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임 ......
■ 그리움
인간의 욕심은 한이 없다. 보고 듣고 만지며 냄새 맡고 맛 보며, 오감을 통하여 호오(好惡)가 갈리고, 욕심도 크게 된다. 마음 속에 담겨진 이들 감정은 오욕칠정으로 나뉘며, 결국 우리의 상념을 복잡하게 엮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식욕.수면욕.성욕.재물욕.명예욕의 오욕과, 기쁨.노여움(성냄).슬픔.즐거움.미움.욕망(두려움).사랑이라는 칠정으로 구분 되는 인간 감정의 원류는 감각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감각이 없다면 오욕칠정의 어느 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내장감각, 성감 등도 체세포 일부의 감각 중 한가지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인간 감정들은 시차적으로 각각의 특성을 생각할 수 있는데, 대부분 과거와 현재로서만 구분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지난 날, 과거의 그것들을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 관하여 예측되는 감정이란 과연 어떤 것이 있을까? 있다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를 줄 수 있을까?
과거와 미래에 대한 감정 중에서, 용서, 신뢰, 걱정, 불안 등에 관하여 짚어보기로 하자.
용서란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잊는 것이고, 신뢰나 불안은 미래에 대한 감정인데, 용서가 힘든 이유는 감정의 과거 찌꺼기가 현재까지 아직 남은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욕구가 강한데, 그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 근심하는 감정이 불안이다. 불안을 떨치는 방법은 겸손한 마음으로 욕망을 벗어 던지는데 있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감정이란, 신뢰 믿음 불안 등과 같이 미래의 바람에 대한 욕구충족 가능성 여부를 예측하는 데서 갖게 되는 것들이다. 신뢰와 믿음은 미래의 원하는 바를, 충족 내지 달성을 예상하거나, 나쁜 일과는 닥치지 않으리라는 감정이지만, 불안은 그 반대의 감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불안의 특성은 긍정적인 것에 대하여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을 미리 염려한다거나, 원하지 아니하는 부정적인 것들과 닥치지 않을까를 미리 걱정하는 것이다.
신뢰나 믿음이 미래에 대한 “긍정(미래)의 긍정(미래), 내지 부정의 부정”의 감정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불안은 “긍정의 부정, 내지 부정의 긍정”에서 오는 감정 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까?
. 그리움
이에 반하여 그리움의 감정은 과거에 경험했던 감정들을 현재에 와서 되새김질 하는 감정 행태이다.
신뢰, 믿음, 불안, 걱정 등이 미래에 관한 것이라면, 그리움은 과거에 관한 현재의 감정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특성은 과거 경험했던 호오(好惡)의 감정들 중, 좋았던 감정((好)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데 특성이 있다. 지난날 좋았던 것들이 현재에 다시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긍정(과거)의 긍정(현재)”만을 대상으로 한다.
“글” 이나 “그리움”의 어원은 “긁다”라고 한다. 벽이나 바위 위를 “긁어서” 기호로 표시 한 것이 “글”의 어원이고, 그리움도 마음 속에 “긁어서” 남긴 과거의 감정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미래에 닥칠 일을 미리 마음에 담는 것은 “신뢰나 불안, 걱정”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마음 속에 그려진 과거에 대한 그림 중에서도 좋은 감정에 대한 것이 “그리움”이라면, 노여움 슬픔 두려움 걱정 원한 회한 등은 좋지않은 그림에 해당 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움”은 우리 감정 중에서 특히 “과거의 좋았던 부문”의 한정적으로 제한된 부문을 대상으로 지칭하는 것이 된다.
그리움은 지난날 좋았던 감정에 대한 회상이고, 되돌아 가고 싶은 시간이자, 머무르고 싶었던 순간이며, 다시 갖고 싶은 과거의 상황이나 감정들이다. 그래서 생각나면 사랑스럽고 흐뭇하며, 설레임의 낭만이 그려지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리움의 모순점은 그 때 그 가운데 함께했을, 고통, 화남, 두려움, 미움, 야속함, 아픔, 걱정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사그라지고 긍정적이고 좋았던 기억들만이 남아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그 좋은 사례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장면을 보며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부부간, 부모와 자식간, 형제간의 애절하던 그리움의 모습들과 수 십년 만에 만나는 상봉의 기쁨을 나누는 모습은 어느 가족에게서나 느낄 수 있다. 상봉 가족들의 서로를 애닯아 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내 부모 내 형제 내 가족들과는 왜 그들 같은 깊은 감정이 없을까를 생각나게 하곤 한다.
단절된 기간동안 그리움이 될만한 좋은 감정만 선택적으로 남았기 때문에 커진 결과 일 것이다. 그 때 서로 헐뜯고 다투던 순간의 감정은 그들의 “그리움” 속에서는 찾을 수 없고, 오직 좋았던 모습과 생각과 감정만 남았을 것이다. 설령 그러한 나쁜 기억이 있더라도 그 때의 악감정은 “용서”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땜질 된 상태일 것이다.
