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13.슬픔 (悲)

슬픔

오갑록 2014. 2. 24. 20:46

흥겨운 ......

■  슬픔과 기쁨, 그리고 눈물

 

 

      때로 울컥 하며 솟는 눈물은 내면의 감정에서 발현하는 신체적 반응이다. 안구의 수막을 형성하고 유지하며 윤활, 살균, 이물질 제거 등 시각보호 역할에서 아주 중요한 보호기능이기도 하지만, 슬픔 기쁨 놀람 감격 흥분 할 때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도 하므로, 눈물은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가늠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국어를 배울 때, “눈에 눈이 들어가면 눈에서 나오는 것은 눈물이냐? 눈물이냐?” 라고 하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콩글리쉬로 eye-water, snow-water 정도나 되려나? Tear나 melted-snow 는 왜 그런지 내 정서와는 멀리 느껴옴은 내가 한국 토종이라 그런 모양이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흐르는 것은 감정과 육체가 작동하여 표출되는 현상이다. 배우처럼 자기의지로 흘리는 예외를 뺀다면 대부분 무의식적인 상황이 된다. 감정의 종류나 크기가 눈물의 량이나 시간과 비례하지는 않는다. 처한 사회적 상황이나, 개개인의 가치기준, 개인차에 따라 전혀 달리 작동된다는 특성도 있다.

 

뭇 감정들 중에서, 특히 슬픔은 우리에게 울음이나 눈물을 표출하는 감정으로서 더 자주 작동 되곤 한다. 자기의 가치기준 중 가장 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잃을 때 인간은 슬퍼하게 된다. 그 중요함에는 개인별, 시대별, 지역별, 사회별로 제각기 다를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마실 거리며 먹을 거리가 중하고, 누구는 처자부모형제라는 가족이 중하며, 더러는 금은보화 재산이 그 보다 우선하기도 한다. 이조시대처럼 도덕적 사회서는 효행, 신의, 충성이라는 명분이 목숨보다도 중하게 여길 때도 있었다. 인간은 그들을 잃을 때 많이 슬퍼하고 울며 눈물 흘리곤 한다.

 

러시아 소치에서 열린 22회 동계올림픽이 오늘(2014.2.24.)로 막을 내렸다. 소련은 금메달 13개로 1위를 차지했고, 우리나라는 금.은.동 각각 3.3.2 개로 13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 빙상경기연맹의 잘못을 구실로 러시아 국적을 취했던 안현수 선수가 이번에 따낸 금메달이 3개나 된다. 캐나다가 금메달 10개로 3위임을 고려한다면, 그가 따낸 메달이 없었다면 러시아는 몇 단계 하위로 추락했을 것이다.

 

21회 전기 대회에서 승리한 후, 태극기를 휘감고 돌던 그가, 이번 22회 대회에서 타국의 국기를 감고 그 승리를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슬픔이나 기쁨이란, 시대나 사회의 명분에 따라 전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좋은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이니, 기쁨은 상당 부분이 마음먹기에 달려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1936.8.9.)하고 난 후, 동아일보에 게제한 일장기 삭제사건이 있었던, 그 때, 그 사회 여건의 가치관과는 시대와 사회가 달리했기 때문에 상황은 전혀 다를 수 밖에 없다고 여겨진다.

 

개인 사회 국가의 영광은 관념의 차이에 불과 할 수 있기에, 그로 인한 슬픔이니 기쁨은 시대나 지역 또는 사회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단지 본능에 입각한 감정만이 우리 생명체의 공통적이고 통일된 것이 될 것이다. 따스하고 배부르고 편안하고 건강하며 중심가족이 평온하다면 기쁨이 흐를 것이고, 춥고 배고프고 아프면 그리고 혈육이 편치 못하다면 슬픔의 원인이 될 것이다. 이를 벗어난 이유들은 대부분 부질없고 허황된 욕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남보다, 더 많이, 더 크고, 더 좋고, 더 오래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을 채우지 못하여 슬퍼하고 아파한다면 이 또한 시대나, 사회, 개인의 가치기준 때문이 될 것이다.

 

아무리 없더라도 행복해 하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까지도 기뻐하는 모습들은 종종 듣고 보게 된다. 가치관을 넘어 신념이나 신앙심의 결과물 들 이려니 생각하여도 보지만, 기쁨이니, 슬픔의 원류는 항상 헤아리기 어려운 의문점이 되곤 한다.

 

그렇기에 내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도 모를 때가 허다하다. 사회 형식적이고 객관화된 슬픔이 이유일 때가 더하겠지만,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할 때도 많은 것이다.

 

어릴 때 내가 골려 먹고 하던, 마음 여린 여동생이 있다. 눈을 마주하고 장난 삼아 “너, 지금 운다 울어!” 하고 서너 번만 하면 아무 이유 없이도 울곤 했다. 중고등 학생 때까지도, 그런 장난이 먹혀 들어, 성공한 기억이 남는다. 나이 쉰 살이 다된 지금까지도 “오빠, 난 지금도 누가 운다고 만 하면 눈에서 눈물이 나와!” 학교 국어선생님 이랍시고 감수성이 훨씬 더 예민해서 만은 아닌 듯 하고 ……, 아무튼 이쯤 되면, 개성차이가 분명하고 가족력을 탓할 수도 있다. 나도 마음 여린 부분에서는 그만 못하지는 아니하니 말이다.

 

식사 후, 밥 그릇 따라 붙은 밥 한두 알 젓가락으로 따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순간적으로 눈시울이 핑 도는 순간을 경험한다.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자문 한다. 배불리 잘 먹고, 따스하며, 평온 함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이, 한 톨의 발 알을 오물거리며 함께 씹혀지는 데서 오는 기쁨의 윤활유였다고 생각한다. 3년 만에 재개된 최근 남북이산가족 상봉장의 눈물들과는 아주 색 다르다. 60년 만의 만남이라는 엄청난 슬픔, 한, 기쁨도 아니다. 올림픽 경기장 시상대 위에 선 선수가 손으로 훔치던 기쁨 감격의 눈물과도 다른 차원이다. 허기와 고통으로 보채며 울부짖는 어린아이의 원초적 울음과도 다르다.

 

연초록 풀 잎새, 거기에서 대롱대는 이슬 방울, 그를 가르는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빛, 때로는 대자연의 장엄한 경관 앞에 서서, 고운 선율의 음악을 접하면서, 신앙심도 없는 나 같은 주제에 엄숙하고 호사스레 치장한 대웅전이니 예배당의 위엄에 압도되며  …… 우리는 모르는 사이 감탄 하기도 하고, 눈물이 맺혀 질 때도 경험한다. 뚜렷한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다.

 

나 스스로 때문인지, 자연이나 타자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리고, 그 가치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여 보기도 전에 우리의 마음은 총총 걸음으로 다른 곳 멀리 달음질쳐 버리곤 한다. “혹시 생명체로서 마지막에 가서 경험할 죽음의 순간에 한마디로 써 먹힐 이유가 될지도 몰라” 하는 엉터리 추측은 여전히 성급한 것일까?

 

“그래도 난, 행복했어!”

 

그렇듯 이유 모를 눈물 보다는, 헛된 욕심 위에 흘리는, 가치 없고 부끄러운 눈물들이 누구나 더 많을 것 같다. 많은 경우, 슬픔이 아닌성 싶은데 한 없이 슬퍼하고 아파한다. 부, 명예, 건강, 생명 …… 대다수는 시대와 사회가 만든 허황된 허울임을 망각한 채 몸부림치곤 한다. 그렇기에, 건전한 종교, 그러한 종교생활은 우리사회를 밝고 건강하게 안내하고, 개개인의 삶을 안정되게 하는데 무엇보다 큰 몫을 차지하는 사회제도라고 생각한다. 단지, 세속적인 영역다툼의 꼴 사나운 모습들은 부정적인 작은 그늘 정도이리라고 위안 삼아 본다.

 

 

    2014.2.24.(월)

    오갑록

 

 

 

ㅁ 슬픔

                                                                                                                           (위키백과)

슬픔은 부정적인 감정 표현의 하나이다. 탈력감, 실망감이나 좌절감을 동반하고 가슴이 맺히는 등의 신체적 감각과 함께 눈물이 나오고, 표정이 굳어지며, 의욕, 행동력, 운동력 저하 등이 관찰된다. 또한 눈물을 흘리며 말로 할 수 없는 소리를 내는 '우는' 행동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사랑, 우정, 의존, 공영의 대상이 없어졌을 때 나타난다. 슬픔은 '깊다/얕다'라고 표현되고, 대상이 자신과 관계가 강할수록 깊은 슬픔이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는 가장 큰 슬픔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다.

 

처음은 노여움에 의한 그 사실의 부정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의 뇌에서 그 현실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복받쳐 오는 감정이다.

 

 

 

   “슬픈 날들의 철학”       

                베르트랑 베르줄리 (개마고원, 2007년)  

                                                                                                                        (서평 중에서)

'슬픔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덮어두기 마련이었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우리가 학대하는 무고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준다. 슬픔은 모든 폭력, 모든 전쟁이 반드시 희생자를 낳는다는 사실을 환기해주고,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깔아뭉개는 삶들의 기억을 존재하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그로부터 더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16)

 

헨리 뉴엔 신부가 신앙의 관점에서 삶에 대한 성찰을 하고, 명상과 기도를 통해 얻게 된 위안과 평화를 이야기 하고 있다면 이 책의 저자는 철학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겠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 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 뿐만이 아니라 고통, 부당함, 우울, 소외, 질투, 무관심, 불안, 신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경험하게 되는 감정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오류적 감정을 바로 잡고 영혼을 치유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미는 흔히 하듯이 사람이 당하는 악을 정당화 시키고자 하는데 있지 않고, 더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게 도와주는 힘들을 발산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즉, '자신이 삶에 의해 부당한 고초를 겪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왜 하필 나일까?'라는 질문이 '나만 아닐 이유가 있는가?'로 바뀌는 것이다."(96)

 

이처럼 감정적으로 '왜, 내가'라는 의문에서 '고통'이라는 감정이 일상에서의 감성일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바뀌게 된다는 의미에서 신앙의 관점이든 그렇지 않든 내적성찰이 이루어지게 된다.

