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23.좋음과 옳음

좋음과 옳음 (Good & Right)

오갑록 2011. 4. 5. 18:32

좋음과 옳음 ......

 ■  좋아 한다는 것

 

     “좋~~아 하네~!”  

 혼잣말로 빈정대는 말투로 툭 하고 종종 던져지는 말투다. “어느 무엇만”을 좋아한다는 한정적인 의미, 또는 이루기 힘든 일에 자기 분수를 넘는 욕심을 부린다는 의미 등으로 쓰인다. 그 상대로는, 돈 여자 권력 명예 특기 취미 건강을 비롯하여 도덕적 윤리적 덕목이나 진선미(眞善美) 따위의 개념에 빗대어 쓰여진다.

 

(부자?) 좋~~아 하네~! (자기 주제도 모르고 ……)

(백살?) 좋~~아 하네~!

(솔직?) 좋~~아 하네~!

(예뻐?) 좋~~아 하네~!

(존경?) 좋~~아 하네~!

 

좋다는 것은 그 이유나 원인이 있기도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좋아하는 일도 많다. 타인이 보기에는 더욱 그런 경우가 많게 된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 언제부터 또는 언제까지 좋아하는지, 누가 누구를 좋아 하는지, 어떻게 얼마나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모양새도 가지가지로 구성되곤 한다.

 

좋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음은 ‘싫다’의 반대로서 ‘좋다(好)’와 , ‘나쁘다’의 반대로서 ‘좋다(善)’ 라는 두 종류의 의미가 있다. 전자는 주관적인 감정 표현인데 반해, 후자는 객관적인 가치 평가이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감각기관인 오감을 포함해서 또는 마음이나 정신적으로 자기에게 선(善)한 방향으로 느껴지는 그 무엇을 통칭하는 같은 의미의 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향이며 맛이 좋고, 곧거나 굴곡진 선(線)이며 면(面), 색과 빛이 곱다거나 멋지고, 질감이며 촉감이 부드럽다거나 매끄럽고, 때로는 따뜻해서, 때로는 시원해서 좋기도 하며, 소리가 곱다는 등의 오감을 통해 선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음 씀씀이며 정신적으로나 어떤 영감이 작용하여 자기에게 선하게 느껴질 때도 우리는 통상 좋다고 말 한다. 때로는 그 수량이나 크기, 모습 따위가 욕심을 채우리 만큼 한 크기일 때도 좋다고 한다. 

 

이러한 “좋다”는 의미의 대표격인 복합체는 역시, “사랑(愛)”이라는 이름으로 느껴지는 사람의 감정이 아닐까? 진정어린 사랑(愛)이란, 우리가 육체적으로는 오감을 통해서 그리고 마음까지도 선한 방향의 동요를 느끼게 된다고 본다. 사랑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이성간에 갖게 되는 사랑, 모성애나, 부모 형제와 같은 혈육, 이웃 종족 인류와 같은 사회적인 관계에서 느끼는 사랑이 있고, 종교적인 관점이나, 학문, 금권, 명예 따위의 자기욕망의 관점에서 표현되는 사랑도 있다. 이들 중 우리가 가장 쉽게 느낄 수 있는 좋은 예로는 역시 이성간의 사랑을 꼽을 수 있다.

 

서로 스치며 닿기만 해도 전율이라도 느낄 만큼 좋은 촉감, 눈빛으로 나누는 서로의 아름다움, 말하고 듣는 것도 곱게 들어올 뿐만 아니라, 때로는 후각이며 미각까지도 호감에 동원하기도 한다. 육체적으로 느끼는 오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주고 받는 아끼는 마음이며 희생의 각오, 정겨움 들은 서로의 영혼까지도 나누고 싶을 만큼 다정다감 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갖게 되는 좋음의 감정들이다.

 

그런 연유에서 인지 “좋을 호(好)” 자도 남녀를 나란히 세운 모습이다. 한문의 뜻 풀이를 찾아본다.

  . 좋다, 좋아하다, 사랑하다, 사이좋다, 아름답다,

    구멍, 우의, 정분, 교분, 친선의 정, 곧잘, 자주, 걸핏하면

 

단순하게 “好” 자에 관한 한문 뜻풀이를 연결만 하더라도 “좋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듯하다. 좋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이고, 사이가 좋다는 것이며, 아름답다는 것이다. 좋음을 뜻하는 영어단어 like, good, love의 사전적 의미는 그 범위가 넓은 듯 하지만 결국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음의 의미를 모두 함축하고 있다.

 

좋음과 옳음의 철학적 의미와 서로의 관계를 알아보고, 도덕적 윤리적 연관성을 전문가의 생각들을 모아가며, 일반상식 개념 삼아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2011.4.5.(화)

    오갑록

 

 

 

■ 좋음과 옳음의 의미

 

□  개요

. 옳다 란, 도덕이나 규칙 등에 벗어남이 없다는 것으로서

    행위를 지시하며, “도덕적 의무이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 좋다 란, 마음에 흐믓하여 즐겁다 라 정의한다.

    행위의 동기나 사람의 성품에 쓰일 경우 '도덕적인' 의미를 갖지만,

    사물에 쓰일 때에는 도덕과 무관한 의미이다.

 

이 두개의 개념은 윤리학의 두 주요 개념이며,

윤리설의 구조는 대체로 이 두 개념의 관계와 관련이 있는데

공리주의에서는, 옳음은 그 좋음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반면, 칸트의 경우는, 옳음, 즉 도덕의 문제는 "좋음"과 무관할 수도 있다고 보고,

도덕법칙을 규정하는데, 좋음,공리 등은 그 기준이 될 수 없다고 본다,

 

옳음; 정당성, the right,  좋음; 선, the good

 

 

 

□  좋음과 옳음, 선악의 의미

                                                                                         “선과 악의 의미, 김.종욱” 중에서

우리는 보통 선이란 말에서 착함과 좋음을 떠올린다. 선(善)이라는 한자어가 온순한 양(羊)을 표상 하여 만들어졌듯이, 착함으로서의 선은 어질고 고운 마음씨를 뜻한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性善)’고 할 때, 그가 말하는 본성의 선은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을 뜻하는 것인데, 이렇게 어진 마음이 곧 착함으로서의 선이다.

