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8.사랑 (愛情)

사랑의 관점

오갑록 2013. 10. 29. 16:53

사랑스런 ......

■  사랑의 관점

 

 

누군가를 위하여 내가 줄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재물을 기부하며, 재능과 힘으로서 봉사도 하고,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과 애국을 하고 인류애를 키우며, 마음을 주면서 부부 부모형제 자식 사이에 서로의 우애를 다지기도 하고, 정신까지도 바치는 심정으로 신과 혼령을 모시기도 하며, 열심으로 나 자신을 위한 자아실현에의 정진도 꼽을 수 있다.

 

훗날의 이득이나 보상을 위하는 마음으로 하는 나눔도 사랑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까아니면, 낚시줄에 꿰어 달린 “미끼, 떡밥” 정도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름 앞세워 가며 행사하는 생색내기의 불우이웃돕기며 자선행사, 명예나 한 표를 염두에 둔 그럴듯한 명분의 봉사활동도 눈에 설다. 구원을 받고 영생을 바라보며 기꺼이 하는 봉사나 헌금의 모양새도 그렇고, 늙어지면 돌봐주고, 죽더라도 내 영혼을 위해 제사 지내 줄 것을 믿으며 주는 자식사랑도, 한 편으로는 생명보험이나, 영혼담보부 보험 불입 정도의 성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적어도 내가 주는 사랑 만큼 나 또한 사랑 받기 바라면서 나누는 이성간의 사랑도 “미끼”는 아닐까? . 차라리 사랑 보험이라고 하는 편은 어떨까?

 

지금껏 내가 하여 왔다고 생각해 본 사랑이라고는, 고작 해봐야 이득이나 챙기고 보상을 기대하며 투자한 속 좁은 투자가나 장사치 정도의 행각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물고기도 잡아보지 못한 채 날려버린 떡밥들이 전부이다. 악취 나며 물이나 오염시킨 오물들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나로서는 생각 할수록 부끄러운 말이기도 하다. 밤하늘 반짝이는 먼 별빛과 같이 멀고도 싸늘하게 나에게 다가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이 아름답다 라기 보다는 차라리 무거운 중압감으로서 느껴 오곤 한다. 자아를 위한 욕망과 타자를 위한 나눔의 사이에서 우리의 사랑은 늘 방황하게 된다. 그 함수에 대한 공식이 따로 있을 수 없고, 언제나 주관적인 답으로서 맞게 되는 것이 우리의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인지 따지기에 앞서, 자아와 자아실현을 위한 욕망의 본질이 어떤지 생각해 보고, 이들로부터 벗어난 무아의 경지를 알아 보자.

 

□  자아 (自我)

 

“나”라고 알고 있고, 지각을 통해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인간성격의 일부분을 자아라고 한다. 기억하고 평가하며 계획하는 등 주변의 물리적, 사회적 세계에 반응하면서 그 속에서 행동하는 부분이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행위 및 기대와 상상 속에 나타나는 미래의 행위와 관련된 개인적인 기준을 제공함으로써 행동에 지속성과 항상성을 부여한다. 자아는 성격이나 신체와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본능과 욕망에 의해 살고 있는 경험적인 자아를 의미하며, 도덕적 자신(양심)이나, 신적(神的)인 인간의 본질로서 여기는 학자도 있다.    (사전인용)

 

. 자아의 실현 (自我實現 self-realization)

자아의 실현은 자아의 본질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로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재능.능력.가능성을 충분히 살려서 개발하고, 자기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를 지향하여 현실화 시키는 일을 말하며 자기실현(自己實現) 이라고도 한다. 기본적 동인(動因)으로서의 생명유지, 굶주림이나 고통으로부터의 회피 이외에, 끊임없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려는 기본적 근원적인 충동, 또는 동인에 바탕을 둔다.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과 애정에 대한 욕구, 자존(自尊)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을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보고, 하위 욕구가 충족됨으로써 자아실현 욕구가 발현된다고도 한다.   (사전인용)

 

. 무아(無我)

불교에서의 무아의 의미는. “나”라고 하는 것들 (六根, 四大, 五取蘊)은 나가 아니고(非我), 나의 것이 아니다 (非我所). 그런 곳에 상일(常一), 주재성(主宰性)을 띤 나의 실체는 없다 (無我).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그런 것들을 나의 실체(實體)로 집착하고, 그런 아집(我執)으로 말미암아 대립, 분열 등의 괴로운 문제를 발생시키고, 덧없이 자기파멸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는 무상하고 일체는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일체는 무아 라고 말한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작업  이라고 보아야 한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 만이 나타날 것이다.

                      . 六根 (眼.耳.鼻.舌.身.意), 四大 (地.水.火.風), 五取蘊 (色.受.想.行.識)

 

. 무아경 (無我境)  

정신이 한곳에 온통 쏠려 스스로를 잊고 있는 경지를 무아경(無我境) 또는 무아지경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디서 이 무아경을 경험 하는가? 세속적으로 말할 때는 어느 일에 열중인 정경들이 생각나게 된다.

 

   연주에 몰입하는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첼리스트,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모습이 먼저 생각나고, 연극, 화가 등의 예술행위나, 독서나, 오락, 낚시에 흠뻑 빠진 이들의 모습도 생각나며, 무술 경합 중인 선수나, 마라톤 주자 등의 경주모습에서도 읽어 진다. 열심으로 일하고 탐구하고 노력하는 일상의 모습에서도 엿 볼 수 있으며, 득도를 위해 참선 중인 승려나 기도하는 성직자들의 화폭에 담긴 모습들도 연상 해 보게 된다.

 

이런 장면으로부터 무아경을 연상 할 수는 있지만, 무아에 이르는 길에 닿을 수 있으리라고는 쉽게 여기지 못한다. 자아를 인식하고, 자아를 실현코자 애쓰는 이들이야말로 건강한 사회의 참모습이기도 하기에 그 욕구 충족을 위한 갈망이 무아경과는 거리가 멀다거나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

 

□  사랑 (愛, Love)

 

“자아의 실현”을 욕심.욕망.욕구를 실현 하는 것, 즉 나에게 좋은 것,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이란, 그러한 자아의 실현과 상치되는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즉, 나에게 좋은 것이지만 남에게 나누어 주면서 선을 베풀고, 궁극적으로는 무아지경에까지도 이르는 것이 사랑이니 말이다.

 

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 주었을 때, 내가 비로소 무아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면, 재물.명성.몸.마음의 모든 것(불교: 육근, 4대, 오온)을 나누며 베푸는 것이 사랑이요, 그러한 사랑의 궁극적인 종착지가 무아경에 다다름이 곧 순리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런데 이것을 누구에게 나누며 사랑을 베풀 것인가? 그 대상에 따라 사랑을 세분해 볼 수 있다. 남녀간 이성의 상대와 나누는 사랑, 부모형제 처자식 가족간에 나누는 사랑, 이웃이나 국가와 민족에게 나누는 사랑, 신이나 혼령, 조상을 섬기며 받드는 사랑, 자아실현이라고 하는 자신을 위한 사랑.

 

우리는 남녀간 이성의 사랑을 무엇보다 우선하여 연상하게 된다. 이 때의 사랑 개념이란 앞서 언급된 의미들이 모두 녹아있으며, 그 궁극적인 사랑의 종말이란 무아경에까지 이르는 자기 희생이라는 이야기로 까지도 귀착 된다. 몸과 마음 정신까지 조건 없이 그리고 아낌 없이 전부 줄 수 있을 때, 그 곳에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여긴다.

 

내가 베푼 만큼 나를 사랑하여 주지 않는다며 배신감을 느낄 때는, 이미 그 자체로 사랑을 주제한 장사꾼으로 전락했고, 사랑이라는 한 낚시꾼으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내가 준 만큼의 사랑이란 투자원금을 잠식했노라고 분노 하는 격이며, 내가 던진 사랑의 미끼만 똑 따 먹고 달아난 물고기에 대고 투정하는 격이다.

 

그렇다면 나눔의 종점은 어디일까? 무아지경이라고 한다면, 그 의미는 심오해 진다. 여하튼, 사랑이 잠시 머무는 과정일지 모르지만 섹스는 한 순간동안 “내”가 없는 무아지경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인도의 철학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말한다. 사랑의 결실로 잠시의 무아경을 경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중요한 경험이라는 것이다.

 

. 가진 것의 한계와 사랑의 분배

자아로서 인식되는 개개인의 능력은 항상 제한적이다. 재화도, 건강도, 재능도, 마음도, 모두가 한계가 있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한정된 이것을 어디로 어떻게 사랑의 요소로서 나누고 분배할 것인가? 이는 우리 삶의 새로운 의문이자 과제로서 종종 등장하곤 한다.

 

사랑하는 이성에게 몽땅 쏟아 넣으며 무아경만 쫓을 수도 있으며, 자아실현을 통한 자기사랑 또한 그 우선에서 빼 놓을 수도 없다. 나누고픈 나눔의 대상은 그 외에도 많기만 하다. 가족, 이웃, 벗, 조국 뿐만 아니라 신이나 형이상학적 학문에 이르기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좋다고 느끼며 마음에 닿는 것에 사랑을 나누는 것이 본능에 충실한 것은 되겠지만, 옳음(Right)을 따르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절제하고 억제하며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도록 애 쓰는 것도 건강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마음은 하늘만큼 넓되 돈이 없어, 못다한 나눔과 부족한 사랑의 표현에 아쉬워하는 가족사랑의 모습들은 우리 주변에 흔하다. 반면에 풍족한 재산이 쌓인 편이기는 하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한 욕심으로 고갈된 마음이 나눔에 장애가 되고 작은 사랑의 흔적마저 말라버린 우리의 이웃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몸(건강)과 세월 또한 사랑을 한정하는 요소가 된다. 나이 들고, 때를 놓친 후에, 마음을 열고 싶어도 몸(건강)이 따르지 못하고 못다한 나눔에의 아쉬움으로 한탄하는 이웃도 있다. 저지른 불효에의 때 늦은 후회며, 신이나 조국, 동지에 대한 저버린 믿음에의 후회도 인간이기에 한정된 시간의 요소가 나눔에 장애가 되는 경우이다.

 

대체 사랑이 무엇이고, 그 사랑의 감정은 내게 어떻게 뿌리잡고 있는지, 자신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져 본다.

 

   2011.4.25. (월)

   오갑록

 

 

 

 

  □   사 랑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기에

    언제나 새로우며

 

    최상의 호기심으로 배움에 임하지만

    결코 지식을 쌓지 않으며

 

    무엇이 되려고 한 적이 없기에

    없음이라고 불리며

 

    끝이 없이 깊고 닿지 않는 곳이 없으며

    앎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있기에

    모름이라고 불리며

 

    그의 힘은 무한하나 한없이 부드러우며

 

    보지 않는 구석이 없고

    듣지 않는 소리가 없으며

 

    그이 덕은 높고도 크나

    겸손은 한없이 낮으며

 

    우리의 사고가 끝나는 곳

    단어의 의미가 끝나는 곳에서

 

    어쩌면 만날 수도 있는

    그것은 실체로서의 사랑

 

 

 

□  사랑과 외로움에 대하여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테마 에세이

 

                                                                                                              (컨텐츠 소개 글 중에서) 

사랑이라 불리는 그 이상한 것은 무엇일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 빈틈없고 주의 깊게 연구한다. 그리고 단언해 말한다. ‘사랑이 없으면, 그대는 죽은 사람’이라고.

 

크리슈나무르티는 절대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외로움, 집착, 고독, 쾌락, 자기만족과 같이 사랑이 아닌 것을 통해서 사랑을 말할 뿐이다.

대체 사랑이라 불리는 그 이상한 것은 무엇일까?

크리슈나무르티는 보통 우리가 말하는 사랑에는 섹스, 시기, 외로움, 집착, 우정, 수많은 쾌락과 그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이 뒤얽혀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마음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을 알고 외로움을 알려거든 먼저 마음이라는 사고의 방식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라는 사람이 무언가를 원하고 소망하고 간절히 바랄 때, 그 나의 욕구는 나의 마음을 분명한 형태로 나타낸다. 즉 ‘나는 부자가 되고 싶어’라고 했을 때,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한 패턴을 만들고 나의 생각은 그것에 사로잡혀 버린다. 그러자 나는 그 관점 밖에서는 생각할 수 없고 그것을 넘어 설 수도 없다. 나의 마음은 생각의 패턴 안에서만 구체화되고 완고해지며 무뎌지고, 결국 욕망이 만든 미로에 갇히고 만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되는 행위의 패턴을 만들고 자동차와 외투를 소유하듯이, 사람이거나 물건이거나 그를 소유하는 데서 오는 만족감을 사랑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그, 혹은 그녀가 자신의 곁에 없거나 멀리 떠났을 때만 상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하지만 “그녀는 내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더 이상 그녀를 생각하거나 그리워하지 않는다. 마치 그대가 이미 자신의 소유가 돼 버린 자동차나 가구를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따라서 그대가 어떤 이에게 반해서 그 사람 곁에 있고자 하고, 그를 소유하고자 하면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외로움이나 공허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자꾸 뭔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걸까? 바로 우리 삶의 실제가 외로움, 공허함, 결핍됨과 같은 내적 빈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란 아무리 활동적으로 움직이고, 책을 쓰고, 영화를 보러 가고, 놀고, 사랑하고, 회사에 출근해도 언제나 허무하고 지루하고 판에 박힌 일뿐이다.

 

요컨대 우리는 자신의 존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엄청난 공허함과 욕구불만을 채우려고 바쁘게 움직인다. 그 공허함을 체면이나 돈, 사회적 지위나 독서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따위로 채우려 하기도 하고, 라디오를 듣거나 시끄럽게 수다 떨고 남 얘기하면서 잊으려 하기도 한다. 또 내 재산,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이들과 같이 물건이나 사람에 이름을 붙여 주고 독점적으로 소유하고자 한다.

 

우리가 섹스에 몰두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섹스라는 쾌락은 우리 삶의 원초적인 충동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절대적인 자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섹스에 몰입하는 순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음으로써 절대적인 자유에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섹스라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에 대한 생각이다. 마치, 음식을 먹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먹는 것 외에는 달리 생각할 게 없어서 하루 종일 먹을 것만 생각한다면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행위들은 오히려 고립감만 더할 뿐이며, 고립 속에서는 아무도 살 수 없으므로 갈등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제,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우리가 생각해낼 수 있는 도피의 수준은 모두 같다. 그 어떤 사회활동이 든,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든, 신을 찾아 예배 드리고 의식을 거행하기 든 뭐든 말이다.

 

문제는 모순된 우리의 마음과 삶이다

이처럼 그대는 사랑이라는 말로 공허함을 감추고 자신과 자신의 부족 함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랑이 없다. 오히려 더한 공허와 좌절, 해법 없는 문제만 알게 될 뿐이다. 외로움을 직시하지 못하고 계속 도망치기만 한다면 언제까지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없다.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어떤 형태로든 도피하지 않고 외로움을 이해하며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외로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랑만이 유일한 혁명이다. 사랑은 이론도 관념도 아니다. 사랑은 감상도 아니고 낭만적인 정취도 아니며 그 무엇에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마음에 속하지 않으며 마음이 정말로 고요할 때만, 마음이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묻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 않을 때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사랑은 오직 자기에 대한 생각이 없을 때에만 존재하고 또 자기인식을 통해 존재하는 자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알면 이해하게 되고 마음의 모든 작용이 완전히 드러나고 이해되면 그때 그대는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사랑은 감각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사랑은 뭔가를 실현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아무런 결과도 없는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그냥 존재하는 상태이며, 그 상태에서는 불안해 하고 소유하려는 ‘나’가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가, ‘나’가 활동하는 한 사랑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없다. 그 때문에 ‘나’가 어떤 것인가를 인식하는 핵심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  Jiddu Krishnamurti

 

1895년 인도 태생. 1909년에 신지학회의 계승자로 지목 받아 영국에서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았고, 후에 별의 교단을 이끌었으나. 1929년 교단을 해체함. 전 세계를 돌며 60년 동안 독자적인 강연, 집필, 교육활동을 함.

