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5.조화 (調和)

조화(調和)

오갑록 2011. 5. 27. 15:31

조화로운 ......

 

■  조화 (調和)

날카로움과 게슴츠레함 사이에서의 "조화"를 생각하면서 ……

 

 

        날카롭고 매서운 모습을 떠올리노라면 맹수(猛獸)나 맹금(猛禽)이 연상된다. 금수(禽獸)는 짐승을 일컫는데, 특히 호랑이, 범, 독수리, 매처럼 다른 동물을 포식하는 성질 사나운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을 맹수 또는 맹금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의 외모에서도 그러한 매서운 면면들을 꼽을 수 있다. 맹수나 맹금류처럼 먹거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모습들이다.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휘두르며 투쟁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날카롭고 매서운 모습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목숨 내건 전쟁 통 백병전의 군인들 간 살벌한 눈초리가 우선 생각 난다. 구기이건 육상이건 종목에 관계없이 경기에 임하는 대부분 선수들의 진지한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다. 사업에 성패를 걸고 최선을 다하는 사업가도 그렇거니와 학문과 도량을 닦는 학자나 수도자의 모습들도 예외라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날카로운 모양새가 그들을 총명 하다거나 영리 하다는 선입관을 주기도 한다. 진지하고 부지런히, 열심으로 살아 간다는 우리들 삶의 모습 전체가 그러할지도 모른다. 날카롭고 매서운 모양새는 삶의 과정에서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서 맹수나 맹금류가 먹이 감 잡아채려는 듯한 자세로 긴장하고 눈치 보는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여유니 은은함이니 아름다움을 들이 댈 여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목표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바른 길 이라고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모습들을 굳이 색상으로 표현 하여 본다면, 새빨간, 새까만, 새하얀 등의 원색이 어울릴 듯 하다. 불그스레하거나, 거무스레하거나 희끄무레한 색은 어감이 주는 이미지가 날카로움과는 어울리지 못한다. 빛으로 말한다면 아주 밝거나 새까맣게 캄캄한 것이지, 어슴푸레 밝거나 어둑어둑한 상황들이 아니다.

 

그런데 색상이나 빛을 대할 때, 어떤 것들이 우리의 감성(感性)을 더 자극하는지를 생각하여 보자.

 

미개인들은 원색을 선호한다고 하지만, 문명의 멋이 깃든 현대인들이라면 희불그레하고 거무튀튀한 색을 더 야하고 멋지다고 아름답다고 여기리라고 생각된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좋아하는 옷 색깔과 서구의 대도시 숙녀들이 선호하는 색상에는 그러한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항상 굶주리는 사람의 뱃속에서는 고기며 곡물 같은 단백질이나 당류의 탄수화물이 최고겠지만, 배부르고 기름기 낀 사람의 뱃속에서는 기호식품들을 더 좋아라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비유가 되는 것인지?) 빛의 세기에서도 어느 것이 더 감성적인지는 자명하다. 대낮이나 한밤 보다는 오히려 이른 새벽 희번하게 밝아 오는 여명(黎明)의 순간이나, 석양(夕陽) 넘어 땅거미 지는 초저녁이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곤 한다.

 

우리에게 주는 정감이며 정념은 어느 한편의 극()점이 주는 첨예함에서 보다는 대응되는 양편의 조화(調和)로움 속에서 색다른 맛과 느낌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식탁에서 반찬과 자극적인 양념 그리고 여러가지의 식재료 각각으로는 맛볼 수 없는 비빔밥의 묘미와 흡사한 면이 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양극의 첨예함에서 양극간의 조화로움이 요구되고 돋보이는 사안들은 위에서 예를 들어 본 흑백(黑白)의 색상이나, 명암(明暗)을 이루는 빛뿐 아니라, 생각하기에 따라 삶의 과정에 연속되는 크고 작은 여러가지 일들이 모두 해당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흑백(黑白)의 조화, 명암(明暗)의 조화, 과부족(過不足)의 조화, ……