그립던 사람과의 재결합은 다시 헤어지기 십상이라고 누군가는 주장한다. 그리움의 감정 속에는 그 당시 아팠던 감정은 잊혀진 채 이미 빠진 상태지만, 현실의 재회에서 그 아픔은 재발되기 쉬우며 재결합된 현실은 과거로 회기하기 쉬우리라는 주장이다. 물론, 자의로 결정하고 헤어진 경우가 아니라, 시대의 모순, 사회의 모순으로 인하여 강제된 이유로 단절되고 헤어져서 겪는 그리움은 또 다른 경우일지는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나의 가족관계에서처럼, 부모 형제자매, 부부 간의 만족감 행복감은 어떤지를 돌아 보며, 절절한 그리움에 물든 이산가족 들의 감정과는 사뭇 다른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사이 좋은 노부부들처럼, 서로가 함께 있는 듯 없는 듯, 무덤덤한 관계야말로 가장 원만한 감정의 모습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아름다운 감정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인성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그리움에서 시작된 아쉬움을 이기고, 그리움을 향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그 희망을 갖고 노력 하는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이라는 그늘 아래 헤어나지 못한 채 포기하는 나약함이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약도 되지만 병도 된다. 그래서 “그리움”은 우리의 감정 사회를 더욱 다양하게 꾸리게 하는 이유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말 “그리움”이 상정하는 감정은 모자람과 아쉬움 회한 등의 부정적인 것 이라고 하기 보다는 따스하고 넉넉하며 풋풋한듯한 좋은 감정이 묻어 나는 감정의 표현이라는 생각이다. 그 속에는 좋았던 어린시절, 청년시절에 경험했던 자연의 풍광이 있는가 하면, 나를 보살펴 주던 가족과 이웃과 벗, 조국에 대한 아름다운 면면들이 서리게 된다. 한자의 “연(戀), 동(憧), 모(慕)” 의 의미들이 함축된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그 감정을 맑다거나 밝다고 표현한다면, “회(褱), 회(懷)” 의 감정은 밝은 면 보다 회색 빛 어두운 면이 더해진 우울한 감정이 묻어난다. 영어 사전을 뒤져봐도 꼭 집어 하나로 대치될만한 단어가 마땅치 않다; yearning, longing, attachment, affection, nostalgia.
그래서 국어사전 예문 중에서 몇몇을 골라 놓고, 그 깊은 맛을 느껴 본다. 삶의 아름다움이 그리움 이라는 말 속에도 적셔져 있음이 느껴온다.
ㅁ
(국어사전)
. 그리움으로 일렁이는 그의 눈빛은 나의 그리움과 서러움을 넉넉히 헤아리고 있었다.
. 고된 삶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끔 월컥 가슴을 파고드는 그리움은 어쩔 수 없었다.
. 그녀는 사무치는 그리움에 무정한 밤하늘만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 사랑은 짧지만 그리움은 길고, 이별은 짧지만 그 추억은 긴 것 같다.
. 그녀가 떠난 후 내 가슴은 늘 연분홍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다.
. 나는 가슴속에 그녀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
ㅁ
. 명절이 되면 북쪽에 두고 온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목이 메어 먼 데를 바라보곤 한다.
. 그 편지에는 모성의 피맺힌 슬픔과 자식에 대한 애끊는 그리움이 절절히 흐르고 있었다.
. 그의 글에는 부모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이 절절히 흐르고 있었다.
. 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쏴 밀려 들었다.
ㅁ
. 그는 바닥이 드러난 갯벌을 보면서 외로움에 몸을 떨다가도
만조 때가 되면 왠지 가슴속이 그리움으로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 어디선가 들리는 젊은이들의 합창 소리는
내 가슴속에 젊고 늠름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 아버지가 이따금 눈물을 보이신 것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임을 비로소 알았다.
. 옛집에 대한 그리움과 새집에서의 어설픔으로 나는 몸살을 앓을지 모른다.
. 어릴 적 사진을 보면서 나는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모양새를 가늠하고, 그 아름다움의 의미를 음미한다. 내가 품었던 그리움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돌아보기도 하고,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그 가치가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지도 생각하여 본다.
2013.9.20.
오갑록
□ 사전
. 그리움 (戀, 憧, 慕, 褱)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 또는 과거의 경험이나 추억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
(영) yearning, longing, attachment, affection, nostalgia.
(한자) 戀, 憧, 慕, 褱 (중) 怀念, 怀恋, 想念, 思念, 眷念 (일) 慕わしさ, 懐かしさ, 恋しさ
. 그리워할 회(褱)
그리워할 회(褱)자는 옷 의(衣)자 중간에 눈 목(目→罒)자와 물 수(水/氺) 자가 들어 있다. 즉, '눈(目→罒)에서 눈물(氺)이 나와 옷(衣)을 적시며 그리워하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고 다른 글자와 만나 소리로 사용된다.
