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상의 이동.......善/4. 우리 씨족의 이동

한반도 조상과 씨족, 오씨네 이동경로

오갑록 2011. 10. 11. 18:05

민족과 얼 ......

■ 한반도의 고인류 유입

 

                                                                                     (백과사전)

인류는 약 7백만 년 전에 나타났지만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석기는 약 250만년 전의 것이다. 인류의 발생 직후에도 자연석이나 나무 등을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석기를 제작한 흔적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현대의 침팬지들도 도구의 사용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 결국 석기시대라고 하는 시기는 250만년 전에서 홍적세에 정착생활이 시작되는 1 2천년 전의 시기까지를 포함한다.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도 적어도 150만년 전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하였으며 중국의 전 지역에서 그 흔적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이른 시기의 고인류의 화석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석기유적들이 한반도 전체에 널리 퍼져 있어서 홍적세 이른 시기에 고인류가 유입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홍적세(Pleistocene)는 지구의 기후가 추워져서 빙하가 형성되었던 시기이며 흔히 빙하시대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시기 동안 빙하가 극지방과 높은 산악지대에 형성되고 주변 지역으로는 주빙하 기후가 형성되었다. 빙하시대는 250만년 전에 시작되고 하부 홍적세(250만년∼73만년 전), 중부 홍적세(73만년∼12 5천년 전) 그리고 상부 홍적세(12 5천년∼1 2천년 전)의 시기로 구분된다.

 

인류는 약 7백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기원하여 2백만년 전 경에 초기 호모들이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 나왔다. 동아시아 지역에는 호모 에렉투스가 150만년 전에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반도에도 이른 시기에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했을 가능성이 많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현생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6만년 전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대체로 3 5천년 전 경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는 만달인, 승리산인, 상시인 등의 현생인류 화석들이 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평안도 지역의 동굴유적에서 역포인이나 덕천인과 같은 현생인류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가 발견되고 있지만 아직도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  한반도에서의 현생인류

 

 한반도에서 최초의 현생인류는 언제부터 살았을까?

 

. 과학자들은 약 4만년 전부터 우리의 직계 조상인 현생인류가 한반도에 뿌리 내렸을 것으로 추정

. 충북에서 83년 발견된 4만년 전 인골로서 6살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됨

. 발견자인 석회석광산 채광 소장 김흥수 씨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로 불림

 

. 흥수아이

   . 충북 청원군 문의면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1983년 석회석 광산 직원 김흥수 제보로 충북대가 발굴)
   .
4만 년 전의 후기구석기시대에 살았으며, 5살 때 이 동굴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

   . 머리 크기는 1200~1300㏄,키는 110~120센티미터 정도

   . 머리뼈를 잰 결과는 현대인과 선사인의 특징을 함께 지님

   . 흥수아이가 특별히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것은 장례 풍습에 의해 매장되었기 때문

 

   . 발굴 당시 흥수아이는 편편한 석회암 낙반석 위에 누워 있었는데, 일부러 시신을 바로 펴 놓은 후

     고운 흙을 뿌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고, 주검 곁에서는 여러 종류의 식물꽃가루가 채집되었음

   . 꽃가루 분석에서 국화꽃가루가 가장 많았는데, 상당히 높은 지대인 석회암동굴에 국화꽃이 자생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화꽃은 장례를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서 꺾어왔다고 추정됨

   .
고인류학계에서 네안데르탈인들을 중요시하는 것은 정신적인 면모도 발달하여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는 풍습도 가졌기 때문임. 프랑스의 무스티에 유적지에는 10대 소년이 옆으로  누워서 머리를

     팔 위에 얹어 놓은 상태로 매장되어 있었음. 그의 손 옆에는 훌륭한 돌도끼 한 개가 놓여 있고 소의

     뼈가 둥그렇게 그를 둘러싸고 있었음. 그것들은 소년의 사후에 있을 여로에 도움이 되도록 무덤에

     놓여진 것이었음.

   .
남북한의 고고학자들이 흥수아이를 그토록 열광한 이유는 고고 인류학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풍습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임

 

   . 발굴 당시 굴의 중요부분이 석회석 발파작업으로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 조사되었다고 함

   . 구석기유물, 코끼리 사자 원숭이 쌍코불이, 국화 진달래 등 많은 동식물화석이 발굴됨

   . 석회암으로 된 장소에 시체가 묻히게 되면

      . 석회암이 녹으면서 형성된 광물질이 많은 지하수나 물기가 계속 유골에 작용하여

      . 뼈세포 속에서 광물질이 석출되어 그곳에 채워지고

      . 또 삭아 없어지는 빈자리에도 광물질이 들어가게 됨

      . 또 분자 수준에서 유골과 광물질 사이의 자리바꿈도 진행되며,

      . 이 경우 유골은 돌과 같이 굳어지면서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게 되며

      . 부패작용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외력에 대해서도 저항력이 강해짐

      . 때문에, 상황에 따라 장기간 보존이 가능한 것이라고 함

   . 현재 동굴은 석회석 채광으로 파손 되고 없어짐

 

   .  오래 전에 사라진 큰쌍코뿔소나 상원말 등이 화석으로 나오고 있어,

      이 화석으로 보아 당시 우리나라 기후는 열대성이거나 아열대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 북한의 경우

   . 1973년 평양에서 멀지 않은 대동강유역인 평안남도 덕천시 승리산 동굴유적

. 아래층에서 치아와 어깨뼈가 발견되었고

. 이 위층에서는 아래턱뼈가 나왔음

. 아래층의 치아와 어께뼈의 주인은 덕천사람이라고 명명하였고

. 아래턱뼈 주인은 약 4~5만 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승리산사람이라 부름

. 승리산사람들은 짐승가죽을 이용하여 체온을 의도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을 알았음

 

   . 1979~1980년에 평양 승호구역 만달리 동굴

. 거의 완전한 형태의 골격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만달사람이라 명명

. 2만 년 전의 사람으로 추정됨

. 뇌의 용량은 1.676.8 ml 로 추정되며

. 흑요석을 이용한 석기가 발굴되었고. 흑요석 석기에 자루까지 달아 사용함

. 만달동굴에서 인골화석으로 발견된 사람은

         . 우리 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보는 여러 특성을 갖고 있음

. 그래서 승리산사람이나 만달사람은 조선 옛 유형사람으로서 오늘 우리민족의 선조라고 봄

 

   . 1981년 평양시 상원군 용곡동굴

        . 4개의 머리뼈와 8개의 넓적다리뼈 등 모두 10명에 해당하는 인류화석 출토

           얼굴뼈까지 보존되어 있는 2개의 머리뼈가 나왔음

 

 

        . 45천년 전 후기구석기시대로 밝히고 있음

 

 

 

 두루봉 연구 30   보고서 초록

             (30 Years since the First Excavation of Durubong Cave Site)                                  

                                                                                                    한국고대학회, 이융조

 

         두루봉유적은 1976 7, 강승원 기자(당시 한국일보)의 제보로 알려지게 되었고, 그 뒤 충북대학교 박물관과 연세대학교 박물관이 l차 조사(1976. 8. 7~13) 2굴을 발굴하였고, 그 뒤 연세대학교에서는 9굴을 조사하고 충북대학교에서는 계속하여 2굴과 15굴ㆍ새굴ㆍ처녀굴ㆍ흥수굴 등을 찾아 모두 10차례(1976~1983)까지 조사하였다.

  이렇게 찾아진 동굴은 2~3차례의 계획적인 기획발굴이 진행되었지만, 그 외에는 모두 현지 작업인들의 제보에 따라 조사되었다. 두루봉 동굴유적은 발굴되기 전 1964년부터 광산허가로 이미 발파되어 두루몽실하게 생긴 두루봉의 봉우리가 거의 ⅔ 이상이 파괴된 상태에서 발굴ㆍ조사되었기 때문에 두루봉에 있었던 동굴의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하지만 구제발굴로 실시된 이들 동굴에서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자료들이 발굴되었다. 2굴에서는 46(species)의 동물화석이 밝혀지고 불땐자리(65×90)와 함께 많은 뼈연모. 짐승화석 등이 찾아졌으며, 굴 입구 모서리에서는 진달래(ericacea) 꽃가루가 모두 157개나 검출되어 이들 자료들로 보아 일부러 갖다놓은 것으로 해석되어 “꽃을 사랑한 첫 번째 사람들(The First Flower People)”이라고 할 수 있다.

