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
■ (구석기 시대 1)
□ 인류의 진화계통 (계통이 각기 다름)
(단위; 만년전)
ㅡ 아르디피테쿠스 라미두스 (440~430 만년 전)
ㅡ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나멘시스 (400 만년전) ☞ 케난스로푸스 플라티옵스 (350~320)
☞ 케난스로푸스 루돌펜시스 (350~320)
ㅡ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300 만년전) ☞ 호모 하빌리스 (240) ☞ 호모 에렉투스 (160)
☞ 호모 안티세서 (20) ☞ 호모 사피엔스 (16)
ㅡ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300 만년전) ☞ 파란스로푸스 로부스투스 ( ~140)
ㅡ 파란스로푸스 에티오피쿠스 (250 만년전) ☞ 파란스로푸스 보이세이 ( ~140)
□
2억4000 만년전에서 6500 만년전 중생대(中生代)에 공룡(恐龍)을 위시해 파충류(爬蟲類)가 번성했고, 1억8000 만년전 중생대 중반에는 포유류(哺乳類)도 뒤이어 출현했다. 6500만년전부터 현재까지를 신생대(新生代)라 하는데, 포유류(哺乳類)는 이 신생대 제3기인 6500 만 년에서 300만년전 사이에 출현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7500만년전 중생대 말기에 유원인(類猿人)이 나타난다.
오스트랄로피데쿠스(Australopithecus)의 일종인 타웅 챨리드가 발견 됨으로써 800만년전에 이미 인류의 출현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인류가 출현했다고 생각하는 신생대 4기는 300 만년전에서 현재까지를 두고 말 하는데 홍적세(洪績世; 5-300 만년에서 1만년전까지)와 충적세(沖積世; 1 만년전에서 현재까지)로 나눈다.
홍적세를 고인류시대 또는 구석기(舊石器)시대라 부르지만 400 만년에서 10만년전 까지를 구석기, 중석기시대라 세분하기도 하며 10만년에서 1만년전 까지를 신석기(新石器)시대라 분리해 나누어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이후 충적세는 현생인류시대(現生人類時代)라고도 한다.
호머니드(Hominid; 類猿人)로 분류될 수 있는 원인화석(猿人化石)들이 발견된 예를 보면, 홍적세인 600-440만년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류의 조상 뼈가 1994년 에디오피아 아와시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꾸준히 그 장소주위를 살펴 뼈 조각들을 수입해 형태를 만들었는데 학명은 Ardipithecus ramidis(아르디피데쿠스 라미디스)이며 일명 아르디(Ardi)라 하고 가장 오래된 호머니드 라고 클라크 교수는 주장했다. 4-300 만년전 홍적세 초기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아프리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남쪽 원숭이 사람) 가 1924년 남아프리카에서 발견 되었는데 이 유원인 화석은 현생인류 뇌 용적의 ⅓ 수준이었다.
이들은 고릴라와 인간의 중간동물로 직립보행은 하고 있었지만 어깨와 골반의 부조화(비상사태에서 서로 반대로 움직이지 못하는)로 인해 빠르게 달리지를 못했다. 지금도 부조화가 그대로인 원숭이는 위험이 닥치면 나무로 올라간다.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아프리카누스가 발견된 이후 오스트랄로피데쿠스라 여겨지는 화석들이 전문 화석 사냥꾼들에 의해 계속 발견되고 있다. 320만년전에 살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아파렌시스가, 도날드 요한슨에 의해 1974년 에디오피아 하다르 계곡에서 발견되어 지구최초 인류의 조상이라 하여 루시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다음해 주변에서 A, 아파렌시스 13구가 가족화석으로 발견되었다.
1938년에는 영국의사 로버트 브룸이 200-150만년전 지구에 살았다고 생각되는 오스트랄로피데쿠스 로보스투스의 화석을 발견했다.
180-190만년전에 생존했다고 추정되는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세디바(Australopithecus Sediba)가 2008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동굴에서 성인여성과 어린애 유골이 동시에 발굴되어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보도하면서 현생인류와 원인(猿人)과의 중간으로 인류의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일 가능성을 시사 했는데 학명으로 붙인 세디바(Sediba)란 계속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원천(源泉), 즉 샘이란 뜻이다.
A, 세디바는 현생인류인 호모(Homo)와 원인(猿人)인 오스트랄로피데쿠스의 특징들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데 다리와 허리는 길지만 나무를 잘 타고 다녔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이들이 생존한 시기는 오스트탈로피데쿠스가 점차 사라지고 호모가 등장하던 때이긴 하지만 이 A. Sediba가 과연 Homo인 현생인류(現生人類)와 오스트랄로피데쿠스인 원인(猿人)과의 사이에 누락(漏落)되어있는 화석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가에 그 관심이 집중된다.
바꾸어 말하면 다윈의 진화론이 인정받을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증명되는 화석인가? 가 화제의 초점이다. 500만년 ~ 1000 만 전 사이에 유인원과 인류는 공동 조상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기도 하는데, 인류(Homo)는 250만년전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분들도 있다.
원인(猿人) 오스트랄로피데쿠스를 지나 현생인류(Homo)시대로 넘어오면, 200 만년전 호모 해빌리스(Homo habilis; 손쓰는 사람)가 있었으며 손으로 물건이나 먹을 걸 잡고 생활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중국에는 약 200 만년전에, 시베리아에는 100만년전에 인류가 살았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더러 있다.
70만- 65만 년 전에는 호모 엘렉투스(Homo electus; 곧선사람)이 있었는데, 석기(石器)나 골기(骨器), 특히 불을 사용하며 사냥으로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북경원인과 자바인이 여기에 속한다. 북경원인은 160만년전 호모 해빌리스가 아프리카에서 시작, 아시아로 이동, 50 만년전 아시아에 정착한 호모 엘렉투스 로 보고 있다.
