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과 윤리.........善/3. 목적론적 세계관

목적론과 방법론 (세계관)

오갑록 2014. 10. 13. 11:21

중요한 ......

■ 목적론적 세계관과 방법론적 사고(思考)

  “우리 삶에서 중요한 것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누구에게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실물일 수도 있고, 관념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중요한 것이란, 세월이 흐르고 사회가 변하면 함께 변한다는 특성이 있다. 그리 생각하는 중요한 것이라면 방법론적인 것들을 두고서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목적론적 세계관을 전제로 말하는 중요한 것이라면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체의 우주현상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일관된 목적론적 세계관 속에서, 그 진리가 뒤바뀔 수 없음이기 때문이다.

 

변화무쌍한 사회현상 가운데서 우리의 관념 또한 그리 흔들리면서 생활하며, 유아기, 성장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차츰 나이 들어 간다. 진리 탐구를 향한 학문 정진은 보통 사람들로서는 극히 한정적 순간에 불과할 뿐, 그러한 사상의 연구는 특별한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대부분 방법론적 사고(思考)의 틀 속에서 제각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쫓아 열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이나 종교라는 이름을 앞 세우는 진리라고 할지라도, 목적론적 세계관을 내세우기는 하지만, 한 걸음만 뒤로하여 다시 생각한다면 방법론적 사고(思考)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적지 않다. 방법론적 중요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허구의 틀을 이내 발견 하게 되는 것이다.

 

. 목적론적 세계관(目的論的 世界觀)과 기계론적 세계관(機械論的 世界觀)

                                                                                   (백과사전 인용)

목적론적 세계관이 일체의 우주의 현상이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세계관이라면, 기계론적 세계관은 기계론에 의하여 우주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세계관이자, 모든 현상을 물질 운동의 조합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는 세계관이다. 르네상스 이전까지 중세는 목적론적 세계관이 지배했다면, 근대 이후부터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시대가 열린다고 할 수 있다.

 

자연적 실재의 특성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를 자연철학(philosophy of nature, 自然哲學)이라고 하는데, 물리철학과 생물철학으로 나뉜다. 이 분야에서는 형이상학이나 윤리학, 또는 세계관에 자연철학적 함의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철학이 인류의 자연에 대한 접근, 그 인식론적·방법론적인 문제에 제한된다면 자연철학은 보다 본질적인 자연 자체에 대한 탐구를 포함한다. 결국 자연철학은 목적론적 세계관을 이해시키려는데 뗄 수 없는 학문분야가 된다고도 보아야 한다.

 

. 목적론과 방법론

 

목적론(目的論, teleology)은 철학상의 세계관 중 하나로서 모든 세계의 사물이나 현상은 일정한 목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존재하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한다는 것으로, 예컨대 신이 수립한 세계의 질서를 나타내기 위해 모든 것이 있다는 것 등이다. 방법(方法)은 넓은 의미로는 일정한 목표에 이르기 위한 길이라 하겠으나, 과학적 혹은 철학적 방법이 엄밀한 의미로 사용된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그것이 다루는 객관적 세계의 여러 현상을 관찰함에 그치지 않고, 그 여러 현상의 본질을 이루는 법칙을 파악해야만 한다. 개개의 과학에는 그 대상의 특성에 따라서 독특한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연구 대상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른 방법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방법론이다.

 

방법론(方法論, methodology)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시조로 볼 수 있으나, 분석, 총합, 귀납, 연역 등의 방법론이 명확하게 밝혀낸 이들은 근세의 베이컨, 데카르트 등이다. 이 경우 방법은 원리나 대상에서 분리시켜 논의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변증법에서는 변증법 그 자체가 방법으로 생각될 수 있다. 사물이 운동하는 과정에서 내부에 존재하는 모순으로 인해 자신을 부정하게 되고, 다시 이 모순을 지양함으로써 다음 단계로 발전해 가는 논리적 사고법인 변증법은 인류의 과학적 인식에 대한 전체의 총계, 결론, 일반화이며, 객관적 세계의 일반적인 법칙성과 규정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세계, 원리, 방법이 상호간에 연관적으로 다루어진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하여 본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중요한 것들이란, 항상 그 목적이 따로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목적이라고 여겼던 대다수가 삶의 과정에 산발적으로 꽂힌 잡다한 목표의 깃발과도 흡사하다. 어찌 본다면 시위 군중 속에 갖가지를 주장하는 뭇 깃발들과 흡사하기도 하고, 태백산맥 줄기를 이어지는 크고 작은 산 정상임을 표한 깃발과도 흡사하다. 설령 태백산 정상이나, 백두산 정상에 꽂았다 해도, 우주론적 목적의 시각으로서 본다면, 어찌 그 깃발이 정상의 목표가 될 수 있겠는가?  때로는 진리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 진리의 깃발은 허무하다거나 허탈한 것은 아닌지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아파트 양지바른 베란다에 화분이 하나 있다. 그 화분이 진딧물 끼는 곳이라면 작은 일개미도가 열심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눈에 띈다. 화초의 끝까지 다다르면 오르던 곳을 따라 휘 돌아 다시 기어 내려가곤 한다. 일개미가 열심으로 찾은 곳은 화초 한 가지의 끝일 뿐, 그곳이 정상은 아니다. 더 높은 가지가 있고, 더 큰 화분이 있으며, 베란다 천장이 있다. 그리고 아파트 윗층, 또 윗층, 옥상과 더 높은 고층 빌딩이 있는가 하면, 태백산맥 준령으로 이어지는 높은 산 봉우리들이 있을 게다. 준령의 정점으로 여기는 백두산도 그 보다 더 높은 산의 아랫봉우리 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위성 사진이 보내 준 지구는 둥글다. 내가 생각했던 정점들, 그 집합체인 땅 덩어리가 결국 지구가 아닌가?  지구도 해도 달도 별도 우리 눈으로는 둥글다. 그래서 우주까지도 둥글까?

 

우리가 생각하는 목적과 목표가 그렇고, 우리가 생각하던 중요한 모든 것들이 그렇다.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합리적이라는 명분으로, 윤리적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답다는 명분으로, 성공적이라거나 영광의 이름으로, 참이니, 진리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칠 된 깃발을 꽂고서 그리로 향하곤 한다. 목적 아닌 목적, 방법론적 방법임을 이내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두고, 허무, ()사상이라고 하는 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먹는 것이기도 하지만, 먹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사는 것이기도 하다. 길가에 깨져서 버려진 병 조각 한 개, 찌그러진 깡통 한 개, 휴지 한 조각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가? 그것을 만들기 위하여 우리 인류는 얼마나 긴 세월과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탐구와 개발의 결과물들이 그 휴지와 유리조각 깡통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 화학 기계와 같은 과학은 물론 공예나 예술 분야까지도 포함된 문명의 집합체이기도 하다. 비록 지금 눈 앞에서는 쓰레기 조각에 불과할지라도, 거슬러 올라가며 짚어 본다면, 목적론적 방법론적 접근이 가능한 이야기 거리를 얼마던지 남길 수 있는 물건들이기도 하다.

 

철학과 종교 분야도 그렇다. 믿음으로 단절된 조건 아래 꽂인 깃발이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아닌지 의구심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이러한 의심의 고리는 믿음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인간의 우상(偶像)들을 몇 가지로 특정 지워 구분 한 바 있지만, 우리사회가 인식하는 윤리학의 근간도, 어느 한 시대나 사회가 긍정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에 접근하고자 하는 방법론적인 사고(思考)일 것이다. 그 세계관이 바른지 그른지에 따라 우상(偶像) 여부가 갈리겠지만, 기계론적 세계관에 물든 이즈음의 사고로서는 편견과 착각 속에서 발상된 사회도덕, 사회윤리 부문이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 (), (), ()으로 장식한 지난날의 윤리개념이 퇴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그리고 지금의 내가 속한 우리사회는, 목적론적 세계관은 어떠한지, 우리는 과연 그 곳에 부합되는 방법론적 사고를 하고 있는지, 한번쯤 돌아볼만하지 않은가? 중요하다고 여기던 것들을 내려 놓으며 욕심을 멀리하고, 내 곁에 서성대는 갖가지 부정적인 마음들을 내려 놓아야 하는 이유를 발견할 지도 모른다. 오욕(五慾)을 떨치고, 비방, 원망, 조롱, 시기, 질투 따위의 부정적 사고를 멀리해야 하는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면, 색다른 기쁨을 맛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크고 작은 것, 중요한 것이란 절대적 물리량 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알 만한 낫살이 되었나 보다. 그 크기는 상대적이고 관념적인 요소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왜 진작에 몰랐었는지 자책할 때가 종종 있다. 쓸모 없는 허세에 기 죽지 않는 정도는 된 것이다. 물론, 그만큼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도 없는 것이다. 축재, 출세, 영광, 성공의 이름들이 그다지 빛나 보이지도 커 보이지도 않는다. 철학, 종교, 윤리에서 주장하는 사안도 이 시대, 우리 사회가 바라 본 깃발일 뿐, 우리의 우상(偶像)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받아들이게 된다.

 

우상(偶像)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 드는 순간에, 무섭다거나, 불경스럽고 죄스럽다거나, 부끄럽다거나 하는 따위의 짓눌린 억압 감이 예전 보다는 덜하다는 생각이다. 그들의 주장하는 바가, 원만한 인간 사회를 꾸리기 위한 유용한 도구는 될지언정, 하나뿐인 진리일 수는 없음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 내가 그 시대 그 사회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믿게 되는 신앙은 마음의 평안과 사회 질서를 한 곳에 모을 수는 있다는 긍정적 측면은 인정하지만, 그 곳에 끼지 못하는 데서 느끼는 죄의식, 두려움 따위에 휘둘릴 까닭 또한 없음도 긍정하면서, 필요에 따라서라면, 시대적 사회적 패거리 문화의 일면으로 넘겨 볼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불량하다거나 윤리를 벗어난 패륜 행위는 아니라는 것을 자위할 줄 아는 마음자세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다만 성 넘어 살아가는 그네들의 영광과 기쁨을 시기하거나 험하지 않고, 긍정하는 자세로, 그리고 그들을 축복하는 마음 자세도 원만한 현대인의 덕목이라는 생각을 갖는다. 자신보다 한 층 더 높은 축재며 출세로 성공하고, 명예나 명성을 얻은 이웃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자세는 항상 중요한 것이다.

 

 오갑록

2014.10.08.()

 

 

 

 □   목적론(目的論 )

                                                                                       (ウィキペディア)

목적론(teleology , Teleologie)이란 세계, 자연, 사회, 인간의 존재 목적, 또는 그것을 향한 모든 존재의 운동과 운영에 대하여 고찰하는 철학의 한 부문이다. 이 어휘 자체는 그리스어로 "목적, 종국(終局)"을 의미하는 "τέλος"(telos, 텔로스)에서 만들어진 독일어 어휘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크리스티안 볼프 의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 세계의 실체적, 본질적존재가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존재론에 대응하여, "목적론은 인간을 포함한 여러 존재가 궁극적으로 어디로 가고, 무엇을 목표로 하며, 무엇(어떤 상태)을 달성,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지를 고찰한다. 따라서 전반적으로는 전자의 존재론은 세계에 대한 "정적( ,static)” 고려사항이라는 성격이 강한 반면, 후자의목적론은 사물에 대한 동적(動的, dynamic) 고찰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그러나, 특히 하이데거 이후, 유럽(독일과 프랑스)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현대 철학에서는 존재 자체도 자기의 관심(세계를 마주 하는 쪽)에 의해 산출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자는 동적 관점에 의해 통합 되게 된다.)

 

또한, 근대 초기의 17 세기, 데카르트 적, 고전 역학적 인 정적() 인과율(因果律) 구조만을 상정한 "기계론"에 대해, 종국(終局)과 목적(目的)에서 역으로 따라가 합목적인 정보를 수립하는 방식으로서의목적론이 대치되는 사례도 많다. 이러한 대비는, 특히 칸트의 이론이성(理論理性)에 대한 실천이성(実践理性), 인간의 자유와 도덕 법칙을 따르는 토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   역사

 

. 고대

고대 그리스 초기 철학자(자연)들은 세계의 근원적. 시원적(始原的)인 존재 "아르케 '와 추상적인 법칙성 (로고스. 누스 등)을 고찰(관찰적, 논리적, 형이상학적이기도 한) 했지만, 대체로 "존재론"의 범주에 머물렀고, “목적론적 관점을 갖지는 않았다. 그들의 세계관은 "순환적"인 것으로서, 동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순환적인 상태가 천이된 것으로서, 이어서 어딘가를 향해 나간다는 관점을 갖지는 않았다.

 

. 소크라테스

인간에 대한 목적론의 효시는 소크라테스였다고 지칭된다. 그는 "아레테 (()과 탁월성(卓越性))”을 중시하고 인간의 영혼(정신)을 가능한 한 향상시켜, 선한 삶을 성취 해 나가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그것이 "물질적"에 인지, "정신적"에 인지, 아니면 "지적(知的), 또는 영적()"에 인지,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분분하여 그의 제자들도 플라톤과 큐니코스 파에서 큐레네 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갈리고 있다.

 

. 플라톤

플라톤은 피타고라스 교단과 엘레아 파의 영향을 받아, 중기의 대화 편에서 "상기설(想起)”“이데아론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상을 전개하고, 소크라테스의 발상을 합리화했다. 그 사상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영혼(프시케, 정신)은 태초에 신들과 함께 천상계 있어, 진정한 실재(이데아)를 관조하고 있었지만, 지상계로 떨어져서 육체에 기생하게 되고, 환생을 반복하게 되었다. 우리는 망각 해 버렸지만, 영혼은 옛 천상계의 진정한 실재(이데아)의 기억이 남아있어, 우리가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진실(이데아)의 닮은 꼴에 이끌려 그 기억을 되 찾으려 한다. 그리하여 덕을 쌓은 영혼이 환생에서 재빨리 해탈하고 천상계에 귀환 할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톤은 인간이 선한 삶과 진실을 추구하는 성질을 "영혼에 의한 이데아의 상기(想起)"로 합리화 하고 "천상계에 귀환(가능한 한 빠른)“을 궁극적 목적으로 했다.

 

. 아리스토 텔레스

고대 그리스에서 전개된 설법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에 능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4 원인설(四原因)을 기초로, 인간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만물이 Dynamis(Dunamis, 가능태, 可能態)에서 Energeia(현실태, )를 거쳐 Entelechia(완전현실태, 完全現)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하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화려한 이론을 집성했다. 그 이론은 만물이 자기의 역할과 잠재성을 참작하여 완전현실태(자족상태)의 달성이 궁극적 목표이며, 이를 위해 운동을 계속하게 된다. 인륜과 사회.정치도 그 일환으로 설명된다. 전능한不動의 動者로서의 신()과 달리 인간은 자기 혼자서는 자족(自足) 할 수 없기 때문에 공동으로 사회를 구성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라고 하는 최고선(最高善)을 주장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와 목적론은 불가분 관계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 및 그 이론은 고대 목적론의 상징적이며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 인도

고대 인도에서는 바라문교의 우파니샤드 철학 이후, 세계의 근원이며 본질(, 브라만)과 영혼(진정한 자아, 아트만)의 동일성을 깨닫는 경지(범아일여 梵我 一如)에 이르게 되면, 그로 인하여 윤회전생(輪廻)을 벗어나 해탈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 목적으로 되어왔다. 관점과 용어, 뉘앙스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이 발상은 불교,  자이나교 등 다른 인도계 종교에도  계승된다. 이 인도 사상은 상기 한 바와 같이, 플라톤의 발상과 유사하다. 또한 후대의, "일자(一者)에서 유출(流出)”그리고 거기에 회귀를 특징으로 하는 신플라톤 주의(Neoplatonism)에도 가깝다.

 

. 중세

신학()이 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중세는, 목적론은 "하나님의 뜻(섭리)”로 치환 된 고찰이었다. 이러한 발상 자체는 신들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을 가진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고대부터 비교적 자주 갖게되는 발상으로서, 중세만의 특징적인 것은 아니다.

 

. 근대 이후

17 세기 이후 고전역학과 기계론적 자연관을 발단으로 한,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세계를 포괄한 목적론은 해체되고, 세계를 설명하는 자연과학에 대해, 우리 인간과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소크라테스적인, 인간과 사회 본연의 한정된 목적론으로 회귀하여 간다. 동시에 목적론뿐만 아니라 철학 자체가 비자연과학 영역으로 내몰리게 되고, 인간론과 사회론이 칸트에서 시작하여, 경계책정적(境界策定的)이고 과학철학적인 담론으로 변화 해 나가게 된다.

 

. 칸트

18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형이상학적인 애매한 이해를 바탕으로 초월적(transcendent) 담론의 난립에 의한 무질서 상황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인간은 그 능력에 따라 무엇인지를 적정하게 알게 되는가, 이야기 될 수 있는가?”를 감성(感性), 오성(悟性), 이성(理性)의 음미와 비판을 통해 이끌어내고, 그 적정한 규칙(어디까지나 내재적(비초월적) 입장에서)에 따라, 초월론적(선험적, transcedental) 언급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정비를 도모했다. 그래서 비판철학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그 논의 가운데, 그는 감성(感性)과 오성(悟性)에 의한 경험적.현상적.인과율적(因果律, 기계론).필연적, 인식()에 대응하는 이론이성(理論理性)에서는, 회수되어 끊기지 않는, 그래서 그들과 양립 가능한(그 대상이 되지 않는 까닭으로) “물자체(物自体)와 자유를 배경으로 한다. 경험이 불가능하므로, 자율적인 당위성(当為, 의무와 규범)에 의해 성립된 실천이성(実践理性)의 여지를 인식 한다.

 

이 담론에 입각한 그의 사회론에서, 자신의 실천적 규범(格率) "보편적인 입법(立法)원리로서 타당함"을 주장하면서, 그 도덕법칙에 의거하여 자율적인 각 인격이 서로의 인격을 목적으로 존중하고 함께하는 "목적의 왕국"으로 향하게 된다.

 

. 헤겔

17 세기적 고전역학적인 "기계론에서 생물학적인 유기체론(사회 유기체론)” "진화론(사회 진화론)”으로 세계관이 이행 해 온, 19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자 헤겔은 기계론(이에 대응하는 이론이성)과 그 나머지(이에 대응하는 실천이성)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지는 칸트의 담론을 무시하고 개별정신이 절대정신으로 나가고, 그래서 현실을 형성해 가는 과정을 변증법적으로 그려 냈다.

