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
■ 조우 (遭遇)
나의 삶, 그 길목에서 “조우(遭遇)했던 것들과 나” 사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연기(緣起)론의 주장은 "목적론적 세계관, 필연적 우주관"으로 본, "우주나, 이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업(業)이며 연기(緣起)론은 이 세상의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을 바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본다. 이와는 상대적으로, 자연의 이치가 물리이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면, 물리론의 합리성이라는 연장선에서 그 시작과 끝도 연계되리라는 상상을 가져 본다.
“나”라는 개체, 우리 인간이 지금 안다고 하는 지식들이란 어둠 속에서 집힌 작은 짚 검불 자락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물질과 정신 모두가 철저하게 물리적 기본원리로 구성되어 진화한 세상이라는 가정의 “물리론적 우주론”을 상정한다면,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조우(遭遇)했던 것들”이 아니라 물리 원칙에 따르는 순리에 의해 연계되어 당연히 만나는 것들 일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여 보는 것이다.
단지, 현대 인간의 지적능력 수준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물리적인 순리론에 따르는 당연한 결과들을 “너”와 “조우(遭遇)했던 것들”이라고 말 하는 것은 아닐까? “너”라고 하는 인간관계는 “물리적 실체와 함께 뭇 생각과 감정들” 까지도 그러한 “너”에 해당되는 것이라는 상상은 야무진 착각일까?
연기(緣起)론으로 이어진 목적론적 우주관을 잠시 접어 둔 채, 물리이론에 따르는 당연론적 우주관을 상상하면서 “나”의 입장에서 “조우(遭遇)했던 것들”의 면면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모두가 우연이었다고 무심하게 넘기던 “나와 너”의 현상이며 관계들이 당연히 거치게 될 필연적 결과들이라고 한다면, 너와 “조우(遭遇)했던 것들”은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당연히 만나서 거쳐야 될 물리론적 순리에 의한 결과들이었을 터이고, 진선미며, 선악의 구분이나 그에 대한 추종 또한 순리에 따르는 것일 뿐, 상이나 벌의 대상이 아닐 지 모른다. 평가나 선택의 과정까지도 그러한 순리의 결과로서 당연히 도달 될 길들이었기에, “나”의 삶에서 “조우(遭遇)했던 것들” 모두, 과거의 여정을 포함해서 현재나 앞날까지도 우연이 아니라 순리에 의한 것들이니 만큼, “나”도 순응하고 만족하며, “너”에 대하여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자세로서 임하는 것이 바른 생각이 될지 모른다.
우리가 말하는 조우(遭遇)는 우연이 아니라 당연한 순리의 과정과 결과들일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으로 “나”와 조우(遭遇)했던 것들에 대한 의미들을 새삼스레 되새겨 본다.
2013.9.3.(화)
오갑록
□ 나는 누구인가?
. 생명과 정신
자연계에 존재하는 많은 현상 가운데에는 생명 현상이라 불릴 독특한 현상과 이러한 생명 체계의 내부에서 자신을 주체로 파악하는 '의식'이 발생하는 현상이 있다. 의식은 그것의 주체가 되어보지 않고는 파악할 수 없는 특성이 있다.
의식과 물리적 여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가? 생명현상이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난다는 증거는 없다. 의식을 담당하는 기구인 중추신경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의식 그 자체도 물리적 인과관계에 예속되는 것인가? 의식 주체(자유의지)도 실은 물리적 인과의 사슬에 묶여 있는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물질적 구도에 지나지 않는 우리 중추신경계 안에서 '나'라고 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현재로서는, 물리학으로 해명해낼 수 없는 커다란 신비며 우리 생명이 지닌 매우 놀라운 특성이다.
주체적 삶이 내포하는 '나'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의 이른바 의식이라는 것이 신체, 특히 그 중추신경계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물리적 기구의 주체적 양상을 가진다. 의식의 주체로서 자기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기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나'라고 생각하는 주체의 내용이 이러한 물리적 기구와 일치하는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나'라는 것이 '내 몸' 곧 의식을 일으키는 내 신체를 지칭한다.
'나'라는 내용 속에는 신체로서의 내 몸과 함께 인격체로서의 '나' 와 그리고 한 '삶'의 주체로서의 '나'가 어우러져 있다. 주체적 측면에서의 생명은 일차적으로는 자신이 속한 개체를 '나'로 의식하게 되지만, 자신이 지닌 생명의 모습을 객체적으로 파악해나가면서 자신이 곧 생명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
(장희익, 글 중에서 부분인용)
물질에 기초한 생명이 육체와 정신은 어떻게 서로 연계되는지에 대한 고리는 현대과학 수준에서는 여전한 미스터리며, 이 세상 신비의 한 분야이기도 하다. 정신이나 육체 중 어느 하나가 없거나 서로 다를 때, 우리 상식에서의 생명현상은 사라진다. 지구의 중력 또는 자기장이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서도 현대과학이 아직 인지하지 못할 어떤 상호작용이 있음인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한 생명체로서의 “너와 나”가 조우(遭遇)했던 것은 육체와 정신의 만남이다. 그리고 “나”의 정신, 상념, 생각 가운데에서는 현재의 너 뿐만 아니라, 과거나 미래의 너도 있을 수 있고, 나의 과거나 미래까지도 또 다른 “너”로서 다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다.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음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리 속은 항시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새로운 “너”와의 조우는 들고 나기를 끊이지 않고 지속된다. 갖가지 상념이 들고 나고, 때로는 그 가지를 붙이고 떼가며 망상의 뜬구름을 하염없이 흘리곤 한다. 희로애락으로 물드는 오감의 감정을 듬뿍 덫칠해 가며, 한정된 생명시간의 곶감꽂이에서 한 톨씩 빼 먹듯 시간을 흘리곤 한다.
기왕이면 즐겁고 기쁘며, 발전적이고 희망 섞인 생각과 조우(遭遇) 했음 좋으련만, 슬프고 무섭고 두렵고 괘씸하고 서러운 생각들을 피하지 못하여, 상념 속의 “너”와 조우(遭遇)로 “나”는 때때로 괴로움을 당하기도 한다. 쓸데 없는 잡념임을 잘 알면서도 쉽사리 떨치지 못한 채, 만나야만 하는 그러한 “나쁜 생각”도 숙명이려니 체념하기 일쑤다. “너”와의 조우(遭遇)려니 생각하면서 ……
. 나의 가치관
과거의 역사와 미래의 바람, 그 틈새에서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 속에 있는 나의 형성과정은 어떠한 것일까?
오감으로 느끼는 여러 가지들, 만져서 느끼는 것, 보고서 느끼는 것, 듣고서 느끼는 것, 맛으로 알 수 있는 것, 냄새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러한 오감은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는 시기부터 시작된 직접적인 경험들이 된다. 빛, 소리, 냄새, 맛, 촉감으로서 세상을 구분하고 나누며 기억하여, 스스로의 생명과 신체에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정신의 근본이라고 본다.
그리고 자신의 밖으로부터의 경험을 듣고 얻게 되는 다른 이들이 경험했던 선험적인 것들이 있다. 나 자신의 오감을 통해서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주체들의 선험적인 지식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나"의 경험인양 수긍하게 되는 간접적인 경험의 마음과 생각으로서 "나"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형성된 선험적인 지식들에 대한 관심 믿음 신뢰가 곧 가치관인 것이다. 관심에서 싹튼 "나"의 가치관은 이런 형식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는다. 이렇게 형성된 나를 이끌고 있는 것이 마음이다.
“나”에게 형성된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목적론적 형성과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여기는 정답도 없고, 만점짜리 가치관의 모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나”와의 조우(遭遇)로 인하여 우연으로 연결된 결과론적 내용물이 “나”의 가치관이라고 말 할 수도 있다.
삼라만상으로 표현되는 이 세상 모든 것과 머나먼 인류 역사의 과거, 그 조상과의 조우(遭遇)로 인하여 지금의 “나”가 형성되고, 출생에서 형성된 가족과, 이웃과, 사회에서의 성장과정도 조우(遭遇)로 인하여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선천성이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조우(遭遇)의 결과이고, 후천성인 성격이며 체질, 체격 따위도 조우의 과정에서 얻게 된 것이므로, “나”에게 품게 된 모든 가치관 또한 조우(遭遇)의 결과물들 이라고 말할 수 있다.
1만년 전 “나”가 아닌, 1만년 후의 “나”도 아닌, 현대 지금의 “나”인 것도, 그래서 현대의 사상과 감정에 준하는 “나”의 가치관을 형성한 것도, 결국 조우(遭遇)로 인한 것이라고 여겨보는 것이다.
. 이 세상의 “너”란, 나에게는 무엇일까?
부버는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에게서 만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하나 하나의 ‘너’는 영원자 너를 들여다보는 창구멍이라고 했다. 인간의 진정한 만남과 관계성은 결국 영원자와 만남에 귀착된다는 말이 아닐까? 인간은 영원자 너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해가고 자기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다. 전자는 인격적인 관계성이요, 후자는 비인격적인 관계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와 그것으로 전락된 존재라는 데 비극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성이 황폐화 되어 퇴폐적이고 감각적인 인생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너와의 만남과 관계가 진실되고 참 되어야만 나의 참 인생을 기약한다고 했다. 그래서 영원자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권유하고 있다. (오강남, 글 중에서 인용)
이 세상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다. 종교에서는 그 신비와 황홀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은유 한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 인간이 모르는 신비를 다스리는 주체가 따로 있다고 함은 인간으로서 앎과 그 삶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수긍하는 한 토막을 제외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종교마다 그 믿음의 특성은 제 나름의 절대자를 토막 난 지식의 틀로서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종교나 믿음의 필요충분조건이자, 모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신비로운 “너” 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생각하는 믿음, 그 곳에서 신비란 그 분의 뜻일 뿐, 조우란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해탈을 바라며 기도하는 불교의 믿음과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신비 속에 가려진 “너”의 특성은 한 인간으로서의 “나”는 언제고 알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인 것이다. 이 세상의 “나”는 “너”의 무한한 신비의 그늘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나”가 현재 경험하는 현재의 토막은 진실이겠지만, 믿음이라는 너울 쓰고 “너”일 것이라고 주창하는 몸통은 그릇되고 왜곡된 허상이리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그러나 신비라고 하는 이름이던, 하나님으로 불리는 이름이던 간에 똑 같은 “너”일 것이며, “나”로서는 역시 신비 자체인 것이다.
마음 속에 숨겨진 감정 중에도 “너”가 언제나 “나”를 마주하고 있다. 생각, 상념, 감정 중의 “너” 중에도 역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신비가 있고, 그 신비는 “너”의 몫이 되어 “나”의 앞에 다가서곤 한다. 때때로, 내가 왜 이럴까? 하는 의구심이 발동되는 이유다. 그래서 “나” 중심의 착각 속에 이중성으로 구성된 나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를 생각한다는 것도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심의 한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어느 “너”라 할지라도 나처럼 모든 감정들을 끌어가고 있는 개체이자, “나”가 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생각하는 것처럼, “너” 또한 우주의 또 다른 한 구심점이라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지혜가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너”를 합했을 때, “나” 하나에 대응되는 “너”가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 시간과 공간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를 우주라고 할 때, 물질과 복사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 만물을 포용하는 공간과 함께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간까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 대응하는 “너” 가운데는 밉건 곱건 간에 인간 상대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처럼 무한한 물질과 공간, 심지어 시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흙과 돌, 풀과 나무, 생물과 동물, 물과 공기, 달과 별 …… 느끼고 상상하는 모든 공간은 물론, 물질세계를 넘어선 정신과 영혼의 세계까지도 때로는 “너”로서 “나”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만이 아닌, 과거와 미래까지도 나로서는 “너”라고 하는 함수에서 뺄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렇기에 선조며 역사를 돌아보게 되고, “나”라고 하는 주체가 없어질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하곤 한다.
. 너와의 조우(遭遇)
생명과 정신, 시간과 공간을 아우르는 우주의 진리가 어디에 있던, 나는 지금 그 가운데 있고 중심 축이 되어 “너”를 대하고 있다. 부모.형제 처.자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학우, 동료, 동지, 이웃, 동포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적의나 악의에 찬 대상으로서 바라보는 인간으로서의 상대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물질세상의 삼라만상과, “지금”이라고 하는 현재의 시간은 물론, 과거나 미래 까지도 “너”라는 대상임을 알게 된다.
그러한 모든 것들을 “너”라고 할 때, “너”와의 조우(遭遇)는 나에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생명과 정신, 시간과 공간, 그리고 현재, 과거, 미래라고 하는 광의로서 “너”와의 조우(遭遇)는 기막힌 축복일까? 아니면 그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라면, 업(業)과 연기(緣起)를 내세운 인도철학 힌두교 불교에서처럼 해탈이 필요한 윤회의 과정일까?
누구나 과거나 미래는 모른다. 단지 현재만, 그것도 극히 조금만 아는 것이 “나”일 것이다. 미미한 하등동물이나 인간이 영유하는 생명 기간에는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현재라는 이름으로 스치는 순간의 시간이란, 과거나 미래라는 이름의 무한한 긴 세월에 비하면 작은 점으로 동일하게 수렴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수명은 같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물질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던 어느것도 그와 같은 이치로서 생각할 수 있다. 생명력 유지를 위한 기본 틀을 벗어나는, 그 어느 것도 제 각각의 “가치관”이라는 색안경으로 투영 된 허상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명암, 기온, 습도, 수분 ……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어느 것 하나 그 원칙에서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나”로서 경험하는 “너”와의 조우(遭遇) 가운데 중요한 것들 중에는 자연에서 대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밤낮의 명암 변동, 계절의 온도나 습도 변동을 비롯한 모든 자연환경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상공으로 올라가면 대기 온도는 고공 높이 별로 기온이 급변한다. 100 km에서 영하100도까지 떨어지지만, 150km가 되면 영상200도, 500km 이상이 되면 영상 1700도가 넘는다. 철의 용융점이 1530도니 얼마나 높은 온도인지 상상할 수 있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거리만큼만 상공으로 오르면, 그 상공은 쇠를 녹이고도 넘는 고온인 것이다. 1억5천만 km 떨어진 태양의 표면온도가 6천도라고 하니, 태양까지는 그 온도까지 상승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태양계를 벗어나서 더 먼 거리까지 간다면, 절대영도인 영하 273도까지 수렴한다고 한다.