 

이에 비해 좋음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싫다’의 반대로서 ‘좋다(好)’는 주관적인 감정 표현인데 반해서, ‘나쁘다’의 반대어로서의 ‘좋다(善)’는 객관적인 가치 평가이다. 예를 들어 “그 의사가 좋다”고 할 때, 전자의 의미로는 “나는 그 의사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는 뜻이지만, 후자의 의미로는 “그 의사는 훌륭하고 유능하다”, 다시 말해 “그 의사는 환자의 건강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만한 능력이 있어서 진단이나 투약을 잘하는 자이다”라는 뜻이다.

 

서양의 윤리학에서 논하는 선은 착한 심성이나 개인적인 호감이라기보다는, 이렇게 ‘훌륭하다’ ‘유능하다’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에서의 좋음이다. 이런 식의 좋음을 뜻하는 선을 영어로는 good, 라틴 어로는 bonus, 그리스 어로는 agathos라고 표현한다. 이 세 가지 단어는 단순히 문자적인 번역을 넘어서, 각 시대의 세계관까지도 반영한 말들이다. 먼저 그리스 어 agathos는 주로 훌륭함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좀더 나은 상태를 뜻하는 aga와 연관된 말인 agathos는 보다 훌륭하고 좋고 바람직한 것으로서의 어떤 ‘완전함’을 상징한다. 이럴 경우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최대한 구현하여 그런 완전함에 도달하는 것이 좋은 것, 즉 선이다. 예를 들면, 좋은 물병 훌륭한 물병은 물병을 물병이게 하는 물병의 본질[물병다움=용도]을 완전하게 실현한 것이고, 좋은 인간 훌륭한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인간의 본질[인간다움=이성]을 완전하게 실현한 자이며, 좋은 국가 훌륭한 국가는 국가를 국가이게 하는 국가의 본질[국가다움=정의]을 완전하게 실현한 나라이다.

 

이처럼 자연적으로 주어진 사물의 고유한 본성을 완전히 발휘하여 자기의 존재의미를 충족시키는 것을 선으로 보는 것은 그리스 철학의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라틴어 bonus는 주로 즐거움이나 행복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시대인 중세에서 선은 자연적 본성의 발휘라기보다는 전능한 신의 의지의 발현이다. 이제 완전한 존재인 신은 선 그 자체이고, 행복은 그런 신을 신앙함으로써 채워지는 충만한 기쁨으로 간주된다.

 

이런 식의 행복과 기쁨을 뜻하는 beo와 그런 것을 가져다 줌을 뜻하는 dou에서 유래한 말이 바로 bonus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특별 수당쯤으로 알고 있는 보너스는 원래 신을 묵상하거나 신앙하는 것에 대한 반대 급부로서 일종의 배당금처럼 할당된 행복이나 기쁨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의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근대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행하였는데, 이것을 잘 보여 주고 있는 말이 영어 good이다. 이때 good은 주로 유능함 또는 유용성으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결합과 일치라는 뜻의 ghedh와 관련된 중세 영어 god에서 유래한 good은 원래 ‘∼에 적합한’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어떤 것에 적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을 하는 데 적당하고 유리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good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능력이나 쓸모가 있다는 유용성의 측면이 강조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근대에는, 특히 산업혁명 이후의 영미 계통에서는, 인간이 바라는 목적이나 욕구가 충족되어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곧 선이고 바람직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산업주의와 자본주의가 세계화의 이념으로 작용하고 있는 오늘날, 선의 표준적인 모델은 이런 식의 유용성이다. 이런 입장을 좀더 극단화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쓸모가 있는 유용한 사람, 그런 사회에서 경쟁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바로 좋은 사람이고, 그렇게 되는 것이 곧 선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서양에서 선은 훌륭함이나 완전함, 즐거움이나 행복 또는 충만, 유능함이나 유용성 등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선의 반대로서의 악은 불완전함과 무능함과 결핍을 그 본질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럴 경우 인간의 이성적 본질과 사회의 합리적 규범과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와 신의 엄격한 명령 등을 위반함으로써 야기되는 모든 불행과 고통과 죄가 바로 악이다.

 

이처럼 위반으로 인한 고통이 곧 악이라는 점은 악의 영어형인 evil과 bad를 분석해 보아도 알 수 있다. evil은 ‘초과’라는 뜻의 upel과 관련된 중세 영어 ivel에서 유래한 말로서 원래 ‘적당한 한계를 넘어선’이라는 뜻이고, bad는 ‘강요’라는 뜻의 bheidh와 관련된 중세 영어 badde에서 유래한 말로서 본래 ‘괴롭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또한 선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이 정신적인 이성인 이상, 육체나 물질이나 감각은 선의 실현에 방해가 되는 쓸모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악과 관련될 수 밖에 없게 된다.