 

헤겔의 이러한 담론을 칼 마르크스가 생산관계를 기초로 다시 조립함으로써 공산주의가 지향하는 사회 진화론의 마르크스주의가 성립하게 된다.

 

. 하이데거

20 세기 유럽(독일과 프랑스)을 중심으로 한, 현대철학의 발단이 된 철학자 하이데거는 후셀의 현상학에서 출발하여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이후부터 헤겔 등에 이르기까지 전통적 철학에서 존재자체가 불문에 부쳐지는, 즉 인간과 세계의 관계가 획일적으로 선결(先決) 되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는 애매한 존재의 해석에 기초한 존재적(ontic) 물음을 제기하는 실증과학과는 달리, 보다 더 근원적 인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존재론적(ontological) 물음 ("기초적존재론(基礎的存在論)")이 필요하며, 그것이야말로 본래의 참된 철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존재론은세계--존재(世界--存在, In-der-Welt-sein)”로서의현존재(現存在, Dasein)”인 우리 인간이 불안을 은폐하고, 평균적이고 획일적인 세상의 관심에서 도피하거나, 몰입하거나, 타락한(落した?)사람(das Man)”에서, 본래의 모습인 죽음에 대한 불안을 받아들이는죽음에의 존재(Sein zum Tode)”로서, 진정한 실존을 확립 함을 목표로 한다.

 

□   방법론

 

방법론(方法論, methodology)의 정의

. "학문에서 이용되는 방법, 규칙, 전제 조건의 원칙에 대한 분석"

. "학문에서 응용되는 방법의 개발"

. "특정 절차 또는 일련의 절차"

"방법"이 더 적절한 표현임에도 더 중요하다거나 학술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방법론"이라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학생이 학문적 성공을 위한 조사를 완수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방법을 변경 하여 교수로부터 자료를 수집하는 경우(조사를 통한 자료수집이 정확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전제조건으로) 방법론이 변경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아닌 교수에게 의뢰한다는) 방법이 변경되는 것이다.

 

. 개념

방법론은 다음의 정보를 탐구하는 특정 학문이나 분야에 관련된 개념으로 구성된다.

  . 이론, 개념, 이념의 수집

  . 다양한 수법에 대한 비교 연구

  . 각각 방법에 대한 비판

 방법론은 일련의 방법 이라기보다는 특정 연구의 근거를 이루는 원리와 철학적 전제를 취급한다. 이 때문에 학술적 문헌은 종종 연구자의 방법론 중 부분을 대상으로 한다. 방법론이 취급하는 것은 연구자의 방법("우리는 50 명을 2 주간 조사한 결과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라고 하는 것처럼) 이라기보다는 연구자의 존재론과 인식론의 관점에 관한 것이다.

 

방법론은 연구분야 또는 일련의 과정, 활동, 과제를 포괄하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은 예를 들어, 소프트웨어 개발, 설계 디자인, 프로젝트 관리, 비즈니스 프로세스 분야 따위이다. 이 용어는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 와 같이 개략적으로 대표된다. 연구분야를 만드는 과정을 문서화 하는 경우 방법론은 어디에라는 방법 또는 과정이 있는가를 기술한다. 이 과정 자체는 표준, 방침, 규칙 등의 확인이나 이용과 같은 모양의 방법론의 일부이다.

 

. 일련의 방법

이 기사는 자체연구가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문제부분을 확인하고 출처를 추가하여 기사의 개선에 협력 해주십시오. 논의는 노트를 참조하십시오. (2009 .9.)

대다수 과학은 독자적 방법에서 나오고, 그것은 (그 방법의 타당성을 지지하는) 방법론에 의해 지지된다.

 

예를 들어 사회학은 방법론적으로 사례연구, 조사연구, 통계분석, 기타의 모델링을 포함한 질적(質的) 방법, 양적(量的) 방법의 두 가지를 다양하게 이용한다. 또한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프로젝트 관리에 있어서의 방법론은 일련의 체계화 된 방식을 의미하고 있다. 여기에 때로는 훈련자료, 정규교육 프로그램, 워크시트, 다이어그램 작성도구가 함께 수반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방법이기도 하지만, 그것에 관한 논의도 방법론이라고 부른다.

 

. 협의의 방법론

협의의 방법론이란 방법에 관한 연구이다. 일반적으로 특정 분야 내의 그것을 의미하며 교육방법론, 예술의 방법론, 과학의 방법론처럼 사용된다. **주의, **ism라고불리는것은 통상 그 일부로서 많던 적던 간에 방법론을 포함하는 것이다. 일반 정의로는 "누구 누구의 방법"에 대한 논의를 "누구 누구의 방법론 '이라고 부른다.

 

 

 □    합리론의 역사

                                                                                            (브리태니커)

이성을 지식의 중요한 근원 및 검증 수단으로 보는 철학 견해.

 

고대철학에서의 인식론적 합리론

서양철학사에서 최초로 이성의 통찰을 강조한 사람은 BC 6세기의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모든 것은 수()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는 수학적 법칙이 지배한다는 합리론적 관점을 가졌다. 지각을 초월한 이성적 통찰에 대한 찬양은 플라톤에도 뚜렷이 나타난다. 플라톤의 유명한 '이데아'는 추론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가 감각 사물들과 어떻게 관련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플라톤은 이데아는 이상적인 것으로서 감각적인 것이 접근해가는 비감각적 목표라고 주장했다. 즉 기하학자의 완전한 3각형은 '결코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이데아는 감각적 사물보다 더 실재적이며, 감각 사물은 이데아의 그림자로서 철학자가 그것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하는 대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비록 이데아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이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플라톤과 견해를 같이했다. 그는 이성적 설명의 주요수단으로 삼단논법을 개발함으로써 합리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12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리스의 합리론과 그리스도교의 계시를 하나의 조화로운 체계 속에서 결합하려고 했다.

 

동양사상에서 합리론에 가장 근접한 견해는 8세기의 인도 철학자 상카라와 중국 송대 주희(朱熹)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나라의 고대 경전에 주석을 다는 형식으로 합리론을 설명했다. 상카라의 경우, 이성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진리에 대응하지만 이성조차도 진리를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하며 완전한 이해는 오직 신비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주자는 공자의 학을 이었으나 훨씬 더 사변적이었다. 그는 모든 인간 정신 속에서 오직 이성만이 작용하는데 이를 ''()라고 했다. 모든 사물은 어느 정도 ''의 발현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와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근세철학에서의 인식론적 합리론

 

근세 최초의 합리론자는 르네 데카르트이다. 그는 철학 속에 수학의 엄밀성과 명증성을 도입하려고 한 독창적인 수학자였다. 그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궁극적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방법을 통해 그가 얻은 진리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이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베네딕트 스피노자(1632~77) G. W. 라이프니츠(1646~1716)가 계승했다. 그들은 사물의 구조는 선천적 사유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정신을 부정할 수 없었던 데카르트와는 달리 스피노자에게 사물의 구조는 우주라는 실체였다. 이성은 어떻게 작동하고 또 이성은 어떻게 경험을 초월한 지식을 획득하는가? 칸트에 따르면 이성적인 인간은 자신의 논리가 타당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경험의 구조는 인간 자신의 정신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험적 통찰은 정신의 반영이지 밖에 있는 세계의 반영은 아니다. 따라서 이성적 질서가 물자체 속의 질서를 표현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합리론 사상의 최고봉인 G. W. F. 헤겔은 칸트의 이러한 회의주의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범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라는 의문은 지성적인 해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고, 일정한 체계로서의 우주는 하나의 전체로 구성되어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정신이다. 철학자가 이러한 정신을 구현하는 정도에 따라 진리와 실재성을 알게 된다.

 

윤리적 합리론

 

도덕주의자들은 칸트의 윤리적 합리론과는 달리 행동의 주요규범을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리처럼 자명한 진리라고 주장했다. 17세기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은 이러한 행동규범의 목록을 작성했으며, 도덕적 원리는 실재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합리론은 20세기에 들어와서 결과보다는 의무를 중요시하는 의무론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행동의 특수한 규범이 아니라 행동의 어떤 유형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자명한 의무를 명증한 것으로 여겼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윤리적 합리론자는 G.E. 무어 등 영국의 이상적 공리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행동을 올바르게 만드는 것은 실재하는 선과 악의 결과(또는 목적)라고 주장함으로써 목적론을 내세웠다.

 

종교적 합리론

 

종교적 합리론은 중세에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대두되었다. 종교적 합리론자인 아벨라르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각각 교의 속에 모순이 존재하며 계시된 진리는 이성으로 알 수 있다고 믿었다. 종교적 합리론은 16, 17세기에 들어서 과학적·철학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났다. 갈릴레오는 자연이 수학적 엄밀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교의 천동설과 충돌했다. 뉴턴 등이 갈릴레오의 지동설을 확인한 것은 합리론의 역사상 이성의 승리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데카르트는 신학으로부터 철학적 의심의 산물인 합리론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작했다. 그는 진리를 계시가 아닌 인간 이성의 판단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합리론자들의 견해는 4차례의 소동을 거치면서 대중적인 흥미와 영향력을 확산시켜갔다. 첫번째 소동은 영국에서 이신론의 형태로, 2번째 소동은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이때 이신론은 결국 유물론적 무신론에 흡수되었다. 볼테르·디드로 등의 합리론은 당시 종교적·정치적 전통체제를 공격했는데 이것은 프랑스 혁명의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3번째 소동은 헤겔의 영향 아래 독일에서 일어났다. 헤겔에 따르면 종교적 신앙은 이성이 감각과 상상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나오는 것이다. 헤겔의 영향을 받은 슈트라우스(1808~74)는 〈예수 생애의 비판적 연구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에서 복음서는 계시도 아니며 역사서도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슈트라우스의 영향은 종교에서는 에른스트 르낭(1823~92), 철학에서는 헤겔 좌파 루트비히 포이어바흐(1804~72)가 계승했다. 포이어바흐는 〈그리스도교의 본질 Das Wesen des christentums(1841)에서 "인간은 자신의 상상에 의해 신을 창조했다"라고 주장했다. 4번째 소동은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기인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on the Origin of Species〉 출간을 계기로 일어났다. 이 책은 인간이 낮은 형태의 생명체에서 서서히 출현했다고 설명했기 때문에 성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   물리철학

                                                                                      (브리태니커)

자연적 실재의 특성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

 

물리학은 가장 간단한 무기체와 자연과정, 그리고 그것에 대한 측정과 수학적 기술을 다룬다. 뉴턴의 고전역학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토대로 삼았으며, 태양계를 그의 역학 공리에 종속되는 질점의 체계로 기술했다. 갈릴레오의 낙체법칙은 가장 간단한 뉴턴 공리의 논리적 결과였으며 이들의 뒤를 이은 케플러는 행성의 운동을 정확히 기술하는 법칙을 고안해 냈다. 물리학의 역사에서는 역학 법칙에 덧붙여 제임스 클럭 맥스웰의 방정식으로 요약된 전자기 현상의 영역을 빼놓을 수 없다. 지구에서 100억 광년 정도 떨어진 천체를 관측할 수 있게 된 오늘날에는 역학·음향학·고전물리학의 여러 분야들간의 전통적인 구분이 일상적인 인간의 경험세계에서부터 우주론을 통해 획득된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포괄하는 거시물리학과 원자법칙과 불연속 양자도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미시물리학의 구분으로 대체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독일의 물리학자 막스 플랑크는 h6.626×1027erg·s라는 소위 작용의 양자를 제안했으며 아인슈타인은 이를 빛에까지 확장시켰다. 원자의 실제 존재가 이들에 의해 검증되었고 여기서 미시물리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후 양자론은 닐스 보어,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P.A.M. 디랙 등에 의해 발전되었고 양자전기역학으로 확장되었다. 1905년 처음으로 공식화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물리학의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여기서 점질량의 뉴턴 역학은 단지 더 정확한 상대론적 역학의 근사로 드러난다. 특수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로서 Emc2(c는 빛의 속도)이라는 것이다. 1916년 이후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일반상대성이론으로 확장시켰고 중력을 국부운동이론으로 환원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수학적인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자연의 질서를 담아내는 기준 틀과 관련하여 볼 때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루어진 리카르트 데데킨트의 실수에 대한 정확한 개념 규정은 뉴턴의 시공개념을 분명히 기술할 수 있게 했다. 뉴턴 물리학의 단순한 시공관계는 근대 이후 여러 방향으로 변화해왔다. 동시성의 개념은 특수상대성이론에 의해 상대화되었다. 우주론은 실제 천문학적 우주의 공간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관계에 근사할 뿐임을 보여주었고 이 근사는 유클리드 공간을 일정한 양()의 곡률을 가진 공간으로 대치시킴으로써 개선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공간은 수학적으로 3차원 초구형 '표면' R2x2y2z2u2으로 정의되며 이것은 서로 직교하는 x, y, z, u의 좌표축을 가진 가설적인 4차원 유클리드 공간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에 의해 규약론적으로 지지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과학철학자들은 천문학적 광선이 직선으로 여겨지는 한, 공간 곡률의 문제가 임의적인 규약으로 해결될 수는 없으며 경험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뉴턴 역학과 맥스웰의 전기역학은 유클리드 공간의 대칭성을 보여준다. 이것은 두 역학이 벡터 해석의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드러난다(→ 색인:벡터 해석학). 벡터란 크기와 방향을 갖는 양을 나타내며 벡터장이란 예를 들면 전기장 세기, 전류밀도와 같이 공간상의 모든 점에 벡터를 결부시키는 것을 말한다. 자기장의 세기 H를 벡터장 A의 회전장으로 유도할 수 있는데 이것을 보통 벡터 퍼텐셜이라고 부른다(Hc·curl A). 진공에서 맥스웰 방정식은 패러데이 법칙이 전기장의 회전장과 자기장의 시간에 따른 변화 사이에서 비례형태를 취함을 나타냈다(Hc·curl E). 그러나 맥스웰 이론이 에너지 국부화로 나아가는 반면, 중력 에너지가 어떠한 국부화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중력이론과 양자론 사이에 명백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현상론적 물질이론에서는 모든 물리적 과정이 연속적이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양자론에 의하면 인과율과는 달리 불연속적인 사건의 사전결정은 통계적으로만 말할 수 있다. 상대론적 우주론에서 두 지점에서 각각의 사건은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인과율적 영향은 상호의존적인 시공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양자론에 적용할 경우 물리과정의 인과율 대신 양자변환의 통계적 확률을 도입할 수 있게 된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이론적으로 결합시키는 문제는 양자전기역학을 낳았지만 이것은 아직 완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소위 세계공식화의 해답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더 많은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현대물리학은 중성자·중간자·중핵자 등 다양한 기본입자를 다루고 있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은 모든 종류의 기본입자가 갖는 공통성이다. x방향을 움직이는 전자가 x에만 의존하는 파장길이를 가질 때 전자는 Δx와 같은 간격의 파장길이를 갖고 Δp가 불연속적 운동량의 값이라면 불확정성의 산물인 Δx와 Δp는 플랑크의 기본 양자 상수 h보다 작을 수 없다. 이것이 유명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관계이며, 이는 닐스 보어가 설명했듯이 위치와 운동량의 '상보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디랙과 요르단에 의한 양자역학의 일반 통계 변형이론은 미시적 질점의 측정 가능한 물리적 양들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회전체에 관한 뉴턴 역학의 이론들(즉 원심력에 대한 역학적 법칙과 코리올리 힘)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 위에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을 밝히기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에른스트 마흐는 원심력이 절대적인 물체 회전의 결과라는 뉴턴의 생각에 반대하면서 매우 멀리 떨어진 우주의 거대 질량과 관련된 물체의 회전이 원심력의 진정한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이러한 마흐의 원리를 이끌어내는 것은 우주 전체의 기하학적·역학적 성질이 밝혀졌을 때에나 가능할 것이다.

 

거시물리학에 대한 우주론적 관련은 열역학에도 영향을 끼쳤다. 열역학에서 비역과정의 존재는 시간의 양()과 음()의 방향을 지시해준다. 엔트로피는 시간의 양의 방향에서만 증가할 수 있다. 그러나 원자에 관한 양자이론에서는 시간의 양과 음의 방향은 동시에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CPT[charge parity time] 대칭의 원리). 통계열역학이론에서 엔트로피는 열역학적 개연성의 로그에 비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학자들은 그것을 자연의 과정이 낮은 개연성에서 높은 개연성으로 진행되어간다는 사고의 필연성으로 보았다. 이러한 해석은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이르지 않은 이상적인 기체 속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 유명한 볼츠만의 수학 정리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러나 시간의 양의 방향은 충돌률 계산에 의해 CPT 원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충돌률의 원리가 CPT 원리와 모순된다고 할 때 그것을 타당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어떻게 물리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헤르만 본디는 이 패러독스에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엔트로피 원칙이 우주 전체에서 한 가지 시간 방향을 골라낸 것으로, 즉 팽창하는 우주의 시간을 골라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증가하는 엔트로피를 가지고 그리고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충돌률의 계산을 통해 시간의 양의 방향을 열역학적으로 구분해내는 것은 우주팽창의 결과로 드러난다.