. 품을 회(懷) : (중) 怀 (약) 懐 ; 마음 심(忄) + 그리워할 회(褱)
박홍균
품을 회(懷)자는 '그리워하는(褱) 사람을 마음(忄)에 품다'는 뜻이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다’에서 회포(懷抱)는 ‘마음속에 품고(懷) 품은(抱) 생각이나 정’을 말한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다’에서 허심탄회(虛心坦懷)는 ‘마음(心)을 비우고(虛) 품은(懷) 것을 드러내다(坦)’는 뜻이다.
회의(懷疑)는 ‘의심(疑)을 품다(懷)’는 뜻이고, 방법적 회의(方法的懷疑)는 '확실한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方法的) 모든 것에 의심(疑)을 품다(懷)'는 뜻으로,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년)가 확실한 진리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모든 것(감각, 의식, 철학적 이론 등)을 먼저 의심스러운 거짓으로 단정하고,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하다면 진리로 인정하였다. 데카르트는 자기 자신조차도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다.
. 무너질 괴(壞) : (중)坏 ; 붕괴(崩壞), 괴멸(壞滅), 파괴(破壞) 등
. 그리움
김동규
'그림', '글(文)', 그리다(畵)', '그리다(募), '그립다'라는 말은 모두 밀접한 관계에 있다. 백문식에 따르면 "그림과 글(文)은 '긁다'에 어원을 둔 동사 '그리다(畵)'에서 갈라져 나왔다. '그림을 그리다'라는 행동은 글을 쓴다는 행동보다 먼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다'는 선사시대 벽화를 그릴 때 손톱이나 날카로운 쇠붙이 끝으로 바닥 또는 벽면을 긁어 파는 원초적인 동작과 관련이 있다. … '그리다'는 형용사 '그립다'로 발전하였으며, 그립다에서 '그리움'(그리는 마음이 간절함)이 전성되었다.
'그리움'의 어원적 의미는 '마음에 그림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결국 '그리다(畵)'는 연모의 대상을 상상하여 그리워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한국어의 어원 역시 서양 말의 어원과 마찬가지로 깊이 있는 이미지 해석의 단초를 던져주고 있다. 그 해석을 정리 보면, 이미지는 일종의 그림인데, 근본적으로 그림은 그리움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미지는 사랑하는 대상이 부재할 때, 마음 둘 길 없는 그리움이 그려 낸 그림이다.
□ "긋다"에서 “그리움”까지 (우리말의 어원)
천소영, “우리말의 속살” 중에서
외상을 질 때 흔히 "긋는다" 또는 "달아놓는다"고 말한다. 단골 술집이라면 이런 말도 필요 없이 그저 손가락 끝에 침을 발라 대각선으로 쭉 긋는 시늉만 해 보여도 족하다. 맞돈일 때는 셈을 치른다고 하면서 외상인 경우에는 긋는다거나 달아놓는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긋는다"는 "쓰다" 이전에 있었던 가장 원시적인 기록 방식이다. 무언가 새겨 두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를테면 날짜를 기억하거나 사냥한 짐승의 수를 표시하고자 할 때 대게는 어떤 뾰족한 도구로 벽이나 기둥 같은 곳에 선을 그어 표시했을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상 술을 마셨을 때 낫으로 기둥에 금을 긋거나 새끼 마디에 도토리를 매달아 이를 표적으로 삼곤 했다.
기억하는 일을 달리 말하여 마음에 새겨 둔다고 한다. 명심 또는 각심이라는 한자말이 여기 해당하는데, 이는 다름아닌 마음에 선을 긋는 일이다. 비록 눈에 띄지 않지만 마음에 새긴 금만큼 확실한 표적도 없을 듯하다. "제발 이 일만은 마음에 두지 말게"라는 당부는 흔히 듣는 말이지만 마음에 새긴 금을 쉽게 지울 수가 없다.
살을 쪼아 먹물을 들이는 애흔 수술이나 돌이나 쇠에 새긴 금석명은 지울 수 있으나 마음에 새긴 것만은 지우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금은 긋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 또는 글을 쓰는 일과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이다. 긋고 그리고 쓰는 일은 백지 상태의 흰 바탕에 무언가 흔적을 남기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금, 글 , 그림, 그리움이 본질에 있어서는 모두 같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군가가 내 마음의 벽에 금을 그려 놓은 그림자이다.