    장단(長短)의 조화, 고저(高低)의 조화, 다소(多少)의 조화, 대소(大小)의 조화, 상하(上下)의 조화,

    표리(表裏)의 조화, 전후(前後)의 조화, 개폐(開閉)의 조화, 출입(出入)의 조화두미(頭尾)의 조화,     음양(陰陽)의 조화, 요철(凹凸)의 조화, 남녀(男女)의 조화, 천지(天地)의 조화, 산하(山河)의 조화  

    비락(飛落)의 조화, 진퇴(進退)의 조화, 승패(勝敗)의 조화, 미추(美醜)의 조화, 빈부(富)의 조화,

    정동(靜動)의 조화, 선부(鮮腐)의 조화, 허실(虛實)의 조화, 유무(有無)의 조화, 냉열(冷熱)조화,

    우열(優劣)의 조화, 완급(緩急)의 조화, 조밀(粗密)의 조화, 예둔(銳鈍)의 조화, 곡직(曲直)의 조화,

    여야(與野)의 조화, 노소(老少)의 조화,  강유(剛柔)의 조화, 원근(遠近)의 조화, 강약(强弱)의 조화,

    선악(善惡)의 조화, 희로(喜怒)의 조화, 애락(哀樂)의 조화, 애증(愛憎)의 조화, ......

 

 

 

우리가 대하는 일상에서는 상당수가 이처럼 양편으로 대응하며 상치되는 일들로 이어지곤 한다. 여기에서 ()과 극(), 첨단의 것을 향하고 추구한다면 원색처럼 산뜻할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삶이 진선미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대치되는 양극(兩極)의 조화 속에서 그 참 맛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이를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나 논어에서 다른 표현으로 중용(中庸)의 덕()”이라고도 부른 듯하다.

 

양극(兩極)은 인간의 이상(理想)이니 목표달성을 위해 숫돌에 갈아대는 칼날과도 같다고 말하고 싶다. 예리하게 날을 세워 놓은 칼날은 무엇인가를 끊고 자르기 위해서 갈아 놓은 것이며, 한낱 도구에 불과할 뿐, 아름다움(), (), ()과 같은 삶에의 깊은 의미가 있는 것과는 거리감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본다. 날카롭고 매서운 날을 세워가며, 다툼에서 이기고 달성한 것들이 삶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허망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것은 발톱 날 세워 잡은 고기나 물어뜯고 씹어 먹고 싸고, 결국 죽고야 마는 맹수.맹금과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날카로움을 추구하는 부류들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 (), ()을 추구하는 일이란 덧없는 짓으로 밖에 여기지 못할 수도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그림을 그리고 뛰고 노래 하는 예체능 행위를 두고 한데 몰아 배불러 할일 없는 이들로 백안시 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삶의 참된 것이란 무엇인지, 그 진리를 쉽사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어느 한편의 끝자락에만 진리가 묻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예리함 중에도 없지야 않겠지만, 두리뭉실 뭉툭하여 둔탁하고 투박한 가운데에도 우리들 모두가 갈구하는 진리가 틈틈이 끼어 있을 것만 같다.

 

문명이 발달하고 복잡다단한 현대사회가 될수록 우리의 삶은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일들이 점점 더 양극(兩極)으로 치우치게 되고, 흑백논리로서 판단하고 평가 되기 때문이다. 복잡화 된 현대사회는 구성원의 전문기능을 요구하게 되고, 그들은 흑백, 대소 …… 극간(極間)의 어느 한 곳을 선택 해야만 할 수 밖에 없도록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극도로 크거나 높은 달 별 우주를 향해서, 극도로 작고 미세한 나노, 미크론의 세상, 세포 핵 원자 쿼크 전자의 연구개발을 위해서 전력을 다 한다. 공 차기를 잘하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로 발탁되어 훌륭하게 활동 중인 어느 한국 선수의 기형으로 변한 발의 모습이 공개되었고,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수석 발레리나로 성공한 한 한국여인의 일그러진 발 모습이 공개된 바도 있다. 한 해에 토슈즈 250 여 켤레가 닳아 떨어지도록 혹독한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런 모습들은 자기가 속한 극히 특화된 한 분야에서 그만큼 열심으로 연습하고 생활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들은 현대사회 삶에서 선택과 집중이 어떤 것인지 대변해 주는 사례라는 생각을 들게 하며, 정치 문화 과학 예술 예능 체육 종교 학문 …… 어느 분야이건 간에 예외는 없다고 본다. 특화된 어느 한 단면에서만 서성댈 수 밖에 없는 것이 현대사회의 삶이다. 특화된 어느 한 분야를 누구보다 월등하게 잘만 하면 삶이 보장되는 사회로 변모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스케이트를 잘 타던지, 공을 잘 던지던지, 간드러진 노래나 춤 솜씨가 남 다르거나, 감기 바이러스니 DNA 유전자 등의 연구에서 대가가 되던지, 우주개발 궤도전문 과학자가 되던지 간에 자기만족과 주위의 부러움을 살 수 있는 세상이다.