  15굴에서는 많은 숯이 출토된 불땐자리(30×30)와 함께 커다란 석회석 바위덩어리를 지탱하여, 길이 약 40㎝정도의 넓적한 석회암 돌들을 길이로 놓아 담으로 할 수 있게 하여, Terra Amata 집터와 같이 휘인 나무집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새굴에서는 굴 안의 1 (1×1m)의 면적에서 뿔이 잘린 사슴 머리뼈 13개가 같이 몰려 있어서, 사슴숭배의식(deer cult)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또한 옛코끼리(Elephas antiquitas) 상아(길이 61.8)가 발굴되었는데, 인류행위로 만들어진 찍힌 자국과 자른자국이 관찰되었다.

  처녀굴에서는 거의 완전한 큰쌍코뿔이(Dicerorhinus merckii)의 뼈대와 완전한 한 개체의 동굴곰(Ursus spelaeus)이 발굴되었다. 특히 동굴곰 머리뼈와 아래턱이 놓여진 가운데에는 5년생의 큰꽃사슴(Pseudaxis grayi) 뿔이 놓여 있고, 동굴곰의 긴 뼈들(long bones)이 동쪽방향으로 나란하게 놓여져 일부러 인간이 배열한 행위로 해석되었다. 그 목적은 사슴과 곰의 숭배의식(deer and bear cult)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1982. 12. 15~1983. 1. 29)에 발굴된 흥수굴은 제보해 준 김흥수(Mr. Kim Hung-su)님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동굴로 여기에서는 많은 석기들과 불땐자리(100×75)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이 굴에서는 두 개체의 어린아이 뼈들이 발굴되어 l호ㆍ2호라고 이름 붙여졌으나, 2호는 약 3살 정도의 어린 아이로 이미 머리 부분이 없어진 채로 발굴되었다.

  1호아이는 거의 완전한 채로 발굴되었는데, 밑바닥에 넓적한 판자돌을 묻고 그 위에 두께 약 10㎝정도의 고은흙을 뿌리고, 다시 그 위에 이 흥수아이를 바로펴묻기로 묻은 위에 두께 10㎝ 정도의 고은흙과 판자돌을 다시 덮는 매장을 하였다.

  이 흥수아이는 이빨로 보아 5살 정도가 되며, 키는 110~120cm 정도, 뇌용적량(cranial capacity) 1,260cc가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고, 머리뼈 상태는 좁고 길며(Dolichocrany), 높은 머리(Hypsicrany)  특징인 것으로 계측되었다. 1호아이의 엉치뼈 부분에서는 국화꽃가루가 덩어리 진 채로 발견되어, 이 어린이의 내세를 위한 의식행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두루봉 동굴에서 발굴된 많은 멸종된 짐승뼈화석과 석기ㆍ사람뼈들의 모든 자료들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 구석기연구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으나 유적이 보존되지 못한 것은 무척 애석한 일이다.

  발굴이 진행되고, 발굴이 끝난 뒤에도 필자를 포함한 여러 학자들은 75편의 논문과 보고서 5, 연구저서 l펀을 한국어ㆍ일본어ㆍ중국어ㆍ영어ㆍ불어 등으로 국내 학회와 국제학술회의에 발표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고동물학ㆍ지질학적 연구의 부족과 절대연대측정자료의 축적이 필요하다. 더욱이 이러한 많은 자료들을 지방의 국립대학 박물관 예산만으로는 진행되기 어려운 상태이므로 국가기관에서 좀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충북대학교 박물관에서는 두루봉 발굴 20주년(1996, 10. 21~30) 30주년(2006. 11. 8~14)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여 그 연구성과를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 빙하기 바이칼에 한민족이 살았나?

          우리 민족의 뿌리와 DNA연구                            (동아 사이언스, 신동호 2002.8.30.)

 

□  한민족은 언제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 우리는 북방 아시아인과 언어 문화뿐 아니라 생김새와 유전적 특징도 비슷

. 우리나라의 유전학자, 의사, 지질학자, 고고학자, 민속학자 22명과 러시아 학자 4명이 20028

러시아 이르쿠츠크대에서 ‘동아시아 민족의 뿌리’를 주제로 세미나를 갖고 시베리아의 성소로 추앙되는 바이칼호를 답사

. 서울대 내분비대사영양연구소, 배재대 한국시베리아센터, 이르쿠츠크대가 공동 주최한 내용

 

. 시베리아 원주민이 한국인과 구별이 어려울 만큼 얼굴이 똑같았음

. 북 아시아인은 다리가 짧고, 두터운 지방층을 가지며, 얼굴은 평평하고, 코가 낮고, 입술이 작고, 눈꺼풀이 두텁고, 눈이 가는 게 특징인데,

. 동상과 찬바람을 견디고, 흰 눈 속에서 지내는데 보호막이 되었을 것임

 

. 서울의대 이홍규 교수 (당뇨병 전문)

. 25000년 전쯤 시베리아에 매우 혹독한 빙기가 닥쳤을 때 바이칼호는 아시아인들의 선조에게 오아시스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 대부분의 한국인이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갖고 있는데,

. 생활 수준이 높아져 이제는 추위를 모르고, 영양도 과잉상태여서 환경 변화와 체질의 부조화가 비만과 당뇨를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

. 대부분의 한국인은 북 아시아인의 체질을 갖고 있지만, 남방계 아시아인과 유럽인의 유전자 등도 일부가 섞여 크게 4개의 유전학적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고 봄

. 사상의학을 창시한 이제마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질을 4종류로 구분함과 같은 맥락

 

. 국내 유전학자들은 한국인의 원류가 된 북 아시아인이 마지막 빙기인 5만년 전부터 12000년 전까지 시베리아 지역에서 살면서 추위에 적응된 체질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음

 

. 단국대 김욱 교수(유전학)

. 북 아시아인이 한민족의 주류였음을 인정하면서도 남방계 혈통의 영향도 적지 않았다고 봄

. 한국, 일본, 몽골, 중국, 태국 등 아시아 8개 민족 1211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

. 16500개의 dna 가운데 CCCCCTCTA라는 9개의 글자가 빠진 특이 유전자를 가진 비율이

한국인 16%, 일본인 14%, 중국인 13%. 반면 몽골인 4%, 베트남인 23%, 필리핀인 30%

. 북쪽으로 갈수록 낮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높았음

, 한민족의 형성과정에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함

 

. 바이칼호 주변에는 많은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고 있음

. 목포대 이헌종 교수(고고학, 러시아에서 시베리아 석기를 연구)

. 25000년 전부터 날씨가 추워지면서 정교한 세형돌날 문화가 시베리아에서 발원해

한반도로 확산

. 빙기였던 17000년∼19000년 전 바이칼호 인근의 시베리아가 사막화되자 더 좋은 기후를

찾아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한국과 일본에 인구 분산

 

□  바이칼호 독특한 생태계

 

. 바이칼호는 넓이는 세계 7번째, 담수량 기준으로는 세계 최대의 호수

. 최대 수심 1642m인 이 호수에는 전세계 민물의 5분의 1이 담겨 있음

. 길이 640km, 평균 너비는 48km, 면적이 남한의 3분의 1이나 됨

. 호수의 최대 투명도는 42m. 여기까지 물밑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맑아 그냥 마셔도 될 정도

. 주변의 숲과 초원에서 365개의 강이 바이칼호로 흘러들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것은 오직 하나

 북극해와 연결된 앙가라강 뿐

 

