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24.소중함

소중함

오갑록 2014. 3. 17. 16:05

중요한 ......

■ 소중함

 

    나에게 소중함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에게는 흔하게 쓰이는 말이지만, 쉽게 생각하고 무심코 넘기는 말이기도 하다. 대부분은 우리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의 감정들을 주제로 한, 목적론적 대상 중에서 한정적인 의미로 그 우선 순위나 중요성을 지칭하는 말로서 소중함을 거론하게 된다.

 

“소중하다” 또는 “아니다” 를 한정하게 되는 인간 감정의 부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거대하다거나, 웅장하다거나, 위대한 것이 있는가 하면, 사소하고 별로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도 많다. 영광, 영생, 건강, 장수, 사랑, 진리, 성공, 승리, 충성, 애국 …… 이처럼, 커보이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삶, 행복, 의식주, 선(善), 미(美) 효(孝), 덕(德)처럼 일상의 생활에서 경험하는, 때로는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항목들까지도 그러한 감정 속에 녹아 있다.

 

소중하다는 것은 목적하는 바의 한정 지워진 대상을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그 목적하는 바를 벗어나는 순간, 그 가치나 중요성은 물처럼 바람처럼 공허하게 된다는 특성을 갖는다.

 

가령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자연이나 의식주의 소중함을 말하기도 하고, 재산, 건강, 학문 따위의 소중함을 말하기도 하며, 사회인으로서의 갖가지 덕목들을 말하기도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는 “삶의 한계”를 벗어나는 순간, 그 소중하다는 것의 의미는 허공으로 떠 버리는 격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중함의 구심점은 항상 나를 향하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 세포로 구성된 장기나 육신이라는 생물학적 의미의 “나”도 있을 터이고, 정신과 감정의 주체로서 “나”를 지칭할 수도 있다. 내가 속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나”를 지칭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가족, 친인척, 벗과 동료, 지역, 나라, 민족 더 나아가서 인간으로도 확대될 수도 있다. 때로는 동물, 생물, 아니면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 사람이라는 동시대인을 지칭할 수 도 있다.

 

영생을 추구하는 종교인 이라면 그보다도 한단계 더 뛰어넘는 목적론적 주제를 거론한다고 이해해야 될 듯하다. 다음 세상에서의 목적론을 이루기 위해서 소중한 것들에 대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종교활동이라고 한정 지워 생각해 볼 수 있다.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대상으로 하는 좀 더 큰 세상에 관한 목적론적 소중한 것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중하다는 것은 흐르는 물처럼 제자리에 머물 줄을 모른다.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사회적으로도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어 가면서, 또한 사회적인 측면에서도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소중한 것들도 함께 바뀌며 흘러간다. 삶의 목적이 개인이나 사회의 가치관의 변천에 따라 변화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동물적 본능을 우선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회윤리적 덕목을 그보다 우선하기도 한다. 생명체에서 의식주처럼 선천적인 요인도 있지만, 경험과 인식, 후천적 교육의 산물이 우선순위를 자리 매김 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대를 달리하고, 지역을 달리해도 똑 같은 목적을 위한 소중함은 서로 다르게 된다. 성장, 교육, 빈부, 남녀, 건강, 미추(美醜), 대소,  …… 등등의 서로 다른 환경도 우선순위가 다르게 된다. 물론, 동물 본능에서 주어지는 선천적인 소중함은 인간 누구나, 무슨 동물이나 서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소며 말에게는 한 아름의 진귀한 보석이 마구간 여물보다 소중할 리 없음과도 같은 이치일 것이다. 후세를 담보로 목숨 내걸기를 누가 쉽사리 하겠는가? 다음 세상의 소중함과 이 세상에서의 소중함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인식의 차이가 다를 때, 정신 나간 이, 미친 놈, 이라는 말을 내 뱉기도 한다.

 

그래서, 나와 너의 소중한 것은 항상 다르다. 그리고, 어제 소중했던 것이 오늘이나 내일까지도 소중한 것이 되리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그리도 달콤하고 고소하던 어린 시절의 군것질거리가,

사랑하던 이들, 부모형제, 처자식, 이웃과 벗 들이,

학문과 예술, 지위와 재물, 영광이,

자신의 육신과 정신, 감정, 건강과 수명,

심지어 그 목숨까지도 ……

 

누구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그 때의 소중함이란, 얼마나 변화무쌍했던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느끼게 될 것이다. 머무르지 못하고 항상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소중하다고 여기며 달려 온, 욕심과 집착들이 헛된 것임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육신의 한 쪽이 병들거나, 잘려 나가도, 혈육의 한 편이 불의를 당하여도, 재물의 전부를 털리고서도 ……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을 잃었어도, 우리에게는 이내 또다시 새로운 소중한 것들이 앞에 서성이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물이 흐르듯, 세월이 흐르듯, 인간의 감정도 흐르고, 그 가운데 자리잡은 소중함도 머물 줄 모르고 함께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을 잃은 슬픔 분노 놀람과 같은 좋지 못한 감정들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가면 흘러가게 마련이다. 젖 먹던 어린아이의 이유시기를 자세히 돌아보자. 모유를 끊고, 우유나 이유식이 습관들 때까지 몇일 동안은 대다수 아이와 엄마 간에는 심각한 실랑이가 벌어진다. 아기로서는 모유라는 소중한 먹거리를 찾아 떼 쓰며 울고 몸부림치곤 하며, 어미는 더 주지 못해 아쉬워 하고, 이를 안타까워 한다. 소중하지만 좀 더 소중한 것을 찾아주기 위하여 그 순간의 아쉬움을 이겨내야만 한다. 모유의 소중함이란 유아기 동안만 소중한 것이다. 더 성장하고, 더 건강하기 위하여 때가 되면 멀어지고 헤어져야만 된다. 새로운 소중한 것을 맞이해야 할 준비를 하는 격이 된다.

 

소중함의 본성은 대부분이 이유기 유아의 모유를 비견하면 쉽사리 이해된다. 그 소중함의 명분이 우아하고 거창한 것이던,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순간의 감정들이던, 소중함의 그 본성만큼은 서로 다를 바가 없다. 한정된 목적론의 범주 내에서는 소중하지만, 그 범위를 벗어나 새로이 닥치는 세상이나 새로운 시간의 관점에서는 새로운 것으로 소중한 것이 대체되기 마련이다.

 

대다수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변모하는 소중하던 물건들이 성장과 함께 바뀌는 것과 흡사하다. 모유에서 시작한 먹거리는, 달콤한 사탕이며 과자로, 빵과 간식에서 술과 고기로 발전한다. 장난감에서 필기구며 학용품으로, 옷가지며 운동기구로 발전하고, 다시 차량이니 가구니 더 화려한 집이며 재물로 바뀌기를 거듭한다. 이들 물질과 마찬가지로 여하 한 정신, 감정, 가치관에서의 소중함들도 처지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게 마련이다.

 

 

2014.3.17.(월)

오갑록

 

 

□  우리가 느끼는 소중한 감정들의 주제를 구분하여 본다.

 

. 생명과 건강

 

생명은 유기체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하며, 생리학적으로는 섭식, 물질대사, 배설, 호흡, 이동, 성장, 생식, 외부자극에 대한 반응을 수행하는 계(系)로 정의된다. 생물로서의 특성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개념이 생명이며, 이를 잘 유지하기 위한 모든 계(系)는 생명체로서는 소중할 수 밖에 없고, 생명이 유지되는 몸이나 정신에 아무 탈 없이 튼튼할 때, 우리는 통상 “건강”하다고 지칭한다.

 

건강은 사람이 주위 환경에 계속적으로 잘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신체적·감정적·정신적·사회적 능력의 정도를 말한다. 생명과 건강에 관한 한, 생명의 주체인 자신은 본능적으로 건강의 유지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느끼게 된다. 건강을 잃거나 손상 당할 우려가 될 경우, 머리카락 한 올, 피부 한 점, 장기 한 곳, 어느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곳이 없음을 인식하게 된다.

 

. 명예와 영광

 

세상에 널리 인정 받아 얻은 좋은 평판이나,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 따위를 소중하게 여기기도 하지만, 이는 인간만이 갖는 특성으로, 생명과 건강의 소중함을 느끼는 동물적 본능과는 대조적이다.

 

. 성공과 야망 (꿈)

 

목적하는 바를 이루는 것은 소중하다. 목적의 대상은 가치 있는 삶의 기준 점이라고 할 수 있고, 그 기준은 시대와 사회, 그리고 개개인마다 같을 수는 없으며, 어느 누구의 것이 더 크다거나, 좋다거나 하는 비교의 대상이 되는 것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각자가 갖는 가치 자체로 소중한 것이며, 시대와 지역과 사회와 생명의 주체가 서로 다른 타자가 옳고 그름을 평가 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도 없다.

 

페루 문화인류학자 카를로스 카스타네다 (Carlos Castaneda)의 말과도 상통한다.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며, 너의 마음이 원치 않는다면 그 길을 버리는 것은 너에게나 다른 이에게나 무례한 일이 아니다. …… 오직 너 자신에게만 한 가지를 물어보아라. 이 길이 마음을 담았느냐? 그렇다면 그 길은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길은 소용 없는 길이다.”

 

. 의식주 (먹고 마시며, 잠자며 쉬고, 따듯하게 입는 것)

 

의식주는 생명 유지에 기본이 되는 소중한 것이지만, 인간에게는 헛된 욕심으로 과장된 분수에 넘는 과도한 것들을 소중하다고 여긴다는 그릇된 감정이 있다. 이즈음 우리가 일상에서 생각하는 의식주의 기본은 갈증에 허덕이며 찾는 물 한 모금과, 배고픔을 달래려는 빵 한 조각과, 한 겨울 추위를 피할 공간의 소중함이나 절실함은 아니다.

 

과음 과식으로 인한 당뇨병은 식후 혈당강하제를 찾게 했고, 수돗물을 믿지 못한 대도시 시민들로 정수기 기술이 발달하고, 루르드, 트라코테, 노르데나우, 나다나 샘물의 유명세며, 블루마린, 에비앙, 이로수, 피지워터 따위의 생수시장 상품, 그리고 전해환원수 해양심층수 따위의 개발이 활발하다. 우리네 주거공간도 안락한 쉼터를 넘어 점점 더 눈부시도록 휘황찬란하여 졌고, 복장도 패션이라는 미명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로 삶에서 소중한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여하튼, 자녀 교육 프로그램 가운데 “굶주림 체험학습”이 유행 되는 좋은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 돈, 재물, 재산

 

상품 교환의 매개물로서, 가치의 척도, 지불의 방편, 축적의 목적물로 삼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 돈이며, 교환 가치를 지니는, 자기 소유의 모든 돈과 사물이 재물이고 재산이다. 이러한 재산의 목적론은 몇 단계만 거치면 인간에게는 결국 의식주로 귀착된다. 그렇기에 소중하겠지만, 이 역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응될 듯도 하지만, 대다수 인간은 부의 축적을 위한 욕심에 한이 없다.

 

. 명분과 덕목 (도덕, 윤리)

 

신분이나 이름에 걸맞게 지켜야 할 도리가 명분이다. 타고난 천성으로 간주하여 추구하고 실천해야 할 가치 항목을 덕목으로 보고, 도덕과 윤리에 부합해야 인간답기에 소중한 것이라는 시대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덕목과 현대인이 생각하는 그 가치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다.  

 

. 자유와 평화

 

자유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평화는 전쟁이나 갈등이 없이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몸과 정신이 구속 받거나 얽매이지 않음은 때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평온하고 평화로운 상태도 몸과 정신이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시켜 주기에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이 된다.

 

(자유)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위를 의도적인 행위와 비의도적인 행위로 구별했다. "비의도적인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강제로 한 행위와 모르고 한 행위이다. 그에 반해 의도적인 행위는 행위를 움직이는 원리가 행위자 자신 속에 있으며 그 행위의 개별적 상황을 행위자가 완전히 알고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유로운 결단과 지식을 연관짓고 있지만 자유문제를 주로 자유의지의 문제로 한정하여 다루는 경향이 있었다.

 

중세 봉건사회를 지배한 자유개념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유개념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예정되어 있고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신이 자유롭기 때문에 인간의 예정에도 자유가 부여된다고 주장했다.