올 여름도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가 여러 날 이어져 더운 여름이었다고 언론은 호들갑이다. 불과 10도 안팎의 기온 변화에도 인체가 견디기 어려움을 생각하면, 오늘날 인간세계가 조우(遭遇)하고 있는 이 곳 지구상의 대기 온도며 대기압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 새삼스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한 생명체로서의 “나”로 조우(遭遇)하는 자연 생태계의 모든 것들이란, 섭생의 필요조건이자 특별하게 부여 받은 독특한 환경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우주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장엄하고도 거대한 흐름 속에 거쳐가는 찰나의 한 순간이자, 장소일 수도 있다. “너”와의 조우(遭遇)는 결국 그 기본 틀 속에서 이뤄지는 현재의 상태, 현상일 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부정 섞인 인간 삶의 방정식을 연상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장엄하고 황홀한 쇼 무대의 중심에 선 현재의 주인공이라고 자랑스레 바라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리들 각자 인생과 그 삶을 ……
대우주, 대자연 위에 올려진 장엄함, 황홀함 ……
빛, 공기, 바람, 동식물, 흙, 돌, 소리, 하늘, 구름, 별 ……
. 상념의 세계
“나”로서 조우(遭遇)하는 것이 어디 자연 뿐이랴!
대자연과 함께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상념 생각 상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오감을 통하여 느끼는 하드웨어가 있다면, 생각을 통하여 느끼는 소프트웨어도 조우의 대상에서 “나”로서는 중요한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나”를 스쳐 지나는 것은 물질세계뿐만 아니라 정신세계도 같은 무게로서 다가오고,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기쁘다거나 좋은 생각이 있는가 하면, 무섭고, 서럽고, 분하고, 괴로운 생각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영광, 희망, 영생으로 이어지는 중량감 있는 생각들의 틈틈으로는, 들풀 사이를 흐르는 실바람과 햇살을 보며 느끼는 사소한 상념들도 차돌박이 고기 속 기름기처럼 다른 색, 다른 질감으로 얼룩지기도 한다.
뜻밖에 조우(遭遇)하는 그러한 상념들이 때로는 “나”를 기쁘게도 하고 두렵게도 하지만, 실물세상에서는 이루지 못할 정도의 폭 넓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새로운 감정에 젖기도 하면서, 더 크고 넉넉한 마음의 그릇을 품에 안기는 듯 할 때도 경험한다.
상념과 생각만으로도 행복과 불행, 기쁨과 두려움, 희망과 절망의 골과 마루턱을 오르내리며 희비가 교차되는 삶의 굴곡을 체험하게 된다. 그들과의 조우(遭遇)야말로 때로는 “나”를 넉넉하게 하곤 한다. 생각이나 상념들이 허상이듯, 실물세계에서 영광, 승리, 성공도 순간의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 크기와 높이가 아무리 크고 높다 한들, “너”라는 존재의 유한한 시간, 유한한 세상 중의 미미한 존재임이 물리론적 우주의 원리임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내가 조우(遭遇)했던 상념의 크기와 가치들이 부질없고 헛된 것이라고 여겨져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 때,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던 “너”의 그것들과 키재기를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나” 의 상상 속 허상은 소프트웨어의 몫이요, “너”가 쌓아올리며 소유의 만족과 느낀 물질세계의 허상은 하드웨어의 몫이라는 구분은 될지라도 양쪽 모두, 나와 너에게는 허상일 뿐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다. 물론, 동물적 본능 충족에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리라.
□ 사람과 사람
인간으로서의 나와 너, 물론 조우(遭遇)의 대상에서 무엇보다 우선하여 생각되는 대상이다. 나의 삶에서 조우(遭遇)한 수 많은 상대의 “너”, 그 각각을 특성별로 나누면서 살피노라면 “우연히 만나거나 마주친다”는 그 낱말의 뜻이 더욱 명료해진다.
. 출생
출생의 과정이야말로 “너”와의 조우(遭遇)가 까마득히 먼 조상의 시대부터 연계되어 내려 온 결과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여도 된다. 제1원인, 아르케, 우어스토프라고 하는 이 세상과 물질의 시작 점은 너무나도 멀고 막연하므로 태초의 시작이 어디일지 하는 생각에서 떨쳐버리더라도, 생명체, 동식물의 발원은 그나마 좀 더 가까운 우주역사 속의 실체일 듯도 하다.
먼 인류의 조상인 아프리카 발원의 호모에렉투스는 190만년 전 인류 조상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언스는 20만년 전에 불과 하다. 7만년 전 세계인류 총수는 고작 2천 여명 정도로 추산된다는 보고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고대의 선조로는 “흥수아이”로 명명된 4만년 전 조상이다.
각각이 남녀인 “나와 너”의 조우(遭遇)로 새 생명은 탄생된다. 인류의 탄생과 이동, 그리고 현재의 세계인구 66억 명에 이르기까지 급속한 인구팽창은 그러한 조우의 반복이 이어진 결과일 것이다. 만남과 사랑, 영광과 번창은 그러한 조우에서 시작된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슬픔도 기쁨도,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모든 희로애락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여 본다.
이른 초봄, 물가에 흔한 쌍쌍을 이루며 노니는 물오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리들이 쌍을 이루는 과정은 어떨지를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인간이 “나와 너”의 조우(遭遇)로서 쌍을 이루게 되어 가족을 형성하는 과정과도 유사점이 있지 않을지 하는 상상을 하여 본다.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이란 운명론적 탄생이 아닌 조우(遭遇)의 연속선 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세포생물의 생식은 크게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으로 나뉜다. 무성생식에서 새로운 개체는 부모의 몸으로부터 나온 세포군인 아체(芽體)로부터 생겨나게 되는데 염색체 수는 다른 체세포들과 마찬가지로 2배체(2n)이다. 유성생식에서 새로운 개체는 생식세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생식세포는 체세포의 염색체 수가 반으로 줄어들어 반수체(n)가 되는 감수분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동물에서 생성되는 수컷의 생식세포가 정자이다. 인간의 경우 정자는 23개의 염색체로 구성된 유전물질이 여기에 있다. 여성 난소의 표면은 세포층(생식상피)으로 덮여 있는데 여포라고 하는 속이 텅 빈 세포구들이 일생동안 300개 내외의 여포가 성숙하여 수정될 수 있는 난자가 되며, 배란이 일어나게 된다. 난자는 여성의 유전물질을 가진 핵을 중심에 가지고 있으며, 난자도 역시 23개의 유전물질이 있는데 정자를 만나 수정되면 세포분열이 이루어지면서, 정상인의 세포 염색체수는 2배체(2n)인 46개가 된다.
한 개의 난자가 정자 수억 개로부터 공격을 받으면서 어떻게 단 한 개만을 선택하게 되는 지, 선택의 메커니즘은 경이롭기만 하다. 여기에는 물론 수 억 개 가운데 단지 한 개만의 정자가 선택되기까지 수반되는 물리.화학적인 과학적 선택의 메커니즘이 있겠지만 이를 무시한 채, 수정을 “나와 너”의 조우(遭遇)이리라고 싹둑 잘라서 생각한다면 무지한 짓일까?
조우(遭遇)라는 가정을 담아는 보지만, 세포 수정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수정을 한정 짓는 제약 조건들이 뒤따른다. 즉, 유전 형질의 전달, 종의 생식적 격리, 자연선택 등의 특성을 갖는다. 유전형질은 그 자손에게 자기특성이 전달되는 것이고, 종의 생식적 격리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에 이종간의 교배도 안 되는데, 이는 수정 전 장벽(Prezygotic barrier) 접합자가 만들어 지기 전에 생식적 격리가 일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라고 불리는 수정 특성은 우세한 조건에 대해 가장 잘 적응한 유전자 형이 환경에 의해 선택되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는 생명체를 진화하는 특성이 되는 것이다.
탄생의 과정들을 유심히 보면서, 세상이며 우주의 이치가 윤회와 해탈에 기초한 목적론적 세계관에 있다기보다는, 철저한 물리론을 따르는 당연론적 세계관이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난자와 정자의 만남, 세포와 세포의 분열과 성장 등에서 보이는 “나와 너”의 조우(遭遇)도, 수 많은 다수 중의 우연이 아닌, 물리.화학적, 생물학적 순리 속에서 진행됨을 인식하게 되고, 이 세상의 시작과 끝도 그러한 순리의 연속성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정자 난자의 수정 과정은 감싸고 있던 한 개의 껍질을 뚫고 들어가는 과정이 수반된다고 하는데, 그 껍질은 서로 다른 세계를 분리하고 있는 계면(界面)이기도 하다. 껍질을 뚫고 들어간다 함은 계면(界面)으로 둘러싸인 다른 세상으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도 수정란이나 세포라고 하는 계면처럼, 무한한 계면으로 이뤄진 껍질과 막으로 쌓인 텅 빈 공간일지 모른다. 작게는 원자구조의 기본 모형들이 그러하고, 물질세계의 기본구조가 그러하며, 생명체의 세포 단위조직 들이 그러하고, 더 크게는 우리가 보는 우주공간이 그러하다.
물질세계에서 탄생의 진정한 의미는 새로운 계면(界面)의 형성이며, 그 계면이란 새로운 계면을 이루기 위해 터지거나 꺼져야만 될 운명을 가졌을 지 모른다는 추론을 하여보자.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 계면(界面)에서 시작되고, 그 계면(界面)이란 터지는 것을 순리라고 한다면, 제1원인, 아르케, 우어스토프는 결국 “허공”으로 귀착되고 만다.
물질적 우주에서 생명이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이 의식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도대체 적어도 무엇이 "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연을 넘어서는 어떤 질서, 賦存秩序(order for free)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생명의 기원에서 시작해서 수정난의 형태형성에 이르기 까지,
캄브리아기의 대 번성에서 기술혁명에 이르기 까지
여러 다양한 주제들의 근저에 깔려있는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生氣"(elan vital)라는 개념의 그 공허 한 동어반복에 있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나의 이론은 철저한 전체론(holism)에 입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신비적인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수학적 필연성에서 도출된 것이다.
생명은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전체로서 출현했으며 또 그렇게 유지되고 있다."
“우주는 우리의 집(at home in the universe)” 중에서, 스튜어트 카우프만(S.Kauffman)
. 만남
“나와 너”의 조우(遭遇)는 만남이 주제다. 왜? 어떻게? 만나느냐 하는 것은 세계관, 우주관에 따라 서로 갈리게 된다. 목적론적 우주관이냐, 아니면 물리이론의 순리론에 따르는 당연한 우주관이냐에 따라 만남의 원인들은 서로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위에서는 장구한 인류의 역사적 과정과 생물학적 만남의 과정을 거치는 탄생에 다다르기까지의 만남을 생각하여 보았다면, 이번에는 생명의 한 주체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중의 만남들을 생각하여 본다.
만남, 하면 제일 먼저 생각되는 것이 가족이다. 그 가운데도 “나”를 잉태하여 낳고 길러주신 어머니를 우선하여 꼽는 이가 제일 많을 것 같다. 부모.형제.자매 등의 혈연과 친인척의 순으로 나아갈 것이다. 부모와의 만남을 “나와 너”의 조우(遭遇)로서 만난 것이라는 가정을 해 보자.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잠시 제켜두고, 생물학적 요소들이 우연하게 만나 이뤄진 조우(遭遇)라는 생각을 하여 보자. 체격이며 외모도 자랑스럽고, 부와 학식이 누구보다 우월하며, 건강과 탁월한 두뇌능력, 그리고 명과 운도 좋아서 명성과 좋은 평판을 받으며 “나”의 나이가 지긋할 때까지 오래도록 장수하시는 부모의 자식으로서 선택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다는 속성을 생각하면, 모자라는 부문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자식의 생각에 부모가 이웃보다 못나거나, 모자라고, 그도 아니면 일찍 타계하시어 아쉬워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부모를 조우로서 만난다고 여긴다면, 부족하고 모자란데 대한 아쉬움은 더해지지 않을까? 마치 “나”만 불행한 듯이 여길 수도 있을지 모른다.
만일 내가 남의 부모와 조우하여 태어나고, 다른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된다는 가정을 한다면 세상은 어찌 달라질까를 상상하여 본다. 만남이 달라지면 “나” 또한 다른 “나”가 될 수 밖에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절대적인 “나”가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다른 만남은 지금과는 다른 “나”가 형성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나”는 정자와 난자에 실렸던 염색체, 유전인자의 구속물질로서 구성되기는 했지만 육체적인 기본 특성에 불과한 것이지, 육체적으로도 성장 시 발육특성에 따라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며, 정신적으로는 더더욱 상이한 생각과 지적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기억력 순간판단력, 기본성격 등의 상당 부문의 유전특질은 있겠으나,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은 더 많은 부분이 후천적으로 쌓인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이해를 돕기 위한 예를 하나 들어보기로 하자.
“나”의 탄생이 흥수아이가 살았던 4만년 전일 경우, 이조시대의 상놈이나, 상투 튼 양반일 경우, 또는 아프리카 오지의 사막 근처의 삭막한 마을의 아이 나, 번듯한 재벌가의 장남으로 조우하였다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옳고 그름, 선악의 기준들이 전혀 달라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념이나 사상, 종교관과 세계관도 시대나 지역 차이에 따라 서로 전혀 다른 방향에서 성장되었을 것이다.
결국 부모와의 만남이라는 조우는 지금의 “나”라는 골격의 틀을 만들었지만, 가족과의 만남, 이 지역, 이 사회,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서의 만남, 종교나 이념의 만남, 내가 다녔던 공업고등학교나 대학에서 우연한 기회로 만난 전공분야 …… 내가 지내오며 조우했던 만남 들이 지금의 “나” 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한 “너와 나”의 조우로 인하여 현재 “나”의 모습과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부모가 나에게 유전적 특질을 주신 것처럼, 조우로 생각하며 되돌려 본 지난날의 인물들은 “나”의 상념 속 주인공이 되도록 한 “너”들 임에 틀림 없다. 풀밭에서 함께 뒹굴던 코흘리개 벗들, 초등학교 등교 길에 만화 속 주인공 이야기로 시선 끌었던 동급생, 까까머리 중등 학생 때의 짝궁, 몇은 안 되지만 이야기 나누던 대학 동기들, 회사 일로 마주하던 동료 거래처 사람들과의 만남 …… 그리고 미디어를 통하여 눈과 귀와 마음을 담던 먼 발치의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까지도 “나”와 조우(遭遇)했던 “너”이고, “나”에 대응되는 “너” 이기도 하다.
