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평온 ......
■ 불안한 마음
화엄경의 경구를 인용하여 본다.
약인욕료지 (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 (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 (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어떤 사람이던지 지혜를 깨달아 그것이 욕망인줄 안다면
그것은 전생과 금생 내생 (과거.현재.미래) 일체가 부처의 성품임을 아는 것이다.
또한 관찰하여 수용하는 법계가 본래 성품이라고 알면
일체가 마음이 지어 있는 것이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 의미를 내식으로 다시 풀어 보기로 하자.
세월이 가면 부질없는 것들이니, 쓸데없는 욕심일랑 떨쳐 버리고,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으니, 앞에 닥친 불행이나 고통이라 하여 너무 번민하지는 말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룬다.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이 법구(法句)에는 논리적 결함도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 마음이 저 뜰 앞의 소나무를 만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하늘의 흰구름을 만든 것도 아니다.
만약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미움에 시달리는 이가 있다면, 옛 기억을 떠올려 보자.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고통의 시간들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모두 부질없는 번뇌망상이다. 지금의 현실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따름이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상념의 차이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도 마찬가지이다. 신문 사회면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저주와 불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위키백과)
한 때는 나도, 일체란 돌과 풀, 내 몸까지도 포함될까? 라는 의구심을 가져 본 적도 있다. 현대물리학에서의 빅뱅으로 세상이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추론, 말씀(신의 의지)으로 세상이 시작 되었다는 기독교 교리, 그 처럼 우주의 시작을, 마음에서 생겨났으리라는 것에까지 불교 교리를 확장함은 무리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오는 과정에서 느낀 바로 분명한 것은, 일체란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나 운, 불행의 시발점을 모두 다를 합친 의미 정도로 이해하는 데는 고개를 끄덕이게 될것이다.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몇 일 후, 몇 일 후 ~”를 읖조리며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영원한 이별을 잠시만 헤어진 것일 뿐, 차라리 복된 곳에 먼저 보낸 것으로 여기는 기독교 신앙인도 있다. 다시 만날 날의 기다림으로 승화 시키는, 죽음에 대한 애도보다 서로 간 행복의 절반쯤으로 해석하려는 기독교 신앙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죽음이라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그 씀씀이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엇갈리는 마음의 무궁함을 되새겨 보게 된다.
한 살짜리 아들이 죽자 부르고뉴의 선량공 필리프(1396~1467)는 이렇게 대꾸했다. “만일 신께서 나를 그렇게 일찍 죽게 하셨다면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마음의 여유와 불안 사이에서 움튼다. 아무리 큰 아픔과 고통, 심지어 죽음에서 까지도 그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남고 모자람이 물질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마음 속, 보이지 않는 스스로의 잣대로서 계량된다. 많다고 남는 것이 아니며, 적다고 모자라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 이다. 재물과 부, 명예와 영광, 건강, 심지어 목숨까지도, 그 어떤 욕망의 굴레라 해도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늘 모자람 속에 허덕거릴 것이지만, 텅 비운 마음 속이라면 항상 넉넉함이 흐르고, 풍만, 풍요, 만족, 흡족, 감사 라는 행복의 노랫말이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바람, 공기, 이슬, 작은 풀잎, 들꽃 속에서도 마음 설레는 만족을 껴 안을 수 있고, 포르쉐 카레라 GT, 페라리 599 GTO 따위의 스포츠카를 달리거나, BMW 780 뒷좌석에 기대고 누워 구르더라도 무엇인가 불안하다면, 털털대는 경운기 뒷짐칸에 쪼그린 채 흔들거리며 실려가는 이빨 빠지고 눈가 짓무른 늙은 촌노의 해맑은 웃음 속에 핀 만족감, 그 작은 행복과 견줄 필요가 있겠는가?
불안은 두려움, 무서움, 공포, 겁먹은 속에도 있지만, 미움, 괘씸함, 서러움, 야속함, 괴로움 속에도 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하곤 하는 불청객, 그 불안 의 본질은 대체 무엇일까? 그 불안을 떨쳐낼 안정과 만족은 어떻게 구할 것인가? 그 원인과 해법에 관한 자료들을 몇 편 골라 정리하며 본다.
2012. 3 .25. (일)
오갑록
■ 불안
(백과사전)
불안 (anxiety, 不安) : 걱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지 않음, 걱정스럽거나 초조하여 편안하지 않다. 초조라고도 함. 종종 뚜렷한 원인 없이 느끼는 근심·걱정·두려움 등의 감정.
신체적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것과 같이 분명하고도 실제적인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생기는 공포와는 구별된다. 불안은 오히려 객관적으로 볼 때 자신에게 위험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나며, 자신도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내면의 주관적인 감정충돌의 산물이다. 일상생활에서 어느 정도 불안이 나타나는 것은 불가피하며, 이것은 정상적이다. 그러나 실제 생활의 스트레스와 분명한 관련이 없으면서 나타나는, 심하고 오래 지속되는 만성적인 불안은 감정상태의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이 정당한 이유 없이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사물에 의해 유발될 때, 이를 공포증(phobia)이라 한다.
특별한 이유나 정신적 문제와는 관계없이 지속적이고 막연한 불안이 나타나는 증상을 자유부동성불안(free-floating anxiety)이라고 한다.
불안에 대한 원인이나 설명은 다양하다.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불안이란 지니고 살기에는 너무나 위협적이고 괴로운 자신의 경험. 감정. 충동 등을 억압한 결과로, 내면의 감정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설명했다. 또 성관계나 일 등이 부진해 개인의 자아(ego)나 자기존중이 위협당할 때 불안이 생겨난다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행동심리학자들은, 불안은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잘못 학습된 반응의 결과라고 설명하는데, 충격을 준 사건과 그때의 주위 환경이 연관 되어 사건에 관계없이 주위 환경이 초조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방아쇠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불안한 감정을 적당히 처리하지 못하면, 지속적이거나 주기적인 불안 또는 전반적인 두려움이 엄습하는(특정한 상황이나 사물에 한정되어 나타나는 두려움이 아닌 이 증상은 일반적으로 신경증으로 분류됨) 불안 장애로 진전될 수 있다.
긴장감은 또한 불면증, 감정폭발, 격앙(激昻), 심계항진(心悸亢進:두근거림), 죽음, 정신이상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나타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두렵고 괴로운 감정에 대항하다 보면 자주 피로를 느끼게 된다. 때때로 불안은 좀더 급성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구역질, 잦은 소변, 설사, 숨이 막히는 느낌, 발한, 가쁜 호흡, 동공확대 등의 신체적인 증상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증상들은 몇몇 다른 신체적 질환에서도 나타나며, 스트레스나 공포와 같은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때때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런 상황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극복하는 것이고, 만일 아무런 기질적인 장애나 질병이 없는데도 위와 같은 증상들이 나타나면 신경증으로 생각해볼 만하다.
불안감과 관련이 있는 다른 질환에는 건강염려증, 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 정신분열증 등이 있다.
한편 철학적인 용어로서의 불안(dread)은 실존주의 철학의 기본개념 가운데 하나로 논의되기도 한다. 19세기 철학자 쇠렌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이란 인간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에 대한 갈망이며 인간 자신의 원죄관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불안이란 현존재(역사적 인간)가 우연적 존재임을 드러내는 여러 길 가운데 하나이며, 불안을 통해 비로소 두려움이 생겨난다고 했다.
■ 불안 (불안장애, Anxiety Disorder)
(중앙건강백과)
현실적인 위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불안하거나 또는 그 정도가 심하여 오래 지속하는 경우를 불안장애라 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별안간 형용할 수 없는 불안에 빠져,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흐르며 이대로 죽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심한 불안이 발작적으로 생긴다. 이런 불안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혼자서 외출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도 계단 등을 오르내리는 일도 두려워지며, 심하면 보행도 뜻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사춘기에 가까운 여아에게 특히 많다.
. 원인 (Cause)
아동의 불안에서는 원인이 분명치 않은 경우가 많지만 부모와의 관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불안의 원인은 보통 갈등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불안이 갈등에서만 일어난다고 할 수는 없다. 갈등에는 접근-접근갈등(바람직하지만 양립할 수 없는 두 목표를 추구할 때), 접근-회피갈등(목표 접근과 회피를 동시에 바랄 때), 회피-회피갈등(바람직하지 않은 두 목표나 행동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때)의 세 가지가 있으며, 불안을 일으키는 것은 회피를 포함한 갈등뿐이며, 특히 회피-회피갈등을 느낄 때 불안은 더욱 심하다.
프로이트는 불안이 성적(性的)인 원인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성적 욕구가 지속적인 욕구로 간단하게 단념할 수 없는 반면에, 도덕이나 사회의 관습에 저촉되어 갈등의 원인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이라는 질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고 하였다.
. 증상 (Symptom)
자기에게 닥칠 위험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미래의 가능성으로서 존재하고 있어 자기 안전이 깨어질 것이라는 두려운 감정이 심하게 든다. 생리적으로는 심장의 고동이 세고 가슴이 죄는 듯하며, 머리가 무겁고, 식은땀이 난다. 어떤 사람을 불쾌한 불안감을 없앨 목적으로 손을 자꾸 씻는다든지, 가스밸브나 출입문 자물쇠를 수없이 체크 하는 등 특별한 행동이나 생각을 수없이 반복하는 강박증세를 보인다.
. 현실불안, 정상인이 일상생활에서 겪는 불안(시험 직전의 불안 등)
. 신경증적 불안, 신경증 환자가 겪는 불안
. 부동(浮動)하는 불안,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과 결부되지 않은 불안
. 공포증,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과 결부된 불안이지만, 실제의 위험물보다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불안(광장을 걷기가 두려운 광장공포증, 차 안의 손잡이에 손대기가 두려운 불결공포증 등)이 있다. 불안발작은 불안이 발작적으로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다. 광장공포증은 넓은 거리나 광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회공포증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경우를 지나치게 두려워한다. 폐쇄공포증은 폐쇄된 장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외 동물이나 예리한 물건에 대한 공포 등 여러 가지가 있다.
. 미만성 불안 장애, 막연한 불안이 최소한 1개월 이상 지속한다. 불면증 또는 자율신경계증상이 나타난다.
. 공황 장애, 갑자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면서 자율신경계 증상, 즉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땀이 나고, 두통, 어지러움, 손발이 차지고, 몸이 떨리고, 입이 마르며, 소변이 자주 마렵고, 설사도 한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쉬는 과호흡을 하면 사지에 이상 감각이나 경련을 일으키며 손발이 뒤틀린다.
불안발작이 오면 금방 죽을 것 같은 또는 의식을 잃어버릴 것 같은 또는 미칠 것 같은 급박한 공황상태에 빠진다. 이런 발작상태는 갑자기 일어나서 수분간 지속되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환자는 늘 긴장과 과민상태에 있게 된다.
. 치료방법 (Treatment)
의사는 심리요법으로 환자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불안을 제거하는 암시를 주거나, 환자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번민을 발견하여 그 번민을 제거하는 치료 등을 한다. 그리고 부모의 태도에 어떤 결점을 발견하게 되면 부모에 대한 심리요법도 실시한다. 약물요법으로 정신안정제를 쓴다.
