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
■ 아픔과 고통
따스한 햇살, 가물대며 피어 오르는 아지랑이, 감미로운 바람결에 연초록 풀잎이며 들꽃의 살랑거림, 그윽한 풀 내음 …… 봄이면 봄 길에서 우리가 흔히 만나곤 하던 좋았던 것들처럼, 우리네들 삶의 길목 또한 따스하고, 평온하고, 안정되며, 기쁨과 행복으로 영원을 노래하며 이어지면 좋으련만, 마주치기 싫어도 어찌 하는 수 없이 당하며 지나쳐야만 하는 아픔이나 고통이 적지 않다.
병이니 상처 따위로 오는 육체적인 아픔이나 쓰라림이 우선 생각나기도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정신적인 부담 또한 우리를 아프게 하곤 한다. 서운하고, 서글프고, 서럽고, 슬프고, 괘씸하고, 노엽고, 두렵거나 무섭다는 등으로 형용되는 생각들이 있다. 스스로 원할 리야 없겠지만 본의 아니게 그러한 생각으로 사로잡힐 때, 정신적으로 괴로움을 당하게 되는 순간이 된다. 빛과 그림자,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의 감정은 평온과 아픔이라는 산마루터기와 계곡의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삶”이라는 이름으로, 파동 치듯 어디론가 마냥 흐르곤 한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한 줄기 생명체로서의 건강한 생명 연장과 종족번식에 쓸, 보다 좋은 양질의 “의식주”를 스스로에게 공급하는 과정을 삶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생명체가 갖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들도 한 두 단계만 건너 짚어 생각한다면 결국 의식주로 귀착된다. 아름답고, 사랑하고, 크거나 많다, 좋다거나 나쁘다 는 등의 형용사까지도 그리 비약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도 그러하겠지만, 동식물을 아우르는 모든 생명체가 태생과 함께 맞게 되는 그러한 숙명이 “삶”이라고 말하는 야릇하고도 묘한 주체가 아닐까?
서 있는 한 줄기의 생명체가 겪게 되는 숙명적인 것이 “삶”이라면, 이 삶이라는 피사체에 드리워지는 빛과 그림자를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라는 운명의 피사체에 드리워 진 그림자는 언제나 “나” 자신의 크기만한 덩치로 따라 다닐 것이다. 덩치가 크면 큰 만큼 작으면 작은 만큼 그 크기만큼 다치거나 상하기도 쉬우려니와, 가진 것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며, 꿈 많고, 바라는 것이 많다면 그만큼 잃을 것 또한 커지게 마련이고 이루지 못하는 미련 또한 많아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걱정과 괴로움으로 물든 부정적 사고의 그림자도 커지는 것이 순리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다. 역설적으로, 부질없는 욕망의 자루들을 팽개치고 마음을 비워가며 가벼이 할 때, 어두운 그림자는 사그라질 것이다.
아픔이니 고통이란 삶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그러한 그림자이다. 그 아픔은 때로는 육체적인 통증으로서 느끼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느끼는 갖가지 괴로움도 마찬가지로 삶을 고달프게 하곤 한다. 그렇기에 불교에서 “고(苦)”는 “모든 존재의 참된 본성”이라는 인식이다. 생로병사, 헤어짐과 잘못된 만남의 아픔, 더 채우지 못하여 느끼는 괴로움이라는 오취온(五取蘊)의 고(苦), 즉, 고고(苦苦), 행고(行苦), 괴고(壞苦)의 3 고(苦)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진리로서 안내하고 있다. 진리의 길은 “고(苦)”에서 벗어나는데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삶에의 수고 함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 가나이다. …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움을 얻게 하소서. (성경 시편 90: 10-12)”
육체의 아픔. 통증을 달래 주는 데는 현대의학이 기여하고 있다. 마음과 정신의 고통을 달래 주는 데는 정신의학 분야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종교나 철학, 문학과 정서, 가치관의 교육, 각종 예체능의 역할 등에도 순기능이 있다고 생각된다. 육체적 병이나 신경정신과적 병과는 달리 광신주의와 같은 철학적 병은 약.주사 등의 통상적 의료시술이 필요 없고, 자신이 받는 고통보다는 타인에게 더 많은 고통을 준다는 특징이 있다. 광신주의도 정신치료나 심리치료 등이 병행되지만,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대한 교정이 요구되기 때문에 철학적 치료가 병행되어야만 된다고 한다. 인식이나 논리, 세계관 등에 잘못이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 찾아내어 진단과 처방이 수행 되어야 한다고 한다. 광신주의의 병폐는 역사 속의 정치.군사에서도 볼 수 있다. 히틀러를 앞세운 나치즘, 천황을 앞세운 일본제국주의 등의 패권주의도 인류 공영공생의 개념에서 본다면 시대적 지리적 가치관의 병폐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병(sickness)은 질병(disease)과 아픔(illness)을 합친 것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질병(disease)을 "생물학적인 것"이라면, 아픔(illness)은 "주관적 경험의 것"이란 견해이다. 병은 "증후군, 질병, 질환, 장애, 상처, 변이"등의 용어와 개념상 중복되기도 하는데, 병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인간이나 동물의 마음과 몸에 병이나 불편함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WHO(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의 정의를, “단지 아프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이다.”라고 한다.
The following principles are basic to the happiness, harmonious relations and security of all peoples:
Health is a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The enjoyment of the highest attainable standard of health is one of the fundamental rights of every human being without distinction of race, religion, political belief, economic or social condition. The health of all peoples is fundamental to the attainment of peace and security and is dependent upon the fullest co-operation of individuals and States. ……
From: Constitution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생명이란 물질의 출입이 완전히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세포나 분자와 원자가 바뀌면서도 모양과 기능을 항상 유지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로서, 건강이란 “항상성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픔이나 통증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배가 아프면 소화제나 설사약으로 아픔을 달랜다. 상처로 인해 아프다면 연고나 수술요법 등으로 치료하고, 삐거나 찰과상으로 아픈 데는 파스를 발라서 아픔을 가시게 한다. 이처럼 일반적으로는 통증을 없애려면 원인의 병을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통증이 감정과 같은 심리적 요인으로 생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한 불안과 같은 감정상태는 신체적 요인으로 인해 생긴 통증의 강도를 더욱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고 한다.
어느덧 중년이 넘는 나이로 들다 보니 가족 중에서도 50견이니 하는 통증을 경험하게 된다. 생소한 용어인 섬유근육증후군이라는 말도 듣는다. 이처럼 원인이나 치료법이 명확하지 못하지만 통증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고생하는 집단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눈 여겨 보게 된다. 인근의 대학종합병원에 잠시 들렀을 때도 통증클리닉센터에는 암센터 만큼이나 많은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대한통증학회라는 학회가 있음도 내게는 새삼스럽기만 하다. 학회 홈피에 게시된 통증에도 슈퍼마켓 진열상품만큼 다양하다. 두통, 편두통, 긴장성 두통, 군발성 두통, 삼차신경통, 경부 통증, 어깨 통증, 상지 통증, 요통, 하지통, 대상포진과 대상포진 후 신경통, 환상지통, 중추성 통증, 암성통증 증후군 …… 이 외에도 급성 만성 통증은 어렵고 더 다양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때로는 아프거나 불편하지 아니한데도 불구하고 병으로 취급되기도 하는 것이 있다. 우리주변에 흔한 초기의 고혈당은 방치하여 십 년 남짓 되면 합병증으로 아픈 곳이 여기저기서 튀어 나온다고 한다. 혈당의 경우, 건강한 사람은 공복 시 혈당(FBS)이 110 ㎎/㎗ 미만이지만, 110에서 125사이가 되면 “공복혈당 장애”라고 해서 별도의 관리가 요구되는 집단으로 분류 되어 운동요법, 식이요법, 약물치료 등의 치료가 전제 되고, 식사 전후의 혈당이 각각 126과 200을 넘으면 당뇨병으로 진단 된다. 여기서 “공복혈당 장애”자는 당장 또는 가까운 시일 내에 아픈 것은 아니나, 건강한 미래를 보장받으려면 미리 관리가 요구되는 부류라는 것이다.
이처럼 “아직은 병이 아닌” 것을 중국의학에서는 “未病”이라고 한다. 건강을 세 단계로 구분하여, 항상성(恒常性)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건강”, 항상성이 무너지고 있는 상태를 “未病”, 항상성이 무너져 그대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를 “병”으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아픔을 느끼기 전인 未病의 상태에서 병을 다스려야 함이 한방의학의 기본이라는 말은, 위 당뇨병의 사례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일러 주게 된다.
빛과 그림자로 굴곡진 삶이 이어진다고는 하지만, 양지를 향한 좋고 기쁜 일들에 가리워져 그늘진 구석의 의미들을 못 본 체 하며 지내기 일쑤이다. 희망과 못다한 욕심에의 빛을 따라 쫓아 다니기 바쁜 것이 우리네 일상이기 쉽기 때문이다. 그럴듯하게 크고 멋진 것들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한껏 안고 난 후를 그려보는 기쁨, 만족, 영광 들은 언제고 우리를 설레게 하곤 한다. 그래서 오로지 양지 녘만 나의 생각을 송두리째 독차지하곤 한다. 음지는 어둠에 내 버린 채 아픔이나 죽음이란 남의 일만인 양 내 몰라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곤 한다. 암병동 중병 환자의 병문안이나, 초상집 상가를 문상하는 짧은 순간만 남의 어둠 속을 잠시 기웃거릴 뿐이다.
아픔과 고통이란 무엇인지, 건강하다는 것과 죽음에 이르는 것의 의미에 관하여 이 분야의 전문지식을 알아보고, 의학철학적인 내용들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져 본다.
2010.11.4.
오갑록
■ 철학, 고통 그리고 치료
김석수(경북대 철학과), 글 중에서 일부 발췌. 고통의 종류와 철학의 역할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은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당장 육체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는 고통으로부터, 정신 기능에 이상이 생기거나 마음의 고민으로부터 유래하는 정신적 고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 무엇이며, 또 이들 고통이 서로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 고통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육체적 고통이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고, 정신적 고통이 육체적 고통을 동반하기도 한다. 사실 ‘고통(苦痛)’이라는 이 단어의 한자 의미만 새겨 보아도 여기에는 마음이 괴로워하는 ‘고(苦)’의 상태와 육체가 아픔을 느끼는 ‘통(痛)’의 상태가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이미 육체적 상태와 정신적 상태가 함께 참여되어 있는 개념이다. 물론 짐승의 경우는 ‘통’은 있어도 ‘고’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에서 일어나는 병적 증상은 ‘통’의 상태일 수도 있지만, ‘고’의 상태일 수도 있으며, 이 두 가지가 모두 가미된 경우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단순한 ‘통’의 상태가 아니라 ‘고’의 상태가 훨씬 더 깊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의 병은 순수한 육체적 병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의 정신적인 병이거나, 아니면 사회집단의 질환일 수도 있다. 이 경우는 병을 앓고 있는 자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에 깊이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특히 이 경우의 고통은 객관적 대상으로 제시할 수 없는 주관적이고 사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고통은 ‘설명’의 방식에 입각하고 있는 자연과학적 태도가 아니라 ‘이해’의 방식에 입각하고 있는 인문학적 태도가 요구된다. 이 고통은 타자를 앞에 세워놓고 발가벗기는, 그래서 타자를 문초하고 닦달하는 ‘표상의 철학’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여 타자의 고통을 말 못하는 ‘그것’의 ‘통’이 아니라 소리치는 ‘당신’의 ‘고’로 체험하는 ‘이해의 철학’을 통해서만 제대로 접근될 수 있다.
사실 인간이 겪는 고통은 사적이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타인이 온전히 인지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 받는 자는 “다른 어떤 욕구나 본능보다 더 강하게 언어를 요구한다.” 그래서 고통과 언어의 관계를, “사람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항의와 그것을 제거해 달라는 호소가 언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며 근거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적어도 고통은 언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며, 언어를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손봉호)”라고도 했다.
따라서 언어를 통해 성립되는 대화는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데 근원적인 기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대화에 사용되는 언어는 과거 철학자들이 진리의 이름으로 사용한 거대 기호나 과학기술적 잣대 위에 성립되는 도구적 언어일 수 없으며,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과부와 고아의 얼굴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에 관계하는 일상언어여야 한다. 타자가 앓고 있는 고통의 얼굴과 그의 시선은 나의 어떤 힘도 미칠 수 없는 지각 불능, 대상화 불능, 규정 불능, 소유 불능성을 함축한다. 그의 고통의 얼굴은 지각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고통의 치료에 참여하는 행위는 방법론적 일원론에 입각하여 법칙설정적 차원이 아닌 개성기술적 방법이 요구된다. 이 개성기술적 방법은 인문학 고유의 방법으로서 자연과학이 접근할 수 없는 차원이다.
따라서 인간의 고통의 문제를 치유하는 데 있어서 자연과학의 부류에 속하는 의학, 신경정신학, 심리학의 차원이 아닌 철학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간이 앓고 있는 병을 ‘육체적 병’, ‘정신의학적 병(신경정신과적 병)’, ‘철학적 병’으로 분류((김영진)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철학적 병은 육체적 병이나 정신의학적 병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 판단이 개입된다고 했다.
실제로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건강’을 “완전한 육체적․정신적 그리고 사회적 안녕의 상태이며, 단지 병이나 쇠약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이미 가치지향적인 정의가 내포되어 있다. 건강의 개념이 이러하듯, ‘모든 병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치 담지적이다.’ 특히 철학적 병은 더 더욱 그러하다. 철학적 병은 육체적 병이나 신경정신과적 병처럼 약이나 주사 내지는 수술을 요하는 것이 아니며, 이들 병처럼 자신이 고통을 당하기보다는 타인들에게 더 많은 고통을 가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광신주의다. 물론 이 광신주의도 정신치료 내지는 심리치료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결코 치료가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거기에는 철학적 치유가 요구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대한 교정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인식, 잘못된 논리, 잘못된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철학적 병을 찾아 이를 진단하고 또 진단에 따라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경우가 바로 임상철학이다.
그러나 이미 언급되었듯이, 이 임상철학은 병적 현상을 지니고 있는 상대에 대하여 대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지양한다. 고전적 정신분석학이나 행동요법(behavior therapy)이나 전통적 신경정신학(traditional neuropsychiatry)은 인과법칙이나 관찰 가능한 경험에 근거하여 문제를 접근하고자 하며, 특히 신경정신학은 병적 현상을 뇌신경의 화학작용으로 환원하여 바라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병적 현상을 지니고 있는 자에 대하여 그를 주체적 차원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즉 이들은 환자의 의식현상을 주관적인 것으로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같은 접근법은 때로는 치료의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환자를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래서 철학적 접근은 이 부분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하고자 하며,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철학카운슬링이 대두된다. 바로 이 ‘철학카운슬링은 논리, 윤리, 가치, 의미, 합리성, 갈등과 위험 상황에서의 의사 결정 등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다루며, 인간사의 온갖 복잡한 상황을 다룬다.’ 이것은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철학의 새로운 방향이자, 철학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 철학적 치료의 필요성과 그 특징
루 매리노프의 주장처럼 ‘기존의 종교 단체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권위를 잃고, 또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의사가 유용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월권행위를 저지르자, 많은 사람들이 철학카운슬링에 눈을 돌리고’ 있다. 외향적 사유가 만든 형이상학적 왕국도, 내향적 사유가 만든 과학기술적 왕국도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억압의 장치로 둔갑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른바 아도르노의 주장처럼 신화와 계몽의 악순환이 오늘의 우리의 삶을 빈곤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 현대인은 전통적 세계관이나 가치관, 아니면 모던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서 자신의 삶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는데 회의적이다. 철학은 이제 형이상학과 과학기술의 틈바구니에서 다시 한번 인간의 삶의 조건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많은 현대인은 오늘의 철학에서 그와 같은 면을 기대하고 있다.
사실 현대사회에 점점 증가하고 있는 우울증의 경우만 보더라도, 다양한 형태가 존재하고 있다. 우울증은 뇌에 이상이 생기는 경우, 즉 유전적인 문제로 신경화학적 전달물질이 분비되고, 이로 인해 두뇌 기능이 정상적으로 일어나지 못해서 발생하거나, 아니면 암페타민(각성제)이나 알코올 등의 부작용으로 발생할 수도 있다. 또한 이 우울증은 해결되지 못한 어릴 적의 트로마로 발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직업을 잃게 되거나 이혼을 당하게 되어 금전적으로 도덕적으로 심한 딜레마에 빠졌을 때도 발생할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신경과나 신경정신과의 치료를 받아야 하겠지만, 세 번째의 경우는 심리치료와 철학상담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부분이다. 특히 네 번째의 경우는 철학적 접근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만약에 네 번째의 경우에 프로잭(prozac)을 복용케 한다면 이것은 문제의 당사자를 더 심한 고통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 고통을 외면한 철학
19세기에 이르러 거리의 철학이 강단의 철학으로 전환되면서, 철학자는 이웃하는 동료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철학자도 상아탑의 전문가로 자리하면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하였지, 세상사의 지혜에 관여하는 철학에 더 절실하게 다가서지 못했다. 전형적인 강단철학자였던 칸트 조차도 이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학문개념으로서의 철학’은 ‘세계개념으로서의 철학’에 이바지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나아가 그는 철학자는 “우리가 원하는 어떤 종류의 목적에 대해서든 이성 사용의 규칙을 주는 자”여야 하며, “실천적 철학자로서 이론과 사례를 통하여 가르침을 주는 지혜의 교사”만이 “진정한 철학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오죽해서면 철학자 베이컨이 사색하고 관조하는 철학자보다 우리가 당장 고통스러워하는 현실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자를 존중한다고 주장했겠는가?
철학이 거리에 나가 고통 받는 자와 마주하여 대화를 하지 않을 때 그 스스로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철학이 19세기 이후 전개되어 온 강단철학에만 매몰되어 있을 수 없다. 의미 있는 생활인의 삶을 외면한 채 학문상의 과목으로만 철학이 남게 된다면, 고통 받는 인간이 도움을 요청할 리가 없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야스퍼스와 니체는 기존의 강단철학의 반생명성에 대해서 강한 비판을 가한다. 야스퍼스는 오늘날 철학이 위기에 처한 것을 인간이 진정으로 호흡하고 살아야 하는 실존의 공기에 대한 고민을 상실한 데 있다고 보았다. 한 마디로 철학이 구체적인 치료의 철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 역시 철학은 더 이상 부유함이나 힘을 대변하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아픈 자의 치료에 도움에 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그래서 “그는 건강에 대해서, 그리고 삶에 대해서 내가 의욕 하는 것으로부터 나의 철학을 만들었다”고 선포한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태도 아래서 철학, 생리학, 의학 사이를 친근한 관계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철학적 행위와 관련하여 진리보다 건강, 생명, 힘과 같은 문제에 더 집중하였다. 그는 철학이 지루한 학문적 작업을 하는 영역으로 추락하였음을 불평하면서, 철학이 다시 건강과 생명을 고민하는 ‘철학자 의사’로 거듭나야 함을 강조하였다.
사실 이들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이미 고대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영혼의 치료’라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철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주장들은 공허하며, 인간의 아픔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스토아학파 역시 철학은 추상적 이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잘 사는 기술에 관계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들 철학자들은 인간에게 스며드는 고통의 문제를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로 설정하고 있다. 사실 고통은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확실한 사건이다. 이런 고통을 외면하고서 철학 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을 배제한 철학이 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은 이미 철학이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통의 문제를 그 동안 종교인이나 과학자가 전담해온 것이 사실이다.
종교인이 마음의 아픔을 치유하는 역할을 해왔다면, 의술인은 몸의 아픔을 전담하여왔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이 고통에 대해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여야 하는가? 철학이 고통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의 문제를 방기하는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며, 이런 비난을 벗어나려면 어떤 형태로든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손봉호의 주장에 따르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없고 고통이 끼치는 영향에서 벗어난 인간 형성이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고통의 문제를 무시하면 인간현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는 것이요, 고통의 경험을 전제로 하지 않는 인간 이해는 인간의 참모습을 반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이 당장 육체적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의사처럼 치료할 수도 없고, 또 그렇다고 종교인처럼 또 다른 세계의 존재함에 대한 믿음을 제시함으로써 구원을 제공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고통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줄 의무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철학은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위로를 제공할 수 있기를 희망할 수 있다. 이제 철학은 감각의 세계에 대해 판단 중지를 선포하고 순수 사유에 침잠함으로써 불변의 초월계로 올라가거나 의식의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 고통이 없는 절대적인 세계나 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아파하는 이 현실적 존재에 시선을 돌려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철학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로부터 ‘나는 아파한다 고로 존재한다’(Doleo ergo sum)라는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레비나스의 주장처럼 타자의 ‘상처받을 가능성을 지닌 얼굴’ 속에서 현현하는 고통의 눈물이 나로 하여금 나의 삶에 책임을 다하도록 다그치는 명령의 소리로 진지하게 받아드리는 새로운 윤리의 지평이 요구된다.