. 성장, 생활
조우(遭遇)는 만남을 가리키고, 무엇인가 시작되는 개시 시점을 의미한다. 언제, 어디서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그 다음 단계의 사안이 될 것이다. 만나서 먹고 마시고 떠들거나, 배우고 익히며, 만들고 일하는 따위의 일들은 성장, 생활, 삶이라는 큰 틀에서 다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너와 나”가 조우(遭遇)는 깔린 멍석 위에 마주하고 앉는 격이고, 마주하여 무엇을 하느냐는 우리가 삶이라고 통칭하는 성장하고 생활하는 모든 양태가 된다 할 것이다.
“나” 홀로 임하는 것이 아닌, “너”와 함께하는 것들이 삶이다. “너”가 없는 곳에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너”는 곧 “나”라고도 할 수 있기에, 삶에서 조우(遭遇)나 만남들은 “나”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나”라고 하는 한 생명체로서는 물질세계에서의 아르케나 에테르와 같은 존재란 “조우(遭遇)를 통한 만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명체를 포함한 물질세계가 계면이고 거품이고 공간이라는 물리법칙을 따르는 당연론적 우주관임을 전제 한다면, 물질이건, 생명이건, 상념이건, “이 세상 모든 너”는 언젠가는 꺼져야 할 거품이기에, 조우(遭遇)라는 만남의 기회를 딛고 성장이니 생활이니 삶이 이어져 가기는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함께 꺼져야 할 대상이 되고 공허한 것들일 수 밖에 없다. 조우(遭遇)는 “나와 너”를 이어 주기는 하겠지만 서로 만나 딛고 선 삶들이란, 텅 빈 공간으로 다시금 되돌리게 될 것이다.
당연론적 우주관으로만 본다면, 조우니 만남이 기쁘거나 슬프지도 않을 뿐더러, 좋거나 나쁠 이유도 없고, 선악으로 나뉠 이유도 없을 듯 하다. 만남에서 시작되는 모든 삶의 양태들 또한 다를 바가 없겠지만, “나와 너” 는 목표라는 기치를 삶의 길목마다 세워놓고 그 달성 여부마다 희비와 호오, 선악이 갈리곤 한다. 그 목표는 너무도 다양하다. 더 많게, 더 높게, 더 길게 바라곤 하는 것이 인간의 습성이기도 하다. 부 명예 목숨 …… “나와 너” 삶의 과정 중에 세워 놓은 목표라는 깃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한 번쯤은 자신에게 던져보자!
. 헤어짐과 죽음
조우에서 시작하고, 조우로 인하여 마감하는 것이 생명의 특성이기도 하다. 결국 죽음도 불운이라고 이름 지워지는 우연히 닥치는 사고며 질병 따위가 원인으로 꼽히게 된다. 우연한 사고로, 우연한 감염으로, 우연한 섭생의 과오로, 우연한 생활환경의 재앙으로 …… 생명을 마감하는 요인은 제 각각이지만 곰곰이 따져가며 생각하면 각각의 원인들과 조우(遭遇) 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 저승사자 인 “너”로는 인간이나 자연재앙이 되기도 한다. 바이러스, 세균, 유독물질, 나쁜 습관, 나쁜 생각 따위도 생각할 수 있다. 영원과 영생의 주장은 물질세계의 질서를 벗어난 인간의 바람일 뿐, 그러한 “너”와 조우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라는 현상을 어찌 쉽사리 부정할 수 있겠는가?
어디 인간의 목숨만이 그러한가? 일정한 기간이 되면 학생은 졸업을 하고, 군인은 제대를 하고, 직장인은 퇴직을 한다. 사업가, 발명가, 자영업자도 개인차는 있지만 체력의 한계로 인하여 생업을 그만두게 된다. 일과의 헤어짐이다. 일과 헤어진다는 의미는 만남으로 인연 맺던 사람들과도 헤어지는 것이다. 사회생활 조직이 그렇듯, 가정, 가족이라고 하는 조직도 예외는 아니다. 형제며 자식은 결혼하면 분가하며 헤어지고, 새로운 만남은 새 가정으로 다시 난다.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헤어짐 말고도 “나”와 “너”의 헤어짐은 조우(遭遇)했던 것처럼 반복된다. 마치, 한 번 던진 시선은 한 곳에만 두지 못하듯, 던졌다간 떼곤 하며 시시로 돌려 보는 것이 만남과 해어짐을 많이도 닮았다.
□
☞ 관련 글(2007.7.13.); 인 연
. 조우 (遭遇)
우연히 만나다, 어떤 인물이나 사물, 경우를 우연히 만나거나 마주침
an encounter
. 인연 (因緣)
백과사전
불교에서 인(因)과 연(緣)을 함께 부르는 말.
인은 결과를 산출하는 내적·직접적 원인이며, 연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외적·간접적 원인이다. 여러 가지 원인 가운데 주된 것이 인이며, 보조적인 것이 연이다. 또 인을 넓게 해석하여 인과 연을 합해 인이라고도 하고, 반대로 연을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멸한다.
용수(龍樹)의 〈중론 中論〉에 의하면 이와 같은 존재의 생멸(生滅)은 진실한 모습이 아니므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나아가 그 인연마저도 실재성이 부정되므로 모든 존재는 공(空)이라고 했다. “구사론 俱舍論”에서는 인과 연을 다시 자세히 분류하여 육인사연(六因四緣)의 이론을 전개했다. 육인은 능작인(能作因)·구유인(俱有因)·상응인(相應因)·동류인(同類因)·편행인(遍行因)·이숙인(異熟因)을 말하며, 사연은 인연(因緣)·소연연(所緣緣)·등무간연(等無間緣)·증상연(增上緣)을 말한다. 육인 가운데 능작인은 사연의 증상연이며, 나머지 오인은 사연의 인연이다. 그러나 유식학파(唯識學派)에서는 육인 가운데 동류인을 인연과 증상연에 통하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오인은 증상연이라고 했다.
■ 헤어짐
□ 어떻게 혼자 가요 !
“금강산의 이산(離散) 시인”
52년 수절 끝에 북쪽 남편 임한언 할아버지(74)를 만난 정귀업 할머니(75)는 이번 방북 기간에 이렇게 불렸다.
정할머니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선 시(詩)보다도 절절한 이산가족의 한과 정서가 묻어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못 만났으면 넋새가 되어 울고 다닐 것이다"
반세기 동안의 이산과 상봉의 한을 정할머니는 이렇게 표현했다.
남편 손을 잡고 금강산 구룡연을 찾은 정할머니는 "하늘과 땅을 합친 것 만큼 좋다"고
기뻐하더니 헤어 지면서는 "시곗바늘이 한 점도 쉬어주질 않아요. 가다 보면 아주 가는 날 있겠지..그 때는 후회 없이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작별상봉 때는 남편에게 연인처럼 다짐을 놓았다. "사진 보며 내 생각해요. 나도 보고 싶으면 사진 볼 거야."
그러나 그것도 잠시, 또다시 기약 없는 이별이 다가오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52년 동안 혼자 살았는데 어떻게 또 혼자 가요. 나 집에 안 갈 거야. 이제 어떡하라고요......"
정할머니는 남편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랫동안 도리질을 했다.
동아일보(2003.5.1.) 금강산 취재단 "이산의 시인(詩人) 정귀업 할머니" 기사 중에서
□ 내가 마지막으로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웃음이 아니라 눈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웃음은 다른 이들과 나누겠지만 흐르는 눈물은 내가 받을 수 있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올라 갈 때가 아니라 내려 갈 때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올라 갈 때는 다른 이들과 같이 걷겠지만 내려 갈 때에는 나와 손잡고 걸을 수 있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건강한 모습이 아니라 허약한 모습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건강할 때에는 다른 이들이 곁에 있겠지만 몸이 아플 때는 내가 곁에서 돌볼 수 있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풍족한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모습으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풍족할 때는 다른 이들이 찾아 가겠지만 가난할 때는 내가 찾아 갈 수 있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맑은 날씨가 아니라 비 내리는 궂은 날씨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맑을 때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있겠지만 비 오는 날에는 나를 찾아 오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불꽃이 아니라 재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불꽃의 영광에 대해서는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 하겠지만 재의 허무에 대해서는 나에게 말하겠지요.
내가 마지막으로 그대 가슴에 남을 때에는 사랑이 아니라 이별로 남고 싶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기쁨은 다른 이에게 주겠지만 이별의 슬픔은 내가 안고 살아 갈 수 있겠지요.
□ 전시륜의 유언서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중에서
한국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미국 생활을 하다가 암으로 사망한 전시륜의 유작 수필집 (도서출판 명상, 2000.10.)
미국 사회보장 번호 403-56-4689를 소유한 본인, 전시륜은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긴다. 나는 이 글을 아내 천건희씨, 우리아이들 데니스,데이비드,셀리나를 위해서 쓴다. 이 유언서는 법적으로 집행을 요구하는 문서라기보다는 나의 사적인 소망이란 것을 말하고 싶다.
1. 1986년 10월 현재 우리 총 재산은 약 10만 달러이다. 당좌예금 저금계좌에 2만 달라가 있고, 할아버지 안락의자, 목조 코끼리, 기타 가구를 셈하면 그 값이 1만 달라는 될 것 같다. 미국에 있는 집을 오늘 판다면 은행 빚, 복덕방 수수료를 빼고도 7만 달라는 될 것이다(중략)
2. 현재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사후 처에 대한 재정적 보증과 아이들의 대학 교육에 있다.(중략) 그리고 내가 오늘 죽는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가 죽게 되면 생명보험회사로부터 나의 3년간 연봉에 해당하는 돈을 받게 되어 있고, 이 돈을 가지면 버지니아 주립대학 재학 시 아이들 셋의 4년 동안 학비, 숙비, 용돈의 경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다. 아이들의 교육비 이외 나의 총 재산은 나의 아내에게 넘긴다.
3. 나의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너희들에게 맡긴다. 나는 화장이 좋을 것 같다.(중략) 염라대왕이 허락해 준다면 나는 수요일에 죽고 싶다. 월요일에 죽으면 첫날부터 재수 없다고 투덜댈 테고, 금요일에 죽으면 다가오는 주말을 망치는, 미국 헌법에 어긋나는 엉터리 수작이라고 아우성을 칠까 두렵다.
4. 아내에게 부탁 드립니다. 내가 죽자마자 당신이 해야 할 의무는 내 시체가 당신에게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가를 알아내야 된다는 것입니다.(중략) 법적으로 당신이 찾아 먹을 수 있는 돈을 못 받는다면 이것은 불법적인 행위요, 비 애국적인 태도라고 봅니다. 차마 어떻게 죽은 남편을 이용하냐고요? 여보. 내 돈을 타먹지 않겠다면 당신은 나와 결혼한 의의가 없지 않소? (중략) 재혼을 할 경우 남편과 살을 섞되 은행장부는 섞지 마십시오. 유언을 남길 경우 당신 재산의 최소한 반은 아이들의 명의로 남기십시오.(중략) 손자 손녀들이 생기면 꼬마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주면서 소일하는 것도 좋겠어요. 그럴 경우 수업료를 단단히 받을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럼 복 받고 운수가 트이기를 빕니다. 자연이 준 온갖 선물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운이 아닌가 합니다. 몸조심 하시고 틈나는 대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건강진단을 받으십시오.
5. 우리 아이들에게
......
6. 나는 1959년 미국에 왔다. 여행가방 하나 없이 주머니엔 35달러밖에 없었던 스물일곱의 초라한 나그네였다. 그러다가 우물쭈물 대학교육을 마치고 착한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복 받아 훌륭한 세 아이를 낳았다. 그 후 다행히도 큰 곤욕을 겪지 않고 살아와서 지금 이 유언서를 쓰고 있다. (중략)
나는 인생을 유람선 타는데 비유하고 싶다..(중략) 유람선 여행은 참 재미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우리는 새 승객을 위해 배에서 내려야 한다. 약속된 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유람이었던가! 우리는 유람의 기회를 얻은걸 고마워하면서 후회 없이 하선을 한다. (중략) 나의 유람은 이제 거의 끝나 가고 있다. 솔찍이 말해서 나는 참으로 이 유람을 즐겼다. 배 안에서 재미있는 사람들을 여럿 사귀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은 천건희씨, 데니스, 데이비드, 셀리나였다. 이 자리를 떠나면서 나는 여러분을 상면할 수 있는 행운을 가진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도 끝까지 즐거운 유람을 하기를 축원한다. 내가 죽은 뒤 땅속에 묻히게 된다면 비문을 어떻게 써 달라고 할까 생각해 봤다. 심사숙고 끝에 이런 글이 어떨까 생각했다. “이 땅에 충청도 촌놈이 묻혔습니다. 그의 일생 소원은 사람들이 착각하여 그를 서울 신사로 보아주었으면 했던 것 입니다.” (중략)
그럼 소인 물러갑니다. 오래오래, 길이길이 잘 사십시오.
1986년10월17일 전시륜
□ 나는 누구인가?
(디트리히 본회퍼)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감방에서 나오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침착하고 명랑하고 확고한지
마치 성에서 나오는 영주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간수들과 대화하는 나의 모습이
어찌나 자유롭고 사근사근하고 밝은지
마치 내가 명령하는 것 같다는데
나는 누구인가?
남들은 종종 내게 말하기를
불행한 나날을 견디는 내 모습이
어찌나 한결같고 벙글거리고 당당한지
늘 승리하는 사람 같다는데
남들이 말하는 내가 참 나인가?
나 스스로 아는 내가 참 나인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고 그립고 병약한 나
목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는 나
빛깔과 꽃, 새소리에 주리고
따스한 말과 인정에 목말라 하는 나
방자함과 사소한 모욕에도 치를 떠는 나
좋은 일을 학수고대하며 서성거리는 나
멀리 있는 벗의 신변을 무력하게 걱정하는 나
기도에도, 생각에도, 일에도 지쳐 멍한 나
풀이 죽어 작별을 준비하는 나인데
……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나인가? 저것이 나인가?
오늘은 이 사람이고 내일은 저 사람인가?
둘 다인가?
사람들 앞에서는 허세를 부리고
자신 앞에선 천박하게 우는 소리 잘 하는 겁쟁이인가?
내 속에 남아 있는 것은
이미 거둔 승리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패잔병 같은가?
나는 누구인가?
고독하게 던지는 물음이 나를 조롱합니다.