 

'삶 속의 모든 건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도 홀로 고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사정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죽음은 어떤 면에선 삶의 끝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그 한계가 곧 본질을 향해 열리는 관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삶의 끝이 의미하는 드라마를 간과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면, 죽음과 연관된 보다 깊은 차원의 삶이 있다는 것 또한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320)

 

한 인간과 죽음을 향해 가는 듯 보이는 그의 인생 사이에는 또 다른 무엇이 존재한다. 삶 그 자체와 더불어 삶의 정신을 살게 하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언뜻 이 세상의 법칙처럼 보이는 슬픔 말고 다른 것을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329)"

 

 

누구든 자기나 남을 위해 이득을 끌어낼 만하다고 확신할 때, 고통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제야 비로소 아픔을 감당할 여력을 갖게 되며, 시간에 맞서는가 하면, 심지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힘까지 갖는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사태는 보다 덜 명확해진다. 아무 쓸모없는 고통을, 더군다나 오랜 시간 겪는다는 것은 이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없다. 요컨대 무용하다는 감정은 곧바로 절망에 가 닿는다.

 

  하긴 고통에 관한 자발적인 철학도 존재한다. 이는 유용한 고통은 받아들이고 무용한 고통은 거부하는 계산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겉으로 보기엔 합리적이지만, 사실 그러한 계산은 음흉한 현실을 반영할 따름이다. (...) 게다가 고통이 유용하다는 판단 자체란 얼마나 추상적인가! 고통의 유용성에 대한 사고에 몰두할 때, 우리는 종종 타인의 고통을 생각하지 자기 자신의 고통을 생각하진 않는다. 이는 참으로 손쉬운 발상이다. 남을 고통에 맞서도록 떠미는 일은 언제나 쉽다. 반면 자기 자신이 고통의 최전방에 나서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로부터 합리화의 거짓농간이 시작된다. 그것은 고통을 겪지 않는 자들이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떳떳해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반면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어주지 못한다.

 

특별히 사유를 즐기지 않는 이상, 보통의 의사결정 기준 중 하나는 유용성이다. 저것이 나에게 유용한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대답이 의사결정으로 이어진다. 세속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고통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 그나마 유용성을 기준으로 고통을 받아들이는 정도만 해도 감탄사를 낼 정도가 아닌가!

 

하지만 유용성이란 판단의 잣대는 그 바닥을 금새 드러낸다. 유용하기 때문에 수용한다는 뜻은 유용하지 않으면 수용하지 않겠다는 뜻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생각을 단순화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말로도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고통은 인내를 요구한다.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낸다 던 성경(로마서 5장 4절)을 떠올려본다면 고통 자체가 유용 하다기 보다는 고통으로 인한 인내가 유용함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통 자체로 유용함과 무용함을 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   “슬픔은 철학보다 깊다” 

 

              “나르시스의 꿈” 펴낸 철학자 김상봉씨 대담 중에서.(2002.02.)

         

 나르시스 신화와 만해의 시가 만날 수 있을까. 철학자 김상봉씨는 나르시스의 꿈에서 서양 정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만해의 눈물에서 서양 정신을 극복할 수 있는 ‘우리의 철학’을 모색한다. 김씨가 최근에 펴낸 “나르시스의 꿈”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서양 정신사에 대한 전면적인, 그리하여 매우 새로운 비판이지만, 그 비판은 ‘우리의 철학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고통스러운 모색으로 귀결된다.

 

“서양 철학사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유를 추구해온 나르시시즘의 역사였다.”

 

철학의 현실이나 ‘한국병’에  대한 그의 지적은 그의 눈빛처럼 맑고 깊었다. 그에게 철학은 엄숙한 설교가 아니다. 숭고한 가치를 가르치는 주류 철학이 아니다. 그의 철학은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가장 낮은 곳의 눈으로 세계를 보며, 그 낮은 존재들의 동경을 보편적 언어로 번역해내려 한다. 객체로 머물러야 했던 삶, 즉 한국인의 삶을 주체화 하려는 것이다.

 

“서양의 자기 비판은 사이비 자기 비판”

 

김상봉씨는 호메로스에서 헤겔에 이르기까지 서양 정신의 역사를 뒤따라가며 나르시시즘이 전개된 양상을 되짚는다. 얼핏 보기에 서양 철학사는, 특히 니체에서 들뢰즈에 이르는 서양 현대 철학은 진지한 자기 비판처럼 보이지만, 김씨에 따르면, 그 비판은 사이비 자기 비판이다. 서양 철학은 서양 철학의 바깥, 즉 타자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하나의 비판은 하나의 반복이었다.

 

 “한국인은 슬픔의 힘으로 단절과 자기 상실의 역사를 극복해야 한다.”

 

김상봉씨는 서양 정신의 유구한 나르시시즘을 타자적 주체를 알지 못하는 ‘홀로 주체’라고 명명한다. 이 홀로 주체는 타자를 사물화하며 자신의 진리인 자유를 유지한다. 서양 정신의 시원이자 궁극적 지향인 자유는 타자를 노예 상태에 빠뜨리면서 유지된다. 착취와 빈곤의 세계화, 분쟁과 자연 파괴의 세계화, 테러의 세계화가 바로 홀로 주체에서 비롯한다. 나르시시즘의 보편화가 곧 세계화였다. 김씨가 나르시시즘을 비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홀로 주체의 시대는 조종이 울리고 있다. 김상봉의 철학은 타자를 인정하고 타자들이 공존하는 ‘서로주체’의 시대를 꿈꾼다. 김씨는 “우리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 창조된 것처럼 또한 서로 만나기 위해 창조된 것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오직 사람 사이에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거꾸로’ 가는 김상봉 철학은 만해 시의 눈물에서, 함석헌의 ‘고난의 뜻’에서 박동환 교수의 ‘절망의 개념’에서 ‘슬픔의 해석학’을 곧추세우려 한다.

 

슬픔의 보편학은, 슬픔이 철학보다 커다란 지평이라고 선언한다. 김상봉씨에 따르면, 중국에 이어, 일본과 서양을 따라가기 위해 단절과 자기 상실의 역사를 살아온 한국인이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에서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철학적 사유는 분노가 아니라 자기에게로 돌아가는 슬픔 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1992년, 독일 마인츠 대학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김상봉씨는 그리스도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참고)

나르키소스(Νάρκισσος, Narcissus), 나르시스 또는 나르시시스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 인물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등에 등장한다. 나르키소소라는 낱말은 "잠(sleep) 또는 무감각(numbness)"을 의미하는 나르케(ναρκη, narke)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나르키소스는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됐는데, 입맞춤을 하려 하다가 그것이 자기 자신의 반사된 모습인 것을 알아차린 그는 슬픔에 빠져 칼로 자살을 했다. 그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다. 자기애(自己愛) 또는 자기 도취증이라고 번역되는 나르시시즘(narcissism)은 여기서 유래한다.

 

맨리 P. 홀(Manly P. Hall)은 나르키소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하였다. 그는 나르키소스를 잠든 영혼, 깨어있지 못한 영혼, 즉 육의 성품(fleshly nature)에 미혹되어 있는 상태의 영혼을 뜻한다고 보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나르키소스가 물 (고대인들은 일시적이며 환영의 성질을 띤 물질 우주를 상징하는 데에 이 유동성의 변하기 쉬운 원소를 사용하였다) 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계속 바라보다가 그 비친 모습을 붙잡으려 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린 것과 똑같이, 그렇게, 인간은 자연("물질 우주")이라는 거울 속을 계속 바라보다가, 거기에 보이는 비쳐진 모습인 지성(知性) 없는 육신(senseless clay: 식별력이 없는 흙)을 자신의 참된 자아로 받아들여 결국 자신의 육신의 삶을 자신의 불가시의 불멸의 자아를 전개할 기회로 삼지를 못한다.

 

 

 

 

■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가?

           신체화 된 마음을 중심으로  

                                                                                                               (철학탐구, 2012.)

 

Where is sadness come from? - focused on "embodied mind" and the origin of sadness

 

이 글은 슬픔의 메커니즘과 슬픔의 이해 방식을 알아보고, 우리는 슬픔을 어떻게 개념화 하여 긍정적인 힘으로 바꾸어나갈 것인가를 모색한다. 필자는 슬픔이라고 하는 추상적 감정은 신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경험화 되고 개념화 되어 일상적으로 나타나지만, 항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사라지는 감정이라는 관점을 취한다.

 

이 글은 먼저, 레이코프와 존슨이 제안하고 있는 ‘신체화 된 마음 (embodied mind)’의 개념을 통해 ‘슬픔의 신체성’을 논의하고, 다마지오의 인지생물학적 논거를 반으로 ‘슬픔(감정)의 발현 메커니즘’을 조망한다. 아울러 언어철학과 인지언어학 분야의 논의를 근거로 슬픔의 개념화 방식과 이해의 가능성을 고찰한다.

 

또한 신체를 기반으로 한 슬픔의 양상을 ‘주체-자아’ 은유와 ‘행위-위치’ 은유를 적용하여 상실과 좌절의 두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고, 자연적 감정인 슬픔을 ‘도덕적 슬픔’으로 포착하고 있는 맹자의 시도를 ‘슬픔의 도덕화’란 관점에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현재적 슬픔을 넘어서려는 적극적 시도를 ‘슬픔의 상징화 과정’으로 파악하고, 이를 ‘슬픔의 파도타기’라는 맥락에서 논의한다. 왜곡된 수동적 슬픔으로부터 균형 잡힌 슬픔으로 전환시키려는 실존적 분투는 타자와의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타자로서의 자신과도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량이자 치유적 힘이다.