 

더욱이 선악과를 처음 따먹은 것이 여자였다는 신화 이래로, 여성은 육체나 물질이나 감각의 화신으로서, 정신과 이성의 소유자인 남성을 악으로 유혹하는 존재로 간주돼왔다. 이제까지 말한 선(good)과 악(bad)이 우리말로 좋음과 나쁨이라면, 옳음과 그름에 해당하는 것은 정(正, right)과 사(邪, wrong)이다. 우리말 ‘옳다’는 ‘바르다’와 관련된 말이다. 이 점은 ‘옳다’에서 유래한 ‘오른’쪽과 ‘바르다’에서 유래한 ‘바른’쪽이 모두 같은 방향[右]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바르다’는 직선처럼 올곧은 어떤 원칙에 잘 ‘맞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름이나 맞음이라는 뜻의 옳음은 주어진 평가의 기준이나 원칙에 잘 부합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옳다는 뜻의 영어 right의 고어형 riht는 원래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똑바르고 올바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right에는 옳음과 오른쪽이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직선을 곧바로 따라가기에 올바른 것이라는 뜻도 함축돼 있다. 결국 우리말 ‘옳음’과 영어 right는 상당히 유사한 발상법 하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양자는 직선처럼 곧은 것을 진리나 원칙으로 상정하고 이것에 따르는 것을 옳음으로 본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이처럼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원칙을 일종의 직선적 이미지로 표상하는 것은 한자어에서도 나타난다. 바르다거나 옳다는 뜻의 정(正)은 사람이 땅(一)에 발(止)을 딛고 똑바로 서 있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리나 규범에 똑바로 들어 맞음이 옳음이라면, 옳지 않음이란 그런 것에 잘 맞지 않아 뒤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는 옳지 않은 것은 그른 것이고, 그른 것은 어긋나거나 틀어진 것이며, 틀어진 것은 곧 틀린 것이다. 또한 그름을 뜻하는 영어 wrong의 어원 wring은 본래 ‘뒤틀린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양자 사이의 비슷한 발상법을 발견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필자가 좋음과 나쁨 혹은 옳음과 그름에 관해 다소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단순히 어원학적 분석을 위해서 라기 보다는, 그것들에 관한 철학적인 용법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였다. 즉 윤리학에서 ‘좋음’은 주로 ‘행복한 결과를 가져오는 데 유용한 것’인데 비해서, ‘옳음’은 ‘당연히 지켜야 할 원칙에 순수하게 따르는 것’을 뜻한다.

 

 

□  니코마스 윤리학 중에서

 

. 좋음이란 무엇인가

                                                                                                         철학의 추구, nomad 발췌

모든 종류의 앎과 선택이 어떤 좋음을 욕구하고 있으므로 정치학이 추구한다고 지적했던 좋음은 무엇인지, 그리고 행위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좋음 들 중 최상의 것은 무엇인지 논의해 보자. (중략)

 

 대중들과 교양 있는 사람들 모두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잘 사는 것과 잘 행위 하는 것을 행복하다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대중과 지혜로운 사람들이 동일한 답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중략)

 

 좋음은 서로 다른 행위나 기술에 있어서 각기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의술에서의 좋음과 병법에서의 좋음이 서로 다르고, 여타의 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좋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서 나머지 것들이 행해지는 것인가? 이것은 의술의 경우에는 건강이고, 병법의 경우에는 승리이며, 건축술에서는 집이고, 다른 경우에는 각기 다른 것으로, 모든 행위와 선택에 있어서 그 목적(telos)이다.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위해서 나머지 일들을 하는 것이니까. 따라서 만일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의 목적이 하나 있다면, 이것이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좋음일 것이며, 만약 목적이 하나 이상이라면, 이것들이 행위에 의해 성취할 수 있는 좋음 들일 것이다.  (중략)

 

 모든 목적이 다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최상의 좋음은 분명 완전한 어떤 것이다. 따라서 만일 어떤 하나만이 완전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겠다. 만약 여럿이 완전한 것이라면, 그것들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이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겠다.

 

 그런데 우리는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이 다른 것 때문에 추구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하며,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지는 않는 것이 그 자체로도 선택되고 그것(다른 것) 때문에도 선택되는 것보다 더 완전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언제나 그 자체로 선택될 뿐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되는 일이 없는 것을 단적으로 완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행복이 이렇게 단적으로 완전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행복을 언제나 그 자체 때문에 선택하지, 결코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예, 즐거움, 지성, 그리고 모든 탁월성을 선택하는 것은 물론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이것들로부터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들 각각을 선택할 것이니까), 이것들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행복을 위해서도 선택하는 것이다. 반면에 누구도 이런 것들을 위해서 행복을 선택하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선택하지도 않는다. (중략)

 

 하지만 행복이 최상의 좋음(최고선)이라는 주장은 아마 일반적으로 동의 될 것으로 보이긴 해도, 보다 분명하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런데 인간의 기능이 무엇인지 파악된다면, 아마 이것이 이루어질 것 같다. 피리 연주자와 조각가, 그리고 모든 기술자에 대해서, 또 일반적으로 어떤 기능과 해야 할 행위가 있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그것의 좋음과 잘함은 그 기능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처럼 인간의 경우에도 인간의 기능이 있는 한, 좋음과 잘함은 인간의 기능 안에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중략)

 

 인간적인 좋음은 탁월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일 것이다. 또 만약 탁월성이 여럿이라면 그 중 최상이며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이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좋음은 완전한 삶 안에 있을 것이다. (중략)

 

 탁월성에 따르는 행위들은 그 자체로 즐거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들은 좋기도 하고 고귀하기도 하되, 각각의 경우마다 최고로 그러할 것이다. 이것들에 관해 신실한 사람이 훌륭하게 판단한다고 하는 한. 그런데 신실한 사람은 우리가 이야기했던 대로 판단한다. 그러므로 행복은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며, 이 세 가지는 델로스의 비명에 새겨진 것처럼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윤리학 (이.창우 외)

                                                                    “철학의 추구 - 좋음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발췌

 

 

 □  윤리학에서 좋음 

                                                                                      “새로운 윤리학.  철학이야기” 중에서, 지니

선악을 좋고 나쁨으로 대체하는 새로운 윤리학은 좋음을 선이라고 놓는 과도기를 거친다. 금지의 초자아가 즐기라는 초자아로 변하는 것처럼. 하지만 선악을 떠나서 좋고 나쁨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이제부터 모든 것을 선악이 아닌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그럼 선악에서 좋고 나쁨으로 전환할 때 거기에서 사라지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잘못이라는 개념, 죄라는 개념이다. 좋고 나쁨에는 죄 개념이 부재 한다. 잘못이 부재 한다. 무구함. 선악이 아닌 단지 좋고 나쁨 만이 있을 뿐인 무구함만이 존재한다.