내가 누구이건
오, 하나님 당신은 아십니다.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베를린 감옥에서 쓴 기도 시)
□ 세상 “인연”을 접다
금아(琴兒) 피천득. 그는 떠나지 않을 줄 알았다. 늙지 않는 얼굴로 늘 우리 곁에 머무를 줄 알았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웃음 멈추지 않을 줄 알았다. 지난해 9월에도 '피천득 수필집' 일본어판을 제작한 일본 출판사 제작자들을 자신의 집에 초대한 금아였다.
그러나 지인들은 달랐다. 조용히 '만약'을 준비해왔다. 금아는 96번째 생일이었던 지난해, 예년과 달리 지인들을 초대하지 않았다. 외부와 연락도 끊었다. 금아는 변변한 세간도 없는 서울 반포동 32평 아파트에서 25년을 살았다. 거기서 금아는 치매에 걸린 아흔 살 아내와 막내딸 서영(61)씨가 어릴 적 갖고 놀던 인형과 함께 살았다. 아흔여섯 평생을 자신의 수필처럼 소박하고 단아하게 살다 간 금아였다.
. 거문고 소년
금아는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열 살에 어머니를 잃었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금아의 애정은 각별했다. 아흔이 넘어서도 '엄마'라고 불렀고, 당신을 기린 수필 '엄마'를 남겼다. 어머니 말고 소년 피천득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 두 명이 더 있다. 금아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월반해 제일고보(현 경기고)에 입학했는데, 그때 그의 재능을 주목한 이가 춘원 이광수였다. 춘원은 금아의 중국 유학을 권했고, 유학을 마친 금아는 춘원의 집에서 3년간 기숙하기도 했다. 거문고 소년이란 뜻의 아호 금아도 춘원이 지어준 것이다. 거문고 잘 탔던 금아 어머니 때문이었다.
중국에서 금아는 도산 안창호를 만난다. 도산도 금아를 몹시 아꼈다. 도산은 금아가 아프자 요양소에 입원시켰고 아침마다 문병했다. 도산과는 안타까운 일화도 있다. 도산이 순국했을 때 그는 조국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경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때 일을 금아는 평생의 한으로 짊어지고 살았다.
. 서영이와 난영이
금아는 영원한 어린이였다. 늙어서도 늘 어린이의 표정을 짓고, 어린이를 '어린 벗'이라고 부르며 어린이처럼 살았다. '엄마! 나는 놀고 싶은데 무엇하러 어서 크라나'('아가의 슬픔'부분)라고 드러내놓고 어리광을 부렸다. 천생 어린이 같은 금아를 작가 최인호는 "전생의 업도 없고 이승의 인연도 없는, 한 번도 태어나지 않은 하늘나라의 아이"라고 불렀다.
금아는 일생에 두 여성이 있었다. 엄마와 딸 서영이다. 금아는 외동딸을 끔찍이 위했다. 딸이 조금만 아파도 학교에 안 보냈고, "아들보다 더 사랑한다"고 알리고 다녔다. 수필집 '인연'(1996년)의 세 장 중 한 장을 '서영이'라 이름 지어 딸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전했다. 거기서 금아는 '서영이는 나의 엄마가 하느님께 부탁하여 내게 보내 주신 귀한 선물이다. 서영이는 나의 딸이요, 나와 뜻이 맞는 친구다. 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여성이다'라고 적었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 하버드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55년, 금아는 딸 선물로 인형을 사왔다. 그 인형을 금아는 여태 간직하고 있었다. 씻기고 이불 덮어 재우고, 철 따라 옷을 갈아 입히며 쉰 해를 함께 살았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딸 서영이를 대신한 사랑이었다. 인형의 이름은 난영이. 서영이 대신 난영이가 금아의 임종을 지켰다.
. "사랑을 하고 갔구나"
금아는 채소 위주로 소식했다. 술. 담배도 하지 않았다. 잘 알려진 금아의 장수비결이다. 이와 관련한 금아의 농(弄) 한 토막이 있다. "영국의 버나드 쇼(1950년 95세로 사망)가 채식주의자였어요. 나이 들어 죽었는데 이때 런던 타임스가 사설에서 '버나드 쇼의 장례 행렬에는 염소와 소, 양떼들이 울면서 뒤를 따랐다'고 썼대요. 재미있지?"
서양 신문처럼 적어본다. 그의 운구에도 소와 돼지가 울면서 뒤따를 것이고, 그의 주옥 같은 문장을 읽으며 어른이 된 모두가 뒤이을 것이다. 언젠가 금아는 "잠자는 듯 조용히 숨을 거두는 것이 가장 커다란 소망"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가장 커다란 소망까지 이루고 떠났으니, 금아는 복도 많으시다.
손.민호 기자
. 피천득 선생이 남긴 명구절 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수필 '인연'에서”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 수필 '오월(五月)'에서”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이다." “수필 '수필'에서”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시 ' 너 ', 생전의 금아가 가장 아꼈던 자작시”,
중앙일보
■ 시인이 느끼는 조우(遭遇)
□ 황홀한 조우
진경옥
반 아이크와 루벤스를 만났다
푸라도, 루브르를 압축한 듯
알짜 진수들이 병렬한 회랑
고야와 벨라스케스 무릴료와 엘 그레꼬
거기 피카소는 없었지만
게르니카 앞에서 마음 다 내어준 어제
오늘은 맑은 정신으로 시야를 잃지 않으리라
벗은 마야와 입은 마야 앞에
겹겹이 다가 선 이방인들
청색시대의 피카소는 아비뇽을 깔았지만
회색 시대의 고야,
검은 개 검은 우울 죽음을 각인한 것일까
죽음 곁에 허우적일 지라도
저 문 밖을 나서고 싶지는 않아
-황홀하게 요동치는 감동의 파장
섣불리 끝내고 싶지는 않으니.
□ 낯선 이웃과의 조우(遭遇)
박 해 람
모든 병의 주소는 싱싱한 몸이다.
조용히 가끔 몸은 수문을 열 듯 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길을 알고 있는 그
그는 그 길을 감추며 유유히 들어온다.
내가 아는 한 여자의 몸도 그랬다.
어느 날 불쑥 찾아와
턱과 이마에 낯선 상처를 남기고 가곤 했다
그때마다 여자는 뒹구는 버릇이 생겼다
진드기를 떼어 내기 위해 진흙에서 뒹구는 짐승처럼.
여자의 말은 좀 달랐다.
어쩌면 자신은 병의 몸에 얹혀 사는 또 다른 병인지도 모른다고.
본래 몸 주인의 귀찮은 손님인지도 모른다고.
그 주인이 찾아와 몸을 돌려 달라고 행패를 부리는 지도 모른다고.
잠시 육체를 이탈했다가 돌아오면
누군가 들러 싱싱한 일상을 죄다 몰고 간 텅 빈집의 공기 같은 몸
여기저기에 지친 愛撫의 자국이 남아있는 몸
여자도 어느 몸의 싱싱한 병이 되고 싶다고.
서로가 깊은 病이었다가
서로가 깊은 치료 술이었다가
서로가 날카로운 손톱이었다가.
치료되지 않는 모든 병은 손님이다.
오래 전에 초대해 놓고 잊고 있던 낯선 이웃이다.
□ 조우(遭遇)
최범영
거리를 헤매다 옛 벗을 만나
한잔 들이키자 하나 벌써 취한 잔납이
입 속의 묵은 뼈들은 사이사이 튀어나와
시심은 깨지고 눈은 빙글빙글 돌았네
오래 선비를 못 보았으면 섬겨라 했지만
아주 먼 서로의 생각들 원망도 못하겠네
다만 한잔 마시고 한마디씩 만 함에
이쪽과 저쪽의 느낌은 가까웠다 멀어졌다 했다네
徘徊巷中遇舊友 言一杯上已醉猿
배회항중우구우 언일배상이취원
口中有骨間間投 詩心見破眼沈圓
구중유골간간투 시심견파안침원
不見久儒必恭敬 隔歲之意不可怨
불견구유필공경 격세지의불가원
旦一杯後擧一言 彼此之情近惑遠
단일배후거일언 피차지정근혹원
□ 산다는 것
최재환
산다는 것은
맺힌 매듭을 푸는 일이다.
그것은 바램이다.
태어나 죽는 날까지
아슴프레 떠오르는 지평을 향해
꾸준히 신발을 고쳐 신는
영원한 바램 그것이다.
주인 없는 시공(時空)을 받치고 서서
부모형제와 이웃들.
도 다른 나와의 조우(遭遇).
오가다 마주치는 눈길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어느 길목에서
무심코 버린 한숨도
삶을 확인하는 소중한 인연이다.
쉽게 맺힌 매듭도
쉽사리 풀리진 않는 법.
풀리지 않는 매듭을 풀기 위해
더욱 열심히 발버둥 치다 보면
어느덧 해는 서산에 구르고
전생(前生)의 아픔은 조용히 닫히는 것을.
설혹 풀렸달지라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욱 굳게 맺히는 매듭들을
하루살이처럼 시간이나 축 내며
자꾸자꾸 풀고 맺는 세상살이.
산다는 건
결국 풀린 매듭을 다시 맺는 일이다.
□ 세월 길들이기
김낙필
지천명(知天命) 언덕에서
내가 조우한 것은
바람과 강 이였다.
비껴 지나온
불혹(不惑)에는
산과 바다를 만났었다.
이순(耳順)에는 누구와 만날까..
해무(海霧)일까..
아니면 황금 빛 모래 일까..
학암(鶴岩)에서 바라보는
먼 바다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밀,썰물을 셈한다.
내가 나를 잊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나이를 먹으면서
이물(異物)이 되어가는 것 같다..
걸출 영웅도 아니니
한낮 촌부의 이름으로
버리는 일에만 몰두한다.
시공(時空) 속
날 오라 손짓하는 것은
세월 귀퉁이 그 언저리 일뿐...
□ 꿈
청산 강대환
분열하는 번뇌를 짊어진
사람들의 고독한 영혼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척박한 이 땅에
종환처럼 부풀어 오른
단비를 내리고
상처 투성인 삶의 모서리에
부딪쳐 깨지면서
천고에 조우하는 날들
영혼의 오만과 태타의 시련
간 밤에 꾸었던
한낱
일그러진 꿈이었나
□ 그대는
공석진
그대는 보석입니다
살을 에는 아픔 속에서
달빛,쪽빛과 조우하여 은파금파(銀波金波)
찬란한 빛을 발하는 순백의 진주입니다
그대는 전율입니다
등신처럼 방황하던 시인의 심장을
흔적 남김없이 하얗게 지우는
큐피트의 화살입니다
그대는 포로입니다
결코 이탈을 허락치 않는
익숙한 이별에 철옹성을 구축한
모진 감옥 유정에 갇힌 포로입니다
그대는 항아리입니다
추억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진한 향을 내는
그리움을 저장하는 장 항아리입니다
그대는 난간입니다
위태로운 벼랑 끝에 우뚝 서
아득한 두근거림을 설레임으로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기둥 난간입니다
그대는 야생화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견디어
진한 아픔 쓸어 내는 싸리비처럼
햇살 발그레 미소 짓는 얼레지입니다
□ 공제선
임영준
절망에 잠길 때마다
공제선에 기대보자
너무나 아득한 극치보다는
조우하고 있는 하늘과 땅에서
극복의 흡기를 취할 수 있으리니
장엄한 일몰의 순간에도
노을을 불러 일으켜
감동을 심어두곤 하지 않는가
환멸과 증오로 점철된 세사에서
그보다 더한 위무가 어디 있겠는가
□ 관능의 여정
임영준
휘황한 오로라를 조심조심 벗겨내고
치렁치렁한 북국의 침엽수를 어루만지다가
깊고 푸른 호수에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렸다
그리고 오뚝하고 고상한 산맥을 매만지면서
사시사철 감미로운 순풍이 감도는 옥답과 조우하고
해안을 타고 빛나는 포말의 격정을 끌어안고
저 광활한 초원이 품고 있는 육감에 응하여
혈맥을 차고 오르는 원시의 피톨까지 궐기했는데
곁 붙어 전율하는 활화산 탓에 훌쩍 건너뛰었으나
저 길고도 곧게 뻗은 옥주(玉柱)의 각선에 빠져들어
몇 날 며칠을 쓰다듬고 파고들고 부벼대다 보니
마침내 태초의 밀림에 당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도 진솔하게 달아오르고
미세한 손길에도 격랑에 휩쓸리는 최후의 보루답게
말초까지 짜내어 파정(破精)케 하는 대륙의 매혹이여
관능을 흡족케 하는 내 시원(始原)의 여정이여
□ 사랑과 이별, 그리고 흔적들
김설하
몇 줄기 바람이 흔드는
잔영만이 생기로운 기척일 뿐
빈 골목에 정적이 감돌고
고독과 쓸쓸함이 깊어 가는 한가운데
가끔 불빛이 어둠을 뚫고 지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 사랑과 이별, 그리고 눈물의 흔적들
조우했던 모든 것들이 슬프지 않게
고스란히 묶어 두고픈
연하던 어둠의 길이 깊어 가는 시간
희미한 빛에 마음을 기댄다
치렁치렁 쏟아지는 가로등불빛만이
고즈넉한 골목을 지키고 있는
드문드문 지나던 행인조차 없는 쓸쓸함에
주저앉은 달빛의 그늘도 아프다
먼 하늘의 푸른 별들이 꿈처럼 빛이 나도
외로움은 늘 소롯이 밀려들어
살가운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바람소리였으리라 그것은
잠시 스치고 간 혼돈의 소리였으리라
그리움에 목젖이 열리고
동공으로 눈물이 괴다 넘치는 일은
잠시 마음을 만지고 간 기척 때문에
감성이 몸 밖으로 새나온 것이리라
□ 봄의 반란
반기룡
세상 향해 고개 드는 뾰족한 생명력
겨우내 추운 땅에서
묵언정진하고
동안거 끝내더니
삶의 용틀임이 견고하구나
명장사 풍경소리 울릴 때마다
발아의 꿈을 키우며
푸른 하늘 잡아 끌더니
드디어 햇볕과 조우 했구나
어둠에서 밝음으로
밝음에서 어둠으로
윤회의 수레바퀴
휘익! 돌리더니
봄볕과 교접하였구나
머지않아 꽃이 낭창낭창 피겠구나
□ 흔들리는 오후
김낙필
눈물이 마른자리는 풀기 마른 자리처럼 뻣뻣하다.
