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善/15.두려움 (恐)

공포와 두려움

오갑록 2010. 2. 6. 16:22

자연스런 ......

 

 

■  공포와 두려움

 

 

멍청한 질문에 대한 같잖은 대답을 늘어 놓는다.

 

   저 촛불은 왜 켜져 있는 것인가?   꺼지기 위해서 ……

    작열(灼熱)하는 태양은 왜 떠 있는 것인가?   지기 위해서 

    나는 지금 왜 눈을 뜨고 있는 것인가?   감기 위해서 ……

    땀내며 산 정상까지 왜 올라 왔는가?   내려가기 위해서 ……

    그림자는 왜 나를 따라 다니고 있는가?   떠나기 위해서 ……

 

이런 우문우답을 따라 가다 보면, 다음 질문도 쉽사리 대답할 수 있을 듯 하다.

   우리는 왜 공포와 두려움을 품고 사는 것인가?   벗어나기 위해서 ……

 

공포의 깊은 골을 떨치지 못하고 여태껏 기억하는 어린 시절 한 때의 커다랗던 불안감을 돌이켜 본다. 초등학교 5~6학년 즈음의 국어 교과서로 기억된다. “쾅! 쾅! 우르르 쾅! ……” 탱크를 앞세운 북한 괴뢰군의 6.25 남침이야기다. 보따리 이고지고 우는 어린애를 업고 걸리며 폭발하는 거리를 줄 이은 피난 행렬의 참혹하고 어수선한 장면의 삽화와 함께 6.25 전쟁을 그린 대목을 배울 때다, 그 무렵 여러 날을 두려움에 떨고 무서운 악몽으로 허덕이며 어릴 적 막연했던 전쟁의 공포가 새삼스럽기만 하다.

 

공포와 두려움에 떨곤 하던 크고 작은 일들이란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것인 경우가 허다하다.그 공포나 두려움들이란 때가 되어 상황에 맞닿으면 시간이 저절로 풀어 주곤 하던 기억들이 적잖다. 그래서인지 공포란 인간의 이지(理智)와 문명이 만들어 놓은 가능성(Potential)의 의미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자연에서 벗어나 언젠가는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 가야 할 위치 에너지(Potential energy)로서, 자연스럽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고도 여겨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공포와 두려움들을 어떻게 떨치며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한껏 부푼 위치 에너지(Potential energy)를 낮추는 일이 답일 것이다. 힘겨운 짐을 내리고 자연으로 돌아 가는 것이며, 겹겹으로 껴 입으며 깊이 감춘 것들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마음을 비우며 욕심을 비우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에 성경에서도 무거운 짐을 내리라는 권유가 있는지 모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 11. 28~29)

 

높이 올랐다거나 많이 가진 것들에 대하여 떨어질세라 빼앗길세라 안달하고 걱정하는 모습이 공포와 두려움의 모습일 수 있다. 그 주제는 재물일 수도, 명예일 수도, 사랑일 수도 또는 생명이나 건강일 수도 있다. 짚어 본다면 그들 모두가 인간이라면 언제인가는 내려 놓거나 벗어 던져질 운명을 가진, 또는 생전에는 따라 다니다가 종국에는 사라지고야 마는 그림자처럼 부질없고 허망한 것들이 아닐까?

 

이지(理智)와 문명, 욕망이라는 높은 탑 안에 갇혀서 내려다 보며 가졌던 공포의 격정들도 자연이라는 뜰로 돌아와 평정을 되찾으면 때로는 허탈해지기도 하고, 겸연쩍어 지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의 탑, 문명의 달콤함은 인간의 마음 씀씀이를 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끝없이 유혹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공포와 두려움에 둘러 싸이게 된다. 한가한 짬이 나게 되면 공 들여가며 사서 공포를 즐기기까지도 한다. 공포영화나 공포소설에서 간담을 서늘하게 하거나 마음을 졸이게 하는 느낌인긴장감또는전율을 뜻하는 스릴(thrill)”도 일종의 공포감을 즐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여 본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공포의 영화와 소설이 그렇고 암벽등반, 스키점프, 번지점프, 카 스피드, 오락기구 같은 위험물을 즐기는 것도 그러하다.

 

이런 생각에서 본다면, 공포와 두려움이란 생명을 가진 삶의 기간 중에는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자연스런 한가지 마음의 상태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차고 다녀야 할 마음가짐 중 한 가지라면 이에 순응하며 보내는 삶의 방식이 현명할 수도 있다. 공포, 두려움, 불안의 각가지 심리적 양상들이 어떤 부류로 나뉘는지, 그리고 그 특성과 대처방안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우리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두려움과 놀람의 형식이나 크기는 천차만별이다. 한겨울 거실에 들여 놓은 화분에서 기어 나온 민달팽이를 미처 보지 못한 채 밟아 놓고서, 놀라 소리치고 펄쩍 거리며 무섭다고 치우지도 못하여 마나님만 불러대다 퉁 맞은 일이 있다. 여리고 나약한 스스로가 웃기지도 않다. 아주 사소하기는 하지만 이것도 두려움의 한 예가 아닐까?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공포에 허덕이는 중환자, 재난을 만난 자의 불안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하게 불안의 심리 상태만 놓고 본다면, 한 순간 불안의 농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공포영화나 스피드 광을 즐기는 이들의 스릴 절정의 순간 심리상태에서도 유사한 점이 있을 듯 하다.

 

전쟁이나 가난, 죽음이나 질병, 사고나, 재난, 강권에 의한 약탈 등과 같은 삶의 과정에서 원치 않는 상태에 닥치는 공포는 상황이 종료된 후의 향방을 가늠치 못한 채 겪는 두려움과 불안들로서, 강한 의지와 이지(理智)의 힘으로 스스로 헤쳐 나아가야만 하는 상황들이다. 그러나 일부러 택하여 즐기는 스릴물 들은 스릴 상황이 종료되면 평상의 원상태로 복귀 할 수 있다는 약속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공포, 두려움, 불안은 삶의 과정에서 느끼는 감정의 굴곡 중 한 단면이자, 삶의 다양성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지내 온 자신의 연륜들을 돌아보면 그것도 아름다움의 한 면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직선보다는 조화롭게 굴곡진 선이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듯, 적절한 스릴이 가미된 삶은 기복 없이 밋밋하고 단순한 삶 보다 오히려 아름답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람과 가치는 스스로 찾고 느껴야만 할 것이다. 그리 느끼지 못하는 공포나 불안은 원망과 자책으로 자신을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흥망성쇠, 건강과 병듦, 장수와 단명으로 이어지지만, 과연 어느 것이 더 크고 작은지, 많고 적은지, 길고 짧은지 한마디로 쉽게 표현 할 수는 없다. 그 곳에 정답이란 없다. 하루살이의 일생과, 장수거북의 일생을 두고 어느 것이 더 길다거나, 값지다고 답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것은 스스로의 마음 속에 짓고 있는 답이 정답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 본다.

 

인간은 원하고 갈망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파라다이스에 몸 담기를 원한다. 그곳은 공포나 두려움, 불안이 없다고 생각 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때 말하는 자연 속에는 무서운 맹수니 파충류가 여기저기 숨어서 목숨을 노리며 득실대는 곳이라는 선입관은 전혀 갖고 있지 않는다. 산천의 경치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 피고 새 울며, 먹거리가 풍성하고, 몸 담을 만한 따스한 보금자리가 지천으로 널린 곳으로 생각하는 자연이다. 그런데 역설적이라고나 할까? 아이러니 하게도, 평온하고 밋밋한 생활에 이내 실증 나는 것이 우리네의 심성인 듯 하다. 짜릿함, 스릴을 찾아나서 색다른 공포감을 즐기려고들 한다. 이 때의 공포감은 공포의 상황이 끝나고 나면 평상 상태, 자연상태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기약, 확신을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사파리를 들어서면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들을 가까이서 보며 즐길 수 있고, 그들로부터 해코지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되는 것과도 흡사하다.

 

스스로 원해서 즐기는 공포감을 살펴보자. 고공에 올라 뛰어내리는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의 공포나 두려움이 있다. 뛰어 내리는 순간의 외마디 비명은 공포에서 평상으로 돌아서는 지점(시점)의 이정표, 경계선, 또는 임계점 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 임계점의 짜릿함을 즐기려 하는 것 같다. 격정의 과정을 거쳐 오르가즘 순간의 외마디 소리지르기도 이와 유사한 임계점의 기쁨을 표하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임계점에서는 상태들이 항상 유동적이다. 자연현상도 그러하고 마음의 현상도 예외는 아닌 듯싶다.

 

자연에서 물과 얼음이 갈리는 0 ℃ 나, 물이 끓어 증기로 되는 100 ℃도 상(相) 변화가 되는 임계점이다. 물과 기름이 층을 이루는 지점이나, 물방울이 튀겨서 방울 층을 형성하는 경계면도 임계면(臨界面)의 한 종류다. 체내에서도 마찰면의 흥분으로 나오는 돌기 부분이나, 소화장기의 융털돌기처럼 페이즐리 문양의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며 반응물질을 분출하거나 영양물질을 흡수하는 생체의 여러 조직들도 일종의 경계면, 임계면에 해당된다. 이러한 계면(界面)은 다양성에서 오는 아름다움도 있으려니와, 반응성과 활동성, 생산성이 탁월하고, 생명이 잉태되는 점들이 이곳 임계면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임계면들이 다른 부문보다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것은 아주 자연적인 현상이며 대우주의 섭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까지도 한다.