. 신체적으로 질환이 없다는 것을 환자 자신이 확인하고 인지하여야 한다.
. 불안은 환자의 의지가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환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정신의 질병 상태이다.
따라서 신체적인 질병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진단과 전문가의 적절한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 불안은 회피할수록 오히려 더 심해지므로 불안해 하는 대상에 환자를 반복해서 노출시키고, 회피반응을
못하게 억제함으로써 불안을 점차로 약화시키는 것이다.
. 불안하다고 하여 신체활동을 줄일 필요는 없다. 일상생활을 유지해도 좋다.
. 특별한 식이요법은 없다. 그러나 커피나 홍차와 같이 카페인이 든 음료나 술은 피하는 것이 좋다.
. 불안과 두려움이나 공포 감정과의 차이
두려움에는 두려움을 일으키는 위험물이 목전에 있지만, 불안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불안은 상상 된 위험물에 대한 반응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안의 대상은 무(無)라고 한다.
두려울 때는 위험물에서 도망치려고 하거나, 위험물을 극복하려고 하는 충동을 느끼지만, 불안할 때는 무력감밖에 없다.
■ 무상감으로서의 불안의 의미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김형효 의 책을 중심으로
블로그, “Life” 중에서 부분적으로 발췌한 것임
□ 공포와 “근본적 마음상태”로서의 불안과의 차이
하이데거는 불안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공포와 대비시켜 설명했다.
. 공포
. 공포가 무서워지는 이유는 공포를 느끼는 존재자 자체인 현존재 때문이다. 존재자의 존재에서
이 존재를 주요한 관심으로 여기는 존재자만이 무서움을 느낄 수 있다.
공포는 이 존재자가 위험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내맡겨져 있다는 것을 현시하고 있다.
.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현존재 때문인데, 현존재는 나, 즉, 나는 나 때문에 무서워한다.
나는 허약한 존재...
. 인간은 자기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익명의 어떤 이를 위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 공포도 마음상태의 한 양식이다.
. 불안
. 똑같이 우리를 무섭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규정된 어떤 것, 지시 가능한 어떤 것에 의한 것이 아님.
. 규정되는 존재자에 의해 제기되는 것이 아님.
. 세계 안에 있는 어떤 존재자도 현존재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도록 하는 원인이 되지 못한다.
.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은 완전히 무규정적인 것 … 세계 안의 존재자가 중요하지 않다.
. 존재자가 중요하지 않다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
. "어떤 것의 현전에서 불안이 불안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것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 자체"
.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가까운 근처이고, 세상에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에도 없는,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를 숨막히게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어디에도 없는 ……
. 도대체 불안이 어디에서 생긴다는 소릴까?
이런 이상 야릇한 느낌을 하이데거는 '스산한 느낌'이라고 비유 했다.
"불안 속에서 사람들은 스산한 감정을 느낀다. 현존재가 불안 속에서 마음적으로 느끼고 있는 특이한 무규정성은 그런 스산한 감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무와 어디에도 없음에로 표현된다. 스산한 느낌은 동시에 자기 집에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근본적인 구성을 알리는 최초의 표시로서, 그리고 내폐성의 범주론적 의미와 구별하여 “(세상에) 거부하는 존재”의 실존론적 의미의 해명으로서 “세상에 거주하는 존재”는 “~에 거부하고 있음”과 “~와 친숙하게 존재하고 있음”으로서 이미 규정되었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의 이러한 성격은 안심된 자기 안전과 자명한 자기 집에 있음을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보장하는 세상 사람의 일상적인 공식성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이미 가시화되었다. 불안은 현존재가 함닉하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그 현존재를 다시 되찾게 한다. 일상적인 친숙함이 한꺼번에 쪼개진다. 현존재가 개체화된다. 그렇지만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으로서 개체화된다.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이 “자기 집에 있지 않음”의 실존론적인 양식으로 변한다. 그 밖의 어떤 것도 “스산한 느낌”의 담화성을 대신할 수 없다."
……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이고, 어디에도 없다 는 말을 덧붙였다. (고로, 불안은 스산한 느낌, 무)
또, 이렇게 불안만 느끼게 하고,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려면 우리 현존재들이 힘들 것이다.
그래서 현존재들은 이런 세상사람의 공식성에서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단독화된 실존 이라니, 그래서 현존재를 고독한 존재라 하고…… 다시 정리해 보면, 불안은 스산한 느낌, 자기 집에 있지 않음의 감정, 세상의 무의미를 느끼게 하는...... 또 세상의 세론을 박하고 고독한 외로움을 맛보게 해 주는 것이다.
□ 하이데거의 불안과 유식학의 비교
무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파악하려고 하는 존재를 알기 위해선 “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이데거는 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한 마디로, 답변이 가능한 논리학적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말한다. 이제까지의 서양 철학은 무들을 무로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해 왔다고. 그리고 무의 올바른 이해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분별적으로 보는 존재자적인 사고가 일시에 무너지는 곳에서 가능하다고 했다.
여기서 비슷한 개념이 등장한다. 앞에서 불안이란, 이 세상 이 모든 존재자들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그 사고들을 무너뜨리는 것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 “불안”과 “무”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의 불안과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감'을 함께 비교 분석 해 본다.
. 불안이 무를 계시한다.
. 스산한 감정을 지니면서 다른 한편으로 고요한 평안의 감정을 동반하는 불안은 무를 계시.
. "무는 불안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결코 존재자로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무는 또한 대상으로서 주어지지 않는다. 불안은 무를 장악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는 불안을
통해 불안에서 계시된다."
. 불안이 무상감을 불러일으킨다. … 무화. "무 자체는 무화 한다."
. 비교 1
. 무가 무화 한다. 불안이 불안케 한다. / 제행무상
무와 불안의 개념이 단순한 지식의 수준에서 우리에게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사건으로 와 닿는 생기의 수준으로 어떤 깨달음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세상 살아가는데, 괜히 불안해 진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불안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눈을 감고 보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이 세상도 없다. 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불안의 이유가 되어주지 못하니까.
(무의 무화)
여기서 무는 어둠이지만, 밝은 어둠이다. 제행무상의 빛이다. 마음이 제행무상을 느낄 때, 마음은 존재자를 어떤 이용 가능한 기구나 또는 대상 가능한 사물로서가 아니고, 존재자를 오직 그 자체로서 바라보고자 하는 평안의 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현존재를 존재자 앞으로 가져가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어려운 말로, 무화 하는 무의 본질이 현존재로서의 마음을 제행무상에 젖게 함으로써 현존재가 존재자를 그 자체로서 보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 불안이 역설적으로 평안으로 마음을 인도하는 것.
. "마음인 현존재는 무 속으로 들어가 머물고 있음을 뜻한다. 무 속으로 들어가 머물면서 현존재는 벌써
존재자를 그 전체성에서 넣어서 있다."
. 이렇게 존재자를 몽땅 이해하고 넘어선 것을 '초월'이라고 부른다.
. 무에로의 초월이 있어야만 현존재는 존재자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다.
. 비교 2
. 현존해가 무 안으로 들어가는 것. 초월하는 것 / 제법무아
제법무아의 견분은 모든 존재자가 자가성의 칠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유인데, 모든 존재자를 그 자체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마음이 존재자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는 무의 무화작용에 의해 가능하기 때문.
하이데거든, 유식이든, 존재 말고 존재자에 집착하면 제대로 존재를 알지 못한다.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것이라는 결론이다. 이 존재자에게 집착하지 말라고 지금 이 어려운 말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이데거와 유식에서 말하는 무와 유의 개념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 비교 3
. 불안의 무상함에 의하여 현존재가 제행무상을 느끼고, 제행무상에 의하여 현존재가 무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머무는 초탈에 의하여 제법무아를 터득하고, 비로소 비본래적인 곳에서 본래성의 실존에로 회귀
하게 되는 ……
. 존재자를 깨달으면서 존재를 깨닫는다.
/ 제행무상을 통해 제법무아의 진리를 유도, 아공이 법공을 동반하는 것.
. 비교 4
. 무화 하는 것 / 삼무자성론에서 존재자를 무화 하는 초탈로서의 초월.
. 비교 5
. 무가 곧 유의 본질 / 자성이 바로 무자성을 이면에 함의하고 있다.
. 현존재는 유이면서 동시에 무로 해석되어야 한다. 자꾸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에 집착할수록 유와
무의 망각도 심해지고…… 존재자들을 일종의 기구처럼 생각해서 결국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는.
. 이런 깨달음을 가능케 해 주는 힘이 불안으로부터 온다.
. 불안의 무상감을 통해 현존재는 비본래성 에서부터 본래성 에로의 회심을 이룩하게 된다.
■ 실존과 불안
이동희의 철학여행 카페,
글 “사르트르” 중에서, 내용 중 일부 발췌
사르트르의 주저 “존재와 무”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표절인가? 흔히 말하는 대로 이 책은 “존재와 시간”에 대한 사르트르의 창조적 오독인가? 그러나 “존재와 무”에 대한 그러한 평가는 부당한 것이다. “존재와 무”는 비록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았지만, 철학자로서의 사르트르의 독창성과 기발함이 담겨 있는 책이다. ……
“존재와 무”는 현상학적 존재론의 시도이며 존재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한다. “존재와 무”에서 그는 즉자존재, 대자존재를 구분한다. 즉자 존재는 의식과는 무관한 그 자체로 존재하는, 돌멩이나 의자와 같은 사물의 존재이다.
즉자존재는 자기 자신도, 타자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다. 돌멩이도 그 자리에 놓여 있을 때는 어느 누가 고의적으로 갖다 놓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의자도 의자를 만든 목수의 의도가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는 그 이상일 수 없다. 그러한 것이 그대로 그들의 본질을 결정한다. 이에 반해 대자 존재는 자기에 대해 의식하는 존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인간존재를 뜻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 인간은 자신이 돌멩이나 의자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의식한다. 인간은 돌멩이도 아니며, 목수가 그 용도를 미리 정해 놓은 의자도 아니라는 것도 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의 본질을 미리 규정하는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옹기장이와 같은 하느님은 없으며 따라서 옹기처럼 정해진 인간의 본질도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고서야 그리고 나서야 자신의 본질을 묻는다. 그러므로 사르트르는 이렇게 주장한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본질이 아직 규정되지 않은 “무”라는 것을 안다.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았기에 인간 존재는 “자유”다. 아무 것도 규정되지 않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운명처럼 주어져 있다. 이제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선택해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도 있으며, 사물처럼 주어진 대로 그냥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자유”를 의식할 때 인간은 불안을 느낀다. 불안은 공포와 다르다. 불안은 나 혼자 선택해야 하며 그 자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이러한 불안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추고 즉자적인 상태로 살아가고자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기기만이라 부른다. 사르르트는 “불안”을 인간의 자유를 실현하는 기획의 동력으로 삼는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기에 불안을 느낀다. 나의 선택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결혼을 선택한다면, 그러한 선택은 결혼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지지하는 것이 된다. 이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상황은 결국 타자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존재와 무” 3부는 대타 존재, 즉 타자와의 관계하는 존재를 기술한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는 항상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는 타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대상으로서 경직화된다. 우리는 타인의 판단에 내맡겨진다. 타인은 우리를 이렇게 저렇게 객관화시키고 대상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을 이렇게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타인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판단에 우리를 내맡겨야만 할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 이상 타인에 판단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기획하는 것이다.