평안남도 덕천 승리산 동굴에서 발견된 사람의 어금니 2개와 어깨뼈는 북한은 덕천인이라 부르며 70만 전 구석기시대(舊石器時代)에 살았던 호모 엘렉투스 라 주장한다.
10 만년전, 제3 간빙기(間氷期), 호모 사피엔스(Homosapiens; 슬기사람)가 살았는데 이 시기에 네안델타르인이 출현했으며 두뇌를 사용, 생활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네안델타르인은 그 이전 20만년전에 살았다 생각하는 분도 있다.
약 1만년전, 충적세 초기 전후에 살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Homo sapiense, sapiense; 슬기사람) 은 현생인류의 출현을 의미하고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주구점, 상동인 등으로 진정한 현생인류 조상의 출현으로 본다.
특히 크로마뇽인은 4만년전에 이미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생인류의 출현을 설명하는데도 실제 인류학적으로
유원인(類猿人)으로부터 현생인류로의 진화과정에서 반드시 연결 되어져야 하는 진화론에 필요불가결한 고고학적 중간단계들이 누락되고 빠져있다. 이미 최초의 인류라고 알려진 루시를 비롯해 여러 원인(猿人)인 오스트랄로피데쿠스의 화석이 발견되고는 있지만 만족할 만한 결정적인 연결고리는 아직은 발견되지 않았다.
2008년 발견된 오스트랄로피데쿠스 세디바(A, Sediba)가 알려진 대로 원인(猿人)과 현생인류의 공통점을 모두 갖고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가 완성될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
■ (구석기 시대 2)
배기동 교수
한양대 인류학과
□ 구석기시대의 개념과 의의
. 구석기시대의 개념
구석기 시대란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던 문화발전단계의 기간을 말하는데, 인류가 처음 출현한 500만년전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기 직전인 1만년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인류 역사의 거의 99.8%가 구석기시대인 셈이다. 이 구석기시대 기간 동안 인류는 채집과 사냥을 하면서 이동성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류의 최초 출현은 약 500만 년 전이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최고(最古)의 석기는 약 2백50만 년 전의 것이다. 인류가 발생 직후에도 자연석이나 나무 등을 도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만 250만년전까지는 석기를 제작한 흔적이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 구석기시대의 의의
구석기시대는 석기의 제작기법에 따라 전기, 중기, 후기의 삼 단계로 구분한다. 구석기의 발전단계는 인류형태의 진화과정과 병행한다. 구석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현대 인류가 출현하였다.
구석기시대의 전 기간 동안 인간의 모든 진화가 일어나게 된 것이며, 현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특성들이 형성된 시기인 것이다.
즉 250만년의 기간 동안 인류는 지구 상에 살아 남을 수 있는 문화적인 역량을 구축하여 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인류의 기원과 진화
. 인류의 기원 -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 된 인류의 형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들이다.
500만년전에 출현하여 현생인류인 호모 시리즈들이 출현하는 250만년전까지 존속했는데,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된다. 체질적으로 직립하였지만 아직도 얼굴 형태에서 침팬지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 최근 에치오피아 아파르지역에서 4백만 년이 넘는 인류화석이 발견되어 새로운 속으로 아리디피테쿠스로 명명되었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종류(출현 순서)
. 오스트랄로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
. 오스트랄로 아프라카누스(Australopithecus Africanus)
. 오스트랄로 에이치오피쿠스(Australopithecus Aethiopicus)
. 오스트랄로 보이지아이(Australopithecus Boisei)
. 오스트랄로 로부스루스(Australopithecus Robuslus)
아파르가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70년대 초,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가장 오래된 <루시>가 발견되면서부터다.
머리뼈에 침팬지와 비슷한 특성을 가진 이 화석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으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로 새로운 학명이 부여됐다.
. 인류의 생존과 확산
. 인류의 생존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에 관한 연구는 인류의 생존 이유와 직결되고 있다.
도구의 사용, 언어의 사용, 직립보행 등이 인간과 짐승의 구별점으로 논의되고 있다. 그 중 직립보행이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주장된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파렌시스의 뼈 화석을 보면 이미 직립보행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들 화석들은 그 어느 것도 석기와 함께 나타난 적이 없다. 이것은 태초의 시기에 인간은 도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도구의 사용이 직립으로 유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현재 인류학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이는 다윈의 학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결론인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인간이 직립을 하기 시작하였을까?
현재까지 제기된 이론 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명이 오웬 러브조이 박사의 음식운반을 위하여 일어서서 걷게 되었다는 학설이다. 인간은 우리와 유사한 유인원, 즉 침팬지, 고릴라 등에 비하여 다량으로 음식을 운반하여 더 많은 자손을 번식시킬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 인류의 확산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아프리카지역에서만 살았다.
유라시아대륙에 인류가 처음 출현한 것은 약 50만 년 전 <호모 에렉투스>의 단계에서 이루어졌다. 중국과 쟈바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호모 에렉투스가 발견된 지역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생 인류도 역시 아프리카의 한 여성에서 출발하여 진화한 것이라는 <이브학설>로 설명되고 있다. 인류의 진화단계와 문화발전 단계는 대체적으로 병행하게 되며, 오늘날 인류들이 하는 문화적 행위의 모든 근원은 이미 현생인류가 출현하면서 예고된 것이라 하겠다.
아프리카 이브설 –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설
캘리포니아 Berkeley 대학 생화학과의 A.C. Wilson박사 등은 1987년 Nature지를 통해, 5대륙을 대표하는 147명 여성의 태반으로부터 얻은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이들 모두가 약20만 년 전 아프리카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며 현생인류의 아프리카 기원을 주장하였다.