 

우리의 심리상태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 이유로 인하여 격정이나 공포에서 평상으로 넘어가는 임계점이 더 큰 즐거움이나, 기쁨, 만족감 또는 안도감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번지점프 점프 순간의 외마디 소리,

    공포영화 절정의 외마디 소리,

    출산 순간 산모나 아기의 외마디 소리,

    오르가즘 순간의 외마디 소리,

    생사가 갈리는 시점의 외마디 소리

   ……

이러한 외마디 소리는 공포나 두려움, 격정에서 평상 상태로 또는 자연이나 수평의 상태로 변화되는 임계면에서 표출되는 탄성들이리라.

 

삶의 과정에서 어찌할 수 없이 닥치게 되는, 미래를 알 수 없는 공포나 두려움, 불안들도 시간이 흘러 지나고 나면, 평상으로 되돌아 와서 안도하게 되고, 때로는 기쁨을 선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던가? 고생 끝에 얻게 되는 행복의 가치가 더 크고 값지다고 한다. 불안과 공포에 떨며 보낸 지난날의 어려운 곤경들이 생각만으로도 전율을 느끼기도 하지만 때로는 좋은 추억으로 아롱대는 경우도 있다. 다가 올 날에 있을지도 모를 막연한 불안으로 인하여 오늘은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하며 포기하지는 말자. 공포나 두려움, 불안도 따라 다니는 그림자처럼 삶의 한 부문이려니 하는 넉넉한 마음, 여유로움이, 때로는 우리들 삶의 지혜가 될 수도 있다.

 

 

     2010.2.2.()

    오갑록 (K L Oh)

 

 

 

■  공포(恐怖)

 

 

공포(恐怖) 두렵고 무서움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포 증상의 예를 보면,

   공포증(심리학) (恐怖症, phobia); 대수롭지 않은 일을 늘 크게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고민하며 불안을

      느끼고 자기 통제를 하지 못하는 병적 증상.

   공포신경증(恐怖神經症); 자신의 행동을 자주 방해하고 때로는 신체 증상을 수반하며 긴장과 불안을       조성하는 일을 계속하는 공포증.    동물공포(動物恐怖); 작은 벌레만 보아도 공연히 무서워하는 일. 정신 쇠약이나 강박 신경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종의 강박 관념.    불결공포(不潔恐怖); 아무리 씻어도 더러운 것 같은 불안을 느끼어 손이나 몸 전체를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자꾸 씻는 공포증.    첨단공포(尖端恐怖); 연필, , 젓가락 따위의 끝이 뾰족한 것을 무서워하는 공포.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 높은 장소에서 비정상적으로 심리적인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는 상태.

 

                                                                                                                                 (백과사전)

정신의학자들은 공포증을 불안장애의 한 형태로 분류했으며, 공포감을 일으키는 대상에 따라 공포증 앞에 수식어를 붙여 공포의 본질을 수백 개의 단어로 나타냈다. 예를 들면, 높은 곳에 있을 때 무서움을 느끼는 고소공포증(acrophobia), 밀폐된 곳에서 무서움을 느끼는 폐소공포증(claustrophobia), 어둠을 두려워하는 어둠공포증(nyctophobia), 군중을 두려워하는 대중공포증(ochlophobia),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는 외인공포증(xenophobia), 동물을 두려워하는 동물공포증(zoophobia) 등이 있다. 특히 트인 장소나 공공장소에 있을 때 두려움을 느끼는 광장공포증(agoraphobia)은 집에서 떠나지도 못하는 심한 병이다. 학교공포증(school phobia)은 지나치게 부모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동들에게서 볼 수 있다.

 

 

□  공포증(恐怖症) 진단기준

(위키백과)

특정대상의 공포증에 대한 진단기준이 있으며, 이 기준에 부합될 경우 공포증이라 임상적으로 진단하고 정신과적인 처방을 받을 수 있다. 특정한 대상이나 상황의 존재 혹은 예기에 의해 촉발되는 현저하고 지속적인, 과도하거나 비합리적인 공포로서, 공포자극에 노출되면 거의 예외 없이 즉각적인 불안반응을 일으키며, 상황에 의해 반드시 나타나거나 상황에 의해 나타나기가 더 쉬어지는 공황발작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어린이에게는 불안이 울음, 떼쓰는 것, 얼어붙는 것, 밀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공포가 과도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

   공포상황을 회피하거나 심한 불안이나 고통을 느끼며 인내한다.

   회피, 불안한 예기, 두려워하는 상황에서 고통으로 인해 그 사람의 정상적인 일상, 직업적 기능, 또는         

   사회적 활동이나 관계가 현저한 방해를 받거나 혹은 공포증이 있는 것에 대해 현저한 불편 감이 있다.

 

   18세 미만의 사람에서는 기간이 적어도 6개월 이상이어야 한다.

   특정 대상이나 상황과 연관된 불안, 공황발작, 공포에 의한 회피반응이 강박성 장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또는 이별불안장애, 사회공포증, 광장공포증을 동반한 공황장애 ……

 

공포증의 치료는 공포의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심각할 경우 일시적인 증상완화를 위해 약물치료를 하게 되며, 공포상황에 노출되기 전에 미리 약물을 투여 할 수도 있다. 약물치료 외에 공포증에서는 행동치료, 인지치료, 정신분석치료의 방법이 있다. 행동치료는 가장 많이 연구되어 발달된 치료법으로서 공포의 대상(고소공포증의 경우 예, 높은 곳)을 스스로 결정한 정도에 따라 순서대로 경험하는 것과 처음부터 공포대상을 노출시키는 것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노출의 정도가 너무 강하면 공포증은 악화될 수 있어 무리가 있다.

 

  

 

 

 

■ 공포에 관하여

 

 

□  도서; “공포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

                저자: 구연상                                                                                                                      (서평 중에서 발췌)

    우리 인간이 공포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속에 있다는 것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분석한 책으로서, 이 글의 철학적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기분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 결과를 비판적으로 받아 들였다고 한다.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은 세 기분을 셈 여림 차 순으로 자리매김 한 것이다. 소스라 칠 것만 같았던 거센 공포의 감정이 누그러졌을 때, 두려움은 마음 졸이는 불안으로 바뀐다. 감정의 셈 여림의 관점에서 보자면, 공포는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불안을 낳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세 기분들 사이의 근원성 관계를 살피는 철학의 눈으로 보자면, 공포는 두려움으로부터 낳아지고, 두려움은 불안으로부터 낳아지며, 불안 자체는 우리 인간이 시간적으로 존재 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고 말 할 수 있다.”

 

(내용).  공포란 무엇을 뜻하는가?. 공포에 대한 애벌그림. 무서움(공포)의 성격: 으름. 무섬 거리와 무섬 까닭의 혼란. 무서움의 까닭: 자기 안전에 대한마음-졸임. 두려움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두려움의 성격: 꺼림. 피함과 맞섬에 대한 주제적 분석. 두려움의 가능 근거: ‘-열려 있음에 대한마음-졸임

 

. 불안은 무엇을 뜻하는가?. 불안의 시간 성격: 문득. “불안낱말, , 매김의 어려움(애매함)에 대하여. 불안의 성격: 막힘. 사람들의 불안 그리고 본래적 불안. 사람들의 불안. 본래적 불안

 

 

 

□  "공포"란 무엇을 뜻하는가?

                                                                                       

   공포는 개인이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공포를 단순히 느낌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생활에서공포란 말을 매우 광범위하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싫음이나고통과 같은 느낌 자체를공포란 단어를 사용하여 나타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러한 느낌들은 공포를 가능케 하는 공포 현상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공포를 시간적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였다. 그는 공포의 시간성을기대하면서 현재화하는 망각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여기에서기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공포 속에서의 기대함은 위협적이 어떤 것이 자기 자신에게로 다가오리라고 예감된다는 것과 관계된다. 우리가공포거리의 다가옴을 공포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것은 어떻게든 현재에서, 즉 우리들 자신의 코앞에서 나타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현재란 시간에서공포거리로 말미암은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의 대상에 의해 불러일으켜질 수 있는 공포스러운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다.

 

 

□ 

"공포와 두려움은 신앙을 낳고, 의심은 철학을 낳는다."             장자(裝子)

 

 

 

□   자연과 문명의 심리상태 비교

           ; 임시방편으로서의 문명에 관한 생각

                                                                                                블로그유고연방군” , 글 중에서 발췌

 

      

공포는 인간을 문명 이전으로 되돌린다. 아니, 공포라는 것이 실은 원시인의 심리상태라고 할 수 있다. 공포는 이성을 잃게 만들고, 이성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 공포의 대상에게 가능한 한 최대한의 잔혹함을 보여주게 된다. 사실 인간의 문명은 이성을 통해 세계에 질서를 도입하여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지배하는 과정에서 공포를 쫓아버림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 문명이라는 것도 실은 공포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떠있는 조그만 조각배와 같은 것이어서 언제라도 거센 파도에 휩싸여 침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수백만의 대량학살이 하필 금세기에 일어났다는 것도 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굳게 믿는 이성도 실은 이렇게 매우 취약한 지반 위에 있다. 결국 문명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공포를 추방하는 작업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성적 설명을 요구하는 일목요연한 체계를 일군 문명은 그 점에서 철학과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철학에서 공포에 대한 논의를 많이 볼 수 없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철학이 아직 우리 삶을 이루는 핵심적인 배경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석가가 통찰했던 인생에 대한 불만족. 그 저변엔 언제나 우리에게 엄습해오는 문명 이전의 자연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관습, 문명은 모두 같은 토대를 품고 있다. 삶을 보존하기 위한 신체적 습관들, 습관들의 체계가 모여 이루어낸 관습과 금기들. “Pathos Ethos, Nomos Physis”, 고대 희랍인들은 문명 이전의 자연이 출몰하는 세계에서 사유를 일구어 냈다. 그렇다면 공포에 대한 논의는 바로 그 지점, 문명과 학문이 출발하는 그곳에서 새롭게 논의되어야 한다. 감정과 신체, 인식주관이 아니라 출몰하는 자연이, 우리에게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바로 그 자연의 현상. 우리는 이 같은 공포를 다루면서 체계를 세울 수 있는가? 이건 조금 다른 문제로 보인다.