정말이지 현대인은 테일러의 주장처럼 불안한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즉 현대인은 삶의 의미, 이른바 도덕적 지평을 상실하고, 도구적 이성 앞에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마침내 자유와 자결권마저 상실한 채 나르시시즘이라는 자기감옥에 갇혀버렸다. 이로 인해 타인의 고통은 고사하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마저 무감각해져 버렸다. 버려진 죽음, 사물화된 죽음이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주체와 타자라는 이분법의 도식 아래서 미메시스와 노에시스의 악순환, 신화와 계몽의 악순환을 겪어왔던 아폴론의 철학이 이제 닻을 내리고, 주체와 주체가 각기 분리되어 있는 ‘홀로 주체’가 아닌 함께 하는 ‘서로 주체’가 되는 새로운 얼굴의 철학, 고통의 철학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다고 이 고통의 철학이 그저 고통을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면 지워져 버리는 단순한 대상이나 일시적인 사건에 관계하는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현대의 임상의학은 인간의 고통을 단순히 수선하고 제거 가능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며, 이로 인해 고통을 매개로 점점 더 자본화되고 권력화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푸코가 주장하듯이 정신병원의 합법화 과정을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고통의 참의미를 지워버리거나 은폐하게 되는 부정적 현상을 낳는다. 이것은 고통을 통해 인간의 삶의 참 조건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없다. 이들에게는 고통의 현상학이 부재하거나 빈약하다.
■ 고 (苦)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을 고통이라고 한다. 고(苦)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duhkha는 “슬픔, 고통, 불완전함, 정신적인 고뇌”를 뜻하며, 불교에서 “고(苦)”는 모든 존재의 참된 성질(본성)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둔다고 한다. 늙고, 병들고, 죽으며,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며,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등의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고(苦)는 세가지 부류로 구분할 수 있는 바, 생로병사로 인한 고통(고고(苦苦)), 쾌락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행고(行苦)), 모든 현상은 일시적이므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나 애착을 가지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데서 오는 고통(괴고(壞苦))으로 나눌 수 있다. 3고는 팔고(八苦)로 세분되기도 한다. . 태어나는 고통(生). . 늙는 고통(老). . 병드는 고통(病). . 죽는 고통(死). .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愛別離). .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怨憎會). .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求不得). . 오온(五蘊;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에 집착 함으로서 비롯되는 고통(五取蘊苦, 五陰盛苦).
뷸교의 사성제(四聖諦)는 그러한 고통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의 실재(苦), 고의 원인(集), 고의 소멸(滅), 고를 없애는 길(道)”로서 석가가 깨달은 진리라고 한다.
■ 병 (病)
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인용
. 병(病)의 개념
병(病, disease)은 인간이나 동물의 마음이나 몸에 질병 또는 불편함이 생긴 상태를 말한다. 증후군(syndrome), 질병, 질환은 병(病)의 유사한 개념이다. 병은 모호한 개념이고, 무엇을 병으로 보고, 무엇이 병이 아닌가는 정치적 윤리적 문제를 포함하여 논의되어야 한다.
하나는, 객관적인 판단에서, 정상과 이상(正常, 異常)의 개념으로 나누려는 견해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정상"이고 어디까지가 "특별한"지는 쉽게 정의할 수 없다. 통계적으로 기본값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몇 %라는 정규분포에서 모집단의 5 % 미만으로 보이는 형질상태 등으로 일률적으로 정의하는 생각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통계적인 정의를 "병"에 그대로 적용 해 버리면, 당뇨나 비만처럼 대상이 많은 경우에도 건강하다고 해야 하고, 우연으로 키가 큰 건강한 사람이 병으로 분류해야만 되는 모순점이 생긴다.
또 한가지는, 주관적인 판단에서, 순전히 가치판단만 갖고 병의 정의를 "본인이나 주변이 심신에 불편을 느끼고 개선을 바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정신질환이나 경증질환 환자 중에는 본인은 생활에 불편을 느끼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이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여 치료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주변의 의견도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병이라고 진단하는 사람이라도 본인은 생활에 문제를 느끼지 않는 등의 이유로 "자신은 병이 아니고 건강하다"고 말 할 수도 있고, 혹은 "신체장애는 장애(넓은 의미에서 병의 일종)가 아닌 개성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의료 종사자 입장에서도 본인 또는 주위에서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병원으로 진료를 올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정의도 진짜 문제는 발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도 곰곰 생각해 보면 의사가 중독증이나 골다공증 등으로 진단되는 경우에도 위와 같은 인식의 차이가 발생하는 일이 있어, 의학 연구 입장에서 본다면, 본인이나 주변의 가치기준에 상관없이 병을 정의하고 진단하도록 할 필요성도 존재한다.
의료 인류학에서 병(sickness)은 질병(disease)과 아픔(illness)을 합친 것이라는 개념도 제기되고 있다. 질병 (disease)을 "생물학적인 것"이라면, 아픔(illness)은 "주관적 경험의 것"이란 견해이다. 이 개념을 적용하는 경우, 예를 들면, 당뇨병의 정의에 해당하는 자가 많다고는 하지만 만성질환으로서 자각증상이 적은 초기 단계에서는 본인이 "병"이라고 파악하기는 극히 적다는 논리가 된다.
어쨌든 "질병은 심신부진 또는 문제가 있다는 상태이다"라 해도, 무엇이 병인지, 병이 없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일반 사회 또는 의사집단의 총의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스테로이드 피부 질환, 각종 공해병, 유아 돌연사 증후군의 예제에서 볼 수 있듯, 그 병이 존재하는지 여부 자체가 학문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 분류
질병을 분류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그 범주는 의학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경된다. 의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관점에 따라 질병 분류된다.
. 정신 질환 또는 기질적 질환 (생체조직 자체의 이상으로 인한 질환)
또는 기능적인 질환 (생체조직의 일하는 방식의 이상에 따른 질환)에 의한 분류
. 병소의 분포에 의한 분류 (간 질환, 심장 질환 등) . 원인에 의한 분류 (감염성, 심인성, 자가 면역 등) . 병리적 소견의 분류 (양성, 악성, 육아 종성 등) . 진행 양상에 따른 분류 (급성, 만성, 극증, 일과성, 발작 등) . 의료의 필요 불필요에 따른 분류
. 병과 건강
병의 반대말은 일반적으로 건강이라고 생각된다. WHO(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의 정의를, “단지 아프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양호한 상태이다.”라고 한다. 생명이란 물질의 출입이 완전히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항상 세포나 분자와 원자가 바뀌면서도 모양과 기능을 유지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존재이다. 서양의학 풍의 용어로서 말하자면, “건강이라는 것은 항상성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병이라는 것은 “항상성이 무너져 버려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거나, 돌아가기 어렵게 되어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또한 항상성의 개념을 중국 전통의학의 "未病"이라는 용어에서 파악하여 보면 병이나 건강의 개념을 보다 알기 쉬워진다.
. 未病
전통 중국의학(중의학)에서 "未病"으로 진단되는 것은 검사에서 뚜렷한 이상이 없고 명백한 증상도 없지만, 조금 상태가 안 좋은 상태에서 질병의 전 단계인 심신의 미묘한 변화를 가리키고 있다. "未病"을 키워드로 하여 몸의 상태를 분류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상태 1 : 항상성(恒常性)이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 … 건강 상태 2 : 항상성이 무너지고 있는 상태가 … 未病
상태 3 : 항상성이 무너져 그대로는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 … 병
이들 사이에는 명확한 경계가 없고 연속적으로 이행하고 있다. 중국에는 예로부터 "上工治未病"이라 하여, 未病을 다스림이 최상이라는 말이 있다. 즉 좋은 의사는 발병하기 이전에 未病의 단계에서 이상을 찾아내어 대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반면 서양의학에서는 未病을 간과해버리고 발병이 되어서야 치료에 임한다. 병을 화재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중국의학이 화재가 될 것 같은 위험한 장소를 미리 검사하고, 점화 가능한 재료를 미리 불연재로 바꿔 무사히 화재를 방지하는데 비해, 서양의학에서는 화재가 발생하고 나서야 대처한다는 격이다. 일단 발화가 확실하게 되면 우선 타오르는 불의 기세를 억제한다는 것이나, 그보다는 화재 예방과 재발 방지가 매우 중요한 것처럼, 서양의학처럼 발병 때까지 방치 해두고 발병하고 나서야 대처하겠다는 생각 보다는, 중국 전통의학처럼 未病의 단계에 그것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자기 치유력을 높임으로써 빨리 해결 하려는 사고방식이 더 적절하고 중요하다.
전쟁으로 인한 부상으로 많은 사망자가 나오기를 연이었던 20 세기 전반에는 서양의학이 눈부신 발전을 보이고, 항생제와 백신이 개발되어 생명을 위협하는 감염증 등을 격감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런 질병의 상황은 완전히 탈바꿈하여 생활습관이나 삶에 기인한 심장 질환, 뇌혈관 질환, 알레르기 질환, 대사 증후군, 교원병(유머티스열) 등 만성질환이 급증하여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만성질환은 서양 의학적인 치료법 (대부분이 대증요법)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근본 치유법으로서, 생활습관을 교정하면서 자기 치유력을 높이는 것이 필수적이 되므로, 마음과 몸을 하나의 단위로 받아들여 전체의 밸런스와 리듬을 가다듬어 질병을 치유한다고 생각하는, 심신일여(心身一如)의 사상에 서 있는 동양의학의 사고방식이 필수적이다.
. 용어
종종 병은, "증후군, 질병, 질환, 장애, 상처, 변이"등의 용어와 개념상 중복되곤 한다. 병의 존재를 전제로 하여, 환자의 공통적인 특징에 대하여 病態 또는 病像 이라고 한다. 病状은 어느 특정 환자에 대해 그 임상 경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 낱말은 종종 혼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병과 질환 질병; 의학에서는 "병"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신에 좀 더 엄밀한 질환, 질병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병"이라는 단어는 내인성(内因性)의 질환 밖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로 인한 골절은 일반적으로 병이라고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병 병환 질병과 "증후군"; 증후군(症候群)은 원인이 불명하면서 일반적인 병태 (자각.타각 증상, 검사소견, 영상소견 등)을 나타내는 환자가 많은 경우에 이런 증상의 집단에 우선 이름을 붙여 취급하기 쉽게 한 것이다. 인명을 딴 증후군의 이름도 많고, 원인이 판명된 경우에는 그 이름이 변경되기도 하며, 때로는 다른 병명과 통합되는 것도 있다.
한편 원인이 판명된 후에도 오랫동안 그대로 관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증후군"도 많고, 반대로 "~ 병"의 이름을 붙이는 원인 불명의 질환도 많이 있는 등, 실제 명확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원인이 판명 했음에도 불구하고 "증후군"이라고 하는 질환의 예;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SARS),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 (AIDS): 모두 바이러스 감염이 원인 단일 질환으로 판명되고 있다. 다운 증후군: 21번 염색체가 정상보다 많은 경우
원인불명이면서도 "~ 병"이라는 질병의 예;
가와사키병(川崎病, 소아의 급성발열 질환). 원인불명.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것으로 감염의 관여가 의심스러운 한편, 증상의 정도와 검사소견의 동향에 차이가 크고 단일 질환인지도 의심스럽다.
베체트병(Behcet’s Syndrome), 교원병류 관련 질환. 원인불명.
병 질환 질병 질병과 "증상"
증상(症状 symptom)은 병에 따라 환자의 심신에 나타나는 다양한 개별 상태변화, 혹은 정상에서의 변이이다. 병에 걸리는 것을 이환(罹病, 병에 걸리는 비율을 이환율),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발증(発症) 또는 발병(発病)이라고 한다. 환자 본인에 의해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자각증상이라 하여, 주변에서 객관적으로 감지되는 타각증상(他覚症状)과 구별한다. 간단하게 "증상"이라는 경우 자각증상의 것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고, 이 때는 타각증상을 소견(所見), 증후(徴候)라고 불러 구별한다.
통상 "질환"과 "증상"은 원래 크게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즉, 질병이 먼저 있고, 그것을 받아 "증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 진료의 경우는 증상이 확인되어도 그 증상을 초래하는 원인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증후군"에서의 예와 비슷한 증상 이름과 병명과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탈수는 병명은 아니지만, 탈수가 보이면 본 질환보다 앞서서 탈수진단 치료를 할 수 있다. 근시는 증상과 병명의 이름으로 사용된다. 본태성 고혈압이라는 병명은 다른 기초질환이 있어 이차적으로 고혈압이 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 원인불명으로 고혈압이라는 "증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함께 포함하는 "병명" 이다.
몇몇 임상 상(像)이, 본 질환에서 보이는 증상의 하나인지 또는 합병증으로 출현한 다른 독립된 질환인지에 대해서는 의학 교과서를 집필하는 데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보험 진료보수 및 통계에도 연관이 되기 때문에 경시할 수 없는 문제이다.
증상을 연구하는 의학의 한 분야로서 증후학(症候学)이 있다.
질병 이득; 병으로 인해서 본인이 얻는 이득. 주위의 걱정을 받는 약자 피해자로서 타인에게 의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병이 아니다"라고 해서 화내는 사람이라면 질병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요소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의존 이득; 의존이나 중독을 계속해서 얻는 이득. 약물 의존증으로 마약 각성제 마리화나 담배 등을 반복 남용함으로 해서, 불쾌한 금단증상을 찰나적으로 평온하게 할 수 있다. 또한 의존하고 있는 동안은 의존에 따른 현실의 해에 불구하고 불안을 느끼지 않고 찰나적이라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등 이득이 있다. 의존증, 중독이라는 말의 부인은 의존 이득을 얻을 목적으로 행해진다.
꾀병(詐病); 학교를 빠지고 논다거나, 공공 보조금을 얻는 등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허위 장애; 병자로서 대접 받게 된다는 질병 이득을 얻기 위하여 건강 상태 등에 대해 거짓을 늘어놓는 정신질환의 일종이다.
■ “통증을 길들이다”
베르나르 칼비노 등 저/이효숙 역
도서 리뷰 중에서. 통증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뭘까? 그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랫동안 사는 것이 아닌가 한다. 모두 무병장수를 소망하게 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질병에 걸리거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아파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고 했다. 아픔에는 물론 심리적 요인에 의한 것도 있지만 주요한 대상이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아픔을 느끼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한다.
심신에 병이 찾아와 치료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동반하는 것이 통증이다. ‘죽어도 좋으니 아프지만 않게 해주세요’라는 말처럼 거부할 수 없는 이 통증을 완화하고 치료하는 과정이 의술행위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통증은 사람마다 그 심한 정도를 느끼는 차이가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이로부터 얼마나 아픈가 하는 것에 대한 일반화가 어려운 까닭이기도 하다. ……
이 책은 통증을 식별하고 치료하기, 통증을 밝히다, 통증에 대한 환자의 권리 등 크게 세 가지 분류로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통증에 대한 원인과 분석의 과학적 접근은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되는 부분도 있지만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철학, 신학, 문학 등에서 통증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살핀 ‘통증을 밝히다’ 라는 2장이 아닌가 싶다. 통증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인류가 통증을 인식한 시간만큼 오래되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모든 병과 동반하는 통증에 대해 과학적인 접근이 이뤄진 시기는 놀랍게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 1947년 존 보니카에 의해 출발했으며 이 책이 발간된 프랑스의 경우로 보더라도 1986년 통증의 임시적 완화를 담당하는 치료진들을 구성하고 이러한 치료를 장려하는 보건부 공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본격으로 통증치료에 진정한 출발은 1993년 8월에 와서야 프랑스 통증학회 이름으로 개최된 제7회 국제통증학회 파리 학술대회를 연 때를 시작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떤지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다만, 추천 글을 보면 1983년 설립된 대한통증연구학회가 그 출발이 아닌가 한다.
이 책에서는 통증에 대한 의학적 접근뿐 아니라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 관심을 끈다. 그것은 환자의 정서 상태나 주변 사람들의 환자에 대한 인식 등 환자의 통증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심리학적, 환경과 문화적 요인을 살펴 진심으로 환자의 고통을 줄여가려는 노력이 통증을 바라보는 현대적 시작임을 알게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몸과 마음이 고통 받고 있는 현대인들이 통증의 원인과 그 해결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할 수 있게 하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닌가 한다.
■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 김용일 역. 2006
가볍고 단순하고 작을 것. 경박단소(輕薄短小)는 현대사회의 트렌드다. 여러 갈등과 문제로 배배 꼬인 상황에서는 대의명분과 큰 호흡의 생각이 절실할 터다. 그러나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에서라면, 머리를 굳이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다. “경박단소형 삶”이 생활의 주류가 되는 까닭은 여기 있겠다. 하긴, 행복은 고민을 짧게 하고 즐거움은 크게 느끼는 태도 속에서 꽃피지 않겠는가!
. “행복 깊숙한 곳… 절망 머무는 곳”
그러나 “스톡홀름의 고독한 덴디”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소박한 믿음에 고개를 젓는다. 그는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다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모두가 절망하고 불행해질 뿐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람은 전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 탓이란다. 도대체 그는 왜 이렇게 삐딱한 생각을 했을까?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의 이르는 병”은 암(癌)처럼 몸에 깃든 병이 아니다. 이 병은 “우리의 가장 고상한 부분”인 정신에 감염되어있다. 인간은 결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기에, 절망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
언뜻 보면,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은 우울증 환자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병들어 있는 사람은 의사가 진단 내리기 전까지 자신이 건강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절망상태임을 좀처럼 깨닫지 못한다. 환자는 자신이 병들어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의사를 찾아가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얼마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만 절망에서 빠져나올 길도 찾게 될 터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이 절망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따라, 절망의 정도를 나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절망”이다. 이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 같은 상황이다. 술꾼은 맨 정신으로 있을 때가 가장 괴롭다. 그래서 자신이 취해있음을 잊기 위해 더욱더 퍼 마신다. 평범한 사람들도 그렇다. 누구에게나 삶이 무의미하고 버겁게 느껴지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 순간에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거개는 고민을 잊기 위해서 또 다른 즐거움에 눈을 돌릴 뿐이다. “돈 5달란트를 잃었을 때는 심각해지는 이들도 정작 자기를 잃어버린 데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속물근성”이란 말로 절망에서 애써 눈 돌리려는 이들을 경멸한다. 그들은 부유하고 안락한 일상이 곧 인간다운 삶이라고 착각하는 탓이다. “행복의 깊숙한 곳, 이곳이야 말로 절망이 가장 편안하게 머무는 곳이다.” 이런 상태는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현명한 충고와 처세술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쾌락과 안락함을 끊임없이 좇지만, 결국 절망감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들 터다. 늘어난 아파트 평수와 차의 배기량이 주는 행복감이 얼마나 빨리 증발해버리는지 생각해보라.
키에르케고르는 절망 속의 사람들을 지하와 지상 이층으로 되어 있는 집에 빗대어서도 설명한다. 절망한 사람들은 이층에서 살 수 있는데도 굳이 지하층을 고집하는 이들과 같다. 이들은 이층이 비어있으니 그곳으로 옮기라고 하면 화를 내기까지 한다. 인간은 정신을 최고로 발휘할 때 가장 인간적이지만, 사람들은 굳이 그보다 낮은 감성과 쾌감의 상태에만 머무르려 한다는 뜻이다.
이보다 나은 절망은 “자신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 절망”이다. 이 단계에 이른 자들은 삶의 허무함과 고통을 더 이상 바깥에서 찾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괴로움이 돈 없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덧없고 무의미한 삶 자체에서 비롯됨을 깨달은 자들이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절망 안에서 주저앉아 버린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지 않으려고” 한다. 자기 자신이 너무 싫은 나머지 “마치 옷을 바꿔 입듯이”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그는 유능하고 똑똑하고 훌륭한 인물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마음속에서 또다시 자신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일어나지 않을지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또다시 절망 속으로 움츠러든다.
드물게도 이 수준을 넘어서서 절망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절망”에 빠진 이들이다. 이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에 빠져들거나, 다른 이들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이 왜 절망하는 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삶이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끝까지 고민한다. 그럼에도 이들 역시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들이 절망은 “반항”에 지나지 않으며, 급기야는 아무 희망 없음에 좌절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곤 한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키에르케코르는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신앙이다.” 신은 죽어 사라져버려서 의미 없을 우리네 삶을 비로소 가치 있고 영원하게 만든다. 이 점에서 절망은 변증법적이다. 절망은 인생을 힘들게 만들지만, 그 때문에 비로소 거짓 생활을 진정한 삶으로 거듭나게 만들기도 한다. 고난이 인생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그 의미를 깨우칠 때 삶이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처럼, 가장 높은 단계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려는 절망’은 신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와 믿음을 통해 완성된다.
.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 아닌 “신앙”
“죽음의 이르는 병”은 우리가 과연 진짜로 행복한 삶을 좇는지 하는 의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현대인의 삶은 “속도전”이나 “돌격전” 같은 북쪽나라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반대로, 그 대가로 얻어지는 일상은 가볍고도 단순하며 유쾌하다. 키에르케고르 식으로 설명하자면, 우리는 삶의 무의미함에서 이중으로 도망치고 있는 셈이다. 경쟁의 무거움은 덧없는 인생의 의미를 찾는 물음 자체를 한가하고 쓸데없는 소리로 만들어 버린다. 무겁고도 치열한 삶에서 잠시 비켜나오면, 이번에는 가볍고도 단순한 오락거리가 우리네 일상을 가득 채우곤 한다. 어디에서도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찾아보기 어렵다.
