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 ......
■ 순진함
순진하다는 것은 욕심을 멀리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가 들수록 욕심의 보따리는 커지게 마련이다. 욕심이 더해질수록 순진한 모습은 감춰지게 된다. 욕심이라는 가면이 덧대지면서, 날카롭다거나 영악스럽다고 하는 다른 모습으로 타인에게 표출된다. 거짓이나 꾸밈 없이 매우 순수하고 참되다는 의미의 “천진난만(天眞爛漫)하다”는 말은 순진함을 잘 표현하는 내용은 아닐까? “자연 그대로 참되고 꾸밈이 없으며(天眞), 선명하고 아름다운 것(爛漫)”이 순진함이라고 여겨진다.
. 그의 천진난만한 미소 때문에 나는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 그 시인은 죽을 때까지 어린애와 같은 천진난만을 잊지 않았다.
천진난만한 순진성은 왜 우리를 편하게 하는가? 가면 뒤에 행여나 숨어 있을지도 모를 불편한 진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에 느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다. 보이는 그대로의 선명함과 아름다움을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순진한 어린이나 순진한 이성에게서 예쁘다거나 아름다움을 더욱 느끼는 이유이다. 그들이 제아무리 귀엽고 예쁘다 하더라도, 사소한 욕심으로 가려진 모습을 읽는다면 누구나 금방 식상하여 싫증나게 될 것이다. 배고파 짜증 섞인 어린이가 순진하게 보일 리 없고, 이해를 따진다거나, 욕정에 눌린 이성의 모습이 순진하게 보일 리 없으며, 그들이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질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순진한 늙은이나, 직장에서의 순진한 상사를 두고, 우리는 좋게 평하지는 않는다. 보고 느끼고 생각 하는 바를,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으며 표현하는 것을 좋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우리”, “너와 당신들” 사이에서, 그 이해에 따라 엇갈리면서, 다른 모습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여 지는 것이 순진함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순진하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순진함이 귀엽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어리석다거나, 덜 떨어진 모자란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특히 “나”의 욕심에 반하는 순진한 짓은 누구에게나 그리 보이게 마련이다. 여우처럼 영악스럽다거나, 날라리 아니면 타락한 모습이거나, 똘똘하며 야무진 모습과 대치되는 각기 다른 형상으로서 비교되곤 한다.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은 현상들을 생각하여 보자.
우리 정신세계에서 깨달음과 미혹은 기쁨과 근심이 교차하며,
정치의 통합과 개혁은 화해와 갈등으로,
침입한 이물질에 대한 육체 내 반응에서 면역과 알레르기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 영향으로,
정신세계의 윤회와 부활은 내부와 외부의 교차로서,
미술에서 질서와 혼돈은 창의성에서,
우리 사회생활에서 책임과 명예,
경제정책에서 재정적자 감축과 성장,
우리들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 ……
각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서로는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곤 한다.
똑 같은 순진한 모습이라 하더라도, 동전의 양면처럼 좋거나 나쁘게 달리 인식되는 이유가, 욕심으로 가려진 나와 너, 우리와 너희들 간의 이해관계 또는 생각 여하에 따르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나의 욕심에 반하는 너의 순진함은 멍청함이요 어리석음이고, 내 욕심에 부합되는 너의 순진함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것이 당연하고 순리에 맞는다는 생각일까?
내가 좋았다고 느꼈었던 너의 순진함을 떠 올리며 답을 헤아려보자. 어린 내 새끼의 순진한 짓거리들, 좋아하던 이의 순진한 행태들, 경쟁상대 못 되는 연약한 풋내기들의 귀엽고 순진한 행태들 …… 무엇이던 주고 싶고, 베풀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상대방인 “너”의 밝고 티없는 좋은 순진한 모습은 좋았던 기억으로 남는다.
내 마음 속에 머물렀던 나를 끄집어 내보며, 순진하던 자신의 모습에 흐뭇하던 순간들도 얼마던지 많다. 가녀린 잎새를 매만지고 물 주며 흡족해 하던 “나”, 때로는 소나무 등걸에 매인 밧줄을 풀어주기도 하고, 서로 엉켜 얽매인 채 밭두렁에 매어 진 흑염소의 얽힌 끈을 풀어 주며 넉넉하게만 느껴지던 “나”, 고인 물길을 발길질로 트기도 하며, 공원구석의 돌덩이를 치워가며 느끼던 “나”, 어려워 보이거나 슬픈 남의 모습에 측은하고, 안쓰럽다고 느끼며, 그들에게 별로 도움이 못 되는 자신이 부끄러이 여기던 “나” ……
그러한 경험이 꼭 누구에게 꺼내 놓고 자랑할만한 것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스스로의 순진성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은 누구에게나 얼마던지 경험되곤 한다. 그러한 조그만 순진성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것들로서 간직될 수 있을 것이다. 꼭, 재산이나 명예가 더해질 수 있는 것들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부와 명예에만 초점을 둔다면, 세상은 오히려 더 험악하고 사악하고 추해지기 십상일 것이다.