 

선택하여 전문인으로서 성장할 만큼 집중을 기하면 자기영역 확보로 원만한 현대인으로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극한에 달한 특정분야에서 전문인으로서 성공인 셈이지만, 전인(全人)적 평가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선미나 덕 이라고 하는 큰 틀의 훌륭한 삶과는 괴리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육체와 정신을 나누는 이분법적인 철학을 지양하고, 인간을 인지적. 정의적. 기능적. 신체적 측면 등 전 부문에 걸쳐 조화롭게 발달시키고자 하는 소위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추구하는 이유이다.

 

허블 망원경 앞 천문학자만 별을 세는 것은 아니다. 시인 윤동주도 별을 헤아리는 시를 남기고, 시골 촌노도 여름 밤 하늘에 수 놓는 별을 헤아리곤 한다. 바이러스 세균과 싸우는 의학도도 첼로니 바이올린 끼고 모짜르트 악보의 빼곡한 콩나물 대가리 헤아리기 마다 않는 분도 있을 것이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거쳐 화학공학을 전공한 공(工)돌이라는 자기 주제도 잊은 채,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 토막에 마음 닿아 눈길 머물곤 하는 나 스스로의 처신도 다를 바는 없을 듯 하다.

 

이는 “선택과 집중으로 도달한 극()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조화(調和)를 시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면 어떨까? 우리들 감정이나 생각에서의 극()한의 의식도 조화(調和)로움이 필요하긴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날카로움과 게슴츠레함이라는 특정한 극()한의 예를 생각하여 보자.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정신을 흐릿하게 몽롱하게 하는 행위들은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삶의 목적론적 가치기준에서만 본다면 부정적인 답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마약으로 분류되는 모르핀 코카인 대마초와 같은 것은 빼 놓더라도, 알코올 카페인 니코틴 등을 성분으로 하는 술 담배 커피 차와 같은 기호식품도 마약 보다 습관성은 낮겠지만 감성이나 정신을 자극하는 물질들임이 자명하다. 이들은 정신의 예민함 날카로움을 잠시나마 저해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황의 필요성이 인정되기에 생필품으로서 애용되고 있다.

 

빛이나 색에서의 어슴푸레하거나, 희끄무레한 것들처럼, 자명하지 못하고 몽롱한 정신상태의 조화도 때로는 삶의 여정에서 필요불가결 한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에 취해서 생각이며 행태가 몽롱하거나, 어슴푸레, 게슴츠레 한 것도 빠질 수 없는 삶의 한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 마약류는 아니더라도 기호식품에 의존하거나, 뿅뿅과 같은 오락을 통해서, 또는 신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정신적 신체적 쾌락과 함께 새로운 조화를 추구하곤 한다. 맹수. 맹금류가 가진 매서운 사냥 본능뿐 아니라, 삶에 어울리는 색다른 조화로움을 찾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춤추며 노래하고, 조깅 하고 수다 떠는 순간들도 몽롱하고 게슴츠레한 시간일 수 있다.

 

이 때의 게슴츠레함이란 안개에 살짝 가리워진 먼 산 능선의 모습을 그린 수묵 산수화의 모습과 흡사할 수도 있다. 영상에서의 페이드인(fade-in)이나 페이드아웃(fade-out) 시의 여운 남기는 아름다운 순간장면일 수도 있다. 물기 촉촉하게 젖은 얇은 망사로 중요 부위만 살며시 가리워져 윤곽도 선명한 누드사진 한 점일 수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처럼 웃는 듯 마는 듯 야릇한 미소일 수도 있다.