 

한편 알렉산더 프리드만의 수학적 발견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우주론적 모델을 수학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리드만에 의하면 평균 질량 밀도가 전공간에 걸쳐 일정한다면 중력장 방정식은 시간 좌표 t를 가진 일정한 곡률의 3차원 공간을 포함하는 행렬에 의해 충족된다. 이런 우주론은 공간곡률이 양이냐 음이냐 또는 0이냐에 의존한다. 이 이론은 본디에 의해 프리드만 모델에 적용되기도 했는데, 우주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은 모든 시공간에서 동일하다는, 소위 가장 완전한 우주론적 원칙을 채택함으로써 이 이론은 일정한 시간을 가진 3차원 공간뿐만 아니라 전체 시공간의 다양성에 관한 고도의 대칭성이나 동질성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나 이 이론은 우주 시초의 '대폭발'의 잔여물로 해석되는 절대 온도 3K을 가진 배경 복사의 발견으로 인해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정상우주론 대신 프리드만 모델이나 우주상수 λ를 도입하는 르메트르 모델을 택할 수밖에 없다. 중력 상수 G는 우주의 발달과정에서 변하기 쉽다는 디랙의 추측 이후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는 아직 어떠한 결론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   생물철학

                                                                              (브리태니커)

자연적 실재의 특성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

 

생물철학의 최근 저작들은 진화론에 관한 미해결의 문제와, 생물학이 물리화학적 토대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학문분야인가 하는 데 대한 비판적인 재평가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신진대사나 재생산과 같은 성질이 유기체의 성격을 특징짓고 따라서 그것을 정의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정의는 논리적으로 유기체의 이러한 성질들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점에서 임의적이다. 아직까지는 살아 있는 체계와 살아 있지 않은 체계를 구분하는 특징에 관한 임의적이지 않은 설명은 없다. 생화학적인 것이 유기체로 종합됨으로써 매우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게 되고 이러한 작은 체계에 생명이 기원을 두고 있으며 거기서 생명이 발달해왔다는 것은 자연의 위계적인 배열과 과학의 시간적인 진화단계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암시한다. 물리적인 진화는 종국점에 도달했다고 생각되지만 사회발전 과정의 진화도 그렇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는 없다.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줄리언 헉슬리는 "세계-질료는 사회진화를 통해서만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역설했다. 러시아의 광산학자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지구 표면이 생물학적 과정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에서 의식적인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규정되는 단계를 경과한다고 보고 이런 의식의 층을 인지권이라고 불렀다. 이 개념은 생물학과 종교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 프랑스의 성직자이자 고생물학자인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에 의해 확충되었다.

 

20세기초에 폭넓게 논의된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의 구분은 현대 생물학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양자간에 분명한 구분은 설정할 수 없다고 여겨지고 있다. 때로는 살아 있고 때로는 살아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는 바이러스나 유전자가 문제영역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생명의 생물학적 본성에 관한 대표적인 철학적 입장은 생기론·기계론·유기체론으로 나뉜다. 생기론은 모든 생명체에는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내적인 요소가 있다는 입장으로 20세기 초기에 많은 생물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논의되었다. 기계론은 유기체가 섬세한 기계와 같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생물학적 원리가 물리화학적 법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환원주의적 입장이다. 유기체론은 유기체가 기능하는 전체로 해석되어야 하며 물리학이나 화학을 통해 이해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오늘날에는 소수의 과학자들만이 루트비히 폰 버탈란피와 에드워드 스튜어트 러셀 등 유기체론 이론가들의 주장을 옹호하고 있다.

 

전체론적인 유기체 개념은 발생과 행동을 규정하는 통제 메커니즘이 입자 수준에서 작동한다는 데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 체계의 성격은 일종의 복잡한 인공두뇌학 과 다를 바 없다. 전체론과 환원주의는 이런 점에서 유사하다. 버탈란피 등에 의해 제시된 일반체계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적·방법론적 프로그램은 유기체론적 생물학의 확장이다. 이것은 물리학적·생물학적·심리학적·사회적인 모든 체계가 동일한 근본원리에 따라 작용한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모든 과학에 공통적인 방법론적 접근을 제공하려는 시도이다. 생기론자와 획득형질의 유전을 포함하는 라마르크적인 진화론의 옹호자들은 진화론은 결정론적 종말론을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G.G. 심프슨 등의 진화론자들은 그런 주장을 거부하고 자연도태가 진화상의 비임의적인 요소이며 진화에 방향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와 같은 진화론자는 환경변화의 예측불가능성과 돌연변이와 도태의 우연적 요소가 결정론적 법칙을 정식화할 수 없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진화론적 생물학이 사후적인(after-the-fact) 탐험적 과학의 예이며, 진화과정은 결코 예측될 수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생물학적 종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은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문제이다. 종의 실재에 관한 논쟁이 비록 의미론적 난점으로 혼란을 겪기는 했지만, 생물철학은 실체의 문제에서 단순한 언어적 혼동을 분리시키는 데 공헌했다. 1950년대 이후에는 진화론에 관한 심프슨과 고생물학자인 오토 슈인데볼프의 2가지 관점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진화개념을 모든 지식과 경험을 비추어주는 도식으로 채택하려는 시도는 최근 극히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시도의 대표자인 헉슬리는 전체 우주를 물리학적·생물학적·사회적 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윤리학과 관련하여 볼 때, 도덕적 책임에 대한 신념을 위협하는 생물학적 내용은 로버트 아드리와 콘라트 로렌츠에 의해 제기된 인간의 내적인 공격성에 관한 이론이다(→ 색인:공격행위). 만약 공격본능이 있다면 폭력이나 전쟁에 대해 개인이나 사회를 비판할 수 있다는 생각은 타당성을 잃는다. 아드리와 로렌츠의 이론에 대한 반박은 고릴라·침팬지·오랑우탄 등의 영장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 연구는 그런 동물의 대다수가 호전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내적인 공격성에 관한 이론의 반대자인 M.F.A. 몬터규는 "야생동물의 포악성에 관한 신화는 서구인이 자신의 공격성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합리화시킨 것 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환경적 요소와 그에 대한 인간행위의 결과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인간이 이전에는 깨닫지 못한 책임성을 갖게 했다. 진화론적 윤리학의 옹호자들은 진화의 사실과 진화 과정 안에 외적인 도덕기준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19세기말에 허버트 스펜서 등은 소위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을 주창했다. 헉슬리는 도덕원리가 자연 안에서 특히 진화과정에서 발견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심프슨은 진화과정이 윤리의 영역과 관계가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 행위의 척도를 제공하느냐 하는 문제는 많은 생물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사회진화론자나 심프슨의 주장은 그런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론적 자연관의 문제성

 

                                                                                            김균진

…… (중략)

기계론적 자연관의 중요한 특징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기계론적-합리적 자연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수학적 법칙이 자연의 세계 속에 내재하며, 자연의 세계는 이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이 세계의 모든 현상들은 수학적으로, 합리적으로 파악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

  2. 인과론적 자연관: 자연 세계의 모든 현상은 인과율, 곧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 인과론적 법칙은 곧 수학적 법칙으로 파악된다.

  3. 유신론적, 범신론적 자연관: 자연 세계는 시계 제작자 하나님에 의해 제작되었으며, 그가 부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양태(modus)로 보는 범신론적 자연관이 등장하기도 한다(Spinoza). 그러나 시계 제작자 혹은 자연 속에서 작용하는 자연(natura naturans)로서의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될 때, 유신론, 범신론적 자연관은 곧 무신론적 자연관으로 발전한다.

 

  4. 목적론적 자연관: 시계 제작자 하나님이 부여한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자연 세계는 이 하나님이 가진 목적을 향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합목적성과 합법칙성을 그의 본성으로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가 부인될 때, 자연 세계는 인간이 설정하는 합목적성과 합법칙성을 따르는 것으로 규정되며, 하나의 궁극적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5. 빈델반트에 따르면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자연의 기계론적 탈정신화”(mecha- nische Entgeistigung der Natur)를 그의 특징으로 가진다. 자연의 세계를 하나의 기계로 이해할 때, “생명의 현상들도 기계론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동물들의 신체는 자동기계와 같으며, 그들의 생명 활동은 기계적 과정으로 관찰될 수 있다.

  6. 인간 중심적 자연관: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세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유익을 주는 한에서 가치와 의미를 가진다. 존재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하는 인간은 자기 아래에 있는 자연의 세계에 대해 지배자로 이해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의 소유자요 주인”이다. 그는 자연과학을 통해 자연의 모든 비밀을 합리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열쇠를 그의 손안에 가지고 있다.

 

  7. 실재론적 자연관: 자연 세계는 인간이 인식하는 바대로 실재한다. 따라서 과학적 이론들은 관찰자에게 의존함이 없이 세계 그 자체(Welt an sich)를 묘사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은 관찰자의 입장에 의존하거나 외적인 것과 관계를 갖지 않고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그 속에서 사건들이 일어나는 절대 형식이다. 수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질량과 속도 등의 기본 특성들은 실재하는 세계의 객관적 표식들이다.

  8. 결정론적 자연관: 자연 세계 속에는 영원하며 변하지 않는 자연법칙들이 있다. 세계는 가장 작은 요소들에서 시작하여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에 이르기까지 이 법칙들에 예속되어 있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은 이 법칙들에 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우연은 배제되며, 운동 속에 있는 물체들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된다.

9. 환원론적 자연관: 가장 작은 부분들, 기초적 요소들이 전체를 구성하며, 부분들의 상태가 전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변화는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요소들의 새로운 배열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든 사물들은 가작 작은 부분들로 환원될 수 있다.

 

…… (중략)

 

계론적 자연관의 이데올로기적 문제점은 모든 “우연”을 배제하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시계가 그 자신의 내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듯이, 세계도 그 자신의 내적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세계를 지배하는 이 내적 법칙을 파악할 때, 우리는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고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세계의 모든 것이 기계적 법칙에 움직이므로, 우연적인 것, 예기치 못한 것은 원칙상 인정될 수 없다. 우연은 우리가 세계의 법칙을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우리의 주관적 인상들에 불과하며, 사실상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중심적 원리” 혹은 “중심적 질서”를 발견할 필요가 있다.

 

빈델반트(W. Windelband)가 그의 유명한 “철학사”에서 말하듯이,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려는 전체적 내지 통일적 설명을 시도한다. 세계에 대한 전체적, 통일적 설명은 세계를 지배하는 중심 내지 중심적 질서가 전제될 때 가능하다. 이 “중심적 질서”를 파악할 때, 세계의 모든 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장악할 수 있다. “주관적 영역을 질문하는 거기서도 중심적 질서가 작용하며, 이 영역의 형태들을 우연이나 자의(恣意)의 놀이(Spiel)로 생각할 수 있는 권리를 거부한다.” “결국 중심적 질서, 고대의 언어로 말한다면, 우리가 종교의 언어 속에서 관계를 맺는 ‘일자’(一者)가 언제나 자기를 관철한다.” 하이젠베르크의 이러한 진술에서 우리는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아직도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중심적 질서”는 모든 우연적인 것, 자유로운 것을 배제하고 “일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 모든 국부적 질서들과 개인의 삶과 행동은 일자의 중심적 질서에 예속되어야 하며, 일자의 통제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일자의 중심적 질서를 벗어나는 모든 우연적인 것, 자유로운 것은 “반 질서적인 것”, “위험스러운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중심적 질서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중심적 질서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중심적 질서는 언제나 개인의 복종과 희생을 요구한다. 독재자들이 단일한 형식, 곧 “유니폼”(uniform: 모든 사람이 입어야 할 똑 같은 제복)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또한 고전물리학의 환원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부인하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환원주의의 원리에 따르면, 어떤 물체의 화학적 결합은 전자(electron)의 움직임으로 설명될 수 있고, 인간 행동은 생화학적 영향에 대한 반응으로 설명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의 문제가 일어난다. 만약 인간의 행동이 전적으로 화학으로 환원될 수 있고, 화학은 다시 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물리학의 법칙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해 인간의 자유의지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게 된다. 인간은 물리학의 법칙에 따라 결단하고 행동하는 물질적 기계일 뿐이다. 인간이 물리적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물질적 기계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계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 그것은 전체의 운명을 위한 어떠한 책임의식도 느끼지 않는다. 여기서 환원주의의 입장에 숨어 있는 유물론(=물질주의, materialism)의 문제점이 드러난다: 만약 인간이라는 하나의 “복합적 전체가 그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 결코 아니라면”, 인간은 물리적, 기계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물질에 불과하다. 물질은 윤리적 책임성을 알지 못한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세계에 대한 윤리적 책임성을 알지 못하는 자는 결국 자기의 공동체와 세계를 내버려두게 된다.

 

기계론적 자연관의 결정론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성을 더욱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세계의 모든 것이 인과율, 곧 원인과 결과의 엄격한 법칙에 예속되어 있고 이 법칙에 따라 진행되도록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사실상 이 세계의 그 무엇도 변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필연성이 사라지게 된다. 기계론적 자연관의 결정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믿으면서 세계를 위해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기독교 신앙만큼 해로운 것이다.

 

 

■ 불교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

                                                                                               (이중표)

□ 서언

 

인간은 자연 없이 살 수 없다. 즉 인간과 자연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인간과 자연을 대립적인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 아닌 것이 자연이고, 자연 아닌 것이 인간인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서구적인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전세계가 서구화 되어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지역의 구분 없이 서구화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서구의 이해에 철학적 기반을 마련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체의 사물이 합목적적인 질서를 지니고 있으므로 자연의 완벽한 합목적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궁극원인이며 목적규정성 속에서 사물을 발생시키는 본래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질료와 형상의 관계로 이해했다. 형상이 질료의 목적이듯이 정신은 육치의 목적이다. 즉 육체는 정신의 도구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론적 관점에서 그는 무기체를 최하위에 두고 그 위에 식물, 동물, 인간이라는 계층을 설정했다. 이러한 계측에서 부동의 원동자이며 순수형상인 신을 제외하면 인간은 자연계에서 최고의 목적이며 형상이다. 즉 자연은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사상이 서구의 인간 중심적 사고의 토대를 이루었다.

 

서구에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에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르네상스 이후 발달한 자연과학이다. 자연과학은 체계적인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들을 귀납적 방법으로 정리하고 여기에 수학을 적용하여 자연의 법칙을 수립했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성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세계관을 무력화했다.

 

자연과학의 성과에 자극을 받은 영국의 베이컨(1561~1626)은 목적론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 반대하여 저술한 <신 오르가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자연관을 종족의 우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자연은 인과관계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학문이란 자연의 인식, 즉 자연에 내재한 인과법칙의 발견을 말하는 것이고, 자연법칙을 앎으로써 우리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학문은 자연을 이용하여 인간의 생활을 복되게 하는 데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프랑스의 데카르트(1596~1650)는 생각하는 실체과 물질적 실체, 즉 사유(思惟)와 연장(延長) 사이의 운명적인 분리를 제시했다. 그는 오직 인간만이 영혼을 가질 정도로까지 신의 성질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동물조차도 영혼이 없는 자동기계일 따름이었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생각에 근거해서 인간은 아무런 가책없이 거대한 무생물 기계인 자연을 마구 해체하고 조작하고 실험할 수 있었다.

이러한 서구 근세의 기계론적 자연관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자연은 지배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은 이러한 서양 근세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결과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와 같은 현대의 여러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 환경문제는 21세기에 진입한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되었다. 환경문제는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는 살 수 없으며,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했다. 자연관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이는 인류가 생존할 수 없음을 느낀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자들은 기계론적이며 실재론적인 자연관에 의심을 갖기 시작했다. 과학이론은 객관적으로 독립적인 물리적 실재를 대표한다고 믿어져 왔다. 그러나 이 가설은 과학자들에 의해 의심을 받고 있다. 물리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 원리는 측정 가능한 것의 한계를 명확히 했으며 수학에서는 쿠르트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공리(公理)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체계 외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모든 수학체계가 완전하다면 모순이 있을 리 없고 모순이 없다면 완전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생물학에서는 진화의 의미가 새롭게 이해되고 있다. 맹목적이고 우연한 돌연변이가 새로운 진화를 이끈다는 예전의 생각은 별개의 진화계통을 통해 진화한 생물들의 공생적 합병에 의해 새로운 생물이 만들어진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진화의 원동력은 돌연변이가 아니라 공생이며, 자연선택의 주요한 요인은 개체간의 생존경쟁이 아니라 유기체와 환경의 상호협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의 성과는 인간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생명체는 큰 의미에서 하나의 생명이라는 주장이나 시스템 이론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대응이다. 21세기는 서양 근세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넘어서 모든 것을 상호의존적으로 연결된 관계구조로 보는 새로운 세계관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는 불교의 연기설과 상통한다.

 

오늘처럼 환경에 대한 우려가 크지 않았던 시대에 형성된 불교사상에서 자연에 대한 논의는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의 고뇌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가 불교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해서 불교사상에 외부세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붓다의 가르침, 즉 근본불교 속에 이미 인간과 세계에 대한 관계가 논의되고 있고, 부파불교와 대승불교를 거치면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불교의 이해는 심화되고 체계화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세계 이해의 토대에 인과율이 있다는 관점에서 불교의 세계 이해의 토대가 되는 연기설을 인과율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근본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사상에 나타나는 연기론적 세계관에 담긴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를 오늘의 시점에서 해석하고 평가하고자 한다.

 

불교의 인과율

 

인과율은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 틀이다. 종교든 과학이든 철학이든 인과율에 의해 세계를 이해한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기독교의 세계관은 신이 모든 존재의 원인이며, 세계는 신의 창조의 결과라고 믿는 인과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며, 자연과학은 인과율이 자연에 내재한다는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모든 형이상학은 현실세계와 현실세계의 원인 사이의 인과관계를 다룬다. 이와 같이 인과율은 모든 세계관에 내재해 있으며, 사물이 어떻게 생기고 변화하며, 어떻게 사건과 관계되는지를 원인과 결과의 상호관계로 설명한다.

 

인과율에는 두 가지 패턴이 있다. 하나는 직선적 단일방향적 인과율이고, 다른 하나는 역동적 상호의존적 인과율이다. 직선적 단일방향적 인과율에서는 원인에서 결과로의 흐름이 일방적이다. 즉 원인은 결과에 영향을 주지만 결과는 원인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시간적으로는 원인이 항상 결과에 선행한다. 이러한 인과율에 의하면 인과의 고리는 A B C D … 와 같이 직선의 형태가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세계 이해는 이러한 직선적 인과율에 의한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상호의존적 인과율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A B, C, D, … 등에 의존하여 존재하고, B A, C, D, … 등에 의존하여 존재한다. 이와 같이 모든 현상들은 상호간에 원인이 되며 동시에 결과가 된다.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은 이러한 상호의존적 인과율이다.

 

붓다는 [잡아함 299]에서 자신이 깨달은 연기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여래가 세상에 나타나거나 나타나지 않거나 法界는 常住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등정각을 이루어, 여러 중생들을 위하여 분별하여 연설하고 개발하여 현시하나니 소위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

 

붓다에 의하면 연기법은 인간이 고안한 것이 아니고 자연계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인과법칙이다. 그가 깨달은 인과율은 당시의 인도사상계에서 이해하고 있던 인과율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붓다 당시 인도사상계는 직선적 인과율에 의지하여 세계를 이해했다. 그러나 붓다는 인과관계가 직선적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임을 깨달았다. 이것과 저것은 일방적 인과관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인과관계로 존재하며(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저것의 생성의 원인임과 동시에 저것은 이것의 생성원인이 된다(이것이 나타날 때 저것이 나타난다).