과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행복할 수 있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쾌락은 우리 마음을 만족하게 채워줄 수 있을까?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은 마약을 더 많이 구하는 데 있지 않다. 자기 처지를 분명하게 파악하여, 건강한 삶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때에야 절망에서 탈출할 길도 열린다.
키에르케고르는 “믿음은 절망에 대한 안전한 해독제”라고 말한다. 해독제는 자신이 독에 물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내 삶을 절망에서 이끌어 낼 “믿음”은 어디 있을까? 기독교 신자인 키에르케고르는 그 답을 신에 대한 믿음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구원을 찾을 수 있을까?
좋은 물음은 훌륭한 답을 이끌어 낸다. 문제는 제대로 된 물음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같은 논리로, 삶에 대한 깊고도 정확한 의문은 가치 있고 높은 경지의 인생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러나 인생을 제대로 짚는 의문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내 삶에 들어붙어 있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인지 곱씹고 또 곱씹어 보라. (글 안.광복, 중동고 철학교사)
■ 통증
(백과사전 인용)
몸에 상처나 손상을 입었을 때 느끼는 감각과 고통이 통증이다. 이 통증은 해로운 물질로부터 물러나게 해서 생물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한편 환자에게는 치유과정에 필요한 휴식을 보장한다. 그렇지만 특히 신경계에 손상을 입은 경우에는 통증이 필요 이상으로 심하게 오기도 한다.
통증에 대한 감각은 심리적.주관적이지만 통증의 해부학적.심리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많이 밝혀졌다. 조직을 손상시키는 자극으로 통증을 느끼는데 그 자극은 미미하거나 쉽게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은 자신의 영아기 경험을 바탕으로 통증을 구별한다고 한다. 사람이나 다른 동물은 어릴 때부터 통증을 주는 자극에서 쉽게 피하는 능력을 가지지만 어린 시절 통증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면 통증을 잘 느끼지 못하거나, 통증을 일으키는 자극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화상을 입어보지 않은 아이는 불을 무서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화상을 입어도 통증을 쉽게 못 느끼거나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신체적 질병 때문이 아니라 정서적 문제(심리적.감정적 요인) 때문에 통증을 느낀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통증은 상처와 관계가 있다. 통증을 점차 배워간다는 사실, 통증이 일반적으로 주관적이라는 점, 통증이 자주 신체적 요소와 관계없이 생기는 점으로 미루어 통증은 일차적으로 조직에 생긴 손상과 관련된 불쾌한 느낌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그러한 손상의 견지에서 묘사될 수 있다.
. 신경 생리학적 근거
19세기 이전의 이론가나 의사들은 통증을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감정이라고 생각했으며 해부학과 신경생리학이 발전하면서부터는 통증을 하나의 감각활동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현재는 신경생리학적 근거를 여전히 중시하면서도 통증을 감각활동에만 한정시키지는 않는다.
통증은 손상을 일으키는 자극이나, 전기 쇼크와 같이 조직을 손상시키지 않는 종류의 자극이 자유신경종말이라는 미세구조가 있는 피부나 조직에 가해진 다음 느껴진다. 자유신경종말은 통증뿐만 아니라 다른 감각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보이며 인체 안팎의 표면에 널리 퍼져 있고 이곳에서 신경섬유는 신경충격을 척수에 전달한다. 피부에 자유신경종말이 있는 부분인 자극점에서는 아픔뿐만 아니라 뜨거움이나 차가움 같은 다른 감각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통증은 따로 떨어진 단선철로와 같이 각기 특수화되고 불변인 신경전달경로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해부학적. 생리학적으로 상황에 따라 바뀌는 형태라 추정된다.
피부처럼 신체의 말단 부위에 있는 수용기 근처의 일부 신경섬유는 해로운 자극에만 국한되어 반응한다. 이로 미루어 인체의 제일 말초부분에는 통증의 생리학적 근간이 되는 일부 고정적인 요소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 요소의 효과는 더 위쪽의 신경계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의해 바뀌는 것 같다. 대체로 해로운 자극에 대해 일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신경섬유는 수초가 작은 신경이거나 무수신경섬유이다. 이 신경섬유들은 촉감이나 압감을 전달하는 큰 신경섬유보다 자극 전달속도가 느리다.
. 심리적 정서적 요인
통증에 대한 일부 학설은 통증의 신경학적 근거 없이 심리학적 면으로만 설명하고 있다. 통증은 감정과 같은 심리적 요인으로 생기는 경우도 많다. 또한 불안과 같은 감정상태는 신체적 요인으로 인해 생긴 통증의 강도를 더욱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한다. 그래서 통증이 일어나는 신경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완전히 밝힐 수 없을 때는 언제나 내적 요인으로 돌리기도 한다. 긴 여행에서 불편한 자세로 있을 경우와 같이 오랫동안 근육이 긴장하면 통증이 생기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비슷하게 불안할 때도 근육, 특히 목•두피의 근육이 수축하기도 한다. 이렇게 근육이 긴장하면 통증, 특히 두통이 생기는데, 이로 인해 더 불안하게 되고 이렇게 계속 되풀이 되면서 통증은 더 악화된다.
. 만성통증
만성 통증 환자의 치료법으로는 침술요법, 최면, 생물 피드백, 전기자극요법 및 화학적 신경 블록과 말초나 척수의 신경을 자르는 방법, 그리고 뇌수술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많은 만성 환자의 경우에 통증은 기질적 요인이 없어져도 지속되는 일종의 학습된 현상이다. 통증은 주위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 반응인데, 내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재정적 수입이나 여가 시간에 대한 욕망과, 일과 대인관계, 과도한 관심에서 해방되고 싶은 욕구에서 느끼는 무력감 등에도 민감하다
■ 일반적인 통증의 종류
대한통증학회 자료 중에서
. 주요 통증들
두통, 편두통, 긴장성 두통, 군발성 두통, 삼차신경통, 경부 통증, 어깨 통증, 상지 통증, 요통, 하지통, 대상포진과 대상포진 후 신경통, 환상지통, 중추성 통증, 암성통증 증후군
. 국제 두통학회의 두통 분류
편두통
긴장성 두통
군발성 두통과 만성발작성 편두통
구조적 병변과 관계없는 두통
두부외상과 연관된 두통
혈관질환과 연관된 두통
비혈관성 두개강내 질환과 연관된 두통
약물중독 및 금단과 연관된 두통
두부외의 감염과 연관된 두통
대사성 질환과 연관된 두통
두개, 목, 눈, 코, 치아, 입 혹은 다른 안면부 및 두개구조물과 연관된 두통 및 안면통
뇌 신경통, 신경간통, 구심로 차단 통증
분류 불가능한 두통
. 삼차신경통
삼차신경통이란 삼차신경 분포 부위의 돌발적이고 심하며 단시간의 찌르는 듯하고 반복성인 통증을 말한다.
. 경부 통증
두통, 어깨통증, 흉통, 상지통 등 관련통을 흔히 동반하는 경부통은 외상, 퇴행성 척추증, 류마티즘 등에 위해 유발되며 해부학적으로 근육, 척추후관절, 추간판에 병소가 있는 경우가 많다.
. 요통, 하지통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전 인구 중 50-80%가 일생에 한 번 이상 요통으로 고통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노동자인 경우에 경노동자보다 발생 빈도가 높다. 그러나 비록 가벼운 일을 하더라도 장시간 일정한 자세로 작업을 하거나 진동에 노출된 경우, 단순 반복 동작을 지속적으로 할 경우,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에 종사할 경우, 비흡연자보다 흡연자의 경우 등에서 발생 빈도가 높다.
. 급성 대상포진
수두 대상포진 바이러스에 이미 잠복 감염되어 있던 사람에서 이 바이러스가 재활성화 되어 국소적으로 감염이 발생하는 것이 대상포진이다. 대상포진은 지각신경 분포를 따라 주로 편측성으로 군집한 수포성 발진이 생기며 4-5일 선행하여 통증이 발생하는 특징이 있다.
. 환상지통
절단 수술을 받아서 상실된 신체 부위에서 만성적인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환상지를 가진 환자의 약 반 정도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 중추성 통증
뇌졸중 후의 중추성 통증
척수손상
다발성 경화증
척수 공동증
. 암성통증 증후군
골전이, 다발성 골수종, 유방암, 전립선암, 갑상선암, 그리고 폐암 등이 골 전이가 잘되는 암인데 흔히 척추, 골반, 대퇴골 그리고 두개골에 잘 전이된다. 주증상은 통증으로 나타나는데 골전이에 의한 프로스타글란딘 E2의 상승으로 인한 국소 침해수용체자극, 주위신경 압박, 혈관이나 연부조직의 압박 때문이다. 통증은 둔하면서 쏘는 듯하고, 국소적으로 오나 척수신경을 누르면 방사통이 오기도 한다. 골 전이의 합병증으로 골절, 과칼슘증, 척수압박 등이 올 수 있다.
■ 만성통증증후군 “KBS 1TV : 생로병사의 비밀”
2011.1.29. 오후 8시 방송
복합부위통증 증후군 환자 김수진씨 말,
저녁에 자면 경련이 일어나고 칼로 베는 것 같고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 온몸에 전기가 오르며 경련이 일어나고 경직된다. 2달간 고통에 시달리며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을 겪게 된다.
행복전도사 최윤희씨는 700가지 통증에 시달리다, 통증이 너무 심해 견딜 수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 했다.( 2010.11.8.) 만성통증은 통증과 함께 피로감, 수면장애, 우울증에 쉽게 빠지게 해 더욱 심각하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은 만성통증의 대표적인 질환으로 꼽히며 외상 후 특정 부위에 만성적으로 극심한 통증이 계속되는 질환이다. 스치면 아프고 닿으면 아프고 아픈 증상이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예를 들어 찬바람을 쐬어도 아프고 살짝 스쳐도 발작이 일어난다
복합부위통증증후군(CRPS) 환자들이 겪는 고통은 분만의 고통보다 더 크다고 한다.
만성통증증후군의 가장 큰 원인은 통증을 뇌로 전달하는 신경망의 이상 때문이다. 지속적인 통증에 의해 통증을 전달하는 시스템에 이상이 생겨 약한 자극을 뇌로 전달하는 위치, 감각의 경로가 통증을 전달하는 경로로 이어진다. 조기 발견과, 적극적인 치료로 통증이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전문가는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을 경우 스트레스에 의해 많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운동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움직이지 않거나 비만에 걸리면 뇌도 빨리 퇴화하고 뇌뿐만 아니라 모든 신경이 더 빨리 퇴화해 염증을 조절하는 능력이 없어지고, 그러다 보니 통증은 더 심해진다고 한다.
■ 통 증
(김정훈)
통증이 없다면 우리는 아픈 부위를 깨닫지 못하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거나 질병에 걸리게 될 것이다.
. ‘채널’이 통증 신호를 만든다
통증은 몸의 곳곳에 분포한 통점이 자극을 받아서 통각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할 때 느낀다. 통점을 구성하는 세포의 세포막에는 채널이란 세포소기관이 있는데, 이 채널을 통해 세포의 안과 밖으로 여러 물질들이 오가면서 세포 사이에 다양한 신호를 전달한다. 인체의 부위가 손상되면 포타슘 이온, 세로토닌, 히스타민 등의 통각 유발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이 채널을 통해 세포 안으로 들어오면서 세포는 통증 신호를 인식하게 된다. 통증을 유발하는 대표적인 채널로 치통, 피부염, 관절염 등의 염증성 통증에 관여하는 캡사이신 채널이 있다. 이 외에도 상처를 입었을 때, 화상을 입었을 때 등 통증의 종류별로 다른 채널이 존재한다.
인체의 부위가 손상되면 포타슘 이온, 세로토닌, 히스타민 등의 통각 유발물질이 만들어지는데, 이들이 채널을 통해 세포 안으로 들어오면서 세포는 통증 신호를 인식하게 된다.
신경 중에 가장 느린 통각신경 통점의 세포에서 인식한 통증신호는 통각신경을 통해 뇌로 전달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통각신경이 다른 감각신경에 비해서 매우 가늘어 신호를 느리게 전달한다는 것이다. 압각이나 촉각 등이 초속 70m로 전달되는 데 비해 통각은 초속 0.5~30m정도다. 예를 들어 몸길이 30m인 흰긴수염고래 꼬리에 통증이 생기면 최대 1분 후에 아픔을 느낀다. 실제 우리가 압정을 모르고 밟았을 때 발바닥에 깊이 들어간 다음에야 아픔을 느낄 정도로 통각은 전달 속도가 늦다.
통각신경이 다른 감각신경에 비해 가는 이유는 더 많이 배치되기 위해서다. 피부에는 1cm2 당 약 200개의 통점이 빽빽이 분포하는데, 통각신경이 굵다면 이렇게 많은 수의 통각신경이 배치될 수 없다. 이렇게 빽빽이 배치돼야 아픈 부위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반면 내장 기관에는 통점이 1cm2 당 4개에 불과해 아픈 부위를 정확히 알기 어렵다. 폐암과 간암이 늦게 발견되는 것도 폐와 간에 통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신 통각신경의 느린 속도는 촉각신경이 보완한다. 통증이 일어날 때 대부분 촉각도 함께 오기 마련인데, 우리 몸은 경험을 통해 촉각에 반응해 통각의 느린 속도를 보완한다. 뾰족한 것에 닿았을 때 반사적으로 손을 뗀다든지, 등 뒤에서 누군가 건드리면 휙 돌아보는 것이 좋은 예다.
통각신경은 다른 감각신경에 비해서 매우 가는데, 이는 더 많이 배치되기 위해서이다. 피부에는 1cm2 당 약 200개의 통점이 빽빽이 분포하는데, 통각신경이 굵다면 이렇게 많은 수의 통각신경이 배치될 수 없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인 모르핀은 척수나 뇌 같은 중추 신경에 직접 작용해서 통증을 완화한다.
. 통증의 뿌리를 차단하는 신개념 진통제
이렇게 통증은 꼭 필요한 것이지만 정도가 심하면 생명까지 위협하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통증을 줄이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통증을 해소하려면 통증이 일어나는 여러 단계 중 한 부분을 차단하면 된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인 모르핀은 척수나 뇌 같은 중추 신경에 직접 작용해서 통증을 완화한다. 하지만 모르핀은 중독성이 있고 과다하게 사용했을 경우 중추신경계가 마비될 수도 있다. 따라서 통각 신경세포가 받은 자극을 신경신호로 바꾸기 전에 애초부터 통증을 차단하는 방법이 연구 중이다. 캡사이신 채널을 세계 최초로 발견한 서울대 오우택 교수는 캡사이신채널을 여는 역할을 하는 불포화지방산 12-HPETE이 진통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을 밝혀 진통제 PAC20030을 개발했다. 이는 캡사이신채널이 열리는 과정을 근원적으로 차단해 통증을 막는다.
이 방법은 통증을 일으키는 채널에 직접 작용하는 만큼 선별적으로 통증을 완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캡사이신채널을 막으면 치통, 피부염, 관절염 등의 염증성 통증을, 열 자극에 작용하는 채널을 막으면 화상으로 인한 통증을 선별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중추신경을 자극하지 않기 때문에 중독·마비 현상도 예방할 수 있다.
. 촉각 키워 통증 막는다
‘경피성 전기 신경 자극(TENS)’은 촉각신경에 전기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어 통각신경을 억제해 통증을 덜 느끼게 해주는 장치다.
한편 ‘문 조절 이론(gate control theory)’이라는 통증을 막는 재미있는 방법이 있다. 이 이론은 굵은 촉각신경으로 전달된 촉감이 가느다란 통각신경으로 전달되는 통각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즉 촉각이 세지면 통각신경을 더 많이 방해하므로 통증을 덜 느끼게 된다. ‘경피성 전기 신경 자극(TENS)’은 촉각신경에 전기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어 통각신경을 억제해 통증을 덜 느끼게 해주는 장치다.
사실 우리 몸도 ‘엔도르핀’이라는 진통제를 가지고 있다. 엔도르핀은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할 때나, 출산이 가까워졌을 때 분비된다. 운동에 집중할 때 발목이 삔 것을 잊는다든지, 전쟁터에서 상처를 입어도 아픔을 못 느끼다 병원에 와서야 느낀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엔도르핀의 작용이다.
통증은 우리 몸이 주는 경고 신호이니만큼 아프다고 마냥 싫어할 일만은 아니다. 통증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몸을 더 소중히 하는 것은 어떨까.
■ 의학을 통해 본 인간이해
학생 리포트 중에서 발췌. 의학과 철학의 내면적 상관성
인간은 적절한 심신의 절제와 활동과 휴식 없이는 건강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의학은 더 이상 단순한 치료 의학일수만은 없고 이제 철학, 특히 윤리학과도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현대 서양의학은 실증주의에 기초하여 치료 면에서는 눈부시게 발전했으나 자연과학에 대한 맹신 때문에 인간실존의 문제를 다루는 인간학에서는 이탈되어 갔다. 그에 따라 이루어진 의료기계의 무리한 증설과 신약개발의 과도한 투자는 의료비를 가속도로 증가시켰고, 임상분야를 지나치게 세분화한 결과, 환자의 치유보다는 전문적인 기술진단에 편중되고 있으며 의료 분규 등의 불신풍조까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학과 철학의 대화가 필요하다.
의사들에게는 출산, 사망, 성장, 위기, 질병, 곤란, 도움과 치료에 대한 근본적 물음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학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철학자들에게 답변이 요구 되어지는 물음이다. 그리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심리치료, 의학적 심리학의 기본문제, 육체와 심리학의 관계, 신체와 사회의 관계들의 문제들을 “살아있는 의학”의 중심문제로 삼게 되었다.
철학과 의학의 관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서양 고대와 중세의 의학철학은 자연철학의 내용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근세 이후의 의학과 철학의 관계는 19세기에는 축소되었으며, 베이컨, 록크, 콘디약, 콩트, 밀(Mill)등의 경험적 실증주의적 의학이론에 의하여 정체되었다. 그래서 의학에서의 이론적 문제의 독자성이 인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의학의 위치는 자연과학에 비하여 뒤쳐졌으며, 철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과 병행하여 의학과 철학관의 내면적 연관도 무시되었다. 그리고 19세기 철학의 흐름도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무관심하였다. 또한 현대 심신의학과 의학적 인간학의 영역에서는 철학적 사고를 되살리기 시작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의학자들은 철학적 요소의 평가와 참여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진행시키고 있다. 실증주의로 말미암아 과학과 철학으로부터 무시되었던 병과 치유에 관한 연구는 최근에 들어와서 인간실종의 근본문제로서 철학자들에게서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특히 철학적 인간학의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의학과 철학간의 문제가 되는 근본문제, 예컨대 삶과 죽음, 인간의 허약성, 육체와 영혼과 정신의 관제, 인간에 대한 염려, 삶의 진행과 현존재의 형성에 관한 문제는 과학화 하는 과정에서는 거의 조사해 볼 수 없는 것이며 철학적으로 정돈 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근본범주에 속하는 이러한 문제를 3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 날 때부터 생물학적으로 결핍존재이며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기한부의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질병은 유기체의 영역에서 장해인 것처럼 영적(정신적)영역에서도 장해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 때문에 병의 철학적 해석이 요구되고 이 병의 철학적 해석은 병에 관한 존재의 해명이 요구된다. 의사는 질병의 원인에 대한 해명을 넘어서서 치유와 주제의 근원에 대해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병의 근본에 대한 이해는 치유의 전제가 된다.
둘째, 인간은 염려하는 존재로서 서로서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공통의 연대성 속에 서 있다. 시간 속에 있는 우리의 삶은 걱정스럽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삶이다. 시간이 가면 죽음이 오고 죽음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결정하는 한계와 시간 속에 있는 우리의 존재의 제약을 보여 준다.
셋째, 죽음은 삶의 한계와 종식에 불과한 이미 들어와 있고 우리는 죽음을 실존 그 자체의 현상으로 체험하고 인식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이 마치 모든 날에 있지 않은 것처럼 죽음이 정상적인 현존재에 실존하지 않는 것처럼, 그리고 죽음은 하나의 예외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 의학적 인간학; 의학철학의 기초
저자 진교훈, 2002.2.28.
. 철학의 관점에서 본 의학에 관한 개론서로서, 크게 3개 부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의학철학 입문
의학적 인간학의 개관과 내용
의학적 인간학의 여러 양상을 학자들을 중심으로 설명
. 내용 중에서;
인간은 병든 존재이며, 병은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물질과 생명과 정신은 세 가지 형태들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다. 질병은 개별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객관화할 수 없는 것을 객관화하려고 하고 나중에는 그 객관화한 것 자체를 새로운 과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반복하는 모순을 의학은 거듭 범하고 있다.