□ 샤르트르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고 이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산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은 “존재와 무”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르트르에 대해 멋대로 비판을 했다. 사르트르는 자기 철학을 올바르게 알리기 위해 1945년에 강연을 행했다. 강연 제목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였다.
이 강연에는 강연장의 의자가 부서지고, 몇 명이 기절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다. 이 강연 이후로 실존주의가 건초 더미에 불붙듯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전도사이자 슈퍼스타가 되었다. 사실 사르트르는 처음에 실존주의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말을 처음 쓴 사람은 가브리엘 마르셀이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칼 야스퍼스, 마르셀을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하이데거와 자신을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규정했다.
. 실존주의 유행을 부른 강연
강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 대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존재와 무”는 존재론을 다루었지만, 인간 자유의 조건인 경제적, 사회적 관계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두 번째 철학적 주저인 “변증법적 이성 비판”에서 실존주의와 맑스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했다.
이 책은 1960년에 발표되었다. 사르트르는 “사회적 세계에서 인간을 다시 발견하고, 인간의 실천과 특정한 상황을 토대로 해서 사회적 가능성과 대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기획을 추적해 이해하고자 하는 인식을”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과제로 내 세운다. 사르트르는 맑스주의가 개인주의를 선험적인 사회구성의 전체적 목적에 복종시킨다고 비판했다. 그는 맑스주의의 도그마를 부수기 위해 실존주의가 맑스주의에 통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 1963년에 자전적 소설인 “말”이 발표되었다. 이 작품으로 사르트르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절했다. 그는 노벨상을 받는 것은 문학을 등급화시키고 제도권 내에 편입시키는 일이며, 동서양 진영에서 한 진영에 편향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레닌 상을 준다고 해도 그는 거절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러셀과 더불어 국제 재판을 열어 미국의 전쟁범죄를 비판했다. 사르트르는 1968년에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68학생운동이 진실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기폭제라고 믿었다. 그래서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 눈이 멀고 건강이 악화되어 1980년 4월 15일 폐암으로 74세의 나이에 죽었다. 약 2만5천여 명이 참석하여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과 파리에서 열린 그의 장례행렬에는 5만명이 넘는 군중이 뒤따랐다. 마치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연상시켰다. 그의 훌륭한 선임자 위고가 받았던 국장(國葬) 승인은 없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었고, 사르트르가 항상 그의 글로써 권리를 지켜준 사람들이었다.
앙리 레비가 말한 것처럼 사르트르는 그 자체가 하나의 국가였다. 그는 프랑스의 문화의 대표적 아이콘이었지만, 프랑스인이 되기를 거부했다. 그는 항상 행동했고 실천했다. 그는 치외법권적인 존재였지만,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양심에 따라 행동했고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참여했다. 그는 자유 그 자체였다. ……
■ 불안(不安)과 공포(恐怖)
(이동식, 주간조선 1978.11.)
. 현대의 상황과 불안
현대는 ”불안의 시대”라고 한다. ”불안의 시대”라는 오오든의 시가 나오고 레오나드 번스타인의 교향악도 있다. 까뮤는 20세기를「공포의 세기」라고도 불렀다.
불안이란 과거에는 정신을 가진 인간에게만 있고 동물엔 없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중추신경이 발달된 동물일수록 불안의 현상을 분명히 볼 수 있다. 보신탕 냄새를 맡고 눈물을 흘리는 개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불안이 그 예다.
현대가 전면적인 불안의 시대로 보여지는 이유는 고대나 중세에 있어서는 일시적인 천재지변이나 역병이나 전란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안정된 종교 정치 경제 사회적 질서가 유지되고 따라서 개인의 신분이나 역할이 고정되어 있었고 가치의 변동이나 사회의 변동이 급격하거나 빈번하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현대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급변의 연속이요 가치의 혼란 신분과 역할의 혼란 무기의 가공스런 발달과 공해의 만연으로 인한 인류전체의 멸망이란 전면적인 불안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 불안의 의미와 근원
유마경(維摩經)에도 모든 인간은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구절이 있다. 불교에서는 건강하고 성숙된 마음을 단단한, 부서지지 않는 견실심(堅實心)이라고도 하고 여덟 가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不動心)이라고도 한다. 이와 반대로 흔들리는 마음이 넓은 의미의 불안이고 공포도 여기에 속하고 유교에서 말하는 칠정 (喜怒哀樂愛惡欲)이나 불교의 칠정 (喜怒憂懼愛憎慾)이 모두 불안에 속한다. 서양의 정신분석에서도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공급이 되어 불안을 느끼지 못하다가 출생과 더불어 생기는 탄생(誕生)불안이 불안의 원형이라는 주장을 한다.
물론 근자의 연구로서는 어머니의 자궁에 있을 때에도 어머니의 심신상태에 따라서 반드시 그렇기만 하지 않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드의 불안에 관한 최종이론을 보면 불안을 자동불안(自動不安)과 신호불안 두 가지로 구분한다. 자동불안은 자기 힘으로 소화 또는 감당하기에 너무나 크고 많은 자극을 받으면 언제든지 자동불안이 생긴다. 자동불안의 원형은 탄생불안이다. 이러한 자극은 밖으로부터도 안으로부터도 올 수 있으나 대부분 본능 즉 욕동(欲動, 욕망)에서 비롯된다. 자동불안은 유아기의 특징이다.
발육도상에 위험한 사태가 일어나면 불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나중엔 위험한 사태를 예견만 해도 불안해진다. 이 신호불안이 있기 때문에 자아가 본능을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 이것은 도둑질을 하고 싶은데 도둑질을 하면 형무소에 들어간다는 위험한 사태를 예기하기 때문에 신호불안이 일어나 도둑질을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계속 이러한 신호불안을 일으키는 위험한 사태라는 것은 언제나 있다.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불안의 연속이고 이 불안 즉 문제가 생기면 불안이 일어나는데 문제를 처리하면 불안이 없어지나 해결을 않고 두면 정신장애가 일어나고 성격이 비뚤어진다고 볼 수 있다.
신호불안은 불안의 약화된 형태로 볼 수 있고 정상발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면서 노이로제의 특징적인 불안형태다.
어떤 정신분석학자는 기본적 불안 기본적 신뢰란 말을 쓰기도 한다. 기본적 신뢰는 젖 먹는 것 잠의 깊이 위장의 이완 즉 속이 쉽게 편해지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안 되면 사회적 불안이 생긴다. 이것이 잘 되면 기본적인 신뢰가 생긴다.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도 불안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와의 관계가 신뢰하는 정도로 되어 있어야만 된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기가 추워하면 춥지 않게 덮어주고 배가 고파지면 젖을 주고 기저귀를 갈아주어야 될 때 갈아주고 안아주어야 할 때에는 안아주고 졸릴 때는 재워주고 가만히 두어야 할 때는 가만히 두고 지켜보고 있다든지, 같이 놀아야 할 때에는 같이 놀아주고, 어린이의 성장에 필요한 것만 해주고 불필요한 간섭을 않는 것이며 불편해 하면 그 원인을 알아내 원인을 없애주는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사람은 평생을 불안 없이 일생을 지낼 수 있다. 불안한 어머니를 가진 아이는 커서도 항상 불안해 하고 겁이 많고 잘 놀래거나 위축이 되거나, 폭발적, 충동적인 성격 여러 가지 형태의 정신장애를 일으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신호불안을 일으키는 전형적인 사태는 어머니로부터 떨어질 때 일어나고 1년6개월까지는 대상상실(對象喪失)에서 생긴다. 이것은 어머니가 여행을 가거나 형무소로 가거나 사망 등의 경우다. 여태까지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때, 세 살 전후에는 소위 거세불안이란 것을 말하기도 한다. 이것도 일반적인 위협감에서 온다고 볼 수 있다. 5~6세 경부터는 양심이 발달되어 죄악감 즉 양심의 가책이 생긴다.
이렇게 불안이 태어나자마자 누구나가 경험을 해야 되고 산다는 것 그 자체가 불안을 전제로 한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다면 불안해진다.
어떠한 방법을 써서 먹을 것을 구해 먹으면 불안이 없어진다.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양식을 준비해 둔다든지 돈을 준비를 해두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안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불안이 병적으로 된다. 그러나 신호불안이 있음으로 해서 정상적인 인격이 발달될 수 있고 교육이 가능하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말하자면 나쁜 짓이나 법률이나 도덕, 부모의 지시를 어기는 행동을 해도 불안이 없다면 인격의 성숙이나 교육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불안의 효용이고 긍정적인 면이다.
. 불안의 해소와 불해소의 결과
이렇게 불안이란 살고 있는 동안에 여러 가지 내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외부적인 위협이 있을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 가정이나 사회 인류의 평화가 불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여하에 달려있다. 점(占)도 여기에서 나오고 여러 가지 미신도 모든 종교 활동도 여기에 집중이 되고 술집이나 각종 오락시설, 정치 경제 과학 기술 모든 예술 활동, 인간의 모든 활동이 불안해소의 목적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그 해결방법이 적합하냐 항구적이냐 일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상적이고 건강한 인격이 길러진 사람 즉 건강한 사회에서 건강한 부모 특히 건강한 어머니 밑에서 깊은 건강한 사랑(부모자신의 욕구충족이 위주가 아니고 자녀의 성장 위주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 즉 잘 했을 때에는 칭찬을, 그것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받고 잘못했을 때에는 꾸중이나 매를 맞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본인이 하도록 권장되고 부모가 대신해주는 일이 없이 자라고 본인이 견딜 수 있는 정도의 욕구충족을 보류 지연시키는 훈련, 다시 말해서 견딜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병을 일으키는 정신적 예방주사를 맞고 자란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도상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해결하고 자기 힘이 모자라면 가족이나 친구, 스승이나 선배나 상사에게 상의해서 도움을 받아 처리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긴 시간이 걸려도 해야 할 일은 장기 계획을 세워서 해결을 해나간다. 불가능하거나 그렇게 까지 큰 시간이나 노력을 할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포기하여 항상 불안이 오래 지속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불건강한 사회, 불건강한 부모 특히 불안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거나, 건전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없거나, 부모가 건강해도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대로 구실을 못하거나 어머니 대신 역할을 하는 할머니, 가정부나 가정교사, 아버지 역할을 하는 할아버지나 삼촌 등이 건강하지 못할 때, 인격성숙이 제대로 안된 미숙한 인격은 정상인이면 불안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에 불안이 생기고, 일단 불안이 생기면, 불안의 처리 방법이 적절하지 못하고 일시를 호도하거나 모르는 척하면서 지나려고 한다. 한마디로 제대로 처리를 못한다.