 

봉건주의에 대항하여 중세적 질서를 청산하려 한 부르주아지는 기계적 결정론의 틀 속에서 자유를 이해했다. 기계적 결정론은 결정론인데도 자유문제를 다룬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유는 객관적 필연성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 사물이 자기 본성의 필연성에 따라 존재하고 움직일 때 그 사물은 자유로우며, 다른 사물에 의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도록 규정될 때 강제된다고 보았다

 

루소는 자유는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지니는 속성이며, 오직 개인에게만 속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자연과 자유의 조화를 확보함으로써 기계적 결정론의 숙명론을 타파하려 했다. 그러나 칸트는 자연과 자유를 같은 차원의 세계에서 조화시킨 것이 아니라 두 세계론에 근거해서 각기 다른 세계의 원리로 보았다. 즉 세계를 자연 세계인 현상계와 물자체의 세계인 예지계로 나누고, 인간을 이 두 세계에 속하는 시민으로 보았다. 자연 세계인 현상계는 예외 없이 인과성이 지배하며, 따라서 자연 존재인 인간의 행위는 인과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성적·도덕적 존재이기도 한 인간은 초감성적인 예지계에도 속하며 따라서 도덕법칙에서 구체화되는 자유의 주체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유를 논할 때 자연과 사회에 존재하는 객관적 필연, 즉 객관적 합법칙성에 대한 인간의 관계가 문제된다. 여기서는 자유와 필연의 관계가 변증법적인 관계로 파악되며 필연은 언제나 자유의 전제가 된다. 필연은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필연을 인식하지 못하는 한, 필연은 인간에 대해 맹목적으로 관철된다. 우리가 객관적으로 필연적인 것을 바라고 그에 맞추어 행동할 때, 필연은 맹목적으로 작용하기를 멈추고 자유 속에서 지양되어 보존된다.  (자유; 브리태니커 중에서)

 

(평화)

서양 그리스도교 문명권에서는 평화가 정의의 실현(평화를 위한 전쟁), 전쟁이 없는 상태로서의 질서유지라는 정치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띠었고, 힌두교의 영향권에 있던 인도에서는 마음의 편안함을 목표로 하는 내향적·비정치적인 태도로 평화를 추구했으며, 중국에서는 "권력을 독점하는 자가 없고 평등하며, 재화(財貨)가 공유되고 생활이 보장되며, 각자가 충분히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고 범죄가 없는 사회" (예기 禮記) 라는 대동(大同)에 대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 평화의 개념을 사회정의에서 찾았다.

 

평화는 크게 국가적인 평화와 국제적인 평화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국가적인 평화는 통상 자본주의 민주국가의 정치적 이상인 사회정의의 실현을 통한 국민들의 정치·사회·경제의 안녕과 안정을 꾀하는 것이며, 국제적인 평화는 국가간의 갈등·분쟁·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평화; 브리태니커 중에서)

 

. 예술과 스포츠 (아름다움, 건강, 즐거움)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창조하는 일에 목적을 두고 하는 활동이다. 스포츠는 몸을 단련하거나 건강을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예술활동과 스포츠를 통하여 마음과 느낌을 즐거이 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도 우리들 삶에서 매우 소중하다.

 

. 사랑과 우정 (나, 가족, 벗, 동료, 조국)

 

사랑은 어떤 상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이다. 그 상대로는 이성이나 부모형제 자식 등의 혈족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기 자신이 그 보다 더 큰 대상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대상은 더 커지기도, 좁아지기도 한다. 나라와 민족, 인류애를 말하기도 하고, 햇빛 공기 바람 들풀처럼 대자연 속의 아주 작은 미물까지도 그 대상으로 하기도 한다.

 

때로는 예술과 문화, 신앙과 믿음이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음을 경험하곤 한다.

 

(사랑)

사랑은 문학·도덕·철학·종교 등에서 모두 근본적인 관념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사랑을 둘러싼 사상이 전개되었고 동양에도 인(仁)·자비(慈悲)라는 사상이 있다.

 

공자의 '효도는 인의 근본'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감정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넓혀가는 것이 인도(仁道)이다. 맹자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의 시작이다"라고 말했고 사람을 불쌍히, 가련히 여기는 동정심에서 사랑이 생긴다고 말했다. 묵자는 "하늘 아래 서로 겸애하라"고 말했고 친족과 타인을 구별하지 않는 평등한 사랑을 주장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悲)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erōs)·아가페(agapē)·필리아(philia)라는 3개의 단어로 표현된다. 이들은 사랑에 있어 본질적인 3가지의 위상을 각각 가리키는 것으로

 

에로스는 정애(情愛)에 뿌리를 둔 정열적인 사랑이며, 그리스도교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무한한 질적 차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과 인간 사이에는 융합도 실체적 합일도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신과 인간의 교제가 있을 뿐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2개의 주체가 마주하여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고 존재하는 데에서만 이웃사랑의 교제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필리아의 사랑도 독립된 이성간에 성립되는 우애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 또는 '자기와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자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필리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귀착한다. (사랑; 브리태니커 중에서)

 

. 자연과 환경 (빛 물 공기 동식물과 자연환경)

 

자연은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은 저절로 된 그대로의 현상이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많은 부문에 걸쳐 변화를 초래하였고, 그 자연 속에서 탄생한 인류인 만큼 자연 본연의 환경이 소중함을 문명의 발달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물, 공기, 빛, 풀, 생물 …… 어느것 하나도 우리 삶에서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결국 이는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 시간과 세월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져 머무름이 없이 일정한 빠르기로 무한히 연속되는 비(非)공간적인 연속체(連續體)의 흐름을 말한다.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을 세월이라고 한다. 생명체는 아주 한정된 시간만 영속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시간을 거꾸로는 되돌릴 수도 없다는 특성 때문에 현재가 소중하고, 아무리 짧더라도 그 시간은 소중할 수 밖에 없다. 시간과 생명간의 제한된 관계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 없다거나, 되돌릴 수만 있다면 누가 시간의 소중함을 말하겠는가?

 

(시간)

미국 화이트헤드처럼 시간을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과정철학자들은, 시간의 흐름이 중요한 형이상학적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흐름은 비합리적인 직관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시간을 불연속체의 무한한 집합으로 생각하는 철학자들은, 시간의 흐름이나 시간을 통한 인간의 진보는 환영이라고 주장한다. 과정철학자들은 미래는 열려 있고 과거는 불변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간의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과거를 바꾼다는 말과 같이 미래를 변화시킨다는 말도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시간에 대한 서로 다른 철학적 해석은 역사 전반을 통해 지속된 시간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반영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와 제논(BC 6~5세기)은, 변화는 논리적으로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겉보기와는 달리 현실은 유일하며 움직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시간은 환영이라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환영이라는 관념은 특정 인도 철학자나 불교와 같은 종교의 교리이기도 하다. 반면에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제자와 같은 고대인들은, 시간의 흐름은 현실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사건을 윤회적인 관점과 직선적인 관점으로 나누는 사상가들과 함께 시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궁극적으로 인류역사에 대한 관점이나 행위에 대한 규범에 큰 차이를 만들었다.

 

시간에 대한 윤회적인 관점은 힌두인, 고대 그리스인, 중국인, 아스텍인들 사이에 널리 성행했으며, 어느 정도는 현대 서구사회에서 재현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간은, 고전적으로 음(陰)과 양(陽) 사이의 변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념으로 표현된 서로 다른 리듬으로 움직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는 음과 양의 등가물(等價物)은 사랑과 투쟁이라고 생각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간에 대한 직선적인 관점에서 시간의 흐름은 순환하지 않으며 시작과 끝이 있다고 주장했다. 몇몇 사람들은 만약, 시대를 초월하는 어떤 힘이 시간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한 시간에 대한 제한들은 상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시간을 창조하고 없애는 신(神)이 때때로 이러한 작용을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에 대한 초기의 과학적 개념은 아이작 뉴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절대시간(絶對時間)을 붙박이 별의 겉보기 운동으로 측정된 겉보기 시간과 구별했다(→ 색인 : 천체역학, 고전역학). 뉴턴의 절대시간은 이상적인 시간 척도였으며, 그의 관점은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의 사상을 형성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칸트는 시공간이 미지세계의 일부분이 아니라 현상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뉴턴의 연구가 시간의 성질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기초를 세우면서, 뉴턴 역학의 많은 것들이 일정한 시간의 주기를 갖는 계에 관련을 두게 되었다. 시간을 통해 전개되는 계에 대한 연구는 19세기에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시간과 현대 물리이론의 완전한 통합은 20세기로의 전환기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독창적인 연구 이후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은 빛의 속력에 가깝게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 직관과 다르게 작용한다. 운동하는 물체의 길이는 운동방향으로 줄어들고, 움직이는 시계는 정지한 시계보다 더 느리게 가는 것으로 관측된다. 민코프스키는 이러한 두 현상이 일반적인 3차원 공간에 시간을 덧붙인 4차원 시공간 좌표계(座標系)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였다.

 

시간은 아직까지 정의하기 어려운 양이지만 오늘날 가장 정확하게 측정된 물리량이라는 것은 다소 모순되는 것 같다. 많은 시간의 척도가 개발되어 왔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구 자전을 바탕으로 하는 자전시, 천체의 운동방정식에서 그 역할에 따라 정의된 역학적 시간, 그리고 원자과정이 극도로 규칙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는 원자시 등으로 범주를 나눌 수 있다. 원자시계는 정밀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실제로 빛의 속력보다 훨씬 느린 일상적인 상황에서 상대론적 효과에 의해 예견되는 미세한 시간의 차이를 발견하고자 할 때 사용할 수 있다.

 

1태양일(太陽日)을 24시간,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로 나누는 자전시는 그 기원이 고대에 있지만, 대략 1600년경에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시간; 브리태니커 중에서)

 

. 우주질서 (만물의 질서, 종의 다양성)

 

우주(宇宙)는 과학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체라 정의할 수 있다.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은 우주를 존재하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 그리고 사건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는 시공간의 총체로서 정의한다.

 

자연과 환경, 시간과 세월, 생명과 건강이 그 가운데서 운행되고 있으며, “나”라고 하는 주체로서는 그 질서 속에서 자신이 존재함을 잊은 채 삶을 이어가기 쉽지만, “나”라는 주체가 그 속에 있기에 그러한 질서의 소중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감정과 정신세계

 

. 나, 자신, 주관

 

자아(自我, ego)는 사고, 감정, 의지, 체험, 행위 등의 여러 작용을 주관하며 통일하는 주체로서, 정신분석이론에서 '자기' 또는 '나'로서 경험되며,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성격의 일부분을 말한다. 소중하다는 감정은 결국 자아로서 갖는 감정 중 한 가지이다.  “나”를 구심점으로 세상, 만물, 우주질서를 대하는 것이므로, 자기, 자아, 주관은 옳고 그름, 잘잘못을 떠나 자신에게는 항상 소중한 것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신을 가치의 기준으로 삼아 상대를 평가하게 된다. 좋다거나 나쁘고, 옳다거나 그르다는 것은 항상 자기중심적이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정치인은 자기가 속한 정당의 정강을 옳다고 두둔하고, 주장하게 마련이며, 국민은 자기가 속한 조국의 영광과 이익을 쫓아 찬성과 반대 의견을 갖게 되며,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옳은 믿음이며, 다른 종교는 모두 사이비가 될 수 밖에 없다. 종교, 이념, 경제, 사회, 시대, 윤리, 가치관 …… 모든 관념과 감정은 자기 중심적일 수 밖에 없고, 자기를 구심점으로 하여 판단하고 평가하게 된다.

 

몸처럼 정신세계에서도, 항상 “나”는 우선하여 소중하고, 그만큼 자신을 중심으로, 자신을 위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타자를 평가하게 된다.

 

(자아)

자아는 기억·평가·계획하고 여러 방식으로 주변의 물리적·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며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 정식분석이론에서 자아는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인간 정신의 역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제시한 3가지 요인의 하나로서, 이드 ·초자아와 공존한다. 프로이트의 용어에 따르면 자아(Ego:라틴어로 '나'라는 뜻)는 성격을 실행하는 기능을 하며 이드와 초자아의 통합자이자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의 통합자이다. 자아는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행위 및 기대와 상상 속에 나타나는 미래의 행위와 관련된 개인적 준거를 제공함으로써 행동에 지속성과 항상성을 부여한다. 신체 개념은 자신의 초기 경험이 중심이 되지만 자아는 성격이나 신체와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발달된 자아는 특히 위협·질병 및 생활환경의 변화 등으로 인해 전생애에 걸쳐 변화할 수 있다.   (자아; 브리태니커 중에서)

 

. 좋은 생각, 옳은 생각

 

이는 도덕과 윤리라는 사회적 덕목이기도 하다.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인가, “너”까지도 생각하며 갖는 생각인가에 따라, “나”가 속한 사회질서는 명암이 엇갈리게 될 것이다. 생각이 옳다거나 좋다는 평가는 생각의 주체에 따라 동전의 양면처럼 엇갈리게 된다. 곰곰이 집어가며 생각할 때, 세상에 “너와 나”가 함께 좋다거나 옳다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너와 나” 사이의 이해 관계란, 항상 명암이 엇갈리고 흑백의 존재로서 현존하는 것이 세상이치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결국 “나눔”의 문제로서 해결 된다. 사생결단 내어 둘 중 하나가 살던 죽던 생사를 가름하는 세상은 험한 세상이다. 험하지 않고 좋은 세상이란 좋은 생각, 옳은 생각을 하며, “너와 나”가 원만한 합의로서 이루는 선(線)을 두고 말하는 생각일 것이다. “너”도 살지만 “나”도 사는 방편이기에 좋은 생각, 옳은 생각은 소중한 것이다.

