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
■ 관계(關係)
우리가 사는 사회는 어떻게 하던지 간에 사람들과, 자연, 물건, 이해, 감정 등의 상호간의 “관계”로 이어져 있고, 그 관계 맺음을 적정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국가는 법을 운용하고, 사회의 조직 마다 규정이니 규칙을 운용하게 된다. 사회 윤리나 도덕도 서로간에 “관계” 맺음의 적정선을 긋는 사회운용의 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도 나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며, 동문, 또래, 고향, 동료 등도 나와 사회에서 맺게 된 “관계”며, 조국도 나와 종족으로 맺어진 사람들 간의 “관계”이다.
관계라는 관점에서 법의 예를 살펴보자.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서 “특수관계인”의 정의가 나온다. 동법 시행령 제11조는 특수관계인이란 당해 회사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자, 동일인관련자, 경영을 지배하려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당해 기업결합에 참여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민법, 상법 등도 법 마다 목적에 따른 서로의 “관계”들을 정의하고 있다. 회사나 조직의 규정, 규칙, 거래선과의 계약, 학교의 교칙 따위에서도 결국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어떤 “관계”의 선을 긋는 내용들이 이어져 있음을 흔히 볼 수 있다. 헌법 민법 상법의 첫 조항들을 보면서 “관계”를 생각하여 본다. 하나같이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나"란 자신도 포함하지만, 내가 속한 이익집단 또는 사회집단까지를 포함한다.
헌법 1조 2: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상법 1조: 상사에 관하여 본법에 규정이 없으면 상관습법에 의하고 상관습법이 없으면 민법의 규정에 의한다.
민법 1조: 민사에 관하여 법률에 규정이 없으면 관습법에 의하고 관습법이 없으면 조리에 의한다.
민법 2조: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
민법 3조: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
남녀간의 은밀한 행위를 완곡한 표현으로 “관계”한다고도 하지만, “관계”란 일반적으로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무엇이건 간에 “나”와의 관계가 항상 우선하여 중요하다. 남과 남의 관계, 남과 사물, 남과 현상 등의 관계란 우리의 귓전을 항시 흐르고 있는 수 많은 전파처럼 나의 이익이나 관심과는 거리가 먼, 세상의 한 현상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그러한 관계가 “나”나, 내가 소속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거나, 줄 것이라고 여겨질 때, 관계는 그의 파급 정도에 따라서 나 또는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나와의 관계”라고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너”라고 하는 사람이다. 사랑의 주제도 너라고 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이다. 이 때의 “너”는 연인 혈육 이웃 벗 등을 떠 올려 볼 수 있다. 사랑에서처럼, 존경, 미움, 원망, 증오 …… 모두가 너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들이고, 나에게는 그 관계를 두고 말하기를 행복이나 불행의 원인이라고 여기게까지 된다.
물론 동식물 자연과 같은 사물이나, 사회적, 물리적, 자연적 각종 현상도 진선미(眞.善.美)라는 이름을 걸고 그 “관계”에 끼어 들게 된다. 성공 명예 영광 만족의 크기로서 비교되어 “나”와 우리 옆에 다가오며 그 관계에 끼어 들곤 한다.
“나”가 지니는 한계는 무게 크기 거리라는 물리 요소와 함께 수명이라는 한정된 시간 요소를 특징으로 갖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영원하기를 갈망하기도 하지만 눈에 보이는 자연현상에서의 바람으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한계를 극복하여 넘어보려 애쓰기 보다, 섭리로서 수긍하고 현재 “나”의 의미를 보듬으려는 자세가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나와 나의 한계를 인정하면, “너”라는 의미는 한층 더 명료해질 것이다.
너는 나의 소유물이 될 수도, 나와 영원 할 수도 없는, 또 다른 한 “나”로서의 개체임을 인정하고, 나만큼 존중하려는 자세도 서로를 위해, 또는 밝은 사회를 위해 값진 생각은 아닐까? 물론, 진실과는 거리가 먼, 지금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현상이나, 허상일 뿐, 깊은 진리는 달리 있노라는 믿음, 신앙 하는 것이 종교인의 자세라는 것도 이해한다.
“나” 역시 동물이다. 그 눈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이성의 모습은 과연 무엇일까? 당신도 산책길에 주인장과 함께 가는 애완견을 보며 맛난 사철탕 용 고기 정도로 군침 삼키며 쳐다보곤 하는가? 들판에 여유롭게 풀 뜯고 있는 암소를 바라보며 안심스테이크 자르는 생각으로 군침을 흘리는가? 물가에 노니는 통통한 오리 떼를 보며 훈제오리의 구수한 맛을 먼저 떠 올리는가?