(목차 중에서)
. 철학(哲學)과 의학(醫學)의 내면적 상관성
. 의학과 철학의 만남. 의학과 철학의 내면적 상관성에 관한 사적(史的) 고찰 서양 고대와 중세의 의학철학 서양의 근세 이후의 철학과 의학의 관계 현대 철학과 의학과의 관계
. 의학적인 관심과 철학적인 관심의 내면적 상관성 연구 인간의 나약함과 노쇠 염려(念慮), 고통(苦痛) 죽는 것과 죽음의 문제. 의사와 환자의 만남 의학적 인간학의 과제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
대화의 중요성
. 현대 의학에 대한 인간학적 성찰 현대 의학의 기조(基調) 의학의 실천성과 윤리성 인간의 존엄성과 생의학적 문제 . 의술의 이론과 실천에 인격론 도입 인격론과 의술의 상관성 인격의 양상(樣相)과 그 의미 인격론의 의술에 적용
. 의학적 인간학의 의미
. 병과 건강의 의미 . 치유의 의미 . 생명의 의미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개념의 다의성(多義性)과 그 정의(定義)의 난점 생명의 가치의 의미 생명보전(生命保全)과 생명가치(生命價値)의 구현
. 의학적 인간학과 철학적 인간학 및 의학철학과의 관계
. 의학적 인간학과 심리분석(정신분석)의 관계 심리분석의 대두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특징에 대한 비판적 수용 프로이트의 충동이론의 문제점 프로이트의 심리의 구조모델과 철학적 인간학의 관점에서 본 발병의 근본원인 심리분석(정신분석)에서 본 병의 생성과 꿈의 해석 심리분석과 병의 치유
. 현대 의학적 인간학의 모델
. 바이츠제커에 의한 의학적 인간학 마음(Seele)과 몸(Leib)의 상관성 . 겝자텔에 의한 의학적 인간학 강박증의 세계와 인간이해 대물성 성적 도착증(對物性 性的 倒錯症, Fetischismus) 및 성적 장애(性的 障碍) 병든 사람과 건강한 사람 의사의 자세 . 메다르 보스에 의한 의학적 인간학 현존재분석의 방법과 현상학 전통적 의학 및 심리학과 심신상관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현존재분석적 건강개념의 의미 현존재분석 이론의 결과와 심신상관학의 실습 . 아르투르 요레스에 의한 의학적 인간학 인간과 병 늙음과 죽음의 의미 치유의 의미 위탁 받은 인간 . 메를로-퐁티에 의한 의학적 인간학 메를로-퐁티의 철학 하는 태도와 애매성의 의미 행동의 의미 지각의 의미 몸의 의미 인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
(진교훈, 秦敎勳)
서울대 사범대학 국민윤리교육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졸업
독일 빈(Wien)대학교 철학박사(1972)
□ 의료위기 현실 진단과 처방
“Hani, 책과 사람” 중에서
현대의학의 눈부신 발전을 칭송하는 한편으로 의료의 위기를 외치는 소리도 작지 않다. 위기의 근원으로 혹자는 재정상의 문제점을, 혹자는 분배의 불평등을, 혹자는 기술적 발전의 한계 등을 지적한다. 이에 대해 철학자인 진교훈 교수(서울대 국민윤리교육학)는 현재의 위기는 의사, 간호사, 의료기술자, 병원운영자, 제약회사와 의료기기 회사 등 의료공급자, 그리고 보건담당관리, 의료사고 소송 변호사, 약 광고업계, 언론매체 종사자들의 복합적인 이기주의가 환자의 약점을 악용해 금전 취득에만 급급한 데서 발생했다고 본다. 또 환자의 무지와 조급함과 몰염치가 위기를 더욱 촉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거시적으로 볼 때 현대인의 인간성 상실과 윤리성 망각이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았다. 의학교육과 약학교육, 넓은 의미의 생명과학교육이 실증주의적이고 기능주의적인 교육에 치중한 반면, 인간과 생명존중에 대한 교육을 하지 않는 데서 오늘의 위기가 배태되었다는 진단도 서슴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조금 생소하게 들릴 “의학적 인간학”을 처방 원리로 제시하며 구체적인 논지를 펼쳤다. 우선 철학과 의학이 내면적 상관성을 갖는다는 당연하면서도 소홀하기 쉬운 점에 대해 역사적•철학적으로 고찰한다. 이어서 병과 건강, 치유, 생명 등에 대해 그 “존재론적 의미”를 천착하고 심리분석(정신분석)에 대해서 철학의 관점에서 메스를 들이댄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의학적 인간학”의 대표적인 모델로 여기는 바이츠제커, 겝자텔, 메다르 보스, 아르투르 요레스, 메를로-퐁티 등의 사상을 소개한다.
요컨대 저자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철학자인 사람은 신에 버금간다”는 히포크라테스의 금언에 발맞추어 의학이 철학과 진지한 대화를 함으로써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며, 또 그로서만 오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의학이 과연 위기인지, 위기라면 어디에서 연원 하는지, 또 처방은 무엇인지에 대해 저자와 견해를 달리할지라도 의학에 대해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진 이 철학자의 주장을 경청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철학에서 의학으로 다가가는 이러한 노력에 상응하는 의학(자)의 답변이 기대된다.(황상익/서울대학교 교수,의학사)
□ 과학시대의 생명윤리
조선일보, 2002.5.9.
공상 영화에나 등장하던 ‘복제 인간’이 이제 더 이상 황당하게 들리지 않는다. 배아 복제를 통한 복제 인간 실현 가능성이 눈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머지 않아 자신의 유전자와 똑같은 간과 심장을 ‘맞춤 이식’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생명과학의 발달은 인간에게 과연 득만 될 것인가? 한 세기 전 기술복제(複製)시대 예술의 운명처럼, 생명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존엄성과 아우라(aura•후광)를 잃을 위기에 처한 것은 아닐까? 윤리학자 진교훈(秦敎勳) 서울대 교수와 생물학자 최재천(崔在天) 서울대 교수가 ‘과학시대의 생명 윤리’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들은 “인간은 언제부터 인간이라는 생명체로 볼 수 있는가”를 놓고 논의를 시작했다. (편집자주)
영국은 수정된 직후부터 14일까지의 배아에 대해서는 연구와 실험을 할 수 있다고 최근 결론 내렸다. 그러나 정자와 난자가 수정된 직후부터 인간 생명이 시작된다고 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수정란에 대한 실험은 인간에 대한 실험과 다를 바 없다. 생명의 특성은 연속성이다. 14일째 되는 수정란이나, 15일째 되는 수정란, 그리고 3개월 된 태아가 과연 얼마나 다른가? (진)
어느 시점을 인간 생명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를 과학과 논리로써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각 사회가 서로 합의할만한 기준을 세우는 게 최상이다. 배아에 대한 연구는 그런 사회적 합의에서 가능할 것이다. (최)
생명은 외경스런 존재이고, 따라서 어느 시점에서도 존중돼야 한다. 낙태가 살인이듯, 연구와 실험을 위해 배아를 희생시키는 것도 살인이다. (진)
생물학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정자와 난자는 생명체를 이어주는 고리이지 생명체 자체는 아니다. 정자와 난자는 살아 있지만, 그 자체로는 DNA를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정된 직후부터를 생명체의 시작으로 본다 해도, 많은 윤리적.정책적 문제점이 제기될 수 있다. 매년 미국에서는 3분의 2 정도의 수정란이 자동 유산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임신한 미국 여성 3분의 2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체를 죽였다는 이야기할 수는 없다. 배아복제 문제 등 생명윤리를 논할 때, 어떤 절대적 기준을 찾으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최)
과학자가 연구하고 싶은 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옛 소련이나 일본에서 생체실험을 했던 것이 옳았는가? 인문.사회과학을 이해하는 과학자도 있지만, 인문.사회과학은 물론 예술이나 종교 등에 대해 무지한 자연과학자와 의학도들도 있다. (진)
배아를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 배아를 연구하는 기술은 현재 없다. 개인적으로 배아연구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라리 배아복제 기술을 몰랐다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고, 더 많은 ‘판도라의 상자’들이 앞으로 열릴 것이다. 자물쇠만 잠근다고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시간만 늦춰질 뿐이다. 윤리적으로 가슴 아픈 부분도 있겠지만, 연구는 계속해야 한다. 과학자와 인문학자 등이 서로 협력해 ‘판도라의 상자’를 잘 열도록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다. (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 불치병이나 난치병을 위한 줄기세포 연구라면, 성인의 몸에서 ‘성체 줄기세포’를 얻어 연구하면 되지, 왜 생명체인 배아를 희생시켜야 하는가? 과학자와 의학자들이 인류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연구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데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생명사랑에 대한 종교인과 윤리학자들의 충정도 또한 존중돼야 한다. (진)
이 모든 논의가 사실 죽음과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될 것이다. 난치병 등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배아복제를 통해 배아 줄기세포를 얻고, 여기서 장기이식을 받으면 모든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식으로 일부 과학자들이 주장했기에 더욱 논란이 커진 것이다. 과학자들은 자신이 실험하고 관찰할 것만 이야기하고 예측은 안 했으면 한다. (진)
최근 불치병 말기 환자 등에 대한 안락사 문제가 세계적으로 또 다른 생명윤리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네델란드는 본인과 친권자, 그리고 의사의 합의만 있으면 안락사를 허용한다지만, 윤리학자로서 찬성할 수 없다. (진)
나는 생명체의 주체는 DNA라고 본다. DNA 혹은 진화생물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자살은 직무유기이다. 후대에 유전자를 전달해야 할 생명체가 자신의 의무를 포기한 것이기에. 하지만 모르겠다. 안락사가 반드시 틀린 것인지, 어떤지…. (최)
인간복제 문제로 마무리를 해보자. 복제 인간은 결코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고, 시도해서도 안될 것이다. 복제 인간이 탄생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것이다. 기본적인 인륜제도가 무너질 위험성도 있다. 복제 인간이 태어남으로써 가족이 해체되면 결국 사회와 국가도 해체될 것이다. (진)
복제인간이 나타나서 우리 주변에 함께 사는 게 그렇게도 끔찍한 일일까? 성공 확률은 여전히 낮지만, 복제 인간은 결국 자신의 귓불을 뜯어서 만든, 유전자가 같은 ‘일란성 쌍둥이 동생’이 태어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유전자가 같아도, 환경과 사회적 여건 등이 다르기에, 그는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영혼은 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바람이지만, 복제인간을 두려워할 근본적인 이유도 없다. 그들은 또 다른 인간다움을 찾아낼 것이다. (최)
■ 생명윤리학 이론
학생 리포트 중에서 발췌
생명은 일회적인 것, 내면적인 것, 영혼이 깃들여 있는 것, 역동적인 것, 체험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 따라서 초합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계론적인 사고, 도식화하는 사고, 수학적, 합리주의적인 사고로 파악될 수 없고 정서적인 느낌을 통해 간접적으로 겨우 이해될 수 있다. 생명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으므로 모든 생명체는 효용가치와 쾌락가치와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 자신의 본래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므로 생명체를 인위적으로 훼손시키거나 소멸시키는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진교훈, “의학적 인간학”)
그러나 생명이 신성하다고 할 때의 신성함은 인간의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에게 다른 생명체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그 하나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인간을 비롯한 지구의 모든 생명체의 기원과 탄생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으로 보는 것에서 기인한다.
대부분의 생명과학자들은 생명을 물질의 우연적 화학작용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보고 유전자나 세포가 갖고 있는 정보도 물질의 집합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본다. 생명은 진화해가면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물질의 조직체이다. 여기서 진화라는 개념은 자기 번식, 여러 세대들을 잇는 물질의 연속성, 유전자의 변이, 변이한 개체의 자연도태 따위 현상들을 함축하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기원은 과거 20만년 전 혹은 그 이전에 아프리카 어느 곳에서 시작되었으며 모든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선택의 산물이며 영장류에 속하고 그와 유사한 다른 종들과 혈족관계를 이루는 한 종류이다.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분시켜 준다고 여겨지는 직립보행, 언어능력, 도구사용, 사랑과 성, 사고작용, 정신작용은 자연선택에 의한 것으로 인간의 뇌의 번연계에 있는 대뇌피질 안의 10억 개의 뉴런들의 결합, 그리고 운동영역과 감각영역의 상관성에서 기인하며 개인의 기억의 기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장디디에 뱅상. 뤼크 페리, 생물학적 인간, 철학적 인간, 이자경 역, 2002)
■ 의학과 철학의 만남
주간.조선,
글; 이.상복, 서울의대교수
의학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병에 관한 학문이다. 왜 병이 생기며, 그 병을 어떻게 고치느냐 하는 것이 의학의 연구 대상이다. 병든 몸이란 몸의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며, 병든 마음이란 마음이 제대로 돼 있지 않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몸이든 마음이든 병들었다 함은 제 본연의 모습을 잃고 무언가 잘못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우리의 몸과 마음의 본연의 모습인 것인가? 병들지 않은 몸과 마음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가? 우리의 타고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면서부터 기형인 경우, 또한 병이 없다 할 것인가? 아니면 기형과 같은 극소수의 특출한 것이 아닌 대다수의 인간이 지니고 있는 흔히 보는 다수인의 평균적인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러나 회충이환율이 반수를 넘는 지역에서는 그 이완상태가 병들지 않는 상태로 보아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 태어나면서부터의 제모습도 대다수 인간의 평균적인 개념도 아닌 외부로부터의 병원균이나 독소의 침입, 또는 기계적인 힘에 의한 상처를 받지 않고 내부의 신진대사나 그 밖의 기능이 제대로 영위되는 경우, 그래서 고통스럽지 않고 번민스럽지 않는 상태를 흔히 건강하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외부환경과의 끊임없는 교호작용에서 외부로부터의 상처나 독소 및 미생물의 침입을 100% 막을 수는 없으며, 그런 면에서 그 누구나 병들었다고 해야 할 터인데, 그러한 외부물질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은 평형과 안정을 유지해 갈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이 병든 상태라고 규정 지울 수는 없다.
한편 마음의 번민과 고뇌는 인간인 한에서 떼어버리기 힘든 매우 인간적인 양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번민이고 고뇌하는 마음을 병적 상태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신이 아닌 인간인 한에서 병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의사는 어떠한 상태를 병적인 것으로 진단하고 그를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인가? 과연 병적인 상태와 건강한 상태의 구분은 누구에게도 명명백백한 기준이 있는 것인가. 번민하는 인간의 모습이 정상인 것인데도 그를 병적인 것으로 보고 그 번민을 없애려고 하는 의사의 노력이 오히려 인간의 깊은 심성을 이해 못하는 데서 오는 무리한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인공적인, 그리고 그 노력자체가 오히려 “병적”인 상태는 아닌가? 인간은 각자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없는 1회 적인 독특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건강이라는 그 누구에게도 들어맞는 일반적인 평균 개념 속에 맞추어 규격화하고 도식화하며, 그에 벗어나는 모든 독자성을 깎아 내고 도려내어 각양각색의 개개의 인간을 획일화, 단순화, 그리고 평균화함으로써 오히려 탈 인간화 내지는 인간말살을 꾀하는 것이나 아닌가. 의사는 과연 인간을 살리고 있는 것인가, 죽이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의사는 그 환자들에게 베풀어주고 있는가. 이득을 주는가, 해를 주는가? 여기에 의학의 철학과의 첫 만남이 있다.
의학이 인간을 하나의 물리화학적인 요소로 분해되는 생물로서 다루고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에 철저하다면 인간은 모두 신체화되어 버려 마음의 설 땅이 없다. 그곳에는 인간기계론이 판을 치고 자동차나 기계를 수리하듯 인간의 몸의 고장을 갈아 끼우고 도려내고 땜질하는데 의사의 일은 그치게 된다. 인간을 육체로만 다룬다면 그 육체를 왜 보존하고 가꾸고 튼튼하게 하여야 하는지 그 까닭을 말하기 힘들다. 들판의 장미꽃이나 숲 속의 늑대와 그 무엇이 다르다고 애써 손질하고 매만지는 것인가. 거기엔 인간을 단순히 육체로만 볼 수 없는 비육체적인 인간의 영혼과 그 영혼으로 인한 인간의 가치 체계와 주체성이 있음으로써만 설명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려 애쓰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들판의 꽃이나 산속의 짐승과는 달리 귀한 것은 그 몸 안에 몸을 넘어서는 마음이 깃들여있고 그 마음 속에 이 우주와 삼라만상을 포괄하는 주체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의 참모습을 또렷이 하는 것은 아마, 자연과학적 방법론 위에 서는 의학으로는 힘에 미치지 못하는 철학의 영역인 것이다. 따라서 의사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깊숙하게 도사리고 있는 병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인간의 바람과 인간의 참모습을 환자에게 되살려내고 가져다 준다면 그는 이미 의학의 “장이”로서가 아니라, 의학의 “철인”으로서 인간을 병으로부터 구원해주고 있는 인간의 “목자”가 되는 것이다. 의사가 의학과 더불어 철학을 가지런히 한다면 그는 마치 신과 같다고 한 어느 고인의 말은 이런 의미를 짧게 표현한 것으로 보겠다.
의사가 환자에게서 그 병든 환부만을 치료한다면 그 의사는 정확히 자연과학의 입장에 선 의학으로써 그 책임을 다하고 있음에는 틀림없으나 스스로 의료기술인의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병든 몸으로 해서 겪는 환자의 마음의 상처와 번민마저 어루만지고 병든 인간을 치유하려고 할 때 의사는 의료기술인의 입장을 넘어서 仁術을 베푸는 醫人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환자가 병든 육체로서가 아닌 병에 시달리는 인간으로서 대해지고, 의사와 환자는 기술자와 고장 난 물체의 관계가 아닌 도움을 주고 받는 대등한 인간관계로서 사회적인 인연이 맺어지게 된다. 환자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느끼고 환자의 문제를 내 문제인양 함께 고민하고 함께 그 해결을 위한 전문가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할 때 원만한 의사와 환자의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의사는 환자에 있어서 병든 상태에 그 관심의 초점을 맞추고 환자는 의사의 인술에 전폭적인 신뢰로 자기 몸과 마음을 몽땅 맡길 때 건전한 관계가 있게 된다. 이러한 바람직한 관계가 의술의 대가로써 돈을 주고 받는 이해관계에 보다 큰 관심의 초점이 모아지고, 의사의 진료에 대한 불신에서 빚어지는 갖가지 불미스런 법률적인 소송사건으로까지 번진다면 그 자체가 병적인 상태요, 그 또한 치유되어야 할 인간관계의 병인 것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와 같은 “의사와 환자의 사회병리”를 흔히 본다. 병을 고치려는 동기에서 형성된 인간관계가 새로운 병을 잉태하고 증식시켜 나가게 된다. 이것은 병을 고치는 입장이 아니요, 병을 만드는 입장이다. 의사가 돈에 초점을 맞출 때 환자의 병을 돈주머니로 보고 오히려 그 병을 키워 노다지 단지로 삼는 일이 없다고 누가 보장하랴! 그땐, 이미 의사는 그 스스로 의사의 품위를 내던진 악덕상인으로 변신되어 있는 것이다. 악덕 상인화된 의사가 사회의 지탄을 받고, 환자의 불신을 불러 일으키며, 하나의 사회악으로 문제화된다면 그 문제의 해결은 어디서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가? 그것은 철학 없는 의학이 불러 일으킨 비극이요, 윤리 없는 의술이 빚은 의학의 치부인 것이다. 여기에 또한 철학이 의학에 개입되어야 하는 절실한 요청이 있게 된다.
병이 일차적으로 병균이나 독소 또는 외상으로 하여 생기는 경우, 검사하며 약을 쓰며 수술하는 행위는 돈에 초점을 맞추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돈과 결부된 경제적 문제를 제기시키고 있다. 환자가 돈이 없이 진찰을 받지 못하고 필요한 약을 쓰지 못한다면 그 죄는 누가 져야 하는가? 돈이 없다고 의사는 이런 사태를 방관만하고 있어야 하는가. 단순히 돈 때문에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인가? 여유 있는 의사가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보아주고 병을 고쳐주는 것은 하나의 보시요, 미덕이다. 그러나 가난한 환자들이 줄을 이어 찾아올 때 의사는 불원간 스스로 가난한 입장으로 전락되어 도움을 베풀지 못하는 딱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가난한 의사는 가난한 환자에게 무엇을 베풀 수 있는가? 그 병이 돈이 드는 약이 필요한 경우 환자나 의사 모두 약 쓸 돈이 없는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것은 의사와 환자 두 사람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전체의 문제로 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사회가 이 문제를 기피하고 해결해주지 못하는 경우, 그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병적 사회다. 그럴 때 의사는 그러한 병든 사회마저 고쳐야 하는가? 그런데 더 나아가서 환자의 병이 순전히 병든 사회로 해서 생기는 경우도 흔히 있다. 또한 그렇지 않은 병에도 사회의 병으로 해 더욱 악화되는 예도 많다. 이들 경우에 있어서 환자의 병을 고쳐야 하는 의사의 소명의식은 어떠한 행동을 강요하는 것인가? 행동으로써 병의 원천적인 뿌리를 뽑아내고 잘라내는 수술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것이 의사 개인 또는 의사집단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고, 또 의사가 하여야 할 직분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돈이 없이 영양 실조 된 환자에게 돈의 처방을 내리고 가장과 직장 안의 알력과 갈등에서 번민하는 환자를 위해 그 가정과 직장의 문제에 뛰어들어 해결해 주는 것이 의사의 마땅히 하여야 할 “의료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질환의 病因的 要素가 사회 안의 그릇된 인간관계와 제도, 습관, 내지는 사회집단의 의식구조 안에 박혀 있는 경우, 그를 교정하고 개혁하는 노력 또한 “의료행위”라고 할 것인가. 여기에 또한 의사의 철학적 사유와 판단이 요청되는 문제가 있다.