젊거나 늙은 이의 순진한 모습들은 때로는 갑갑하고 어리석게, 때로는 밉거나 추하게 느껴지곤 한다. 아마도, “나와 우리”의 이익에 반할 것이라는 느낌이 많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만 같다. 결국, 내 욕심에 반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밉상 가는 며느리에게 순진하게 대하는 아들녀석을 바라보는 “씨에미”의 심정이 그러할 지 모른다.
유아원 다니는 어린아이의 눈높이에 맞춰가며, 함께 그림 그리고 공작품 만들며 노래하며 율동하고 깔깔대고 서로 웃고 웃기며 잠시 보내던 짤막한 시간을 돌이켜 생각한다. 늦은 나이지만 순진의 의미를 나 또한 몸으로 다시 체험한 것이다. 눈 높이를 맞추며 보낸 그 순간만큼은 나도 어린애와 마찬가지로 욕심의 그늘을 잊고 “순진함(純眞艦 ?)”의 뱃전을 거닐었던 것이다.
그러한 측면으로 생각한다면, 순진성도 전염성이 강한 자극물질일지 모른다. 이웃이 순진하면, 벗이 순진하면, 네가 순진하면 …… 나도 역시 순진해진다. 너의 사악한 면을 용서하고 접어 둔 채, 순진한 너의 모습만을 내가 대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항상 순진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가진 것이 과연 무엇일까? 내가 더 원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 내가 갈망하던 오욕칠정의 모습은 한정된 짧은 시간 동안의 허상임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그러한 진리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누구나 다 순진한 삶을 이어갈 것이다.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불안해 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근본은 대부분이 욕망의 덧칠에 가려 순진하지 못한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욕심의 발로는 무엇인가? 그리고 욕심이란 우리 삶에서 과연 어떤 영향을 주는 것인가? 욕심은 본성이다. 건강한 사람이 오욕칠정의 감정을 갖는 것을 두고 누가 나쁘다고 탓하겠는가? 단지, 너만 잘 살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잘 살아가자, 나누며 살아가자는 뜻에서 욕심을 억제하자는 미덕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 편이 보다 더 아름다운 사회를 꾸리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욕심은 때로 순진성을 왜곡하기도 하겠지만, 인간의 본성임을 스스로 인정하기에 우리는 순진함을 어리석다거나 추하다고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리라.
2012. 11. 5.
오갑록
■ 순진함과 순수함에 대하여
어감의 행태를 따진다면 “순진(純眞)하다”를 “순수하게 참되다, 진실하다”라고 한다면, “순수(純粹)하다”는 “불순물이 없이 바탕과 똑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흰 바탕의 순수함은 흰색이고, 검정 바탕에서의 순수함은 검정색이다. 선한 이들 모임에서 순수함은 선한 역할이지만, 악당들 틈새에서 순수함은 악한 행동과 악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아군에서의 순수함은 적의 동향을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 되겠지만 적군 입장에서는 그 반대를 두고 순수하다고 평할 것이다.
불자들이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불심을 키우는 자를 생각하겠지만, 그리스도교의 성경에서 말하는 순수함은 전혀 다른 의미임에 분명하다. 기독교인이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마음의 본 바탕에서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을 의심함 없이 온전하게 믿는 것부터 시작될 것이다. 성경 내용에 대한 의심은 순수하지 못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성경에 명시된 우주의 탄생이나 생명체 사후의 일에 관한 주장, 사랑, 선과 악, 죄와 벌에 대한 주장 따위도 순수하지 못한 생각으로서는 용인하기 어려운 사안이 된다. 의심을 갖고 흠 잡는다면 모두 앞뒤가 조리에 맞지 않는 이야기로 반전되고 만다.
결국 신앙활동에서 믿음의 전제는 순수와 순종이 전제 되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순수함이 전제되지 아니한 상태에서의 시각, 즉, 이교도의 눈으로 보는 타 종교의 내용은 말 그대로 모순투성이 들인 것이다. “나”가 생각하는 진리는 알사탕 숫자를 헤아리는 것처럼 보이고 만져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개념과 상상, 생각하는 이의 각기 서로 다른 가치관을 똑 같은 바탕색으로 하기에는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포교의 기반이 순수함이라는 바탕색을 요청하는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 목적하는 바의 포교 수단일거라는 의심을 한다면 과연 과한 의문일까?