나이든 남자가 우는 것은 이유가 없다.
오르가즘처럼 흔쾌하게 희열로 온다.
거울 뒤로 숨는 일은 그런 연유일께다.
프로필이라니 내게 무슨 삶의 흔적들이 있을까.
뾰족한 칼 한 자루만 품고 살았으니
궤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표피가 거칠어질수록 상흔으로 남을 뿐이다.
어느날 갑자기 떠난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조우하듯
삶은 짧은 기억에 불과하다.
비밀스럽게 꽁꽁 묶어줄 무엇이 필요하다.
익숙한 솜씨로
양파를 채 썰고 식초를 넣고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셀러드유를 둘러서
드레싱을 만들 때처럼
무리하게 집착해야 할 무엇이 필요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유리그릇처럼
빈 채로 살아온 것 이다.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해 낼 것이 없다.
모든 게 환영이었듯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빨래들처럼
가지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억을 표백 시키는 것
또 그것을 복제하는 것들은 무엇일까.
남자는 변했다. 어두운 바다의 표면처럼..
남자는 기차표를 확인한다. 어딘지 모르는 목적지도 확인한다.
커피 향 때문이었을까..
남자는 온 길을 비 내리듯 천천히 돌아본다.
등뒤로는 눈에 익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
정일근
그리운 곳에는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있네
헐벗은 영혼들도 귀의할 안식이 있듯
상처뿐인 삶들도 돌아가 잠들 그리운 집은 있네
천상의 사랑은 이미 빗장을 풀고 달아나버려
보리밭 위로 부는 바람에도 나는 어찌할 수 없네
어제는 들판에서 잠자고 오늘은 길 위에서 눈뜨는
노숙의 세월인들 꿈이 없으랴
그 꿈속의 비단길인들 끝이 없으랴
나는 대상에서 떨어져 나온 외로운 쌍봉낙타
취하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는 도시의 불 사막을
지글거리는 고통의 맨발로 걸어가네
또 그렇게 가다 보면 세상의 마지막 저녁과
두고 온 고향의 바닷 별과 조우하려니
입 안에 풍화하는 모래가 씹히고
모래언덕 위로 붉은 달이 떠오를 때
별에다 귀를 가져다 대면, 들리네
혓속에서 잉잉거리는 세상의 첫소리와
첫사랑 현옹수 떨리는 소리까지 들리네
착한 눈동자 선한 귀로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게
그리운 곳에는 우리가 부르는 소리가 있네
□ 여행
김옥남
그것은 생활의 연장
방랑과 유리하는 자의 속성
다만 떠나는 연습일 뿐
떠난 자리에
되돌아 올
어김없는 약속을 남기고
비운 자리만큼
그 무엇을
채워 올 것 같은 기대
깊은 상념을 사유하고
낯선 사물과 따뜻이 조우하며
생경한 거리에서
포근한 인정을 그리워하는
여행,
미지를 향한
갈증 같은 설레임
□ 완전한 사랑 연리지(連理枝)
고은영
오후 눈금이 시원한 빗줄기 속에서
오히려 통통 튀는 색기를 발산하고
여름 풍경은 그리운 피사체로
7월의 유역에 울창하다
몇 세기를 굽이쳤는지 그대 아는가
어느 시공을 초월하고 어둠의 통로에서
존재마저 모호한 한 알의 씨앗으로
햇살 한 줄기 쏟아지는 대지에 미약하게 굽이치다
밤이면 이슬 젖은 달을 야금야금 먹어야 했던
배부르도록 외롭던 포만감
그대와 나는 오랫동안
슬픔이 충일한 거리를 떠돌았다
주홍빛 서러움을 안주로 삼고
낮 술에 취한 그대와 나의 조우는
항상 저 안개 자욱한 숲에서나 만나던 현주소
보고 팠던 부피만큼 지성이 가득한
그대를 바라보는 일은 행복하다
시간의 터울 속에 우리가 간과했던 무심에서
새롭게 고개 드는 그리움
그래, 사랑은
보편성을 획득한 고귀한 물결로
때론 유유히 흘러가기도 하는 아름다운 것
데미안의 새처럼
우리는 어느 관념의 알을 깨고
이제 막 세상을 향하여 하나로 선 것이냐
□ 비는 저 홀로 울고 있었다
고은영
메마르고 까칠한 그의 입술이
비정한 미소와 함께 차갑게 움직였다
한 떼의 구름 들이 몰려오고
혼돈이 안개 늪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천근의 무게로 다가오던
시리기만 한 두꺼운 띠를 두르고
"나는 단 한 번도 그 무엇도
어느 누구도 사랑을 해 본 일이 없었다"
짧은 순간에 추락하던 진통 사이로
비는 스치는 바람의 말을 듣고 있었다
너무나 당당하게 바람은 말했다
가슴으로 운다는 것은
얼마나 처량한 일인가
그 숱한 조우 속에도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절감하는 일
언제나 그랬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바람은 비가 될 수 없고
비는 바람이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는 저 홀로 울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참고자료)
■ 불교에서의 인연(因緣)
위키백과
□ 인연 (因緣)
12연기설(十二緣起說)은 12지연기(十二支緣起), 12인연(十二因緣)이라고도 하며, 무명 · 행 · 식 · 명색 · 6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의 12지, 즉 12요소로 된 연기설(緣起說)이다.
“잡아함경” 중에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 연기경(緣起經)”에서 고타마 붓다는 연기법(緣起法)의 법(法)과 의(義), 즉 연기법 특히 유전연기의 정의 또는 본질(法, 初)과 그 자세한 모습 또는 뜻(義, 差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경전들에 따르면, 연기법 특히 유전연기(流轉緣起)의 정의 즉 법(法)은 연(緣)과 기(起)를 뜻하는데, '연(緣)'이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는 것을 의미하고, '기(起)'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는 것을 의미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연(緣)'은 무명연행(無明緣行) · 행연식(行緣識) · 식연명색(識緣名色) ·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 6입연촉(六入緣觸) · 촉연수(觸緣受) · 수연애(受緣愛) · 애연취(愛緣取) · 취연유(取緣有) · 유연생(有緣生) · 생연노사(生緣老死)의 일련의 인과관계적 과정을 말하고, '기(起)'는 이 과정을 통해 추(愁: 걱정) · 탄(歎: 한탄) · 고(苦: 괴로움) · 우(憂: 근심) · 뇌(惱: 번뇌, 고요하지 못함)가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다시 이러한 뜻의 '연(緣)'과 '기(起)'를 총체적으로 간략히 말하면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순전한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 또는 순수하게 큰 괴로움의 무더기 즉 5취온(五取蘊)이 형성(集)되는 것을 말한다. 5취온이 형성된다는 것은 생사윤회를 반복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법의 자세한 모습 또는 뜻(義, 差別)은 12연기의 12지 각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6입(名色緣六入)의 연기관계에서 한 요소(支)를 이루고 있는 명색(名色)에 대해 명(名)은 5온 가운데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4온을 말하고 색(色)은 색온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4대종과 4대종으로 만들어진 소조색을 말한다는 설명과, 촉연수(觸緣受)와 수연애(受緣愛)의 연기관계에서 한 요소(支)를 이루고 있는 수(受)에 대해, 수(受)는 낙수 · 고수 · 불고불락수의 3수로 나뉜다는 설명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 인연
인연(因緣)에서 인(因)은 결과를 낳기 위한 내적이며 직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고, 연(緣)은 이를 돕는 외적이며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는 양자를 합쳐 원인의 뜻으로 쓴다.
연기(緣起)는 영어로는 "dependent arising (의존하여 생겨남)", "conditioned genesis (조건지워진 생성)", "dependent co-arising (의존된 상호발생)" 또는 "interdependent arising (상호의존하여 생겨남)" 등으로 번역되는데, 연기(緣起)의 법칙은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라고 서술된다. 이 서술에서 "이것"과 "그것"의 두 항목은 서로 연기관계(緣起關係), 즉 인과관계(因果關係)에 있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이것"을 의존하여(조건으로하여) 일어나는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사제설(四諦說)인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하는 항목을 합하여 병렬한 것이다.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연기(緣起)하는 항목들로는 이들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열 두 항목을 사용하여 설명된 연기설이 12연기설이다.
. 유전연기과 환멸연기
연기설은, 일반적으로, 세계인생의 일반적인 생멸변화(生滅變化)의 제 현상의 관계항목을 보여주는 12지(支 · 항목)의 연기로 설명된 철학적인 이론 또는 담론인 것처럼 보이기 쉬우나, 연기가 설명된 본래의 목적은 그러한 일반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원인이나 조건에 의해서 고뇌가 생기고 또 어떠한 인연조건(因緣條件)에 의해서 고뇌를 면할 수가 있는가 하는, 인생의 현실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또 그 현실을 초극(超克) 하는 방법과 길을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 유전연기
연기설이 문제로 하고 있는 현상은 선악업(善惡業)과 그 과보(果報)로서의 고락과 같은 종교적 · 윤리적인 가치관계의 현상이다. 그 경우 현상이 가치적으로 악화하는, 즉 고(苦)가 생기(生起)하는 연기관계를 유전연기(流轉緣起) 혹은 연기의 순관(緣起의 順觀) 혹은 순연기(順緣起)라고 한다.
연기의 순관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名)에 연(緣)해서 행(行)이 있고 행에 연해서 식(識)이 있으며 식에 연해서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에 연해서 6입(六入)이 있으며 6입에 연해서 촉(觸)이 있으며 촉에 연해서 수(受)가 있고 수에 연해서 애(愛)가 있고 애에 연해서 취(取)가 있으며 취에 연해서 유(有)가 있고 유에 연해서 생(生)이 있으며 생에 연해서 노사(老死) ·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생긴다"라는 정형적(定型的)인 글로 표현되어 있다.
한편, 연기의 순관은 현실의 노사(老死) 등의 고(苦)에서 소급해서 고의 근본으로서의 무명에 이른다고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며 그것이 본래의 모습이라고도 하는 견해가 있지만, 불교 경전에 설명된 정형적인 글로는 무명에서 고가 생겨나는 연기가 설명되어 있다.
. 환멸연기
현상(現象)이 가치적으로 악화되는 과정인 순관에 대응해서 현상이 순화(純化)되고 정화(淨化)하는, 즉 고뇌의 유전(流轉)이 멸해지고 이상의 열반계(涅槃界)로 돌아가는 연기의 관계는 환멸연기(還滅緣起)라고 말해지며 또 이것을 연기의 역관(緣起의 逆觀) 혹은 역연기(逆緣起)라고 한다.
연기의 역관은 구체적으로는 "무명(無明)이 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한다. 행이 멸하기 때문에 식(識)이 멸한다. 식이 멸하기 때문에 명색(名色)이 멸한다. 명색이 멸하기 때문에 6입(六入)이 멸한다. 6입이 멸하기 때문에 촉(觸)이 멸한다. 촉이 멸하기 때문에 수(受)가 멸한다. 수가 멸하기 때문에 애(愛)가 멸한다. 애가 멸하기 때문에 취(取)가 멸한다. 취가 멸하기 때문에 유(有)가 멸한다. 유가 멸하기 때문에 생(生)이 멸한다. 생이 멸하기 때문에 노사(老死) · 우비고수뇌(憂悲苦愁惱)의 갖가지 고(苦)가 멸한다"와 같이 설명된다.
□ 유전연기의 내용
12연기설을 구성하는 열 두 항목 각각과 이들 간의 유전연기(연기의 순관: 고통과 번뇌가 계속되게 하는 인과관계)는 다음과 같다.
(1) 무명(無明)
무명(無明, 산스크리트어: avidyā, 팔리어: avijjā, 영어: ignorance)은 무명연행(無明緣行)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무명연행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무명에 대한 설명에서 부지(不知) 즉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낱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데, 불교에서 앎[知]이란 정지(正知) 즉 바른 앎을 말하는 것으로, 앎[知] 또는 정지는 여실정행(如實正行) 또는 정행(正行)과 동의어이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앎[知]이란 불교의 진리 즉 4성제 · 12연기 등의 이치에 대한 이론적인 앎에 실천이 더해져서 획득하고 성취하게 된 실천적인 앎을 말한다.
역으로 그리고 엄격히 말하자면, 바른 행위 또는 바른 실천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불교에서 정의하는 앎[知] 또는 정지(正知)가 아니다. 다만, 좀 더 완화된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론적인 앎이 실천적인 앎의 출발점 또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이론적인 앎도 실천적인 앎[知] 또는 정지(正知)의 일부이다. 즉, 유루혜인 3혜 가운데 문혜와 사혜도, 비록 세간의 정견에 포함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정견에 포함된다.
과거[前際]를 알지 못하는 것[不知], 미래[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 과거와 미래[前後際]를 알지 못하는 것,
안[內]을 알지 못하는 것, 밖[外]을 알지 못하는 것, 안팎[內外]을 알지 못하는 것
업(業)을 알지 못하는 것, 과보[報]를 알지 못하는 것, 업과 과보[業報, 업보]를 알지 못하는 것
불보[佛]를 알지 못하는 것, 법보[法]를 알지 못하는 것, 승보[僧]를 알지 못하는 것
고제[苦]를 알지 못하는 것, 집제[集]를 알지 못하는 것, 멸제[滅]를 알지 못하는 것, 도제[道]를 알지 못하는 것
원인[因]을 알지 못하는 것, 원인이 일으키는 법(法) 즉 결과를 알지 못하는 것
선(善)과 불선(不善)을 알지 못하는 것
죄가 됨[有罪]과 죄가 되지 않음[無罪], 익혀야 할 것[習]과 익히지 않아야 할 것[不習], 열(劣: 저열한 것)과 승(勝: 뛰어난 것), 염오(染污)와 청정(清淨), 그리고 이들의 분별(分別: 식별하는 것, 식별력)과 연기관계[緣起]를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이들 모두를 남김없이 즉 완전히 알지 못하는 것[皆悉不知]
6촉입처(六觸入處), 즉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을 여실히 즉 실답게 관찰하고 알지 못하는 것[不如實覺知], 즉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을 진리[實]와 계합[如]하는 상태에 있게끔 제어[覺知]하지 못하는 것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不知],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보지 못하는 것[不見],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의 앎[知: 실천적 앎]에 대해서라도 '간격없이 동등함[無間等]' 즉 '완전한 계합'이 없는 것[無無間等],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어리석고 컴컴한 것[癡闇],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밝음이 없는 것[無明], 위에 열거한 모두 가운데 어느 하나에 대해서라도 크게 어두운 것[大冥]
“연기경” 에서의 설명에 따르면, 무명은 다음을 뜻한다. 앞의 “법설의설경(法說義說經)”에서는 무명에 대한 설명에서 부지(不知) 즉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낱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는 반면, “연기경”에서는 무지(無知) 즉 '앎이 없는 것'이라는 낱말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과거[前際]에 대해 앎이 없는 것[無知], 미래[後際]에 대해 앎이 없는 것, 과거와 미래[前後際]에 대해 앎이 없는 것
……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무명은 명(明), 즉 지혜가 없는 것으로, 연기의 도리를 알고 있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현실적으로는, 올바른 인생관 · 세계관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행(行)
행(行,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 영어: (mental) formations)은 무명연행(無明緣行)과 행연식(行緣識)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무명연행은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뜻이고, 행연식은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행(行)은 신행(身行) · 구행(口行) · 의행(意行)의 3행(三行)을 뜻한다. 3행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과 동의어이다.