 

 

 

■  울음의 미학, 그 역동성

         -신경림론-

                                                                                                                      김낙현 논문 중에서

. 울음의 시학과 서정

 

신경림은 한국 현대시 전통 속에서 울음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여 정서를 표출하고 현실을 육화(肉化)시킨 시인으로서 그 존재 가치가 더욱 빛난다. 신경림 시 세계는 이미 여러 평자들에 의해서 서사성의 확대라든가 민중성을 기반으로 한 리얼리즘의 성취 등으로 논의되어 왔다.

 

실상 이런 논의는 신경림 시 세계를 집약해 놓은 듯한 흐름으로서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시적 특질을 가능하게 했던 기저에 울음의 정조가 은밀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신경림 시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울음의 정조와 그 역동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좀처럼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 울음은 신경림 시에서 매우 놀랄만한 역할을 수행한다.

 

신경림 시에 나타난 울음의 이미지와 그 힘을 살펴보기 앞서, 우선 문학작품에서 울음은 과연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 알아보자. 물론 이 문제에 대한 조명은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지만, 뒤에서 언급될 신경림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한 차원에서 시에 한정하여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인위적인 분류가 되겠지만, 우리 시사(詩史)를 두루 살펴볼 때 슬픔의 대명사인 울음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양상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 차원의 울음과 사회적, 역사적 현실 차원의 울음이다.

 

전자의 울음의 근원은 시에서 객관적 상관물인 사랑의 대상이 상실 함에서 비롯된 것과 인간 존재의 근원적 슬픔에서 발생하는 경우이다. 김소월의 대표작인「진달래꽃」에서 표출된 울음(눈물)은 님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울음으로서, 이 울음은 그의 시의 미학적 특징을 대표하는 슬픔과 정한의 정서로 형상화된다.

 

한편 ‘한국적 비가(悲歌, elegy)의 한 전형’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박재삼 시에서 구현된 울음은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에서 나오는 울음이다. 그의 시「울음이 타는 가을 강」,「밤바다에서」,「포도」등은 좋은 보기가 된다. 이러한 유형의 울음은 김춘수의 경우에도 발견되는데 그의 20편의 초기 작품 가운데 울음 또는 슬픔 등의 비애와 관련된 시가 절반이 넘을 정도로 범람하고 있다.

 

반면 울음이 사회적, 역사적 현실 차원에서 표출된 대표적인 경우로는 서사구조를 토대로 민족의 비극적인 슬픔과 비애감을 빚어냈던 백석과 이용악의 시를 들 수 있다. 특히 탁월한 비극미를 바탕으로 하여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백석의 시는 그 좋은 본보기가 된다.

 

그의 시 「여승」은 온 가족을 잃고 여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불우한 삶을 담고 있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여인의 삶을 ‘산꿩도 서럽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고 읊는다. 이 시는 울음을 매개로 하여 디테일 하게 서술하지 않고도 사회적, 역사적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리얼리즘 시로서 의의를 지닌다.

 

유종호의 지적처럼 ‘페시미즘의 절창(絶唱)’이라고 불리워지는「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도 이런 경향을 띠고 있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시인의 작품을 살펴보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슬픔과 결부된 울음의 색채가 나타나지 않는 시를 찾기란 힘들다. 문제는 시인이 표현한 그 울음의 이미지와 기능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과 그 울음의 근원이 무엇이냐 하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 글은『농무』를 중심으로 한 실제분석을 통해, 울음의 이미지가 신경림 시 전반에 끼친 영향력을 밝히는 데 주력하고자 한다.

 

. 숨은 울음 : 하강 이미지

 

신경림 시에서의 울음은 시인 혹은 시적 화자가 주어진 현실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나타내는 행동양상으로서의 대상이다. 그리고 역동성이라는 개념은 이 울음으로 인하여 신경림 시가 갖게 되는 특성을 말하며, 그 특성이 그의 시를 지탱하게 하는 힘을 가리킨다.

 

신경림의 시집 『농무』에는 모두 60 편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울음 또는 눈물로 표출된 시편만도 23편에 이른다. 슬픔으로 직결되는 울음의 정서는 비단 『농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농무』이후에 간행된 신경림의 모든 시집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일관된 시적 연속성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주조를 이루고 있는 울음에 대한 분석과 고찰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데 하나의 단초가 되며 키워드가 되는 셈이다.

 

신경림의 초기 시에는 예외 없이 울음과 슬픔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울음은 시집 『농무』에서 표출된 울음과 여러모로 대비되는 성향을 띤다. 문단데뷔작「갈대」는 그의 시에 구현된 울음의 이미지를 규명하는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전문

 

이 시의 일차적인 내용은 연약한 존재의 표상인 갈대가 자기를 흔드는 것이 ‘바람’도 ‘달빛’도 아닌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인화된 갈대가 흔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함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인식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삶의 인식 결과는 갈대 자신의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갈대의 울음은 자신의 삶에 대한 존재론적 슬픔의 울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갈대의 울음은 숨어있는 울음으로서 그 의미와 파장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갈대」에서 표출되고 있는 울음은 그것을 유발시킨 원인과 실체가 다소 모호한 성격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단순화시키면 다음과 같다.

 

    ⓐ 갈대는 언제부턴가 속으로 울고 있었다.

    ⓑ 갈대는 어느 날 밤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 갈대는 자기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몰랐다.

    ⓓ 갈대는 산다는 것이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몰랐다.

 

이를 정리해 보면 울음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하나로 ⓐ와 ⓑ를 조합해 보면 갈대는 지금까지 계속 속으로 울고 있었으며 어느 날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와 ⓓ를 연결하면 갈대는 자기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과 산다는 것이 울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음으로 해석된다.

 

ⓐ에서 나타난 갈대의 울음은 ⓒ와 ⓓ에 비추어 볼 때 삶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 현상적인 울음이다. 갈대는 줄곧 울고 있었지만 자신의 그러한 울음이 자기를 흔드는 울음인 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와 ⓓ에 나타난 서술어 ‘몰랐다’를 표면적인 의미 그대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경우 갈대의 울음은 현상적인 울음일 뿐 삶의 본질을 자각한 울음은 아니다.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와 ⓓ에 나타난 서술어 ‘몰랐다’라는 언표를 뒤집어서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야 ‘알았다’는 의미로 이해할 때 가능한 해석이다. 이 경우 갈대의 울음은 모름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한 울음으로서 삶의 본질적인 실체로서의 울음이다.

 

이와 같이「갈대」에서 표출되고 있는 울음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성격의 울음으로서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의 울음은 좀처럼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숨어 있는 울음이라 할 수 있다. 이 숨어있는 울음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에서 사랑하는 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는 시적 진술과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라는 진술 속에는 표면적 의미와 달리 시인의 본심이 심층에 은폐되어있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울음은 내면 속에 고여있는 울음으로서 신경림이 정태적(靜態的)인 개인적 세계에 머물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갈대」에서 시인은 시적 대상을 ‘나’가 아닌 3인칭 ‘그’로 서술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에서 드러난 울음은 ‘나’의 울음이 아니고 ‘그’ 만의 울음이다. 대부분의 서정시에서 나타난 울음이 직접적으로 ‘나’의 울음이고 혹은 대상과 동화(同化)된 시적 화자의 울음인 점에 비추어 볼 때 이 시에서의 울음은 이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시인이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시인과 시적대상 사이에 엄격한 인식의 거리를 유지하고 시를 서술하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시인은 ‘나’의 가장(假裝)된 ‘그’, 즉 극적화자(persona)인 갈대를 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래서 갈대만 울뿐 시인은 울지 않는다. 시인은 그저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단순히 갈대의 울음을 지켜보며 관찰하고 서술할 뿐이다. 따라서 그의 사적인 감정토로는 있을 수 없다. 시인은 갈대의 울음에 뛰어들지 않으며 재래의 서정시처럼 독자들의 울음을 자아내려 하지도 않는다. 이 시가 짙은 비극적 정서인 슬픔을 다루면서도 울음이 숨은 형태로 나타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신경림 시에서 울음이 숨어있는 형태로 내재할 때 독자들의 상상력은 확장된다. 이런 특징은 초기 시의 긍정적인 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울음이 그의 시에서 숨어 있는 경우 시는 내면화 되고 사변화 되어 개인적 세계에 머물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인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현실을 관념적 태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이 울음은 더 이상 현실세계로 뻗쳐 나아가지 못하고 가라앉는 숨은 울음으로서 하강의 이미지를 띠는 것이다. 신경림은 등단한 이후 당시 문단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신이니 존재니 하는 알쏭달쏭한 시만이 판을 치는 문단에 나는 설 자리가 없었다” 고 술회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진술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의 초기 시는 내면으로 숨어 있는 울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경림 시의 본령이 민중들의 현실적 삶에 천착한 리얼리즘 성격의 시라 할 때, 이 울음은 분명히 신경림 답지 않는 울음으로서 한계를 지닌다.

