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간과 우주.......眞/4. 종교의 정의

종교론 (기독교)

오갑록 2014. 3. 20. 17:39

믿음 ......

       

      (참고자료)

            . 종교의 기원과 다원주의  :  http://blog.daum.net/yongsimyi/1596096

            . 종교비판적 차원에서의 종교의 정의

                                               : http://www.cwmonitor.com/news/articleView.html?idxno=43775

             .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철학 : http://hompi.sogang.ac.kr/theoinst/journal/journal_8/8-9.pdf


    도 이제는 믿음이 왜 소중한 지를 어느 정도 알만 할 때라고는 생각 하지만, 믿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로는 자신의 부끄러움, 그리고 종교집단 각각에 대한 떨치기 어려운 이런저런 의구심들은 그러한 믿음에 열심인 신도들을 선망하며 바라만 볼 뿐, 내가 선뜻 앞에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종교이던 간에 믿음은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며, 삶에서 꼭 필요한 인간 감정의 활동 영역임을 인정하면서, 나 스스로를 돌아보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럴까?

 

남들처럼 조건 없이 믿지 못하고, 그들을 한 발 뒤로한 자세로 바라만 보며, 의심하거나 부정하려 하는 기본 자세는 과연 옳은 처사인가? 그렇다고, 내가 자기주장이 뚜렷하여, 그럴만한 독불장군이 될 만한 위인이 아님도 인정한다.

 

우리 삶에서 믿음의 필요성, 소중함을 인정하고, 성실하게 믿음을 따르는 자들을 선망하면서,

종교란 무엇인지, 그 정의들에 관한 일반상식 수준의 자료들을 한 군데 모아서,  의 마음 속, 책꽂이에 꽂아  본다.

 

2014. 3.  .

오갑록

 

 

■  "슐라이어마흐"의 견해

 

 

       종교는 사변과 의지의 한계범주이면서 이들의 근거범주이다. 종교는 교양인의 체계적인 개념 틀 속에 갇혀질 수 없으며 오히려 이것을 체험하는 사람의 내면 가운데 생동적으로 작용한다. 종교만의 고유한 영역은 인간의 심정이 무한자의 적극적인 활동에 전적으로 사로잡히게 됨으로서 형성된다.

 

이러한 감동과 사로잡힘은 이성이나 의지의 몫이라기 보다 직관과 감정의 일이다. 신앙의 확실성은 무한자에 대한 신학적인 이해나 형식적 파악에 근거 한다기보다 생생한 실존적 체험에 근거한다.

 

인간은 경건한 믿음과 절대적 체험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넘어갈 수 있으며 전혀 다른 세계를 향해 개방될 수 있다. 무한자는 그를 향하는 인간의 자발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직관 되는 그의 적극적인 작용을 통해서만 접촉될 수 있다.

 

경건은 무한자에 대한 인식이 아니며 그를 향한 행위도 아니고 그와의 만남에서 일어나는 온 영혼과 마음의 움직임이다. 무한자에 대한 사변이 형이상학적이고 그를 향한 행위의 근본이 도덕이라면 무한자를 직관하고 느끼는 것이 경건과 종교이다.   

 

                                                                               슐라이어마흐의 '종교론' 중에서

                                                                               (Friedrich Schleiemacher, 독일, 1768-1834) 

 

 ■  종교의 정의

 

 

□  종교 (religion, 宗敎)

                                                                                                                             브리태니커

신성하거나 거룩하거나 영적(靈的)이며 신적(神的)인 것과 인간의 관계.

 

종교는 일반적으로 인간과 신(하느님) 또는 신.영들과의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여겨진다. 예배는 아마도 종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되지만, 일반적으로 도덕적 행위, 올바른 믿음, 종교단체에의 참여 등도 신도와 예배자들에 의해 실천되고 종교적 현인들과 경전에 의해 명해진 종교생활의 구성 요소들이다.

 

특정 종교체제의 예; 불교, 유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

 

. 종교

 

객관적으로는 특정 신앙을 전제로 그 신앙을 변증하고 옹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비판  종교의 정의적으로는 종교의 본질을 자료와 논리에 의해 파악한다는 뜻이다. 종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현상이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차원의 삶을 드러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현대에 이르러 보다 폭 넓고 치밀하게 발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종교현상의 문화적·역사적 자료의 수집과 정리, 종교 현상의 의미에 대한 탐구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전자를 위해서는 역사학을 비롯한 고고학·민족학·언어학·문헌학 등이 활용되고 있고, 종교경험의 구조·본성·역동성 등을 이해하려는 후자를 위해서는 심리학·사회학 등이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분야의 학문과 연계를 도모하면서도 종교에 대한 학문적 관심은 19세기 말엽 이후 종교학이라는 자율적인 학문분야를 확보하여 전개되고 있다.

 

          ('으뜸 종(宗)' '가르칠 교(敎)'. 즉, 세상의 으뜸 가르침이라는 뜻으로도 설명 함)

 

. 종교

                                                                                                                               위키백과

종교(宗敎)는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를 말한다. 종교인들은 주로 신을 비롯한 초월적인 대상의 존재 또는 세계에 대한 궁극의 진실, 사람은 어떠한 도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각자의 믿음을 갖고 있다.

 

종교와 관련하여 그 종교에 귀의하여 우러나오는 경건한 마음은 종교심(宗敎心) · 신심(信心) · 신앙(信仰) · 불심(佛心)이라 하며, 종교적 신앙에 따르는 마음가짐은 종교의식(宗敎意識)이라 한다. 기독교에서는 전례 또는 예전이라고 부르는 종교 의례(宗敎儀禮)는 종교에서 신앙의 대상을 예배하기 위한 여러 예식(Ceremonial: 의식에서의 성직자와 청중의 상징적인 행동과 시각적, 청각적인 상징) · 순서(Order: 고정된 순서) · 의식(Ritual: 말이나 노래 같은 음성을 표현되는 문서화된 의식과 기도문)을 가리키며 종교 의식(宗敎儀式)이라고도 한다.

 

. 세계의 종교

 

인류의 종교적 발전은 평행하게 시대를 따라 흘러왔다. 아직도 고등문화 속에 남아 있는 자연민족의 신앙은 그 후에 일어난 보다 높은 종교의 막연한 근저가 되었다. 마적 외포(魔的畏怖), 무격적(巫覡的)인 신빙(神憑), 마적 열광과 황홀한 춤과 원시적 신비, 그리고 주술적이고 신성한 행사 등의 감정을 비롯하여 거기에서 일어나는 정령신앙(精靈信仰)이나 죽은 사람에 대한 의례(儀禮), 영혼숭배와 토테미즘(totemism), 요술사와 주술사, 복술·점술, 청정(淸淨)과 부정(不淨), 유치한 행위나 신성한 행위, 원시적 금욕, 공희(供犧)의 신비, 주물숭배(呪物崇拜) 등의 표상, 그리고 자연주술과 모든 자연의 주적 영화(呪的靈化) 등의 표상은 종교 이전의 것들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부터 서서히 나타난 것에는 숭고한 신성, 신들의 숭배, 제사제도, 의례와 신전과 제사, 신성한 집단과 풍습 등의 표상이 있고, 또, 이런 표상에 속한 것으로서 신화, 우주에 관한 계도적(系圖的)인 의례의 우화(寓話), 신화적인 원시적 사변(思辨) 등이 보여주는 넓은 상상의 활동세계가 전개된다. 이런 모든 요소는 서로 매우 다르나 전혀 개별적으로 연락 없이 집합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서로 관련하고 집결하여 하나의 그물을 이룩하고 있기도 하여, 어떤 기후나 토지에도 놀랄 만큼 서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이런 유사성이 참으로 그 근본에는 통일적이고 합일적인 인간심리 일반의 기능이 있음을 쉽게 이해하게 한다.

 

자연적 신앙의 뒤를 이어 선종교(先宗敎)라고 부를 수 있는 보다 높은 것으로의 전이과정이 있다. 이 전이는 서양 및 그것을 규정하는 그리스 문화에 나타났다. 기원전 800년부터 500년에 이르는 중요한 기간에 신학이 신화학(神話學)으로부터, 그리고 로고스(logos)가 신화(mythos)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리고 신들에 관한 지식을 뜻했던 신학은 점차로 신에 관한 지식이 되는 동시에 형이상학의 최고점이 되기도 했다. 신앙은 신을 마적 외포의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켜 물리학과 신비사상의 요소를 결합시킨 우주론이 되었다.

 

예컨대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크세노파네스, 아낙사고라스 등의 물리학은 모두 우주론적인 신학이었다. 이 신학은 점점 신화적인 요소를 극복 내지 배제하고 나아가서는 신들의 세계를 신적인 것의 이념(Theion)에 종합하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절대자와 신성(神性)의 이념이 되었다. 따라서 신들은 그리스 비극작가(悲劇作家)들에게는 세계와 습관을 지배하는 통일적인 힘이었으며, 본래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생각에서만 의의를 갖고 있던 신이란 표현은 절대적 신성이란 이념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것과 동시대적인 평행은 극동의 문화인 속에 있다. 피타고라스가 교단(敎團)을 창시한 것이 기원전 약 530년이었는데, 중국의 공자는 약 470년에 죽었고 공자와 동시대의 선배에 노자(老子)가 있었다. 중국의 고대사 시대는 이들보다 이전에 3세기가 지나고 있었다. 동양의 발전이 서양의 그것과 다른 독자성과 개별성을 보여주나 그 차이는 동일한 종속(種屬) 내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도 얕은 신화적 단계의 극복이나 종교의 확연한 도덕화나 절대자에로의 정진(精進)이 있었다. 공자가 합리주의로 흐른 데 비해서 노자는 '도덕'으로 기울어졌다. 서양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주의적 유신론이 공자의 이론에 필적하고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가 노자의 도(道) 사상과 맞먹는다. 노자나 공자는 다 헤라클레이토스나 플라톤에서 인정되는 내적 신비의 빛을 말했다.

 

이스라엘도 이 세기에 여호와의 자연신화를 깨고 유일신을 찾았다. 엘리야(Elijah)로부터 제이 이사야(Isaiah)와 에스겔(Ezekiel)에 이르는 동안 종족적 종교로부터 개인적인 주관적 종교에로의 전이(轉移)가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 조로아스터(zoroaster)의 종교개혁 준비와 그 성과는 기원전 약 800년부터 큐로스왕 시대에 이르는 기간에 악마신앙과 다신교의 안개를 걷고 예언자적 신신앙(神信仰)과 도덕적 상반의 별견(瞥見)과 역사의 조만간의 종말에 관한 순수한 종교가 출현했다.

 

이 시대에 평행해서 고대인도는 혼돈된 공희(供犧)에서 바루나(Varuna) 신앙을 성립시켰다. 더욱이 우파니샤드 경전의 내용은 그리스 신학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 불타(佛陀) 시대에 일어난, 일체의 잡다(雜多)는 감각의 가상(假象)이며 무지(無知)에 지나지 않지만, 진지(眞智)는 운동·변화·성질(性質) 없이 시공(時空) 이외에 '제2자가 없는 유일자(唯一者)' 위에 나타난다는 사변(思辨)은 크세노파네스나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의 그것과 일치한다.

 

이것들은 모두 종교적 직관에 의한 신비적 몰아(神秘的沒我)의 특유한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인도의 바라문(婆羅門) 세계에서 그 사변(思辨)과 함께 실천적 종교생활이 발전하였다. 높은 관념의 발전보다 높은 종교에 한걸음 다가섰다. 구제(救濟)·해방(解放)·해탈(解脫)의 깊은 종교적 삼매(三昧)와 금욕적 실천과 생활태도에서의 세간(世間)과 자연적 존재양식을 멸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 분류

 

  . 아브라함 계 종교 : 가장 큰 그룹, 기독교(그리스도교, Christianity), 유대교(Judaism), 이슬람교(Islarm)

  . 인도의 종교 : 힌두교(Hinduism), 불교(Buddism), 시크교, 자이니교

  . 동아시아의 종교 : 샤머니즘, 유교, 도교, 신토(신도), 천도교, 까오다이교, 일관도

  . 이란의 종교 : 이란에서 비롯한 것으로, 배화교, 야즈다니즘

  . 아프리카계 아메리카의 종교

  . 부족 종교(Tribal Religion)

  . 신흥 종교

 

ㅁ 신학 (theology, 神學)

 

신이라는 낱말로 표현되는 "궁극적 실재"는 제1철학이나 존재론적 형이상학에서 연구되기도 한다. 각 종교마다 이에 해당되는 신학이 있지만, 학문체계에서 신학은 흔히 그리스도교 신학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교에서 신학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고, 새로운 상황에서 그 진리를 거듭 재해석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노력이다. 신학은 교회에 봉사하는 학문으로서, 성서와 교리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인간상황에 선포하고 변증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신학의 연구대상은 이성의 영역 안에서 온전히 해명될 수 없는 '궁극적이고 성스러운 실재'이지만, 그 탐구가 하나의 학문적 연구이기 때문에 신학은 인간의 시도이며, 시대상황과 역사성에 제약 받는다. 따라서 학문 일반과 마찬가지로 진리를 탐구하는 순례자로서 신학이 있을 뿐이다.

 

 

□  종교학 (science of religion, 宗敎學)

 

종교 현상을 객관적·비판적으로 연구하고, 특정 종교가 아닌 종교 일반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하는 학문의 총칭.

 

 

□  종교 (일본의 경우)

                                                                                                                   ウィキペディア

종교의 Religion 영어 어원은 라틴어 religio에서 파생 된 것이다. religio는 "다시"라는 의미의 접두사 re와 "연계"라는 의미의 ligare의 조합이며 "다시 묶는”라는 뜻으로, 거기에서 하나님과 사람을 다시 묶는 것으로 이해된다.

 

쥰이치(磯前順一)에 따르면 Religion이라는 단어가 처음 번역 된 것은 “미일수호통상조약(1858 년)”의 번역에서 "종지(宗旨) 또는 종법(宗法)"이라는 단어로서 쓰인 것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초기 사이에 사용 된 번역어로서 “종교(宗教), 종문(宗門), 종지법교(宗旨法教), 법문(教門), 신도(神道), 성도(聖道)” 등으로서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중 "종지(宗旨), 종문(宗門)” 등 종교적 실천을 포함한 단어는 "종법(教法), 성도(聖道)” 등 사상과 교리의 의미가 강한 단어보다 일반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은 많은 일본인에게 종교가 실천과 깊이 결부 된 것이었다는 것과 상통한다.

 

"종교"라는 말은 실천보다 교리의 의미가 강한 단어이지만, 쥰이치 의 설명에 따르면 그런 번역어가 결국 정착하게 된 배경에는 일본의 서구화 과정에서 겪게 된 외교적 절충과 엘리트 계층, 지식인 들 가치관의 서구화 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종교"의 용어는 1869 년 독일 북부연방과 체결 된 “수호통상조약 4 조”에도 기록이 있다. Religionsübung의 번역어로서 쓰인 것이 정착됬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종교 일반"의 의미로 사용되게 된 것은 1884년 간행 된 사전 "개정증보철학자휘(改定増補哲学字彙, 井上哲次郎)” 에 게재되고부터 라고 한다.

 

. 종교 정의

 

"종교 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가, 철학자, 종교학자 등에 따라 매우 많은 종교의 정의가 시도되어 왔으나,  "종교의 정의는 종교 학자의 수 만큼 있다 "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만 다룬 것만으로도 꽤 된다. 예를 들어, 제임스 류바(James H. Leuba)의 저서 부록에는 48 가지 정의와 이에 대한 코멘트가 작성되었으며, 일본 문부성 종무과가 작성한 “종교 정의집"에서도 104 가지를 들고 있다.

 

. 류바(Leuba) 정의 분류

 

류바는 종교에 대한 다수의 정의를 세 그룹으로 분류하고있다. 즉 주지적(主知的, intellectualistic) 관점에서의 정의, 주정적(主情的 , affectivistic) 관점에서의 정의, 주의적 혹은 실천적 (主意的. 実践的, voluntaristic or practical) 관점에서의 정의의 세 가지이다.

 

. 주지적(主知的, intellectualistic) 관점에서의 정의

대표적인 고전적 정의, 예로서  막스 뮐러의 “무한 한 것을 인지하는 마음의 능력”을 들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는 클리포드 기아츠의 “존재의 일반적 질서에 관한 개념의 체계화”가 있다.

 

. 주정적(主情的, affectivistic) 관점에서의 정의

슐라이어마흐 (Friedrich Schleiemacher,1768-1834)에 따르면 "오직 의존감정",  마렛 (Marett, RR) 등도 다른 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합리주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종교의 원형을 정서주의 (emotionalism)에서 논한다.

 

. 주의적 혹은 실천적 (主意的 . 実践的, voluntaristic or practical) 관점에서의 정의

CP 티레에 따르면 "인간의 원초적, 무의식적으로 타고난 무한한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세계종교사전"에는 위의 3가지 류바의 분류.분석에 근거하여, 종교를 성립시키는 기본요소를 초절적(超絶的) 또는 초월적(超越的) 존재 (신(神), 부처, 법(法), 원리(原理), 도(道), 영(霊) 등)을 인정하는 특정 관념임에 근거하면서, 종교와 인간의 힘과 자연의 힘을 초월한 존재를 중심으로 하는 관념이며, 관념 체계에 근거한 교리, 의례, 기관, 조직 등을 갖춘 사회집단 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로서, 종교는 초월적 존재(신(神), 부처, 법(法), 원리(原理), 도(道), 영(霊) 등)에 대한 믿음, 초월적인 것과 개인의 관계,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개인의 태도(믿음 등), 신앙에 기초한 활동(예배, 순례 등), 조직.제도(교회, 사찰 제도 등), 신자로 형성하는 사회시설(교회당, 사원, 사원 등) 등등이다.

 

사전(広辞苑)에는 신 또는 어떤 초자연적 절대자 또는 신성한 것에 대한 믿음. 행사라고 정의 하고 있다.

 

 

 

□  종교

                                                                                                                                  엔하위키

. 개요

 

宗敎, Religion. 신성하거나 거룩하거나 영적(靈的)이며 신적(神的)인 것과 인간의 관계. 종교가 반드시 뭘 믿거나 집단을 이뤄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한자 '종교'는 불교가 자신들의 가르침을 으뜸 가는(宗) 가르침(敎)이라고 칭했던 데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어떤 형태로나 인류와 함께 해왔으며,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해왔다. 물론 선사 시대에도 존재했으리라 추정된다. 실제로 80만년 전에 지구에 있었던 네안데르탈인들에게는 원시적인 종교형태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통계적으로 세계 인구의 84%가 종교를 믿고 있다. 북, 동유럽, 미국의 동서부 같은 극히 일부의 지역을 제외하면 의외로 아직도 지구는 종교인의 행성인 셈이다.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시대의 소련이 무교였다는 걸 감안하면 정말 엄청나게 높은 수치. 하지만 공산주의국가에는 마찬가지로 강력한 교조주의가 있었으며 그런 점에서 상당히 종교적인 면이 강했다. 물론 소련은 종교 국가는 아니었다. 종교적인 면이 강하기는 했지만. 중국의 경우 알게 모르게 종교인이 많으며 인도, 아프리카 같은 곳에 워낙 종교가 위세가 강하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사실은 무신론자들 중 과학자, 지성인 등등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무신론자가 많아보이는 착시현상이 보이는 것. 과학자들 중 (기독교의) 신을 믿는 비율은 미국에서도 10% 미만이며 영국에서는 5% 미만이라고 한다. 통계조사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종교관련 단체에서 조사한 통계에서도 유신론자가 높은 경우 40% 내외로 나타나 과학자들의 경우 유신론자의 비율이 크게 봐도 과반수를 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자들 중에서 유신론자의 비율이 낮은 것은 과학자가 된 이후에 종교를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종교적인 사람들보다는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과학자가 되는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소속된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일코를 하는 무종교인/무신론자들도 있다. 많은 사회에서 무종교인/무신론자들은 안 좋게 보는 경향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충 해당 사회에서 가장 융성한 종교를 믿지만 상세는 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극단주의자들이 종교와 사상에 관련 없이 상대방의 침묵을 강요한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가 다른 사상등에 비해서 극단으로 흐르기가 쉽다.

 

. 사회속의 종교

 

신앙이나 믿음은 인류가 모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해왔다. 자연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경험을 문자의 형태로 보관할 수 없었던 시절엔 번개나 화산폭발 같은 자연활동은 인간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범주에 있었다. 또한 짐승들의 습격이나 외적의 침략도 한정된 정보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으며, 이는 불확실한 미래로 인한 두려움으로 이어졌다. 이에 인류는 최초의 종교 형태라 여겨지는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형태로 자연 현상을 이해하고, 여기에 구전으로 내려오는 유용한 경험 등을 접목시켜 공동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지식을 전승시키는 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종교의 본격적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게 없으며, 사람만 종교를 가진 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추세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1) 종교를 가진 집단이 없는 집단보다 유리해서, 2)집단의 생존에 유리한 특징이 종교를 만들게 해서, 3)바이러스가 퍼지듯이 그 개념이 부모-자식으로 연결돼서. 물론 3가지 중 어느 것도 아직 결정적이지는 못하다.