무명연행(無明緣行) 또는 연무명행(緣無明行), 즉 무명(無明)이 있으므로 행(行)이 있다는 것은 무명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3행(三行), 즉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3업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무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행(行)은 부파불교의 업감연기(業感緣起)에서 업(業) 또는 업력(業力)에 해당하고, 업 또는 업력이 저장되는 곳은 무표색과 의근이다. 행(行)은 대승불교의 아뢰야연기(阿賴耶緣起)에서 아뢰야식에 보관된 종자, 그 중에서도 특히 업종자에 해당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행(行)은 신행(身行) · 어행(語行) · 의행(意行)의 3행(三行)을 뜻한다. 3행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과 동의어이다.
……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행(行)은 행위와 그 행위 경험의 축적(蓄積)을 뜻한다. 또는, 다른 학자에 따르면, 행(行)은 조건 지워진 상태 또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특히 정신적인 기질 또는 성향을 의미한다. 또한 현대의 승려 비쿠 보디(Bhikkhu Bodhi)에 따르면, 행은 능동적인 측면에서 의지적인 행위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정신적인 기질 또는 성향은 의지적인 행위의 결과로서 형성되고 또 현재의 의지적인 행위는 미래의 의지적인 행위를 일으키는 인과 연이 되기 때문이다.
(3) 식(識)
식(識, 산스크리트어: vijñāna, 팔리어: viññāṇa, 영어: consciousness)은 행연식(行緣識)과 식연명색(識緣名色)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행연식은 행연식은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뜻이고, 식연명색은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식(識)은 안식신(眼識身) · 이식신(耳識身) · 비식신(鼻識身) · 설식신(舌識身) · 신식신(身識身) · 의식신(意識身)의 6식신(六識身)을 뜻한다.
여기서 신(身, 산스크리트어: kāya)은 이 단어의 일반적 의미인 몸 즉 신체의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라,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들'로서 사용된 경우이다. 따라서, 안식신은 안식들 또는 안식들의 집합을 뜻하는데, 온갖 시각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식신 · 비식신 · 설식신 · 신식신은 각각 온갖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하며, 의식신은 온갖 정신적 의식들의 집합을 말한다. 그리고 6식신(六識身)은 이들 6가지 식신(識身) 즉 이들 6가지 식(識)들의 집합을 말한다. 이들 6가지 식신(識身)들은 일반적으로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이라고 불리며, 6식신(六識身)은 6식(六識)이라고 불린다.
초기불교에서의 6식은 곧 마음(心, 산스크리트어: citta, 팔리어: citta)을 말하는 것으로, 부파불교에서 마음 즉 6식은 심의식 또는 심 · 의 · 식이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에서는 6식은 하나의 마음의 6가지 다른 모습 또는 작용일 뿐이라고 보며, 이러한 견해를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도 마음을 심의식 또는 심 · 의 · 식이라고도 하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초기불교의 6식은 더 심층의 의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마음이 6식에 말나식과 아뢰야식이 더해진 8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교학을 가지고 있다.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에는 8식은 그 체가 각각 별도라는 심체별설 또는 식체별설의 견해와 8식의 체는 하나라는 심체일설 또는 식체일설의 견해가 둘 다 존재한다.
행연식(行緣識), 즉 행(行)이 있으므로 식(識)이 있다는 것은 그릇된 행, 즉 그릇된 3행(三行), 즉 그릇된 신업 · 구업 · 의업의 3업(三業)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6식신, 즉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이미 발생한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또는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이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그릇된 행 즉 신업 · 구업 · 의업 가운데 그릇된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따를 때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마음(의식)은 행위[行, 業] 또는 운동을 바탕하여 발생한다는 것이다. 근원적 연기관계에서 볼 때, 마음(의식)이 행위를 낳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마음(의식)을 낳는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정이 행하는 행위 즉 몸 · 말 또는 뜻으로 행하는 행위는 단순히 행위 자체에 그치지 않으며 반드시 그 유정 속에서 어떤 마음(의식)을 낳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식(識)은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의 6식신(六識身) 즉 6식(六識)을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식(識)은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의 전5식(前五識)에 의한 감각작용과 제6의식에 의한 지각(知覺) · 추리(推理) · 기억(記憶) · 판단(判斷) 등 일체의 의식작용 및 이러한 작용을 하는 주체적 존재를 총칭하는 것으로서, 과거의 모든 행위[行]가 잠재의식이 되어서 작용하게 된 것이다.
(4) 명색(名色)
명색(名色, 산스크리트어: nāmarūpa, 팔리어: nāmarūpa, 영어: name and form)은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6입(名色緣六入)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식연명색은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뜻이고, 명색연6입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명(名)과 색(色) 즉 정신과 물질 또는 마음[心]과 육체[身]를 통칭한다. 명(名) 즉 정신 또는 마음[心]은 5음(五陰) 가운데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4무색음(四無色陰)을 말한다. 색(色) 즉 물질 또는 육체[身]는 5음(五陰) 가운데 색음을 말하며, 구체적으로는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색을 말한다. 여기서, 색음 · 수음 · 상음 · 행음 · 식음의 5음(五陰)은 색온 ·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5온(五蘊)의 구역(舊譯)이다. 그리고, 대상을 제외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만 볼 때, 여기서의 마음[心] 또는 정신[名] 즉 4무색음은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합한 개념이다. 육체[身] 또는 물질[色]은 안 · 이 · 비 · 설 · 신의 5근을 말한다.
식연명색(識緣名色), 즉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것은 그릇된 식, 즉 그릇된 마음, 즉 그릇된 6식, 즉 그릇된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이 있기 때문에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정신[名]과 육체[色]'의 그릇된 상태, 즉 '마음 · 마음작용 · 육체'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그릇된 식 즉 시각적 · 청각적 · 후각적 · 미각적 · 촉각적 · 정신적(제6의식의) 마음(의식)들 가운데 그릇된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명(名)과 색(色)을 통칭한다. 명(名)은 5온 가운데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의 4무색온(四無色蘊)을 말하고, 색(色)은 5온 가운데 색온(色蘊)을 말하는데 이것은 곧 제소유색(諸所有色) 즉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말하며, 구체적으로 4대종과 4대종의 소조색을 말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명색(名色)은 정신적인 것[名]과 물질적인 것[色]으로서 이 현상세계의 존재를 가리킨다.
(5) 6입(六入)
6입(六入, 산스크리트어: ṣaḍāyatana, 팔리어: saḷāyatana, 영어: six sense gates, six sense bases)은 6처(六處) · 6입처(六入處) · 내6입(內六入) · 내6입처(內六入處) · 6내입처(六內入處) · 6정(六情) · 제입(諸入) · 6촉입처(六觸入處) · 6촉처(六觸處) · 6갱락처(六更樂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한다. 6입은 명색연6입(名色緣六入)과 6입연촉(六入緣觸)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명색연6입은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다는 뜻이고, 6입연촉은 6입 즉 6처 즉 6근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에서는 6입(六入)을 6입처(六入處)라고 부르고 있는데, 설명에 따르면, 6입처는 안입처(眼入處) · 이입처(耳入處) · 비입처(鼻入處) · 설입처(舌入處) · 신입처(身入處) · 의입처(意入處)의 6내입처(六內入處)를 말한다.
입처(入處)라는 낱말은 입(入)과 처(處)가 합쳐서 이루어진 낱말이다. 입(入)은 섭입(涉入: 거두어들임) 또는 촉입(趨入: 재촉하여 들임)의 뜻으로 6근(六根)과 6경(六境)이 서로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리킨다. 처(處)는 소의(所依) 즉 발동근거 · 의지처 · 도구라는 뜻으로, 6경에 대하여 6식이 생겨날 때 6근이 소의 즉 발동근거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입처(入處)는 6식의 수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6근과 6경이 서로를 거두어 들여서 6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또한, 6식의 능동적 작용이라는 입장에서는, 입처(入處)는 6식이 6근을 통해 6경을 거두어들임으로써 6경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인식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한 앎 또는 요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대상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마음작용들이 일어나는 것도 포함하는 말이다. 《아비달마구사론》에 따르면, 처(處)는 생장문(生長門)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과 마음작용이 생겨나게 하고 증장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을 뜻한다. 즉, 6근은 6식 즉 마음의 단순한 인식도구가 아니다. 6근은 마음의 인식도구일 뿐만 아니라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을 현행하게 하고 그 세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6근 가운데 의근(意根)의 경우 이러한 점이 두드러진다.
6내입처(六內入處): 6가지 내적인 입처(入處), 6식이 6경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6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내적인 어떤 것
안입처(眼入處): 눈[眼]이라는 입처, 안식의 입처, 안식이 색경(색깔과 형태)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안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
이입처(耳入處): 귀[耳]라는 입처, 이식의 입처, 이식이 성경(소리)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이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
비입처(鼻入處): 코[鼻]라는 입처, 비식의 입처, 비식이 향경(냄새)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비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
설입처(舌入處): 혀[舌]라는 입처, 설식의 입처, 설식이 미경(맛)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설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
신입처(身入處): 몸[身]이라는 입처, 신식의 입처, 신식이 촉경(감촉)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신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
의입처(意入處): 뜻[意]이라는 입처, 의식의 입처, 의식이 법경(법, 정신적 존재, 즉 명색의 명)을 비롯한 6경을 인식할 때 사용하는 인식도구이자 의식과 그 관련 마음작용이 생겨나고 증장되게 하는 것
명색연6입(名色緣六入), 즉 명색(名色)이 있으므로 6입(六入)이 있다는 것은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있기 때문에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6식 즉 마음이 6경을 인식할 때 6근이 인식도구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생겨나기도 하고 혹은 마음과 마음작용을 생겨나게 하고 증장 시키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며 때로는 그릇된 방향으로 생겨나게 하고 증장 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명색연6입(名色緣六入)은 또한 이미 발생한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심신(心身)의 그릇된 상태 즉 심신의 부조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에서는 6입(六入)을 6처(六處)라고 부르고 있는데, 6처는 안내처(眼內處) · 이내처(耳內處) · 비내처(鼻內處) · 설내처(舌內處) · 신내처(身內處) · 의내처(意內處)의 6내처(六內處)를 말한다.
……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6입(六入)은 6처(六處) 또는 6근(六根)이라고도 하며 6개의 감각기관으로서 이 감각기관을 통해 식(識)이 작용하게 되어 명색을 인식한다.
(6) 촉(觸)
촉(觸, 산스크리트어: sparśa, 팔리어: phassa, 영어: contact)은 6입연촉(六入緣觸)과 촉연수(觸緣受)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6입연촉은 6입(六入) 즉 6처(六處) 즉 6근(六根)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뜻이고, 촉연수는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촉(觸)은 안촉신(眼觸身) · 이촉신(耳觸身) · 비촉신(鼻觸身) · 설촉신(舌觸身) · 신촉신(身觸身) · 의촉신(意觸身)의 6촉신(六觸身)을 말한다.
여기서 신(身, 산스크리트어: kāya)은 이 단어의 일반적 의미인 몸 즉 신체의 뜻의 명사로 사용된 경우가 아니라, 복수 · 집합을 뜻하는 복수형 접미사 '~들'로서 사용된 경우이다. 그리고 촉(觸)은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을 말한다.
6촉신(六觸身): 6가지 촉(觸)들, 6가지 촉(觸)의 집합; 6촉(六觸)은 6근 · 6경 · 6식의 화합들을 말하고, 6촉신(六觸身)은 이러한 화합들의 집합을 총칭한다. 6촉과 6촉신은 사실상 같은 말이며, 6촉은 6촉신의 줄임말이라 할 수 있다. 6근 · 6경 · 6식의 화합의 상태는 6식 즉 인식대상에 대한 6가지 인식 또는 요별 가운데 개별 또는 다수가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안촉신(眼觸身): 안촉(眼觸)들, 안촉(眼觸)의 집합; 안촉(眼觸)은 안근 · 색경 · 안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안식 즉 인식대상의 색경(색깔과 크기와 모습)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눈으로 대상의 색깔과 크기와 모습을 보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촉신(耳觸身): 이촉(耳觸)들, 이촉(耳觸)의 집합; 이촉(眼觸)은 이근 · 성경 · 이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이식 즉 인식대상의 성경(소리)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귀로 대상의 소리를 듣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비촉신(鼻觸身): 비촉(鼻觸)들, 비촉(鼻觸)의 집합; 비촉(鼻觸)은 비근 · 향경 · 비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비식 즉 인식대상의 향경(냄새)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코로 대상의 냄새를 맡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설촉신(舌觸身): 설촉(舌觸)들, 설촉(舌觸)의 집합; 설촉(舌觸)은 설근 · 미경 · 설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설식 즉 인식대상의 미경(맛)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혀로 대상의 맛을 감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신촉신(身觸身): 신촉(身觸)들, 신촉(身觸)의 집합; 신촉(身觸)은 신근 · 촉경 · 신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신식 즉 인식대상의 촉경(촉감)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몸으로 대상의 촉감을 감촉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의촉신(身觸身): 의촉(身觸)들, 의촉(身觸)의 집합; 의촉(身觸)은 의근 · 법경 · 의식의 화합을 말한다.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의식 즉 인식대상의 법경(정신적 측면)에 대한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의식으로 대상의 정신적 측면을 감지 또는 요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의식 즉 제6의식은 의근을 통해 단지 법경만을 요별하지 않으며 의근을 통해 5경에 대해서도 요별 하는데, 이 경우 의촉은 의근 · 6경 · 의식의 화합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화합의 상태는 인식대상에 대한 제6의식의 전체적 · 종합적 인식 또는 요별이 현행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을 뜻한다. 즉 제6의식이 대상을 전체적 · 종합적으로 감지 또는 요별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6입연촉(六入緣觸), 즉 6입(六入)이 있으므로 촉(觸)이 있다는 것은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촉(觸)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안근 · 이근 · 비근 · 설근 · 신근 · 의근의 6근,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눈 · 귀 · 코 · 혀 · 몸 · 뜻이 있기 때문에 '그릇된 상태의 근 · 경 · 식 3사화합'이 생겨난다. 특히, 마지막의 의근 또는 뜻은 6식이 과거로 낙사한 것, 즉 과거 경험의 총체를 말한다. 이와 같이 과거의 행위들은 누적이 되어 현재의 6근의 상태를 형성하거나 6근의 작용의 발동근거가 되는데, 현재의 그릇된 상태의 6근은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이 생겨나게 한다. 그리고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은 대상에 대한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에 진실한 인식 즉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6입연촉(六入緣觸)은 또한 이미 발생한 촉(觸)의 그릇된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이 있다면, 즉 그릇된 상태의 안촉 · 이촉 · 비촉 · 설촉 · 신촉 · 의촉이 이미 발생한 상태라면,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미 발생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6입 즉 6처 즉 6근의 그릇된 상태 즉 진리에 계합하도록 제어되지 못한 상태의 6근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촉(觸)은 안촉(眼觸) · 이촉(耳觸) · 비촉(鼻觸) · 설촉(舌觸) · 신촉(身觸) · 의촉(意觸)의 6촉신(六觸身) 즉 6촉(六觸)을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촉(觸)은 6입과 명색과 식이 접촉하는 것이다.