의사가 그러한 원천적인 병인 제거에 손을 쓰지 못할 때 그 자신에 있어서나 환자에 있어서 모두 마찬가지로 답답한 입장에 놓여 올바른 처방전을 내지 못하거나, 내더라도 공수표화 하는 쓰라린 현실에 부딪치게 된다. 몸의 병을 고치던 의사가 그 몸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마음의 병을 고쳐야만 그 마음의 병을 보다 근원적으로 고치기 위하여 사회의 병과 인간의 병을 고쳐야 하는 논리를 바로 인식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 의사 개인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큰 저항에 부딪혀 행동에서 제약을 받게 되는 수가 많다. 여기에 의사로서의 힘의 한계가 있고 고충이 있다. 병을 그 뿌리로부터 고쳐내려는 당연한 의사의 「의료적」인 의욕과 열정은 좌초하는 운명에 놓이기 때문이다.
의사가 환자의 마음을 다스리려 할 때 그는 이미 좋은 의미의 의사를 넘어서 “牧者”의 입장에 서서 신부가 되고 목사가 되며 스님이 되어야 한다. 의사가 환자의 병과 관련된 사회 안의 잘못을 고쳐보려고 한다면 그는 이미 단순한 의사의 입장을 벗어나 정치인으로서 사회 개혁과 자선사업, 제도개선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식적 입장에서 의사의 할 일이 아니다. 전문화된 사회에서 의사는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적 입장에서 인간의 질환을 정확히 파악하고 의식적인 면에서의 치료에 그치는 것이다. 좋은 동기에서 뜨거운 인간애의 열정으로 어설프게 인간의 영혼을 제 나름대로 구제해 본다고 “목자”의 시늉을 하는 의사가 과연 올바르게 그 영혼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의사의 간섭으로 오히려 그 구제하려던 영혼이 더욱 구제하기 어려운 심연으로 빠져들어가는 역효과를 보이는 과오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사회의 개혁과 제도의 개선을 꾀한다고 정열과 의협심으로 의사가 “정치”에 뛰어드는 것이 오히려 사회의 분란과 문제의 악화를 초래하는 씨가 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영혼문제는 목자에게 맡기고 사회문제는 정치인에게 맡기는 것이 설령 환자의 병과 그 병의 치료에 관련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환자를 위해 결과적으로 최선의 방안이 되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 의사의 자기 좌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고 환자의 치료는 의사 홀로의 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사회 전체가 제 각기 역량으로 힘껏 도울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하는 진리를 체득하게 된다.
철학은 환자진료에 있어서 질병에 관한 전문적인 의학의 지식과 기술을 제외한 위와 같은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관건이 된다. 환자의 병은 그 앓는 환자를 때어서 병 자체만을 다룰 수 없는 데에서 의사에 있어서 의학 이외의 철학이 필요하게 된다. 병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고, 그 인간 안에서 고쳐야 할 병을 전체적으로 다뤄야 하는 의사에게 병에 대한 과학적인 전문지식 이외에, 인간 이해를 위한 인간학으로서의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을 그 전체로써 파악하는 일은 과학을 넘어선 철학의 입장이다. 인간의 여러 측면을 생리학, 생태학,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역사학 및 문화인류학 등 여러 과학적 입장에서 다룰 수 있고, 그러한 과학적 바탕 위에서 의학의 이론이 의학에 머무는 한에서는 인간을 전체로 파악할 수는 없다. 학문으로서의 의학은 질병과의 관련 위에서 인간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의 종합을 꾀하고, 그런 면에서 과학적 입장에서는 인간의 正常과 異常에 관한 인간학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연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과학적 인간학으로서의 의학은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인간에 대한 참된 모습을 밝히지 못한 채 왜곡된 인간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한 왜곡된 인간상을 바로 고쳐보려고 하는 노력이 인간을 전체로서 그 근원적 입장에서 밝혀보려고 하는 철학적 인간학이다.
의사가 환자의 질병만이 아니라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질병을 바로 파악하는 것이 그 병을 바로 고치는데 필요불가결 할 것이라면 그는 의학적 입장을 넘어선 철학적 입장에 서야 한다. 생명에의 경이사상으로 병든 인간의 구제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슈바이쳐 박사에서 우리는 확고한 철학적 입장에 선 의사의 좋은 본보기를 본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내버려진 적도 아프리카대륙의 흑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줌으로써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도하는 그의 생애는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대하여야 하고 환자를 위한 봉사에서 어떻게 그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 가는가 하는 하나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슈바이쳐 박사가 봉사하던 아프리카대륙과 같은 상황이 아직도 허다하게 많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슈바이쳐 박사와 같은 의사가 과연 이 땅에 몇이나 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안이한 일상의 테두리 안에서 환자 자신들의 문제보다는 나 자신의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풀지 못한 채 자신 안의 불건전한 병적 요소와 싸우는 환자의 입장에 서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의사로서 다른 환자의 문제해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불안전한 상태에 서 있다. 스스로 환자이면서 환자를 고쳐야 하는 입장은 의사의 숙명적인 것이다. 슈바이쳐 자신은 그 자신의 문제로서 괴로워한 적은 없었는가. 문제는 불건전한 의사 안의 병적 요소로 해서 환자가 조금이라도 피해를 보지는 않느냐 하는 것인데 과연, 나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환자에 그 어떤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고 찾아온 환자에게 내가 과연 그 어느 의사보다도 훌륭하게 환자의 희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런 자신이 서지 않을 때 나는 그 환자를 나보다 더 훌륭하게 치료해 줄 수 있는 의사에게 양보해야 한다. 인간 생명의 관리인으로서의 의사의 책임과 의무는 두려우리만큼 무겁고 엄숙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나의 판단과 경망한 나의 행동이 환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의 생존권을 보존 하기는커녕 박탈해 버리는 살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바로 생명의 경외를 근간으로 하는 의료윤리가 있게 되고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인간인 상태에서 의식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 서는 경우 우리는 그 환자의 생명을 그대로 계속 존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노력에 종지부를 찍고 그로 인한 인력과 엄청난 의료수가의 낭비를 막아야 하는 것인가? 과연 어떠한 이유에서든 인간이 인간의 생명에 종결을 지울 수도 있는 것인가?
위에서 말한 모든 문제들은 의학에 있어서의 철학적인 문제들이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의료행위에 직결되는 중요한 사항들로서 우리의 진료 출발점에서 부딪치게 되는 난문들이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의료에의 관문들로서 의사는 각자의 철학적인 양식에 따라 각자 특유의 결단을 보이며 해결해 가고 있다. 그곳에 의사의 인격이 반영되고 철학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서 철학의 빈곤은 그것이 그대로 의료행위에 파급되어 새로운 병을 낳게 된다. 혹을 때려다 혹을 붙인다는 말이 이 상황을 대변하는바, 철학 부재내지는 빈곤의 의료는 철부지 아이에게 장전된 총 자루를 메어주는 식으로 매우 위험한 것이다.
고도의 기술 인으로서의 의사가 세속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이기와 나태와 교활, 그리고 간사마저 지니고 있다면, 그로 인해 빚어지는 의료상의 피해는 인간생명의 여부에 직결되어 까닭 모를 무덤이 생겨나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위험성이 많다. 새로운 의학 발전에 부지런히 발맞추어 최신 최상의 진료를 베풀도록 우직스러우리만큼 요령과 어물쩡을 모른 채 성실하고 세밀주도 한 자세로 배우고 봉사하는 생활을 보내는 의사여야만 환자도 안심하고 자기의 생명을 몽땅 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바람직스런 의사는 자기 안의 온갖 “악마”의 소리를 물리칠 수 있는 철통 같은 의료양심을 지니고 있어야만 가능한 채,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에서 보이는 의료양심은 고도의 의료기술을 연마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끊임없는 자신에의 반성과 채찍 그리고 깊은 철학적인 사색과 도덕적인 단련으로 비로소 쌓아지는 값비싼 산물이다.
인간에 대한 투철한 성찰과 뜨거운 인간애, 그리고 극기 복래 하는 자기희생적인 봉사정신의 확고한 철학적 이념 위에 고도로 전문화된 의학이론과 의료기술을 유감없이 구사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료인의 숭고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철학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모든 의사에게 의학의 전문지식과 기술에 앞서 꼭 지녀야 할 등불이요, 나침반이 되고 있다
■ 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
엔도 슈사쿠 저, 한은미 역
도서 리뷰 중에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삶. 이러한 삶의 끝은 무엇일까? 그 종착지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에 대해 동서양의 현자들이 많은 어록을 남겼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죽음과 삶은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삶의 완결이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이 책의 원제목은 “잘 사는 법 잘 죽는 법”이다. 작가 엔도 슈사쿠는 삶의 많은 부분을 병마와 싸우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삶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삶을 깊이 관조하고 죽음에 대해 많은 성찰을 하게 된다. 자신의 삶의 주어진 고통에 꺾이지 않고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치열하게 살았던 엔도 슈사쿠는 인생은 고통(고뇌)의 연속이지만 그럴수록 삶을 즐기며 살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이 책은 가벼운 문체로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씌여졌지만, 그 이면에는 엔도 슈사쿠의 깊은 인생철학과 주옥 같은 인생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의 인생관과 신앙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지금 이순간을 행복하고 유쾌하게 보낼 수 있는 지혜를 갖게 될 것이다.
. 저자 : 동경 출생, 1923~1996, 게이오대 불문학과 소설 “침묵”, “바다와 독약” 등 수필집 “나를 사랑하는 법”, “심술궂은 인간에게”, “이상한 자신을 사랑하라” 등
(목차)
. 희망은 내 안에 있다
행복과 불행은 나에게 달려 있다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다
고통은 나의 힘
아름답게 나이 드는 법
여유롭고 즐겁게, 그러나 진실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움직임
이 세상에 신은 존재하는가
. 삶의 여백을 위해
비어 있는 듯 꽉 찬 인생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산다는 것은
우주와 함께 호흡하다
육체를 통해 마음을 바라본다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
부부가 된다는 것
의학을 넘어 인간학으로
. 고통에도 끝이 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이 든다는 것
노인의 얼굴
인생은 비극인가
무엇이 환자를 절망하게 하는가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 ― 죄와 악
‘꽤, 잘 살았다!’
. 잘 놀고 잘 배우는 법
프로와 아마추어
잘 놀고 잘 배우는 법
여자들의 논리
사랑과 연애는 전혀 다르다
나를 키워준 사람들
가족이라는 것
.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말의 힘
인연의 신비
풍경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소비시대에 예술을 소비하는 법
어느 섣달 그믐날
(내용 중에서)
오랫동안 인간의 생명을 육체적인 면만으로 생각해왔던 의사들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말기 암 환자에 대해 의사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때 많은 의사들이 “의학은 과학이다.”라는 신념을 굳게 믿고 있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의학은 과학뿐 아니라 인간학도 알아야 할 때이다. 그리고 과연 생리적인 육체의 종말이 모든 것의 종말인지 어떤지를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을 마음속에 지닌 사람은 그것을 몇 번이고 꼭꼭 되새김질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말 못할 괴로운 비밀로 인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삶의 지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그 비밀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그 비밀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적어도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위선자 “자신은 항상 올바른 사람이라 생각하며 남들에게 심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위선적인 도덕군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베푸는 선행이나 사랑이 상대방에게는 매우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는 달갑지 않은 친절일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의 사랑이나 선의 감정에 눈멀어 자기만족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선마’라고 한다. 사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자신도 이런 ‘선마’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경험이 과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었다.
이렇게 악의 없는 ‘빵점’을 받아온 나를 어머니는 슬픔 어린 표정으로 위로하셨다. “너는 대기만성(大器晩成)할 거야!”라는 말씀과 함께. 그러나 초등학생인 내가 그 말뜻을 제대로 파악할 리 없었다. 뜻도 모르는 채 동네 아이들한테 자랑 삼아 그 말을 했더니 아이들이 감탄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구들도 그 말뜻을 모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기저기 그 말을 떠들고 다녔는데, “나는 만기대성한대!”라고 말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신 어머니가 또 한번 비통한 얼굴을 하셨던 기억이 남아있다.
내가 ‘꽤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안에 존재하는 ‘채널’이 하나뿐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백여 개의 채널을 돌리면서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노인 탈에는 신의 모습이 숨어 있다. 나도 늙었기 때문일까, 이 노인 탈이 정겹게 느껴진다. 학창 시절, 수업 중에 이 노인 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배운 것은 이 탈의 이미지는 단순한 노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모습을 어딘가에 숨기고 있거나 신에 근접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내가 얻은 노인 탈도 소박한 가운데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고, 그런 마음과 함께 자꾸만 쳐다보게 된다.
예를 들면, 당신 친구의 인생에서 당신은 그 사람의 중요한 조연이다. 그의 인생에서 당신은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조연일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종종 잊고 산다. 당신은 당신의 배우자의 인생에서 종종 자신이 조연이라는 신분임을 잊어버린 채 마치 주연인 양 행세하려 들지는 않았던가.
‘아름다운 노년(老年)’ 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지하철역 같은 곳에 노부부의 사진을 붙여놓고 ‘아름다운 노년’이라는 문구를 써넣은 포스터 같은 것도 있다. 그런 포스터를 보면 나는 한없는 부러움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것이 과연 가능할까?” 하고 반발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한다. 아름다운 노년이라, 그것은 혹시 언어의 속임수 같은 것이 아닐까?
(출판사 서평 중에서)
종교와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차례 오른 엔도 슈사쿠의 산문집. 엔도 슈사쿠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부드러운 힘, 인생살이의 무거움을 가벼운 필체로 담아내는 공력이 돋보이는 수필집이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는 매우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이지만 한국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특히 그는 기독교 문학에서 매우 유명하고, 의외로 유머작가로도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은 그 엔도 슈사쿠가 삶의 굴곡들을 펼쳐두고 그 사이사이에 후회 없이 인생사는 비법을 박아둔 인생론이다. 그의 책을 읽고 나면 ‘인생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는 엔도 슈사쿠의 메시지가 잔잔하게 마음에 스며든다.
풍부한 교양과 지성, 그리고 인생에 대한 무르익은 통찰이 빛나는 엔도 슈사쿠의 이 수필집은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숨겨진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엔도슈사쿠의 소박한 모습, 흔히 관심 갖지 않는 세상의 사각지대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그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유쾌한 논리,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진솔한 생각들이 이 수필집에는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수필집을 통해 엔도 슈사쿠를 내면을 엿보는 것은 이 시대를 정신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에 묵직한 무언가를 던져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엔도의 인생철학이 넘쳐나는 이 책은 행복과 불행의 선택은 본인에게 있다는 점과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담은 ‘희망은 내 안에 있다’, 삶의 여백에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가에 대한 ‘삶의 여백을 위해’, 엔도 자신의 투병생활을 중심으로 늙음과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불청객인 고통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은 ‘고통에도 끝이 있다’, 다방면에 능통한 엔도가 말하는 연애와 사랑의 다른 점을 중심으로 쓰인 ‘잘 놀고 잘 배우는 법’, 인생 전체의 시기와 현 소비시대에 대한 통찰을 이야기 한 ‘모든 것은 때가 있다’, 총 5부로 이어져 있다.
불우한 유년기와 오랜 투병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책을 쓸 때 진지하고 무거운 표정이 아닌 여유롭고 평화로운 얼굴로 글을 썼다고 한다. 투고 과정에서 그는 지난했던 과거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 괴롭거나 힘든 일이 아니라 따뜻하게 보듬고 싶은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유쾌하게 사는 법, 죽는 법”은 인생살이 지혜에 대한 성숙한 통찰과 그의 풍부한 지성을 가벼우면서도 차분한 필치로 고스란히 옮기고 있다.
지칠 줄 모르는 배움의 열정으로 글 이외에도 다도, 바둑, 그림, 연극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던 엔도 슈사쿠. 그는 자신이 오로지 소설가로 남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소설가 이전에 삶을 사랑하고 그 삶을 어떻게 아껴줄 것인지를 진심으로 고민하던 청년이자 끊임없이 인간과 삶을 탐구하는 학생이었다.
이 산문집은 그의 인생살이 지혜를 응축해 놓은 요약 본이고 우리가 청춘을 지나치고 나서야, 그 때 알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것들을 인생선배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성심 성의껏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가족들이 오순도순 거실에 모여 가장인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풍경을 떠올리며 수필집을 썼다고 앞서 밝혔다. 영어공부를 하거나, 다가올 시험을 대비하는 공부를 하기 이전에 인생의 쉼표로 엔도 슈사쿠가 전하는 인생살이 지혜를 공부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긴장하지 않아도 되고 미친 듯이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나 더없이 소중한 것들을 담아놓은 공부거리를 어깨에 힘을 풀고 읽어보자. 문장과 문장 사이마다 넘쳐나는 인생의 자양분을 마음껏 흡수한다면 엔도 슈사쿠가 저 세계에서 빙긋이 미소를 지을 것이다.
. 인생 곳곳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폐기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살다 보면 버리고 싶은 기억들, 지우고 싶은 과거들이 마음 한 켠에 쌓이게 된다. 이것은 의지가 아니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엔도 슈사쿠는 오랜 투병생활, 늙음에 대한 두려움,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고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그 고통의 끝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손등에 불행이 있다면 불행과 행복이 양면의 동전과 같아서 불행의 뒤편에는 행복이, 행복의 뒤편에는 불행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자각함으로써 인생이라는 여행길에서 더 안전하고 유쾌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행동한다면 누구에게도 완벽한 패배는 찾아오지 않는다.
이 책에는 끝없는 절망과 더 나아가 자기혐오에 이르는 고통의 나날 속에서 이 인생 폐기물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인생에서의 마이너스를 어떻게 플러스로 전환시키는지 저자가 전하는 비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 유쾌하게 즐기다 보면 정말 ‘잘’ 살게 된다
아무리 부자여도, 아무리 잘났어도 살아가면서 유쾌한 일만 겪으면서 살 수는 없다. 그런데 엔도 슈사쿠는 정말로 유쾌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어떻게 유쾌한 삶을 확신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엔도 슈사쿠만이 가진 탁월한 인생비법이다. 그에게 닥친 시련들과 고통이 결코 작거나 희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울어야 할 대목에서, 고통스럽거나 절망해야 할 대목에서 낙천적인 한마디를 던지고 있는 엔도 슈사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그저 소박하게 ‘행복 반, 불행 반인 상태가 우리네 인생에는 가장 많지 않을까.’ 하며 지금 발 딛고 선 불행이 아닌 이미 그곳을 초월한 삶의 더 높은 지점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 의학과 철학 시험문제
이.을상 철학교실 자료 중에서
. 철학은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립-모순적 성질을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설명하시오. . 형이상학의 의미와 유래, 그 현대적 의의를 설명하시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이 명제의 모순과 반대는? . "어떤 부산사람의 고향은 서울이다." 이 명제에서 주어개념과 술어개념의 주연, 부주연을 밝히시오. ."약간의 사람은 여성이다." "모든 학생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학생은 여성이다."
이 추리에서 격과 식을 쓰시오.
. 1 + 1 = 2와 만유인력의 법칙은 모두 '참'이다. 이것이 참은 근거와 차이를 밝히시오. . 구명정의 예를 보고, 나의 윤리적 견해를 밝히시오. . 쾌락주의와 금욕주의가 궁극적으로 일치함으로 논증하시오. . 목적론적 윤리설의 한계에서 의무론적 윤리설을 논증하거나
의무론적 윤리설의 한계에서 목적론적 윤리설을 논증하시오.
. 전통적인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문제점을 서술하시오. . 내가 '자유롭다'는 것의 의미를 서술하시오. . 나의 몸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이해를 서술하시오. . '이성의 역사'의 역사에 관해 서술하시오.
.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우리 사유의 '애매모호성'을 제거하기 위한 것에서 출발한다.
애매모호성의 반대 개념과 그 근거를 밝히시오.
■ 의학과 철학의 만남
(하병학 교수, 2005.12.29)
. 과학 철학으로서의 의학 철학
의학적 현상, 의학적 연구에 대한 철학적 이해
인간이 과학을 한다는 의미, 여러 제 과학의 보편적 특성, 과학 방법론, 심과 신의 관계 과학과 사회 문화 역사의 관계, 세계(사실)와 과학 언어, 인식론 - 현상에서 보편성을 찾는 것은 세계의 법칙성에 대한 인식인가
아니면 세계에 대한 인간의 법칙적 구성인가? 이러한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 의학적 현상이란 무엇인가? 의학적 현상은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가? 아니면 문화적 가치적 판단이 포함되는가? 의료 행위의 대상은 무엇인가? 의학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인가 사물을 다루는 학문인가? 환자는 고장 난 기계와 마찬가지인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불안은 무엇인가? 정신질환, 물리현상인가 정신 현상인가?