 

독수리나 매의 매서운 눈, 호랑이나 범의 불꽃 튀는 눈, 부처상이나 달마도의 득도를 갈구 하는 사려 깊은 눈, 사천왕상의 부릅뜬 눈, 희번덕대는 극 중의 강도나 도둑의 눈 …… 이들은 하나같이 날카롭고 매서운 모습들이다. 뽕 맞은 이나 업힌 돼지의 눈은 게슴츠레하다고 한다. 윗 눈꺼풀에 추나 달린 듯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 시선의 초점은 허공에 드리운 채, 몸은 "날 잡아 잡수시오" 라는 듯이 제대로 가누지 못해 무방비 자세로 두고, 마음이나 정신 또한 쓰레기 더미처럼 멀리 팽개치듯 한 기운 빠진 모습을 표현하는 부사이다. 선잠에서 갓 깨어난 어린아이 눈과 모습에서 보이기도 하고, 행위예술의 절정에서도 때로는 그러한 순간들을 연출하기도 한다. 손발의 힘을 한껏 빼고 나른한 몸을 길게 늘이며 휴식을 취한 때에도 그러한 게슴츠레한 맛을 즐기는 격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상태에서도 그러한 순간은 적지 않게 자주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휴식과 수면에 취할 때나, 오락, 식도락, 마시거나 여행 등을 즐기면서도 때로는 몽롱하거나 게슴츠레하여 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쉼이나 여유로움의 또 다른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한 편이 옳다거나 그르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날카로움에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면도 많겠지만, 날카로움과 게슴츠레함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진 생활 또한 삶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더 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 본다.

 

, “중용(中庸)의 덕()”이라는 어려운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일과 생각들이 조화로운 지혜와 행동들을 통해서 양극(兩極)으로 치달으며 과(過)하여 남거나 넘치지 아니 하고, 모자라 허덕이고 아쉬워하지 아니하게 처신함은 매우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새삼스레 되뇌어 본다.

 

       2010. 3. 14. ()

       오갑록 (K L 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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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용과 조화, 그리고 덕(德)

 

     “덕교(德敎)의 핵심은 중용지위덕(中庸之爲德)” 중에서

 

                                                                                                노.중평, 글 중에서 부분 발췌

    마고시대로부터 인간은 천체의 운행을 보면서 하늘이 땅에 베푸는 덕을 찾으려 했다. 천체의 운행에서 덕(德)이 생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천체의 운행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각가지 현상과 변화를 개념화하고 정의하면서 덕의 실체를 찾아내어 덕교(德敎)라 이름지어 가르쳤다.

 

진주소씨의 족보서문인 “동근구보서(東槿舊譜序)”에 덕교의 실체가 무엇인가를 밝혀 놓았다. “동근구보서”는 “덕교가 풍도를 숭상한다(德敎尙風道)”고 하였다. 즉 풍도를 숭상하는 것이 덕교라 한 것이다. 풍도란 풍이(風夷)가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한다.

 

'풍도는 근신하고 삼가 하여 옛날의 인군(人君)이 덕을 닦고 어진 행실을 행하는 일(謹按古之人君以修德行仁之事)'이라고도 하였다. 목덕(木德)이 무엇인데 이토록 갈고 닦으려고 하였을까? 목덕이란 동쪽의 덕이다. 춘분(春分)의 기(氣)가 오는 곳의 덕이 목덕이다.

 

덕교의 사상은 덕을 밝히는 명덕(明德)이었다. 자연이 순환하는 이치인 원형이정(元亨利貞)에 따르고 사계(四季)를 숭상하는 검덕(儉德, 단군왕검의 덕)을 내세웠다.

 

태백진교는 수리(數理)로 보면 3을 숭상하는 사유체계이다. 하나에서 셋이 나온다는 것으로 삼태극, 음양조화, 삼신사상이 이 안에 있다. 우리는 태백진교를 세상에 펼침으로써 “재세이화(在世理化)의 도”를 이룩하였다. 조선에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이론체계가 서기 전에 이미 배달나라에서 “재세이화의 도”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재세이화의 도는 태백진교라는 다른 말로 표현이 되었다.