 

「갈대」에서 나타나고 있는 울음은 외적인 현실에 대한 대타(對他)의식에서 비롯된 울음이 아닌 존재론적 근원의 개인적 슬픔에서 생긴 울음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초기 시는 박재삼과 김춘수적 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당시 존재의 근원적인 슬픔으로서의 울음은 삶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울음은 그의 시에서 삶과 현실을 인식하는 수단으로 제시된다. 초기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신경림의 시적 출발의 첫 모티브가 내면화된 감정, 특히 울음이었으며, 그 울음은 그의 시의 근간을 이루고 그로 하여금 지속적으로 시를 쓸 수 있게 한 커다란 자산으로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현실 반영적인 울음: 상승 이미지

 

『농무』에 나타난 울음의 정조는 초기 시와 달리 사회적, 역사적 상황에서 표출된 울음으로서 상승의 이미지를 띤다. 그렇다고 해서 신경림의 모든 시에서 울음의 이미지가 휠라이트의 원형 상징론에서처럼 그렇게 단선적으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로 양분되는 것은 아니다.『농무』이후에 간행된 최근의 시집『뿔』(2002) 에서도 부분적으로 울음의 이미지는 하강의 이미지인 숨은 울음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신경림 시에서의 울음은 일종의 변증법적 형태를 띠며 전개된다. 그러나 신경림 시에서 형상화 된 울음은 상승의 이미지로 드러나는 것이 지배적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농무』에 실려 있는 시들은 대부분 농촌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 모습은 목가적인 전원풍경이나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향수의 대상 농촌이 아니라 가난과 슬픔의 사연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으로서의 농촌의 형상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단순한 농촌 풍물시가 아닌 민중의 삶에 천착한 리얼리즘 시로서 의의를 지닌다. 신경림은『농무』에서 사소한 인물들―민중들―의 삶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재현한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신경림은 민중들의 삶을 비극적인 정서인 울음 그 자체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회와 역사를 보는 신경림의 시각은 상당히 우울하다. 이제 신경림의 시 의식은 초기 시에서 보였던 개인적이고 추상적인 막연한 비애 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집단적이고 구체적인 비애감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시에서 표출된 울음은 더 이상 모호하고 추상적인 울음이 아닌 실체가 분명한 울음으로 형상화된다.

 

『농무』에서 울음에 대한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그는 필연적으로 서사성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제기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꼭 울음의 정조로 인하여 서사성이 그의 시에서 요청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서사적 골격을 갖춘 신경림 시는 민중의 암울한 삶을 울음과 관련된 비극적 정서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시는 직간접적으로 거의 모든 시가 소외된 민중들의 애사(哀史)와 관련된다. 이런 민중들의 애사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시어는 울음이다. 주지하듯이 현실 세계를 천착하고 적극적으로 묘사, 서술하는 데는 서사적 양식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울음에 관계된 사연을 보다 더 구체적이고 용이(容易)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서사적 양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경림 시에서 울음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고, 그 울음이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느냐의 여부는 신경림 시의 성격을 결정지어 버릴 정도로 중요하다. 울음의 서정과 서사의 긴밀한 결합은 그의 시에서 연속성을 띠게 되는데 이 점은 더욱 주목을 요한다.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장에 간 큰 아버지는 좀체로 돌아오지 않고

    감도 다 떨어진 감나무에는

    어둡도록 가마귀가 날아와 운다.

              (중략)

    닭장에는

    지난봄에 팔아 없앤 닭 그 털만이 널려

    을씨년스러운데 큰엄마는

    또 큰형이 그리워지는 걸까. 그의

    공부방이던 건넌방을 치우다가

    벽에 박힌 그의 좌우명을 보고 운다.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는 그

    좌우명의 뜻을 나는 모른다. 지금 혹

    그는 어느 딴 나라에서 살고 있을까.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앞에는

               (중략)

    남의 땅이 돼버린 논 뚝을 바라보며

    짓무른 눈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

    인자하던 할머니도 싫고

    이제 나는 시골 큰집이 싫어졌다.

                                -「시골 큰집」에서

 

인용된 시는 ‘이제 나는 시골 큰 집이 싫어졌다’라는 화두(話頭)로 시작되고 있다. 시적 화자인 ‘나’―어린아이―가 시골 큰집이 싫어진 원인을 서술하고 있는 이 시는 많은 사연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난봄에 팔아 없앤 닭’,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남의 땅이 돼버린 논 뚝’ 등의 서사적 토대 위에서 피폐한 한 가족(농촌)의 사연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사양식의 원리는 인간의 행위와 사건 전개에 주체가 몰입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진술하는 태도를 장르적 특성으로 한다. 이런 서사적 기법의 시는 현실 세계를 천착하고 묘사하는 데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시작 원리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서사적 양식의 시는 시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서정적인 인간 내면 세계를 경시한 나머지 자칫 잘못하면 단편 서술적인 흐름으로 시가 건조해지고 시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이때 시적 긴장감이란 독자들이 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상력을 말한다. 좋은 시라면 독자들에게 중층적인 의미를 심화(深化)시켜 자꾸 시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고 할 때, 이것은 분명히 서사시가 범하기 쉬운 약점이며 한계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계는 신경림 시에서도 내재하고 있다. 그의 시가 울음에 대한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서사적 양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그의 시는 건조해지고 시적 긴장감은 떨어진다. 이것은 초기 시와 대비된다. 즉 초기 시는 울음에 대한 구체성이 확보되지 않아 독자들의 많은 상상력을 발휘하게 한다. 그러나 신경림 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농무』에 수록된 시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렇지 못하다.

  

강조할 필요도 없이 이 시에서의 지배적인 정서는 울음의 미학이다. 이 시에서 울음은 두 번 나타나고 있는데 앞서 언급한 서사시의 한계를 메워주고 있다. 첫 번째 울음은 이미 ‘감이 다 떨어져 버린 감나무’에서 을씨년스럽게 ‘가마귀’가 울어대는 울음으로서, 이는 불길하고 어두운 시적 공간을 제시하는 이미지이다. 그리하여 황폐한 농촌과 분해되어 가는 한 가족의 몰락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는 배경구실을 한다.

 

이는 뒤에서 소개될 사연의 성격을 암시하는 시적 장치로서, 두 번째 ‘큰 엄마’의 울음의 의미를 상승시키는 생산적 기능을 발휘하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첫 번째 울음은 시인의 의도적이고 치밀한 구성에서 나온 계획된 울음인 것이다. 이처럼 신경림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눈길」,「폐광」,「강」등에서처럼 전략적으로 자연물의 울음까지도 끌어들인다. ‘큰 엄마’의 울음은 ‘우리는 가난하나 외롭지 않고, 우리는 무력하나 약하지 않다’라는 아들의 좌우명을 보고서 표출된 울음이다.

 

그러나 시적 화자인 ‘나’는 그 좌우명의 뜻을 모른다. 시인은 객관적 인식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린아이를 시적화자로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음에 대한 인식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점은 초기 시와 동일하다. 하지만 이 시는 울음에 대한 구체성을 확보하고 있다. ‘큰 엄마’의 울음은 ‘조합 빚이 되어 없어진 돼지 울’, ‘남의 땅이 돼버린 논 뚝’에서 보이듯 구체적인 농촌 현실에서 파생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울음은 ‘큰 엄마’의 울음에 대한 구체성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울음은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된다. ‘우리’라는 시어 사용에서 한 사람의 울음만은 아닌 ‘우리’ 전체의 울음으로 승화될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 시가 나아갈 방향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시골 큰집」에서는 지극히 평범한 한 사람을 내세워, 현실적 고통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난하고 힘 없는 민중의 생활을 묘사하고 있다. 신경림은 곧잘 한 범인(凡人)의 울음을 통해 현실을 파악하고 독자들에게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주며 시를 이끌어나간다. 고통 받고 소외 받는 민중들의 삶에 대한 울음의 핍진성에 신경림 시의 힘이 실려있다. 

 

이처럼 신경림은 울음의 미학으로 민중들의 삶을 규명하며 구체성을 확보한 그 울음은 리얼리즘 성취에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따라서 초기 시에서 보였던 개인적 비애는 거의 사회적 비애로 환치 된다. 이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시인은 “20년이 지나도 고향은 달라진 것”이 없기에 “가난 같은 연기”가 가득 찬 고향에서 아이들만이 울어대는 황폐한 고향의 모습을 노래한다.(「時祭))

 

농촌의 실상이 이러하기에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씩 미치기 시작”(「失明」)했고 “부서진 장독대에 그의 아내의 눈물이 고여” 있으며 “가난과 저주의 넋두리”는 결국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가는 길을 굽어보게” 된다.(「서울로 가는 길」) 이것은 백석과 이용악 등이 식민지 한국 농촌의 경제마저 절망적인 붕괴를 겪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난 유랑민의 삶과 슬픔을 그들의 시에서 직접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과 동궤(同軌)에 있다. 이러한 울음은 도시 변두리의 소외된 민중들 삶의 실상을 드러내는 태도로 더욱 확대된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중략)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기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山1番地」에서

 

위의 시에서 울음은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소외된 민중들의 울음으로서 고달프고 지친 민중들의 삶을 대변한다. 산동네 빈민가에 바람이 불어 “불행한 삶들의 얼굴에 / 돌머리를 끼어 얹는다”. 어버이는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오고 애기 밴 처녀는 산벼랑에 몸을 던진다. 이 현실에 대한 극한적 절망 속에서 울음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므로「山1番地」에서의 울음은 민중들의 암담하고 처절한 생활현장에서 비롯된 사회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울음은 한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통곡’으로 울려 퍼진다.

 

이처럼 신경림 시는 비극적인 정서를 농후하게 담고 있지만 울음으로 인한 정화작용(淨化, katharsis)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극의 궁극적인 목표가 비극을 감상함으로써 심리내부에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무거운 감정이 배설되어 밝고 경쾌한 심정을 되찾는 쾌락이라고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시학)), 이 정의는 그의 시에서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는 이런 비극적인 감정에 억눌려 현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반성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이 점이 비극적인 정서를 표출함에도 그의 시를 나약하게 하지 않는 힘이 된다. 따라서 이 울음은 초기 시에서 보인 관념적 인식이 따를 수 없는 강렬한 실체성을 지닌 울음이며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공감을 확대하는 시적 지향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위의 시 「山1番地」는 시인 스스로 밝힌 바 있듯, 서울 홍은동 산동네에서 생활하며 손수 겪었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시이다. 체험 시는 시론에서 김준오도 언급하듯 인물들과 행위(사건)와 정황이 제시된 점에서 극적(劇的)인 성격을 띠며 현실과의 관련 문제, 뒤집어 말하면 허구성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신경림 시에서의 울음은 자신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울음이었다는 점에서 피상적인 울음이 아닌 삶에 육화된 울음이다. 그러기에 다른 재래 서정시인들의 시에서 형상화된 울음보다도 훨씬 더 절실한 이 울음은 현실의 구체적 사연을 독자들에게 생생한 환기력으로 상승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신경림이 오랫동안 민중들의 삶과 부대끼면서 그 체험을 바탕으로 나름대로 시에 대한 정의를 내린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민중들의 현실적 삶이 시로 이어지고 형상화되어야만 그 시가 정말로 살아 있는 시가 되고 우리의 시는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박은 것’(『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에서)이어야 한다는 그의 진술은 위의 사실을 입증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신경림 시의 원형질인 울음의 정조는 기층 민중들의 삶의 실상을 밀도 있게 보여주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빗발이 치고 바람이 울고 총구가

    일제히 불을 토한다. 통곡하라

    부활하라 죄없는 무리들아, 그리하여

    증언하라 이 더러운 역사를.