"그립다"는 말은 그 사람의 모습을 자꾸 그리고 싶다거나, 새겨진 그 모습이 새록새록 생각난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 상대가 마음에 들면 들수록, 그와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새겨진 금은 많아질 것이고 금의 깊이도 더해 만 갈 것이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그립다"는 말 자체가 "그리고 싶다"이기에 이 말은 하면 할수록 더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그리다, 그리워하다, 그립다"는 말의 본뜻을 절묘하게 살린 예를 우리는 김소월의 "가는 길"이라는 시에서 찾는다. 마음 속에 새겨진 무형의 흔적이 그리움이라면, 그리움은 당장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 희미한 그림자 일 것이다. 대중 가요에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이라는 가사도 있지만 그리움이란 역시 대상이 눈 앞에 없는 경우에 쓰일 수 있다. 보고 싶은 님은 당장 그곳에 없어도 그 님의 그림자만은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움은 생명이 영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움은 또한 태양을 등진 어두움의 그늘이다. 그것은 밝고 맑은 분위기가 아니라 우울하고 슬픈 이미지를 나타낸다. "내 님을 그리사와 우니다니, 산접동새 난 이슷하요"라는 고려가요 "정과정"에서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바람 센 오늘은 너 더욱 그리워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 있나니..." 하는 청마 유치환의 시에서 보듯 그리움은 대체로 울음을 동반하여 얼굴을 내민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을 그리움이라 한다면 눈으로 불 수 있게 손으로 그려 내는 그림을 글(서,문)이라 할 수 있겠다. 글은 새기는 사람에 따라 그의 개성이 배어 있으므로, 이를 일러 글씨라 일컫는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듯 그리움의 흔적, 곧 글을 쓰는 방식도 시대에 따라 변해가고 있음을 본다. 기둥이나 벽에 금을 긋던 원시적 방법은 이내 붓 끝에 먹물을 찍어 긋는 방식으로 바뀐다. 다시 먹물 대신 잉크가, 붓 대신 철핀(펜)이 나와 이를 대신하는 듯 싶더니 곧 이어 만년필이나 볼펜이 등장하여 훨씬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타자기나 컴퓨터가 등장하여 쓰는 일에 일대 혁신을 가져온다. 이처럼 기록 방식은 긋거나 긁는 데서 치거나 두드려 찍는 식으로 변했는데, 이렇게 찍혀 나오는 글씨에서는 무언가 잃은 듯한 허전함을 느낀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자신의 솜씨를 자랑할 수가 없어서가 아니다. 컴퓨터에서 찍혀 나오는 글씨는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상품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만든 이의 정성과 손때가 묻어 있는 수제품에서 느껴지는, 그런 맛을 맛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괴발개발 함부로 쓴 악필일망정 글씨에는 쓰는 사람의 개성과 마음의 흔적이 배어 있다. 지문이 묻어 있는 자신의 육향이 스며 있다고나 할까. 날씨로 치면 희끄무레하니 흐린 날의 이미지를 가졌지만 그리움은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사랑이란 우리 혼의 가장 순수한 부분이 미지의 것을 향하여 갖는 성스러운 그리움"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 자체가 그리움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바람 부는 오늘 같은 날에는 어느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 그리움
부분발췌 (김정운, 한겨레, 2010.)
......
우리말의 그리움은 참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미움과 증오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 끼어 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애틋한 의미가 영어로는 잘 번역되지 않는다. ‘갈망’, ‘열망’을 뜻하는 ‘longing’으로 번역되나, 그 풍요로운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움을 뜻하는 독어의 ‘Sehnsucht’는 우리말의 ‘그리움’에 그 뉘앙스가 상당히 근접해 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이 ‘Sehnsucht’를 꼽곤 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외로움의 고통도 알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안다는 이야기다. 그의 시에 차이코프스키가 곡을 붙인 소프라노의 노래는 구구절절 가슴을 울린다. 심리학적으로도 그렇다. 그리움이 없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뜻이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는 걸까?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기가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심리학적 기준은 ‘흉내 내기’에 있다. 아기가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것도 한참 전에 봤던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다. 이를 ‘지연모방’(deferred imitation)이라고 한다.
지연모방은 타인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스위스의 심리학자 삐아제는 ‘표상’(representation)이라고 정의한다. ‘표상’이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생후 약 9개월부터 이 표상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후 9개월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로 보자면, ‘그리움’과 ‘생각’은 같은 단어다. 살면서 도무지 그리운 게 없다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가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지내는 것도 도무지 그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의 어느 순간부터 가슴 시린 그리움의 감정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 가을이 더욱 쓸쓸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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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부분발췌 (김정운 경향,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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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제주도에 워크숍을 갔다. 비는 시간을 이용해 서귀포의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장맛비를 뚫고 찾아간 미술관에 전시된 이중섭의 작품은 대부분 사진이었다. 진품은 채 몇 점 되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마음에 돌아 나오는데, 한쪽 벽에 이중섭의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아, 이렇게 가슴 저리는 그리움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피난 온 서귀포에서의 2년이 채 못 되는 시간이 이중섭에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꿈 같은 나날이 된다. 어쩌지 못하는 가난 때문에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귀포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중섭의 편지는 그의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것이다. 네 장을 빽빽하게 쓴 편지에는 입국허가와 관련된 단 한 문장을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뿐이다. 특히 아내에 대한 그의 애틋함은 그녀의 발가락에까지 닿아 있다.