 

큰 안목으로 볼 때, 그 속에서 사회의 안녕과 질서가 공존하고 평화가 유지되며, 몸과 정신의 건강의 항상성이 더 안전하게 보장되고, 자기가 속한 사회는 서로의 인간다운 생명 유지를 더 확고히 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 믿음 신앙

 

종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를 말하고, 신앙은 그렇게 여기는 절대자를 믿고 받드는 일이다. 

 

종교(宗敎)는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를 말한다. 종교인들은 주로 신을 비롯한 초월적인 대상의 존재 또는 세계에 대한 궁극의 진실, 사람은 어떠한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중국 양수명의 종교관에 의하면, 종교란 감각이 접할 수 없고 이지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으로서, ‘이지를 넘어선 것’(外乎理智)이며,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 세상을 넘어서 있다는 ‘초월’은 이지나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의미의 ‘신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종교의 필요성은 정서.의지 방면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능과, 지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월의 영역에서 입론의 근거를 찾고, 죄의식 및 후회감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지하여 새로운 길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와 “나”가 속한 사회에서의 정신적 평화와 안정에 종교, 신앙, 그에 대한 믿음이 왜 필요한 지를 잘 설명하여 준다. 때문에, 종교, 신앙, 믿음은 그 자신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회덕목의 한 방편으로서 매우 중요한 소프트웨어지만, 자기종교, 자기 중심적으로 편향되어 타자를 불편하고 힘들게 했던 역사나 주변의 현실도 있음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다.

 

. 지식, 식견, 사상, 철학

 

지식은 교육이나 경험, 또는 연구를 통해 얻은 체계화된 인식의 총체이며, 식견은 보고 듣거나 배워서 얻은 지식과 견문을 말한다. 사상이나 철학은 이러한 지식과 식견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 정치, 인생 등에 대한 자기의 일정한 견해나 생각을 세우는 것이 사상이고,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 세계관 따위를 탐구하는 학문이 철학 이다.

 

지식과 식견은 우리에게 더욱 안락한 삶의 방편을 찾게 하여 주고, 사상과 철학은 우리에게 삶의 참된 가치를 일깨워 주고 옳고 바르게 살아 갈 방향을 일깨워 주기에 소중한 것이다.

 

. 우월감, 만족감, 자신감

 

같은 상황이더라도, 어떤 생각이나 느낌 마음에서부터 우리는 위안과 만족과 자신을 갖게 된다. 그것은 우월감, 만족감, 자신감 따위이다. 스스로 남보다 뛰어나다고 여기는 생각이나 느낌, 모자람이 없이 마음에 흡족한 느낌, 어떤 일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활력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감정을 가졌느냐 여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한 긍정적인 사고야 말로 자신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는 소중한 감정이다. 과거에 대한 만족, 현재에 대한 우월, 미래에 대한 자신은 그 삶이 흐르는 세월과 함께 항상 행복이 유지되는 소중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 성취감 (학문적, 종교적, 예술적, 사회적)

  자신의 가치와 지위의 인정

 

목표를 이룰 때의 성취감은 만족이라고 하는 감정의 한 줄기일 것이다. 우리 인생의 목표로서 내세울만한 거창한 명분들은 다양하다. 학문, 예술, 신앙, 또는 사회적 입지도 내 세울만하다. 사업적인 성공, 진학, 직위, 명예 따위도 아름다운 포장의 명분이 될 수 있지만, 스포츠맨처럼 어떤 단거리 선수는 0.1초 단축을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어떤 피겨선수는 반 바퀴 더 회전 하는데 몇 해를 두고서도 그 목표 달성을 걱정하곤 한다.

 

기쁨과 행복의 상당 부분은 이러한 성취감에서 경험된다. 좋은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 골인한 선남선녀의 행복도 일종의 성취감일 수 있다. 성취감은 자신의 가치와 지위를 인정하는 스스로 인정하는 감정이라고도 생각한다.

 

. 강인한 정신력

 

우리 삶은 물결처럼 파도처럼 요동 치며 흐른다. 아무리 고요하고 평온한 세상,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정은 하루에도 몇 번 씩 일렁이며 넘실대는 파동을 느끼곤 한다. 좋은 일도 많지만 피치 못할 궂은 일도, 넘기에 고단하고 힘 든다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어려운 일도 겪어가며 갈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원만한 삶을 유지하는 데는 항상 굳건한 정신력이 지탱해 줘야만 된다. 때로는 포기나 좌절하지 않고 강한 정신력만으로 그 높은 감정의 파고를 벗어날 수 있기에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다.

 

. 권리와 의무

 

권리는 어떤 일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처리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주장하고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나 힘이며,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의무이다.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국민의 기본권으로 자유.평등.참정.청구.사회권이, 그리고 국민의 의무로는 교육.근로. 납세.국방의무가 있다. 주고 받을 권리와 의무를 정하고 그 선을 제대로 지킬 때, 그 사회는 평화와 안녕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교통안전에 차선의 중요성처럼, 사회질서와 안녕을 위해서 권리와 의무를 지키는 것은 우리들 서로가 소중하다.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각각이 처한 입지에서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러한 사회 통념에 부합하는 권리와 의무가 제대로 지켜 질 수 있을 때, 밝고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국민으로서, 대통령으로서,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 군인으로서, 과학자로서, 시인으로서, 직원으로서, 학생으로서, 교양인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남편으로서 ……

 

. 인연, 나눔

 

삶이란 결국 연분과 관계를 맺어가며 보내는 세월이다. 그 인연의 대상은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으며, 사물, 자연현상, 감정까지도 연관 지어 볼 수 있다. 인연을 맺고 무엇이던 나눔을 서로 행할 수 있을 때, 더 밝은 사회,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나눔은 재물과 물건이 아니더라도, 지식과 재능, 때로는 감정, 관심, 마음을, 나눌 수도 있다. 때로는 노력, 아픔, 고통까지도 서로 나누며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아름다운 것이다. 인연을 맺고, 더불어 함께 살아 가는 사회가 “나” 그리고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 기쁨, 웃음, 즐거움

 

잘 산다고 하는 것은 삶의 결과론적인 사실 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삶의 끝은 누구에게나 죽음이고 보면, 삶의 과정을 두고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예와 부를 쌓는 것도 한 몫을 차지하겠지만, 과정이 기쁘고 즐거워 웃음이 이어질 때 잘산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 소중하던 모든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 선상에서 맺음 된다.

 

사랑하던 것, 욕망하던 것 모두가 본능에 따르는 생각과 감정에서 비롯되지만,  “나”를 중심으로 하는 주체의 물질세계인 유기체의 한시적 현상으로서, 작용되다 사그라질 한 여름 하늘을 장식하던 뜬 구름처럼 헛된 것임을 우리는 잊으며 살아 간다. 단, 종교적인 주장은 그 선을 넘는다고 주장될 수도 있으나, 이는 믿음이라는 신앙의 특성을 전제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삶이란 목적론적 결과가 아니라, 그 한시적인 삶의 과정이 더 중요하기에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위와 같은 가치관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들을 키우고 잘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제 아무리 소중한 것도 죽음을 넘어서까지 갖고 갈 수 없다고 해서, 영혼 불멸의 영생만을 추구하며 고집할 이유도 없다. 카스타네다 (C. Castaneda)의 말처럼, “어떠한 길도 하나의 길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을 마음에 담았느냐가 항상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과정에서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더 키우고 유지하는데 힘쓰며 살아가는 마음이 소중한 것이다.

 

장자(莊子)가 남긴 말들을 새겨본다.

 

    “작은 것은 큰 것 속에 숨기면 알맞기는 하나 잃어 버릴 수가 있다.”

                   藏小大有宜(장소대유의) 猶有所遯(유유소둔)

    “만약 천하를 천하에 숨겨 둔다면 잃어 버리지 않으리라.”

                   若夫藏天下於天下(약부장천하어천하) 而不得所遯(이부득소둔)

 

  장자(莊子)의 스승 진인(眞人)은 변화하는 바깥 세계에는 관심이 없고, 집착하는 게 없으니

  시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외물에 구애 받지 않으니 근심걱정을 모르며, 자연에 순응한 채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는 정치에 대해 늘 초월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이다.

 

 

2014.3.17.(월)

오갑록

 

 

. 소중하다.

                                           (사전 중에서)

 

소중하다 ; 지니고 있는 가치나 의미가 중요하여 매우 귀하다

중요하다; 소중하고 요긴하다

귀중하다; 매우 가치가 크고 중요하다

진귀하다; 보배롭고 값지고 귀하다

 

可贵[kěguì]  珍视[zhēnshì]  爱惜[àixī]

传家宝[chuánjiābǎo]  心膂[xīnlǚ]  甘贵[gānguì]

百宝箱[bǎibǎoxiāng]  八宝箱[bābǎoxiāng]  结晶[jiéjīng]

忍字心头一把刀[rěn zì xīntóu yī bǎ dāo]  

饭吃三碗, 闲事少管[fàn chī sān wǎn, xiánshì shǎo guǎn] 

 

소중하다; [所重-] きわめて大切だ, 貴重だ, 大事だ

 

소중 ; important, weighty, momentous, important

keep in cotton wool , 과보호하다, 소중하게 다루다

in a million, 진기한, 소중한, 극히 드문

dearness, 귀여움, 사랑스러움, 소중함

 

 

 

 

 

■ 소중한 것

 


      이른 아침 나서는 출근길, 동네 놀이터 주변의 여기저기 나 붙은 색다른 안내문이 눈길을 끈다.

“반지를 찾습니다. 제게는 소중한 것입니다. ……”

간밤에 부근에서 분실한 반지를 습득한 사람을 찾는 알림장이다. 연락처를 남기면서, 후사하겠다는 내용으로 마감을 했다. 그네와 미끄럼틀 기둥, 가로수, 가로등 등에 온통 도배가 되어 있다. 순간 스치는 나름대로의 시나리오에 멋적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늦은 밤 놀이터 주변에서 주고 받은 의미 있는 선물”을 달콤함에 넋이 나가 어둠 속 어딘가 놓아 둔 채, 찾지 못하여 애태우는 미성년의 앳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찾는 이로서는 “아주 소중한 것”일 게다. 적어도, 써 붙인 그날 아침에는……

 

소중한 것이란,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그 대상이 무궁무진 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부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겠지만, 바이러스 연구하는 생물학자는 연구중인 바이러스 한 마리가 무엇보다 중할 수도 있고, 별 따며 사는 우주천체 과학도는 드넓은 우주 자체가 소중한 관심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물질에만 한정 된 것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마음과 정신 또한 마찬가지로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있다. 사랑하는 것 , 아름다운 것, 위대하고 거룩한 것, 기쁨과 희망, 건강 ……    

 

소중하다는 것은 “나”를 구심점으로 두고 시간이라는 끈에 매달려 원운동을 하고 있는 가지각색의 욕심과 욕망이라는 물체와도 비슷하다. 똑 같은 사안일지라도 시간과 욕망의 크기, 그리고 원운동의 가속도와 같은 마음 씀씀이에 따라, 목숨과도 바꿀 만큼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끈 풀리면 쓸데없는 쓰레기나 공상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나”라는 주체는 생체로서의 “나”도 그렇지만, 사회적 주체로서의 “나”에게도 그 원리는 다를 바가 없다. 배불리 먹고 마시고 배설하며 살아가는 데 소중한 물품과 이의 조달에 필요한 돈 또는 건강이 될 수도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이웃보다 좋은 입지를 차지하려는 소중한 것도 있다. 때로는 학문과 철학. 종교적인 더 높은 차원의 소중한 것들도 있다. 명예, 사랑, 평화, 희망, 안식처럼 거룩하고 높은 이름으로 치장된 것들이 그것일 수 있다.

 

시간이 가고 나이 들면,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바뀌면, 그렇게 소중하다고 여기던 모든 것이 새큼하고 달콤하던 흔적은 사라지고 맹물처럼 덤덤해지는 것이 세상 이치인 듯하다. 욕망에 불타는 이글거리는 젊은 때의 눈빛은 사라지고 젖먹이 갓난아기처럼 평온 심을 한 백발노인의 편안한 모습을 볼 때면,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를 생각나게 하곤 한다.

 

어릴 때는 달콤한 먹을 것에 소중함을 느낀다. 성장기에 생각하던 크고 작은 소중한 것들이나, 이성과 가족의 사랑에 애태우던 한 때의 소중한 것들도 때에 따라 다른 의미가 되곤 한다. 땀 배고 지친 모습이 될 때까지 운동에 매달리는 주름진 초로의 이웃들을 보면, 그들이 원하는 소중한 것은 건강하게 장수하기 바라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소중한 것이란,  누구나 이처럼 짧은 끈으로 이어진 시간의 줄에 매달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지 싶다.

 

질풍노도처럼 숨막히고 어렵던 역사의 한 대목들을 읽을 때도, “그 때 그 사회의 소중했던 것이 지금은 무엇이 되었는가?” 하고 반문하여 본다. 중국 진시황 황릉이나 만리장성, 피라미드의 흔적도, 전쟁으로 할퀸 자국을 보는 우리 근대사의 처절함 들도, 이제는 세월과 역사라는 시간 함수로 인하여 빛 바랜 현재의 형상들을 보면, 그 때 소중했던 것들의 의미 없음에 허탈해 질 때가 있다.