  주요저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자기로부터의 혁명”,  “자유인이 되기 위하여”

 

 

 

 

■  사랑이란,,

 

 

국어사전의 단어 풀이에는 사랑을 세가지 의미로 구분하여 설명되고 있다.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부모나 스승, 또는 신(神)이나 윗사람이 자식이나 제자, 또는 인간이나 아랫사람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남을 돕고 이해하려는 마음.

 

“사랑”은 타인 또는 특정 대상에 대해 품는 애틋한 마음으로 인간의 기본적 감정의 하나이다. 특히 문학· 도덕· 철학· 종교 등 인류의 지성사를 통틀어 가장 근본적인 관념으로 취급되어 왔다.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인(仁)· 자비(慈悲) 등의 사상의 핵심은 결국 ‘사랑’으로 집약될 수 있다. 공자의 ‘효도는 인의 근본’이라는 말처럼 인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사람을 불쌍히, 가련히 여기는 동정심에서 사랑이 생긴다는 것이다.

 

. 생물학에서의 사랑

생물학은 대체로 사랑을 공복이나 갈증과 같은 동물적 욕구의 일종으로 본다. 인류학자 헬렌 피셔는 사랑을 크게 정념(lust)과 연심(attraction) 및 애정(attachment)의 세 단계로 나누는데, 각 단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정념은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로 이끌고, 연심은 사람들이 연애 관계에 자신들의 노력을 집중시키도록 하며, 애정을 통해 아기가 태어나 자라는 동안 배우자와의 관계를 지속하게 된다고 한다. 본능에 가깝지만 동물도 자기의 자식들 번식시키고 사랑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정념은 초기에 사람들을 이성관계로 이끄는 감정으로, 에스트로겐 등의 화학물질 분비량의 증가와 관계가 있다. 이 효과는 대체로 몇 주에서 몇 달 이내에 끝난다. 그 다음 단계인 연심은 연애의 대상을 특정한 개인으로 집중시키는 감정이다. 사람은 사랑에 빠질 때 뇌에서 페로몬 등의 화학물질이 분비되어 쾌락중추를 자극하고, 이로 인해 심박수의 증가와 식욕과 수면욕의 감퇴 및 강한 흥분 상태 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상태가 대체로 1.5 ~ 3년 가량 지속된다.

 

. 에로스. 아가페. 필리아

그리스어로 사랑은 에로스(eros)· 아가페(agape)· 필리아(philla)로 표현된다. 에로스는 정애(情愛)에 뿌리를 둔 정열적인 사랑이며, 아가페적인 사랑은 신과 인간 사이의 교제 속에서 탄생한다. 필리아의 사랑은 독립된 이성간의 우애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것을 바라는 사람”, 또는 “자기와 함께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듯 자기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이며, 필리아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에 귀착한다.

이렇듯 이기적인 사랑으로 영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 어리석은 사람, 악인까지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리아의 사랑이 아가페에까지 고양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신이 아닌 한 인류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불가능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자신한다면 위선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결코 위선에 빠지지 않는 사랑은 자기애적인 에로스뿐이며 필리아는 에로스적 요소를 잃는 정도에 따라 위선적인 사랑에 빠지기 쉽게 된다. 이렇게 해서 필리아적 사랑은 아가페와 에로스의 양 극단을 오가게 된다.  (사전인용)

 

 

□  사랑의 유형

 

                                                                                                  (이즈데이 글 중에서, 부분발췌)

. 열정적 사랑 (eros);  강한 정서적 감정이 특징

신체적 매력에 이끌리며 강력하고 육체적인 자극을 필요로 하는 관계를 원하므로 자신의 이상형을 잘 알고 그런 상대를 만나면 첫 눈에 반해버린다. 사랑을 지나치게 갈망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고, 이상적 연인들이 만나 함께 사는 것이 연애와 결혼의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몰두하기를 원하지만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경쟁자의 존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유희적 사랑 (ludus);  사랑에 빠지거나 헌신할 의사가 없고 정서적으로 통제된 관계를 맺음

"놀이, 게임"을 뜻하는 라틴어. 이상형이 없고, 한 사람을 사랑하기를 거부한다.

사랑을 일종의 게임으로 여긴. 한 상대에서 다른 상대로 떠나는데 손쉬우며, 상대에게도 역시 허용적이고 여러 상대를 동시에 사랑하기도 한다. 사랑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몫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 그저 다양한 이성과의 만남을 즐기는 것일 뿐이며 감상적인 깊이도 없다. 일상적인 사랑관계에서 보다는 다소 놀이적인 애정관계에서 볼 수 있는 예이다.

 

. 친구 같은 사랑 (storge);  많은 시간과 활동을 공유하는 특별한 우정이 사랑이라고 여김

형제, 자매, 친구 사이에 서서히 무르익는 사랑. 천천히 진행되는 만큼 열기도 어리석음도 없다.

서로 아주 편한 관계로써 뜨거운 사랑보다 우정과 가정이라는 큰 목표가 소중하다.

 

상대에 대한 지나친 감정 표현은 삼가고 공유할 수 있는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더 선호하며, 열정보다는 친구로서 알게 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상호 간의 사랑은 우정과 사랑이라는 상위목표의 일부로 여긴다. 서서히 발전해 가는 정에 근거한 지속적이고 진화적인 사랑의 유형이다.

 

. 소유적인 사랑 (mania);  한 사람에게 완전히 사로잡히며 질투와 소유욕이 강함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욕구가 있다. 사랑에 대한 필요를 느끼면서도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힘겹고 고통스럽다는 생각에 사랑하기를 두려워한다. 극도의 질투를 보이며 상대에 대한 더 많은 애정과 헌신을 요구하고, 관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평온을 얻지도 못하나, 스스로 관계를 끊지 못해서 상대가 관계를 종결 시키게 된다. 너무 많은 애정을 요구하느라 냉정하게 처신할 수가 없다. 외로움, 낮은 자존감, 자신과 상대의 애정관계에 대한 불확실감 등이 원인이 되어 사랑증후군 (symptom love)에 빠지기도 한다.

 

. 실용적 사랑 (pragma);  논리적이고 실용적인 쇼핑리스트 같은 사랑

컴퓨터 결혼 대행사에서 사용하는 방법. 황홀한 로맨스나 가슴 설레는 연애를 꿈꾸지 않고, 그 누구도 자신의 상식을 희생할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쇼핑목록을 작성하듯 원하는 상대의 자질 요건을 의식적으로 구체화해둔다. 상대가 자신과 걸 맞는지를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평가해서 의도적으로 고려하여 적절한 상대를 선택한다.

 

. 헌신적 사랑 (agape);  타인 중심적, 자기 상실적 사랑 유형

사랑을 선물 혹은 책임이라고 여겨서, 상호성을 기대하지 않으며 사랑을 의무로 생각한다. 따라서 사랑이란 감정이 아니라 의지의 표현이며, 상대에게 애정 어린 보살핌을 베풀어야 할 의무를 강하게 느끼고, 배우자는 이런 배려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상대를 더 행복하게 해줄 경쟁자가 존재하면 기꺼이 그 관계를 단념할 수도 있다.

 

. 스토르직 에로스(storgic eros);  

스토르게와 에로스의 결합형. 서로 주고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무리하게 소유하려 하지 않고, 사랑과 헌신을 강요하지 않는다.

 

. 루딕 에로스(ludic eros);

사람들을 쉽게 사귀며, 사랑의 관계는 특별한 감정이 없는 일종의 일상 생활이다.

관계 자체를 즐기므로 질투하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 스토르직 루두스(storgic ludus);

특정 파트너를 사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사랑을 즐겨야 할 때는 즐기지만자기절제와 신중함이 있다. 일상의 삶에 충실하고 편리할 때 파트너와 시간을 보낸다. 감정표현은 없는 편이다.

 

 

 

 

 

■  사랑의 조건에 관하여

     

         "로미오와 줄리엣, 그 사랑의 조건"   황.상윤

 

                                                                                                                    

                                                                                                                  기사 중에서 일부발췌

. 세익스피어의 비극적인 희극 “로미오와 줄리엣”

 

.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을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분개한다.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에 감히 전제조건이 있다고 주장하는 나를 세파에 찌든 속물로 취급한다. 진정한 사랑에 조건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라 주장한다.

 

. 존재가 사랑에 우선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로미오란 사람과 줄리엣이란 사람의 존재를 전제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란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서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구체적인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구체적인 사람으로 먹고, 자고, 싸면서 자신의 구체적인 삶을 영위하며 존재해야 사랑할 수 있다. 자신의 구체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살아야 한다.

 

. 욕망이 발생하다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무조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위해서는 보다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로미오는 남성이고 줄리엣은 여성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이성애자이거나 최소한 양성애자여야 로미오란 남성과 줄리엣이란 여성이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서로를 향한 욕망이 넘쳐 나야 한다. 그래야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랑은 가능하다.

 

. 역사에도 조건이 있다

첫째 조건, 인류의 역사란 것이 존재하려면 필연적으로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

구체적인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노동해야 인간의 역사는 가능하다.

 

두 번째 조건, 인간이 먹고, 자고, 싸는 자신의 삶의 조건에 근거해서 새로운 욕망을 창조해야만 역사는 가능하다. 오늘은 라면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면, 내일은 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싶다는 욕망이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조건에 근거해서 그 욕망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렇게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어 가야 한다.

 

세 번째 조건, 인간은 밥만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삶 속에서 섹스도 해야 한다.

섹스를 해서 자녀도 낳아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 자체를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

그렇게 인간은 세대를 이어가야 인간의 역사가 가능하다. 인간 자신을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

 

네 번째 조건, 인간이 인간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게 되면 가족이 등장하게 된다.

가족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고립된 개인을 상정하는 것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고립된 개별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고,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의 역사는 가능하다..

 

. 삶의 방식과 문화의 관계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먹고 산다. 먹고 사는 방식에 따라 문화를 만들어 간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습이 만들어졌다. 법이 만들어지고 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문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관습과 법과 예술이 그냥 꽃 피게 된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회관계 속에서 먹고 사는 생활방식에 의해 문화는 만들어졌다. 관습과 법과 예술이 만들어졌다. 먹고 사는 방식의 변화에 따라 문화는 변했다. 관습과 법과 예술은 변해왔다.

 

우리의 의식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리 역사의 산물이다. 우리가 먹고, 자고, 싸면서 만들어온 우리 역사의 산물이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나의 존재가 나의 의식을 규정한다.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  사랑, 심리학에 길을 묻다 

 

                    글:  배.재국

                                                             자연이 블로그 중에서 일부발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곧 경험(과거)의 집합체요 기억에 불과하다. 과거로부터 고착된 경험덩어리,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자아, ego”라 부른다. 양파 껍질을 벗기고 벗기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듯, 백가지 경험이 쌓여 “나”라는 경험이 되었다면 한 가지씩 버리다 백가지를 다 버렸을 때는 자기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나”라는 것은 경험의 집합체에 지나지않으며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경험(과거,기억)은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허상이며 그 허상이 “나”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질은? 그것은 경험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한 바탕, 즉 변치 않는 실체인 “생명” 그 자체이다. 우리의 본질은 “빛”이요, “생명”이요, “사랑” 그 자체이다. 우리가 엄마 배에서부터 갖고 나온 생명 그 자체가 우리의 본질이다. 머리, 팔, 다리, 심장, 허파, 간, 내장 그 어디에도 우리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해부한 인간의 몸을 보면 그저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할 뿐, 그 어디에도 만물의 영장이라 할 만한 부분이 없다.

 

우리 몸은 그저 텅 빈 허공이나 마찬가지, 그 허공은 에너지장으로 가득 차 있어 우리 몸을 지탱한다. 이 에너지가 바로 생명 에너지인 것. 이 에너지는 우리로 하여금 숨쉬게 해주고 활동하게 해주고, 소화를 시켜주며 사랑하게 해준다. 어릴 때 우리 몸 속에 있었던 생명에너지와 노인의 되어서 지니고 있는 생명에너지는 근본적으로 같다. 어린 시절 눈으로 한강을 보았다면 노인이 되어서도 한강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바로 그와 같은 변치 않는 실체인 “생명(사랑)”을 갖고 있다.

 

. 에고

에고라는 관념이 시작되기 전 어린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친구와 놀다 싸우더라도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재미있게 같이 노는 것이 그 증거다. 어른들은 그러지 못한다. 왜 일까. 어른의 경우 현재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과거의 경험이 끼어 들어 대상을 순수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과거에 얽매여 현재의 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왜 같은 생명을 가진 존재인데 나무는 싱싱하게 살아가고 사람은 절망하거나 자살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말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나무하고 사람하고 어떻게 똑같아!” 아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가 똑같다. 겉 모습은 비록 다르지만. 생명만을 믿고 살라. 팔다리가 잘렸더라고 우리 생명은 변함이 없다. 그 생명이 우리의 본질이며 그 외의 것은 모두 허상이다. 허상에 집착하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은 순수 현재뿐이며 생명은 끊임없는 흐름이다.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바로 경험 집합체, 곧 기억이요 죽어버린 과거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에고의 정체다.

 

. 에고의 법칙

만유인력의 법칙, 어떤 것에 대한 경험(지식)은 인력이 있어 그것이 욕망으로 작용한다

관성의 법칙, 경험의 집합체는 하나의 에너지 덩어리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 물방울이 자신의 본 모습을 유지한 채로 바다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바다와 하나가 되려면 자신의 모습을 버려야 한다.

 

사랑도 이와 같다. 자기 경험의 집합체인 에고를 희생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나”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며 “나”만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버겁다.

 

사랑에는 마음의 아픔이 따른다고 하는데 그 아픔이 바로 에고의 죽음이요, 희생이다. 자기라는 주관적인 세계가 있는 인간에게 사랑은 어렵다. 에고가 사랑하는 한 거기엔 충돌과 갈등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본질이 물, 곧 사랑(생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싸우고 갈등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어떤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지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다가도 자기 이미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헤어지거나 미워하게 된다. 진정 상대를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인 실존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 그것이 곧 진리이다.

 

. 절망

생명의 힘을 약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관념, 곧 경험이요 기억이다. “나는 60이니까 이제 죽을 날도 멀지 않았다” 이런 관념이 그 힘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70이 되어서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에고를 결코 자신의 본질이라 믿지 말라. 그것은 필름 속의 영상이요 하늘에 떠다니는 한조각의 구름이다. 두려운 마음이 드는가? 속지 말라, 그것 역시 실체가 아니다.