. 생명의 기원과 종료 생명은 육체적 실체인가, 정신적 실체인가? 죽음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나?
. 불안, 염려, 돌봄의 철학 생명을 가진 존재자에 대한 도덕적 지위와 동물의 생명권
자살, 인간의 최종적 권리인가 죄악인가?
성전환 수술, 동성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 의료 윤리
의학적 연구, 의료 행위에 있어 발행 가능한 윤리적 물음, 생명공학과 의료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 기술을 어디까지 어떻게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물음
. 인간배아 연구, 낙태. 장기획득과 분배 ,
안락사, 임상연구에서의 생명윤리, 인간복제와 유전 공학
... 생명 연구에 대한 생명윤리위원회의 역할
. 의료법,의료 보험제도, 치료의 공평한 분배와 진료비, 의사파업.... 의료 윤리문제와 도덕적 추론 그리고 합리적 의사결정 원칙주의인가 사례 중심의 판단인가?
무엇이 의료윤리문제에서 기본적인 판단의 원리인가?
의료윤리와 관련된 사회적 갈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 의료 연구에 있어 질적 연구 방법론과 의료 행위로서의 의사소통
의학적 현상은 사물적 현상인가 인간적 현상인가? 만일 의학적 자료에 인간적 현상이 포함된다면 그 현상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의학적 통계는 신빙성이 있는가? 문화와 질병현상의 관계는? 산부인과에서 어린 소녀, 결혼한 젊은 여성, 폐경기 여성을 접근하는 방식은 동일해야 하는가
달라야 하는가? 그 이유는?
환자가 정말 안락사를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의사와 환자, 보호자와의 의사소통은 의료 행위에 들어가지 않는가?
환자의 치유에 대한 확신과 의지를 강화하는 의사소통은 어떻게 가능한가? 의학 전문용어와 설명력, 죽음을 어찌 통보해야 하나?
■ 불교에서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
글(문을식) 중에서, 서문 발췌
만약 우리가 현상적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존재라면 불교는 이 세상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 명나라 감산대사가 “몽유집”에서 “옛부터 출가는 생사의 큰 일 때문이었다. 부처님이 출가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니 생사 말고 다른 佛法 없고 불법 말고 다른 생사가 없다.”라고 하였듯이, 석가모니 붓다(Buddha) 자신도 생사 문제에 대한 종교적 성찰에서 시작하여 생사 문제의 철저한 해결 “열반”으로 끝맺는다.
죽음의 문제는 生死의 문제다. 삶을 들여다보면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죽음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면, 바로 그때 삶이 무엇인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상호 유기적이다. 죽음은 삶의 통합적 일부이다. 죽음 없이 삶은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이 있으므로 삶이 존재한다. 죽음은 삶의 토대이다.
따라서 삶의 완전한 순간에 이르면 항상 문득 그곳에서 죽음을 보게 된다. 삶과 죽음은 같은 에너지, 같은 현상의 양극이다. 마치 밀물과 썰물, 낮과 밤, 여름과 겨울과도 같아 이들은 분리되어 있는 것도, 서로 적대하고 있는 것도, 반대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상호보완적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확장이며, 절정이고, 대단원이다. 삶과 죽음은 궁극 점에서 만나서 하나가 된다. 삶이 전체적인 것이 될 때 죽음은 늘 거기에 있다. 죽음 없이 삶은 전체적으로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적으로 두려움 때문에 삶과 죽음을 분리한다.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원해야 하고 죽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이 삶의 끝없는 고통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하는 자는 삶다운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각 개별자 자신의 실존적 태도에 달려있다. 사람이 늙어서 죽음에 이르는 부정적인 문제는 사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안고 있는 생사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죽음을 어떻게 보고 있고, 또 그것을 극복하고 있을까?
. 불교에서 죽음은 어떻게 정의하고 죽음에 대한 기본 인식은 무엇이며, 또 죽은 뒤에는 어떤 모습들인가? . 불교에서는 어떠한 원인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를 불교 근본교설이라 할 수 있는 삼법인, 사성제, 12연기설 그리고 인과업보설을 중심으로 살피겠다. .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대로인지 아니면 변화하는지, 변한다면 그 이론적 근거는 무엇인지 그리고 만약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면 그 바뀐 인식에 근거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지 아니면 죽음을 죽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지, 만약 극복한다면 그때의 죽음은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 죽음에 대한 기본 인식과 죽음 이후의 모습들
죽음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죽음이란 영혼이 몸을 떠나는 것으로서, 죽어도 영혼만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의 입장이다. 둘째는 죽음이란 몸을 이루는 물질 요소가 흩어지는 것으로서, 이때 영혼은 물질에 종속된 현상에 지나지 않아 죽고 나면 흩어지는 물질만 남을 뿐 죽은 뒤에는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단멸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면 불교에서 죽음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불교에서 죽음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정의는 수명과 체온과 의식이 사라져 신체의 기관이 모두 파괴된 상태로 보고 있다.
수명과 체온과 인식은 육신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진다. 그 육신은 흙더미 속에 버려져 나무나 돌처럼 마음이 없다.……수명과 체온이 사라지고 기관이 모두 파괴되어 육신과 생명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 일컫는다.
곧 불교에서는 살았느냐 죽었느냐의 구분은 수명이 지속되고 있느냐 아니면 파괴되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여기서 수명이란 생명에 관계하는 기관[命根]을 말한다. 수명은 체온과 의식을 보존하여 지속하는 것을 말하므로 수명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관건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수명은 체온과 의식으로 이루어지므로 체온과 의식이 육신으로부터 사라질 때 수명은 파괴되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
(나오는 글 중에서)
요즈음 트렌드는 ‘웰빙(Wellbeing)’, 곧 ‘잘 먹고 잘 살자’라고 한다. 잘 먹고 사는 것은 곧 ‘품위 있게 사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웰빙’에는 ‘품위 있는 삶’만 있고, ‘품위 있는 죽음’은 빠져 있는 것 같다. ‘품위 있는 삶’은 ‘품위 있는 죽음’을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품위 있는 삶’과 ‘품위 있는 죽음’은 나누어 생각할 수 없다. 늙어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각 개인이 생명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해야 한다는 실존적 태도를 기르는 마지막 단계이기 때문이다.
■ 생물계에서의 인간의 지위
(블로그 에서 인용)
이성의 면은 철학.심리학에 의해서, 최근에는 모든 정신과학에 의해서 탐구되며 삶의 면은 생물학과 의학에 의해서 탐구된다. 인간생물학은 인간학의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자연주의만을 기반으로 삼았다. 이성인간학과 생물학적 인간학은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구별된다. 이성인간학과 종교인간학은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있는 특성(이성)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모든 자연을 능가한다고 봄으로써 간단히 결합하며 역사적으로도 쉽게 융합할 수 있었는데, 생물학적인 인간학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부인한다. 괴테의 시대와 비슷한 현대는 인간의 일회성과 특수위치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자연의 통일체로 인간을 보려고 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엄청나게 크다고 하겠지만, 개개의 차이들을 검토해 보면, 대개 너무나도 개별적일 뿐, 인간과 동물을 완전히 구별할 수 없다. 플라톤에게서 두 서로 상이한 인간학의 관점이 맞부딪치는데, 서로 내면적으로 맞물려 있지도 않고, 또 서로 보완하지도 않으면서 평행선을 긋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존재의 계층에서 최고 정상을 이루지만,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인간을 다른 존재보다 뛰어난 것으로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다른 존재와 결합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린네는 처음으로 생물권 안에 인간을 넣어서 분류했다.
일반적으로 괴테 시대는 기독교적인 신과 세계라는 이원론에 범신론적인 일원론을 대립시켰다. 그래서 그 시대는 또한 인간과 자연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했다. 헤르데르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역사의 지평선상에 두고 있다. 인간은 삶이라는 사다리의 한 계단에 불과한 것이며, 다른 모든 생물들의 특징들이 인간 안에서 재현된다. 우리 인간의 본질의 고유성은 우리의 전체의 현상에서 찾아내야만 한다. 괴테는 자연은 하나의 큰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이며, 어디서나 똑같은 것이 단지 여러 가지로 다르게 변화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인간은 자연의 고리(環)의 한 마디로서만 자연의 신성에 참여한다고 보았다.
. 진화설과 그 설의 반대자들
괴테는 종교 속에 하느님이 있는 것처럼 자연은 유기체들의 배후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내재적인 인과론적인 사상은 유기체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생산하도록 하게 하고, 따라서 형태학적인 연관을 발생학적인 것으로부터 유도해 낸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미 옛날에 근대의 인과론을 가능하게 하여 주었던 것처럼, 또한 진화론을 가능하게 하여 주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은 문화 철학자로서 진화론자들 이었다. 그들은 자기작용을 하는 인간의 진보를 믿었던 최초의 사람들이었으며, 최초의 자연철학자였다. 다윈은 진화론을 기계론적으로 관철하려고 최초로 시도한 사람이다. 그의 업적은 도태설이다. 변화는 어떤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법칙에 의거하지도 않고 순전히 우연적으로 생긴다. 왜냐하면 자연은 결코 똑같은 것을 반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은 합목적적이지만, 목적에 따라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합목적성은 오직 가장 알맞는 변화만이 남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생긴다. 괴테는 인간에게 자연의 신성을 부여하며, 신성을 전자연에 확대시켰다. 이와는 달리 다윈의 일원론과 특히 헤겔의 일원론은 기계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란 도대체 그 근본에 있어서 '단지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세기의 발전의 이념은 오로지 자연주의에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데 그치고 만다. 자연이 물질로 철저하게 통일되어 있다는 신앙은 심지어는 그들 자신을 강등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 자신을 비하시키는 것까지도 그들이 기뻐해야 한다는 모순을 감수하게 만들었다. 다위니즘에 의해서 이제까지의 종교에 대한 비판적 태도가 적극적인 계기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의 내면의 깊은 곳에서는 문화의 강제에 대한 미움이 스물거리고 있으며, 인간은 긴장이 해소된 삶으로 되돌아 가고 싶어서 이 강제를 벗어나고 싶어한다. 문화에 대한 미움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기증오이다. 18세기의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가 일으킨 반응은 우리 세기에 인간으로부터 개인적인 결단과 책임을 앗아가는 전체주의적인 체제를 결별하게 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잇달아 다위니즘도 성공을 하게 되었다.
낮은 것으로부터 발생된 것은 단순히 수식 되어진 낮은 것이 아니라, 진짜로 변형되어 지는 것에 의해서 부인할 수 없는 보다 높은 것을 형성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에 중립적.유기적인 것인데, 이것은 인간과 동물의 양측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향으로 표현된다. 인간과 동물은 둘 다 서로 환원시킬 수 없는 유형의 것이며,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며, 다른 종류의 유형이다. 기원에 관한 문제는 이제는 헥켈이 말하듯이 '모든 문제 중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독특한 현존재의 본질분석이 더욱 중요하다.
원숭이에게 있어서 유년기구조로부터 성숙기구조로 진행하는 진화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부분적으로 지체되고 있다. 인간은 구조적으로 원래 유년기에 가지고 있었던 특징들을 성숙한 상태가 되어서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원숭이의 경우에는 단지 과도기를 보여주는 데 불과한 것이 인간에게서는 영속적인 것이 된다. 유태성숙 (幼態成熟)이다.
■ 현대 사회와 “죽음의 배제”
교과서 과제물 발표자료, 일부발췌
(기독교의 성경을 인용하며) 명.현숙, 2009 (목차). 죽음에 대한 기본적 이해
. 죽음의 배제에 대한 긍정과 비판. 죽음의 배제의 원인 심리학적 원인 세계의 탈 신화화, 세속화 현대 사회의 산업화, 개인주의화 현대 사회의 가치관 핵가족화 현대의 병원체제, 장례식의 상업화 죽음에의 익숙
. 죽음의 배제의 결과 현실에의 집착과 탐닉 끝없는 자기 추구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사회 죽음을 잊으려는 잘못된 삶의 태도 사회의 요구에 대한 순응 죽음의 배제와 환경 파괴
.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성경을 인용하며)
죽음의 의식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교만한 인간이 겸손한 인간으로
죽음에 대한 태도를 미리 취하는 지혜
순간 순간을 충실하고 의미 있게
참되고 영원한 것을 찾는 삶의 태도
“있음” 자체를 기뻐하는 마음
비정한 사회가 인간적인 사회로
□ 현대 사회와 “죽음의 배제”
현대 사회는 “ 총체적 죽음의 의식에 사로잡힌 사회”인 동시에 “죽음이 배제된 사회” 라 말할 수 있다.
죽음의 현실이 우리의 삶 한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이 경험 되지 않는 사회, 죽음이 배제된 사회가
바로 현대 사회라 할 수 있다.
. 죽음에 대한 기본적 이해
의학에서는 죽음을 인격적 과정이라기 보다는 단적으로 혹은 주로 생물학적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의학에서 죽음의 개념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 생체적 유동 기능의 불가역적 정지 (심장과 폐혈관의 기능정지).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불가역적 이탈 (호흡기능 정지). 신체적 통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뇌기능의 정지). 사회적 상호 작용 능력의 불가역적 정지 (뇌피질사)
이러한 개념은 인간의 특성이 의식, 그리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사회환경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는 견해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죽음은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 죽음의 배제에 대한 긍정과 비판 “배제”개념은 19세기 중반 헤르바르트(Herbart)와 쇼펜하우어의 저서에 나타나는데, 인간의 심리적 기능과 평형 관계를 침해 할 수 있는 본능, 관심, 생각들을 인간의 의식에서 제거하고자 하는 심리적 방어장치(Mechanismus)를 뜻한다.
1892년 프로이트(S. Freud)는 처음으로 이 개념을 수용하는데, 그가 말하는 배제, 후퇴(Regression), 반응(Reaktion), 격리(Isolierung), 투사(Projektion), 투입(Introjektion), 등의 “방어장치들” 가운데, 배제의 기술은 특별한 차지를 한다. 그것은 다른 방어 장치들이 처리할 수 없는 강한 본능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의 배제는 죽음으로부터 오는 불안을 극복하고 심리적 평형 관계 내지 평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방어장치로서 긍정적 기능을 가진다. 그것은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고 “영적 건강의 유지를 위한 타당성”을 가진다.(C. F. von Weizsacker)
.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죽음의 배제”는 많은 학자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틸리케(H. Thielicke)에 의하면, “세속적 현존의 공적 영역에서 죽음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질병은 거의 병원으로 추방되었다. 영화와 연극은 건강한 삶의 거울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공적 영역에서 장례식 행렬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며, 단지 묘지 경내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폰 겝자텔(V. E Frhr. von Gebsattel)은 초월을 알지 못하는 세속 안에서 스스로 자율적이라 생각하는 개인은 죽음을 잊어버리거나, 거짓된 상들을 가지고 그것을 은폐하고자 시도한다. 혹은 죽음을 무력화 하거나, 비인격화 하거나 폐기하고자 하며, 죽음의 세력을 깨뜨리거나 환상을 가지고 그것을 은폐시키려는 노력은 헛된 것이다.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가르침을 수용할 때 우리는 완성된 인간 존재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폰 페르버에 의하면, 현대사회에서는 죽음을 개인의 영역으로 추방함으로써, 사회적 협동의 기능을 향상시키며, 사회적 기능들의 미끄러운 과정을 귀찮게 만드는 예기치 못한 결단들을 제거하는데 기여한다. 사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죽음의 문제성을 제거하는 현대사회의 추세는, 죽음의 경험을 제거하며 행동의 유한성의 경험을 제거함으로써 절정에 이른다.
. 죽음의 배제의 원인
. 심리학적 원인
죽음의 배제의 첫째 원인을 우리는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죽음이란 인간의 삶의 끝을 뜻하며, 이 세계로부터의 영원한 작별을 뜻한다. 아무도 자기의 죽음을 대신 당할 수 없으며, 자기의 죽음을 함께 당할 수 없다. 그는 홀로, 외로이 자기의 죽음을 당한다. 죽음 뒤에 과연 무엇이 올지,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죽음은 인간에게 언제나 불안의 대상이다. 이 불안은 인간에게 유쾌하지 못한 것이다. 불안이 쌓여질 때, 그것은 노이로제 현상으로 발전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불안을 방어하거나 추방하고자 한다. 불안을 방어하거나 추방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배제하는 데에 있다.
그러면 심리학적 차원에서 죽음의 배제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일반적으로 그것은 죽음을 현재의 자기와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먼 미래로 미루어 버림으로써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죽음이 일어나고 있다.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자살로 인한 죽음, 자연재해로 인한 죽음, 전쟁과 학살로 인한 죽음, 굶주림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 등 수 많은 죽음이 일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는 아직 해당하지 않는, 자기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 내가 사는 동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무엇인가?
그것은 삶에 대한 나의 욕구를 약화시키고, 나의 노동과 사회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는가?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할 수 없다.”비트겐슈타인의 이 말은 죽음을 삶과 의식의 영역에서 추방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심리적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죽음이 나의 삶의 경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죽음에 대하여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 세계의 탈 신화화, 세속화
인류의 역사에서 고대세계는 하나의 신화적 세계였다.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피안의 초월적 세력이나 악한 영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세계의 사물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신적 질서 혹은 법칙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인간의 죽음도 이러한 원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이해되었다.
그것은 신들이나 악령들의 작용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어떤 종교적인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내재적 원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세계에 대한 신들의 지배가 차츰 사라지고, 세계는 인간의 자율적 이성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세계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역사의 이러한 과정을 가리켜 우리는 세계의 탈 신화화((Entmythologisierung), 탈 마술화(Entzauberung), 합리화(Rationalisierung), 세속화라고 부른다.
세계의 탈 신화화, 세속화와 함께 죽음의 탈 신화가 시작되었다. 인간의 죽음은 어떤 종교적 원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내의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내재적 원인들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으로 파악 되었다. 결론적으로 현대 세계에서 죽음의 배제는 세계의 탈 신화화와 함께 일어난 세속화와 합리화에 그 원인을 가진다.
. 현대 사회의 산업화, 개인주의화
최근 일련의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배제는 현대 사회의 변천이 초래한 필연적 귀결이며 현대 문명 발전의 구조적 특징이다. 현대사회의 산업화는 소유와 소비와 향유를 크게 확대시킨 동시에, 개인의 개인화(Individualisierung), 개인의 익명성(Anonymitat), 개인의 개체화, 고독의 문제가 생성된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산업화 될수록, 개인은 고립된 개인으로 개체화 되어 간다. 많은 대중이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며, 인격적 교통을 갖지 못한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활을 알지 못하며, 또 그것을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있지만, 고독을 느낀다.
고독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그것을 자신과 무관한 일로 간주하고 조금도 관여하지 않는 사회, 철저히 개인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회, 이웃의 죽음이 배제된 사회,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지만, “죽음이 없는 사회”가 오늘의 현대 사회라 할 수 있다.
무한한 진보를 추구하는 현대 문명에 대하여 죽음은 인간의 무능력에 대한 상징이다. “철저히 관리되는 세계에서도 인간은 홀로 죽는다. 어떤 독재자도 이것을 변경할 수 없으며, 현존의 죽음의 해석으로서 등장하는 어떤 체계를 통해서도 그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해결 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배제하고, 자기를 세계의 유일한 지배자로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경향에 반하여 귀르스터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죽음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의 불안을 유지할 때, 우리는 현대 사회의 집단성에서 개인의 개체성을 구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음은 집단화, 사회화를 막을 수 있는 보증이요, 개체성의 상실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다.
. 현대 사회의 가치관
현대 사회는 더 많은 기능과 생산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고 있다. 더 많은 능력과 기능, 더 큰 효과, 이를 통하여 얻게 되는 더 많은 소유와 소비, 삶의 향유가 현대인들의 가치관과 삶의 목표를 형성한다. 이를 방해하는 모든 욕구와 충동은 억제 되어야 하며, 질병과 죽음은 그 사회의 기능과 능력을 방해하고 저해하는 요소로 간주된다.
그래서 몸이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하면서, 자기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내세운다. 테러나 각종사고로 말미암아 다친 사람들 혹은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즉시 제거되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모든 일들이 “정상”을 되찾는다. 사회전반의 원활한 소통이 방해되어서는 안되며, 사회의 기능이 조금도 방해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는 죽음을 각자가 감추어야 할 하나의 터부로 간주함으로써, 각자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에 대한 의사 소통과 사회적 담론을 저해한다. 이를 통하여 현대 사회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야기하고 있는 죽음의 세력들을 비호한다.
. 핵가족화
산업 사회 이전 농경 사회는 일반적으로 대 가족제를 가지고 있었다.