         (중략)

    부활하는 자. 모두 흙 속에서

    원통한 귀신이 되어 우는가.

                                -「1950년의 銃殺」에서

 

 6ㆍ25전쟁의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는 이 시에서의 울음은 전쟁으로 인한 절망적 상황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부활의 통렬한 절규로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통곡은 미래전망이 보이지 않던 닫힌 세계에서 새롭게 열릴 미래공간을 획득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이제 시인은 민중들에게 울부짖으며 더러운 역사를 씻고 새로운 역사를 부활시킬 것을 역설하고 있다. 이 시에서의 울음은 초기 시와 대비되는 동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울음은 “용기 있는 자들은 이 들판에 내어 쫓겨/ 여기 억눌린 자와 어깨를 끼고 섰다./ 한 사람의 노래는 백 사람의 노래가 되고/ 천 사람의 울음은 만 사람의 울음이 된다.”(「喊聲」,『새재』)와 같이 더욱 더 수직적 상승공간으로 뻗쳐 나간다.

 

. 울음의 시학, 그리고 그 문제

 

신경림은 서정과 서사의 긴밀한 결합으로 시를 이끌어 가는 데 그 서정의 핵심 코드는 울음의 이미지이다. 신경림 시의 특수성은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을 드러내기 위해 울음을 이미지화 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신경림 시에서 울음이 표출되는 형태를 통해 그의 시와 세계가 길항(拮抗)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울음이 그의 시에서 숨은 형태로 내재될 때 시는 내면화 되고 사변화 되어 개인적 세계에 머물게 되고, 반면 울음의 구체성을 확보할 때 그의 시는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천착한 성격을 띤다. 이처럼 울음은 신경림 시의 성격을 결정할 정도로 그의 시 전반에 중요한 원형질로 작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울음의 미학은 그의 시의 역동성의 근원이 아닐까. 

 

이와 같이 울음을 소재로 줄기차게 시를 써 온 신경림의 시작태도는 장점인 동시에 단점이기도 하다. 울음의 정서는 그가 시를 지속적으로 쓰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며 연속성의 면에서 볼 때 시의 견고성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울음의 단일한 소재 사용으로 인해 그의 시는 경직화 되어 시폭(詩幅)이 그만큼 좁아졌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점은 신경림 시가 극복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우리는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헤어진 이산가족을 만나더라도 “나는 울지 않을 거야”(『뿔』, 2002)라는 그의 외침이 반어적 진술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농무』에서 표출된 울음의 근원은 대략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시골 큰집」,「時祭」,「失明」,「서울로 가는 길」등의 시에서 나타난 울음과 같이 민중들의 생활 기반인 농촌의 황폐화와 이농 현상에서 비롯된 울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도시 변두리에서 사는 소외된 민중들의 삶으로부터 비롯된 울음이 있으며「눈길」,「폐광」처럼 민중들의 억울한 죽음과 울분에서 나오는 울음이 있다. 또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파생된 울음도 있다.

               

 

 

□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 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 않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져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학풍 1948)

 

* 삿 : 삿자리의 준말.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 딜옹배기-흙으로 만든 질옹자배기

* 북덕불-북더기 불. 짚이나 풀 따위를 가지고 피운 불

* 쌔김질-새김질

* 갈매나무-갈매나뭇과에 속한 좀나무. 키는 2 m쯤 되고 가지에 가시가 나며, 잎은 넓은 바소꼴이며 톱니가 있다. 열매는 '갈매' 또는 '서리자'라 하여 약재나 물감으로 쓴다.

 

 

(참고)

  백석(白石 1912 - ? ) 시인 본명은 백기행

 

이 시는 가족과 떨어져 객지에 홀로 나와 생활하면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작품으로, 한국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서정시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다. 다소 특이한 느낌을 주는 이 시의 제목에서 ‘남신의주’와 ‘유동’은 지명(地名)을 뜻하며, ‘박시봉’은 화자가 기행지에서 세를 든 주인집 이름에 해당한다. 결국 이 시는 남신의주 유동에 있는 박시봉이라는 사람의 집에 세 들어 사는 화자가 자신의 근황과 심경을 편지 쓰듯 적어 내려가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문맥으로 볼 때, 박시봉이라는 사람은 목수 일을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으며, 화자는 그 곳에서 가족과 떨어져 자신이 지나온 삶을 되새기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이 시에서 홀로 객지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화자의 절실한 내면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된다.

 

화자는 슬픔과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자신의 지난 삶을 되새김하는 소처럼 회상하면서, 끝없는 비애와 영탄에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이 그렇게 살아온 것이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운명론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탓으로 화자는 자신의 슬프고 부끄러운 삶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체념을 하기에 이른다. 즉 삶에 대한 운명론적, 수동적 세계관에 갇혀 있는 넋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어둡고 슬픈 현실 속에서, 눈을 맞고 서 있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처럼 굳세고 깨끗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현실에 맞서는 치열한 의식을 보여 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현실의 아픔을 수용하고 그것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면서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겠다는 굳건한 삶의 자세를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는 이를 통해 한국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인생관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상의 전개 과정을 통해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자신의 무기력한 현실 대응 방식을 반성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다.

 

 

 

□  독후감 중에서   

                                                                      

눈물과 울음은 다르다. 울음은 내적 감정의 외적 표현이지만, 눈물은 생리적 현상이다. 방금 하품을 했다. 눈물이 나왔다. 그 눈물을 우리는 울음이라 하지 않는다. 눈물은 눈을 정화한다. 울음은 가슴을 정화한다. 언어적 차이인지 모르지만 '눈물의 역사'에선 울음과 눈물을 구분하지 않는다.  

   . “눈물의 역사”  (안 뱅상 뷔포)

 

울음은 눈물을 반드시 동반하지 않는다. 눈물이 반드시 울음이 아닌 것처럼, 눈물이 흐르는 울음과 눈물이 흐르지 않는 울음이 있다. 또한 메마른 울음도 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울음의 샤워는, 때론 눈물을 동반하기도 할 것이고 때론 메마른 울음으로 심장 속 혈관에 흐르는 피와 같은 눈물을 가슴속에서 맞을 것이다. 이를테면 '감성의 샤워'다.

   . 울음이란 감성의 샤워 (독후감, 이성규)

 

 

 

■   대신 울어주는 기계

                   임상심리학자, 김선희 (2009.8.)

                         글 중에서 일부발췌

얼마 전 한 여성이 클리닉에 방문하였다. 그녀는 배우자와 자녀에 대하여 그리고 중년기 중반으로 접어드는 자신의 삶의 어려움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심리치료를 원했다. 그녀는 이야기 중간 중간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주 소리 없는 조용한 눈물이었다. 증상적으로 우울증이 발병한 탓도 있지만 그녀의 그 눈물은 증상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의 이야기, 아픔,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일체 말하지 않고 (어찌 보면 말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꾹꾹 눌러 삭이면서 살아왔다고 한다.

 

가족 뿐만 아니라 친구에게도 마음 속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물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섣불리 단정짓기 어렵지만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친구도 그녀에게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눔과 공유란 없었고 접촉이란 없었다. “심리적 단절”상태였다. 그러던 그녀가 막내 아이 마저 유학을 보내고 나자 심리적 위기가 찾아 들었다. 간당간당 하던 둑이 무너지듯 심리적으로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녀는 속에 쌓인 것들을 이제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조용히 한 말이 내 가슴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인간이 그리워요. 사람이....그래서 여기를 왔어요”

 

2년 전 즈음으로 기억되는데, 재미있지만 다소 서글픈 기사를 읽게 되었다. “대신 울어주는 기계”. 그 기사에서는 육체의 일부가 그 고유의 기능을 잃게 되면 그 기능을 대체하는 임플란트, 의안, 의족, 가발 등의 보조물 들이 그 기능을 대신 해주듯이, “감정 표현”에 약한 사람을 위한 보조 기구로 ‘대신 울어주는 기계’가 나왔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꼭 울어야 되는 상황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을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단추를 누르면 눈물모양으로 디자인된 장치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여기에 저장된 울음소리도 다양하다고 한다. 이 기사에는 이 장치를 착용한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걷는 사진도 함께 실려 있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부 무표정이다. 마치 로봇 같아 보였다. 물론 그런 컨셉으로 설정하고 사진을 찍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상당히 기계적인 느낌이었다.

 

그 사진에 나온 이들은 그 보조기계 덕에 필요할 때 나름 적절하게(?) 울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기계가 처리하지 못하는 진정한 감정의 표현과 카타르시스, 공감, 소통은 어쩌지라는 의문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보조기계에 너무나 포괄적이고 완벽한 기능(?)을 요구하는 내가 오버하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언뜻 들었지만, 눈물 안에 담긴 역사와 이야기, 감정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눈물을 흘리는 행위에 담긴 심리적 의미를 나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나 보다. 어쨌건, 우리가 그 기계를 사용하다 인간의 우는 기능마저 점점 퇴화가 되어 사랑니나 꼬리뼈처럼 눈물샘도 그저 인간의 지난 역사를 알려주는 한 신체구조의 징표로 퇴색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시나리오까지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며 내가 이 보조기계에 대해, 아니 '눈물과 감정'에 대해 할 말이 많은가 보구나 하며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있다. 심리학, 부부치료를 하면서 눈물의 의미에 대해 남다른 경험과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속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이 가져다 주는 치유의 축복을 나는 깊이 사랑하고 있는 터이다.