 

삼신신앙이 실현되는 사회가 재세이화의 도가 실현되는 사회이고 태백진교를 가르치는 사회이다. 태백진교를 가르치는 사회가 덕교가 실현되는 사회이고 홍익인간을 가르치는 사회이다. 홍익인간을 가르치는 것을 덕교라 하였다.

 

덕교는 수리로 보면 4를 숭상하는 사유체계이다. 1에서 시작한 3이 지구의 궤도인 황도를 공전하면서 완성하는 수가 4이다. 이 4가 원형이정이다. 4가 운행하여 생겨나는 것이 춘하추동 사계이다. 사계는 인간을 이롭게 한다. 원형이정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고 해서 홍익인간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사회성에서 나오는 홍익인간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에서 나오는 이익(利益)됨으로써 홍익인간이다.

 

원형이정은 사덕(四德)이다. 사덕이 인간을 고루 이롭게 한다. 사덕은 태양이 태양의 공전궤도인 황도를 운행하면서 생겨나는 결과이다. 우리가 봄(元)에 씨 뿌리면, 싹이 나서 여름(亨)에 성장하고, 가을(利)에 결실을 거두게 된다. 원형이(元亨利)가 정(貞)을 낳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성(地星)인 지구는 이러한 우주의 원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원리에는 균형을 잡아주는 이치가 있다. 지구가 23.5도 동북쪽 간방(艮方)으로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이유가 균형을 취하게 하는 어떤 힘이 작용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지구가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을 중용(中庸)이라 한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용의 덕 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중용(中庸)이 덕이 된다고 하였다. “중용지위덕 기지의호 민선구의 (中庸之爲德 其至矣乎 民鮮久矣)” 중용의 덕이 됨은 참으로 지극한 것이다. 중용을 능히 행하는 이가 적은지 오래다. (論語, 雍也)

 

공자가 말한 중용지위덕(中庸之爲德)은 덕교의 핵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덕에 관한 기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역경”이다. 덕의 뜻을 풀어 원형이정이라고 하고, 원형이정은 “역경”의 건(乾).곤(坤).둔괘(屯卦)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공자는 “논어” 옹야편에서 삼태극의 토인 황의 덕를 말하고 있다. 삼태극의 토인 황은 우주만물의 중심에 있어서 음과 양을 조화 시킨다. 조화가 바로 덕 이다.

 

단군왕검이 말한 사덕인 원형이정에서는 덕의 주제가 되는 것이 이(利)이다. 이는 조화의 결실이다. 우주가 운행을 하면서 일구어내는 결실이 바로 이(利)이다. 이는 바로 익(益)이 된다. 이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이가 널리 퍼져 누구에게나 베풀 수 있는 것이 홍익(弘益)이다. 이렇게 홍익은 덕을 펼치는 것이다.

 

천덕(天德)을 가르치는 것을 덕교(德敎)라 하였다. 천체가 운행하는 것을 천행(天行, 周易)이라 하는데, 이를 밝히는 것이 천문(天文)이다. 해와 달과 북두칠성이 천도(天道, 행성이나 행성이 가는 길, 태양의 길은 황도黃道, 달의 길은 백도白道, 북두칠성이 가는 길은 12辰)를 따라 운행함을 천덕이라 한다.

 

태양이 나타내는 천덕, 절기를 덕시(德施)라고 한다. 태양이 절기를 만드는 것은 양덕시(陽德施)이고, 달이 사덕을 만드는 것은 음덕시(陰德施)이고, 북두칠성이 12진을 만드는 것을 12진덕시(辰德施)이다.  즉 우주의 이치인 원형이정(元亨利貞)을 나타내는 것을 각각 양덕시, 음덕시, 십이진덕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천도의 운행이 반복해서 나타나면 이로 인하여 덕이 나타난다. 덕이 나타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理)가 눈에 보이도록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덕” 본다고 한다.