 

직선적(선형적) 인과율은 우리에게 사물이 발생하는 인과의 고리를 제공한다. D의 원인은 C이고, C B의 결과이며, B의 원인은 A이다’ 라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인과의 고리는 제일 원인이나 또는 무한소급으로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제일 원인을 단일 실체로 보면 일원론이 되고, 다수의 실체로 보면 다원론이 된다. 정통바라문사상의 일원론적인 전변설(轉變說)과 사문들의 다원론적인 적취설(積聚說)은 직선적 인과율에 의한 세계이해의 결과였다.

 

직선적 인과율은 우리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제일 원인이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것인가 물질적인 것인가? 하나인가 다수인가? 그러나 상호의존적 인과율에서는 이런 모순적 양자택일은 무의미하다. 붓다가 모순된 명제를 놓고 대립하던 당시의 철학적 논쟁에 대하여 침묵했던 것은 형이상학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과 세계를 이해하는 인과 패러다임이 달랐기 때문이다.

 

직선적 단일방향적 인과 패러다임은 ‘실체’와 ‘동일성’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 논리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직선적 인과율에서 인과관계는 실체들 사이의 관계이다. 실체는 변화하지 않는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며, 변화는 실체가 지니고 있는 속성들의 전개나 전달에 의해 일어난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 패러다임에 의존하면 실체가 무엇인가를 추구하게 된다. 당시 우파니샤드 사상가들은 브라흐만(Brahman)이 유일한 실체라고 주장했고, 사문들은 다수의 물질적, 정신적 실체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대립을 직선적 인과 패러다임은 피할 수 없다. 변화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하고, 그것이 경험될 수 있다면 대립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하지 않는 실체는 경험된 적이 없다. 신적 존재인 브라흐만은 인식된 적이 없고, 사문들이 주장하는 요소들도 불변의 실체는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변의 실체는 경험적 근거가 없는 추상적 개념이다. 이러한 추상적 개념을 만드는 것이 논리학이다. Brahmaj?la-sutta에서 붓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비구들이여, (계율 이외의) 또 다른,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논쟁의 여지가 없어) 고요하고, 추론의 범위를 벗어난, 실제로 체득해야 할 법들이 있어, 그것들을 여래는 스스로 깨닫고 체험하여 알려주나니, 그것들을 가지고 찬탄하는 것이 여실하고 바르게 여래를 찬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자아(atta)와 세계(loka)는 상존한다는 상견(常見)을 주장하는데, 여기에는 4가지가 있다. 그러면 저 사문과 바라문들은 무엇에 의해서, 무엇으로부터 … 4가지로 주장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몇몇 사문이나 바라문은 노력하고, 정진하고, 헌신하고, 방일하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여, 그와 같은 마음의 삼매(定意三昧; ceto-sam?dhi)에 도달하여, 그러한 삼매의 마음으로 여러 가지 과거를 기억한다. - 즉 한 번 태어난 생, 두 번 태어난 생, … 백 번, 천 번, 십만 번의 생을 기억한다.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으로, 이런 가문에서, 이런 용모를 지니고,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고락을 겪으며 살다가 이렇게 수명을 마쳤다. 그는 그곳에서 사라져 저곳에 나타났다. 거기에서는 이런 이름으로, 이런 가문에서, 이런 용모를 지니고, 이런 음식을 먹고, 이런 고락을 겪으며 살다가 이렇게 수명을 마쳤다. 그는 거기에서 사라져 여기에 나타났다.” 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여러 가지 전생에 살던 곳을 관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없이(vanjha),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고 고정불변하며, 중생들은 (그 세계 속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윤회하고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태어나지만 영원히 존재한다.” … 이것이 첫째 주장이다.

 

… 즉 한 번에서 열 번까지 세계가 괴멸하고 생성하는 것을 기억한다. … 이것이 둘째 주장이다.

… 즉 열 번에서 마흔 번까지 세계가 괴멸하고 생성하는 것을 기억한다. … 이것이 셋째 주장이다.

넷째 사문과 바라문들은 무엇에 의해서, 무엇으로부터 자아와 세계는 상존한다는 상견을 주장하는 것일까?

 

비구들이여, 몇몇 사문이나 바라문은 논리적으로(v?ma?s?) 추론하는 자(takk?)이다. 그는 추론의 영향을 받아(takka-pariy?hata?), 논리적인 사변을 행하여(v?ma?sanucarita?), 자신의 논변(saya?-pa?ibh?na?)으로 이렇게 말한다. “자아와 세계는 … 영원히 존재한다.

비구들이여, 여기 이들을 (사문이나 바라문의 사상을) 여래는 분명하게 안다. 이들 견해의 근거(見處; di??h??h?n?)를 아나니, 이렇게 파악된 것이며, 이렇게 집착한 것이며,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며, 이들 견해의 결과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여래는 그것을 알고, 그 보다 더욱 수승한 것을 알지만, 그 지식을 집착하지 않나니, 無執着만이 寂滅임을 알아, 느낌들(;vedan?na?)의 集과 滅을 알고, 즐거움과 재앙을 알고, 出離를 여실하게 알지만, 비구들이여, 여래는 (그 지식을) 집착하지 않고 해탈했느니라.

 

여기에서 붓다는 당시의 여러 사상들이 두 가지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한 추론에 근거를 둔 것이다. 즉 전자는 경험론자의 귀납논리이고, 후자는 합리론자의 연역논리이다. 이들 논리학은 귀납법이건 연역법이건 실체를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인간과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인간과 세계라는 개념은 변화하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인간이 변화한다’는 명제 속에서는 동일성을 지닌 실체로서의 인간이 존재하고, 그 존재가 본질은 변화하지 않으면서 겉모습만 바뀐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당시 사상계의 윤회설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과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을 뿐,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실체론적 사고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붓다는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비구들이여, 저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과거의 시간(本劫; pubbantakapp?)에 대하여, 과거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가지고, 과거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는 18가지 주장은 느껴진 것(因受緣; vedayita)이며, 갈망에 빠진 것( ta?h?-gat?na?)이며, 두려움에 떤 것(paritasita-vipphanditam)이지만, 저들 존경받는 사문과 바라문들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저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 저마다 주장하는 62종의 견해들은 觸을 인연한 것(phassa-paccay?)이다.

 

붓다는 실체론의 근거를 느낌, 갈애, 두려움이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것은 무상하게 변화한다. 우리는 이렇게 잠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자신에게 느껴진 감정을 토대로 감정을 일으키는 성질을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실체로서 외부에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자아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것, 더러운 것, 맛있는 것, 맛없는 것, 감미로운 음악, 시끄러운 소음이 존재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은 변화하여 더러운 것이 되고, 맛있는 것은 배가 부르면 맛이 없어진다. 시끄러운 음악을 감미롭게 듣는 사람도 있고, 조용한 음악을 따분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외부의 사물도 변화하며,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도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고집하는 것은 그러한 느낌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즉 아름다운 것을 계속하여 보고자 하는 갈망이 아름다운 것을 관념적으로 실체화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관심이 없는 것은 실체화되지 않는다. 나무로 만든 책상을 예로 든다면, 책이 없어서 책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에게 책상은 나무일뿐이다. 책을 놓고 보기에 좋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대상을 실체화하여 책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한편 우리에게는 자아의 존재가 소멸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이 자아를 실체화한다. 자아와 세계는 이렇게 느낌과, 갈망과 두려움을 통해서 실체화된다.

 

붓다에 의하면 느낌(; vedana)은 촉(; phassa)을 조건으로 연기한 것이다. 그리고 갈애(; ta?h?)는 느낌을 조건으로 연기한 것이다. 따라서 실체론의 근원은 촉이라는 것이 붓다의 생각이다.

 

촉은 우리가 감관을 통해 지각할 때 생기는 ‘외부에 사물이 있다는 느낌’이다. 이러한 촉은 자아와 세계를 개별적 실체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잡아함 306]에서는 촉의 발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二法이 있나니 … 眼과 色이 二法이다. … 眼과 色을 인연하여 識이 생기고, 이들 셋이 화합한 것이 觸이다.

 

()은 인식 주관(六入身), 즉 자아를 의미하고, ()은 객관(六外入), 즉 세계를 의미한다. 우리는 주관과 객관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에서 사물을 보면 대상을 분별하는 의식이 생긴다. 예를 들어 촛불을 본다고 하자. 촛불은 기름이 끊임없이 연소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촛불을 실체화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존속하는 사물로 인식한다. 이렇게 변화하는 현상을 실체화하여 사물로 인식하는 의식이 식()이다. 우리의 의식에 실체화된 관념이 있을 때, 그 사물에 상응하는 대상을 지각하면,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느낀다. 책상이라는 관념을 실체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책상이 있다’는 느낌은 생기지 않는다. 촉은 이렇게 현상을 실체화함으로써 나타난다. 따라서 실체론에 근거하여 대립하는 모든 견해는 촉을 연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붓다의 이야기는 이들 대립된 견해가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개별적이고 대립적인 실체로 보는 데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붓다는 [장아함 청정경]에서 이들의 대립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이와 같은 (모순 대립하는) 주장을 붓다는 허락하지 않나니, 이들 견해 속에는 각기 結使가 있기 때문이다. … 이들 邪見은 말만 있을 뿐이어서 함께 논의할 만한 내용이 없다. … 이들 사문과 바라문은 모두 觸因緣으로 인하여 그러한 주장을 한다. 만약 觸因을 떠난다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六入身으로 말미암아 觸이 생기고, 촉으로 말미암아 受가 생기며, … 生으로 말미암아 老死憂悲苦惱의 大患陰이 集起하기 때문이다. 만약 六入이 없으면 觸이 없고, … 老死憂悲苦惱의 大患陰의 集起도 없다.

 

‘결사(結使)가 있기 때문’이라고 된 곳이 D?gha-Nik?ya에는 ‘중생들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annath? sannino pi h' ettha sant' eke satt?)’이라고 되어있다. 즉 이들 주장은 서로 다른 생각의 대립이지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은 어떠한 것인가? 붓다는 모든 것은 연기하므로 무상하며 무아라고 주장한다. 즉 서로 인연이 되어 존재하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실체는 없고 관계만 있다는 것이다.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이라는 이름의 [잡아함 335]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구들이여, 眼은 생길 때 오는 곳이 없고, 멸할 때 가는 곳이 없다. 이와 같이 眼은 부실하게 생기며, 생기면 남음 없이 사라지나니, 業報는 있으나 作者는 없다.

 

인지하는 자아, 행위하는 자아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의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행위하는 실체는 없고, 오직 행위를 통해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즉 업보만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라는 상호인과율에 의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을 이원화된 실체로 보지 않고, 행위를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로 이해한다.

 

□   연기론적 세계관

 

모든 것이 상호인과관계를 가지고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는 연기설의 입장에서는 이 세계를 실체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관계에 의해 모든 것이 과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붓다는 이러한 관계의 근원을 인지 구조라고 이야기한다. 붓다는 이 세계의 근원에 대하여 묻는 사람에게 {잡아함 319}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一切란 12入處를 말한다. 眼과 色, 耳와 聲, 鼻와 香, 舌과 味, 身과 觸, 意와 法, 이것을 일체라고 부른다. 만약 이를 일체라고 하지 않고 … 다른 일체를 세운다면, 그것은 단지 言說만 있기 때문에 물어도 알지 못하고 의혹만 늘어갈 것이다. 그 까닭은 그것은 境界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일체는 세계의 근원을 의미한다. 당시 정통바라문교에서는 브라흐만, 즉 정신적 실체를 일체라고 주장했고, 사문들은 여러 가지 요소, 즉 정신적·물질적 실체를 일체라고 주장했다. 붓다는 이러한 일체에 대하여 그것은 우리의 인지 구조/삶의 구조(眼耳鼻舌身意)와 그 구조와 함께 나타나는 것(色聲香味觸法)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지 구조의 핵심에 정신적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은 물질적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의 생각에 따르면 물질과 정신은 단지 언어일 뿐이다. 그래서 물질이 무엇인가, 정신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면 의혹만 증대할 뿐 결국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을 붓다는 그것이 우리의 인지 구조(삶의 구조)의 영역(境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붓다의 이야기는 '세계는 인간의 감각 지각 기억의 구조물이다'라는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의 이야기와 상통한다. 세계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인간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삶과 함께 있다. 동물에게는 그들의 삶과 함께 그들의 세계가 있다. 세계는 이렇게 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세계는 이렇게 인지 구조(삶의 구조)를 통해 그 구조와 함께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인지 구조 와 세계가 분리되지 않는다. Sa yutta-Nik ya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世間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게 하는 것, 그것을 聖法律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 法友들이여, 眼에 의해서, , , , , 意에 의해서 세간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과 신념이 있다. 이것을 聖法律에서는 세계라고 부른다.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은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와 상통한다. 월리스는 인류 원리를 소개하면서 그 핵심적 요소를 "인간의 존재가 우주의 설계를 결정하고, 반대로 우주의 설계가 인류의 생존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천문학자 에드워드 헤리슨은 "인류 원리는 우리 인류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우주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류 원리는 인간이 경험하는 우주 내부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인류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은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참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원리는 연기설에 근거한 불교의 '유심 사상(唯心 思想)'과 상통한다. 세계는 항상 삶의 구조()에 의해 드러나고, 그 세계에서의 삶이 다시 새로운 삶의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 연기설에 근거한 불교의 업보(業報) 이론이며, 유심 사상이다. 이와 같은 세계관에서 본다면 인간과 자연에 대한 모든 논의는 인간의 삶, 즉 업보와 직결된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삶, 즉 업()이다. 인간도 업의 결과(業報)이고, 자연도 업의 결과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중생의 세계, 즉 삼계(三界)는 업보의 세계이다. 따라서 중생의 세계는 중생의 삶에 의해서 형성되고 소멸된다. {장아함 세기경(世起經)}에 의하면 중생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고 좋은 음식과 의복이 사라지며, 땅은 황폐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법(正法)을 행하고 선행을 닦아 모두가 천상에 올라가면 중생들이 살던 하계(下界)의 세계는 사라진다. 천상에 살던 중생들이 복이 다하여 그곳에서 수명을 마치면 다시 하계에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 다시 천지가 이루어진다. 이와 같이 근본불교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형이상학적 실체를 가정하여 이해하지 않고 삶의 과정, 즉 업보로 이해한다.

 

 불교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

 

. 아비달마불교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

 

존재의 근원이 업이라는 근본불교의 세계관은 당시의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비달마불교가 실재론에 흐른 것은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된다. 아비달마불교의 여러 부파 가운데 실재론적 입장을 가장 강하게 주장한 부파는 시간과 존재가 실체로서 존재한다(三世實有 法體恒有)고 주장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이다. 유부에서도 근본불교의 세계관을 계승하여 중생들의 세계가 중생들의 업력(業力)에 의해 생성, 유지,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 자체에 실체성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부에서는 물질(色法)의 구조를 분석적으로 사유했다.

 

모든 물질은 유형적인 존재인 이상 반드시 그 최소 단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최소의 단위를 극미(極微; param?nu)라고 불렀다. 극미는 미세하여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다. 극미는 낱개로 존재하는 일이 없이 7개의 극미가 일단이 되어 중심에 있는 한 극미를 사방(四方)과 상하(上下)에서 둘러싸고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 7개의 극미가 일단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미취(微聚)라고 하며, 7미취를 금진(金塵), 7금진을 수진(水塵), 7수진을 토모진(兎毛塵), 7토모진을 양모진(羊毛塵), 7양모진을 우모진(牛毛塵), 7우모진을 극유진(隙遊塵)이라 하는데 극유진의 형태가 될 때 비로소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다. 개개의 극미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질의 견고한 성질은 지대(地大)이고, 습윤(濕潤)한 성질은 수대(水大)이며, 온난(溫暖)한 성질은 화대(火大)이고, 운동의 성질은 풍대(風大)이다. 극미 속에 있는 사대의 성질은 조건()에 따라 증감이 있다. 어떤 1 大의 성질이 강성하면 다른 3大의 성질은 잠재 세력으로 은복한다. 현상계의 여러 차별적인 물질들은 이러한 사대의 현현과 은복으로 설명된다.

 

물질에 대한 유부의 이론은 현대과학의 원자론과 유사하다. 극미의 존재 형태는 핵을 중심으로 주위에 소립자가 위치한다고 하는 원자의 형태와 유사하고, 구체적인 사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사대는 원자가 모여 형성되는 분자와 유사하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세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원자론과 큰 차이가 있다. 원자론에서는 원자 자체의 기계적 운동력에 의하여 인간이나 생명체의 삶과는 무관하게 물리적 자연세계가 형성된다고 한다. 그러나 유부에서는 중생들의 업력에 의하여 그 과보로서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으로서의 세계가 형성되고 유지된다고 본다.

 

중생들의 삶에 의하여 형성된 업력은 두 가지의 과보를 초래한다. 하나는 정보(正報)로서 중생의 몸을 형성하고, 다른 하나는 의보(依報)로서 중생의 국토를 형성한다. 즉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과 같은 육도(六道)의 중생들은 각각 정보로서 받게 되는 유정세간(有情世間; Sattva-loka)이고, 그들이 사는 세계는 의보로서 받게 되는 기세간(器世間; Bhajana-loka)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정세간과 기세간은 중생의 업력에 의하여 형성되고 소멸하는 것이지 극미 자체의 구조나 운동력에 의하여 형성,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세계관은 유부가 비록 실재론적이고 원자론적 입장을 취했지만 근본불교의 세계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 대승불교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

 

아비달마의 실재론적 입장은 붓다의 연기설을 왜곡한 것이다. 대승불교는 사상적으로 이러한 왜곡된 불교를 시정하여 붓다의 본의를 회복하려는 운동이며, 그 선봉에 용수(龍樹; N?g?rjuna)가 있다. 용수는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에 자성(自性)이 없다는 이른바 일체개공(一切皆空)의 입장에서 유무(有無)가 대립하는 실재론적 입장을 떠나 중도(中道)가 실상(實相)임을 천명한다. 이러한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업보와 마음을 중심으로 인간과 세계를 해석한 것이 대승불교다. 이제 대승불교의 유식학(唯識學) ??화엄경??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은 착한 일도 하고 악한 일도 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선악업(善惡業)에 의해 훈습(熏習)된다. 훈습이란 종이에 향기가 배어들 듯이 인간의 행위가 마음에 습관으로 배어드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훈습되면 그 마음에는 습기(習氣)가 있게 되는데 이 습기를 종자(種子)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마음은 과거의 삶에 의한 선악업의 결과로 더럽게 혹은 깨끗하게 여러 가지로 훈습되어 수많은 습기, 즉 종자가 모여있다. 이렇게 업의 결과로서의 종자가 모여있는 마음이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이 아뢰야식에 모여있는 종자에서 모든 법()이 나타난다. 종자가 인()이 되고 법이 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업의 결과, 즉 법이 종자로 모여있는 곳이며, 동시에 모든 법이 업을 통해 발생하는 근원이다. 유식학에서는 이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인간과 자연을 설명한다.

