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
■ 소묘(素描)에 대한 관심
대동아 전쟁 통의 보릿고개를 거쳐, 38선을 가르고 남과 북이 전쟁을 치르던 우리 부모 세대는 굶주림에 허덕이며 앞날을 바라 볼 희망조차 막막했었다. 그 때의 동포 대다수의 삶은 고달프고 절망적이었다. 여러 역사 속 사료들을 통하여 접하는 우리의 근대사는 암울하기만 하다.
그에 비하면 지금 내가 처한 생활은 얼마나 풍족한 시절인가.
먹거리가 넘쳐 나니 다이어트라는 미명으로 시간과 돈을 써가며 살 빼기 경쟁에 힘겨워 하고, 입을 것은 넘쳐 나니 헌 옷인지 새 옷인지 구분도 못할 옷가지가 차 떼기로 버려진다. 꽤나 쓸만한 집인데도 포크레인으로 뺨 치듯 때려 부셔버리는가 하면, 몇 해만 살았어도 이사 들면 화장실의 세면기, 양변기, 타일, 부엌의 싱크대는 의례 재시공하는 것이 보기 흔한 세태가 되었다. 사무용품도 예외가 아니다. 대다수 서류의 이면지는 박스로 가득 쓰레기 통으로 향한다. 연필 볼펜 따위의 필기구류는 아마도 10중 8, 9는 쓰지않은 채 폐기처분 된다.
버려지기를 대기 중인 여러 뭉치의 이면지가, 어느날 갑자기 나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 잡는다. 물끄러미 바라 본 지면이 나의 눈에는 넓고 커 보이는 순간이 있었다. A4 용지, 그 이면지 위에도 온 세상이 다 들어 갈 수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문득 잠겨 본다. 간단한 연필 스케치를 시도 해 볼 량으로, 굴러다니는 연필 자루들을 이 방 저 방 찾아 다니며 모아 보았다. 그리고 수 십년 전 여동생이 보다가 버리고 간 쾌쾌 묵은 소묘(素描) 책자도 한 권 찾아 내었다.
스스로 시간이 없다고, 재주가 모자란다고 해서 제쳐 두었던 것이 그림 서예 음악과 같은 예.체능 분야였다. 새삼스레 연필을 잡으니 멋 적기는 하다.
온 세상을 대상으로,
누군가는 글로 쓰기도 하고, 말로도 이야기 하며, 사진에 담기도 한다. 어떤 이는 눈으로 보려고 산골로 바다로 해외로 여행을 나서기도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목소리로 흉내도 내고, 악기로서 소리도 낸다. 그리고 화가들은 화판 속에 그 세상을 담아 내려고 애 쓴다.
넓은 세상! 고원이나 지평선이 보이는 평야의 뜰만 넓은 것도 아니며, 5대양 6대주만 넓은 것도 아니다. 달과 별이 뜬 하늘과 우주공간만 넓은 것도 아니다. 눈을 감고 마음을 열어 젖히면 온 세상이 다 열릴 수도 있다. 비록, 수도자들이나 지향하는 넓은 세상일 수는 있겠지만 ……
이면지 위에 굴러 다니던 몽당 연필로 그린 그림이, 가뜩이나 재주 없는 솜씨에 오죽이나 알량하랴 마는, 대가들이 남긴 스케치 흔적을 따라 다니며 그들이 본, 선(線)과 면(面), 그리고 명암의 세계를 마음 깊이 감상하고자 한다. 쓰고나서 버리려 하던 종이지만, 그 위에 새로운 세계가 나의 마음을 열게 할 것을 기대하며 지면에 연필 심을 흘려 보기 시작한다.
16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루벤스, 피카소나 로댕이 남긴 유명한 스케치도 따라 본다. 관웨이싱의 초상화도 흉내 내어 본다. 꽉 찬 구도의 세계, 선과 면, 조화로운 명암의 구조들이 심오함을 느낀다. 여인의 고운 선, 깊숙한 주름에 잠긴 촌로의 연륜 들도 그 속에서 찾아 보고 싶다. 소백산맥 자락의 고향, 지리산 중턱, “구름 봉우리 덕이 있는 산(雲峰 山德)”의 마음 속 능선도 작은 면 속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보고 싶다. 좁은 공간이기는 하나, 그 속에도 조화로움은 넓은 세상과 마찬가지로 존재할 것이다. 그 속의 조화(調和)란 비교적 단순화 된 모습일지도 모른다. 선(線)의 굵기와, 선의 길이와, 선의 명암이 거리와 원근을 이루며 조화로운 세상의 모습을 압축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손짓하나, 주름진 눈 가의 모습, 먼 산의 아련한 능선, 꽃잎 끝의 가녀린 선, 무사의 팔뚝 근육 사이로 튀어 나올듯이 숨겨진 명암에서도 그들의 조화를 느끼고 만질 수 있을 것을 기대하여 본다.
비록 연필자루로 내가 흘린 선(線)이 볼 품 적은 얼룩진 흑백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꿈 속 모습들도 흑백의 세상이라고 하지 않던가?
굴러 다니는 연필 자루와 버려지는 이면지를 시작으로 넘치는 여유시간을 써 먹으며, 엉성하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의미를 찾아 긴 여정을 4:5 비율의 좁은 고정 지면 위에 선과 명암으로서 남기려고 한다.
2012. 2.16. (목)
오갑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