비근한 예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부모들이 자기자식을 잘 기른다고 밖에 나가서 놀면 다친다거나, 이웃아이들이 양반이 아니라 또는 없는 집 아이들이라 음식을 잘못 먹거나 병이나 옮지 않을까 좋지 못한 행동을 배울까봐 불안한 정도가 심해서 집안에 가두어 키우면, 학교에 가서 불안 공포가 심해지고 심할 때에는 학교 가기를 싫어한다. 이러한 문제를 일찍이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손을 써서 극복하게 도와주지 않으면 점점 접촉을 꺼리고 결국은 정신병에까지 이른다.
노이로제나 정신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이러한 불건강한 인격, 다시 말해서 미숙한 인격, 나이는 먹었는데 마음과 감정이 어린 상태에 있는 사람이 남은 자기를 자기나이에 합당한 사람으로 보고 거기에 합당한 책임을 요구하고 기대를 갖는데, 본인에게는 그것이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공연한 적개심이 생겨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하게 되고, 항상 갈등상태를 헤매다가 도저히 더 이상 적응하기가 어려워질 때 여러 가지 병적인 증세가 나타난다.
정신 장애란 불안의 처리방식이 잘못된 것이고, 처리방식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
정신병이나 신경증 (노이로제) 등 신체증상을 주로 하는 정신신체장애는 불안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감정을 억압하는 데에서 생긴다. 말하자면 남에게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을 때, 속으로는 기분이 나쁘면서도 기분 나쁘다는 감정을 즉각 억압하고 오히려 웃거나 아니면 표현을 못하거나 대항을 못하면 속에서는 적개심이 점점 더 커진다. 이 세 가지는 정신분석에서 인격의 삼대구성요소를 본능 자아 초자아(양심)로 구분하는 것 중에서 초자아(양심)가 지나치게 비대해 있어 자기의 욕구충족이나 감정표현이 타인에 해가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해서는 안 된다고 양심이 금지시켜 발생한다.
정신병과 신경증은 주로 정신작용이나 행동면에 증상이 나타나고, 정신병은 인격의 붕괴가 일어나고 현실감각이 없어진다. 신경증은 인격의 붕괴가 없고, 현실감각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면, 건강한 사람이면 튼튼하게 지어진 빌딩의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천장이 무너질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신경증기가 있는 사람은 혹시 시공을 잘못해서 천장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이 가끔 일어나지만, 그것은 엉뚱한 생각이라는 자각이 있다.
그렇지만 정신병의 정도가 되면 천장이 무너져서 떨어지는 것이 환각(幻覺)으로 보일 정도로 현실감각이 없어진다.
정신신체장애는 누구나가 경험하는 것으로 밥상머리에서 기분 나쁜 소리를 들었는데 잘 처리하지 못하면 체하는 경우다. 어떤 사람은 밥상머리에서 마누라가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하면, 즉시 수저를 놓고 밖으로 나가서 한바퀴 돌고 나서 밖에서 식사를 한다 했다. 왜냐하면 그냥 앉아서 밥을 먹으면 반드시 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신병이나 노이로제에 여러 가지 종류가 있듯이 정신신체장애(또는 심신장애)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흔한 것은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당뇨병 등등이다.
위의 세 가지 범주의 정신장애와 대조적인 정신장애로는 인격장애자라는 것이 있다. 앞의 세 가지는 불안이 생기면 무조건 불안의 원인이 되는 감정을 억압하여 화가 내공발병하고, 자기 자신의 심신에 파괴작용이 일어나는 경우지만, 인격장애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성장과정에서 양심이 제대로 길러지지 못해 자기의 본능 욕구를 제어하는 장치인 양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다. 화가 잘 나고 화가 나면 즉각적으로 남을 친다. 남을 말로써나 폭력으로 기타방법으로 공격하여 자기의 불안을 해소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심신에는 별로 파괴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격장애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범죄자, 깡패, 여러 가지 관리직에서 성공한 사람, 정치가들 중에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다. 냉정하고 사람 조종을 잘하며 말을 잘하고 상냥한 경우도 많다. 지금까지는 개인의 경우에 국한해서 이야기했지만, 인간이란 자연의 일부이고 과거의 역사를 등지고 미래를 향하면서 현재의 지구 위에서 자기나라, 자기가정, 자기직장, 자기교우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 앞서는 개인 내부를 주로 얘기했으나 외부와 내부가 항상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안의 해소나 정신건강의 문제의 해결은 개인을 벗어난 전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러 해 전에 미국의회에서 저명한 정신분석의를 초청, 국제분쟁의 해결책에 관한 증언을 들은 일이 있다. 이때 모씨는 국제분쟁은 가족관계가 잘못된 것이 원인이며, 가족관계를 바로 해야 건강하고 성숙되고 상호이해하며 협조하는 인간이 되어 세계평화가 성취될 수 있다고 증언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유교에서 말하는 효 내지 효제(孝悌)를 상기한다. 효란 건전한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말하고 자기실현이라는 것을 오늘날의 한국의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망각하고 있다.
효경(孝經)에도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을 삼는다고 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도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수신에서 출발한다는 것인데, 수신은 효에서 출발한다. 이 때문에 효로써 세계평화의 근본을 삼는다는 뜻이 되고, 효란 건전한 친자관계를 말하는 것이며 친자관계가 바로 되면 형제관계가 바로 되고, 이러한 건전한 친자형제관계, 다시 말하면, 건전한 가족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가족 아닌 모든 대인관계를 가족관계와 같이 한다는 것이 유교의 정신이요, 오늘날 서양의 정신분석 가족치료 심리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연구 결과이고 우리의 전통문화의 정수다.
. 불안공포의 해결책
이상에서 현대는 전면적인 불안 공포의 시대고, 불안의 의미와 발생 근원을 밝혔고, 불안의 해소 및 해소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주로 개인문제에 국한시켜서 밝혔다. 개인내부의 불안과 외부의 불안 요소가 상호관련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사회활동이 불안조성과 해소내지 해소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고, 궁극적으로는 효가 근본 해결책이기는 하나, 이미 효가 제대로 되기 어려운 것이 과거의 현실이었고, 현대는 더욱더 실현이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에 이미 잘못 자란 것이 현실적인 인간이라, 이미 잘못된 인간들을 어떻게 치료하느냐, 구제를 하느냐가 또 한편의 현실문제다.
효로써 예방이 더 중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치료가 큰 문제가 된다. 여기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예술 등 문제는 다루지 않고 기본원리만을 다루기로 한다. 필자는 다년간 서양의 정신의학과 정신분석 정신치료 카운슬링을 공부하고 많은 환자를 치료했으며, 과거 십여 년 동안은 틈틈이 동양의 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해오는 동안 여러 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잘못 길러져서 불필요한 불안 공포를 가지거나 불안공포를 가진 사람을 자신과 타인에게 파괴적이 아니고 건설적으로 해결하게 도와주는 방법 중 서양에서 가장 발달된 것이 20세기에 와서 이루어진 정신분석치료다.
물론 인류의 역사 특히 서양의 역사나 원시사회를 볼 때에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의 말을 빈다면 원시인이나 인류의 고대에 있어서는 끊임없는 자연의 위협 앞에 인간은 무력하였고, 심한 불안을 경험했다. 고대인은 이 불안을 해소 시키기 위하여 주술 여러 가지 금기의식을 창안했다. 이러한 생존의 위협에서 오는 불안에 대처하는 또 다른 방법은 현실(자연)을 개조하여 인간에 봉사 시키는 기술로 발전하였다. 전자는 위협적인 현실에 눈을 가리기 위한 관념적인 조작에 불과하고 미신으로부터 종교로, 종교로부터 신학으로, 신학으로부터 전통적인 서양철학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관념의 유희란 말이 여기에서 나온다.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적 현실에 작용하여 현실을 변경시켜 인간 생존에 봉사 시키는 기술은 오늘날의 과학으로 발전했다. 불안의 해소는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는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것은 여기에 다루는 좁은 범위에서 볼 때 정신장애의 치료에 있어서 물리 화학적인 치료로서 근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영국태생으로 미국시민이 되어 성공회 신부로 있다가 동양의 도에 심취되어 동양사상을 계몽하는 저서도 십여 권 내고 몇 해 전에 작고한 알란 왓츠씨는「정신치료― 동과 서」라는 저서에서 동양의 종교는 서양적인 의미에서는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며 서양의 개념으로서는 정신치료라고 갈파하고 있다.
동양의 종교로는 유불선(儒佛仙)을 말하는데 근본을 따져보면 같다. 왓츠는 서양문화는 하나의 문화이고 동양의 도는 여러 문화를 비판하는 문화들의 비판이고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필자가 발견한 몇 가지를 소개해보면,
첫째로 서양에서 가장 발달된 정신분석치료와 도, 특히 선불교(禪佛敎)와의 비교다.
정신분석치료의 과정을 우선 살펴보면 분석자는 처음에 환자 측 피분석자를 만나서 우선 그 사람의 증상이나 여러 가지 고통이 되는 문제의 원인이 되는 핵심과 이 핵심을 이루게 된 어려서의 가족관계에서 생긴 감정을 진단 파악한다.
다음으로 분석자는 환자로 하여금 이러한 자기 장애의 핵심적 원인이 되고 일거수 일투족 자나깨나 전인격을 지배하고 있는 핵심적인 감정동기를 이해 시킨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감정 동기 욕구를 분석자에게서 느끼고 있다는 것, 즉 전이감정을 이해하고 다음으로 환자로 하여금 환자가 분석자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환자가 이러한 핵심적인 감정을 치료 받기 전과 같이 억압하지 말고 녹이고 없애는 작업을 분석자와의 협동으로 하게 된다. 이 작업이 끝나면 분석치료가 끝나게 된다. 이것은 참선에서 겪는 각의 과정을 그린 심우도(尋牛圖) 또는 십우도(十牛圖), 목우도(牧牛圖)와 비교하면 그 유사성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소를 찾아 나선다. (尋牛), 다음에는 소의 발자국을 본다 (見跡), 다음엔 소를 본다 (見牛), 그 다음에는 소를 잡아 고삐를 단다 (得牛), 다음에는 소를 먹인다 (牧牛), 다음에는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騎牛歸家, 기우귀가), 다음에는 소를 잊고 사람만 있다 (忘牛存人, 망우존인), 다음엔 사람도 소도 다 잊어버리고 (人牛俱忘, 인우구망), 다음에는 본래의 자기로 돌아간다 (返本還源, 반본환원), 마지막으로 보살이 되어서 시정으로 들어가서 중생을 제도한다 (入廛垂手, 입전수수).
소는 자기의 마음이다. 불가에서는 처음에 보는 소는 검은 소라고 한다.