 

신뢰 믿음 사랑의 이름으로 오래도록 남을 만한 것도 있을 듯 하지만, 변화무쌍하게 요동치는 나 스스로의 마음을 헤아리노라면 그 소중한 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시간이나 세월, 역사가 흐르면 탈색되고 미지근한 싱거운 물맛처럼 바뀔 것이다.
 
나이 들어  원시안 되면 글 한 줄 읽는데도 멀리해야 보인다. 빨갛고 꼭꼭 차던 잇몸은 주저 앉고 치간은 멀어진다. 마음 또한 그 만큼씩 멀어져서, 먹고픈 맛난 음식도 줄거니와, 불타는 정열이나 짜릿한 취흥마저 시들하게 느껴진다. 한 때는 그렇게 소중하던 것들도 마음에서 멀어지고 또한 흐려지게 마련인 듯하다. 그렇게 멀어지고 흐릿해진 평상심의 상태를 평온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오늘, 지금 시간, 이 순간은 어떠한가?” 라고 묻는다면, 아침 출근길에 본 광고문 중의 잃어버린 반지만큼이나 소중한, 풋풋한 야채처럼 아삭거리는, 크고 작은 또 새로운 것들로 항상 줄 잇곤 한다.

 

마음 한편은 언제나, 또 다른 새로운, 소중한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도 생명력의 한가지 특성은 아닐까?

 

2007.7.26.
오갑록

 

 

 

■  그들도 나처럼 소중하다.

               저자 박경서

     프롤로그. 나와 당신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

 

.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 가슴으로 낳은 딸, 미치코와의 인연

  . 바로 내 곁에 있는 것, 인권

  . 세계화의 후유증을 앓고 있는 중국

  . 비폭력을 통한 평화, 달라이 라마

  .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 아웅산 수지

  . 동티모르의 호세 라모스 오르타 전 대통령과의 만남

  . 원주민의 눈물로 만들어진 나라, 호주

  .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곳, 남아프리카공화국

  . 인디오의 희망, 리고베르타 멘추

 

  . 상처 입은 나라, 고통 받는 사람들

  . 역사의 아이러니가 숨겨져 있는 인도아 대륙

  . 카스트와 다우리의 굴레, 인도

  . 자연재해로 시들어가는 방글라데시

  . 정치적 혼돈에 빠진 파키스탄  

.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르완다

  . 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보여준 캄보디아  

. 핵실험의 희생양이 된 타히티

  . 아시아의 횡포로 고통 받는 솔로몬제도

 

  . 여성, 어린이, 장애인 그리고 아시아

  . 먹구름이 가득한 동북아시아의 미래

  . 여성 인권을 위해 노력하는 시린 에바디

  .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 위안부

  . 혹독한 기아의 희생자, 북한 아이들

  . 가난과 무관심으로 거리로 내몰린 아이들

  . 함께 지켜가야 하는 장애인 인권

 

  . 우리의 인권을 찾아서

  . 인권을 위한 선진국의 노력

  . 인권 선진국으로의 첫걸음

  . 인권의 실천은 가정에서

 

 

 

■  사소한 것이 소중하다

                “생각하는 동화” 중에서

 

                                                                               정채봉

싱싱하게 새해 아침이 밝았다.

아랫 강에 사는 자라는 얼음물로 세수를 하고, 거북이한테 세배를 갔다.

 

거북이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자라의 세배를 받았다.

거북이가 덕담을 하였다.

"올해는 사소한 것을 중히 여기고 살거라."

자라가 반문하였다.

"사소한 것은 작은 것 아닙니까? 큰 것을 중히 여겨야 하지 않는가요?"

 

거북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내가 오래 살면서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은 사소한 것이었네. 잘 사는 길이야."

자라가 이해를 하지 못하자,

거북이가 설명하였다.

"누구를 보거든 그가 사소한 것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면

금방 알게 되네. 사소한 일에 분명하면 큰 일에도 분명하네. 사소한 일에 부실한 쪽이 큰 일에도 부실하다네."

 

자라가 물었다.

"그럼 우리 일상 생활에서 해야 할 사소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거북이가 대답하였다.

"평범한 생활을 즐기는 것, 곧 작은 기쁨을 알아봄이지. 느낌표가 그치지 않아야 해. 다슬기의 감칠맛, 상쾌한 해바라기, 기막힌 노을 총총한 별빛...."

 

자라는 일어나서 거북이한테 넙죽 절하였다.

"어른의 장수 비결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느리고 찬찬함, 곧 사소한 것을 중히 알아보는 지혜로군요."  

 

 

 

■  작은 것부터 소중히

 

 

한평생 시계만을 만들어 온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늙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생에 마지막 작업으로 온 정성을 기울여 시계 하나를 만들었다.

자신의 경험을 쏟아 부은 눈부신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완성된 시계를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이 시계를 받아보니 이상스러운 것이 있었다.

초침은 금으로, 분침은 은으로, 시침은 구리로 되어 있었다.

"아버지, 초침보다 시침이 금으로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들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대답은 아들을 감동케 했다.

"초침이 없는 시간이 어디에 있겠느냐

작은 것이 바로 되어 있어야 큰 것이 바로 가지 않겠느냐.?

초침의 길이야말로 황금의 길이란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목에 시계를 걸어주면서 말했다.

1초 1초를 아껴 살아라. 1초가 세상을 변화시킨단다.

 

세상에는 살인(殺人)이란 말이 있다. 그렇다면 살시(殺時)라는 말은 어떨까.

사람을 죽이는 일은 법적으로 다루는 일이지만

시간을 죽이는 일은 양심의 법으로 다루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 이 양심을 외면한다.

작은 것을 소홀하게, 작은 것을 아무렇게 해도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다.

시계를 만드는 아버지 말처럼 작은 것이 없는 큰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벽돌하나도 10층 건물에서 소중한 역할을 하며..

 

벼 한 포기도 식량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작은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큰길로 가는 길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1초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치만 알아도............. “

 사소한 것이 소중하다 

 

 

 

■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소중하다

             장자 (내편)

 

배를 골짜기에 감추어 두고 어살을 연못 속에 감추어 두면 든든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밤중에 힘있는 자가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자들은 알지 못한다.

 

크고 작은 것을 감추어 두는 데에는 적당한 곳이 있겠지만, 그래도 다른 곳으로 옮겨질 곳이 항상 있는 것이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두면 옮겨질 곳이 있을 수가 없는데, 이것이 영원한 만물의 위대한 실정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형체를 타고난 것만으로도 기뻐한다.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은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처음부터 한계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즐거워한다면 즐거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물건이 딴 곳으로 옮겨갈 수 없는 곳에 놓임으로써 모든 존재를 인정한다.

 

일찍 죽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늙는 일에도 잘 대처하며, 시작하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끝맺는 일에도 잘 대처하여 사람들이 그를 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만물이 관계되어 있고, 또 일체의 변화의 근거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莊子(內篇) 第6篇 大宗師

 

夫藏舟於壑, 藏山於澤, 謂之固矣.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 昧者不知也. 藏小大有宜.猶有所遯. 若夫藏天下於天下而不得所遯, 是恒物之大情也. 特犯人之形而猶喜之. 若人之形者, 萬化而未始有極也, 其爲樂可勝計邪! 故聖人將遊於物之所不得遯而皆存. 善夭善老, 善始善終, 人猶效之.又況萬物之所係, 而一化之所待乎!

 

 

 

■  오늘이 소중하다

        

                                                                                                                  人生感悟:珍惜今天

세상은 흐르는 강물처럼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은 여전히 오늘을 틀어쥐는 것을 모르고 눈 앞에 펼쳐지는 진귀한 기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신의 미래와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한다. 사실 시간은 돈처럼 마음대로 저축했다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주어진 그 한 순간이며, 바로 오늘과 현재이다. ……

 

모름지기 일에는 하늘의 뜻이 있다. 세계의 어떤 일도 앞당길 방법이 없다. 착실하게 오늘을 붙들어야 가장 올바른 인생의 태도인 것이다. 인생은 사실 과도하게 내일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일은 필경 많은 미지수의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내일 주위 환경이 어떻게 변화해서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만약 줄곧 내일을 기대한다면 무의식적으로 오늘을 낭비하고 버리며 진귀한 기연을 놓칠 수 있어 오늘의 좋은 시간을 의미 없게 흘려보내게 된다.

 

오늘만이 바로 진정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다. 오늘이라는 인생 궤도에서 바로 어제의 성공과 실패가 나타난다. 오늘은 어제의 상처와 눈물의 흔적을 지워 어제의 하고자 했던 바를 이룰 수 있다. 오늘의 옥토에 성실하고 선량한 종자를 심어야 장래에 행복한 결과가 있을 수 있다. 오늘이라는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않는다면, 기연을 잃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겨 충실하고 후회 없는 인생을 걸어갈 수 있다.

 

人世间的任何状况犹如江河中的流水那样,每时每刻都在发生着各种变化。然而,有许多现代人仍然不知道把握今天,不珍惜展现在眼前的珍贵机缘,却又忧心自己的未来将会如何如何。其实时间并不能像金钱一样让人们随意储存起来,以备不时之需,人们所能使用的只有被给予的那一瞬间,也就是今天和现在。……

 

 

 

■  소농은 완전 소중하다

 

                                                                                                                           하승수

나의 할아버지는 소농이셨다.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 있는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딱 한 마리 키우던 소에게 쇠죽을 쑤어주시던 모습이다. 그렇게 농사를 짓다가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도시로 나온 세대다. 그러나 요즘 아버지는 다시 할아버지가 살던 고향마을을 왔다 갔다 하시며 약간의 벼농사를 짓고 계신다. 평생을 시골에서 사신 장인·장모님도 아직 농사를 짓고 계신다. 덕분에 쌀은 양가로부터 얻어먹고 있다. 얼마 전 딸아이는 ‘아빠도 나중에 농사를 지어서 나에게 쌀을 보내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웃으며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리고 너도 네 자식에게 그렇게 하라고 얘기해줬다. 이 약속은 꼭 지키려고 한다. 농사는 우리에게 탯줄 같은 것일지 모른다.

 

어느덧 기차가 홍성역에 도착했다. 차를 얻어 타고 간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추수가 끝난 들판이 보인다. “선생님, 올해 쌀 농사는 어땠습니까?” 신문에서는 올해 쌀 생산량이 407만4천t으로 지난해보다 15만t 이상 줄어들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곡물자급률이 26%에 불과한 나라에서 그나마 자급이 되던 쌀조차도 수확량이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

 

‘풀무학교 전공부’는 농업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교육 기관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 사회생활을 하다가 농업에서 삶의 방향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문을 두드리는 교육 기관이다. 한 해 10명의 학생이 입학한다.

 

풀무학교 전공부가 있는 곳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이다. 친환경 농업과 대안적인 삶을 일궈온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안철수씨가 대통령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농민들의 얘기를 듣겠다며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오면 놀랍다. 청년들이 농업에서 삶의 길을 찾겠다고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현실은 농업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농업이 유지되려면 농지가 있고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농지는 계속 줄어들고 농민도 줄어들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전체 농지의 20%가 사라졌다. 신도시로 개발되고, 4대강 사업의 와중에 사라지고, 도로로 뒤덮였다. 농민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가 되었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가 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5% 남짓한 수준이다. 농촌에 가보면 농민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의 고령자다.

 

그 동안 정부는 외국 농산물에 시장을 개방하면서도 농업을 지원하는 데 많은 예산을 쓰겠다고 약속해왔다. 실제로 많은 돈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농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작 사람이 농촌에서 정착하고 농사를 짓는 데 도움이 되는 돈은 적었다.

 

농민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물어본다. 대답은 간단하다. “농사지을 땅이 있고 농사를 지어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농사지으려고 할 사람은 많을 겁니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면 임대료로 땅 주인에게 30~40%를 줘야 한다. 임대료 주고 영농비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지 않으려면 땅을 사야 하는데, 땅값은 엄청나게 올랐다. 평당 수십 만원인 땅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농지 가격이 평당 수십 만원인 것은 이미 농지가 아니라 투기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다.

 

“처음에 귀농해서 농사를 짓는데, 10년 이상 연수입이 1천만원을 넘은 적이 없었어요. 나야 내 소신대로 사는 것이지만, 농민에게 이런 상황을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농민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보장하는 게 필요합니다.” ……

 

다만 그는 지원의 초점이 소농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가족의 노동력에 의존해 친환경적으로 농사를 짓는 소농에게 도움이 되는 농업정책이 진정으로 환경을 지키고 농업을 살리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인류를 먹여 살려 온 것은 소농이다. 아프리카의 가나는 1970년대에 소농이 국내에서 소비되는 쌀의 전량을 생산했다. 그런데 농산물 개방으로 소농이 몰락해 현재 가나는 쌀의 70%를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우리나라도 여전히 소농이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 ‘한-미 FTA를 반대해서 내가 지키려고 했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가치를 ‘소농의 가치’라고 진단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농지개혁을 통해 형성된 소농들이 동아시아 사회의 뿌리이고, 이들이 협동하며 농사짓고 비교적 균등하게 살아온 게 우리 사회라는 것이다. 평등을 중시하는 가치체계, 아무리 경쟁이 심해도 다른 한편으로는 ‘같이 살자’라는 생각이 남아 있는 우리 사회의 뿌리에는 바로 ‘소농’이 있다는 것이다.