. 바이칼호는 3000만년 전부터 단층 운동에 의해 형성

. 지금도 바이칼호 주변에서는 매년 3천번 이상 지진이 일어나며

. 지금도 호수 주변은 1년에 1㎝씩 융기하고 호수는 매년 2㎝씩 넓어지고 있다고 함

 

. 바이칼호에는 2500종의 동식물이 살며

. 이 중 상당수가 바이칼호에만 사는 고유종

. 세계 유일의 민물 바다표범을 비롯해 철갑상어, 오물, 하리우스 등 어종이 이곳의 명물

. 이처럼 생물 다양성이 높은 것은 바이칼이 생성된 지 오래된 호수이고, 일반적인 호수와 수심

 깊은 곳까지 산소가 공급되고 자체 정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

. 특히 호수 주변에는 온천이 많고

. 수심 420m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 구멍을 발견하기도 함

 

. 맑은 물, 높은 생물 다양성, 많은 온천은 빙하기의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했던 초기

아시아인에게 좋은 안식처가 됐을 것임

 

      

 

 

 

 

□  바이칼호 주변 부리야트족

 

. 시베리아의 여러 아시아 소수민족 중 인구 40만의 부리야트족은 그 중 최대의 소수 민족

. 특히 부리야트족이 간직한 샤머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많음

. 원래 바이칼의 주인인 이들은 17세기에 시베리아를 정복한 러시아에 동화됨

. 몽골인과 뿌리가 같고 언어도 비슷. 유목민인 이들은 모두 자신을 징기스칸의 후예로 믿고 있음

 

. 부리야트족은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과 똑같은 민족 설화를 갖고 있는데, 한 노총각이 바이칼호에  

  내려온 선녀에 반해 옷을 숨겼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선녀를 집으로 데려와 아들 열 하나를

  낳았다. 하지만 방심하는 틈에 선녀는 숨겨놓은 옷을 입고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

 

. 오색 천 조각을 두른 나무말뚝이 주변지역에 흔한데, 오리를 조각해 나무 꼭대기에 꽂아놓은 우리의

  솟대나 서낭당과 상징적 의미와 형상이 거의 똑같음. 이는 한국의 토속신앙과 샤머니즘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 바이칼을 찾는 사람과 손을 맞잡고 부르는 샤먼의 북소리와 애잔한 노래 가락은 우리 정서와 금세 공명을 일으키며, 함께 따라서 추는 춤은 강강술래 같다고 함

. 예전의 샤먼이 썼던 모자는 사슴뿔 모양으로, 신라의 왕관과 모습이 닮아 시베리아의 샤먼 전통이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음

 

 

□  면역 유전자 및 체형

                                                                    

. 면역 유전자 (HLA)

  우리 민족의 특징적 조직적 합성 항원 HLA-B-59는 인도의 수라스트란인,

  미국 서북부의 백인계 인디언 혼혈족 등 아리안어족의 것과 같다.

 

. 체형

  우리 민족이 아시아인 중 키가 크고, 콧날이 오똑 하고, 얼굴 뼈가 수직으로 되어

  있고, 신‧구석기 시대 만달인, 북한 검은모류 유적지의 승리산인 등의 머리 형태가

  장두형(長頭形) 등 신체적으로 아리안어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

 

□  유전자 분석으로 보는 한민족

 한국인은 대부분 남방의 농경문화 민족에서 그리고 일부는 북방의 유목·기마 민족에서 비롯돼 ‘이중의 민족기원’을 지닌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또 한국인과 몽골인이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결과와 달리,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중국 베이징 한족과 만주족, 일본인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분석됐다.이 연구결과는 지금까지 한국인의 민족기원과 관련한 연구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에 걸쳐 가장 많은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이뤄진 것이다.

 김욱 단국대 교수(인류유전학) 연구팀은 “한국인을 비롯한 중국·일본·베트남·몽골 등 동아시아 11개 민족집단에서 1949 명의 유전자를 조사·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북방계보다는 주로 남방계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그러나 북방계도 뚜렷해 ‘이중의 민족기원’ 현상이 두드러진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는 저명한 국제학술지 “휴먼 지네틱스”에 발표됐다. 연구팀은 이번 연구를 위해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고 고스란히 유전되는 두 가지 염색체의 DNA를 이용해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추적했다. 하나는 아버지에서 아들한테만 전수되는 Y 성염색체’의 DNA이며, 다른 하나는 난자 세포에만 존재해 모계로 전수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다. 김 교수 연구팀은 2001~2003 년 한국과학재단 지원으로 11개 민족 738명의 와이염색체를, 2002~2003 년엔 8개 민족 1211 명의 미토콘드리아 염색체를 비교 분석해 이런 결과를 얻어냈다.

 먼저, 와이염색체를 분석한 결과는 ‘한국인의 원류는 북방 민족’이라는 세간의 인식과 크게 다른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김 교수는 “16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현대인(호모 사피엔스)은 6만~8만 년 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이주 집단의 한 갈래가 2만~3만년 전 아시아 남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와이염색체에 돌연변이를 일으켜 ‘엠(M)175’라는 유전자형을 지니게 됐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이번에 Y염색체를 비교해보니 한국인 75%에서 이런 유전자형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한국인10명 가운데 7, 8명이 아시아 남쪽으로 이동하던 2만~3만년 전의 집단과 동일한 와이염색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몽골인을 뺀 동아시아인 대부분에서 엠175 유전자형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런 사실은 엠175 유전자형 집단이 중국 중북부인 황허·양쯔강 유역에서 농경문화를 이룩해 인구의 대팽창을 일으키면서 5천년 전 쯤 한반도와 다른 아시아 남부로 퍼져나갔다는 유전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번 연구에선 중국 중북부 농경민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남방계와 별개로, 한국인에선 몽골·시베리아 북방계 와이염색체의 유전자형(20%)도 발견됐는데, 이는 남방계가 대규모로 옮아오기 이전에 알타이 산맥이나 시베리아 바이칼 주변에서 빙하기를 피해 남하한 집단이 먼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풀이된다.

결국 “지금의 한국인은 한반도에 먼저 들어온 일부 북방계와, 대규모로 이동해 들어온 남방계 농경민족이 섞여 이뤄졌다”는 것이 연구팀의 결론이다. 이와 함께 연구팀은 이번 11개 민족집단의 비교분석을 통해, 2300년 전쯤 농경문화를 전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통해 일본 본토로 이주했다는 유전적 증거도 발견됐다고 덧붙였다. 한국인이 주로 중국 중북부 농경문화에서 비롯했다는 와이염색체의 분석결과는 이 연구팀이 따로 벌인 미토콘드리아 DNA의 분석결과와도 대체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김 교수 연구팀의 결론은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최근 다른 연구팀의 연구결과와 달라 논란을 일으킨다.

 김종일 한림대 교수(생화학교실)는 ‘한국인 66명과 몽골인 72명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두 민족은 유전적으로 매우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는 중간 연구결과를 밝힌 바 있다. 이와 관련해 김 교수는 “우리는 한국·몽골인 사이의 유전적 관련성만을 연구한 것이며 연구방식에서도 큰 차이가 있다”며 “이런 점에서 다른 결론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  한민족의 유전자 루트   

                                                                                                      (레이아웃 글 중에서 일부발췌)

최근의 한중일 학자들의 공동 연구결과, 이들 삼국의 공동조상(DNA구조상 가장 중심이 되는)은 동남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혀냈다. 동남아시아에 머물고 있던 한 무리가 오랜 세월 동안 중국 동해안 루트를 따라 북부로 이동해왔고, 대략 중국 화북지방에 정착했음을 확인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가 분열돼 서쪽과 북쪽으로 계속 이주하여, 훗날 티벳이나 내몽골 지역의 황인종의 시원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내몽골 지역은 후에 이주해온 아리안계(흉노)에 의해 접수되지만. 황화강 유역에 살던 종족은 그 후 산동과 요녕, 한반도, 일본 등으로 확산되어 나간 것으로 확인이 되었고, 이들이 오늘날 한국과 중국, 일본조상의 중심적 DNA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래서 이들 삼국(중국 남부지역민은 제외)인의 DNA구조가 가장 유사하게 나오는 것이다.