 

 

□  정월 떡국과 고사(告祀)의 의미 

 

(昧, 周易)를 동이의 음악이라 하였다. 우리 문자에 떡을 치는 떡메가 있는데, 이 메자와 매자는 어원이 같다. 상고시대의 우리 음악을 매라고 한 것은 매를 치는 음악이라는 뜻으로 썼던 데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메는 떡판에 놓은 떡을 치는 메이고, 매는 동이의 음악이다. “친다, 두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메나 매가 두드리는 소리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어원이 같다고 본다. 동이는 장구 징 꽹과리 북 등을 두드리는 음악을 연주한다. 떡메의 떡은 덕(德)을 어원으로 가지고 있다. 덕을 나누기 위하여 떡을 만들었다. 제사에 떡을 올렸다가 제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었다. 덕을 연주하는 음악을 덕매(德昧)라고 말할 수 있다.

 

덕을 봄으로써 비로소 대인(大人, 周易, 乾爲天卦上九象曰大人造)이 된다. 대인은 발이 큰 사람을 말한다. 관자(管子)는 발이 큰 사람을 발인(發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동이(東夷)라는 뜻이다. “산해경”에 대인은 호랑이 두 마리를 부리는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가 사는 나라를 군자(君子國)이라고 하였다. 산신각(山神閣)에 군자를 그려 모시고 산신도라고 한다. 군자란 대인이요, 단군왕검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주역”은 군자를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경인데, 군자가 단군왕검의 자손이므로 단군왕검의 가르침인 덕교의 경전이 된다.

 

덕을 쌓는 일을 후덕(厚德, 周易, 坤爲之卦 彖曰)이라 한다. 덕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육덕(育德, 周易, 山水蒙卦 象曰)이라 한다. 덕을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덕교를 실천할 수 있다. 유교(儒敎)의 근원이 덕교이다.

 

구덕(舊德)은 묵은 떡. 직역하면 낡은 덕이 되는데, 묵은 떡으로 본다. 정월 초하룻날 나누어 먹는 떡국을 덕국(德國)으로 볼 수 있는데, 덕국은 단군조선을 의미한다. 묵은 떡을 나누어 먹으면 끝에 가서 여향이 길하다. 여향은 단군왕검의 중시조인 유망의 고향이다. 유망의 집안 식구들에게 길함이 있다고 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고사(告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사에는 떡과 타래실과 북어를 올린다. 떡은 조선의 덕(德)을 상징한다. 시루는 나라를 상징한다. 따라서 시루떡은 나라의 덕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사상에 북어와 타래실을 올리는 것은 곤(鯀)을 상징한다. 나라(시루甑)의 덕의 주인이 곤이라는 뜻이다. 이를 기리는 제사가 고사이다. 고사는 단군왕검이 조선을 선포할 때 처음 행한 제사법이었다고 생각된다. 요새 말로 개국(開國) 기념식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발췌원문:   http://www.whantimes.com/sub_read.html?uid=2090

 

 

 

■  중용의 덕과 조화

  

 

중용(中庸)이란,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알맞은 일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가리켜 “과불급이 없는 중도를 선택하는 덕”이라고 했다. 일례로,“용기”라는 덕은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용의 덕이고,“겸손”이라는 덕은 파렴치함과 수줍음의 극단을 피한 중용의 덕이라고 했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중용”

                                                         최.명관 역, “니코마스 윤리학”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으로서의 행복을 '완전한 덕에 따르는 마음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덕을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한다.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며,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발생하거나 성장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도덕적인 덕에 대해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덕은 결국 중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모든 행위와 모든 정념에 중용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악의, 질투, 절도, 살인 같은 경우에는 그 중용이란 도무지 없으며, 그 자체가 나쁜 것이다. 요컨대 언제나 그릇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절제와 용기는 그 극단적인 것이 중간적인 것이 되기 때문에, 과도와 부족이 도무지 없다. 요컨대 절제와 용기는 그 자체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중용에 대한 위와 같은 일반적인 언급을 개별적인 사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란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우에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몇몇 사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명예와 불명예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긍지요, 그 과도는 이른바 허영이요, 그 부족은 비굴이다. 노여움에 관해 말하면, 그 중용은 온화요, 그 과도는 성급함이며, 그 부족은 성질 없음이다. 진리의 중용은 진실이요, 그 과도는 허풍이며, 그 부족은 거짓 겸손이다. 돈을 주고받는 일에서 중용은 너그러움이며, 그 부족은 인색함이고 그 과도는 방탕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용을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뜻하지 않은 우연이나 일시적 충동에 의해 중용에 맞게 행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성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젖은 행동의 습관이라고 이야기한다. 일시적, 우연적으로 중용에 맞게 행동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항구적일 수 없다. 시종일관 중용에 맞는 행동, 즉 유덕한 행동을 거듭함으로써 우리는 덕의 습관, 중용의 습관을 얻을 수 있다.