막말로 까발려 본다면, 누구나 썩어서 냄새 나는 똥자루를 몸 속에 품고 지낸다. 그것이 순수한 자들의 모순이기도 하다. 육체뿐만이 아니다. 정신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순수함 속에 숨겨진 모순, 악취 나고 추한 모양의 더러운 사고(思考)는, 우리 몸의 똥자루 마냥, 어떤 것이든 좋은 생각 가운데에도 한 자루씩 심 박혀 있다고 여겨진다.
□ 성경 중에서
“마음이 순수한 자들”“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마5:8)“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럽지 않은 신앙심은(종교는) 이것이니 곧 고난 중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약1:27)
“주님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단련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시12:6)“주님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그것을 사랑하나이다.”(시119:140)“주님의 법규들은 정당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 도다”(시19:8)
“사람이 하나님과 견주어 의롭다 할 수 있겠느냐? 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느냐?
심지어 달을 바라보아도 그것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참으로 별들도 그분의 눈앞에서는 순수하지
아니하거늘 하물며 벌레인 사람이야 어떠하겠느냐? 벌레인 사람의 아들이야 어떠하겠느냐?”(욥25:4-6)
“순수한 자에게는 주님의 순수하심을 보이시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주의 적대(敵對)하심을 보이시리니”(시18:26)
“너희가 성령을 통해 진리에 순종함으로 너희 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1:22)
“순종이 희생 헌물 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 단어 및 한자의 의미
. 순수 (
純粹)
대상 그 자체에 전혀 이질적인 잡것의 섞임이 없음.
마음속에 사사로운 욕심이나 불순한 생각이 없음.
. 순(純) – (생사 순, 선두를 준, 묶을 돈, 온전할 전, 검은비단 치)
생사(生絲). 순색(純色)의 비단. 순수하다. 오로지. 천진하다.
도탑다. 온전하다. 온화하다. 착하다. 크다.
아름답다. 정교함. 모두. 밝다. 선 두르다. 묶다. 쌈. 온전하다.
. 수(粹) – (순수할 수, 부서질 쇄)
순수하다. 전일(專一)함. 쓿은 쌀. 정미(精米).
아름답다. 같다. 동등함. 온전하다. 이지러진 데가 없음.
상세하다. 정밀(精密)함. 변하지 아니하다. 불변함.
부서지다. 싸라기. 부서진 쌀.
. 순정(純情)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 순진하다. 마음이 꾸밈이 없고 참되다
. 순박하다(淳朴. 淳樸. 醇朴)
순수하고 꾸밈이 없다, 순수하고 꾸밈이 없는 성질
■ 순진한 걸음
검은 민달팽이 한 마리가 길 위에 나와 있다
문득 달팽이가 느리다거나 내가 빠르다는 건
진실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엔 자기만의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달팽아 너는 네 속도로, 나는 내 속도로 가자
그럼 우린 잘 가는 거다
(순진한 걸음 / 순진)
■ 순수의 전조
(Auguries of Innocence)
한 알갱이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담아라.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And Eternity in an hour
by William Blake (영국시인, 1757-1826)
■ 순진함
그 녀는 오늘 역시 망설이고 있었다.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1년 넘게 고민하며 연기하여 오던 터인데,
몇 달 전부터 말은 꺼내 놓았지만
그 동안 부장님이 말리고, 이사님이 말려서 주저했던 일이다.
졸업하고 어렵게 잡은 첫 직장이다.
3년간을 열심으로 일은 했지만 너무 힘겹단다.
주어진 일은 거절 할 줄 모른다.
회사일, 조직 전체의 일에도 직분에 과한 걱정을 혼자하곤 한다.
일이 많은 탓인지, 일을 못하는 탓인지는 모른다.
그래서 사직을 결정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 상태라면 건강을 상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살기 위한 퇴직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은 사장님이 따로 불러
오랜 시간 동안 개별 면담을 했다고 한다.
인정에 끌려서
다시 처음처럼 고민을 한다.
이렇듯 윗분들 모두 만류하는데
그냥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닌지 하고 ……
그래서, 이즈음 하루 하루는 더욱 힘들어 보인다.
가족들은 건강관리 못하는 너의 탓이라고 책망하기도 했다.
챙겨서 먹고, 짬 내어 운동하는 데는 미울 정도로 아주 게으르다.
여유 시간이면 오히려 더 파김치처럼 되곤 한다.
사람들 만나고, 늦도록 마시는데
싫어도 힘겨워도 거절 할 줄 모른다.
사람살이에 정답이 어디 있겠느냐며
마음이 닿는 대로 정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며,
알아서 결정 해라는 조언 밖에 넘겨주지 못했지만
우리 집 막내,
아직은 참으로 순진하다.