 

유식학에서도 아비달마와 마찬가지로 업의 과보를 정보와 의보로 구별한다. 정보는 지옥, 아귀, 축생, 수라, , ,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 10 계의 중생(인간)을 의미하고, 의보란 그들이 사는 국토(자연)를 의미한다. 아비달마와의 차이점은 정보와 의보가 모두 외계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형성된 마음에서 전개된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중생(생명)은 각각 자신의 모습과 세계를 전개해 낸다. 이렇게 중생들이 자신과 세계를 전개하는 근원은 아뢰야식에 모여 있는 의정(依正) 이보(二報)의 종자(種子)이다. 이 종자가 모든 존재를 전개하는 원인이다. 종자에는 공상(共相)과 불공상(不共相)이 있다. 공상종자(共相種子)란 같은 종류의 중생들이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로 비슷한 과보(果報)를 가져오는 종자를 의미하고, 불공상종자(不共相種子)는 다른 중생과는 공통되지 않는 서로 다른 과보를 가져오는 종자를 말한다. 예를 들면 산하대지(山河大地)와 같은 자연세계는 공상이고, 각 개인의 신체는 불공상이다. 공상은 동류의 중생에게 비슷한 모습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공상종자는 중생 각자의 아뢰야식 속에 있기 때문에 중생들은 각기 자신의 세계를 전개한다. 그러나 업의 유사성 때문에 동류 중생들은 세계를 공유하는 것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다. 비유하면 많은 등불을 같은 방에 켜놓으면 빛의 근원은 각기 다르지만 서로 걸림이 없이 하나의 불빛으로 느껴지는 것과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이렇게 모든 생명들이 삶을 통해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는 여러 개의 등불이 하나의 불빛을 이루듯이 서로 걸림이 없이 융합되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내가 만든 세계에 나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살고 있고, 나 또한 다른 생명들이 만든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자연계는 바로 이러한 세계이다. 식물들은 식물계를 이루고 있고, 동물들은 동물계를 이루고 있으며, 인간들은 인간계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세계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 세계가 서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인간계 속에 동식물의 세계가 들어있고, 동식물의 세계에 인간계가 들어있다. 따라서 인간계와 자연계를 나누는 것은 언어에 의한 분별일 뿐이다. [화엄경 광명각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차별된 현상을 분명히 알되 言說에 집착하지 말라.

一과 多가 따로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불교를 따르는 것이다.

중생과 국토를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잘 관찰하는 것을 불법의 의미를 알았다고 하는 것이다.

(了知差別法 不著於言說 無有一與多 是名隨佛敎 衆生及國土 一異不可得 如是善觀察 名知佛法義)

 

()은 전체를 의미하고 다()는 부분을 의미한다. 우리는 지각을 통해 다양한 내용을 인지한다. 그리고 각기 다른 현상에 이름을 붙여 구별한다. 이렇게 이름을 붙여 구별된 것이 부분이고, 이 부분의 총화가 전체이다. 따라서 부분과 전체는 언설에 의한 분별일 뿐이며, 언설은 편의상 주어진 이름, 즉 가명(假名)이다. 이러한 언설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언설에 의한 분별을 실체화한 것이 실체론이며, 전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실체론에 근거한 인과율이 직선적 인과율이다. 상호의존적 인과율, 즉 연기론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현상은 그물처럼 얽혀있기 때문에 전체를 부분으로 분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중생과 국토, 즉 인간과 자연도 마찬가지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과 저것이 동일한가 다른가의 판단은 실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 저것이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을 때에는, 즉 이것과 저것이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고 할 경우에는,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연기론적 입장은 현대의 시스템 이론과 일치한다. 카프라는 다음과 같이 시스템 이론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 양자물리학이 극적으로 입증해 주었듯이 - 부분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부분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의 직물 속에 나타난 하나의 패턴일 뿐이다. 따라서 부분에서 전체로의 전환은 대상에서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복잡한 연결망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무늬 주위에 경계선을 그려 그 무늬를 고립시키고 그것을 하나의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자의적인 일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환경 속에 들어있는 대상을 지칭할 때 바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일례로, 우리는 나뭇잎, 잔가지, 가지, 줄기들의 관계의 연결망을 볼 때, 그것을 나무라고 부른다.

모든 나무의 뿌리들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조밀한 지하 연결망을 이루며, 그 연결망 속에서 개별 나무들의 정확한 경계를 긋기란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가 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관찰과 측정의 방법을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지각에 의한 것이다.

지금까지 짧게 요약한 시스템적 사고의 특성들은 모두 상호의존적인 것들이다. 여기에서 자연은 서로 연결된 관계들의 그물망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특정한 패턴을 ‘대상’으로 식별해 내는 것은 인간관찰자와 그의 앎(인식)의 과정에 달려있다.

 

인간과 자연은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고 있는 관계의 그물망을 이루는 패턴들이다. 이름(언설)은 이들 패턴에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자연을 실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무엇이고 자연은 무엇인가’를 개념적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나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호 의존하여 변화해 가는 무상한 패턴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러한 이해의 태도, 즉 관계에 대한 관심은 필연적으로 인간은 타인이나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즉 타인과 자연에 대해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라는 윤리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인간과 자연, 나와 남이 상호의존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자각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을 분별하지 않고 한 몸으로 보는 동체자비(同體慈悲)의 실천, 즉 윤리적 삶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는 세계의 상호의존적 관계를 깨달아 동체자비의 윤리를 추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발보리심(發菩堤心), 즉 발심(發心)이라고 부르며, 인간은 지혜롭고 행복한 삶과 장애 없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마땅히 발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발심의 공덕은 측량할 수 없나니                     發心功德無能測

삼세 일체 부처님을 만들어내고                      出生三世一切佛

세상 모든 즐거움을 이루어 내며                     成就世間一切樂

일체의 수승공덕 증장시키고                         增長一切勝功德

일체 모든 의혹은 길이 끊는다.                      永斷一切諸疑惑

아름다운 세상을 열어 보이고                        開示一切妙境界

일체의 장애를 모두 없애며                          盡除一切諸障碍

청정한 세상을 이루어 내고                          成就一切淸淨刹

일체의 如來智를 출생하나니                         出生一切如來智

시방의 一切佛을 친견하고자                         欲見十方一切佛

무진장한 공덕을 베풀어주고자                       欲施無盡功德藏

중생들의 모든 고뇌 없애 주고자                     欲滅衆生諸煩惱

어서 빨리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宜應速發菩堤心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삶을 통해 연기하는 상호의존적 관계로 봄으로써 인간은 타인이나 자연세계에 대해 자비를 실천해야 할 윤리적 당위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  결 어

 

세계 이해의 바탕에는 인과율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존의 세계 이해는 대부분 인과를 실체들의 직선적이며 단일 방향적인 관계로 보는 직선적 인과율에 의한 것이었다.

 

직선적 인과율은 인과관계를 실체 사이의 일방적 관계로 보기 때문에 사물이 발생을 설명할 때 원엔에서 결과로의 흐름이 일반적인 인과의 고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인과의 고리는 제일 원인으로서의 근본 실체를 전제하거나 무한소급으로 끝을 맺는다. 따라서 '근본 실체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근본 실체는 정신인가 물질인가?' 라는 식의 모순된 주장이 대립하고 우리는 이 모순된 주장 가운데 하나의 선택을 요구 받는다.

 

붓다는 모든 것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생성되므로 인과구조는 직선적이 아니라 그물망과 같은 구조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소급해가야 할 원인이 없으므로 제일 원인도 없고, 근본 실체도 없다. 오직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실체를 공허한 것으로 보고 관계를 진실한 것으로 본다. 불교의 세계 이해는 이러한 상호의존적인 인과율, 즉 연기설에 토대를 둔다.

 

연기설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인간의 인지 구조를 통해 연기한 것이다. 즉 세계의 토대는 인지 구조이며, 중생들은 인지 구조를 토대로 삶을 영위하면서 자신과 세계를 만들어 간다. 이것이 불교의 업보사상이다. 이러한 불교의 업보 사상에 의하면 인간과 자연의 삶의 결과, 즉 업보로서 삶에 의해 변화해 가는 과정이다.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인간 자신과 그의 환경, 즉 자연이 변화해 간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자연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이렇게 인간과 자연은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면서, 상호인과적으로 인간은 자연을 만들고, 자연은 인간을 만든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은 불일불이의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이해가 불교 윤리의 토대가 된다. 자연은 중생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중생은 자연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영향을 받고 자연은 인간의 삶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자연과 인간은 불일불이의 관계 속에서 한 생명을 이루고 있다. 자연세계는 인간과 무관한 객관적 사실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삶에 의해 이해되고 변화하며, 인간의 삶에 영향을 준다.따라서 윤리는 인간 상호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여기서 현대 윤리학에서 문제되는 환경윤리의 당위설이 있다.

 

서구사회의 윤리체계에서는 도덕의 핵심이 '정의'지만 불교의 윤리체계에서는 '자비'가 핵심이다.

 

정의는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이익을 놓고 서로 대립한다. 자신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이 대립할 때 공정한 분배의 원리가 요청된다. 이때 공정한 분배의 원리가 정의이다. 따라서 정의의 윤리학에서 자연은 인간이 정의롭게 분배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연기설에 근거하여 '나와 남',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自他不二'의 의식을 강조한다. '자타불이'의 의식을 통해 ''에서 ''으로, '인간'에서 '자연'으로 자아가 확장된다. '자아'를 확장하여 '자아' '타인과 자연'을 포용하면 인간 상호간의,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은 사라진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바른 이해(반야)를 통해 이루어지고 자비를 통해 실현된다.

 

자아가 확장되어 다른 존재를 포용한다면 우리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타인에 봉사하고 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즉 자연과 인간이 연기 구조 속에서 한 생명으로 이해될 때 우리는 인간중심의 윤리에서 생태중심, 생명중심의 윤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유식 삼성설 (唯識 三性說)

 

□ 유식사상 (1)

. 중관(中觀) 사상과 유식(唯識) 사상

                                                                                        다음카페 koreanashram, 내용 일부발췌

. 중관(中觀) 철학

 

용수(龍樹) 2~3세기경 남인도 출신의 대승불교 교리연구 논사였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저서인 “중론송(中論頌)” 에 있다.

 

'(中)'은 유와 무의 양극을 피하는 기본입장으로서, 세계의 모든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이다. 그러나 공은 결코 무가 아니며, 다만 자성(自性)이 없이 조건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세계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공()이란 비유(非有), 비무(非無)이며 중도인 것이다. ()은 연기(緣起)라는 제법(諸)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일단 제법의 실상이 공임을 알면, 그 법들이 아무 것도 아닌 무가 아니라 공한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것을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하며 용수(龍樹)는 이것을 가명(假名)이라 부른다.

 

용수(龍樹)에 의하면 사람들이 세계의 실제 모습인 공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 개념의 성격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사물들이 독립되고 고정된 본질을 갖고 실재하는 것처럼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은 일체의 개념들을 거부한다.

 

그렇다고 용수는 일상적 언어나 관념의 타당성을 무조건 부정하지는 않는다. 용수에 의하면 우리는 사물을 볼 때 높고 낮은 2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으며 이 2가지 관점에 따라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2(二諦)가 성립된다고 한다.

 

진제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반야(지혜)의 눈으로 보는 것으로서 언어를 초월한 공()의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속제란 세상 사람들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는 세계로서 진리가 가리워진 모습을 말한다. 용수는 이러한 일상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언어의 사용과 철학적 사유는 속제의 단계에서, 가명의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속제를 떠나서는 진제를 깨달을 수 없다고 용수는 말한다.

 

. 유식(唯識) 사상

 

 유식사상은 중관철학의 진리에 대한 부정적 접근에 만족하지 않고 공()의 진리를 받아들이면서도 이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발전시켰다. 우리가 자성(自性) 없이 공()한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잘못 보는 것은 결국 우리의 그릇된 인식()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유식철학은 우리의 인식활동을 떠난 사물의 객관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식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인식활동만 존재한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 vijñapti-mātratā)의 철학이다.

 

유식철학은 한 마디로 말해 식의 구조와 작용으로써 생사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철학이다. 유식철학은해심밀경(解深密經 Sadhinirmocana-sūtra)”과 같은 유식경전에 근거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논서로 전개된 것은 4세기의 미륵(彌勒 Maitreyanātha), 무착(無着 Asańga)과 그의 동생 세친(世親 Vasubandhu)에 의해서였다. 이들에 의해 수립된 철학은 요가의 실천을 통해 유식의 진리를 추구한다 하여 유가행파(瑜伽行派) 혹은 유식학파라고 부른다.

 

세친은 “유식이십론 唯識二十論”에서 우리의 인식 활동을 꿈에 비유하면서 인식대상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인식은 식 자체가 보유하고 있는 종자로부터 발생하는 것임을 논한다.

 

식의 전변(轉變)에 의해서 자아와 제법(諸法)의 실재성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는 과정을 밝히고 있다. ()의 전변이란 식()을 주관과 객관으로 구별하면서 8가지 모습(八識)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는 심층식으로 여기서 우리가 지은 업의 자취가 종자와 같이 축적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발현하여 자아의식의 제7식 말라식(末那識)과 안,,,,,() 6식으로써 지각되는 경험세계를 연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험세계는 식()을 떠나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식의 상분(相分)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상분을 외계에 실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집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범부의 인식상태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작용 그 자체도 항상 생성소멸하는 의타적 존재로서 이것을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부르며, 이렇게 식의 본성을 깨닫고 나면 외계 사물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데 이것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부른다. 이른바 유식(唯識)의 삼성설(三性說)이다

 

 

유식사상 (2)

                                                                                글 박해당, 일부발췌

. 유식사상은 공()사상의 존재론적인 기반 위에서 인간의 의식에 대해 다룬다. 근본 사상은 유식무경(唯識無境), 오직 식일 뿐이고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식사상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은 미륵(彌勒, Maitreya, 270~350년경), 그의 뒤를 이어 무착(無著, 310~390), 그 동생 세친(世親, Vasubandhu)이다.

 

. 세친의 유식사상은 저서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 등으로 전해지며, 무경(無境)의 

  논증과, ()의 구조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삼무자성(三無自性)

. 변계소집성 相無自性: 의타적인 존재가 잘못 인식되면 변계소집성이 된다. 중생들이 만들어내는 세계

. 의타기성 生無自性: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보여준다.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 의존해 연기적으로

  존재한다. 인식주체를 떠나서 존재 자체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 원성실성 勝義無自性: 의타적인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면 원성실성이 된다. 깨달은 사람이 보는 세계는

  원성실성을 가진 세계이다.

 

. 유식무경의 “경(, 대상)”은 어디까지 적용이 되는가?

. 유식의 문제는 왜 중생들이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잘못된 생각을 일으키는가 하는 것이다.

. 유식의 논의는 내 머리 속의 識과 거기에 들어맞는 境(대상)은 사실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원성실성의

  세계는 아니고 유식무경은 변계소집성으로만 보아야 한다.

. 만약 의타기성까지 부정하게 된다면 그 이전(초기 불교론적 사유와 대승불교의 사상) 까지의 모든 사유를

  부정해버리는 것이 된다.

 

. 유식의 논의가 의타기성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유식 이십론에서 세친이 세계 자체

  가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했던 것이 용수가 중론에서 실재론자들을 비판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이다.

 

. 깨달음은 식의 전이(轉移, 의식이 오염되어 있던 상태에서 깨끗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것은 의타성

  을 꿰뚫어 봄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 점에서 의타성까지 부정해버리면 식의 전이가 일어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꿰뚫어 볼 진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 유식무경의 경은 변계소집성으로 한정시켜 보아야한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유식은 관념론이 아니다. 유식

  이 의타성까지 부정하면 주관적 관념론으로 규정이 될 수 있는데 실제로 유식을 주관적 관념론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유식무경의 논리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식을 유일한 실재로 파악하는 절대적

  관념론의 입장으로 빠져버릴 수가 있다.

 

. 변계소집성 (徧計所執性)

 

. 변계소집성의 특징은 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의식에 의해서 규정되고 고착화된  

  상이라는 것이다.

  , 두루 보편적으로

  , 이리저리 헤아리고 따지고 계산하는 것

  所執, 집착되는 바

  변계소집성, 이리저리 헤아려서 집착되는 대상이 되는 성질

  ,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중생이 만들어낸 세계

. 변계소집성의 경은 상이 되고 상은 거기에 대응하는 실재가 없다는 것이다.

  내 머리 속에 뱀이 포착되었지만 뱀이라는 상만 있을 뿐 실제로 뱀은 존재하지 않는다.

. 변계소집성의 상들은 실재하지 않으므로 자성이 없다. 그래서 공한 존재이다.

 

. 의타기성 (依他起性)

 

. 의타기성은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을 두 가지 관점으로 해석된다.

. 실제로 우리 머리 속에 들어와 있는 변계소집의 세계들

. 식 자체의 연기성

 

. 첫째, 우리에게 인식되는 세계들이 모두 내 식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다. 칸트의 인식론처럼 세계가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세계를 구성해서 본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인식론은 객관적으로 규정되며 주관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칸트의 인식은 보편타당한 인식의 틀로 찍어내는 것이지만 유식에는 보편타당한 인식의 틀은 없다. 즉 주관적인 경험, 즉 업에 의해서 인식의 틀이 결정되기 때문에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다. 변계소집의 세계에서는 보편적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마다 자기의 세계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둘째, ()과 식()의 상호 연기적인 작용에 의해서 식이 형성작용을 한다. 연기는 생성소멸을 특징으로 한다. 의타기성이 존재의 본성인데 유식에서는 그 본성을 자성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무자성: 끊임없이 생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데 그것들은 당연히 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승의무자성: 연속된 것 중 가장 뛰어나다는 의미이지 초월로 이해하면 안 된다.