 

. 생명의 신비

우리가 에고의 집착에서 벗어나 생명과 하나가 되면 우리는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참 자유를 누리게 되고, 사랑 그 자체가 되고, 모든 존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우리의 생명(사랑)이 에고로부터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우린 점점 지혜로워지고 조화롭게 된다. 에고를 희생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엄청난 손해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가장 자신을 위하는 행위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고 사랑 받을 수 있다.

 

. 자아발견

우리의 마음이란 가을날 하늘과 같아서 평상시 아무런 일이 없을 때는 고요하고 평화롭다가도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대상과 부딪치면서 혼란해지거나 괴로워진다. 에고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인간은 먹을 게 해결되고, 많은 것을 가질지라도 평화롭지 못하다. “나”로 인해 벌어지는 저항과 장애를 하루빨리 발견하여 해방되고 나면 우리 본질인 “생명(사랑)”은 자연스레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흙을 벗겨내면 숨어있던 보석이 그 빛을 저절로 드러내듯이.

 

. 고통의 비밀

우리가 겪는 마음의 고통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며 그 고통의 정체는 알고 보면 우리 마음속의 에고로부터 비롯된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만 비로소 마음의 고통이나 아픔에서 벗어나 마음의 가장 건강한 상태, 아무런 고통이 없는 “생명(사랑)”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마음의 장애와 저항은 에고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 모든 인간이 겪는 아픔과 고통의 원인이며, 이를 제거해야만 한다. 에고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본질인 “생명”과 하나가 되어 사랑과 자유와 조화의 삶을 마음껏 구가할 수 있다.

 

. 관조

생명을 찾아가는 과정은 수양의 과정이다. 예부터 써온 대표적인 수양방법은 “관조” 와 “이해” “인내”이다. 말하자면 스스로의 마음을 마치 연극을 보듯이 지켜보며 이해하고 견뎌내는 것. 바로 이것이 “거듭나기”의 정수.

 

. 물질

과거(경험)은 죽은 것이다. 백억을 가진 사람이 편안하다면 그 편안함의 원인도 과거에 있다. 그는 지금 과거에 의해 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백 억이 몽땅 날아가면 그는 과거에 의지할 곳을 잃어버려 상실감에 자살에까지 이른다.

과거에 대해 매일매일 죽으라. 그래야 날마다 새로울 수 있다.

 

과거로 현재를 바라보면 진실을 바로 보기 힘들다. 다시 반복하건대 생명은 순수 현재만을 살 뿐이다. “있는 그대로” 그것만이 진실이다.

 

원효대사 해골 물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맛있게 마셨던 물이 바로 석은 해골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갑자기 구토증을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자신의 관념, 즉 어제라는 과거와 썩은 해골 물이라는 생각때문.

이미 죽어버린 과거인 경험에 얽매이지 말라. 과거로 현재의 삶을 망치지 말라.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 접하여 마음의 고통을 느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며 그 아픔의 원인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원인이 전부 에고에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만으로 마음의 고통은 쉽게 사그라든다. 그리고 이 방법은 스트레스를 전혀 남기지 않는다. 고통의 근본원인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의 아픔을 겪는 것은 우리가 외부(물질이나 돈)의 것을 우리 경험 속에 저장하여 그것이 실체인 양 집착하기 때문이다. 물질이나 돈은 단순한 수단에 불과하다. 수단이 주인이 되게 하지 말라. 주인은 오로지 사람이며 물질과 돈은 그저 “좋은 것”일 뿐이다.

 

. 언어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위대한 것은 이 “언어” 때문이다. 인간의 논리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언어라는 체계이다. 언어가 없으면 사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전쟁으로 휘몰아 넣었던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모은 이데올로기나 사상도 다 언어로써 이루어져 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내뱉은 말로 인해 마음의 고통이 일어난다면 그 즉시 자신의 마음의 아픔을 관조하면서 그 아픔의 원인이 자신의 허상인 경험의 집합체, 즉 에고 때문이라는 것을 인식하라! 그러면 그 아픔에서 곧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잠시 마음은 아플 것이다. 하지만 양파 껍질을 벗길 때 냄새가 지독하듯, 에고 껍질을 벗기는 과정에서 고통의 냄새를 견디어야 한다. 인내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나 인내를 통해 에고는 죽어간다. 벗어나려면 그만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길은 바로 자신의 에고가 상처를 입었을 때 즉시 자각하고 그것을 관조하면서 이해하고 인내하는 것이다. 상대를 공격하거나 외부 탓으로 돌리지 못해 고통스럽더라도 꿋꿋이 인내 하다 보면 에고의 상처는 서서히 아물고 그 상처가 어느새 사랑으로 변해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참기보다 우리 자신 속의 에고를 파악하라. 에고라는 건 자라면서 축적되어온 경험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갖가지 욕망들이 잠재해 있다.

 

미움이 생기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 “나”의 욕망과 집착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내해야 한다. “나”로 인한 고통을 꿋꿋이 인내하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허상을 죽이는 과정이다. 사랑으로 쓰다듬어주라. 자기 자신의 아픔을 사랑하라. 그것이 진정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로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분노가 일어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모든 일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할 때 그 상처는 더 이상 스트레스나 한으로 남지 않는다. 관조와 이해와 인내가 모든 고통을 불태워 우리를 순수한 본질을 되돌려줄 것이다.

 

우리의 에고는 수많은 욕망을 갖고 있어서 우리 자신을 가만히 놓아주질 않는다. 욕심을 쉴 새 없이 부추기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거나 좌절한다. 에고는 항상 행복을 외부에서 찾고 의존하려 한다. 때문에 행복은 항상 위태롭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고 무너질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꾸 쌓이다 보면 에고는 더욱 공격적이고 자기중심적 성향을 띤다. 쉽게 화를 내고 분개하며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전부 비난의 대상이 된다.

 

관조와 이해와 인내뿐이다. 자아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며 스트레스의 원인을 이해하면 그대로 소멸해 버린다. 단, 아무리 관조하고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면 그 스트레스는 해소되지 않는다. 부정적 스트레스의 주범, 에고를 이해하고 사랑하라. 고통을 관조하고 이해하라. 그리고 인내하라. 그것이 스트레스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어디에 있더라도 그 상황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분리되는 느낌은 에고가 욕심에 차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학교에 있으면서 오락실을 생각하고 있다면 현재가 고통스럽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지낼 방법을 찾으면 된다. 생명은 순수 현재며 현재만이 전부다. 그러니 놓치지 말라. 희망과 기대는 미래의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순수 현재이기에 순간을 살고, 순간을 즐긴다. 에고는 과거다. 그것은 우리 기억 속에 있고 그곳에서 온갖 희망과 기대와 욕망과 망상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들은 잠시도 현재를 살지 못하고, 생각이 늘 과거나 미래를 향해 달린다.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다. 우리는 한시도 현재를 살지 못한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행복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 행복은 우리가 아무런 기대나 희망 없이 현재 순간에 몰입할 때 찾아온다. 진정 행복은 외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명만을 믿고 순수 현재에 몰입할 때 찾아온다.

 

. 고정관념

우리 마음 속에 수많은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자라며 경험,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것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매우 부분적인 진실들이다. 이것 때문에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하고 세상을 편협한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삶의 자유를 구속하고 마음을 고통스럽게 한다.

 

. 화

“화는 나쁜 감정이야, 화를 내면 나쁜 사람이야!”

마음속을 맴도는 이 생각 때문에 화는 무의식 속으로 점점 더 파고들어 행동을 지배한다. 마음은 점점 더 경직되고 화는 자신에게 화를 일으켰던 사람들을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힌다. 만약 화가 상대를 진정 위하는 길이라면 화를 내라. 하지만 에고의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자신의 마음을 관조하며 인내하라. 그러면 곧 사라질 것이다

 

. 억압

억압을 하면 그 억압을 받는 대상은 무의식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자리를 잡고 언제든 튀어나올 기회를 노린다. 억압된 욕망은 어떤 방식으로든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반드시 복수를 한다. 어떻게 든 분출이 되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파괴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정신병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을 관조하면서 그 생각이 원래 자신의 본질이 아니라 자라며 외부에서 받아들여 쌓인 에고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참거나 억압하지 말라. 억압을 하면 스트레스가 되지만 이해를 하면 그대로 해소된다. 그리하여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해는 모든 것을 수용하고 조화시킨다. 선악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

 

. 지식

인도의 성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으로부터 거의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알고 있는 것을 마치 자신의 실체인 양 붙잡고, 그것을 “진정한 나”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든 이데올로기, 사상, 이념은 결국 지식이다. 이런 지식의 대립으로 인류가 지금껏 겪은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는 여전히 지식으로 인해 마음의 고통을 받는다. 도덕이나 윤리, 종교적 도그마 그 외 수많은 주장과 이론들, 이런 지식들이 마음속에 각양각색의 형태로 들어앉아 있다. 지식은 단지 지식일 뿐 어떤 지식도 완벽한 것은 없다. 우리는 지식에 대해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 자신을 괴롭히는 생각, 떨쳐내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더 이상 외면하거나 피하지 말기 바란다. 고통스럽더라도 그 생각을 이해하고 직면하여 뿌리 채 뽑아버려라.

 

우리가 에고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마음을 관조하면 마음의 어떤 고통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이해는 곧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포용하고 모든 고통을 녹여 버린다. 우리의 본질인 “생명”은 깨어 있는 관찰자가 되어 “나”가 일으키는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고 지켜보면 그 고통은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힘이요, 연금술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통은 거의 무의식적이다. 살아 있으므로 당연히 겪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우주적 조화에서 벗어난 경고의 신호이다. 생명에서, 중용에서, 현실에서 벗어나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이다.

 

고통이라는 것에 감사하라. 차라리 기뻐하라. 당신의 잘못을 깨우쳐주거나 마음속 에고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기에. 우주는 궁극적으로 자연의 본질인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이것이 고통의 진정한 의미다. 거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같은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

 

우주는 근본인 생명, 즉 사랑을 지켜주며 키워주는 자에게 복을 주고, 생명을 해치고 괴롭히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벌을 준다. 이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요, 신의 법칙이요, 생명의 법칙이다.

 

에고는 허상이다. 그것은 새가 날아간 흔적처럼 실체가 없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붙들고 있지 말라. 과거라는 허상을 무거운 짐처럼 짊어지고 살고 있다. 버려야 할 쓰레기를 지고 다니며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과거의 경험이 현재 마음에 끼어 들어 상처 주려 하면, 즉시 자각하고 거기에 결코 휩쓸리지 말라.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상대방에게 화를 내거나 미워하는 것 역시 스스로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다.

 

에고가 파괴될 때 심한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계속 벗겨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거듭 강조했듯 에고는 경험의 집합체이므로 경험에 대한 집착이 전부 떨어져나가면 그 집은 무너져 내린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텅 비어 있다. 원래 생명만이 그 자리에 굽이칠 뿐.

 

그것이 곧 사랑과 하나 되는 길이요, 내면의 평화에 도달하는 길이다. 우리가 평생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해가는 일일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 자신을 이해해야 남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엔 스스로를 지나치게 비난하고 심판하는 사람이 많다. 스스로를 자주 비난하는 자는 남에게도 그렇게 하기가 쉽다. 우리 경험의 집합체 에고는 마음속에서 독재자 노릇을 하고 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을 심판하고 비난하고 있다. 얼마나 우스운가 에고에서 비롯된 생각을 에고가 다시 비난하고 심판하고 있으니.

 

 나의 독을 피하려면 “나”가 자신을 비난하려 할 때, 즉시 그것을 관조하며 자각하라. 그러면 감정으로까지 전이되지 않고 즉시 멈춰버린다. 진정 그 생각(비난)에서 벗어나려면 내 본질인 “생명(순수의식)” 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욕망이나 생각을 일부분으로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그러면 비열함, 어리석음, 질투, 수치, 바보 같음, 무책임, 열등감, 우유부단함, 폭력들이 전부 사랑으로 변형된다. 부정적 요소들조차 근본은 생명 에너지므로.

 

. 사랑만이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비난에는 동정도 사랑도 없고 대상에 대한 미움만 존재한다. 비난하는 당사자는 그 대상보다 우위에 서게 되므로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바로 에고가 자신을 유지해가는 미묘한 방법이다.

 

어머니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엄마는 평생 너희를 위해 희생해 왔는데, 너희들이 엄마에게 이럴 수 있니?” 당신이 남편을 잃었다면 재혼해도 상관없고 혼자 살아도 상관없다.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당신과 자식들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택하라. 그것이 사랑이며,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길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희생이라 생각되면 그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이 아니다. 그런 경우 자신에게 아무 보상이 돌아오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게 혐오감과 박탈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당장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그만 두어라. 자기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라. 그러면 진정한 희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궁극적으로 그 길만이 우리가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 사랑

원래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전체와 하나가 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이 우주는 하나다. 각자가 기능을 가진 우리 몸 속의 수많은 세포가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듯 말이다. 에고라는 개체도 전체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작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만이 에고라는 것을 가지고 있어, 에고가 자신의 생명과 자연(전체) 사이를 하나의 막처럼 막고 있다. 아주 어렸을 적엔 이 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분리되는 느낌을 느끼지 못하다가 자라며 점점 두꺼워져 자연과도 점점 멀어지게 된다.

때문에 우리가 자연처럼 영원 하려면 자연과 우리의 생명 사이를 막고 있는 에고의 막을 제거해야만 한다. 인간이 사랑을 갈구하는 것도 그것으로 인하여 전체와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술, 마약, 온갖 쾌락에 탐닉하는 것은 전부 이 에고로 인한 전체와의 분리감, 그로 인한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공포를 잊기 위해서이며, 에고의 욕망으로 인한 좌절과 그로 인한 고통을 잊기 위해서 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라는 것은 개체가 전체(자연)와 하나가 되려는 본능인 것이다. 사랑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에고가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다. 결국 사랑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당신이 진정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생명의 지혜를 들어보라. 당신 안에 그 답이 숨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라. 생명의 멈출 수 없는 갈망에 귀를 기울여라. 생명의 근원적 욕망은 바로 창조이다. 자기만의 색깔을 창조하라.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간절히 원하면 생명은 그것을 이루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영감을 보낸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그러니 내면의 소리, 생명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라. 모든 답이 우리 안에 있다.

 

. 삶

보통 사람들은 인생을 일장춘몽이니 한바탕 꿈이나 허무 하느니 하며 되는 대로 그냥 그럭저럭 살아간다.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에 뭔가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원래 맨몸으로 태어나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마음속에 여러 경험이 쌓이며 “에고”라는 관념이 생겨났고 거기에 사람,사물,돈,지식,지위,명예 등 수많은 것들을 집어넣으며 살아왔다. 그리하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뭔가 커다란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려 한다. 자신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한 존재라는 확신을 얻고 싶어한다. 세속에 무한한 가치를 두고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집착의 대상을 냉철하게 생각해보면 그것들 중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어느 것 하나 실체가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그것들이 영원한 것인 양 붙잡고 있다. 영원한 듯이 집착하고 있다가 사라져버리니 허무할 수밖에. 생명에너지를 제외하고 우리네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다. “무”의 상태인 것이다. 보통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의미로 “허무”를 말하는데, 그것은 인생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사람들이 자꾸 무언가에 의지하고 소속되려고 하는 것은 에고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으키는 마음이다. 당신의 마음속을 조용히 들여다보라. 거기엔 무엇이 있는가? 잘 들여다보라.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어떤 욕망만이 꿈틀대고 있을 것이다. “심심한데 무얼 할까? 친구 만나러 갈까? 영화 보러 갈까? 비디오나 볼까? 낚시나 갈까? 어디에 갈까?” 그 내용들을 분석해 보라. 당신이 전에 다 경험한 것들이 기억으로 다시 떠오르며 욕망이 되어 마음을 부추긴다. 전부 과거이자 기억이며 에고다. 실체가 아닌 거울 속 허상 같은 것이다. 그것은 원래 “무”였다. 때문에 아무리 거기다 많은 걸 집어 넣어봐야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와 같은 허상을 잔뜩 집어넣고 있다. 애초에 채워질 수 없는 것이기에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래 아무것도 아닌 존재, 생명 자체임을 모르고 그 사실과 직면하는 하는 것이 두려워 에고의 욕망에 지배되어 텅 빈 마음속에 수많은 걸 집어놓고 집착하는 것이다. 자신이 그래야 영원히 존재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착각일 뿐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생명의 뜻을 우선으로 하여 사랑의 삶을 산다면 그는 무한한 사랑을 받을 것이며, 매우 행복할 것이다. 행복은 사람들과의 사랑 속에서 가장 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학교에서 배울 유일한 것이 있다면 “사랑”이다.