차라리 자랑스럽다.
네일 내일 몸 사림 없이 최선을 다하고
싫던 좋던 거절하기 어려워하고
직장의 작은 일에도 걱정하고
자기 건강 제쳐 놓고 열심이다.
어렵게 계속 일해야 할 직장 윗분 걱정이 앞서고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
쓸만한 말단사원 손 놓치지 않으려는
이사님과 사장님의 달콤한 말씀 몇 마디에도
신뢰를 배반함은 아닌지 하는 마음 쓰며 고민한다.
보다 나은 자신의 건강과 미래를 바라보며
홀로 떠남을 미안해 하고, 부끄러이 여긴다.
막내 일을 눈 여겨 보면서 생각한다.
“역시, 순진함은 아름다움이기도 하구나”
□ 당신의 생각은?
당신이 생각하는 순진함이란 무엇입니까?
당신이 생각하는 순수함이란 무엇입니까?
. 생각은?. 믿음은?. 행동은?. 모양은?. 모습은?
. 빛깔은?. 색깔은?. 소리는?. 촉감은?. 향은?. 맛은?
현대를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서
보편 타당성 있는 대답이기를 기대하여 봅니다.
밝은 대낮, 순백색 바탕에,
곱고 은은한 소리,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그윽한 향의 감칠 맛 나는,
아름다운 것들을 그려 봅니다.
좋은 생각,
아름다운 믿음에 바탕을 둔
좋은 행동으로서,
포근함이 몸에 밴
고운 모양, 넉넉한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과 욕망에 찬 붉은 색깔 정열은
발전과 성공을 향한
한 낮의 부질없는 꿈일 뿐,
순진을 지향하는 아름다움이나 자연스러움과는
한참 다르지 않을까요?
“나”가 생각하고 행동해 온
순수함이
열심이라는 명분 아래
빨갛다거나 시커멓고,
과격한 것이나 아닌지 ……
한번쯤 되돌아 보는 것은 어떨까요?
순진함 속에는 어떤 가치가 숨어 있을 지를 ……
□ 우리는 왜 순진함을 좋아하는가?
애완 동물을 보면서 느낀다. 애완동물이 예쁘게 여겨 지는 것은 그 고운 외모를 즐기는 부분도 있겠지만, 근본은 그들의 순진성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꾸밈이 없고 감춤이 없어 거짓이 없기에 보이는 그대로를 우리가 믿기 때문이다. 이 순진성은 귀엽고 예쁘며 사랑스러움을 우러나게 하고 우리에게 기쁨을 돋워준다. 거꾸로 내가 누구엔가에게 순진성을 보이려면 어찌해야만 할 지를 배울 수 있다. 나를 버려야만 가능한 일임을 애완동물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모든 욕심을 버릴 때 가능하다. 심지어 자신의 몸통이니 정신까지도 통째로 맡길 수 있을 때만 기대할 수 있음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다는 각오일 때 상대의 순진성을 엿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생각하여보기로 하자. 컴퓨터 자판을 익히고 어느 정도 컴맹에서 탈출하여 익숙하게 되면, 인터넷을 통하여 넓은 자료공간 속에 다양한 새로운 경험들을 겪게 된다. 폭넓은 지식의 세계에도 손 쉽게 접할 수 있고, 미술, 사진, 음악과 같은 예능 분야도 시간이나 비용 부담 없이 접하고 익힐 수 있다. 색다른 풍경과 여행도 지역에 관계없이 언제라도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겪을 수 있는 또 색다른 경험 한가지가 더 있다. 소위 말하는 채팅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어떤 이 인지 몰라도 되고, 나 자신의 모습도 거리낌이 없으니 서로 의견을 나눔에 있어 거칠 것이 없게 된다. 부끄러워 차마 못 꺼냈던 마음 속의 생각들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된다. 벗, 부모, 형제, 연인과 같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쉽사리 내놓기 어려운 내용들이 포함되게 된다. 사소한 자랑스런 일은 물론, 부끄럽고 창피한 일, 분하고 억울하고 화나는 일까지도 스스럼 없다.