 

. 삼성의 요체는 인식되는 자에 의해서 세계가 어떻게 달리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식이십론은 우리가 실재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세계의 비실재성/()성을 밝힌다.

 

. 원성실성 (圓成實性)

 

. 원은 완전하다는 의미이다. 성은 다 이루어진 것이고 실은 참된 것을 의미한다. 완전히 이루어진 참된 인식

  의 세계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 유심론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에 삼성에는 삼무자성을 반드시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유식은

  중관철학 인식론적 바탕 위에서 구축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한 것이 칸트식으로 표현하자면 물자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진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으로 보게 된다. 이 상을 만드는 것이 습기이다. 습기에 의해서 하나의 고유한 인식틀을 갖게 되는 것이고 그 인식틀에 맞추어 대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므로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다. 칸트 같은 경우 인식의 틀이 내 경험에 의하지 않고 이미 주어진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유적으로 동일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불교에는 그런 보편적인 인식의 틀이 없다. 습기는 저마다의 업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른바 동업중생, 즉 업이 비슷한 중생들이기 때문에 공감이 가능한 것이고 비슷해지는 것이지 그것이 보편적인 인식의 틀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식의 인식틀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일상적으로 자명하다고 생각되는 우리의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유식사상 (3)

 

. 마음의 세 유형

 

마음이란 무엇인가? 유식 심리학에서는 인간 마음의 존재형식을 “집착, 연기, 완성”의 세 가지로 구별한다.

보통 이것을 유식 삼성설(唯識三性說)이라고 부른다.

 

. “집착”은 외계의 대상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소박한 실재론을 의미한다.

 

한문으로 번역하기를변계소집徧計所執’이라고 했다. ()은 두루함을 의미하고, ()는 자아와 세계를 대상으로 의식함을 뜻이며, 소집(所執)은 집착된 대상을 의미한다.

이 집착의 마음은 장미꽃처럼 “자아와 세계가 저기에 존재한다”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다. 이것의 의미는 사물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인식하는 나와는 별개이고, 그것은 언어에 의해서 기술된다는 것이다.

 

유식에서는 자아와 세계를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망한 분별로 볼 때, 그것은 바로 변계소집성을 가리킨다. 자아와 세계는 집착에 의해서 구성된 가공물이다. 집착이 자아와 세계의 본질이다. 자아는 세계가 항구적으로 존재한다는 신념체계를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시킨다.

 

왜냐하면 자아란 대상과의 의존관계를 통해서 자신의 항상성을 발전시켜 왔기 때문이다. 일반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성숙과 발달로 규정한다. 하지만 유식 심리학에서 이런 상태를 잠자는 상태(睡眠, 無明)라고 부른다. 이 상태는 마치 꿈꾸는 것으로 묘사되고,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기를 거절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연기”는 의타기성(依他起性, paratantra)으로 번역된다.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서 발생한다(tantra)는 것을 의미이다. sva가 자신을 의미한다면, para란 타자를 의미한다. 자아와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관계에 의해서 존재한다. 이것들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연기적 존재이다.

 

상황이란 원인과 조건의 의미이다. 꽃병은 저기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력, 압력, 온도 등과 상호작용 관계에서 존재하고, 그것을 포착하는 의식에 의해서 거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출현되며, 개념과 이름에 의해서 그곳에 존재한다고 기술된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때, 연기란 고통, 집착, 현상이 발생하는 패턴, 형태, 양식을 의미한다. 그 발생의 상호작용을 가리킨다.

 

. “완성”은 원성실성(parinispanna, 圓成實性)으로 번역된다.

 

허망되지 않고 진실하며, 변함이 없이 항상됨을 말한다. 원성(圓成)은 완성되어 부족함이 없는 만족스럽고, 건강한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종종 현상과 대립되는 본체나 본성과 같은 철학적인 개념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유식에서 말하는 유식무경의 인식론과는 차이가 있다. 빠리닛빠나(원성실성)이란 마음의 평정, 경험적 중도를 의미한다.

 

한쪽에 치우친 집착은 선/, 더러움/깨끗함, 옳음/그름으로 마음을 분열시킨다. 마음이 번뇌에 휩싸이고, 결코 평안하지 못하다. 하지만 이들 개념은 서로 상대적인 개념이다. 그 자체로 성립되지 못한다. 더러움과 깨끗함은 상대적인 개념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발생된다. 이것이 두 번째의 연기의 의미이다. 연기의 의미는 악은 선으로 인하여, 더러움은 깨끗함으로 인하여, 미움은 사랑으로 인하여 마음의 정화를 이룰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과 미움의 변주곡을 함께 벗어던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곳에서 경험된 내용은 초월, 산뜻함, 내적 평온이다. 이것이 원만함, 완성의 의미이다.

 

. 이상의 세 가지 마음을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뱀과 새끼줄에 비유하곤 했다.

 

어떤 사람이 밤에 길을 가다가, 새끼줄을 밟았다. 그 순간 놀랍고, 공포를 경험하였다. 그는 뱀을 밟은 것으로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뱀을 집착으로, 새끼줄을 연기로, 짚을 완성으로 설명한다. 집착이란 착각의 산물이고 결과는 공포와 두려움이다. 그래서 진실을 회피함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었다고 밝혀지면,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고, 공포는 치유된다. 다시 그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뱀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뱀이란 자신이 만든 환상이고, 새끼줄은 짚으로 만들어진 연기의 소산임을 자각하고, 그래서 집착과 연기가 본래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자리임을 철저하게 깨닫게 될 때, 그는 비로소 완성, 즉 해탈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유식에서 분류하는 세 형태의 마음이란 결과적으로 의식이 성장하면서 깨달음을 얻어가는 세 단계라고 이해해도 되겠다.

 

 

□ 유식사상 (4)

 

. 유식 삼성설 (唯識 三性說)

                                                                    글 다음카페 ad48, 일부발췌

유식(唯識)이란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의 구조와 작용에 대해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이라는 말에 들어있다.

"세계는 마음이고, 온갖 존재는 다만 식() 뿐이다"라는 의미다.

 

유식(唯識)에서는 모든 존재를 백법(百法), 100가지 존재로 분류하고, 이 백법(百法)이 마음을 떠나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님을 설명한다. 그 백법(百法) 중에 8()이 들어있다. 백법(百法)은 크게 오위(五位), 즉 심법, 심소법, 색법, 불상응행법, 무위법 등 5종류의 법()으로 분류된다.

 

오위(五位) 중에 심법(心法)의 심()은 중심적인 마음 작용을 가리키며 총 8가지가 있다.

 

전오식(前五識)이라 하는,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

제육(第六) 의식(意識)이고, 제칠(第七) 말라식, 제팔(第八) 아뢰야식(또는 아알라야식)으로 분류된다.

 

제육(第六) 의식(意識)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마음 작용이다.

제칠(第七) 말라식은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하며, 끊임없이 사량하고 비교하고 계산하여 자기(自己)라는 개념을 형성하고 그 형성된 개념에 집착하는 마음 작용으로 자아의식이라고도 보면 될 것이다.

제팔(第八) 아뢰야식은 모든 마음 작용의 근본이 되는 식()으로, 일어난 모든 마음 작용의 결과를 창고에 종자를 보관하듯이 보관하고, 그 보관한 종자를 인연에 따라 다시 피어나게 하는 마음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뢰야식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계속 이어지는 특성을 가진다. 이 특성 때문에 말라식이 아뢰야식을 자아(自我)라고 집착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뢰야식이 불변의 모양을 갖춘 실체로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을 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뒷물이 앞물을 이어가면서 강이라는 모양을 이루고 있지만,

강이 고정불변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강의 모습은 매순간 다르고, 한 순간도 같은 물이 아니다. 강에는 고정 불변의 실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는 강이지만, 강물은 대지를 적시고 물고기를 살리며 홍수도 일으키는 등 온갖 작용을 수행한다.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이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아뢰야식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과거의 모든 기억을 보관하고 그 기억을 다시 눈앞에 펼쳐 놓는 가장 근원적인 마음 작용을 하는 것도 확실한 것이다. 뒷물이 앞물을 이어 가면서 모습을 이룬 강이 얼핏 고정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과거의 마음이 현재로 그리고 다시 미래로 이어지는 마음의 작용을 보면서 마음에 고정불변의 실체가 따로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와 같이 8가지 식()으로 세분화하고 있는 것이다. 8가지 식()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8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작용을 자세하게 살펴보니 크게는 8가지 작용으로 나누어 볼 수 있더라는 것이다.

 

()은 마음의 작용이다.

 

성품(性品),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이 모든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 바탕자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모든 정신현상을 일으키는 바탕자리이며, 나아가 모든 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자리이다. 크기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모든 현상과 존재의 근원이 되는 자리인 것이다.

 

유식에서는 모든 존재를 존재의 양태에 따라 3가지로 나누고 있다.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의 삼성(三性)이 그것이다.

 

변계소집성은 사실은 없는 것인데, 착각하여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의타기성은 말 그대로 다른것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것이다. 다른 말로는 인연화합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마지막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인데, 이것은 말 그대로 원만하게 이루어진 실다운 성품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존재의 바탕이 되는 참다운 성품(性品)을 이르는 말입니다.

 

8가지 식(),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다.

조건이 갖추어 질 때 존재했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서 결국 사라지는 존재인 것이다. 이식(耳識), 즉 듣는 작용을 보면 소리가 들릴 때 소리에 대해 듣는 인식이 생겼다가, 소리가 다함과 동시에 듣는 인식도 사라진다.

 

8가지 식(),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의 존재이고 이 의타기성의 근저에 원성실성의 존재인 근본 마음자리가 있는 것이다. 이 근본 마음자리를 성품(性品),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自性)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自性)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이라고 한다.

 

자성(自性)에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자성(自性)은 정신의 근원인 것이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을 정신이라 하고, 이 정신의 바탕자리가 자성(自性)인 것이다.

 

 

□ 유식사상 (5)

 

. 유식삼십송 강설 중에서

인경 강설 내용중 일부발췌

. 의타기성

 

다른 것에 의지하여 자성은 조건에서 발생된 분별로서 구성된다.

원만한 참다운 성품은 의타기보다는 항상 분별로부터 멀리 떠나있다.

(依他起自性 分別緣所生 圓成實於彼 常遠離前性)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서로 비교한 것이다.

 

변계소집은 “두루 분별하여 집착됨”을 말한다면, 의타기성은 집착을 야기시킨 분별을 의미한다. 분별로부터 집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다음 2가지 해석이 있다.

 

. 원인과 조건에서 발생된 것으로서 의타기성이 된다. 그에 반하여 변계소집은 잘못된 집착으로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有無], 같음과 다름[一異], 함께 함과 함께 하지 못함[俱不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 모든 마음과 마음현상은 허망된 훈습으로 말미암아 비록 그 바탕은 하나이지만, 주관과 객관, 인식과 대상 등의 2가지 형상을 낸다. 인식의 주객은 견해에서만 존재하고 실질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2가지 형상은 변계소집이고, 이들 인식의 주객을 발생시킨 허망한 분별이 바로 의타기성이다.

 

이들의 차이점은 현대 심리치료에서 정신역동과 인지치료의 차이점과 유사하다. 정신역동은 과거에 그것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중시한다면, 인지치료는 현재에서 어떻게 그것을 경험하고 있는지를 중시한다.

 

의타기성은 변계소집과 원성실성을 함께 공유하지만, 원성실성은 항상 변계소집에서 멀리 떠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의타기성에 대해서 분별을 일으키면 변계소집으로 떨어지고, 반대로 의타기성을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면 곧 원성실성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의타기성이 물들면 그것은 바로 변계소집이 되고, 반대로 의타기성이 청정하면 그것이 바로 원성실성임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의타기성은 바로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현실을 왜곡시키면 집착이 되고 존재 그대로 허용하면 원만한 행복이 된다. 이런 점에서 유식 삼성설은 그대로 심리치료의 과정으로 활용될 수가 있다.

 

. 변계소집성

 

 이런 저런 분별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사물을 두루 분별한다.

이렇게 분별에 의해서 집착된 것들은

스스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

(由彼彼徧計 徧計種種物 此徧計所執 自性無所有)

 

“성유식론”에서는 변계소집을 ‘허망한 분별(虛妄分別)’로 정의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 분별하여 집착하기 때문이다. 초월적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은 존재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그것에 집착한다. 자아의 존재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구체적이고 확고한 증거가 없는데도 우리는 자아의 존재를 믿는다. 이런 것들이 모두 허망한 분별로서 변계소집이다.

 

유식의 입장에서 변계소집을 고통과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곧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왜곡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잘못된 분별을 교정하여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게 한다면, 고통으로 벗어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심리치료이다. 여기에는 3가지의 접근방식이 있다.

 

첫째는 잘못된 분별을 일으키는 내적인 공능, 습기, 종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내적인 힘이 계속 권리를 주장하는 한에서 자주 재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은 쉽지만은 않다. 우선적으로 내적인 씨앗을 찾아내는 일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현대 심리학에서 이것과 유사한 전략을 선택한 학파는 정신역동이나 도식치료이다. 이들은 어린 시절과 같은 과거의 경험내용을 중시하고 그곳으로부터 원인이 있고, 변화도 그곳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믿음을 가진다.

 

둘째는 잘못된 분별을 교정하는 일이다.

이것은 반대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가 분명하게 존재하지 않을 때는 쉽지가않다. 자아가 존재하지 않다는 증거는 쉽게 제시하지 못한 경우가 많고 그 반대증거를 제시하여도 이것을 납득하지 않으면 폐기처분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인지치료와 매우 흡사한 전략이다. 부정적인 감정은 바로 왜곡된 인지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감정을 바꾸려하지 말고 부정적인 사유방식을 바꾼다면 감정적인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믿는다.

 

셋째는 존재를 존재하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이다.

이 일은 먼저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힘, 곧 명상의 훈련이 전제가 된다. 외부의 사물은 쉽게 수용되지만, 자신의 내적인 심리현상을 그대로 수용하는 일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과 우울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이것은 바로 명상수행의 힘에 의한 지켜보기의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

 

 

 

 

 

■ 죄 (, sin)를 보는 시각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죄는 본질상 어떤 사람이 진정한 자기표현을 이루어 자신과 우주의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는 데 실패하는 것을 가리키며, 주로 무지 때문에 일어난다고 보았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죄는 하느님의 뜻을 고의적이고도 의도적으로 범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죄에 대한 개념은 개인이 외적인 행위의 표준을 따라 살아가는 데 실패하거나, 타부(금기), , 도덕, 관례를 위반하는 것과 동일시 되기도 하며,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는 죄를 하느님의 뜻에 대한 고의적인 침해로 보며, 인간의 자만, 자기 중심성, 불순종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신학자들은 죄를 자기가 범한 죄(actual sin)와 원죄(original sin)로 구분한다. 자기가 범한 죄는 일상적인 의미의 죄로서, 생각, , 행동으로 범한 악행이다. 원죄는 인간이 날 때부터 죄 많은 종족의 일원임을 깨닫게 하는 도덕적 부패상태를 가리킨다.

 

범죄(犯罪, crime)는 죄를 범하는 행위나 범한 죄이다. 형법상 범죄는, 범죄의 구성요건(구체적 사실이)에 해당되고, 위법이거나 책임있는 행위이어야 한다. 3가지의 요건 중 하나가 부족할 경우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국어사전)

. 종교적 견지에서 생각되는 도덕적 악.

. 규범이나 윤리에 반하는 행위

. 양심이나 도리에 벗어난 행위

. 법률에 위반되어 처벌을 면하지 못하는 불법 행위

.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

. 도리에 거슬리어 괴로움의 과보(果報)를 부르는 나쁜 행위.

 

 

(ウィキペディア, Wikipedia)

□ 종교에서의 죄()

 

종교에서의 죄란 주로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 도덕적 규범을 깨는 행위나, 그러한 규범을 거역하는 행위를 범한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도덕적 규약(code of conduct)은 신성한 존재 (예:아브라함 종교에서의 신)에 의해서 규정 된다.

 

죄란, 통상 금지된 행위나 부정한 것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종교에 따라서(특히 크리스트교의 종파) 죄는 특정의 행위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안고 있는 정신 상태도 의미하는 경우가 있다. 말로 하는 부도덕적이거나 수치 또는 유해하거나, 이단으로 간주되는 어떠한 의견이나 말 또는 행위도 “죄가 된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여러 종교에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죄에 관한 개념들이 있다.

. 타자(他者), 삼라 만상 또는 현세나 내세()에서 신으로부터 받게 될 죄에 대한 벌

. 죄가 되려면 그 행위가 의도적이어야 하는 것인지의 여부

. 양심이 죄를 범하고 있다는 인식을 재촉하는 죄악감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

. 죄의 경중을 가리는 체계

. 죄에 대한 참회(후회와 더 이상 다시 범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현)

. 과거에 범한 행위에의 속죄

. 주로 신격을 가진 존재자 등의 중개자를 통해 죄에 대한 용서(Atonement)의 가능성

 

. 어원

영어에서의 Sin (여기서는 종교에서의 죄)은 고대 영어의 Synn에서 유래하며, 빨라야 9 세기경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같은 어원은 고대 노르웨이어의 Synd , 독일어의 Sunde , 기타 게르만 언어에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게르만 원래 언어의 sun(d) jo (직역: 진실하다)가 어원이라고 추정된다.

 

 

 

불교에서의 죄()

 

불교에서는 업()이나 행위로서 알려진 “인과(因果)의 도리(道理)”가 있을뿐, 타 종교와 같은 죄에 대한 개념은 없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선행이든 악행이든 행위의 의지 그 자체가 업()의 원인이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 누구든지 머릿속에 있는 대부분의 사상은 네가티브인 것 일 수 있다는 견해다.

 

()의 결과인 과(, Vipaka, 과보심(果報心, 위빠까찌따, vipaka-citta))는 부족한 생활이나 곤란, 파괴와 같은 어떤 불화(不和)한 생명현상이나, 또는 건강하고 안락한 생활과 같은 조화(調和)로운 생명현상을 낳을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좋은 행동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행동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믿고, 업과 과는 자신의 행위와 그 결과라고 본다.

 

불교도의 원칙적 윤리 규범인 오계(五戒)는 석가를 따르는 신도들이 지켜 나아가야 하는 석가의 가르침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로서 팔정도(八正道)와 연결되어 있다.