  

 

 

 

■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공간

 증상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그 불안과 공포

                                                                                                                                                                    블로그, “집시” , 글 중에서 일부발췌

 

□  오감도(烏瞰圖) : 시 제1                                                      시인, 李箱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로 질주(疾走)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1의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2의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3의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

   제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오.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공포 영화나 스릴러의 공통된 법칙은 하나다. 그곳에는 '외부'가 없다는 것, 외부가 없는 그곳은거울이고 곧함몰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큐브(빈센조 나탈리, 1997)나 샤이닝(스탠리 큐브릭, 1980 )은 공간적 폐쇄로 인한 불안과 공포, 사이코(히치콕,1960)는 심리적 폐쇄로 인한 살인, 쉘로우 그레이브(대니 보일, 1994)는 물적 계기로 인한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비틀리면서 괴기한 형태로 되살아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던 13인의 아이들은 끝내무서운 아이무서워하는 아이로 돌변한다. 그리고, 후반에는 막다른 골목이뚫린 골목이라도,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스스로 공포(체계)내재화된다. (샤이닝처럼) 공간(장소)의 폐쇄는 심리적 폐쇄를 불러오며, 그곳에서 은유, 암시, 호출, 은폐(드러냄), 상징 등의 기호들은 비로소이데올로기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누구인가? , 누가 부르고 누가 응답하는가?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이다. 억압적 국가기구와 변별되는 요소는 복수로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대부분사적 영역에서 발생한다. 좀더 분명히 말하자면,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이전의 공적인 것에서 실현되던 것과 달리,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거나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단지, 그것은 좀더암묵적이고, 좀더정교하며, 좀더심리적이며, 급기야자가 증식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자가 증식하면서 체계와 연동되는가?(혹은 체계라는 외형성을 획득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순수한 환상, 순수한 꿈, 즉 무위로 나타난다. 이데올로기의 모든 실체는 이데올로기에겐외형적인것이다”.  알튀세르가 말하듯, 이데올로기는자의적인 배열과 질서 속에 나타나기도 하지만 때로는도착되어” “무질서속에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개인이 부대끼며 살고 있는 현 실제 관계에 대한 그 개인들의 가상적 관계속에서 재탄생 하는 것이다.

 

엄마가 아들을 비난하는 말을 하니 슬픈 일이야

 

사이코에서 노먼 베이츠는 엄마를 살해한 후 죽은 엄마의목소리를 실제처럼 듣는다. 또한 샤이닝의 잭은 호텔 지배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자신의 '환상(영상, 이미지)”을 만들어낸다. 목소리나 이미지는 꿈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적 소망성취에 의한표상이다. 꿈이 전위에 의해 제멋대로 꾸어지듯, 이들은가상에 의한 재배치의 산물들로서 자신들만의 실제계를 지배해나간다. 목소리든, 영상이든 환상이 무대화되는 것은 필연적일 수 있다. 지젝이 지적하듯, 카프카는사회적 현실 자체의 한복판에서 작동하고 있는 환상을 무대화시킴으로써 현대 관료주의의 모습을 드러낸다. 노먼 베이츠의 경우에도 자신을 억압하던 엄마를 살해한 후, 다중적으로 분열하며 엄마의 역할을 함으로써환상을 찾아낸다. 그는 자신의 죄의식으로써사후적으로 환상을 구성한 셈이다. 흔한 정신분석적 독법에 의하면, 그의 환상은 어머니-아들로 구성된 이자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입법자이자, 억압자인 아버지에 가깝다. 곧 아버지-아들로 구성된 이자적 관계인 셈인데, 그가 살해한 어머니(아버지)는 거세 불안이나 공포에서 오는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환각은 폐제된 것이 외부로부터 돌아오는 것과 관련된다고 한다. 신경증자는 들려오는 환각을 의심하지만, 정신병자는 그 환각을 확신하는 셈이라고 하는데, 이 대입법에 의하면 노먼은 부권적 기능의 실패로 정신병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노먼이 신경증이든 정신병이든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포 영화 장르의 법칙이기도 하겠지만, 사람을 연쇄적으로 죽인다는 것이다. 그것은실수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후의 사건들은애초사건과는 별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단서도 제공하는 셈이다. 물론, 노먼은 어머니의 환각 속에서 살인을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다른 귀결점들을 낳는다.

 

관계가 다중적이거나 겹이라면 애초의 사건과 관련 없이 다른 지점으로 치달을 수 있는 가능성은 훨씬 커진다. 그것은 마치 사방에서 비추는 거울의 빛과 같아서, 상이 맺히는 지점에서 다시 다른 각도의 상이 맺히는 거울 입방체와 같다. “사물의 관계가 시각을 통해 이루어지고 재현의 여러 형태들로 배열될 때, 무엇인가가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단계별로 전달되며, 숨겨져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응시이고 이것은 시선과 분열한다. 보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시선과 응시 사이의 분열이 일어나는데, 내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타자가 보는 것, 사이에는 틈이 있는 것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만큼 타자가 욕망하지 않고, 타자가이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타자는그곳을 보고 있지 않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차이나 심연은 욕망의 비대칭의 결과이고, 결국 응시와 시선의 차이, 다른 욕망들은 우발성과 비대칭, 다른 결론을 낳을 수도 있다. 관계의 공포는 이 차이와 심연 사이에 존재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인간은 텅 빈 섬뜩함을 느낄 수 있다. 큐브에서 큐브의 이동은 공간이동이지만, 결국은 각 인간들의 자리 바꿈, 위치 이동일 수 있다. 이것은 욕망의 자리이동과 배치로 이루어진 쉘로우 그레이브도 마찬가지다.

 

나와 타자의 틈은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골이다.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마치 벽과 벽을 타고 오르는 진자 같이 작동한다. 그 진자는 반복과 강박이라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유지되며, 또한 그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강박적으로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이데올로기 호출로 달려가 주체는부재를 경험하면서 그 부재 속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거울 같은 타자의 욕망으로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는 나를 주시한다   “()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안전하다   “나는 중심이다

   ……

   그러나, 그곳은

 

   거울들처럼 불쌍하다

   내 눈은 거울들처럼 텅 비어있고

   거울들은 눈멀게 하는 그대의 부재로 채워진다.

  

 

 

 

 

■  죽음에 대한 공포

 

신충우 저, ”죽음은 벽인가 문인가에서

 

우리는 숫자 중에서 특히 4자를 싫어한다. 죽을 사()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빌딩 승강기의 4층을 대부분 영어의 F(Four)로 표기하고 심지어는 첨단과학의 산물인 과학위성 아리랑호와 무궁화 위성에도 4호가 없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나온 발상이다. 우주과학이 아무리 무결점 과학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한한 능력의 소유자인 인간의 과학이라는 점을 이들 위성은 보여준다.

 

“낯선 목소리를 듣는 자는 모두 죽는다.” 한 여자고등학교의 음악준비실 안, 목소리를 잃은 비운의 음악교사 희연의 시체가 천정에 매달려있다. 영언의 죽음 이후 학교는 불길한 의문사로 뒤숭숭하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대신하던 영언이 죽던 날에 희연 역시 끔찍한 시체로 발견된다.

 

여고생들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다룬 2005년판 영화 <여고괴담>에 나오는 낯선 목소리가 부르는 죽음의 공포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큐로스(BC 341BC 270)는 메네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죽음은 우리에게 행복을 부정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설득력 있는 논쟁으로 강력하게 표현했다. 이런 역설적 긍정을 통해 그는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죽음의 두려움을 멀리 던져버려야 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도래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에피큐로스에서 영혼이란 신체와 마찬가지로 해체될 운명에 처해진 미세한 물체들이다. 영혼은 감성의 터전이며 영혼이 죽을 때 감성 또한 죽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을 어떤 체험된 경험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으며 죽음을 시험할 수 없다. 만일 죽음이 모든 것의 최후라고 설득할 수 있다면 다른 삶 저 세상의 천국이나 지옥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희망을 갖지도 않을 것이다. 반대로 삶이 죽음에 맞서서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다면 삶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에피큐로스 철학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진리의 규칙을 제시하는 기준론, 자연의 철학적 설명을 제안하는 자연학, 행복한 삶의 조건을 다루는 도덕론이 그것이다. 이 세 영역은 에피큐로스의 주요 체계이다. 윤리학은 사실상 자연학을 기초로 하는 철학의 목표이며 또 현자를 행복하게 하는 자연 인식을 부여한다.