(7) 수(受)
수(受, 산스크리트어: vedanā, 팔리어: vedanā, 영어: sensation, feeling)는 촉연수(觸緣受)와 수연애(受緣愛)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촉연수는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뜻이고, 수연애는 수(受)가 있으므로 애(愛)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수(受)는 고수(苦受) · 낙수(樂受)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를 말한다.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등 불교 일반에 따르면, 수(受)는 마음 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촉(觸) 즉 '근경식 3사 화합'을 바탕으로 하여 일어난다.
촉연수(觸緣受), 즉 촉(觸)이 있으므로 수(受)가 있다는 것은 촉(觸)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수(受)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그릇된 상태의 고수 · 낙수 · 불고불락수의 3수(三受)가 생겨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릇된 상태의 3수는 전도된 상태의 3수를 말하는 것으로 고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낙 또는 불고불락의 대상이라 여기고, 낙이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고 또는 불고불락의 대상이라 느끼고, 불고불락이라고 느껴야 할 대상을 고 또는 낙의 대상이라 느끼는 것을 말한다.
촉연수(觸緣受)는 또한 이미 발생한 수(受)의 그릇된 상태 즉 전도된 3수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촉(觸)의 그릇된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3사화합', 즉 현행하는 인식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 즉 그릇된 상태의 안촉 · 이촉 · 비촉 · 설촉 · 신촉 · 의촉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학에서 수(受) 즉 3수(三受)는 더욱 세밀하게 탐구 되어 심수 · 신수의 2수(二受), 낙수 · 고수 · 희수 · 우수 · 사수의 5수(五受) 또는 5수근(五受根) 등의 여러 가지 분류로 재분류 되어 불교의 번뇌론과 수행론과의 관련 하에 논의되고 있다. 예를 들어 5수 가운데 낙수와 희수는 색계의 제3정려인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와 관련되어 논의되고 있다. '이희묘락지'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희수[喜]를 떠나고 묘한 낙수[樂]가 있는 장소'이다. 또한 제4정려인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염(念)을 버린 청정한 장소'인데 '염을 버린 상태[捨念]'는 3수 또는 5수 가운데 사수(捨受)를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수(受)는 낙수(樂受) · 고수(苦受) ·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의 3수(三受)를 뜻한다.
(8) 애(愛)
애(愛, 산스크리트어: tṛṣṇā, 팔리어: taṇhā, 영어: craving, desire, thirst)는 수연애(受緣愛)와 애연취(愛緣取)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수연애는 수(受)가 있으므로 애(愛)가 있다는 뜻이고, 애연취는 애(愛)가 있으므로 취(取)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애(愛)는 욕애(欲愛) · 색애(色愛) · 무색애(無色愛)의 3애(三愛)를 말한다.
애(愛)는 애착(愛著) · 탐(貪) 또는 집착(執著)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대상에 대한 그릇된 좋아함[欲]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그 대상에 들러 붙어 떠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애(愛)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에는 사랑이라는 뜻이 있으며 12연기설에서 말하는 애(愛)는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기독교 등에서 말하는 사랑은 불교의 자비(慈悲)에 해당한다. 그리고 불교에서도 애(愛)라는 낱말이 이러한 사랑 또는 자비의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부파불교의 5위 75법과 대승불교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 따르면 12연기설의 애(愛) 즉 탐(貪)은 그 성질이 불선(不善)으로, 본질적으로 번뇌이다. 이에 비해 자비의 자(慈)는 무진(無瞋)의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이고, 비(悲)는 불해(不害)의 마음작용의 본질적 성질로서, 둘 다 본질적으로 선(善)이다. 불교에서는 탐(貪)으로서의 애(愛: 갈애, 애착, 집착)는 증(憎: 증오, 미워함)과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애(愛: 갈애, 애착, 집착)가 증(憎: 증오, 미워함)을 낳기도 하며 반대로 증(憎: 증오, 미워함)이 애(愛: 갈애, 애착, 집착)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자비 또는 사랑으로서의 애(愛)에는 이러한 면이 없다.
그리고 12연기설의 12지 가운데 제1지분인 무명(無明)과 제8지분인 애(愛)와 제9지분인 취(取)는 선 · 불선 · 무기의 3성에 따라 살펴보면 그 성질이 본질적으로 불선 또는 번뇌이다. 이에 비해 나머지 지분들은 그 성질이 무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지분들은 선이 될 수도 있고 불선이 될 수도 있다. 즉 바른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그릇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즉 청정한 상태에 있을 수도 있고 오염된 상태에 있을 수도 있다. 12연기의 유전연기는 이들 지분들이 그릇된 상태로 되는 것에 대해 특히 다루고 있는 것이며, 반면 12연기의 환멸연기는 이들 지분들이 바른 상태로 되는 것에 대해 특히 다루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무명(無明) · 애(愛) · 취(取)는 그 성질이 본질적으로 불선 즉 악이기 때문에 이들이 바른 상태로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다만 이들을 끊음으로써 더 이상 마음이 이들과 계합 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환멸연기에서 이들 3가지 지분은 변형[轉依]의 대상이 아니라 단멸(斷滅) 즉 원리(遠離: 멀리 떠남)의 대상이다.
욕애(欲愛) · 색애(色愛) · 무색애(無色愛)는 다음을 뜻한다.
욕애(欲愛): 욕계의 애, 욕계의 법 즉 욕계의 사물을 애착하여 그 결과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욕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
색애(色愛): 색계의 애, 색계의 법 즉 색계의 사물을 애착하여 그 결과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색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
무색애(無色愛): 무색계의 애, 무색계의 법 즉 무색계의 사물을 애착하여 그 결과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것, 무색계를 떠나지 못하는 것
수연애(受緣愛), 즉 수(受)가 있으므로 애(愛)가 있다는 것은 수(受)의 그릇된 상태가 있기 때문에 번뇌 또는 불선인 애(愛)가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의 사물들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상태가 전도된 3수(三受)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수연애(受緣愛)는 또한 이미 발생한 애(愛) 즉 3계의 어떤 사물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면,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의 각각을 떠나지 못하는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수(受)의 그릇된 상태 즉 전도된 고수 · 낙수 · 불고불락수의 하나 혹은 다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애(愛)는 욕애(欲愛) · 색애(色愛) · 무색애(無色愛)의 3애(三愛)를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애(愛)는 갈애(渴愛)라고 하여 맹목적인 애념(愛念)을 말한다. 고락 등의 감수작용이 강하면 그만큼 애증(愛憎)의 염(念)도 강해진다. 즉, 쾌락이 크면 그 쾌락을 가지려는 염이 강해지고, 고통이 크면 그 고통을 피하려는 염이 강해진다.
(9) 취(取)
취(取, 산스크리트어: upādāna, 팔리어: upādāna, 영어: attachment)는 애연취(愛緣取)와 취연유(取緣有)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애연취는 애(愛)가 있으므로 취(取)가 있다는 뜻이고, 취연유는 취(取)가 있으므로 유(有)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취(取)는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4취(四取)를 말한다. 이 가운데 계취는 계금취(戒禁取)라고도 하며, 아취는 아어취(我語取)라고도 한다.
취(取)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가짐 또는 취함인데, 모니어 모니어윌리엄스(Monier Monier-Williams)의 “산스크리트어-영어 사전”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 원어 우파다나(upādāna)의 일반적인 의미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취하는 행위(the act of taking for one's self),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전용(轉用: 쓸 곳에 쓰지 않고 다른 곳으로 돌려서 씀)하는 행위(appropriating to one's self), 받아들임(accepting), 허용함(allowing), 취함(taking), 획득함(acquiring) 등이 있고, 불교 용어로서는 '갈애 즉 탐욕이 원인이 되어 존재를 꽉 붙잡는 것 또는 집착하는 것으로 유 즉 새로운 태어남들의 원인이 되는 것(grasping at or clinging to existence caused by tṛṣṇā, desire, and causing bhava, new births)'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후자의 불교 용어로서의 정의는 애연취(愛緣取)와 취연유(取緣有)의 의미를 합쳐서 취(取, upādāna)를 정의한 것이다.
현대의 불교 사전들에 따르면, 취(取)라는 낱말의 일반적인 의미는 집지(執持: 잡아서 가짐, 잡아서 지님, 잡은 후 버팀, 잡은 후 유지함 · 집취(執取: 잡아서 가짐, 잡아서 취함, 잡은 후 받아들임, 잡은 후 의지함 인데, 좁은 뜻으로는 집착(執著: 꽉 붙잡은 후 들러붙음,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함)이라는 번뇌를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모든 번뇌(煩惱)를 뜻한다. 즉, 후자의 넓은 뜻으로는 취(取)는 번뇌의 다른 말인데, 4취(四取)라고 할 때의 취(取)는 이 후자의 뜻이다. 그리고 어떤 번뇌를 취(取)라고 할 때는 마음이 해당 번뇌의 대상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4취(四取)는 모든 번뇌를 취(取)의 뜻에 초점을 맞추어 4그룹으로 분류한 것이다. 즉 대상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한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모든 번뇌를 4그룹으로 분류한 것이다. 설명하기 좋은 순서대로 말하면, 대체로 견취(見取)는 그릇된 견해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고, 계취(戒取) 또는 계금취(戒禁取)는 그릇된 계율과 그릇된 금지조항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고, 욕취(欲取)는 욕계의 사물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고, 아취(我取) 또는 아어취(我語取)는 색계 · 무색계의 사물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다. 구체적으로는 4취는 다음과 같다.
4취
4취(四取, 산스크리트어: catvāry upādānāni, 팔리어: cattāri upādānāni)는 모든 번뇌, 정확히 말하면 108번뇌를 취(取)의 관점에서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4그룹으로 분류한 것이다. 욕취에 34번뇌, 견취에 30번뇌, 계취에 6번뇌, 아취 또는 아어취에 38번뇌가 있어서 총 108번뇌를 이룬다. 4취를 구역에서는 4수(四受)라고도 한다.
① 욕취
욕취(欲取, 산스크리트어: kāmopādāna, 팔리어: kāmopādāna)는 욕계의 5욕(五欲)의 대상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로, 달리 말하면, 욕계의 색 · 성 · 향 · 미 · 촉의 5경에 들러붙어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이다. 욕취에는 욕계의 6경 가운데 6번째인 법경(정신적 사물)에 대한 취(取)가 제외되는데, 이것은 4취 가운데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에 소속된다.
구체적으로, 욕취에 속한 번뇌들이란 욕계의 탐(貪) · 진(瞋) · 만(慢) · 무명(無明) · 의(疑) · 10전(十纏)을 말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때, 욕취에 속한 번뇌들 중 탐 · 진 · 만 · 무명 · 의는 근본번뇌에 속하고 10전은 수번뇌에 속한다. 10전은 무참(無慙) · 무괴(無愧) · 질(嫉) · 간(慳) · 회(悔) · 면(眠) · 도거(掉擧) · 혼침(惛沈) · 분(忿) · 부(覆)를 말한다.
설일체유부의 번뇌론에서 모든 근본번뇌는 견고소단(見苦所斷) · 견집소단(見集所斷) · 견멸소단(見集所斷) · 견도소단(見道所斷) · 수도소단(修道所斷)의 5부(五部)의 관점에서 나뉘는데, 각각의 근본번뇌마다 5부 모두가 있는 경우도 있고 특정한 몇 부(部)만 있는 경우도 있다. 욕취에 속한 탐(貪) · 진(瞋) · 만(慢) · 무명(無明) · 의(疑) · 10전(十纏)을 5부에 따라 나누면, 욕계의 탐 · 진 · 만 · 무명에는 모두 5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총 20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의는 견소단의 번뇌이므로 수도소단을 제외한 4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4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10전은 수번뇌인데 비록 수번뇌에 대해서도 5부 분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108번뇌를 헤아릴 때는 수번뇌는 5부로 나누는 대상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그대로 10가지의 번뇌가 되므로, 총 34가지의 번뇌가 있게 된다. 이들 34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34사(三十四事)라고 한다. 즉, 108번뇌 중 34번뇌가 욕취에 속한다.
② 견취
견취(見取, 산스크리트어: drsty-upādāna, 팔리어: ditthi-upādāna)는 3계의 그릇된 견해를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번뇌로서의 견(見) 즉 염오견 즉 그릇된 견해를 이루는 5견(五見) 가운데 유신견(有身見) · 변집견(邊執見) · 사견(邪見) · 견취견(見取見)의 4견을 말한다. 즉, 욕계의 4견, 색계의 4견, 무색계의 4견을 통칭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때, 4견을 포함한 5견(五見)은 모두 근본번뇌에 속한다.