 

*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시의 전체 인구 중 1/3정도가 한족(漢族)이었다고 한다. 또한, 신라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6부는 중국 이주민이었음을 삼국사기나 중국사서가 증명하고 있다. 김씨 정권의 조상인 김알지도 한족이었음은 물론이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형성은 큰 줄기가 예맥족 + 한족(漢族) + 해양민족(인도?) + 극소수 흉노족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유전자와 유물 유적 등의 발굴은 우랄 알타이어계 민족으로만 알고 있어왔던 한민족의 혈통 형성과정이 의외란 사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인들은 우리 민족에 많은 DNA를 남겨줬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의 기록에 따르면, 몽고가 고려의 항복을 받은 후 몽고 병사들에 의한 행패는 전 고려 인들에게 재앙이 되었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몽고인들의 유전자가 대량 유입되고, 우리들 엉덩이에 반점(몽골반점)이 새겨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  우리나라의 성씨

                                                                                                       출처 : 뿌리를 찾아서

 

. 우리 나라 성()은 삼국시대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

  중국도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역, , 강 등을 성으로 삼았음

 

   .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강()

   .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희()

   . ()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으므로 성을 요()씨 …등

      (이것은 어머니 성씨를 따랐던 모계사회의 흔적이기도 함)

 

□  삼국시대

 

.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 고구려 건국 시조 주몽(朱蒙)은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기 때문에 고()씨라고 하였고

   . 백제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扶餘)씨라고 하였으며

   . 신라에는 박(), (), () 삼성의 전설이 전해 오며, 유리왕 9(32)

     육부(六部) 촌장에게 이(), (), (), () , (), ()씨의 성을 주었음

 

. 그러나 중국의 "북제서"에는 진흥왕(540~576)을 금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씨라는 성을 사용 한 것으로 나타남

 

. 이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 7세기 이전 건립된

   . 신라 진흥왕의 네 곳의 순수비

   . 신라 진지왕 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술오작비

   . 진평왕 시대에 건립된 경주 남산의 신성비 등의

 

. 비문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볼 때 인명에 성을 사용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고

  소속부명(촌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성보다 본(촌명)을 먼저 썼다고 볼 수 있음

 

. 성을 쓴 기록 추정

   .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3~490)부터

   .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346~375)부터

   .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 삼국 시대의 성

   . 고구려: (), (), (), (), (), , (), (), (), (),

             , (), 명림(明臨), 을지(乙支)

   . 백제 : , , , , , , , , 국 등의 팔족과 왕, , 사마, 수미, 고이, 흑치

   . 신라 : , , 3성과 이, , , , , 설의 육부의 6성과 장,

 

. 왕실의 성인 고(), (), ()을 쓴 사람이 가장 많았음

.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는 없는 사람이 더 많았고,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신들과 유학자와

  장보고와 같이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않았음

 

□  고려시대

 

. 고려의 태조 왕건은 개국 공신들과 지방 토호세력들을 통합 관장하기 위하여 전국의 군.현 개편

   작업과  함께 성을 하사 하면서 우리나라 성씨의 체계가 확립

. 고려 초기부터 귀족 관료들은 거의 성을 쓰게 되었으나,

. 고려 문종9(1055)에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法令)을 내린 것을 보면 이때

   까지도 성을 쓰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법령으로 우리나라의 성이 보편화

   되어 일반민중이 성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음

. 때문에 문종 이후의 사람을 시조로 하는 성씨가 많아졌음

 

□  조선시대, 현대

 

. 조선초기 성은 양민에게도 보편화되었으나 노비와 천민계급 등은 조선 후기까지도 성을 쓸 수 없었음

. 그러나, 1909년 새로운 민적법(民籍法)이 시행되면서 어느 누구라도 성과 본을 가지도록 법제화가

   되면서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성을 취득하게 되었음

 

. 우리나라 성의 수

   . 1486(성종)에 편찬한 『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277,

   . 영조(21)에 이의현(李宜顯)이 편찬한 『도곡총설(陶谷叢說)』에는 298,

   . 1930년 국세조사에서는 250,

   . 1960년 국세조사에는 258,

   . 2000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286개의 성씨로 보고됨

 

 

□  오씨의 유래

 

. 오씨는 문헌에 의하면 164~210본이 있으나 16본을 제외한 나머지의 유래나 시조는 불명

. 오씨 성의 기원은 고대 중국 양자강 부근 연릉 사람인 태백이 세운 吳나라에

  부차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손자 류양이 천자로 부터 오씨 성을 하사 받고

  오 나라의 왕이 되어 이때부터 오씨가 생겼다고 함

     . 연릉(延陵: 지금의 강소성 금릉도 단도현)

 

. 우리나라 오씨의 근원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기록이 다르고, 확실한 사적 근거는 없음

 

. 우리나라 모든 오씨의 도시조는 오첨(吳瞻)

. 류양의 46세손이며 신라 지증왕 1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건너옴

    (다른 설 : 태백왕의 25세인 오기(초나라 제상) 45세손)

   . 그는 함양에서 22년간 살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감

   . 그때 두 아들 중에 둘째 아들 오응(46+1)은 그대로 함양에 남아서 살았음

. 그 후 오응의 12대손 오광우(47+12)가 다시 중국에 들어가 살았는데

. 후손 오연총(?)이 고려 문종 30년에 다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며 오씨의 중시조가 됨

. 그 후 오연총의 6세손 오수권(47+12+?+6)이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 그 아들들이 고려 고종 3 3본의 시조가 됨 

 

. 태백묘에 있는 오태백 유래의 글 (중국)

                                                                                      

紀元前 黃河 流域에서 나라를 세운 皇族으로, 泰伯의 姓씨는 姬씨며, 中國 皇帝의 18代 孫이며 周나라 太王 고공단부(古公亶父)의 長子다. 주 태왕은 아들이 3명 있었는데 長子가 泰伯이요, 次子가 仲擁, 三子가 季歷이었다. 그런데 三子 계력의 아들 昌이 총명하여 장차 聖君의 제목으로 생각한 周 태왕은 王位를 季歷과 그 아들 昌에게 물려주려는 주 태왕의 心中을 알고 泰伯은 동생 仲擁과 함께 약초를 캐러 간다는 핑계로 형만 (강소성 무석현 매촌리)으로 피하니 따른 무리가 200여명이 되었다.

 

 泰伯은 형만을 개척하고 住民을 敎化하며 德을 베풀어 원근의 백성들이 몰려와 王으로 추대하니 이 나라가 구오국(勾吳國)이요 紀元前 1200년경이다. 훗날 勾吳國은 吳나라로 改稱하였으며 國號를 따라 吳泰伯이라 하였고 在位 47년간 후사가 없어 동생 仲擁이 왕위를 繼承 하였고 이 두 분이 吳氏의 始祖가 되시며 吳 나라가 越 나라에 亡할 때까지(BC475) 25 770년간 강소성, 안휘성, 열강성 일대의 大國을 다스렸다. 여기서 吳씨의 始祖는 泰伯과 仲擁이며 아래 왕대에서 12姓의 始祖가 出現하였다고 한다.

 

 吳泰伯은 紀元前 1200년경에 구오국(勾吳國)創建하여 25 770년 의 歷史를 가진 吳나라의 創建者이며 吳氏의 創氏者 이다. 公子도 그 德을 稱頌하였고 中國에서는 곳곳에 國寶級 祠堂과 記念物을 지어 稱頌하고 있는 偉大한 人物이나 韓國의 吳氏와 連繼가 되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吳泰伯에 대한 吳氏 淵源 內容,  (글: 吳五泳) 

 

 . 오씨 (국내)                                                                     

오첨은 중국으로부터 신라 지증왕 원년(500)에 입국하여 신라 여인과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경남 함양에서 살다가 큰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씨의 숫자는 현재 30여만 명으로 추정되며 한국의 성씨 중에서 13번째지만 중국에서는 10위 안에 드는 번성이다.