이것은 정신치료에서 환자로 하여금 성실하게 마음을 관찰, 보고케 하면 처음에 나타나는 것이 부정적인 감정인 것과 일치한다. 핵심적 감정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이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다루는 것을 배운다는 것과 이 과정을 극복하는 것은 득우(得牛) 목우(牧牛) 기우귀가(騎牛歸家)에 해당하고 망우존인(忘牛存人)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은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수도를 하면 검은 소에서 흰 점이 하나 생겨서 흰 부분이 확대되고 나중에는 흰 소가 된다고 한다. 이것은 파괴적인 감정이 없어지고 건설적인 사랑의 감정이 성장하는 것이며 긍정적인 힘의 성장이다. 입전수수(入廛垂手)는 성숙된 분석자가 되어서 남을 위해,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에 해당한다.
도와 정신분석의 그 밖의 공통점은 매즐로우가 말하는 결핍동기를 없애고 또는 자기현실화동기를 나타내게 한다는 점이다. 노자 도덕경에「爲學日益 爲道日損損之又損 以至于無爲…」란 표현이 적절하다. 이것은 학문 즉 지식을 공부하면 나날이 지식이 불어나지만 도를 닦으면 신경증적인 욕망 즉 결핍동기가 나날이 덜어지고 자기현실화동기만 있게 되는 것 무위(無爲)다. 욕심 결핍동기 콤플렉스를 없애는 것이 치료고 수도고 불안을 없애는 방법이다. 돈오(頓悟)하고 보림삼년(保任三年) 한다는 것과 정신분석에서 통찰을 얻어서 극복한다는 것이 같고 치료가 되어감에 따라서 꿈이 현실에 가까워지는 것과 각의 몽교일여(夢覺一如)가 상통한다.
분석의가 자기치료부터 성공해야 남을 분석 치료할 수 있다는 점은 자각자라야만 각타(覺他)를 할 수 있다는 불가의 전통과 일치한다. 부처의 직전단계인 보살은 상속식(相續識) 지식(智識) 현식(現識) 전식(轉識)을 벗어나고 업식(業識)이 녹아서 남아있는 업식을 자각하고 이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경지를 말한다. 이것은 성숙된 정신분석의가 자기의 남아있는 무의식적 동기의 흔적을 자각하고 이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과 같다. 성숙된 분석의는 이웃만큼 전 인류에 대한 사명감을 갖는다. 이것은 보살정신과 통한다.
서양의 정신치료자나 실존철학자들은 불안을 병리적인 신경증적인 불안과 정상적인 실존적 불안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정신분석이나 실존철학, 정신치료로써 병리적인 신경증적인 불안은 없앨 수 있지만 정상적인 실존적 불안은 여하 한 방법으로도 없앨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왜 그러냐 하면 아직 그들은 도의 경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서양문화에서의 불안 공포의 해결책은 정신분석 실존분석 등의 정신치료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서양인들 자신이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가 없다. 도는 생사지심(生死之心)을 타파함으로써 정상적인 실존적 불안마저 없애고 중(中), 견실심(堅實心) 부동심(不動心)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불안 공포를 극복한 자만이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다. 처음부터 불안 공포를 모르는 것은 용기라고 할 수 없다.
끝으로 첨가하고 싶은 것은 서양의 정신분석에서 발견한 것과 동양의 도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사이에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나 여기에서는 앞서 말한 것 외에 한 가지만 첨가한다. 모든 정신분석치료의 중심적인 양상은 환자가 치료자에게 사랑 받고 인정 받고 칭찬 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강해서 도저히 충족이 되지 않기 때문에 치료자에게 적개심이 생기고 사랑 받고자 하는 대상에게 적개심을 갖기 때문에 표현을 못하고 억압하면서 죄악감 불안 자학 등이 생긴다. 억압하기 때문에 사랑 받고 싶은 욕망은 더 가중된다.
불교에서도 가령 원각경(圓覺經)에서도 모든 인간의 고통 즉 불안의 근원은 증애(憎愛)에 있다고 하며, 증은 결국 갈애(渴愛)에서 비롯된다고 말하고 있다. 증애 더 나아가서는 갈애(渴愛)가 모든 불안 공포의 근원이요 갈애(渴愛)의 욕구가 식어지는 것이 불안이 없어지는 길이라는 것이 일치된 셈이다. 갈애란 대상갈구(對象渴求)다.
. 결어
이상 불안의 의미와 근원, 불안의 해소와 불해소의 결과, 불안 해결을 위한 동서고금의 방책, 그리고 현대가 전면적 불안의 시대라는 것을 말했으나 왜 이러한 전면적 불안의 시대가 왔는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서양문화 만연의 결과요, 그것은 또한 가까이는 서양의 르네상스의 결과요, 이 르네상스에 대해 한국의 지식인들은 자아의 각성이라고 하고 우리에게는 자아의 각성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서양의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자아가 아니라 본능의 각성이요 해방이다. 르네상스가 해방시킨 인간성은 성적 충동, 타인을 말살하려는 경쟁심, 타민족을 정복하려는 침략적인 공격적 본능, 자연의 정복과 파괴의 충동, 이기심 등이었다. 미국의 루이스 맘포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최근 수백 년의 서양의 역사는 붕괴와 야만의 역사다.
오늘날 한국의 모든 병폐가 이 서양의 흐름에 휩쓸려 오는 야만화와 붕괴의 길을 치닫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서양에서 절규 되고 있는 것은 자기제어이고, 맘포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서양문명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자기이해 자기검토 자기기율(自己紀律) 자기제어뿐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도요 휴머니즘의 극치요, 서양의 진정한 자아의 군림이 없는 파괴적인 본능의 해방과는 다른, 본능을 제어하는 진정한 자아,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문화에서는 이러한 20세기의 전면적인 불안에 대한 치료제로서 등장한 것이 정신분석이나 카운슬링 실존사상과 동양의 도에 대한 관심의 대두다.
필자의 견해로는 정신분석은 도에다가 서양의 전통적인 합리 개념 이론의 옷을 입혀 놓은 것이고, 실존사상은 서양인의 죽음에 대한 불안 공포의 자각이고 서양의 정신적 성숙의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도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실존사상은 도의 입문이다. 실존사상은 죽음에 대한 불안의 자각이 끝이고 불안에 대한 해결책이 없다. 이에 대한 해결이 도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토인비도 인류문제의 해결은 성실성의 회복과 자연과의 조화에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성실성과 자연과의 조화가 바로 도인 것이다.
이렇게 동과 서의 길이 한 방향으로 모아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이든 서양 것이 우위에 있다는 패배의식에서 배태된 생각을 버리고 동서를 초월한 평등한 입장에서 동서문화나 사상을 보고 우리의 전통을 서양문화나 사조의 몇 분의 일이라도 알려고 할 필요를 느껴야 될 것이며, 그것을 알고 보면 우리가 얼마나 귀중한 보물을 지니고 있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 "불 안"
(저자 : 알랭 드 보통)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사랑결핍, 속물근성. 기대, 능력주의, 불확실성” 이라는 주제로서 분석하고,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의 주제로 그 불안의 해법에 관하여 풀어 간 내용이다. 책자의 설명 내용 중, 주요부분 들을 발췌하여 불안의 원인과 해법에 관해 "나" 개인적으로 부족했던 이해를 더하고자 한다.
(정.영목 역)
(정의)
. 지위
한 집단 내의 법적 직업적 신분의 의미 외에도,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 또한 중요하다. 높은 지위는 즐거운 결과를 낳는다. 이 결과에는 자원, 자유, 공간, 안락, 시간 등이 포함되지만, 남들에게 먼저 배려 받고 귀중하게 여겨 진다는 느낌도 중요하다. 이런 느낌은 다른 사람들의 초대, 아첨, 웃음, 경의, 관심을 통해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 지위로 인한 불안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 그 결과 존엄성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그 위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가 우리의 자아상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불안은 불황, 실업, 승진, 퇴직, 동료와의 대화, 성공을 거둔 걸출한 친구에 관한 신문기사 등으로 유발된다.
. 명제
지위로 인한 불안은 비통한 마음을 낳기 쉽고, 지위에 대한 갈망은 다른 욕구들과 마찬가지로 쓸모가 있다. 자신의 재능을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자극하고, 남들보다 나아지도록 고무하며, 남에게 해가 되는 괴팍한 행동을 못하게 억제하며, 공동의 가치체계를 중심으로 사회 구성원을 결합한다. 그러나 모든 욕구가 그렇듯, 이 갈망도 지나치면 해가 된다.
(원인)
□ 사랑의 결핍
. 높은 지위를 바라는 마음
돈, 명성, 영향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상징이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 더 중시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하고 부산을 떠는 이유는 무엇인가? 탐욕과 야망을 품고, 부를 추구하고, 권력과 명성을 얻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활필수품을 얻으려는 것이라면, 노동자의 최저임금으로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 삶의 위대한 목적이라고 하는 이른바, “삶의 조건의 개선”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 쏟고, 공감어린 표정으로 알은체를 해주는 것이 우리가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도덕 감정론(Theory of moral sentiment, 아담스미스)
성적인 사랑과, 세상이 주는 사랑 두 가지 모두 강력하고 복잡하며 중요하다. 때문에, 만일 어느것이나 이루지 못한다면 고통스럽고 가슴 아프다.
. 사랑의 중요성
사랑의 결핍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무시를 당하면 왜 우리는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차라리 고문을 당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 할 운명을 타고 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 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남의 관심 때문에 기운이 나고 무시 때문에 상처를 받곤 한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신뢰 할 수도 없고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 속물근성
어렸을 때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아무도 크게 마음을 쓰지 않으며, 존재만으로도 애정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인물들의 행동이 지위에 대한 불안의 한 가운데로 우리를 자리잡게 한다.
속물이란, 당초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였지만,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발전했다. 전통적 속물근성(snobbery)은 귀족계급에 대한 관심과 관련 있지만, 속물은 시대에 따라 군인(스파르타, 기원전 400), 주교(로마, 1500), 시인(바이마르, 1815) 농민(중국 1967) 등 여러 특정집단에 영합했다. 속물의 일차적 관심은 권력이며, 권력구조의 변화에 따라 속물의 존경대상도 바뀌기 때문이다.
사치품의 역사는 탐욕의 이야기 라기 보다는 감정적 상처의 기록으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사치품들이란 남들의 경멸에 압박감을 느껴 자신에게도 사랑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텅 빈 선반에 엄청난 것들을 전시하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이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 평등, 기대, 선망
서양문명 2000년의 장점은 이제 익숙하다. 부, 식량, 과학지식, 소비물자, 선체적 안전, 기대 수명, 경제적 기회 등이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보통 시민들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은 오히려 높아졌다. 즉, 자리, 성취, 수입을 놓고 걱정은 늘어났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않고 더 늘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만 질투한다. 우리의 준거집단에 속한 사람들만 선망한다는 것이다.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장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이 아니라 오히려 근접상태다. 일반병사는 상사나 상병에게 느끼는 것과 비교하면 장군에게는 질투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뛰어난 작가 역시 평범한 삼류작가 보다는 자신에게 좀 더 접근한 작가들로부터 질투를 더 받는다. 불균형이 심하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며, 그 결과 우리에게서 먼 것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지 않게 된다.”