 

인구와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게 되고,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인 수렵 경제에서 농경으로 변환하게 되자, 사회체제의 보호장치로서, 혹은 사회체제의 강제장치로서 종교에 어느 정도의 권능과 사회적인 책임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문자의 발명으로 지식이 쌓이게 되자 종교는 한층 체계를 잡아나가면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권위를 가지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대 그리스를 중심으로 과학지식이 발달했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을 설명할만한 충분한 기반 지식이 부족하고, 이를 연구할만한 인재를 기를 교육적 기반이 부족하여 과학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성립하는 근대까지는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서 종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부분은 흔한 오해라는 분석도 있는데, 고대 그리스에서도 초보적인 방법론적 자연주의가 존재했기 때문에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의 영향으로 이러한 생각을 가진 학자들이 죽거나 추방되는 바람에(...) 물론 기독교의 영향만 있었던 건 아니다. 로마 말기는 분쟁이 끊이지 않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학문에 어느 정도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고 종교가 거기에 결정타를 먹였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히피티아 같은 사례도 있지만, 종교만의 영향으로 학자들이 죽거나 추방됐다고 말하는 건 왜곡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정치나 외교 같은 복합적인 문제이다.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종교는 인류 문명이 발달할수록 문화 및 행동 양식에 끼치는 영향이 점점 커졌는데, 집단 내에서 종교는 사회적인 불만을 해소하고 체제를 안정시키며 도덕, 양심, 박애, 사랑 같은 장치를 통해 사회적인 약자를 보호하는 복지 기능을 겸하기도 했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의 오류가 있다. 사실 국가의 성립 이전에 원시사회에서는 재화의 공동분배가 기본적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나눌만한 재화 자체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특권층이 없기는 했으나 수렵채집민의 영양상태는 농경민보다 좋은 편이었다. 또한 종교가 도덕을 뒷받침한다는 근거는 오늘날 일부 철학자들에 의하여 비판 받고 있다. 도덕은 당연히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가변적인 상대적 사회 규범이기 때문에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뒷받침될 수밖에 없으며, 종교에 도덕과 관련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도덕을 종교가 받아들인 것이지 종교가 도덕을 만든 게 아니라는 것. 가령 기독교의 성경이 현대의 도덕과는 어울리지 않는 구절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에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도덕적인 행동이었다. 오늘날 노예제를 지지하는 종교는 없어졌겠지만 과거에는 노예제를 지지했었으며, 사회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는 움직임이 커지자 종교도 그 움직임을 따랐다. 즉, 종교가 도덕의 근원이라고 볼 수 만은 없으며, 오히려 당시의 도덕률을 종교가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국가가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장기간 복지 정책을 행한 것은 로마가 최초이며, 로마가 멸망한 이후 복지는 한동안 사라졌다. 종교가 빈민을 구제하는 역할을 조금 하기는 했지만. 이후 2천년 가까이 종교활동은 봉사에 상당히 기여하며, 20세기에 와서야 공산주의 등의 형태로 다시 국가가 복지 정책을 행하는 주체로 돌아오게 되었다. 비록, 봉사 자체는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교세 확장에는 효과가 별로 없기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 종교의 이미지를 좋게 포장할 수 있으므로 도움을 받는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고 반대로 보람이나 자기 만족 등이 이유인 경우도 많다. 이는 일본의 종교 선교, 봉사의 예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사회 체제의 일부로서 자리 잡게 된 종교는 여타 사회제도가 그렇듯 선 기능 만이 아니라 악 기능도 많이 가지고 있다. 종교간의 분쟁은 유럽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정도이며, 현대에 와서도 1990년 냉전이 끝난 이후부터 본격적인 분쟁의 원인으로 부각되고 있다. 특히 2000년에 터진 911 테러는 종교분쟁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특이 점으로서 매우 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한번 종교의 가르침으로 채택된 사실은 전제 군주의 명령처럼 절대적 진실이 되어, 이에 대한 반론을 탄압할 경우 결과적으로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곤 했다. 갈릴레오의 지동설 및 종교개혁당시의 상인계급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또한, 종교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향상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가령 바티칸은 1960년대가 되어서야 인권을 인정했으며, 그 이전까지 많은 신학자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은 신성모독이라고 여겼다. 정작 인권을 향상시킨 사상은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인권과 민주주의를 부정하지 못하게 되자 그들이 항상 인권과 민주주의의 편이었던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와서 종교는 상당수의 선진국 국가에서 옛날만큼 힘을 못쓰고 있는데, 이는 과학의 발달로 이전에 종교로 밖에 설명되지 않았던 자연현상이 밝혀짐에 따라 종교의 권위가 약해지고, 사회체제의 변화로 인해 과거의 풍습과 제도를 유지하는 오래된 종교의 관습체계가 매력적이지 않게 변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 종교는 최소 2천 년이 넘는 동안 농업사회, 봉건제, 전제 군주의 도구로서 기능 해 왔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수직적인 명령구조와 체제를 갖춘 경우가 태반이었다. 종교가 민중의 편에서 지배계급의 탄압에 맞서 싸울 때도 있었으나,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는 순간부터는 종교가 지배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 시키는 도구가 되기도 했고, 혹은 직접 지배권을 행사할 때도 있었음을 기억하자.

 

왕권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거나 신의 대리자임을 부정하는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과학이 발달하여 종교가 가르쳐오던 사실이 틀렸다는 것이 차례차례 밝혀지자 현대에서의 종교의 권위는 하락하게 되었다.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종교에 대한 열망이 줄어들고 후진국일수록 종교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이 강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비교적 오랜 기간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하였고 먹고 사는데 큰 걱정이 없으며 교육수준이 높으니 종교에 연연할 필요도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종교를 사용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성 종교들은 수직적인 명령구조로 인해 종교가 현대사회에 맞춰 변하는 것을 방해 받는 사이, 신흥종교는 이 틈을 타 현대 문명에 더 밀접한 신앙과 규범을 내세우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고, 그 중엔 사이비종교도 급속히 퍼져서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되고 있다.

 

종교의 미래에 대해선 가타부타 설이 많지만 대부분 미래에도 어떤 형태로든 존속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다만 북유럽쪽의 사례를 보건대 오늘날의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양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한국에서 제사를 지내지만 거기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 것처럼. 종교가 탄생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인 미래에 대한 불안은 라플라스의 악마가 공상 속의 존재임이 확실해져 해소할 길이 없는 만큼, 이 불안을 달래 줄 종교는 앞으로도 인류의 역사와 함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개인과 종교

 

어느 종교든 간에 공통적으로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하게 살면서 다른 사람을 위하라고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착한 일이란 그들의 신을 위하는 것이며 나쁜 짓이란 그들의 신에 반하는 짓이라는 숨은 뜻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탈레반에게 이교도를 죽이는 것은 도덕적이고 착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란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에 한정된다. 물론 오래 버틴 종교는 그런 성향이 비교적 약하긴 하다.

 

인류의 역사 이래 종교는 넓게는 세계구급 전쟁부터 시작해서 좁게는 키배를 유발하는 최강의 떡밥 자리를 굳건히 유지하고 있으며, 이 지위는 세계대전 따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다른 요소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고 있다. 종교가 꽤 오랜 세월동안 존재해왔으니, 어쩌면 세계대전보다도 더 클지도 모른다. 특히 이걸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등쳐먹는 정말 나쁜 놈들도 많다.종교 제쳐두고 인류가 편가르기 좋아하는 족속이기도 하고.

 

고전 종교의 경우 도그마의 설정, 즉 중심이 되고 기본이 되는 명제를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가르침이 존재하고 이에 대한 강한 믿음이 따르며 신도들간의 유기적인 집단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현재에 와서는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는' 믿음과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유기적인 집합체를 종교, 종교집단으로 보고 있다.

 

비록 일부 철학자들은 여전히 종교를 정의할 때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빼먹지 않지만 이제 많은 학자들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을 종교의 정의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많은 신흥 종교가 초자연적인 존재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렇게 할 경우 종교의 정의가 너무 막연해진다는 지적도 있다.

 

종교학자 찰스 킴볼(Charles Kimball)은 종교의 타락을 경고하는 다섯 가지 징후로

  . 절대적인 진리 주장,

  . 맹목적인 복종,

         . 이상적인 시대 확립,

  .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

         . 성전(聖戰) 선포를 각각 꼽았다.

 

참고로 주체사상이 여기에 딱 들어 맞는다. 이해하기 힘들면 그냥 사이비 종교나 광신도를 떠올려보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밤 되면 창문 열고 아무데나 둘러보면 된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중에 1번과 2번은 대부분의 종교가 가진 특징이기도 하다. 다만 이 아저씨가 전형적인 서양인이라선지 이슬람교를 대놓고 디스 하는 게 엿보인다.

 

한편 동물들도 무리 지어 생활하는 종들은 유행가 같은 그들만의 문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종교라고 볼 수 있는 행위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무리 지어서 행동하는 동물들도 종교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인류는 네안데르탈인에서부터 종교와 비슷한 개념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중국에서 발생한 도 계열의 사상(유교, 도교 등)은 종교가 아니라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다만 동양은 서양과 달리 모든 학문에 세세한 구분이 없었다는 걸 감안하고 보면 유교에서도 충분히 종교적 색채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종교로 구분한다. 대한민국에서도 종교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은데, 배울 때는 문화일 뿐 종교는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宗敎"는 불교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높이기 위해 만든 말이고, 유교, 도교도 이것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을 종교로 칭했다. 이렇다 보니 "불교/유교/도교는 宗敎가 아니다." 하면 어원을 따져보면 매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된다. 宗敎의 원조들을 놓고 宗敎가 아니라고 하는 꼴이다. Religion을 宗敎로 번역하다 보니 생긴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서양식의 종교 개념은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불렀다. 삼국지 시대의 오두미도, 동학 농민운동 당시 전봉준을 현상수배하면서 내건 명분인 혹세무민의 도 같은 것이 해당된다.

 

항상 종교는 정치와 더불어서 논란이 되지만 문학에서 많은 영향력을 끼쳤으며 특히나 판타지 소설에서는 불가피하게 들어가는 요소 중 하나로, 세계적이었던 양대 판타지 소설가로 꼽히는 정말?  톨킨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반면 C.S 루이스는 독실한 성공회 신자이며 그의 대표적 나니아 연대기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소설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래서 거꾸로 무신론 성향에서 쓰여진 황금 나침반은 나니아를 잘근잘근 씹는다카더라.

 

어그로의 끝판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덕분에 지금까지 많은 철학자들이 종교가 없는 세상을 열망하기도 했다. 오경환 신부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 같이 인문학을 배운 사람들이 과학자들보다 무신론자의 비율이 높다고 하는데 이건 이미 옛날 이야기고, 과학자들의 무신론자 비율은 70%에 가깝고(20% 정도는 불가지론자) 유신론자는 10% 미만이라는 점으로 볼 때 학자들의 다수는 신을 믿지 않는 모양이다. 마르크스는 아예 인류의 마약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는데 정작 마르크스는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그다지 반종교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작 공산정권에서 일어난 일들은 마르크스와는 무관하다. 게다가 소련 같은 경우에는 헌법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도 했고(...). 물론 소련정부가 종교를 좋아한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종교의 주장을 잘 따져보면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것이 많다. 게다가 포교 방법도 이성보다는 감성을 공략하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쉬이 빠질 수 있는 게 종교다. 물론 자기만의 가치관이 잡혀 있는 과학자라면 스스로 빠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신자 과학자가 그렇게 창조과학 관련 집단에 들어갔다가 스스로 빠져 나는 경우도 가끔 있다. 남은 사람은 물론 비주류 중의 비주류에 검증도 되지 않은 사이비들.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이 결핍된 종교가 열등하다는 것은 아니며 정신세계에 관한 것만 주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심리학이 점점 발전하는데... 일부 철학자들은 심리학 같은 학문이 발전하면 종교는 문화의 일부 이상은 되지 못할 거라고 보기도 한다. 다만, 최근에는 심리학이 과학과 충돌한다는 주장도 있기는 한데 반대로 심리학은 조만간 인지과학으로 완전히 들어오게 된다는 주장도 있다.

 

 

 

 

■  중국 양수명(梁漱溟) 종교관    

양수명, 동서 문화와 철학”, .종현 .상현

철학사상 (2006) 중, 일부 내용을 요약함

  종교

 

.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 “사람들은 과거나 오늘날이나, 과학, 예술, 철학을 갖지 않는 인간사회를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없는 사회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 종교가 인간사회에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서구나 인도와 비교할 때 특별히 종교의 역할

     이 미약하였다는 점이 중국적 전통의 특징가운데 하나로 지적됨

 

. 풍우란(馮友蘭)에 의하면,

   . 철학으로서의 도가는 자연을 따르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설하여,

     자연에 역행하는 방법, 즉 불로장생술을 가르치는 종교로서의 도교와는 구별됨

   . 불가에도 종교적 신앙으로서의 불교와 철학적 학문으로서의 불학이란 두 측면이 있으며,

   . 중국의 지식층은 불교보다는 불학에 더 흥미를 가짐

   . 그리고 유가사상이 중국인의 생활관념 속에 깊숙이 배여 있어서 마치 일종의 종교처럼

     보이지만, 유가사상은 결코 종교가 아니라고 함

 

. 감각이 접할 수 없고 이지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이란

      . ‘이지를 넘어선 것’(外乎理智)

      .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 세상을 넘어서 있다는 ‘초월’은

      . 이지나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의미의 ‘신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

 

. 종교의 필요성

      . 정서.의지 방면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능

      . 지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월의 영역에서 입론의 근거를 찾고

        죄의식 및 후회감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에게 의지하여 새로운 길을 추구

 

 

  종교의 기능

 

ㅡ 종교가 인간생활에 필요한 이유

. 사람의 생활을 유지시켜 파탄에 이르지 않게 해주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점

. 사람의 정서와 의지 방면의 위로와 격려

. 하등종교나 고등종교를 막론하고 모두 똑같다고 할 수 있음

 

ㅡ 초월

. 종교의 특징 내지 종교적 이론의 성격으로 초월과 신비를 꼽음

. 초월이란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 세상을 넘어서 있다는 말이고,

. 신비란 이지 내지 이성적인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의미

 

. 무엇이 이 세상인가?

      . 바로 현재 우리의 지식세계, 즉 감각이 미치고 이지가 포괄하는 세계임

. 종교는 왜 그러해야 하는가?

     . 종교는 유한한 이 세상을 넘어서기 위해

     . 이 세상 밖에 있는 존재에 의지하게 된다고 함

     . 이 점에서 초월은 출세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

 

     . 지식의 측면에서는 이 세상을 넘어서 있다는 점에서 초월이고,

     . 정서와 의지의 측면에서는 이 세상을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출세라는 것

 

ㅡ 신비

. 신비란 무엇을 말하는가?

     . 대개 이지로 파악할 수 없는 관념 혹은 경험이 모두 신비

     . 각자의 눈과 마음에 작용하는 적극적인 의미는 말로 할 수 없음

 

. 종교가 왜 그러해야 하는가?

     . 정서와 의지가 편안하지 못한 것은 이지가 분명하고 명료하게 관찰하기 때문

     . 위험에 처한 경우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할수록 더욱 마음이 동요하고 편치 않음

 

ㅡ 초월과 신비의 결합

. 종교의 특징 내지 종교적 이론의 성격으로 간주되는 초월과 신비,

     . 즉 감각이 접할 수 없고 이지로 알 수 없는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은

     . ‘이지를 넘어선 것’(外乎理智)

     . ‘초월’은 이 세상이 우리의 지식이 이지 내지 이성에 의거하여 성립하므로

  . 이지 내지 이성적 인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라는 의미의 ‘신비’와 불가분의 관계

 

ㅡ 종교의 기능과 특징

. 정서.의지(情志) 방면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능과

. 이성적 인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입론의 근거를 마련한다는 특징을 가짐

  실은 동일한 사실의 양면일 뿐임

 

. 정서.의지 방면에서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가능

. 지식의 세계를 넘어서서 초월의 영역에 의지한다는 특징과

. 지식의 세계를 초월하지만 정서.의지 방면에서 위로하고 격려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특징

 

 

  종교의 필요성

 

ㅡ 약한 정서.의지의 위로

. 모든 신자들의 정서와 의지는 약함

     . 그들은 결국 스스로 무력하다고 느끼고 문제에 대처할 수 없어서 매우 자신이 없음

     . 그러나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정서와 의지가 강함

     . 그들은 기력에 여유가 있는 듯하고 문제가 없으며 매우 자신만만

 

. 자연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인간의 정서.의지가 약하기 때문에 종교가 필요한 것일까?

     . 인간의 지식이 증대되어 장차 그러한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종교가 불필요하게 될까?

     . 다른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

 

ㅡ 죄악에 대한 후회와 용서

. 기독교는 죄악을 참회하고 선으로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풍부하며

     . 생존과 화복의 문제에서 신앙심이 생기는 것은 아닌 것 같음

 

. 송학(宋學)을 공부하다가 나중에 기독교를 받들게 된 한 지인의 사례를 들었음

       "그는 스스로 약하고 작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죄악을 자각했다. 그는 겁내고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그는 생존과 부귀를 구한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선하고 밝은 생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과거에 저지른 죄악을 씻어버릴 방법도 능력도 없을 때,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는 마음을 떨쳐버리고 광명을 얻어 새로운 생명을 열고 새로운 길로 들어서서 하나의 새로운 인격이 되는 것은, 용사가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직 상제에게 호소하여야 하고 그래야 비로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그는 상제 (존재의의)가 여기에 있고 종교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말이 사실이며, 기독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체로 모든 대종교가 다 사람들에게 이런 위로를 준다고 깊이 믿었다."

 

. 이 사례가 종교가 지금껏 인류에게 준 도움 가운데 가장 큰 것 가운데 하나임

 

. 스스로 미약하고 왜소하다고 느끼고 두려워하는 것은 문화의 진보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 사람이 죄악을 자각하고 스스로 후회하는 것은 문화가 진보한다고 사라질 수 없음

     . 태어나면서부터 죄악이 있다고 자각하는 것은 변할 수 있지만,

     . 문화가 진보함에 따라 더욱 심해질 수도 있음

 

. 스스로 후회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진실로 후회한다면 참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음

     . 이때 그가 자신을 용서할 수는 없고 스스로 용서하더라도 소용이 없고,

     . 죄를 지은 사람이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은 소용없음

     . 오직 상제에게 그 모든 것을 용서 해주기를 구해야만 비로소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고,

       상제가 그를 도와 새롭게 해야 광명을 느낄 수 있게 됨

 

. 양수명은 여기서 신앙의 동기 문제를 논하고 있음

 

ㅡ 인생 허무감의 극복

. 인생이 공허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은

     .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 외면세계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종의 착오

     . 인간이 아무리 이해타산을 정교하게 한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는 그러한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고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고 보고 있음

 

. 그의 견해로는, 오직 이 세상을 벗어나는 출세의 방법만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고

     . 종교만이 생을 활발하고 용맹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며

     . 종교가 고양시키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자기희생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도 아님

 

ㅡ 정신생활.영성생활

. 인생은 그 자체로 존재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데,

     . 생에 대한 공허감은 바로 인생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생겨남

 

. 그와 같은 이지의 이해타산을 버리고

     . 직관에 의지하여 우주와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데,

     . 러셀의 영성생활이나 오이켄의 정신생활이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고 보았음

 

. 그것은 인생의 공허감을 극복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는 하나의 방법인데,

     . 양수명은 그와 같은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직 종교만이 생에 활력을 주어

     . 용감하게 분투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실을 입증해준다고 주장함

 

 

  불교의 문제의식

 

ㅡ 싯다르타의 사문출유

. 경전에서 불타가 출가하기 전에 인생 문제를 발견하고 마음이 동요되어

  좌우를 물리치고 간단없이 사색한 것은 네 차례 - 싯다르타의 ‘四門出遊’

 

     . 첫째 문제는 모든 중생(有情)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 살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거기서 비롯되는 고통

     . 자비와 불살생의 계율을 제정한 이유임

 

. 양수명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체를 살상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더욱이 본능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금수나 벌레는 말할 나위도 없음

     . 그와 같은 고심과 고통은 이 세상에 사는 한 어찌 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는 전혀 위로 받을 길이 없으며,

     . 유일한 해결방안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일(出世)뿐임

 

. 그는 바로 이러한 문제와 그에 대한 불교의 문제의식이야말로 종교의 진정한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주장함

 

ㅡ 무상의 문제

. 싯다르타의 사문출유(四門出遊) 중,

     . 늙고 병들고 죽는 세가지 문제, 곧 “중생의 생활은 모두 무상(無常)하다.”는 것.