인류의 기원을 단백질이나 DNA와 같은 생체분자로부터 추적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1960년대로부터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해 온 분자생물학은 이윽고 1987년에 현생인류의 어머니로서 아프리카 이브(African Eve)를 등장시켰다.
사람의 미토콘드리아 DNA가 모계를 통해서만 전해진다는 사실로부터 현 인류의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현대인의 근원지는 아프리카 대륙이었으며 어느 한 여성이 인류의 공통조상이 된다는, 이전까지 생각해오던 것과는 매우 상반되는 가설을 내놓은 것이었다.
□ 전기 구석기 시대
. 최초의 석기 등장
최초의 석기들은 동아프리카에서 약 250만 년 전에 출현하여 약 10만 년 전까지의 시기로 호모라고 명명된 인류의 출현과 일치한다.
최초의 호모(Homo)는 호모 헤빌리스(Homo Habilis)로 이들은 오스트랄로 보이지아나 로부스쿠스와 같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들이 억센 야생식물을 많이 먹은 것에 비해 호모헤빌리스들은 육식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오스트랄로 피테쿠스의 두개골 화석은 턱을 움직이는 근육이 매우 발달되고 이로 인해 정수리에 돌출부분이 있다).
또한 이들은 동물의 가죽을 자르거나 고기를 사체로부터 분리하기 위하여 석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의 유적에서 나타난 동물 뼈에 도살 흔적이 확인된다.
. 전기 구석기의 석기 제작 기법
돌을 깨뜨려 석기를 만들 때 떨어져 나온 돌 조각을 '박편(격지)'이라 하고 박편이 떨어져 나온 원래의 돌을 '석핵(몸돌)'이라 부르는데 박편을 2차 가공한 경우를 박편석기라 부르고 석핵을 가공한 경우에는 석핵석기라 한다.
전기구석기에는 돌을 던져서 떼어 내거나(던져 떼기), 모루돌에 부딪히게 하여 떼어내는 방법(모루떼기), 그리고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 망치 돌을 가지고 떼어내는 직접타격법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전기 구석기가 진행되면서 주먹도끼가 나타나는 시기가 되면 일부 지역에서 연질망치 직접타격법(돌망치 대신에 나무나 뿔을 망치로 사용함)이 나타나고 이로 인해 석기의 날이 고르고 전체적으로 납작한 석기가 등장하게 된다.
. 올도완 석기문화 - 최초의 석기문화
원래는 동아프리카의 유명한 올두바이 계곡의 맨 아래층에서 나타난 석기문화를 부르는 명칭이었으나 다각면 원구나 긁게 등 주먹도끼를 포함하지 않는 원시적 특성의 석기문화의 공작을 부르는 일반 명칭
. 아슐리안 석기문화- 주먹도끼가 나타나는 석기문화
약 15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호모 엘렉투스(직립원인)가 만든 문화이다.
그 특징인 주먹도끼는 평면이 타원형 또는 첨두형으로 생기고 전면을 가공한 다양한 기능을 가진 석기이다. 이와 함께 큼직한 박편을 가공하여 오늘날의 도끼날과 같은 가로날 도끼도 나타나며 직립원인의 지혜의 발달을 보여준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하여도 아슐리안 석기문화는 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발견된다고 하여 인도를 중심으로 아슐리안 문화권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권으로 양분하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주먹도끼들로 인하여 이 학설은 무너지고 이제는 동아시아에도 아슐리안 문화가 있는 것으로 학설이 정리되어가고 있다.
아슐리안 석기를 제작하였던 호모 엘렉투스들은 불을 사용할 줄 알았고 지혜 또한 발달하여 환경에 대한 예측력과 적응력이 크게 개선되어 아프리카를 떠나 아시아 쪽으로 퍼지게 되었으며 동아시아지역은 아프리카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고인류의 흔적이 남게 되었고 그 시기는 약 백만년 전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에는 전기 구석기의 중엽쯤 고인류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개연성으로 볼 때 중국의 북경에서 고인류가 약 50만 년 전에 거주하였기에 비슷한 시기일 가능성은 매우 높다.
현재 평양의 검은 모루 유적은 북한측에 의하면 80 만 년 전으로 주장되나 연대적인 증거나 석기도 불확실한 면이 많아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국 최대, 최고의 구석기 유적은 전곡리 유적이다.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전기 구석기 유적이기는 하나 현재는 20 만 년 전후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
단양 금굴 유적 또한 유사한 석기가 발견되어 중기 홍적세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으나 지질학적 해석의 문제점이 있는 실정이다.
□ 중기 구석기 시대
중기 구석기 시대는 약 10만 년 전 전후에서 3 ~ 4만 년 전후까지의 시기이다.
석기 공작의 특징으로 르밤르와 기법의 출현과 박편석기의 증가가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르밤르와 기법이란 원하는 박편의 모습을 미리 몸돌에 다듬은 후에 조정타격면을 이용하여 박편을 떼 내는 발달된 제작기법이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지역의 석기공작을 흔히 무스테리안(Mousterian)석기공작이라고 부르며 네안데르탈(Neanderthal)인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중기 구석기인들은 네안데르탈인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호모사피엔스들이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중기구석기인들은 르밤르와 기법이 잘 나타나지 않아 전기 구석기문화와 기술적인 구분이 어렵다.
한반도에서는 굴포리의 하층문화, 석장리의 중층문화, 용곡동 중층문화 등이 여기에 속하나 절대연대가 제시된 바 없기에 연대적인 범위도 아직은 분명하지 않은 실정이다.