해주 오씨는 원래 고려 성종 3(984) ()나라의 대학사로써 고려(高麗)에 와서 군기감(軍器監)을 지내고 해주(海州)에 정착한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하는데 나중에 오첨의 24대손 오현보(吳賢輔)를 시조로 하는 파가 생겼다. 고려 고종 3(1216)에 거란(契丹)족이 침공하였을 때 오현보(吳賢輔), 오현좌(吳賢佐), 오현필(吳賢弼) 3형제가 이를 토벌한 공으로 각기 해주(海州), 동복(同福), 그리고 보성(寶城)땅을 나라로부터 하사 받아 그 본으로 삼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3본이었던 오씨는 세월이 흐르면서 14본으로 나뉘게 되었으나 오씨의 대부분이 해주 오씨다.

  위키백과

   ,    ?  (BC700년 경)   중국 연릉(지금의 강소성)에 태백이 세운 오나라 이름에서 유래

   .    ?                       중국 류양 (부차의 손자, 천자로부터 오씨성 하사 받음))

   . 서기 500  (신라 지증왕)   오첨  (도시조, 류양의 46)

   . 서기 984  (고려 성종)      오인유                        (해주 시조)  

   . 서기 1216 (고려 고종)     오현좌 (오첨의 24)     (동복 시조)

   . 서기 2008                      “나”   (46+24+29) (중국 시조로부터 99( 2500))

                                

 

 

 

■ 오나라 오씨

                                                                                      디지털 사기열전(2004),  오귀환

 

□ 왕조의 몰락과 참극 속에서도 살아남아 한국.대만. 일본을 거쳐 전 세계로

 

삼국지 영걸 가운데 한 명으로 유명한 오()나라의 손권은 서기 230년 장군 위온과 제갈직을 시켜 갑사 1만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이주와 단주로 가게 한다. 인구가 모자라 천하통일에 결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것을 깨닫고 그런 식의 ‘사람 사냥’을 해서라도 인구를 늘리려 한 것이다. 지금의 대만인 이주까지 원정을 나서는 처절한 노력까지 기울여보지만, 결국 오나라는 그 50년 뒤인 서기 280년 압도적인 인구와 물자를 갖춘 진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 2500년 전의 오나라가 부활하다

 

오나라는 그로부터 620여년 뒤인 중국 오대십국시대에 다시 부활한다. 당나라 말기 회남절도사였던 양행밀이 서기 902년 양주를 수도로 삼아 역사상 세 번째 오나라를 세운 것이다(한나라 초기 ‘오초칠국의 난’으로 반란국가로 등장한 오나라까지 치면 역사상 네 번째임). 서기 10세기에 등장한 이 오나라는 35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존속하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끊임없이 소멸을 반복하는 ‘오나라’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새롭게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왜 양쯔강 이남의 강남에서는 2500년 전 사라진 춘추시대의 오나라가 지속적으로 민중의 마음을 뒤흔들며 되살아나곤 했던 것일까? 무엇이 유독 오나라라는 왕조의 처절한 부활을 반복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바로 이런 오래고도 뿌리 깊은 염원을 반영한 듯한 사건이 역사 속에서 벌어진다. 오나라의 국명을 모태로 하는 ‘오씨’라는 가문이 전세계에 퍼져나가 오나라의 정체성을 지금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기원전 473년 최초의 오나라가 멸망한 뒤로부터 거의 2500, 왕조는 갔어도 가문은 살아남았다.

 

오나라는 오태백이 처음으로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지방에 봉해진 이후 25대 왕 부차 때까지 이어지다가 멸망했다. 25대를 내려오는 동안 언제 정확히 오씨라는 성이 정립됐는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주류에서 벗어난 왕족들이 망명이나 투항 등으로 다른 성씨를 갖게 되는 일도 생겨났다. 결정적으로 오나라가 월나라에 멸망 당한 이후 왕족의 여러 지파를 중심으로 자신들을 오씨라는 정체성으로 일체화한 집단이 폭발적으로 많아진다. 왕조가 존속할 때는 오히려 희미하던 정체성을 멸망 뒤의 고난 속에서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강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역사를 보자.

 

“오나라 19대 왕 수몽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은 제번, 둘째는 여제, 셋째는 여말, 넷째는 계찰이었다. 계찰이 현명하고 재능이 있어서 수몽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할 수 없이 큰 아들을 옹립하면서 형제순으로 차례로 즉위토록 유언을 남겼다. 결국에는 계찰이 왕위에 오르도록 배려한 것이다. 유언에 따라 왕위는 이어졌지만, 다시 계찰 차례에 이르자 이번에도 그는 오나라 사람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족을 떠나 밭을 갈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할 수 없이 왕위는 셋째 여말에 이어 그 아들 요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오나라의 운명에 결정적인 전기가 된다. 맏아들 제번의 아들 공자 광이 자신에게 올 왕위가 요에게 잘못 갔다면서 요를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오왕에 등극한 것이다. 이 공자 광이 합려이다. 이 전격 쿠데타 당시 요의 아들인 공자 촉용과 개여는 전쟁에 나가 초나라군에 포위돼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초나라에 항복한다. 초나라에 투항한 형제는 초나라 서 땅에 봉해져 각각 촉용씨와 개여씨의 시조가 된다. 오로부터 분리된 성씨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합려의 동생 부개가 반란을 일으킨 뒤 역시 초나라로 항복해 당계씨의 시조가 된다.

 

□ 월나라의 파괴, 오나라의 멸망

 

어쨌든 오나라는 합려왕 때 크게 번성한다. 손자와 오자서의 보좌로 합려는 초나라 수도를 함락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다. 그러다가 배후에서 갑자기 습격해온 월나라 군사와 싸우던 중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저 유명한 오월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오월대전에서 초기 대승을 거둔 오왕 부차는 교만함과 간신들의 아첨에 빠져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다. 오자서와 공손경 같은 충신들을 죽인 그는 결국 월나라에 패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오나라의 멸망은 ‘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국가 지역 핏줄의 3가지 가운데 2가지의 단절을 가져왔다. 나라는 망해 월나라의 식민지가 됐다. 양쯔강의 뱃길을 중심으로 무역국가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수도 오(오늘날의 쑤저우)도 파괴됐다. 역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월나라 사람들은 오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오나라의 건축물을 철저히 파괴했다. 부차가 세운 고서대도 부서지고, 수도 오도 파괴를 면할 길이 없었다.’ 사마천은 이 파괴 이후의 양상을 ‘오나라의 폐허’(吳墟)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무너진 성벽은 과연 여기가 한때 번화하던 오나라 수도였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게 했다. 석양은 핏빛으로 물들었다‘라고 표현한 이도 있다.” 이 참극에서도 3가지 가운데 하나는 가장 확실하게 살아남았다. 핏줄, 바로 오씨라는 성씨다. 그러나 오씨라는 성이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고통은 매우 컸다.

 

“왕족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고 유랑민이 됐다. 부차의 아들인 태자 화와 그 아들도 패망 몇해 전 포로로 붙잡혀 월나라로 끌려갔다. 새로 세워진 태자 우와 고멸 등 왕자들도 월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다른 왕자 전문은 피살됐다. 또 다른 왕자인 경기와 그 가족은 송나라와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 밖에 많은 왕족들이 월나라의 박해와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오씨 대부분은 집을 떠나 월나라의 노예가 되거나 월나라 사람 밑의 예속민이 돼야 했다. 월나라 벽지로 강제 이주돼 노역을 해야 했던 사람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나라 멸망 뒤 오씨를 살아남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왕권을 둘러싸고 내부 싸움을 벌였던 왕들과 그 후손이 아니라 양위파 계찰과 그 후손이다. 역사를 다시 보자.