     .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그 자체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늙음과 병듦과 죽음은 본래 매우 고통스런 것이지만,

. 고통의 소재는, 그 중점이 떠남, 즉 무상에 있다는 것으로 양수명은 보았음

     . 젊음을 떠나는 늙음이고

     . 건강함을 떠나는 병듦이며

     . 삶을 떠나는 죽음이라는 것

 

불교의 문제의식에서 종교의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는 양수명의 주장은 여기에 근거함

 

ㅡ 불교의 출세관

 

. 이지의 계산 내지 이해타산에서 나온 정서.의지는 공박하여 바꾸게 할 수 있지만

     . 직각의 진실한 정감에서 나온 정서.의지는 거부하거나 바꿀 수 없는데,

     . 인생의 근원적인 허무감, 즉 무상은 아무리 인간의 지식과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결코

       변하지 않고 소멸될 수 없는 엄연한 사실

 

. 그와 같은 문제가 존재하는 한 종교는 영원히 필요하다고 함

     . 또한 그 문제는 이 세상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으며

     . 오직 이 세상을 벗어나는 출세에 귀의할 수 밖에 없음

 

. 종교란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 세상에서는 궁극적인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우리의 감각적인

경험과 이성적인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과 신비의 영역에서 해답을 찾아 정서.의지의 면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함

여기서 양수명은 초월과 신비가 바로 불교의 출세와 동일한 것이라 파악하고, 종교의 진정한 필요성을 불교의 문제의식에서 찾은 것이다. 그는 출세의 경향을 종교의 욕구와 동일시하고 있음

 

 

  종교의 억압

 

. 종교 신앙이란 일반적인 이치로 평가할 수 없으며 종교 신앙의 대상은 절대적인 존재

     .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숭배해야 하며

     . 구속력이 강하여 동시에 다른 것을 신앙할 수 없고 개종하기도 어려움

     . 그것들이 모두 사람의 개성을 굴복시키고 억압한다는 사실로 귀결됨

 

. 일반 상식적인 사고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배척될 것들을 신자들이 신앙하는 이유는

     . 정서.의지가 약하고 편안하지 못하여

     . 귀의처를 찾아 자신의 운명을 맡기려 하기 때문

 

. 양수명에 따르면 이는 단지 지식 면의 욕구와 경향을 억누른 것이 아니라

     . 실로 인간 자신을 억압하고 굴복시킨 것이라고 봄

     .  고등종교나 하등종교를 막론하고 이 점에서는 같다는 견해

 

ㅡ 무지와 종교

. 종교는 우리의 무지와 연관되어 있음

     .  초월과 신비란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된 세계를 넘어서 있는 것,

     . 이른바 ‘이지를 넘어선 것’(外乎理智)

 

. 그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함

     . 하나는 진정 알 수 없는 게 아니고 단지 지식이 미치지 못할 뿐인 경우

     . 가령 고대인들이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현상에 대한 무지

 

     . 다른 하나는 우리가 모르는 것에 진정으로 알 수 없는 부분이 포함된 것

     . 가령 기독교.이슬람교 등에서 신앙하는 절대자로서의 신이 그러한 경우에 해당

     . 우리의 인식이 발달하고 지식이 증대된다고 해도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

 

ㅡ 종교의 가능성

 

. 종교란 우리의 지식으로 구성되는 이 세상에서는 궁극적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식의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과 신비의 영역에서 해답을 찾아 정서.의지의 면에서 위로와 격려를 얻게 하는 것

 

. 그는 종교의 존재 가능성을 종교와 철학이 결합된 인도적 전통에서 발견

     . 종교가 인도에서 가장 흥성하고 고도로 발달하였다고 보았음

     . 특히 인도 종교의 동기에 주목함.

     . 여타의 종교는 사람의 연약한 정서.의지에 기대어

        개성을 굴복시키고 억압함으로써 자신을 정립하지만,

 

. 인도의 종교는 정정당당하게 출세를 추구한다는 것

     . 개성이 억압되지 않아서 확고한 견해에 기초하여 토론하고 논의하고

     . 철학적 탐구가 해탈을 위한 실행으로 연결되고,

     . 종교적인 수행이 철학적 이론에 기초하여 이루어짐

. 즉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결합되어 종교가 곧 철학이고 철학이 곧 종교라는 것

 

 

  유학과 종교

 

. 종교를 괴상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됨

     . 그것은 단지 일종의 정서와 의지의 생활일 뿐

     . 인류생활의 세 측면 가운데 결국 정신적 측면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정신생활에서도 정서와 의지가 지식보다 중요

 . 정서와 의지가 표현되는 두 가지 생활이 바로 종교와 예술이고,

     . 종교의 힘이 항상 예술보다 더 큼

 

. 공자는 일반 종교가 가지는 한두 가지 요소가 없어 종교라고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지만

. 다른 고등종교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위대한 작용을 하므로, 양자를 합치면 바로 종교가 됨

     . 효제(孝弟)의 제창

     . 예악(禮樂)의 실행

 

. 종교는 어느 정도 출세(出世)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 이런 경향으로 인해 많은 괴상하고 신비한 것들을 요구하게 되나,

     . 공자는 자신의 이치에 의거하여 그러한 출세와 괴상한 것들에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음

 

. 공자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생각(생전과 사후 등)을 하는 것을 가장 원하지 않았는데,

     . 공자는 과거를 생각하고 장래를 타산하는 것을 주제넘은 생각이라고 여김

       이는 인의 생활 오직 현재의 직각으로 인식하는 생활과 크게 어긋났기 때문

     . 그래서 자로가 귀신과 생사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사람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 삶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하고 답하였음

       이것이 공자의 태도라는 것이 양수명의 견해

 

* 양수명

    중국 양수명(梁漱溟, Liang Shu-ming 1893-1988) :

웅십력(熊十力, 1884-1968)과 더불어 현대 신유학 창시자로 알려짐.

23세에 중학졸업의 학력으로 북경대학 교수가 되었으나, 1924년 여름 7년간의 교수생활을 청산하고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전통적 유자의 이상에 따라 이론의 영역에 머물며 강단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과 맞부딪친 실천적인 지식인

 

“동서 문화와 철학”은 양수명의 출세작이자 대표작, 현대신유학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고 문화보수주의로서 학문적 정체성을 정립한 저술

 

 

 

■  종교 체험의 구조와 본질

          . 왜 믿는가?, 왜 믿어지는가?

 

                                                                                                “삶과 철학”,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인간 실존의 특질들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태도는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초월한 모종의 지식과, 세속의 규범과 법제가 보장하는 한계 너머의 안정성을 무제약적으로 욕구하고, 종교는 그러한 인간 삶의 욕구들에 대한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대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 대답들은 과연 인간 실존의 기본요소, 즉 우연성, 무력성, 그리고 결핍에서 파생되는 문제, 예를 들어 인간의 운명, 욕망과 좌절, 정의와 죄악, 고통 및 죽음에 대해 진정 의미 있는 대답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그와 같이 받아들여지고 획득되는 근거와 통로, 이른바 종교체험은 어떤 구조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절박한 문제에 부딪쳤을 경우, 통상 관습적이고 경험적으로 가능한 해결 조건에 구애 받지 않고 무제약적으로 그 해결 방안으로 여겨지는 일체의 것에 다가간다. 사실상 인간은 파악할 수 없는 신비나 절박한 위기 상황에 직면 할 경우, 고독감과 무력감에 휩싸이며 압도적이고 위험하고 무관심한 세계에 나약한 존재로 내던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의식은 유기체적 보존마저 위협당하는 극한 상황에 이르면 주어진 제한성을 초월하는 반응 기제 또한 갖추고 있다. 종교적 체험의 단초는 이와 같이 의식 또는 삶의 극단적 위기 점에서 작동하는 자기 보존기제의 외화, 다시 말해 인간이 현실 삶의 사고와 사건을 돌파해서 한계 상황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그 한계점에서의 경험이다.

 

그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유기체는 말리노프스키(B. Malinowski)가 언급했듯이, “이 한계점에 직면하면 자동적으로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고 그로부터 연원 하는 행위와 신념이 발생한다.” 이 강렬한 반응은 비상하고 강력한 힘을 동반하며, 임의적이고 신비로우며 매혹적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념과 행위는 “절대적인 의존”과 “지극한 존경”과 놀랄만한 “경이감” 그리고 어마어마한 “자기몰입”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곧 신성(神聖)과 접촉하는 계기로서 초월성의 체험이자, 비록 경험 속에서 일어나지만 경험을 초월하는 반응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종교 체험이다.

 

로크디유(E. Rochdieu)가 말했듯이 이와 같은 신성의 체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와 매혹, 두려움과 사랑을 느끼게 하고, 그 자신 무언가 운명에 사로잡혀 있다거나 파묻혀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줄 뿐 더러, 베버(M. Weber)가 언급했듯 신성에 대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의무감까지도 수반하는 카리스마 관계를 성립시킨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 가뭄, 홍수, 태풍 등 자연의 비예측성, 또는 무한한 우주공간이 보여주는 장엄함과 신비로운 위압감 등은 평탄한 일상 생활의 배후에 강력한 힘의 대행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더구나 사회의 제도화 된 관계와 문화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욕구에 차디차게도 무관심한 세계”와 그에 연원 하는 비정함과 냉혹함 역시 경험적 세계 배후에 있는 신성하고도 자애로우며 위력적인 그 무엇과의 관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저히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서 궁극적인 무력성을 끊임없이 경험하면서, 급기야 자기 보존의 한계점을 인식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관습적인 대응 방식이나 경험적 합리성과 전혀 무관하게 그 절박한 희구의 체계를 신성하고도 위력적인 초월적 실재로 전화시켜, 그 절박함에 상응하는 무제약적인 확신으로 그와의 관계 속에 스스로를 내던진다.

 

물론 한계 상황에서의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초월적인 것에 대한 절대의존적인 욕구 보상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념무상의 해탈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불교에서의 깨달음이라던지, 무위 자연을 이야기 하는 도교에서의 가르침 등은 오히려 소극적 보상의 측면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그 의미에 대한 높은 수준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측면을 보여 주기도 한다. 한편, 샤르트르(J. Sartre)는 저주스럽도록 허무에 둘러싸인 인간 존재의 실존 자체를 자유로 규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교 체험의 초월성의 이면에는 사회적 삶의 좌절과 상실을 보상하고자 하는 일상적인 제반 욕망들이 자리잡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짐멜(G. Simmel)은 종교적인 관계 속에 들어감에 있어서조차 인간은 현재 이미 존재하는 정상적인 일상 관계에서의 태도와 느낌으로 그것을 표현하며, 사회에서 이미 존재하는 사회 관계에서의 인간 관계를 모형으로 삼아 그들의 신 또는 초자연적인 세력, 혹은 초월적인 다른 개념들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말한다. 종교적인 이유로 말미암은 죽음, 이른바 순교조차 이 생에서의 사회적. 생물학적 삶의 과정에서 인지된 가치와 생명의 영속적 존속에 대한 확신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순수한 자기희생이라는 죽음 조차도 삶의 과정에서 흡취 된 사회적 가치관에 기초한 총체적 자기보존 욕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종교체험의 본질로서의 초월은 경험적. 현세적 욕구의 결핍을 “보상 의식 기제”를 통해 완전한 타자로부터 보충하여 자아의 욕망 구조상의 균형 상태를 보존 하고자 하는 현세적 욕망의 또 다른 양태라 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에서 뒤르켐(E. Durkheim)은 초월자가 갖는 이른바 신성의 속성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대상물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대상물에 투여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초월자의 개념을 한계 상황에서 반응하고 발생하는 일종의 사회적 경험의 주관적 침전물로 파악하는 관점은 이제 종교 체험의 대상으로서의 초월적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에 있어 “투사(投射)” 개념을 핵심적으로 부각 시킨다.

 

종교의 관념적인 내용을 인간의 투사로 파악하는 입장의 대표적인 사람으로 포이어바흐(L. Feuerbach)를 들 수 있다. 그는 종교나 하나님의 개념 자체가 “인간의 가장 오래 된, 자기 지식의 간접적인 형태” 라 주장하고, “인간은, …… 이것은 종교의 신비다. …… 그의 존재를 객관적인 것에 투사한다. 그런 다음에 주체로 전환 된 자신의 투사된 이미지로 자신을 객체로 만든다. …… 하나님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추상된 인간의 가장 고차원의 주체이다” 라고 말한다.

 

투사의 관점에서 프로이트 (S. Freud)를 빼 놓을 수 없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선 종교는 “인간의 나약함을 참을 수 있게 만들기 위한 필요성에서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반응하는 행위 양태 또한 과거 상황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배운 적절했던 방식을 현재 상황에서 재연하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유아기를 재연하는 것이다. , 종교는 유아기적 투사가 그 원형이다. 유아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 두려움으로부터의 보호 또한 아버지로부터 이루어짐을 체험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두려움과 경외감을 일으키는 일체의 자연의 힘 또는 초월적 신성을 인간의 이미지로 만들어 내고 그것에 아버지의 특성을 부각시킨다. 신을 공포와 존경과 자애로움을 수반하는 “완전한 타자”로 창조하고, 그에 대한 확신과 의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무력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미 확신의 내용과 실제와의 연관성 자체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로이트에게 종교는 “환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교는 인간의 사회적 부적응, 욕구불만의 상황을 최소한 견딜만한 정도로 완화 시킴으로서 사회적 통제를 도와주는 것이고, 그러한 면에서 종교는 “많은 성취”를 이루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신성이란 원칙적으로 윤리적인 개념에 중립적이거나 별개의 개념이다. 때문에 종교가 사회적 삶의 과정에 깊숙하고도 광범위하게 자리 잡힌 사회가 반드시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현재보다 종교적 교리가 무한정 강했을 때 더 행복했다고 볼 수 없으며, 더 도덕적이었다고 볼 수 없다”고 했다.

 

 

          

                                         

■  존재론 (存在論. ontologia)

                                                                                                    인용: 철학의 주요 개념중에서

 

□  ‘존재론’ 개념의 형성

 

      존재의 원리와 인식의 원리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각각 ‘존재론’, ‘인식론’이라고 부른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란 어떤 특정한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적으로 ‘존재한다’는 술어가 속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존재론의 대상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인 한, 바로 그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인 까닭(이유, 원인, 근거, 목적)의 탐구가 된다.

 

도대체 존재자는 왜 존재자인가? 존재자를 존재자이게끔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 관련하여 사람들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드는 근원적인 존재자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 근원적인 존재자에게 ‘신’(theos)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그래서 ‘철학’의 문제는 신학(theologia)의 문제로 전이되었다.

 

이제 ‘존재론’은 ‘존재자 일반에 관한 학’ 혹은 일반 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의 통칭으로 사용되었다. 칸트(I. Kant, 17241804)는 플라톤(Platon, BC 427347) 이래 데카르트(R. Descartes, 15961650)까지 ‘학문’과 동의어로 쓰이던 ‘철학’(philosophia)을 여타 과학들과 구별되는 전문 학문으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세분함으로써 존재론의 대상 영역을 확정하였다.

 

 

□  존재론의 문제와 쟁점들

 

□  존재론적 물음

 

철학자는 어떤 것이 무엇이 됐든, 그것이 꽃이든 새든, 세포든 H2O, 삼각형이든 용이든, 그것이 ‘무엇’이며,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임을 보고, 어떤 것이 됐든 그것을 무엇이게 하고, 있게 하는 근거, 원리를 묻는다. 그것은,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공기는 어떻게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떤 것은 왜 ‘무엇’(본질, essential)이며, ‘존재’(existential)하는가를 묻는다.

그것은 어떤 한 사물의 본질과 존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과학적 물음의 대상이다), 존재자 일반의 본질과 존재를 묻는다. 이것이 존재론의 근본 물음이다.

 

어떤 것은 도대체 어떻게 무엇일 수 있으며, 있을(존재할) 수 있는가?

 

“왜 도대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存在者)이 있는가?”로 정식화된 존재론의 물음을 우리는 라이프니츠에서 발견하고, 이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또한 하이데거에서(Heidegger) 볼 수 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무엇인 것(存在者)보다 더 간단하고 쉬운데, 왜 사물들은 존재해야만 하는가?, 이것은 ‘형이상학의 기본 물음’으로서 물음들 가운데 물음이며, 최초의 물음이다. 그것은 존재자 전체를 향하여, 그것의 존재 이유를, 궁극의 존재 원인을 묻기 때문이다.

 

 

□  존재론의 물음과 관련된 쟁점들

 

. 본질과 존재 일반의 근거 혹은 원리

 

존재자의 무엇임과 있음의 규정은 존재자의 존재 방식이며, 그 방식은 근원적인 존재자로부터 유래한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에, 존재자의 존재 규정 일반은 존재자를 파악하는 인간 의식의 사고 방식이라는 견해도 있다.

 

모든 존재자는 본질의 면에서나 존재의 면에서 그 존재자가 그러한 원인을 가지며, 그 원인은 그 존재자 자신 안에 혹은 밖에 있으되, 그 원인 역시 어떤 형태의 존재자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어떤 것을 무엇이게도, 있게도 할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 모든 존재자의 존재 규정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시원(始源), 근원적인 존재자로서의 신()의 개념이다.

 

낱말로서는 똑같이 신(theos, deus)이라고 표현되더라도, 존재자의 유래를 자연 발생적으로 파악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있는가 하면, 그것을 의지적인 창조의 결실로 파악하는 유신론(有神論, theism)이 있다. 이 가운데 이신론의 신 개념은, 존재생성의 근거율 적용에서 하나의 예외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유신론의 신 개념은 초월성과 인격성으로 인해서 많은 쟁론을 불러일으킨다.

 

. 이신론의 신(神) 개념

 

무엇인가가 존재함은, 내가 존재하고 있으니 확실하다. 그리고 나를 나 자신이 있게 하지 않은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나를 있게 끔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를 존재하게 한 원인이 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존재자의 원인으로서의 존재자의 계열에서 최초의 존재자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모든 존재자의 근거이고 시원(始源)이다.

 

그러니까 이 최초의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 원인을 더 이상 자신의 밖에 갖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자기 원인’(causa sui)이라 일컬어지고, (theos)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유래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무엇에도 의존되어 있지 않은 ‘자족체’(自足體, autarkeia)이며, ‘그것은 자신의 본질상 자기 안에 존재를 포함’하기 때문에, ‘자기의 존재를 위하여 어떤 다른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실체’라고 불리고, 모든 존재자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므로 모든 존재자를 포괄한다는 뜻에서 ‘최고 완전 존재자’, 혹은 모든 존재자들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을 다갖추고 있다는 의미에서 ‘최고 실질() 존재자’라고도 불리 운다.

 

이신론의 신 개념으로써 세계의 발생을 설명할 때, 그런 견해는 보통 ‘유출(流出, aporroia, emanatio)설’이라고 불린다. 도(道)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으며, 둘은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老子, “道德經”, 四十二: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하나(一者, to hen, 하나님)는 만물이되 유일자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만물이 아니라,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一者, to hen)로부터 세계의 발생을 유출로 설명하면서, 그 ‘하나’를 단지 순서에 있어서 앞서는 것으로 보고 세계 내재적인 것으로 보면, ‘자연과학적’인 세계 생성의 설명이 된다. 그리고 이런 세계 생성의 설명에 대해서는, “그 ‘하나’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제기될 수 있지만, 이신론은 이 질문 자체를, 그 ‘하나’는 궁극의 원인이므로, 더 이상 그 유래를 물을 수 없다고 배제한다. 그러니까, ‘존재하는 것은 반드시 그 원인들 갖는다’는 존재 근거율에 단 하나의 예외가 인정되는 셈이다. 이 점 이외에는 유출설의 구성은 ‘논리적’이므로, 이신론에서는 ‘신의 존재 증명’과 같은 작업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사물(존재자)의 본질에 존재 방식은 그 원인에 따라 규정되며, 그 원인은 자연 안에 있다. 이 원인의 계열, 즉 존재자의 전 계열 자체가 자연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세계의 시원(始源)으로서의 ‘하나’는 의지와 지혜를 가진 존재자이며, 그 ‘하나’의 의지와 지혜의 질서에 따라 만물의 본질과 존재의 양이 정해진다고 파악한다. 이런 ‘하나’를 신이라고 부를 때, 그런 견해는 유신론이라고 일컬어지며, 이때 신은 인격성을 가지므로, 보통 ‘인격신’이라고 불리고, 인격신으로부터의 만물의 유래를 ‘창조’(創造, creatio)라고 일컫는다. 그래서 그 ‘하나’는 ‘하나님’(‘하느님’), 혹은 ‘창조주’라고 불리며,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자의 존재 원리로 이해된다.

 

  .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

 

창조주로서 ‘하나’는 모든 존재자들의 본질과 존재를 규정한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며, 악의 회개를 기뻐하고, 선에 대해서는 상을 내리고, 간절한 소원에는 응답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질들을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완전한 인격체’이다. 인격신으로 ‘하나’는 또한 자연 만물의 근원이면서도 자신의 피조물과는 위격(位格)에서 완전히 구분되어, 자연의 존재자들의 계열 중에 있지 않다. 말하자면 ‘초월자’이다. 초월적 인격체로서의 신의 존재 설명에는 초논리적 요소가 불가피하게 개입되므로, 계시(啓示)에 의한 확인이나 신앙(信仰)이 요구되고, 따라서 그것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이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하였다.

 

 

□  대표적인 사례

 

기독교 신학자들이 제시한 신 존재 증명 방식 가운데 철학사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방식이 셋이 있는데, 그것은 칸트에 의해서 각각 ‘존재론적 증명’, ‘우주론적 증명’, ‘목적론적 증명’ 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이다.

 

. ‘존재론적 증명’ 방식은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가 제안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바, 다음과 같은 삼단 논법의 형식을 빌어 정리해 볼 수 있다.

  신은 개념상 최고로 완전한 것이다.

완전성에는 존재도 포함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완전한데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전성의 결여를 뜻하므로, 자가 당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존재하지 않을 수없다. 그러므로 신은 필연적인 존재자다.)

 

‘우주론적 증명’과 ‘목적론적 증명’ 방식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가 제안한 다섯 가지 증명 방식 가운데 두 가지이다.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말하자면 우연적이고 가능적인 존재자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발생하고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그것의 존재 근거가 자기 밖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우연적인 존재자들의 근거로서 그것들의 밖에 하나의 존재자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이 필연적인 존재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전혀 지적인 능력이 없는 자연의 사물들도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 그것도 일정하게 의도된 목적을 향하여. 마치 화살이 저 혼자 날아가지만, 궁수에 의해서 계획된 방향으로 날듯이, 세계 내의 모든 존재자들은 어떤 지적인 존재자에 의해 계획된 방향으로 운동하고 있다. 이 운동의 기획자를 사람들은 신이라고 부른다.