견취에 속한 3계의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 견취견을 5부에 따라 나누면 총 30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이들 30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30사(三十事)라고 한다. 즉, 108번뇌 중 30번뇌가 견취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유신견(有身見)은 현행의 결과, 즉 4성제 가운데 고(苦), 즉 5취온에 대해 미혹하여 생겨난 견해이기 때문에 5부 가운데 오직 견고소단이다. 따라서 3계 각각에 유신견이 있으므로 유신견으로는 총 3가지의 번뇌가 있다.
변집견(邊執見)도 또한 5취온이라는 현행의 결과에 대해 영원한 것 혹은 영원히 소멸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견해이기 때문에 5부 가운데 오직 견고소단이다. 따라서 3계 각각에 변집견이 있으므로 변집견으로는 총 3가지의 번뇌가 있다.
사견(邪見)은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곧 4성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 · 견집소단 · 견멸소단 · 견도소단의 4부가 존재한다. 따라서 3계 각각에 사견이 있으므로 사견으로는 총 12가지의 번뇌가 있다.
견취견(見取見)는 유신견 · 변집견 · 사견 등의 저열한 견해를 진리라고 주장하는 견해이기 때문에 견고소단 · 견집소단 · 견멸소단 · 견도소단의 4부가 존재한다. 따라서 3계 각각에 견취견이 있으므로 견취견으로는 총 12가지의 번뇌가 있다.
이상의 설명대로, 유신견에 3가지, 변집견에 3가지, 사견에 12가지, 견취견에 12가지의 번뇌가 있어서 견취는 총 30가지의 번뇌로 이루어져 있다.[131] (참고로 5견과 의는 모두 견소단의 번뇌이다. 5견과 의의 구체적인 5부 분별에 대해서는 '견소단(見所斷)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③ 계취·계금취
계취(戒取) 또는 계금취(戒禁取, 산스크리트어: śīla-vratopādāna, 팔리어: sīla-bbata-upādāna)는 3계의 그릇된 계율이나 그릇된 금지조항을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을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번뇌로서의 견(見) 즉 염오견 즉 그릇된 견해를 이루는 5견(五見) 가운데 계금취견(戒禁取見)을 말한다. 즉, 욕계의 계금취견, 색계의 계금취견, 무색계의 계금취견을 통칭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때, 계금취견을 포함한 5견(五見)은 모두 근본번뇌에 속한다.
계금취에 속한 3계의 계금취견을 5부에 따라 나누면 총 6가지의 번뇌가 있게 되고, 이들 6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6사(六事)라고 한다. 즉, 108번뇌 중 6번뇌가 계금취에 속한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계금취견(戒禁取見)은 한편으로는 자재천 등이 5온과 세계의 참된 원인이 아님에도 그것을 참된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현행의 결과, 즉 4성제 가운데 고(苦), 즉 5취온에 대한 바른 관찰이 있을 때, 즉 고제현관(苦諦現觀)이 있을 때 바로 끊어지는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금취견은 불 속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고행이 참된 길이 아닌데 그것을 해탈과 열반에 이르는 참된 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릇된 견해이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다. 따라서 3계 각각에 계금취견이 있으므로 계금취견으로는 총 6가지의 번뇌가 있다.[131] (참고로 5견과 의는 모두 견소단의 번뇌이다. 5견과 의의 구체적인 5부 분별에 대해서는 '견소단(見所斷)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④ 아취·아어취
아취(我取) 또는 아어취(我語取, 산스크리트어: ātma-vādopādāna, 팔리어: atta-vādupādāna)에서 아취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나를 취하는 것'으로 '나에 대한 집착'을 뜻한다. 아어취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나에 대한 말을 취하는 것'으로 '(게속하여) 나에 대해 말하는 집착'을 뜻한다. 아취 또는 아어취는 색계 · 무색계의 사물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로, 달리 말하면, 색계 · 무색계의 소의신의 뛰어난 상태를 '나'라고 여겨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색계 · 무색계의 소의신의 뛰어난 상태를 그릇되이 좋아하여[惡欲] 취한 후 그것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성격의 번뇌들을 통칭한다.
구체적으로는, 색계와 무색계의 탐(貪) · 만(慢) · 무명(無明) · 의(疑)를 말한다. 번뇌를 근본번뇌와 수번뇌로 구분할 때, 이들은 모두 근본번뇌에 속한다. 욕취의 경우와는 달리 아취 또는 아어취에는 진(瞋)이 포함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진(瞋)은 욕계에만 존재하는 번뇌이기 때문이다.
아취 또는 아어취에 속한 색계와 무색계의 탐(貪) · 만(慢) · 무명(無明) · 의(疑)를 5부에 따라 나누면, 색계와 무색계의 탐 · 만 · 무명에는 모두 5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색계에 15가지 번뇌가 있고 무색계에 15가지의 번뇌가 있어 총 30가지의 번뇌가 있다.
의는 오직 견소단의 번뇌이기 때문에 5부 가운데 수도소단이 제외되므로 색계에 4가지가 있고 무색계에 4가지가 있어서 총 8가지의 번뇌가 있다.
따라서, 아취 또는 아어취에는 총 38가지의 번뇌가 있게 된다. 이들 38번뇌를 전통적인 표현으로 38사(三十八事)라고 한다. 즉, 108번뇌 중 38번뇌가 아취 또는 아어취에 속한다. (참고로 5견과 의는 모두 견소단의 번뇌이다. 5견과 의의 구체적인 5부 분별에 대해서는 '견소단(見所斷)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애연취(愛緣取), 즉 애(愛)가 있으므로 취(取)가 있다는 것은 번뇌 또는 불선인 애(愛)가 있기 때문에 108번뇌, 즉 근본번뇌와 수번뇌를 합한 온갖 번뇌 또는 불선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계의 사물들에 들러붙어서 떠나지 못하는 상태인 욕애(欲愛) · 색애(色愛) · 무색애(無色愛)의 3애(三愛)가 원인이 되어서 그러한 들러붙음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며 또한 더욱 고착화되는 것을 말한다.
애연취(愛緣取)는 또한 이미 발생한 취(取) 즉 3계의 갖가지 번뇌가 있고 3계의 사물에 아주 확고히 들러붙어 있어서 이들로부터 떠나는 것이 거의 기대도 되지 않는 상태가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욕애(欲愛) · 색애(色愛) 또는 무색애(無色愛)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취(取)는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금취(戒禁取) · 아어취(我語取)의 4취(四取)를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취(取)는 집착(執着) 또는 번뇌(煩惱)를 의미하는데, 제8지분인 애(愛)를 연하여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강한 취사선택(取捨選擇)의 행동이다. 다른 학자에 따르면, 취(取)는 번뇌가 강화되고 이에 따라 아집(我執) 즉 번뇌장(煩惱障)이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아집(我執)은 인간 자신 속에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있다는 견해로, 중생의 몸과 마음을 번거롭게 하여 열반(또는 해탈)을 가로막아 중생으로 하여금 윤회하게 하는 장애라는 뜻에서 번뇌장(煩惱障)이라고도 한다.
(10) 유(有)
유(有, 산스크리트어: bhava, 팔리어: bhava, 영어: becoming)는 취연유(取緣有)와 유연생(有緣生)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취연유는 취(取)가 있으므로 유(有)가 있다는 뜻이고, 유연생은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유(有)는 욕유(欲有) · 색유(色有) · 무색유(無色有)의 3유(三有)를 말한다.
3유(三有)는 세계라는 측면에서는 3계를 뜻하고, 유정이라는 존재의 측면에서는 욕계의 유정 · 색계의 유정 · 무색계의 유정을 뜻한다. 유정이란 명색의 화합체 즉 5온의 화합체를 말하는 것으로, 유전연기의 관점에서는 취(取) 즉 온갖 번뇌에 물들어 있는 5온, 즉 5취온을 말한다. 따라서, 유전연기의 관점에서는 유(有)는 5취온을 말하며, 달리 말하면, 번뇌로 인해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는 상태 즉 윤회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의 삶을 말한다.
“잡아함경”에 따르면, 5온으로 하여금 5취온이 되게 하는 근본 요인은 욕탐(欲貪)이다. "5온이 곧 취(取: 구역에서는 受라고도 함)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5온이 취(取)와 다른 것도 아니다. 5온에 욕탐(欲貪)이 있으면 5온이 곧 5취온이 된다[非五陰即受 亦非五陰異受 能於彼有欲貪者 是五受陰]"고 말하고 있다.
취연유(取緣有), 즉 취(取)가 있으므로 유(有)가 있다는 것은 욕취(欲取) · 견취(見取) · 계취(戒取) · 아취(我取)의 4취(四取) 즉 108번뇌에 물든 상태가 있기 때문에 5취온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갖가지 번뇌가 있기 때문에 욕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색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무색계의 유정으로서의 존재이건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취연유(取緣有)는 또한 이미 발생한 유(有) 즉 욕유(欲有) · 색유(色有) 또는 무색유(無色有)로서의 존재가 있고 이러한 존재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취(取)가 존재한다는 것, 즉 갖가지 번뇌에 물든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이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었으며, 5취온의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유(有)는 욕유(欲有) · 색유(色有) · 무색유(無色有)의 3유(三有)를 뜻한다.
현대의 해석;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유(有)는 현존재 또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애(愛)와 취(取)의 행위가 잠재 의식화되는 것에 의해, 즉 자신의 성품 · 마음 · 습관 · 체질의 일부가 되는 것에 의해 현존재인 유(有)가 규정된다.
(11) 생(生)
생(生, 산스크리트어: jāti, 팔리어: jāti, 영어: birth)은 유연생(有緣生)과 생연노사(生緣老死)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유연생은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다는 뜻이고, 생연노사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들은 모두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생(生)은 각각의 중생(衆生)이 각각의 몸의 종류로 한 번의 생을 넘어 화합하여 태어나서는, 음(陰)을 득하고, 계(界)를 득하고, 입처(入處)를 득하고, 명근(命根)을 득하는 것을 말한다.
고타마 붓다의 설명에 나오는 각 낱말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각각의 중생[彼彼衆生]은 유정(有情)의 구역(舊譯)으로, 욕계 · 색계 · 무색계의 3유의 세계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소의신을 가지고 살고 있는 개개의 유정을 말한다.
각각의 몸의 종류[彼彼身種類]는 중동분(衆同分) 즉 유정의 동류상사성(同類相似性)을 말한다.
한 번의 생을 넘어 화합하여 태어나는 것[一生超越和合出生]은 5온의 화합이 한 번의 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상속(相續)되고 유전(流轉)하는 것을 말한다.
음(陰)을 득하는 것[得陰]은 5온이 갖추어지는 것을 말한다.
계(界)를 득하는 것[得界]은 18계가 갖추어지는 것을 말한다.
입처(入處)를 득하는 것[得入處]은 12처가 갖추어지는 것을 말한다.
명근(命根)을 득하는 것[得命根]은 생에서 생으로 윤회할 때 즉 5온이 생에서 생으로 상속되고 유전할 때 전생(前生)에 쌓은 원인에 따라 일정한 수명을 부여 받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또한 그 수명 동안 살아가는 것 즉 한 생애를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한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란, 그 생애 동안 무명(無明)에서 유(有) 즉 5취온으로 이어지는 유전연기를 행하거나 무명(無明)을 단멸 시키고 나아가 유(有) 즉 5취온을 5무루온으로 변형[轉依]시키는 환멸연기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연생(有緣生), 즉 유(有)가 있으므로 생(生)이 있다는 것은 욕유 · 색유 · 무색유의 3유 가운데 어느 하나의 존재, 즉 5취온의 상태가 있으므로, 즉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는 상태가 있으므로 태어남이 생겨난다는 것 즉 다른 일생을 받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5취온은 죽음으로 그냥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생으로 상속되고 유전된다는 것을 뜻한다.
유연생(有緣生)은 또한 이미 발생한 생이 있다면, 즉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여 받은 삶이 있다면, 즉 자신이 3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라면, 반드시 그 원인이 되는 유(有)가 존재한다는 것, 즉 5취온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순대고취(純大苦聚)의 상태의 즉 5취온의 상태의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생(生)은 각각의 유정(有情)이 각각의 유정의 종류로 갖가지 생에서 6취[趣] 가운데 태어나서는 온(蘊)을 일으켜 나타내고, 계(界)를 득하고, 처(處)를 득하고, 모든 온(蘊)을 득하고, 명근(命根)이 생기고 나타나는 것을 뜻한다.
(12) 노사(老死)
노사(老死, 산스크리트어: jarā-maraṇa, 팔리어: jarā-maraṇa, 영어: aging (old age), decay and death)는 생연노사(生緣老死)의 연기관계에서 한 지분을 이루고 있는데, 생연노사는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는 뜻이며, 또한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최종적으로 순대고취(純大苦聚) 즉 5취온이 형성[集]되어 생사윤회가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잡아합경” 설명에 따르면, 노사(老死)는 노(老)와 사(死) 즉 늙음과 죽음을 통칭하는 말이다.
노(老) 즉 늙음은 털이 하얗게 세고 정수리가 벗겨지며, 가죽이 늘어지고 5근[根]이 문드러지며, 4지[支]가 약해지고 등이 굽어지며, 머리를 떨어뜨리고 끙끙 앓으며, 숨이 짧아져 헐떡이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몸이 검게 변하며, 온몸에 저승 꽃이 피며, 정신이 희미해져 멍청히 있으며, 거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해지는 것을 말한다.
사(死) 즉 죽음은 각각의 중생(衆生)이 해당되는 무리로부터 사라지고 천이(遷移)하며, 몸이 무너지고, 수(壽)가 다하고, 따뜻한 기운[火]이 떠나고, 명(命)이 소멸하여, 음(陰: 5온)을 버릴 때가 온 것을 말한다.
생연노사(生緣老死), 즉 생(生)이 있으므로 노사(老死)가 있다는 것은 태어남이 있으면 반드시 늙음과 죽음이 있다는 것으로, 열반에 이른 상태가 아닌 한 생사윤회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이미 발생한 노사(老死) 즉 늙음과 죽음이 있다면, 반드시 그 기본 전제가 되는 생(生) 즉 태어남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연기관계를 통해 순대고취(純大苦聚)의 상태의 즉 5취온의 상태의 생사윤회가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연기경” 설명에 따르면, 노사(老死)는 노(老)와 사(死) 즉 늙음과 죽음을 통칭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