 

또 한참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Free Hug" 즉, ”무료로 안아드립니다“라는 거리활동(?)을 한 호주 남성의 기사도 떠오른다. 이 남자에 대해 일부에서는 성추행의 위험성을 논하며 부정적인 시각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당사자는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에게 안긴 후 뒤돌아서는 사람들 모두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돌아갑니다“라고. 그 어떤 것도 대신해줄 수 없는 사람과 사람의 진짜 접촉, 쳐다봄과 바라봄, 다가감과 안김, 소통과 연결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던 뉴스였다.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시대, 점점 더 문명화 되어가는 사회, 첨단의 디지털 세상이 우리 삶에 깊게 관여되고 우리 삶을 지배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다가오는 역설적인 깨달음이 있다. 바로 “인간적 교감”, “휴먼터치(human touch)의 소중함”이 그것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관계”를 추구하는 속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유아시절, 우리는 양육자의 돌봄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태어난다. 걸을 수 있게 되는 생후 1년이 되어도 유아는 양육자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를 영위하기 힘들다. 이때 유아가 기본생존을 위해 먹고 자고 배변하는 행위에 더하여 엄마와의, 그 누군가와의 인간적 교감이 유아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다. 인간은 신체를 가진 동시에 마음과 정신세계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돌봄과 사랑을 받아야 만이 인간이 비로소 인간답게 생존, 성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아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고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어서도 우리에게 인간적 교감은 여전히 필요하다. 여기에서 인간적 교감이란 정서적으로 친밀한 소수의 애착대상과 지속적인 애정과 돌봄, 관심을 주고받는(give & take) 관계이다. 친구가 많고 늘 약속이 있고...그런 피상적이고 시끄러운 관계가 아닌 “견고하고 안전한(firm & secure)"관계가 중요하다. 불완전한 나와 불완전한 상대방이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교감이 오고 가는 관계, ”내가 너를 돕고 돌보며 너도 나를 돕고 돌보는“그런 관계가 인간적 교감, 휴먼터치의 본질이다.

 

그렇게...인간적 교감을 추구하고 따뜻한 휴먼터치를 주고받고자 하는 욕구를 지닌 우리는 부부관계를 맺음으로써 안전한 인간적 교감을 맺고 싶은 소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배우자와 현실을 함께 헤쳐 나가고 가정을 운영하는 동시에(이때는 마치 비즈니스 파트너와 같은 연결감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부드럽게 연결되는 관계. 그러나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정서적인 인간적인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에 상처를 입고 우울증에 압도되며 외로워 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이혼이라는 선택을 감행하는 많은 부부가 외견상으로는 경제적 어려움, 외도 등등을 이야기하나 그 이면에 본질적인 공통분모는 배우자와 더 이상 인간적 교감을 할 수 없게 된 뼈아픈 상황이 깔려 있다. 이렇게 끊어진 연결고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고자 우리는 술도 마시고 일중독이 되기도 하며 채팅에도 빠져보고 쇼핑, 외도도 하게 되고 아이에게 목숨도 건다. 성형수술의 힘을 빌어 신체적 재탄생이라는 드라미틱한 인생사를 쓰기도 한다.

 

그래도 이 모두가 결코 우리가 원하는 진정 깊이 있는 휴먼터치를 대신해주지 못한다. 지금 당신 곁의 배우자, 가족, 친구를 한 번 바라보라. 그들과 진정한 휴먼터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휴먼터치가 가능한 관계인가? 그 전에, 나는 과연 휴먼터치가 가능한 정서적인 사람인가를 먼저 자문하여보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답게 삶을 영위하는 것,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우리 서로서로가 잘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바로 정서와 감수성, 이에 기반 한 적절하고도 적당한 휴먼터치가 우리네 삶의 키워드이다.

 

내가 나 자신과 교감하고 내가 타인과 교감을 할 수 있는 충분히 부드러운 연결감은 바로 내면과 정신세계, 영혼의 풍요로움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당신의 정서적 풍요로움을 위해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와 어떤 교감을 나누고 있는가? 풍요로운가? 단절되어 있는가? 혹시 정서적 교감이 배우자에 대한 집착, 강요, 의심으로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지는 않은가?

 

한번 즈음 돌아볼 일이다.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는 미래의 그 시절에 혹시 “대신 살아주는 배우자”라는 기계가 나오지는 않을까? 부디 우리 다음 세대가 “관계의 불구, 감성의 불구”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먼저 깨어나야 할 것 같다.

 

 

 

■   눈물이란 무엇인가

 

                                                                                                                  (독후감 중에서 발췌)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고문을 보면 그분들 역시 우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슴을 알게 됩니다. 옛사람들이 일상에서 걷어 올린 삶의 의미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세상은 변해도 삶의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몇 백년 전의 글을 읽어보아도 전혀 낯설지가 않거든요. 하지만 이런 글들이 한문이나 다른 문서체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독자들과 만날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

 

 눈물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하루에 평균 0.5~0.8그램 정도 흘리는데 98%가 물이고 나머지는 단백질,전해질 등으로 구성된 약 알카리성 용액이라 합니다. 눈물은 항균 작용을 하기 때문에 눈에 이물질이 있거나 염증이 있으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또한 혈액공급이 안되는 안구 각막에 산소와 영양소를 전달하는 아주 중요한 물질입니다. 그러므로 눈물이 부족하면 안구가 건조해지면서 여러 가지 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눈물이 부족하여 인공눈물을 넣으면서 지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눈물의 소중함을 잘 알 겁니다.

 

 한편 눈물은 미생물을 방어하여 몸을 보호해 줄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반영하고 정화해 주는 커다란 기능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은 신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라고도 합니다. 남자들은 어렸을 적부터 울면 안 된다고 가르침을 받아왔는데 감정이 복받칠 때는 억지로 참지 말고 가끔 눈물을 흘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납니다.

 

심노숭 산문선 <눈물이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동기는 옛사람들이 슬픔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찾아가다가 읽게 된 전송열교수님의 <옛사람들의 눈물>에서 소개하고 있는 심노숭의 ‘눈물이란 무엇인가(淚原)’라는 글의 일부를 읽고 놀랐기 때문에 그 원문을 읽어보고자 해서입니다. 심노숭은 상사(喪事)가 생겨 초빈(草殯)으로부터 시묘(侍墓)에 이르기까지 어떤 때는 한 번 곡하고도 눈물이 나다가 어떤 때는 천백 번 곡해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때가 있음을 기이하게 여겨 그 연유에 따져본 글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눈물은 눈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마음(심장)에 있는 것인가?(51쪽)”라는 의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시 우리의 의학수준으로 해부학이나 생리학에 대한 지식이 없을 때이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심노숭이 찾아들어가는 과정은 다분히 철학적이지만 과학적이기도 합니다. 다만 동양의학이 뇌의 기능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기 때문에 정신이라고 보이는 마음이 뇌가 아니라 심장에 있다고 추정하고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을 비유하자면 땅이고 눈은 구름이다. 눈물은 그 사이에 있으니 비유하자면 비와 같다.”고 한 점입니다. 얼마 전에 읽은 <마르코스와 안토니우스 할아버지>에서 인용하고 있는 멕시코 설화에서 세상을 만든 신들의 꿈인 구름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해서 세상을 만든 신들이 자신들로 변했는지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 구름의 고통이 눈물로 변했다. 일곱 번째 구름은 그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최초의 신들은 일곱이었는데, 일곱 구름은 바로 땅을 위한 빛이 되려고 했던 신들의 바람이고 소망이었던 것이다.(75쪽)”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 눈물이 비가 되었다는 점에서 심노숭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노숭은 기(氣)의 감응으로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것이므로 “눈물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또 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52쪽)”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어떻습니까? 멋있는 해석이 아닙니까? 자신이 “제사에 임해서 곡(哭)을 해서 눈물을 흘리면 제를 지냈다고 여겼고 그렇지 않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고 여겼으며, 때때로 느꺼움이 있어 눈물이 나면 신이 내 곁에 왔구나라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황천길이 멀구나하고 생각했다.(53쪽)”고 하니 조금은 지나침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고인을 생각함에 있어 진심으로 애도하면 뜻이 통하여 눈물이 나온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   울음, 참으면 병 된다 

              (도서 목차)

                                                           한광일,김선호 지음

 

. 울음이란 무엇인가

감정의 독소를 쏟아내는 통로

인간 최초의 언어

신이 내린 또 하나의 선물

건강을 위한 명약

 

. 울음이 우리 몸에 미치는 영향

몸속 독소 배출

면역력 증가와 원활한 혈액순환

통증 완화와 몸에 좋은 호르몬 분비

정신 건강 증진

울지 않으면 장기가 대신 운다

 

. 어떻게 울어야 하나

아이의 울음을 막아서는 안 된다

일부러라도 울어야 한다

우는 데도 요령이 있다

남자가 더 많이 울어야 한다

 

. 울음의 원인, 상처

마음속 상처 받은 ‘또 다른 나’를 달래주어라

무엇이 상처를 주었을까

호기심 통제

- 솔직한 감정 표현의 차단

- 쾌활함과 자유 억압

- 자신의 색깔 상실

- 순수함과 믿음의 변질

- 도움과 사랑의 결핍

- 영적인 상처

- 학대

 

상처는 무엇으로 나타날까

- 무질서한 행동

- 공격적인 행동

- 사고의 왜곡

- 격리·자학

- 허풍과 허세

- 신뢰감 장애

- 관계 형성의 장애

 

. 울음치료란

마음에 관한 공부

용서와 화해, 감사의 작업

울음치료의 역사

한국인과 울음치료

 

. 울음치료는 어떻게 하나

오감 깨우기(감정관계 훈련)

상처 받은 자아 찾기

울음치료 기법들

- 조건 없이 울기

- 문화적 자극에 의한 울기

- 울음명상

- 사이코드라마 기법

- 열정·몰입 기법(크레이지 세라피)

 

 

 

■   통곡의 벽

                                                                                                                 윤길원 글 중에서

. ‘호곡장’(好哭場);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의 글인 열하일기 중에 연암 일행은 1천2백리에 걸쳐 산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득히 펼쳐지는 요동벌판을 만나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을 보는 순간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한 연암은 이렇게 독백을 한다.