 

. 五戒: 不殺生 不偸 不邪淫 不妄語 不

불살생(不殺生)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

불투도(不偸盜)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 것

불사음(不邪淫) 정당하지 않은 성관계를 갖지 말 것

불망어(不妄語) 거짓말을 하지 말 것

불음주(不飮酒) 술을 마시지 말 것

 

. 八正道; 正見 正思惟 正語 正業正命 正精進 生念 正定

깨달음을 얻기 위해 취해야 할 8가지 바른 자세

정견 (正見) 바르게 보기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정업 (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정명 (正命) 바르게 생명을 유지하기

정근, 정정진 (正勤, 正精進) 바르게 정진하기

정념 (正念)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생각하기

정정 (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이러한 규범이 궁극적으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죽음의 반복이 되는 사이클인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길로 이끈다고 여긴다. 그 후 열반(涅槃)에 이른다는 것이다.

 

. 오역죄 (五逆罪 pañcānantarya, five rebellious acts, = 오역중죄(五逆重罪))

다섯 가지의 무거운 죄.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을 살해하고, 아라한을 살해하고, 불신(佛身)에서 피가 나오게 하고, 승단(僧團)의 화합을 깨뜨리는 경우 (殺母, 殺父, 殺阿羅漢, 出仏身血, 破和合僧)

 

살부(殺父)와 살모(殺母)의 경우는 은전(恩田)에 배반한 경우이며,

나머지 세 경우는 복전(福田)에 배반한 경우임

 

. 오악 (五悪)

살생(殺生)·투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음주(飮酒)

 

 

 

유대교에서의 죄

 

유대교에서는 신성한 계율을 깨는 것을 죄로 간주하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행위 그 자체가 죄라고 가르치고 있고, 죄가 상태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악행을 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나게 된 것은 아니지만, 예전부터 그 경향성은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창세기). 인간은 그 경향성을 기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악을 물리치고 선을 선택했다고 하고 있다 (= 양심). 유대교는 “죄”라고 하는 말에 유대법을 거역한다고 하는 의미를 담고 있어, 반드시 도덕 개념의 혼란이나 일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교 사전에 의하면 “사람은 자유로운 의지를 내려 주신 이상,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된다. 그렇지만, 선천적으로 사람은 의지 박약하며 정신의 경향성은 악에 기울고 있다. “이전부터 인간의 마음은 악성이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신은 자비를 베풀어 인간들에게 참회나 용서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모든 인간은 인생의 여러가지의 갈림길에 서게 되어 있으므로 죄를 범할 수도 있기에, 신은 자비심을 가지고 정의를 가리고 있다는 믿음이다.

 

Hebrew Bible에 따르면, 유대교에는 3 종류의 죄가 있다고 설명한다. 죄를 범한 사람은, 3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의도적으로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가장 죄가 무겁고, 둘째는 잘못하여 죄를 범한 사람으로서, 범한 죄에 책임은 있지만, 첫째를 범한 사람에 비해 가벼운 죄라고 여기며, 세째로는 유대교가 아닌 사람이나, 비유대교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유대법의 존재 의식이 없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이 세번째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죄로서 고려할 수 없다고 여긴다.

 

   . 베샤/메렛드(? ペシャ/メレッド) - 의도적으로 범해진 죄. 신중하게 신을 모독하기 위해서 범해진

행위. 반란, 위반, 부정 등을 의미하는 말에 유래한다.

. 아부옹(? アヴォン) - 성욕이나 제어 불능인 감정에 의해서 범해진 죄. 의식적으로 범해지지만,

신을 모독하기 위해서 범해진 것은 아닌 것. 사악한 잘못, 비도덕적, 해악 등의 윤리적인 악을

의미하는 말로부터 유래한다.

. 치이트(cheat ? チェイト) - 의도가 없는 죄, 범죄, 혹은 과오. 실패, 일탈, 범죄, 과실등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Strong's Concordance” 용어사전에서)

 

유대교에서는 인간은 불완전하며, 여러 차례 죄를 범했던 적이 있다고 여긴다. 그렇지만 몇몇의 죄는(アヴォン, チェイト)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한두번 범한 극한 죄만으로도 일반적인 지옥의 개념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성서나 랍비는 협의의 신은 자비를 가지고 정의를 가름하는 창조자이지만, 탈 무드에 볼 수 있는 “라비.탐”의 관점에 따르면 신의 자비에는 13 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 신은 인간이 죄를 범할 수도 있음을 알기에,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 자비롭다.

. 신은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도, 죄를 범한 사람에 대해 자비롭다.

. 신은 인간이 기대고자 하는 의지가 없더라도 자비로운 힘을 발휘한다.

. 신은 배려가 깊으며, 죄악감이라고 하는 벌을 완화시킨다.

 

   . 신은 자비나 은혜에 적합하지 않더라도 온정을 베푼다.

. 신은 노하지 않으며, 느긋한 성미이다.

. 신은 친절한 마음이 흘러넘친다.

. 신은 진실의 신이므로 후회를 하는 죄인까지도 받아들인다는 신의 약속에 몸을 맡길 수 있다.

 

   . 신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아브라함, 이사크, 야곱)이 그 모든 조상에게 혜택을 베풀었기에,

     앞으로의 세대에게도 친절함을 보장한다.

. 신은 죄인이 죄를 회개한다면 의도적인 죄까지도 용서한다.

. 신은 죄인이 죄를 회개한다면 그 자신이 품었던 분노도 용서한다.

. 신은 잘못으로 범한 죄는 용서한다.

 

   . 신은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를 사해 준다.

. 유대인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imitatio Dei라고 하는 신과 같은 선()을 실시할 수 있는 정신에

따를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랍비들은 이러한 특징을 고려에 넣어 유대법이나, 현재에도 그

적응 방법들을 결정하고 있다.

 

고전적인 랍비 문학 작품인 “미드라슈의 랍비.나탄에 의한 현인들 (Avot de Rabbi Natan, 영역 The Fathers According to Rabbi Nathan)”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져 있다:

 

"어느날 라반, 요하난, , 작카이가 랍비 요슈아(Rabbi Yehoshua)와 함께, 그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예루살렘 신전까지 걸어서 겨우 도착했다. ”, 우리들의 재앙이여” 라비요슈아는 한탄했다.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세웠던 이 신전이 지금 폐허가 되어 앞에 놓여 있구나!” 라반 요하난은 대답했다. “우리에게는 한가지 더, 함께 소중한 속죄의 근원이 있다. 게미룻트하사디무(? ゲミルットハサディム, 사랑이 있는 친절심)의 실천이다. 나는 희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친절심을 바란다라고 기록될 수 있도록"

 

탈 무드에서는, “랍비, 요하난과 랍비, 에레아잘은 모두, 신전이 건재했을 때의 제단은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식탁이(불쌍한 사람을 손님으로 초대했을 때) 죄를 속죄한다,” 라고 설파하고 있다. (Tractate Berachot, 55 a)

 

 경외의 날들” (로슈.핫샤나나.키프루 등의 성대한 경축일)에는 기도, 참회, 자선 행위 등이 죄를 속죄하는 길이라고 적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우선 먼저(신이나 마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에 대해서 범해진 죄를 스스로 최선을 다해 바로 잡아야만 하며, 최선을 다해도 바로잡아지지 않는 죄는 진정한 의미로 회개할 수 있었던 죄라고는 할 수 없노라고 하고 있다.

 

. 유대교에서의 속죄

 

죄의 속죄에 대해 크리스트교 신자들에게 구약성서라고 알려진 타나하(タナハ)에 전해지고 있다. 속죄 의식은 예루살렘 신전에서 코헨(Kohanim)으로 불리는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고승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 행사에는 노래, 기도, 코바놋트(korbanot)로 불리는 공물이나 동물 같은 속죄제가 식순에 포함되어 있다. 속죄의 날 의식은 레위기 15(Leviticus) 에 규정된 아자젤(Azazel)에 따르며, 들판에 풀어주는 제물 의식은 속죄의 관례 중 한가지다. (레위기, Leviticus 1620-22)

 

여러가지 동물의 제물은 속죄를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도적이 아닌 죄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贖罪祭, sin-offering, 하느님에 대한 죄의 근원에 대해 드리는 예물)와 죄를 사함 받기 위해 배상의 형식으로 드리는 속건제(贖愆祭, guilt offering, 일정액의 손해배상을 반드시 지불해야 함)가 모세5서에 정해져 있다.

 

동물에 의한 제물의 중요함이 모세5서에는 자세하게 기재되지 않지만, 창세기 9장과 레위기 17장에는 피와 생명의 활력이 관련됨을 시사하고 있다. 주목 할 점은 현대 보수파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에서는 죄의 속죄를 위한 속죄제(贖罪祭)와 죄의 배상을 위한 속건제(贖愆祭)뿐이라는 것이다.

 

본디 제물의 목적인 죄에 대한 보상을 지불한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대교도는 제물의 목적을 전혀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대의 초기 유대 사학자들은 이 견해에 아주 반대하면서, 이 속죄제의 목적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들은 후에 일어났다고 논하고 있다.

 

다음의 성서에서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종종 사람들 마음이 그들이 지불하는 제물보다 더 소중하다고 하는 듯한 내용을 설파하고 있다. ;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중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 1522)

 

   .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세아 Hosea 66)

 

   .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이사야 1:11)

 

   .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

이다. (시편 Psalm 51:17, VanPopta)

 

   . 신이 지불하는 희생은 붕괴한 영혼이며, 실의와 회한의 마음이다. (시편 Psalm 5117 )

The sacrifices of God are a broken Spirit; A broken and contrite heart, O God, you will not

despise. (시편 Psalm 51:17)

 

 동물의 제물이 속죄로서 쓰이기는 했지만, 헤브류 성서에 동물에 의한 제물 만이 유일한속죄의 방법이다고는 어디에도 쓰여지지 않았다. 헤브류 성서는 회개와 기원만을 통해서도 신에 끼친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요나서와 에스텔기 에는 유대교도 비유대교도도 신에 후회와 기도로 어떤 제물도 바치지 아니 하고 그들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하고 있다. 더욱 근대에 들어서는 유대교도의 거의가 동물의 제물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위령성일(Rosh Hashana)이나 욤.키푸르(유대교의 속죄일) 등과 같은 큰 축제나 이러한 축일 사이의 10일 간의 기간 동안은 범한 죄를 회개하는 특별한 기원이나 성가 등에 기초를 두고 있는 편이다. 유대교도 중에는 고대부터의 제물 방법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회개를 위한 제물의 일반적인 방법의 하나로 물속에 빵을 떨어뜨릴 뿐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죄를 흘리는 것으로서 신에 의해서 삶의 기록(Book of Life)에 한번 더 자신의 이름을 남겨 둘 수 있도록 한다는 기원을 의미한다. 이것은 특히 가장 성스러운 축일로 되어 있는 욤.키푸르에 중요시 되고 있다.

 

회개하는 것 자체가 속죄하는 방법의 하나이기도 하다. (에제키엘 Ezekiel, 33:11,33:19, 에레미아 36:3, ). 헤브리아어로 회개를 테슈바(teshuvah)라고 하는데 직역하면 ”(신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예언자 호세아(14:3)는 “믿고, 신의 근본으로 돌아오세요.”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교는 개개인과 신과의 관계는 그 개인 각각을 신의 근본으로 언제라도 향할 수 있노라고 설파하고 있다. 마라치(Malachi 3:7)에는 “나의 품으로 돌아오너라, 그리하여 나도 너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 에제키엘(18:27)도 “기괴한 무리가 그대를 범하고 있는 기괴의 발을 씻어내어 정당하게 될 때에 그대와 그대의 영혼을 소생하게 하리라.”라고 말하고 있다. , 다니엘서(9:18) 에는 신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당함을 가지고가 아니라, 당신의 여유로운 자비에 의해서, 당신 앞에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라고 매우 배려 넘친 너그러움으로 말하고 있다.

 

단지, 근대 유대교의 죄나 속죄에 대한 견해란 이들 헤브류 성서에만 쓰여져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유대 구전법(oral law)을 통해서 보는 성서의 법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  The Major Sins, by Allah in the Quran

                  (From; Al-Kaba'r)

 

 

The major sins are those acts which have been forbidden by Allah in the Quran and by His Messenger (SAW) in the Sunnah (practise of the Prophet), and which have been made clear by the actions of of the first righteous generation of Muslims, the Companions of the Prophet (SAW).

Allah Most High says in His Glorious Book:

 

If you avoid the major (part) of what you have been forbidden (to do), We will cancel out for you your (other) evil deeds and will admit you (to Paradise) with a noble entry. (al-Nisa 4:31)

Thus by this verse, Allah Most High has guaranteed the Garden of Paradise to those who avoid the major sins. And Allah Most High also says:

Those who avoid the greatest of sins and indecencies, and forgive when they are angry (al-Shra 42:37) Those who avoid the greatest sins and indecencies, except for oversights, (will find that) surely your Lord is ample in forgiveness. (Al-Najm 53:32)

The Messenger of Allah (SAW) said: "The five [daily] prayers, Friday to Friday, and Ramadan to Ramadan make atonement for what has happenned since the previous one when major sins have been avoided." It is therefore very important to determine exactly what the greatest vices, technically called "the major sins" (Kaba'ir), are, in order that Muslims should avoid them.

There is some difference of opinion among scholars in this regard. Some say these major sins are seven, and in support of their position they quote the tradition: "Avoid the seven noxious things"- and after having said this, the propeht (SAW) mentioned them: "associating anything with Allah; magic; killing one whom Allah has declared inviolate without a just case, consuming the property of an orphan, devouring usury, turning back when the army advances, and slandering chaste women who are believers but indiscreet." (Bukhari and Muslim)

 

 

'Abdullah ibn 'Abbas said: "Seventy is closer to their number than seven," and indeed that is correct. The above tradition does not limit the major sins to those mentioned in it. Rather, it points to the type of sins which fall into the category of "major." These include those crimes which call for a prescribed punishment (HADD; plural, HUDUD), such as theft, fornication or adultery (ZINA), and murder; those prohibited acts for which a warning of a severe punishment in the Next is given in the Qur'an or the tradition; and also those deeds which are cursed by our Prophet (SAW). These are all major sins.

 

Of course, there is a gradation among them, since some are more serious than others. We see that the Prophet (SAW) has included SHIRK (associating someone or something with Allah) among them, and from the text of the Qur'an we know that a person who commits SHIRK will not his sin be forgiven and will remain in Hell forever.

 

Allah Most High says: Surely, Allah does not forgive associating anything with Him, and He forgives whatever is other than that to whomever He wills. (al-Nisa 4:48 and 116)

 

 

01. Associating anything with Allah

02. Murder

03. Practising magic

04. Not Praying

05. Not paying Zakat

06. Not fasting on a Day of Ramadan without excuse

07. Not performing Hajj, while being able to do so

08. Disrespect to parents

09. Abandoning relatives

10. Fornication and Adultery

11. Homosexuality(sodomy)

12. Interest(Riba)

13. Wrongfully consuming the property of an orphan

14. Lying about Allah and His Messenger

15. Running away from the battlefield

16. A leader's deceiving his people and being unjust to them

17. Pride and arrogance

18. Bearing false witness

19. Drinking Khamr (wine)

20. Gambling

21. Slandering chaste women

22. Stealing from the spoils of war

23. Stealing

24. Highway Robbery

25. Taking false oath

26. Oppression

27. Illegal gain

28. Consuming wealth acquired unlawfully

29. Committing suicide

30. Frequent lying

31. Judging unjustly

32. Giving and Accepting bribes

33. Woman's imitating man and man's imitating woman

34. Being cuckold

35. Marrying a divorced woman in order to make her lawful for the husband

36. Not protecting oneself from urine

37. Showing-off

38. Learning knowledge of the religion for the sake of this world and concealing that knowledge

39. Bertrayal of trust

40. Recounting favours

41. Denying Allah's Decree

42. Listening (to) people's private conversations

43. Carrying tales

44. Cursing

45. Breaking contracts

46. Believing in fortune-tellers and astrologers

47. A woman's bad conduct towards her husband

48. Making statues and pictures

49. Lamenting, wailing, tearing the clothing, and doing other things of this sort when an affliction befalls

50. Treating others unjustly

51. Overbearing conduct toward the wife, the servant, the weak, and animals

52. Offending one's neighbour

53. Offending and abusing Muslims

54. Offending people and having an arrogant attitude toward them

55. Trailing one's garment in pride

56. Men's wearing silk and gold

57. A slave's running away from his master

58. Slaughtering an animal which has been dedicated to anyone other than Allah

59. To knowingly ascribe one's paternity to a father other than one's own

60. Arguing and disputing violently

61. Witholding excess water

62. Giving short weight or measure

63. Feeling secure from Allah's Plan

64. Offending Allah's righteous friends

65. Not praying in congregation but praying alone without an excuse

66. Persistently missing Friday Prayers without any excuse

67. Unsurping the rights of the heir through bequests

68. Deceiving and plotting evil

69. Spying for the enemy of the Muslims

70. Cursing or insulting any of the Companiions of Allah's Messenger

 

 

 

 

Sin in the Catholic Encyclopedia

http://www.newadvent.org/cathen/14004b.htm

 

 

The subject is treated under these heads:

. Nature of sin

. Division

. Mortal sin

. Venial sin

. Permission and remedies

. The sense of sin

. Nature of sin

 

 

Since sin is a moral evil, it is necessary in the first place to determine what is meant by evil, and in particular by moral evil. Evil is defined by St. Thomas (De malo, 2:2) as a privation of form or order or due measure. In the physical order a thing is good in proportion as it possesses being. God alone is essentially being, and He alone is essentially and perfectly good. Everything else possesses but a limited being, and, in so far as it possesses being, it is good. When it has its due proportion of form and order and measure it is, in its own order and degree, good. Evil implies a deficiency in perfection, hence it cannot exist in God who is essentially and by nature good; it is found only in finite beings which, because of their origin from nothing, are subject to the privation of form or order or measure due them, and, through the opposition they encounter, are liable to an increase or decrease of the perfection they have: "for evil, in a large sense, may be described as the sum of opposition, which experience shows to exist in the universe, to the desires and needs of individuals; whence arises, among human beings at least, the suffering in which life abou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perfection which it limits, evil is metaphysical, physical, or moral. Metaphysical evil is not evil properly so called; it is but the negation of a greater good, or the limitation of finite beings by other finite beings. Physical evil deprives the subject affected by it of some natural good, and is adverse to the well-being of the subject, as pain and suffering. Moral evil is found only in intelligent beings; it deprives them of some moral good. Here we have to deal with moral evil only. This may be defined as a privation of conformity to right reason and to the law of God. Since the morality of a human act consists in its agreement or non-agreement with right reason and the eternal law, an act is good or evil in the moral order according as it involves this agreement or non-agreement. When the intelligent creature, knowing God and His law, deliberately refuses to obey, moral evil results.