 

생물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무서운 명제다.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로의 생명과 많게든 적게든 유리(遊離)된 곳에 자기의 존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라는 것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죽음의 공포는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자기라는 것을 구축한 이상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독한 것이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같은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운 자기를 구축한 걸까.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서 잘려 나와 생물학적 생명 그 자체로만 살아 갈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이 망가지고 현실적응 기능이 상실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박리(剝離)된 자연의 대용품으로써의 문화를, 그리고 망가진 본능의 대용품으로써 어떤 행동규준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 이에 자기라는 것이 그 행동규준의 거점으로서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삶 가운데 가장 두렵고 슬픈 일이 죽음이다. 죽음의 공포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 모양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전쟁과 평화를 발표, 명성을 얻은 후 심한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죽음이 인생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생각으로 고뇌했으나 어디에서도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 나이 50에 기독교 성서를 깨닫고 난 후에야 비로소 죽음의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톨스토이가 저술한 신앙론의 서문이다.

 

"나는 55년의 생애 중 아동기 15년을 제외한 35년을 허무주의자로 살았다. 그러나 5년 전에 예수님을 만난 후 모든 것이 변하게 됐다.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선악의 개념도 바뀌게 됐다. (중략)…

나도 십자가 위의 그 도둑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을 믿게 되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중략)…

나는 이 현세의 생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생활이 나에게는 무섭게만 생각됐다. 이때 나는 예수의 말씀을 들은 것이다. 그리고 홀연히 그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죽음과 삶이 나에게는 악으로 생각되지 않게 됐다. 그리고 절망 대신에 죽음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 삶의 환희와 행복을 나는 경험하게 된 것이다."

 

26살에 요절한 소설가 이상(19101937, 본명 김해경)은 만 20세부터 끈질긴 자살 충동에 시달렸다. 자신의 이런 무의식적인 자살 충동에 굉장한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영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예민한 성격의 글을 자주 썼으나 실제 생활은 나태, 무기력, 난잡했다. 그는 착실히 돈을 모으거나 사업을 할 재주도 없었고 극도로 게을러 빈궁함을 자초했다. "구석지고 천장이 낮고 지하실 같이 밤낮 어둡고 침침하고 습하고 불결하고 해서 성한 사람이라도 그 방에서 사흘만 지내면 병객이 되고 말 지경"의 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얼굴이 여기저기 얽은 데다 손가락이 잘려 빈궁하게 살았던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콤플렉스, 그리고 자신을 입양한 백부에 대한 증오심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스스로를 선각자이며 천재이며 모더니즘의 기수이자 전위 예술의 선구자라고 자처했다. 이런 오만한 자각 덕에 그는 자신의 결핵이나 자살충동을 희화화 하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다. 1930년 잡지조선에 이상이란 필명으로 장편소설 ”1212을 연재했다. 이 소설은 그의 처녀작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서 이상은 자신을 키워준 백부에 대한 증오심, 자살 충동, 결핵에 대한 공포를 표현하고 있다.

 

1980 3월 프랑스 파리의 부르셀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경 받는 지성인이 폐수종(폐포 내에 장액성 누출액이 찬 상태)으로 입원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아내에게도 묻지 못했고 아내조차도 그의 병명을 말하지 못했다.

 

소리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남편의 곁에서 위로조차 하지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불쌍한 여인과 그 사람. 그런데 그처럼 글로써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남긴 사람은 없었다. 그가 바로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였다. 1980 4 15, 그는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출생은 1905 6 21.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등에 대해 각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때 어떤 독자가 한 신문사에 이런 글을 투고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는 날 돌아갈 고향, 천국이 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인가?

 

신이 아닌 이상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죽게 마련이다. 들판에 피어있는 이름 모를 작은 풀에서부터 만물의 영장인 사람까지 죽음은 어느 무엇에게나 찾아온다. 그러기에 죽음은 삶과 함께 생명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그 동안 철학의 중요한 주제가 돼온 것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죽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나 자신이나 주변의 사람들 혹은 친했던 동물이라도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우선은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해 신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생명이란 유한한 것으로 태어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지만 살고 있는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죽는 것은 너무나 두렵고 끔찍한 일인 것이다.

 

가끔 사람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지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날 때에나 사고가 생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면 더욱 두렵다. 미국 국립정신보건연구원의 연구에 의하면 건강한 노인 55%에서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했고 30%는 부정, 5%에서 공포를 표시했다. 오늘날 노인들은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들이 대개 집에서 죽게 되므로 죽는 과정을 본 경험들을 갖게 되고 또한 그 죽는 과정이 굉장히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최상의 불안은 혼자 죽는 것이다.  ……

 

초등학교 다닐 때 반 친구들과 길게 줄지어 서서 양호선생님이 불에 주사를 소독하는 걸 본적이 있다. 저자는 친구들과 이를 불 주사로 이름 짓고 그 이름과 모습만으로도 참을 수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줄이 짧아질수록 간은 콩알만해지고 정신은 저 너머로 아득해진다. 주사액이 채워지고 간호사가 눈에 들어오면 나의 몸과 마음은 절망 속에 몸부림치며 삶의 고통을 절감한다.

하지만 그 길고 긴 고통의 터널은 아주 짧은 그리 크지 않은 고통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나 역시 곧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남은 것은 공포의 기억뿐이고 공포의 실체는 더듬을 수도 없을 만큼 흐릿하다.

 

죽음 역시 그러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방주사처럼 매년 맞을 수 있다면 쉬이 장담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과히 큰 간극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다. 예방주사를 맞는 게 두려워 삶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는가?

 

등 뒤가 갑자기 서늘해지는가 그래서 알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해오는가. 벗어나는 쉬운 길이 있다. 고개를 뒤로 돌아보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아무것도 없을 것이고 보이지 않는 두려움은 순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은 실제로 공포스러운 일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상상한 것보다는 그 정도가 약할 것이다. 정도가 혹 더하다 해도 현실에서 만난 순간 모든 것은 다 감당할 수 있을 만할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공포는 종종 허깨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통을 초래한다.”(실러의 피콜로미니”)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중에서

 

 

 

인생은 한 순간에 지나지 않고,

사람의 실질(우시아)은 흘러갈 뿐이며,

감각은 둔하고,

육체의 전체적인 조합은 부패하기 쉬우며,

영혼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운명은 가늠하기 어려우며,

명성은 불확실 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육체에 관한 모든 것은 유랑이며,

영혼에 관한 모든 것은 꿈이자 연기다.

인생은 전쟁이자 잠자리며,

사후의 명성은 망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를 이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 가지, , 한 가지는 철학이다. 

 

 

 

 

■  동양철학(종교)에서 말하는 죽음

 

 

                                                                                       이광신 블로그, 글 중에서 일부분 발췌

 

인간의 가장 큰 두려움은 아마도죽음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다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이기에 이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바둥거리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종교에 관한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 방안으로 종교가 생겨나고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각 종교에서 말하는죽음’  개념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유교; 자손의 제사에 따라 현세로의재생’, 초혼(招魂)재생. 도교; 자신의 노력에 따라 불로장생’, 불로장생. 불교; 인과나 운명에 따라 윤회전생’, 윤회전생

 

. 유교에서 말하는 죽음

 

중국 사람은 이 현세에 일초라도 더 오래 살고 싶다는 현실적인 기대가 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죽음 뒤에도 어떻게 해서든지 이 세상에 돌아올 수가 있는 것을 가장 큰 바램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죽은 뒤에 다시 현세에 돌아올 수가 있다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코 중국 사람 고유의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의 간절한 소망인 것이다. 중국 사람도 그런 민족의 하나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죽은 뒤에 육체는 썩어서 해골로 될 뿐이다. 그래서는 이렇게 생각했다. 인간을 정신과 육체로 분리하여 정신의 주재자(() 말함)와 육체의 주재자(() 말함)가 있다고 하고, 이 혼백이 일치되어 있을 때를 살아 있는 상태로 보았다. 거꾸로 말하자면, 혼과 백이 나누어졌을 때가 죽음의 상태로 되는 것이다. 결국 육체의 호흡이 정지하게 되면(뇌사가 아니고, 심장사를 뜻한다) 함께 있던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그리고 백은 땅 아래로 돌아간다. 이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거꾸로 분리되어 있던 혼과 백을 불러들여 일치시키는삶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다만 어디로 불러들일 것인가? 라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가장 알맞은 것은 죽은 사람의 육체인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단지 해골이 남을 뿐이다. 여기서 백골이 된 해골 중에서 두개골이 특수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므로, 이 두개골을 남겨 둔다. 남은 뼈는 뒤에 땅에 묻게 되며 그것이 발전하여 무덤이 되었다. 따라서 뼈를 소중히 여기는 점은 당연하다. 그리고 제삿날에 그 남겨 둔 두개골을 끄집어 내어서, 살아 있는 인간(할아버지일 경우 손자일 때가 많다)의 머리에 두개골을 씌우고, 죽은 사람으로 여겨서 거기에 혼과 백을 깃들이게 한다. 냄새가 좋은 향을 태워서 하늘에 있는 혼을 부르고, 향기 좋은 술을 땅에 뿌려서 땅속의 백을 부른다. 이렇게 돌아오는 장소로 위패에 혼과 백을 맞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초혼의례(招魂儀禮)이다. 아마도 이상한 음악이 연주되고, 사람들이 광란 상태로 미친 듯이 춤출 것이다. 이상한 분위기이다. 이런 의식으로 죽은 사람은 현세에 돌아올 수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싹하는 주술적 관념에서 생긴 재생(再生)이론이지만, 죽은 사람이 재생할 수 있다는 이론에 따라 죽음의 공포나 불안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의례가 이어지는 동안에 위패에 덮여 있던 두개골이 탈로 바뀌고 위패 전체가 나무 판자로 바뀌어, 그 나무판자 위에 성명을 비롯한 죽은 사람의 일을 글자로 나타내게 된다. 이 나무판자를 신주(神主) 혹은 목주(木主)라고 하며, 중국 사람은 이것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여 제사 지낸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신주가 불교에 채용되어 위패가 되었던 것이다.