“내 오늘에 처음으로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돌아다니는 존재임을 알았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번 울만 하구나.”

 

. 이스라엘 ‘통곡의 벽’;

 

주후 70년에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할 때 당시 로마군의 지휘관 티투스 장군은 예루살렘 성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그 때로부터 약 4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멀지 않아 멸망 당할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시며 울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다 훼파되고 그 웅장하던 성전이 다 허물어진 중에 성전 서쪽 벽이 남았었다. …… 허물어진 성전의 서쪽 벽은 유대인들의 울음터가 되었고 최고의 기도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온이즘을 꿈꾸는 비전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곳을 ‘통곡의 벽’이라 했다.

 

 

 

■   그리움이란 울음을 운다

 

그리움이란 울음을 운다

그대는 꿈으로 와서

가슴에 그리움을 수놓고

눈뜨면

보고픔으로 다가온다.

 

그대는 새가 되어

내 마음에 살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리움이란 울음을 운다

 

사랑을 하면

꽃피워야 할텐데

사랑을 하면

열매를 맺어야 할텐데

 

달려갈 수도

뛰어들 수도 없는 우리는

살아가며 살아가며

그리워 그리워하며

하늘만 본다.

           (좋은 글 중에서)

 

 

□  울음

 

. 울음의 의미

  생존 수단 (배고픔, 추위, 질병)

  애착 형성의 중요한 수단

  언어 대용의 수단  

  감정의 표현 방법  

 

. 울음이 많은 이유

  다양한 정서표현이 안될 때 

  문제해결 대처방식이 다양하지 않을 때

  언어 능력이 충분히 발달되지 않았을 때  

 

. 부모의 단점을 닮은 아이

  부정적이고 열등하다고 생각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의 각인

  자신의 고통이 대물림 되는 것에 대한 우려

 

 

 

■   좋은 울음

 

                                                                          (이규필)

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窺怒號

 

대지가 쉬는 숨을

바람이라 한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고요하지만

바람이 불면 세상의 모든 구멍이 세차게 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

 

대숲은 바람을 만나 울고, 시내는 여울을 만나 운다. 새는 노래로 울고, 먹구름은 천둥으로 운다. 세상 모든 것이 우는 속에 시인은 시로 운다.

 

장자는 말했다. 대지가 내뿜는 숨이 바람이다. 바람이 불면 세상의 모든 구멍이 세차게 운다. 큰 고목의 옹이 구멍에서 물 흐르는 소리, 화살 나는 소리, 노한 소리, 외치는 소리, 아우성 소리, 맑은 울림의 소리가 난다. 앞의 옹이가 우웅우웅 울면, 뒤의 옹이가 오오 하고 따라 운다. 바람이 자면 모든 구멍들은 고요히 텅 빈다.

 

당나라의 대문장가 한유(韓愈)는 장자의 이 말에서 영감을 받아 ‘불평즉명(不平則鳴)’, 곧 평온하지 못하면 운다는 특유의 문학이론을 내세웠다. 바람이 불어 구멍 안의 공기가 평온히 있지 못하고 요동을 치면 고목의 옹이가 울 듯, 시대가 불안하면 시인들이 운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한유는 말했다. 초나라가 망할 때에는 굴원이 울었고, 한나라 때에는 사마천이 울었고, 당나라 때에는 이백과 두보가 울었다고. 한유가 말한 불평(不平)이란 시대의 불안함이요, 시인의 곤궁함이다. 이 말을 송나라 구양수가 받아 벗 매성유(梅聖兪)에게 ‘곤궁한 뒤에야 절창이 나온다(詩窮而後工)’고 하였다.

 

그러나 불평이 꼭 불안함과 곤궁함일 필요가 없고, 울음이 꼭 비분강개의 울음일 필요도 없다. 평정상태가 깨어진 모든 상태-환희, 슬픔, 열락, 분노가 모두 불평이고, 발산되는 모든 동작-파안대소, 외침, 절규, 발구르기, 글쓰기가 모두 울음이다. 울음 가운데 어떤 것이 좋은 울음일까. 율곡은 벗 최립(崔?)에게 ‘사람이 소리를 내어 남들에게 좋게 들리고, 남들에게 좋게 들려 글로 표현되며, 글로 표현되어 정도(正道)에 합치된 것을 좋은 울음이라 한다. 좋은 울음을 울기가 참으로 어렵다’ 하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들녘에 서서 묻는다. 세상의 바람이 내 몸을 스쳐 불어갈 때, 나는 어떤 울음을 울 것인가?

 

 

 

■   울음의 미학

 

. 영화 ‘변호인’과 울음의 미학(美學), 그리고 Lascia ch'io pianga...

                                                                                                                              (희성황)

 '40대 중반의 직장인 김성구 씨는 “‘변호인’을 보며 오랜만에 눈물을 쏟았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기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지만, 나는 그분의 지지자는 아니다. 다만 영화가 가슴을 후벼 파더라”고 덧붙였다. 개봉 직후 일찌감치 ‘변호인’을 관람한 30대의 한 관객은 “영화 중반부터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라”고 자신이 본 극장의 풍경을 전했다. 영화평론가이자 전주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인 이상용 씨는 “영화가 감정을 건드리면, 우리 관객들은 울어줄 준비가 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은 헤럴드 경제지에 실린“‘변호인’1000만이 울었다”라는 기사의 전문(前文)이다. 이 기사를 쓴 이형석 기자는 “영화 ‘변호인’이 유난히 울음에 인색한 한국 남자들을 울렸다”고 쓰면서, 흥행에 성공한 한국영화를 울음코드로 분석하고 있다. 극장에서 영화를 같이 보며 함께 울 수 있다는 사실이 ‘위로’이자 ‘감정의 정화’인지는 나는 잘 모르지만, 매듭짓지 못한 응어리를 들추어 눈물을 자극한 것만은 영화 ‘변호인’을 보고 공감하는 바다.

 

 사실 나 또한 두 시간 내내 눈물을 질질 짜냈으면서도 울고 난 뒤에 ‘도대체 뭐가 그리 서러워서 내가 울었을까?’란 자문을 해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서정주 시인의 노래대로 ‘자연의 섭리’였를까? 아니면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중에 담겨진 내용처럼 ‘사람이 칠정(七情:喜,怒,哀,樂,愛,惡,慾)중에 슬플(哀) 때에만 우는 것이 아니라,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인가? 다만 분명한 것은 감추어진 내면의 ‘응어리’가 들추어진 것은 사실인 듯싶다.

 

 칠정(七情)은 감정(感情)의 여러 종류이다. 연암 박지원도 이소(離騷)는 굴원(屈原)의 울음이요, 장자(壯子)는 그야말로 몽수비장학(蒙叟悲藏壑)이며, 사기는 사마천(司馬遷)의 울음이고, 초당(草堂)의 시집은 두보(杜甫)의 울음이라 했다. 또한 그는 ‘울음에는 그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울음은 더욱 통렬한 것이다’라 했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그 감정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었으나, 도대체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언젠가 ‘나가수’란 프로그램에서 ‘나 가거든’ ‘여러분’이란 노래를 들으며, 일부 관객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눈물은 어떤 의미였을까? 영화 ‘Farinelli The Castrato (일명 “파리넬리”)’를 보게 되면, 한 카스트라토(Castrato)의 미성(美聲)에 많은 여자들이 울음을 넘어 졸도까지 하고 만다. 도대체 그들이 카스트라토의 비애(悲哀)를 이해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러한 울음은 도대체 칠정(七情)중에 어떤 감정일까? 다시 돌아가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자연의 섭리’일까? 아니면 그저 알 수 없는 울음일 뿐인가?

 영화 ‘변호인’을 기억하며, 오늘은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중 그 유명한 아리아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 mia cruda sorte)’를 들어 본다면, 그나마 그 울음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 파리넬리 OST; 울게하소서 (Lascia ch'io pianga)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Il duol infranga queste ritorte di' miei martiri

  이 슬픔으로 고통의 사슬을 끊게 하소서

sol per pieta, di'miei martiri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sol per pieta.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e che sospiri e che sospiri, la liberta!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Lascia ch'io pianga

  나를 울게 하소서

la durasorte e che sospiri la liberta

  비참한 나의 운명! 나에게 자유를 주소서

 

         울게하소서 (Lascia ch'io pianga) “파리넬리 OST”

 

 

 

 

■   울음과 웃음은 건강에 도움이 된다.

 

 

너무 반가워서 웃다가 울음이 터져 나오면

다시 말해서 너무 너무 좋아서 웃다가 울거나

울다가 웃으면 건강해 지는 것이다.

 

. 울음과 웃음에 차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구별할 수 있다.

 

첫째 : 울음은 과거를 돌아보게 하는 반면 웃음은 미래를 내다보게 한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슬피 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과거다.

살아있는 어머니가 10년 후에 돌아 가실 거라고 미리 우는 사람은 없다.

 

둘째 : 울음은 고난을 참는데 도움이 되고 웃음은 고난을 이기는데 도움이 된다.

셋째 : 우는 소리보다 웃는 소리가 더 멀리 들린다.

넷째 : 울면 얼굴의 근육이 아래로 쳐져 지지만 웃으면 얼굴의 근육이 위로 당겨 올라간다.

다섯째 : 울면 얼굴의 화장이 다 지워진다.

여섯째 : 우는 것과 웃는 것의 차이는 바로 "웃"자의 "人" 하나 차이이다.

" 人" 만큼 웃는 것이 우는 것 보다 좀 낫다고 한다.

 

일곱째 : 웃으면서 생기는 주름은 보기가 좋고 아름답다.