 

내 생각에 현대 사회는 선악에서 좋고 나쁨으로 전환하는 과도기 상태에 놓여 있다. 금지의 초자아는 약해졌지만 그 대신 지배적이 된 초자아가 두 가지가 존재한다. 즐겨라 라는, 재미와 쾌락, 행복을 추구하라는 초자아와, 건강을 추구하라는 웰빙적 초자아.

 

새로운 윤리학은 예를 들면 담배는 임산부에게 나쁘다는 담배 회사의 경고문으로 나타난다. 이 경고문은 지극히 스피노자적이다. 그에 비해 과도기적 윤리는 담배를 피우는 임산부는 잘못되었다로 나타난다. 내용에서는 좋고 나쁨이지만 형식에서는 여전히 선악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을 추구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인 잘못이다' 라는 과도기적 명제가 등장하게 된다. 웰빙적 초자아는 즐겨라 라는 초자아의 동전의 이면이다. 현대인들은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즐기고 즐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만 건강을 추구한다.

 

우리 시대는 과도기로서 건강과 성공, 행복과 재미 같은 것들이 도덕이 되는 시대다. 이것은 선악에서 좋고 나쁨으로 윤리학이 전환되는 과도기 상태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금지의 초자아 -> 즐겨라 라는 초자아(혹은 웰빙적 초자아) -> 초자아의 부재.

 

선악을 떠난, 좋고 나쁨으로 전환된, 새로운 윤리학이 완성되는 순간은, 즐겨라 라는 초자아에서 초자아의 부재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칸트는 사람들이 선악이 아닌 좋고 나쁨을 추구한다면 자동인형으로 변화해 버릴 거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정반대다.

 

왜냐하면 선악의 초자아는 내면을 옭아매기에 자유가 없고(내면의 명령, 초자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과도기적 윤리인 즐겨라라는 초자아가 바로 칸트가 말한 자동인형이라면 초자아의 부재야말로 자동인형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게 된 해방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칸트는 스피노자적 윤리학을 과도기적 윤리학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좋음을 선으로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칸트는 초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웰빙적 초자아는 칸트가 말한 대로 자동인형을 만든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윤리는 자유인을 만든다.

 

칸트는 웰빙적 초자아, 즉 자동인형적 삶을 경계한 나머지 아무런 좋음도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선이라고 주장했다. 칸트의 시대에서도 역시 과도기적 윤리가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경계한 것 역시 웰빙적 초자아였다.

 

칸트와 도스토옙스키는 선악에서 과도기적 윤리로 넘어가는 시기를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웰빙적 초자아에 대항해 충동의 윤리를 주장했다. 인간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좋음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를 파괴할지라도 내면의 충동을 따라야 한다는 것(라이터를 켜라)

 

그것은 웰빙적 초자아에게 대항하는 무기로는 쓸모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초자아의 부재를 상상하지 못했다. 원하지도 않았다. 칸트와 도스토옙스키에게 신의 부재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 혼돈을 낳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유란 원래 모든 것을 허용하는 법이다.

 

초자아의 부재, 좋음과 나쁨만이 남겨진 상태에서 윤리학은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를 알려주는 합리적 인식에 불과하다. 그 이상은 그 인간의 자유다. 그래서 좋음과 나쁨의 새로운 윤리학은 담배 회사의 경고문 이상의 것은 될 수 없다. 그 이상은 자유니까.

 

지금까지의 인류가 아이 상태였다면 새로운 윤리학 이후의 인류는 어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인류는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명령을 듣고 살았다면(초자아) 앞으로의 인류는 좋고 나쁨의 합리적 인식에 기반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스스로 결정하라는 자유야말로 즐겨라라는 초자아라고 말하는데 (라디오헤드가 음원 가격을 소비자에게 결정하라고 한 것) 여기서 내면의 압력을 받는 사람은 그 자신이 초자아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칸트가 스피노자를 과도기적 윤리로 오해했듯이 말이다.

 

건강이나 행복, 성공이나 재미는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런 걸 가지고 타인을 잘못했다고 추궁할 수는 없다. 도덕적으로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고? 추궁한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혹은 법적)인 형식이므로 그것은 문제를 '도덕화'하는 것이 맞다.

 

과도기적 윤리(웰빙적 초자아)는 좋음을 선과 혼동하는(좋음은 선하다) 범주 오류일 뿐이다. 그것은 칸트적으로도 오류이고 스피노자적으로도 오류이다. 칸트의 윤리학이 '좋음 없는 선'을 목표로 했다면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선 없는 좋음'을 목표로 한다.