 

. 데카르트는 이외에 ‘이성론적 증명’이라고 부를 만한, 또 다른 증명 절차를 제시했다.

     . 명석 판명한 인식만이 참이다.

     . 명석 판명한 의식의 내용으로서의 신의 관념이 있다.

  . 원인 없이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으므로(이것은 ‘자연의 빛’으로서 이성이 주는 명백한 사유 법칙이다),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을 있게끔 한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 이 원인의 내용은 그 결과인 신의 관념의 내용보다 크거나, 적어도 같아야 한다.

      . 그런데 우리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의 내용은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하다는 것이다.

   .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한 신의 관념의 원인은 그러므로 ‘나’ 자신이거나,

     내 의식 내에 있는 또 다른 어떤 관념일 수가 없다. ‘나’나 내 의식 내의 또 다른 어떤

     관념도 무한하고 완전 독자적이며 전지전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내 의식 내에 있는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은 내 의식 밖에 있는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

      . 따라서, 내 의식 내의 신의 관념을 일으킨 원인으로서의 신은 내 의식 밖에 실재한다.

 

. 기타

 

라이프니츠(Leibniz), 개별 사물들은 각종의 결여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집합체인 세계는 조화롭게 운행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계가 적절성의 원칙에 따라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그런 세계를 만든 자는 그러므로 완전한 자라 하여 신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다.

 

버클리(G. Berkeley, 16851753), ‘지각된 것만이 실재’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그런데 자연 세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우리 인간이 지각할 때는 있다가 우리가 지각하지 않으면 없게 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므로, 실재하는 것은 우리가 지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지각 중에 있어야 하며, 그 누군가는 언제나 모든 것을 지각하는 무한자여야 한다고 보아, 그 무한자를 신이라고 논변한다.

 

그러나 이상의 여러 신의 존재 증명이 논리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이들 증명은 선()을 상주고 악()을 징벌하는 인격적 신의 존재를 입증하지는 않고 있다. 게다가 칸트가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은 논리적으로 허위임을 밝혀 냄으로써, 그 후로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신의 존재의 입증은 그러니까 이제는 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오로지 종교, 신학적인 문제라 볼 수 있다. 또 신의 존재 증명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원인 없는 존재자가 적어도 하나 있다’는 주장이 됨으로써, 존재론의 근본 물음은 여전히 남는다.

 

가령 우리는, ‘신은 도대체 어떻게 전지전능하고 완전하게 선한 존재자일 수 있는가?’신은 도대체 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자인가?’라고 다시금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자의 ‘본질’과 ‘존재’의 근거는 어떤 존재자가 아니고, 존재자의 ‘본질’이니 ‘존재’니 하는 것은 존재자를 인식하는 의식의 규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의식되는 존재자’로 국한된다. ‘누구에게 의식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란 따라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여기에서 이른바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관념론의 입장에서 보면, 실재론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철학함의 기본 태도인 확실성의 토대를 벗어나는 것이며, 반면에 실재론의 입장에서 보면, 관념론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하면 무의미한 것을 ‘존재한다’고 인식한다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다. 이 논의는 의식의 초월성에 관한 인식론적 쟁론에로 이어진다.

 

 

 

 

■ 종교문화 속에서 초월 (Transcendence in Religious Culture)

              

       초월에 대한 열정과 그 형식

                                                                                                    인용: 논문(.한빈) 중에서 발췌

 

 

       각 시대마다 종교가 갖는 다양한 형식과 형태를 종교문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문화 중 초월에 주목하여 그 일정한 특징을 살펴본다. 초월 체험은 의식- 비의식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지고 초월적 지향은 외재적 초월과 내재적 초월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과 지향은 시대에 따라 강조를 달리 한다.

 

현대 사회와 문화는 초월 체험에서는 비의식적인 면을, 초월의 지향에서는 내재적 초월을 더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지 문화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와 문화가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인간의 비의식적 잠재 능력에 주목하고 있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현재 일련의 활동들은 이 능력에 대해 가치판단을 유보한 채 그 현상 자체에만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태도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팽창 논리에 함몰되어 새로운 억압과 예속의 상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종교문화가 가지고 있는 초월의 다양한 경험과 정보는 인간의 비의식적 능력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제공해 줄 수 있다.

 

현대 종교 역시 현대 문화가 미쳐 가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대해 이미 다양한 경험을 선취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 종교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서의 역할이 아닌 다른 의미를 현대 사회와 문화에 줄 수 있다.

 

 

□  현대 사회와 종교적 초월

 

 과학이 발전하고 예술의 자율성이 확장된 이래 철학과 더불어 그 위상과 정체에 대해 질문 받는 영역은 바로 종교이다.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의미가 더 이상 기복적인 데 있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일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현대의 문화 시대에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우선 종교 문화 양태를 일견해 보면 그것은 상반된 것들의 공존이라 할 수 있다.

무한과 유한, 초현실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신비적인 것과 정상적인 것, 공동체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비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 등의 공존이 그것이다. ……

 

막스 베버의 …… 설교에 따르면 신앙을 갖는 것과 합리적 행위를 의미하는 성실한 사회 활동은 동일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종교적 이념의 관계에 대한 베버의 이러한 분석은 종교 문화에 대한 재해석을 의미한다. 이에 비추어 보면 종교 문화는 성스러운 영역에서만 독자적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회와 인간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반된 것들이 공존이라는 종교 문화의 특징에서 현대 사회와 관련하여 종교 문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는 초월이다. 왜냐하면 각성, 지성, 과학 외에 환각, 감성, 예술로서의 문화를 주목하는 현대 사회는 종교적 초월과 일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초월의 문자적 정의는 “넘어섬”이다. 종교적 초월에서 “넘어섬”이란 유한한 존재를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한한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현대 사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초월은 종교적 이념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 한다. 그것은 외재적인 절대적 타자로의 귀의일 수도 있고 내재적인 순수의식 세계로의 도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초월에 대한 해명은 우선 종교적 체험 속에서 다루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종교는 여타의 사상체계와 같이 특정한 이념을 전제하지만 일정한 체험 형식과 내용을 갖지 않는다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종교 체험의 한 형태로서 초월이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정한 종교적 이념의 반복일 수 있다.

 

 

□  고통의 경험과 초월 체험의 형식

 

종교는 왜 초월을 말하는가? 왜 초월하려고 할까? 그것은 초월의 체험과 구원이 관계되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종교적 신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구원에 있다. 구원은 인간이 겪는 억압과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고통의 극복에서 우선은 그 고통을 경험하는 의식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고통이 의식되면 고통을 극복하고자하는 의식은 대상으로서의 고통과 그 고통의 의식 주체를 발견한다. 고통의 의식 주체는 고통의 대상이 극복가능한지에 따라 그 대면 방식을 달리한다. 이 때 극복이란 것은 그 대상의 실제적인 해소를 의미한다. 만약 고통의 대상이 실제적으로 해소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고통은 일시적 아니라 항구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고통이 항구적인 것이라고 할 때 고통의 주체는 절망한다. 이 절망은 자신의 유한함의 인식을 의미한다. 이제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은 유한한 존재의 극복을 의미한다. ……

 

종교 문화의 양태는 상반된 것들의 공존이라는 앞의 지적대로 결국 초월 체험은 의식적, 비의식적 지각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비의식적 지각 능력으로 인해 초월 체험은 일종의 환각 체험인 신비 체험의 성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  초월의 지향적 대상, 외재적 초월과 내재적 초월

 

초월에 대한 의식적, 비의식적 지각 능력의 관계는 사실 초월 체험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한한 존재를 넘어서는 초월 체험이 실제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의식적 지각 능력은 자신의 한계 체험에서 절대적 존재를 상상한다. 루돌프 오토는 이것을 “전적 타자 the Wholly Other"로 규정했고, …… 현재의 유한한 자기를 압도하는 외부적 어떤 대상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이러한 초월의 지향을 외재적 초월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외재적 초월과는 다른 초월의 지향이 있다. 외재적 초월의 특징은 대상성이다. 그런데 이 초월적 지향은 대상성을 거부한다. 이 초월적 지향은 고통의 의식 자체를 의식 외부의 어떤 대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식 내부의 활동을 통해 넘어서려 하기 때문에 내재적 초월이라 명할 수 있다.

 

고통을 의식하면 그 때에 비로소 고통은 인식 주체의 객관적인 대상이 된다. 이러한 이원적 의식 구조가 바로 고통의 체험 구조이다. 내재적 초월의 지향하는 바는 이원적 의식 구조를 극복하여 고통 자체를 성립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내재적 초월은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는 의식적 지각 구조를 넘어서기 위해 통상 관조와 명상이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관조와 명상은 기본적으로 의식적 지각 능력이다. 따라서 내재적 초월은 의식적 지각 능력이 스스로를 반성하여 극복하는 것이다.

 

노르만 가이슬러는 초월의 지향을 “위에(above)”와 “깊은 곳에(in depth)"라는 표현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이 때 구분의 기준은 의식적 지각이다. “깊은 곳에”의 경우, 의식적 지각의 깊은 내면 속에서의 이루어지는 초월 체험을 말한다. 따라서 가이슬러의 이 개념 역시 내재적 초월의 특성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그런데 내재적 초월은 나와 너의 구분, 브라흐만과 아트만의 구분이 없는 초월 체험에 근거하고 있다.

 

초월의 체험은 의식적- 비의식적 전 지각 능력을 통해서 작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은 외재적 초월과 내재적 초월에 개입한다. 외재초월과 내재초월은 초월의 지향이 의식의 바깥으로의 넘어섬인가 아니면 의식의 깊은 차원으로의 넘어섬인가에 따른 구분이다.

 

종교적 체험의 이러한 양태는 다음의 경우로 정리된다.

   . 의식적- 비의식적 외재 초월

   . 의식적- 비의식적 내재 초월.

 초월의 특성들에 대한 구분의 기조와 강조의 차이는 본질적으로는 각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 생존에 대한 관심의 내용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인간의 생존에 대한 이념은 시대마다 환경마다 그 정의가 달랐다.

 

원시 공산사회의 경우, 의식적 지각 능력보다는 비의식적 지각능력이 그들의 현실적 생존과 더 깊은 관련을 맺으며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다가갈수록 의식적 지각 능력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비의식적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초월 체험은 개인의 자율적 의지에 의해서 교정될 수 있는 영역이 상대적으로 적은 영역이므로 이의 강조는 종교적 이념의 초개인화를 의미한다. 이 때 종교는 환각 또는 신비 체험을 종교체험에서 중요하게 고려한다. 의식적 초월 체험은 자기 존재에 대한 반성과 확인을 통해 자기와 자기가 아닌 것을 구별하여 자아를 유지, 보존하려 한다.

 이러한 체험이 강조는 종교적 이념의 개인화를 의미한다. 이 때의 종교는 의미와 가치 그리고 윤리성이 종교 체험에서 중요하게 고려된다.

 

 

□  종교문화사에서의 초월

 

.  원시 공산사회

 

종교 체험을 의식적 지각 능력과 비의식적 지각 능력으로 구분한 방식을 적용한다면, 선사시대의 종교체험은 비의식적 지각 능력에 더 관련이 있다.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은 수렵이다. 정주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이동하는 이 생활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안목을 불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개념적 지각 능력으로서의 의식이 발달할 수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에 자신을 계속해서 맞추어 나간다는 것은 세계와 나의 관계를 정립할 매개로서 자아를 형성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구석기 시대에는 종교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따라서 구석기 시대에서 종교를 말한다면 종교에 대한 정의가 다시 내려져야 한다.

 

고대 원시 농경사회에서 주목할 만한 삶의 변화는 정착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다. 일정한 곳을 기준으로 정착한다는 것은 변화하는 환경과 더불어 변화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하는 환경을 설명하고 해석해야 하는 고정된 관점을 가지게 됨을 의미한다. 그 관점은 의식적 지각 능력의 발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각 능력은 전체에 대한 추상적 사유를 가능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 때부터 본격적인 종교 문화가 개시된다. 그런데 고대 원시 농경 사회는 여전히 강력한 공동체사회를 지향한다. 따라서 종교 문화는 추상적 사유의 발달이 가져올 개인 의식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어야 했으며 또한 공동체와 유기적인 일치감 저하에서 오는 구성원의 소외감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응해야 했다.

 

한편 생산력의 발달과 의식의 발달은 또한 현실과 가상을 분화시켰고 이에 따라 종교적 전문인으로서 주술인과 예술인이 등장한다. 이 전문가들은 당시의 종교 문화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였다. 개인 의식이 발달함과 동시에 공동체적 유대를 충족시킬 필요는 종교 체험에서 의식적, 비의식적 초월 체험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이 때 의식적 - 비의식적 초월 체험은 조상신이나 농사와 관련된 자연신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 맞물려서 작동되었다. 이러한 원시 농경 사회의 종교 문화는 의식적 - 비의식적 외재초월의 전형적인 예이다.

 

.  유태교

 

고대 유태교라 할 수 있는 히브리인들의 종교는 반농경, 반유목의 생활 형태를 기반으로 한다. 정확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을 야훼라 하여 숭배한 히브리인들의 종교 형태는 일신 숭배가 아니라 일신교였다.

 

이들은 기원전 약 13세기 모세에 지도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함으로써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형태를, 그리고 소위 모세 오경이라는 경전을 통해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한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인 유대지파가 민족의 대표성과 종교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의 종교는 유태교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이 유태교의 특징 역시 일신교이다. 이들의 초월의 지향은 철저히 외재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에게 죄를 짖고 타락해서 초월의 가능성을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신이 특별히 지시한 종교적 지도자와 성서가 아니라면 개인으로서 각자는 초월적 지향인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의식 - 비의식적 외재초월이 유태교를 특징짓는 종교 체험이었다.

 

.  고대 그리스, 영지주의

 

12명의 올림포스 신으로 특징짓는 고대 그리스 종교는 철저한 의인화된 신의 숭배이다. 이러한 신은 영웅들의 조상이며 도시 국가의 상징적 수호자였다.

 

고대 그리스인의 숭배는 철저히 형식적이었고 기복적이었다. 이미 발달한 개인 의식은 이러한 신을 초월의 지향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철저히 현실적이어서 종교적 숭배를 초월로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오히려 철학과 예술에서 초월의 가능성을 보았다.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의식적 내재초월의 전형이며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는 기본적으로는 의식적 외재초월의 전형이다. 이들은 철학을 통해서 오히려 초월의 지향과 의미의 외연을 확대하고 각성된 의식을 통한 초월를 준비했다.

 

.  기독교

 

기독교 역시 예수를 믿음에 있어 의식적 - 비의식적 초월 체험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또한 객관적으로 절대적인 숭배의 대상인 예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따라 초월적 지향의 외재성과 내재성이 동시에 등장한다. ……

서양 기독교 문화에서 보여진 초월의 양태를 보면,

  . 초기 기독교: 의식적-비의식 외재 초월과 내재초월의 공존

  . 중세 기독교: 의식적-비의식적 외재초월(정통파). 의식적-비의식적 내재초월(비정통파)

  . 보편논쟁의 근대적 귀결: 비의식적 외재초월과 내재초월

  . 프로테스탄트의 이신칭의: 의식적 외재초월과 내재초월

  . 현대 기독교: 의식적 외재초월에서 의식적 내재초월과 비의식적 내재초월로

 

.  현대 종교

 

현대 종교의 중요한 흐름은 종교적 영성(spirituality)의 강조이다. 영성의 강조는 종교 체험의 흐름을 의식적 외재초월에서 의식적 내재초월과 비의식적 외재초월로 바꾸고 있다.

 

현대의 초월 체험은 깊은 명상과 신비 체험에 강조를 두고 있다.

이러한 종교 문화의 변화는 의식적 외재초월에 기반한 종교 체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초월 체험에서 비의식적 지각 능력의 강조는 현대의 문화시대의 특징과 일치하는 점이 있다. 또한 다가올 미래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상대적 가치들의 인정과 사회의 분열, 분화는 공동체의 파괴로 점철되어왔던 문화 구조를 소규모 공동체로 제조직하는 결과를 이루어 낸다. 이러한 현대 사회적 흐름은 그 동안 억눌려 있던 비의식적 지각 능력들, 즉 비개념적 사고로서의 상상력, 감성, 욕망 등이 활발히 작동함을 의미한다. 종교의 비의식적 지각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체험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  종교적 초월과 문화철학적 전망

 

종교 문화에서 초월이 주는 문화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현대 사회 문화의 특징과 종교적 초월에 대한 강조의 변화가 서로 비슷한 길에 서 있다는 데서 답해 질 수 있다.

 

자본으로서의 지식과 정보에 대한 강화된 의미 부여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한 특징이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의 다양한 종합력과 응용력이다. 이에 부응하는 지각 능력은 상상력이다. 지금까지 예술적인 차원에서만 주목받던 상상력은 이제 구체적 현실의 차원에서 자본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중요한 지각 능력으로 부상한다.

 

현대 문화의 또 다른 특이성은 가상현실과 결부된 문화들이다. 예술의 꼬리표를 가질 때만 의미 있었던 가상 세계가 과학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현실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비정상적이고 신비적인 것에 불과했던 환각 체험 등도 이런 의미에서 새롭게 주목받는다. 현대 물리학의 이론으로서만 가능했던 다른 차원의 시간과 공간의 경험이 실제적인 체험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문화는 세계에 대한 다른 차원의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세계가 연장에서뿐만 아니라 양태에서조차 무한한 것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러한 현대 문화는 새로운 지각 능력을 주목하면서 그 능력에 힘과 생동감을 불어넣는 욕망에 대해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욕망은 분명 현실이지만 개념적 사유의 틀로 보면 어둡고 정체가 모호해서 괴물스러운 것이다. 욕망은 가능한 한 일정한 방식으로 통제되지 않으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특이성을 일순간 삼켜버릴 정도로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것이다. 이러한 욕망은 자신을 반성적으로 지각하고 통제하는 의식에 비해 자기의 정체를 정립하기 힘든 비의식의 영역에 놓여있다. 이러한 욕망으로서의 비의식은 상상력을 매개로 현대 사회에서 새롭게 부상한다.

 

인간 능력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평을 열어 놓는 현대 사회의 이러한 특이성은 또한 새로운 문제를 동반한다. 기존의 문화와 새 문화에 접점에는 기존의 가치와 의미의 상실이 뒤따른다. 개인은 물론 사회 전체가 가치 전도에 따른 상실감으로 인해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새로운 가치와 의미에 대한 수용 능력의 문제도 있다. 현대 사회는 스스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비의식적 지각 능력에 대해 매우 무지하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에서처럼 동굴 밖으로 나온 사람은 퇴화된 안력으로 인해 새로운 동굴 밖의 삶이 당황스럽고 고통스럽다. 마찬가지로 실제로 작동하는 비의식적 문화 현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현 단계에서는 당황스럽다. 미리 준비된 지도가 없기 때문이다. 제기될 수 있는 이러한 문제를 총체적으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개인이든 사회이든 달라진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실존적 문제가 될 것이다.  ……

 

문화철학은 지금까지 다양한 문화 현상, 특히 비의식적 지평에서 속하는 욕망, 환각, 상상력들에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그 지평을 항해할 지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문화철학의 다양한 탐구는 자칫 책임질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초월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무한하며 집요했다. 종교적 초월은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어떤 문화보다 비의식적 지평에 대한 여행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초월을 통한 종교적 의미의 재해석은 단순히 종교적 이념을 변호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문화 시대의 중요한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

               (Friedrich Schleiemacher,1768-1834)

 

                                                                                                             블로그 cccsw, 부분 발췌

               -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

1장 서론

 

19세기 신학자들은 인간 생활 안에 종교라는 어떤 특정의 자리를 정함으로써 계몽 사상에 의해 초래되었던 곤경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흐는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킬 것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그가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력은 뉴턴이 물리학에, 프로이드가 심리학에, 그리고 다윈이 생물학에 끼친 것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슐라이어마흐를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인정한다.

 

슐라이어마흐가 이러한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학에 있어서 새 시대를 창도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 사상과의 갈등 속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풀어 주기 위하여 그가 취한 방법과 접근법이었고, 그것은 그 이후 200년 간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위해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그의 동조자들뿐 아니라 그의 반대자들도 신학적 지식을 이룩하는 데 쓰이는 바, 그가 형성시켜 놓았던, 이 새 방법 때문에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슐라이어마흐 연구는 그가 가졌던 특정한 교리적 견해들보다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이다.

 

2장 슐라이어마흐의 삶과 그의 경력

 

슐라이어마흐는 프러시아의 브레스라우(Breslau, Prussia: 오늘날 폴란드의 브로크로브)에서 1768년 11월 2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개혁 교회의 목사로서 프러시아 부대의 군목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어린 프리드리히가 열 살때, 그의 아버지 슐라이어마흐는 모라비아교도(Moravians)로 알려진 경건주의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감정적으로 깊은 은혜를 받았다. 슐라이어마흐의 가정은 프러시아 개혁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매우 열정적이고 복음적이며 신앙적인 생활을 했다. ……

 

그의 최초의 역작, 『신앙에 관하여: 신앙을 멸시하는 교양인들에게 쓰는 담화』(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ts, 1799)를 쓴 것은 친구들에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 젊은 사상가는 신앙을 '멸시하는 교양인들'(독일의 젊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신앙은 교리와 무관하며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Gef hl)에 관한 문제라고 설득하려 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이거나 신조적 명제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슐라이어마흐의 『담화』는 신앙(종교)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현대적 연구서였고, 저자는 이 책 때문에 하루 아침에 젊은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다.