 

 

 

 

■  사랑한다는 것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관계에서 안전하고자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슬픔과 공포를 키운다.

안전을 찾는 것은 불안전을 찾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당신은 안전을 찾은 적이 있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안전하기를 원하지만,

각자가 자신의 안전한 길을 찾을 때 사랑이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랑 받지 못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

나는 내 나라를 사랑하고, 나의 왕을 사랑하고, 나의 책을 사랑하고,

나의 재산을 사랑하고, 나의 쾌락을 사랑하고, 나의 아내를 사랑하고,

나의 신을 사랑한다.

사랑은 관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당신 좋을 대로 기르고 품고 난폭하게 취득하고

뒤틀려 질 수 있다.

 

당신이 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당신이 자신의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것을 뜻하며,

당신이 고상하고 신성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의거한 어떤 형태의

“존경할 만함”을 걸치고 있는 당신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나는 신을 사랑한다”라는 것은 완전히 넌센스다. 당신이 신을

경배할 때 당신은 자기 자신을 경배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인간적인 것을 풀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추상 속으로 도망간다. 사랑은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문제와 진통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일 텐데, 그것을 다만 정의 함으로서 교회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고, 사회는 또 그렇게 정의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일탈과 남용이 있었다. 누구를 숭배 하는 것, 누구와 같이 자는 것, 정서의 교환, 사귐 등이 우리가 사랑으로서 뜻하고자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규범이자 패턴이었고 또 너무나 개인적으로 감각적이고 제한된 나머지 종교인들은 사랑이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들은 인간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 속에서 쾌락, 경쟁, 질투 그리고 소유하고 유지하고 구속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간섭하려는 욕망 등을 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복합성을 아는 나머지 그들은 신성하고, 아름답고 순결하고, 썩지 않은 다른 종류의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 어디에서나 이른바 신성한 사람들은, 여자를 쳐다보는 것은 완전히 나쁜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들은 성에 탐닉하면 신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고 말하며 비록 자기들이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무시해 버린다. 그들은 성욕을 거부하기 위해 자신의 두 눈을 빼버리고 혀를 잘라버리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지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슴과 마음을 굶주리게 하고 쇠약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탈수 시켰다. 그들은 아름다움이 여자와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인멸했다.

 

사랑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는가? 아니면 오직 사랑만이 있을 뿐인가? 하나에 대한 것만 사랑이고 다수에 대한 것은 사랑이 아닌가? 만일 내가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라고 말 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제하는 것인가? 사랑은 개인적인 것인가 아니면 비개인적인 것인가? 당신은 전 인류를 사랑하면서 특수한 개인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은 감정인가 정서인가? 사랑은 쾌락이고 욕망인가? 이 모든 질문은 우리가 사랑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으며, 사랑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에 의해 발전되어 온 패턴이나 관례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규명하려면 우선 수세기 동안 쌓여 온 껍데기에서 사랑이 해방되어야 하며, 그것이 어떠해야 하고 어떠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대한 모든 관념과 이데올로기들을 제거해야 한다. 어떤 것을 “그래야 하는 것”과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나누는 것은 삶을 다루는 가장 기만적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이 불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그것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것 자체로서 무엇을 뜻하는 지를 어떻게 알아낼까?

……

그것을 이해하려면 우선 나 자신을 자신의 편향과 편견에서 해방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혼란스럽고, 나 자신의 욕망에 잠겨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말한다.

“먼저 너 자신의 혼란을 정돈하라. 어쩌면 사랑이 아닌 것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도 있을 테니까.”

 

정부는 “나라에 대한 사랑을 위해 가서 죽어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랑인가?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섹스를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것이 사랑인가?

사랑은 욕망인가?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기 때문이다.

쾌락을 누리려는 욕망, 즉 감각을 통해서, 성적 접촉과 만족을 통해서 얻어진 쾌락 말이다. 나는 섹스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 지를 안다. 섹스가 당신에게 순간적으로 주는 것은 자신의 완전한 포기이며, 그러고 나서 당신은 그 혼란과 더불어 원 상태로 되돌아 오게 된다. 당신은 아무 걱정도, 아무 문제도, 자아도 없는 그 상태가 자꾸 되풀이 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사랑 속에서 성적 쾌락, 당신의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하는 사람을 집 안에 갖고 있다는 쾌락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은 그녀에게 의존한다. 그녀는 당신에게 그녀의 몸을 주었고, 그녀의 정서, 그녀의 격려, 어떤 안정감과 행복감을 주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당신을 떠난다. 그녀가 싫증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과 도망가면, 당신의 정서적 균형은 깨어지는데,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이 교환은 질투라고 불린다. 그 곳에는 고통, 불안, 증오, 폭력이 있다. 그래서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나한테 속해 있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는 순간 나는 너를 증오하기 시작한다. 내가 성적 욕구나 다른 욕구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너한테 의존하는 한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순간 나는 너를 싫어한다.”

 

다시 말해 당신과 그녀 사이에는 적대감이 있고 분리가 있으며 그리고 당신이 그녀에게서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때, 거기엔 사랑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모든 대립상태나 자신 안에서의 끝없는 불편 없이 아내와 살 수 있다면, 그때 당신은 아마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완전히 자유로우면 그녀도  자유롭지만, 당신이 자신의 모든 쾌락을 위해 그녀에게 의존한다면 당신은 그녀의 노예다. 사랑할 때는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렇게 남에게 속해 있는 것, 다른 사람에 의해 심리적으로 키워지는 것, 남에게 의존 하는 것에는 언제나 불안, 공포, 질투, 죄의식이 있으며, 공포가 있는 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다. 슬픔으로 찌든 마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감상벽이나 주정주의는 사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쾌락이나 욕망과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랑은 과거의 것인 생각의 산물이 아니다. 생각은 사랑을 심어 기를 수 없다. 사랑은 질투와 양립하거나 질투에 사로잡힐 수 없는데, 왜냐하면 질투는 과거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언제나 능동적인 현재다. 그것은 “나는 사랑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사랑했다”가 아니다. 만일 당신이 사랑을 알면 당신은 누구도 따르지 않는다. 사랑은 복종하지 않는다. 당신이 사랑할 때 거기엔 존경도 무례함도 없다.

 

어떤 사람을 정말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신은 모르는가? 증오 없이, 질투 없이, 분노 없이, 그가 행복하고 생각하는 바에 간섭하려고 하지 않고, 비난 없이 비교 없이 사랑하는 것, 당신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비교가 있는가? 당신이 어떤 사람을 온 마음을 다해, 온 심장을 다해, 온 몸을 다해, 당신의 전 존재를 다해 사랑할 때, 거기에 비교가 있는가? 당신이 그 사랑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바칠 때 거기엔 다른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사랑은 책임이나 의무를 갖고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 그 말들이 합당한가?

당신이 무슨 일을 의무적으로 할 때, 거기엔 사랑이 들어 있는가?

의무 속에는 사랑이 없다. 사람이 묶여있는 의무의 구조는 그를 파괴한다. 어떤 일을 의무이기 때문에 강제로 하는 한,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이 있을 때, 거기엔 의무도 책임도 없다.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들의 아이들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되어야 할 것과 되지 말아야 할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들의 책임감을 드러낸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안전한 지위에 있기를 원한다. 그들의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숭상하는 그 지위의 일부분이다. 그들은 오로지 완벽한 부르주아가 되는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들이 아이들을 사회에 맞도록 준비시킬 때 그들은 전쟁, 갈등, 잔인성을 지속 시킨다. 당신은 그것을 보살핌과 사랑이라고 부르는가?

 

정말 보살핀다는 것은 나무나 식물을 보살피듯 물을 주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예의 검토하고, 그것을 위해 가장 좋은 토양을 조사하고, 친절과 부드러움으로 보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아이들을 사회에 맞도록 준비 시킬 때, 당신은 그들이 죽임을 당하도록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결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당신은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우는 것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 울어 본 적이 있는가? 전장에서 죽은 당신의 아들을 위해 운 적이 있는가? 눈물은 자기 연민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살해되었기 때문인가? 만일 자기연민 때문에 운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에 관해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커다란 애정을 준 사람을 여의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면, 그것은 애정이 아니었다. 죽은 형제를 위해서 울 때 그를 위해서 울어라. 당신을 위해서 우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당신은 자신의 가슴이 감동하였기 때문에 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위해 감동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연민에 의해 감동한 것인데, 자기 연민은 당신을 굳어지게 하고 당신을 가두며 당신을 무디고 어리석게 만든다.

 

.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울 때 그것이 사랑인가?

외롭기 때문에, 잊혀졌기 때문에,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우는 것, 팔자 한탄을 하고, 환경을 탓하며, 눈물 속에 항상 당신이 있는 울음, 그것이 사랑인가?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할 때, 즉 당신이 마치 나무나 기둥이나 손을 만지듯 그것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때, 당신은 슬픔이란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 슬픔은 생각이 낳았다는 것, 슬픔은 시간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3년 전에 동생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래서 나는 위함과 우애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외롭고 괴로워서 눈물이 난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당신은 자신 안의 모든 사태를 볼 수 있다. 그것을 분석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충분히, 완전히,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당신은 “나”라고 불리는 이 거짓되고 보잘것없는 것의 전 구조와 본질을 한 순간에 볼 수 있으며, 나의 눈물, 내 가족, 내 나라, 나의 믿음, 나의 종교의 본질을 순식간에 볼 수 있다. 그 모든 추함이 당신 안에 들어 있다. 당신이 그것을 마인드가 아니라 하트로서 볼 때, 즉 그것을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볼 때, 비로소 슬픔을 끝나게 할 열쇠를 가진 것이다.

 

슬픔과 사랑은 병행할 수 없는데, 기독교에서는 고난을 이상화하여, 그것을 십자가에 얹어 놓고 예배하며 그 특별한 문을 통하지 않고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암시한다. 이것이 약점을 이용하는 종교사회의 전 구조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물을 때, 당신은 너무 겁을 먹은 나머지 대답을 못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완전한 대 변동을 뜻할 수도 있다. 즉 그것은 가족을 깨뜨려 버릴 수 있다. 당신은 자신이 아내나 남편이나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 할 수도 있고, 당신이 지어놓은 집을 산산이 부숴야 할 지도 모르며, 다시는 사원에 가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여전히 찾아내고자 한다면 당신은

. 공포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

. 의존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 자기 연민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 사랑 받지 못함에 대한 괴로움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 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이 모든 것을 없앨 수 있다면, 즉 강제로가 아니라 비가 나뭇잎에서 여러 날 쌓인 먼지를 씻어내듯이 그것들을 씻어 낼 수 있다면, 비로소 당신은 인간이 항상 목마르게 찾는 그 기묘한 꽃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영혼의 동반자 (SOUL MATE)

 

   존 오도나휴  

 

켈트 인들이 지녔던 생을 대하는 지혜를 시적인 언어로 풀어낸 책, 사랑에 대한 탐구로 장을 시작하여, 육체와 영혼, 침묵과 홀로 있음, 성장의 시학, 시간과 영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 이 책은 고대 지혜의 길을 따라가며 인간과 삶의 참 의미를 묻는다.   (책 소개 중에서)

 

□  “영혼의 동반자” 서문 중에서

 

한 줌의 흙이 있었다. 흙은 기억을 갖고 있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자연의 순환을 거치면서 그 흙은 둘로 나뉘어, 각자 다른 사람의 몸을 구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원래 하나였던 그 흙은 서로를 기억한다.

그리고 다시 하나가 되기를 갈망한다. 그 기억이 되살아 나는 순간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그것은 사랑보다 더 절실한 일체감의 기억이다.

 

흙의 분리는 곧 존재의 고독이다. 분리되어 있을 때 생은 어둠 속에 있다.

꿈 속에서, 무의식 저편에서 일체감의 기억이 누군가를 그리워 하지만,

현실의 시간은 우리를 더 큰 고독 속으로 데려갈 뿐이다.

하나였던 흙이 서로를 발견하기까지 생은 무수한 기다림과 공허함의 반복이다.

 

흙이 서로를 기억하는 순간, 우리 앞에는 '영혼의 동반자'가 서 있다.

그는 한 몸이었던 시절의 충만함과, 분리되어 있던 긴 세월의 고독감을 이해한다.

두 팔의 껴안음은 오래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흙의 껴안음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분리되기를 원치 않는. 흙의 기억이 비로소 완성을 이룬 것이다.

 

영혼의 동반자를 발견할 때, 그 사랑은 모든 관습과 굴레를 뛰어넘는다.

이제 우리는 결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사랑으로 빛이 나는 얼굴 앞에서는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 의미를 잃는다.

사랑은 곧 신이기 때문이다. 그 신은 절대적인 것을 원한다.

부분적인 만족이나 낮은 땅에서 배회하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할지라도 이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저 공허할 따름이다.

 

이 영혼의 동반자를 켈트인들은 '아남 카라'라고 불렀다.

'아남'은 고대 아일랜드 어로 '영혼'을 뜻하며, '카라'는 동반자다.

자기 삶의 숨은 비밀을 열어 보일 수 있는 사람, 원래 하나의 흙이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그가 곧 영혼의 동반자다.

 

켈트인들은 인간의 가슴은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 가슴이 완전에 이르는 길은 아남 카라, 곧 영혼의 동반자를 찾는 일이다.

시간은 불안한 영원이다.

영혼의 동반자와 함께 있을 때, 그 영원은 완전에 이른다.

영혼의 가장 깊은 언어가 사랑이다.

사랑은 새롭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오래된 일체감의 확인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안에 완전한 세계를 담고 있다.

그 세계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원한다.

 

언어로, 몸짓으로, 때로는 눈빛만으로도 그 세계는 자신을 드러내고 이해 받기를 원한다.

영혼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에 대한 감각을 느끼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영혼의 동반자는 시로써 이야기한다.

건조하고 어두 침침한 무덤이 아니라 봄 날의 따뜻한 햇빛, 열정으로 가득한 삶을 얘기한다.

 

영혼을 가진 우리는 홀로 삶을 헤쳐 나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상처와 분노와 슬픔을 겪는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또한 그 세계를 제대로 이해해 줄 사람을 찾으려는 욕망을 멈춘 적이 없었다.