농경 사회의 경제 질서가 대 가족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 산업 사회의 등장과 함께 가족이 소규모화 되고, 가정을 구성화는 세대가 부모나 자녀의 두 세대로 제한됨으로 말미암아, 노인 세대의 임종과 장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감소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현대 사회의 성 개방으로 말미암아 더욱 확산 되고 있다. 모계중심의 가정이 등장하고 있으며, 남자들은 떠돌이처럼 살아가는 사회적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변천 속에서 노인들의 임종과 장례를 인격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 현대의 병원체제, 장례식의 상업화
오늘의 병원체계와 장례절차는 죽음을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배제하는 현대사회의 추세에 일조하고 있다. 사회의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면 될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임종을 가정에서 맞지 않고 병원에서 맞이한다. 이리하여 죽음은 가정과 공공의 영역에서 병원의 제한된 공간으로 배제되어 버린다.
선진국의 병원들은 환자 방문 시간을 엄격히 제한하기 때문에, 죽음이 멀지 않은 친척 환자를 방문하고 그와 대화 할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제한 되어있다. 임종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병실의 다른 환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기 때문에, 임종 환자는 중환자실로, 혹은 임종환자를 위하여 특별히 설치된 격리실로 격리된다. 사망 직후 죽은 사람의 시체는 병원 시체 보관실에 격리되고, 그의 빈소는 병원 영안실에 설치된다. 과거에는 동네 전체의 일이었던 장례식이, 현대 사회에서는 병원 영안실로 배제되어 버린다.
죽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몇 사람의 가족이나 친구들로 제한한다. 죽은 사람이 살던 동네 전체가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 참여하는 경우는, 오늘날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옆집사람이 죽어도 문상을 가지 않으며 애도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 추세이며, 문상과 애도의 시간도 점점 감소된다.
장례식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장례전문 업체에서 치러진다. 이로 인하여 죽음은 인간의 삶의 현실에서 한 걸음 더 배제된다. 오늘날 장례식은 아무 마찰도, 어려움도 없고, 사회적 표준에 맞는 하나의 잔치와 같은 것으로 집행된다. 장의사는 죽음의 모든 경악스러운 요소들과 진지한 면들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고, 죽음을 하나의 칵테일 파티와 비슷한 것으로 미화시키려고 노력한다. 물론 장의사는 장례식을 아름답게 치르고 유족들의 슬픔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노력 하지만, 이를 통하여 “죽음의 은폐와 미화(美化)”가 일어나며, 죽음의 현실이 약화되고 인간의 현실에서 배제되는 결과가 일어난다.
. 죽음에의 익숙
현대 사회에 대하여 “죽음의 배제” 라는 명제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죽음과 함께 사는 사회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생태계의 파괴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자연의 생물들의 떼죽음을 우리는 언론매체를 통하여 자주 접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생명도 죽음의 위협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생태학적 이변들과 함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침식하고 있다는 의식은 오늘날 세계 전체의 보편적 현상일 것이다. 지금 인류가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는 지구를 여러 번 파멸시키고도 남을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오늘 현대인의 생명은 죽음과 함께 사는 생명, “죽음을 향한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 제2차 대전, 한국의 6.25전쟁, 베트남 전쟁, 이념 분쟁, 인종 분쟁, 종교 분쟁, 히틀러의 독재 체제하에서 600만 명의 유태인들의 독가스실 등.....
사회학자들에 의하면, 죽음에 대한 매일의 보도와 죽음에 대한 지식으로 말미아마, 현대인은 죽음에 익숙하게 된다. 수 백 명이 죽었다면 놀라워하지만, 몇 명, 몇 십 명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그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소식들은 죽음에 대하여 우리 인간의 마음을 민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감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현대 사회의 죽음에 대한 무감각과 무관심, 죽음의 망각으로 인하여 현대사회는 사실상 배제한다.
. 죽음의 배제의 결과
. 죽음과 죽은 사람들에게 냉담한 사회
죽음의 문제는 단지 죽음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삶과 관계된 문제이다. 그것은 삶과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 죽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진다. 죽음은 단순히 삶의 마지막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삶 한가운데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그의 의식과 삶과 사회에서 배제하여 버릴 때, 다음과 같은 삶의 태도와 사회적 에토스가 형성된다.
. 현실에의 집착과 탐닉
인간이 죽음을 자기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살고자 할 때, 그는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착하고 그것에 탐닉하는 삶의 자세를 갖게 된다.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상황이 아닌가?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죽음이 올 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것처럼, 내가 죽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죽음을 경험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는 동안 죽음을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누리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며, 충분히 소유하고 물질적 풍요와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데에 삶의 가치를 둔다.
오늘날 한국의 대도시 문화는 한마디로 향락의 문화, 소비의 문화라 말할 수 잇다. 죽기 전에 가능한 한 즐겁고 풍요하게 사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생각할 때, 점점 더 호화스럽게 살면서 자기가 가진 것을 과시하려는 삶의 태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 소유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지 않고, 조금만 가져도 그것을 드러내며 야단스럽게 생활한다. 죽음은 그들의 의식 밖에 있다. 그것은 삶과 관계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이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의 죽음을 망각하고 이 세상의 삶에 탐닉하는 현대인의 삶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내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겠다.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을 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 (눅 12:18-19)
이러한 삶의 태도는 인간을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게 하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한편으로 그는 죽음을 체념하지만, 가능한 한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은 그에게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된다.
. 끝없는 자기 추구
죽음을 배제할 때, 인간은 결국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에 집착하며, 끝없이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을 갖게 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이 세계 속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산다.
지구의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눈감아 버리고,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고, 자랑하고 뻐기면서 살아간다. 그들은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과 같다. 그들의 인생은 무덤이다. 썩는 것과 악취가 그 속에 가득하다. 인간이 이 세계에 속한 것에 집착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기 자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것에 대한 집착과 그것의 추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과 자기 추구의 표출에 불과하다
불안과 고독 속에서 그는 자신에게 집착한다. 자기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그는 하나님과 이웃과 함께 살도록 창조된 그의 본래적 삶의 법칙에서 멀어지며, 무의 세력에 사로잡힌다. 인간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것, 곧 하나님의 은사이지, 인간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에게 선물 되어졌다가 다시 거두어 진다.
결코 지나가지 말았으면, 끝나지 말았으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러나 모든 쾌락의 순간들은 지나가버린다. 그 다음에는 허탈감과 허무감이 엄습한다. 곧 무의 현실이 인간을 찾아온다.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인간은 새로운 쾌락의 순간을 찾지만, 결국 그의 삶은 죽음의 한계에 부딪힌다. 죽음을 자기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죽음 없이 살아가는,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 여기에 있다.
.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
현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apatheia)이라 말할 수 있다. 죽음이 우리의 삶에서 배제될 때 우리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며 어떤 고통을 당할 것인지, 그들이 어떤 죽음을 당할 것인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탄생과 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
탄생은 삶의 시작이요, 죽음은 삶의 끝이기 때문이다. 탄생과 죽음 가운데서 무엇이 더 의미 깊은 사건인가를 묻는다면, 그것은 죽음이라 말할 수 있다. 죽음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한 삶이 완결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끝이요 결정이다.
피 흘리는 일과 죽은 사람들을 많이 본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되며, 지속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당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는 물론 삶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된다. 그는 모든 것이 어찌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삶에 대한 모든 느낌을 말살한다. 삶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소멸함으로써, 그는 그 자신의 죽음을 앞당겨 온다. 그의 느낌과 생각이 굳어지고, 그는 산다고 하지만 차츰 죽은 자로 변모한다. 무디어지고 굳어져 버린다는 것은 죽음의 징조이다.
.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사회
죽음에 대한 무감각은 결국 무감각한 사회, 냉정하고 냉혹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를 형성한다. 우리 인간이 삶의 현실에서 배제한 죽음은 사회전체를 마비시키고 비인간적 사회로 변질시키는 사회적 무관심과 냉담함을 확산시킨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우리의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며, 나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죽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모든 장애들은 가능한 한 즉시 제거된다. 임종과 죽음과 애도는 하나의 터부로 간주되고, 죽음에 대한 토론과 의사사통이 사라진다. 국토의 효율적 관리를 위하여 매장은 차츰 사라지고 화장이 권장되며, 죽은 사람의 존재는 강물이나 산 속에 흩어버리는 뼛가루와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현대 사회는 한마디로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사회, 죽음을 향하여 달리고 있지만 죽음에 대하여 무감각한 사회, 비인간적인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 한 인간의 죽음은 즉시 제거되어야 할 교통사고와 같은 것으로 간주된다. 현대 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유와 삶의 향유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여 죽음을 인간의 의식과 삶에서 배제한 현대 사회의 필연적 결과이다.
. 죽음을 잊으려는 잘못된 삶의 태도
우리 인간이 죽음을 우리의 의식에서 배제하고 죽음에 대한 망각과 무의식 속에서 산다 할지라도,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에 대한 의식을 벗어날 수 없다. 죽음의 필연성은 모든 생물의 존재 구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의식 속에 숨어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숨어 있으면서, 삶의 허무감과 불안감을 일으킨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여러 가지 잘못된 삶의 태도를 취한다
더 많은 소유와 소비와 향락에 집착하는 삶의 태도
더 많은 업적을 남기고자 하는 삶의 태도
삶의 시간을 가능한 길게 연장시키고 죽음의 시간을 연기시킴으로써,
삶의 허무함과 불안을 배제하려는 삶의 태도
더 “빨리” 삶으로써, 더 많이 경험하고 삶을 더 많이 향유하려는 태도
물론 모든 것을 빨리 하려는 삶의 태도가 단지 죽음으로 말미암은 삶의 허무감과 불안 때문에 야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한 빨리 많을 것을 경험하려는 삶의 태도에서, 우리는 죽음의 불안과 삶의 허무함을 잊으려는 몸부림을 발견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Sin zum Tode)이다. 이러한 죽음의 불안과 삶의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길은 알코올과 마약과 자살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문명이 발달하고 물질 생활이 윤택하여질수록,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자살자의 수가 증가한다. 그러나 알코올과 마약과 자살은 하나의 도피 책이지 궁극적 해결책은 아니다.
. 사회의 요구에 대한 순응
폰 페르버에 의하면, 죽음은 개인의 주체성과 사회의 한계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것은 개인이 자신의 내면성, 삶의 개인적 영역으로 도피할 수 있는 지점으로, 전체주의적 경향성을 가진 사회의 모든 요구들로부터 개인의 자유롭게 하며, 이 요구들을 상대화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죽음의 이러한 의미를 부인하거나 죽음을 배제함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전체성을 요구하게 되며, 개인이 그의 모든 규범들과 요구들에 대하여 순응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 “협동적 효율성의 확보” 더 많은 생산, 더 큰 이익, 자기확장, 더 많은 소비를 최고의 목표로 삼는 현대 사회에서, 죽음은 훼방꾼 내지결함으로 간주된다. 이리하여 죽음은 점점 더 사회 변두리로 배제되며, 인간의 의식에서 배제된다.
. 죽음의 배제와 환경 파괴
죽음의 배제와 환경 파괴는 오늘날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한 사람의 죽음에서는 한 사람의 인격적 죽음이 문제되지만, 환경 파괴에서는 보편적 “자연의 죽음”이 문제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자연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다. 한가지 사물에 대한 태도는 다른 사물에 대한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환경의 파괴와 자연의 죽음은 물과 공기의 오염, 삼림의 파괴 등 과 함께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대상화, 대물화(Verding-lichung), 그리고 자연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시작한다. 그것은 오늘날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현존하며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으며 피부로 느껴지지 않을 때,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의식에서 배제한다. 또 이 문제가 언젠가 인간의 노력을 통하여 극복될 것이라는 심리적 안도감 속에서 현실의 사태를 직시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리하여 환경 파괴와 자연의 죽음은 인간의 의식에서 심리적으로 배제된다.
□ 성경을 인용하며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 죽음의 의식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위에서 우리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불안과 삶의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여러 가지 인간적인 방법과 삶의 태도를 고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궁극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죽음에 대한 무관심과 무감각을 더욱 조장함으로써, 인간과 사회의 비인간화를 심화시킨다. 그것은 하나의 악순환에 불과하며 인간의 삶을 절망과 마약과 자살로 이끈다. 그러므로 죽음을 우리의 의식에서 배제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죽음의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서는 이러한 인간적인 방법 대신 하나의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은 먼저 삶 속에 있는 죽음의 의식을 현실을 의식하며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다.
신약성서에서도 죽음은 단지 삶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생물학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 가운데 사는 인간과 세계의 현실 혹은 실제로 생각된다.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살고 있다.(마 4:16)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하라.”(눅 9:60, 마 8:22)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 없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이미 죽음 속에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빠르게 지나가니, 마치 날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셔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해주십시오." (시 90 : 3 - 12)
……
. 교만한 인간이 겸손한 인간으로
자기는 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으며, 죽음은 언제나 자기의 삶 속에 현존한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자기의 유한한 존재를 보게 되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 앞에서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 죽음에 대한 태도를 미리 취하는 지혜
죽음의 필연성과 죽음의 현실을 의식할 때, 인간은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물론 자기의 삶에 대한 태도를 미리 선택할 수 있다. 자연계의 생물들 가운데에도 자신의 죽음을 미리 의식하며 죽음에 대한 태도를 취하는 생물들이 있다.
코끼리; 그러나 자연의 생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태도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본능에 따라 그들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이에 대하여 본능적 반응을 나타낸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의식은 본능적, 생물학적 직관에서 오는 것이지, 이성적 성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 순간 순간을 충실하고 의미 있게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고 제한되어 있으며, 그것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 밖에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죽음에 대한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제한성, 유일회성, 불가역성을 깨닫게 된다.
지금의 순간을 놓치는 사람은 다음의 순간을 붙들기 어렵다. 지금의 이 순간을 놓침으로써, 그는 사실상 삶의 시간의 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이 순간에 일어나는 나의 결단과 행동이 나의 존재를 결정하며,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 하면서,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 들을 깊이 음미 하면서 소중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죽음에 대한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 참되고 영원한 것을 찾는 삶의 태도
인간의 가장 일차적인 욕구는 배고플 때 먹고 싶은 욕구, 목마를 때 마시고 싶은 욕구, 피곤할 때 쉬고 싶은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킬 때에만 인간은 생존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의식은 우리의 맹목적인 삶을 의미 있는 삶으로 바꿀 수 있다. 무가치한 것을 버리고, 가치 있는 것을 찾게 하며, 모든 거짓된 것, 일시적인 것을 버리고,참된 것, 영원한 것을 동경하게 한다. 이리하여 죽음에 대한 의식은 비인간적인 인간을 인간적인 인간으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변화시킬 수 있다. ……
. “있음” 자체를 기뻐하는 마음
죽음과 함께 자기는 이 세계 모든 사물을 떠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의식할 때,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이 세계 모든 사물들의 있음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 할 수 있으며, 그들의 있음 자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무, 곧 없음은 없음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아무런 아름다움이 없다. 이에 비하여 유, 곧 있음은 있음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면, 있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존재를 무의 영역으로 돌려버리는 죽음을 의식할 때, 우리는 모든 사물들의 “있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고, 그들과 참된 친교를 가질 수 있으며, 친교 속에서 그들을 향유할 수 있다. 참된 친교는 자기의 마음을 열고 자기를 내어주며 서로의 삶을 나누는 데에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다.
. 비정한 사회가 인간적인 사회로
오늘 우리의 사회는 누가 죽어도 마음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 무감각한 사회, 비정한 사회가 되었다. 물속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산 위의 나무들이 무참히 벌목 되어도, 사람들은 마음의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죽음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이웃 사람들과 인류와 자연의 피조물들이 당하는 고통에 눈을 뜰 수 있으며, 그들이 당하는 죽음의 위협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민감해지고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질문할 때, 우리는 타인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는 물론 자연의 생물들의 고난과 죽음에 대하여 민감해지고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 배고픔을 당해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고, 고생을 해 본 사람이 고생하는 사람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죽음과 죽음의 불안을 의식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피조물들이 당하는 죽음의 불안과 공포를 이해 할 수 있다. ……
■ 혼수상태
(참고자료)
ㅁ (위키백과)
혼수상태(昏睡狀態) 또는 코마(coma)는 의학에서 깊은 의식불명 상태를 말한다. 코마(coma)라는 단어는 깊은 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κ
ῶμα 에서 유래되었다.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은 깨울 수가 없고 일반적으로 고통이나 빛, 소리 등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또한 건강한 사람과 달리 깨어 있는 상태와 수면 상태의 주기적 전환이 발생하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 원인
혼수상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는, 약물 등에의 중독, 물질대사 이상, 중추신경계 질병, 저산소증이나 뇌졸중 등으로 일어나는 발작과 같은 심각한 신경 관련 손상 등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자동차 사고나 추락 등 뇌에 가해진 외상에 의해서도 발생할 수 있다. 희귀한 경우로, 벼락을 맞거나, 신체 장기를 이용해 마약을 운반하다가 이것이 터져 혼수상태에 이른 예가 있다. 혼수상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중뇌에 있는 뇌간의 양측에 동시에 손상이 생긴 것이다. 뇌간은 잠을 조절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환자에게 발생한 혼수상태의 원인이 불분명한 경우에는 혈액검사나 영상진단 등 다양한 검사가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혼수상태를 유발한 이유를 알아내고 그중 제거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보통은 입원하게 되며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 진단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가 안정된 상태가 되면, 이에 대한 근본 원인을 찾기 위해 조사를 받게 된다. 예를 들면, 뇌에 대해 컴퓨터 단층 촬영이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뇌출혈등의 혼수상태에 대한 원인을 파악할 수가 있다. 진단이 이루어지면 그에 대한 적절한 치료를 지시할 수 있지만, 중환자실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생명 유지 처치는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진단을 통해 생명 유지 처치를 중지할 수도 있는데, 이것은 혼수상태를 일으킨 병변을 치료할 수 없고 뇌 손상이 영구적이어서 소생 가능성이 없는 경우이다.
. 예후
혼수상태로 일어날 수 있는 결과는 회복부터 죽음까지이다. 혼수상태는 일반적으로는 수 일에서 수 주까지 지속된다. 2~5주 이상 지속되는 것은 드물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 년 이상 가기도 한다. 이 기간이 지나면 서서히 혼수상태로부터 벗어나거나, 식물인간이 되거나, 죽게 된다. 식물인간 상태가 된 사람은 수 년 동안, 심지어 수십 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가 지속된다. 기네스 북의 세계 기록으로, 37년간 식물인간 상태가 지속된 예가 있다.
혼수상태 또는 식물인간에서 회복하는 것은 혼수상태를 일으킨 원인, 병변의 위치, 신경계 손상의 강도와 양에 따라 달라지며, 혼수상태가 깊다는 것이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깊은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이 잘 회복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약한 혼수상태에 있는 사람이 결국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들이 물리 치료, 뇌 치료, 정신 치료를 조합한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치료를 통해 회복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환자는 점차적으로 감각이 돌아오는 형태로 회복되게 된다. 일부 환자는 매우 간단한 반응을 하는 정도에서 그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완전하게 의식을 회복한다. 그러나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곧바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처음 수 일 간에는 겨우 수 분 동안 깨어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혼수상태였다가 곧바로 건강한 상태로 회복되어 일상생활에 복귀하는 예가 많은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는 혼수상태 환자가 정신 착란 상태로 깨어나기도 하며, 이런 경우 어떻게 병원에 갔는지를 인지하지 못하고 실어증 등의 여러 가지 장애를 겪는 경우가 있다.
회복에 대한 예측은 신경계 손상을 측정하는 데에 쓰이는 여러 가지 기법에 따라 변화할 수가 있다. 이러한 예측은 통계적인 확률에 기초하고 있어, 회복 확률이 낮게 예측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회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회복 확률을 예측하는 가장 일반적인 변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뇌 손상에 의한 혼수상태가 넉 달이 지속되면, 부분적인 회복 가능성도 15% 미만에 그치며 완전히 회복될 확률은 대단히 낮다. 한편 2008년 벨기에 연구팀은 뇌 손상 후 손상되지 않은 다른 영역의 활성화 정도를 이용해 예후를 예측하는 방법을 발표하였다.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가 사망하는 가장 일반적인 원인은, 오랜 기간 누워 있는 환자에게서 생기는 폐렴과 같은 2차 감염이다.
드물게는 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는 환자도 있다. 19세 때에 자동차 사고를 당한 미국인 테리 월리스는, 최소한의 의식 상태(영어: Minimally conscious state, MCS)로 19년을 보낸 후, 서서히 말하는 능력을 회복했으며 자신의 주변 환경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비슷하게, 폴란드의 철도 직원인 얀 그르제프스키도 2007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뇌에 외상을 입어 6년간 유사 혼수상태로 지낸 38세의 미국인이 의료진에 의해 2003년 의식을 회복한 일도 있다. 당시 의료진은 그의 뇌 깊숙한 곳에 전극을 심어두었는데, 심부 뇌 자극술(영어: Deep brain stimulation, DBS)이라고 부르는 이 방법에 의해 이 미국인 환자는 의사소통 능력, 복합적인 운동 능력과 식사 능력을 회복하였다. 이 환자는 최소한의 의식 상태(MCS)였는데, 이것은 혼수상태와 유사하지만, 이따금 짧게 나타나는 환경 인식 및 자기 인식 동작으로 인해 완전한 혼수상태와 구분된다.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져 회복가능성이 없어 보였던 환자가 자기장 치료 이후 회복된 예도 있다. 경두개 자기 자극(영어: 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TMS)이라고 부르는 이 방법을 15회 적용한 결과, 약간의 언어기능, 감각기능, 운동기능을 회복하였지만, 이것이 이 치료법의 효과인지 자연적으로 증상이 호전된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9]
. 인위적 혼수상태
약물을 사용하여 인위적으로 혼수상태를 유도할 수도 있는데, 이런 부류의 혼수상태를 인위적 혼수상태(영어: Induced coma)라 한다. 이것은 뇌에 가해질 수 있는 충격으로부터 뇌 기능을 보호하거나, 부상이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용된다.[3] 적용 예로 뇌 수술과[10] 광견병 치료 연구인 밀워키 프로토콜 등을 들 수 있다.