 

1804년에 슐라이어마흐는 할레대학교의 교수와 대학예배를 위한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809년 친한 친구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마침내 가정생활의 행복을 바라던 그의 깊은 열망을 이루었다. 슐라이어마흐는 트리니티교회에서 매주일 설교했고, 당시 베를린의 지도층 인사들의 자녀들 수백명에게 견진례를 베풀었다. 그 중에는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건설한 미래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대작(magnum opus)은 1821-1822년 처음 나오고 1830년에 개정한 『기독교 신앙』(Christian Theology)이라는 제목의 조직 신학이었다. 전통주의자들에게 이 『기독교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반(反)초자연주의적 정신을 용인한다는 합의 각서와 같은 것으로 마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으나 슬쩍 위장하여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는 시도의 표현이었다.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유행이 다 지난 권위주의적 교의서로부터의 해방이며, 동시에 과학과 갈등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기독교 신앙형태로의 전이(轉移)를 뜻했다.

 

슐라이어마흐는 1834년 2월 12일 폐렴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가족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는 중에 임종을 맞았다.

 

3장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은 주로 그가 살던 때의 문화적 상황과 지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은 기독 교회의 국교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고 대신 '이성의 여신'( Goddess of Reason)을 등극 시켰다. 이성은 감각적 경험의 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칸트의 제한은 신앙과 이성을 연관지었던 어떠한 종교사상에도 심각한 문제를 안겨 주었다.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은 어떤 부분에서 본다면, 칸트가 설정한 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반면 그의 종교 비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슐라이어마흐 신학의 문화적 맥락을 형성시켜 주었던 새로운 상황은 낭만주의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생동감이라든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힘과 상상력 같은 것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합리주의 때문에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다.

 

4장 신학적 방법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인 어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인간경험에 기초하는 신학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실천 이성에 두려 했던 칸트의 시도나 절대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것을 탐색하는 새로운 사변적 합리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놓으려고 했던 헤겔의 노력과 함께, 계몽주의의 여파속에서 신학을 시도했던 세 번째 주요한 노력이다.

 

슐라이어마흐는 직관을 통하여 하나의 대안적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의존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의 또는 교회적 의식(儀式)이나 절차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쉽게 식별이 되는 통합적 요소'-즉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흐가 종교를 '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어의 Gef hl이라는 말은 영어로 감정(sensation)이라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말은 의식 중에 '성찰-이전적' 상태, 곧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종교적 감정(그것을 종종 '경건'이라고 불렀다)이 인간의 경험 안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종교의 자치권을 확립하고 그것을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보편적 인간의 경험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그 위치를 설정한 후, 슐라이어마흐는 신학 자체로 관심을 돌린다. 가장 광범위하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학은 종교, 다시말해서 경건에 대한 인간의 성찰일 뿐이다.

 

그의 위대한 조직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신학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보편적 경건, 또는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의식 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표현하는 한 형태이다. 그는 경건의 한 구체적인 형태를 식별하여 그것을 기독교적인 '하나님-의식' 또는 기독교적 '자아-의식'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가 의미하는 바 '기독교의 종교적 감정'-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고 성취된 기독교의 '하나님-의식'이나 '자기-의식'이라는 경험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신학적 방법에서 그가 이룬 혁신은 이른바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turn to the believing subject)는 데 있다.

 

현대신학에 대한 그의 기여들 가운데 하나는 교리들의 문화적, 역사적 성격을 강조한 점이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적 경험이 주된 것이고, 신학은 그 다음으로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독교 공동체들의 변화하는 양상과 관련하여 항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교리의 형태는 어떤 특정의 시기에 국한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영속적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건 살아있는 종교적 의식의 함의를, 비판적 성찰에 의거하여 새로이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를 인간 경험에 있어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로서 보아 그 독특성을 주장했고, 예수 그리스를 '하나님-의식'의 지고한 표현으로 보아 그의 독특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계몽주의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다.

 

5장 교리적 헌신

 

그는 모든 교리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아-의식' 즉,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썼다. 분명히 슐라이어마흐는 성경이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거나 무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하나님-의식'의 순수한 모델이 나타날 때마다, 기독교 신학을 위한 하나의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신학을 위한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후자 곧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 안에 재현된 '하나님-의식'이다.

 

1절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돌리는 그의 모든 속성들이 하나님 안에만 특별하게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절대 의존 감정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방식에 있어서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한 진술은 하나님-그 자체(God-in-himself)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떤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가 재구성한 하나님 이해는 전통적 기독교 사상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죄와 악의 창시자라는 사실은 피조물의 의존성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 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그 외의 다른 대리자의 몫으로 돌리게 되면, 그의 전능성이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죄라는 것을, 구속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정하셨다고 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중보 기도의 효과를 부정했다. 하나님에게 일의 진행 과정을 바꿔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끝으로, 삼위일체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기독교 신앙』 맨 뒤에 나오는 짤막한 결론 부분으로 가지고 냉담하게 진술하기를, 그것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를 거절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하지만,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초인격적인 능력인데, 피조성이 그 존재에 부과하는 모든 차별성을 뛰어 넘는다.

 

2절 기독론

 

슐라이어마흐는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식' 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그것을 대치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외에는 나머지 인간들과 완전히 같다.

 

그러므로 구속자는 인간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이다.

 

슐라이어마흐에 의하면, 예수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상성이다. 곧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이상이며, 완전한 경건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구속 사역은 그가 이러한 하나님-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재생산성(Vorbildlichkeit)이다.

 

6장 평가 및 결론

 

20세기에 벌어진 논쟁은 주로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적 방법론에 집중되어 왔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순전히 인간의 경험이라는 지평 안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말씀을 하시거나, 어떤 행동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초월성의 상실쪽으로 향하는 현대 기독교의 사상적 경향을 창도하였다.

 

그의 신학적 방법의 약점은 그의 신론에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의 신론은 내재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자연과 거의 동일시한 나머지 구속이 하나님의 행동인 것만큼 악과 고통 역시 하나님의 행동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과 이 세계를 상호 연관지으면서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는 면에서 슐라이어마흐의 신론을 만유재신론적(panentheistic)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예수의 신성이 그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보는, 곧 하나님과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그가 기능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여, 오늘날 '기능적 기독론'으로 알려져 있는 사상의 원형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상의 오류는 그것이 기능적 기독론이므로 하나님의 '자기-표현'인 예수의 궁극성과 최고성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자적 위대성은 부인할 수 없다. 좋든 싫든, 그의 영향은 현대신학에 고루 퍼져 있다. 그것은 특히 19세기 말엽쯤에 가서 개신교 사상을 장악하게 된 '자유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신학의 학파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제 그 신학의 가장 위대한 주창자에게로 가야겠다.

 

                                    

□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목창균

슐라이에르마허 1 : 감정의 신학

 

서론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슐라이에르마허 만큼 상반된 평가를 받는 신학자도 없을 것이다. 그는 19세기의 교부로, 또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반면, 19세기의 대이단자로도 비판받고 있다.

 

특히 칼 바르트의 입장이 그러하다. 그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신학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연구가 아닌 인간의 종교성에 대한 연구, 즉 인간학으로 전환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주도한 신정통주의 신학은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거부와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슐라이에르마허를 “영웅”으로 칭송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업적은 너무 위대하여 19세기 전체가 그의 세기였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우리의 관점과 사고에서 활동한다.

 

그의 신학을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단지 그들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바르트는 자신의 집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벽에 슐라이에르마허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는데, 이것은 그에 대한 슐라이에르마러의 영향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라 하겠다. 시카고 대학교 역사 신학 교수 게리쉬는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린다 할지라도, 슐라이에르마허는 우리가 항상 신학적 입장을 확인해야 할 몇 안되는 기독교 사상의 거장들, 즉 어거스틴, 아퀴나스, 루터 그리고 칼빈의 대열에 속한다” 고 주장했다. 반면, 신정통주의자들은 슐라이에르마러가 루터와 칼빈으로 소급되는 상속선을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바르트는 칼빈, 루터, 사도 바울로 이어지는 위대한 전통에 이르는 길을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듯 이중적 평가를 받고 있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고, 현대 과학과 사상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어떻게 존립할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신학적 과제로 삼았다.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슐라이에르마허가 끊임없이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주로 그의 신학 방법론 때문이다. 그는 성경본문,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는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을 신학의 토대와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학 방법론상의 일대 변혁이었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 의식에 대한 연구로,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필자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생애와 저술을 통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고, 사상적 배경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의 신학 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핵심 개념을 설명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개괄하고 그 역사적 의의와 함께 문제점도 지적하려고 한다.

 

I.신학적 배경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요소가 있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개혁 교회적인 가정 배경과 모라비안 경건주의에서의 교육이었다. 철학적인 면에서는 할례 대학교 재학 시절의 칸트 연구와 번역 사업을 통해 접한 플라톤의 사상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베를린의 자선 병원 원복 시절 젊은 지성인들과의 교제를 통해 받은 낭만주의의 영향이라 하겠다. 이러한 요소들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1. 종교적 배경

 

종교적인 면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두 전통이 병행하는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개혁 교회 전통과 경건주의 전통이 그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부모의 가문 모두로부터 개혁 교회, 즉 칼빈주의 전통을 물려받았다. 그의 친가와 외가 모두 개혁 교회 목사 가문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개혁 교회 신앙 고백에 동의하고 개혁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일평생 개혁 교회 목사로 활동했다. 실제로 그는 칼빈주의 예정론을 변호하고 루터 교도들을 설득하려고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개혁 교회 전통에 대한 충성을 자주 고백했으며 자신이 전적으로 개혁파 출신임을 주장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가문에는 경건주의의 전통이 있었다. 아버지 고트리프는 개혁파 목사였으나 모라비안 경건주의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모라비안 교단은 종교 개혁의 선구자 후(J.Hus)의 감화로 15세기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생겨난 보헤미안 형제단으로부터 기원했으며, 깊은 종교적 감정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보헤미안 형제단은 17세기 30년 전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발해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 1725년 작센(Sachsen)지방의 헤른후트(Herrnhut)에서 진젠도르프 백작에 의해 재조직되었다.

 

고트리프는 아내와 자녀들 역시 경건주의적인 신앙을 가지도록 인도했으며, 그 결과 슐라이에르마허는 14세 때 회심을 체험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나이에 모라비안 교단 학교에서 경건 훈련을 받으년서 종교적으로 깊이 감화되었고, 외적, 내적으로 모라비안 교도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이 “높은 서열의 모라비안 교도”였음을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 형성에 모라비안파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말해준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종교의 정서적인 면을 강조하여 종교의 본질을 감정으로 간주한 것이나 종교와 철학을 철저히 구별한 것, 그리스도 중심적인 신학을 주장한 것은 모라비안 경건주의의 영향이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모라비안 경건주의를 통해 루터의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라비안 교단과 루터교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라비안 교단의 전신인 보헤미안 형제단은 종교개혁 당시 루터 교회에 가입한 후 모라비아 지방에 정착하여 이루어진 것이 모라비안 교단이다.

 

슐라이에르마허와 루터 교회와의 또 다른 인연은 그가 할례 대학교의 루터교 신학부의 교수가 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프러시아 정부는 루터교 신학부에 개혁 교도인 슐라이에르마러를 초빙함으로써 연합의 길을 모색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베를린 대학교의 신학부 교수가 되었을 때, 루터교 신학자들의 저서를 교재로 선택했으며, 자신의 교의학서에 개혁 교회 신학자들보다 루터 교회 신학자들을 더 자주 인용했다. 이는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확신과 이 두 개신 교단의 연합에 대한 강력한 지지로부터 나온 것이다.

 

요약하면,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으로 개혁 교회뿐만 아니라 모라비안 경건주의와 그것을 통한 루터 교회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바로 이것이 그의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철학적 배경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상 형성의 토대가 되었던 철학 사상은 칸트와 플라톤 철학이다. 그는 모라비안 신학교 재학 시절 칸트의 저서를 읽었다. 할레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그는 신학 과목보다 오히려 칸트의 철학이나 헬라 고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는 당시 할레 대학교의 저명한 철학 교수 에베하르트(J.A.Eberhart)교수와 고전 연구가 볼프(F.A. Wolf)교수의 영향이었다. 그는 에베하르트 교수로부터 칸트의 철학 체계 전반에 대해 배웠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순수 이성 비판’과 ‘실천 이성 비판’을 읽고 칸트 연구에 몰두했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1789년 겨울 드로센의 아저씨 집에 체류하는 동안 집중적으로 칸트 철학을 연구했다. 그는 칸트의 영향을 받아 “종교보다 윤리학에 우위를 두었으며, 기독교 신앙을 칸트츼 윤리학적인 관점으로부터 평가했다.”

 

칸트 철학 연구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철학적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칸트의 저서들은 젊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사색의 출발점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슐라이에르마허는 칸트의 비판 철학에 대해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칸트의 영향은 특히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발견된다. 그는 칸트의 철학이 계몽주의 신학을 합리주의의 늪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변적인 지식의 한계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 철학의 결론을 수용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에베하르트의 칸트 비판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 불멸에 대한 칸트의 도덕론적 논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칸트가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이며 철학적인 지식을 타파한 것을 받아들인 반면, 칸트가 실천 이성 및 도덕의 영역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자리를 발견한 것을 거부했다. 종교의 자리는 감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가 이성을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으로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칸트에 따르면, 순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나 영혼 불멸 및 자유와 같은 종교적인 주제를 알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생각되어질 수 있을 뿐이지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항목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이원론을 수용할 수 었었다. 종교는 아는 것(knowing)과 행동하는 것(doing)의 토대요 통일체이기 때문이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플라톤의 영향은 학자들에 의해 자주 간과되어 왔다. 슐라이에르마허가 플라톤의 저서를 처음 접했던 때는 할레 대학교 학생 시절이었다. 그는 에베하르트 교수의 철학사 강의를 통해 헬라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며, 특히 플라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원목으로 일하면서 ‘종교론’을 저술할 무렵 슐레겔로부터 플라톤의 저서들을 함께 번역하자는 제의를 받은 그는 플라톤 저서에 대한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슐레겔의 태만으로 슐라이에르마허 단독으로 번역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슐라이에르마허가 스톨프에서 목회하는 동안과 1804년 할레 대학교 교수로 부임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1804년 그의 플라톤 번역집 1권이 출판되었으며 1828년까지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3개을 제외한 모두를 소개, 번역, 주해했다. 그러나 그는 ‘티마에우스(Timaeus), '크리티아스’(Critias), '법률‘에 대한 번역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플라톤 저서의 번역으로 당대의 가장 훌륭한 고전학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을 뿐 아니라, 독일에서의 플라톤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왜냐하면 신플라톤 학파 이후 처음으로 진정한 플라톤 사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플라톤 연구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기계론적인 윤리관을 거부하고 결정론적 윤리관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낭만주의와 개인주의적 주관주의를 극복했다.

 

3. 사상적 배경

 

젊은 슐라이에르마허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상 가운데 하나가 낭만주의이다. 그는 베를린의 자선 병원 원목 시절 도오나 백장의 소개로 낭만파 모임에 가담했다. 여기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한 낭만파 지성인들과 사귀게 되었고, 이 모임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낭만주의는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철학, 과학 등 다방면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인공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발적인 것을, 냉랭한 합리성 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했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낭만주의자인가 하는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낭만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이 “피상적이며 무비판적인 심미주의”나 “지적인 정확성과 완전성을 결여한 공허한 종교성”을 의미한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결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삶과 신앙에 대한 그런 접근 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반면 낭만주의가 냉랭하고 분석적인 이성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상상력과 직관에 의해 현상 배후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면, 슐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자이다. 그는 낭만파 모임의 정회원이었으며 낭만주의 언어를 사용하고 그 문화세계에서 살았다. 그러나 거기에 예속되지 않고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낭만파 친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며, ‘종교론’ ‘독백론’ ‘크리스마스 이브’ 등과 같은 그의 초기 작품들은 낭만주의 사상으로 채색되어 있다. 그는 낭만주의로부터 시와 예술에 대한 이해을 배웠으며 자신의 해석학과 플라톤 해석에 대한 중요한 암시를 얻었다. 한편 낭만파 친구들에게 종교가 “예술에 대한 감흥”이 아님을 확신시킨 것은 낭만주의 발전에 대한 그의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18세기 계몽주의와 계몽주의 신학의 초자연적 교리를 거부했던 낭만주의자들에게 공감하여 그들과 결합하였으나. 신학과 철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 낭만주의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하고 극복했다.

 

II. 감정의 신학

 

오늘날 현대 신학이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깊은 통찰력과 혁명적인 방법론이 그를 현대 종교 사상과 신학 사상의 창건자로 만들었다. 후대의 학자들이 다루는 주제가 그에게 힘입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의 관심 영역은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현대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문제가 무엇이건 그들 앞에 슐라이에르마허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슐라이에르마허가 지속적으로 후대 신학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필자는 그의 주요 사상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1. 신학 방법론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사상은 18세기 유럽 지성계를 지배했다. 이것은 세속적이며 과학적이며 낙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으로 대두되었다. 이는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가치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의 모든 전제들을 문제시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 초의 신학적인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활기 읶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현대 세계에서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바로 슐라이에르마허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정신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는 것(knowing), 행동하는 것(doing), 느끼는 것(feeling)이 그것이다. 감정은 지식이나 행위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며 독특한 정신 기능인 동시에 보다 심원한 존재의 단계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감정을 종교가 발견되는 장소로 보았다. 그가 ‘종교론’에서 종교를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 또는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으로 정의한 것이나 ‘신앙론’에서 종교를 느끼는 것 또는 직접적인 자기 의식의 수식으로 종교의 본질을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 감정”으로 정의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관은 종교연구의 새로운 길과 방향을 제시했다. 종교를 연구하는 것은 종교인의 신앙과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 자신, 즉 그의 종교적인 감정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것이 되었다. 이것은 종교연구에 있어서 코페프니쿠스적인 변화였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는 신조나 교의 또는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혹은 기독교인의 자기 의식을 신학의 토대로 간주했다. 그는 교리적인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하려 했다. 신학의 과제는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다. 신학은 사변학이 아니라 기술학이기 때문이다. 또한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과거의 도식의 단순한 반복으로 간주하지 않고 현대 세계와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교의 신학은 주어진 시대의 기독교회에서 널리 유행하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상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진리를 재진술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경헙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기와 관심을 불어넣었다. 또한 인간 감정에 나타난 자기 의식과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변적인 철학으로부터 신앙과 신학의 독립을 확립했다.

 

2. 그리스도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적인 통찰의 중심을 이룬 문제는 그리스도론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가 이룩한 구원에 관련되어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 특징이다. 학자들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더불어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평가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그의 그리스도론은 “교회적인 그리스도를 현대 정신에 수용하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이 긍정적인 평가만 받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론이 슐라이에르마허 신학의 문제 거리로 취급되기도 한다. 그것은 당시 기독교인들의 종교적인 경험, 즉 자아 의식에서 추론된 것으로 비역사적인 가정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론적으로 부적절하다고 지적된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의 그리스도론은 역사적인 계시보다는 기독교인의 경험, 또는 의식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조명하에 기독교인의 경험을 해석하고 명료화하고 재건함으로써 그의 신학 전체가 형성되고 있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를 원형적인 인간으로 이해했다. 그의 그리스도론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성육신보다 오히려 원형적인 인간성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래적인 인간의 원형 또는 이상으로 간주했다. 원형성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의식의 절대적인 힘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소유했다. 하나님 의식의 완전한 원형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셋째,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론의 기초로서 요한복음을 일방적으로 선호했다. 그것이 공관복음보다 오래되었고 목격자의 눈으로 기록되었으며 예수의 의식이 진정으로 반영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넷째, 그는 교회의 전통적인 용어나 성서적인 용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리스도의 양성의 교리를 거부하고, 신성이란 표현 대신 그리스도의 신의식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또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교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연적인 탄생을 주장했다.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은 현대 그리스도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그리스도가 19세기와 20세기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는 데 이바지했다. 또한 그의 그리스도론은 예수를 인간학적인 지평 속으로 끌여들였다. 그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최초로 공개 강의함으로써 이 주제의 역사적, 신학적 중요성에 대해 관심을 일으켰다. 특히 19세기에 예수의 생애 연구가 성행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그리스도론은 몇 가지 면에서 전통적인 견해와 입장을 달리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성을 인성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어떤 말씀과 행위는 신성에 그리고 다른 것은 인성에 돌리는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둘째, 그리스도의 양성이 서로 교류한다로 믿는 교류 교리를 거부했다. 이 교리가 두 본성의 결합을 폐기하며 본성의 상실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신성에 대한 거짓 교리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출생에서 남성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신약 성서의 기록과 모순된다고 주장했다.