 

삶은 때때로 너무나 진부하고 냉소적이기 때문에

누구나 그 틀과 판에 밖인 생활을 깨고 이 지상에서의 존재의 이유를 찾고픈 열망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누구든, 물질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평가하든 상관없이,

우리의 영혼은 자신을 다 바칠 사랑을 원한다.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탐구가 시작된다.

영원이 우리를 절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혼의 동반자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삶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깨닫는다.

그 때 우리 모두의 안에 있는 영성이 되살아 난다.

우리의 육체는 모순과 신비를 지닌 무한히 크고 복잡한 내면의 세계의 단순한 외곽선에 지나지 않는다.

그 육체 안에는 태고 적부터의 흙의 기억, 영원히 우리를 보호해 줄 존재에 대한 기억이 있다.

 

... 사랑이 다가오는 순간, 두 영혼은 갑자기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두 사람이지만 하나의 영혼인 것을.....

 

 

□   두 사람 하나의 영혼

 

                                                                                        “영혼의 동반자” 독후감 중에서

 

. 육체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육체가 있으며, 영혼에게는 울타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길은 태초부터 하나였던 흙의 기억을 완성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 육체가 공기를 원하듯 영혼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대는 사랑하고 사랑 받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곳에

  보내졌다. 인간의 가슴은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는다. 가슴은 삶의 모든 경험 마다에서 다시 태어난다. 

  가슴이 곧 그대 속안의 얼굴이다. 인간의 삶은 그 속안의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여행이다.

 

□   영혼의 동반자

 

. 이 세계 속에서 인간은 그리 오래된 존재가 아니다. 그대 위에서 은하수는 영원을 향해 춤을 추고 있고,

그대 발 아래에는 태고적부터 존재해 온 대지가 있다.

 

. 육체는 흙으로 빚은 그대의 집이다. 우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그대의 집. 육체 속에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육체가 있다. 그대가 이것을 깨달을 때, 육체는 성스럽고 신비로운 것이 된다.

그때 육체의 감각은 신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 세상은 밤에 휴식한다. 밤이 찾아오면 나무와 산, 들판과 얼굴들은 형상의 감옥에서, 노출의 부담에서

  풀려난다. 모든 것은 어둠의 안식처 안에서 고요히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어둠은 태고적부터의

  자궁이며, 밤 시간은 곧 자궁 속에 머무는 시간이다.

 

. 새벽이 다가오면 우주의 경이롭고 미묘한 색깔들이 모든 존재에게 옷을 입힌다.

어떤 시인은 이 순간을 ‘색깔들은 빛의 상처’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색깔은 자연의 중심부에 있는 비밀스런 존재의 깊이를 드러낸다.

 

. 시간의 표면에서 사라지는 듯 보이는 것들은 사실 다른 모습을 하고 기억의 집에 저장된다.

. 퇴역 군인은 젊었을 때부터 사랑했지만 결혼할 수 없었던 한 여성에게 말한다.

지금까지 당신을 볼 수 없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었노라고.

. 컴퓨터가 인간 사이의 만남을 대신하고 정신과 치료가 종교를 대체하는 세계에서 관계에 집착하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 낯선 이의 손은 신의 손이다. 낯선 이는 우연히 오지 않는다. 그는 특별한 선물과 계시를 가져다 준다.’

. 한 사람의 삶과 열정은 어떤 장소의 에너지에 흔적을 남긴다. 사랑은 가슴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사랑은 밖으로 흘러나와 풍경 속에 비밀의 성소를 짓는다.

. 사랑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이 머무는 공간을 넓게 가져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구원’의 어원 중 하나가 공간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운 일이다.

 

□   육체와 영혼

 

. 육체는 흙으로 만든 그대의 집, 지구에 머무는 그대 영혼의 집이다.

육체를 통해 영혼은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 된다. 육체는 이 세상에서 그대가 속해 있는 집이며,

매우 신성한 신전이다. 누군가 다가올 때 그는 육체를 갖고 온다. 그리고 육체와 함께 자기만의 경험과

기억의 세계를 모두 가지고 온다. 가까워지는 것은 단지 두 육체가 아니라 두 세계다.

 

. 육체는 영혼의 비밀스런 세계가 표현되는 거울이다. 그것은 신성한 출발점이다.

따라서 육체는 그것이 가진 영적인 의미를 바탕으로 존경 받고, 이해되어야 하는 소중한 것이다.

 

. 우리가 고대부터 북이라는 악기에 친숙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북 소리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것은 엄마의 심장 박동과 하나였던 시절로 우리를 돌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 그대가 가진 독특한 색깔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재능에서 상투적인 목소리를 걸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 음악은 침묵과 만나는 가장 완벽한 소리다. 진정으로 음악에 귀 기울일 때 그대는 음악이 침묵을 배열하고

구성하는 아름다운 방식을 듣기 시작한다.

 

. 접촉은 판단하지 않으며, 오직 대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라고까지 표현한다.

 

□   침묵과 홀로 있음

 

. 영혼 속에는 그대의 홀로 있음을 밝혀 주는 등불이 있다. 홀로 있음은 반드시 외로움을 뜻하지 않는다.

홀로 있음은 그 안에 따뜻한 빛을 밝힐 수가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만이 세상에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표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때로 그 선물 속에는 설명하기 힘든 고통과 시련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

 

. 켈트 인들은 영혼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계시’라는 단어가 ‘다시 가리다’라는 뜻의 

  어원에서 왔다는 것은 흥미롭다. 영혼의 세계는 다시 가려진 베일의 틈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다.

 

. 얼굴은 우리가 직관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영혼은 잠시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고 기억이 늘어 가면서, 얼굴은 서서히 영혼의 여행을 비춘다. 얼굴은 나이가 들수록 영혼을 더욱

  풍성하게 비춘다.

 

. 운명은 경험과 삶의 바깥에 있는 틀을 만든다. 그리고 자유는 그대 속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채운다.

 

. 자신의 가능성과 재능을 무시할 때, 그대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고, 신의 부름을 피하기 위해 일상적인

  것들에 안주 한다. 그대가 흐름을 잃어버릴 때, 삶은 지루할 정도로 신중해지거나 아무런 개성 없이

  자동으로 움직일 것이다. 삶의 흐름은 조화와 일체감으로 가는 비밀스런 열쇠다.

 

. ‘영원한 젊음의 땅은 집 뒷마당에 있다. 자신 안에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땅에.’ 영원한 세계와 죽음이

  있는 세계는 평행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세계는 서로 뒤섞여 있다.

 

. 영혼이 자신의 영적인 갈망에 대해 계속 무감각하다면, 그 영혼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 영혼은 외로움을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이다. 용기를 갖고 자신의 홀로 있음과 마주한다면, 그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 현대 문명은 완벽한 화장에 너무 많이 집착해 있다. 아름다움은 이제 표준화되었다. 그것은 또 다른 상품이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은 그대의 영혼에서 비쳐 나오는 빛이다.

 

. 그대가 홀로 있음 속에 철저하게 머물고, 고립되고 버림 받는 고독의 극단을 경험할 때, 그대는 그 홀로

  있음의 중심에서 외로움과 공허함이 아니라 일체감과 안식처를 발견할 것이다.

 

. 수도자의 홀로 있음 속에는 침묵이 들어 있다. 침묵은 현대 문명에 의해 크게 희생당한 것 중 하나다.

우리는 눈을 강하게 자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 때문에 고통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침묵하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기 때문이다. 침묵과 빈 공간 없이 홀로 있음이 어떤 결실을 맺는 일은

  상상할 수도 없다.

 

. 켈트 족 세계에서는 침묵과 미지의 것을 인간 여행의 가장 가까운 동료라고 늘 생각했다.

. 모든 언어는 침묵으로부터 나온다. 깊이와 공감, 치유의 힘을 가진 말들 속에는 수도자의 침묵이 담겨있다.

 

. 깨어 있는 영혼은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자신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소중한 ‘원수’를 가져야한다.

원수를 사랑할 때, 그대는 분노와 위협을 뛰어넘어 자유로워질 수 있다.

 

. 자연의 홀로 있음은 주로 침묵이다. 오래 전 아일랜드 인의 지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했다.

‘산들은 결코 만나지 않지만, 인간은 언제나 서로 만날 수 있다.’

. 모든 나무는 동시에 두 방향으로 자란다. 다시 말해 자신의 바람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지와 뿌리를 함께

   뻗으면서 어둠과 빛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 그대는 단 한 번의 삶을 갖고 있고, 두려움과 거짓된 장애물로 삶에 한계를 그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이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은 매순간 살아있는 일이다.

진정한 신이란 아름다움, 창조성, 어둠, 부정적인 것이 모두 조화를 이룬 존재라고 상상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  “영혼의 동반자” 중에서

 

                  존 오도나휴                                                                       

□  사랑의 기도

                                                                                            류.시화 역

그대에게 좋은 친구가 있기를

또한 그대가 그대 자신에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위대한 사랑과 따뜻함 그리고 느낌과 용서가 있는

그대 영혼 속 장소로 여행할 수 있게 되기를

그 여행길이 그대를 변화시키게 되기를

그것이 그대 안에 있는 부정적이고 차갑고 냉정한 것을 바꿀 수 있게 되기를

진정한 열정과 친밀감과 일체감이 있는 곳으로 그대가 여행하게 되기를

그대가 친구들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기를

그들을 선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들을 위해 그곳에 머물게 되기를

그대의 여행에 필요한 모든 도전과 축복, 진실과 빛을 그들이 가져다 주기를

그대가 결코 홀로 고립되지 않기를

언제까지나 영혼의 동반자들과 함께 편안한 집에 머물게 되기를.

 

□  육체를 위한 기도

 

그대의 몸이 축복 받기를

육체가 그대 영혼의 충실하고 아름다운 친구임을 깨닫게 되기를

그대에게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하기를

그리하여 그대의 감각이 성스러운 출발점임을 알게 되기를

신성함이란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고 느끼고 듣고

접촉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기를

그대의 감각이 그대를 불러 집으로 데려가기를

감각을 통해 지금 그대 안에 있는 우주와 그대 자신의 신비로움

그리고 그대의 가능성을 찬양하게 되기를

무엇보다 대지의 사랑이 그대를 축복하기를.

 

□  홀로 있음의 기도

 

삶에서 영혼의 존재와 힘 그리고 빛을 깨닫게 되기를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며

밝음과 일체감 속에서 그대의 영혼이

우주의 흐름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를

그대 자신의 차이점과 남다른 모습을 존중하기를

그대 영혼의 모습이 독특하고

그대가 이곳에 특별한 운명을 갖고 왔으며

삶의 겉 모습 뒤에는 아름답고 선하고

영원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매순간 기쁨과 자부심과 기대를 가지고 신이 그대를 바라보듯이

그대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보게 되기를.

 

□  일을 위한 기도

 

영혼의 빛이 그대를 안내하기를

영혼의 빛이 그대가 하는 일을 축복하기를

그대가 하는 일에서 그대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기를

그대가 하는 일의 신성함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그대가 하는 일을 보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치유의 빛과 새로움을 가져다 주기를

그대가 하는 일 때문에 지치지 않게 되기를

그대가 자신의 일과 하나가 되게 하기를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채로 무덤덤하게 일하지 않기를

하루가 무거운 짐이 되지 않기를

새벽이 그대를 깨워 맑은 정신을 갖게 하고

새 날에 꿈과 가능성을 갖고 다가가기를

저녁에는 훌륭하게 일을 해낸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를

그리하여 그대를 축복하고 쉬게 하고 지켜주는

밤 속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그대의 영혼이 그대를 평화롭게 하고 위로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를.

 

□  늙음을 위한 기도

 

그대 영혼의 빛이 그대를 보살피기를

늙음에 대한 모든 걱정과 불안이 사라지기를

그대 영혼의 눈이

결실의 아름다운 시간들을 볼 수 있도록

그대에게 지혜가 주어지기를

최선을 다해 그대의 삶을 수확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그대가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상처 입었던 것들이 그대에게 다가와

그대와 하나가 되기를

인간의 존엄성을 갖게 되기를

그대가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느낄 수 있기를

무엇보다 그대 안에 있는 영원한 빛과 아름다움을 만나는

멋진 선물을 받게 되기를

그리고 축복 받게 되기를

그대 자신을 위해

그대 자신 안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기를.

 

 

 

■  사랑의 인식 (철학)

                                                                                                      (마실가 철학목록 중에서 발췌)

 

플라톤의 작품 "향연(symposium)"에서, 사랑(Eros)의 탄생에 대한 한 설화를 아가톤 (Agathon)이 전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태어난 신들은 축제를 벌였다. 그날에 Metis와 Poros의 아들인 포로스(Poros) (아버지 Poros는 재산가이고 어머니 Metis은 재리에 밝은 여인)는 술에 취해 잠들었다. 가난한 거지 여인 페니아(Penia)가 Poros와 관계를 맺어 아무르(Amour)를 낳았다. 그래서 사랑(Amour, Eros)은 빈곤에도 풍요에도 속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의미를 연장해보면, 지식 무지 사이에 있다.

 

 

(영원한 존재)도 인간(죽는 존재)도 아닌 Eros는 양자 사이의 매개이다. 즉 죽음과 불멸, 감성과 지성사이의 중간자이자 매개자이다. 이 사랑이 두 개의 것을 동시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즉 두 개의 기능을 함께 종합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다이몬(Daimon)이다. 이 에로스(Eros)는 빈곤과 풍요를 동시에 소유하는 혼합적 존재이다.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전부 가진 것도 아닌, 즉 있기는 있되 (약간)또는 많은 것을 원하는 그는 역동적이고 불안정 된 존재의 본성을 갖고, 갈망하는 것에 대해 열렬하게 추구하면서도 변덕스런 성격을 가지며, 그것을 얻기 위해 발명적이지만 불만족상태에 머문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로부터 벗어나 지식과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사랑의 특성을 ‘철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사랑(Amour)이 지식(앎의 세계)에로 나감을 동굴의 비유에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감을 뜻하기도 한다.

 

아마도, 플라톤의 의도는 사랑에게 매개자적 지위를 부여하려 한 것 같다. 죽음과 불멸, 빈곤과 풍요, 무지와 지식사이에 참여하는 중간자적 지위로서 에로스(Amour)를 규정하고, 그 의미의 연장으로서 사랑은 철학자이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전체적 흐름으로 보면,

 . 포자니아스(Pausanias)가 말하는 사랑은 복합성의 통일이라고 본 견해,

 .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사랑은 떨어져나간 짝을 되찾으려는 폐쇄라고 본 견해,

 . 아가톤이 전한 사랑은 창조하고 넘어서기를 자극하는 역동성(충동성)이라고 본 견해

 . 디오티메의 입을 빌어 말한 소크라테스는 사랑이란 새로운 발명에로,

   독창적 창조에로 연장이란 견해를 내면서 발전적으로 보려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발전적이고 독창적 창조의 길을 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베르그송이 “창조적 진화”에서 말하는 대의식과 생명의 자기 생성의 길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을까?

 

 

 

 

 

■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

 

                                                                                            (임.헌준,   글 중에서 일부발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이다. 개인의 생각이나 행위는 그 개인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나의 선한 생각이나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나의 그릇된 생각이나 행위가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종교 경전들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불행하게 되지 않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간관계에 관한 여러 가지 실천 덕목들을 제시한다.