                                            

 

 

 □  좋음과 옳음

                                                                                 “실천윤리학 방법론 소고”, 정.원규

                                                                              윤리이론 글 중, “좋음과 옳음”의 의미 일부 발췌

…… 실천윤리학적인 중첩적 합의의 가능성과 내용은 전적으로 중첩적 합의의 대상이 되는 윤리 이론들을 어떻게 선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며 ……(중략) 중첩적 합의의 내용은 그 대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규범윤리이론의 세가지 입장

 .목적론(teleology), 의무론(deontology), 덕이론(virtue theory)

 

 . 목적론은 옳음은 좋음에 의해 규정되며,

   따라서 좋음이 옳음에 우선하는 가치라고 보는 입장

 . 의무론은 옳음은 좋음과 독립적으로 결정되거나 옳음은 좋음에 우선한다는 입장

 . 덕이론은 옳음은 좋음에 의해 규정되지만 좋음에 우선하는 입장

 

각각의 윤리적 입장들의 내용과, 핵심적인 요구 사항들

 

 . 목적론: 통상적으로 이기주의(egoism)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및 유사 이론들이 포함된다. 이 중, 이기주의는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해도 될 듯한데, 그 이유는 이기주의는 그 이론적 내용이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윤리적 이기주의자라면 다원주의를 긍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윤리적 이기주의는 각자가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전체의 이익을 증대 시킨다고 보는 입장이므로 이는 사실상 이기주의라기보다는 공리주의(결과주의)의 한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목적론의 요구사항은 결과주의의 요구사항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고, 이는 통상적으로 옳음의 문제는 그 평가 대상 - 정책, 행위 등 - 의 (예상된) 시행 결과와 연결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때의 결과가 최대의 결과인지, 옳음과 전혀 무관한 결과(가령 쾌락)인지 등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각기 결과주의의 범위 내에서 자신의 주장을 고수한다고 할 때, 옳음의 결과관련성은 이러한 모든 편차에도 불구하고 생략될 수 없는 요소임에 분명하다.

 

  . 의무론: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의무론의 핵심 주장을, 옳음의 좋음에 대한 독립성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우선성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해석차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입장들은 학자에 따라 다양하지만 필자는 의무론의 가장 기본적인 주장은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부 의무론자들이 옳음을 좋음과 무관한 것으로 규정하려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좋음과 무관하다는 사실로부터 옳음에 대한 긍정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좋음보다 옳음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어떤 요소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의무론의 핵심은 좋음에 대한 옳음의 단순한 독립성이 아니라 옳음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어떤 요소를 긍정하는 것, 즉 옳음의 우선성을 긍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덕이론: 옳음의 좋음 관련성과, 옳음의 우선성이라는 기본적인 특성을 각각 목적론, 의무론과 공유하는 것 이외에, 옳음이 가능한 근거로서 덕이론의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적 특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덕이론에 따르면 일차적으로 옳음, 즉 덕은 좋음을 달성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행동이나 정책의 결과를 항상 엄밀히 예측할 수는 없고 보면, 우리는 결과와 상관없이 최선의 결과를 달성한다고 믿어지는 수단(덕)을 실제 염두에 두고 있는 결과보다 우선시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덕은 사람들의 역사적, 사회적 경험, 즉 공동체의 관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덕이론은 이러한 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근거로서 공동체와 그것의 사회문화적 역할에 대한 긍정을 그 어떤 다른 입장들보다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보자.

다원주의 하에서 실천윤리학적 방법론에 대한 정당화는 규범이론적인 중첩적 합의여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합의되어야 할 내용은,

 

   . 목적론적 요구 : 옳음의 문제는 결과와 관련하여 긍정될 수 있어야 한다.

   . 의무론적 요구 : 옳음은 좋음에 우선해야 한다.

   . 덕이론적 요구 : 윤리적 판단의 근거는 공동체여야 한다.

   . 다원주의적 요구(4) : 규범적 다원주의를 긍정해야 한다.

   . 포괄성 요구(5) : 모든 윤리적 문제들을 윤리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4)의 요구는 필자의 도덕 형이상학적 전제이며, (5)의 요구는 실천윤리학 방법론의 이론적 목표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5)와 관련하여 두 가지 정도가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윤리의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분명 윤리관에 따라 다양할 수 있으며, 특히 결과주의적 입장을 취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세상 모든 일이 윤리적 문제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반드시 결과주의적 입장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윤리 개념은 가급적 광의로 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판단은 항상 최종적인, 즉 모든 것을 고려한 연후의 것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윤리와 무관한 영역에 윤리적으로 접근한다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 역은 윤리적으로 치명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이러한 포괄성 요구가 다원주의적 요구와 충돌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모든 문제에 모든 윤리적 주체가 동의하는 윤리적 해법이 주어질 수 있다면 다원주의가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괄성 요구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긍정하는 구체적인 윤리적 판단을 도출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에 윤리적 해결 방법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즉 형식주의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모두가 합의한 절차에 따라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결정이 내려졌다면, 임신중절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낙태수술을 시행하는 것을 가로막아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임신중절이 타당하다고 개심(改心)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서로 상이한 윤리관을 지니고 있는 윤리적 주체들이 가령 형식적 차원에서 절차를 수용하고, 실천적 차원에서 절차에 의해 도출된 결과를 인정한다 해서, 그러한 결과가 함축하는 윤리적 태도까지 내면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론 다원주의적 요구와 포괄성의 요구가 충돌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옳은 행위를 규정하는 방법

                                                                                                              김.진형, 글 중 일부발췌

…… (중략)

영국의 두 철학자 벤담과 밀이 제시한 공리주의의 핵심인 ‘최대다수 최대행복’의 원리가 좋은 행위의 기준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리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근거는 대략 이렇다.

  . 우리들은 모두 그리고 언제나 쾌락을 추구한다.

  . 인간은 상호협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 모든 사람의 이익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양심상 고통을 느낀다.

이들 중 첫째는 ‘행복’이 왜 도덕의 기준인지를 말해주는 근거이며 후자들은 최대 다수의 행복을 우선시해야 하는 근거들이다.