 

이외에도,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및 재림을 그리스도론의 적절한 요소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것들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3. 속죄론

 

속죄론은 기독교 복음의 중심 교리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루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해명되어 왔다. 교부 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속상금의 지불로 간주하는 교부 속상살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중세 시대에는 안셀름의 만족설로 대변되는 속죄의 객관적인 견해와 아벨라드의 도덕 감화설로 대변되는 주관주의적인 견해가 대립했다. 종교 개혁 시대에는 안셀름의 만족설을 수정 보완한 루터와 칼빈의 징벌 대속설이 제시되어 개신교 속죄론의 근간이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았고고 보는 징벌 대속설과 대신 벌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켰다고 보는 만족설과 같은 전통적인 견해을 거부했다. 슐라이에르마허에 있어서 속죄는 하나님 의식이 자기 의식 안에 출현하여 그것을 지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활동은 완전한 하나님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가 신자에게 자신의 하나님 의식을 나눠 주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능력이 그의 특정한 행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본질을 고난이 아닌 강력한 하나님 의식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속죄론은 다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그의 전생애를 통해 일어났음을 강조했다. 그의 구속 능력은 십자가의 죽음과 같은 특정 활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 즉 하나님 의속 속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새로운 공동 생활의 건설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하나님 의식의 능력을 통해 죄의 공동 생활에 대치되는 새로운 공동생활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 사역의 본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그것에 부수적인 중요성을 부여했을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희생의 개념과 그리스도의 고난이 죄의 징벌을 폐기한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일관되게 거부했다.

 

넷째, 그의 속죄론은 주관주의적이며 인간 중심적이다. 그는 속죄를 하나님 의식에 뒤따르는 축복의 감각 또는 종교 의식의 변화로 간주했다. 그런 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주관주의적 속죄론의 중요 대표자가 되었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 속죄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경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근거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죄,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한 그의 속죄론은 인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필요성과 의의를 약화시킬 여지가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가 자신의 절대적인 하나님 의식의 능력을 통해 신자 안에 하나님 의식을 일어나게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하나님의 의식에 근접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4. 죄론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경험, 사회적 환경, 이성에 대한 확신, 예수의 인간성, 관용적 종교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특히 낙관주의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악을 인간의 삶에 장애물을 일으키는 것들로 간주하였다. 이를 다시 자연적인 악과 사회적 또는 도덕적인 악이라는 두 종류로 분류했다. 전자는 인간의 행위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것이며, 후자는 인간의 행위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 모든 악은 죄에 대한 벌로 간주될 수 있다. 사회적인 악이 직접적인 것이라면, 자연적인 악은 간접적이다. 따라서 죄와 악은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성서에 근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종교적 의식, 즉 내적 경험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모든 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죄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하나님 의식에서 나타나는 반대물이나 장애물을 죄로 정의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아니고 인간의 영육 간의 갈등과 대립이다. “우리는 하나님 의식이... 우리의 자기 의식을 고통으로 결정할 때마다 죄 의식을 가진다. 그러므로 죄는 영에 대한 육의 대항이다.” 육과 영의 대립은 인간 안에 쾌락과 혐오감을 일어나게 하는 것과 하나님 의식을 일어나게 하는 것 사이의 대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대립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존을 자각하는 데 방해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를 하나님 의식의 무질서와 무력으로 규정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와 악의 근원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에 비판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가 아니며 죄의 원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의 남용이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견해와 인간의 자유 의지가 죄의 원인이라는 견해를 양자 택일적인 것으로 취급하지 않고, 신적인 인과율(causality)과 인간의 자유라는 양자 사이에는 긴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중에 하나를 수용하고 다른 하나를 거부함으로써 그 긴장 관계를 해소하려고 한다면, 페라기우스나 마니교같은 이단적 견해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죄의 근원을 하나님 또는 인간이나 악마로 간주하거나 죄를 단디 무(無) 또는 단순한 결핍으로 보는 일방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오히려 신적인 인과율과 인간의 자유 모두를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우리는 죄가 부분적으로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존재 밖에 그 근원을 가지고 있음을 의식한다.” 악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는 신적인 인과율에 근거한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하나님에게서 돌아서는 행위가 죄라면,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일 수 없다. 죄의 상태에서도 인간은 아직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구속의 관계성이라는 조건하에서 하나님을 죄와 악의 창시자로 보았을 뿐이다. “죄는 하나님에 의해 명해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속 또한 하나님에 의해 명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가 하나님을 구속의 창시자라는 것과 같은 의미로 죄의 창시자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은총은 하나님의 선물인 반면, 죄는 인간 자신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가 죄를 짖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할 때, 하나님에게호 향하게 된다. 죄 의식 없이는 결코 은총에 대한 의식을 가지지 못하므로, 하나님은 은총과 병행하여 죄의 존재를 규정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구속의 필요성을 의식하도록 자극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 죄와 악에 대한 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죄 의식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다. 따라서 죄와 악은 그 자체에서 혹은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디 구속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한다.

 

죄를 존재하게 하는 신적인 인과율은 무엇인가? 하나님 의식의 무력상태인 죄를 일으키는 신적인 활동은 무엇인가? 슐라이에르마허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지이다. 명령하는 하나님의 의지는 이 하나님 의식의 무질서를 우리에게 죄의 원인이 되게 한다. 따라서 죄는 하나님이 의지를 통해 일어난다. 죄를 포함하여 세계를 창조한 것과 나사렛 예수를 구속의 선포자로 정한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시작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슐라이에르마허는 전통 신학과는 다른 죄관을 제시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나 불충성,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 행위 심지어 사탄에 속박당하는 것도 되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는 죄가 인간의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부터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 곧 하나님과의 관계의 혼란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죄 의식을 무력한 신 의식과 동일시했다. 이 무력한 신 의식을 인간에게 죄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적이며 효력 있는 의지이다. 따라서 죄의 원인을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서 찾은 것이 슐라이에르마허 죄관의 특징이며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라는 개념이 슐라이에르마허 죄론의 핵심이다.

 

결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네안더(Johann Neander)는 스승 슐라이에르마허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신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갈 그 사람이 운명하셨다.” 이 예언은 적중했다. 오늘남 현대 신학이 슐라이에르마허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리타드 니이버(Richard R. Niebuhr)에 따르면, 종교적인 측면에서 19세기는 슐라이에르마허의 세기였다. 프랑스 혁명과 칸트로부터 시작하여 트뢸취, 하르낙 및 제1차 세계대전까지 전개되었던 프로테스탄트 사상의 발전을 설명하다 보면, 그런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새로운 신학과 새로운 학파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태동하게 했던 소수의 신학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개신교의 신학적 통찰을 요약하고 기독교 사상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슐라이에르마허 없이 19세기와 20세기 신학을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슐라이에르마허에 비판적인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삼고, 그것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이런 신학사적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비판과 거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신학 사상의 결정적인 약점은 무엇인가?

 

슐라이에르마허의 오류로 흔히 세 가지가 지적된다. 범신론, 주관주의 및 불가치론이 그것이다. 특히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소위 그의 범신론이다. 그는 ‘종교론’ 출판 이후 끊임없이 범신론 혐의를 받아 왔다. 당시 사람들은 슐라이에르마허에게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그를 범신론자로 간주했다. 사실상, 범신론적 경향이 ‘종교론’ 초판이나 ‘신앙론’ 초판에서 발견된다. 이로 인해 슐라이에르마허는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그 자신 만년에 가서 초기의 입장을 상당히 수정하게 되었다.

 

‘신앙론’ 2판에서 절대 의존 개념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했다. 절대 의존 감정은 세계에 대한 의존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의존 감정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하나님을 세계로부터 구별하고 있다. 이러한 수정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에르마허는 적지 않은 후대 학자들로부터 범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가 범신론 혐의를 받게 된 것은 하나님과 세계를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인격성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슐라이에르마허에 대한 또 다른 비판점은 그의 심리적 주관주의이다. 그는 인간의 감정을 종교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종교적인 경험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따라서 그는 신학은 종교적인 감정에 대한 설명이며, 하나님은 단디 신자의 경험에서만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토대와 기본적인 전제를 제시한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객관적인 계시를 등한시하고 주관주의적인 경험을 중시한 슐라이에르마허의 견해는 신학의 객관적인 토대를 거부하는 한편,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의 가능성을 포기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불가지론자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론’에서 우주를 종교의 대상으로 간주했으나 그 본질을 체계적으로 해명하지 않았다. 우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종교의 영역을 벗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불가지론적 경향은 ‘신앙론’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하나님 자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단지 인간이 경험하는 하나님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의식 속에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을 감정에 의해 감지할 뿐이며,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슐랑이에르마허의 이런 입장은 일종의 불가지론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존재와 영적인 영역에 대해 불가지론적 입장을 보인 것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그런 태도를 취한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현대 신학이 시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은 흔히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신학 방법론상의 오류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는 성경, 신조 및 교리를 신학의 토대로 삼는 전통적인 신학과 달리,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과 현실 상황을 신학의 기본 자료로 삼았다. 이것은 계시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연구로 신학을 전락시켰다. 따라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그가 도달했던 결론이 아니라 그가 택했던 방향에 의해서 그리고 제시한 대답이 아니라 그가 제기한 문제에 의해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누리는 것이다.

 

  

□   쉴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rermacher)의 해석학적 신학

                                                                                            조성노 박사(현대신학연구소 소장)

쉴라이에르마허는 1768년 브레슬라우(Breslau)에 있는 프로이센(Preussen) 군대의 육군 군목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러시아는 18세기 초에 왕국을 형성한 나라로 독일을 통일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던 프러시아를 말함) 그의 아버지는 개혁교회의 목사였는데 대단히 엄격하고 보수적이어서 18세기를 풍미했던 경건주의적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쉴라이에르마허도 자연히 그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초등교육도 모라비안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머허는 자기의 스승들과 아버지가 유럽 땅에서 당시 새롭게 일고 있던 지성의 기운을 백안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터는 할레(Halle)대학으로 떠난다. 그는 할레대학에서 고대 희랍 철학과 Kant를 연구하며 17세기 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강의도 들으면서 1790년에는 별다른 감흥도 없이 목사시험도 치룬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자아와 세계에 대한 의식이 싹트기 시작한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개혁교회의 설교자와 할레에 있는 도나(Dohna)백작의 가정교사가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도나 백작의 집에서 대단히 교양 있는 상류사회 인사들과 더불어 지성적인 교제를 나누면서 점차 사상적으로 성숙해 갔다. 그후 1793년에는 다시 베를린으로 일자리를 옮겨서 한 자선 병원의 설교자로 일하면서 계몽주의 운동의 총본부라 할 수 있는 베를린의 철학적, 문학적 낭만주의의 자극을 깊이 받는다.

 

그러나 쉴라이에르마허 당시에는 이미 그 운동이 쇠퇴기에 들어가고 이제는 낭만주의의 부드러운 곡조가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때였다. 쉴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의 대표적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쉴레겔(F.Schlegel)과 그의 주변에 있는 자들과 친구가 되었고 마침내는 그 사교 모임의 지도적인 인물로 부상된다. 바로 그 사교 모임에서 쉴레겔의 권면으로 1798년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 봄에 출간한 책이 저 유명한 '종교론'( ber die Religion)이다. 이 책은 종교를 멸시하는 문화인들에게 종교를 새롭게 변증하는 책이었는데 출판되자 마자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1800) 초에 '독백록'(Monologen)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종교론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윤리론을 다룬 저작이었다. 이 시절에 그는 쉴레겔과 함께 Platon의 전집을 공역하는 일에도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루노프(E.Grunow)라는 부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베를린의 생활은 우울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 일로 쉴라이에르마허는 교회를 사임하고 1802년에 조그마한 시골교회로 임지를 옮기게 된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낙관적이었던 그의 낭만주의적 사상이 급격히 약화된다. 다행히 그는 2년간 그 시골에 있으면서 시골교회를 돕는 한편, 조용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어, 마침내 '지금까지의 윤리학에 대한 비평'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플라톤 전집 제 1권도 번역하여 세상에 내놓게 되었는데 이 플라톤 전집의 번역 출판은 독일 정신사에 위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학문적인 성과는 쉴라이에르마허의 생애에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1804년 쉴라이에르마허는 할레대학의 교수로 초빙이 된다. '지금까지의 윤리학에 대한 비평'이 학문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가 된 것이다. 할레대학에서 그는 철학적 윤리학, 해석학, 조직신학과 갈라디아서를 강의했다. 그리고 할레대학 교회의 설교자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할레대학에서의 그의 학문적인 노작은 대단히 다양하였는데, 이를테면 '신학연구 개론', '크리스마스 축제'(Die Weihnachtsfeier) 또 두 권의 설교집과 디모데 전서에 대한 논문집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저작된 것들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불란서 군대가 독일 땅을 침공해서 할레대학의 인접한 도시까지 점령하는 바람에 더 이상 강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그는 1807년 겨울에 다시 베를린의 친구들에게로 돌아간다.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가자 마자 '성 삼위일체 교회'의 설교자로 임명이 된다. 매주 정규적으로 행한 초기의 그의 설교는 나폴레옹의 침략 행위를 격렬하게 규탄했고, 또 당시 독일의 정치적인 불안과 국가적 혼란의 원인을 날카롭게 지적을 하면서 베를린 시민의 자유의식을 고취시키는 정치적 설교였다. 그러므로 불란서 점령 당국에 여러 차례 연행되어 경고를 받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그때그때 자기에게 부딪혀 오는 모든 문제에 관해 과감히 말하고 행동했다. 그는 그같은 자신의 행위가 윤리학적으로 타당하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의 윤리학적인 입장에 따르면 개인은 시민과 국가 모두를 위해 그들 사이에 건전한 균형을 이룩하여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공공 생활의 제반 영역에 과감히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실라이에르마허의 상(象)은 정열에 불타는 애국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1809년 그러니까 그가 40세 되던 해, 가까운 친구의 젊은 미망인과 결혼을 하고 그 다음해에는 막 새롭게 건립된 베를린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어 1834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베를린대학의 교수로서 그리고 마지막까지 성 삼위일체교회의 설교 강단을 지킨 설교자로서 헌신을 다하였다. 당시 대학에는 철학을 강의하던 동료 교수 헤겔이 있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윤리학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독일의 위대한 관념론자인 이 헤겔을 비판한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1821년과 1822년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흔히 '신앙론'이라고 하는 '그리스도교 신앙'(Der christliche Glaube)를 출판한다.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교의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 다음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외에도 그는 무려 4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따라

서 그는 공헌도 많았고 과오도 적지 않았지만 그러나 현대신학에서의 그의 위치는 마치 현대 생물학계에서의 찰스 다윈의 존재와 비슷하다고 할수 있겠다. 그의 저작들을 떠나서는 현대신학의 계통적인 사상들을 이해할수 없기 때문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사상

 

19세기 개신교가 사상적으로 대단한 격동기였던 19세기에 대응한 첫번째 문제는 그 시대의 지식인들이 제기했던 물음들이었다. 이는 지성인들이 과연 그리스도교 진리를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당시의 지성인들은 모두가 18세기 합리주의를 상속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지식 분야가 점점 더 넓어짐에 따라 이제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메시지란 아득하고도 미개한 고대의 산물이어서 성숙한 19세기의 지성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유치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성인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지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 전혀 바람직한 일이 못되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19세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독일 내에는 또다른 조류가 작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소위 낭만주의 운동인데,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의 이 낭만주의는 인간생활의 영역 중, 단순한 지적인 영역 이외의 다른 영역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운동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삶의 풍요란 지적인 것보다는 오히려 상상력이라든지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 또 인격의 자유와 개성 등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시와 노래와 연극 등의 예술을 선호하였고, 삶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보다는 오히려 삶의 삶의 신비성이라던가 기대 불가능성, 예측 불가능성 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낭만주의자들에게도 종교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삶의 진정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의 눈에는 종교 역시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합리주의적인 것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종교란 그 속에 삶의 감정적이고도 경험적인 측면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인식이 되었다. 그러니까 19세기의 그리스도교는 합리주의적인 지식인들로부터도 반지성적이라고 매도되었고, 낭만주의자들로부터도 지성에 호소하는 종교로 치부 당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세기 그리스도교가 당했던 큰 위기적 상황이었다. 쉴라이에르마허가 그의 위대한 두 저작인 '종교론'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바로 합리주의와 낭만주의라고 하는 양대 사조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신학적으로 응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를 그 시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해석학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1. 종교론( ber die Religion)

 

이 책은 종교의 본질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종교에 대한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오해를 일거에 해소하고자 했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의 기본 명제는 종교는 신조나 교리 혹은 신학적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그 본질에 있어서 하나의 경험이요 깨달음의 감각이요 느낌이라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이 한 마디가 당시 상황에 파급시킨 영향은 실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부정했던 합리주의자들과 낭만주의자들의 공통된 과오는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이 종교를 하나의 신조나 교리나 신학적인 체계로 오해했다는 데 있었다. 합리주의자들은 합리주의자들 대로 그리스도교적 교리 체계를 반지성적이라고 외면했고 낭만주의자들은 또 낭만주의자들 대로 인간의 지성에 호소하는 종교라 하여 외면했으나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 자신의 저작 속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은 대단히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언어들을 통해서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개념은 비교적 분명하다. 종교는 도덕도 아니고 선행도 아니라는 것이다.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신학적인 체계도 아니라는 것이다. 또 종교는 사변적인 철학 속에서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낭만주의자들에게 종교를 설명하면서 그 종교의 진수는 만유(All)와의 조화된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즉 종교는 각 사람들 속에서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해는 인간은 이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세계와 조화되어야 하고 또 세계와 이 세계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세계와의 화해 속에서 인간은 자기가 이 세계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이 세계가 의존하고 있는 신께 절대 의존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체험은 다시 인간으로 하여금 '의존'이란 인간의 숙명적인 본질로서 누구도 예외 되지 않고 공유하는 것임을 깨닫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또한 절대의존의 조건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서로 연계되어 있고 일체성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도 된다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론에서 "경건한 사람의 체험이란 모든 유한한 존재들이 무한자 안에서 무한자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 의식이다. 종교는 살아 움직이는 모든 존재자 속에서 모든 성장과 변화 속에서 모든 행동과 수고 속에서 바로 이것을 찾고 발견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신 안에서의 삶이며 신 안에서 모든 것을, 모든 것 안에서 신을 소유하는 삶이다."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적 체험은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모든 존재가 신에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서로 연합되어 있다는 일체성에 대한 깨달음.

2) 모든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감독.

3) 모든 유한한 존재가 그 속에 존재하는 무한자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감독하는것 등이 종교의 본질이다.

 

이처럼 쉴라이에르마허는 어떤 신조나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은 종교를 가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전혀 착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 역시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은 본질적인 종교적 감정, 곧 절대의존의 감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쉴라이에르마허는 세계의 여러 종교들을 조사해 보면, 종교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이 분석이 얼마나 보편적인 진리인가 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한다. 세계의 모든 종교들은 모두가 그들 나름대로의 신조를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모든 종교가 단순히 이와 같은 신조의 형식을 지녀 왔다는 사실만으로 종교의 본질

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조라는 것은 본래 무한자에 대한 유한자의 의존의 인식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지적으로 표현해 놓은 명제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고 최초의 종교적 경험이 이제 성찰의 대상이 될 때 그것이 교리적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도 불가피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원인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느낌, 체험이 일차적이다. 이성이라고 하는 것, 교리나 신조라고 하는 것은 단지 일차적인 느낌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기능으로서의 이차적인 것이다. 의존이라고 하는 인간 조건에 대한 체험적 감독, 체험적 느낌 바로 그것이 종교다. 믿음의 합리적인 표현인 신조나 교리체계는 그것의 결과일 뿐이다. 이 점에 관한 한은 그리스도교도 타종교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은 이러한 신에 대한 보편적인 의존의 느낌 외에도 그 경험에 따르는 다른 두 가지 차원의 감각을 동일한 종교의 본질로 믿는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감각과 은총에 대한 감각이다.

 

2. 그리스도교 신앙(Der christiliche Glaube)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시켜 주는 이 두 가지 감각의 구체적인 내용을 그의 두번째 주요 저작인 '그리스도교 신앙'(1821-1822년 출간)이라는 신앙론에서 서술하고 있다.

 

1) 죄에 대한 감각에 관해서 말하면서 쉴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이 비록 하나님과의 교제를 경험하고 또 그것을 인식할 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의식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신의식을 상실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란 인간이 신께 대한 절대의존의 감각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해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 죄란 고립이며 의존의 감정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형태이다. 이것은 인간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의존을 공유하는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성과 일치성으로부터도 자신을 분리시키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같은 고립 상태는 마침내 인간의 삶에 엄청난 고독과 불행을 가져다 준다. 행복이란 오직 하나님 및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성을 인정하는 데서 찾아져야 한다. 인간이 참된 평화를 발견할 수 있는 길은 바로 이 절대의존의 느낌, 감정이라고 하는 종교적인 체험을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다. 그 때 비로소 인간은 소외와 고립을 극복하고 자기의 자아와 그리고 신과 이 세계와도 진정한 화해를 이룩하게 된다.