한낱 이성으로서의 너와, 나의 삶의 동반자로서의 너는 위에서처럼 개나, 소나, 오리를 바라보며 생각하는 서로 다른 양태일 수 있다. 진리가 어느 한 곳에만 옳고 그름이 있을 수는 없을 게다. 선악의 기준이 인간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착각(베이컨이 말한 "종족의 우상")이 인간의 공통된 것이라는 점도, “너”를 대하며 판단하는 우리의 일관된 착각에서 읽을 수 있다.
나의 눈에 비친 아름답던 한 이성이지만, 누군가의 딸이며, 벗이며, 가족과 조직의 한 구성원이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팔린 나의 눈으로 “너”라는 개체를 얼마나 많이 이해 할 수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가축을 단지 맛난 고깃덩이로만 보듯 하지는 안 했을까? 겨우내 짝지어 쌍쌍이 생활하는 냇가의 물오리 들과, 나와 너를 이름하며 숙명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에는 서로 간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나와 너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 중심의 착각 속에 이중성으로 구성된 나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너를 생각한다는 것도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심의 한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축을 식용 고기로만 보려는 착각처럼, 술집에서 시중 드는 여인은 접대부로만, 부하직원은 부하로만, 아내는 아내로만, 부모는 부모로만, 자식은 자식으로만 …… “너”를 대하는 목적에 맞는 단면만을 보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그 어느 “너”라 할지라도 나처럼 모든 감정들을 끌어가고 있는 개체이자, “나”가 이 세상의 중심에 서서 생각하는 것처럼, “너” 또한 우주의 또 다른 한 구심점이라는 것을 인정할 줄 아는 지혜가 중요하다고 본다. 세상의 모든 “너”를 합했을 때, “나” 하나에 대응되는 “너”가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고운 너도, 미운 너도, 사랑하고 좋아 하는 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로서는 중요한 대상들이다.
. 음양의 조화
흑백(●○), 요철(凹凸)도 음양이고, 선악(善惡), 아어(ㅏ ㅓ), 나너 도 글의 모양새나 어감이 주는 느낌은 음양을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하나에서부터 시작한, 하나에서 나뉜 것들인지 모른다. 마치 점 하나가 빅뱅으로 터져 우주를 이룬다는 물리학 가설이 그럴싸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정자 염색체 23개와, 난자 염색체 23개가 수정되면 세포분열 하여 정상인의 체세포 염색체 46개로 성장한다. 남녀라는 음양이 만나 조화를 이루며 완전한 하나의 새 생명체로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 생물학적 성장과정이자, 생물학적 음양의 조화로운 모습일지 모른다.
“나”가 양이라고 하면, “너”는 음이 된다. 그러니 음양의 조화라고 하는 관점으로 보면, 세상의 다양한 “너”만큼 “나”의 몸 속, 생각 속에도 다양한 “나”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이치로 “나” 속에도 음양의 이중성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를 향해 항시 도사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너에 대응하는 나가 있고, 나에 대응하는 너가 있다. 그렇기에 “나”이지만 나를 잘 모를 때가 많음을 경험하곤 한다. 나 자신도 나를 잘 모르겠다는 말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숫컷 동물인 나에 대응하는 조화로운 너가 있어야 하고, 새로운 체세포 염색체 46개를 꾸릴 반쪽 염색체 23개를 갖는 이성이 음양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너”라는 이름으로 필요 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선악의 서로 다른 얼굴로서 매일 다가오는 “너”에 대응하는 “나” 또한 “너”에게 각기 다른 모습으로 대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조화를 차리려고 한다. 선과 악, 세고 여림, 음양의 모습을 수시로 달리하며 대응하는 것이 “나”이며, 세상 이치라고 여겨진다.
너의 선한 모습에 나도 선한 생각이, 너의 악한 모습에 나도 악한 감정이, 너의 강한 모습에 나도 강한 감정이, 너의 약한 모습에 나도 약한 감정이, 너의 웃음에서 나도 웃음이, 너의 눈물에서 나도 눈물이 ……
그래서 “나”의 속에는 선과 악이, 음과 양이, 함께 상존하며 세상의 갖가지 “너”와 조화와 평형을 이루며 대응하게 된다. 그렇기에 “나” 속의 이중성은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된다. 나의 마음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고 해서 부끄럽다거나 미안스러워 할 이유는 없다. 그만큼 “너” 또한 다른 모습으로서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일 뿐이다.