: 인성론 (A treatise on human nature, 데이비드 흄)
역사적으로 상당기간은 불평등과 낮은 기대 수준이 정상적이고, 지혜로운 것이었다. 극소수만이 부와 충족을 갈망했을 뿐, 다수는 자신이 착취를 당하며 체념 속에 살아 갈 운명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어떤 사람은 날 때부터 노예이며, 날 때부터 노예인 사람들에게는 노예제도가 편리하고 정당하다”
: 정치 (Politica,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350)
고대에는 노예와 노동계급은 보통 이성이 없는 피조물로 간주했으며, 그 결과 가축이 밭을 가는 것이 당연하듯 비참한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 들어서 정치적 사고가 평등주의적 사고로 조금씩 나아갔다.
토마스 홉스는 “개인은 사회의 탄생 전부터 존재했으며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 사회에 합류한 것이고, 보호를 대가로 타고난 권리를 내주기로 동의한 것 (리바이어던, 1651)”이라고 했다. 그 후, 정치적 평등과 사회적 경제적 기회 주장은 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에서 구체적인 표현을 발견했다. 윌트 휘트먼은 “미국의 위대함은 곧 맹종 없는 평등 (풀잎, 1855)”이라고 했다.
그러나 1930년대, 프랑스 역사가 토크빌은 미국인은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이런 부에도 불구하고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으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을 볼 때 마다 괴로워 한다는 병을 분별해 냈다. 토크빌은 “왜 미국인은 번영 속에서도 그렇게 불안을 느끼는가? (미국의 민주주의, 1835)”라는 부제에서 불만과 높은 기대, 선망과 평등의 관계를 분석하게 된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해야만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일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반드시 수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를 밀어붙이느냐에 달려있다”
우리가 무엇을 정상이냐고 생각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이 결정된다. 우리의 자존심을 높이는 데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 하나는 더 많은 성취를 거두기 위한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성취하고 싶은 일의 수를 줄이는 것이다. 제임스는 두 번 째 방법의 장점을 “요구를 버리는 것은 그것을 충족 시키는 것만큼이나 행복하고 마음 편한 일이다”고 했다.
그러나 옛날과는 달리, 현대 서구 사회문화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행동이나 소유에 우리 자신을 거는 방향으로 밀려 간다. 이 사회는 요구를 잔뜩 늘어 놓는 바람에 적절한 자존심을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기대의 좌절에 따르는 위험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각해 졌다. 내세에 대한 믿음이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유치한 아편에 불과하다고 해석해버린다면, 성공하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압박은 더욱 강해질 수 밖에 없다. 지상의 성취는 다른 세계에서 실현해야 하는 일의 서곡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의 총합이 된다.
삶은 불가피하게 고난일 수 밖에 없다는 확고한 믿음은 수 백년 동안 인류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며, 울화로 치닫는 마음을 막아 주는 보루였다. 그러나 이 믿음은 새로이 형성된 세계관으로 인하여 잔인하게 훼손되어버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불행은 삶의 움직일 수 없는 본질이며, 비참한 인간 상황의 일부 (“신국”, 427)”라고 하며, 이 비참한 삶에서 인간이 자신만의 힘으로 기쁨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주장들을 경멸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시인 외슈타슈 데샹(1338~1410)은 지상의 삶에 대한 노래에서,
애도와 유혹의 시간
눈물의 시절
질투와 고통의 시절
무기력과 저주의 시간 ……
근대 이전 어떤 이는, 자기 아들의 이른 죽음에도 신의 부름에 차라리 행운이라는 말까지 남겼다지만, 그러나 근대는 염세주의에 그렇게 관대하지도 친절하지도 않았다.
장 쟈크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에서,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했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더 가난해 진다. 만족 할 때마다 소유한 것은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루소가 원시인과 근대인의 행복 수준을 비교하는 것과, 윌리엄 제임스가 행복 수준을 결정 할 때, 기대의 역할을 강조한 것과 흡사하다. 루소의 벌거벗은 야만인은 가진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타지마할에 사는 후손들과는 달리 그들은 아주 적은 것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큰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 능력주의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진다.
. 실패에 관한 유용한 이야기 (과거)
가난이 자존심에 미치는 영향은 공동체가 가난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결정적으로 좌우된다.
가난은 가난한 사람들 책임이 아니며 가난한 사람은 사회에서 가장 쓸모가 크다.
낮은 지위에 도덕적 의미는 없다.
부자는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강탈하여 부를 쌓았다.
. 불안을 일으키는 성공 이야기 (근대)
18세기 중반부터, 물질적 성장을 배경으로 심리적으로 낮은 지위를 견디기 어려워졌고, 그러한 자리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근심이 깊어지게 되었다.
빈자보다 부자가 쓸모 있다.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가난한 자는 죄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 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 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 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능력주의의 등장”, 마이클 영 1958)”
□ 불확실성
전통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지만, 그 지위를 잃는 것 또한 어려워 행복할 지경이었다. 중요한 것은 살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성취하는 것 보다도 태어날 때 얻는 신분이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내가 누구냐는 것이었다.
근대는 개인적 성취가 지위를 결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제 지위는 급속하게 움직이는 무자비한 경제 내에서 거두는 성과에 달려있다. 경제의 특성 때문에 지위를 얻으려는 노력은 그 결과가 불확실할 수 밖에 없다.미래를 생각해 보면 동료나 경쟁자 때문에 좌절 할 수도 있고, 자신이 선택한 목표를 이룰 가능이 없음을 발견 할 수도 있고, 급변하는 시장의 파도 속에서 재수없는 흐름에 말려 들 수도 있다. 게다가 우리의 실패는 동료의 성공 때문에 더 심각해 보일 수도 있다.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몇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한다.
. 변덕스러운 재능 : 우리는 최고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전면에 내세울 수 없다. 그런 재능의 소유자답지 못하게 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의 성취는 많은 부분이 외적인 힘이 준 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변덕스레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그 힘에 의해 우리의 인생 경로와 경제적 능력이 결정되는 셈이다.
. 운 : 이제 우리 삶의 결과를 운으로 설명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신의 힘과 자연의 예측 불가능한 변덕을 존중하던 시절에는 누구든 사태의 흐름을 제어할 수 없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외적인 힘에 감사도 하고, 책임을 그리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환경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예측하는 인간의 힘이 성장하면서 운이나 수호신이라는 관념은 힘을 잃었다.
. 고용주 : 조직의 피라미드를 성공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등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 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들이다. 근대의 사업체와 중세의 궁정에서의 생활에는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절 은퇴한 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경구를 보면 현대의 기업체에서 생존비결을 터득 하는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 동료를 조심해야 한다.
. 거짓말을 하고 과장해야 한다.
. 무서워야 한다.
. 마키아벨리 (1469~1527)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사랑은 감사의 유대에 의해 유지 되지만, 사람은 지나치게 이해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가 생기기만 하면 이 유대를 끊어 버린다. 그러나 공포는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지되며, 이것은 늘 효과적이다.
. 구이차르디니 (1483~1540)
사람은 거짓되고, 기만적이고, 교활하고, 자신의 이익에는 탐욕스럽고 남의 이익에는 둔감하므로, 적게 믿고, 그보다 더 적게 신뢰한다면 잘못된 일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일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는 감추고 성공은 과장하라. 이것은 속임수이지만, 사실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당신 운명이 걸려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늘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좋다.
다수는 착하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으므로, 친절보다는 엄격함에 의지하여야 한다.
. 라로슈프코 (1613~1680)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 라브뤼예르 (1645~1696)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
. 고용주의 이익 :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을 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 세계경제 : 회사와 종업원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사정에 처하기도 한다.
.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 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족의 유대, 우정, 성적 매력 때문에 물질적 동기가 부차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이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모한 낙관주의자일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동포의 도움을 얻을 일이 있다. 그러나 동포의 자비로운 마음에만 기대서는 도움을 얻을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자기애를 자극하면 설득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은 양조장 주인이나 빵 가게 주인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 (국부론, 아담 스미스 (1776))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기게 들쑤시는 한가지 이유가 된다.
(해법)
□ 철학
. 명예와 약점
사소한 시비로 인한 결투의 관행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부터 관행이 없어지는 1차 세계대전 시 까지 유럽인 수십만 명이 결투로 목숨을 잃었다. 17세기 스페인에서만 5천명이 죽었다. 스페인을 찾는 사람들은 괜히 지역민의 명예를 건드려 무덤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영국에서는 “검을 쥐어보지” 않은 자는 신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단테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난에 사촌을 죽이는 문인이 있는가 하면, 자기 아파트를 천박하다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고양이 소유권을 두고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
결투는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지, 제3자의 변덕스러운 판단에 좌우될 문제는 아니라며 믿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결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찌 생각하느냐에 맞추어 자신을 바라본다. 주위 사람들이 악하거나, 수치스럽다거나, 겁쟁이라거나, 실패자, 바보 또는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눈에도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의 자기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좌우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마음에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들기 전에 차라리 총이나 칼을 맞아 죽는 쪽을 택한다.
어느 사회에서나 지위, 즉 명예의 유지는 모든 성인 남성의 일차적 과제가 되곤 했다. 명예는 전통적 그리스 촌락 사회에서는 티메(Time), 이슬람 사회에서는 샤라프(Sharaf), 힌두인은 이차트(Izzat), 스페인에서는 온라(Honra) 등으로 불렸다. 어느 경우에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폭력도 불사해야만 했다. 스페인에서는 온라(Honra)를 얻으려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모욕에 충분한 폭력으로서 충분히 대응해야만 하고, 장터에서 조롱을 당하거나, 거리에서 누군가가 불쾌하게 째려 보았을 때 싸움을 걸어야만 남자답고 명예로운 것이라고 여겼다.
우리들도 그런 정신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경멸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존심 역시 다른 사람들이 부여하는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지위를 위해 결투도 불사했던 그 때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중요한가를 판단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호적인 시선을 받고 싶은 강렬한 욕구는 과거와 다름없이 우리를 지배한다. 지위를 부정 당할 때, 즉, 일에서 어떤 목표에 이르지 못하거나 가족을 부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온라, 티베, 샤라프, 이자트를 잃어버린 전통적인 공동체의 구성원과 똑같이 괴로움에 시달릴 수 있다.
. 철학과 약점의 극복
. “다른 사람들의 머리는 진정한 행복이 자리를 잡기에는 너무 초라한 곳이다.”
(쇼펜하우어, 소품과 단편집, 1851)
.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또 “부자가 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독립적으로 살라”고 간청할 뿐이다.” (샹포르, 격언집, 1795)
. “나를 부유하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다. 판단은 내가 가지고 다닐 수 있다. 판단만이 나의 것이며, 누구도 나에게서 떼어낼 수 없다.” (에펙테토스, 어록, 100년 경)
철학은, 세상이 흔히 적용되는 변덕과 비합리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지적인 양심에 따라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재구성한다. 우리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칭찬이라는 후광 없이도 사랑 받을만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을 고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불안 때문에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고, 능력을 계발하기도 하며, 성공하기도 한다.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 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기원전 350년 경)”에서 인간 행동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보통 극단으로 흐른다고 하며, 지혜롭고 침착한 중용을 이상으로 제시하며, 이 중용을 행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 지적인 염세주의
쇼펜하우어는 “모든 질책은 그것이 과녁에 적중하는 만큼만 피해를 줄 수 있다. 자신이 어떤 질책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만만하게 그런 질책을 경멸 할 수 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한다.”고 헸다.