이중섭은 아내의 발가락을 ‘아스파라가스군’이라 부르며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아스파라가스군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뜰한 뽀뽀를 보내오.’ 또는 ‘나만의 소중한 감격, 나만의 아스파라가스군은 아고리(이중섭의 별명)를 잊지나 않았는지요?’, ‘아스파라가스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리가 화를 낼 거요.’ 이 따뜻하고 유머스러운 발가락의 에로티시즘과 행려병자로 홀로 죽어간 이중섭의 초췌한 모습이 오버랩 되며 가슴 끝이 꽉 조여 든다.
네 장을 가득 채우고도 못내 아쉬운 이중섭의 그리움은 편지지의 귀퉁이마다 작은 삽화로 다시 그려진다. 떨어져 있는 세 식구를 향해 팔을 벌린 자신의 모습, 네 식구가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 아내의 얼굴 등을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특히 발가락을 따뜻하게 안 하면 화낸다는 문장 뒤에는 화를 내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귀엽게 그려넣었다.
그의 아내는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또 보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울었을까? 쓸쓸한 이중섭은 가족과의 행복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평생 그렇게 그리워하다 죽어갔다. 벌거벗은 아들이 게,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린 이중섭의 그림들은 그래서 더 처연하다.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행복에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가끔은 외로워야 한다. 가슴 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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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향수(鄕愁), Nostalgia..
July 10, 2013, Author Ken
Nostalgia, 노스탤지어, 향수(鄕愁).. 사전을 보면 이것의 뜻은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정도가 된다. 그렇게 힘든 뜻이 절대로 아닌 것이 누구나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내가 ‘애독’하는 New York Times, the 신문에 ‘향수, nostalgia에도 과연 바람직한 것이 있는가?‘ 란 제목의 기사가 나의 눈을 끌었다. 이 제목을 보면 우선 향수란 것은 원래 ‘바람직하지 않은 것’ 으로 암시가 되어있고 그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향수, nostalgia란 용어는 의학적인 것도 있어서, 이것은 분명히 disorder (장애 障碍) 에 속하고 따라서 그에 따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의 어원은 ‘망향심 望鄕心’의 그리스어 nostos와 고통이라는 뜻의 algos가 합성된 말로서 17세기 어떤 스위스 의사가 ‘전쟁 중에 떠나온 고향을 그리는 군인들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의 병’ 을 뜻하는 말로 시작이 되었다고 했고, 이후로 이 ‘병’은 부정적인 뜻으로 이해되고 쓰이고 있다.
. 향수(병) 연구
이 기사의 ‘주인공’은 영국에 사는 그리스(희랍)계 (사회)심리학 교수 콘스탄틴 세디키데스 (Constantine Sedikides, University of Southampton, U.K., Ph.D Ohio State University, 1988) 인데, 그리스에서 대학을 졸업, 곧바로 미국 유학으로 사회심리학으로 연구를 계속, 현재는 영국의 University of Southampton에 재직하고 있는 사회심리학계의 권위자이다. 이런 배경이면 젊었던 시절을 포함해서 고향을 두 번씩이나 떠난 셈이고, 고향의 그리움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고, 그것을 사회심리학적으로 파헤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날 고향 생각에 빠진 그를 보고 주위에서는 ‘우울증’으로 우려를 했지만, 그는 사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고 그가 느낀 것은 ‘고통적, 병적’인 것이 아닌 ‘포근함, 심지어 즐거움’에 가까운 것들이었고, 과연 고향과 지나온 과거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향수(병)이라는 것은 꼭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과연 향수(병)이 과거에 짓눌려 살아야 하는 고통인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를 사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주인공 자신의 느낌으로 출발된 이 문제는 본격적으로 ‘학문적, 통계적’으로 10년 이상 연구가 되어서 그 결실을 맺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 그가 이런 향수(병)에 걸렸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이런 향수적 감정은 내 존재의 뿌리와 연속성을 느끼게 해 주고, 내 자신과 주변과의 관계도 긍정적으로 보게 해 주었으며 앞으로 살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였는데.. 과연 나만 그런 것일까.. 하는 선에서 출발을 했다고 한다. 연구의 결과는 그가 느낀 그대로였다. 그 골자는:
향수적 감정은 고독과 지루함, 불안함과 맞서 싸우는 힘이 된다는 것이고 나아가서 자신을 더 관대하고, 포용적이고 더욱 참게하며 특히 부부들은 공통된 향수, 기억 감정을 나누며 더욱 가까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 이 감정은 글자 그대로 우리를 훈훈하게 해 준다. 물론 고통스럽던 기억도 동반하겠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이 향수감정은 우리의 인생을 더 의미 있게 보게 하고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죽음도 덜 무섭게 느끼게 한다.