 

한편, “아니오”라고 생각하는 경우 그 이유는,

 

거짓말은 나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적 때문에 그 잘못이 가려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어떤 행위 X는 그 결과와 상관없이 동기가 올바른 경우 또 오직 그 경우에만 옳다.”라는 주장에 동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독일의 철학자인 이마누엘 칸트의 주장으로서 그 근거는 대략 이렇다.

   . 이성적 존재자로서 인간은 자연의 인과율에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지녔다.

   . 인간에게는 이성이 명령하는 실천법칙을 마음으로 존중하여 그것에 따르려는

       선의지가 있다.

   . 실천법칙은 옳은 행위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므로 그것에 따르는 것은 의무이다.

 

어떤 행위 X가 실천법칙이 규정하는 것이라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선의지에 따라 X를 행하되 그것이 옳기 때문에 마땅히 행한다. 즉 X를 행하는 동기는, ‘그것이 옳다는 바로 그 이유만으로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다. 칸트는 이것을 의무 동기라고 부른다. 그리고 욕구나 외적인 강제로 인해 행동할 때의 동기인 끌림 동기와 달리 이 의무 동기만이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 즉 실천법칙이 옳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실천법칙은 일종의 형식적 원리인 만큼 개개의 옳은 행위를 나열하지 않는다. 그 대신 어떻게 해야 옳은 행위를 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은 진술을 통해 알려 준다.

  . 어떤 모순도 낳지 않고 보편화 할 수 있는 준칙(準則)에 따라서만 행동하라.  

  . 나 자신과 타인을 언제 어느 경우든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동하라.

 

칸트는 이 진술들을, 특정 조건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언명령’이라고 부른다. 바꿔 말하면 ‘명령 된 모든 행위는 어떤 조건 또는 결과에 구속되지 않고 행해지는 것들’이다. 그리고 칸트는 그러한 행위들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   좋음 good은 善이고 옳음 being은 正義다.

                                                                                                                  태제, 글 중에서 발췌

좋음은 착함이다. 시뮬라크르 simulacre란 현상을 뜻하며 본질을 드러내는 새로운 본질이다. 서강대의 이정우는 이를 '시뮬라크르의 복권'이라 했다. 복권은 로또가 아니고 권리회복이다. 권리회복을 쉽게 복귀 Return으로 표현해도 적당하다. 스타워즈시리즈 중 제다이의 귀환 Return of Jeda을 가장 재미있게 보았다. 제다이든 시뮬라크르든 돌아왔다 (Return)라는 것이다. 바로 아래는 터미네이터에서의 명대사 "I'll be back~".

 

인간에게 비추어지는 모습, 특히 스켑렙에서 글로 보여지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인간이 선인이지 악인인지 알 도리가 별도로 진정 있는가? 글이라는 인식된 부호를 통해 전달되는 단어들이 뇌의 변연계에 저장된 행복 혹은 고통 두 가지 중 하나의 느낌의 기억을 되살려 내어 미래를 추론하는 과정 (베이지언 추론)을 반복함으로써 선/악 좋고/나쁨이라 표현, 즉 시뮬레이션하고 있지 않은가.

 

'착한 척'은 악의적으로 표현 할 때 위선이다. 인간의 본질을 반영한 시뮬라크르가 新본질이므로 '착한 척'은 좋음 good의 시뮬라크르이다. 인간본질은 드러나 보여지는 시뮬라크르만으로 파악함이 현실에서 가능하므로 드러난 모순이나 절차상 악의가 없는 '착한 척'은 착함의 본질을 반영함이다.

 

(글쓴이는) 인간의 이타심이란 변형된 이기심으로 정의한다. 이타심을 드러냄에 모순 없고 이타심을 드러낸 행위에 절차상 악의가 없음이면 이타심, 변형된 이기심은 이타심으로 표현되어야 마땅하다. 일반적 정의로서가 아닌 특정 지역, 특정 시간에 한정된 이타심은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이 이타적인 존재라 여기기에는 인간의 모습은 그러지 않은 반증으로 가득하다.

 

롤스는 자신의 옳음은 다양한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고 스스로 시인했다. 즉 좋음에 의해 옳음의 위치를 이동시킨 것 역시 스스로 규정한 이데올로기, 생각이라는 것이다. 그의 정의론이 효용 있음 역시 이데올로기 혹은 사상/철학에 불과하다.

 

이제 정의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옳음은 인간을 향한다. 인간 존재함과 그 연속성이 옳음이다. 신휴머니즘이 옳음이다. 지금 당장 정의론을 새로 써야 마땅하다.

 

 

 

■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허상

                                                                                                           마켓인 기사 중, 일부발췌

시뮬라크르(simulacre).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꾸미는 허상을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시뮬라크르`라 명명했다. 이 개념을 언론과 권력기관에 들이대면 다음과 같다.

 

“보수 언론과 검찰의 실상은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주류질서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데, 가끔 워터게이트 사건이나 재벌비리 수사 등을 통해 마치 언론과 검찰에 의한 사회정의 구현이 실재하는 것처럼 본질을 호도한다” 정도가 된다. 도덕시간에 배웠던 “사회정의”와 “법치”가 실생활에선 얼마나 나약한 관념에 불과한 것인지 보드리야르는 통렬히 꼬집었다.

 

보드리야르의 명쾌한 통찰력에 무릎을 치다가도 종내 허무해지고 만다. 껍데기들만 온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 알맹이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여겨지는 탓이다. 그러나 지난해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위키리크스와 그 친구들”은 보드리야르식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흔들어 깨웠다.

“정의? 그런 게 존재해? 세상 일이 다 그런 거지…”란 자조에서 벗어나 “그래. 우리가 나서면 세상은 바뀔지 모른다”는 희망을 심어줬다. 각국의 외교 비밀문서를 폭로해 강대국의 지저분한 실상을 만천하에 알린 위키리크스는 이제 `검은 돈`의 안식처인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까지 폭로할 태세다.