 

2) 쉴라이에르마허는 특히 그리스도교의 구속 관념을 다루면서 은총에 대한 감각이 그리스도인의 종교 경험의 중요한 일부임을 강조하고 있다.예수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의 신의식을 상실하게 된 역사의 한 구체적인 시점에 하나님의 중보자로 보내졌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은 바로 그의 신의식에 대한 중보의 역할이었다. 그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최상의 일체성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 사실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라고 표현한 예수 자신의 고백적인 언어 가운데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렇듯 예수는 신을 인간에게 완전히 계시한 분이면서 인간이 신과 더불어 갖는 참다운 관계가 어떠한 것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준 분이었다. 예수의 중보의 사명은 우선 그 자신의 완전한 현실 직관, 다음은 그 자신의 신의식을 인간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구속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절대의존의 감정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해 그 참다운 본성으로부터 자아가 철저하게 소외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신의식과 신과의 일체성의 의식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구속함을 받는 경험, 고립과 소외의 상태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구속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의 충격적인 경험이다. 구속은 이성적 사고에 의하여 도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다. 그래서 구속은 인간의 삶으로 구체화된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은총 또한 하나의 신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신의식이 갱신되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이성은 은총에 대한 이런 감각을 신조로 표현하기 위해 정식화할 수 있고 또 정식화해야겠지만 그럼에도 은총은 경험이지 개념은 아니다. 쉴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상과 같은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교회론도 다루고 있다.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교회의 의미란 교회의 본질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가 교회에 소속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험에 있다. 역사적 교회는 교회가 시작된 이후로부터 교회에서 보존되고 생활화되고 선포된 예수의 삶과의 접촉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신의식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계속하여 증거해 왔다. 한마디로 말해 교회는 인류의 계속되는 그리스도 경험이다. 인간은 교회 안에서 교회가 제공하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체험을 갖게 되고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신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공동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연합의 자리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에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도 교회의 본질과 사명은 설교, 곧 말씀의 선포에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선포되는 그 말씀을 특정한 반응과 동의를 구하는 교리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예수 자신에게 유래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그 속에 계시는 예수의 의식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설교와 성례와 교제를 통해 그 의식이 다시 순환, 교류 되도록 하는데 있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그리스도의 의식과 일치되고 교회는 그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

 

3) 이제 '그리스도교 신앙'에 나타나는 쉴라이에르마허 사상의 마지막 측면을 지적하기로 하자.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의 종교란 강력한 사회적·윤리적 성격을 띤다. 이것은 신에게 의존해 있다는 의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런 의식을 공유한다는 연줄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식, 그리고 이런 의식들이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져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의 고립이나 자아의 선택이라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이고 인간의 기본적 본성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불행만을 초래할 뿐이다. 인간 본연의 삶은 신과의 명백한 교제 속에서 그리고 동일 운명의 타인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쉴라이에르마허에게 있어서의 사회적·윤리적 차원이란 종교의 한 근본적인 측면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대가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결론적으로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가 각 시대 시대의 문제들, 그 문화적 표현 양식들, 그 지적인 선입견들을 이해하지 않는 한 어떤 시대에 대해서도 그 시대가 귀 기울일 만한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엄밀하게 말하면 쉴라이에르마허는 폴 틸리히(P.Tillich)의 상관방법의 원리를 가장 처음으로 도입한 근대 신학자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무시간성을 강조하는 입장과는 달리 시대 시대에 대한 적합성을 말하려고 했던 이러한 관심이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의 최대 강점이었다. 이처럼 쉴라이에르마허는 시대 정신과의 대결 필요성을 인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화의 초점이 무엇인지도 간파한 사람이었다. 19세기라고 하는 시대가 주로 관심 한 것은 개별적인 인간 인격, 곧 자아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의미성, 즉 본질도 자아의 주관적인 체험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것은 좁은 지성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이 아니라 경험, 체험이 종교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체계가 얼마만큼 참된 그리스도교적 노선 위에 서 있느냐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선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종교의 주관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였다는 점이다. 극히 조심하지 않는 한 주관적인 요소는 언제든지 주관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란 결국 개인적인 주관적 경험이 각자에게 말해 주는 것 그 이상이 아니게 된다. 따라서 쉴라이에르마허가 객관적인 계시에 대해서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피하기가 어렵다. 또한 그의 신학이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하나님 의식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비난도 변명 되기 어려울 것 같다. 어쨌든 쉴라이에르마허가 부단히 탈피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학이 이른바 심미주의적 요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힘들다. 물론 아직까지도 쉴라이에르마허 신학에서 말하는 감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명쾌하지가 않다. 다만 주관적인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정서적으로 착색한 것인가? 어쨌든 쉴라이에르마허에 대해 반발한 최초의 현대 신학자는 칼 바르트인데, 그는 그리스도교의 기초란 궁극적으로 인간의 감정적 정서적 체험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라고 주장하면서 쉴라이에르마허의 입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성서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바른 사상들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사상들이다. 성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이야기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또 우리가 어떻게 그에게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우리에게 이르는 길을 찾고 발견하셨는가를... 우리가 그와 가져야 할 바른 관계가 아니라 그가 아브라함의 정신적인 자녀들이 된 모든 사람들과 맺으신 계약,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날인하신 계약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   슐라이어마허의『신앙론』

                                                                             최홍덕 (서울배움터 신학과 교수, 조직신학)

슐라이어마허의 교의학적 저서는『신앙론』이다. 물론 그 정식적인 타이틀은『복음주의교회의 원칙에 근거하여 조직적으로 서술된 기독교 신앙』(Der christliche Glaube nach den Grundsaetzen der Evangelischen Kirche im Zusammenhange dargestellt; 제1판-1821/22년, 제2판-1830/31년)이다. 슐라이어마허의『신앙론』은, 일반적으로 신학사(神學史)에 있어서 <교의의 학>에서 <신앙의 학>에로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신학에 의하면, 교회적 교의(敎義)는 초자연적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교의는 신앙의 규범으로 이해되었으며, 결국 신앙이란 교의명제를 지적으로 승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러한 사태(事態)에 대하여 슐라이어마허는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교의는 신앙의 규범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경험, 즉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경험의 소산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기독교 신앙명제(교의)란 “기독교적인 경건한 심정의 상태에 대한 해석이 언설로 표현된 것”(CG2, I, hrsg. v. Mrtin Redeker, Berlin, 1999, § 15Leits., S. 105)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교의가 신앙에 선행(先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체험, 즉 기독교적인 경건한 자기의식이 교의에 선행하는 모태인 것이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는『신앙론』에서 종교의 본질로서의 경건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경건은......지식도 아니며, 행위도 아니라, 감정 혹은 직접적 자기의식의 한 양태이다.”(Froemmigkeit......ist......weder ein Wissen noch ein Tun, sondern eine Bestimmtheit des Gefuehls oder des unmittelbaren Selbstbewusstsein. CG2, I, § 3Leits., S. 14.) 이처럼 슐라이어마허는 신앙의 본질적인 체험과 그 체험에 대한 성찰(Reflexion)로서의 교의를 예리하게 구별하는 동시에, 모든 기독교적 교의는 기독교 신앙(체험)에 근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래서 슐라이어마허는 주로『신앙론』의 <서론>에서 경건과 자기의식의 관계에 대해서 정교하게 다룬다.(『신앙론』은 2권으로 되어 있으며, <서론>, <제1부>, <제2부>,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경건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자로서, 바꿔 말하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자로서 의식하는 것”(CG2, I, § 4Leits., S. 23)이다. 이 의식의 최고단계를 그는 <절대의존의 감정>(das schlechthinnige Abhaengigkeitsgefuehl)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감정>은 종종 어떤 정서적인 것이거나 신비적인 것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헤겔(G. W. F. Hegel)은 다음과 같이 슐라이어마허를 비판하였다.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가 단지 감정에만 기초된다면, 그러한 감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의존감정 이상의 어떤 규정도 갖지 못한다. 그렇다면 개야말로 가장 우수한 그리스도인일 것이다.

 

왜냐하면 개는 이 감정을 가장 강하게 자기 속에 지니고 있으며, 특히 이 감정 속에서 삶을 영위하기 때문이다.”(F. W. Kantzenbach, Schleiermacher, ro/ro/ro, 1967, 70에서 재인용) 이러한 헤겔의 슐라이어마허 비판은 최고 지성인의 가장 어리석은 비판으로 인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절대의존의 감정>이란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그래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신을 의지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딘가 밖으로부터 촉발되는 것”(Irgendwohergetroffensein; CG2, I, § 4, 2, S. 25)에 의존되는 것으로 인간의 수용성(Empfaenglichkeit)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어떤 정서적인 차원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존재론적인 차원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 의하면, “(절대의존의 감정은) 우리의 현존재 전체에 수반하며, 절대적 자유를 부정하는 자기의식” 속에 배타적으로 존재한다. 즉 “우리의 모든 자기활동성은 우리 밖에서 오는 것임을 의식하는 것이다.” 결국 이 <밖>, 즉 현존재(Dasein)의 유래를 슐라이어마허는 하나님(Gott)이라고 보며, <절대의존의 감정>을 “하나님의 근원적 계시”(eine urspruengliche Offenbarung Gottes)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CG2, I, § 4, 3; § 4, 4, S. 28-30). 이와 같이 서론에서 계시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슐라이어마허는 제1부와 제2부에서 창조론, 인간론, 신론, 그리스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서술한 후, 삼위일체론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의『신앙론』의 특징은, 칼 바르트에게서도 볼 수 있는 그리스도(론)적 집중이라고 할 수 있다.

 

                                    

□   슐라이어마허의 신학구조론

                                                                              최홍덕 (서울배움터 신학과 교수, 조직신학)

오늘날 신학의 구조는 전체적인 윤곽에서 본다면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그리고 실천신학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구조를 근대적인 학문적 논의에서 처음으로 다룬 신학자가 슐라이어마허이다.

 

그는 그의『신학연구입문』[정식명칭은『입문적 강의를 위한 신학연구의 간단한 서술』(Kurze Darstellung des theologischen Studiums zum Behuf einleitender Vorlesungen)이다.]에서 신학을 크게 세 분야로 구분했다. 즉 철학적 신학(philosophische Theologie), 역사적 신학(historische Theologie), 그리고 실천적 신학(praktische Theologie)이다. 먼저, 철학적 신학은 당시 일반적으로 수행되고 있었던 신학분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슐라이어마허만의 독특하고도 혁신적인 분류이다. 이 학과에서는 기독교교회의 현상에 있어서 본질적은 것은 무엇인가를 규명하며, 그 기독교의 본질을 이념으로 하여 다시 기독교교회에 관한 것들을 비판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따라서 철학적 신학은 <변증학>(Apologetik)과 <논쟁학>(Polemik)으로 분류된다.

 

전자는 기독교 및 프로테스탄트의 고유한 본질을 여러 문화와 종교 가운데서 규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철학적 윤리학 및 종교철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자는 기독교의 본질 및 프로테스탄트의 본질이 기독교교회 공동체 속에 바르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검토함으로써, 그 공동체의 병적인 일탈을 자각하여, 공동체를 본질에 일치시키려고 노력한다. 이처럼 변증학이 기독교교회 밖을 향한 것이라면, 논쟁학은 기독교 교회 안을 위해 수행되는 것이다. 다음에 역사적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적 소재를 고찰하는 신학의 한 부문”(KD2, § 81, S. 35.)이다.

 

슐라이어마허가 “기독교이념과의 진정한 관계 속에서, 모든 시점(jeder Zeitpunkt-필자 주; 교회의 역사를 의미)을 서술하지 않으면 안 된다”(KD2, § 27, S. 11)고 말했듯이, 역사적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현상 전체를 파악하는 것을 그 과제로 한다. 그러므로 역사적 신학은 철학적 신학을 전제로 하여 영위된다. 슐라이어마허는 역사적 신학을 석의신학(필자 주; 오늘날의 성서신학에 해당), 교회사, 교의신학, 교회통계학(kirchliche Statistik) 등으로 분류하였으며, 그것들을 다시 세부적인 학과들로 구분하였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교의신학을 역사적 신학에 편입시켰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의신학을 마치 신학전체인 것처럼, 혹은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규범에 관한 것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예를 들면, Fundamentalismus). 그러나 슐라이어마허는 교의학(Dogmatik)을 “어느 일정한 시대에 승인되어 있는 교설을 총괄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라고 논함으로써, 즉 <어느 일정한 시대에>라는 한계를 지움으로써, 그러한 사고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한편 교회통계학 역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분류에 있어서 독특한 것이다. 노박(K. Nowak)에 의하면, 교회통계학은 교회 사회학(Kirchensoziologie), 혹은 교회학(Kirchenkunde)을 의미하는 것으로, “교회공동체에 있어서 그 외적인 관계들(즉 유기적 조직체, 교회지도, 타 교회와의 관계 등)을, 교회공동체에서 종교라는 내적인 관계 속에서 연구하는 것”이다(Kurt Nowak: Schleiermacher, Goettingen 2001, 230).

 

마지막으로, 실천적 신학은 슐라이어마허가 최초로 확립한 신학분과이다. 이것은 철학적 신학과 역사적 신학의 탐구를 기반으로 하여 수행되어져야 할 학과로서, 교회지도를 위한 <기교의 규칙>(Kunstregeln) 혹은 <기술>(Technik)을 그 과제로 한다. 즉 실천적 신학은 교회가 현실적으로 갖고 있는 구체적이고도 실용적인 내용에 대해 다양한 지침과 원칙을 제공한다(KD2, § 25, S. 10). 개별적인 교회공동체에 관한 것과 개별적인 차원을 초월한 전체 교회공동체에 관한 것으로 대별된다.

 

오늘날 여러 신학자들(예를 들면, G. Ebeling)이 신학의 분야가 극도로 세분화 되어가는 경향을 염려하고 있다. 신학의 정체성이 모호해질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신학이라는 학문자체가 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를 염두에 둘 때,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의 구조는 <기독교 본질>이라는 이념과 <교회지도>라는 실천을 중심으로 하여, 전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신학의 전 분야, 즉 성서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등을 신학의 전체성이라는 차원에서 통일된 구조를 갖게 하는 <기초신학>(Fundamentaltheologie-에벨링의 개념)이 절실히 요구된다.

 

                               

□   슐라이어마허의 교회를 위한 신학

                                                                                  최홍덕 (서울배움터 신학과 교수, 조직신학)

슐라이어마허는 일반학문과 동등한 선상에서 철학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신학의 학문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신학은 체험, 즉 인간의 하나님의 계시와의 만남(신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봄으로써, 신학은 타학문의 성격과 전혀 다른 독자성과 독립성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은 변증적(apologetisch)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매우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슐라이어마허의 신학을 아예 철학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으며, 또한 교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오해에 불과하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신학은, 철학과 같이 지(知, Wissen)의 이념을 중심으로 해서 전체적인 통일을 이루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신학은 “실천적 과제의 해결”(Loesung einer praktischen Aufgabe)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목적과 관련하여 형성된 실정적 학문(positive Wissenschaft)이다[KD2, § 1의 Zus(a)]. 그가 말하는 <실천적 과제의 해결>이란, 구체적으로는 “교회지도”(Kirchenleitung)에 있어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KD2, §§ 3, 5). 이렇듯 슐라이어마허가 이해하는 신학은 철저하게 교회를 위한 신학이며, 교회내의 실천을 위한 것이다. 단순히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판넨베르크(W. Pannenberg)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쉘링(F. W. J. Schelling)에게 있어서 신학은 ‘무차별점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학문으로서, 즉 ‘절대적이면서 신적인 본질의 직접적 학문’으로서 이해된 것과는 달리,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는 ‘실천적인 것’으로서 ‘교회지도’의 과제와 관계된 학문이다”(W. Pannenberg, Theologie und Philosophie, Frankfurt am Main, 251).

 

그러면 슐라이어마허가 주장하는 <교회지도>란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서 이 개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는데, 하나는 각 개별적인 교회공동체의 차원을 초월한 지도활동, 즉 '교회치리'(Kirchenregiment)이며, 다른 하나는 각 개별적인 교회공동체내의 지도활동, 즉 '교회봉사'(Kirchendienst)이다. 여기서 특히 후자에는 예배, 설교, 교육, 목회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교회지도에 참여하는 지도자는, 무엇보다도 학문적 정신(이론)과 종교적 관심(경건한 신앙의 실천)의 일치라는 이념을 습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KD2, § 9). 만일 양자의 균형관계가 상실된다면, 교회지도자는 실천을 직시하지 못하는 단순한 탁상 신학자가 되어버리거나, 아니면 비판적 정신을 결여한 단순한 실무자로서의 성직자에 머물게 된다고 슐라이어마허는 갈파한다.

 

이처럼 신학의 실천적 과제를 강조한 슐라이어마허는 결국 <실천적 신학>(Die praktische Theologie)을 학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신학에 있어서 실천신학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는 나무비유로 말하기를, 신학연구에 있어서 <철학적 신학>은 “뿌리”(Wurzel)이며, <역사적 신학>은 “몸통”(Koerper) 그리고 <실천적 신학>은 “수관”(Krone)이라고 하였다(KD1=KGA I/6, §§ 26, 36, 31).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실천적 신학>이 “신학”에 있어서 “수관”이 아니라, “신학연구”에 있어서 “수관”이라는 사실이다. 즉 실천신학이 신학에 있어서 왕자의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학연구에 있어서 <철학적 신학>과 <역사적 신학>이 연구된 토대 위에서 마지막으로 행해져야 할 신학분야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종종 오해되어 과거에는 실천신학이 신학들 중의 신학인 것처럼 이해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한편 칼 바르트도 신학의 장소를 교회로 보았다는 점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사고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신학은 교회를 위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르트는 신학의 역할을 하나님에 관한 언설(Rede)의 내용을 검증하는 것이라고 봄으로써, 신학을 교회지도를 위한 것이라는 차원에서 본 슐라이어마허보다는 협소한 견해에 머무르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Karl Barth, Die kirchliche Dogmatik, I/1, S. 1)

 

                                    

□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과 해석학

                                                                                                                 황기식(평택대 신대원)

스탠리 그렌츠, 로저 올슨 [20세기 신학]

슐라이어마흐

 

 제 1 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 Friedrich Schleiemacher, 1768 - 1834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목 차

 

1 장 서론 -

2 장 슐라이어마흐의 삶과 경력 -

3 장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

4 장 신학적 방법 -

5 장 교리적 헌신 -

6 장 슐라이어마흐의 해석학 -

1절 보편해석학 -

2절 해석의 방법 -

3절 결론 -

7 장 평가 및 결론 -

 

 제 1 장 서론

 

19세기 신학자들은 인간 생활 안에 종교라는 어떤 특정의 자리를 정함으로써 계몽 사상에 의해 초래되었던 공견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흐는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킬 것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그가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력은 뉴턴이 물리학에, 프로이드가 심리학에, 그리고 다윈이 생물학에 끼친 것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슐라이어마흐를 현대 신학으로 인정한다.

 

슐라이어마흐가 이러한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학에 있어서 새 시대를 창도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 사상과의 갈등 속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풀어 주기 위하여 그가 취한 방법과 접근법이었고, 그것은 그 이후 200년 간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위해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그의 동조자들뿐 아니라 그의 반대자들도 신학적 지식을 이룩하는 데 쓰이는 바, 그가 형성시켜 놓았던, 이 새 방법 때문에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슐라이어마흐 연구는 그가 가졌던 특정한 교리적 견해들보다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이다.

 

3 장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은 주로 그가 살던 문화적 상황과 지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은 기독 교회의 국교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고 대신 ‘이성의 여신’을 등극 시켰다. 이성을 감각적 경험의 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칸트의 제한은 신앙과 이성을 연관지었던 어떠한 종교사상에도 심각한 문제를 안겨 주었다.

 

4 장 신학적 방법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인 어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인간경험에 기초하는 신학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실천이상에 두려 했던 칸트의 시도나 절대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것을 탐색하는 새로운 사변적 합리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놓으려고 했던 헤겔의 노력과 함께, 계몽주의의 여파속에서 신학을 시도했던 세 번째 주요한 노력이다.

 

슐라이어마흐는 직관을 통하여 하나의 대안적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의존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의 또는 교회적 의식이나 절차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쉽게 식별이 되는 통합적 요소’-즉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흐가 종교를 ‘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어의 Gefühl이라는 말은 영어로 감정(sensation)이라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말은 의식 중에 ‘성찰-이전적’ 상태, 곧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 혹은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종교적 감정(그것을 종종 ‘경건’이라고 불렀다)이 인간의 경험 안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

 

종교의 자치권을 확립하고 그것을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보편적 인간의 경험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그 위치를 설정한 후, 슐라이어마흐는 신학 자체로 관심을 돌린다. 가장 광범위하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학은 종교, 다시말해서 경건에 대한 인간의 성찰일 뿐이다. 그의 위대한 조직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신학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보편적 경건, 또는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의식 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표현하는 한 형태이다. 그는 경건의 한 구체적인 형태를 식별하여 그거을 기독교적인 ‘하나님-의식’또는 가독교적 ‘자아-의식’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가 의미하는 바 ‘기독교의 종교적 감정’-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고 성취된 기독교의 ‘하나님-의식’이나 ‘자기-의식’이라는 경험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신학적 방법에서 그가 이룬 혁신은 이른바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turn to the believing subject)데 있다.

 

현대신학에 대한 그의 기여들 가운데 하나는 교리들의 문화적, 역사적 성격을 강조한 점이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적 경험이 주된 것이고, 신학은 그 다음으로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독교 공동체들의 변화하는 양상과 관련하여 항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교리의 형태는 어떤 특정의 시기에 국한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영속적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건 살아있는 종교적 의식의 함의를, 비판적 성찰에 의거하여 새로이 표현하는 것이 산학의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를 인간 경험에 있어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로서 보아 그 독특성을 주장했고, 예수 그리스를 ‘하나님-의식’의 지고한 표현으로 보아 그의 독특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계몽주의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다.