이 향수(병)이란 것은 지역적, 연령적 차이가 거의 없이 또한 생각보다 더욱 자주 겪게 된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예전, 특히 19, 20세기에는 이 감정(‘병’)이 실향민,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겪는 ‘이상 증세’라고 분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연구결과로는 이것은 ‘누구나’ 겪는 훨씬 보편성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친구, 가족, 명절 휴일들, 결혼, 노래, 석양, 호수.. 등등의 추억으로 더욱 나타나고 특히 그것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은 항상 ‘좋은 주인공’의 역할을 했다고 기억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 이상 이런 경험을 하고, 거의 반수 이상이 일주일에 3~4번 겪는다고 한다. 특히 고독을 겪는 사람이 더 자주 겪는데, ‘향수 감정’이 그런 고독과 우울의 고통을 덜어 주며 그런 데서 빨리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이 연구 결과로 향수가 그렇게 ‘좋은 면’도 있다면, 이것을 의도적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는 없을까? 가장 빠른 방법 중에는 추억의 음악을 듣는 것이 있고 이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고 하며 정말로 이 ‘추억의 음악’ 효과는 대단해서 실제로 몸 자체가 따뜻해 진다고 한다. 간혹 지나치게 과거에 집착하게 되면 ‘인생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위험도 없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오히려 과거와 현재,미래를 더욱 더 연결시켜주는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연구 팀의 일원인 Dr. Routledge는 “향수 감정은 우리의 ‘실존 감’에 탁월한 도움을 준다. 내가 아끼는 귀중한 추억을 불러 일으키며 그것이 우리가 의미 있는 생을 보내는 값진 한 사람 임도 일깨워 준다. 또한 많은 향수 감정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도 잘 처리한다.” 고 보고를 했다.
다른 흥미로운 것은 이 ‘향수 감정’의 빈도나 심도는 젊은이에게 크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간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젊은이들의 경우, 새로운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그 이전의 시절을 회상, 음미하며 건강한 변화를 추구하며, 가족과 보냈던 크리스마스, 애완 동물과 학교 친구들을 그리워한다. 이럴 때 바람직한 것은 좋은 추억거리가 많을 수록 좋고, 이것은 거꾸로 살아가며 좋은 추억거리를 많이 만들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런 향수 감정을 잘 ‘이용’하려면, 가급적 기억 속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를 하며, ‘그때가 좋았지.. ‘하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그 대신, ‘존재적인 방법’으로 그 때의 일들이 나의 현재에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도 극단적인 것만 피하면 ‘추억 향수의 감정’을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병적인 노이로제나 극단적 성향만 없다면 이런 향수적 감정은 ‘적극적’으로 즐기는 것, 일주일에 2~3번 정도 빠지는 것도 좋고, 이것을 우리가 경험으로 번 값진 상품이라는 것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이다.
이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또 한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된다. 몇 년 전에 이런 ‘we didn’t know then..‘ 류의 ‘연구 보고기사’ 중에 ‘내성적인 사람들의 시대’ 란 조금 걸맞지 않은 제목도 있었고 나는 ‘신나게, 열심히’ 읽었다. 내가 내성적인 사람 중의 ‘대표’이기에 그랬을까? 생각보다 더 많았던 ‘동료 내성적 인간’들을 알고 흐뭇해 하기도 했지만, 진정한 내성의 장점도 확실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회 심리학’적인 것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지역간에도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변화는 큰 것이 못 된다. 한마디로 인간은 대개 ‘공평’하다고 할까.. 그런 보편적 경험적 진리를 확인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면 지금 이 기사를 읽으며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이것도 ‘안도감’이었다. 일방적인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나는 향수 감정 같은 것 별로 없다’ 하며 살고 싶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과거에 매달리는 ‘현재가 불행한 한심한 인간’이란 딱지를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위의 연구 결과에 있듯이 일 주일에 몇 번 씩 이고 그런 감정을 느끼고, 어떨 때는 즐기고 산다. 그렇다고 나의 현재가 과거에 비해서 덜 행복하거나 심지어 비참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연구 보고와 같이 나는 조금 우울해지면 ‘일부러, 자연적으로’ 향수 감정을 이용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 자신 성격의 일부가 된 것 같다. 그런 ‘추억적 행복’도 없다면 아마도 위의 연구결과에도 있듯이 괴로운 감정을 더 느끼며 살았는지 누가 알랴?
그러면서 나의 blog을 찬찬히 뒤 돌아 보면, 역시 나는 ‘과거의 좋은 추억’들을 적극적으로 총동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현재를 더 의미 있게 ‘견디는’ 영양제가 된 것일까? 주변의 어떤 ‘골프를 미치도록 좋아하는’ 친지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왜 과거에 집착을 하느냐?‘ 라는 간단한 반응이다. 과연 그는 그의 ‘아름다운 추억’을 즐기지 않는 것일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나는 조금 평균이상으로 ‘향수 감정’을 겪고 있고, 그것으로 나의 ‘아픔’을 잊으며, 그것이 현재를 더 건강하게 살고 미래를 준비하는 원천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차피 원어 발음이 힘들면 간단하게 그냥 노스탈자 하면 더 좋지 않을까?