. 관련 질병 또는 상태
식물인간
뇌사
감금 증후군(또는 폐쇄 증후군) : 식물인간과 유사하나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
최면
■ “길은 내 안에 있다”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Osho Laznishi, 1931∼1990)
(김현국 역)"나의 메시지는 종교도, 철학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일종의 연금술이며 인간 변화를 위한 과학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자들, 용기 있는 자들만이 들을 수 있다. 나의 메시지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나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그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따라서 나의 메시지는 그대가 외투처럼 걸치고 자랑할 수 있는 철학도 아니고 그대를 괴롭히는 질문을 잠재우기 위한 교리도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언어적 대화가 아니다. 나의 메시지는 훨씬 위험하다. 그것은 바로 죽음과 부활이다." (오쇼 라즈니쉬)
. 평범한 인간;
. 전설 뒤에 숨은 역사결코 평범하지 않는 자신에게 평범한 인간이란 타이틀을 붙였다. 그리고 또 평범하지 않은 인간이 남긴 전설 뒤에 숨은 역사라는 부제를 붙였다. 평범한 우리들의 입장에서 본 다면 그 스스로 평범하다고 한 그의 삶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듯이 이 세상 사람 누구나 그와 같이 될 수 있기에, 그는 자신을 평범하다 했나 보다. 아무튼 평범함과 비범함을 넘나드는 인생을 살았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듣는다.
.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사람들은 항상 변화를 강조한다. 끊임없이 변화하여, 과거의 자신과 또는 남들과 달라지려고 무던히도 애쓴다. 하지만, 또 자신과 많이 다른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속한 그룹 속에서 조용히 묻혀 살기를 바란다. 이런 세상에 한 괴짜가 나타났다. 깨달음을 얻은 자가 나타났다. 그가 하는 말들은 왠지 그럴 듯 하면서도 위험해 보인다. ……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은 오쇼가 아닌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오쇼라 불렀다. 그리고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을 만들어 그것이 오쇼의 얼굴이라 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과 그러한 모습으로 비춰지는 자신에 대한 오쇼의 날카로운 한마디가 담겨있다.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누구든 지이다."
. 유산그는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겼다. 그의 가르침, 아니 그가 전하는 메시지들이 그것이다. 종교와 명상, 그리고 심리학 등 그가 떠난 이 세상을 살아갈 우리들에게 그는 많은 메시지들을 남겼다. 이것을 읽고 나면, 왠지 본격적으로 명상을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일어난다.
.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 내용 중에서 (발췌)
(편집자 서문). 그는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신문기사 모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진리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시간 속의 사건들의 의미를 이해하기를 원한다. .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가 누구냐'이다. . 오쇼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때에만 우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서문). 역사학은 진실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 진실은 물질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아직 의식의 사건들을 다루기에 충분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1부) 평범한 인간. 전설 뒤의 숨은 역사
. 나에게 있어서의 영성은 순수한 개인성을 필요로 한다. 영성은 어떠한 종류의 의존도 허용하지 않는다. 영성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하나의 자유를 창조해낸다. 영성은 결코 군중 속에 있지 않으며 언제나 홀로 있다. . 나에게 있어 영성은 단지 자신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 . 침묵은 고유의 진동을 가지고 있다. 침묵은 전염성이 있다.
. 스승은 그 스스로 알았고 자신이 안 것을 나누어준다. 선생은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을 고스란히 세상에 전해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아직 알지 못한다. . '나는 자신을 안 모든 사람들의 발 밑에 절합니다.'. 앎의 대상은 없다.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아는 자가 있을 뿐이다. . 지식은 그대를 매우 교활하게 만든다. 나는 교활하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가 삶을 끝내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그의 권리이다. 그러나 나는 삶을 길고 긴 고문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대한다.
. 언제나 자신에게 진실한 나니는 말했다. "바꾸기에 너무 늦는 법은 없어요. 당신의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바꾸세요. 사실 당신은 늙어가고 있으니까 더 빨리 바꿔야 해요. 늙었으니까 바꿀 수 없다고 말하지 마세요. 젊은 사람은 바꾸지 않을 여유가 있을지 모르지만 늙은 사람은 그럴 수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이미 충분히 늙었어요."
. 오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속에서만 죽음을 만날 수 있다. . 사랑 없이는,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로 가는 열쇠를 주지 않는다. 사랑이 있을 때, 죽음은 그대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통하는 열쇠를 건네준다.
.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랑자가 되기를 선택한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겠어요. 능력이 있으면서도 말이에요. 그렇다면 방랑자라고 해도 존경 받을 만해요. 존경은 직업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니까요. 존경은 그 사람의 행동이 힘과 명료함, 지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느냐와 관계가 있어요.. 몇 번쯤 넘어지고, 다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은 좋다. 몇 번쯤 길을 잃는 것은 좋다. 해가 될 것은 없다. 그대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돌아오라. 삶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 저는 단지 그것을 이용했을 뿐이고 그것은 저의 권리에요. 상황을 이용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권리에요.. "제발 선생님의 갈 길만 가주세요. 선생님의 과목이 아니면 어떠한 조언도 제에게 하지 말아주세요. 그래야 저 자신의 방법으로 저의 삶을 탐험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저는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를 거예요. 저는 기꺼이 실수와 잘못을 저리를 거예요. 그것만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 만약 어떤 신이 있어서 언젠가 내가 그를 만난다면 그는 나에게 화를 낼 수 없어. 오히려 내가 그에게 화를 낼 것이야 '왜 당신은 세상을 이렇게 창조했소?'라고, 나는 두렵지 않다.
. 나는 말했다. "괜찮아요. 왜냐하면 저는 그 모든 조언들을 결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저는 결코 신경 쓰지 않았어요. 제가 하려는 일이 무엇이었든지, 저는 누가 뭐래도 그것을 했을 거예요. 그러니 죄의식을 느끼지 마세요. 저는 결코 여러분들의 조언을 심각하게 받아들여본 적이 없어요. 그 말들을 듣고 있기는 했지만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저는 제 속에 하나의 결정을,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 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 순간 속에서 마치 섬광처럼 그대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 . 구두쇠는 주먹을 꽉 쥐고 죽을 것이다. 이직도 붙잡고 집착하면서, 아직도 죽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직도 이완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손을 펴고,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나누었듯이 자신의 죽음마저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 그들은 와야 했기 때문에 왔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단지 사회적인 관습을 충족시키기 위해, 단지 그들이 왔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렇게 오는 것조차도, 그들이 죽었을 때 청소차가 그들을 실어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 만약 그대가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두려움은 없다. 만약 그대가 삶에 집착한다면 그때는 모든 두려움이 거기 있다.
. 나는 그들이 나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준 것이 한없이 행복했다. 그것은 나에게 엄청난 자유를 주었다. 아무도 나에게서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대에게서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때, 그대는 침묵에 빠진다. 세상이 그대를 그대의 모습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제 그대 쪽에서도 아무런 기대가 없다.
.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라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을 원하고, 권력을 원하고,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같은 욕망이 돌아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 우리는 이미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 노력은 필요하다.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노력만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그대는 그대와 그대의 희망 사이의 거리를 줄일 수 없다. 희망은 지평선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 나는 평범한 마음에 일어날 수 있는 관점들은 모두 버리고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관점만을 선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 돈은 언제나 나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대가 누군가를 신뢰하면, 그들이 그대를 속이는 것은 무척 어려워진다. . 나의 통찰 속에서 과학, 종교, 예술, 그것은 하나의 삼각형이다. . 나는 모든 독서를 통해 배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독서는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었고 그 목적은 나의 메시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 지역적인 한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다.
. 나는 어떠한 형용사도 없는 단지 나 자신이 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큰 통합과 개인성, 진정함, 그리고 충족감에서 오는 엄청난 지복을 주었다. . 그 모든 말들은 공허했다. 경험을 통한 뒷받침이 전혀 없었다. . 나는 모든 것을 무릅썼소. 나는 부자였고. 나는 자이나 승려가 되기 위해 그것을 포기했고 이제 나는 자이나교를 포기했고 승려직을 포기했소.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서 완전한 자유를 실험하기 위해서 말이요.
. 깨달음 전에 그들은 위대한 선생이었고 이제 깨달음 때문에 그들은 스승이 된다. 이제 그들은 선생에서 스승으로 바뀐다. 그리고 분명 그것은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 나의 강의는 정말로 명상의 위해 내가 고안한 장치의 하나이다. 말하기가 이런 식으로 이용된 적은 결코 예전엔 없었다. 나는 그대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 마음의 기능을 정지시키기 위해 이야기한다. .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나 자신도 다음 단어가 무엇이 될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어떤 실수도 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준비를 할 때 실수를 범한다. 나는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떤 것을 기억할 때에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그 어떤 강연자도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 깨달음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똑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이며 유일한 경험이다. . 나 자신의 경험으로는, 만약 그대가 침묵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대가 마음을 초월할 수 있고 그대의 의식이 성장할 수 있다면, 그때 그대가 무슨 일을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의 행동들은 전혀 중요시되지 않는다. 오직 그대의 의식만이 중요할 뿐이다. . 명상은 빛을 가져오려는, 기쁨을 가져오려는, 침묵을 가져오려는, 지복을 가져오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아름두운 명상의 세계에서 그대는 어떤 잘못된 일도 할 수 없다.
(2부) 빈 거울에 비친 그림자들.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한 인간의 여러 얼굴
.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의 아내이기 때문에 한 여자를 사랑해야 하게 되는 그 순간, 그것은 매춘이다. . 나는 종교성을 하나의 특질로 본다. 그것은 조직의 회원권이 아닌 자신의 존재에 대한 내적인 경험이다. . 신은 없다. 그러나 모든 꽃 속에, 모든 나무 속에, 모든 돌 속에 신성이라고 밖에는 부를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 안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그 언어를 모른다. . 부유한 자가 종교적이지 않다면 그는 어리석은 것이다. 가난한 자가 종교적이라면 그는 엄청나게 총명한 것이다. . 그대가 정말로 웃을 때, 그 한 순간 동안 그대는 깊은 명상적 상태 속에 있다. 생각이 멈춘다. 웃으면서 동시에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둘은 정반대이다. . 모든 물질적 욕구들이 충족되었을 때, 이제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명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만이 아직도 열려 있는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이다. 다른 모든 문들은 그대가 이미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하나의 문만이 그대를 초대하며 아직 열려 있다.
.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배추벌레와 나비의 관계이다. 배추벌레와 나비의 우정이다. 나비는, 배추벌레가 나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그러나 나비는 배추벌레 안에 하나의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 종교와 철학이 실패한 점은 그것이 모두가 진정한 경험에 대한 대응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계하라!. "지금의 내가 무엇이든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선택이다. 그것은 이 순간의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고 싶다면 그것을 바꾸는 것은 절대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어떤 사회적 강요도, 어떤 국가도, 어떤 역사도, 어떤 경제도, 어떤 무의식도 나를 막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바꾸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그것을 바꿀 수 있다.". 단지 그대 자신에 대해서 책임을 지라.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하라. 만약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면 즉시 징벌이 따를 것이다. 만약 그것이 옳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보상이 따라 올 것이다.
(3부) 유산
. 진정한 종교는 이름이 없다. 결코 어떤 이름도 가질 수 없다.. 과학은 객관적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며 종교는 주관적인 세계 안에서의 진리에 대한 탐구이다. . 물질의 차원 안에서의 앎을 그대는 객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그대의 내면성의, 그대의 내면의 존재의, 그대의 의식의 차원 안에서의 앎, 그것을 그대는 주관적인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 종교라는 말은 필요치 않다. . 믿지 말라. 물어라. 그대가 믿는 그 순간 질문은 멈춘다. 그대의 마음을 열어두라. 믿지도 말고 믿지 말지도 말라. 단지 깨어 있는 채로 모든 것을 탐구하고 의심하라, 그대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이 진리이다.
.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은 단순하게 생각들을 넘어 움직일 수 있다. 믿는 사람은 생각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의 믿음이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마음의 부분이다.
. 매일 하루 60분 동안만 세상에 대해 잊어라. 세상이 그대에게서 사라지게 하라. 그리고 그대도 세상으로부터 사라져라. 방향을 180도 돌려 단지 안을 보아라. 처음에는 구름들만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 그 구름들은 그대의 억압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그대는 분노와 미움, 탐욕, 온갖 종류의 블랙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대는 그거들을 억압했다. 때문에 그것들이 거기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소위 종교들은 그런 것들을 억압하라고 가르쳐왔다. 그래서 그것들은 상처처럼 거기 있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들을 숨겨왔다.
. 그대는 알고 있다. 그대가 눈을 감고 안으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대는 무엇을 만나는가? 그대는 붓다가 이야기하는 극락정토를 만나지 않는다. 그대는 그곳에서 억압된 채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지옥들과 고뇌들을 만난다. . 모든 사람들의 100도가 각각 다르다. 사람 또한 100도에서만 수증기로 변하지만 모든 사람의 100도는 서로 다른 것이다.
. 명상은 무엇에 '대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중심 밖에서의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다.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을 만큼 전적으로 그대 자신이 될 뿐이다. 내면의 불꽃은 움직임이 없다. 타인은 사라졌다. 오직 그대만이 있다. 단 하나의 생각도 거기 없다. 온 세상이 사라졌다. 마음은 더 이상 거기 없다. 그대의 절대적인 순수 속에 오직 그대만이 있다.
. 그대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 마음의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 마음 그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대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 만약 제가 강물 속으로 뛰어든다면 저는 다시 그 강을 더럽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마음 속으로 뛰어든다면 더 많은 소음이 일어나고 더 많은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물가에 앉아 있는 동안 저는 그 기술을 배웠습니다.
. 그대가 그대 마음의 강둑에 앉는 순간 그대는 더 이상 마음에 에너지를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명상이다. 명상은 초월의 기술이다. . 그대의 인생의 3분의 1은 잠을 자는데 들어가고 또 3분의 1은 교육에, 배우는데 들어간다. 뭐가 남는가?
그 중 많은 부분은 밥벌이에 들어간다. 만약 그대가 모든 것을 계산해본다면 그대는 놀랄 것이다. 70년 가운데 그대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은 7년도 되지 않는다. 당연히 급할 수밖에 없다. 미친 듯이 달려갈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미쳐서 달려갈 수밖에 없다. 그대가 염두 해 두는 것은 그대가 빨리 가고 있느냐는 것뿐이다. 수단이 목적이 된다.
. 외부에 빛이 있다. 따라서 그 빛이 그대 내면의 어둠을 보여준다. 흰 셔츠 위에 묻은 작은 진흙, 그것은 눈에 띈다. . 나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인류, 그리고 궁극적으로 양쪽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종교와 과학의 만남을 지지한다. 내면과 외면 모두를 다루는 하나의 과학을 지지한다.
. 서양은 지나친 과학으로 고통 받고 있다. 동양은 지나친 종교로 고통 받아왔다. 이제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하나의 인간 안의 두 가지 측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새로운 인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다리는 예술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신인간은 신비가이며, 시인이며,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4부) 오쇼의 일생과 그 주요 사건들
. 외부상황은 변할지 몰라도 그대의 의식은 한 치의 변화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나의 가르침의 전부이다.외부상황은 변한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어느 날은 성공하고, 어느 날은 실패한다. 어느 날은 정상에 있고, 또 어느 날은 밑바닥에 있다. 그러나 그대 안의 무엇인가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그리고 바로 그 무엇인가가 그대의 실체이다. 나는 나의 실체 안에 살 뿐이다. 나는 실체를 둘러싼 모든 꿈과 악몽들 속에 살지 않는다.
. 첫 번째 금언은 현재에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금언은 자연스럽게 살라는 것이다. ……세 번째 금언은 홀로 살라는 것이다.
. 그대 안에 하나의 혁명을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을 넘어 의식의 세계 속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 외에는 어떤 것도 종교적이지 않다. . 만약 내가 그대에게 한 시간을 준다면 그대는 쓰레기 같은 소리들을 지껄인다. 만약 내가 그대에게 일 분을 준다면 그대는 정확히 필요한 그것을 이야기한다. 그것이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 나의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이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대가 무엇이든지, 그대의 상태 그대로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달성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그대는 흰 구름이 될 것이다.
. 나의 의자는 비어 있을 수 있다. 그대는 나의 부재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기억하라. 오직 그대가 나의 부재를 느낄 수 있을 때에만 그대는 나의 현존을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대가 나의 육체라는 탈것이 거기 없을 때에는 나를 볼 수 없다면 그대는 나를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 그대는 그대 자신을 길을 찾아야 한다. 각자가 그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대 앞에 모든 길들을 펼쳐놓아 그대가 보고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올바른 길이 나타날 때면 그대는 즉시 그대 안에 커다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이 신호이다. 그것이 그대의 때가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가 기다려온 때라는 것을, 이것이 그대의 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그대에게 어떤 문제가 일어난 것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좋은 기회이며, 도전이며, 결정적인 순간이다. 그 순간을 창조적으로 이용하라. 수단과 방법을 찾아내라. 조용히 그대 자신의 가슴의 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확신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좋다.
. 나누라. 그러나 강요하지 말라. 나눔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나눔은 타인을 매우 존중하는 것이다. 나눔은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강요는 폭력적이다.
. 기러기는 물에 자신의 그림자를 비추려는 욕망이 없다. 그리고 물은 기러기의 상을 받아들이려는 욕망이나 마음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일어난다. 기러기가 날아갈 때면 물은 기러기를 비춘다. 그 반영은 거기 있다. 그 상은 거기 있다. 그러나 물은 비추려는 마음이 없고 기러기도 비춰 지려는 갈망이 없다.
. 탐욕스러워지지 말라. 왜냐하면 탐욕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말라. 왜냐하면 소유욕은 그대를 과거에 집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탐욕과 소유욕, 야망,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 세상은 그대가 빗나갈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빗나가지 않는다면 그때 각각의 성공들은 엄청난 기쁨이 된다. 그대는 중심에 남는다. . 이제 나의 방식으로 살아라. 스스로 책임을 져라. 그래서 다른 누가 그대에게 명령할 필요가 없게 하라. .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책임이다. 그리고 만약 그대가 스스로 그대의 책임을 질 수 없다면 그때는 다른 누군가가 그대 대신 그 책임을 떠맡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대는 노예가 된다.
. 나는 그대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대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그대에게 충족을 줄 수 있는 것은 거기 바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기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다른 시간 속에도 있지 않으며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정지할 때의 느낌, 완전한 정지의 느낌은 다름 아닌 '지금 여기'의 경험과 같다.
. 어떤 종류의 의존도 노예상태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영적인 의존은 노예상태 중에서도 가장 나쁜 노예상태이다. .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종교만이 있으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종교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신만이 있으며 그것은 축하라는, 삶이라는, 기쁨이라는 신이다. 이 모든 지구는 하나이며 모든 인류는 하나이다. 우리가 모두가 서로의 일부분이다.
. 이완하라. 그대가 단지 주시자일 뿐이라는 것만을 기억하라. 육체는 그대가 아니다. 마음은 그대가 아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거울이다. 그리고 그대가 거울과 같은 주시 속으로 침잠함에 따라 전 존재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모습을 띄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신성해진다. . 이번에는 정말로 인공의 사원이나, 인공의 종교가 아닌 그대 본래의 집으로 들어가라. 그대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라. 왜 자꾸만 복사품이 되려 하는가?
ㅁ 정관(靜觀]
. 대상에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봄. . 무상한 현상계 속에 있는 불변의 본체적, 이념적인 것을 심안(心眼)에 비추어 바라보는 것.
ㅁ 사물 밖의 여유
.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사물 밖 벗어난 유유한 놀음 優遊超物外자재로이 보내는 아침 저녁 自在度朝昏 천 산의 달 밟는 두 발 足踏千山月만 리의 구름 따르는 이 한 몸 身隨萬里雲
나 남이 업이 보는 본래의 소견이니 本無人我見 옳고 그름 갈린 문 어찌 있겠나 那有是非門 새가 꽃을 물어오지 않아도 鳥不含花至 봄 바람은 저절로 꽃다운 것을 春風空自芬
ㅁ
높은 마루 홀로 앉아 잠 못 이룰 때
적적한 외로운 등불 벽에 걸려있고
마루 끝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엿봄에
뜰 앞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高臺獨坐不成眠 고대독좌불성면 寂寂孤燈壁裏懸 적적고등벽리현 時有好風吹戶外 시유호풍취호외 却聞松子落庭前 각문송자락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