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디즈니가 여름을 맞아 내놓은 새로운 놀이 기구인 UFO Zone에 사용되고 있는 물이 대장균에 오염되어 있다’ (2009년 7월 31일 홍콩의 한 신문)
이런 뉴스를 들으면 ‘마시는 물이 대장균에 오염되어 있다니 심각한 일이군! 이제부터 어떻게 안심하고 물을 마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대장균이 포함된 물을 마신다고 질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대장균은 인간과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유사 이래 인류와 함께 지내 온 대장균은 이미 사람의 큰창자(대장)에 완전히 적응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자신에게도 손해라는 것을 아는 대장균은 사람의 몸에 해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사람의 몸도 대장균과 함께 사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이익이 되는 상태로 적응해 왔으므로 사람의 몸과 대장균은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공생이란 공존하는 것이 서로 도움이 되는 상태를 가리키므로 대장균이 몸에 들어오는 경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인체에 해가 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마시는 물에서 대장균이 발견되면 매스컴에서 크게 다루는 것은 대장균 자체가 위험해서가 아니라, 대장균이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이 대장균 아닌 다른 병원성 세균이 감염되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안전하다고 믿고 안심하고 마시던 물이 뭔지는 모르지만, 병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세균에 오염되어 있다고 하니 이제부터 어떤 위험한 세균이 포함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꽃과 벌의 공생관계처럼 사람과 대장균도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왼쪽) 대장균의 전자현미경 확대 사진(×10,000)(오른쪽) <출처: Brian0918 at en.wikipedia.com(오른쪽)>
대장균이 살고 있는 큰창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물을 흡수하는 것이다. 그 외에 비타민을 흡수하기도 하고, 배출되기 전까지대변을 저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큰창자에서 흡수되는 비타민은 음식으로 섭취한 것이 아니라 큰창자에 사는 세균에 의해 합성된 것이다. 대장균이 합성할 수 있는 비타민은 비타민 K, 비타민 B5, 바이오틴이 전부다. 이들은 대장에서 수시로 생성되므로 적절하게 음식으로 섭취하지 않는다 해도 결핍증이 생기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또 큰창자를 통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노폐물이나 독소 중에서도 일부는 대장균 등에 의해 대사되어 몸으로 흡수되어 재사용되기도 한다.
평소에 건전한 생활을 하면 나쁜 습관이 자리를 잡기 어렵듯이 대장균이 큰창자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다른 병원성 세균이 큰창자에 들어오기 어려운 것도 대장균이 주는 이점이다. 큰창자의 대장균처럼 정상적으로 인체에 존재하는 세균을 정상 균무리(normal flora)라 하며, 정상적으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몸에 해가 되는 세균의 침입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장균도 질병을 일으킨다
정상 균무리로 존재하는 대장균은 병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창자에 구멍이 뚫려 복강 내로 세균이 들어가기라도 하면 기회감염을 유발한다. 즉 평소에 비병원성이던 세균이 병을 일으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대장균은 패혈증 환자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고, 요로감염의 80%를 차지하며, 개발도상국에서는 위장관에 염증을 일으키는 주된 요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위장관에 염증을 일으키는 병원성 대장균은 아래와 같이 다섯 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장 병원성 대장균(enteropathogenic E. coli, EPEC)
장 독소생성대장균(enterotoxigenic E. coli, ETEC)
장 출혈성 대장균(enterohemorrhagic E coli, EHEC)
장 침투성 대장균(enteroinvasive E. coli, EIEC)
장 응집성 대장균(enteroaggregative E. coli, EAEC)
최근에 매스컴에 등장하는 O157:H7(일명 O-157), O26:H11(일명 O-26)등은 장 출혈성 대장균에 속하는 것으로 O와 H는 각각 대장균이 가지고 있는 항원의 종류를 가리키고, 숫자는 항원의 고유번호를 가리킨다.
실험실에서는 대장균을 검출하기 위해 배양 접시에 배양하고, 염색한다.
O157:H7형은 1982년에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장 출혈성 대장균에 대한 예방 접종법이 개발되지 않았으므로 증세에 따라 치료를 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치사율은 낮은 편이다. 감염 후 합병증이 생기는 경우는 나이에 따라 다르나, 보통 10% 이하이며, 합병증이 발생한 환자 중 2-7%가 사망에 이른다.
이와 같은 종류가 몸에 해로운 이유는 긴 세월에 걸쳐 사람과 공생관계를 유지해 온 대장균의 유전형질에 변형이 생겼기 때문이다. 박테리오파지와 같이 세균에 기생할 수 있는 바이러스가 대장균에 침입하거나 염색체 바깥에 별도로 존재하면서 숙주 세포의 기능을 이용하여 복제를 하는 플라스미드(plasmid) DNA가 대장균에 들어와서 유전형질을 변화시킨 것이 치명적인 대장균이 탄생하게 된 이유다. 환자가 발생하면 24시간 간격으로 2회 대변을 배양하여 대변 검사를 하여 확진하고, 세균이 검출되지 않을 때까지 격리시키며, 탈수방지를 위한 수액요법을 비롯하여 증세에 따라 알맞은 치료를 한다.
분자생물학 연구에 빠져서는 안 될 재료인 대장균
유전자를 조작한다고 하면 끔찍하게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유전자변형식품(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GMO)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유전자 조작은 이미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198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버그(Paul Berg)가 유전자 재조합 기술을 먼저 발견하기는 했으나 오늘날 분자생물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클로닝 방법(functional cloning)을 가능하게 한 유전자 조작은 1973년에 코헨(Stanley Cohen, 성장인자를 발견하여,1986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과 보이어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분자생물학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기법의 하나인 클로닝은 원하는 유전자를 장기간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는 언제나 그 수를 증폭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일종의 화학물질이라 할 수 있는 유전자는 연구에 이용하다 보면 보관된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 많은 양이 필요하면 플라스미드를 지닌 세균을 배양하면 된다. 세균이 자라나면서 유전자가 담긴 플라스미드도 그 숫자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때 사용하는 세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이 바로 대장균이다. 대장균은 혹시나 사람에게 감염된다 해도 병원성이 약하므로 비교적 안전하고, 수많은 종류의 세균 중 인류에 의해 가장 많이 연구된 세균이 바로 대장균이다. 대장균은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1921년에 인슐린이 당뇨를 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초기에는 돼지의 인슐린을 분리하여 사용했으나, 1970년대에 유전자 클로닝 법이 개발되고 나서는, 사람의 인슐린 유전자를 대장균에 주입하여 대장균이 사람 대신 만들어주는 인슐린을 분리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얻은 인슐린은 돼지가 지닌 원인 불명의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으므로 대장균이 분자생물학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글 예병일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저서로는 [내 몸 안의 과학]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등이 있다.[내 몸 안의 과학]은 교과부에서 2008년 상반기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