□ 옛노래
. 그리움이 연상되는 옛노래 ; ☞ 유튜브
. ☞ 그리움만 쌓이네 (여진)
. ☞ 고향은 내사랑 (윙크)
. ☞ 고향은 내사랑 (주현미)
. ☞ 제 비 (조영남)
. ☞ La Golondrina (Nana Mouskouri)
. 음악에 부쳐((☞ An die Musik) – Schwarzkopf, 1961)
. ☞ 그리움만 쌓이네
여진
다정했던 사람이여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
그리움만 남겨놓고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세월 가버렸다고 이젠 나를 잊고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가
아 나는 몰랐네 그대 마음 변할 줄
난 정말 몰랐었네
오 나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았네
그리움만 쌓이네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세월 가버렸다고 이젠 나를 잊고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가
아 나는 몰랐네 그대 마음 변할 줄
난 정말 몰랐었네
오 나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았네
그대만을 믿었네
네가 보고파서 나는 어쩌나
그리움만 쌓이네
네가 보고파서 나는 어쩌나
그리움만
그리움만 쌓이네
. 고향은 내사랑
남인수 (☞ 윙 크)
찔레꽃이 피어 있네 고향에 묵은 꿈 속의 날
잘있소 잘가오 눈물로 헤어지던 날
그대는 대답 없고 구슬픈 산울림만 울려주니
그때 피었던 찔레꽃이 피어 있네
해당화가 피어 있네 추억에 젖은 어린 시절
꼭 오지 꼭 오마 손가락 헤어본 시절
그대는 가고 없고 외로운 새 소리만 들려오니
그때 피었던 해당화가 피어 있네
. ☞ 제 비
조영남
정답던 얘기 가슴에 가득하고
푸르른 저 별빛도
외로워라
사랑했기에 멀리 떠난 님은
언제나
모습 꿈속에 있네
먹구름 울고
찬 서리 친다 해도
바람 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고운 눈망울
깊이 간직한 채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아 그리워라
잊지 못할 내 님이여
나 지금 어디 방황하고 있나
어둠 뚫고
흘러내린 눈물도
기다림 속에 잠들어 있네
바람 따라 제비 돌아오는 날
당신의 마음 품으렵니다
. ☞ La Golondrina
Caterina Valente, 1956
(Nana Mouskouri)
A donde ira veloz y fatigada 여기를 떠나가는 제비는
la golondrina que de aqui se va 아, 혹시 바람 속에서 쉴 곳을 찾다가 길을 잃었나
oh, si en el viento se hallara extraviada 아니면, 쉴 곳을 찾지 못하나?
buscando abrigo y no lo encontrara 내 침대 곁에 그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리
Junto a mi lecho le pondre su nido 그곳에서 계절을 보낼 수 있으리라
en donde pueda la estacion pasar 나도 역시 이곳에서 길을 잃었네
Tambien yo estoy en la region perdida 오, 하느님 날을 수도 없습니다.
oh, cielo santo y sin poder volar 나 역시 사랑하는 조국을 떠났네
Deje tambien mi patria idolartrada 내가 태어난 집도...
esa mansion que me miro nacer 나의 삶은 오늘도 방황하고 고뇌스러우며
mi vida es hoy errante y angustiada 이제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네
y ya no puedo a mi mansion volver 사랑하는 제비야, 방황하는 여인이여
Ave querida, amada peregrina 당신을 나의 가슴으로 안으리라
mi corazon al tayo estrechare 당신의 노래를 들으리라
oire tu canto, tierna golondrina 다정한 제비여
Recordare mi patria y llorare 나의 조국을 생각하며 나는 눈물을 흘리네
.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괴로움을 안다”
차이코프스키(1840년생) op.6-6
괴테 시에 곡을 붙인 가곡(1869년 작곡)
Schwarzkopf, Soprano, 1956년 연주
Nur wer die Sehnsucht kennt,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Weiß, was ich leide! 내 아픔을 알리라!
Allein und abgetrennt 홀로
Von aller Freude, 모든 기쁨을 저리하고
Seh ich ans Firmament 저 멀리
Nach jener Seite. 창공을 바라보누나
Ach! der mich liebt und kennt, 아! 나를 사랑하고 아는 님은
Ist in der Weite. 저 먼 곳에 있다.
Es schwindelt mir, es brennt 몸이 어지럽고
Mein Eingeweide. 애간장이 타구나
Nur wer die Sehnsucht kennt,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Weiß, was ich leide! 내 아픔을 알리라!
. 음악에 부쳐(☞ An die Musik)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Schwarzkopf, Soprano, 1961
Du holde Kunst, in wieviel grauen Stunden,
너 축복 받은 예술아, 얼마나 자주 어두운 시간에,
wo mich des Lebens wilder Kreis umstrickt,
인생의 잔인한 현실이 나를 조일 때,
hast du mein Herz zu warmer Lieb entzunden,
너는 나의 마음에 온화한 사랑을 불을 붙였고,
Hast mich in eine bessre Welt entrückt!