나와 너는 새로운 조화를 이루기 위해 늘 생동하고 있다. 음과 양, 선과 악이라는 상반된 모습들이 서로 교차하며 “관계”하고 있다.
2011.12.5.(월)
오갑록
■ " 나를 위한 심리학"
이철우 저
(서평 중에서)
내가 생각하는 나, 남이 생각하는 나는 분명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가 일치하는 지점이 바로 심리학이 원하는 해결점이고 학문의 귀착점이 이곳에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심리를 분석하는 것은 결국 너와 나의 관계를 보다 손쉬운 방법으로 찾고 우리가 되는 길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나와 너의 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덜 상처주고 서로가 더욱 원활하고 이익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플갱어”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자기에는 외부를 아는 주체로서의 자기와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기가 뒤섞여 있다. 이른바 자기의 이중성이다. 우리는 모두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도플갱어와는 좀 구별되고 협소한 의미이기는 하지만 자기 이중성으로 인해 우리는 “심리”에 관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알려고 하는 욕구가 더욱 커진다.
“나”를 표현하는 심리의 법칙으로
나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자기 제시의 심리”, 일부러 불리한 조건을 만들어 두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셀프 핸디캐핑 심리”, 유명인과 친분을 과시한다든지 아니면 자존심을 높여 줄 수 있는 친구를 만든다든지 하는 “영광욕의 심리”, 아부와 비위 맞추기, 자신의 유능함을 알리려고 하는 “영합의 심리”,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며 곤경은 우선 피하고 보는 “변명의 심리”, 안되면 막 가는 “협박과 애원의 심리”, 그리고 카멜레온 형 인간을 꿈꾸는 “자기 모니터링 심리” 등이 있다.
* ㈜ 도플갱어(doppelgänger)는 나 자신과 같은 현상을 보고있는 생물체를 뜻함
“이중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란 의미며, 세상에는 나와 똑같이 닮은 또 하나의
존재가 돌아다니며 임종 시 단 한번 만난다는 독일 민간전설에서 유래된 말
■ 부버의 "나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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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캔디스)
마틴 부버 '나와 너'에서 현대인의 인관 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다.
하나가 '그것'과 '그것'의 관계다.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철저하게 이용한다는 것이다. 때론 남편이 아내를 이용하고, 아내가 남편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결에 생명이 비인격화 되어가는 현상을 지적한다.
두 번째로 '나'와 '그것'의 관계이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한다면 무척 괴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끝까지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관계는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너를 인격적으로, 너는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줄 때 만에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 나와 너의 관계로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주어도, 우리 사이에는 언제가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질 수 있는 긴장감이 있다. 이러한 것은 인간의 연약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엔 이 인간 관계를 항상 중매해가는 하나의 촉매제가 필요하다. Martin Buber는 이 촉매제를 '영원자 '너'' 라고 지적을 했다.
이 세상에는 화평이 없다. 인간의 의지의 한계를 다 동원해 화평을 추구해 보지만 할래야 할 수 없다. 그리고 거침없이 세상에는 참 믿을 사람이 없다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게 세상사이다. 기실은 내가 나 자신도 믿을 만 하지 못한다. 내가 내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 후략 (설교 중에서)
□ “나와 너 (Ich und Du)”
. 1923,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1878~1965)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생 유대인
(글 오강남, 글 중에서 일부발췌)
마틴 부버는 무엇보다 그의 책 “나와 너”를 통해 가장 많이 알려졌다. 이 책은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부버에 의하면 관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나와 그것(Ich und Es, I and It)’이라는 독백(monologue)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너(I and Thou)’라고 하는 대화(dialogue)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그 이용 가치로 따져보는 관계이다. 일정 정도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사물을 그렇게 보지 않으면 생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이 나의 이기적 목적에 어떻게 부합할 수 있을까 만 생각하면서 대한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이해한다든가, 사랑한다든가, 마음으로부터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 자신을 완전히 열어놓지 못하고 뭔가 움츠리고 감추려 한다. 삐걱거리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 말 없이 통하는 것이 참된 대화
마틴 부버는 이런 관계를 청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나와 너’라고 하는 대화(dialogue) 관계에 들어가 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을 가면이나 체면치레나 가식이나 체하는 일 없이, 심지어는 말하지 않고도 진정으로 이해하고 서로 통하는 관계를 말한다. 독일어에는 ‘너’ 혹은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로 ‘Du’와 ‘Sie’가 있는데, Du는 친밀한 사람들끼리 쓰는 것이고, Sie는 공식적, 외교적인 관계에서 쓰이는 것이다.