그러한 이야기까지 왜 했을지 하는 후회를 할 일도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상대방은 사사로운 득실을 고려할 필요 없이 솔직한 생각을 내놓게 된다. 이성간에 때로는 사이버 공간의 선을 넘어선다는 우려도 한다지만, 이러한 공간은 우리가 과거에 경험할 수 없던 색다른 경험들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름 아니라 상대의 “순진성”을 쉽게 만끽하는 것이다. 서로 간에 나누는 솔직한 의견 가운데서, 상대의 순진성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자판의 글로서 나누는 인사말, “안녕하세요?, 차 드셨어요?, 잘 잤나요?, 잘 지냈나요?, 감기 조심하세요! 건강 하세요! ……” 단순한 인사말 속에도 사사로운 감정, 욕심 없이 진심을 준다고 여기기에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고, 상대의 순진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순수함과 순진함”의 단편을 즐기게 되는 것이다. 때로는 별 의미 없이 맑음 고움 아름다움을 느끼기도 한다. 마치 새벽녘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화창한 날 물가의 잔물결처럼, 봄날 멀찌감치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처럼 …… 배부르거나 돈 되고, 명예가 되는 일은 아닐 터이지만 …… 사이버 공간에서 “순수와 순진”의 단편을 현대적인 새로운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이리라.
2012.11.9.
오갑록
■ 순진함과 순수함의 차이
깨끗하고 투명한 유리잔 두 개가 있습니다.
한 잔에는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고,
다른 한 잔은 비워져 있습니다.
전자는 "순수" 라는 것이요,
후자는 "순진"이라는 것이죠.
순수라는 것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어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으니,
깨끗함 그 자체이고요.
순진은 비어 있으므로,
그 안에 순수처럼 깨끗한 물이 담길 수도 있고,
더러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떤 누군가가
"순수"와 "순진"의 차이를 묻더군요.
순수의 사전적 의미는
"잡것의 섞임이 없는 것", 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진"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이 꾸밈이 없이 순박하고 참되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함 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순진하다" 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반면 "순수하다" 라는 말은
자신의 소신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것이며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순진" 이란 말은
어릴 때만 간직할 수 있는 말입니다.
어른이 되어도 순진하다면
세상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반면 순수는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순수한 사람이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거짓이 없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자기 말에 책임을 집니다.
순수한 사람은 주관이 뚜렷합니다.
순수한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흔들리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겸손의 미덕을 갖고 있습니다.
순수한 사람은 남의 잘못은 용서하지만
자신에게는 엄격합니다.
순수하게 살아간다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습관을 가지려 노력하면
순수해질 수 있습니다.
진정 순수해
누가 봐도 아름다워서 나를 닮고 싶어하는
사람 들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누가 봐도 부담이 없는,
순수를 사랑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중에서)
■ 순진함과 순수함
두 가지는 다 깨끗하다는 뜻이고
백지처럼 때 묻지 않았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둘 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가지고 싶은 것들이죠.
순진함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순수함은 아무나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모두 순진합니다.
……
하지만 순진함은 세상을 알아갈수록 점점 없어집니다.
이 때가 되면 순진함은 “뭘 모른다” “그런 것도 모르냐”의
뜻과 비슷하게 쓰입니다.
나이가 먹었는데도 여전히 순진하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이 될 수도 있고, 많은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시기가 되면 순진함은 더 이상 장점도 아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이에 반해 순수함은
백지 위에 더럽혀진 오점들을 스스로 털어버리고
지워버릴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 낙서처럼 휘갈겨 쓰고 더럽혀도
다시 본래대로 깨끗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우리는 순수하다고 합니다.
순진은 노력하지 않아도 갖고 있지만
순수함은 노력하고 마음이 넓어야 가질 수 있습니다.
순수함은 상처를 받아도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고
그 상처 때문에 세상을 저주하거나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순수한 사람입니다.
……
■ 순수함
(글: 정건희)
순수함은 솔직함이다.
솔직함은 가식이 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자신의 이기성을 발현시키기 위해 고민하지 않는다.
가능한 소통하려 노력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어떠한 이기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싫다.
인간은 어차피 이기적이다.
자신의 신념, 돈, 가치 등을 발현시키고 투영하고자 하는 욕구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다만 교묘히 속이려 드는 자들이 있고 솔직히 요구하는 이들이 있다.
신념, 이상, 가치, 돈 그 무엇이라도 솔직 했으면 좋겠다.
이 아이들의 웃음처럼 꾸미지 않고 솔직히 소통하고 관계하며 절충하고 협의했으면 좋겠다.
솔직하다는 것은 개방하는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신뢰를 만드는 기반이라 믿는다.
솔직하다는 것은 이 아이들과 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나에게 솔직 했으면 좋겠다.
항상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순수함
(글: 김경모)
. genuineness 진짜임, 순수함
. sincerity 성실, 성의, 진실, 진심, 순수함
. pristine (순수함이 아직 남아 있는) 초기의, 원시 상태의
. childlike innocence 어린애 같은 순수함
Almaz
Randy Crewford
She only smiles
He only tells her
that she's the flowers of wind and spring
In all her splendor sweetly surrendering
The love that innocence bring
Almaz, pure and simple
Born in a world where love survives
Now men will want her
'Cause life don't haunt her
Almaz, You lucky lucky thing
-
Now I watch closely
And I watch wholly
I can't imagine love so rare
She's young and tender
But will life bend her
I look around if she everything
-
-
He throws her kisses
She shares his wishes
I'm sure he's king without a doubt
With love so captive
So solely captive
I ask if I could play the part
-
-
Almaz, You lucky lucky thing
Almaz, You lucky lucky thing
-
알마즈
-
그녀는 조용히 웃기만 합니다.