 

타임지는 2010년 올해의 인물로 페이스북의 주커버그를 선정했다. 하지만 네티즌이 참여한 온라인 투표에선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가 버락 오바마 등을 제치고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10대 때 이미 해커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던 어산지. 위키리크스 방어벽은 어떤 해커들도 뚫지 못할 만큼 강력하다. 이런 막강한 방어시스템도 그렇지만, 위키리크스의 진짜 파괴력은 바로 “고발자 보호”에 있다. 전세계 각지에서 고급 정보를 가진 사람들이 앞 다퉈 정보를 제공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철저히 신분에 대한 비밀을 보장하는 것이다. ……(중략)

 

 

 □  시뮬라크르 (Simulacre)

                                                                                                                “우듬지” 글 중 에서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實在보다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 리얼리티의 시대다. 이처럼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사회라고 명명했다. 시뮬라크르의 원래 의미는 이미지, 비슷함, 초상, 幻影, 假想 등이다. 그러나 들뢰즈 이후 현대철학에서 시뮬라크르는 ‘원본 없는 복제’, 또는 ‘복제의 복제’라는 의미가 되었다.

 

시뮬라크르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주의는 可知的(intelligible) 차원과 감각적(scnsible) 차원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가지적’이란 오로지 지성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고, ‘감각적’이란 우리의 감각으로만 지각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데아의 세계라고도 하는 가지적 차원은 본질의 차원이고 변화하지 않는 차원이며, 감각적 차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경험적이고 現象的인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경험적 세계는 외관만 있는 假想의 세계이다. 가시적, 감각적, 구체적이어서 엄연한 실재처럼 느끼지만 , 실은 가지적 차원인 이데아(理念) 세계의 한갓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진짜 실재의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시공을 초월한 보편성의 영원한 세계인데 반해, 그것의 그림자인 現象界는 언젠가는 스러져 없어져버릴 불완전하고 낮은 단계의 감각적 세계이다.

 

플라톤 사상은 이데아와 이미지의 이원론이다. 이미지는 다시 두 개의차원으로 나누어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로 구분된다. 이데아는 절대적 善의 세계이므로 이데아와 닮을수록 좋은 것이다.

 

본질적이고 변화하지 않는 이데아와 닮은 것은 좋은 이미지이고, 이데아와 닮지 않은 것은 나쁜 이미지이다. 좋은 이미지와 나쁜 이미지의 차이점은 이데아와 ‘닮음’의 여부다. 좋은 이미지는 圖上(icon) 혹은 복사본(copy)이라 부르고, 나쁜 이미지는 幻影(phantasm) 혹은 시뮬라크르(Simulacre)라고 부른다.

 

플라톤은 시나 그림 같은 예술 활동을 ‘모방’ 행위로 규정한다. 예를 들어 침대와 식탁이 있다. 관념의 하늘에는 두 개의 이데아, 침대의 이데아와 식탁의 이데아가 있다. 침대나 식탁을 만드는 匠人은 다양한 모양의 침대나 식탁을 만들뿐, 침대와 식탁의 이데아 자체를 만들지 않는다. 이것은 神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침대 장인은 많은 침대 중의 하나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참으로 침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실재와 유사하되 실재는 아닌 그런 침대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모방자이다. 이데아의 세계에 있는 것을 실재라고 했을 때 , 장인이 만든 침대와 식탁은 실재에서 한 단계 내려온 두 번째 단계의 실재라 할 수 있다.

 

이번에는 장인이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림을 그린 화가를 생각해보자 . 캔버스에 그려 넣는 행위도 어찌 보면 침대의 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침대를 실제로 제작하지 않았으며, 다만 침대를 그림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화가는 모방의 모방을 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만든 침대(그림)는 침대라는 실재를 기준으로 보면 세 번째 실재이다. 또한 화가는 ‘보이는 현상’을 모방했을 뿐 진리(aletheia)의 모방은 아니다. 이러한 재현적 예술을 플라톤은 경멸했다. 왜냐하면 실재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습만을 모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모방이 서구 예술의 재현의 출발점이다. 하늘에 있는 침대의 이데아, 장인이 만든 침대, 화가가 그린 침대 중 이 세 번째 실재의 이미지가 바로 시뮬라크르이다.

 

현실의 사물들이 이데아의 하늘에 똑같은 모습으로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후기 구조주의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實在(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와 이미지의 관계, 원본(original)과 사본(copy)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란 어떤 실물을 그려놓은 그림이거나 , 아니면 머릿속에서 그 실물을 떠올리는 像이다. 이미지란 언제나 어떤 실재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플라톤의 두 가지 가상 중 첫 번째인 도상-사본(icon-copy)이다. 다른 하나는 실재를 모방하지 않고 완전히 幻影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像을 떠올릴 수 있다. 판타스마타(phantasmata)이다. 예컨대 현실에는 없는 괴물의 그림 같은 것이다.

 

형상을 모방하지 않는 가상 중에서 반드시 판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형상은 모방하지 않으면서, 다만 다른 가상을 또 모방하는 가상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이 시뮬라크르이다. 예를 들면 마리린 먼로라는 배우가 있다.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며 실재이다. 그녀를 찍은 사진은 실재를 닮으려고 하는 복제(copy)이다. 앤디 워홀이란 화가가 있었다. 이 화가는 마릴린 먼로의 사진 한 장을 무수하게 여러 장 다른 색깔로 복제했다. 그것은 실재를 복제한 것이 아니라 다른 복제(사진)를 또 복제한 것이다. 복제의 복제이다. 첫 번째 단계의 것이 copy이고 두 번째 단계가 Simulacre인 것이다.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 하는 것인데, 시뮬라크르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 하기이다. 실재를 참조대상으로 삼지 않으면서 마치 뒤에 실재가 있는 척 하는 것이다. 전자는 있음의 계열이고 후자는 없음의 계열이다. ‘감추기’는 실재의 원칙을 손상하지 않지만 시뮬라시웅(Simulation, 영어로는 시뮬레이션)은 참과 거짓, 실재와 상상 사이의 다름 자체를 위협한다. 참과 거짓, 실재와 상상의 차이가 더 이상 무의미해진 것이다.