 

□ ()씨의 연원에 대한 세가지 설

 

“오나라가 망할 때 계찰의 장손 오복번은 노모와 처 그리고 식솔을 이끌고 도망쳐 동정호 부근으로 갔다(역사서를 보면 계찰은 이전까지는 성이 없이 계찰로 불리다가 오나라 멸망 뒤부터 ‘오계찰’로 표기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호산으로 불리는 무봉산 남쪽에까지 간 그는 월나라 사람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성과 이름을 감추고 자신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복씨’라고 성을 바꿨다. 그리고 세세손손 그곳에 은거한 채 살았다. 바깥 세상과도 절연한 채 집안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맨 처음 남매끼리 결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문중 결혼으로 가계를 이어가던 그들은, 그러나 자신들의 조상을 잊지 않았다. …그 가문은 1500 여년이나 흐른 남송 때 다시 ‘오씨’라는 성을 되찾는다.

 

계찰의 둘째아들 오정생 일파는 가장 가문이 융성해진 경우이다. 제나라로 피난한 그는 제나라 공주와 결혼해 아들을 낳은 뒤 ‘나라를 되찾는다’는 결의를 담아 아들 이름을 ‘후번’이라고 짓기도 한다. 오후번은 나중에 노나라의 상국이 되고, 그 아들 오번은 공자의 제자 안회의 제자가 된다. …” 이 계찰의 아들 다섯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씨 가운데 대종을 이루게 된다. 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왕들과 그 후손들이 투항 등으로 다른 성씨로 정착하는 등의 변화를 많이 겪은 데 반해 그와 그의 자손은 오씨의 정통으로서 가문을 가장 활발하게 흥성시킨 셈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오씨는 그 뒤 한국과 대만, 일본을 거쳐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왕조가 사라진 이후에도 성씨로 남아 존속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진()나라의 진씨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왕조 진나라가 비교적 단명했기에 그 연속성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씨의 연원에 대해선 오씨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구별 짓기는 쉽지 않다. 대략 3가지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 (?)성 연원설 2. ()성 연원설 3. 로마 연원설 영성 연원설은 진시황 진왕조와의 관련성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경우이다. 영은 원래 진시황의 성이다. 진시황의 이름이 정이었으므로 풀네임이 영정(?)으로 된다. 이 설은 사마천의 <사기> ‘진본기’(秦本記)의 기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주나라 효왕이 섬서성에 살던 목축업자 비자에게 봉읍을 주어 영씨의 제사를 계승하게 하고 이름을 진영(?)이라 했다.” 이 진영의 후손이 나중에 진왕이 된다. 그러니까 진나라 멸망 뒤 진나라 왕족의 성씨를 가지고 있던 집단이 진씨라는 성씨로 정체성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진시황의 혈족임을 정확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시조쪽은 중원의 한족보다는 주변민족일 가능성도 강력하게 시사한다.

 

□ 전쟁으로는 왕조를 지킬 수 없었다

 

희성 연원설은 진씨가 주공 단의 후예로 희성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주공 단의 큰아들 백금이 노나라 노씨의 시조가 되고, 다시 그의 지차 자식 가운데 진읍에 봉해진 자손에서 진씨의 시조가 나왔다는 것이다.

 

로마 연원설은 매우 독특하다. 한나라 초기 반초의 서역 경략 뒤 로마로부터 사신과 사람이 지속적으로 오가는 등 교류가 활성화됐으며, 서기 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로마인들이 진씨 성을 갖게 됐다는 주장을 편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서역을 비롯해 유럽쪽에서 중국을 ‘지나’(차이나, )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3가지 연원설을 가진 진씨는 어쨌든 한나라 이후 부침을 겪으며 존속 발전해오다가 점차 관중 지방과 중원에서 확장돼 강남, 서천, 요령 등지로 무대를 넓혀갔다고 한다. 그 뒤 서역적 기풍과 세계주의적 분위기가 강하던 당나라 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 받는다. 특히 안록산의 난 이후 진씨 등 진나라 후손들은 본격적으로 강남으로 진출해 두각을 나타낸다.

 

그 옛날 진나라는 조나라와 전쟁을 벌여 이긴 뒤 포로 40만명을 죽인 적이 있다. 그 뒤 이번에는 초나라 항우의 군대에 사로잡힌 진나라 병사 20만명은 초나라 멸망의 보복으로 생매장당한다. 이런 피로 피를 씻는 전쟁으로는 어느 왕조도 영원히 자신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인간이 영원히 지킬 수 없는 국가(왕조) 대신 가문으로 영원에 도전하기 시작했던 것은….

 

 □ 춘추전국시대, 지금도 살아있다

 

성씨는 역사 발전에 따라 점차 늘어났다. 오씨의 예에서 보듯 역사의 진전에 따라 새로이 지파가 생겨나고 새로운 창성이 이뤄져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사라지는 성씨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로 생겨나는 성씨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예를 보자. 서기 1100년대 무렵 북송 시대에 편찬한 <백가성>(百家姓)에는 438개 성이 수록돼 있다. 그러다가 명나라 때에 이르러 <천가성>(千家姓)에는 총 1968개 성이 실린다. 그 뒤 현대에 이르러 편찬된 <중화성씨대사전>은 중국의 56개 민족의 성이 총 11969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성씨 관련 서적인 <중화고금성씨대사전>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성씨가 총 12천개라고 추산한다.

 

왕조와의 연관성 아래 부침과 흥망을 같이해온 성씨는 오씨나 진씨 이외에도 많다. 일단 춘추전국시대 나라 이름으로 등장한 것들은 거의 모두 성씨로 진화해 생존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춘추전국시대의 주()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 등은 다 성씨로 살아남았다.

 

물론 멸망한 뒤 다시 세워져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룬 나라도 있다. 삼국지 시대를 통일한 사마의 가문 진()나라, 춘추시대 때 사라졌다가 이연 부자에 의해 건국돼 통일을 이룩한 대제국 당나라, 역시 춘추시대 때 사라졌다가 조광윤에 의해 건국돼 당나라 이후의 통일천하를 이룬 송나라 등이 그렇다. 이와 달리 이민족이 세운 나라의 이름은 아무리 통일을 이루는 성과를 올렸어도 성씨로 이어지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등이 그렇다. 또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이런 경향이 대단히 드물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고()씨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설이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 중국 고대 왕조의 역사흐름

                 (오씨의 시조를 전후한 시기) 

 

□ 중국의 고대왕조

 

. 중국의 고대왕조

   . 하()..()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 하 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함

 

. 은나라 :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 1046)

   .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되어

   .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됨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 할 수 있음

 

   . 지방 통치 조직을 완성한 우()의 자손을 왕으로 섬겼으나

   . 그 17대인 걸왕(桀王)은 전제정치로 인하여 중국 백성의 지지를 잃었음

   . 은왕조의 개조(開祖)인 탕왕(湯王:天乙)은 백성의 요망에 따라 걸왕을 쳐서 멸하고 은왕조를

     창설하였음, 이 탕왕으로부터 29대의 왕이 잇달아 중국을 통치하였음

 

   . 19세기 말에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의 은허, 즉 은나라 수도의 유적으로

     알려진 장소에서 갑골문자를 새겨 놓은 귀갑(龜甲)과 우골(牛骨)이 다량 발견되었고, 여기에

     나타나는 여러 왕의 이름과 그 세계(世系)는 사마천의《사기》에 전하는 은왕조의 계보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함

 

. 주나라

   . 은()나라 다음의 왕조이며, 이전의 하().은과 더불어 삼대(三代)라 함

   . 요().()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짐

 

   . 주왕조(周王朝)의 시조는 후직(后稷:)이며,

   . 13대 때에, 기산(岐山:陝西省 中部)에 옮겨, 국호를 주()라 하였음

   . 당시 황허강[黃河]의 하류지역에는 은왕조(殷王朝)가 번영하고 있었는데,

     주족(周族)은 그 서쪽 변두리의 제후(諸侯)의 하나였음

   . 태왕의 손자 문왕(文王:)에 이르러 서방의 패자(覇者:西伯)가 됨

   . 그 아들 무왕(武王:)은 제후의 지지를 받아,

     당시 민심을 잃고 있던 은의 주왕(紂王)을 멸할 싸움을 일으켰음

     이 출병(出兵)을 하지 말도록 간()한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이야기는 유명함