나를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였던가!
in eine beßre Welt entrückt
Oft hat ein Seufzer, deiner Harf entflossen,
종종 한숨이 너의 하프에서 흘러나왔고,
Ein süßer, heiliger Akkord von dir,
달콤하고 신성한 너의 화음은
Den Himmel bessrer Zeiten mir erschlossen,
보다 나은 시절의 천국을 나에게 열어주었지,
Du holde Kunst, ich danke dir dafür!
너 축복 받은 예술아, 이에 나는 너에게 감사한다!
Du holde Kunst, ich danke dir
□ 시인과 그리움
. 그리움
김진균
산 너머 저 하늘이 그리운 것은
멀고 먼 고향이 그립기 때문
멀고 먼 고향이 그리운 것은
고향의 어머니가 그립기 때문
고향의 어머니가 그리운 것은
어머니보다 더한 사랑이
더한 사랑이 없기 때문
.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 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 그리움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그리움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그리움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개땅쇠 시평 중에서)
그렇습니다. 황동규 시인은 “기다림”을 “사랑”보다 더 상위에 놓았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의 사랑이 하찮았던 것은 아니죠. 자신의 사랑을 비록 “사소함”으로 표현했지만 그것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사소함”이지요. 그런데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은 우주의 진행 원리이고 지구의 존재 방식입니다. 그의 사랑은 반어적 “사소함”으로, 실은 위대한 우주적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사랑은 위대한 “사소함”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사랑은, “사랑”에서 위대한 “사소함”으로, 다시 영원한 “기다림”으로 승화되지요.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지고 또 눈이 퍼붓는” 변화 속에서도 시인의 “기다림”은 계속됩니다. 그리고 우주적인 “사소함”인 시인의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이지만, “기다림”은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기다림”을 사랑의 최고 형태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랑”도 그치고 “사소함”도 변하는 그 때도 “기다림”은 계속되기에 시인은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황동규 시인의 “기다림”과 서정주의 “그리움”은 같은 게 아닐까요? “그리움”, “기다림”, 신기하게 어감도 비슷합니다. 혹시 같은 어원에서 발생한 어휘는 아닐까요?
어쨌든 우리는 그리워서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그리워합니다. 또, 기다리면 더욱 그리워지고, 더욱 그립기 때문에 한없이 기다릴 수 있지요.
이러한 우리의 보편적인 마음의 변화는 “그리움”과 “기다림”을 동의어로 만들어요. 설령 어원도 다르고 뜻이 다를지라도, “그리움”과 “기다림”은 동의어입니다.
□ 그리움이란 환상
인용원문; http://blog.donga.com/arcadeactor/archives/21
……
“옛연인”이라는 기억은 참으로 좋은 기억만 남고 나쁜 것은 망각한다. 이 맹점을 이용해 술은 유혹한다. 전화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이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면 당신은 이미 스스로에게 더 큰 상처를 내고 있는거다. 시간이라는 명약이 절로 치유해 줄 상처를 스스로 덧내고 있다.
순간의 그리움을 사랑이라 착각하지 마라.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저 현재의 허전함을 채우고 싶은 당장의 이기심일 뿐. 있다가 없으면 드는 공허함을 급하게 메꾸어 보려는 졸렬한 사고일 뿐. 설사 그 전화를 통해 그 마음 속 공터를 일부나마 채워 넣는다 해도 결과는 항상 하나로 귀결된다. 또 다시 찾아오는 이별.
연인이 헤어졌을 땐, 다 이유가 있었기 마련이다. 순간의 그리움에 취했을 때는 그 이유가 생각이 안 났었는데 다시 붙잡고 보니 문득 생각 난다. …… 결국 과거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둘은 또 갈등하고 반목하다가 “이번엔 진짜” 헤어진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나는 헤어졌던 상대와 다시 사귀는 건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만 뒀으면 훗날 아름답게 기억될 수 있는 “핑크 빛 로망”을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불쏘시개로 쑤셔 아름다운 로망을 더러운 현실과 마주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번 깨진 믿음은 두 번째엔 몹시 쉽게 깨진다. 순간의 그리움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순간, 불행은 또 다시 시작된다. 현실은 영화처럼 로맨스가 만연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헤어졌던 두 연인이 짙은 포옹을 나누면서 끝나지만, 현실은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사랑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한 번 깨진 믿음은 도무지 다시 예전처럼 붙지 않는다. 믿음 없는 사랑은 불안의 연속이다. ……
자신에게는 수 많은 새로운 인연들과의 가능성이 있는데 왜 굳이 상처만 덧낼 옛 연인에 집착하는가. 그 순간의 그리움만 잘 넘기면 예전처럼 행복한 삶이 다시 찾아 오는데, 왜 그리움을 사랑으로 착각하는가? 시간은 유한하지만, 사람은 너무 많다. 하루하루 흘러가는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거늘, 시간 중요한지 모르는 짓이다.
과거는 가만 두면 아름답게 남는다. 그 아름답게 남을 수 있는 과거의 로망을 굳이 현재의 현실로 끌어와 더럽히지 말자. 자신에게 문득 눈 감았을 때 떠 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 하나쯤은 남겨줘야 하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