 

초혼(招魂)재생 의례, 이것은 동서고금에 있는 극히 일반적인 사생관이다. 먼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영혼을 불러들여서 현재에 재생시킨다. 이런 일을 하는 종교자가 말하자면 무당(샤먼)이다. ‘라는 것은 원래 이런 무당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말하는 곳에의 독자성이 있다. ‘초혼(招魂)의례와 무당이라는 것만으로는 특색이 없으며, 세계의 모든 곳에 자주 있는 원시 종교, 원시 신앙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의 대부분의 초혼재생 의례와 무당은 이런 것이다. 그런데는 이러한 수준에 머물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세계 공통적인 초혼의례를 바탕으로 커다란 이론 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교와 다른 초혼의례 종교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그것은 어떤 이론인가? 초혼의례라는 것은, 조상숭배와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신앙을 근본으로 한다. 당연히 조상을 제사 지낸다. 그러면 이 제사의 주최자는 누구냐 하면 그 자손이 되는 현재의 가장[當主]이다. 그러나 현재의 가장도 언젠가는 죽어서 조령(祖靈)이 된다. 그렇다면 조상의 제사를 이을 일족이 필요하게 된다. 곧 자손을 낳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육친의 관계로 말하자면,

 

선조 - 조부모 - 부모 - - 아들 - 손자...... 일족

 

이라는 식이 된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보면 . 선조와의 관계(과거),. 부모와의 관계(현재), . 자손일족과의 관계(미래)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그 관계를 뿔뿔이 흩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통합시킨다. . 조상의 제사(초혼의례), .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  . 자손을 낳는 일, 이들 세 가지 행위를 포함하여로 삼는 것이다.

 

보통 효라고 하면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잘못이다조상숭배’,  자손을 낳는 일’, 이 두 가지도 또한 효인 것이다. 유에서 말하는 효는 이러한 내용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포함시킨 것이 효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렇다면 효를 행함으로써 자손을 낳고, 조상조령(祖靈)을 재생시키며, 자신도 또한 언제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자손과 일족에 의해 이 세상에 재생할 수 있게 된다. ‘, “내 몸은 부모의 유체(遺體)“(“예기(禮記)” 祭儀篇)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기독교에서 처럼자식은 신의 선물이다고 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이 결과로, 여기에 한 가지 전환이 일어난다. 나의 생명이란 것은 실은 아버지의 생명이고, 조부의 생명이며, 나아가서는 참으로 아득한 조상의 생명이 되는 것으로, 가계를 계속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것은 실은 백 년 전에도 분명히 자신은 살아 있었다는 셈이기도 하다. 아니 백 년은 물론이고, 천년 전, 일만 년 전, 십만 년 전에도, 더 나아가서는 생명의 근원이었던 곳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자신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이는혈맥(血脈)’ 또는피의 사슬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편으로는 자손과 일족이 있으며, 백 년 뒤, 천년 뒤, 일만 년 뒤로, 만일 자손과 일족이 이어지면 자신은 개체로서는 죽더라도,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자손의 생명과 이어짐으로써 계속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결국, 효도를 다함으로 해서 나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가능성과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죽음의 공포나 불안도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영원한 생명, 이것이야말로 현세의 쾌락을 긍정하는 현실적인 감각을 지닌 중국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이는 한()민족에 대한 죽음의 설명으로써 가장 정리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 죽음의 이론은 거꾸로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을 인정하고자 하는 생명론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명론에서 보자면 부모를 몽둥이로 살해한다든지 임신중절로 자식을 살해하는 일은, 실은 나의 생명을 끊는 셈이 된다.

 

생명론, 이것은 효의 본질이다. ‘는 초혼의례라는 동서 고금에 어디든지 있는 주술을 생명론으로 구성했으며, 죽음의 공포나 불안을 해소하는 설명을 하는 데 성공했다. 이 생명론으로써죽음의 설명을 받아들인 사람이야말로, 일반의 중국 사람(漢民族)이었던 것이다.

 

.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

 

불교는 이 세상을 괴로움의 세계로 본다. 이것이 대전제이다. 살아 있는 일 자체를 괴로움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는 사랑과 미움이 있고,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많으며, 평범한 사람은 이 괴로움 속에서 발버둥치며 살아가고 있다. 점점 괴로움이 더해간다. 병에 걸린다. 병을 앓지 않는 사람은 없다. 비록 삶은 괴롭다고 하더라도, 그 삶에 집착하는 평범한 사람은 삶을 위협하는 병의 괴로움으로 우왕좌왕한다. 이런 생활 속에서 다시 괴로움이 늘어난다. 늙는 것이다. 늙어 가는 괴로움은 머지않아 찾아올 가장 큰 괴로움을 예고한다. 말하자면 가장 큰 괴로움인 죽음이 드디어 찾아온다.

 

그런데 육체의 죽음으로 영혼은 떠돈다. 육체는 빈 껍질이므로 화장한다. 불교 본래의 생각대로라면 뼈에 의미 따위는 없는 것이어서, 산이나 강에 버려야만 한다. 한편 성불하지 않는 한 영혼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중음(中陰), 혹은 중유(中有)라고 하는 시간으로 들어간다. 그 기간은 49일간이다. 이 기간 동안에 다음에 환생할 장소가 정해진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도록 스님을 통해서 공양을 바친다. 이 일은 초이레부터 시작하여 7일마다 행해지며, 이윽고 49일 째가 되는 날 그 사람이 생전에 했던 좋고 나쁜 일, 곧 인과응보에 따라 환생할 곳이 정해진다. 여기서 중음에 있는 시간이 끝난다. 이것으로중음을 채운것이 되므로, ‘만중음(滿中陰)’(중음을 채움)이 된다. 만중음을 지나고 나서 고인의 장례 참가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무사하게 중음을 마쳤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어느 곳에 환생하는가? 여기에는 단계가 여섯이 있다. 최고 높은 곳은 천상계(天上界)로 신으로 태어난다. 그 다음은 인간계로 인간으로 환생한다. 이런 식으로 여섯 번째인 제일 밑바닥은 지옥이다. 그밖에 네 번째는 동물 세계로, 그곳은 인간 밖의 모든 동물 세계이다.

 

어쨌든 삶은 괴로운 것이므로, 이 환생한다는 것은 실은 또다시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영혼이 바꾸어 태어난다. 말하자면 전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괴로움이 시작된다. 낳고 병들고 늙고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중음의 세계에 들어가고, 중음을 마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또 태어나고, 사의 괴로움이 시작된다. 이처럼 되풀이해서 빙빙 돌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순환하므로 마치 자동차 바퀴가 돌아가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런 괴로운 순환을 바퀴가 도는 것처럼 생이 돈다고 하여 윤회전생(輪廻轉生)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원히 윤회전생하고 있어서는 구원이 없다. 그래서 그 속박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벗어나서 괴로움의 세상으로부터 탈피하고 싶다는 소원이 있기 마련이다. 풀고 벗어나는 것, 곧 해탈이다. 해탈한다는 것은 부처가 된다는 일이다. 해탈해서 부처가 되면 드디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성공자가 말하자면 석가인 것이다. 석가도 해탈하기 전에는 오랫동안 윤회전생하며 괴로움을 거듭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말한 바가 불교에서 생각하는 죽음의 기본적인 의미이다. 정토(淨土)로 왕생(往生, 정토에 가서 사는 것)한다는 불교의 사상은 여기서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지만 결국 해탈해서 성불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윤회전생하며 괴로움을 계속 하든가의 둘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면 성불한 경우는 제외하고 윤회전생한다고 하면 이론적으로 말해서 영혼은 천계에서 지옥까지의 여섯 단계의 세계 중에 어느 곳엔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중음의 기간을 빼고는 영혼은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불교는 멋진 말을 하고 있다. “형태가 있는 것은, 반드시 멸한다. 영혼은 떠나가고, 육체는 태워 버려져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엄숙함이라 할 것이다.

 

. 도교에서 말하는 죽음

 

벌써 말한 바와 같이 불교는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말하고, 유교는 초혼재생(招魂再生)을 말한다. 그러면 도교는 어떻게 말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의 해결로, 도교는불로장생(不老長生)’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유교의 재생이론은 삶과 죽음의 구별이 분명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실감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을 전제로, 그에 대하여 그런대로 마음에 편안한 설명을 찾던 결과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가 발달함에 따라 의학이 발달되었고, 삶과 죽음의 구별도 또 분명해져 갔다. 그러나 육체의 죽음이 일단 찾아온 뒤에 초혼재생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 자체의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소원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곧 이 나의 육체 자체가 오래 살고 싶다. 원컨대 이 세상에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원이다. 특히 즉물적인 중국 사람들이므로 이 영원한 삶(永生), 혹은 적어도 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長生)의 가능성을 필사적으로 찾게 되었다.