남자는 이렇게 속삭여요
그녀는 바람과 봄의 꽃이라고
사랑스레 물러서는 그녀의 광채 속에
그녀의 순수함은 사랑을 피운다고
-
알마즈 순결하고 청초한 그녀
사랑이 숨쉬는 세상에서 태어난 그녀
이제 모든 남자들이 그녀를 원할 거예요
삶의 고달픔도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테니까
알마즈 행운으로 가득한 그대여
-
이제 나는 그녀를 가까이 들여다봅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살펴봅니다
이렇게 귀한 사랑은 상상할 수도 없었지요
그녀는 이렇게 젊고 부드러운데
생의 어둠은 그녀의 무릎을 꺾을 수 있을까요
나는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녀는 어디에나 있는 걸까요
-
-
남자는 그녀에게 키스를 퍼붓고
그녀는 그의 소망을 함께 나눕니다
그는 정말로 왕이 된 거예요
강렬하게 사로잡힌 사랑
영혼마저 빼앗긴 사랑으로
내가 바로 그 왕이 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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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so very clear from her words and actions that Mother Teresa was a living saint; yet, when she was alive, a prominent columnist castigated her, implying that she was a sexual pervert and arguing that her charitable work merely served to buttress the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status quo.
Why the vicious attack on Mother Teresa's character? Because those who already have lost their purity naturally envy, hate, ridicule and persecute people with purity of heart, mind and soul who are trying to help young people remain pure, too.
그녀의 말이나 행동으로 봤을 때 그녀가 성인임이 명확하나 그녀가 살아있을 때 한 저명한 컬럼리스트는 그녀를 비판하며 그녀가 성도착자이며 그녀의 자선 행위는 단순히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위치를 얻기 위한 의도된 행위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왜 이러한 사악한 공격이 있을까?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연히 이렇게 마음의 순수함과 영혼이 맑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미워하고 조롱하고 매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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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포크라테스 선서” 에서
“순수함과 거룩함이 나의 의술과 생활을 지킬 것입니다.”
. 세상에는 자신이 상상한 만큼 아주 행복한 사람도, 아주 불행한 사람도 없다.(의학의 길)
. No person is either so happy or so unhppy as he imagines.(로슈푸코(Rochefoucauld)
.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약 기원전 460년~370년, 그리스 의사
. Original, translated to English
I swear by Apollo, the healer, Asclepius, Hygieia, and Panacea, and I take to witness all the gods, all the goddesses, to keep according to my ability and my judgment, the following Oath and agreement:
To consider dear to me, as my parents, him who taught me this art; to live in common with him and, if necessary, to share my goods with him; To look upon his children as my own brothers, to teach them this art, without charging a fee;
……
But I will preserve the purity of my life and my arts.
If I keep this oath faithfully, may I enjoy my life and practice my art, respected by all men and in all times; but if I swerve from it or violate it, may the reverse be my lot.
. 히포크라테스의 맹세
나는 다음 맹세와 서약을 최선의 능력과 최대의 판단력을 동원하여 지킬 것을 모든 남신과 여신을 증인으로 하고 치료의 신 아폴로를 걸고 맹세합니다.
나는 이 의술을 가르쳐준 스승님을 내 친부모나 다름없이 존경하고 사랑하겠습니다.
……
내가 사용하는 치료법은 환자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할 것이며, 그들을 상하게 하거나 해치는 데는 결코 쓰지 않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탁한다 할지라도 결코 독약을 쓰지 않을 것이며, 도움이 되는 상담도 하지 않겠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낙태를 돕지 않겠습니다.
어떤 집에 가서라도 모든 잘못과 타락한 행실을 억제하고, 특별히 남자의 유혹이나 여자의 유혹, 후환이 있든 없든 어떤 비행에도 빠지지 않겠습니다.
환자를 돌볼 때나 또는 환자와 관계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사생활에 관한 한 무슨 일을 보든 듣든 신성한 비밀인 것처럼 침묵을 지키겠습니다.
순수함과 거룩함이 나의 의술과 생활을 지킬 것입니다.
■ 육체는 매우 순진하다,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육체는 더 순진하다
(오쇼에게 배우는 명상의 세계 중에서)
또 다른 친구가 물었다. “당신이 명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자기 최면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 차이는 잠과 명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와 같다, 이것 또한 이해되어야 한다.
