이 안되서 발틀이 엇박이 되어 틀을 못 돌리고, 아버지는 기계치라 그 큰(?) 기계도 못돌리고, 동생 아그들은 아직 어리니 안되고 ᆢ

그리하야, 중띵 3년 여름방학, 이 몸이 기술자 행색을 냈었다. 나는 미싱을 돌리고, 어머니는 헌 톤백을 잘라내어 작은 봉투 크기로 잘라 놓으면, 초띵6년 바롯동생은 재봉틀까지 조달하는 시다역 ᆢ!

한 달 내내, 한 트럭를 돌리다 보니, 가정용 틀이 오죽했겠는가! 재봉틀 분해 소제 일에 한달을, 매일 진땀!
그 때가 중띵 3년  ᆢㅎ

여름방학 한달 내내, 짬을 못내어 방학숙제 땜에도 징징댔을것 같다.

초띵 6년 동생은 시다로 꼼짝없이  일을 거들어야 했고, 어머님은 그것 한 자동차를 혼자서 가위로 다 오려 내었을것 생각하면 힘  들었을 터  ᆢ?

더운 한 여름 무더위에, 일도 일이지만, 비좁은 먼지 틈바구니에서, 4명 삐약 새끼들 다스리랴, 중띵 엉터리 기술자 비위 맞추랴 ᆢ

어르신 맘 고생도, 몸 고생 못잖았을 걸 ᆢ?!
생각할수록 쨘한 장면들이다. 그 때는 한국동란 끝난지 십여년 후인지라, 우리뿐만 아니라 이웃도 대다수가 먹거리 조달에 여념없던, 가난한 시절이었을게다.

아버지는 상품을 내다 파시느라, 어머니는 새끼들 보살피랴 제품 만들랴, 나와 아우는 미싱 돌리랴, 더 어린 애들은 그 속에서 자라야만 했으니, 가족 모두들 어려움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대신 내게는 틀 기술이 여지껏 남았다. 고장난 헌 틀도 잘 만질 수 있고, 바지 단 정도 쓱싹 손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 브라더 미싱 ᆢㅎ!
여름 한 달, 일 마치고 난 후에 보니, 재봉틀 노루발 아래가 닳아서 흰 코팅이 없어지고, 속의 합금이 나와서 색이 노랗게 변했었다  ᆢㅎ
내게는 노랑색에 대한 색다른 추억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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