   . 무왕은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갈음하여 주왕조를 창시하였음

 

   . 무왕부터 소왕(昭王).목왕(穆王)에 이르는 동안이 주왕조의 전성기

   . BC 9세기부터 안에서는 제후의 이반(離反), 밖에서는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져서 주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됨

 

   . 11대 선왕(宣王:)은 융적을 격퇴하여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 그의 아들 유왕(幽王)은 견융(犬戎)의 침입을 초래하여 살해됨

 

  . 그의 아들 평왕(平王)은 성주(成周:河南省 洛陽 부근)로 도읍을 옮기고 주왕조를 부흥시켰음

   . 이 평왕의 동천(東遷:BC 771)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며,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러 구별함

 

   . 동주시대에 들어서서 약 반세기가 지나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됨(BC 722)

   . 춘추시대에는 제후 등의 이반으로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정하였고, 열국 간에 전쟁과 회맹(會盟)

     이 끊이지 않았으며, ()의 환공(桓公), ()의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가 회맹을 주재

     (主宰)하여, 중원(中原)의 질서를 유지하였음

 

□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 BC 722 ~ 481)

 

.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이 이름이 유래

   . <춘추>는 공자가 저술한 책으로, 노나라의 연대기가 중심에 된 역사서

. 중국 주나라가 동쪽으로 도읍을 옮긴 BC770년부터 BC403년까지 약 360년간의 전란시대

. 초기 춘추시대에는 200개국에서, 전국시대에는 7개국이 됨

. 춘추오패(春秋五覇)로는 제() 환공, () 문공, () 장왕, () 합려, () 구천

. 전국시대 분기점 : BC 453년, 진나라가 한.. 3국으로 분리

                             ~ BC 221년, 진시황의 통일까지

 

. BC 770, 주나라 평왕이 도읍을 낙양으로 옮기면서 동주 시대가 전개되는데,

   .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뉨

   . 사마천의 사기는 춘추전국시대를 중심으로 서술됨

 

. 춘추시대는 쇠락해가는 주 황실을 대신하여 천하를 호령하는 군웅들이 쟁패를 다툰 시대

   . 주나라 초기에 천 여 개에 달하던 소도시국가들이

   .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백 여 나라로 정비되었음

   .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나라는 14개국 

   . 진秦,조趙, 진晉,제齊, 초楚,노魯, 위魏,연燕, 조曹,송宋, 진陳,채蔡, 정鄭, 오吳, 월越

   . 이 시기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중원을 넘봐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대의명분으로 제후간

     동맹을 주동하였는데, 이 동맹의 수장을 패자覇者라 하였으며 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제후를 춘추오패라 함. 제 환공, 진 문공, 초 장왕, 송 양공, 진 목공 이 그들인데,

     송 양공과 진 목공 대신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을 넣기도 함

 

   

 

 □  춘추시대의 오나라 (춘추시대 BC?  ~ BC473년 멸망)

 

   . 중국 서주시대(西周時代)부터 전국시대 초기까지 동남지역에 세워졌던 제후국 가운데 하나.

     통치자의 성은 희()이고 시조는 주나라 문왕(文王)의 큰아버지인 태백(太伯)과 중옹(仲雍).

   . 오()나라는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를 도읍으로 정하고, 지금의 장쑤·상하이[上海]

     대부분과 안후이[安徽]·저장[浙江]의 일부분을 차지했음

   . 오는 원래 초()나라의 속국이었으나, ()이 초를 견제하기 위해 오를 원조했기 대문에 강대국이

     되었다고 함

   . 천자와 동성이나, 다른 제후국들은 오랑캐 나라라고 부를 정도로 낮추어 여김

   . 춘추오패 중 하나인 합려왕을 배출했으며

   . 그의 아들인 부차(夫蹉)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이웃 월나라에게 멸망

 

   . 6대 왕 합려의 시대에 가장 강성

   . 명신, 손무와 오자서를 데리고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초나라를 멸망직전까지 몰고 갔음

   . 신흥의 월나라를 침범하여 합려는 중상을 입고 아들인 부차에게 복수를 맹세하게 하고,

     후치우에 묻혀 최후를 마침

   . 다시 힘을 키운 부차는 오자서의 보좌를 받아, 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고

     월왕 구천은 패전의 멍에를 지고, 속국으로 예를 다하여,

     당시 최고의 미인인 서시 등의 예물을 받치며 사죄

 

   . 오자서는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적극 주장하지만, 경계심이 풀어진 부차는 그를 외면하고 오히려

     오자서를 자살하도록 만듦

 

   . 결국 범려의 지혜에 말려든 오나라는 기원전 473년 월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오왕 부차는 오자서를

      죽인 것을 후회하면서 자살을 하게 됨

             . 고어 유래: 오월동주, 와신상담, 침어 (서시)

 

 

□  삼국시대의 오 나라 (서기 222 ~ 280)

                                                                                                                           (위키백과)

()는 후한이 멸망한 후, 삼국 중의 하나로 친자 3대에 걸쳐 구축되었다.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재를 갖추었으며 적극적으로 군사침공을 하지는 않고 방어에 충실하였으며, 상황에 따라 촉한, 위나라와 화평을 맺는 유연한 외교술을 펼쳤음

 

..오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건국되었으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가장 나중에 멸망하였다. 손견과 손책의 맹활약으로 강동에 기반을 잡았고 수성의 달인인 손권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마지막 황제인 손호가 진나라의 사마염에게 항복함으로써 삼국 시대는 그 끝을 맺음

 

. 서기 156년 오시조(吳始祖) 손견(孫堅) 출생 무열황제(武烈皇帝)

. 서기 229년 오나라 제1대 오태조(吳太祖) 손권(孫權) 황제를 칭함

 

. 서기

   . 156년 손견 태어남

   . 184년 손견, 황건적을 토벌함

   . 190년 손견,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

   . 192년 손견, 유표 공격 중 전사. 아들 손책이 뒤를 이음

   . 194년 손책, 원술 밑에 몸을 의지함

   . 197년 손책, 원술이 황제를 칭하자 절교

   . 200년 손책, 자객의 습격을 받아 죽음. 동생 손권이 뒤를 이음

   . 208년 손권, 유비와 합심해 적벽에서 조조를 격파

   . 209년 유비가 손권의 여동생을 아내로 삼음

   . 213년 조조와 유수에서 전투를 벌임

   . 215년 합비에서 장료의 기습을 받아 대패

   . 217년 손권, 조조와 화전함

   . 219년 손권,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평정

   . 221년 손권, 오왕으로 봉해짐

   . 222년 촉한과 국교 수복

   . 223년 위나라와 국교 단절

   . 228년 육손, 석정에서 조휴를 격파

   . 229년 손권, 황제를 칭함

   . 241년 태자 손등이 죽음. 손화를 태자로 책봉

   . 250년 태자 손화를 폐하고, 손량을 태자로 책봉

   . 252년 손권 서거. 손량 즉위

   . 257년 제갈탄의 반란에 원군을 보내나, 진압됨

   . 258년 손량 폐위. 손휴 즉위

   . 264년 손휴 서거. 손호 즉위

   . 280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망 

 

□  소설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 관하여

                                                                                                    (위키백과 중에서 발췌)

삼국지(三國志)”는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쓴 중국 삼국시대의 정사(正史)

후한의 운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89년부터 진나라의 사마염이 천하를 통일하는 280년까지의 기록임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중국의 대표적 고전 소설로,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책

진수의 삼국지와 배송지의 삼국지주(三國志註)”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쓰여진 작품

최초 판본은 명 가정 1(1522)에 판각한 “가정본(嘉靖本)”이며,

이 판본은 나관중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으로도 불림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라 하여, 모두 24 240()이었음

 

이야기는 184(후한 영제 중평(中平) 원년)으로부터 280(진 무제 태강(泰康) 원년)까지

이른바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삼국지연의의 총 등장인물의 수는 1,233명임

삼국지연의수호전, 금병매, 홍루몽과 함께 중국 4대 기서로 꼽힘

 

. 삼국지 시대의 인구

  중국 역사상 비극의 시대 중의 하나로, 중국 인구사에 따르면,

  한나라 중기 5,600만명에서 한나라 말 극심한 혼란기에 3,000만명으로 줄었으며,

  삼국지 시대에는 1,600만명으로 인구가 급감한, 전란으로 인한 비극의 시기였음

           (维基百科   "중국인구사")

 

□ 중국역사 개요

 

중국의 역사

신화와 고대

선사 시대

신화·삼황오제

   BC2000? ~  BC1600?