중기 구석기인들은 초식성 동물을 사냥한 흔적이 많고 기법도 다양하게 나타나 창을 사용한 경우나 몰이사냥의 흔적도 발견된다. 남아프리카의 유적에서는 조개채집의 흔적도 나타난다. 이 시기에 장거리 운반된 유물이 유적에서 나타나며 채색벽화나 조각예술도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고 곰이나 양의 머리를 부장품으로 묻은 것도 나타나 의식과 예술행위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며 이 시기에 인간성이 크게 발달하고 언어능력도 현저히 향상된 시기라 할 수 있다.
□ 후기 구석기 시대
석인석기 공작을 특징으로 하는 시기로 약4만년에서 1만 년 전의 시기에 해당된다.
석인석기란 길고 폭이 좁은 박편을 말하고 이는 간접타법 등의 발달된 박리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양 측면이 날카로운 것이 보편적인 형태이다.
이는 석재를 가장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단위당 가장 많은 석기를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석인석기 공작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의 출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아프리카와 같이 빠른 곳은 9만년 전에 현생인류와 같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는 빙하가 가장 번성하여 기후가 대단히 추워지는 시기로 현생인류가 전세계, 즉 신대륙까지 퍼져간 시기이다.
후기 구석기에는 석기뿐 아니라 조각도를 이용하여 많은 골각기를 다듬어 사용하였고 석재에 대한 선호가 두드러져 상당히 먼 거리에서 운반되어 사용된 석재가 나타난다. 이 시기에는 자원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이용하여 계절적으로 이동생활을 하였으며 사냥의 기법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후기 구석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양한 인간성의 표현으로 예술품의 출현, 악기의 출현 그리고 여러 가지 의식들이 유적에서 발견된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동굴벽화와 다양한 주제의 조각품들 그리고 개인용 장신구 등이 나타난다.
중기 구석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매장풍습이 크게 증가하고 다양해지며 뼈나 상아를 이용한 장신구와 관등을 만들고 있는데 이는 집단의 동질성을 표현하기 위함으로 분석되며 이미 사회적인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반도에서는 석인석기문화가 3만 년 전 경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함께 나타난다. 함경도 굴포리의 상층문화, 공주석장리의 상층문화, 수양개 석기공작, 상무룡리의 상층, 만달 동굴 석인석기공작 등으로 대표된다. 흑요석 등 특수한 석재의 선호경향이 나타나며 석인석핵과 아울러 석인을 이용하여 끌긁개나 자루 있는 첨두기를 다듬고 있다.
북한의 만달리에서는 만달인이라고 명명된 현생인류와 함께 석기가 출토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구석기시대 인류가 현대 조선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후기 구석기 문화는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는데 당시에 황해의 많은 부분이 노출되어 있던 것을 미루어 볼 때 많은 유적은 바다 속에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중석기 공작
중석기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이어주는 과도기로서 석기의 크기가 대단히 작아지는데 이를 세석기라 부르고 단독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조합식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석기는 나무로 만든 자루에 끼워서 사용하였고 그 시기는 대체로 후기구석기 말엽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신석기시대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중석기 문화는 도구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이것은 후빙기 초의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다른 경제행위의 변화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북한 주장)
70만 ~100만 년 전 - 검은모루 동굴에서 살았던 원인(호모 엘렉투스)
30만 년 전 – 화대사람
10만 년 전 - 력포사람, 덕천사람
4만~5만 년 전 – 승리산사람
2만 년 전 – 만달사람들,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
■ (구석기 시대 3)
. 한민족·한국인은 누구인가
우리나라에서 70만 년 전 즉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은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유적(북한은 인골화석을 재측정한 결과 100만 년 전으로 설명)과 충북 단양 금굴의 유적을 비롯하여 계속적으로 인류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원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한민족과 어떤 관련이 있으며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원인들은 인류 진화 발전 과정에 따라 고인으로 발전했는데 고인들은 대체로 제4기 중부 홍적세 후기(약 20만~30만 년 전)부터 중기구석기시대의 문화를 형성했다. 이들은 약 5만 년 전인 후기구석기시대에 신인으로 바뀌며 약 1만 년 전에 비로소 현대 인류의 선조들이 태어났다고 인식한다.
마법의 무기로까지 일컬어지는 유전자 분석의 등장으로 인종이라는 구분은 이제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백인종, 흑인종, 황인종이라는 외형적 특징은 분명히 존재하며 한국인은 황인종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몇 십만 또는 몇 만 년 전 적어도 현대 인류가 등장했다는 1만여 년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선조들도 우리와 같이 황인종일까, 황인종이라고 해도 수많은 지류가 있는데 과거에도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유한 특성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가도 궁금한 사항이다.
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고 지적한다. 우선 증거를 찾는 것 자체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몇 만 년, 몇 십만 년 전에 살아있던 인골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시신을 매장하면 단 몇 년도 안 되어 모두 육탈되고 뼈만 남게 된다. 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매장지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100년을 넘지 않는다. 400~500년 전의 미라가 발견되어도 언론 매체가 대서특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물며 1만 년, 10만 년, 100만 년 전의 뼈를 수습하여 연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첨단과학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인골 화석을 발견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인골 화석이 어떤 연유로든 지표면에 나온 것을 발견하거나 인골 화석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을 예견하여 인내를 갖고 발굴하는 것이다.
그런데 화석은 일단 지각 변동 등으로 지표면으로 노출되더라도 2~3년 내에 발견되지 않으면 부식되거나 완전히 파손된다. 그러므로 고인류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화석이 발견될만한 곳을 잠시도 쉬지 않고 방문하여 관찰한다.