 

5 장 교리적 헌신

 

그는 모든 교리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아-의식’ 즉,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썼다. 분명히 슐라이어마흐는 성경이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거나 무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하나님-의식’의 순수한 모델이 나타날 때마다, 기독교 신학을 위한 하나의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신학을 위한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후자 곧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 안에 재현된 ‘하나님-의식’이다.

 

1 절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돌리는 그의 모든 속성들이 하나님 안에만 특별하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절대 의존 감정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방식에 있어서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한 진술은 하나님-그 자체(God-in-himself)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떤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가 재구성한 하나님 이해는 전통적 기독교 사상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죄와 악의 창시자라는 사실은 피조물의 의존성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 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그 외의 다른 대리자의 몫으로 돌리게 되면, 그의 전능성이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죄라는 것을, 그속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정하셨다고 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중보 기도의 효과를 부정했다. 하나님에게 일의 진행 과정을 바꿔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끝으로, 삼위일체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기독교 신앙] 맨 뒤에 나 오는 짤막한 결론 부분으로 가지고 냉담하게 진술하기를, 그것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를 거절했다. 하니님이 인격적이라고 하지만, 신인동형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초인격적인 능력인데, 피조성이 그 존재에 부과하는 모든 차별성을 뛰어 넘는다.

 

2 절 기독론

 

슐라이어마흐는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식’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그것을 대치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외에는 나머지 인간들과 완전히 같다.

 

그러므로 구속자는 인간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가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이다. 슐라이어마흐에 의하면, 예수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상성이다. 곧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니님-의식’의 이상이며, 완전한 경건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구속 사역은 그가 이러한 하나님-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재생산성(Vorbildlichkeit)이다.

 

6 장 슐라이어마흐의 해석학

 

1 절 보편 해석학

 

1) 이해의 기술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해석학에 대한 비판을 해석학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그에 따르면, 계몽주의 해석학의 특징은

 

첫째, 그것은 해석을 모든 본문에 항상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순이나 넌센스와 같은 이해의 방해물이 있을 때에만 필요한 것으로 취급했다.

 

둘째, 그것은 번역이나 주석 경험을 통해 단편적으로 얻어진 규칙이며 시행착오를 통해 축적된 방법이다.

 

셋째, 그것은 이해의 난국이나 실패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일시적(occasional)이며, “훈육적 기능”을 가질 뿐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계몽주의 해석학은 이해의 난국에만 관계하기 때문에 철저하거나 엄격하지 못하며, 진정한 이해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했다.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해가 자주 일어나는 것은 모든 면에서 이해가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는 해석학을 본문의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에 관련된 것, 일시적인 것, 경우에 따라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문의 전체 내용과 언어에 관련된 것,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그는 관찰의 총계와 같은 규칙들을 추구하는 대신, 이해 현상 자체에 주목하고 이해가 일어나는 법칙이나 원리, 즉 이해의 조건을 제시하려고 했다.

 

한편, 그는 해석학을 언어학에 포함시키는 것도 거부했다. 언어학은 해석학을 관찰의 단순한 총계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해석 활동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글 속에 구체화된 사상을 인격적이며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본문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이해의 학, 또는 이해의 기술로 정의했다. 이해 자체가 그의 해석학의 근본적 관심사였다. 해석학은 이해가 일어나는 조건을 분석하고, 이해가 성취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해를 해석학의 본질적 과제로 간주했다. 이해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 일상 대화를 분석하고, 그 것에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보편적 요소와 개별적 요소가 그것이다. 전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에게 이용 가능한 ‘공유적 언어’를 말하며, 후자는 전달될 ‘ 개인적 메시지’를 가리킨다. 이 두 요소를 탐구한 것이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이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이해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

 

모든 언어 활동이 언어 전체 및 진술자의 사고 전체와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언어를 이해하는 데는 항상 두가지 계기가 포함된다. 즉 언어의 문맥에서 말해진 것을 이해하는 것과 진술자의 사고안에 있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슐라이어마허가 해석학을 학(science)으로보다는 오히려 기술(art)로 정의하기를 좋아했던 것도 해석학의 성공이 해석자의 “언어 능력과 사람을 아는 능력에 의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은 언어 이해, 표현, 구별력을 의미한다. 사람을 아는 능력은 사고의 구성을 결정하는 주관적 요소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해를 창조적 재형성과 재구성의 과정으로 간주했다. “ 이해는 저자의 정신 과정을 재경험하는 것이다. 즉 고정적으며 완성된 표현과 함께 시작하여, 그것이 일어난 정신 생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를 피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이해의 과정에서 오해가 일어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를 두 가지 종류, 즉 질적 오해와 양적 오해로 구분했다. 전자는 말이나 글의 내용에 관한 오해로,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본래적 의미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후자는 말이나 글의 어감에 관한 오해로, 그것으로부터 잘못된 인상을 얻는 것을 말한다. 이런 오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의 핵심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해와 설명을 구분했다. 이해하는 것과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설명은 어떤 것을 공식화하거나 언어화하는 활동이므로, 이해의 기술이 아닌, “수사학적 형식화의 기술”이다. 따라서 그는 해석학에 속한 것으로 취급된 설명을 해석학의 영역으로부터 축출했다. 이것이 해석학 발전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요약하면, 계몽주의 해석학은 시행 착오를 통해 축적된 관찰이나 규칙의 총계를 의미했으며, 훈육적 성격을 지녔고, 일시적이며 경우에 따라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슐라이어마허는 이해의 현상 자체에 주목하여 해석학을 이해의 학 또는 이해의 기술로 규정했다.

 

또한 그를 통해 해석학은 비훈육적 성격을 띄게 되었으며,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해석학사의 일대 전환점과 슐라이어마허의 독특한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2) 보편 해석학

 

보편 해석학은 모든 본문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해석 이론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본문 해석에 규범이 되지 않는 해석 모델 또는 방법론은 또한 특수한 영역의 본문에도 규범이 4되지 않는다는 신념에 근거한 것이다. 이런 보편 해석학을 최초로 발전시킨 인물이 슐라이어마허이다. 그는 1819년 4월에 시작한 해석학 강의 서론에서 그 이전에 보편 해석학이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의 근본목적이라고 선언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모든 대화를 이해하기 위한 조건을 기술하는 이해의 기술로 정의하고 그것을 보편 해석학이라고 불렀다.

 

가다머의 설명에 따르면, 슐라이어마허는 “이상한 것에 대한 경험과 오해의 가능성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해의 기술은 본문의 종류, 즉 법률 문서, 종교 경전, 문학작품 등을 막론하고 본질상 동일하다고 믿었다.

 

모든 본문은 언어로 표현되며, 문장의 의미는 문법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모든 언어 이해의 원칙들을 공식화하면, 그것이 보편 해석학이 된다고 주장했다.

 

 

해석의 특수 기술에 선행하는 이해의 보편법칙을 발견하려고 했다. 그것은 “교회의 이데올로기 감옥로부터 신학적 해석학을 해방”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반면, 이해의 대상이 처해 있는 역사적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를 통해 그 철학적 의의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철학적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해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이 일어나는 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철학적으로 논의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 자신이 이를 분명히 언급했다.

 

해석학은 오랫동안 논리학에 첨가되어 왔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해석학설을 발전시키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말하는 기술과 이해하는 기술은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말하는 것은 단지 사고의 외적 측면이다. 해석학은 사고 기술의 일부며, 고로 철학적이다.

 

2 절 해석의 방법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이해의 기술로, 그리고 이해를 본문 저자의 정신과정을 재경험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일상 언어의 두 요소의 분석으로부터 이해를 위한 원칙을 이끌어냈다. 그는 언어에 대한 이해와 진술자에 대한 이해를 해석학의 과제로 간주하고 그 방법으로 문법적 해석과 기술적 해석 또는 심리학적 해석을 사용했다. 언어의 보편적 요소, 즉 언어 자체의 탐구는 문법적 영역에 속하며, 이것은 해석의 소극적 측면이다. 반면, 언어의 개별적 요소, 즉 저자의 개별성(Individuality)의 탐구는 심리학적 해석의 영역에 속하며, 이것이 해석의 적극적 측면이다.

 

1) 문법적 해석과 심리학적 해석

 

모든 이해는 언어를 전제로 한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전달한다. 언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언어는 이해의 수단이며 사고의 매체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 사유 없는 언어와 언어 없는 사유, 모두 불가능하다. “사유는 내적 언어요, 언어는 객관화된 사유다.” 그는 “해석학의 유일한 전제는 언어이고, 발견해야 할 모든 것은 언어에서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 문법적 해석

 

문법적 해석의 중심 관심사는 언어 자체이다. 문법적 해석은 “언어로부터 그리고 언어의 도움을 통해 주어진 진술의 정확한 의미를 발견하는 기술이다.” 슐라이어마허는 문법적 해석을 위해 44개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나, 그 중 특히 첫 번째와 두 번째 것이 중요하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두 규범이 문법적 해석의 전체를 구성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첫 번째 규범에서 두 번째 규범으로, 또는 두 번째 규범에서 첫 번째 규범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문법적 해석은 두 가지 과제를 가진다. 하나는 “주어진 어법으로부터 본질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의미로부터 미지의 용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문법적 해석을 하려면, 해석자는 저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그를 이해할 정도로 그가 사용한 언어를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해석자가 저자 사상의 한계를 인식하며 본문에 대한 해석에서 시대 착오를 피하려면, 저자의 언어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문법적 해석은 관심의 초점을 언어 자체에 두고 그 구조를 탐구하여 그 안에서 의미를 파악한다. 따라서 문법적 해석은 언어의 보편적 영역으로부터 의미의 개별적 영역에로 이르는 것이다.

 

② 기술적 또는 심리학적 해석

 

언어의 형식적이며 질료적 요소를 다룬 것이 문법적 해석의 영역이라면, 나중의 두 질문, 즉 진술자의 의도와 말이나 글에 나타난 전체의 어감이나 어조를 다루는 것이 기술적 해석의 영역이다. 문법적 해석은 저자의 개체성에 관한 지식에 의하여 자체로서는 이룰 수 없었던 단계까지 이를 수 있다. 여기서 기술적 해석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해의 대상이 언어로부터 저자의 의지의 행위로 전환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저자가 구사하는 언어의 특별 용법을 인식하는 것을 기술적 해석이라고 불렀다. 기술적 해석의 과제는 저자의 언어 구성의 특성 또는 그 스타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스타일은 언어가 사용되는 방법을 말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기술적 해석에 의해 언어 용법의 개별적 성격을 적극적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석자가 저자의 독특한 메시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후기 저술에서 저자의 삶의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 기술적 해석을 기술적 해석과 심리학적 해석으로 세분하여 발전시켰다.

 

심리학적 해석은“저자의 삶 전체로부터 사상들이 어떻게 나왔는가” 에 초점을 두는 반면, 기술적 해석은“ 일련의 사상들이 특정 사상이나 의도로부터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둔다. 기술적 해석은 저자가 그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형식과 체계 및 그들의 역할을 분석하는 것이다.

 

심리학적 해석은 저자가 그의 사상을 표현하기로 한 최초의 결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저서의 기본적 혹은 지배적 개념을 발견하고 이것을 저자의 삶과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저자의 삶 전체로부터 사상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탐구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다.

 

 

사유는 심리학적 해석의 영역에 속한다. 왜냐하면 심리학적 해석은 언어의 기원을 저자 내분에서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해석학은 개념과 본문에 대한 재생산적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저자의 최초 의도에 이르는 것이다. 언어에 중점을 두던 초기의 해석학으로부터 후기에는 저자의 주관성에 중점을 두는 해석학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해석학은 심리학적인 것이 되고 저자의 정신 과정을 재구성하는 기술이 되었다. 해석자가 저자의 개체성과 독창성을파악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슐라이어마허는 해석자와 저자 사이에 어떤 동일성이나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심리학적 해석의 필수적 전제 조건은 모든 개체성이 보편적 삶의 표명이라는 것과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 공통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자가 자신의 마음의 구조로부터 저자의 마음의 구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 해석에서 본질적”이라고 생각했다.

 

③ 문법적 해석과 기술- 심리학적 해석의 관계

 

슐라이어마허는 문법적 해석과 기술 - 심리학적 해석을 구분했으나, 또한 그들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문법적 해석과 기술 - 심리학적 해석은 그 작용에 있어서 각각 다른 것을 전제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분리될 수 없고 결합되어야 한다.

 

(문법적 해석과 기술 - 심리학적 해석의) 두 작용들은 실제 적용에서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규칙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이 양자는 각자 그 자체의 특별한 초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분리되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완전한 이해가 문법적 해석과 심리학적 해석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이해는 본문에 사용된 언어와 저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필요로 한다. 본문이 문법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 심리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고, 심리학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한 문법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해석자가 문법적인 해석 방법의 사용만을 강조할 때, 오해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자의 언어 수식능력, 즉 독창성을 도외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심리학적 해석 방법만을 강조할 때에도 같은 결과가 일어난다.

 

슐라이어마허는 오해가 발생할 여지를 철저히 배제하여 적절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이 두 해석 방법들의 결합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다.

 

2) 비교 방법과 예감적 방법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심리학적 해석은 두 방법, 즉 비교 방법과 예감적(divinatery)방법을 사용한다. 비교 방법은 어떤 저자를 보편적 유형 아래 놓고, 같은 유형 아래 있는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그 저자의 개체성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저자의 언어와 양식이 다른 저자의 것과 비교가 되고 어떤 저자가 저서에 있어서 그와 비슷한 경향을 보이는 다른 저자와 비교가 된다.

 

 

비교가 해석의 전부는 아니다. 언어가 사고 구조와 표현 양식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저자의 독특한 성직이 그의 사고를 어떻게 형성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저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을 예감적 방법이라고 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예감적 방법을 해석자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전환시킴으로써 저자의 개체성을 파악하려는 시도로 정의했다. 즉 해석자가 자신으로부터 나와 저자의 입장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직접적으로 저자의 정신과정을 파악하는 것이다. 이 예감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대해 감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예감적 해석방법은 우리가 자신안에 다른 사람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비교 방법과 예감적 방법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해석자는 비교 방법에 의해 그와 저자 사이의 공통적인 것을 파악하고, 예감적 방법에 의해 저자의 개별적인 것을 파악하게 된다. 예감적 이해는 해석자가 그와 그의 대상을 비교함으로써 촉진된다. 또한 비교 방법은 해석자가 자신을 저자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저자의 개체성에 대한 이해를 시도한다. 그러므로 비교 방법은 또한 예감적 방법을 포함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두 방법의 상관 관계를 강조했다.

 

3) 해석학적 순환

 

해석학적 순환은 전체는 부분을 통해 이해되고, 부분은 전체를 통해 이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슐라이어마허의 독창적 개념은 아니다. 그는 그것을 아스트(Ast)로부터 도입하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순환이 이해의 본질적 요소이므로, 모든 이해의 행위에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문법적 해석에서는 이것이 출발점이다. 모든 단어의 의미는 전체 문장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전체 문장의 의미는 개별적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 파악된다. 또한 개별적 개념은 그 의미를 그것이 관련되어 있는 문맥으로부터 이끌어 내며, 그 문맥은 그것이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로서의 저서와 그 부분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전체와 부분은 변증법적 상호 작용에 의해 상대방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순환 안에 의미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학적 순환이라고 한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적 순환을 심리학적 해석에 적용시키기도 했다. 사람의 말이나 사상은 그의 전체 발전 과정에서의 한 요소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적 순환 개념의 의의는 그 독창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것에 있다. 그는 해석학적 순환이 모든 이해의 행위에서 작용한다고 보았다. 근본적으로 이해는 항상 이런 종류의 순환 안에 존재하는 운동이다. 해석은 전체로부터 부분으로, 그리고 부분으로부터 전체로의 반복적인 순환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4) 보편 해석학과 성서해석학

 

슐라어어마허는 성서해석학을 보편 해석학 원리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신학자는 성서 해석에서 어떤 특권을 누리지 않으며, 일반 해석자와 같이 해석학의 규칙들에 묶여 있다고 보았다. 그의 근본적 신념은 “성서 그 자체가 어떤 특별한 해석학적 원리들을 요청”할 수 없으며, 따라서 “보편 해석학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성서를 위한 특수 해석학을 그의 사상 발전 전체를 통해 일관성 있게 거부하고, 종교적인 본문의 해석을 이해의 일반 이론에 포함시켰다. 1809년 경에 쓴 그의 해석학 강의안 초고에서 그는 성서가 세속적인 책들과 다른 범주에 속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첫째, 성서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서만 거룩하다. 둘째, 최초의 독자들은 성서는 거룩하며, 그들 자신도 거룩하다고 믿었다. 셋째, 성서는 인간의 저서이므로, 일상적 방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세 가지 가능성 중에서 세 번째 것을 자신의 입장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성령은 해석의 규칙들에 복종할 수 없다는 전통적 신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보편 해석학은 성서의 영감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영감에 대한 교의적 결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 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해석의 규칙들에 복종할 수 없다는 전통적 신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허의 보편 해석학은 성서의 영감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않다. 그는 영감에대한 교의적 결정을 기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결정 자체가 해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즉 성서가 거룩한 책이라는 것 역시 그것에 대한 이해를 통해 알려진다. 따라서 슐라이어마허는 성서가 영감의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떤 특수한 해석학을 필요로 하는가의 물음에 대해서는 엄격히 제한된 의미에서 긍정적 태도를 취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성서 본문은 다른 저서들과 같은 방법으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규칙을 계몽주의 해석학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동시에, 이것을 그의 보편 해석학 개념과 결합시켰다. 그의 보편 해석학은 성서의 해석을 위해 특별한 방법론의 사용을 인정하지 않았고, 특별한 내용을 위한 일반 원칙의 특별 적용만을 허용했다. 이것은 해석학의 이론이 항상 보편적이어야 하나 그 용법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보편적 규칙의 특별 적용이 특정 언어나 말과 글의 특정 양식 때문에 필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슐라이어마허는 성서해석학 또는 신학적 해석학의 필요성을 암시했으나, 그 자신 그런 특별 해석학을 발전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성서를 다른 저서와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방법으로 해석하게 된 경향은 그의 사상의 영향으로 평가된다.

 

3 절 결론

 

슐라이어마허는 본문을 해석해야 할 과제를 넘어서 이해 자체의 연구로 해석학의 본질과 영역을 재 정의하고, 이해에 관한 보편 해석학을 발전시켰다. 모든 대화에서 이해를 위한 조건들을 발견함으로써 이해의 진정한 기술을 발견하고자 했다. 그것이 해석학사에 전환점을 이룩하고 해석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신학과 문학에 종속된 것으로 취급되던 해석학이 독자적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으며, 훈육 문제로 간주되었던 해석학이 대화를 이해하는 기술이 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그 당대에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 의미가 재발견되고 그의 해석학적 개념이 계승된 것은 19세기 말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1)를 통해서였다. 딜타이는 슐라이어마허와 20세기 철학적 해석학자들 사이의 연결고리였다. 따라서 현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으며 딜타이, 하이데거 및 가다머로 이어지는 해석학적 전통에 중요한 토대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이해의 학, 이해의 기술로 정의했다.

 

둘째, 슐라이어마허는 텍스트의 저자와 해석자 사이에 공통성이 존재한다는 신념에 근거하여 해석자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해는 해석자와 저자가 함께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것이 딜타이와 불트만에게 계승되었다.

 

셋째, 슐라이어마허는 문법적 해석과 병행하여 심리학적 해석을 주장했다. 이해는 해석자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놓음으로써 그 저서 구성의 내적 기원을 이해하는 창조적 행위의 재창조이다. 이것이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의 독창적 공헌이었으며, 딜타이와 불트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넷째, 슐라이어마허는 이해의 개념을 삶과의 관계로부터 파악했다. 이것이 딜타이와 하이데거의 해석학적 사고의 출발점이 되었다. 딜타이는 그의 해석학의 목표를 “삶 자체로부터 이해하는 것”으로 삼았으며, 하이데거 역시 이와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 역사적 방법으로 이 목표에 접근하려 했다.

 

7 장 평가 및 결론

 

20세기에 벌어진 논쟁은 주로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적 방법론에 집중되어 왔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순전히 인간의 경험이라는 지평 안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말씀을 하시거나, 어떤 행동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초월성의 상실쪽으로 향하는 현대 기독교의 사상적 경향을 창도하였다.

 

그의 신학적 방법의 약점은 그의 신론에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의 신론은 내재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자연과 거의 동일시한 나머지 구속이 하나님의 행동인 것만큼 악과 고통 역시 하나님의 행동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과 이 세계를 상호 연관지으면서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는 면에서 슐라이어마흐의 신론을 만유재신론적(panentheistic)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예수의 신성이 그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보는, 곧 하나님과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그가 기능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여, 오늘날 ‘기능적 기독론’으로 알려져 있는 사상의 원형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상의 오류는 그것이 기능적 기독론이므로 하나님의 ‘자기-표현’인 예수의 궁극성과 최고성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자적 위대성을 부인할 수 없다. 좋든 싫든, 그의 영향은 현대신학에 고루퍼져 있다. 그것은 특히 19세기 말엽쯤에 가서 개신교 사상을 장악하게 된 ‘자유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신학의 학파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제 그 신학의 가장 위대한 주창자에게로 가야겠다.

 

 흔히 슐라이에마허의 오류로 세 가지가 지적된다. 범신론, 주관주의, 및 불가지론등이다. 특히 비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의 범신론이다. 그는 [종교론] 초판(1799) 출판 이후 끊임없이 범신론 혐의를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