웃으면 얼굴에 주름이 생길까 봐 걱정이 되어 웃으면서도 손가락으로 눈언저리 주름을

펴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나이가 들면 어차피 주름이 생기게 되어있다.

성낼 때 얼굴을 찡그릴 때 생기는 주름은 두껍고 보기가 싫다.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은 얇고 아름답고 예쁘다.

자기가 갖고있는 그 얼굴은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 것은 반드시 자기 눈에 보이는데 우리 스스로 자기 얼굴을 볼 수 가 없는 것은

우리들의 얼굴은 다른 사람이 보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얼굴은 내 것이 아니고 나를 쳐다보는 상대방의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

항상 상대방을 기분 좋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밝은 표정은 성공의 기약서요

환한 웃음은 행복의 저금통이다.

 

밝은 표정해서 성공 못한 사람이 없다.

우스갯 소리지만 돼지머리도 웃어야 값이 나간다.

 

 

 

■   웃음과 울음의 종류

 

. 웃음[笑]

 

假笑 (가소) : 거짓 웃음, 또는 꾸밈 웃음.

苦笑 (고소) : 쓴 웃음, 또는 달갑지 않은 웃음.

巧笑 (교소) : 애교 있고 요염한 웃음

冷笑 (냉소) : 상대방을 깔보며 쌀쌀하게 웃는 웃음

微笑 (미소) : 소리 내지 않고 빙긋이 웃는 웃음.

失笑 (실소) : 참아야 할 자리에서 툭 터져 나오는 웃음.

嘲笑 (조소) : 조롱 하는 태도로 웃는 웃음.

嗤소 (치소) : 빈정거리며 웃는 웃음.

爆笑 (폭소) : 폭발하듯 갑자기 웃는 웃음.

喜笑 (희소) : 기뻐서 웃는 웃음.

哄笑 (홍소) : 큰 소리를 내며 웃는 웃음.

 

. 울음(泣)

 

感泣 (감읍) : 몹시 감격하여 우는 울음.

哭泣 (곡읍) : 통곡하여 우는 울음.

悲泣 (비읍) : 슬피 우는 울음.

哀泣 (애읍) : 애처롭게 슬피 우는 울음.

怨읍 (원읍) : 남을 원망하며 우는 울음

啼泣 (제읍) : 소리 높이여 우는 울음

涕泣 (체읍) : 눈물을 흘리며 우는 울음.

號泣 (호읍) : 목 놓아 소리 내어 우는 울음.

 

. 당신은 어떤 모습의 웃음을 웃으십니까 ?

 

호탕한 웃음 : 덩치 큰 사람이 기분이 좋아 마음 놓고 웃는 모습.

감동의 웃음 : 감동적인 순간을 만나거나 보았을 때 눈물과 소리 없이 웃는 모습.

함박웃음    : 통쾌한 장면을 보고 크게 웃는 모습.

조용한 웃음 : 종교적인 성인의 웃음.

자지러진 웃음:때굴때굴 구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웃는 모습.

얌전한 웃음 : 새색시가 조용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모습.

흐뭇한 웃음 : 아들, 딸들이 자랑스럽거나 바라던  일을 해 냈을 때 웃는 모습.

소탈한 웃음 : 만족감에서 나오는 웃음.

 

비웃음  : 상황이 앞뒤가 맞지 않을 때 웃는 모습.

쓴웃음  : 두고 보자는 복수심이 불탈 때 웃는 웃음

허탈한 웃음 : 기대심이 컸던 것이 일순간 무너졌을 때 웃는 웃음.

공포 웃음   : 무서움에 떨면서 눈이 크고 손을 저으며 웃는 웃음.

비장의 웃음 : 죽음에 임할 때도 굽힘이 없이 오직 결심한 대로

놀란 웃음   : 죽었던 사람이 살아 돌아 왔을 때, 생각지도 않은

기분 나쁜 웃음:소름 끼치듯이 웃는 웃음.

억지웃음    : 웃음의 여건이 아닌데 강제로 웃으라는 명령에 의해

실없는 웃음 : 웃을만한 여건이 아닌데도 시도 때도 없이 웃는 웃음.

정치적 웃음 : 인위적 목적을 띤 웃음.

 

 

 

■   성경에서 본 울음

 

 

□  울음의 종류

 

. 원망에 찬 울음

 

.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민 11:4)

.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민 11:18)

.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개월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민 11:20)

 

. 거짓 울음

 

. 삼손의 아내가 그의 앞에서 울며 가로되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이요 사랑치 아니 하는도다 우리민족에게 수수께끼를 말하고 그 뜻을 내게 풀어 이르지 아니하도다 삼손이 그에게 대답하되 보라 내가 그것을 나의 부모에게도 풀어 고하지 아니하였거든 어찌 그대에게 풀어 이르리요 하였으나(삿 14:16)

. 칠일 잔치할 동안에 그 아내가 앞에서 울며 강박함을 인하여 제 칠일에는 그가 그 아내에게 수수께끼를 풀어 이르매 그 아내가 그것을 그 민족에게 고하였더라(삿 14:17)

 

. 진심에서 우러난 울음

 

.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삼상 20:41)

 

. 기력이 다하도록 운 울음

 

.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삼상 30:4)

 

. 은근한 울음

 

.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 영원한 울음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사 8:12)

 

. 격렬한 울음

 

.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 사랑의 울음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 동정의 울음

 

.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  울음의 원인

 

. 죽음

 

.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5)

.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창 50:1)

.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는 기한이 맟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일을 애곡하니라(신 34:8)

. 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삿 11:39)

. 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삿 11:40)

.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생각하는지라(요 11:13)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요 20:11)

.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행 8:2)

 

. 환란, 재앙, 심판

 

. 거리에서는 굵은 베로 몸을 동였으며 지붕과 넓은 곳에서는 각기 애통하여 심히 울며(사 15:3)

. 헤스본과 엘르알레는 부르짖으며 그 소리는 야하스까지 들리니 그러므로 모압의 전사가 크게 부르짖으며 그 혼이 속에서 떨도다(사 15:4)

.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는도다 그 귀인들은 소알과 에글랏 슬리시야로 도망하여 울며 루힛 비탈길로 올라가며 호로나임 길에서 패망을 부르짖으니(사 15:5)

. 이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멸하였음을 인하여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사 22:4)

. 왕의 조명이 각 도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곡읍하며 부르짖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에 4:3)

.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렘 9:18)

.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렘 13:17)

.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렘 14:17)

.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렘 22:10)

. 그들이 다 너를 위하여 머리털을 밀고 굵은 베로 띠를 띠고 마음이 아프게 슬피 통곡하리로다(겔 27:31)

. 그들이 통곡할 때에 너를 위하여 애가를 불러 조상하는 말씀이여 두로 같이 바다 가운데서 적막한 자 누구인고(겔 27:32)

.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암 5:16)

.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5:17)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  질병, 고난, 조롱

 

.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욥 16:16)

.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시 39:12)

.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 42:3)

.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시 80:5)

. 나는 재를 양식 같이 먹으며 나의 마심에는 눈물을 섞었사오니(시 102:9)

 

. 참회, 가책

 

.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신 1:45)

.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삿 2:4)

.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스 10:1)

.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느 8:9)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렘 50:4)

.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욜 2:12)

.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 26:75)

.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 이별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행 20:36)

.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행 20:37)

.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행 20:38)

.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행 21:10)

.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행 21:11)

.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 21:12)

.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행 21:13)

 

. 혈육을 만난 기쁨

 

.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내어 울며(창 29:11)

.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창 42:24)

.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창 43:30)

.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2)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창 45:14)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창 45:15)

.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창 46:29)

 

. 모성애

 

. 가로되 자식의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 하고 살 한 바탕쯤 가서 마주 앉아 바라보며 방성대곡하니(창 21:16)

 

. 동정

 

.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 성도에 대한 염려

 

.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 반역으로 인한 슬픔

 

.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삼하 15:30)

 

. 자식없는 슬픔

 

.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 1:7)

.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삼상 1:8)

 

. 분노

 

.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창 27:34)

.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8)

 

. 성전재건으로 인한 감격과 기쁨

 

.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 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스3:12)

.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스 3:13)

 

. 포로생활의 비통함

 

.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 지옥에서의 고통과 후회

 

.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2)

.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22:13)

.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 13:28)

 

 

□   울음의 실례

 

. 아브라함

.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창 23:2)

 

. 에서

. 에서가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하고 소리를 높여 우니(창 27:38)

 

. 야곱과 에서

.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창 33:4)

 

. 야곱

.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 37:35)

 

. 요셉

.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창 42:24)

.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창 43:30)

. 요셉이 방성대곡하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창 45:2)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창 45:14)

.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창 46:29)

.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창 50:1,17),

 

. 한나

. 매년에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갈 때마다 남편이 그같이 하매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삼상 1:7)

 

. 요나단과 다윗

.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삼상 20:41)

 

. 다윗

. 다윗이 이 슬픈 노래로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을 조상하고(삼하 1:17)

.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삼하 3:32)

. 말을 마치자 왕자들이 이르러 대성통곡하니 왕과 그 모든 신복도 심히 통곡하니라(삼하 13:36)

. 온 땅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모든 인민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삼하 15:23)

.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 히스기야

.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왕하 20:3)

.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사 38:3)

 

. 예수

.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 마리아

.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눅 7:38)

.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요 11:33)

 

. 막달라 마리아

.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요 20:11)

 

. 바울

.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행 20:19)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   기타

 

. 새예루살렘에서 구원이 완성될 때 울음이 영원히 그칠 것임

 

.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사 65:19)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8)

.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 아들이 죽자 다윗이 울음을 멈춤

 

. 신복들이 왕께 묻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어찜이니이까(삼하 12:21)

. 가로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어니와(삼하 12:22)

. 시방은 죽었으니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 12:23)

 

.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둠

.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 이제 우는 자에게 복이 있음

.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

 

.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처럼 할 것

.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고전 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