아프리카의 올드바이 계곡에 수많은 고인류학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그 지역이야말로 가장 많은 고인류화석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또 학자들의 기대만큼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인류화석도 발견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석회암 지대에서 화석 발견>
1974년 미국의 고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이 대학원생인 조수 탐 그레이와 에티오피아 아파르 삼각지의 한 지점인 하다르에서 수십 개의 뼈 조각을 찾아냈다. 하다르는 아프리카 동부의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Great Rift Valley)에 속하는 곳이다.
고인류학자들은 대개 치아 하나, 뼈 한 조각만 찾아내도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두개골의 일부라도 발견하면 복권이 당첨된 것보다도 더 어려운 행운을 잡았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발견한 것은 완전한 골격의 거의 절반 가량이 되었다. 이는 가히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우선 골반 뼈로 보아 여자의 뼈였는데 키는 90센티 정도였고 나이는 20살 정도였다. 이 유골이 바로 약 300~320만 년 전에 살았던 원숭이와 인간 사이의 과도기적 생명체로 현대 인류의 조상으로 추정하는 ‘루시(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다. 고인류학자들이 루시의 발견에 그렇게도 환호한 것은 그렇게도 찾기를 바라마지 않았던 몇 백만 년이나 되는 인류 진화상의 잃어버린 연결고리(missing link)를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루시는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뇌가 작고 턱도 뾰족했다. 생김새는 원숭이와 비슷했지만, 치아는 인간과 거의 비슷하고 호수 근방에 살았다. 무릎 관절로 미뤄봐서 루시가 침팬지보다는 사람에 가까우며 뛰기보다는 걷기에 편했던 골반과 두개골구조를 갖췄던 것으로 짐작된다. 평균적으로 여자는 몸무게가 약 28~30킬로그램, 키가 100~120센티미터였고, 남자는 몸무게가 40~55킬로그램, 키가 120~135센티미터 정도였다.
루시 다음에는 약 150~250만 년 전에 ‘호모 하빌리스’가 출현하며 180만 년 전에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중국, 자바에서 발견되며 70만~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동굴에서 살았던 것도 호모 에렉투스이다.
다음에는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의 특징을 가진 두개골이 발견되는데 네안데르탈인이 그들이다. 네안데르탈인은 유럽, 중동 지방에 특히 밀집하면서 구세계에 널리 분포되었는데 인구수도 몇 십 만 또는 몇 백 만에 달했다고 추정한다.
그 후 15만~20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인 크로마뇽인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계통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은 계통도가 그려질 수 있는 화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루시를 비롯하여 몇 백 만 년, 몇 십 만 년 전에 살았던 생명체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학자들이 구석기인들의 뼈를 찾아낸 장소는 모두가 석회암동굴이다.
석회암 지대에 침수된 지하수는 석회암 속의 가용성 물질을 용해시키기도 하고 결정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석회암으로 된 장소에 시체가 묻히게 되면 석회암이 녹으면서 형성된 광물질이 많은 지하수나 물기가 계속 유골에 작용하여 뼈세포 속에서 광물질이 석출되어 그곳에 채워지고 또 삭아 없어지는 빈자리에도 광물질이 들어가게 된다.
또 분자 수준에서 유골과 광물질 사이의 자리바꿈도 진행된다. 이 경우 유골은 돌과 같이 굳어지면서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며 부패작용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외력에 대해서도 저항력이 강해지므로 상황에 따라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는 고인류 화석에 관한 한 세계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질 좋은 석회암이 나온다는 것은 한국이 세계적인 시멘트 생산국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고대 인골이 발견된 곳은 무려 10여 군데나 된다. 앞에서도 약간 설명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인골에 대해 설명한다.
<계통적으로 발견되는 인류 화석>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골은 2002년 4월에 함북 화대군 석성리의 5개의 화산용암 속에서 발견된 여자와 미성년, 어린이 등 3인의 머리ㆍ골반ㆍ대퇴ㆍ팔뼈이다. 이를 ‘화대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열형광법으로 절대 연도를 측정한 결과 화석의 주인공은 거의 30만 년 전에 살던 인류라고 발표됐다. 이 화석은 한국이 세계적으로 최초의 고인이 출현한 발생지의 하나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류화석으로는 스페인에서 발견된 30만 년 전의 아토푸에르카가 인정되었으며 중국의 경우 가장 오래된 고인은 13만~18만 년 전의 것이다. 특히 화대사람은 화산 용암 속에서 인류화석이 발견된 첫 번째 예로 주목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 인류화석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인식한다.
1972~1973년,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의 아래층에서 ‘덕천사람’이 발견되었고 1977년 9월에는 평양 력포구역 대현동 동굴에서 ‘력포사람’이 발견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에서 70만 년 전 즉 전기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는 평양시 상원군 흑우리에서 발견된 검은모루동굴유적과 충북 단양 금굴의 유적으로도 알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인골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검은모루동굴은 인골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한국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이다. 검은모루유적은 상원읍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흑우리(黑隅里)의 낮은 산인 우문봉 남쪽 비탈에 있는데 1966년 석회석을 채광하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29종의 동물화석과 구석기인의 타제석기(打製石器)가 발견됐는데 정밀조사는 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동물화석 중에는 곰ㆍ멧돼지ㆍ승냥이 같은 수풀지대 짐승과 원숭이ㆍ물소ㆍ큰쌍코뿔이 등 열대지방 동물 뼈도 있었다. 이는 당시 기후가 아열대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더욱이 29종 중 17종은 이미 멸종된 것이다.