 

-미 FTA로 지키려던 가치는 자동차 팔아서 밥을 해결하겠다는 게 한-미 FTA를 추진한 발상이지만, 앞으로는 자동차 팔아도 밥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이 올지 모른다.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위기는 이미 눈앞에 다가와 있다. 2008년 러시아에서 가뭄이 들었을 때 밀 수출국인 러시아는 수출을 통제했다. 자기 나라 국민도 먹을 게 없는데 수출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농업을 살리는 것은 주권의 문제이고 생명의 문제다.

 

 

 

■  작은 것이 소중하다.

 

                                                                                                    박필규의  “오늘의 행복”  중에서

조사(助詞)가 목적어를 지배한다.

 

조사는 도움을 주는 토씨다. 조사는 어미(語尾), 부사(副詞), 체언(體言) 뒤에 붙어서 말과 말을 연결하고 뜻을 더하고 조정한다. 조사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목적어를 지배한다. 조사가 없는 한글은 한 문장도 성립시키지 못한다. 조사처럼 겉으로는 작고 부수적으로 보이지만 전체를 지배하는 게 있다. 작지만 우선적이고 소중한 일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대한 과업도 백성의 마음을 헤아리는 작은 일에서 시작해야 하듯, 나를 다스리려면 나를 돌아보고 내 마음과 행동을 찾는 작은 일부터 챙겨야 한다. 거인과 소인의 구분 선은 작고 소중한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자세다. 웃음을 잃지 않는 몸 자세, 마냥 즐거운 마음 자세, 겸손하고 감사하는 태도 등 작지만 소중한 일부터 하자. 작고 소중한 일일수록 섬세하고 미세(微細)해야 한다.

 

외부지향과 내부관찰을 병행하자.

 

큰일을 하려면 나를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인류는 원시 사냥꾼시절부터 자기 내면보다 주변 환경을 살피고 대비하는데 익숙했다. 인간 주변에 생명을 노리는 야수와 적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현생 인류도 경쟁자라는 야수들이 주변에 웃으면서 포진하고 있기에 항상 긴장하면서 외부를 살필 수밖에 없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서 친구와 동지를 만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철저하게 개별적인 존재다. 배신과 외로움이 두려워서 외부 지향적이 될 수밖에 없는 현대인은 자칫하면 자아를 잃고 주변 상황에 끌려가는 형식적인 껍데기 삶을 살 수 있다.

 

자기를 향한 성찰과 자기여행.

 

개인이 무너지는 것은 상대(환경) 때문이 아니다. 외부 환경의 도전에 자기를 이기고 버티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계를 일주하더라도 자기를 찾고 자기에게 필요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면 몸뚱이만의 여행에 불과하듯, 100년을 살더라도 자아가 약하다면 자기가 없는 유전자 전달자에 불과하다. 강해지고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자기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를 향한 대화로 성찰하고 참회하여 부족한 면을 훈련하고, 자기를 살피는 자기여행으로 자아를 찾고 재무장해야 한다.

 

말하지 말고 먼저 들어라.

 

저마다 자기 말만 하는 세상이다. 저자만 많고 독자가 없다. 지금의 인간 시장은 상대의 말(글)을 살 사람은 없고 자기의 말만 팔려고 하는 사람만 득실거리는 수요와 공급이 깨진 시장이다. 글은 나를 치유하는 수단.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다면 이제 침묵하리다. 이 세상에 짧을수록 좋은 것은 언어다. 참회합니다. 사실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성급하게 말하고, 알 필요도 없는 사실 파악을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고, 상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의견을 앞세우고 지시만 하려고 했던 오만함을 참회합니다.

 

 

 

■  "신뢰가 소중하다"

 

                                                                                                       안철수, 송년메시지 중에서

 

2013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때는 대개 모두가 아쉬운 마음과 설레는 마음으로 차분하게 한 해를 보내고 기쁜 마음으로 새해를 준비합니다.

 

하지만 세밑에 들려오는 소식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이 된 가계부채가 1000조를 넘어서면서 14%의 가구가 소득의 40%를 빚을 상환하는데 써야 합니다. 전세 값은 폭등하고, 사교육비는 “그래도 자식만이라도..”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진 부모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독거 노인들은 동장군이 두렵고, 가장들은 내일만 생각하면 오늘도 퇴근길이 무겁습니다. 그 와중에 국정원 개혁은 여전히 안개 속이고, 정치권의 중재로 가까스로 봉합 된 철도파업으로 인해 노정갈등이 위험수위로 치닫기도 했습니다. 정말 다사다난이란 말이 실감납니다.

 

저는 요즘 예전에 읽었던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를 짬짬이 다시 읽고 있습니다.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절이었다.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면서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갔다. 말하자면, 지금과 너무나 흡사하게, 그 시절 특정 권위자들 역시 오직 극단적인 비교로만 당시의 사건들의 선악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 책은 서로 분위기가 달랐던 런던과 파리 두 도시의 내면을 비교하며, 19세기 산업사회가 만들어 낸 어두운 이면을 조명하고 있지만, ‘극단’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입니다.

 

과거 극적인 전환의 시대에는 현명한 지식인(지도자)들이 방향을 결정하고 어리석은 대중을 따르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들 대중을 지도하고 가르쳐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고, 대중은 그에 피로서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 시대입니다. 이제는 일부 전제주의나 독재국가를 제외하고는 힘보다는 설득이, 대립보다는 화해가 우선시 되는 대화와 타협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서거한 넬슨 만델라는 바로 그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지금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지난 대선에서 모두가 소통과 화합을 약속했습니다. 저는 “증오와 분열을 끝내고 새로운 미래를 열자고, 누가 승리하건 승자는 패자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패자는 승자에 협조하자”고 호소했었고, 모두들 거기에 동의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여당이 야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고, 야당이 국정에 협조하는 것은 야합으로 불리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국정원 개혁,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 철도 파업 등 당장 당면한 현안만 하더라도 1년 전 약속을 생각했다면 이렇게까지 가지는 않을 일이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불신입니다. 잘못은 원칙대로 처리하고, 공기업 개혁은 공론화의 절차를 먼저 거치고, 국정원 개혁은 모두가 문제였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치면 됩니다. 하지만 서로가 상대를 불신한 탓에, 서로 상대가 악용할 것이라고 생각한 탓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신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었습니다.

 

얼마 전 프란체스코 교황이 스스로 퇴임한 베네딕트 전 교황을 찾아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때 전 교황은 현 교황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보수적인 신학관을 가진 분이라고 알려져 있는 전임 교황이, 개혁적인 분이라고 알려진 현 교황에게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 진실함이 멀리까지 전해졌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정치도 개인이나 소속된 정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 "언제나, 언제나, 언제나..“ 진심으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물론 저도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저도 그 부족함을 잊지 않고 늘 진심을 채우겠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겠습니다. 그 길이 설령 자갈길이라 해도 스스로 몸을 낮추고, 늘 겸손하게 화해의 길, 통합의 길, 진심의 길을 가겠습니다.

 

 

 

■  모두 다 소중하다 

 

                                                                                                             민병임, 미주한국일보

맨하탄 지역 피자전문 파파존스에서 음식을 주문한 한인여성의 영수증에 종업원이 ‘눈이 찢어진 여성(Chinky eyes)’이라 표현, 인종차별적 언어에 당사자가 항의하여 종업원이 해고되고 트위터에 사과문이 게재된 일을 기억할 것이다.

그 한달 후에는 애틀랜타 스타벅스에서 백인 종업원이 한인여성이 주문한 음료수 컵에 이름을 써서 주는 대신 찢어진 두 눈이 그려진 컵을 건네주어 그 여성이 분노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아시안으로 미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피부와 생김새를 둘러싼 문제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이번 2월 달은 흑인 문화유산의 달(Black History Month)이다. 올 흑인 유산의 달 주제는 흑인 인권운동(Civil Right Movement)이 미국 사회와 문화에 끼친 영향력 조명이라 한다.

 

1955년 12월 버스 인종 분리정책에 항거한 로자 파크스부터 시작하여 인종평등을 위한 비폭력 투쟁에 평생을 바친 마틴 루터 킹 목사 등 흑인 지도자들이 벌인 민권운동 결과 오늘날 아시안들이 혜택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인들은 흑인 문화유산의 달에는 관심 없다.

오래 전 이민 온 1세 중에는 종업원 혹은 파트타임 일 하는 흑인에게 6.25 참전군인 흑인을 가리켜 깜둥이, 깜씨라 부르던 습관대로 뒤에서 그렇게 부르는 이들이 있다. 앞에서는 자칫 소송 당할까 못한다. 우리도 뒤에서는 못생겼다고 타인종이 피자 페이스(pizza face)라 부르기도 한다는 것은 모르고 말이다.

고정관념과 편견을 지닌 일부 사람들은 생김새와 피부로 판단하여 이렇게 들 부른다.

 

미국 백인을 비하하여 양키(Yankee), 흑인을 무시하여 부르는 단어로 니거(nigger), 니그로(negro), 인디언은 피부색이 붉다 하여 레드스킨(redskin), 동양인은 피부색이 누렇다 하여 국(gook)이나 눈이 찢어졌다 하여 칭크(Chik)라는 칭호 들이다.

 

사람이 사람을 무시하여 부르는 품격 없는 이런 칭호들이 시대가 바뀌면서 많이 정화되고 있다. 80~90년에 중국인을 비롯 한인을 오리엔탈(Oriental)이라 불렀다. 한인을 비롯 동양인이 많이 탄다하여 플러싱 메인스트릿과 맨하탄 타임스퀘어를 오가는 7번 전철 급행을 ‘오리엔탈 익스프레스’라 부르기도 했다. 요즘은 이 단어가 사라져 오리엔탈이 아시안(Asian)으로 불리고 있으니 조금씩 고정관념과 편견이 사라지고 있다고 봐도 좋다.

 

아메리칸 인디언도 1970년대 민권운동을 통하여 ‘네이티브 아메리칸’으로 공식적으로 부르게 되었고 흑인이라는 용어 대신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명칭을 바꾸자는 제안이 통과 되어 현재 사용되고 있다. 맨하탄과 브루클린, 브롱스에 사는 흑인 2세들을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부르기는 낯설지만 공식적인 명칭이다.

 

흑인 민권을 위해 투쟁한 흑인 지도자 중 백인을 미워하면서도 어린 시절 동경 한 적이 있다고 고백한 이가 있다. 피부를 크림으로 닦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도 꼬불거리는 까만 머리는 얼마 후 다시 자라났고 그럴수록 더욱 비참한 심정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백인이 될 수 없다. 흑인으로 살자. 흑인인 내 모습 그대로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긍지를 갖자’, 흑인 지도자로 부상한 그의 깨우침, ‘블랙은 아름답다’(Black is Beautiful)는 흑인사회의 모토가 되었다. 이는 당당한 자존감이다.백인이나 아시안이 ‘블랙 피플’이라고 부르면 인종차별적 발언이 되지만 흑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을 `블랙 피플'이라고 망설임 없이 부를 정도로 자존감을 회복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피부가 하얗고 노랗고 까맣고에 상관없이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서 나름의 개성, 전통, 고유의 자존심을 지녀야 한다. 요즘은 당당하고 실력 있는 아시안들이 정치, 경제, 법률, 의학, 과학, 교육 모든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아시안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피부 색깔과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 다 아름답고 모두 다 소중하다. 생김새와 피부색으로 판단되고 무시하는 ‘칭크’ 같은 단어들은 점차 사어(死語)가 되어갈 것이다.

 

 

 

■  가족은 법보다 소중하다 

          

                                                                                                                                 박철

…… 

맹자는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君子三樂)이 있는데,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이고,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이며,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셋째이되, 천하의 왕이 되는 것은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성현의 가르침이 오늘 날 법에서도 경시되지 않았으니, 형법은 범인 도망, 은닉과 증거인멸의 죄에서 친족은 벌하지 않고 있다.

 

가난하더라도 자애로운 부모, 효성스러운 자녀와 화목한 형제자매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만금을 가졌어도 화목하지 못한 형제자매를 보면 보기에 안쓰럽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을 위해 지위와 기회를 버리는 일은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다. 가볍게 이혼하고 가족 사이에서도 쉽게 미워하는 세상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는 각자의 내면에 있고 진정한 행복은 가족 안에 있는 법이다.

 

 

 

■  미움과 불안이라는 감정도 소중하다.