 

불로장생이 가능하다고 말한 것이 도교이다. 당연히 그불로장생은 유교의초혼재생과 나란히 즉물적현실적인 중국 사람들의 죽음의 불안공포의 해결방법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유교가 죽음 자체에는 다만 그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며 무저항인 데 반하여, 도교는 죽음에 대하여 과감하게 도전하여 구체적인 연명(延命)을 가르쳤다. 이를테면 육체를 운동하여 단련시킨다.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고 있는 기공술(氣攻術)이나 태극권(太極拳)은 이 계보 위에 있다. 혹은 약을 먹어 병을 예방하기도 하고 연명한다. 말굽버섯 같은 버섯류(도교에서는 버섯류를 靈芝라고 한다)를 비롯하여 수은(水銀 피부병에 잘 듣기 때문에 예전에는 많이 쓰여졌다. 또 영양이나 위생 상태가 나빴던 옛날에는 피부병이 많았다)에 이르기까지 많은 약이 있으며, 대증요법적(對症療法的)으로 조제도 많이 이루어졌다. 또한 곡류를 먹지 않는다는 식사요법이나, 심호흡법 등 정신이나 육체의 안정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하고, 심산유곡에 살며 삼림욕을 하는 등 오늘날의 여러 가지 건강법의 원형이 거의 이미 있었고, 실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력의 최후는 영원한 생명을 지닌 선인(仙人)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신자는 도교의 신들을 받들어서 현세의 이익도 얻을 수 있게 된다.

 

다신교인 중국 사람들의 일이라서, 장사를 돕는 신, 병을 고쳐주는 신, 인연을 맺어주는 신……이라는 식으로 일상의 신앙에도 또한 널리 파고들어 갔다. 생명을 늘려 주고, 재산을 늘려 줄 수 있는 종교가 있다면 성행하는 것은 당연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도교가 퍼졌으며, 중국 사람의 민족종교로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사실상 낮(공적으로)에는 원칙상으로 유교, (사적으로)에는 본심의 도교라는 것이 중국 사람의 일반적인 생활이었다고 말하게까지 되었다.

 

 

□   죽음의 정의에 관한 여러 입장들

 

.  인격체로서의 기능의 불가역적 상실

 

이 입장에 따르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본질적인 특성은 그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인격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격체로서의 기능을 불가역적으로 상실한다는 것은 어떤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변화로, 이런 변화를 죽음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인격성’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라는 견해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하나의 인간관을 표방한 것으로 이런 인간관의 수용 여부는 믿음의 문제이지 더 이상 객관적 논의의 문제는 아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에서 볼 때인격성의 영원한 상실이야말로 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유일한 변화이기 때문에 이 변화를죽음의 의미에 부합하는 사건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죽음이 의미하는 바가인격성의 영원한 상실이라고 할 때 이런 의미가 충족되어 죽음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기준은 어떤 것이 될까? 인격성은 다시합리성의 토대’, ‘경험 능력’, ‘사회적 상호작용의 능력’, ‘자아 정체성 유지등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하든 이 인격성이 최소한의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신체 중 의식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대뇌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대뇌의 불가역적인 정지를 의미하는 대뇌사가 죽음의 기준이 될 것이다.

 

. 생물학적 통합 기능 상실

 

한 사람이 생물학적 통합 기능을 상실하는 것을 죽음으로 보는 이 입장에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인격체라는 사실이라기보다 생명체라는 사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인간도 다른 생물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것, 인간의 인격적 기능은 생물학적 기능이 없어지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그 인격적 기능이라는 것도 실은 개체의 생물학적 유지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으로 가령 인간의 이성은 개체의 생명 유지의 도구로 볼 수 있다는 것 등을 내세울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한 개체로서의 생물학적 기능을 상실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일 때, 이 의미를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 다시 두 가지 입장이 나뉜다.

 

. 심폐사론

이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인간 유기체의 통합적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의한 순환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런 순환이 있어야 신체의 각 부분들이 상호 연관을 맺고 서로 에너지와 물질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장 박동과 호흡의 중단으로 이런 순환이 멈추는 것을 죽음의 시기로 본다.

 

. 뇌사론

이 입장에 선 사람들 역시 심장 박동과 호흡에 의한 순환을 인간 유기체의 통합적 기능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런 심장 박동과 호흡을 유지시키는 신체 내 기관은 뇌간이다. 뇌간이 정지하면 심장 박동과 호흡은 오직 기계에 의해서만 유지될 뿐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뇌간을 포함한 뇌 전체가 불가역적으로 정지한 뇌사가 바로 죽음의 시점이라는 것이다.

 

. 모든 생물학적 기능의 불가역적 상실

 

산 자가 죽은 자에 이르는 과정에는 의식의 상실, 생물학적 통합 기능의 상실과 같은 큰 변화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것을 유일한 근본적인 변화라고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령 이들 중 어느 하나를 근본적인 변화라고 본다 해도 이런 큰 변화 후에도 신체의 여러 부분에서 작은 변화들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보았을 때산 자가 죽은 자가 되게 하는 사건으로서의죽음은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변화의 종결을 의미해야 한다고 보는 이 입장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죽음의 의미를 이렇게산 자가 죽은 자가 되는 과정에서의 모든 변화의 종결로 볼 때 이런 의미를 충족시키는 죽음의 기준은생체가 기능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화학적, 물리적 또는 전기생리적 활동의 소실로 특징 지워지는 인체의 각 세포의 불가역적인 상태로의 변화가 될 것이다. 즉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의 죽음인 세포사가 죽음의 기준이 될 것이다.

 

 

□   대표적 형신론 소개

 

. 고대의 귀신론

 

중국인은 고대로부터 귀신에 대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대략 삼사천 년 전에 존재했었던 하..주시대에 이미 귀신관념이 생겨났었으며 아울러 제사활동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하남성의 은허에서 출토된 은대의 갑골문에는 제사와 점복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상나라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어서 귀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 상제를 모신다고 생각했다. 이를 근거로 보면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으로 변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귀신설이 지니는 기본적인 관점은 사람이 죽으면 정신은 육신을 벗어나게 되며 그것은 귀신으로 변하여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이다. 춘추시대에 살았던 공자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신에 대한 미신이 성행하는 시대에 귀신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뭇 사람들이 분노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제자인 자로(子路)가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느냐고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도 제대로 섬길 수 없는데 귀신을 어떻게 섬기겠는가?” (“論語 先進) 즉 살아있는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하면서 어떻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또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論語 先進) 즉 살아 있는 사람의 도리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 이후의 일을 알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결국 공자는 귀신을 믿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귀신을 명확히 부정하지도 않았다.

 

공자는 어째서 귀신을 명확히 부정하지 않았는가? 여기에 대해 후세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견을 말하고 있다. 왕충은 그 이유로성인은 불효의 근원을 여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논형薄葬)라고 하였다. 즉 만약 귀신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자손이 선조에 대해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것이며 조상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곧 불효하는 풍속을 이끌어 내게 된다. 바꾸어 말해 공자는 귀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확인을 보류하고 제사 지낼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효도를 널리 펼치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노신(魯迅)공자는 확실히 위대하다. 당시에 과신에 미혹된 세력이 그처럼 왕성했는데도 귀신에 대한 속설을 끝내 따르지 않았으니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공자가 귀신을 부정하지 않은 것은 일종의 세속을 교화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곽말약(郭沫若)십비판서(十批判書)”에서 공자가 확실히 귀신을 부정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유가에 반대한 묵가의 말을 통해서 논증하였다. 이는 상당히 교묘한 방법이다. 장대년(張岱年)도 공자가 귀신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보았다.

 

. 전국 시대의 정기설(精氣說)

 

각 학파별로 각각의 설명방식이 있으나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하늘은 양기를 내는데, 이는 정() 혹은 정기(精氣)라 불리우는 미세한 기이다. 땅은 음기를 내는데, 이는 형() 혹은 형기(形氣)라 불리우는 상대적으로 투박한 기이다.” 두 음양의 기가 합치게 되면 곧 사람이 생겨난다. 하늘의 정기는 사람의 정신을 만들어 내며, 땅의 형기는 사람의 육체를 만들어 낸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는 썩어 땅으로 돌아가며, 정기는 육체를 떠나 하늘로 올라간다. 시체는 백()이라 불린다. 이는 땅 속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귀()라고 한다. 정기는 혼()이라 불리운다. 이는 하늘로 올라가며 또한 신()이라고도 칭한다. 귀는 땅의 음기이며 신은 하늘의 양기이다. 이른바 귀신이란 바로 음양의 기이다.

 

요컨대 정신과 육체 이 둘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물질(음기와 양기)로부터 형성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은 곧 형신이원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물질은 모두 기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면 형과 신이 동일하다고 하는 일원론이 된다. 결국 형과 신은 질료의 성격을 띠고 있는 기로 통일된다.

 

형과 신은 두 가지의 상이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서로 합해질 수도 있고 또한 분열될 수도 있다. “장자식의 사고에 따르면 사람은 이 두 종류의 기가 모임으로써 태어나고, 흩어짐으로써 죽는다.