검은모루유적의 발견은 해방 후 북한을 포함하여 한국 고고학계의 최대 성과로 평가된다. 한반도에도 구석기시대가 있음을 확인한 획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남한에서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ㆍ충남 공주시 석장리 등 30여 곳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됐지만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먼저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자 그들은 식민사관을 조장하기 위해 한국에는 구석기가 없다고까지 왜곡했다. 그런데 검은모루유적이 이를 통쾌하게 극복케 만든 장본인인데다가 한국의 역사를 무려 70만~100만 년 전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70만 년 전이라면 유명한 북경원인(北京猿人)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호모에렉투스 즉 직립원인이다. 검은모루유적이 남북한을 막론하고 한국 역사의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여하튼 검은모루동굴에서 인골이 나오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없으므로 한국인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한참 후대로 내려가야 한다.
바로 력포사람이다. 력포사람은 한 개체분의 머리뼈(앞머리뼈, 윗머리뼈, 옆머리뼈)가 발견되었는데 7~8살 정도의 어린아이이다. 이마가 낮고 넓적하여 뒤로 제껴진 것은 원인이나 고인 단계의 인류 특징이다. 뇌수의 앞머리 부분이 잘 발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마가 몹시 낮은데 북한은 력포사람을 상당이 앞선 시기의 고인이라고 추정한다.
력포사람보다 약간 일찍 발견된 덕천사람은 오른쪽과 왼쪽 어금니, 오른쪽 어깨뼈가 발견되었다. 이빨은 크지 않고 치관의 형태는 장방형으로 현대인에게는 자주 볼 수 없는 유형을 갖고 있는데 이는 고인들의 이빨에서 볼 수 있는 원시적인 특징이다. 반면에 어깨뼈는 고인임에도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덕천사람은 고인의 특성과 현대 한국인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추정한다.
다음은 평남 덕천시 승리산 동굴에서 발굴된 ‘승리산사람’이다. 승리산사람은 아래턱뼈가 발견되었는데 같은 덕천에서 발견된 ‘덕천사람’보다 윗층에서 발견되어 년대가 많이 떨어지는데 약 4만〜5만 년 전으로 추정한다.
유골은 35살 정도의 중년 남자로 아래턱뼈가 원인이나 고인에 가까운 높이를 갖고 있다. 이것은 후기구석기시대의 신인 단계이지만 아직도 원시적인 특징이 채 가시지 않은 현상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나 승리산 사람은 아래턱뼈가 높은데도 이음부의 높이가 턱구멍 부위의 높이보다 낮다. 이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씹는 기능의 약화와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매우 진보적인 형태의 특징으로 설명된다.
북한은 아래턱뼈를 기본 자료로 신인의 얼굴을 복원했는데 학자들 손에 의해 다시 태어난 승리산 사람은 슬기슬기사람(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으로 주장된다. 이같은 주장은 승리산사람 얼굴 특징에 나타난 높은 머리와 넓은 하관부가 오늘날 한국인 특징의 일부로 남아있다는 데서 나왔다.
남한의 충북 청원군 두루봉 동굴에서도 승리산과 거의 동시대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를 ‘흥수아이’라 부른다.
1983년 발견자인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 붙였는데 흥수아이는 약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신인이라고 추정한다.
흥수아이에 대한 체질인류학분석결과 5살 때 이 동굴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아이의 머리 크기는 1200~1300㏄,키는 110~120센티미터 정도이다. 특히 뒤통수가 튀어나와 요즘의 말로 표현하면 짱구형이며 아래턱도 둔탁하게 보인다. 머리뼈를 잰 결과는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지닌 것으로 드러났다.
흥수아이가 특별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흥수아이가 장례 풍습에 의해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1983년 발굴 당시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놓은 후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 주검을 아무렇게나 마구 버리지 않고 고이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뜻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흥수아이의 주검 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다는 점이다.
이들 꽃가루 분석에서 국화꽃가루가 가장 많았는데 학자들은 흥수아이가 죽었을 당시 국화꽃이 주검 주변을 치장한 장의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상당히 높은 지대인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화꽃은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꺾어왔다는 추정이다.
또한 동굴 입구 한쪽 모서리에서 많은 양의 진달래꽃가루가 채집되었다. 진달래는 본래 호산성식물인데 두루봉 일대는 알칼리성 토양으로 되어 있다. 학자들은 두루봉동굴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 이당시 이미 아름다움을 식별하는 심미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장례용으로 꽃을 사용했다고 인식한다. 물론 국화꽃이 가을꽃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흥수아이가 사망한 시기도 가을로 추정했다.
고인류학계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을 중요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면모도 발달하여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풍습도 가졌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무스티에 유적지에는 10대 소년이 옆으로 누워서 머리를 팔 위에 얹어 놓은 상태로 매장되어 있었다. 그의 손 옆에는 훌륭한 돌도끼 한 개가 놓여 있고 소의 뼈가 둥그렇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것들은 소년의 사후에 있을 여로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에 놓여진 것이었다.
특히 이라크의 샤니달 동굴에서 발견된 인골은 40세 정도의 남자인데 다리가 접히고 구부러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인골 주위에서 접시꽃, 푸핀, 엉겅퀴, 무스카리 등을 비롯한 많은 꽃가루 화석이 발견되었다. 죽은 자에게 꽃을 바치는 마음을 간직했다는 사실은 시체를 정성스럽게 묻었다는 것으로 원시인의 이미지를 근본부터 뒤덮는 일이었다.
체코의 한 고분에서는 시체 위에 돌로 만든 보호층 아래 14개의 인골이 있었는데 이들 시신은 내세에서도 계속 가깝게 지내겠다는 뜻에서인지 서로 붙어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모라비아의 한 고분에서는 매머드의 거대한 견갑골 밑에서 여자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시신 위에 적색의 황토가 소량 뿌려져 있었다. 생명을 주는 혈액으로 추정했을지도 모르는 적색 황토는 유럽 지역의 여러 고분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주로 웅크리거나 자궁 속의 태아 모습으로 수습된 시신 위에 뿌려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남북한의 고고학자들이 흥수아이를 그토록 열광한 이유는 고고 인류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풍습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뼈화석을 자료로 얼굴을 복원했는데 이 얼굴을 보면 매우 귀여운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에서 유럽인도 발견>
1979~1980년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에서 약 2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이를 ‘만달사람’이라 부르는데 보존 상태가 좋은 머리뼈와 아래턱뼈가 함께 발견되어 학자들을 기쁘게 했다.