염세주의 철학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려면 우리 지위를 단속하려는 미숙한 노력을 포기해야 한다. 실제로 지위를 단속한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다. 이론적으로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는 모든 사람과 결투하고 그들의 목숨을 빼앗아야 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논리에 기초하여 자신의 가치를 느껴야 하는데, 사실 이 때 느끼는 만족감이 근거가 더 탄탄하다.
□ 예술
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는 “교양과 무질서”에서 다수의 눈으로 볼 때 예술은 “인간의 곤궁에 바르는 향기 나는 고약이며, 세련된 무위(無爲)의 정신을 숨쉬는 종교로 이 종교의 신자들은 악의 뿌리를 뽑는 일을 거들기를 거부한다. 예술은 종종 실용적이지 못하다거나, 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고 하면서,
그러나 그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예술은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긴장과 불안에 해법을 제공하는 매체라고 했다. 예술이 아무리 비실용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예술은 무엇보다도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해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에는 인간의 잘못을 없애고, 인간의 혼돈을 정리하고, 인간의 곤궁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의 흔적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삶의 비평”이라고 했다.
분명한 점은 삶은 비평이 필요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피조물로서 늘 가짜 신들을 섬기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남의 행동을 오해하고, 비생산적인 불안과 욕망에 사로잡히고, 허영과 오류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소설, 시, 희곡, 회화, 영화 등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우리의 조건을 설명해 주는 매체 역할을 한다. 예술작품은 세상을 더 진실하게 더 현명하게, 더 똑똑하게 이해하는 방법을 안내해 준다.
예술의 역사는 지위의 체계에 대한 도전, 풍자나 분노가 서려 있기도 하고, 서정적이거나 슬프거나 재미있기도 한 도전으로 가득하다.
. 예술과 속물근성
프랑스의 미술 아카데미는 1648년 루이 14세가 처음 만들 때부터 중요성을 기준으로 여러 쟝르의 회화 등급을 정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의 교훈적 이야기와 같은 역사화, 다음이 초상화, 특히 왕이나 왕비의 초상화, 풍경화의 순이었고, 마지막이 서민들의 가정생활을 그린 풍속화였다.
로마의 신전이나 르네상스 교회의 현란한 매력에는 쉽게 눈이 가지만 평범한 지붕에 눈이 가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샤르뎅, 존스, 쾨브케 같은 화가의 풍속화를 예로 들면서, 여름날의 저녁 하늘, 햇볕에 달구어진 얽은 벽, 환자를 위해 달걀 껍질을 까는 여인이 우리 눈이 보고 싶어하는 가장 아름다운 광경에 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존중하고 갈망하도록 배워 온 많은 것의 가치를 의심 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한 생활 속의 예술 작품들이야말로 세상에서 무엇을 존경하고 존중할 것인가에 대한 속물적 관점을 교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 비극
나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를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실패의 물질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이 실패를 바라보는 냉정한 태도, 실패한 사람을 “패배자”로 지목하는 집요한 경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심각해진다.
……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 희극
유머는 불만을 제기하는 데 특별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겉으로는 즐거움만 주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은근히 교훈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만화는 권력남용을 비판하는 설교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만화를 보면서 깔깔거리다가 권위에 대한 불만 토로가 적절하다고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정당화 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을 조롱한다. 자신을 과대 평가하는 왕, 능력이 권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왕은 조롱한다. 인간적 본성을 잊고 권력을 남용하는 높은 지위의 권력자들은 조롱한다. 우리는 조롱을 하고 웃음을 통하여 불의와 과잉을 비판한다. 따라서 웃음은 최고의 익살꾼 손에 쥐어지면 도덕적 목적을 획득하며, 농담은 다른 사람들의 성격과 습관을 바꾸도록 촉구하는 수단이 된다.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존 드라이든의 말을 빌리자면 “풍자의 진정한 목적은 악의 교정”이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이해하고 조절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 정치
. 이상적인 인간형
사회마다 각기 특정한 종류의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또 기술, 억양, 기질, 성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단죄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나 자질이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위를 분배하는 원칙은 무엇인가? 왜 어떤 사회에서는 군인이 찬사를 받고, 다른 사회에서는 토지를 소유한 신사가 찬사를 받는가? 일단, 네 가지 부류로 나뉜다.
어떤 집단은 남에게 신체적인 해를 줄 수 있다는 능력을 과시해서, 또는 괴롭힘이나 협박으로 굴복 시켜서 원하는 지위를 얻는다.
힘으로 보호해 주거나 식량을 조달 해 주어 원하는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안전이 문제 될 때는 용기 있는 투사나 말을 탄 기사가 존경을 받는다. 고대의 투사, 사냥꾼, 현대의 기업가나 과학자 등이 될 수 있다.
어떤 집단은 선한 태도 신체적 재능 예술적 솜씨 지혜로 다른 사람들에 감명을 주어 높은 지위에 올라 갈 수도 있다. 기독교 유럽의 성직자나 현대 유럽의 축구선수가 그러하다.
어떤 집단은 함께 사는 사람들의 양심이나 도덕적 품위에 호소하여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 간다. 어떤 집단은 옆구리에 창을 꽂을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고, 어떤 집단에서는 전투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며, 어떤 집단에서는 신에게 헌신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하며, 어떤 집단에서는 자본시장에서 이윤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걱정한다.
자신이 사는 사회의 이상 때문에 불안이나 실망을 느낀 사람이라면 이러한 지위의 역사에서 기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상이란 돌처럼 만들어져 굳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상적인 지위는 오래 전부터 계속 바뀌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바뀔 수 밖에 없다.
. 현대의 지위에 대한 정치적 관점
과거의 전사, 성직자, 기사, 토지를 소유한 귀족 신사가 누렸던 높은 지위를 상속한 현대의 성공적 인물의 관심이나 자질을 본다면,
현대의 성공한 사람이란 인종과 성별을 막론하고, 스포츠, 예술, 과학, 연구 등과 같은 상업세계의 무수한 분야 어느 한 곳에서 자신의 활동(물려 받은 유산이 아닌)을 통해서 돈, 권력, 명성을 축적한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 사회의 기반은 “능력주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경제적 성취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해한다.
부를 축적한 사람은 “창의성, 용기, 지능, 체력”이라는 네 가지 미덕은 있다고 칭송 받는다. “겸손, 경건”이라는 미덕은 이제 눈길을 끌지 못한다. 성취는 이제 과거 사회에서처럼 “행운, 섭리, 신” 때문이라고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이것은 현대 세속사회의 의지력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실패 역시 능력에 따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실업자는 전사들의 시대에 육체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처럼 수치를 느끼게 되었다. 돈에 윤리적 가치가 부여되고, 돈은 소유자의 미덕의 증거다. 부자는 훌륭하다는 증거이고, 낡은 차며 허름한 집은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소스틴 버블린의 “유한 계급론, 1899”에 따르면, 상업사회에서는 덕은 있지만 가난한 사람은 존재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 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따라서 물자를 아주 많이 소유하는 것은 이 물자가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명예를 제공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일이 된다.
수 많은 외적 사건과 내적인 특징이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은 가난하게 만든다. 운과 환경도 있고, 병과 공포도 있고, 우연과 뒤늦은 발달도 있고, 적절한 시운과 불행도 있다. 미셀 드 몽테뉴는 삶의 결과들을 결정하는 우연적 요인의 결과를 강조했다. 그는 “변덕스러운 의지에 따라 우리에게 영광을 베푸는 우연”의 역할을 잊지 말라고 충고 했다. “나는 우연이 능력보다 앞서서 행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냉정하게 평가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자랑하거나 창피해 할 이유가 그리 많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실제로 벌어지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 행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힘 있고 부유한 자를 만날 때 흥분을 억제하고, 가난하고 미미한 자를 만날 때 판단을 억제할 것을 요구했다.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돈과 행복을 연결 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에 대한 공격의 핵심은 이것이 우선 순위를 엄청나게 왜곡하여, 물질적 축적과정을 가장 높은 수준의 성취로 치켜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아상을 진실되고 폭 넓게 규정한다면, 물질적 축적은 우리 삶의 방향을 규정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에 불과 할 뿐이다.
. 정치적 변화
사회적 위계 때문에 기분 상하거나 난처해지더라도 그러한 위계가 뿌리깊고 견고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 위계를 지탱하는 공동체나 신념들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며, 그 위계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여 체념하고 그냥 받아 들이는 경향이 있다. 처음은 독특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자연스레 받아들여진 관념들은 많이 있다.
남녀의 사회적 지위 관계
교육적 평등의 관계
성적인 관계
인종, 종교 간의 관계 등
사회의 목소리 큰 사람들이 선험적 진리로 여기는 견해들이 사실은 상대적인 것이고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비로소 정치적 의식이 깨어난다. 그러한 견해들은 당연하고 나무나 하늘처럼 존재의 기본 구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특정한 사람들이 특정한 현실적 또는 심리적 이해관계를 옹호하고자 만든 것이다.
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믿음들은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적 진술이란 중립적으로 말하는 척 하면서 교묘하게 어떤 편파적인 노선을 밀어 붙이는 진술이라고 규정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이데올로기적 믿음을 주로 퍼트리는 사람들은 사회의 지배계급 들이다. 반면 중상주의 사회에서는 기업가의 성취가 사회 구성원의 성공의 꿈을 지배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강압성을 보이면 결코 지배를 할 수가 없다. 이데올로기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정신은 예의와 전통을 벗어버리고 거리낌없이 반대의 입장에 서서 이이들처럼 순수하게 묻는다. “꼭 이래야 하는가?” 억압적 상황은 영원한 고통을 겪으라는 자연의 심판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변화 가능한 어떤 세력들 탓이라고 생각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죄책감과 수치감은 이해로, 지위의 더 평등한 분배 방식에 대한 탐구로 바뀔 수도 있다.
정치적 관점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다. 분석을 통하여 이데올로기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님을 밝혀 그 뇌관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위와 관련된 근대의 이상 역시 자연스럽지도 않고 신이 주신 것처럼 보이지도 않게 된다. 그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생산과 정치 조직의 변화에서 생겨난 것이며, 그 이후 유럽과 북미로 퍼져 나갔다. 신문과 텔레비전에 주입되어 있는 물질주의, 기업가 정신, 능력주의에 대한 열망은 체제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모든 시대의 지배적 관념은 늘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리고 다수는 이 체제에 의해 생계를 유지한다.
이것을 이해한다고 하여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의 이상들을 바꾸거나 그것과 씨름 해 보는 첫 단계는 될 수 있다. 아무런 회의 없이 무조건 숭배하고 존경하는 경향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세계를 만드는데 어느 정도 도움은 될 것이다.