 

                                                                                                                                화랑

   지금은 일상화된 단어인 소시오패스 혹은 사이코패스라는 것은 대략 이십 년 전에는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런 있지도 않은 단어가 표현하는 감정 없음이라는 것을 좀 느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도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도 별로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이기에 결혼도 못할 것이라고 - 물론 아직 못하고 있지만 -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사귀고 난 다음이 압권이었습니다. 사귀었을 때는 내가 정말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냥 그 기분에 도취되었는지 몰랐는데 이별이 있고 난 뒤에 그 이별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아픔 때문에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내게도 감정이 있구나 내게도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었구나라고 말입니다. 물론 지금이라면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그러나 당시에는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생각했기에 그 때 아프기 때문에 울기도 하였고 감정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사랑을 꽤 오래 안 해본 나로서는 과거의 경험이 있었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아직도 나는 다른 이를 사랑하는 데 이렇게 서툰 것이지라고 생각도 많이 했었고 왜 나는 이렇게 어렵게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사는 것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감정을 살리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서 미움도 생기고 공포감도 생기며 불안감도 내 안에 생기는 것을 보고 나는 오히려 다시금 안심합니다. 이러한 감정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아직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나는 두려움에 떠는 모습, 불안감에 떠는 모습, 공포에 질리는 모습은 겁쟁이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기에 우리는 공포를 갖고 있는 것이고 인간이기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이며 인간이기에 불안함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인간이기 이전에 소시어패스나 사이코패스일 수 있습니다.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세상을 다채로운 색깔로 볼 수 있으며 감정을 갖고 있는 인간이기에 우리는 세상을 충분하게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시체를 보고 두려워한다고 해서 용기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채찍질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어떤 일이 두렵다고 해서 스스로를 경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두려움이나 불안은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증거이니 말입니다.

 

 

 

■  친구는 돈보다 소중하다

 

                                        앤드류 매튜스

.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

. 상대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라.

. 가까울수록 예의를 갖춰라.

. 사랑을 얻으려면 자존심을 버려라.

 

.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 말과 행동을 일치시켜라.

. 겸손하되,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혀라.

.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이 돼라.

 

. 상대의 장점을 먼저 칭찬하고, 그 다음 단점을 지적하라.

. 원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사귀려고 애쓰지 마라.

 

 

                

■  살가움이 소중하다

 

                                                                                                              박경순, 비룡소 중에서

가끔 부모님들께 질문 한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의 품에 있다고 느끼면 어떤 감정이 들지, 아니 지금 엄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고 상상하면 어떨 것 같은지. 상상이 잘 안 된다고 한다든가, 불편하거나 어색할 것 같다고 하면 살갑지 않은 것이다.

 

아이가 예뻐서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살가움을 받은 경험이 나와 부모 사이에 없었다는 뜻이다. 그 살가움에 대한 경험이 없는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살가움이 무엇인지부터 배우고 느껴보는 일이다. 부모교육이나 이론은 그 다음이다.

 

살가움이 양육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일차적인 의사소통은 피부 접촉이다. 아이가 예뻐서 어쩔 줄 몰라 바라보고, 안아주는 느낌을 유아는 피부를 통해 받아들인다. 그것이 사랑의 경험이며, 건강한 자아, 자존감으로 발전해가는 마음의 핵이 된다.

 

*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 안다고 했던가. 사랑은 어디까지나 받는 경험이 먼저다. 아이 사랑도 마찬가지. 처음 아이를 낳고 가슴을 쳤던 건, '나도 이렇게 컸겠구나' 하는 자연스런 깨달음 때문이었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받아 안고, 초보 부모로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하나 하나 해주면서 받은 사랑의 크기를 잠시 헤아려보았는데, 사실 잘 헤아려 지지가 않았다.

 

우리는 이걸 잘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를 구성하는 재료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받은 사랑의 대부분은 기억의 세계 저 너머에 있다는 게 삶의 아이러니. 그래서 우리가 동원하는 건 상상력이다. 받았을 법한 사랑을 상상 속에서 재구성해내는 것. 그것도 힘이 된다.

 

"울며 달려와 품에 안기는 아이를 보며 생각한다. '나도 이랬겠지. 하루에도 수십 번 앙앙 울어 제꼈겠지.' 요즘에는 아이를 안아주다 도리어 내가 위안을 받곤 한다. '나를 이렇게 안아주셨겠구나' 하고."

 

그런데 안타깝게도 보편적일 것 같은 이런 경험이 꼭 보편적이지만은 않다. 일차 양육자(대개는 엄마)에게 심한 우울증이 있었다면, 그에게 심한 자기애성 인격장애의 특성이 있었다면, 그 밖의 여러 이유로 아이가 그로부터 애정어린 돌봄을 받지 못했다면 아이 마음 속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우물 같은 게 남아 있게 된다. 그 아이가 자라 엄마 또는 아빠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릴 적 온전하게 받은 사랑이 마르지 않는 샘이 돼서 그 힘으로 제 아이를 키워나가는 것인데, 그런 바탕이 부족하다 보니 아이가 힘들게 하면 금세 지치고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부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어른은 되지는 못한 채, 아이를 힘껏 안아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당혹스러워 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제 안에 아직도 무조건적 사랑을 누리지 못한 외로운, 어쩌면 불안정한 어린 아이가 하나 있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밀어내는 것, 이렇게 불안정 애착은 다시 세대를 타고 넘는다.

 

그래서 살가움이 소중하다. 살과 살이 맞닿는 데서 오는 느낌, 거기서 전해지는 체온, 그 가운데 느껴본 충일한 사랑의 경험이 마음 속 핵이 된다. 다행인 건, 어릴 적 충분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해 불안정 애착으로 진행됐던 경우라도 '획득 애착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안정 애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서로를 안아주어야 할 이유다. 몸과 몸의 접촉만일까. 우리는 얼마든지 말로도 안아준다. 눈빛으로도 안아준다. 서로의 마음을 읽어 줌으로써도 얼마든지 서로를 따뜻하게 포옹해줄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더 살갑게 대하는 그 마음으로 우리 아이들을 좀더 자주 안아줄 수 있게 된다면, 그렇게 세상을 내 쪽에서 먼저 힘껏 껴안는다면 조금은 더 살가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나는 내가 소중하다

           “내가 나에게 애정을 가질 때 인생도 나를 사랑한다”

 

                                                                                                            저자; 호르스트 코넌

“나는 내가 소중하다”의 저자 ‘호르스트 코넨’은 독일 내에서 아주 유명한 인생코치이자 성공한 자문가 입니다. 심리학자인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신을 소중히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기 자신을 함부로 대할 때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무엇을 얼마만큼 요구해야 할지 모르며, 자신에게 맞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낼 척도조차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이죠.

 

자기 자신과 매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변에서 올바른 역할 모델을 찾는 게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점에 대해선 처벌 받는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죠. 게다가 요즘에는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개인적인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바쁜 것이 성공한 삶으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더 많이 인정 받고 남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앉기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낌없이 자신을 희생하고 있죠.

 

           (원제; Sei Gut Zu Dir, Wir Brauchen Dich  호르스트 코넨 저, 한희진 역)

 

이제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 책의 부제는 ‘스트레스와 화로부터 나를 지키는 Take Care 원칙’입니다. 그런 만큼 자신이 자기 자신을 학대하거나 힘들게 대할 때 빨리 알아차리고 응용할 수 있는 원칙들을 소개합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다루고, 그것을 통해 더 큰 성공과 만족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것이죠.

 

아쉬운 점은 ‘깊이’가 좀 부족해서 부황부황한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야 해!’가 전부라는 것이죠. ‘과정’의 생략은 ‘이런 말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잖아!’ 라는 뻔한 느낌까지 들게 합니다. 심리학자가 쓴 글이라기보단 인생선배가 쓴 글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뻔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지키지 못하는 것들이기에 한번은 되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구성은

. 과거에 연연해 하고 있는가? 

. 자신을 억압하고 있지는 않은가? 

. 스트레스와 짜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 당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 나쁜 생각과 충동을 따르게 되는가? 

. 당신은 직관을 믿는 편인가?

.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 자신의 삶을 지키고 있는가?

 

(맺는 글) 자신을 위하라, 우리는 당신이 필요하다!

 

내가 나에게 애정을 가질 때 인생도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파악한 후 ‘받아들이거나 바꾸거나 아니면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특별합니다. 나는 늘 한 편의 전기를 쓰고 있는 인물이며, 그렇기에 오늘 이 시간부터 누구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도록 삶의 지휘권을 돌려 받아야 합니다. 누구나 삶의 주인공이니까요. 물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말이죠.

 

 

 

■  짧은 것은 소중하다

 

                                                                                                                  정진홍, 중앙일보

절정이던 가을단풍이 어느새 낙엽으로 변해 간다.

 

그 절정과 낙하 사이의 시간적 여백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고 짧았기에 더욱 절절하고 소중하게까지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절정은 짧다. 아니 어쩌면 순간이다. 간혹 오래된 책들을 다시 뒤척이다가 어린 시절 곱게 물든 단풍의 낙엽을 골라 책갈피에 끼워 놓은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단풍 든 낙엽의 윤곽이 책 속에 그리기라도 한 듯 스며 있을 때 또다시 느끼게 된다. 짧게 산 단풍의 그 여운이 얼마나 길고 깊으며 진한 것인지를! 이처럼 이미 낙하한 가을 낙엽 하나에도 길고 충만한 생명의 기억들이 담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절정의 짧음을 탓하지 마라.

 

짧은 말이 긴 여운을 남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구구절절 긴 이야기는 때로 흘려 들어도 간명한 일침 같은 짧은 말은 새겨듣는다. 그래서 오히려 짧은 화두가 더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던가. 19년 전 열반하신 성철 스님의 생활 속 화두는 “이 뭐꼬”라는 한마디로 압축된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 퇴설당에서 열반에 드실 때 남긴 마지막 말 한마디 역시 “잘 하그래이”뿐이었다. 그 즈음에 성철 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뵙겠다며 사람들이 해인사로 몰려들어 산사로 향하는 길이 길고 길게 장사진(長蛇陣)을 이뤘지만 정작 스님의 가르침은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처럼 짧고 간명했다. 그래서 더욱 오래도록 기억되고 소중한 것으로 남아있는지 모른다.

 

실천적인 경제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이기도 했던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썼다. 그런데 “작은 것이 아름답다”면 “짧은 것은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엊그제 올해로 10년째 된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의 개막을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20여 분 전후의 짧은 시간 동안 상영되는 단편영화는 다소 난데없는 전개와 생뚱 맞은 결말에 당혹스럽기까지 하지만 그 이면에는 진실의 단면이 묘하게 스며 있다. 그래서 짧지만 소중하다.

 

이 영화제의 개막작은 ‘주리(Jury·심사위원단)’였다. 20여 분 남짓한 영화의 줄거리라고 해봐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어떤 영화에 대상을 주니 안 주니 하며 충돌하고 다투는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이 좌충우돌하는 영화를 감독한 이는 다름아닌 김동호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장이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맨땅에서 일궈낸 한국, 아니 세계영화계의 전설이다. 하지만 올해 만 나이 일흔 다섯을 넘긴 그가 20여 분짜리 짧은 영화를 만들어 신참내기 감독으로 ‘입봉’한 것이었다. 세상적 나이로 결코 짧지 않게 살아온 그는 “이왕 이 바닥에 발을 디뎠으니 앞으로도 길게 더 많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모두가 웃으며 그의 말을 들었지만 나는 왠지 그의 말이 빈말 같지 않았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이 설사 짧게 끝날지라도 적잖게 긴 여운을 남길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정말이지 짧은 영화를 보고 긴 수다를 떤 느낌이랄까? 단편영화제 개막식 뒤풀이가 그랬다. 둘이 합쳐 영화경력 100년이라는 안성기, 강수연 두 국민배우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스크린 안과 밖에서 모두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화로 꿈을 꾸고 꿈이 영화를 만든다”던 일본 감독 도미야마의 담백한 건배사 ‘간빠이’는 너무 짧고 간명해서 되레 매력적이었다. “장자(莊子)”에서 이르길 “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길게 늘여주어도 괴로움이 따르고,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잘라 주어도 아픔이 따른다(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고 했다. 단풍의 절정은 짧고 낙엽의 낙하는 길다. 고승의 화두는 짧으나 가르침은 가없다. 우리 인생도 짧지만 소중한 순간들이 있다. 거기 진짜 인생의 참 맛이 숨어 있다. 그 짧지만 소중한 순간 순간들을 이 늦가을에 놓치지 말자. 어차피 인생 역시 짧고 긴 여운의 영화니깐.

 

 

 

■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

 

                                                                                                                 이상원, 2006. 1.

테리 시아보 사건과 배아줄기세포 추출을 둘러싼 논쟁이 보여 주듯이 지난 2005년은 과거 어느 해보다 생명의 가치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던 한 해였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생명 윤리 논쟁의 중심에는 첨단 과학기술의 바른 용도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첨단 과학기술은 현대인의 생명 증진과 삶의 질 향상에 상당히 큰 공헌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적절한 방향 설정과 절제 없이 남용될 때 현대인의 삶, 나아가서는 현대인의 생명 그 자체에 심각한 위해를 초래한다. 자동차나 비행기가 현대인의 삶을 편리하게 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자동차와 비행기 사고로 인하여 생명을 빼앗기고 있다.