잠은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인데 비해서, 자기 최면은 노력을 통해 인위적으로 일으키는 잠이다, 이것이 유일한 차이이다, ‘히프노스(hypnos)'라는 말 또한 잠을 의미한다, ‘최면(hypnosis)'이란 탄드라, 즉 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는 저절로 찾아오는 잠이며 다른 하나는 인위적으로 유도된 잠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잠을 자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잠을 자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이다. 자리에 누워 계속해서 자신은 잠에 빠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이 생각은 그의 존재 속으로 스며들어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그러면 육체는 그에 따라 반응할 것이다, 육체는 이완하기 시작할 것이고, 호흡은 느려지며, 마음은 고요해질 것이다.
육체 안에 잠을 위한 환경이 창조되면 육체는 그에 따른 기능을 시작한다, 육체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육체는 매우 순진하다, 만약 그대가 매일 아침 11시에 배고픔을 느끼는데 시계가 그 전날 밤 11시에 멎었다고 하자, 이제 시계를 보고 그대의 위는 “밥 먹을 시간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사실은 아침 8시밖에 안 되었는데도 말이다.
아직 11시가 아니다, 11시가 되려면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그러나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다면 위는 배고픔을 호소할 것이다, 위는 기계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자정에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어쩌다가 그대의 시계가 두 시간 빨라졌다고 하자, 그대는 시계가 12시를 가리키는 것을 보자마자 졸음이 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직 10시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육체는 즉시 이렇게 말할 것이다. “12시다, 잘 시간이다!”
육체는 매우 순진하다,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육체는 더 순진하다, 건강한 육체란 순진한 육체이다, 병든 육체란 순종을 멈춘 육체이다.
그대는 졸음을 느끼는 데 육체는 잠들기를 거부한다, 그대는 배고픔을 느끼는 데 육체는 먹고 싶어하지 않는다, 순종을 멈춘 육체가 병든 육체이며, 순종하는 육체가 건강한 육체이다. 왜냐하면 육체가 순종할 때 그 육체는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육체가 순종을 거부할 때 어려움이 생겨난다, 따라서 최면이란 단순히 육체가 지시를 받고 그 지시를 따르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질병은 대부분 가짜이다, 우리 병의 거의 50퍼센트는 거짓이다, 세상에 질병이 늘어만 가는 이유는 병이 늘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허위가 늘어만 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하라.
지식이 증가했고 경제적 조건이 더 나아졌으므로 질병의 수도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간의 거짓말을 하는 능력도 점점 더 늘어만 갔기 때문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에게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새로운 질병마저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업에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파산 직전이라면 그는 자신이 파산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고 회사에 나가기가 두려울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채권자들과 얼굴을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때 갑자기 그는 어떤 병에 휩싸여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
이것은 그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병이다, 이런 병에는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자신을 납득시켰으니 남들 또한 납득시킬 수 있다.
그리고 둘째로 이 병은 불치병이다, 처음부터 그것은 전혀 병이 아니었다, 따라서 치료를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병은 더 나빠질 뿐이다. 만약 약으로 그대의 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그 병은 약물을 통해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라, 병의 원인은 다른 어딘가에 있다, 약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대는 약을 저주하고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는 의사를 바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아유르베다 의학이나 자연요법을 시도할지도 모른다, 대증요법이나 동종요법으로 돌아설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어떤 의사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의사는 진짜 질병만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 질병에 대해서는 아무런 방법이 없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은 그대는 이처럼 끊임없이 병을 만들어내고 그 병이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병의 50퍼센트 이상은 가짜이다, 여자들은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 법칙을 배워왔다, 아플 때에만 사랑을 받고 아프지 않다면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내가 아플 때면 남편은 일을 쉬고 의자를 끌어당겨 아내의 침대 곁에 앉는다,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저주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한다. 따라서 남편의 관심을 끌기를 원할 때면 언제나 여자는 즉시 몸져눕는다, 그것이 바로 여자들이 언제나 아픈 이유이다, 그들은 병에 걸림으로써 모든 가족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픈 사람은 독재자가 되고 폭군이 된다, 만약 아픈 사람이 라디오를 끄라고 말한다면 그 라디오는 즉시 꺼진다, 아픈 사람이 “불을 끄고 자라.”고 하거나 “모두 집에 있어라, 아무도 나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면 가족들은 그 말대로 한다. 독재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더 병에 잘 걸린다 - 누가 감히 아픈 사람의 감정을 건드리고 싶어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위험하다, 이런 식으로 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의 병에 가담하게 된다.