 

결국 인격이란 오랜 세월에 걸친 일관된 도덕적 훈련과 그로 인한 습관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격자란 모든 행동에서 자신이 형성한 중용의 습관에 맞추어 신뢰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하나의 행위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그가 전 생활의 모든 행동에서 중용을 지키지 않는 한, 그 사람을 유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한 마리의 제비가 왔다고 봄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루의 실천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 중용의 덕은 산술적 기계적 중간이 아니라 관계적 중간을 의미한다.

  . 중용은 우리의 일상에서 늘 요구되는 실천적 덕목이다.

  . 중용의 실천은 정신적 덕목에 해당하는 타당한 지식과 올바른 지혜에 기초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 행복에 이르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을 덕이라고 부르고,

 . 덕은 구체적으로 가장 적절하고 빼어나게 발휘된 우리의 고유한 본성 또는 품성의 상태를 뜻하며,

 . 이러한 덕은 성격적 덕과 지적인 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어떤 품성이 하나의 덕이 되기 위해서는 중용의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

 

“중용의 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은 각각의 끝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면서 동일하다. 반면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은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다. 가령 10은 많고 2는 적다고 한다면, 대상에 따른 중간으로 6을 취한다. … 이것은 산술적 비례를 따른 중간이다. 그러나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은 이렇게 취해서는 안 된다."

 

간추려보면 중용이란 일종의 중간상태이긴 하지만,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중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용은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이며, 그것은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이다. 이처럼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상태로서 관계에 대한 정확한 파악으로부터 귀결되는 중용개념을 연구자들은 산술적 중간에 대비된다는 뜻에서 기하학적 중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중용의 뜻을 명료하게 밝히는 데에 그다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중용의 상태는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날까?

 

매사에 사태 및 관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기초하여 슬기로운 균형과 조화 를 꾀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태도가 곧 중용이다. “중용은 일차적으로 품성의 적절하고 조화로운 상태를 일컫는 말이면서, 나아가 지혜로운 삶의 태도와 실천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중용의 덕을 파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헤아림이 대단히 중요하다. 용기나 절제 또는 진실성 등의 덕은 중용에서 성립하는 선택에 관계된 품성의 상태이며, 중용은 그 자체로 하나의 덕이다.

 

앞에서 중용의 덕을 실천할 수 있으려면 관계 또는 사태에 대한 정확한 이해 내지 파악이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했다. 무언가를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것은 정신적인 활동이다. 이런 정신적 활동에 있어서 요구되는 조건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덕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적인 덕은 앞서 논의한 성격적인 덕과 서로 매우 밀접한 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다. 성격적인 덕이 품성의 훈육과 습관화를 통해 얻어지는 결과라고 한다면, 지적인 덕은 주로 교육과 가르침을 통해서 갖출 수 있는 덕이다. 덕을 그 기원에 따라 성격적인 덕과 지적인 덕으로 구분하는 근거는 인간의 품성이 그것의 부분에 따라 각각 다른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음양의 조화"와 기(氣)의 흐름

 

 

                                                                                                                 글; 일중, 부분 발췌

     기의 흐름은 음양의 조화에 있다. “황제내경”에는 “천지의 기에 조화보다 큰 것은 없다. 조화라는 것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조화는 음양의 기가 운동 변화 하는 근본적인 방향이며 아름다운 상태이다.

 

음양의 기는 만물의 조화를 위해 펼쳐 졌다. 오그라들기도 하고, 말렸다 펴 지기도 하고, 텅 비었다 가득 차기도 하며, 왕성하였다 쇠퇴하기도 한다.