 

그 가운데 기독교의 제일 항목은 ‘사랑’이고, 불교의 제일 항목은 ‘자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기독교의 “사랑”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레 19:18) ……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일 4:19).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다(요 3:16; 요일 4:9).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요일 4:10).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인간이 응답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신 사랑을 본받아서 인간관계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15:12)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을 통하여 사랑을 보여주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고(마 5:44),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으며(눅 23:34),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고자 생명까지도 주셨다(고전 15:3; 사 53:6).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와 같은 다른 이를 위한 희생적인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의 모범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하나님의 자녀이다(창 1:27). 하나님 안에서 형제 자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을 본받아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만, 특별히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요일 4:21).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 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요일 4:20). 사랑은“율법의 완성”(롬 13:10)이며, 영원불멸의 진리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 불교의 “자비”

 

“자비(慈悲)”라는 말에서 “자(慈)”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의 범어 “마이트리”(maitri)에서 온 것으로 ‘온갖 생명체를 사랑하여 애지중지하며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비(悲)”는 “동정, 공감, 함께 슬퍼하다”는 뜻을 지닌 범어 “카루나”(karuna)에서 온 것으로 “온갖 생명체를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없애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교 경전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자(慈)이고, 불행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고 말하지만, 자와 비는 거의 같은 심정을 나타내며 마이트리 또는 카루나가 “자비”로 번역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슬픔을 함께 나누는 감정을 통하여 모든 생명 있는 자 위에 확대하여 가는 자비는 불교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근본 구조라고 말할 수 있다. 자비는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사는 이 세상에서 인간 관계에 대한 불교의 실천 원리로 강조된다.

 

“비천한 짓을 해서 지혜 있는 자의 비난을 받지 말고, 오직 자비만을 닦으라.... 마치 어머니가 그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 같이 살아 있는 모든 것 위에 한량없는 자비의 마음을 내어라.... 서 있거나 걸을 때나 앉아있거나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의 마음을 굳게 지녀라” (小部經典, 經集 1, 8. 慈經).

 

나에게 나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이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의 생각은 어디에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 간다 해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은 찾을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는 안 된다”(相應部經典 3, 8 末利).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불교에서는 종종 동체자비(同體慈悲)라는 말을 쓴다. 다른 사람을 나 자신으로 여기고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종법계(四種法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화엄경의 우주관에서는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 등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사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 곧 현상계를 가리키고, 이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가리킨다. 이사무애법계는 이(理)와 사(事), 즉 본체계와 현상계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사사무애법계는 현상계의 각 사물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모든 사물에는 개체가 있고, 또 작용이 있으며 제각기 연기(緣起)하여 자기의 자성(自性)을 지니고 있지만, 사(事)와 사(事)를 서로 상대시켜 보면 다연(多緣)이 서로 상응하여 일연(一緣)을 이루고 있으며 또 一緣은 널리 두루 多緣을 도와서 서로 그 역용(力用)이 교류하게 되고, 사사무애(事事無碍)하고 중중무진(重重無盡)이 된다”는 것이다.

 

사사무애법계의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관계가 성립된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다. 나와 너가 한몸(동체)이다. 인간관계에서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 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동체자비이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면 불교는 자비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관계에서 사랑과 자비는 행복한 세상을 이루기 위한 대강령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전개된다. 그에 비해 불교의 자비는 현실세계의 인간관계에 대한 관조(觀照)로부터 출발하여 이웃에 대한 자비로 전개된다.

 

사랑과 자비는 이렇게 출발점이 다른 만큼 그 지향점도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둘은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공통된 주제를 지니고 있다. 이 사랑과 자비의 동심원을 가족관계에서 이웃으로, 사회로 확대시켜 나갈 때 이 세상은 보다 행복하고 아름답게 될 것이다.

                                                                                  ( “아는 만큼 보인다” , 2005,  글 중에서 )

 

 

 

 

 

■ 기독교의 사랑에 대한 인식

 

 

                                                                                   카페 글 중에서 인용, 글; 베다니의 아침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성령의 사랑이라는 특별한 용어들이 나온다. 인간의 사랑과 구분하는 용어들이다. 신께서 지으신 사람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사랑은 아가페이며 그 사랑을 받은 인간이 신께 반응을 하는 경우는 필레오와 스토르게와 에로스로 나타나는 것이다.

 

.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고후 5:14) (롬 8:35)

. ....성령의 사랑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롬 15:30)

  

진리의 사랑, 청결한 양심 안에서 나오는 사랑,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용어도 있다.

 

.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살후 2:10)

.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딤전 1:5)

.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4:9-11)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아가페 사랑은 신의 사랑이기 때문에 구속 받고 거듭난 영적인 사람의 마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기 전에는 아가페(진리)의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사랑은 사람에게서 기인 된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성령을 통해서 사람에게 부어진 결과로 나오는 것이며, 그 대표적인 표현은 영혼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구원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은 어떤 방면에서는 냉철한 이성을 동반하기 때문에 복음을 대적하는 불의를 보고 엄한 책망을 할 수 있으며 불선을 엄히 책망할 수 있는데 인간적인 사랑은 이렇게 분명하게 선을 그어서 처신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사람의 양심을 씻고 만져서 영혼을 치료하는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그런 당신의 사랑을 부어 구속하신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부탁하셨는데 이것이 곧 새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지만 어떤 이들은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에게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6-10)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 : 44) 

.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눅 6 : 27) 

 

.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눅 6 : 35)

 

.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0-21)

  

.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1)

 

 

 

□  고린도전서 13장은 전체가 사랑에 대해 쓰고 있다.

                                                                                                        (다음지식, like_person)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다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사랑하는 마음에 관한, 명사명언

 

 

  사랑은 두 사람이 마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쌩떽쥐베리)

  사랑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함께 한다. (스페인 속담)

  보통 사람이란 사랑하면 따라 온다. 사랑해도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또한 세상에서 버린 사람이다.

                   (한용운)

 

  사랑의 가망이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남자만이 사랑을 진실로 아는

    남자이다. (쉴러)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은 큰 고통이며,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오트 L V.그륜베르그)

 

  사랑이란 자기 희생이다. 이것은 우연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행복이다. (톨스토이)

  구해서 얻은 사랑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구하지 않고 얻은 것은 더욱 좋다. (셰익스피어)

  사랑의 치료법은 더욱 사랑하는 것밖에는 없다. (H.D.도로우)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또한 기쁨이 있다.

                   (괴테)

 

  너그럽고 상냥한 태도, 그리고 사랑을 지닌 마음, 이것은 사람의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말할 수 없이 큰

    힘인 것이다. (파스칼)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랑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 (리튼)

  사랑은 홍역과 같다. 우리 모두가 한번은 겪고 지나가야 한다.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 (Thomas Mann)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쾌락과 고통, 슬픔과 후회가 거기에 함께 살고 있다.

                    (반 필드)

  사랑은 인간생활의 최후의 진리이며 최후의 본질이다. (슈와프)

  사랑하지 말아야 되겠다고 하지만 뜻대로 안된 것과 같이 영원히 사랑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J.라브뤼이엘)

 

  사랑의 고뇌처럼 달콤한 것이 없고 사랑의 슬픔처럼 즐거움은 없으며, 사랑의 괴로움처럼 기쁨은 없다.

   사랑에 죽는 것처럼 행복은 없다. (E.M.아른트)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라파데르)

  아무도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다. 사랑이란 우리의 생명과 같이 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F.M.밀러)

 

  희망이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자만이 사랑을 알고 있다. (j.C.F.실러)

  사랑은 가장 달콤한 기쁨이요, 가장 처절한 슬픔이다. (P.J. 베일리)

  사랑은 동그라미로서, 똑같은 사랑의 달콤한 영원 속을 끊임없이 맴돈다. (R. 헤리크)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 (T. 만)

  만약 한 사람의 인간이 최고의 사랑을 성취한다면 그것은 수백만의 사람들의 미움을 해소시키는데

   충분 하다. (M.K.간디)

 

  상호간의 사랑과 같은 천국은 없다. (G. 그랜빌)

  죽음보다 더 강한 것은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다. (Thomas Mann)

  사랑은 성장이 멈출 때만 죽는다. (Pearl S. Buck)

  사랑은 삶의 최대 청량, 강장제이다. (Pablo Picasso)

  사랑은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이다. (Oliver Wendell Holmes)

 

  미성숙한 사랑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왜냐하면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에."

   성숙한 사랑은 말한다. "당신을 사랑해요. 왜냐하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 Erich Fromm)

  사랑은 두 사람이 단절된 느낌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크리스토프불프)

 

 

 

 

 성경에서의 사랑

 

                                                                           (다음지식 중에서 인용)

. 성경에는 사랑이란 말씀이 441개 나온다고 한다.     

. 성경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죄와 악으로 배반하고 배척하고 제멋대로 방향 할 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여, 그 방법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가페적인 사랑을 실행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가페사랑을 보여준 실행서 이다.

  

                                                                            (비젼21, 글 중에서)

□  사랑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16)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요일4:7)

사랑함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3:10)

사랑이 예수 안에 있다(딤전1:14)

사랑은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이1:6)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13:8. 10)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4:8)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다(골3:14)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전13:1-3)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요일4:18)

 

사랑이 거룩하게 한다(엡1:4)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전13:4)

사랑은 온유하다(고전13:4)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13:6)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믿고, 소망하고, 인내한다(고전13:7)

 

사랑은 영원하다(고전13:13)

모든 일을 사랑하기 위해서 구하라(고전14:1)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16:4)

사랑은 믿음을 완전케 한다(갈5:6)

믿음으로 나는 것이 사랑이다(딤전1:5)

 

사랑은 성도의 모든 행위의 토양이다(엡3:17. 4:15)

사랑은 수고이다(살전1:3)

사랑은 흉배(방어용 무기)이다(살전5:8)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구원이다(딤전2:15)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다(딤후:7)

 

사랑을 좇으라(딤후2:22)

사랑은 기쁨과 위로를 준다(몬1:7)

사랑은 거짓이 없다(롬12:9. 고후6:6)

사랑은 투기하지 않는다(고전13:4)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전13:4)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전13:4)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잔13:5)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13:5)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전13:5)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전13:5)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13:6)

 

 

□  하나님이 사랑하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16. 고후13:11)

아들 예수를 사랑하신다(요15:9. 17:26. 요10:17. 15:9. 17:23. 24. 26)

아들 예수를 사랑하사 큰 일(구원)을 보이셨다(요5:20)

예수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신다(마3:17. 12:18)

하나님이 예수를 사랑하사 만물을 아들에게 주셨다(요3:35)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요3:16. 요17:23)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우리를 사랑하셨다(요일4:10. 19)

하나님이 잠잠히 사랑하신다(습3:17)-이로 기쁨을 이기지 못해 하신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우리들이다(요11:3)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계1:5)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주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엡2:4-5)

예수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하셨다(요15:10)

바로(악)에게서 속량하시다(신7:8)

너를 사랑하셨다(신7:13)

그리스도인은 사랑하심을 받은 자들이다(살전1:4)

 

사랑하심을 입어 성도라 부르심을 입었다(롬1:7)

백성을 사랑하신다(신33:3)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요13:1)

나그네를 사랑하셨다(신10:18)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여 인도하신다(렘31:3)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다윗을 세우셨다(왕상10:9)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솔로몬을 세우셨다(대하2:11. 9;8)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환란에 동참하신다(사63:9)

극도로 악해져도 사랑은 여전하시다(호3:1)

결혼 때의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렘2:2)

 

사랑의 줄로 이끌어 주시다(호9:4)

신자란 예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요15:9. 10)

그 사랑으로 부음(성령)이 되었다(롬5:5)

성령이 사랑으로 역사 하신다(롬15:30)

사랑은 성령의 열매이다(갈5:22)

 

그 사랑을 예수 죽여 우리를 위하심으로 확증하시었다(롬5:8).

그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빼앗을 자 없다(롬8:35.39)

그 사랑의 강권하심을 받아 헌신한다(고전5:14)

그리스도의 사랑은 넘친다(엡3:18. 5:2)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어 자신을 주셨다(엡5:25)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케 된다(요일2:5)

그 사랑으로 우리를 그 자녀라 일컬으신다(요일3:1)

그가 목숨을 버림으로 그 사랑을 보이셨다(요일3:16)

여호와가 너를 사랑하시므로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사셨다(신23:5)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신다(시33:5. 37:28. 61:8)

 

하나님을 떠난 자 까지 하나님이 사랑하신다(호3:1)

즐거히 저희를 사랑하신다(호14:4)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노라> 하신다(말1:2)

예수를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요14:21)

계명을 지켜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는 거처를 옮겨 계시고 자기를 나타내신다(요14:21)

 

승리는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얻는다(롬8:37)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후9:7)

나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다(갈2:20)

사랑하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이시다(살후2:16)

주는 사랑하는 자(대우하시어)를 징계하신다(히12:6. 계3:19)

 

여호와의 사랑하심을 입은 자이다(신33:12)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사단에게 알게 하신다(계3:9)

주의 사랑하신 자를 건지신다(시60:5)

하나님이 의인을 사랑하신다(시146:8)

여호와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127:2)

 

특별한 경우(행위가 악하여) 다시는 사랑치 아니하다(호9:15)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부재 한다(요일2:15)

 

 

□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출20:6. 신5:10. 6:5. 7:9. 10:12. 11:1. 13. 22. 19:9. 수23:11. 마22:37)

누구보다(부모) 더 사랑해야 한다(마10:37)

하나님의 장막을 사랑한다(시84:1)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킨다(요일4:21)

보지 못하나 사랑하는 도다(벧전1:8)

 

사랑하는 자의 나라, 교회를 사랑한다(사5:1)

성도란 명칭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롬8:28)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고 계신다(고전2:9)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저를 알아주신다(고전8:3)

성도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이다(시97:10)

 

주를 사랑한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요14:15. 21. 23. 요일5:3)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였다(왕상3:3)

하나님을 사랑하나 안 하나를 시험하라 하신다(신13:3)

예수를 사랑하는 데는 경쟁도 불사하라(요21:15)

예수를 사랑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해 놓으셨다(약1:12)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신30:6. 16)

하나님을 사랑, 사랑, 사랑하여 노래하라(사5:1)

신앙의 진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눅11:42).