앞머리뼈에는 현생 인류에게서만 찾아지는 화살융기도 들어있었고 턱구멍이 현대인처럼 낮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가공한 흔적이 뚜렷한 석기 13점과 함께 뼈나 뿔로 만든 골기가 발견되어 만달인은 후기구석기의 신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만달사람은 사망할 당시의 나이를 25~30살 정도로 추정하는데 북한은 건장한 용모의 청년으로 만달사람을 복원했다.
그런데 만달사람은 전형적인 장두형이다. 신인단계에서 장두형의 특징은 아시아지역의 신인인 산정동인에서도 발견되는데 그들과 다소 다른 점도 발견된다. 머리뼈의 너비가 매우 넓다는 점인데 머리뼈의 넓이가 넓다는 것은 한국인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장두형에 속하는 만달사람은 단두형의 특징을 지닌 고유한 한국인의 모습으로 정형화되기 시작하던 초기의 징표로 인식한다. 이러한 특징은 보다 후대로 추정되는 신인인 ‘룡곡사람’에서도 발견된다.
1980년, 평양시 상원군 룡곡리의 여러 석회암동굴에서 상당히 많은 신인의 화석이 나왔는데 이를 ‘룡곡사람’이라고 한다. 특히 룡곡1호 동굴에서 보관 상태가 매우 좋은 2개의 머리뼈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머리뼈는 그 높이가 매우 높은 반면에 얼굴뼈 높이는 중간정도이다. 이들 역시 장두형에 속한다. 룡곡사람 역시 만달사람처럼 한국인의 옛 모습이 형성되던 초기시대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설명한다.
학자들은 동아시아의 신인들을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동북아시아형으로 주로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발견된 인류 화석이다. 둘째는 황화와 장강유형으로 산정동인을 비롯하여 중국에서 발견된 신인화석이다. 산정동인에게는 태평양에서 발견되는 남부계열의 특징이 뚜렷하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시아유형인데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서 발견된 신인의 화석이 이 유형에 속하며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에 가까운 특징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되는 신인들이 동아시아의 다른 신인들과 구별되는 일련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한국인의 선조들이 극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유형을 이룰 수 있는 환경에서 진화되었다고도 추정하는 것이다.
시대를 건너뛰어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간다. 1986년부터 1990년 함경북도 회령시 남산리 검은개봉에서 매우 빠른 시기의 청동기시대 6개체분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1930년대 말에 이미 4개의 머리뼈가 발견되어 모두 10개체분이 발견된 셈인데 그중 남자가 7개, 여자가 3개이다.
머리뼈지수에 의하면 남자는 좀 큰 편으로 중두형에 속하고 여자는 아주 큰 축으로 전형적인 단두형이다. 이것은 검은개봉의 주민들이 의심할바 없이 현대 한국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은개봉유적을 남긴 주민들과 유사한 특징을 가진 사람들은 중국동북지방에서도 발견된다. 기원전 2000년~1000년에 해당하는 청동기시대의 인골로 요령성 심양 부근의 정가와자유적과 길림시 서단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정가와자와 서단산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현대 북중국인이나 앙소문화인, 은대 안양부근의 서북강유적 주민들과도 뚜렷하게 구별되며 고대한국인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정가와자의 머리뼈는 짧고 높은데 이것은 검은개봉 유적을 비롯하여 현재 한국인에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이들 지역은 현재 중국 영토이지만 고조선이 건국된 지역이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황석리 13호 인골은 국내학자들을 괴롭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인골을 분석한 서울의대 나세진 박사는 인골의 신장이 약 174센티미터이며 두개골과 쇄골·상완골 등 모든 부위에서 현대 한국인보다 크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두개지수(頭蓋指數, Sephalic Index)가 66.3으로 현대 한국인이 단두형(短頭型)인데 반해 이 인골은 장두형이다.
이마·뒤통수의 길이와 귀와 귀 사이의 길이 비율을 나타내는 두개지수는 한국인의 경우 100대 80~82인데 반해 서양인은 100대 70~73 사이이다. 그러므로 황석리 인골의 두 개지수가 66.3이라는 것은 이 인골은 한반도로 이주한 초장두형 북유럽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김병모 박사는 기원전 1700년쯤 유럽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이란 등으로 내려왔으며 이들이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 전래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서대의 조용진 박사가 인골들의 두개골을 복원했는데 ‘서양인’의 얼굴형과 거의 똑같았다. 조 박사는 인골의 왼쪽 이마가 볼록하고 코가 높으며 얼굴이 좁고 길고, 이가 큰 북방계통의 사람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이 같은 인골의 특징은 현재 제천의 산간지역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데 결론적으로 알타이 지방에서 내려온, 서양인의 형질을 포함한 사람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황석리의 인골만 갖고 서양인으로 확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반론도 있다. 유태용은 지금도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고 같은 인종에서도 빈부나 계급의 정도에 따라 골격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뼈들은 대체로 충분한 영양공급을 받은 튼튼한 것들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지배층은 평민들보다 여러 면에서 여건이 좋았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사실상 과도한 노동력을 하면 어깨뼈가 한쪽으로 기우는 등의 현상을 보인다. 황석리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은 특별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두형에서 단두형으로 변형된 한국인>
북한에서 30만 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화대사람, 10만 년 전의 력포사람, 덕천사람, 4만~5만 년 전의 승리산사람, 2만 년 전의 만달사람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을 70만 ~100만 년 전에 검은모루 동굴에서 살았던 원인(호모 엘렉투스)으로부터 일관하게 진화하여 나온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논지는 간단하다. 한국인은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단일 민족으로 한국인의 원류가 잘 알려진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로부터 유입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한국인의 발상지는 우리나라로 소위 ‘다민족기원설’에 의거한 ‘본토기원설’을 주장한다.