부버가 ‘나와 너’라고 했을 때 그것은 물론 ‘Ich und Du’였다. 영어의 경우 ‘I and Thou’라 번역하기도 하지만, 현재 Thou라는 말은 일상에서 거의 쓰이지 않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번역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 말로는 ‘나와 그대’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나-너’의 관계는 서로가 아무런 전제 조건이나 이해관계를 고려함이 없이, 순수한 두 존재가 그대로 만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생긴 유대관계에서는 서로서로 북돋아주고 서로서로 자라게 해주는 일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두 연인, 고양이와 그 주인, 기차에서 만난 두 사람 등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나-너’의 관계가 한번 성립되면 언제나 그대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나-너’의 관계에서 ‘나-그것’의 관계로 넘나든다. 또 의식적으로나 억지로 ‘나-너’의 관계를 이루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너’는 다시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어 결국 ‘나-그것’의 관계로 변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열어놓고 진정한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너’의 인격적 관계는 경험을 통해서만 그 깊이를 알 수 있다.
. 不二 입장까지 이르지 못한 것 한계
부버에 의하면 ‘나-너’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가질 수 있는 관계라고 한다. 미술이나 음악이나 시가 모두 이런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매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고 한다. 부버는 이런 관계를 신에게까지 적용한다. 부버에 있어서 신은 우리의 ‘영원한 그대’이다.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거나 신을 정의하려는 것은 신과 우리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로 전락시키고 마는 일이다.
‘영원한 그대’에게 무조건 우리 스스로를 열어놓고 기다리면 그와 ‘나-너’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관계에 들어갈 때에는 말이 필요 없게 된다. 그야말로 언설 이전의 경지라는 것이다. 신과 ‘나와 그대’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나 자연이나 예술과의 ‘나-너’의 관계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부버에 의하면 경전은 ‘영원한 그대’인 신과 인격적 관계를 체험한 사람들의 기록으로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그 기록을 읽고 우리 스스로를 비움으로 그런 관계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을 읽을 때 분석적으로 따지면서 읽으면 안 된다. 그렇게 읽는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관찰자의 입장에 서게 하므로 참된 대화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부버에게 있어서 법이 정해주었기 때문에 그대로 행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내가 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 ‘나-너’의 관계에 들어갈 때 그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동이 진정으로 의미 있고 바람직한 행동이라 보았다.
부버의 관계철학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만물동체라든가 천지합일, 무극이나 불이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도 나와 그대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에서 뭔가 궁극 경지에는 미치지 못한 상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쉬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와 그대’의 대화 관계만 있어도 세상은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
(고광필, 글 중에서 부분 발췌)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그의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 근원어
부버에 의하면 세계는 사람에게 있어서 두 겹(二重的)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인간의 몸가짐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인간은 이 두 겹의 실존 상황을 낱개의 말이 아니라 짝말인 두 개의 근원어로 표현한다. 두 근원어는 나-너(Ich-Du)와 나-그것(Ich-Es)이다. 여기서 “그것”이라는 말에는 인간도 포함된다. 따라서 인간은 짝말로 된 두 근원어의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짝말이라는 것은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인간의 실존은 짝말이라는 언어 속에 존재한다.
두 겹으로 된 짝말은 인간의 실존 상황을 잘 묘사해 준다.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짝말인 두 겹으로 된 관계성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나와 너의 관계성을 갖거나 아니면 나와 그것의 관계성 중의 어느 하나의 관계성을 갖는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존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혹은 나와 그것이라는 관계에서 존재한다. 인간은 동시에 두 관계성을 함께 갖고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고뇌와 갈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근원어는 서로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너라는 관계는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 말해지는 것이나 나와 그것의 관계는 그렇지가 않다. 인간은 무엇을 원하고, 생각하고, 느끼며 산다. 인간은 무엇에 대한 몸부림 가운데 부대끼며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이러한 것이 부버에 의하면 세계의 집합체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그것의 관계는 인간이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소유의 대상, 즉 물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에서 너는 소유하는 하나의 대상물이 아니다.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서로 나누는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부버에 의하면 나와 너의 관계성 속에서만 참다운 관계성이 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와 그것에는 참다운 관계성이 없는 것이다. 독점적인 소유에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너의 관계성은 소유가 아니라 상호 관계성이다. 그래서 나와 너의 관계성은 만남으로 귀착된다. 여기서 너는 나를 만나 주지만 나의 입장에서 보면 내가 직접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너의 만남은 선택이요 동시에 선택함을 입는 것이요, 능동이며 수동적인 것이다. 상호적이라는 말이다. 상호적이라는 말은 나와 너의 관계에서 침묵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응답적인 것이다. 반응이 없는 만남은 그 안에 무엇인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성이다.