신앙의 생명은 하나님을 사랑함이다(요5:42)

하나님을 사랑하여 평화를 건설하는 것이다(삿5:31)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느1:5)

주의 이름을 사랑한다(시5:11. 69:36. 119:132)

주의 말씀을 사랑한다(시119:140)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주의 집과 영광이 거하는 곳, 예루살렘을 사랑한다(시26:8. 122:6. 사66:10)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시119:97. 113. 119. 127. 159. 163. 165. 167)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시31:23)

주의 구원을 사랑하라(40:16)

시온산을 사랑하신다(시78:68)

시온의 문을 사랑하신다(시87:2)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신다(시145:20)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잠3:12)

사랑하는 자를 건지신다(시91:14)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라(엡6:24)

 

 

□  이웃을 사랑하여,

 

서로 사랑하라(살전4:9. 요일3:11. 요일4:11)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요일4:19)

많이 사랑하라(눅7:47)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하라(고후2:4)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신다(요일4:12)

서로 사랑함이 계명 완수이다(요15:12. 요일3:23)

이웃을 사랑하라(마5:43)

너희 원수까지 사랑하라(마5:44)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 34. 마19:19. 22:39)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다(삼상18:3. 20:17)

요나단의 다윗 사랑은 여인의 사랑을 능가했다(삼하1:26)

다윗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까지 사랑했다(시109:4)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한다(롬12:10)

잘못한 자들에게 대하여 사랑함을 나타내라(고후2:8)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도우면 하나님의 사랑이 머문다(요일3:17)

나를 덜 사랑하여야 남을 더 사랑하게 된다(고후12:15)

형제를 사랑하여야 구원을 얻는다(요일3:14)

예수가 그러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13:34)

예수가 가르침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요15:17)

 

피차간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신다(살전3:12)

사랑은 서로를 근심하게 하지 않는다(롬14:15)

서로 사랑함이 예수의 제자된 증거이다(요13:35)

친구를 사랑하는 것이 최고이다(요15:13)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

 

모든 성도를 향해 사랑하라(엡1:15)

사랑은 서로 용납하는 것이다(엡4:2)

더욱 많이 할 것이 사랑이다(살전3:12)

무엇보다 더 할 것이 사랑이다(벧전4:8)

사랑으로 입추라(벧전5:14)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알리라(요일4:7).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지지 말라(롬13:8)

예수가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에 거하라(엡5:2)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라(벧전1:22. 2:17)

 

 

 

 

■  사랑이 무엇이기에 ......

 

 

 

 □  사랑

 

                                            한용운

봄 물보다 깊으리라

가을 산보다 높으리라

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

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  떠날 때의 님의 얼굴

 

                                             한용운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못 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에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 바로 볼 수가 없을 만큼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 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겠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

하지만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도 아프겠습니다

 

 

 

 □  사랑하는 까닭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인연

 

                                             한용운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땐 잊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을 못 잊는 것이요

그 만큼 그 사람과 사랑했다는 것이요.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초이며 이별의 시달림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가다가 달려오면

사랑하니 잡아달라는 것이요

가다가 멈추면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는 것이요

뛰다가 전봇대에 기대어 울면

오직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한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애처롭기 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 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 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 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  사랑의 존재

 

                                한용운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벌써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이름 지을 만한

말이나 글이 어디 있습니까.

 

미소에 눌려서

괴로운 듯한 장미빛 입술인들

그것을 스칠 수가 있습니까.

 

눈물의 뒤에 숨어서

슬픔의 흑암면(黑闇面)을 반사하는

가을 물결의 눈인들 그것을 비칠 수가 있습니까.

 

그림자 없는 구름을 거쳐서,

메아리 없는 절벽을 거쳐서,

마음이 갈 수 없는 바다를 거쳐서 존재..

존재입니다.

 

그 나라는 국경이 없습니다.

수명은 시간이 아닙니다.

 

사랑의 존재는

님의 눈과 님의 마음도 알지 못합니다.

 

사랑의 비밀은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압니다.

 

 

 

 □  사랑의 측량(測量)

 

                                               한용운

즐겁고 아름다운 일은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사랑은 양이 적을수록 좋은가 봐요.

 

당신의 사랑은 당신과 나와 두 사람의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양을 알려면, 당신과 나의 거리를 측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은 사랑은 나를 웃기더니, 많은 사랑은 나를 울립니다.

뉘라서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진다고 하여요.

 

당신이 가신 뒤로 사랑이 멀어졌으면,

날마다 날마다 나를 울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어요.

 

 

 

□  사랑이란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 하지 말고

잠시 같이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 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 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 태운다고 원망 하지 말고

애처럽기만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줄 수 없음을 아파 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 한다고

질투 하지말고

알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 하지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 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 하렵니다...

 

 

 

 □  천년 사랑

 

                                              한용운

천년에 한 알씩

모래를 나르는

황새가 있었단다

그 모래가 쌓여 산이 될 때까지

너를 사랑하고 싶다.

 

천년에 한번 피는 꽃이 있었는데

그 꽃의 꽃잎이 쌓이고 쌓여

하늘에 닿을 때까지

너를 사랑하고 싶다.

 

학은 천 마리를 접어야

행복을 가져다 주지만

나에겐 너만 있으면

행복하다.

 

하늘에게 소중한 건 별이고

땅에 소중한 건 꽃이고

나에게 소중한 건

바로 너란다.

 

내가 한강에 백원을 빠트렸을 때

그거 찾을 때까지 우리 사랑하자.

 

예전엔 모르던 사랑

지금은 편안한 사랑

나중에 편안할 사랑

바로 너란다.

 

장미꽃은 사랑

안개꽃은 죽음을 뜻하는데

난 너에게

안개꽃의 장미를 꽂아주고 싶다.

 

왜냐면?

난 너를 죽도록 사랑하니까.

 

영혼이 맑은 그대

일생을 통해 만난

이 세상 다 변해도

사랑해요 영원히 ............

 

햇살이 눈부신 날

투명한 유리병에

햇살을 가득 담고 싶다.

너의 흐린 날에 주기 위해서..

 

사랑한단 말이다

사랑한단 말이다

사랑한단 말이다

 

 

 

□  사랑

 

                                                김남조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 엎고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줄 안다

 

천년을 두고

봄의 언덕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안다

 

그리고 가실을 끝낸 들에서

사랑만이

인간의 사랑만이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  사랑초서

 

                                               김남조

1

사랑하지 않으면

착한 여자가 못 된다

소망하는 여자도 못 된다

사랑하면

우물 곁에 목말라 죽는

그녀 된다

 

 2

하늘땅 끝머리

저승만이나 먼먼 집에

아침엔

햇빛 나르고

저녁엔

바람 나르고

 

3

너무 굶기면

사랑도 죽네

더운 물을 삼켜도 가슴 추운

병이 깊어

내 사랑, 사랑이여

눈감았음을

 

4

먼 길 긴 시름으로

새 풀 초당에 임 돌아오시면

온 천지 불 혀이네

어질 머리와 눈물 나는

교회당이네

 

5

소리없이 뿜기는 샘물

소리없이 엉기는 이슬

이쯤의 것이네

젖어서 전기가 와도

침묵 안의 것이네

 

6

나를 먹이는 사람

原子로 먹이는 사람

불씨 한 점으로

해돋이 저녁노을

다 불붙이네

 

7

탄생에 축복을

만남과 헤어짐에 축복을

죽음엔 더 축복을

사랑에겐

사랑을 보태어주소서

주여

 

8

말은 잔모래

물결에 쓸리는

돌의 포수 (泡洙)

말로선 못 가는 수평선에

이름으론 못부를

한 사람 있다

 

9

오늘은 사랑이 내 인격이다

아니, 모든 날에

사랑이 내 인격였다

 

10

사랑은

관습의 시력

되풀이하는 해후

세번 세상의

동일영육

 

11

마음에 대답하는 마음

영혼에 산울림 하는 영혼

이를 생각만 해도 나는 운다

굶주렸고 바보인

아이처럼

 

12

사랑의 추위

추워지려고 사랑하는지도

모를

둘의 약봉(約逢)

 

13

소리지르게

쓸쓸한 이날

존재의 밑바닥에 시린 샘물에

큰 용서(容恕)처럼 생긴

사랑 하나

빛나고 있다

 

14

사람 몸엔

그림자

사람 마음엔

아홉 하늘 살 맞대고 오는

(靑) 메아리

 

15

누군가 네 영혼을 부르면

나도 대답해

소름 끼치며 처음 아는

영혼의 동맹 (同盟)

 

16

이름없는 사람아

이름없는 은총에서 태어난

나의

금동아기

 

17

어리디 어린

봄날,

흙 속 구근들 귀밑머리 돋아 나

첫 햇살 쬔다

보고 싶은 가려진

내 마음도

 

18

새벽에 그가 온다

그의 가난이 문을 두드린다

이날의 삶이 열린다

아아 두 낱의 가난이 만나 해로의

한 연분을 맺은 외엔

더 아는 것이라곤 없다

 

19

내 임종엔

성탄절 찬미가를

다 쓰고 가는 사랑을

영혼의 어부

주 그리스도를

 

34.

평생에 그 하나

손 안 댄 죄를

죄 지으려면 그대와 나눠야지

마른 날 불벼락의

모진 천벌도

그대하고 나눠야지

 

44.

하늘이 못 주신

사람 하나를

하늘 눈 감기고 탐낸 죄

사랑은

이 천벌

 

55.

한 바다 수심을

혼자서 다 뎁히는 사람

물결 하나하나

신령 붙여

보내는 사람

 

69.

가시와 꽃들이

불타는 곳에

내가 재 되는 줄 알면서

아프면서 기쁘면서

그대와 불타는 곳에

 

83

사랑은

정직한 농사

이세상 가장 이른 날에 씨를 뿌려

가장 늦은 날에 싹을 보나니

 

86.

내 사랑 용서 하시오면

임의 사랑 용서 바치오리

일월성신

즈문 날에

황송하고 고맙고

죄지은 마음

 

 

 

 □  겨울 사랑

 

                                               김남조

겨울은 성숙한 계절

봄에 사랑이라 싶은 한 마음을 만나

망월(望月)의 바람 부풀더니

가을엔 그 심사 깊어만 져

모진 기갈에 시달렸지

 

눈 시린 소금밭의 짠맛보다도

더 매운 겨울 모랫바람

수수천만 조각의 삭풍이 가슴 맞대인

이 쩡한 돌거울에

눈꽃 송이송이 흩날리고

눈부시며 눈부시며

그대 보이옵느니

 

피가 설었을 젠

못 얻은 사랑

삼동 바닥 없는 추위에

무상(無償)의 축원 익혀

오늘 임 맞이하네

 

 

 

 

□  사랑의 말

 

                                               김남조  

1.

사랑은

말하지 않는 말,

아침해 단잠을 깨우듯

눈부셔 못 견딘

사랑 하나

입술 없는 영혼 안에

집을 지어

대문 중문 다 지나는

맨 뒷방 병풍 너머

숨어 사네

 

옛 동양의

조각달과

금빛 수실 두르는 별들처럼

생각만이 깊고

말하지 않는 말,

사랑 하나

 

2.

사랑을 말한 탓에

천지간 불붙어버리고

그 벌이 시키는 대로

세상 양끝이 나뉘었었네

한평생

다 저물어

하직 삼아 만났더니

아아 천만 번 쏟아 붓고도

진홍인 노을

 

사랑은

말해버린 잘못조차

아름답구나

 

 

 

 □  사랑하리, 사랑하라

 

                                              김남조(金南祚)

아니라 하는가

사랑이란 말

아니 비련이란 말에 조차

황홀히 전율 이는

순열한 감수성이

이 시대에선

어림없다 하는가

벌겋게 살결 패이는

상처일지라도

가슴 한복판에

길을 터 달리게 하는

절대의 사랑 하나

오히려 어리석다 하는가

 

아니야, 아닐 것이야

천부의 사람마음

새벽 숲의 젊은 연초록으로

치솟아 오름을

누구라 막을 것인가

 

사랑하리, 사랑하라

그대 영혼 그리고

그대 사랑하는 이의 영혼

충만하도록

그 더욱 사랑하리, 사랑하라

                        - 新婦에게

 

 

 

   사랑도 쉬게

 

                                               김남조

이 슬픔

기름으로 부어

불을 켜게 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눈물

오늘은 눈물을 용서하시고

번뇌를 용서 하옵소서

 

여인의 생애는

기다림으로 흐르는 강이옵니다

인내와 그리움으로 닦는

청동의 거울이옵니다

아베 마리아

 

이 슬픔 익으면

그를 먹이는

술이라도 되게 하옵소서

옥 빛 눈물이라도 되게 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고독

오늘은 고독을 허락하시고

위로를 허락 하옵소서

 

견디고 견딘

그 나머지의 피곤

오늘은 안깃을 불러 주시고

편안한 긴 잠에

사랑도 쉬게 하옵소서

아베 마리아

 

 

 

□  사랑하고 싶은 날

 

                              오탁번

앵두나무 꽃 그늘에서

벌떼들이 닝닝 날면

앵두가 다람다람 열리고

앞산의 다래나무가

호랑나비 날갯짓에 꽃술을 털면

아기 다래가 앙글앙글 웃는다

 

태초 후

45 억 년쯤 지난 어느 날

다랑논에서 올벼가 익어갈 때

청개구리의 젖은 눈알과

알밴 메뚜기의 볼때기에

저녁노을 간지럽다

 

된장독에 쉬 슬어놓고

앞다리 싹싹 비벼대는 파리도

거미줄 쳐놓고

한나절 그냥 기다리는

굴뚝빛 왕거미도

다 사랑하고 싶은 날 

 

 

 

□  사랑은 1

 

                            용혜원

사랑은

둘이 하나 되는 것이기에

 

욕망 속에

칡넝쿨 엉키듯

엉키고 엉켜 몸부림쳐도

사랑은 아니고

 

허무함 속에

타오르는 목줄기의 갈증을

축이고 싶다 해도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기다려 주고

참아 주고

견디어 줄 수 있어야 하기에

 

멀리 있어도

가까이 있어도

늘 같이하고

늘 마음에 담고 살 갈 때

진정 사랑입니다.

 

 

 

  사랑은 2

 

용혜원

사랑은

자유를

기쁨을

환희를 준다

 

사랑은 생각하게 하고

파묻혀 버리고 싶게 한다

 

사랑은

너와 나를

하나로 만들어 준다

생명의 빛을 발한다

 

사랑은

너와 나의 모든 것을

감싸 주는 놀라운 힘이 있다

 

 

 

□  사랑은 3

 

용혜원

만나기 전에

사랑은

온통 기다림이야

 

만나면 만날수록

사랑은

온통 설레임이야

 

빠져들면 들수록

사랑은

온통 감동이야

 

떠나 있으면

사랑은

온통 그리움이야

 

떠나가 버리면

사랑은

온통 슬픔이야

 

 

 

□  아름다운 사랑

 

                            용혜원

삶을

처절하게 투쟁하며

투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군중을 이끌어가며

영웅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사랑 한 번 못했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삶을 풍요롭게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수고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사랑 한 번 하지 못했다면

그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혼자만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네가 있어야 한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위하여

 

 

 

□  사랑하는 사람아

 

용혜원

두 손을 꽉 쥔

안타까움 속에

그리워하던 사람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리워하던 사람이

 

정작 만나면은

한 마디 말도 못하고

가벼운 웃음만 띄우고

돌아서는

 

사랑하는 사람아

사랑하는 사람아

 

외로움은 어찌해야 하나

외로움은 어찌해야 하나

 

 

 

□  나는 사랑했다

 

용혜원

나는 사랑했다

너의 모든 것을

나에게 주는 고통까지

사랑했다

깊숙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헤어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끝없는 사랑

영원한 사랑은

순수해야 아름답다

나는 지금도 너를 사랑한다

 

 

 

  그대를 사랑하기에....