 

‘시뮬라크르 하기’라는 뜻의 시뮬라시옹 은 再現과는 정반대이다. 재현은 기호와 실재의 등가의 원칙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떤 실재가 있고 , 그것을 나타내는 기호가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이때 실재와 기호는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는 등가원칙을 무시하고, 기호의 지시기능을 사형집행의 기능으로 전환한다. 이미지가 실제를 죽이는 기능이 있다(욘사마 - 배용준, 모의실험, 행사의 리허설, 여론 조사 ).

 

시뮬레이션은 현실을 모의로 해 보는 가상이다. 그런데 시뮬레이션이 실재보다 먼저 실행되고, 따라서 실재를 미리 결정한다. 그러므로 실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상이다. 가상이 현실을 지배하고 결정한다. 효율적으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시뮬라시옹이지 결코 실재가 아니다(지도는 지리적 영토에 선행하고, 전쟁의 이미지는 진짜 전쟁을 선행한다).

 

근대 이전의 이미지는 현실의 반영이었다. 그 후 이미지는 현실을 감추고 변질시켰다. 이어서 이미지는 현실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에 이르렀다. 원본의 시대에서 위조의 시대로, 다음에 기술복제 시대, 그리고 제3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인 오늘날 복제는 원본을 대신한다. 메인 행사가 원본이라면 리허설은 복제인데, 그 복제가 원본을 대신하여 원본보다 더 중요하게 된 시대이다(배우나 정치인의 이미지).

 

현실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이미지에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사라져 버렸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 그것이 하이퍼 리얼리티(極寫實, hyper-reality)이다. 참조대상이 없고 자기 충족적인 이 하이퍼 리얼리티에서 현실은 기호에 의해 지워지고 대체된다.

 

 

 

■ 영어 사전 중에서 “좋음”

 

. Like

to find pleasant, attractive or of a good enough standard; to enjoy

love

to prefer to do; to prefer, to be made or to happen in a particular way

to want

to be unwilling to do

 

. Good

of high quality or an acceptable standard

pleasant; that you enjoy or want

sensible, logical or strongly supporting what is being discussed

showing or getting approval or respect

skilful

morally right; behaving in a way that is morally right

following strictly a set of rules or principles

kind

showing kindness to other people

behaving well or politely

healthy or strong

useful or helpful effect on

suitable or appropriate

showing approval

in exclamations

large; great in number, amount or degree

at least; not less than; rather more than

thorough; complete

amusing

for particular time / distance

likely to provide

morally right or acceptable

 

. Love

affection; a strong feeling of deep affection for

romantic; a strong feeling of affection for, that you are sexually attracted to

a love song/story

enjoyment; the strong feeling of enjoyment that, gives you

you like; a person, a thing or an activity that you like very much

friendly name

feelings of affection for

to like or enjoy, very much

 

 

□ 속담 가운데서 엿볼 수 있는 “좋음”의 의미

 

몇몇 속담의 뜻 가운데에서도 그 의미를 음미해 볼만하다.

 

. 고사리는 귀신도 좋아한다.

     →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몹시 즐겨 먹는 음식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돼지는 흐린 물을 좋아한다.

     →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과 사귀기를 좋아한다는 말.

. 심사는 좋아도 이웃집 불붙는 것 보고 좋아한다.

   → 원래 좋은 사람이라 해도 사람은 흔히 남의 불행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함함하다면 좋아한다.

. 호랑이도 제 새끼를 사랑하면 좋아한다.

     →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이 못 되더라도 좋다고 추어주면 누구나 기뻐한다는 말.

. 제상에 놓은 떡이 커야 귀신도 좋아한다.

      → 무엇이나 후하게 대접하여 주어야 상대편이 좋아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늙은 당나귀 콩 실러 가자면 좋아하듯

   → 평소 일하기 싫어하다가도 자기에게 이익 되는 일에는 반겨 나서는 모양새

 

. 남의 술에 삼십 리 간다.

     → 공술이라면 삼십 리 먼 길도 간다는 뜻으로, 공짜를 좋아하는 행동을 비유 함

. 눈 오는 날 개 싸다니듯 

     → 쓸데없이 돌아다니기 좋아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찬밥 두고 잠 아니 온다.

      →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좀처럼 잊어버리지 못한다는 말.

. 패린 돼지 두부 앗은 날

      → 무엇을 게걸스럽게 먹으며 좋아하는 경우를 비꼬는 말.

. 굿 들은 무당 재 들은 중

   → 평소 매우 좋아하거나 원하던 일을 하게 되어 신이 나서 좋아하는 모양

. 천생 팔자가 눌은밥이라

  → 고작 좋아하는 것이 눌은밥이니 가난한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꼼

. 참깨가 기니 짧으니 한다.

      → 자질구레한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비꼬는 말.

. 나 많은 말이 콩 마다할까

      → 매우 좋아하는 것을 제공할 때 거절할 이유가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먹다가 보니 개떡(수제비)

   → 멋도 모르고 그저 좋아하다가, 알고 보니 의외로 하찮은 것이라 실망함

. 노처녀더러 시집가라 한다.

      → 물어보나 마나 좋아할 것을 공연히 묻는다는 말.

. 콩 본 당나귀같이 흥흥한다.

     →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기뻐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