나와 너의 만남은 나의 전 존재를 건 행위이다. 여기에는 상호 책임성, 상호 보호성, 상호 이해성이 포함된다. 여기서 상호 책임성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야속한 관계성이 아니라, 상호 만남의 관계성을 서로 일구어 나가는 것이다. 서로라는 말이 없어질 때 나와 너의 관계성은 나와 그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참 만남이 위기에 처하게 된다.
나와 너의 만남을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너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천하에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영혼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너의 만남은 나의 본질적인 행위 즉 나의 본연의 모습에서 갖고자 하는 상호 관계성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너를 통하여 내가 된다. 내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너를 만남으로써 나의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서 나는 한 인격체로서 너를 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와 너의 관계성은 형이상학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실존적인 관계성이다. 우리가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관계성이요 만남인 것이다. 이것을 벗어난 관계성과 만남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 있어서 나라는 인간은 때로는 너를 그것으로 대상화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와 너의 관계성은 깨지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하나의 관계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나와 너 혹은 나와 그것의 관계성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에 있어서는 나와 너에 있어서 너라는 관계가 그것으로 되어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고귀한 우수성”이다. 그렇다. 여기에 인간의 고뇌, 갈등 그리고 몸부림이 있다. 그러나 운명대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신앙이 필요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의 관계성을 동시에 갖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인간을 하나의 대상(물건)으로 전락시키는 나와 그것의 관계성을 막고 인격적인 나와 너의 만남으로 바꾸는 믿음이 필요하다. 여기에 희생과 아픔이 따르게 되며 희생과 아픔은 참 만남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 인간세계
개인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는 서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민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것의 역사가 증가되고 있다. 나와 그것의 관계라는 말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다. 그러한 관계성을 가지려 하는 변질된 관계가 악한 것이다.
세상에 살면서 인간은 여러 가지 유혹에 빠진다. 세상에 대한 염려, 물질에 대한 유혹이다. 이러한 유혹 가운데 있을 때 인간은 나와 너의 인격적인 관계성을 가지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사귀는 인간이 자신의 유혹을 극복하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 세상이 물신주의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자기 욕심을 채우고 그것이 지나쳐 탐심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 이런 관계성은 결국 나와 너의 관계성에서 나와 그것의 관계성으로 전락된 것이다.
. 영원자 너
부버는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자 너’에게서 만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하나 하나의 ‘너’는 영원자 너를 들여다보는 창구멍이라고 했다. 인간의 진정한 만남과 관계성은 결국 영원자와 만남에 귀착된다는 말이 아닐까? 인간은 영원자 너와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자기를 완성해가고 자기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 나와 너의 완성은 영원자를 너라고 부르는데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영원자는 누구일까? 부버에 의하면 영원자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성은 무조건적인 독존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함께 겹쳐 있다고 했다.
부버에 의하면 하나님의 관계성에서 나와 너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관계성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성을 묘사할 뿐이라고 했다. 인간은 모순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모순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독존성과 포괄성을 우리는 그 자체로서는 이해할 수 없고 그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성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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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 관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것은 나와 너 그리고 나와 그것이다. 전자는 인격적인 관계성이요, 후자는 비인격적인 관계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나와 그것으로 전락된 존재라는 데 비극이 있는 것이다. 더욱 비참한 것은 전락된 관계성에서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의 회복을 인간 스스로는 할 수 없는 데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많은 바벨탑을 쌓았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부버도 역시 영원자 즉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 영원자와 관계성에서 진정한 나와 너의 만남과 관계성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참 인생은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부버의 말은 참으로 중요하다. 참 만남이 없고 참 대화가 없고 참 관계성이 없을 때 인간은 살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을 때 인간성은 황폐화되고 그 결과 퇴폐적이고 방향이 없는 감각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진정한 대화는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만남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결국 영원자 너를 부르게 된다. 영원자 너를 부름으로써 우리의 관계성을 재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너의 관계성으로 재정립을 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