아내가 건강할 때 남편이 그녀의 침대맡에 앉는 것은 좋다, 그것은 이해가 되는 일이다, 그러나 아내가 아플 때 남편이 회사를 쉬면서 그녀의 병에 기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너무나 손해가 큰 거래이다.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 임마누엘 칸트, 동서문화사, 2007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 김재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읽기 - H.M. 바움 가르트너, 철학과 현실사, 2004
. 제1판의 머리말(1791년)
인간의 이성은 자신의 인식의 성격상 회피할 수 없는 물음에 시달리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이 물음을 회피할 수 없는 까닭은, 이 물음이 이성 자신의 본성에 의해서 부과된 것이면서도, 이성은 이 물음에 답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 - 이성이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이성 능력 총체를 추구하려는 의식을 비판하는 것
. 제2판 머리말(1797년)
이성의 인식
이론적 인식 - 대상과 그 개념을 '한정하거나', (수학, 물리학)
실천적 인식 - 더욱 '현실화 하는' 것
사고방식의 혁신(코페르니쿠스적 전회)
가정
우리의 인식이 대상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의 구조를 따른다.
물 자체와 현상의 구별(객관을 이중의 의미로 해석)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사물과, 사물 자체로서의 사물을 구별
객관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사물 - 현상 - 감성적 표상방식 - 인식
사물자체로서의 사물 - 물자체 - 지성적 표상방식 - 사고
(서론)
순수이성비판;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에 대한 결정, 가능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원천, 범위, 한계 등의 규정을 의미 한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무엇인가? ; 자신의 술어가 모순율에 따라 그 판단의 주어와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술어 개념의 첨가를 통해 대상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게 하는 판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근거 지워질 수 있는 판단을 말한다.
1) 순수인식과 경험적 인식의 구별에 대해
선험적 인식 - 모든 경험에서 절대적으로 독립해서 성립되는 인식
변화는 모두 그 원인이 있다.
- 선험적인 명제이나 순수하지는 않다.
- 변화라는 개념은 경험을 통해서만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모종의 선험적 인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평범한 지성조차도 결코 그런 인식이 없지 않다.
그 개념 속에 ‘필연성’을 가지는 명제가 있다면 이런 명제는 선험적이다.
어떤 판단이 엄밀한 보편성을 수반한다면 선험적이다.
변화는 모두 그 원인이 있다.
원인 개념은 원인이 결과와 결부되는 필연성의 개념,
인과율의 엄밀한 보편성의 개념과 관련이 있다.
3) 철학은 모든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과 원리들과 범위를 규정해 주는 학문을 필요로 한다.
순수이성의 불가피한 과제 - ‘신’, ‘자유’, ‘불사성’
4) 분석 판단과 종합 판단의 구별에 대하여
분석 판단(설명 판단) - 술어 P가 주어 S라는 개념 속에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서 주어 S에 속하거나(동일성에 의한 결합), (예) 물체는 모두 연장적이다 (선험적 판단)
종합 판단(확장 판단) - 그렇지 않으면 P(P라는 인식)는 S와 결부되어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S라는 개념의 밖에 있는 것(동일성 없는 결합) (예) 물체는 모두 무겁다 (경험판단)
경험판단은 그 본질상 모두 종합적이다.
5) 이성의 모든 이론적 학문들에는 선험적 종합 판단들이 원리로서 포함되어 있다.
선험적 종합판단 (예) 발생하는 것은 모두 그 원인이 있다.
수학적 명제 - 직관의 도움을 받는 선험적 종합판단 (예) 7 + 5 = 12
직선은 두 점 사이 최단거리다. (주어-질, 술어-양)
형이상학은 적어도 그 '목적상' 완전히 선험적인 종합 명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 세계는 반드시 그 시초가 있다.
6) 순수이성의 일반적 과제
선험적 종합 비판이 어떻게 가능한가?
-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 자연 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7)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이름 밑의 특수한 학문의 이념과 구분
이성 - 선험적 인식의 원리를 주는 능력
인간의 인식에는 두 개의 근간이 있다. - 감성과 지성
인식능력 감성능력 -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지는 수용성
지성능력 - 우리가 대상들을 사고하는 자발성
감성에 의해서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지며, 지성에 의해서 사고된다.
인식은 직관을 통해 대상과 관계하며
개념에서의 직관의 가공을 통해 대상과 관계한다.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원리론 초월적 감성학 공간론 (직관)
시간론
초월적 논리학 초월적 분석학 개념의 분석학 (지성)
원칙의 분석학 (판단력)
초월적 변증학 합리적 심리학
합리적 우주론 (이성)
초월적 방법론 순수이성의 훈육
순수이성의 규준
순수이성의 건축술
순수이성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