 

음양의 이치에서 보면 동(動, 움직임)도 동 그 자체로 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동에도 반드시 정(靜)이 있는 것이다. 정과 동은 음과 양이다. 정과 동의 개념은 크게는 자연계 물리현상 속에서 서로 반대되는 상태라고 말 할 수 있고, 작게는 인간 행위에 있어서 정지와 활동, 휴식과 움직임이라는 두 가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이 더 큰 동이며 동의 근원인 것이다. 인간에게 정을 취하는 것은 양생(養生)의 필연적이고 기본적인 방법이 된다. 모든 생명력의 원천은 “정”에서 자라 움직인다. 인간을 비롯한 자연계의 동식물, 광물이라도 모두 정 속에서 생명력이 충만해 지고 성장하게 되어 있다. 식물의 꽃잎, 씨앗 등도 고요한 상태에서 성장하고 움직이는 상태에서 시든다. 

 

사람도 육체적인 측면에서 활동만큼 휴식이 필요하다. 활동 속에 인간의 기는 쇠하고, 휴식 속에서  기는 충만 된다. 정신적 측면에서 말한다면, 심신을 고요히 함으로서 선천적인 지혜에 접근 할 수 있다. 인간의 지식은 후천적인 학습 행위에서 나오나, 지혜는 고요한 정 속에서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움직임이다. 

 

 

 

■  노자의 도덕경 중에서

               (상호간의 조화를 생각하며 ......)

 

 

   노자가 “도덕경” 2장에서 설파한 ‘유무상생(有無相生), 난이상성(難易相成), 장단상형(長短相形), 고하상경(高下相頃), 음성상화(音聲相和), 전후상수(前後相隨)’ 등은 문자학적 사유인 상관적 대대법(pertinent opposition)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마음도 소유와 존재, 본능과 본성의 문자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마음이 무아의 고요에 머물 때에 마음은 본성의 기호를 나타내고, 마음이 자아를 의식하는 감정의 파도에 휩싸일 때에 마음은 본능의 기호를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김.형호)

 

 □ 노자, 도덕경 2장 :  “인위(人爲)는 거짓(僞)이다”

 

“도덕경”  2장은 상대주의를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無爲)가 핵심적인 주제가 된다.

 굳이 하나를 고집할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상대적일 뿐이기 때문이다.

 (美)와 오(惡),

(善)과 불선(不善)의 구별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설파한다.

 

 

(원문)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천하개지미지위미  사오이

 

皆知善知爲善  斯不善已

개지선지위선  사불선이

 

故 有無相生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고 유무상생 난이상성  장단상교  고하상경  음성상화 전후상수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시이성인처무위지사  행불언지교

 

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

만물작언이불사  생이불유  위이불시  공성이불거

 

夫唯不居, 是以不去

부유불거  시이불거

 

세상 사람들은 겉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爲美)을

아름다움(美)이라고 알고 들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惡)일 뿐이다.

 

모든 사람들은 착하게 보이는 행위(爲善)를

(善)이라고 알고 들 있는데,

이것은 전혀 선(善)일 수가 없다(不善).

 

왜냐하면 있음과 없음은 서로 상대적으로 일어나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상대적으로 이루어지며,

길고 짧음은 서로 상대적으로 비교 된 것이며,

높고 낮음은 서로 상대적인 높이로 보이는 것이고,

나오는 소리와 들리는 소리는 서로 어울려서 울리는 것이며,

앞과 뒤는 서로 상대적으로 붙어 다니는 것이다.

 

이리하여 성인은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無爲) 일을 하면서도,

말없는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다.

 

자연의 온갖 작용이 어떻게 운행되고 있는지는 설명될 수가 없다.

자연은 온갖 만물을 낳으면서도 그것을 소유하지 않는다.

자연은 온갖 만물을 보살펴 주면서도 그 베푼 결과에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자연은 결실(功)을 이룩하더라도 그 공(功)의 결과에 머무르지를 않는다.

 

이렇듯 자연의 무위적인 흐름처럼(夫)

성인은 어디에든 머물지 않기 때문에(唯不居)

그래서 무엇인가를 거두어 들일 것도 없다.(不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