한국인이 북방인과 남방인의 두 갈래로 섞여있으며 남방인이 20~30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북한측도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에 많은 반론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 측에서 본토기원설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는 매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북한측은 두 가지 면에서 한국인의 본토기원설을 주장한다. 하나는 평양 유역에서 발견된 신인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인과 연결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고유한 특징이 평양 유역에서 발굴된 신인들에게서 처음으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평양에서 발견된 신인들의 대뇌피질의 앞머리부가 고인과 유사성을 보이므로 고인이 력포사람의 직계선조라는 설명이다.
한국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살든지 일반적으로 얼굴의 높이는 중간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지만 머리뼈 높이는 상당히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특징이 용곡사람과 만달사람에서도 발견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북한의 본토기원설에서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현대 한국인의 특징이 단두형인데 신인단계의 유골에서 단두형이 아니라 장두형의 머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장두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화석인류단계의 머리뼈들은 예외 없이 장두형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시대가 오래될수록 원시적인 특징이 많기 때문이다. 눈확부와 뒤통수부의 뼈주름이 발달되어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머리뼈 길이가 길어지므로 자연히 장두형에 속한다. 평양 일대의 신인들도 장두형에 속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인의 단두형은 단두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경우 과거로 올라갈수록 머리뼈 길이가 길어져서 장두형에 속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그와 반대로 현대로 내려오면서 단두형이 비율이 많아진다. 그런데 신인과 조선옛유형사람, 현대한국인의 머리뼈형태가 서로 구별되기는 하지만 머리뼈 형태를 규정하는 개별적인 요소에서는 유사한 점이 많이 발견된다.’
현대 한국인의 머리뼈 형태는 상당히 단두화되어 장두형은 고작 5~6퍼센트로 추정한다. 그런데 과거로 올라갈수록 장두형이나 중두형의 비율이 높아진다. 함경북도 회령시 검은개봉유적의 10개체 머리뼈도 단두형이 4개체이고 6개가 장두형과 중두형에 속한다. 송평동유적에서 발견된 4개체의 머리뼈도 단두형이 2개체, 중두형이 2개체였다. 이것은 과거 사람들이 현대인보다 머리뼈의 길이가 길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장두진은 설명했다.
사실 상당히 후대로 볼 수 있는 유명한 안악 3호분,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고분, 평안남도 대동군 덕화리고분, 강원도의 신라무덤 등에서 발견된 머리뼈는 모두 단두형에 속한다.
더욱이 한국인의 특징인 단두형은 세계적으로도 매우 희소하다는 점도 북한측은 강조한다. 아시아에서는 동북아시아 일대와 중앙아시아, 유럽에서는 스위스 일대의 알프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서만 단두형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주위는 모두 장두형이다.
물론 고인인 력포사람, 덕천사람에서 신인인 승리산사람, 만달사람들을 오늘날 우리 민족의 직계로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지적도 있다. 구석기인들은 자연환경변화나 사냥거리에 따라 빈번히 이동했다. 비록 후기구석기인들이 전·중기구석기인들 보다는 좀 더 붙박이 정착생활 쪽을 택했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선주민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다지역기원설을 주장하는 중국 측은 이런 주장을 매우 공격적으로 반박하면서 북한측의 주장을 두둔한다. <중국사회과학원> 왕웨이의 글을 인용한다.
‘서양의 구석기 문화를 보면 약 10만여 년 전 어떤 곳에서 기하형의 세석기들, 예를 들면 삼각형기ㆍ신월형기ㆍ제형기 등이 출현하며, 2만 년 전에는 더욱 정밀한 기하형의 세석기가 출현했다. 그 당시에 이런 석기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구석기 문화 중에서는 이런 기하형의 세석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이런 세석기 제작 기술의 흔적도 없다. 이런 차이점은 중국의 구석기 문화와 서양의 구석기 문화가 서로 다른 문화 계통에 속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왕 교수는 아프리카가설에 의하면 ‘아프리카 이브’의 후예들이 중국으로 옮겨왔을 때 분명히 그들이 갖고 있던 선진 석기 제작기술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석기들을 가져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중국의 구석기 문화는 격변을 맞이해야 하는데도 중국에서 3만여 년 전 신인(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에게 어떠한 변화의 징조가 없으며 중국 구석기 문화가 중단된 적도 없다. 적어도 외래 문화에 의해 대체되는 현상도 없는 것을 볼 때 서양의 구석기 문화와 중국 구석기 문화는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위의 설명은 북한에서 주장하는 한국인의 기원과 연계되지만 다소 다른 면도 있다. 중국에서는 북경원인이 현대 아시아인의 주류라고 주장하지만 북한은 큰 틀에서 ‘다지역기원설’을 지지하면서도 북경원인이 한국인의 원류라고는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민족이 형성 되었다는 가설을 감안한다면 매우 작은 양의 인골을 토대로 과거 한민족의 모습을 그려본다는 것이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는 지적도 있음을 첨언한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일관성 있게 고대 인류의 화석이 발견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특이한 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보다 많은 인골이 발견되면 한민족에 대해 더 많은 정보가 축적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종호(mystery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