   BC1600? ~  BC1046

   BC1122  ~  BC 256

  서주

동주

    춘추 시대

    전국 시대

제국의 시대

         BC221 ~   BC206

         BC206 ~   AC220

   전한

          8 ~  23

   후한

삼국 시대   220 ~ 280

  , ,

         265 ~  420

   서진

   동진

   오호 십육국 시대 304 ~ 439

남북조 시대  420 ~  589

          581 ~ 619

          618  ~ 907
무주         690 ~ 705

오대십국 시대
   907 ~  960


907 ~  1125

 

  960 ~  1279

   북송

   남송

서하 1038 ~  1227

   1115 ~  1234

 

1271 ~  1368

1368 ~  1644

1644 ~ 1912

현대의 중국

중화민국 1911 ~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1949 ~
현재

중화민국 (타이완)

 

 

 

 

 □  중국의 인구 역사

  (자료: 基百科, 中人口史)
  중국 추정인구            세계 추정인구
   (년도)   (백만명)      (년도)    (백만명)
        BC1000   50.0
        BC500   100.0
BC230 춘추전국 후기    38.0   BC400   162.0
BC210 진시황 37년    40.0   BC200   190.5
BC202 前漢 태조원년    16.5        
BC129 前漢     36.0        
BC91 前漢     32.0   BC25 로마제국  (56.8)
  92 前漢     59.6       1   272.2
             
  25 後漢, 광무제     28.0        
  75 後漢, 명제    34.1        
  140 後漢, 순제    49.2     117 로마제국  (88.0)
    263 後漢, 영제    55.0     200   223.0
             
  282 晋(진), 무제    23.8        
  318 晋(진)    12.4        
  370 16국 춘추    18.0     395 동로마제국  (34.0)
  421 南朝, 송무제    20.0        
  440 南朝, 송문제    23.7        
  581 北朝(북조)    18.0        
             
  581 隋(수), 문제    18.0        
  628 唐(당), 태종    19.0        
  705 唐(당), 중종    37.1        
  740 唐(당), 현종    48.1        
  859 唐(당), 선종    33.3        
  907 唐(당), 말엽    27.0        
             
  1041 北宋(북송),인종   100.0        
  1110 北宋, 휘종   125.0        
  1274 몽고 (8.9)        
             
  1403 元(원), 태종     66.6        
  1640 元(원), 사종    140.0        
  1644 元(원), 사종    100.0        
             
  1651 清(청), 세조    81.7        
  1685 清(청), 성조   101.7        
  1722 清(청), 성조   150.0        
  1790 清(청), 고종   301.5        
  1851 清(청), 문종   436.1     1830   1,000.0
  1901 清(청), 덕종   450.0        
             
  1939 중화민국   517.6     1930   2,000.0
  1953     601.9        
  1964     694.6     1960   3,000.0
  1982   1,000.8     1974   4,000.0
  1989   1,133.7     1988   5,000.0
  2000   1,242.6     2000   6,000.0
  2005   1,306.3        
  2009.7.   1,331.6     2009.5.   6,783.8

 

 

 

 

  한반도의 인구추정

 

□  고구려 초기((전한(前漢) 시대, 기원전) 인근 국가별 인구 통계

                                                               (자료: 1910년 한일합방후 조선총독부, “조선의 인구현상”)

  .  낙랑군 : (전성시 25 ) 63천호, 인구 41만명

  .  요동군 : ( 18 ) 56천호, 인구 27만명

  .  현토군 : ( 3 ) 45천호, 인구 22만명

    (합 계) : (46 ) 164천호, 인구 90만명  

  . 낙랑, 현토, 요동은 고구려의 근간지역이었으며, 인구가 약 100만명에 달함

 

□  A.D 660 - 800 시대

 

 . 신라 경()중에 179천호, 인구로 환산 약90만명 (신라의 전성시대(삼국유사))

 . 신라의 경중(京中)인구(90) + 통일전 신라 영토내의 인구 (200만명)

 . 백제의 멸망시 76만호, 인구로 환산 약350만명 (신당서)

 . 고구려 멸망시 절반 정도가 신라로 귀속됐다면 300만호, 인구로 약150만명

 . 통일 신라의 인구는 약800만명 (백제(350) + 고구려(150) + 신라(300))

 

 . 통일 신라 인구의 다른 방식 계산

   . 통일 신라는 9 , 5 소경, 117 , 333 개 현

   . 현 인구 약 500만명 (333 *3천호(최소) *5 ) + 90만명 = 590만명  

 . 신라 전성시대 최소한 700~800만명 정도 추산됨

 

. 조선시대 인구 현황 (총독부 발행)

  . 태조 4(1395) : 153천호, 32.2( 5부 제외되어 있음)

  . 현종 원년(1660) : 758천호,  248만명

  . 숙종28 (1702) : 1342천호, 592.2만명

  . 영조26 (1750) : 1782천호, 722.9만명

  . 정조13 (1789) : 1753천호, 730.3만명

  . 순종 7 (1807) : 1765천호, 756.1만명

  . 광무 8 (1904) : 142만호,    592.9만명 (150만명 감소 이유?)

 

  . 신라 패망후 900년이 지난 조선 말기 순종 7(A.D 1807)의 인구 756만명과 비슷함

 

.  세종실록 지리지로 본 호구 (경상도 지리지로 본 인구)

  . 유수부 1 : 경주       . 대도호부 1 : 안동       . 3 : 상주,진주,성주

  . 도호부 6 : 금해,녕해,순흥,창원,밀양,선선  

  . 15 : 량산,합천,울산,예천,영천(榮川),영천,청도,함안,초계,흥해,함양,금산,대구,곤남,청송

  . 40 : (생략)

  . 도내 41천호, 192천명, 1호당 인구는 평균 4.64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라의 천년 왕도 였으며, 조선시절에도 유수부 였던 경주의 인구 수임

     . 서기 700 - 800년 사이의 신라 전성기 시절에 백만명을 육박했던 경주의 인구가

       600 여년이 지난후 1,500 여호에 12천명에 불과 함

     . 고려 시대 오백년을 거쳐 이씨 조선이 개국한 후의 인구가 몇십만 명에 불과?

 

. 중국 사서에 따르면 고구려가 멸망한 당시의 인구가 총 69만 호, 백제는 총 76만 호

  . 삼국의 인구는 신라까지 합해서 약 200만 호에 1000만 여명

  . 중국 측이 자신들의 전공을 과장하기 위해 고구려, 백제의 인구를 부풀려서 적었을 가능

    성도 배재할 수 없음

  . 삼국시대의 농업생산력을 감안해봐도 삼국의 인구가 1000만 명은 불가능

    . 삼국의 농업생산력은 씨앗 하나 당 약 10 개의 알을 맺는 수준

    . 농업생산량이 그 이상으로 되려면 모내기 농법의 도입이나, 비료사용 확장 등이 필요

    . 이 신농법들은 송 나라 시대인 서기 10세기 에 들어서야 등장한 농법

    .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야 도입됬음

 

□  현재 삼국의 인구에 대한 정설은

 

  . 삼국시대:  고구려(300), 신라(100), 백제(100만명)

  . 통일신라:  200~250만명

  . 고려 전기:  250~300만명

  , 고려 말기:  40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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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복 오씨  (0) 2018.0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