 

용혜원

그대에게 아직

못다 한 말이 남아 있습니다

두려움은 절망을 만들어 내지만

그대를 만난 기쁨은 행복을 만들어냅니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흘러간 세월에 아쉬움이 간절해

가슴앓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날이 지나가도록

이 한마디를 미친듯이 외치고 싶었지만

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들썩이다 말았습니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쓰라린 슬픔도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지금

숨이 막히도록 좋습니다

 

나는 아무 두려움이 없기에

내 마음을 그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눈물이 가슴속에서 흘러 넘칩니다

 

그대를 사랑하기에

그대를 만나는 것도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것도 행복합니다

 

 

 

  사랑아, 가지 마라

 

공석진

사랑아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떠나지 마라

 

추억, 머릿결로 곱게 빗질하고

슬픔 가득 옷자락을 걸치면 

분명 이별을 예고한다

 

눈을 감는다고 하늘이 감춰질까

이별 후의 고통을 예감하며

다정한 시선으로 장막을 치는구나

 

사랑은 봇물 터져 강이 되는데

한 줌 미소로 달래려느냐

한 웅큼 아쉬움으로 침묵하려느냐

 

바닷물이 하늘로 올라 구름이 되듯

강물이 바다가 되도록 사랑하다가

구름 위의 산책을 즐기자

 

서러움이 복받치는 사랑아

가지 마라 가지 마라

떠나지 마라

 

 

 

□  사랑하는 명자씨

 

공석진

명자씨

사랑하는 명자씨

사랑을 위하여 꽃 피우지 마세요

상처 받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닐진대

꽃이 지고 난 후

이파리 바람에 날아가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저 눈물만 가득 뿌리며

맨바닥에 뒹굴면 어쩌시려구요

 

명자씨

서러운 명자씨

다가올 사람 유혹하지 마세요

떠나간 사람 그리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선홍 빛 자태는 눈부시나

새벽녘 감춰진 이슬의 영롱함은

세상 사람들의 이기심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굳이 본능으로

애써 꽃 피우려거든

뭇 남정네들에게 보이지않는

먼지 가득 머금은 길 목련으로

거친 산등성 후미진 곳에 자리하세요

 

혹여

산심(山心) 캐는 심마니처럼

당신의 겸손함을 사랑하여

평생 맺어질 가인(佳人)으로

다가설 지도 모르니까요

 

 

 

□  금지된 사랑

 

공석진

산을 오르다

산의 뜻으로

당신을 만났습니다

계율(戒律)이 힘들게 하지만

성모 앞에 고백하며

돌에 맞는 고통을 댓가로

수녀복, 하얀 베일

가지런히 종탑 뒤에 벗어놓고

못내 아쉬운 발길을 돌리렵니다

 

산길 오르다

돌계단에 주저앉아

무심히 보내주는

고단한 시선에

시나브로 빠졌습니다

세속(世俗)을 떠나

불자로 구원한

부처님의 자비도 이제 부질없는

파계(破戒) 된 죄인으로 돌아가렵니다

 

그리하여

금지된 길을 가다가

훗날

뒤돌아보며

후회하지않도록

발자국을 지우렵니다

 

 

 

□  사랑이 지나간 자리

 

고은영

번뇌의 찰라 마다.

각자의 몫만큼 우리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어둠의 강을 향해 한걸음씩

무겁게 걸어가고 있었다.

 

회한으로 이는 바람결에

사랑의 기억들은 매몰돼 가고

문신처럼 가슴에 남은

부스러기 연민조차도

희망할 수 없던 이별

 

철골 같은 앙상한 뼈마디에

미움을 빽빽이 숨긴 채

레일을 달리는 기차처럼

각자 굽은 등으로 돌아서던

우리 사이에 불던 살을 에던 바람

 

믿음과 신뢰를 버린 눈동자 위로

끈적이던 심중의 담담한 어조

불신이 준 감당할 수 없는

관계의 기억들은

분진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작별은

별 감흥도 없이 끝나고 마는

건조한 무덤 같은 관계를 끝으로

상쾌한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던

여름 중심의 불쾌지수

 

어쩌면 쪽빛 바다 위

하늘을 선회하는 물새 한 마리가 

죽도록 그리워지고 있었다.

 

 

 

■  김용택 시인의 "사랑의 시"

 

    (여자 사랑, 가족 사랑, 고향 사랑 그리고 그 고향의 사투리 사랑  ......)

 

 

□  봄날은 간다

                                        김용택

 

 진달래...

 

 염병한다 시방, 부끄럽지도 않냐

 다 큰 것이 살을 다 내놓고

 훤헌 대낮에 낮잠을 자다니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허겠다 시방.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울 잡아끌고 초저녁

 이슬 달린 풋보리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 덧없다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은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 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  사랑하는 너에게

 

                                  김용택

네가 잠 못 이루고 이쪽으로 돌아누울 때

나도 네 쪽으로 돌아눕는 줄 알거라.

 

우리 언젠가 싸워

내게 보이던 고운 뺨의 반짝이던 눈물

 

우리 헛되이 버릴 수 없음에

이리 그리워 애가 탄다.

 

잠들지 말거라 깨어 있거라

먼데서 소쩍새가 우는구나.

 

우리 깨어 있는 동안

사월에는 진달래도 피고

오월에는 산철쭉도 피었잖니.

 

우리 사이 가로막은 이 어둠

잠들지 말고 바라보자.

 

, 보이잖니

파란 하늘 화사한 햇살 아래

 

바람 살랑이는 저 푸른 논밭

화사한 풀꽃들에 나비 날지 않니.

(아, 너는 오랜만에 맨발이구나)

 

이제 머지않아 이 얇아져가는꿉꿉한 어둠 밀려가고

허물 벗어 빛나는 아침이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화창한 봄날 날잡아 대청소를 하고

그때는 우리 땅에 우리가 지은 농사

 

쌀값도 우리가 정하고

없는 살림살이라도

 

오손도손 단란하게 살며

밖으로도 떳떳하고 당당하자꾸나.

 

그날이 올 때까지 잠들지 말고

어둔 밤 깨어 있자꾸나, 어둠을 물리치며

 

싸우자꾸나, 아침이 올 때까지

손 내밀면 고운 두 뺨 만져질 때까지

 

그리하여 다리 쭉 뻗고 곤히 잠들 때까지.

네가 뒤척이는 이 밤

 

나라고 어찌 눕는 꼴로 잠들겠느냐.

 

 

 

□  사람들은 왜 모를까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벗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선운사 동백꽃

                                              김용택

 

여자에게서 버림받고

 

살얼음 낀 선운사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여자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  산울림

 

                                    김용택

아부지, 왜 이리 무덤까지가 멀다요.

 

오늘도 나는 아버지 무덤에 닿지 못하고

해 진 풀잎들과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길 찾지 못합니다.

 

아부지, 죽음에서 삶까지 길이 왜 이리 멀다요.

 

야 이놈아

없는 세상의 길을 찾지 말고 논을 찾아라 논을.

 

 

 

 

□  그 여자네 집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눈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  그대 거침없는 사랑

 

                                         김용택

 

아무도 막지 못할

새벽처럼

거침없이 달려오는

그대 앞에서

나는

꼼짝못하는

한떨기 들꽃으로 피어납니다

 

몰라요 몰라

나는 몰라요

 

캄캄하게

꽃 핍니다

 

 

 

□  그랬다지요

 

                                       김용택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밤이슬

                                        김용택

 

나는 몰라라우

인자 나는 몰라라우

 

하얀, 하이얀 어깨에 달빛이 미끄러지고

서늘한 밤바람 하 줄기 젖은 이마를 지난다

 

저 멀리 풀잎에 이슬들이 반짝이는데

언제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오는지 자욱한 풀벌레, 풀벌레 울음

소리

 

, 저기 저 산 달빛에 젖어

밤새가 우네

 

 달을 안고 앉아 산을 보는 사람아

살에 붙은 풀잎을 떼어내는 여인의 등에

얼굴을 묻네 

 

 

 

□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

 

                                      김용택

환장허겄네 환장허겄어

, 농사는 우리가 쎄빠지게 짓고

쌀금은 저그덜이 편히 앉아 올리고 내리면서

 

며루 땜시 농사 망치는 줄 모르고

나락도 베기 전에 풍년이라고 입맛 다시며

장구 치고 북 치며

 

풍년잔치는 저그덜이 먼저 지랄이니

우리는 글먼 뭐여

신작로 내어놓응게 문뎅이가 먼저 지나간다고

 

기가 차고 어안이 벙벙혀서 원

, 저 지랄들 헝게 될 일도 안된다고

올 농사도 진즉 떡 쪄먹고 시루 엎었어

 

,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이사 바로 혀서

풍년만 들면 뭣헐 거여

안되면 안되어 걱정

잘되면 잘되어 걱정

풍년 괴민이 더 큰 괴민이여

 

뭣 벼불고 뭣 벼불면 뭣만 남는당게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뙤놈이 따먹는 격이여

, 그렇잖혀도 환장헐 일은 수두룩허고

헐 일은 태산 겉고 말여

 

생각허면 생각헐수록

이갈리고 치떠리능게 전라도 논두렁이라고

 

말이 났응게 말이지만 말여

, 머시기냐 동학 때나 시방이나

우리가 달라진 게 뭐여

 

두 눈 시퍼렇게 뜬 눈 앞에서

생사람 잡아 논두렁에 눕혀놓고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똥 뀌고 성내며

사람 환장혀 죽겄는지 모르고

 

곪은 데는 딴 데다 두고 딴소리 허면서

내거 헐 소리 사돈들이 혓잖여

 

, 시방 저그덜이 누구 땜시 호강 호강 허간디

호강에 날라리들이 났당게

 

못된 송아지 엉뎅이에 뿔 돋고

시원찮은 귀신이 생사람 잡는다는 말이 맞는개비여

 

사람이 살면은 몇백 년을 사는 것도 아니겄고

사람덜이 그러능게 아녀

뭐니 뭐니 혀도 말여 사람은

심성이 고와야 허고

밥 아깐지 알아야 혀

 

시방 이 밥이 그냥 밥이간디

우리덜 피땀이여 피땀

밥이 나라라고 나라

 

자고로 말여 제 땅 돌보지 않는 놈들허고

제 식구 미워하는 놈들

성헌 것 못 봤응게

 

, 툭 터놓고 말혀서

쌀금이 왜 이렇게 똥금인지 우린 모르간디

우리라고 뭐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창사도 없는 줄 알어

 

지그덜이사 뱃속이 따땃헝게

뱃속 편헌 소리들 허고 있는디

그 속 모르간디

 

그러고 말이시

, 없는 집안 제사 돌아오듯 허는

그놈의 잔치는 왜 그리도 많혀

 

땡큐땡큐 하이하이 혀봐야

저근 저그고 우린 우리여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 덕에

뭣 나발들 엥간이 불며

실속없이 남의 다리 긁지 말고

가려운 우리 다리나 착실히 긁어야 혀

 

그저 코쟁이야, 왜놈이야 허면

사족들을 못 쓴당게

사람들이 말여 쓸개가 있어야 혀 쓸개

 

, 생각들 혀보드라고

여직 땅 갈라진 채로 이 지랄들이니

남 보기도 부끄럽고 챙피혀서 말여

긍게 언제까장 이 지랄발광헐 거여 긍게

 

긍게 북한이 외국이여

꺼떡하면 4천만 동포, 동포 허는디

 

, 그러고 말이시

우리가 어디 한두 번 농사 망쳐봤어

쩍 허면 입맛 다시는 소리고

딱 하면 매맞는 소리

철부덕 허면 똥 떨어지는 소리여

 

, 제미럴 헛배 부를 소리들 작작 허라고

, 제미럴 우리는 뭐 흙 파먹고 농사 짓간디

 

고름이 피 안되고 살 안되게

짤 것은 짜내야 혀

 

하나를 보면 열을 알겠더라고

새 세상에 새 칠로 말허겄는디 말여

그 속 들여다보이는

선거고 나발이고

 

, 말이 났응게 진짜 말허겄는디

선거만 허면 질이여

, 뭐여 그러면 민주냐고

민주가 뭣인지 잘 모르지만 말여

 

제미럴, 가다오다 죽고

총맞아 매맞아 죽고

엎어져 뒤집혀 죽고

곧 죽어도 말여

 

우린 넓디넓은 평야여

두고두고 보자닝게 군대식으로 혀도 너무들 허는디

우리는 말여 옛적부텀

만백성 뱃속 채워주고

 

마당은 삐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치고

논두렁은 비뚤어쳤어도

농사는 빤듯이 짓는

전라도 농군들이랑게

고부 들판에 농군들이여

 

참 오래 살랑게

벼라별 험헌 꼴들 다 겪고

 

지금은 이렇게 사람 모양도 아닝 것맹이로

늙고 병들었어도

다 우리들 덕에 이만큼이라도

모다덜 사는지 알아야혀

 

아뭇소리 안허고 있응게 다 죽은 줄 알지만 말여

아직도 이렇게 두 눈 시퍼렇게 부릅뜨고

땅을 파는

농군이여

농군

 

 

 

□  섬진강 12

 

                                       김용택

세상은 별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은

누구누구 때문이 아니구나.

 

새벽잠에 깨어

논바닥 길바닥에 깔린

서리 낀 지푸라기들을 밟으며

 

아버님의 마을까지 가는 동안

마을마다

몇 등씩 불빛이 살아 있고

새벽 닭이 우는구나.

 

우리가 여기 나서 여기 사는 것

무엇무엇 때문도 아니구나.

 

시절이 바뀔 때마다

큰소리 떵떵 치던

면장도 지서장도 중대장도 교장도 조합장도 평통위원도

별것이 아니구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또 어디도

시도 철학도 길가에 개똥이구나.

 

아버님의 마을에 닿고

아버님은 새벽에 일어나

수수빗자루를 만들고

 

어머님은 헌 옷가지들을 깁더라.

두런두런 오손도손 깁더라.

 

아버님의 흙빛 얼굴로,

어머님의 소나무 껍질 같은 손으로

 

빛나는 새벽을 다듬드라.

그대들의 눈빛, 손길로 아침이 오고

우리들은 살아갈 뿐,

 

우리가 이 땅에 나서 이 땅에 사는 것

누구누구 무엇무엇 때문이 아니구나.

 

비질 한번으로 쓸려나갈

온갖 가지가지 구호와

토착화되지 않는

이 땅의 민주주의도,

 

우리들의 어설픈 사랑도 증오도

한낱 검불이구나.

 

빗자루를 만들고 남은 검불이구나.

나는 헐은 토방에 서서

아버님 어머님 속으로 부를 뿐

 

말문이 열리지 않는구나.

목이 메이는구나.

 

 

 

□  섬진강 17

 

                                       . 김용택

추석에 내려왔다

추수 끝내고 서울 가는 아우야

 

동구 단풍 물든 정자나무 아래

-차비나 혀라

-있어요 어머니

 

철 지난 옷 속에서

꼬깃꼬깃 몇 푼 쥐여주는

소나무 껍질 같은 어머니 손길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고개 숙여 텅빈 들길

터벅터벅 걸어가는 아우야

 

서울길 삼등열차

동구 정자나무잎 바람에 날리는

쓸쓸한 고향 마을

 

어머니 모습 스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어머니 어머니 부를 아우야

 

찬 서리 내린 겨울 아침

손에 쩍쩍 달라붙는 철근을 일으키며

공사판 모닥불 가에 몸 돌리며 앉아 불을 쬐니

팔리지 않고 서 있던 앞산 붉은 감들이

 

눈에 선하다고

불길 속에 선하다고

 

고향 마을 떠나올 때

어여 가 어여 가 어머니 손길이랑

 

눈에 선하다고

 

강 건너 콩동이랑

들판 나락 가마니랑

누가 다 져날랐는지요 아버님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불효자식 올림이라고

 

너는 편지를 쓸 것이다

                                     선운사 동백꽃 외 / 김용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