 

 

Sin is nothing else than a morally bad act (St. Thomas, "De malo", 7:3), an act not in accord with reason informed by the Divine law. God has endowed us with reason and free-will, and a sense of responsibility; He has made us subject to His law, which is known to us by the dictates of conscience, and our acts must conform with these dictates, otherwise we sin (Romans 14:23). In every sinful act two things must be considered, the substance of the act and the want of rectitude or conformity (St. Thomas, I-II:72:1). The act is something positive. The sinner intends here and now to act in some determined matter, inordinately electing that particular good in defiance of God's law and the dictates of right reason. The deformity is not directly intended, nor is it involved in the act so far as this is physical, but in the act as coming from the will which has power over its acts and is capable of choosing this or that particular good contained within the scope of its adequate object, i.e. universal good (St. Thomas, "De malo", Q. 3, a. 2, ad 2um). God, the first cause of all reality, is the cause of the physical act as such, the free-will of the deformity (St. Thomas I-II:89:2; "De malo", 3:2). The evil act adequately considered has for its cause the free-will defectively electing some mutable good in place of the eternal good, God, and thus deviating from its true last end.

 

 

In every sin a privation of due order or conformity to the moral law is found, but sin is not a pure, or entire privation of all moral good (St. Thomas, "De malo", 2:9; I-II:73:2). There is a twofold privation; one entire which leaves nothing of its opposite, as for instance, darkness which leaves no light; another, not entire, which leaves something of the good to which it is opposed, as for instance, disease which does not entirely destroy the even balance of the bodily functions necessary for health. A pure or entire privation of good could occur in a moral act only on the supposition that the will could incline to evil as such for an object. This is impossible because evil as such is not contained within the scope of the adequate object of the will, which is good. The sinner's intention terminates at some object in which there is a participation of God's goodness, and this object is directly intended by him. The privation of due order, or the deformity, is not directly intended, but is accepted in as much as the sinner's desire tends to an object in which this want of conformity is involved, so that sin is not a pure privation, but a human act deprived of its due rectitude. From the defect arises the evil of the act, from the fact that it is voluntary, its imputability.

 

 

. Division of sin

 

Material and formal sin

This distinction is based upon the difference between the objective elements (object itself, circumstances) and the subjective (advertence to the sinfulness of the act). An action which, as a matter of fact, is contrary to the Divine law but is not known to be such by the agent constitutes a material sin; whereas formal sin is committed when the agent freely transgresses the law as shown him by his conscience, whether such law really exists or is only thought to exist by him who acts. Thus, a person who takes the property of another while believing it to be his own commits a material sin; but the sin would be formal if he took the property in the belief that it belonged to another, whether his belief were correct or not.

 

 

. Internal sins

That sin may be committed not only by outward deeds but also by the inner activity of the mind apart from any external manifestation, is plain from the precept of the Decalogue: "Thou shalt not covet", and from Christ's rebuke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whom he likens to "whited sepulchres... full of all filthiness" (Matthew 23:27). Hence the Council of Trent (Sess. XIV, c. v), in declaring that all mortal sins must be confessed, makes special mention of those that are most secret and that violate only the last two precepts of the Decalogue, adding that they "sometimes more grievously wound the soul and are more dangerous than sins which are openly committed". Three kinds of internal sin are usually distinguished:

 

 

delectatio morosa, i.e. the pleasure taken in a sinful thought or imagination even without desiring it;

gaudium, i.e. dwelling with complacency on sins already committed; and

desiderium, i.e. the desire for what is sinful.

 

. The capital sins or vices

 

According to St. Thomas (II-II:153:4) "a capital vice is that which has an exceedingly desirable end so that in his desire for it a man goes on to the commission of many sins all of which are said to originate in that vice as their chief source". It is not then the gravity of the vice in itself that makes it capital but rather the fact that it gives rise to many other sins.

 

 

. Mortal sin

 

Mortal sin is defined by St. Augustine (Reply to Faustus XXII.27) as "Dictum vel factum vel concupitum contra legem æternam", i.e. something said, done or desired contrary to the eternal law, or a thought, word, or deed contrary to the eternal law. This is a definition of sin as it is a voluntary act. As it is a defect or privation it may be defined as an aversion from God, our true last end, by reason of the preference given to some mutable good. The definition of St. Augustine is accepted generally by theologians and is primarily a definition of actual mortal sin. It explains well the material and formal elements of sin. The words "dictum vel factum vel concupitum" denote the material element of sin, a human act: "contra legem æternam", the formal element. The act is bad because it transgresses the Divine law. St. Ambrose (De paradiso, viii) defines sin as a "prevarication of the Divine law". The definition of St. Augustine strictly considered, i.e. as sin averts us from our true ultimate end, does not comprehend venial sin, but in as much as venial sin is in a manner contrary to the Divine law, although not averting us from our last end, it may be said to be included in the definition as it stands. While primarily a definition of sins of commission, sins of omission may be included in the definition because they presuppose some positive act (St. Thomas, I-II:71:5) and negation and affirmation are reduced to the same genus. Sins that violate the human or the natural law are also included, for what is contrary to the human or natural law is also contrary to the Divine law, in as much as every just human law is derived from the Divine law, and is not just unless it is in conformity with the Divine law.

 

 

. Biblical description of sin

 

In the Old Testament sin is set forth as an act of disobedience (Genesis 2:16-17; 3:11; Isaiah 1:2-4; Jeremiah 2:32); as an insult to God (Numbers 27:14); as something detested and punished by God (Genesis 3:14-19; Genesis 4:9-16); as injurious to the sinner (Tobit 12:10); to be expiated by penance (Psalm 1:19). In the New Testament it is clearly taught in St. Paul that sin is a transgression of the law (Romans 2:23; 5:12-20); a servitude from which we are liberated by grace (Romans 6:16-18); a disobedience (Hebrews 2:2) punished by God (Hebrews 10:26-31). St. John describes sin as an offence to God, a disorder of the will (John 12:43), an iniquity (1 John 3:4-10). Christ in many of His utterances teaches the nature and extent of sin. He came to promulgate a new law more perfect than the old, which would extend to the ordering not only of external but also of internal acts to a degree unknown before, and, in His Sermon on the Mount, He condemns as sinful many acts which were judged honest and righteous by the doctors and teachers of the Old Law. He denounces in a special manner hypocrisy and scandal, infidelity and the sin against the Holy Ghost. In particular He teaches that sins come from the heart (Matthew 15:19-20).

 

. Philosophical sin

Those who would construct a moral system independent of God and His law distinguish between theological and philosophical sin. Philosophical sin is a morally bad act which violates the natural order of reason, not the Divine law. Theological sin is a transgression of the eternal law. Those who are of atheistic tendencies and contend for this distinction, either deny the existence of God or maintain that He exercises no providence in regard to human acts. This position is destructive of sin in the theological sense, as God and His law, reward and punishment, are done away with. Those who admit the existence of God, His law, human liberty and responsibility, and still contend for a distinction between philosophical and theological sin, maintain that in the present order of God's providence there are morally bad acts, which, while violating the order of reason, are not offensive to God, and they base their contention on this that the sinner can be ignorant of the existence of God, or not actually think of Him and His law when he acts. Without the knowledge of God and consideration of Him, it is impossible to offend Him. This doctrine was censured as scandalous, temerarious, and erroneous by Alexander VIII (24 Aug., 1690) in his condemnation of the following proposition: "Philosophical or moral sin is a human act not in agreement with rational nature and right reason, theological and mortal sin is a free transgression of the Divine law. However grievous it may be, philosophical sin in one who is either ignorant of God or does not actually think of God, is indeed a grievous sin, but not an offense to God, nor a mortal sin dissolving friendship with God, nor worthy of eternal punishment" (Denzinger-Bannwart, 1290).

 

 

. Conditions of mortal sin: knowledge, free will, grave matter

Contrary to the teaching of Baius (prop. 46, Denzinger-Bannwart, 1046) and the Reformers, a sin must be a voluntary act. Those actions alone are properly called human or moral actions which proceed from the human will deliberately acting with knowledge of the end for which it acts. Man differs from all irrational creatures in this precisely that he is master of his actions by virtue of his reason and free will (I-II:1:1). Since sin is a human act wanting in due rectitude, it must have, in so far as it is a human act, the essential constituents of a human act. The intellect must perceive and judge of the morality of the act, and the will must freely elect. For a deliberate mortal sin there must be full advertence on the part of the intellect and full consent on the part of the will in a grave matter. An in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law even in a grave matter is not a formal but a material sin. The gravity of the matter is judged from the teaching of Scripture, the definitions of councils and popes, and also from reason. Those sins are judged to be mortal which contain in themselves some grave disorder in regard to God, our neighbour, ourselves, or society. Some sins admit of no lightness of matter, as for example, blasphemy, hatred of God; they are always mortal (ex toto genere suo), unless rendered venial by want of full advertence on the part of the intellect or full consent on the part of the will. Other sins admit lightness of matter: they are grave sins (ex genere suo) in as much as their matter in itself is sufficient to constitute a grave sin without the addition of any other matter, but is of such a nature that in a given case, owing to its smallness, the sin may be venial, e.g. theft.

 

 

. Malice

The true malice of mortal sin consists in a conscious and voluntary transgression of the eternal law, and implies a contempt of the Divine will, a complete turning away from God, our true last end, and a preferring of some created thing to which we subject ourselves. It is an offence offered to God, and an injury done Him; not that it effects any change in God, who is immutable by nature, but that the sinner by his act deprives God of the reverence and honor due Him: it is not any lack of malice on the sinner's part, but God's immutability that prevents Him from suffering. As an offence offered to God mortal sin is in a way infinite in its malice, since it is directed against an infinite being, and the gravity of the offence is measured by the dignity of the one offended (St. Thomas, III:1:2, ad 2um). As an act sin is finite, the will of man not being capable of infinite malice. Sin is an offence against Christ Who has redeemed man (Philippians 3:18); against the Holy Ghost Who sanctifies us (Hebrews 10:29), an injury to man himself, causing the spiritual death of the soul, and making man the servant of the devil. The first and primary malice of sin is derived from the object to which the will inordinately tends, and from the object considered morally, not physically. The end for which the sinner acts and the circumstances which surround the act are also determining factors of its morality. An act which, objectively considered, is morally indifferent, may be rendered good or evil by circumstances, or by the intention of the sinner. An act that is good objectively may be rendered bad, or a new species of good or evil may be added, or a new degree. Circumstances can change the character of a sin to such a degree that it becomes specifically different from what it is objectively considered; or they may merely aggravate the sin while not changing its specific character; or they may lessen its gravity. That they may exercise this determining influence two things are necessary: they must contain in themselves some good or evil, and must be apprehended, at least confusedly, in their moral aspect. The external act, in so far as it is a mere execution of a voluntary efficacious internal act, does not, according to the common Thomistic opinion, add any essential goodness or malice to the internal sin.

 

 

. Gravity

While every mortal sin averts us from our true last end, all mortal sins are not equally grave, as is clear from Scripture (John 19:11; Matthew 11:22; Luke 6), and also from reason. Sins are specifically distinguished by their objects, which do not all equally avert man from his last end. Then again, since sin is not a pure privation, but a mixed one, all sins do not equally destroy the order of reason. Spiritual sins, other things being equal, are graver than carnal sins. (St. Thomas, "De malo", Q. ii, a. 9; I-II.73.5).

 

 

 

 

 

■ 죄와 관련된 명언

 

 

. 나를 믿는 연소자(年少者)들 가운데 한 소자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 깊숙히 잠기는 편이 낫다. - 성서

 

. 남의 악행과 게으름보다 자기가 저질러 놓은 죄악과 게으름을 보라. - 성전

. 내가 지은 죄는 바닷가에 널린 모래알보다 많다. - 이시도라(스페인 대주교)

. 뇌물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천하에 가득하건만, 죄는 박복한 사람에게 얽매여 든다. - 명심보감

 

. 누구에게나 신의 속성이 들어 있으며 어느 누구든 신의 속성을 파괴시킬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살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톨스토이

. 늑대는 한 밤중에 양을 잡아먹지만,

  낮에 보면 그가 범인임을 보여주는 핏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 칼릴 지브란

 

. 면죄부로써 죄를 면할 수는 없다. 죄를 면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뿐이다. - 루터

. 모든 범죄 행위는, 그 속에 천벌( 天罰 )과 사라지지 않는 고통의 씨를 지닌다. - 롱펠로

. 모든 죄악의 기본은 조바심과 게으름이다. - 카프카

 

 . 범죄자의 죄지은 동기를 추구(追求)하여 죄를 정한다. - 한서

. 빈곤이 범죄의 어머니라면 지각부족( 知覺不足 )은 범죄의 아버지다. - 라 브뤼예르

 

. 살인 행위는 어떤 경우든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살인이야말로 모든 종교적 가르침이나 인간의 양심에

  드러나듯이 신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못된 범죄입니다. - 톨스토이

 

. 서슴없이 죄를 범하는 사람이야말로 싱긋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범할 수 있는 사람이다. - 오그덴 나쉬

. 악행에 대한 가장 큰 형벌은 범인을 더 나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이다. - 플라톤

. 시뻘겋게 단 쇳덩이를 모르고 쥔 사람이 알고 쥔 사람보다 더 많이 데듯이.

   모르고 나쁜 짓을 한 자가 알고 한 자보다 그 죄가 더 크다. - 미란타왕문경

 

 . 왕이라면 누구나 유죄다. 그리고 하나의 인간이 왕이 되고자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그는 이미 죽을 죄를 범한 것이다. - 생 쥐스트

 

. 욕망의 결핍과 우연한 기회의 부족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았던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 조셉 루

. 인간은 개인의 죄는 용서하지만, 개인이 단체의 죄악에 가담하는 건 용서치 않는다. - 마르셀 프루스트

. 자기가 지은 죄는 스스로 거두게 마련이며,

   금강석이 보석을 부수듯 자기가 지은 죄는 자기가 부순다. - 법구경

. 자기 자신이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남의 죄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말라. - 바비도프

 

. 종교적 윤리적 의미에 있어서의 '죄과', 삶의 전체적이고 지속적인 흐름에서 무한히 다양하면서도 무한히 통일적인 흐름으로부터 하나의 요소가 잘려 나가 응고된다는 말이다. 삶의 내부에 있어서 아주 다른 성격을 지닌 곳의 여러 요소가 이같이 삶을 떠남으로써 죄과와 죄가 생겨날 때, 그것은 삶의 외부에 있는 것에 대한 즉 신에 대한 죄로서 이해되는 셈이 되며, 속죄도 삶의 외부에서만 생기게 된다. 덕과 공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서 삶을 가치와 관계없는 선악의 저편에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삶으로부터 가치의 본질을 보면 그 결정체에 고착되어 있는 경우와는 전혀 다른 것이 될 것이다. - 게오르크 짐멜

 

. 죄과(罪過)에 빠진 중생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성불치 못하다면 나 또한 성불을 원치 않으리라. - 불경

. 죄는 처음에는 거미집의 줄처럼 가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배를 잇는 밧줄처럼 강하게 된다. - 탈무드

. 죄는 처음에는 손님이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손님이 그 주인이 되어 버린다. - 탈무드

. 죄는 처음에는 여자처럼 약하나, 내버려두면 남자처럼 강하게 된다. - 탈무드

. 죄는 취소될 수 없다. 용서될 뿐이다. - 스트라빈스키

.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 탈무드

. 죄를 저지르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의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 - 톨스토이

 

. 죄악 가운데 가장 못된 죄악은 기쁘게 축복받고 살아가는 생활, 곧 형제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고 심지어 미워함으로써 삶의 최고 기쁨을 파괴하는 것처럼 나쁜 죄악

  은 없습니다. - 톨스토이

 

. 죄악에는 허다한 도구가 있지만, 그 모든 것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거짓말이다. - 호메로스

. 죄없이 우리는 좋아질 수 없다. 죄야말로 우리 인간의 미덕을 찾게 하는 옳은 길이기 때문이다. - 소로

. 죄에 대한 연구는 자기를 아는 지식으로 시작된다. - 헨리 밀러

 

. 지난 죄를 착한 행실로서 보상하는 자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마치 흐린 날의 밤을 비추어 주는 달과 같다.

                                                                                                                                     - 불교

. 지은 죄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금세 짜낸 젖이 상하지 않듯, 재에 덮인 불씨가 꺼지지 않듯,

  지은 업이 당장엔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늘에 숨어서 그를 따라다닌다. - 법구경

 

. 진실한 죄과는 결코 속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고정된 어떤 순간과 형이상학적인 무시간적 삶의 통일 사이의 도저히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서, 이 관계는 그후의 어떤 순간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죄는 신에 대한 죄라는 말은, 누군가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절망적인 방법이다. 고통에 의한 속죄는 참으로 비교가 안 되는 두 요소를 저울로 재려고 하는 아주 외적이고 기계적인 것이며, 하나의 천박한 자기기만이다. - 게오르크 짐멜

 

. 큰 죄는 단 한번으로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에 범했던 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 라신느

.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벌을 주시기를 원하면, 그로부터 믿음을 빼앗아 가신다. - 발 셈

. 하늘에 죄를 지으면 용서를 빌 곳이 없다. - 공자

. 한마리 곤충을 괴로움으로부터 구하는 것으로서 나는 인간이 생물에 대해서 줄곧 범하고 있는

  죄의 얼마간을 감하려 하는 것이다. - 슈바이처

. 해와 달이 아무리 밝더라도 엎어놓은 항아리의 밑은 비추지 못하고, 칼날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죄없는

  사람은 베지 못하며, 뜻밖의 재앙도 조심하는 집 문안에는 들어오지 못한다. - 강태공

. 형벌은 절름발이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찾아온다. - 조지 허버트

. 죄의식을 갖지 말고 즐길 건 즐겨라. - 앤드류 매튜스

.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된다. 수백만의 사람을 죽이면 정복자가 된다. 모든 인간을 죽이면, 신이 된다.

                         -장 로스탕

. 숨어서 몰래 죄를 짓고 얼굴을 닦는 사람은 어느 곳 어느 것이나 모두 살피고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 동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