 

사람이 생겨난다는 것은 기가 모임으로써 이루어진다. 모이면 삶이 되고 흩어지면 죽음이 된다. (“장자知北遊)

 

기가 변해서 형체가 있게 되며, 형체가 변해서 삶이 있게 된다. (“장자至樂)

 

사람의 삶과 죽음은 곧 기의 모임과 흩어짐이다. 음기는 사람의 형체를 구성하며, 양기는 사람의 정신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정신이란 사람이 방안에 거주하는 것처럼 양기가 음기로 구성된 사람의 형체 위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뒤에 맹자는 집이다라고 했는데, 곧 정신이며 정신은 마음과 서로 연관되고, 또 마음은 정신의 집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곧 양기인 정신은 사람의 마음에 의지해 있으며, 사람의 마음은 정신의 숙소라는 의미이다.

 

정신은 형체로부터 분리될 수 있으며, 또 정신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사람의 정신은 육체로부터 벗어나 여기저기 흘러 다닐 수 있다. 그리하여 혼이 육체에 매여있지 않음은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는 것과 같다는 식의 사고가 나오며, 이러한 사고에서 영혼불멸 혹은 정신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 나오게 된다. 본래 물질적인 성격을 지닌 기로 귀신문제를 설명한 근본 목적은 귀신론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 결과는 귀신론을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정기설은 두 가지 방면으로 분열된다. 즉 하나는 견고한 유물론의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며, 다른 하나는 빙빙 돌아 결국에는 원점으로 복귀하여 새로운 귀신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 왕충의 영혼부재론(無鬼論)

 

동한의 왕충은 기로 형신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상을 계승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기는 주로 뼈와 살이 되며, 양기는 주로 정신이 된다.(“논형訂鬼) 뼈와 살, 즉 형체는 음기가 만든 것이며, 정신은 양기가 만든 것이다. 또한 사람이 죽은 후에는 정신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체는 땅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여기서의 정신은 정기를 가리킨다. 또한 그는형체는 기를 기다려서 형성되며, 기는 형체를 기다려서 지각을 갖게 된다고 했다. 즉 육체를 떠난 정기는 지각작용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천하에 홀로 타는 불이 없거늘 세간에 형체가 없이 홀로 지각작용을 하는 정기가 어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논형,論死)

 

불은 연소되는 물체를 떠나 홀로 탈 수 없으며, 사람의 정신 또한 육체를 떠나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왕충의 결론은 정신이란 필연적으로 형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왕충은 정기설을 계승하였으며 여기에다 또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 즉 그는 정신이 바로 정기의 작용이며 또한 정기는 형체를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정기와 사람의 육체가 결합해야만, 즉 정기가 육체에 진입한 이후에야 정신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기가 육체에 진입하기 이전이나 육체를 떠난 이후에는 정신작용이 상실된다. 이는 의식을 일으키는 일종의 비교적 미세한 기가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록 정기가 육체를 떠나 도처로 흘러 다닐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영혼이나 귀신의 문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무귀론(無鬼論)은 이를 정면으로 논증할 방도가 없다. 그러므로 이상의 논증은 단지 가설을 사용해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귀론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식은 유귀론의 관점을 논박함으로써 역으로 무귀론이 옳다는 점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왕충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유귀론을 논박하고 있으며, 그가 든 이유 중에는 현재의 시각에 보아서도 상당히 타당한 이유들이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사람이 죽어 모두 귀신이 된다면 이미 과거에 죽은 사람은 현재에 살아 있는 사람에 비해 수천만 배나 많다. 그렇다면 도처에 귀신들이 널려 있어 거리거리마다 귀신들로 꽉 차 있어 걸음걸음마다 귀신들이 채일 것이니 사람들은 숱한 귀신들을 보아야만 할 것이다. 또한 생명과 정신이 있는 사람은 죽어서 귀신이 된다고 쳐도 생명과 정신이 없는 의복은 땅에 묻혀도 귀신으로 변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보는 귀신은 모두 마땅히 나체여야 할 것인데, 어떻게 옷을 입은 귀신을 볼 수 있겠는가? 귀신이 입은 옷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미신적인 사람은 장사 지낼 때 명의(冥衣, 죽은 사람을 위해 태우는 종이로 만든 옷)도 함께 태우는데, 이는 귀신에게 옷을 보내주기 위한 것인 듯하다. 그러나 사람의 신체는 칠팔 척이 되는데 명의는 단지 한 척 남짓하니 귀신이 어떻게 그 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귀신이 그 자그마한 옷을 입을 수 있다면 사람들이 보는 귀신도 왜소해서 마치 나무인형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에 보이는 귀신은 모두 보통 사람처럼 크니 이는 사람이 죽으면 정신이 귀신으로 변한다는 설명에 맞지 않는다. 또한 만약 귀신이 사람처럼 음식을 먹는다면 귀신은 매일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 사람들 또한 매일 귀신에게 제사 지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년에 몇 차례에 불과한데, 귀신은 몇 개월 동안 굶주린 배를 단 한번의 포식으로 채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귀신은 음식물을 저장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말이다. 당시인들은 현실생활을 바탕으로 해서 죽음 이후의 귀신 생활을 묘사했다. 그러므로 왕충은 현실생활의 도리로 귀신생활의 이론과 제사 등에 관한 논법을 반박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당시에 매우 설득력이 있었다.

 

. 불교의 영혼불멸론(傳燈法)

 

불교에서는 일체의 생명을 지닌 것들은 모두 영혼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영혼이나 소나 말 심지어 곤충의 영혼은 모두 그 본질상 동일하며 항상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바로 불교가 살생을 금지하는 근거가 된다. 그들이 말하기를, 소를 죽이면 내세에 소로 태어나 전생에 그 소였던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한다. 또한 개미를 밟아 죽이면 내세에 개미로 태어나 전생에 그 개미였던 사람에게 짓밟혀 죽게 된다. 이것은 곧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스스로 과보를 받게 된다는 인과응보 혹은 윤회전생의 원리이다. 이러한 설명방식은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의 수는 유한하며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고 보기 때문에 왕충의 이른바걸음걸음마다 귀신이 채인다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법에 근거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가장 좋은 업보를 받게 된다. 즉 사람을 죽이면 내세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로써 추론해 보면 노인을 죽인 자는 내세에 장수하게 되고 부귀한 자를 죽인 자는 내세에 부귀하게 된다. 불교는 권선징악으로부터 출발하여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을 만들어 냈는데, 결과적으로는 살인으로 복을 누리게 된다는 엉뚱한 결론을 도출해내게 되었다. 이처럼 이론은 항상 그것을 정반대로 흐르거나 혹은 그 이론이 출발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된다. 이는 이론의 발전과정 중에서 나타나는 일종의동그라미’(圓圈)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불교는 영혼의 불멸과 정신의 불사를 설명하기 위해땔나무와 불의 비유그리고초와 불의 비유를 사용한다. 즉 땔나무와 초는 사람의 형체에 비유되며, 불은 사람의 정신에 비유된다. 불교에서는 하나의 나무에 불붙어 있는 불은 또 다른 나무로 옮겨 붙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고 있던 나무가 다 연소되고 나면 불은 또 다른 나무로 옮겨 붙게 된다. 이처럼 불은 지속적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결코 꺼지지 않는다. 또한 불은 하나의 초에서 시작하여 또 다른 초로 옮겨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각은 사람의 정신은 불과 같이 무한히 이어지며, 개개인의 육신은 비록 썩어 없어지더라도 사람의 정신은 죽지 않으며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신불멸론이라고 한다.

 

. 범진의 신멸론(神滅論)

 

남북조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반대하였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범진(范縝)이었다. 그의 자는 자진(子眞)이며, 남북조 제량(齊梁)시대에 활동한 유물론 철학가이며 동시에 무신론자이다.

 

범진의신멸론의 관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정신과 형체의 관계는 칼날과 그것의 예리함의 관계와 비슷하다. 칼날은 바탕이 되며 예리함은 칼날의 효용이 된다. 사람의 형체는 바탕이 되며 정신은 인체의 효용이니 이를형질신용(形質新用)’이라고 한다. 이것으로써 범진은 형체가 존재하면 정신도 존재하고, 형체가 시들면 정신도 소멸한다는 그의 관점을 설명하고 있다. 이는 곧 정신은 일종의 특수한 물질이라는 전통적인 논법을 부정하는 것이며, 정신은 단지 형체의 효용에 불과하며 형체에 완전히 부속되어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정신은 형체에 의존하며 형체가 없어지면 정신도 소멸한다는 범진의 이와 같은 생각은 유물론의 형신일원론의 설명방식과 완전히 부합된다.

 

 

□   대화로 살펴보는 범진의 신멸론

 

. 당신은 죽은 뒤에 정신이 소멸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육체가 보존되어 있으면 정신도 보존되고, 육체가 스러지면    정신도 소멸한다.

 

. 육체와 정신은 서로 다르다. 정신은 생각하고 판단하는 지각활동이 있지만 육체는 없다. 지각이 있고 없는   차이가 있으니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육체는 정신의 물질적 바탕이고, 정신은 육체의 작용 또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없다.