□ 기독교
. 죽음
톨스토이는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을 살핀 기록인 “참회록, 1882”에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인 51세 때 자신의 어린시절부터 잔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 보다 더 유명해진다고 치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톨스토이는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지위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다른 데로 방향을 트는 데 죽을 병이 어떻게 도움을 줄까? 무엇보다도 사회가 우리를 존중하던 여러 가지 이유를 빼앗아 간다. 이런 과정에서 죽음은 지위를 통해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관심의 덧없음, 나아가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우리의 건강이 좋고, 권력도 막강할 때는 우리를 칭찬하는 사람이 진짜 애정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어떤 이익을 노리고 그러는지 굳이 알고싶지 않다.
그러나 병은 세속적 사랑의 조건을 제거하여 그런 구별이 잔인할 정도로 분명하게 눈 앞에 나타난다. 병원에서 환자 복을 입고 눈 앞에 다가온 죽음을 기다릴 때 우리의 지위를 조건으로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격분한다. 조건부 사랑에 흥미를 잃게 되면, 그것을 얻기 위해 추구하던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도 줄어든다. 어린아이처럼 위로를 갈망하며 무방비 상태에서 헝클어진 모습으로 인생을 끝내야 할 운명이라면, 우리가 지위를 얻든 잃든 지속될 수 있는 관계에 에너지를 집중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기는 셈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관점에서 의미 있는 활동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기독교적인 생각과 세속적인 생각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 진정한 사회 관계, 자선에 대한 강조는 공통 되는 것 같다. 또한 권력, 힘 야욕, 명예에 대한 관심을 비판하는 것도 공통 되는 것 같다. 죽음에 대한 생각 옆에 갖다 놓으면 어떤 행동들은 하찮아 보일 수 밖에 없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전도서 1장1절),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지만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1장4절) 16세기부터 2세기간 유행했던 기독교도들의 “바니타스(Vanitas art, 헛되다의 뜻) 미술”은 가재나 서재에 걸려 있다. 천박과 세속적 영광의 상징물인 꽃, 동전, 월계관, 체스판, 술병 등과 함께, 죽음과 짧은 생명의 상징물인 두개골과 모래시계가 있다. 이 그림의 목적은 헛되다는 생각으로 우울함을 자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 경험의 구체적인 면에서 결함을 찾아낼 용기를 주고, 동시에 사랑, 선, 진실, 겸손, 친절 등의 미덕에 좀 더 진지하게 관심을 가질 자유를 주었다.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묘비의 시 중에서
“밤 생각” (에드워드 영, 1742)
현자, 귀족, 권력가, 왕, 정복자
죽음은 이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왜 한 시간의 영광을 위하여 그토록 애를 쓰는가?
부의 냇물에서 거닐고, 명성이 높이 치솟으면 뭐 하는가?
지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도, “여기 그가 누워있다” 에서 끝이 나고,
가장 고귀한 노래도 “흙에서 흙으로”가 마무리를 하는데.
“무덤” (로버트 블레어, 1743)
자만심이나 다른 사람들의 아첨이
우리가 보통 사람 이상의 존재라고
교활하게 소곤거려도
무덤은 그 반질거리는 얼굴에 담긴 아부를 반박하며
솔직한 진실로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 준다.
“시골 묘비의 비가” (토머스 그레이, 1751)
문장(紋章)의 자랑, 권력의 허세
모든 아름다움, 모든 부가
똑 같이 불가피한 순간을 기다린다.
영광의 길은 무덤으로 통할 뿐.
사회에서 푸대접 받는 사람들이 개인과 사회의 궁극적인 소멸을 예상하며 미리 복수한듯한 달콤한 느낌을 맛볼 수 있다. 화가들 역시 문명이 멸망한 미래의 모습을 묘사하는 작품을 그리는 데 기쁨을 느꼈다. 이것은 시대의 오만한 수호자들에 대한 보복이었다. 18세기 프랑스 화가 뤼베르 로베르는 위대한 건물을 폐허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영국의 조지프 갠디는 잉글랜드 은행의 천장이 내려 앉는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비슷한 감정을 품은 여행자들은 과거의 폐허를 감상하기 위하여 트로이, 코린트, 파이스툼, 테베, 미케네, 크노소스, 팔미라, 바알벡, 페트라, 폼페이 등지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기독교 도덕가들은 불안을 달래려면 낙관적인 사람들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최악으로 흘러간다고 강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지위에 대한 우리의 하찮은 걱정을 천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우리 자신의 미미함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된다.
. 공동체
기독교적 사고를 따른다면 다른 모든 사람과 같아지는 것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며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신의 창조물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명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예수의 중심적인 주장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말에 따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을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들 사이의 표면적 차이 너머를 보면서, 보편적인 진리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 이 진리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친족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해 불가능하지도 않고 혐오스럽지도 않다는 생각은 지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 커지기 때문이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공동체가 부패할수록, 개인적 성취의 유혹도 강해진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현실적 맥락이나 이론적 맥락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한가지 방법이 교회 예배의 의식과 교회 음악 연주였다. 이런 행사에 참여하면 초월적 중재자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심이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상적인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존엄과 자원의 기본적 평등 덕분에 승자 옆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공포가 제어되고 경감된다. 성공하여 피어날 것이냐 아니면 실패하여 시들 것이냐 하는 이분법의 그 가혹한 칼날도 약간은 무디어 지는 것이다.
. 두 도시
기독교의 지위에 대한 도식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서로 연관 없는 두 가지 종류의 지위를 갖는다. 하나는 직업, 소득, 평판으로 결정되는 세속적 지위며, 다른 하나는 사람의 영혼과 심판의 날에 신의 눈에 드러나는 장단점으로 결정되는 영적 지위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세속적 영역에서는 권세가 있고 존경도 받아도 영적인 영역에서는 황폐하고 부패할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427)”에서 모든 인간 행동은 기독교적 관점과 로마적 관점 양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마인이 높게 평가하는, 돈을 모으고, 별장을 짓고, 전쟁에 이기는 것은 기독교적인 면에서는 하찮은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열쇠이다. 그는 이 두 가지 가치체계를 “신의 도시”와 “세속의 도시” 라고 부르는 두 도시로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세속도시에서는 왕이라도 천국의 도시에서는 하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기독교는 세속 도시와 그 가치를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서양에서 사람들이 부와 미덕을 구분한다면, 또 중요한 사람이냐 아니냐 만 따지지 않고 선한 사람이냐 아닌 사람이냐 도 따진다면, 그것은 수 백년동안 자신의 자원과 위신을 이용하여 지위의 의로운 분배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관념을 옹호해 온 기독교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봉사하던 천재적인 화가와 장인들은 그들이 믿는 종교의 가치에 영속적인 형태를 부여했으며, 돌, 유리, 소리, 말, 이미지를 어루만져 그런 가치들이 현실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세속적인 건물들이 우리에게 지상의 권력의 중요성을 무자비하게 외쳐대는 세상이지만, 큰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우뚝 서 있는 성당들은 영을 앞세우는 공간으로 유지되며 사람들의 상상을 자극하고 있다.
□ 보헤미아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새로운 집단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박한 옷을 입었고, 도시의 싼 지역에 살았고, 책을 많이 읽었고, 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다수는 우울한 기질이었고, 사업이나 물질적 성공 보다는 예술과 감정에 충실했고, 가끔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성생활을 하기도 했고, 여자들은 단발이 유행하기 오래 전에 단발을 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를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게 됐다.
보헤미안은 전통적으로 집시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 후 품위라는 부르주아적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광범위한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아서 랜섬은 “런던의 보헤미아”에서 “보헤미아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태도다.”라고 말했다.
보헤미안과 부르주아지를 궁극적으로 갈라 놓는 것은 화제나 후식의 선택문제가 아니라, 누가 높은 지위를 얻을 자격이 있고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하는 문제였다. 보헤미안들은 저택을 소유했건 다락방을 소유했건 처음부터 19세기 초에 탄생한 경제적이고 능력주의적인 지위 체계에 맞서는 입장이었다.
대립의 핵심에는 세속적 성취의 가치와 감수성에 대한 대조적 평가가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잇는 능력 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보헤미안의 가치 체계에서 순교자적 인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기 위해 또는 여행이나 친구나 가족에게 헌신하기 위해 안정된 정규직장과 사회의 존경을 희생한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이런 헌신 때문에 외적인 품위의 표시는 부족할 지 몰라도, 보헤미안들의 세계에서는 최고의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윤리적 양식과 감수성과 표현 능력 때문이었다. 많은 보헤미안들은 비현실적인 믿음 때문에 고생을 하거나 심지어 굶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자신들의 영혼은 부르주아지가 품고 있는 천박한 공리적 관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고 여겼다.
보헤미안의 가치체계에서는 돈으로 명예를 얻지 못하듯이 소유로도 명예를 얻지 못한다. 보헤미안의 지위는 영감어린 대화스타일을 선 보이거나 가슴을 울리는 좋은 시집을 써서 얻는 쪽이 빠르다.
보헤미안들은 또 실패라는 말도 조심스럽게 재규정 했다. 부르주아적인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업이나 예술에서 경제적 또는 비평적 실패는 당사자의 인격에 대한 의미심장한 고발장 노릇을 한다. 이들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 구성원의 노력에 공평하게 보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헤미안들은 세상이 어리석음과 편견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하여 외적인 실패를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볼 때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가장 지혜롭거나 가장 훌륭한 사람의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했다.
집단과 그 전통은 열등하다는 보헤미아의 믿음과 더불어 개인의 우월성에 대한 강조가 나타났으며, 이와 더불어 관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나타났다. 빅토르위고는 “에르나니, (1830)”의 서문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보헤미아의 기여를 요약하자면, 그들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 추구에 정통성을 부여 했다고 간단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존중하는 하위 문화의 경계를 정하고 의미를 부여 했는데, 이곳에서는 부르주아 주류가 과소 평가하고 간과하는 가치들이 적절한 권위와 위엄을 부여 받았다.
보헤미아는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물질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 하는 방법을 옹호했다. 기독교의 수도원이나 수녀원과 마찬가지로 보헤미아의 다락방과 카페, 집세가 싼 동네와 협동 사업은 부르주아적인 보답을 추구하는데 관심 없는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고 동료를 찾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되었다.
보헤미아는 법률가, 기업가, 과학자라는 역할 모델에 시인, 여행가, 에세이스트를 보탰다. 보헤미아는 이런 인물들 역시 그 기행과 빈곤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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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 박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으며, 철학자로부터 인정 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 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이 아무리 불쾌하다 해도 그 불안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좋은 인생을 상상하기 어렵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이지 못한 삶 사이의 공적인 차이를 인정 할 경우 치룰 수 밖에 없는 대가이다.
그러나 그 지위에 대한 요구는 불변이라 해도, 어디에서 그 요구를 채울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가치를 따르는 것은 두려움을 느껴 나도 모르게 복종을 하기 때문이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수의 가치로부터 인정 받지 못하는 가치, 다수의 가치를 비판하는 새로운 가치에 기초하여 새로운 위계를 세우려 했다. 이 다섯 집단의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 지를 재규정 하려 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패자나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잔인한 규정과는 다른 규정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정당성을 얻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