 

컴퓨터 및 정교한 의학 기술은 불치로 여겨졌던 많은 질병을 치료하고 있지만, 배아와 같은 힘없는 생명체를 미시적 차원에서 마음대로 조작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원자력이 전기 생성과 방사선 치료 등에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자력 발전을 하고 남은 잔재인 열화우라늄탄은 살상용 폭탄으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폭발이 일어난 지역을 방사능으로 오염시켜 인류의 생명에 심각한 질환을 유발한다.

 

수십만 종류가 넘는 인공 합성 화학 물질들은 다양한 물품들을 생산하여 현대인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었으나, 이것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온갖 분비물들은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암이나 생식기 이상 등과 같은 다양한 질병의 원인물질로 작용하기도 한다.

 

생명의 무게는 천하를 합한 것보다 무겁다.

 

첨단 과학 기술이 유물론적 인간관, 효율성을 절대화하는 공리주의, 경제적 이익을 최상의 가치로 간주하는 자본주의, 어떤 절대적 규범의 실재도 인정하지 않는 후현대주의 등과 같은 이념들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가 될 때 기술은 인간 생명의 존립을 위협하는 흉기로 둔갑할 수 있다.

 

여기서 불가피하게 두 가지 문제가 제기된다. 첫째는, 인간 생명의 가치는 어떤 이념적 가치, 특히 다수의 인간 복리를 위하여 희생될 수도 있는 가치인가, 아니면 모든 복리적 가치를 넘어서는 절대적 가치인가?

 

둘째는, 인간의 생명은 일부 생명윤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질적으로 가치 있는 생명과 질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생명으로 차등화 될 수 있고, 그 결과 상황에 따라 질적으로 열등한 생명은 질적으로 우등한 생명을 위하여 희생될 수도 있는가, 아니면 모든 인간의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따라서 동등한 차원에서 존중 받아야 하는가?

 

이 중요한 질문들에 대하여 성경은 어떤 답변을 제시하는가? 성경은 인간의 생명은 그 어떤 복리적 가치에 의해서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과 모든 인간의 생명은 아무리 기능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동등하게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와 같은 성경의 제시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은 천하보다 중요하며, 태중의 생명체도 인간이며, 고통 속에 있는 인간도 인간이라는 관점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첫째로, 인간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인간은 신적인 존엄성을 부여 받는다. 인간이 타락한 순간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인정을 받을 만한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상실했지만, 타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영이신 것처럼 영을 지니고 있으며, 영을 표현하는 신비로운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영과 육체를 포함한 전인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의 형상이라고 한다. 모든 인간은 영을 지니고 있으며 영을 표현하는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동등하게, 차별 없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모든 인간은 차별 없이 신적인 존엄성을 부여 받는다.

 

둘째로, 인간 생명의 무게는 천하를 다 합한 것보다 무겁다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인간관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 16:26)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천하란 인간이 이 세상에서 획득할 수 있는 모든 공리적 가치들의 총체를 가리킨다.

 

저울의 한쪽에 모든 공리적 가치들을 올려놓고, 저울의 다른 쪽에 한 인간의 생명을 올려놓았을 때 한 인간의 생명을 얹은 쪽이 더 무겁다는 것이 예수님의 관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이 지닌 가치는 세상이 주는 가치들을 항상 능가하는 절대적인 가치라는 것이 성경의 관점이다.

 

이와 같은 관점은 100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에서 한 마리가 길을 잃었을 때 99마리의 양들이 가는 행로를 중단시키고 한 마리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의 행로에도 나타난다. 거라사의 마을 사람들이 귀신들려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해서 내다 버린 한 영혼을 위하여 돼지 2,000마리를 가차 없이 희생시키신 예수님의 분노에 찬 행동(막 5:1~20)도 같은 논점을 전달한다.

 

. 하나님의 형상을 담은 인간 생명은 존중돼야,

 

셋째로, 성경은 현대 학명으로는 배아라고 불리는 자궁 속의 작은 생명체까지도 영혼을 가진 존엄한 인간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성경은 자궁 속의 태아에 대하여 어떤 시점도 구분하지 않고 영혼을 가진 인격적 주체로서 대우한다. ‘나’라든지, ‘너’와 같은 인칭 대명사를 사용하거나(욥 31:15, 사 44:24, 렘 1:5), ‘아이’(눅 1:44)라든지 ‘구주’(눅 1:46,47)라는 인격체를 가리키는 표현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야곱이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호 12:3)는 표현이나 태중의 세례요한이 “성령이 충만했다”(눅 1:15)거나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오는 것을 보고 태중의 세례 요한이 “뛰놀았다”(눅 1:41)는 표현 등은 자궁 속의 생명체가 인간이 아니면 이해될 수 없는 표현들이다.

 

넷째로, 사람들 눈에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생명도 하나님의 형상이요, 천하보다 귀중한 인간 생명으로서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어떤 생명윤리학자는 생물학적 생명과 전기적 생명을 나눈 후에 전기적 생명을 상실한 채 생물학적 생명만을 유지하는 인간의 생명에 대하여 차등을 두기도 하지만, 이 해석은 낙태나 배아 실험을 허용하기 위한 이론에 불과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적 차별을 위한 생물학적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

 

2006년 한 해 동안 진행될 ‘생명이다’ 시리즈가 인간의 생명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다른 가치보다도 소중한 절대적 가치이며, 모든 인간의 생명은 동등하게 존중 받아야 한다는 생명의 원칙들을 확인하고 독자들에게 각인 시켜 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은 생명의 원칙들을 규범적 판단의 기준으로 유념하면서, 배아 실험이 자행되고 있는 생명 공학의 영역을 비롯해 낙태와 안락사를 점점 더 허용하는 분위기, 고령화와 노인 인구의 급격한 증가로 위기에 처한 노인들의 삶, 각종 암과 생식기 질환의 급격한 증가, 전쟁으로 죽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와 고아를 양산 해 내는 교통사고, 대량 살상 무기의 이용이 불가피한 현대전 등과 같은 현실들이 예리하게 진단, 분석, 비평되고 대안이 모색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네 인생만 소중하냐? 내 인생도 소중하다.”

 

                                                                                                                            김부하

나이 들어 손주를 돌보는 일이 힘들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커가는 아이들과 함께 행복과 감동을 느끼며 늙어가는 일이야말로 노년을 풍요롭게 보낼 썩 괜찮은 방법이 아니겠느냐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육아에서 조부모의 역할이 커지면서 최근에는 할아버지가 기록한 육아서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생의 황혼기를 살고 있는 어른들의 사려 깊고 묵직한 이야기를 담은  이창식 에세이 일부이다.  

 

엄마!, 부탁해!,,,염치 불구하고 엄마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렵사리 꺼낸 얘기에 “네 인생만 소중하냐? 내 인생도 소중하다.”며 거절 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손자를 맡아 보니 ‘내 인생’이란 게 몰래 먹겠다고 감춰둔 케이크 조각처럼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손자 녀석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고, 걸핏하면 떼쓰고, 지칠 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이 모서리에 헤딩이라도 할까 봐 눈을 못 떼고 전전긍긍하다 보면 할머니는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다. 콧물 흘리고 배아프다고 하면 할머니는 더 아파한다. "똥이 촌수 가린다."고 하면서, 손자 똥을 만진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사느냐며 비웃기까지 한다."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나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대답이었으니까. 우선 꼭 이렇게 되묻는다. "손자 안보는 대신 무슨 대단한...가치있는 큰 일을 하시는데,,,?  내 자식이 도와달라고 애원하는데,,, 내 손자가 남의 손에 맡겨지는데,,, 이유가 어디 있어,,,?...나는 엄마이고, 부모다. 

 

요즘 내 삶이 한결 더 보람차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전원생활 즐기며 여행 다니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봤자 뭐가 남겠나? 손자 봐준다고 해외여행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서너 번 갈 때 한 번 가고, 못 간 나라들은 DVD로 보면 되는 거지. 어차피 세상을 다 볼 순 없지 않은가. 다 본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뙤약볕 자외선에서 하는 운동 역시 그러하다. 

 

내 자식들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나?,,,어머니가 저 대신 아기를 잘 키워주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지. 직장생활도 열심히 할 수 있으니 회사나 국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제 속으로 낳은 새끼를 어머니가 대신 키우느라 고생하는 거 보면서,  부모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지 몰라. 고마움도 새삼 깨닫는 것 같고. 부모 입장에서는 사실 그게 더 고맙고 기특해서, 손자 키우느라 진이 속 빠져도...보람은 최고다.  

 

손자한테 푹 빠져 남편은 뒷전이 되어버린 아내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예쁘게 늙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도 소중하다”며 자식의 어려운 처지를 나 몰라라 하는 어미보다는, 어떤 때는 펑펑 울고 싶다고, 너무 힘들어 하면서도 날마다 손자와 씨름 하는 그녀가 훨씬 더 아름다워 보인다.  

 

앞으로는 아내가 짜증을 부려도 웬만하면 다독거리고 도와줄 생각이다. 나도 짜증나면 못 참는 성질이라 마음먹은 대로 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내의 인생이 내 인생이고, 내 아들의 인생도 내 인생이고, 우리 며느리와 손자의 인생도 틀림없는 내 인생이고, 그것들을 모두 합친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이 정말 소중하다.  

 

"손자는 할아버지 귀에다 비밀이 있단다. 이 세상에서 할아버지가 제일 좋단다."... "할머니 귀에도, 비밀이 있단다..."..."할아버지와 목욕하고, 바둑두고, 숙제하고, 팡팡싸움하고, Lego, 로봇, 카드게임하고, 책 읽으면서, 할아버지와 같이 잔다. 자는 사이 할아버지 못 가게 할아버지 옷을 감춘다." ...손자와 추억 만들기는 진행 중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子息農事가 부모의 노후를 보장하던 시대는 지났다...그러나, 子息農事가 부모 인생의 성적표임은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좋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는 정말 행복합니다."

 

 

 

■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소중하다

 

장자(莊子) 내편(內編)

장자는 우리가 크게 존중할 스승으로 진인(眞人)을 내세우고 있다. 진인은 변화하는 바깥 세계에는 관심이 없고, 집착하는 게 없으니 시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는 외물에 구애 받지 않으니 근심걱정을 모르며, 잠자리에서는 꿈조차 꾸지 않는다. 이 처럼 자연에 순응한 채 욕심 없이 살아가는 그는 정치에 대해 늘 초월적인 자세로 일관하는 것이다.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소중하다.”

 

무릇 배를 골짜기에 숨기고 산을 못 속에 감춰두면 안전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한밤중에 힘센 자(시간의 흐름을 뜻함)가 그것을 지고 달아날 수가 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헤아리지 못한다.

작은 것은 큰 것 속에 숨기면 알맞기는 하나 잃어 버릴 수가 있다.

 

    夫藏舟於壑(부장주어학) 藏山於澤(장산어택) 謂之固矣(위지고의)

    然而夜半有力者負之而走(연이야반유력자부지이주)

    昧者不知也(매자부지야)

    藏小大有宜(장소대유의) 猶有所遯(유유소둔)

 

만약 천하를 천하에 숨겨 둔다면 잃어 버리지 않으리라(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방임한다는 뜻).

이는 바로 만물의 위대한 진리이다.

사람들은 이 무한한 대자연 속에서 어쩌다 인간의 형체를 지니고 태어난 것을 기뻐한다.

하지만 인간의 형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갖가지로 변하게 마련이다.

 

    若夫藏天下於天下(약부장천하어천하) 而不得所遯(이부득소둔)

    是恒物之大情也(시항물지대정야)

    特犯人之形而猶喜之(특범인지형) 而猶喜之(이유희지)

    若人之形者(약인지형자) 萬化而未始有極也(만화이미시유극야)

 

만약 우리가 이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기쁨은 헤아릴 수 없게 된다.

그러기에 성인은,

아무것도 잃을 염려가 없는 경지에서 노닐며,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시인하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도 좋고 오래 사는 것도 좋으며, 시작도 좋고 종말도 좋다고 한다.

 

    其爲樂(기위락) 可勝計邪(가승계야)

    故聖人(고성인)

    將遊於物之所不得遯而皆存(장유어물지소부득둔이개존)

    善夭善老(선요선로) 善始善終(선시선종)

 

그러나 만물이 매어있고 모든 변화를 낳는,

(道)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人猶效之(인유효지) 又況萬物之所係(우황만물지소계)

    而一化之所待乎(이일화지소대호)

 

 

 

■  생명은 소중하다

                                                                                                   시드니 우리교회

인간에 대한 바른 관점이 세상을 밝게 한다

 

창세기 1:26-28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 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장 마지막에 인간을 지으셨다. 이를 기록한 성경 말씀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세 가지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다른 피조계와는 달리 인간을 만드실 때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의논이 있었다는 사실이며, 두 번째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인간에게 모든 피조세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는 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서로 의논하셨다는 성경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거북한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우리’(창1:26)라는 복수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이 껄끄러운 기록에 대하여 수정하지 않았다. 성경에 대한 유대인의 신뢰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밝은 진리의 빛을 기대하면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경을 가감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창조를 의논하시면서 인간의 타락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제2위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범죄 하여 영적으로 죽은 인간들을 위한 십자가 죽음을 작정하셨고. 그리고 제3위이신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선택 받은 백성들에게 적용시키는 구원의 업무를 맡기로 하셨다. 이런 바탕에서 성부 하나님은 창조의 실행과 작정을 하셨다.