 

. 정신과 육체는 이름이 이미 다른데 어떻게 분리되지 않는가?. 육체와 정신의 관계는 칼과 날카로움의 관계와 같다. 날카로움은 칼이 아니다. 또 칼은 날카로움이 아니다.    그러나 날카로움을 버리고는 칼이 없고 칼을 버리고는 날카로움이 없다. 칼이 없어졌는데 날카로움이     남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니, 어찌 육체가 없어진 뒤에 정신이 있다고 하였는가.

 

. 죽은 사람의 육체는 살았을 때의 육체가 아닌가?. 사체와 생체는 이미 완전히 구조가 다른 것이다. 산 사람의 육체가 죽은 시체와 같을 수 없다.

 

. 육체와 정신이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것이라면 손에도 과연 정신이 있는가?. 정신의 일부분이 손에 있다.

 

. 정신은 생각할 수 있는데, 손이 정신의 일부라면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가?. 손은 아프고 가려운 것을 느낄 수는 있으나 시비를 판단할 수 없다.

 

. 느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같은가 다른가?. 느끼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 다만 느낌은 생각의 얕은 단계이다.

 

. 당신 말대로라면 두 단계의 생각이 있다. 생각이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면 정신도 두 종류가 있는가?. 인체는 본래 하나이므로 정신도 하나이다.

 

. 뛰어난 사람의 육체는 보통 사람의 육체와 다를 바 없지만 그 능력은 다르다. 이는 육체에 깃든 정신이   보통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뛰어난 사람은 몸도 보통 사람과 차이가 있다. 깨끗한 쇠는 빛이 나지만 녹슨 쇠는 빛이 나지   않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사람의 몸은 보통 사람의 몸과 다르다. 보통 사람과 뛰어난   사람의 몸이 같다는 생각은 틀린 것 같다.

 

. 뛰어난 사람과 보통 사람의 몸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뛰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생김새가  차이 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뛰어난 사람들은 능력이 서로 같으면 되지 외모가 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말이 털 색깔이   다르더라도 다 잘 달리고, 옥이 색이 다르더라도 다 아름다운 것과 같다.

 

. 꿈에서 죽은 사람을 만났다거나 실제로 귀신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귀신이 있다고 믿고   있는데 이런 경험들이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아닌가?. 억울하게 죽거나 참혹하게 죽은 사람이 많지만 다 귀신이 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 귀신은 사람의 영혼이   남아서 귀신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는 다른 자연현상일 것이다.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고 귀신이   변신하여 사람이 되는 것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 당신이 말한 것처럼 정신이 육체와 함께 소멸한다는 것을 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미신이 사람들을 혼란 시켜 그로 인한 폐단이 그치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미신의 그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을 건지려고 한다. 재산을 다 털어서 종교에 달려가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생활을 멀리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틀림없이 자기 한 몸의 행복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 때문일 것이다. 쌀 한 줌을 가난한 친구에게 주면서는 아까운 기색이 얼굴에 역력해도 천금을 종교에 바칠 때는 기쁜 마음이 머리털까지 나타난다. 종교는 그에 상응하는 많은 보답을 약속하지만, 친구는 벼 한 한도 갚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급히 도와 주어야 할 딱한 사람은 버려 두고 자기에게 덕이 돌아올 일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 천국이라는 허황된 이야기에 유혹되고, 고통스런 지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것들이 영혼불멸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영혼불멸론이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건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장애가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형신론의 발전과 귀신설에 대한 평가

 

중국고대의 형신론에는 세 종류의 견해가 존재한다.

. 첫째, 사람이 죽으면 정신은 육신을 벗어나 혼백 혹은 귀신이 되어 도처로 떠돌아다닌다. . 둘째, 사람이 죽으면 육신 중에 있던 정기는 하늘로 올라가며,

일단 육체를 떠난 정기는 정신적인 작용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귀신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셋째, 정신은 형체를 바탕으로 해서 기능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체가 사망하면 정신 또한 자동적으로 소멸된다.

이는 곧 범진의형체는 바탕이며 정신은 효용이다.”, “형체가 시들면 정신도 소멸한다는 관점이다.

범진의신멸론의 관점은 봉건시대에 이미 최고봉에 도달하였으며,

이후의 그 어느 철학자들도 그의 관점을 뛰어넘는 사상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봉건사회동안 장기간 점유하고 있던 관점은 범진의 신멸론이 아니라 형신이원론과 신불멸론이었다. 형신이원론의 주요 관점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형과 신으로 구분되어 있으니, 형은 백이 되며 신은 혼이 된다. 형과 신이 합하면 혼백이 모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어남이다. 형과 신이 나뉘어지면 혼백이 모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태어남이다. 형과 신이 나뉘어지면 혼백이 흩어지는 것이니 이것이 곧 죽음이다. 태어나면 사람이 되고, 죽으면 귀신이 된다. 사람이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의 정기가 내려와서 사람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사람의 정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고 태어나는 것을 일러 또한승천한다’ ‘하강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하강하고 하늘로 승천하므로 하늘은 곧 사람의 근본이 된다. 이상이 형신이원론의 주요 관점이다.

 

신불멸론도 이와 매우 유사하다. 단지 거기서는 정기를 정신 혹은 영혼 내지는 귀신으로 바꾸어 부른다. 이러한 정신은 형체를 떠난 이후에도 그대로 의식작용을 지니며 희노애락을 느낀다. 또한 현실세계에 대해 의지적인 작용, 예컨대 상을 주고 악을 징계하는 것과 같은 활동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귀신설이다.

 

 

 

 

■  “광기에도 의미가 있는가?”

 

               바칼로레아 철학 논술

 

                                                                                                        블로그, “이브닝” , 글 중에서

     병리현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광기는 항상 억압의 대상이 되었다.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어보면 모든 사회에서 광기는 사회구조를 와해시킬지도 모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따라서 위법으로 간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들은 광기를 이성과 대치되는 부정적인 것, 수많은 오류와 환상을 야기하고 진리를 왜곡하여 인간을 혼란 시키는 주범으로 비난하였다.

 

다양한 문화그룹의 정신건강을 연구한 정신분석학자와 문화인류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의하면, 우리는 광기를 주어진 삶의 규범과 비교해서 이상하다고 느껴지는 것, 가까이 하기 싫고 내게서 멀어지길 바라는 악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지탄하는 광인의 모습에서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나도 그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 내 안에 존재하지만 인정할 수 없는 또 다른 나이다.

 

우리 안에 이상하고 괴짜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타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내가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것은 완벽하고 이성적인 모습이다. 가끔 우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한 행동을 하는 자기 자신에게 놀라움과 공포심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향이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것을 이성으로 억압하게 된다.

 

내 안의 광기를 잊는 방법으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것은 광인을 대표할 만한 자를 선정하여 그에게 나의 모든 불안과 공포를 전이하는 것이다. "저 사람 미친 사람이다"라는 주장의 저변에는 "나는 정상인이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정상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에 20세기의 학자들은 회의를 표시한다.

 

롤랑 바르트는 "광기는 병이 아니며 시대에 따라 변하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의미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광기는 병인가 다름인가? 푸코는 정신병원 제도는 광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들이 정상이 되기를 바라도록 강요하며, 그렇지 못한 광인들에게 죄의식과 열등감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고차원적인 억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편 광기의 문제와 관련해서 파스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광인이므로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광기일 것이다. 이성이란 광기의 또 다른 회전이다." 유사한 관점에서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가역적 관계로 인해 모든 광기에 이성이 있고 모든 이성에 광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광기란 생 그 자체이며 인간 내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아 인간의 악과 약함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광기를 의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강함과 약함 모두를 이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현실적 삶 속에서 광기를 맘껏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거의 갖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광기와 세상의 광기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더욱 현명한 삶을 구축할 수 있다. , 진정한 지혜는 광기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광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대한 이해부터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성이 고전철학이 자신에게 부여한 절대적이고 완벽한 권위를 벗어 던지고 보다 상대적이고 역사적인, 즉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부정하고 숨기고 싶어했던 인간의 심연, 즉 광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칼로레아 논술 철학이다.

 

그러나, 이해도, 용인도 되지 않는 것은 마지막 부분이다. "진정한 지혜는 광기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더 높은 지혜의 영역을 단지 미지의 영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광기에게 너무 성급하게 넘겨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물론 광기를 토양으로 뛰어난 지혜와 빛나는 재능이 발현된다는 것은 굳이 푸코가 아니더라도 이미 고대의 이성 중시학자 플라톤도 인정한 사실이다. 이성이 유연성을 갖추고 재정비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한다.

파스칼은 "이성의 마지막 단계는 이성을 넘어서는 것이 무한히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그 마지막 단계를 다른 어떤 것 (책에서 주장하듯 이를테면 광기.)을 통해 획득 되어 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이성 너머에는 책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를테면 "심연"이 있다.

광기는 인간이 그 "심연", 무한정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어둠에 직면할 때 발생하는 인간의 조악한 발작이자 폭발이다. 그러므로 광기는 지혜나 재능의 도화선이지, 원천은 아니다.

 

현대는 광기의 옹호를 넘어서 예찬에 가까워지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시대는 나를 슬프게 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경솔한 트레이드(맞바꿈)를 좋아하는 인간의 파우스트적 본성이 현대에서도 맹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봐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이 광기의 예찬을 회전시켜 다른 편에서 보면, 인간이 자신의 조야함을 격찬하고 있는 꼴이라는 것을 발견할 뿐이기 때문이다