 

인간은 다른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부가적이고 2차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 대하여 특별한 의도와 선하신 계획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에 있어서 절정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는 일에 자신의 지혜와 능력과 정성을 다 모으셨다.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이 말씀을 일차적으로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강대국의 종으로, 부속 인으로, 장식품으로 살았다. 이제 그들은 수백 년간 길들여진 노예의식에서 벗어나야 했다.

 

오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면에서 인간의 고귀함과 소중함을 알려준다.

인간을 생산의 도구로만 보거나 물질로 보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성찰하고 그릇된 사상에 의하여 왜곡되어진 인간관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라.

 

 

 

■  기업의 문화와 철학과 가치는 소중하다.

 

                                                                                                                    Gos&Op 2012

이 글도 어제 다음 제주 오피스에서 임정욱님의 강연에서 시작합니다. 정욱님의 강연의 내용을 요약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그 중에서 잠시 다뤘던 내용, 쿡선언 The Cook Doctrine,에서 영감을 받아 적습니다.

 

The Cook Doctrine은 2009년도에 1월, 스티브 잡스의 병가 중에 임시 CEO를 맡고 있던 팀 쿡 Tim Cook이 컨퍼런스콜 Conference Call에서 잡스의 부재시의 애플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말합니다. 이 답변이 쿡선언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쿡선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We believe that we’re on the face of the Earth to make great products, and that’s not changing.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지구 상에 존재하고, 그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We’re constantly focusing on innovating.

우리는 끊임없이 혁신에 집중할 것입니다.

 

We believe in the simple, not the complex.

우리는 믿습니다. 복잡성이 아닌 단순함을.

 

We believe that we need to own and control the primary technologies behind the products we make, and participate only in markets where we can make a significant contribution.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주요 제품을 뒷받침하는 주요 기술들을 소유하고 통제해야 하며, 우리가 주요하게 기여할 수 있는 시장에만 참여해야 합니다.

 

We believe in saying no to thousands of projects so that we can really focus on the few that are truly important and meaningful to us.

우리는 믿습니다. 수천 가지 프로젝트들을 거부해야만 우리에게 진정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소수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We believe in deep collaboration and cross-pollination of our groups, which allow us to innovate in a way that others cannot.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그룹들 간의 깊은 협업과 상호수분을 통해서 다른 이들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혁신을 이룩합니다.

 

And frankly, we don’t settle for anything less than excellence in every group in the company, and we have the self-honesty to admit when we’re wrong and the courage to change.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사내의 모든 그룹들이 탁월해야만 하고, 우리가 틀렸을 때 그것을 인정하는 정직성과 변화를 꾀하는 용기를 갖고 있습니다.

 

And I think, regardless of who is in what job, those values are so embedded in this company that Apple will do extremely well.

그리고 저는 생각합니다. 누가 잡스의 위치에 있던 상관없이 그런 가치관이 회사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어서 Apple은 극히 잘 해낼 것입니다.

 

- Tim Cook, Acting Apple CEO, January 2009 FQ1 2009 Earnings Call

 

이상의 쿡선언은 팀쿡이 컨퍼런스콜을 위해서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늘 준비된 멘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위의 선언이 바로 애플의 문화, 철학, 가치이고, 그것이 전 직원들에게 공유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팀쿡이 임시 CEO가 아니었더라도 표현은 달랐을지는 몰라도 위와 비슷한 답변이 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의 조직, 기업이 확고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소중합니다. 그런 문화를 바탕으로 회사가 스스로 성장해 나갑니다. 그들이 공유하는 가치 위에서 모든 문제에 대한 결정이 쉽게 내려 집니다. 그들의 가치와 철학에 반하는 결정은 단호히 No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단기적으로 수익이 발생하더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맞지 않다면 그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거부해야지 만이 그들이 그들의 문화, 가치, 철학을 확고히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 글을 보는 순간 애플이 진정 부러웠습니다. 그들이 세계 최고의 시가총액 기업이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멋지고 혁신적인 제품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훌륭한 인재들을 보유하고 있고 좋은 지원체계를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확고한 문화, 가치, 그리고 철학을 가졌고, 그것이 전사에 공유되어있다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와서 다음의 미래는 어떨 것 같습니까? 또는 다음의 문화, 가치, 철학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바로 다음의 비전은 이러이러하고, 이런 가를 추구합니다라고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세상을 즐겁게 변화~~'라고 말하면서 끝을 그냥 얼버무릴 것 같습니다. 여러 분들도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 회사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당신 회사의 문화는 무엇입니까? 당신 회사의 가치와 철학은 무엇입니까? 바로 대답할 수 있는가요? 그렇지 못하다면 그 회사를 당장 그만 두거나 그 회사의 제대로 된 문화, 철학을 바로 세우는데 기여를 해야 합니다. 저는 일단은 -- 현실적인 환경이 변한다면 어떻게 될지 장담을 할 수는 없으나 –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지금으로선 지치지 않고 전진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작은 성공이라도 이룩하길 바랄 뿐이지만...

 

(추가. 2012.05.05) 브랜드라는 것은 고객/사용자 또는 외부인이 특정 기업이나 그 기업의 제품/서비스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반면에 (기업) 문화는 그 기업의 내부인 (또는 협력 업체들)이 느끼는 그 기업에 대한 감정입니다. 아무리 우수한 브랜드파워를 가졌더라도 내부 인이 느끼는 문화적 빈곤은 그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확고한 기업문화/철학을 바탕으로 직원들이 단합하고, 그러는 가운데 강력한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  모든 꿈은 소중하다  

 

꿈이란 건 크지 않아도 됩니다

작아도 멋진 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꿈은 많아도 좋습니다

욕심꾸러기처럼 여러 개나 갖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건강하다는 증거일 겁니다

 

먼 꿈도 멋지지만

가까이 있는 꿈도 소중합니다

 

오늘의 꿈, 내일의 꿈

다음주의 꿈, 내년의 꿈.....

 

끝없이 거듭된다면

살아가는 하루 하루가 얼마나

설렘으로 가득 차겠습니까...

 

        가나모리 우라코,  “참으로 마음이 행복해지는 책”

 

 

 

■  여행은 소중하다.

 

                                                                                                       강영신

프랑스에 갔다 왔다.

프랑스를 보러 갔지만, 나는 거기서 나의 고국을 보았다.

파리를 걸으면서 난 한국의 거리를 생각했고, 프랑스의 유산을 보면서 한국의 유산을 생각했다.

프랑스의 리용역에서, 1호선 신도림역의 분주함을 생각했다.

프랑스 음식을 먹으면서 한국의 김치찌개와 냉면이 먹고 싶었다.

지나가는 프랑스인을 보면서 내 주변 철수와 영희를 생각했다.

 

결국 여행은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인가보다.

나와 내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시간인가보다.

 

 

 

■  "융합은 힘들다 그래서 소중하다"

 

                                                                                                                              김정태

많은 곳에서 융합을 말합니다. 특히 '창조경제'가 지난 정부의 녹색성장을 밀어내고 전면에 등장한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더욱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다양한 섹터와 연계되고, 섹터간 구별과 장벽이 허물어지고 아이디어 자체가 현실이 되는 융합(convergence).

 

하지만 융합은 힘듭니다. 융합이 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섹터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다른 섹터에 대한 기대감과 존중입니다. 내 전문분야에 대한 '전문성'(혹은 특수성)을 너무나 높게 생각한다면, 다른 분야의 이야기나 담론은 가치 있게 여기지 못하게 됩니다. 즉, 굳이 다른 분야를 이해하고 다른 분야의 통찰과 아이디어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긴다면 융합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이것저것 융합을 해보고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아니지만 디자인을 활용하고, 기술자도 아니지만 적정기술을 말하고 다닙니다.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전통적인 비즈니스가 아닌 '사회혁신 기업' 또는 소셜 비즈니스를 말하고 다닙니다. 팀과 함께 진행하는 말라위에 진행하는 '햇빛 영화관' 프로젝트는 적정기술, 앙터프러너십, 디자인씽킹이 융합 된 국제 프로젝트입니다.

 

그런데 '융합' 활동을 하다 보면 쉽지 않습니다. 다들 융합을 말할 때는 좋아하지만, 융합을 실제로 하는 사람과 만나면 해당 분야의 사람들은 경계 내지는 '전문성이 떨어지는 아마추어'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그럴 때마다 "융합은 참 어렵구나"라고 느끼게 되죠.

 

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융합은 참 소중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의 부족함과 한 분야의 발전이 사회문제/사회발전이라는 거대 목표의 실현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겸손하게 깨달은 사람만이 융합을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융합을 하는 사람이 소수일 수도 있습니다. 융합은 '내가 이 분야에 모르는 것을 위해 다른 분야의 지식과 경험도 배우고 싶다'는 연약함을 드러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융합은 내 분야가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더 소중한 가치와 배울 것이 있음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시작됩니다. 섹터와 섹터가 만나는 협업이 융합이 아니라, 섹터를 넘어 다른 섹터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바로 협업 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다양한 융합을 계속 해보고 싶습니다. 비즈니스와 디자인, 사회기술/적정기술이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과 사회적 기업가 정신(social entrepreneurship)으로 연계되는 교차로에서 계속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계속해나가고 싶습니다. 힘들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진 않겠습니다. 포기하기에는 융합이 가진 가치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떤 융합을 하고 있습니까?

 

혼란스럽기만 하다. 질서가 없으니, 더욱더 어렵다. 인생이 왜 이렇게 복잡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에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갈등은 심화되고 인생에 무엇이 제일 소중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애매하기만 하다. 돌이켜보면 무엇이 제일 소중한 것인지 알쏭달쏭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 것은 바로 소중한 것은 찰나에 사라진다는 점이다.

 

 

 

■  인생의 소중한 것들

 

                                                                                                                                  春城

……

낮아진 기온에도 가을의 하늘은 높고 맑기만 하다. 가을 햇살이 눈부시니, 내 마음까지 다 환해진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마음이 날개를 달아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 가을 햇살의 눈부심에 젖어 있으니,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이것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가을 하늘의 푸름이 인생을 아름답게 비추어주지만 이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햇살이 구름에 먹힌다거나 해님이 서산으로 넘어서게 되면 찰나처럼 사라지고 만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단 한번뿐인 인생이다. 이왕이면 빛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한번뿐인 인생이니까, 더욱 더 사랑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인생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아무리 인생이 소중하다 하여도 욕심은 인생을 망치는 것이다. 욕심이 한번뿐인 인생을 망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욕심은 당연히 버려야 한다.

 

인생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을 버리게 되면 찰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인생의 소중한 일들은 찰나에 사라진다. 소중한 일들은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소중한 일을 경시하고 모른 체 하게 되면 인생도 함께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찰나에 사라지는 것들을 가슴에 소중히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빛의 속도로 멀어지는 것들은 가슴에 새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다. 스스로 실천하기에는 더욱 더 어렵다. 그렇다면 차선의 방책은 있을까? 있다. 사람은 혼자만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생을 빛나게 하는 차선책은 찰나에 사라지는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어울리면 가능해진다. 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모방하여 실천하게 되면 나중에는 스스로도 할 수 있게 된다.

 

가을의 햇살은 영원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가을도 영원하지 않다. 아름답게 빛나는 가을은 시간이 지나면 빛의 속도로 멀어진다. 가을이 멀어지고 나면 어김없이 겨울이 다가올 것이다. 가을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안심하고 있다면, 인생은 빛날 수 없다. 가을의 아름다움도 결국 찰나에 사라진다는 진리를 알고 살아간다면 인생 또한 빛날 수 있다. 인생은 남의 것이 아니다. 바로 내 것이다.

 

한번뿐인 내 인생을 아름답게 빛나게 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찰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하여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은 절대 아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인생의 소중함을 깨닫고 내 인생을 빛나게 해야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다. 가을 햇살이 참으로 눈부시다. 이 또한 찰나에 사라지고 말 것이란 것을 알고 미리미리 가슴에 새기는 것이 좋다.

 

 

 

■  자신이 가장 소중

 

                                                                 천신

이 하늘 아래서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

뭇 생명들도 또한 소중하고 귀하다

 

전부 끌어안고 전부 가야 할 인생이기에

사해의 동포들도 진정 소중하다

 

자신이 소중하듯이 자신의 꿈도 또한

너무 소중하다

 

모든 생명은 길게 연결돼 있음으로

자신이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할 길이기에

천천히라도 걸어나가야 한다

 

그 걸음이 빠르냐 느리냐를 결정했지만

그 시기는 닥쳐오고야 말고

그것에 적응하는 것만이 진정한

희망과 기쁨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